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 경고

  대개의 미래사회를 그린 영화들이 그렇듯 에디슨 시티 또한 범죄율 0%를 자랑하는 미국 최고의 살기 좋은 도시다.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는 범죄를 미리 예상하는 집단이 있었더랬고, <이퀼리브리엄>에서는 사람들에게 감정을 없애는 약을 주입함으로써 평화를 달성했고, <브이 포 벤데타>에서는 국가의 주도 하에 모든 역사와 사건이 조작되고, 이들의 공권력으로 시민들을 통제하는 모습을 보여줬더랬다. 그 외에도 미래 사회를 그린 영화들이야 수도 없이 많지만, 또 앞서 언급한 어떤 영화는 평화로운 미래사회보다는 통제받는 미래사회에 촛점이 맞추어졌다고 하지만, 대개의 미래사회를 그린 영화들은 평화롭다. 오늘날과 같은 범죄가 난무(?)하는 사회는 예상할 수 없다.  



* 영화에서 가장 무자비한 요원으로 나왔다. 인정머리라곤 조금도 없고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무조건 가지쳐야 한다는  사고방식. 심리적인 불안감을 보이기도 했다. 결국 그가 저지른 행위의 결과로 인해 죽음을 맞는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느니.

  범죄율 0%의 사회를 평화로운 사회라고 볼 수 있을 때 '에디슨 시티'는 매우 평화롭다.  영화 <에디슨 시티>의 범죄율 0%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F.R.A.T는 워낙 영화 속에서 순식간에 지나갔던지라 무엇의 약자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비밀경찰조직과 같은 것이다. 이들이 무엇을 하는지, 이들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극비다. 그들은 범죄가 일어나는 곳이면 어디든 출동하고, 어떤 방식을 사용하여 현장을 제압하는가 하는 것은 순전히 그들에게 달려있다. 야구방망이를 쓰고 싶다면 쓰는 거고, 총을 사용하고 싶다면 총을 사용하는거고, 그냥 주먹으로 해결하고 싶다면 주먹을 사용하는거다. 사건을 어떤 식으로 어떻게 해결하는가 하는 것은 현장에 출동한 비밀경찰 프랫 각각의 개인들에게 달려있다.

  어느날 프랫이 연루된 살인사건이 재판에 회부되고, 이 지역신문 신참기자 폴락은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는 낌새를 챈다. 신문사 편집장인 애쉬에게 도움을 청해보지만 애쉬는 공권력에 다가가서는 안된다고 충고한다. 그저 추측으로 일관한 기사는 기사가 아니라 소설이라며 정말 기사다운 기사를 쓰고 싶다면 취재를 하라고 한다. 현장을 발로 뛰며. 애쉬의 조언으로 현장 취재를 하던 폴락은 슬슬 잊혀지던 사건의 진실에 다가서게 되고, 그 와중에 여자친구와 함께 길거리에서 딱 죽지 않을 만큼 폭행을 당한다. 주먹 몇 방에 이렇게 만들 수 있는건 그들 뿐이다. 여자친구는 혼수상태로, 자신은 위험을 피해 지역 검사의 버려진 시골집으로 가지만 역시 안전하지 않다.



* 헐리우드 최고 관록의 배우와 헐리우드 초짜 배우의 만남.  정말 화려한 출연진이다. 모건 프리먼. <쇼생크 탈출>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부터 <딥 임팩트> <하이크라임> <블루스 올마이티> <드림캐쳐> <더독>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이 배우가 나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건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였다. 주연이라 할 수는 없지만 주연 못지 않게 비중있는 역할을 맡았더랬다. 늙은 체육관장과 나이든 여자 복서와의 매개 역할이랄까. 두 배우도 멋있었지만 나에겐 모건 프리먼이 더 멋있게 보였다.

* 오른쪽엔 2000년 빌보드 선정 최고의 그룹이라던 '엔싱크'의 리드보컬 저스틴 팀버레이크. 그는 이후 솔로활동으로 자신의 입지를 굳혔지만, 여자친구인 카메론 디아즈의 영향으로(지금도 사귀고 있는지는 나도 의문) 영화계에도 눈독들이다가 <에디슨 시티>로 화려한 신고식을 마쳤다.  영화에선 뭐 저런 별 배우같지도 않은 (헐리우드 남자배우들은 잘생겨야한다는 편견은 버려) 애가 나왔담 했는데 그가 저스틴 팀버레이크라니. 근데 정말 볼품 없게 생겼다.

