2007. 1. 25  예스24 영화

http://movie.yes24.com/movie/movie_memwr/view.aspx?s_code=SUB_MEMWR&page=2&no=13861&ref=2&m_type=0

 

매트릭스 directed by 앤디 워쇼스키, 래리 워쇼스키

이 영화를 봤을 때의 충격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아마도 대학 2학년 시절 본 것 같은데, 그간 배웠던 철학적 지식으로 영화를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달까. 워쇼스키 형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장난삼아 이것저것 다 끼워 맞춰봤다고 하지만, 영화는 이미 던져졌고 난무하는 것은 해석뿐.
우리는 지금 바라보고 있는 이 사물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 내가 만지는 이 자판이 딱딱하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우리는 현실세계에 살고 있는가, 현실이란 무엇인가, 진짜와 가짜는 무엇인가, 어떻게 규정되는가 등등의 질문들. 이 영화 한편으로 다양한 관점에서 철학 수업이 가능하다.

봄날은 간다 directed by 허진호

아, 도저히 영화 엔딩크레딧이 올라간 뒤에 일어설 수 없었다. 그렇게 아픔을 가져다준 영화였다.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내 안에서 스스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언제나 사랑이 변하지 않는다는 진리는 존재했지만 나를 포함한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이를 심적으로 거부한다. 받아들이지 않는다. 봄날은 그렇게 간다. 사랑에 빠졌고 사랑은 떠난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그래 사랑은 변한다. 인정하자.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고 꿈꿔왔던 사랑의 관념을 뒤바꿔준, 현실을 확인시켜준 영화랄까. 허진호 감독의, 사랑에 대한 성찰이 돋보이는 영화였다.

장미의 이름 directed by 장 자끄 아노

움베르트 에코의 힘겨운 소설 『장미의 이름』을 영화로 확인하는 매력이란 이런 것. 책을 읽었을 때의 느낌은 아, 어렵다, 정말, 벅차다, 이런 느낌이었으나 영화는 좀더 대중적인 느낌을 전해준다. 영화 그 자체로서보다는 소설과 연계하여 봄으로써 그 가치를 확인할 수 있는 영화. 소설 속 캐릭터들은 영화 속에서 적절한 배우와 연기로 환원되었다. 지적인 희열을 느끼고 싶다면 이 영화를, 소설을 읽기 힘들었다면 이 영화를 먼저, 혹은 함께.

사랑을 놓치다 directed by 추창민

애절하게 질질짜고 전혀 안 쿨한 사랑영화. 요즘 세상에 이런 인간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사랑하는 이를 향해 고백하기 힘들어하는 두 남녀에 관한 이야기. 아, 한번의 고백을 위해 십년의 세월을 보냈던가. 난 그간 뭘 했던가. 우리가 만나기 위해 십년의 세월은 너무나 가혹했고, 십년은 우리의 그 애틋했던 느낌을 지속시키기 힘들었다. 어긋나고 어긋나고 또 어긋나고. 보는 관객이 더 화가 나고 답답해하는 그런 영화. 하지만 쿨한 요즘 세상에도, 과거와 똑같이, 사람들은 사랑하는 이를 향해 고백하기 그렇게 힘들다. 세상의 흐름과 사랑방식의 변화 문제가 아니라 본래적인 사랑의 문제이다. 쿨하지 않다고, 찌질하다고 그들을 욕하지마라. 정말 쿨한 것은 사랑이 아니라 쾌락일지니.

비포 선라이즈 | 비포 선셋 directed by 리차드 링클레이터

참으로 다양한 사랑만큼이나 참으로 다양한 사랑방식이 존재하고, 참으로 다양한 사랑영화가 존재한다. <비포 선라이즈>와 <비포 선셋>은 새로운 방식의 사랑영화이다. 낯선 남녀와 기차간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끌려 함께 거리를 거닐고, 눈이 맞아 사랑을 하고, 훗날을 기약하며 기차에서 헤어진다. 원나잇을 다룬 이보다 더 순수한 영화가 있을까. 사랑이 시작하고, 진행되는 과정을 매우 자연스럽게 압축적으로 그려낸 영화이다. 마치 알랭 드 보통의 소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보는 듯.

 

 

  지금 다시 고르라면, <장미의 이름>을 빼고, 
  <이터널 선샤인>  <파니핑크>  <내 남자의 유통기한>  <클로져> <아들의 방>
  중에 하나가 들어갈 것이다. 그러고 보니 사랑영화가 아닌 것은 <매트릭스> 뿐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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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2-01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섯개네요.^^ 왜 아직 매트릭스를 못 봤지...

마늘빵 2007-02-02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더 꼽을 수 있지만 다섯편만 써달라해서 그리 되었습니다. <장미의 이름>은 지금 와서 보면 다른 걸 집어넣을걸 하는 생각이 드네요. 저거 말고도 넣을 영화는 많은데.

토트 2007-02-02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을 놓치다는 못봤네요. 이 영화들 다 좋았어요.^^

마늘빵 2007-02-02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사랑을 놓치다>는 극과 극으로 나뉠 듯 하군요. 토트님께서 어떻게 보실지 궁금합니다. 적어도, 제게는 아픈 영화였답니다.

마음을데려가는人 2007-02-02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포선라이즈-유럽여행에 대한 환상을 키워준 영화. 언제 봐도 좋아요, 이 영화는. :)

마늘빵 2007-02-02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미리 정해놓지 않은 듯 한 그런 자연스러움이 좋았어요. 영화니 당연히 인위적인 설정이 없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그저 두 사람의 뒤를 밟아 따라가는 카메라의 시선이나 두 사람의 자연스러운 대화나. 간격을 두고 꾸준히 보고픈 영화입니다.

프레이야 2007-02-02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님, 그 블로그가 님의 것이었군요. 몰랐어요. 축하드려요.^^
토로피칼 빠숑, 재미있어요. 비포선라이즈는 정말 대사를 놓치면 안 되겠더군요.^^

마늘빵 2007-02-02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혜경님 네 ^^ 혹 알고 계셨던건가요. 비포선라이즈는 그쵸 대사 놓치면 안돼요.
 

2007. 2. 1 예스24 영화

http://movie.yes24.com/movie/movie_memwr/view.aspx?s_code=SUB_MEMWR&page=1&no=14160&ref=20&m_type=0

 

[칼럼] 이기주의와 묵가 철학으로 바라본 <묵공>

참으로 재미있는 영화가 나왔다. <묵공>이라. 한중일 합작영화라 하여 시선을 끌기도 하였고, 유덕화가 안성기 주연이라는 점을 앞세워 홍보하며 관객을 끌어보려 노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노력"에 그쳤을 뿐, 언제 한중일 합작영화가 흥행한 적이 있던가. 그저 한국과 중국과 일본의 몇 사람이 모여서 한 영화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한중일 합작영화지, 그 이상 그 이하의 어떤 의미도 지니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 아니던가.  "한중일"은 무슨, 영화를 본 바로는 철저히 중국영화다. 주연이 유덕화와 안성기라고 하지만 안성기는 묻혔고, 유덕화는 빛을 발했다.

