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염된 언어 - 국어의 변두리를 담은 몇 개의 풍경화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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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두번째 읽는다. 그리고 두번째 리뷰를 쓴다. 아마도 몇년 뒤에 나는 또 이 책을 읽을 것이고, 또다시 리뷰를 쓸 지도 모른다. 같은 책을 두번 읽고 두번 리뷰를 쓰는 이유는, 처음 읽었을 때의 느낌과 두번째 읽었을 때의 느낌이 분명히 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고종석을 좋아하는 것은 변함이 없으며, 그가 우리말을 잘 구사하는 몇몇 작가 반열에 든다는 데에도 이견이 없으며, 그의 글을 읽고 있으면 내 머리 속에서 많은 생각들이 왔다리갔다리 하면서 지적욕구를 불러일으킨다는 것도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그럼 무엇이 바뀌었나.

  처음 이 책을 읽은 이유는 단지 이 책이 고종석이 쓴 책이기 때문이었지만 두번째 이 책을 읽은 이유는 이 책이 복거일에 의해 촉발된 영어공용화론 논쟁과 관련해 많은 점들을 시사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98년엔가 시작된 영어공용화 논쟁은 많은 창작물을 생산했다. 복거일은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를 통해 자신의 의견을 구체적으로 알려왔고, 이에 대한 비판서들로서 김영명의 <나는 고발한다>, 네명의 필자에 의해 쓰여진 르뽀 형식의 <한국어가 사라진다면>, 영어교육학자 한학성의 <영어공용어화 과연 가능한가>, 조동일의 <영어공용화를 하자는 망상> 등이 약간의 간격을 두고 나왔다. 이후 복거일은 다시한번 삼성경제연구소 문고판 시리즈의 하나로서 <영어를 공용어로 삼자>를 통해 다시한번 자신의 생각을 확고히 밝혔다.

  이 논쟁은 여기 소개한 책들 뿐 아니라 수많은 신문과 잡지의 칼럼을 통해서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내노라하는 우리나라의 지식인들의 참여 속에서 많은 관심을 받았다. 고종석은 그 당시의 논쟁의 중심에 있지는 않았지만 <감염된 언어>를 통해 영어공용화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영어공용화 논쟁을 염두에 두고서, 복거일을 옹호하거나 그의 비판자들을 비판하기 위한 책이라는 느낌보다는 부제로 달고 있듯 '국어의 변두리를 담은 몇 개의 풍경화'로 보는 것이 맞다 싶다. 그래서일까. 고종석은 복거일을 옹호하며 영어공용화론에도 찬성의 입장을 내세우고 있지만 그 누구도 고종석을 비판하지는 않았다. 심지어 복거일은 나중에 낸 문고판 책 <영어를 공용어로 삼자>에서는 그의 제자를 자청하는 고종석의 <감염된 언어>에서 상당부분을 인용하며 근거로 삼고 있다.

  그러나 고종석의 생각은 복거일이 자신의 두 책에서 이야기한 바의 근거와는 좀 다르게 영어공용화를 옹호한다. 복거일의 주된 논리는 경제성이다. <영어를 공용어로 삼자>라는 책을 통해 그는 망 이론을 설명한다. 수도관, 전기관, 가스배관 등의 망으로 연결되어있듯이 언어 또한 망 역할을 하는 것이며, "비록 망의 가치가 꼭 사용자 수의 제곱에 비례해서 늘어나지는 않더라도, 그것이 사용자 수보다 훨씬 빠르게 늘어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말하며 이어서 "아주 적은 사람들만이 쓸 때, 한 언어의 가치는 그리 크지 않다. 그러나 점점 많은 사람들이 쓰게 되면서, 그것의 가치는 폭발적으로 늘어난다."고 한다. 고로 지금 추세는 다수의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고, 세계를 주름잡고 있는 영어가 그 망의 중심에 있으니 영어공용화를 통해 우리는 영어를 자연스럽게 배우고 세계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고종석의 논증방식은 좀 다르다. 고종석은 경제성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그의 근거의 중심에는 자유주의, 탈민족주의가 있다. 언어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여전히 계속 한 언어와 한 언어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을 것이며, 다른 말로 언어는 감염된다. "인류 문화의 역사는 감염의 역사이고, 그 문화를 실어나르는 언어의 역사도 감염의 역사다. 언어는 다른 세계와 만나면서 풍부해지고 생명력을 얻는다. 모든 언어는 혼혈이며, 순수한 언어란 없다. 갇혀 있는 언어는 이미 죽은 언어이다." 라고 말한다. 고로 우리 언어가 외래 언어에 의해 변화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영어와 한국어의 충돌과 변화과정을 이상하게 여길 것이 없다는 것이다. 과거 우리나라의 언어, 조선시대의 어떤 사람이 사용했던 말과, 또 그 이전의 신라시대의 사람의 말과,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말은 모두 같을까? 아니란 말이다. 분명 우리는 신라와 조선과 대한민국을 동일시하고 있지만, 각기 나라에서 사용되었던, 각 시대에서 사용되었던 '우리말'은 지금의 '우리말'과는 다르다. 중국으로부터 한자의 영향을 받았듯, 일본에 의해 일본어의 영향을 받았듯, 지금의 우리말은 순수한 우리말이 아니다. 이미 많은 변화와 감염의 역사를 거쳐왔으니 앞으로 다른 언어에 의해 변화되거나 감염되어도 이상할 것은 없다.

