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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가 에미넴에게 말을 걸다 - 대화의 역사
스티븐 밀러 지음, 진성록 옮김 / 부글북스 / 2006년 12월
평점 :
절판
얼마전 노무현 대통령이 언론을 통해 주머니에 손넣고 구부정하게 단상에 서서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에 대한 억울함과 울분, 그리고 지금껏 하던대로 소신을 지켜나가겠다는 메세지를 전한 바 있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이 장면과 기사가 나간 뒤 다음 날부터 국민을 상대로 발언하는 자세하며, 발언 내용의 거침과 발언의 강도 등을 문제삼는 비난의 댓글들이 줄을 이었다. 항간에는 그가 예정되었던 연설 이외의 발언을 한 것은 노무현 대통령만의 특유의 솔직함과 과단성으로 이해해야한다는 그를 두둔(?)하는 소리도 들렸으나 극히 소수에 불과했고, 대통령으로서의 태도와 발언내용이 부적합하다는 것이 대부분 사람들의 의견이라 봐야겠다. 이전에도 노무현 대통령은 '국민과의 대화'를 시도했으나 '대화'는 '호소' 내지는 '변론'으로 바뀐 적이 있다. 많은 이들이 노무현 대통령이 대화에 미숙하다고 생각한다. 도대체 대화가 뭐길래.
대화란 무엇인가?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는 대화란 "말을 통한 정보, 아이디어 등의 비공식적인 교환 : 그것을 할 수 있는 능력 혹은 숙달" 이라 정의되어있고, 대화는 또 한 사회적 상호작용으로서, "다른 사람과 사귀거나 다른 사람을 다루는 행위"를 의미한다. 또한 "18세기에는 대화가 예술과 문학, 과학, 인간의 조건 등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지는 半 공식적인 사교모임을 뜻하기도 했다." 대화는 영어로 conversation으로 talk 와는 구별된다. 새뮤얼 존슨이 언젠가 친구네 집에서 '아주 재미있는 일행'과 저녁식사를 했다고 하기에 저자는 훌륭한 'conversation'이 오갔느냐 했더니 그는 "전혀, talk는 충분히 했지만 conversation 은 전혀 없었다." 고 대답했다. 이는 우리가 평소 누군가와 말을 할 때 말을 아무리 많이 하더라도 그것이 대화가 아닌 단순한 토크의 수준에 머무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대화에는 지적인 아이디어의 교환이 포함되어야 한다. 하지만 대화는 목적을 갖지 않는 반면, 토크는 목적을 갖는다. '지적인 아이디어의 교환'이라는 것은 목적이 아닌 말의 주고 받음에서 형성되는, 혹은 말의 오감에 포함되는 주제를 가리키는 것이고, 이는 목적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애초 내가 무엇인가를 상대에게서 얻어내려거나, 발화행위를 통해 다른 실천행위를 이끌어내려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제목은 '소크라테스가 에미넴에게 말을 걸다' 이지만 부제는 '대화의 역사'이다. 저자 스티븐 밀러는 대화에 대한 꾸준한 관심을 가지고 대화에 대해 연구를 하고 있으며, 이 책은 그의 오랜 연구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화는 사람들의 두뇌작용을 활발하게 해주고, 사고의 범위와 깊이를 확장시켜준다. 사람들은 대화에 목말라있지만 사실상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면서 대화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때의 대화를 앞서 언급한 토크의 수준이 아니라 컨버세이션의 수준으로 봤을 때 과연 얼마나 많은 이들이 대화를 하며 살아갈까. 대개의 직장인들이라면 아침에 눈을 뜨고 화장실을 들렀다 밥을 먹고 부랴부랴 지각하지 않으려 버스나 지하철로 몸을 내던지고, 가까스로 직장에 도착해 맨먼저 컴퓨터를 켜고, 그날의 업무를 확인하고 온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를 수행한다. 그리고 점심시간이 되면 밥을 먹고, 다시 또 돌아와 컴퓨터 앞에 앉고, 야근을 하고, 집에 돌아와 잠자리에 든다. 그리고 다시 또 처음부터. 이러한 생활 패턴 속에서 대화를 찾아 볼 수 있을까. 직장에서 이루어지는 업무상의 회의를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는 대화에 포함시켜선 안될 것 같다. 그것은 목적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아침에 눈을 뜨고 밥먹고 학교가서 수업을 듣고 점심밥을 먹고 수업듣고 집에 돌아와 학원에 가서 또 수업듣고 집에 돌아와 컴퓨터를 만지작 거리거나 티비를 보다가 잠이든다. 다시 또 맨처음부터 반복. 애들은 참 말을 많이 한다. 수업시간이고 쉬는시간이고 하루 종일 떠들어댄다. 말을 하다 지칠 법도 한데 어디서 그런 에너지가 나오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점심시간 이전에 배가 고프다고 난리를 치는 것은 아침부터 내내 수다를 떨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학생들이 말을 많이 하지만 대화는 없다. 동방신기의 믹키유천이 오늘 헤어스타일을 바꿨대, 시아준수랑 미키유천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며, 나 어제 지나가다 연예인 봤다, 너 방학에 학원 어디 다닐거야, 기타 등등 이런 것들을 대화라고 할 수 있을까. 집에서 이루어지는 상호간의 말을 주고받음도 마찬가지다. 엄마 나 학교에서 뭐 어쩌고저쩌고, 밥 줘, 아 왜 반찬이 어제랑 똑같아, 뭐 차려주면 고맙게 먹을 것이지, 투덜투덜 궁시렁궁시렁. 말의 주고받음은 있을지 몰라도 이런 것을 대화라고 할 수는 없을 터다.