 

조나라 10만 대군의 수장, 항엄장(안성기 분). 말이 한중일 합작이지 안성기의 역할은 "지위"만 높았지 "비중"은 높지 않았다.

이기주의의 철학에서 바라본 <묵공>

<묵공>은 묵가학파에 관한 이야기다. 얼마 전 묵가학파를 옹호(?)하는 책이 나왔더랬다. 김시천의 『이기주의를 위한 변명』이라는 책은 중국철학의 역사에서 사실상 공자와 맹자, 노자와 장자만이 기억되고 있는 오늘날, 묵가라는 저들 사이에서 기지개 피다 잠들어버린 한 학파의 철학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기주의는 진정한 이기주의의 의미가 아니며 다른 관점에서 이기주의를 바라볼 수도 있다는, 삐딱하게 보면 말장난과도 같지만, 이기주의의 의미에 대해 되새겨볼 수 있는 좋은 텍스트였다. 저자는 그 책에서 이기주의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이기주의란, 각 개인이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임을 바탕으로 하여 이에 대한 사회적 배려와 지원이 우리 사회의 어떤 가치보다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는 입장일 뿐이다."

이는 대인의 이기주의다. 우리는 누구에게나 대인의 삶을 살 것을 권유하는데 - "권유"의 수준을 넘어 "강요"의 수준으로 가고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 누구나 다 대인이 될 수는 없으며, 소인은 소인의 삶을, 대인은 대인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대인의 삶이란 그 자리가 큰 것에서 생기지, 사람이 큰 것에서 생기지 아니한다. 이 세상의 모든 문제들은 소인의 삶을 살아야 할 자가 대인의 삶을 살길 고집함으로써 빚어진다. 많은 소인들이 대인의 자리에 있을수록 인간을 고통으로 몰아넣고 세상을 폭력과 전쟁으로 얼룩지게 하는 악이 많아지게 된다.

영화 <묵공>에서 천하통일을 앞둔 조나라는 10만 대군을 이끌고 양성함락을 위해 진군한다. 고작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든 인구를 합해봐야 인구 4천명밖에 되지 않는 이 성을 함락시키는 것은 10만 대군에겐 너무 쉬워 보인다. 양성은 묵가학파에 원군을 청하지만, "혁리"라는 이름을 가진 단 한 사람만이 이들을 도우러 왔다. 단 한 사람이 10만 대군을 물리칠 수 있을까. 사람들은 비웃었지만 비웃음은 잠시뿐, 조나라의 10만대군 중 5천명이 순식간에 시체로 돌변했다. 혁리는 양성에서 조나라를 물리치고 그 사이 백성들과 군사들의 신임을 얻었다. 하지만 대왕과 그의 충신들은 그를 시기하여 처단할 궁리를 하게 되고 결국 혁리는 그들을 구했음에도 불구하고 버림받았다. 이후 양성은 다시 철군하고 남은 고작 천여 명의 조나라 군대로부터 공격을 받고 순식간에 함락되었다. 백성은 피 흘리고 대왕은 조나라의 항엄중 앞에 무릎 꿇는다.

소인은 누구이고, 대인은 누구이며, 누가 소인의 삶을 살아야 함에도 대인의 자리를 넘봤는가. 소인은 양성의 대왕이었으며, 대인은 혁리였고, 대왕은 소인의 삶을 살아야 할 자임에도 불구하고 대인의 자리인 대왕의 자리를 고집했다. 혁리는 대왕의 자리를 넘보지 않았다. 그러나 대왕은 혁리를 두려워했고 그를 몰아냈다. 어찌 대인의 자리에 있어야 할 자는 여인이 주는 하찮은 신발조차 받기를 거부하며, 어찌 소인의 삶을 살아야 할 자는 대인의 자리에 앉아 스스로 소인임을 드러내는가.

이 영화는 단순한 서사시가 아니다. 오히려 서사 장르의 영화에서 바라보기엔 이 영화는 너무나 재미없고 지루하다. 그러나 관점을 달리해서 바라본다면 영화의 재미는 다른 곳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속의 혁리와 대왕, 그리고 그들의 주위를 맴도는 부하들은 우리 사회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우리 사회엔 대인의 자리를 탐내는 소인들이 너무나 많다. 고요히 소일을 하며 소인의 삶을 살아야 할 자가 대인의 자리를 탐내다 보니 갖은 말썽이 생기고, 큰 일이 틀어진다. 오히려 대인은 자리를 탐하지 않는다. 그러니 사회는 예나 지금이나 시끄럽고 어지러운 것이다. 각자 제 자리를 찾아가면 좋으련만.

 

묵가학파의 혁리로 나온 유덕화. 그가 연기한 혁리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묵가의 일원을 보여줬다.

<묵공>으로 바라본 묵가의 철학

유가학파가 공자에 의해 시작되었듯 묵가학파는 묵자에 의해 시작되었다. 묵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그가 어느 나라 사람이고, 언제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지만 주로 이야기되는 바로는, 그의 성은 "묵"이요, 이름은 "적"이다. 공자가 활동하던 춘추시대 말기에서 전국시대 초기에 살았으며, 당시 유가의 공자와 함께 가장 두드러진 사상가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묵자의 사상은 공자에 묻혀 그리 칭송받지 못했다. 함께 같은 시대를 살았으니 두 사람이 흔히 비교되곤 하는데, 쉽게 비교해보자면 - 도식화는 매우 위험하지만 - 공동체주의와 개인주의의 관점에서 이 두 사람을 비교해봤을 때 묵자가 공자보다 더 공동체주의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공자가 개인주의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묵자에 비교해 봤을 때 그러하다는 것이다.