  "한글이 한자와 싸워온 과정은 그대로 민주주의가 봉건주의와 싸워온 과정이다. 우리는 한글이 우리 글이어서 써야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사용이 민주주의적 가치에 부합하기 때문에 써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한자를 배우지 않을 수는 없다. 지난 2천년 동안 한자를 매개로 해서 무수한 중국어 단어, 일본어 단어들이 한국어에 차용됐고, 그렇게 차용된 한자어들은 당연히 한자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어에 수입된 한자는 중국어나 일본어에서와는 다른 독자적인 한국 음을 지니고 있고, 그래서 중국어나 일본어에서 차용된 한자어들은 중국어도 일본어도 아닌 한국어이다. " (P216)

  민족, 민족 하지만 극단적으로 민족이 사라진다고 해도 그는 이에 대해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민족이 사라진다고 우리가 정체성을 잃는 것은 아니며,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을지는 몰라도 세계시민으로서의 새로운 정체성을 얻게 된다고 한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 이 말은 우리 모두가 하나의 개인이라는 말과 같다. 민족, 나라에 얽매이지 말고, 민족어, 나라어에 얽매이지 말고 하나의 개인으로서 일어서자는 것이다.

  고종석은 분명 복거일의 근거와는 다르지만 영어공용화를 옹호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의견은 달리 반박하기가 쉽지 않은 듯 보인다. 심정적으로 나는 영어공용화에 반대한다. 그것은 내가 영어를 못해서일까, 아니면 우리 민족과 나라를 걱정해서일까, 한국어를 사랑해서일까, 아니면 영어공용화의 필요성과 그 효과가 그다지 적절하지 않고, 크지 않다고 보기 때문일까. 내가 고종석을 좋아하는 것과는 별개로 나는 그의 영어공용화론에 대한 찬성만큼은 동조해줄 수가 없다. 그의 논쟁에 대한 논거는 매우 깔끔하고 신선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장에 쉽게 고개를 끄덕일 수 없는 것은 왜일까. 어쩌면 그것은 내가 '지금의 한국어'를 구사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가 말하고 쓰고 있는 언어에 대한 애착심 때문에?

  그러나. 이 점을 감안한다고 해도 한가지 지적하고 싶은건, 언어가 감염된다면 그냥 그대로 내버려둘 일이지 인위적으로 '영어공용화'라는 정책을 통해 앞당길 일은 아니란 생각이다. 그것이 영어든, 프랑스어든, 인도어든, 중국어든, 한국어와 다른 외래어는 앞으로도 계속 영향을 주고 받을테고, 언젠가는 또 지금 이 땅에 살고 있는 미래의 누군가와 나는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서로의 언어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를 인정한다고 해도, 영어공용화는 강요에 불과하다. 고종석의 말대로라면 이대로 내버려두는 것이 오히려 더 자연스럽다. 감염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지 억지로 주사기에 약물을 투입해 이루어져서는 안된다. "외래어가 됐든 번역투가 됐든, 그것들을 인위적으로 몰아내 한국어를 순화하겠다는 충동은 근본적으로 전체주의적이라는 점이 강조돼야 한다." 인위적으로 몰아내는 것이 전체주의적인 만큼 인위적으로 사용토록 하는 것도 전체주의적임을 말하고 싶다.