스티븐 밀러는 이 책에서 고대 그리스 소크라테스의 대화술에서부터 현대의 에미넴에 이르기까지 대화의 역사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 시대의 대화와 중세의 대화, 또 18,19세기 근대의 대화, 현대의 대화에 대해서. 대화가 서로에게 권장되었고, 찬양받았던 시대가 있는가 하면, 대화는 그저 시간 있는 돈 많은 녀석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언어의 유희를 즐기는 것으로 취급받았던 시대도 있다. 또 엄밀히 어떤 시대가 그렇다고 단정짓기보다는 그 시대를 살았던 철학자마다 각기 대화를 다른 시각으로 바라본 관점의 차이도 존재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틀어서 영국 철학자 마이클 오크숏과 데이비드 흄, 그리고 새뮤얼 존슨을 자주 출연시키며 대화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엿보고 있다. 책을 읽을 때 미리 이것을 알았더라면 그들이 출연할때마다 주의깊게 봤겠지만, 아무것도 모른 상태로 그저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기 때문에 이들이 이 책에서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다는 것을 안 것은 이미 중반쯤 지났을 때였다. 책을 읽다 좀 더 눈치빠른 독자들은 초반에 알아챌지도 모르겠다. 만일 그렇다면 이 책을 읽는데 좀더 도움이 될 것이다.
고대와 중세, 근대의 이야기는 사실 조금 따분한 면이 없지 않다. 현대를 살아가는 나와는 많이 떨어진 옛날 이야기이고, 그 시대의 생활습관이나 풍토 등 문화전반에 관한 기본적 이해가 없다면 글이 재밌게 읽히지는 않는다. 하지만 현대로 넘어와 앞장에서 지식이 풍부하고 당대에 이름을 떨쳤던 학자들을 출연시킨 것과는 달리 에미넴이라는 저속하고 사건만 일으키는 문제아 래퍼를 등장시킴으로서 파격적 캐스팅을 감행한다. 지금껏 저자는 소로, 루소, 흄, 오크숏, 존슨, 홉스, 푸코 등의 철학자들을 출연시키며 그들을 대화 찬양자와 반대자의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오크숏, 존슨, 흄의 경우에는 대화 찬양자에, 루소는 대화반대자에, 소로의 경우는 어느 곳에도 관여하지 않는 자로 나오지만 반대자쪽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식의 이분법적 양분구도는 위험하지만 대화의 역사에 있어 그들의 찬성과 반대의 시각은 딱딱한 이 책에 한층 재미를 부여한다.