묵가에서는 "따로"와 "함께"는 구분되어야 하며, "따로 노는 것"은 "함께 노는 것"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본다. "따로 노는 것"에서 온갖 미움과 멸시, 공격, 억압, 교란 등이 생겨났고, 이를 없애기 위해서는 "함께 노는 것"이 주가 되어야 한다고 본다. 남의 나라를 자기 나라 같이 위하여, 상대방을 자신과 같이 위한다면 모든 악이 사라진다고 본 것이다. 묵가의 주된 사상은 "겸애"로 요약되며, 이는 "세상의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사랑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영화를 보면 사랑하라, 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이 말은 바로 묵가학파의 겸애사상을 이야기한 것으로, 모든 백성들이, 모든 나라들이 서로가 서로를 동등하게 사랑함으로써 "함께 사는" 세상을 실현하자는 말이다. 혁리가 조나라 군대를 물리친 후 군사들과 백성들로부터 신임을 얻는 것은, 그가 "사랑"으로 그들을 대했기 때문이다. 첩자라 하여 죽이지 않고, 적군이라 하여 죽이지 않는다. 적을 물리치되 죽이는 것이 최선이 아니다. 단지 최후의 방법으로서 우리의 생존을 위해 마지막 수단으로 적을 죽임을 택할 뿐이다. 5천의 조나라 군사의 시체가 성의 안팎에 널려있는 것을 보고, 군사와 백성들로 하여금 땅을 파 이들을 묻게 하는 마음이 바로 "겸애"이다. 첩자라 하여 백성들에게 몰매 맞는 한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몸을 방패 삼아 구해주는 "겸애"이다. 자신을 내친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다시 그들을 구하기 위해 뛰어드는 "겸애"이다.

묵자는 "백성에게는 세 가지 근심이 있다. 주린 자가 먹지 못하는 것, 추운 자가 입지 못하는 것, 그리고 피로한 자가 쉬지 못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라 하였다. 이것만 보면 묵자의 철학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말하는 듯 하지만, 오히려 존 롤스의 『정의론』에 나오는 "최소수혜자의 이익 극대화의 원칙"에 더 가깝다 할 수 있다. 한 집단의 최대 행복은 그 집단의 가장 가난한 자의 행복과 연결되지 않지만, 가장 가난한 자의 행복을 우선시함으로써 집단 전체의 행복을 도모한다면 구성원 전체가 행복해질 수 있다. 양성을 지켜낸 혁리는 양성 전체의 행복보다는 백성 한 명 한 명의 행복을 바랐다. 그렇지 않다면 첩자라 하여 다른 이들에게 짓밟히는 그를 구하려 스스로 몸을 던지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묵자의 철학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한국이라는 집단 전체의 행복을 위해 경제발전을 우선시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한국이라는 집단의 가장 아래에 위치한 이들의 행복을 우선시하면서 집단의 행복을 도모할 것인가. 관점은 분명 다르다. 그리고 어느 것을 택하느냐에 따라 집단 구성원의 행복도는 달라질 것이다. 어느 것이 옳다고 말하진 않겠다. 대답은 영화를 본 그대들에게 있다.

 

글/ 트로피컬 빠숑

 

 

* 커밍아웃. 아시는 분은 다 아시겠지만 트로피컬 빠쑝은 접니다. -_-
  그래스물넷에서 영화칼럼을 맡았습니다. 리뷰인지 칼럼인지 구분은 잘 안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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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7-02-02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멋진 글을 예스24에 연재하신다니 반가워해야 할지 유감스러워해야 할지 흠...

마늘빵 2007-02-02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아직 안주무셨군요! ^^ 아. 글이 좀 딱딱하고 어려워졌습니다. 담에는 좀 쉽게 써야지. 저런 글은 아무도 안볼거에요. -_- 일단 읽혀야지.

antitheme 2007-02-02 0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럽습니다. 저도 영화를 꽤 좋아했는데 요즘은 볼 시간이 안나요..

마늘빵 2007-02-02 0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쉴 때마다 쇼파에 편하게 기대 앉아 영화를 봐서 그런지 많이 보게 돼요. 별로 안보는거 같으면서도 이렇게 해서 보는 영화들이 상당하답니다.

승주나무 2007-02-02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영화를 봤는데, 아프 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전형적인 중국영화의 틀을 어김없이 보여준 영화였습니다. 다만 제가 관심을 갖는 묵가가 나왔고, 그것이 나름대로 녹았다는 데 의미를 둡니다.

리뷰를 보니 맹자의 구절이 생각나네요. 군자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으나 왕업은 여기 해당하지 않는다. 맹자는 왕천하를 두 번이나 이야기하면서 방점이 여기 있다고 강조했지만, 다들 군자삼락에만 관심을 보어더라는 안타까운 그 구절^^

“군자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지만, 천하에 왕이 되는 것은 여기에 같이 있지 않다. 부모가 함께 살아 계시고, 형제가 사고가 없으면, 첫째의 즐거움이다. 우러러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고, 구부려 사람에게 부끄러움이 없음이 두 번째 즐거움이다. 천하의 영재를 얻어 그들을 교육하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 군자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지만, 천하에 왕이 되는 것은 여기에 있지 않다.”
孟子曰:  「君子有三樂, 而王天下不與存焉. 父母俱存, 兄弟無故, 一樂也.  仰不愧於天, 俯不怍於人, 二樂也. 得天下英才而敎育之, 三樂也. 君子有三樂, 而王天下不與存焉. 」

 


릴케 현상 2007-02-02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커밍아웃이라니 양파껍질처럼 자꾸 벗겨야겠군요^^ 만화를 재밌게 본 터라 영화를 굳이 볼 맘이 안 드네요~

마늘빵 2007-02-02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승주나무님 / 묵가철학의 의미 말고 그냥 서사영화로 보기엔 그다지 아니었죠. 아 중국철학에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신 승주나무님께 좀 배워야겠습니다.
선책님 / ^^ 벗기면 너무 야해요. ㅋㅋ 근데 이게 만화도 있어요?? 그건 몰랐는데;;

비로그인 2007-02-02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가에서는 묵가에서 내아버지와 남의 아버지를 구분하지 않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답니다. 이론일 뿐, 사람의 실제 삶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저는 남의 아버지를 나의 아버지처럼 결코 사랑할 수가 없지요. 하하

잠깐 들렀답니다. 아프락사스님.
멋진, 깊이있는 리뷰입니다.

통상적 의미의 이기주의대신 '개인주의'라는 훌륭한 어휘가 있지요.


마늘빵 2007-02-03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님 ^^ 들르셨군요. 네. 그것이 유가의 묵가의 차이죠. 유가가 묵가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관점의 차이인데 그것이 나 개인의 문제로 들어가면 그렇죠 달라질 수 밖에 없죠. ^^
 



* 스포일러 경고

  종교영화 혹은 어떤 영적인 계시에 관한 영화인줄 알았다. 그런데. 가족영화라고. 정말이지 내내 영적인 영화로서 받아들이던 내게, 영화 중반을 넘어서면서도 아무런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 이 영화를, 어디까지 참아내야 하는가 하는 것이 영화관람의 중점이 되었다. 끝내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은 채로 엔딩 크레딧 올라가더라.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가족의 위기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대개 영화는 무슨 영화인지 자세한 내역을 모른 채 봐야 제맛이지만 이 영화는 시시콜콜 다 알고 봐야 이해할 수 있다.