  진실은 캐면 캘수록 점점 커다란 몸체를 드러내고 진실을 캐는 폴락의 목숨은 더 위험해진다. 사건의 증인이 교도소에서 살해당했으니 이제 증거라고는 없다. 하지만 비밀경찰 프랫에 몸담은 이 중 그들의 행태에 동조하지 못하고 양심의 가책을 받는 이가 있었다. 폴락은 그와 비밀스럽게 접촉을 해 프랫을 쓰러뜨릴 자료를 받게 되지만 프랫은 이를 눈치채고 두 사람 모두 사지로 몰아넣기 시작한다. 신체 180센티 이상, 90킬로그램 이상, 모두 미혼에, 사격명중율 100%를 자랑하는 이들에게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

  기존의 영화 속에서, 언뜻 보기엔 평화로운 미래사회는 그 안에 항상 겉으로 보이는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나름의 방법이 있었다. <에디슨 시티>의 평화는 프랫이란 비밀경찰의 무자비함 때문이었으며, 사람들은 그들이 무서워서 피했던 것이지, 각각의 사람들의 자발적인 동의와 공감을 얻어 평화가 달성된 것이 아니었다. 평화는 자발적으로 달성될 수 없는 것일까. 한 사회와 국가를 비롯한 공동체를 구성하는 구성원들의 자발적 동의와 공감을 얻어 달성된 평화는 유토피아일 것이다. 말 그대로 이상향일 것이다. 인간이 모두 악한 마음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일까. 아니면 인간은 원래 선하게 태어났는데 사회와 환경의 영향으로 악하게 변한 것일까. 성악설이든 성선설이든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확실한 것은, 모든 사람들의 동의를 얻어 평화가 달성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평화를 원한다고 하지만, 정말 그들은 순도 100%의 평화를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원하고 원하지 않고의 차원이 아니라 감당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원에서 본다면 말이다.

  영화 <에디슨 시티>의 그 동일 이름의 도시 또한 평화로운 사회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범죄율 0%와 동의어로 사용했을 때의 평화이지 순도 100%의 평화는 아닐 것이다. 범죄는 없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프랫이란 비밀경찰을 두려워하며 벌벌떨고 프랫은 여자와 마약과 무기와 돈을 끼고 자신들이 하고싶은 대로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범죄율 0%는 달성되었을지 모르지만 여전히 거리의 폭력과 무자비한 살해는 남아있다. 단지 그것이 '범죄자'라 지칭된 이들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프랫'이란 국가공권력인 비밀경찰에 의해서 이루어질 뿐. 행위의 주체는 달라졌을지 모르나 행위의 현실은 변함이 없다. 이렇게 본다면 맨 처음 '범죄율 0%' 와 '평화'를 동일시 했던 명제는 깨져버린다. 진실된 의미의 평화는 사람들 개개인의 자발적 의지로부터 나와야 할테지만 이를 기대한다는 것은 너무나 막연하고 희망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외관상의 평화를 위해 국가에 의해 또다른 폭력이 자행된다면 이는 또다른 불필요한 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폭력에 의한 폭력의 방지'를 통한 평화는 더 이상 평화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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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01-28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스틴이 나온다는 것 자체만으로 관심대상에서 제외된 영화였던 기억이 납니다.
아쉽죠 모건 프리먼에 거기다가 케빈스페이시 까지 나왔는데...^^
하지만 무엇보다도..저 배우들 얼굴 4명 들이댄(?) 전형적인 포스터가 가장 거슬렸어요..^^

마늘빵 2007-01-28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생각보다 괜찮은 영화입니다. 저스틴은 저도 눈에 거슬렸지만 - 그가 저스틴 이라는걸 모르고 본 동안에도 - 모건 프리먼을 보는 맛으로 즐겼습니다. 영화 스토리도 흥미롭습니다.
 



* 스포일러 경고

  "내 얘기를 들어줘"가 뭐냐. 너무 식상하잖아. 이 영화는 전형적인 전설의 고향 코드를 답습하고 있으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다만 조선시대 외딴 산골마을이 현대적 도시와 바닷가 갯벌 마을로 둔갑했을 뿐. 굳이 범인을 예상하지 않고 봤기 때문에 - 범인이 누군지 짚어낼라면 찾을 수도 있겠지만 영화의 재미를 떨어뜨리는 작업이니 웬만하면 하지 않는다 - 영화의 흐름에 몸을 맡겨 관람했지만 뻔히 들여다보였다.  '일반적인' 공포영화라면 어김없이 사건의 단초가 되는 '의문의 연쇄 살인 사건'(아 이런 단어만 들어도 이제 다 보여) 그리고 사라진 한 소녀. 그럼 뻔한거잖아. 한 소녀가 원한을 품었고, 그녀를 괴롭힌 남자들(왜 항상 남자가 되어야 하지, 이제 여자로 바꿀 때도 됐는데)을 찾아다니며 복수를 하는거 아니겠어.