  고종석은 영어공용화에 대해 적극 찬성은 아닐지도 모른다. 이 책의 어딘가에서 그는 복거일과 박이문 사이에서 갈등을 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박이문은 이 논쟁에 있어 복거일의 민족주의 비판을 적극 지지했지만, 영어공용화에 대해선 지지를 유보한다. 중세유럽 지식인이 라틴어를 공용어로 채택한 것과 지금 우리네의 사정은 많이 다르며, 그것이 바람직하다고 해도 몇세기 후 영어가 널리 자연스럽게 보급된 상황에서나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는 또한 언어가 도구가 아니라고 말했다. 고로 내가 이 앞 문단에서 고종석을 향해 비판의 목소리를 낸 것은 허수아비 논증의 오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이는 또한 고종석이 영어공용화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핑계를 둘러대본다. 그는 아직도 박이문과 복거일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을까.

 

* 처음으로 중복 리뷰를 올리게 됐다. '중복리뷰'에 대해 안좋은 시각을 가진 분들이 많다는 것 알고 있지만, 나름대로 첫 독서와 두번째 독서의 느낌과 생각이 많이 다르므로 양해를 구한다. 단지 땡스투 몇십원 더 받자고 이러는 것이 아님을 알아주시기 바란다. 더불어 전의 리뷰를 지우지 못하는 것은, 그때 이 책을 읽은 나에 대한 예의라고 해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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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2-07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가지 주제에 대해 파고드는 독서, 부러워요..

마늘빵 2006-12-07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한번 필 받으면 이렇습니다. 이번에 한꺼번에 지른 책들도 그런 경향이 있죠.

혼자놀기 2006-12-08 0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기 색깔 넣는 것 어떻게 하면 가능하나요? 알라딘은 바로 붙이기가 안되어서 하나하나 다 타자로 쳐서 기입을 하는데 너무 힘드네요..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ㅡㅡ;

마늘빵 2006-12-08 0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혼자놀기님 / 그냥 리뷰쓰는 란에 쓰고 위에 색깔 지정하는거 있어요. 그거 아이콘 클릭하고 색지정하면 되는건데.

짱꿀라 2006-12-08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아프락사스님의 리뷰 정말 굿입니다. 저도 언제나 이런 글을 써보려나.......

마늘빵 2006-12-08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타님 / 참 별거 아닌데 그렇게 칭찬을 해주시면 어찌하옵니까. 다시 읽어도 좋은 책입니다. 나중에 다시 보면 또 느낌이 다르겠죠.

stella.K 2006-12-08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전 고종석의 글 읽고 반했지요. 그리고 한번도 읽지 못했습니다. 한 책을 여러번 읽는군요. 좋은 책은 거듭해서 읽을 필요가 있죠. 좋은 독서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중복리뷰에 관해 말이 많다구요? 내가 좋아 나의 공간에 리뷰를 쓰겠다는데 그게 한번이면 어떻고 두번, 세번이면 어떻단 말인가요? 뭔가 문제인지...
글구 아프님 서재지붕 근사하네요. 딱 내 스타일이네...=3=3=3

2006-12-09 1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늘빵 2006-12-09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숨은님 / 전 고종석 글은 다 좋더라구요. 영어교육 어쩌구 하는 책이 있는데 그건 빼고 나머지 책들은 모두 모아두려고요. 일찌감치 절판된건 어쩔 수 엄꾸. 그냥 머 중복리뷰를 싫어하시는 분들이 있는거 같아서요. 저 책은 리뷰가 몇개 없거든요. 그래서 두개인게 또 티가 나죠. 교보군요. 흠. 근데 이번에 왕창 질러서, 일단 가서 머 있나 구경해봐야겠어요. 감사해요. ^^

얼음장수 2007-02-25 0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달째 사무실 구석탱이 서랍에서 먼지 맞고 있는 책입니다. 조만간 읽어야겠어요.
 
안락사를 합법화해야 할까? 민음 바칼로레아 34
미셸 오트쿠베르튀르 지음, 김성희 옮김, 김현철 감수 / 민음인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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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분만에 읽는 안락사 논쟁이란 말은 절대 광고멘트가 아니다.   정말 30분만에 읽었다. 아침 지하철 출근길에. 이 책은 민음 바칼로레아  시리즈 중 하나이다. 바칼로레아는 이제 많은 이들이 알고 있듯 프랑스의 대학입학 논술시험을 지칭한다. 프랑스의 대학입학시험은 우리와 같은 수능체제가 아니라 논술시험이 판가름하는데 그 문제란 것도 우리처럼 옛날의 본고사의 부활 유형이 아니라 아주 짧고 간단한 질문을 던져주고 자유롭게 알아서 서술하는 식이다. 우리네 논술시험은 사실상 제한 조건들이 많기 때문에 답안들이 아무리 잘 써도 그 나물에 그 밥일 수 밖에 없다. 대학에서는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답안을 뽑겠다고 하지만, 언젠가 한국일보에 나왔던 기억나지 않는 필자의 의견에 따라 정해진 답안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구조이다.