* 친절하고 자상한 아버지 혹은 어머니는 자식입장에서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관심이냐 간섭이냐. 

  미국에는 실제로 영화에서와 같이 '내셔널 스펠링 비'라는 철자 맞추기 대회가 있는데, 이는 만 16세 이하의 청소년들이 참가하여 순전히 집중력과 기억력에 의거해 문제를 풀어나가는 대회라고 한다. 영화 속에서 종교학 교수인 아버지 사울은 그의 딸 엘리자가 어른들도 모르는 글자들을 아무렇지 않게 기억해내는 능력을 발견하고선 이 대회에 참가시킨다. 그는 믿고 있다. 딸이 자신에게는 없는 어떤 영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신과 대화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사울에 딸과 철자대회를 준비하면서 아내와 아들에게 소홀해지고, 아내와 아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소외된 자신을 드러낸다. 아내는 남편이 항상 되뇌이는 말마따나 신비한 빛의 조각들을 모으는데 주력하고, 아들은 유대교를 배신하고 힌두교에 몰입함으로써 '이유있는' 반항을 한다. 화목했던 네 명의 '가족구성원'은 이제 각자가 관심갖는 것들을 위해 하루를 살아내고 '가족'은 무너져간다.



* 화목한 가정의 전형적인 모습, 가정의 평화는 사소한 부분에서 깨어진다. 그리고 어긋남은 지속되기 쉽다.

   영화는 잔잔하게 화목한 가정이 서로 어긋나고 해체되어가는 과정을 그리려고 했다. 그러나 그 어느누구도 이 영화가 그런 메세지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영화를 접하게 된다면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며 황당한 표정을 지을 것이다. 감독은 새로운 형식의 가족영화를 만들어보고 싶었던 것 같지만 이 영화는 아무런 메세지도 전달하지 못했고, 그다지 볼 거리도 없다. 종교와 영적인 교류 등등을 끄집어내어 뭔가 있어보이는 영화를 만들려했지만 하나도 안 있어보이고, 양념이 되어야 할 것이 주가 됨으로써 주요내용은 사라지고 양념은 정체를 드러내지 못한 채 뒤섞였다.

  스코트 맥기히와 데이비드 시겔, 두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영화는 이번이 첫번째가 아니다. 2001년 <딥 엔드>라는 아직 보지못한 -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 영화를 함께 만들었고, 이번이 두번째 공동작이었으나 역시 실패했다. 볼거리가 없다면 메세지라도 뚜렷해야 하는데 메세지도 없고 볼거리도 없고 영화의 장르조차 의심케 만든다. 처음엔 스릴러일줄 알았다. 잔잔하게 다가다 이 딸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구나, 싶었는데 그도 아니었다. 참 애매하고 모호한 영화가 되어버렸다.



  유일하게 내 시선을 주목한 것은, 리처드 기어. 나는 그의 얼굴과 행동에서 드러나는 푸근함이 좋다. 사람이 참 따뜻하다, 라는건 그에게 어울리는 말이다. 체조장학생으로 메사추세스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다가 2년 뒤 연기에 뜻을 두고 곧장 뮤지컬에 몸을 던졌으며, <그리스>의 주연으로 주목받기 시작해 영화에까지 영역을 확장했다. 참 많은 영화에 이름을 올렸지만 그다지 흥행한 작품은 많지 않고 내가 그를 접한 것조차 <귀여운 여인>과 <자칼>이 전부다. 이제 50대 후반을 달리는 그지만 연기에 나이가 따로 있으랴. <다섯번째 계절> 이후 <플록>이라는 영화에 출연했던데 이건 개봉했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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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코레아니쿠스 - 미학자 진중권의 한국인 낯설게 읽기
진중권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월
품절


'국민성'이라는 말 뒤에 붙는 술어는 대개 편견을 담고 있다. 개인차를 무시하고 몇몇의 예만 갖고 전체의 특성을 구성해내는 '일반화의 오류', 한 사회가 발전하는 단계에서 겪는 성장의 고통을 간단히 그 민족의 유전자 탓으로 돌리는 '인종주의 심리', 그저 문화적 차이에 불과한 것을 곧바로 미개함의 지표로 간주해버리는 '제국주의 논리' 등. 자기와 다른 인간에 대한 편견을 생산하는 기제는 다양하다. -10쪽

이 책의 의도는 ' 한국의 정체성'에 대한 탐구가 아니다. '정체성'이라는 낱말은 다분히 이념적이어서, 한국인이 마땅히 수립하고 보존해야 할 어떤 가치 체계를 함축한다. 가치관이 다양해진 시대에, 과연 한국의 문화라면 마땅히 갖춰야 할 어떤 양식 같은 게 존재하는지 모르겠다. '정체성' 담론은 종종 특정인의 주관적 가치관을 사회의 객관적 규범으로 제시하는 형식을 취한다. 하지만 여기서 나는 "한국인이라면 모름지기 이래야 한다"라고 주장하고 싶지 않다.
'국민성' '정체성' 보다 이 책의 의도에 더 적합한 것이 있다면, 아마 '하비투스'라는 개념일 것이다. 우리말로 흔히 '습속'이라 번역되는데, 거칠게 말하면 특정 사회 성원들의 사고방식, 감정구조, 행동양식의 총합이라 할 수 있다. -11쪽

"회화가 색채의 조형예술이듯, 정치는 국가의 조형예술이다. 대중을 재료로 국민을 주조하는 것. 국민을 재료로 국가를 주조하는 것. 이것이야 말로 언제나 가장 심오한 의미에서 참된 정치였다." (요제프 괴벨스, 1929) -58쪽

"옳게 판단하고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능력은 자연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균등하게 배분되어 있다." (데카르트 , <방법서설>) -104쪽

"내가 어렸을 때부터 많은 잘못된 견해들을 참된 것인 양 받아들였고, 그렇게 불안정한 원칙들을 근거로 해서 내가 쌓아올린 것이 불확실할 수 밖에 없으며, 따라서 학문에서 어떤 확고부동한 것을 이룩하려고 한다면, 지금까지 믿어왔던 모든 견해를 벗어나 아주 기초부터 새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을 얼마 전부터 깨달았다." (데카르트, <방법서설>)-105쪽

