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코드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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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가 농담삼아 "책읽듯 책을 낸다"고 말하는 강준만 교수의 올해의 책 중 하나. <한국인 코드>는 어쩌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한국사회에 대해 읽어내고 수많은 고민을 하며 애국자는 아니면서 함께 살아가는 이 공간에 대해 걱정하는 강준만 교수와 같은 이들이 반드시 써야할 책이다.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 글을 쓴다는 데 대해서는 전공이 따로 없다. 우리나라에는 일본학과, 북한학과는 있지만, 또 영어영문학 말고 영어과, 일본어과 는 있지만, 한국어과는 없다. 그러나 몇몇 대학원엔 정식 대학원 과정으로서가 아닌 다른 특수대학원의 형태로서 한국학을 개설하고 있는 듯 하다. 한국에 대해서, 한국인에 대해서 말 할 수 있다는건 다른 전공과 달리 언제나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누구보다 매년 - 매년이라고 말하기엔 강준만의 작업은 너무나 빠르다 - 한국의 현시점에서 벌어지는 논쟁거리들에 대해 많은 발언을 쏟아내고 있는 강준만 이라면 반드시 써야 할 책. 강준만에게서 <한국인 코드>가 나온 것은 당연하다.

  그는 글을 매우 쉽고 재밌게 쓴다. 누가 봐도 금방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쓴다. 그건 그가 언론을 전공했고, 매체에 글을 자주 기고한다는 점이 만들어낸 그만의 글쓰기 방식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한편에서 그를 비판하는 자들은 그의 글쓰기가 그저 신문쪼가리 모아붙여 만들어낸 글로서의 가치도 없는 글이라고 폄하하지만 이런 글이야 말로 진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남들 모르는 현학적인 말 써가면서 어렵게 논문식으로 쓰지말고 이렇게 쓰란 말야. 그래야 좀 읽어볼거 아냐. 가장 가독율이 낮은 글이 논문이라지 않은가. 석사, 박사 학위를 수여하고, 학문으로서의 가치를 두기 위한 것이니 그것만의 형식이 있는 것이 전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나, 강준만이 이 책 어딘가에서 지적했듯이 참고문헌이 고고한 학자들의 저서가 아니라 옛날, 오늘날의 언론매체들이라고 해서 그 가치를 뚝 떨어뜨리는 것은 아니다 싶다. 강준만은 필 받으면 앉은 자리에서 책 한권 뚝딱 할 인물이다. 좀 과장되긴 하지만. 그러니 아 이거 한번 써야겠다 싶으면 그간의 자료들 부시럭부시럭 긁어모아 써 짠 하고 내놓는다. 그리고 딱 적절한 시점에서 그의 책은 대중에게 선보인다. 고 시점에서 논쟁거리가 되는 문제들, 그리고 가장 민감한 현안들에 대해서.

  그의 책은 금방금방 태어나기도 하지만 수명이 짧기도 하다. 그것이 어떤 형이상학적이고 메타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의 한국의 모습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인 코드>는 예외로 두어도 될 듯 하다. 이 책은 한국인의 속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으며, 그것은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된 한국인의 모습이다. 나의 모습을 가장 잘 모르고 있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한국인은 우리 자신을 제대로 알고 있는가, 모르면서 안다고 하는 것인가. 이에 대해 강준만 자신이 살펴본, 한국인을 말한다. 강준만 자신이 한국인 이라는 점에서 한국인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있는가 물음을 제기할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한국인이 한국인 자신을 가장 잘 모르기도 하면서 가장 잘 알고 있지도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들며 그의 발언에 긍정의 끄덕임을 해주고 싶다. 한국인이지만 강준만이라면 강준만이라면 한국인을 객관적으로 보는 시각을 전해줄 것이다. 나의 그에 대한 턱없는 믿음인가.

  너나 잘하세요, 빨리빨리, 배 아픈건 못 참는다, 최고 최대 최초, 정, 6.25, 소용돌이, 서열, 아버지, 목숨걸고. 이렇게 총 10가지 장에 걸쳐서 한국인을 분석해내고 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한 것은 여기 보여진 한국인의 모습이, 한국의 모습이, 우리가 보통 아무렇지 않게 흘려보내는 성질이라는 것이며, 그의 주장이 당연해보인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은 뒤에 많은 변화가 생겨났다. 내 주변에서 그가 지적했던 한국인, 한국의 모습을 쉽게 관찰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학교에서 도덕을 가르친다. 그런데 도덕교과서라는건 "최고, 최대, 최초"가 가장 잘 드러난 표본이다. 민족과 민족문화를 소개하면서 우리나라 최초로 무엇이 나왔다느니, 우리나라가 통계상 1등이라느니 하는 지나치게 자기나라를 자랑하려는 모습을 발견한다. 최고, 최대, 최초 이것이 그렇게 중요하고, 이것은 결국엔 우리나라에 대한 자부심, 애국심으로 연결된다. 또 국가주의, 애국주의. 아 진절머리나. 이를 지극히도 싫어하는 나 조차 수업 중에 평소 신문 스크랩으로 긁어모은 온갖 통계자료를 들어가며 교과서가 가르치는 대로 증거자료를 열심히 보여주고 있는 나는 뭐냐. 1등이 아니면 안되는 문화. 세계일류를 고집하는 기업과 일류대학이 아니면 사회에서 제대로 취급받지 못하는 사회, 일등이 아니면 올림픽 시상식에서 눈물을 떨구며 국민들에게 죄송스러워 하는 선수들. 아 정말 짜증나.  인생에서 일등을 선점한 이들이 가장 살기 좋은 나라, 반면 일등이 아닌 이들이 가장 살기 어려운 나라가 바로 한국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물론 다른 나라에서 살아본 것도 아니고 다른 나라에서 살아보지 않았으니 비교할 대상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말야.