* 솔직히 송윤아 때문에 봤다. 나오는 영화마다 족족 별로 아니었지만 배우 송윤아를 좋아하기에. 그녀가 나왔던 영화 중 제일 나은 선택은 <사랑을 놓치다>이다. 다른 영화들은 영 꽝이다. 그녀의 연기가 영 꽝이라는 것이 아니라 영화 자체가 영 꽝이다. 요새 작품활동 안하는거 같은데 뭐하고 지내나 궁금하네. 

  죽은 세명의 피해자는 확인 결과 컴퓨터로 같은 메일을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그렇담 수수께끼는 메일 안에 있을 것이고, 메일을 살펴보니 웬 이쁘장한 소녀의 홈페이지가 뜨더라. 근데 확인해보니 죽었더라. 그렇담 죽은 소녀가 이들에게 복수를 하는거네. 그녀가 살았던 강원도 바닷가 마을로 떠난 소영은 그곳에서 이상한 소문을 듣고, 사건을 슬슬 풀어나간다.

  돌아온 소영은 갑자기 첫번째 희생자의 집 마당에 묻어둔 검은개의 시체를 끄집어내어 배를 쑤시고 안에서 뭔가를 찾아낸다. 그리고 이 물건은 사건 해결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그런데 왜 소영이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나서 죽은 개의 배를 쑤시고 물건을 빼내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의 행동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영화는 이런 식이다. 하나의 행동과 행동 사이에는 행동하기 위한 어떤 원인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없다. 되는대로 가다가 사건의 중요한 증거를 잡아내는 식이다. 예상된 최종 희생자가 죽는 순간 이들이 도착한 것 하며, 이들이 왜 별 다른 이유도 없이, 그 먼 곳까지 동민을 찾아갔는지, 무엇이 그리 급했는지, 아무 것도 연결되지 않는다.



* 영 연기가 어설퍼. 이동욱. 그래도 2000년부터 꾸준히 한편씩 모습을 드러내고는 있는데 아직 멀었다 싶다. 벌써 7년째인데 이제 좀 나아질 때도 되지 않았을까. 아직 그에겐 작품 속 캐릭터 분석에 대한 시각이 부족한 듯 하다. 자신이 맡은 배역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고민이야 말로 좋은 연기를 펼칠 수 있는 기초가 될텐데. 이 영화에서 상당히 중요한 배역을 맡았음에도 두드러지지 못했다. 화면만 가득 채웠지 화면을 압도하는 무언가가 부족하다.

  감독은 신인이지만 이전에 단편영화나 기타 등등의 경력이 꽤 화려한 사람이던데 왜 이런 생각들을 못했을까.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보더라도 그냥 보이는 이런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문제들을 왜 해결하지 않고 영화를 그대로 내보냈을까. 함께 있는 스태프나 배우들에게 모니터링만 해봐도 보이는 이런 가벼운 문제들을. 그랬다면 뻔하디 뻔한 공포영화라 할지라도 그냥 그러려니 할텐데 하나의 완성된 영화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짜임새가 없다. 공포영화는 예상치 못한 장치가 많이 등장할수록 기발할수록 재밌어지는데 너무 쉽게 예상할 수 있는 것들 투성이였다. 관객과의 머리싸움에서 감독은 철저히 졌다. '전설의 고향'이 그리운 사람은 이 영화를 추천한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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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토랑 2007-01-26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요즘 송윤아 주말 드라마 '누나' 라는데 얼굴 나오던데요 ^^;;;

마늘빵 2007-01-26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그래요? 제가 드라마를 잘 안봐서. 요새 주몽만 보고 있는데;;; ^^
 

* 스포일러 경고

                                               - 1 - 

  이 영화는 실제 1997년 2월 28일 단 44분 동안 미국 LA 지역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영화로 제작한 것이다. 이 사실을 모른 채 영화를 본다면, 그저 심심풀이 시간죽이기용 화려한 액션영화에 지나지 않을테지만, 그것이 사실임을 깨우친 순간 더 이상 영화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는 실제 현장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한다. 덜 축소하지도 않고, 더 과장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를 보여준다고 한다.



* 범인들이 몸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놓고 총격을 가한 것은 순전히 그들의 신체를 둘러싸고 있는 두겹의 방탄복 때문이었다. 영화 속에서 이들은 아무리 총을 맞아도 끄덕도 하지 않고 버텨낼 수 있었다.