수직적 예법의 과잉은 수평적 예법의 결여를 낳는다. 언젠가 독일문화원의 선생이 우리에게 "왜 한국인들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인사를 해도 안받느냐?"고 묻는다. 자신이 "헬로"라고 해도 멀뚱이 얼굴만 쳐다볼 뿐 대꾸가 없어 민망했다는 것이다. 하긴, 독일에선 모르는 사람에게도 "구텐 탁"이라고 했던 나도 같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한마디도 인사를 안 건넨다. 이 어색함, 이 머쓱함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말해주는 예법이 없다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수직적 위계를 위한 예법이 매우 복잡하게 발달된 한국 사회, 수평적 교제를 위한 예법에는 이렇게 구멍이 나 있다. 원래 전통 예법 자체가 신분제에 뿌리를 두고 있는 데다가, 근대화마저 군대를 모델로 하여 이루어지다 보니, 예법이 주로 수직적 위계를 세우는데에 소용된 것이다. 그 결과 개인과 개인의 평등한 교제를 규제하는 품위있고, 격조 있는 시민적 예법은 발달할 기회가 없었던 모양이다. 낯선 사람과 마주칠 때 한국인이 느끼는 어색함은 거기서 비롯된다.-122-123쪽

한마디로 한국인은 근거리 지각에 따르는 쾌, 불쾌에 그다지 민감하지 않다. 일단 내가 불쾌해야 남도 불쾌할 것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지 않겠는가. 자신이 불쾌하게 느끼지 않는 행동은 당연히 남에게도 별 생각 없이 하게 된다. 한마디로 이것은 '배려'의 문제이기 이전에 먼저 '감각'의 문제다. 이른바 에티켓의 전제가 되는 것은 바로 불쾌를 불쾌로 느끼는 미적 취미다. -141쪽

죄책감은 죄를 짓는 순간 발생하나, 수치심은 그것이 드러나는 순간에 비로소 시작된다. -172쪽

한국에서는 이를 '연대책임은 무책임'이라 표현한다. 이는 똑같은 현상에 대한 군사주의적 표현이다. 신의 눈길은 인간에게 죄책감을 안겨주고, 인간들의 눈길은 사람에게 수치심을 느끼게 해준다. 이것은 한국과 일본의 주체 형성이 신 앞에 선 단독자로서 자기반성의 능력을 갖춘 '개인'의 형성이 아니라, 공동체 속에서 남들의 눈길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성원'의 형성으로, 때로는 연대로만 책임을 지는 '대원'의 형성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173쪽

이런 문화(남의 눈치를 보는 문화)에서 윤리를 형성하는 감정은 죄책감이 아니라 수치심이다. 신 앞에 떳떳하지 않은 이도 사람들 앞에선 떳떳하고, 신 앞에 떳떳한 이도 사람들 앞에선 부끄러울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성범죄의 신고율이 낮은 것은 아마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여기서 수치심을 느끼는 것은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 이렇게 윤리가 타인의 눈에 맞춰져 형성된 사회에서는 죄도 드러나지 않는 한 떳떳하고, 죄가 아닌 것도 드러나는 한 부끄러운 것이 된다. -174-175쪽

한국은 뜨겁다. 개인주의가 강한 서구에서는 서로 논쟁을 벌이다가 견해차가 좁혀지지 않으면 "유감이네요"하고 논쟁을 멈춘다. 하지만 모든 성원이 가치관을 공유하는 공동체 정서에 익숙한 한국인에게 견해의 차이는 참을 수 없는 것. 그 차이를 없앨 때가지 한국인은 가망 없는 논쟁을 집요하게 이어간다. 월터 옹은 구술문화에 사는 사람들은 어조가 논쟁적이라고 지적한다. 토론을 할 때 사안의 논리적 해결보다는 인격의 명예를 건 승패에 집착한다는 것이다.
인터넷 문화와 더불어 우후죽순처럼 등장한 것이 이른바 '논객'들. 논객이라는 말은 어쩔 수 없이 '검객'을 연상시킨다. 구술문화에서는 어떤 이가 주장하는 논리보다, 그 주장을 하는 사람의 솜씨에 더 관심이 많다. 이런 사회의 논쟁은 대개 '논리의 대결'이라기 보다는 ;검객의 결투'로 치러진다. 사안의 해결보다 중요한 것이 승부를 통해 결정되는 명예의 감정. 여기서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하는 것은 죽기보다 싫은 일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 논쟁이 합리적이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인터넷은 고수들이 명멸하는 무협지 속의 '강호'. 혹은 검투자들이 사투를 벌이던 고대의 아레나다. 인터넷은 무림의 고수를 지향하는 수많은 네티즌들의 욕망을 충족시켜준다. 한국 사람이 목숨 걸고 인터넷을 하는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얼마전 검색을 하다가 우연히 내 이름이 영광스럽게 거론된 기사를 발견했다. 논쟁을 바라보는 이 사회의 코드를 그대로 보여준다.
"글 싸움에서 시사평론가 진중권 씨에게 이길 사람이 없다면, 말싸움에서 유시민 씨에게 이길 사람은 없어 보인다." -194-195쪽

토론 사이트에 의견을 올리고, 홈페이지에 제 이야기를 쓰고, 사실 오늘날처럼 많은 이들이 글쓰기를 하는 시대도 일찍이 없었다. 하지만 그로써 문자문화가 강화되는 것은 아니다. 인터넷 글쓰기는 구술문화에 가깝다. 오랜 사색으로 정제해낸 생각을 주옥같은 언어에 담는 독백적 글쓰기가 아니라, 반응이 오가는 상황에서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곧바로 글자로 옮겨 적는 대화적 글쓰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글쓰기의 범람 속에도 글쓰기는 위기에 빠질 수 있는 것이다. -211쪽

이른바 '인문학의 위기'란 다름 아닌 이 '디지털 실어증'의 산물이다. 그 위기는 사회가 문자문화에서 영상문화로 이행하는 데에 따른 필연적 현상이다. 21세기는 사회의 주요한 소통매체가 문자에서 영상으로 바뀌는 이른바 '도상적 전회'의 시대다.
[...중략...] 인문학의 위기는 구체적으로 '이미' 영상문화에 속하는 학생과 '아직' 문자문화에 있는 교수 사이의 세대 차이로 나타난다. 그림에 익숙한 학생들은 더 이상 선생의 문어체적 정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문자에 익숙한 선생들은 학생들의 영상적 신체를 이해하지 못한다. 2차 영상성의 문화가 텍스트와 이미지의 결합이라고 할 때, 학생과 선생 모두 어느 한쪽만을 갖고 있어 서로 결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학생의 뇌는 '진보'가 덜 됐고, 선생의 몸은 '진화'가 덜 됐다.
-212-214쪽