   강준만의 목소리는 언제나 현실에 바탕을 깔고 있으며,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느끼는 일상의 삶에서 새로운 문제들을 지적하기에 새롭지 않으면서 신선하다. 그는 우리가 당연하다 여기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가질 줄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당연한 것을 당연하다 생각하고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그의 시각은 진부하면서 새롭다. 진부한 소재를 가지고 들먹이지만 새로운 시각을 전해준다. 그의 목소리는 지금 여기를 이야기한다. 그래서 난 그를 좋아한다.

  p.s. 이 책에서 조금 아쉽게 느껴지는 점은, 그가 들고 있는 근거라는 것이 때로는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라는 것이다. 다른 시각에서 충분히 볼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주장의 근거로서 그것을 활용하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그의 발언의 내용에 비추어 굳이 지적하지 않고 넘어갈수 있는 정도에 불과하다. <한국인 코드>를 시리즈로 낼 계획인 듯 한데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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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조너선 사프란 포어 지음, 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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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라 말하기 어렵다. 감동적인 신파극 하나 읽어냈다면 눈물 뚝뚝 떨구며 아 감동적이야 어떻게 이럴수가, 그럴테고, 자기계발서를 읽으며 매번 이번에는 괜찮기를 하고 매번 기대해보지만 번번히 나를 실망시킨다면 쉣, 이러면 그만이고, 내용은 별반 없지만 신나고 재미난 유쾌한 소설작품 하나 읽어냈다면 여전히 속으로 큭큭큭큭 거리며 재밌어할테지만, 이건 뭐냐. 어째 읽고 난 뒤에 아 탁월해, 정말 천재같아, 혹은 정말 재밌다, 아 참 쓰라리다, 뭐 기타 등등의 이런 감정의 반응이 나타나지 않는다. 뭐지. 뭐지. 굳이 표현하자면, 뭐 어쩜 이럴수가. 이런 정도랄까.

  말하기 굉장히 애매하면서도 그렇다고 '기대보다 실망작' 리스트보다는 '누군가에게 추천해주고픈 작품' 목록에 올리고픈, 하지만 딱히 뭐시기한 느낌은 없는 지금 이 상태. 패닉상태도 아니고, 그냥 멍한 상태다. 뭐냐. 너무 뛰어나서 멍하니 빠져있는 것이 아니라 읽고 난 뒤의 애매모호한 이 느낌. 거참 제목만큼이나 또 표지그림만큼이나 애매한 느낌을 주는 소설이다. 누런 바탕에 빨간색(혹자는 빨간바탕에 누런색이라고 할지도)  오른손바닥을 그려놓고는 제목이랍시고 붙여놓는다는 것이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이라니. 뭘 말하려는거지. 특정단어를 삽입한다거나 주의주장성 문구를 삽입하는 것도 아니고, 뭔지 알 수 없는 애매모호한 수식어를 제목으로 붙여놓는다니. 그것도 서로 어울리지도 않는 것을. 어쩌면 제목을 너무 잘 붙인건지도 모르겠다. 그냥 한 눈에 보기에 뭘 말하는지 모르겠는 저 긴 제목과 빨간 오른손바닥은 이 소설의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바로 그 느낌이야. 이 책을 읽고 나와 같은 '멍함'을 느꼈다면 다시 한번 책을 덮고 제목과 표지사진을 보라고. 딱 그거지 않아?

  소설의 배경은 미국의 911 테러 사태라고 하는데, 절대로, 네버, 절대로, 네버, 소설의 배경이 911사태에요 라는걸 모른 채 본다면 절대로 911을 떠올릴 수 없을테다. 단지 미리 알고 봤기 때문에 소설의 중간중간의 대화 속에서 911 사태를, 또 뒤에 나와있는 연속만화와 같은 사진들을 후루룩 훑어보면서 911을 떠올릴 뿐이다. 911 사태는 전 세계인에게 복합적인 감정을 불러일으켰고 (미국에 대한 적대적인 사람들은 어떤 쾌감을, 다른 한편으로 또 죄없이 죽어나간 수많은 개인들에 대한 애도의 감정을), 지금 생각해도 CNN 화면에 비춰진 두 비행기의 추락과 소리없는 아우성은 끔찍하지만, 이 소설에선 전혀 그런 냄새조차 맡을 수 없을게다.