  시험문제가 어떻든 간에 사회적 논쟁거리가 되는 주제들을 짧은 시간안에 숙지할 필요가 생겼고, 휴머니스트의 야심작 <서양의 고전을 읽는다> <동양의 고전을 읽는다> <한국의 고전을 읽는다> <세계의 교양을 읽는다> 등등의 시리즈나, 최근 나온 <바칼로레아 철학 논술 수험서> 등등의 책들은 모두 이런 목적으로 선보인 작품들이다. 논술 붐에 좀 팔아보자, 고 나온 책들이지만 밉지는 않다. 상업적 목적 뿐 아니라 해당 출판사의 이름을 걸고 나온 내용 알찬 책들이 다수이기 때문이다.

  민음 바칼로레아 시리즈는 현재 50권 정도가 나온 걸로 알고 있다. 이 시리즈는 프랑스 대학입학시험용 전문교재로 프랑스의 검증된 과학자가 쓰고, 국내 과학자들의 감수를 거쳐 번역되었다. 가설, 관찰, 실험, 분석, 검증과정을 따라가며 논쟁의 중심에 있는 주제들이 왜 논란거리가 되는지를 안내해준다. <안락사를 합법화해야 할까> 는 안락사 문제에 대한 질문을 시작으로 이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이유, 합법화한 나라의 예, 합법화 했을 때의 예상되는 결과, 그리고 논란의 중심에 있는 인간의 존엄성 문제에 대해 심도있게 파고든다. 찬성과 반대에 대한 명확한 근거를 따로따로 안내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 짧은 책 그 자체를 하나의 논술 답안으로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맨 뒤에 소개되어있는 '더 읽어 볼 책들'은 안락사 논쟁과 관련해 더 깊이있는 지식을 원하는 이들을 위한 것이다. 프랑스의 논술교재를 번역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이에 그치지 않고 우리네 실정에 맞게 손보고 신경쓴 흔적이 보인다. '더 읽어 볼 책들' 뒤에 나와있는 '논술, 구술 기출 문제'는 대학입학 논술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들을 겨냥하고 있다. 이 책을 읽어본 뒤에 자신만의 견해를 한번 서술해보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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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6-12-08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연 우리나라에서도 안락사라는 것을 인정할까요. 네덜란드는 벌써 법적으로 법률제정을 하고 시행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저도 환자와 식구의 고통을 감안해 환자가 안락사를 수락할 경우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을 하는데......
근데 여러가지의 문제도 또한 있나 봅니다. 저는 잘은 모르지만요

마늘빵 2006-12-08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는 아직 아니지만, 글쎄요, 유럽국가나 기타 다른 선진국가들과 같이 사회보장제도가 마련되어있고, 모든 돈과 기술을 투입해도 안되는 경우 안락사를 시키고 있으니, 일단은 환자에 대한 모든 조치를 취해볼 만한 사회적 여건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이 들면 그때 환자와 가족들도 손을 놓을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나라는 아직 먼거 같아요.
 
감염된 언어 - 국어의 변두리를 담은 몇 개의 풍경화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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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국어의 혼탁을 걱정하지 않는 이유는 내가 불순함의 옹호자이기 때문이다. 불순함을 옹호한다는 것은 전체주의나 집단주의의 단색 취향, 유니폼 취향을 혐오한다는 것이고, 자기와는 영 다르게 생겨먹은 타인에게 너그러울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른 바 토박이말과 한자어와 유럽계 어휘가 마구 섞인 혼탁한 한국어 속에서 자유를 숨쉰다. 나는 한문투로 휘어지고 일본 문투로 굽어지고 서양 문투로 닳은 한국어 문장 속에서 풍요와 세련을 느낀다. 순수한 토박이말과 토박이 문체로 이루어진 한국어 속에서라면 나는 질식할 것 같다.
언어 순결주의, 즉 외국어의 그림자와 메아리에 대한 두려움에서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박해, 혼혈인 혐오, 북벌, 정왜의 망상, 장애인 멸시까지는 그리 먼 걸음이 아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순화'의 충동이란 흔히 '죽임'의 충동이란 사실이다. -25쪽