  사건이 일어나기 2년전 범인들은 불법 무기 소지되로 불심 검문 중 체포되었고, 이들이 그보다 4년전쯤 발생한 은행 강도 사건의 용의자로 떠올랐으나 별다른 증거를 찾지 못해, 그저 불법무기소지죄 6개월을 살고 풀려났다. 더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들이 변호사 선임료를 낼 돈이 없다고 하자 압수했던 무기를 돌려줘 팔도록 했다는 것이다. 무기를 팔기는커녕 그들은 무기를 고스란히 돌려받고 2년 뒤 美 LA를 지옥으로 만들었다.

  사건의 주역인 래리와 에밀은 자동화기 AK소총을 들고 은행으로 침입 곧장 총을 난사한다. 밖에서 산책하다 현장을 목격한 시민은 경찰에 신고하고, 은행 안에 있던 사람들은 언제 죽을까 몰라 벌벌떨고 있다. 근처를 순찰하던 경찰이 은행으로 모이고, 도움을 요청, 시간이 흐르며 200여명의 LA 경찰들이 몰렸다. 날씨를 생중계하고 있던 하늘위의 헬리콥터는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깨닫고 현장을  티비로 생중계하기 시작한다. 



* AK자동소총이다. 이 소총은 작은 몸체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이를 능가하는 마땅한 화기가 없다고 한다. 구 소련에서 만든 것으로, 동구유럽을 비롯 여러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널리 사용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이들은 이 화력을 배가시키기 위해 개조를 했고, 탄창도 70-100발 정도가 들어가는 둥근드럼통을 사용했다고 한다. 그래야 난사할 수 있으니까.

  수많은 경찰이 은행 주변을 둘러쌌으나 은행강도들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돈을 챙겨들고 나와 경찰들을 향해 AK를 난사한다. 고작 권총과 38구경 리볼버만을 가지고 있던 경찰은 그 숫자가 범인의 100배에 달하지만 그들을 제압하기엔 화기에서 기량이 떨어진다. 몸통은 물론이거니와 팔과 다리에까지 방탄조끼를 에워싼 범인은 - 게다가 그들은 머리에 두건을 두르고 실제 현장에선 하이바까지 걸쳤다는 이야기가 있다 -  순식간에 시민과 경찰 수십명에게 부상을 입힌다. 다행히 이날 죽은 사람은 없었지만, 엄밀히 범인 둘이 죽었다, AK자동소총을 개조하여 회전력을 높인 이들의 무기는 경찰차와 담장까지도 관통하며 화력을 과시했다. 



                                                - 2 -

 

   다큐형식의 이 영화를 보면서, 아 이런 일도 가능하구나 싶다. 우리가 영화에서 봐왔던 그런 장면들은 더 이상 영화 속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범인은 은행에 들어갈 때도, 경찰들이 잔뜩 몰려있는 상황에서 티비로 생중계 되는 시점에서도, 절대 동요하지 않고 아주 일상적인 행동을 취했다. 흐느적흐느적 걸어나와 경찰을 향해 총을 난사하고, 다시 들어갔다 돈을 가지고 나와서 차에 싣고, 그리고 현장을 잽싸게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동네 산책하듯 걸어나갔다. 아 이게 어떻게 가능하느냐 말이다. 만약 범인들이 주변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놓고 잽싸게 차에 올라타 현장을 빠져나갔다면 어땠을까. 여전히 헬리콥터가 뒤를 따르며 생중계를 할 것이고, 경찰차가 뒤를 쫓겠지만, 사건현장은 LA에서 미국의 다른 주까지 확대되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사망자가 속출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영화와 현실이 구분되지 않을 만큼의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미국에선 쉽게 총기를 소지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영화에서 경찰은 권총과 리볼버만으로 대항할 수 없게 되자, 근거 총포상에 가서 온갖 화기를 다 구입해서 가지고 온다. 덕분에 총포상은 연매출을 하루에 다 달성했겠지만 신분이 확실하다면 누구나 총기를 소지할 수 있다는 규정은 그날의 공포의 44분을 만든 주인공이다. 자신의 신체를 보호하기 위해 총기를 소지한다는 규정은 일견 설득력있지만 우발적인 사고와 계획적인 살인에 그만큼 쉽게 노출되어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말이 좋아 나와 내 가족을 보호하는 것이지, 이건 누구나 마음 먹으면 타인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칼이나 도끼를 드는 것보다 총알 한 발 발사하는 것이 더 결행하기도 쉽지 않겠는가. 내가 가까이에서 피 묻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한방이면 끝나는 건데. 한 가지 더. 이들이 불법무기를 소지한 죄로 6개월을 살고 나왔으나 변호사 선임료가 없다고 해서 압수했던 총기를 돌려주는 법원은 뭐하자는건지. 그건 '압수'이지 국가가 '빌린 것'이 아니지 않은가.