  911 사태로 높은 빌딩에서 어떻게 죽어갔을지 모르는 아버지를 잃은 어린 소녀의 성장일기라고 하면 그나마 소설의 내용을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을게다. 왼손바닥엔 예스, 오른손바닥엔 노라고 써있는 사진이 자꾸만 떠오른다. 그럴 목적이 있었던건지 아니면 그냥 디자인상인지 모르겠지만, 표지그림에는 분명 오른손바닥이 그려져있고, 그렇다면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NO 일터. 무엇에 대한 NO일까. 그날의 보지 못한 악몽을 부정하는 것? 아버지의 죽음을 부정하는 것? 아니면 뭔가 또다른 것에 대한 부정. 이 모든 것들이, 이 책 속에 들어있는 모든 것들, 제목하며, 표지그림하며, 안에 삽입된 수많은 흑백사진들 하며, 또 소설 표현 기법하며, 그러한 모든 것들이 다 하나의 목적성을 가지고 있다면 난 이 소설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모두 우연이고, 별다른 메세지를 품고 있지 않다면 - 내가 보기엔 그것이 이 소설과 어울린다 - 이 책에 가벼운 키스를 해주고 책장에 고이고이 넣어둘테야. 가끔씩 꺼내 표지그림을 보고선 또 그 애매모호한 감정을 가질테지만. 아 다시 보니 뒷표지에는 왼손바닥이다. 그렇다면 별 의미 없는거.

  그랬다. 살만 루시디와 존 업다이크와 같은 그들의 작품은 아직 보지 못했지만 이름만 들어도 거대한 그네들의 찬사와 각종 매체와 저널들의 찬사를 받고 있는 이 소설, 불과 나보다 두 살 많은 조너던 샤프란 포어라는 이 작가, 부럽다. 얘도 또 철학전공이야. 나도 쓰고싶다. 예전엔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 따위는 안해봤다. 그런데 그런데 언젠가 나는 책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리고 시간이 지나며 그것은 이네들과 같은 한편의 뛰어난 작품을 내고 싶다는 생각으로 굳혀지고 있다. 스위스 철학자 알랭 드 보통, 이젠 미국 철학자 조너던 샤프란 포어, 다음엔 또 누구. 그저 막연한 기대와 희망.

   "<호밀밭의 파수꾼>의 콜필드보다 명민하고, <양철북>의 오스카보다  사랑스러운 아홉살 소년의, 슬픔과 사랑에 관한 퍼즐 같은 이야기." 라는 뒷페이지의 삽입문구는 이 소설이 어떤 것인가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역시나 이 소설을 읽으며 내가 느낀 것도 <호밀밭의 파수꾼>의 콜필드였으며- 하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 소녀는 콜필드 만큼이나 세상에 부정적이고 툭툭 혼잣말로 욕설퍼붓는 까칠한 녀석은 아니다 - 또 어떤 장면에서는 <어린왕자>를 떠올리기도 했다. <어린왕자> 속의 여우와 왕자의 대화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 길들인다는 것에 대해. <호밀밭의 파수꾼>보다 어렵고 두루뭉실하며 <어린왕자>와는 그것을 제외하고는 동떨어져있는 듯한 느낌. 마땅히 어떤 페이지에 밑줄을 긋고 싶다기보다, 그저 소설을 쭉 읽어내려가며 가슴에 담아두고픈 사랑과 슬픔에 대한 한편의 편평한 이야기.

  알 수 없는 제목이었던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은 마지막 장을 덮은 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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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영엄마 2006-11-05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당신은 믿을 수 없겠지만 >이란 책 제목만큼이나 긴 제목이군요..^^;;

마늘빵 2006-11-05 0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그 책은 뭔가 또 궁금해지는데요.
 
한국인 코드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6년 2월
절판


'한국적 사회과학'을 하자고 했더니 조선시대 연구로 돌아간 분들도 있었는데, 그것도 소중한 연구임엔 틀림없지만 '한국적'이라는 말에 너무 겁먹지 않으면 좋겠다. 최신 서양 이론을 수입해 소개하더라도 그 이론이 한국 상황에서 어떤 장점과 한계가 있다는 것만 분명히 밝혀준다면 그게 바로 '한국적 사회과학'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밑줄그은 이 주 : 강준만의 이러한 '한국적'이라는 것에 대한 인식은 철학자 탁석산의 그것과 매우 닮아있다. 탁석산은 <한국의 정체성>이라는 책을 통해 이미 '서편제'보다는 헐리우드 기법을 가져다 쓰더라도 우리식으로 만든 '쉬리'가 더 한국적이라고 말한 바 있다. '한국적=전통적' 혹은 '한국적=민속적' 이라는 등식은 두 사람에겐 적용되지 않는다.) -5쪽

김영명은 한국이 처한 두 가지 '조건' 과 한국, 한국인의 다섯 가지 '속성'을 지적했다. 두 가지 조건은 단일성과 밀집성이고, 다섯 가지 속성은 획일성, 집중성, 극단성, 조급성, 역동성이다. -7쪽