그렇다면 8세기의 한국어와 지금의 한국어를 한 언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들 대다수는 무심코 그렇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신충이 <잣나무가>를 부르며 사용한 언어도 한국어라고 부르고, 황지우가 <뜰 앞의 잣나무>를 쓰며 사용한 언어도 한국어라고 부른다. 그 두 언어를 한 언어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8세기의 한국어와 지금의 한국어 사이에 정체성이 유지되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한 언어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은 뭘까? 그것은 대답하기 힘든 물음이다. 그 대답하기 힘든 물음에 '혈연적 동일성'이라는 손쉬운 대답이 제출된 시기는 19세기다. 19세기 유럽의 언어학자들은 세상의 무수한 언어들을 '혈연관계'에 따라 분류하는 일에 몰두했다. 그들은 '핏줄'이 통한다고 생각되는 언어들을 묶어 '가족(어족)'을 만들어, 그 가족의 '조상(조어)'을 찾는 일로 세월을 보냈다. -58쪽

지리언어학의 관점에 서면, 방언과 독립적인 언어를 구별하는 가장 커다란 기준은 의사소통 가능성이다. 즉 두 화자가 서로 의사소통을 할 수 없을 때 그들은 별개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리 언어학의 이 공간차원을 시간차원으로 곧추세울 수도 있다. 즉 '진화상태'의 어떤 언어가 동일한 이름으로 불리든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리든, 서로 다른 시점의 이 언어 화자들이 서로 의사소통을 할 수 없(으리라고 추정된)다면, 그 언어는 별개의 언어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8세기의 한국어와 지금의 한국어는 서로 독립적인 별개의 언어라고 할 만하다.
...중략...
우리가 이런 관점에 서면, 의사소통 가능성의 경계에 따라서 시간축 위의 한국어는 수많은 한국어들로 나뉠 수 있을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한국어가 아니라 무수한 한국어들이다. 그렇다면 존재하는 것은 한국어 문학이 아니라 무수한 한국어 문학들이다. -69-70쪽

외래어가 됐든 번역투가 됐든, 그것들을 인위적으로 몰아내 한국어를 순화하겠다는 충동은 근본적으로 전체주의적이라는 점이 강조돼야 한다. '국어 순화'의 '순화'는 제 5공화국 초기 삼청 교육대의 저 악명 높은 '순화 교육'의 '순화'다. 실상, 순결을 향한 집착, 즉 순화 충동은 흔히 죽임의 충동이다. 믿음의 순결성, 피의 순결성, 이념의 순결성에 대한 집착이 역사의 구비구비에 쌓아놓은 시체더미들을 잠깐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국어 순화'의 충동에 내재된 위험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121쪽

여기서 꼭 강조돼야 하는 것은 영어공용어화의 반대가 지닌 계급적 함의다. 공용어로서의 영어를 반대한다는 것은, 지식과 정보를 특정집단이 독점하는 걸 허락했다는 뜻이다. 라틴어와 한문을 읽고 쓸 수 있었던 중세의 엘리트들이 지식을 독점했듯이 말이다. 지식과 정보는 곧 권력이다. 영어가 공용어가 되든 안되든, 우리 사회의 지배계층은 자기 자식들에게 영어를 열심히 가르칠 것이다. 그리고 영어에 익숙해진 그들의 자식들은 영어에 익숙하지 못해 지식과 정보에서 소외된 일반 대중의 자식들 위에 다시 군림할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는 특정집단에 의한 그런 식의 지식의 독점을 당연시 하지 않는다. 민주주의의 문제를 떠나서, 한 사회가 습득할 수 있는 지식을 특정 계급이 독점하는 사회와 전 구성원이 공유하는 사회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180쪽