  이 사건 이후 미국은 총기소지 규정을 엄격히 하기보다는 범인들에게 대항할 수 없었던 부실한 LA경찰서의 화기를 탓하며, 이들에게도 자동소총을 소지할 수 있도록 했다지. 그렇담 이제 아무 문제 없을까. 미국도 알 것이다. LA경찰서의 무기를 몇단계 업그레이드 시켰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다음에 나타날 미래의 범인들은 이제 자동소총을 넘어선 무언가를 가지고 나올테니까. 그럼 그 다음엔 어떻게 할건데. 전장에서나 쓰이는 기관총을 들고 다닐 것인가.

    실제현장에서 한참 부실한 무기로 두 명의 범인에 대항하던 200여명의 경찰은 모두 각자가 그들의 임무에 충실했다. 사건 이후 한 경관의 인터뷰대로 단 한 사람도 현장에서 도망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공포가 엄습한 순간 이를 피하지 않았고 이에 맞섰으며 그들과 싸웠다. 시민과 언론은 이 점을 높이샀으며, 지나가는 개 보듯했던 경찰들에 대한 그들의 대우는 확실히 달라졌다. 편지, 꽃, 플랜카드 등이 경찰서로 도착했고,  LA 경찰은 한 순간 영웅이 되었다. 이 영화는 아마도 일반 은행 강도 사건과 다른 범인들의 특이성도 한 몫 했겠지만, 자랑스런 LA 경찰을 보여주기 위한 또다른 애국주의 영화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경찰 홍보 영화로 지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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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로운 체제로서의 자본주의 SERI 연구에세이 14
복거일 지음 / 삼성경제연구소 / 2005년 1월
평점 :
품절


복거일은 시인이자  소설가이지만 실상 시인이나 소설가로서보다는 사회비평가로서의 업적과  활약이 더 두드러진다. 인문/사회과학에 대한 관심은 몇몇 지식인들을 거쳐 복거일에 닿게 해주었으며, 복거일은 내게 미묘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지식인이 되었다. 대개 개인에 따라서 지지, 동의, 공감하는 지식인과 이와 정반대되는 위치에 있는 지식인으로 나눌 수 있다면, 복거일은 그 어느쪽도 아니다. 굳이 분류하자면 정반대에 위치되는 지식인일 것인데, 그의 의견에는 반대할지라도 그의 문제제기는 들어볼 가치가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는 기존에 다른 지식인들이 주장하던 것을 반복해서 언급하지 않고, 항상 자기만의 독특한 시각을 보여준다. <정의로운 체제로서의 자본주의> 또한 자본주의 사회이면서도 자본주의에 대한 지식인들 사이의 비판의 목소리가 높은 점을 지적하며 자본주의를 적극 옹호하는 관점을 취한다.

  "근년에 우리 사회에선 자본주의에 대한 반감이 거센 물살이 되었다. 활기찬 자본주의 체제 덕분에 우리 사회가 지난 한 세대에 빠른 발전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런 사정은 반어적이지만, 우리는 그런 반어를 느긋한 마음으로 음미할 처지가 못 된다. 그러기엔 자본주의에 대한 반감은 우리의 안녕과 복지에 너무 큰 위험이다."

  이 책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자본주의를 적극 옹호하는 책이다. 복거일은 자본주의에 대한 반대자들의 가장 큰 비판은 자본주의가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이며, 이를 제대로 옹호해야만 자본주의의 정당성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대부분의 학자들은 정의로움과 도덕성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효율성을 언급하며 자본주의를 옹호했으며, 복거일은 이것만 가지고는 부족하기에 '정의로움'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이라 말한다.