철학자 이정우는 '코드'라는 개념이 한국 사회에 들어오게 된 것은 '구조주의'라는 사조가 연구되기 시작하면서 부터였다고 지적하면서, "코드는 사물들을 일정한 방식으로 존재하게 만드는 규칙, 특히 무의식적 규칙"이지만, 오늘날의 코드 개념은 어떤 일반적인 무의식적 법칙의 의미보다는 숱한 집단들의 동일성을 형성하고 있는 사고 패턴들, 용어들, 정치적 입장들 등의 의미를 함축하게 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11쪽

'한국인 코드'는 본질주의에 근거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전면 부정도 아니다. 중간적 입장이다. 본질주의란 무엇이 되는 데 그것이 없으면 안되는, 무엇을 규정하는 근본적인 속성들이 있다고 보는 관점이다. '한국인 코드'는 한국인에 고유한 어떤 속성이 존재한다고 보지만 그것을 주로 상황의 산물로 파악하기 때문에 그 유동성과 변화 가능성을 인정한다.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동원하는 범주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는 '전략적 본질주의'로 보면 되겠다. -11쪽

"너나 잘하세요"는 자기성찰 없는 비판 문화가 드센 한국 사회를 향한 일침이다. 자기방어 기제로서의 냉소주의다.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비리, 파렴치, 위선 행각이 그칠 줄 모른다. 염치마저 실종했다. 인간마저 실종된 것이다. 세상이 두렵다거나 세상에 믿을 사람이 없다는 말이 나오게도 생겼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이 의존하는 최대의 심리적 방어 기제가 바로 냉소주의다. -19-20쪽

고영복은 냉소주의를 "현샐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자기가 만족스럽지 못한 부분을 비판하고 개선시켜 나가기 위하여 노력하지 않고, 멀리서 팔짱을 끼고 지켜보며 이것저것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태도"라고 정의했다. -21쪽

민중
마르크스 : "그들은 자기가 하는 짓을 알지 못하면서 그렇게 한다"
슬로터다이크 : "그들은 자기가 하고 있는 것을 잘 알지만 여전히 그렇게 행동한다."-27쪽

윌리엄 번스타인 '이웃효과'

"우리 중의 부자들이 우리의 불행의 원인이라고 말하는 것도 과도한 말은 안디ㅏ. 그들이 부유하면 할수록, 그들이 실제로든 전자매체를 통해서든 우리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그들 때문에 우리는 더욱 비참하게 느끼게 된다. 이것이 진실이라면, 부의 불평등이 가장 작은 사회가 가장 행복할 것이다. 이것은 정말로 타당할까? 그렇다. 주관적인 복합 복지척도의 꼭대기에 있는 나라들(아이슬랜드, 네덜란드, 덴마크, 스위스, 핀란드, 스웨덴, 아일랜드, 노르웨이)은 모두 공공연하게 재분배주의적 세금 정책을 갖고 있고, 소득분포가 협소하다." -68쪽

한국인의 상향의식에 주목한 전 조선일보 논설고문 이규태는 극단적인 증거로 유럽 사람들에 비해 하향을 하지 않으려는 하향억제의식이 별나게 강하다는 것을 드 수 있다고 주장했다. 유럽 사람들은 상황이나 사정 또는 환경이 바뀌면 그게 맞추어 자연스레 하향을 하지만, 한국인은 사정이나 상황이 달라졌다 해도 하향은 끝내 하지 않으려 하며, 어찌할 수 없이 하향을 하게 될 때에는 처참하고 처절한 심경에 빠지고 만다는 것이다.-70쪽

선진국과의 비교 중독증은 두 가지 결과를 낳았다. 하나는 늘 보다 높은 곳을 향하여 따라잡자는 전투성을 배양했다는 점이고, 또 다른 하나는 국민적 자기모멸 또는 자학을 심화시켰다는 점이다. -92쪽

최상진은 정을 1. 역사성(오랜 세월, 추억, 어린 시절 등), 2. 동거성(동고동락, 같이, 가깝게 등) 3. 다정성(포근함, 푸근함, 은근함, 애틋함 등) 4. 허물없음(이해, 숫용, 믿음직, 든든 등) 등 네 가지로 구분하기도 했다. -114쪽

"사람들은 소외당하는 것을 영원히 두려워하며 산다. 그리고 어떤 의견이 커지고 어떤 의견이 줄어드는지를 알기 위해 환경을 주의 깊게 관찰한다. 만약 자기의 생각이 지배적인 의견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공개적으로 자유롭게 의견을 표출하고, 자신의 견해가 지지기반을 잃고 있다고 판단되면 의견을 감추고 조용해지게 된다. 한 집단은 자신 있게 의견을 표출하는 반면 다른 집단은 입을 다물기 때문에 전자는 공적으로 강하게 나타나고 후자는 숫자보다 약해지게 된다.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 스스로를 표현하게 하거나 침묵하게 만들며, 나선형의 과정이 나타나게 된다."
(노엘레 노이만)-169쪽