우리가 이중언어 사용자가 됐을 때, 더 나아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먼 미래에 민족어가 '박물관 언어'가 됐을 때, 궁극적으로 민족이 사라져버렸을 때, 우리는 잠시 정체성 문제에 맞닥뜨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 문제에 대해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민족이 사라진다고 해서 우리가 정체성을 잃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는 대신에 세계 시민으로서의 정체성, 인류로서의 정체성을 얻을 것이고, 민족주의의 억압이 풀린 여러 단계의 인간관계 속에서 새로운 정체성들을 얻게 될 것이다. ... 중략 ...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 우리 모두가 중국인이고 한국인이듯, 먼 미래에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지금도 이미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 우리가 지금도 10대때부터 배우고 있는 영어에 그리스 이래의 유럽 문화가 담겼다는 의미에서만은 아니다. 그리스 이래의 (또는 이집트 이래의) 유럽 문화는 지금 우리 제도, 우리 일상 생활, 우리 사상의 본질적 부분이 되어 있다. 그것이 '외래 문명'이라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그 '외래 문명'의 힘에 많은 부분이 밀려난 우리의 '재래 문명' - 한문 문명 - 역시 우리가 조금 일찍 받아들인 외래 문명일 뿐이다. 말을 바꾸어, 유럽에서 온 그 '외래 문명'은 우리가 조금 늦게 받아들인 재래 문명일 뿐이다.

-181-182쪽

한글이 한자와 싸워온 과정은 그대로 민주주의가 봉건주의와 싸워온 과정이다. 우리는 한글이 우리 글이어서 써야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사용이 민주주의적 가치에 부합하기 때문에 써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한자를 배우지 않을 수는 없다. 지난 2천년 동안 한자를 매개로 해서 무수한 중국어 단어, 일본어 단어들이 한국어에 차용됐고, 그렇게 차용된 한자어들은 당연히 한자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어에 수입된 한자는 중국어나 일본어에서와는 다른 독자적인 한국 음을 지니고 있고, 그래서 중국어나 일본어에서 차용된 한자어들은 중국어도 일본어도 아닌 한국어이다. -216쪽

원음주의를 근본주의적으로 밀고 나가려는 사람들은 세 가지 문제를 간과하고 있다. 첫째, 그들은 소리의 물리적 특성만을 생각할 뿐 그 소리들이 한 언어에서 조직되는 음운체계를 간과하고 있다. 둘째, 그들은 언어 규범에 대한 최종 심판관은 그 언어를 사용하는 대중이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바로 위에서도 이야기한 관습의 문제다. 셋째, 그들은 외국어에 대한 우리들의 지식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잊고 있다. -237쪽

우리가 가족이나 친구를 묻고 슬픔을 느낄 때, 그것은 가족이나 친구를 위한 슬픔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들 자신을 위한 슬픔이다. 우리는 가족이나 친구를 묻을 때, 우리들의 일부를 거기에 묻는다. 우리가 그들과 공유한 과거를 묻는다. 그들의 죽음이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그들과 공유했을 미래의 가능성을 묻는다. 가까운 사람의 장례 뒤에 우리가 느끼는 슬픔은 바로 그 사라져버린 우리 자신의 일부가 유발하는 슬픔이다. 그렇다면 내가 누이를 위해 마련한 사랑은 결국 나 자신을 위해 마련한 사랑일지도 모른다. 결국 원점으로 돌아와버렸다. -2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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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6-12-06 0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너무 좋으신 책만 읽으신다. 좋으시겠어요. 기말 고사 잘 보셨는지요. 행복한 하루 되시기를........

마늘빵 2006-12-06 0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네. 기말고사는 다음주에요. 이건 2년전에 읽었는데 그때랑 지금이랑 또 다르게 다가오네요.

비로그인 2006-12-06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상에서 사용하는 언어가 살아남는다고 생각합니다.
몇 세대가 더 지나면 한자는 전문영역의 학자들의 언어가 될것이라 예측해봅니다.
라틴어가 그런 경로를 걸었지요..

 
안락사를 합법화해야 할까? 민음 바칼로레아 34
미셸 오트쿠베르튀르 지음, 김성희 옮김, 김현철 감수 / 민음인 / 2006년 7월
구판절판


치료중단행위에 관한 지침
우리나라에서는 대한 의사 협회가 2001년에 제정하여 2006년 4월 22일 전면 개정한 의사 윤리 지침에 회복 불능 환자의 진료 중단에 관한 내용이 제 16조, 제 17조, 제 18조에 걸쳐 언급되고 있다. 그 대표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의사는 죽음을 앞둔 환자가 자신의 죽음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제16조 2항) "의사는 의료행위가 의학적으로 무익, 무용하다고 판단된 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에 대하여 환자 또는 그 보호자가 적극적이고 확실한 의사표시에 의하여 의학적, 사회통념적으로 수용될 수 있다고 판단되면 그들에게 충분한 설명을 하고 법령이 정하는 절차와 방법에 따라 그 의료 행위를 보류, 철회, 중단할 수 있다. (제18조) -23쪽