  자본주의가 어떻게 정의로운가? 자본주의 이전에 "그것을 떠받치는 이념인 경제적 자유주의가 정의롭다는 것을" 밝혀야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복거일이 가장 먼저 하는 작업은 재산권의 정의로움을 밝히는 일이다. "자본주의가 사유재산 제도에 바탕을 두었고사유재산 제도는 재산권을 통해 세워지고 유지되므로, 재산권은 자본주의의 핵심이다. 만일 재산권이 정의롭지 못하다면, 다른 면들에서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자본주의는 정의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재산에 대한 권리는 기본적으로 재산의 형성에 대한 공헌에 바탕을" 두고 있고, 재산의 형성에 공헌한 이들이 공헌 정도에 따라 재산에 대한 권리를 갖는 것이 자연스럽고 합리적이며, 그것 말고 우리는 다른 어떤 기준도 생각해낼 수 없다는 것이다. 사회주의가 노동가치설에 근거를 두며, 노동으로부터 재산권이 나온다고 보는 관점을 취하는데, 사회주의의 대표주자인 마르크스의 경제이론이 논파되었으므로 남은 것은 "재산은 그것의 형성에 공헌한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옳다는 사회주의의 근본적 가정" 뿐 이라 한다. 그러나 이 또한 자본주의의 정당성을 더 잘 옹호해주고 있다 한다.

  복거일이 이 책에서 펼치는 자본주의 옹호론의 구도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자본주의의 기본은 사유재산권에 있으며, 사유재산권은 정당하고 자연스러우며, 고로 자본주의 또한 정당하다는 식이랄까. 그러나 중간에 좀 더 보충되고 언급되어야 할 것이 사유재산권의 정당성에서 자본주의의 정당성을 뽑아내는 부분이다. 이 책의 목차를 보면 알겠지만 복거일은 평등과 정의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다. 불과 30-40년 전의 롤스와 노직 등의 논쟁과 관련해서도 이를 살펴볼 수 있는데, 복거일은 노직의 롤스비판을 주요 근거로 삼고 있다. 하지만 거꾸로 롤스의 노직에 대한 반박을 그 근거로 삼는다면 복거일의 주장은 쉽게 논파당한다.

  평등에는 기회의 평등과 결과의 평등이 있으며, 기회의 평등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하지만, 결과의 평등에는 다수가 그것이 정당하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복거일은 기회의 평등도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고 말한다. 로버트 노직의 <무정부, 국가, 그리고 이상향>에서 "기회의 평등에 대한 권리"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했으며, 존재하는 것은 특정한 사물에 대한 특정한 사람들의 특정한 권리들 뿐이라는 것이고, 이것이 기회의 평등이 정당하다는 주장에 대한 강력한 반론이라는 것이다.

  잠시 이 책을 벗어나 롤스와 노직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면, 복거일은 책에서 노직의 입을 빌려 롤스를 비판하면서, 자유주의를 옹호하고, 자유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연결짓는다. 그러나 롤스 비판자인 노직의 눈에는 롤스의 이론이 당연히 문제가 있을 수 밖에 없다. 노직이 말하는 자유주의 사회에서는 개인이 이익을 증진하는 동안 국가나 타인으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않으며, 고로 자신이 증진한 이익을 타인에게 나눠줄 정당한 근거로 없고 궁극적으로 누진세와 같은 세금의 적용은 재산권에 대한 배타적 권리의 박탈인 동시에 세금에 해당하는 양만큼 국가가 개인에게 강제노동을 시킨 것이라 말한다.  

  하지만, 롤스에 따르면 개인의 이익 개선이라는 부분이 순전히 개인 활동일 수 없으며 궁극적으로 타자와 연관되어 있다. 후생경제학자 센은 <자유로서의 발전>이라는 책을 통해서 차등원리가 정당화 될 수 있는 근거를 언급한다. 일명 파레토의 법칙이라는 것인데 "자원의 가장 효율적인 분배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다른 사람의 효용을 감소시키지 않고서는 다른 어느 한 사람의 효용도 증가시킬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고로 복거일이 앞서 자본주의에서 노직의 입을 빌려 사유재산권의 정당성을 옹호한 부분은 롤스와 센에 의해 논파된다. 복거일은 나름대로 자본주의의 비판에 대해 자본주의에 정당성을 부여함으로써 적극 옹호해보려 했지만, 이는 이미 오래전 진행되었던 서양에서의 자유주의에 대한 논쟁 안에 다 들어있던 내용이라 더 언급하거나 옹호할 꺼리가 있는지 모르겠다. 롤스와 노직의 논쟁에 대해 공부 중인지라 더 깊이는 잘 모르겠지만 그저 한 학자의 입을 빌려 자신의 주장의 근거로 삼는데 그친다는 점에서 그다지 효력이 없다고 본다.