한국인들의 강렬한 출세욕에 대해 최상진은, 한국인들은 사회적 존경과 세속적 출세를 엄격히 구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회적 자기 실현을 좋은 의미의 출세와 연결시켜 왔다고 분석했다. "나는 무엇이다"보다 "나는 어떠해야 한다"가 한국인에게는 중요하다는 것이다. 한국의 대학생들에게 자기실현에 대해 기술하라고 했을 때 그들이 기술하는 내용을 보면, 서구적 의미의 자기실현에 관계된 내용보다는 사회적 자기실현의 내용이 주류를 이룬다고 한다. 또 한국인의 자서전을 보면 마찬가지로 자신이 어떤 직업과 위치를 가진 사람으로 살아왔는가를 역사기술 식으로 열거하는 형태를 띠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것이다. 최상진은 한국인의 자기는 서구인의 셀프보다 미래지향적 목표 지향적이 크며, 사회현실과 본인이 처한 입장을 보다 구체적으로 반영한다는 점에서 현실성과 구체성이 높다고 평가했다. -199-200쪽

"군자는 혈구지도를 지닌다. 윗사람에게서 싫다고 느꼈던 것을 아랫사람에게 시키지 않으며, 아랫사람에게서 싫다고 느꼈던 것을 가지고 윗사람을 섬기지 않으며, 앞사람에게서 싫다고 느꼈던 것을 가지고 뒷사람을 이끌지 않으며, 뒷사람에게서 싫다고 느꼈던 것을 가지고 앞사람을 따라하지 않으며, 오른쪽 사람에게서 싫다고 느꼈던 것을 왼쪽 사람에게 건네지 않는다." (<<대학>>)-2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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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주의를 위한 변명 - 진정한 개인의 행복을 찾은 동양 지식인들의 내면 읽기
김시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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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정한 개인의 행복을 찾는 동양 지식인들의 내면 읽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비슷한 시기에 나온 <행복한 이기주의자>와는 달리 - 며칠전 <행복한 이기주의자>를 읽고 혹평을 가한 일이 있었다 - 이기주의자가 되라고 이야기하면서도, '이기주의'의 의미에 대해 다시금 생각케한다. 소위 자기계발서라는 책들이 말하듯 지침을 주고 나를 따르라, 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고 이에 대해 깊이 있는 사색을 이끌어낸 다음 왜 이기주의자를 옹호하는지에 대해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그것이 '이기주의'를 이야기하는 다른 책과 이 책의 근본적인 차이이다.

  여러 철학자들이 옛 고전을 오늘날의 시각으로 읽어내려 한다. 이 책도 그와 같은 작업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아주 오래전의 중국의 철학자들, 누구나 다 아는 공자를 비롯하여, 그의 후계자 맹자, 순자, 그리고 장자와 노자, 묵자와 한비자, 양주와 상앙 등등의 <중국철학사>에나 등장할 법한 굵직굵직한 주요 철학자들은 다 등장했다고 봐야한다. 저자 김시천은 이 많은 철학자들을 책에서 언급하고 있지만 그가 옹호하고자 하는 것은 묵가학파와 양주이다. 이들은 당시 공맹의 유가철학에 딴지를 걸었지만 그네들의 파워가 너무나 큰지라 상대적으로 묻혀버렸던 인물들이다.

  우리는 지금껏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에 따라 군자와 성인이 되라고 윗사람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크게 보고 크게 마음을 쓰고 큰 그릇 큰 사람이 되라고 들었다. 그런데, 저자는 이에 딴지를 건다. 다 큰 사람이 되고자 하면 안된다. 도덕책에 나와있는대로 누구나 다 옳고 선하고 순수하고 남을 돕우며 사는 대인, 군자, 성인이 될 수는 없다고 한다. 현실적이다. 정말 그렇다. 다 그렇게 되면 좋겠지만 누구나 다 그렇게 될 수는 없다. 누구나 다 대통령, 국회의원, 우주비행사, 대기업 CEO, 변호사,  판사, 의사가 되고 싶어하지만 누구나 다 될 수는 없다. 왜. 그럼 왜 안된다는거야. 

  거참 맹렬한 놈일세 아니 하겠다는데 왜 못하게 해. 그래 꿈은 다 꿀 수 있다. 하지만 결국 누구나 되지는 못한다. 큰 인물은 큰 인물 다운 일을 해야하고, 작은 인물은 작은 인물 다운 일을 해야한다. 대인은 대인답게, 소인은 소인답게 자신을 찾아가야 한다. 우리는 마치 '대인=좋은 사람, 소인=나쁜 사람'이라는 등식으로 대인과 소인의 개념을 인식하며 살아왔고, 모두가 다 대인이 되기 위한 삶을 살아왔다. 안되는 데 되게  하려니 어렵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안되면 되게하라'이다. 안되는데 어떻게 되게 해. 이런 억지가 어딨어. 안되면 안되는거야. 안되는데 되게 하려고 애쓰고 노력하며 스트레스 받는 이들에겐 어쩌면 이 책은 위로가 될지도 모르겠다. 안되면 하지마. 넌 너다운 길을 찾으면 돼. 소인의 삶을 찾아가라.