'개인'이라는 말은 in+dividual, 즉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단위라는 뜻이다. 하지만 컴퓨터에 여러 개의 창을 열어놓을 때, 정신은 다양한 관심사로 분할이 된다. 이로써 전통적 의미의 '개인'은 해체된다. 기성세대가 주의력이 산만한 젊은 세대를 불안하게 바라보는 것은 이 때문이다. 특히 미디어의 홍수에 노출된 한국의 어린 세대에게서 '개인'의 해체라는 현상은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급속하고 파괴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220쪽

라이프니츠는 인간(의 정신)을 '창없는 단자'라 불렀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의 인간은 사방으로 창을 열어놓고 산다. 개인이 근대인의 조건이라면, 분열자는 탈근대적 인간의 조건이다. '조건'이란 거부할 수 없는 환경을 뜻한다. 현대인은 어차피 분열자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그중에서 디지털 통각을 가진 이는 멀티태스커로 진화할 것이고, 그것 없이 그저 산만하기만 한 이들은 넓은 정보의 바다를 표류하다가 해체되어 사라질 것이다. -221쪽

한국인의 신체가 아무리 그로테스크해 보여도 오늘의 한국을 만든 것은 바로 그 몸이다. 다만 그 신체는 급조된 근대화에 따르는 부작용으로 고통 받고 있고, 미래로 나아가야 할 시점에서 아직도 과거의 타성에 사로잡혀 있다. 오늘의 고통을 제거하고 미래를 준비하려면 한국인의 몸을 이루는 세 가지 역사적 층위가 최적의 배합을 이루도록 재배치해야 한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존재의 미학, 즉 요소들을 선택하는 테크네와 그것들을 배치하는 메트릭이다. -2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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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d0735 2007-01-31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줄도 많이도 치셨네~ ^^
이 책 리뷰도서로 떠서 신청하고 싶었는데... 못했습니다.
다음달쯤 여유되면 사서 읽어볼게요. 밑줄만 봐도 좋아보이는군요. ^^

마늘빵 2007-01-31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줄을 많이 치면 -_- 여기에 쓸 때 힘들어요. 리뷰 쓰는게 더 쉽겠어요. 곧 리뷰 써야지.

승주나무 2007-02-02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밑줄 많이 쳐주세요. 논술문제 만들 때 써먹게 ㅋㅋ
 
현명하게 세속적인 삶
복거일 지음 / KD Books(케이디북스) / 2006년 12월
품절


당연히, 우파 지식인들 사이의 논쟁들을 건전하게 만드는 일은 시급하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는 몇 가지 점들을 지켜야 할 것이다.
먼저, 우리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싸움에서 한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때로 논쟁의 상대방에게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짜증이 일더라도, 그들이 같은 편이고 그들과 심각하게 다투는 것은 진정한 적을 돕는 일임을 자신에게 일러야 한다.
다음엔, 우리는 모두 사회적 믿음과 정책적 견해에서 아주 동질적이라는 점을 잊지말아야 한다. 때로 차이가 부각되더라도, 그것이 크지도 중요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자신에게 일러서 지엽적 문제가 근본을 흔드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셋째, 우리는 논쟁을 믿음과 견해라는 비인격적 차원에서 진행해야 한다. 논쟁이 개인들의 행적이라는 인격적 차원에서 진행되면, 어쩔 수 없이 논쟁이 거칠어지고 당사자들 사이의 감정적 골은 깊어진다.
중요한 것은 믿음과 견해지 과거의 행적과 현재의 정치적 입지가 아니다. 이 점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깨우침을 줄 수 있는 것은 당의 고승 위산 스님의 말씀이다. 그의 제자 앙산 스님이 행실에 대해 묻자, 위산은 "자네 눈 바른 것만 귀하게 여길 따름, 자네 행실은 보려하지 않네"라고 대답했다. 믿음과 견해가 올바르다면, 행적과 입지에서의 사소한 차이들은 큰 장애가 될 수 없고 거기서 나오는 의견의 편차는 우호적 분위기 속에서 논의를 통해 좁혀질 수 있을 터이다.
넷째, 논쟁에선 되도록 표현을 부드럽게 하려고 애써야 한다. 논쟁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은 흔히 내용보다 표현이다. 체스터필드 백작이 말한대로 "상처는 모욕보다 훨씬 빨리 잊혀진다." 화가 났을 때 나오는 대로 쏘아붙이는 대신 화를 삭이고 나서 보다 부드러운 표현을 쓰는 일은 일반적으로 인식된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40-41쪽

세계성의 시대에선 민족주의적 편향이 든 역사 해석은 특히 큰 문제들을 부른다. 해외에 나갔을 때, 자신이 받은 민족주의적 교육과 세계 현실이 너무 달라서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시민들이 많다. 우리가 크게는 외교에서 작게는 외국인들과의 교류에서 서툰 까닭은 민족주의적 편향이 든 역사 해석도 큰 몫을 했다.
유난히 씁쓸한 반어는 우리 사회를 뒤덮은 민족주의적 태도가 실은 우리의 전통이 아니라 유럽의 전통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우리 선조들은 민족에 그리 집착하지 않았고 우리보다 훨씬 세계적이었다. 지금 우리가 받아들인 민족주의는 원래 근대 유럽에서 비롯했다. 유럽 문명이 다른 문명권들로 수출한 것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들은 기독교, 과학, 그리고 민족주의라 할 수 있는데, 그 셋 가운데 민족주의가 가장 성공적 수출품이었다.
우리 가운데 누구도 민족주의적 편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외세에 대한 저항"이 역사 해석의 중심적 가치가 된 역사 교육을 오래 받아왔으므로, 우리는 모두 알게 모르게 그런 기준에 따라 우리 역사를 바라보고 현실에 접근한다. 그런 편향된 판단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우리에게 이로울 수 없다. -50쪽

그래서 우리는 나름으로 삶의 설명서들을 열심히 찾는다. 그런 설명서로 쓸모가 큰 것이 문학이다. 특히 소설이 그렇다. 사람들의 삶에서 본질적인 부분들을 이야기로 꾸며 들려주므로, 소설은 삶의 본질과 살아가는 길에 대해서 성찰할 기회를 독자들에게 준다.
소설 작품들은 그럴 듯한 이야기들이다. 삶에 별다른 연관성이 없는 특수한 사실들을 버리고 삶의 본질에 연관된 것들만을 뽑아냈으므로, 소설 작품들은 일반적으로 인식된 것보다는 훨씬 큰 보편성을 지닌다. 신문 사회면에 나오는 현실이 소설 속의 현실보다 훨씬 특수하고 기괴하다. 사람들의 삶에 관해서 '보편적 진실'이라 불릴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많이 담긴 곳이 바로 소설이다.
사정이 그러하므로, 소설을 거짓말과 같은 뜻으로 쓰는 우리 사회의 관행은 참으로 불행하다. "소설을 쓴다"는 표현에 "거짓말을 지어낸다"는 뜻을 처음 담은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길 없지만, 그 말을 쓰는 사람들의 무지를 드러내고 우리 사회의 비속함을 상징한다. 근대 이후에서 가장 중요했던 예술 형식을 거짓말과 동의어로 만든 사회가 어떻게 건강하고 세련될 수 있겠는가?-52-53쪽