  이 책은 매우 얇지만 읽기는 어렵다. 가볍게 읽으려고 했다간 큰 코 다친다. 이 책의 목차 순서상 중간 부분에선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있었다. 잘 모르는 이들이 등장하는데다가 생소하지 않은 언어로 생소하지 않은 말들을 늘어놓는지라, 그치만 그 부분이 이 책의 핵심은 아니라는 판단에 꼼꼼히 읽지 않고 넘어갔다. 분량에 상관없이 어렵게 쓰여진 책에 대해 꼼꼼히 읽지도 않고 비판하는 것이 정당한지에 대해서는 자신없으나 이 책에서 복거일이 주장하고자 하는 핵심 논증에 대해서는 이해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나는 그 부분에 대해 주로 생각하고 언급하는 것으로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다.

  한 가지, 복거일은 이 얇은 책자 안에서도 꽤나 많은 인용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있는데, 그 인용구들이 전부 다 필요하진 않다는 생각이다. 짧게 짧게 끊어 인용하거나 복거일이 본인의 입을 통해 간단히 언급하고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을 책의 난이도만 높아지게 길게 늘어뜨린건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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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1-24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다소 간명하게 생각합니다.
사람이 근본적으로 이기적이므로 경제적 문제에 평등은 본성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사회주의의 평등은 역설적으로 상대적으로 못 가진 계층의 이기심의 발로이지요..
인간의 이기심을 국가 제도로 억제하면 궁극적으로 "북한"이 됩니다.


드팀전 2007-01-24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거일은 흔히들 자유주의의 전사로 이야기하지요.이 책을 보진 않았지만 그 도상에 놓여 있는 것 같네요...그리고 한사님의 평등론에 대한 간명한 생각에는 절대 동의할수 없습니다..푸웃.그러고보니 많이 보던 어떤님의 선악론과 유사하네요.그냥 '잘난척 하지말고 제 살길 잘 찾아라'가 늘 그의 결론이었는데..

마늘빵 2007-01-25 0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님 / 음 전 아직 확실한 입장이나 시각이 잡히진 않았지만, 간단히 볼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의 강점도 있지만 그 폐해가 만만치 않기 때문에 계속해서 논쟁이 되는 것이겠고, 그 와중에 폐해를 수정할만한 사회주의적 요소가 있겠죠. 사회주의적 요소가 꼭 아니어도요. 좀 더 공부해볼 생각입니다.
드팀전님 / 네 복거일의 책을 계속 보고 있는데, 논리는 같죠. 자유주의를 너무나 사랑하고, 그 관점에서 보는 사안들을 바라보죠. 이번에 <현명하게 세속적인 삶>을 구입했습니다. 이것도 함 봐야겠어요.
 
정의로운 체제로서의 자본주의 SERI 연구에세이 14
복거일 지음 / 삼성경제연구소 / 2005년 1월
품절


따라서 자본주의의 높은 효율만을 내세우는 주장은 자본주의를 제대로 변호할 수 없다. 자본주의가 정의롭다는 점을 주장할 수 없으면, 그래서 정의를 내세우는 자본주의의 반대자들에게 도덕적 고지를 내주면, 어떤 다른 가치들을 내세워도, 자본주의를 변호하는 주장은 밀릴 수 밖에 없다. 안타깝게도, 자본주의를 변호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바로 그 길을 골랐다. -12쪽

자본주의와 그것을 떠받치는 이념인 경제적 자유주의가 정의롭다는 것은 직관적으로 또렷하지 않고 길고 어려운 설명이 따라야 비로소 밝혀질 수 있다. 반면에, 평등을 내세우는 주장들은 직관적으로 옳게 여겨진다. 자본주의의 반대자들은 자본주의의 변호자들보다 늘 목청이 높았고 훨씬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렸다는 사정이 이상하지 않다.
사정이 그러하므로, 자본주의가 효율적일 뿐 아니라 정의로운 까닭을 밝히는 일은 중요하고 시급하다. 그렇게 한 뒤에야 우리는 자본주의를 적대적 세력으로부터 지킬 수 있고, "제때를 만나 태어나기 위해 베들레헴을 향해 비척거리는 사나운 짐승"이 이땅에 태어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터이다. -13쪽

자본주의가 정의롭다는 사실은 그것이 자연스럽다는 사실과 깊은 관련이 있다. 정의가 사람 마음에 자연스러운 무엇으로 다가오리라는 생각은 합리적이다. 자연스러움이 정의의 핵심적 특질들 가운데 하나임을 명확하게 증명하기는 어려울지 모르지만, 자연스럽지 않은 무엇이 정의로운 경우는 상상하기 어렵다. 정의감이 진화의 산물이므로, 그런 사정은 필연적이다. -14쪽