에미넴의 경우는 저자의 구분에 따르면 반체제인사에 속하게 되고, 대화의 적으로 분류된다. 그는 랩에서나 일상생활에서나 fuck 을 연발하고, 사람들을 조롱하며 웃음거리로 만들고, 대놓고 욕을 한다. 사람들이 에미넴을 그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존재로 보든 아니면 소름끼치게 하는 존재로 여기든, 랩은 대화에 적대적인 표현의 형태이다. "래퍼들은 대화의 유일한 길이 가급적이면 외설적인 언어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감정을 발산하는 것이라고 암시한다. 모든 래퍼들이 다 화난 래퍼들은 아니다. 그러나 랩 뮤직은 주로 화를 표현하는 음악이다. 노래 가사에 저소간 언어를 많이 사용하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래퍼 스누피 독은 "그것은 자기 표현이다. 탈툴에 필요한 모든 감정을 온전히 드러낼 뿐이다"라고 대답했다. 래퍼들이 사회에 위협적인 존재는 아니라 할지라도 랩뮤직의 성장은 대화의 환경에는 악영향을 미친다" 래퍼들은 자신의 명예를 중시하고, 모욕당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들은 대체로 타인을 불신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이러한 기본적 태도는 사교성을 훼손하게 된다. 대화의 기본은 사교성이다. 두 사람 이상이 마주 앉아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 거리낌없이 말을 주고 받음으로써 형성된다. 랩은 그런 면에서 비사교적이며 대화의 적이라 말 할 수 있다. 저자 스티븐 밀러가 에미넴을 여기에 끌어들인 것은 그가 랩을 대표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현대에는 대화 대용품과 대화 회피 장비들이 널려있다고 말하며, 이것들이 진정한 대화를 방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말한다. 이를 통해 저자는 현대를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시대로 규정했음을 알 수 있다. 대화 대용품이란 것은 티비 토크쇼를 지칭한다. 우리는 누군가와 마주 앉아 대화를 주고 받기 보다는 토크쇼의 출연자들의 시시껄렁한 말의 주고받음을 통해 자신의 대화 욕구를 해소하고, 그것으로 대화의 만족감을 느낀다. 그러나 '토크쇼'는 '토크쇼'라는 단어에서도 볼 수 있듯, 단순한 농담따먹기에 지나지 않는 토크에 불과한 한 시간의 수다이다. 대화 회피 장비들은 쉽게 떠올릴 수 있다. 핸드폰, 티비, 비디오, 플레이스테이션, PMP, 아이팟 엠피쓰리 등이 이에 포함된다. 많은 가정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며, 사실상 가족들과 떨어져있는 시간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잠깐의 집에 있는 동안에도 우리는 그들과 대화를 나누기 보다 방구석에 들어가 영화를 보거나, 핸드폰 문자로 친구와 대화(?)를 주고 받거나, 컴퓨터 인터넷의 세계에서 돌아다니다가 잠이 든다. 지하철에서도 버스에서도 각자 서로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거나 PMP를 통해 영화나 티비 프로그램을 본다. 그 어느 곳에서도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대화의 이루어짐을 바라는 것은 그저 희망에 불과하며, 우리는 최소한 타인에 대한 관심에서조차 떠나있다고 봐야한다. 대화는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동등한 위치에서 아이디어를 주고 받는 것이지만 기본적으로 그 이전에 타인에 대한 관심이 전제되어있다. 현대 사회는 이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나 조차도 스티븐 밀러가 말하는 대화 회피 장비에 빠져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대화의 적이다.
그러나 한편 다르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대화 회피 장비를 즐기고 말의 횟수가 줄어든 것은 사실이지만 난 여전히 타인에 대해 관심이 있고, 타인과 대화(아이디어의 교환)를 주고받는 것이 즐겁다. 그래서 새로운 사람들을 찾아다니고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대화를 통해 나를 돌아본다. 인터넷 또한 어쩌면 대화의 회피장비라기보다는 대화의 다른 방식인지도 모르겠다. 인터넷 공간에서 글을 쓰고 또 다른 이들의 글을 보고, 댓글의 주고받음을 대화라고 본다면 잘못일까. 이를 대화 대용품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티비 토크쇼나 오락프로그램에서 연예인들의 말의 주고받음으로 대리만족하는 그것과는 엄밀히 다르지 않나 생각해본다. 나는 대화 회피 장비를 즐기지만 대화의 적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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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부글에서 제목 하나는 기가막히게 지었다. 원제는 이것이 아니고, Conversation: A History of A Declining Art 인데 '소크라테스가 에미넴에게 말을 걸다'라는 제목은 순전히 출판사 혹은 번역자의 생각이다. 자칫 직역하여 '대화의 역사'라고 찍혔다면, 아마도 이 책은 관심도 받지 못하고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제목이 원제대로 나왔을 때에도 내가 이 책에 관심을 갖고 구입했을지는 나도 의문이다. '소크라테스가 에미넴에게 말을 걸다'라는 제목은 대화의 역사를 암시함과 동시에, 우리에게 익숙한 소크라테스와 친숙한 에미넴을 등장시킴으로써 다양한 독자를 확보할 수 있다.
책 맨 뒤에 씌여진 이미 저자보다 앞서 우리의 사랑을 받는 알랭 드 보통과 알베르토 망구엘의 짧은 서평은 또다른 재미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