"자연은 우리에게 장점들을 주고, 우연은 그것들이 일하도록 한다"
"혼자서 현명해지려는 것은 크게 어리석은 일이다"
(라 로쉬푸코)

"그럴 수만 있다면 다른 사람들보다 현명해져라. 그러나 그들에게 그것을 말하지는 말아라."
(필립 체스터필드) -60-61쪽

"첫째, 신과 사람에 대해 너의 의무를 해야하니, 그것 없인은, 다른 모든 것들이 뜻이 없다; 둘째, 많은 지식을 얻어야 하니, 그것 없이는 비록 네가 매우 정직한 사람일지라도 매우 경멸 받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매우 좋은 태도를 지녀야 하니, 그것 없이는 비록 네가 정직하고 박식한 사람일지라도 매우 마음에 맞지 않고 불쾌한 사람이 될 것이다.'
(필립 체스터필드) -62쪽

만일 당신이 그런 행운을 누리지 못했다면, 착한 사람인 척 하는 것이 긴요하다. 세상은 위선을 좋게 여기지 않는다. 찬찬히 생각해보면, 위선이야 말로 칭찬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드러난다. 사람은 천사도 악마도 아니다. 누구도 천성이 온전히 착할 수는 없고, 정신적으로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빼놓으면, 천성이 온전히 악할 수 없다. 그래서 모두 크든 작든 위선적 행동을 통해서 사회 환경에 적응한다. 위선은 사람이 자신의 비열한 천성을 극복하려는 안타까운 노력이다. 자연히, 가장 인간적이고, 그런 뜻에서, 타고난 선보다 오히려 위대하다.
다행스러운 것은, 착한 천성에서든 위선을 통해서든 착한 행동을 하게 되면, 사람의 마음이 실제로 조금씩 착해진다는 사실이다. 사람의 마음은 태어날 때 고착된 것이 아니라 학습을 통해서 다듬어지도록 되었다.-63쪽

"현명하게 세속적이어라, 세속적으로 현명하지 말고"
(콸스)-64쪽

상업활동을 통해서 사람은 돈을 많이 벌어서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높일 수 있다. 아울러 물질적 가치를 창출해서 사회에 공헌한다. 이 점에서 상업활동은 본질적으로 위치재를 놓고 다투는 정치활동과 다르다. 모두 돈을 많이 벌면, 사회적 위치가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경우에도, 물질적 풍요의 절대적 수준은 높아지므로, 가치는 창출된다.
현대 사회가 빠르게 발전하고 그런 발전에서 기업가들이 그리도 큰 역할을 한 것은 상업 활동이 직접 위치재를 겨냥한 것이 아니라 물질적 가치를 창출하고 사회적 지위는 간접적으로 얻어진닫는 사실 때문이다. 반면에, 위치재를 직접 겨냥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얻는 과정에서 가치를 비교적 적게 창출한다. 번영한 사회에서 기업가들이 두드러진 역할을 하고 높은 사회적 지위를 누린다는 점은 우리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훌륭한 기업가들은 "현명하게 세속적"인 사람의 전형이다. 젊은이들이 기업가보다는 관료나 정치가를 선망하는 우리 사회에서 이것은 모두가 깊이 새겨야 할 화두다. -66-67쪽

주목을 덜 받지만 정작 중요한 점은 외국의 기업가들은 자신들의 재산으로 자선을 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대주주로 지배하고 경영하는 기업들의 자산으로 자선을 하지 않는다. 이점에서 외국의 자선가들과 우리 자선가들이 뚜렷이 대비된다.
아무도, 지배적 주주들도 최고경영자들도, 기업의 자산을 자선에 쓸 도덕적 권위를 지닐 수 없다. 기업의 목적은 주주들을 위해서 이윤을 되도록, 즉 법과 도덕에 어긋나지 않는 방식으로, 많이 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윤은 주주들에게 배당이나 청산을 통해서 돌아가야 한다. 자선은 그렇게 투자에 대한 보상을 받은 주주들이 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자선만이 정당할 뿐 아니라 원래 자선의 뜻에 맞는다. 남의 돈으로 하는 자선은 어쩔 수 없이 자선의 뜻을 덜어낸다. 기업은 법인이다. 원래 인격을 갖춘 무엇이 아니지만, 인격을 지닌 것처럼 여기는 것이 사회적으로 좋으므로, 그렇게 법적으로 인격을 부여한 것이다. 따라서 법인은 마음이나 양심이 있을 수 없다. 마음도 양심도 없는 존재를 통해서 그리고 본질적으로 자신의 소유도 아닌 재산으로 이루어지는 자선이 과연 얼마나 깊은 뜻을 지닐 수 있겠는가? 자선은 남의 돈이 아니라 자신의 재산으로 해야 하는 점은 강조되어야 한다. -70쪽

그(프리드먼)는 자본주의 사회들에서만 자선이 나올 수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 중앙 권력이 충분한 정보를 지니고 처리해서 사회의 움직임들을 다 통제하는 사회주의 사회들에선 개인들의 판단에 의한 자선은 들어설 틈이 원천적으로 없다. 만일 자선이나온다면, 그것은 계획이 틀려서 자원이 남는 개인들과 모자란 개인들이 나왔다는 사실을 뜻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사회들에선 자선이란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과 자본주의를 가장 충실히 따르는 미국에서 자선이 가장 왕성하다는 사실은 맥락이 통한다. 자선에 바쳐진 자원에서 가장 큰 성과를 얻기 위해서 현대 기업의 기법들과 기업가 정신을 결합하는 '자선자본주의'가 미국에서 출현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자선은 인간의 본성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고 사회와 문명을 발전시킨 원동력인 '상호적 이타주의'의 한 부분이다. 그러나 그것을 기업의 '사회적 책임'으로 포장하는 일은 더할 나위 없이 해롭다. -72쪽