의사는 인간의 신체를 고치는 데에는 유능하지만, 그 신체가 정신의 또 다른 일면이라는 사실을 직시하려고 하지 않는다. 신체는 고쳐졌어도 정신은 계속 고통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외면한다. 그래서 의학은 병든 장기를 치료하는 동안은 그 장기가 한 인간에게 속해 있다는 것을 아예 잊는 쪽을 택한다. 치료하고 있는 대상이 다름 아니라 병든 한 인간이라는 사실, 곧 육체와 정신을 모두 가지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뒤로 한 채 오로지 장기에만 몰두하는 것이다.-25쪽

환자 가족이 안락사를 요청할 때가 있는데, 소중한 사람의 고통을 보는 게 힘들고 보살피는데 지쳤기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가족의 요청은 자신의 고통을 표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죽음을 요청하는 사람이 정말 충분히 생각해서 진정으로 죽음을 원해서 이성적으로 부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고통이 이성을 잃게한다는 것은 오래전부터 알려진 사실이다. 고통으로 힘들어 하는 사람이 죽음을 선택할 만한 여유가 정말 있을까? 정말 자기의 진정한 의사를 표현하는 것일까? -46쪽

사상의 자유를 내세우면서 존엄성에 대한 그러한 정의를 거부하고, 존엄성이란 개체에 따라 변할 수 있는 주관적인 감정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존엄성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타인에게 강요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노화와 질병을 '존엄성 상실' 상태로 간주하는 것은, 늙고 병든 사람들에 대한 가치 판단으로 곧 이어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존엄성은 안락사 합법화를 얻어 내기 위한 인질에 지나지 않는다. 존엄성을 이유로 안락사를 허용하는 것은 결국 인간이 존엄성을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정당화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 감히 무슨 자격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있게도 하고 없게도 한단 말인가? -57쪽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의사도 사람을 죽여서는 안된다. 고통을 덜기 위해 다량의 진통제가 필요할 때 그렇게 처방하는 것과, 죽이려는 의도를 가지고 과도한 양의 진통제를 처방하는 것을 질적으로 매우 다른 행위다. 보통 의사들이 그러한 결정을 내리는 것은 양심 조항에 해당되는 사안으로 의사와 환자의 관계라는 개인적인 영역에 속하는 일이다. 의사는 자신의 의도와 기본적인 규칙에 의해 움직이고, 자신의 가치 체계가 근거하고 있는 원칙에 따라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인지 선택할 것이다.
여기서 어떠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냐에 따라 차이가 있다는 것은, 안락사 문제가 법학이 아니라 윤리학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법학은 사회의 폐단으로부터 개인을 보호하는 데 목적을 둔 학문이고, 윤리학은 의도를 중요하게 여기는 학문이다. -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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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2-04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닥타로서 무망한 고통에 견디질 못하는 환자분들을 보면
정말 괴로웠지요...


짱꿀라 2006-12-05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안락사는 찬성해야 한다고 봅니다. 정말로 아픔을 참지 못하는 환자를 볼때면 너무나 가슴이 아프답니다.
 
당신에겐 철학이 있습니까?
박이문 지음 / 미다스북스 / 2006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당신에겐 철학이 있습니까? 한국의 늙은 철학자 박이문은 묻는다. 개인적으로 박이문의 책은 처음 접한다. 그의 다른 몇몇 저서들이 책꽂이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번 마음먹고 읽어야하는 작가 목록에 올려놓은지라 손이 쉽게 가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은 한국 사회의 가장 나이든 철학자 중 한명이므로 아 뭔가 대단하고 심오한 학문적 필력을 내세우지 않기 때문일까 하는 우려였겠지만, 그것은 정말 우려였다. 박이문의 글은 매우 쉽게 읽혔다. 뭔가 아는 체하지도 거들먹거리지도 심오하고 무겁지도 않았다. 마치 갓 강호에 얼굴을 비친 소장 철학자 같은 어설픔과 가벼움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것은 박이문의 내공이 약해서가 아니다. 박이문의 이 책을 읽은 이들이 비판하는 부분은, 그가 이 책에서 각각의 주제들에 대해 사색을 하다가 갑자기 멈춰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건 보기에 따라서 다르지 않을까 싶다. 여기서 사색을 멈춘다는 것은 언급한 주제에 대해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는 것이며 이는 자기주관이 뚜렷하지 않음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 자체로 결론을 내리지 않음에 의미를 두는 것일 수도 있다. 나는 후자에 무게를 두고 싶다. 어쩌면 그건 정말 내가 박이문에 대해 많은 기대를 했고, 그 만한 기대를 할만한 철학자라고 생각하는 나의 주관성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한국의 노 철학자가 아무런 의도 없이 그렇게 사색을 멈춰버렸을까.