자본주의가 정의롭다는 것을 밝히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재산권이 본질적으로 정의롭다는 점을 밝혀야 한다. 자본주의가 사유재산 제도에 바탕을 두었고 사유재산 제도는 재산권을 통해 세워지고 유지되므로, 재산권은 자본주의의 핵심이다. 만일 재산권이 정의롭지 못하다면, 다른 면들에서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자본주의는 정의로울 수 없다. -22쪽

최종결과 원칙들을 따르는 사람들이 정의롭다고 여기는 구조적 원칙들 가운데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것은 물론 평등이다. 그래서 그들은 평등한 분배가 가장 정의로운 분배라고 여긴다. 자연히, 자본주의를 반대하거나 비판하는 사람들은 흔히 자본주의의 불평등을 결정적 결점으로 꼽는다. 그리고 구성원들 사이의 평등을 보다 잘 이룬다는 점을 들어 대안적 체제들을 내세운다.
그러나 평등은 좀처럼 모습을 또렷이 드러내지 않는 개념이다. 그래서 그것은 정의하기가 무척 어렵고 쓰는 사람에 따라서 다른 것들을 뜻한다.
그런 혼란을 줄이려면, 먼저 평등을 기술적으로 쓰는 경우와 당위적으로 쓰는 경우를 구별하는 것이 필요하다. 즉 사람들의 특질이 평등하다는 얘기와 사람들은 평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얘기를 구별해야 한다. -53쪽

로버트 노직은 <무정부, 국가, 그리고 이상향>에서 "기회의 평등에 대한 권리"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존재하는 것은 특정한 사물들에 대한 특정한 사람들의 특정한 권리들 뿐이라는 얘기다. 이것은 기회의 평등의 정당성에 대한 강력한 반론이다.

"모든 사람들이 기회, 생명 등등과 같은 것들에 대한 권리를 가졌다고 말하는 것과 이 권리를 강제하는 것에 대한 주요 반론은 이 '권리들'이 사물들과 물질들과 행동들의 하부구조를 필요로 하며 다른 사람들이 이것들에 대한 권리들과 자격들을 지녔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것에 대한 권리의 달성에 다른 사람들의 권리들과 자격들을 지닌 사물들과 행위들의 어떤 이용들이 필요하면, 누구도 그런 권리를 지니지 못한다. 특정한 사물들(저 연필, 그들의 몸 등등)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권리들과 자격들 그리고 그들이 이 권리들과 자격들을 행사하기 위해 하는 선택은 어떤 개인의 외부 환경과 그가 이용할 수 있는 수단을 확정한다. [...] 특정한 권리들의 이 하부구조와 부딪치는 권리들은 존재할 수 없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어떤 깔끔하게 다듬어진 권리도 이 하부구조와 양립 불가 관계를 피할 수 없으므로, 그런 권리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물들에 대한 특정한 권리들이 권리들의 공간을 채워서 일반적 권리들이 어떤 실질적 상태로 존재할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노직, 1974) -55-56쪽

반면에, 대안적 체제들에선, 공산주의든 국가사회주의든, 에드워드 윌슨이 "평등의 이념과 야만적 강제의 편리한 동거"라 부른 질서가 탄생했고, 그 질서는 사람들을 잡아먹는 괴물임이 드러났다. 그러한 질서 속에서, 평등의 이념을 실현하려면 강제적 소득 이전이 필요하고, 강제적 소득 이전을 위해선 강력한 국가 권력이 필요하고, 그런 권력은 소수 정예 집단에 집중되고, 그렇게 소수에 집중된 권력은 필연적으로 부패하므로, 결국 권력을 쥔 정예 집단만 잘 살고 대부분의 시민들은 경제적 빈곤과 정치적 억압을 함께 맞는다.-66쪽

대안 공동체들은 대안이 될 수 없다. 잘하면, 복잡하고 경쟁이 심한 현대 사회에서 지친 사람들이 잠시 머물면서 몸과 마음을 추스르는 피난처 노릇은 할 수 있을 터이다. 그런 피난처가 사소한 것은 결코 아니지만, 대안이라고까지 하기는 어렵다.
보다 일반적으로, 지금 우리 사회에서 '대안'이란 말은 너무 가볍게 쓰인다. 현존하는 관행, 질서, 풍습, 규칙, 법, 기구, 공동체 또는 사회에 대한 '대안'을 선뜻 내놓는 사람들은 현존하는 것들이 많은 대안들 가운데서 가장 나은 것들로 판명되어 사회적 진화를 통해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게다가 '대안'이라고 제시된 것들은 거의 모두 이미 오래전에 시험되어 버려진 것들이다. -130-1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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