좋은 참고서들은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늘 지적 즐거움을 준다. 그리고 그것들을 잘 쓸 줄 아는 사람들에겐 뜻밖의 선물들도 준다. 그런 선물들 가운데 하나는 '스스로 좋은 물음을 던질 줄 아는 능력'이다.
입시 위주의 교육을 받은 터라, 우리 학생들은 모두 주어진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일이 가장 중요한 지적 활동이라는 생각을 지녔다. 창조적 노력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주어진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능력이 아니라 스스로 물음을 던지는 능력이다. 풍요로운 결과를 약속하는 주제를 고르는 일에서부터 새로운 각도에서 문제를 살피는 일에 이르기까지, 창조적 노력의 모든 단계들을 떠받치는 것은 스스로 물음을 던질 수 있는 능력이다. 자료들이 체계적으로 집적된 참고서들은 그런 물음들을 찾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다. -107쪽

우리 교과서들을 열악하게 만든 직접적 원인은 교과서의 기능과 중요성에 대한 인식의 부족이다. 실제로 교과서에 대한 편견과 경멸을 스스럼없이 드러내는 학자들이 드물지 않다. 좋은 책들을 뽑아 상을 주는 일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해보면, 심사기준이 아예 '교과서는 제외한다'는 조항이 들어간 경우도 있다.
교과서는 '어떤 주제의 원칙들과 어휘를 체계적으로 기술한 책'을 뜻한다. 따라서 교과서들은 그 사회의 '공식적 지식 체계'를 독자들에게 제시한다. 바로 거기에 교과서의 근본적 중요성이 있다. 공식적 지식 체계는 한 사회에 존재하는 가장 풍부하고 체계적인 지식 체계이며 사회의 구성과 움직임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고 효과적이다. 어떤 대체적 지식 체계도 공식적 지식 체계에 비길 만큼 풍부하고 체계적이지 못하다. 자연히, 좋은 교과서들이 존재하는 사회에선 시민들이 사회의 구성과 움직임을 잘 이해하게 된다.
교과서들은 또한 재발견의 위험을 줄인다. 이미 남들이 발견해서 잘 다듬어놓은 지식을 혼자 애써서 원시적 형태로 얻는 일처럼 딱한 일도 드물다. 지식의 발전과 축적이 점점 가속되는 지금, 재발견에서 나오는 개인적, 사회적 손실은 점점 커질 수 밖에 없다. 재발견을 피하려면, 지식이 뻗어나가는 맨 앞쪽으로 가장 빨리 가는 길을 찾아야 한다. 그 일에서 교과서는 가자 좋은 길잡이다. -113-114쪽

어쩔 수 없이 나는 복원 사업의 득실을 마음 속으로 헤아렸다. 복원에 든 비용은 작지 않을 터였다. 느닷없이 집과 생계를 잃은 가족들의 손해라는, 보이지 않는 비용은 더 클 터였다. 반면에, 얻은 것은 분명치 않았다. 실은 무엇을 얻은 것이 아니라 절터의 폐허를 그냥 잃어버린 것이었다.
폐허는 폐허 다워야 한다. 폐허마다 세월의 손길에 다듬어진 나름의 모습이 있어서 찾는 사람들에게 그 세월을 얘기해준다. 그래서 폐허다움은 폐허의 자산이다. 그것을 큰 돈을 들여 걷어내다니.
사람의 몸과는 달리, 폐허는 성형 수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젊음을 찾지만, 문화재들은 나이들었다는 점이 바로 본질적 자산이다. 지금 우리는 '문화재 복원'이란 이름 아래 이루어지는 폐허의 파괴에 너무 무심한 것은 아닌지. -134쪽

"내가 하는 모든 것들은 얼마나 하찮은가. 그러나 내가 그것들을 해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가" (볼테르) -193쪽

사람은 천성적으로 마약을 찾게 되어 있고 아주 오래 전부터 갖가지 마약들을 써왔다. 그래서 동서고금의 거의 모든 인류 사회들은 몇가지 마약들을 허용해왔다. 그렇게 허용된 마약들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물론 알코올이다. 니코틴과 카페인도 대부분의 사회들에서 허용된 마약들이다. 비록 이제 니코틴은 점점 괄시를 받지만.
일반적으로, 알코올, 니코틴, 그리고 카페인을 포함하는 술, 담배, 커피, 차 같은 것들은 마약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취급은 사회적 이유 때문이지 화학적 기준 때문은 아니다. 그런 마약들이 허용되는 것은 그것들을 사용하는 관행이 이미 사회 조직 속으로 깊이 들어가 있고 사회가 그것들의 사용에 대처하는 길을 어느 정도 알기 때문이지, 그것들의 영향이나 해독이 다른 마약들에 비해 작기 때문이 아니다. -214쪽

세상이 어지러우면, 보통 사람들의 일상도 힘든 판단들의 연속이 된다. 도덕과 규칙의 필요와 정당성을 부인할 사람은 드물 터이지만, 다른 사람들의 도덕과 규칙을 가볍게 어기는 상황에선, 혼자 그것들을 지키는 것은 짐이 되고 때로는 손해가 된다. 그래서 여느 때라면 무심히 내릴 일상적 결정들이 힘든 도덕적 판단을 거치게 된다.
여기 실린 글들 밑에 자리 잡은 전언이 있다면, 그것은 도덕과 규칙을 지키는 것이 어기는 것보다 낫다는 얘기다. 적어도, 옛 말씀에 있듯이, 도덕적 삶은 자체로 보답이다. 이 말은 부도덕한 삶에 대해선 할 수 없다.
[...] 사람은 자연선택의 효율적 손길에 의해 다듬어진 '도덕적 동물'이다. 다른 사람들과 협력하는 대신 남을 속이는 사람들은 도덕적인 사람들보다 삶에서 얻는 것이 적었고 그래서 밀려났다. 우리는 모두 상당히 도덕적이었던 사람들의 후손이다. 자연히, 도덕적 삶은 우리에게 유리할 뿐 아니라 우리의 천성을 충족시켜서 깊은 즐거움을 준다.
비록 짧고 가벼운 글들이지만, 여기 실린 글들엔 그런 생각이 스며있다. 책 제목이 가리키는 것처럼, '세속적으로 현명한' 것보다는 '현명하게 세속적인' 것이 삶의 본질에 맞다. 지금 우리 사회는 아주 어지럽다. 그래도 나는 '현명하게 세속적인' 태도가 적응적이라고 독자들에게 얘기하고 싶다. (후기에서)
-222-2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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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07-01-28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복거일아저씨한테 꽂혔군요. ^^

마늘빵 2007-01-28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네. 아직 한 권 더 있습니다. 안읽은거. 다른건 새로 구입해야하고요. 이 책 괜찮군요. 복거일에 대해 개인적인 관심이 없어도 괜찮은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