  이 책은 박이문이 <철학과 현실>이라는 철학 계간지에 5년동안 기고했던 글을 모아놓은 것이다. 1부 실존적 선택과 2부 사회적 규범을 통해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의 문제와 "공동체는 어떤 틀을 갖추어야 하는가?"의 문제를 논한다. 나는 왜 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또 홀로있음이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죽음과 고독, 개인, 가치, 실제에 대해 이야기한다. 또 자연과 문화, 전쟁, 인권, 주권, 악법, 역사에 대해 이야기한다. 많은 커다란 주제거리들을 던져놓고는 사색을 전개하다 멈춘다. 나름의 결론을 내리지 않고 저자는 빠져버린다. 그리고 남은 것은 너희들의 몫이니라 한다.

  결론이 있는 글과 결론이 없는 글은 나름대로의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 전자는 글쓴이의 주관을 뚜렷하게 알 수가 있고, 독자는 이에 대한 반박내지는 공감으로 글에 다가선다. 저자에 동의하지 못하겠다면 이에 반하는 나의 논리와  사색을 전개할 것이고, 반대로 공감한다면 왜 어떤 의미에서 공감을  하게 되었는지, 또 부족한 점은 없는지 사색을 전개한다. 그러나 결론이 없는 글은 언제나 독자의 몫을 남겨놓으며 자 이제 이만큼 내가 함께 와줬으니까 네 생각을 전개해봐, 하고 빠져버린다. 마치 스승이 제자를 데리고 옆에서 도와주며 공부를 하다가 자 이제 네가 해봐, 하고 놔두는 것과 같다. 이것이 박이문의 철학함의 방식이 아닐까 생각한다. 각자의 몫을 남겨놓고 안내만 해주는 방식.

  쉽게 다가설 수 없는 어려운 주제거리들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다가 독자는 여기에 멈춰서서 나의 생각을 전개해야한다. 그것이 박이문의 의도가 아닐까 한다. 이 책은 그러므로 독자가 사색하도록 하기 위해 안내서 역할만을 해줄 뿐이다. 어떤 특정 지식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사색을 하는 방법에 대해서, 스스로의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만 슬며시 알려주고 나온다. 에필로그에 쓰여있는 짧은 글은 이를 시사한다.

  "만일 이 책에서 제기한 문제들에 관심을 갖고 필자와 함께 그 문제들을 생각해보고자 하는 독자가 있다면 그것만으로 필자는 이 책에서 보람을 느끼겠다."

  그에게 끝까지 책임지지 않는다고 비난할 필요는 없을 듯 하다. 많은 주제거리들과 생각거리들이 독자의 눈 앞에 쏟아져있지만 이 정도만으로 박이문은 충분히 제 할일을 했다고 본다. 아직 사색함이 서투른 이들보다는 사색하고 싶지만 어찌 해야할지 잘 모르는, 인생을 성찰하고 좀더 진지하게 살아보고자 마음을 먹은 이들이 보면 좋을 책이다. 인생의 갈림길에서, 선택의 기로에서, 내가 어디로 가야할지 잘 모르는 이들을 위한 사색서이다. 사색은 나의 인생을 좀더 풍요롭게 해줄 수 있다. 나와는 상관없어 보이는 사건들, 일상에서 지나치기 쉬운 사물들에 대한 사색은 결국 나에게로 다가가는 길이 될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서 읽어야 할 책이다. 당신에겐 철학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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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2-04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의 노 철학자가 아무런 의도 없이 그렇게 사색을 멈춰버렸을까."
그렇습니다. 아프락사스님.
이분의 다른 책들에 각각의 의문에 대한 이분의 답이 있지요.
일반인을 대상으로 내신 책중에, '이성은 죽지 않았다 /당대'를
이분의 주저로 꼽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