   이 책은 이기주의에 대한 옹호다. 우리는 도덕시간에 이기주의는 나쁜 것이고, 이타주의는 좋은 것이라고 배웠지만 - 도덕교사인 나부터 그렇게 가르쳤다. 그러니 다들 그리 알 밖에. 이 책을 읽었으니 다음부터 조심해서 가르쳐야겠다. 그전에 도덕교과서부터 전면  개편해주면 안되나. 영 가르칠 때마다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인양 가르치는거 같아 미안하네. 그거 싹 무시하고 내 맘대로 하려니 난 따로 닦아놓은 뭔가가 없고 이런걸 내공부족이라고 하지 - 결코 이기주의는 나쁜 것이 아니다. 이기주의가 왜 나빠. 나를 위해 살겠다는데. 나를 위해 살겠다는 이기주의는 '위기지학爲己之學'과 연결된다.

  나를 위하는 학문. <여씨춘추> 중기에는 이래 나와있다.

  "지금 나의 생명은 '나를 위해(爲我)'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를 이롭게 하는 것 또한 크다. 나의 생명은 그 귀천을 논하자면 지위가 천자가 되더라도 비할 바가 못된다. 그 경중을 논하자면 부가 천하를 소유하는 것이라 해도 바꿀 수가 없다. 그 안위를 논하자면 하루아침에 나를 잃게 되면 죽어서도 회복할 수 없다."

  나를 위해 공부를 했다. 공자는 말했다. "옛날 사람들은 제 몸을 위해(爲己) 공부하였는데, 요즘 사람들은 남을 위해 공부한다"(논어), " '자신을 위한다(爲己)'는 것은 배운 바를 신중하게 실천에 옮긴다는 뜻이고, '남을 위한다(爲人)'는 것은 배운 바를 말로만 한다는 뜻이다. "(논어집해), "자신을 위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찾으려고 공부하는 것이고, 남을 위한다는 것은 남에게 인정받으려고 공부한다는 뜻이다." (논어집주)

   옛 사람들은 나를 위해 공부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람들은 남을 위해 공부하라고 배운다. 공부해서 남주라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타인에게 이로운 행위를 하고, 사회와 국가와 인류를 위해 위대한 사람이 되라고 배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학교에서는 이래 배우지만 집에서는 돈 많이 버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침을 받지 않나. 집안 마다 다르겠지만. 요즘 아이들의 머리 속에 돈돈돈 들어있는걸 보면 그것이 가정교육의 여파가 아닌가 싶다. 분명 학교에서 돈 많이 벌라고 가르치진 않았으니까.

  이기주의의 본래 의미는 우리가 알고 있듯 내 이익을 위해 타인을 해치는 것이 아니다. "'개인'은 누구나 자신의 행복 추구에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행동해야 하며, 국가나 사회는 바로 각 '개인'이 행복에 도달하려고 노력하는 행동을 정당화하고 이를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근대 이기주의의 원리이다. 그러한 이기주의 원리가 제도화된 것을 우리는 '권리'라고 한다. "(P112) 이기주의는 곧 근대 민주주의의 권리인 셈이다. 사람들의 이기주의적 행동을 보고 있노라면 그것이 그다지 나쁜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물론 이때의 이기주의는 엄격히 구분지어야 할 필요가 있다. 나를 위한 행동이기는 하되 남을 해치지 않는 범위내에서의 행동. 그렇게 보면 도덕시간에 배운 이기주의의 의미와도 어느정도 일치한다고 봐야하나. 저자는 말한다. "당신의 이기주의는 이렇게 소박하고 작은 것이다. 당신의 생명이 해침을 당하지 않으려는 작은 이기주의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작은 이기주의를 요즈음 말로 '권리'라고 부른다. 당신의 이기주의는 속되게 말하면 먹고 살려는 몸부림이고, 고상하게 말하면 행복해지고 싶은 작은 소망이다. 그래서 괜찮다. 얼마든지 이기적이어도 상관없다. 당신의 이기주의는 기껏해야 당신과 당신의 가족을 행복하게 하려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P220)

  그래 이 정도 선에서는 얼마든지 나는 이기적이어도 상관이 없다. 내 '이기'라고 해보야 고작 이런 정도 밖에 되지 않으니깐 말이다. 이기를 위해 타인을 해치고 피해를 주는 정도의 선까지가게 되면 이는 이기주의가 아니라고 봐야한다. 그것이 저자의 이기주의에 대한 의미가 아닌가 싶다. 저자는 그 정도 선은 이기주의를 넘어서 '인간답지 못함'으로 보고 있으니 말이다. 다음의 저자의 말을 읽어 보면 그 의미가 더욱 명확해지지 않을까 싶다.

  "인간을 고통으로 몰아넣고, 세상을 폭력과 전쟁으로 얼룩지게 하는 악'을 인간의 이기적 본성으로 치부하는 것, 혹은 어느 한 개인의 이기심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한 개인이 다른 사람에게 가하는 폭력의 원인은 그 사람의 이기적 본성보다는 삶의 문제, 사회적 관계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악 또한 사회적인 차원에서 진단되고, 해결책 또한 사회적 차원에서 마련되어야 한다. 이기주의라는 어떤 철학적 입장이나 모든 개인이 갖는 몸의 이기적 본성도 악의 궁극적 원인은 아니다. "(P241)

  저자는 결론적으로 이기주의에 대해 이렇게 정의내린다. " 이기주의란, 각 개인이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임을 바탕으로 하여 이에 대한 사회적 배려와 지원이 우리 사회의 어떤 가치보다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는 입장일 뿐이다." 대인의 삶이란 것은 그 자리가 큰 것이지 사람이 큰 것이 아니라 한다. 맞는 말이다. 제 그릇이 아닌 자가, 솔직히 말해 소인의 그릇 밖에 안되는 자가, 대인이 있어야 할 자리에 앉게 되면 문제가 생긴다. 그 자리가 커질수록 "인간을 고통으로 몰아넣고 세상을 폭력과 전쟁으로 얼룩지게 하는 악"이 많아지게 된다. 이를 막아야 한다. 고로 소인은 소인답게 살자는 것이다. 안되는 그릇에 몸에 좋은 귀한 약을 담고 담다가 넘쳐흐르게 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릇을 늘리면 문제가 해결되지만 그 그릇은 늘어날 그릇이 아니고, 늘어나더라도 시일이 필요하다. 왜냐. 안되는 그릇을 억지로 늘이려 하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대인은 대인답게, 소인은 소인답게 라는 모토는 선천적으로 제 그릇의 크기가 정해져있다는 식으로 들릴 수도 있겠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생긴 의문점은 그것이었다. 그러면 제 그릇의 크기는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 선천적으로 정해져있는 것이 아니라면, 또 정해져있다 해도 그것을 알아볼 수 없다면, 언제쯤 그 그릇의 크기를 알아볼 수 있을까. 15살? 20살? 30살? 의문이다. 언제쯤부터 '대인은 대인답게, 소인은 소인답게'를 적용시켜야 할지. 이런 의문은 아직 해소되지 않았지만 이 책은 분명 우리가 알고 있는 '이기주의'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케 해보는 기회를 제공했다. 대인이 대인의 삶을 꿈꾸는 것은 대인의 이기주의요, 소인이 소인의 삶을 꿈꾸는 것은 소인의 이기주의다. 그리고 이때의 이기주의는 남에게 피해를 주며 나의 이익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나의 이익에 관심을 갖고 나의 행복을 위해 행동하는 이기주의이다. 공자왈 맹자왈 대인이 어쩌느니, 군자가 어쩌느니 그런 말보다 현실적으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소인의 삶이 아닌가 싶다. 고전의 재조명이란 것은 바로 이런 뒤집기가 아닐런지. 바른 말 백번 하는 것보다 우리가 당연하다 여기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게 해주는 이런 글이 훨씬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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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르바 2006-11-26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 님, 당선 축하드립니다. 참 꼼꼼하게 쓰셨네요. 추천도 누릅니다.^^ 저에게도 기쁜 소식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이기주의를 위한 변명 - 진정한 개인의 행복을 찾은 동양 지식인들의 내면 읽기
김시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9월
절판


지금 나의 생명은 '나를 위해(爲我)'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를 이롭게 하는 것 또한 크다. 나의 생명은 그 귀천을 논하자면 지위가 천자가 되더라도 비할 바가 못된다. 그 경중을 논하자면 부가 천하를 소유하는 것이라 해도 바꿀 수가 없다. 그 안위를 논하자면 하루아침에 나를 잃게 되면 죽어서도 회복할 수 없다.
(<<여씨춘추>><중기>) -52쪽

온전한 삶(전생)이 가장 좋고, 모자라는 삶(휴생)이 그 다음이다. 그 다음은 차라리 죽는 것이고, 핍박받는 삶(박생)은 가장 못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온전한 삶을 누리는 것을 말한다. 온전한 삶을 누린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타고나는 욕망이 적절하게 충족되는 삶이다. 모자라는 삶이란 그런 욕망 가운데 반만 충족되는 삶이다. (......) 핍박받는 삶이란 그런 욕망 모두 충족되지 못하고 모두 싫어하는 것만 얻는 것이니 굴종적이고 치욕스런 삶이다. 그래서 핍박받는 삶이란 차라리 죽느니만 못하다고 한 것이다.
(<<여씨춘추>><귀생>) -55-56쪽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옛날 사람들은 제 몸을 위해(爲己) 공부하였는데, 요즘 사람들은 남을 위해 공부한다"
(<<논어>><헌문>)-106쪽

'자신을 위한다(爲己)'는 것은 배운 바를 신중하게 실천에 옮긴다는 뜻이고, '남을 위한다(爲人)'는 것은 배운 바를 말로만 한다는 뜻이다.
(<<논어집해>>)-107쪽

자신을 위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찾으려고 공부하는 것이고, 남을 위한다는 것은 남에게 인정받으려고 공부한다는 뜻이다.
(<<논어집주>>)-108쪽

'개인'은 누구나 자신의 행복 추구에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행동해야 하며, 국가나 사회는 바로 각 '개인'이 행복에 도달하려고 노력하는 행동을 정당화하고 이를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근대 이기주의의 원리이다. 그러한 이기주의 원리가 제도화된 것을 우리는 '권리'라고 한다. -112쪽

큰 사람의 큰 이기주의는 의무이자 책임이지만, 작은 사람의 작은 이기주의는 권리이다. -120쪽

<논어>가 천하를 위한 이기주의를 걸어간 성인 공자의 행적이라면, <장자>는 비참한 현실을 벗어나 자신의 도를 펼치는 강호의 이기주의를 설파한 지도이다. 이기주의의 시선으로 읽는다면 공자는 이기적이었고 장자는 더욱 이기적이었다. 하지만공자가 걸었던 길은 같은 보통 사람이 따라가기 어려운 천하를 위한 이기주의였고, 장자가 발견한 길은 크긴 하지만 일상적이지 않은 강호의 이기주의였다. 도?왜 이런 것을 이기적이라 말하는가?
고전을 읽을 때 그 내용이 얼마나 철학적으로 치밀하고, 논리적으로 훌륭한가 하는 잣대로 평가해서는 안된다. 우리의 삶에 무언가 유익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논리와 수사는 필요한 사람의 몫이다. <논어>의 말은 진솔하고 평범하지만, 그에 따라 살기는 대단히 어렵다. <장자>의 말은 난해하고 복잡한데다가 어떻게 행할 것인가를 끌어내는 것조차 쉽지 않다. 왜냐하면 공자나 장자나 걸어간 길은 대인들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204-205쪽

당신의 이기주의는 이렇게 소박하고 작은 것이다. 당신의 생명이 해침을 당하지 않으려는 작은 이기주의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작은 이기주의를 요즈음 말로 '권리'라고 부른다. 당신의 이기주의는 속되게 말하면 먹고 살려는 몸부림이고, 고상하게 말하면 행복해지고 싶은 작은 소망이다. 그래서 괜찮다. 얼마든지 이기적이어도 상관없다. 당신의 이기주의는 기껏해야 당신과 당신의 가족을 행복하게 하려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220쪽

현대 인도 사회에는 아직도 카스트 제도가 현실적으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며, 사회의 지도층은 여전히 카스트 계급의 최상층 출신이 많다고 한다. 그런데 이를 연구하기 위해 인도에 간 어떤 학자가 최하층 계급에 속했던 사람에게 전통 카스트 제도를 인정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그 사람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당신 같으면 그러고 싶겠소?"
이기주의를 변명한다는 것이 이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 중략 ... 주권이 없고 권리가 없는 세상에서 나를 위한다는 것은 민족에 대한 반역, 국가에 대한 반역을 뜻하는 것처럼 생각하도록 우리는 길들여져왔다. 나를 위해 민족과 국가가 존재한다는 생각은 끔찍한 죄악이고, 오로지 나는 민족과 국가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의무만 부과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늘 사용하는 이기주의라는 말의 뜻을 다시 한번 되새겨보자. 그것은 누구든 자신을 위해, 자신에게 이롭게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입장일 뿐이다. 그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또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그런데 우리는 이기주의란 단어를 들으면 공연히 권위의 그늘 속에서 만들어진 그릇된 연상을 하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이 이기적이라면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기 마련이고, 악을 초래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순자의 성악설은 통속적으로 인간은 약한 존재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가. "인간은 본성이 이기적이다"라는 것과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라는 말은 논리적으로는 물론 그 어떠한 입론을 거치더라도 본성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본성이 이기적이라는 말은 동서양에 상관없이, 모든 인간은 자신의 삶에 이로운 것, 즉 쾌락과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는 기이하게도 인간은 이기적이라는 말을 인간은 본성적으로 악하다는 말과 같은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 도대체 인간은 본성적으로 악하다는 말이 어떤 근거에서 성립될 수 있다는 것인가? -238-239쪽

인간을 고통으로 몰아넣고, 세상을 폭력과 전쟁으로 얼룩지게 하는 악'을 인간의 이기적 본성으로 치부하는 것, 혹은 어느 한 개인의 이기심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한 개인이 다른 사람에게 가하는 폭력의 원인은 그 사람의 이기적 본성보다는 삶의 문제, 사회적 관계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악 또한 사회적인 차원에서 진단되고, 해결책 또한 사회적 차원에서 마련되어야 한다. 이기주의라는 어떤 철학적 입장이나 모든 개인이 갖는 몸의 이기적 본성도 악의 궁극적 원인은 아니다. -241쪽

이기주의란, 각 개인이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임을 바탕으로 하여 이에 대한 사회적 배려와 지원이 우리 사회의 어떤 가치보다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는 입장일 뿐이다. -2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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