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나의 도시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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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일처제 사회의 위대한 규칙 한 가지.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결혼하는 건 아니지만, 결혼하는 사람들은 모두 사랑해야 한다. 그 사람의 존재 자체를 사랑할 수도 있고, 그 사람이 가진 무언가를 사랑할 수도 있으며, 그 사람의 무엇을 사랑하는지 모르면서 사랑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맞선에서 만난 비뇨기과 의사를 대관절 '왜' 사랑하느냐는, 재인을 향한 유희의 질문은 애초부터 성립하기 어려운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17-18 쪽

"잘 모르는 남자와, 아니, ....... 처음 만난 남자와, 하룻밤을 보냈다.
후회하지는 않으련다. 혼자 금 밖에 남겨진 자의 절박함과 외로움으로 잠깐 이성을 잃었었다는 핑계는 대지 않겠다. 저지르는 일마다 하나하나 의미를 붙이고, 자책감에 부르르 몸을 떨고, 실수였다며 깊이 반성하고, 자기발전의 주춧돌로 삼고, 그런 것들이 성숙한 인간의 태도라면, 미안하지만, 어른 따위는 영원히 되고 싶지 않다. 성년의 날을 통과했다고 해서 꼭 어른으로 살아야 하는 법은 없을 것이다. 나는 차라리 미성년으로 남고 싶다. 책임과 의무, 그런 둔중한 무게의 단어들로부터 슬쩍 비껴나 있는 커다란 아이, 자발적 미성년. -43쪽

모든 고백은 이기적이다.
사람들이 누군가에게 고백을 할 때, 그에게 진심을 알리고 싶다는 갈망보다 제 마음의 짐을 덜고 싶다는 욕심이 더 클지도 모른다. 내가 유준을 만나러 온 이유는, 어쩌면 고백하기 위해서였다. 애정 문제와 관련된 카운슬링엔, 맑고 담담한 사이의 이성이 제격이니까. -106쪽

쇼핑과 연애는 경이로울 만큼 흡사하다.
한 개인의 파워를 입증하는 장 일 뿐더러, 그안에서 자신과 비슷한 취햐을 가진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정서적 안도감을 느낀다. 여유로운 시간과 젊음이 있을 때는 경제력이 받쳐주지 않고, 경제력이 생겼을 때는 여유로운 시간과 젊음을 돌이킬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재화의 양이 한정되어 있다. -114쪽

'어리다'는 말이 반드시 생물학적 연령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말 속에는 섬세하고 복잡한 많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어리다는 것은 얼마든지 꿈을 꿀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문제는 그 꿈의 대부분이 몹시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이라는 점. 비록 제 딴에는 아주 현실적이고 실현가능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을지라도 말이다. 그들은 의기양양하게 외칠 것이다. "왜 안 돼? 하면 돼. 나는 나니까!" 맞다. 그것이 스물 다섯 살에 어울리는 세계관이다. 스물 다섯 살이므로, 그럴 수 있다. 문제는 내게 있었다. '당연하지, 다 잘 될 거야' 라고 마냥 북돋워줄 수가 없는 건, 내 인생의 시계추를 다시 칠 년 전으로 되돌리고 싶지 않기 때문일까? -188쪽

"웃기는 얘기 하나 해줄까? 용가리 말야. 한 번 결혼했다 왔으면서 어떻게 그 실력은 하나도 안 늘 수가 있니?"
"그렇게 못해?"
"응. 죽음이야. 첨부터 끝까지 딱 정상체위. 오직 피스톤 운동. 헤어진 와이프랑 섹스리스였다더니 진짠가봐."
이럴 때보면, 유희가 발랑 까진 척하지만 실은 꽤나 멍청하고 순진하던 스무 살에서 그대로 멈춰 있다는 의심을 버릴 수 없다. "야 그걸 믿냐? 그럼 그 집 애는 어디 황새다리 밑에서 주워왔을까 봐? 그런거 다 뻥이고 그 남자는 다만 '원래 잘 못할' 뿐이야"라고 일러주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사실 옛날에 내가 뭘 알았겠니. 하지만 그동안 나도 자연스럽게 학습해온 부분이 있잖아? 그런 거 다 무시하고 걔한테 맞춰서 하향 평준화시키려니까 아주 좀 쑤셔 미치겠다. 미적분 다 떼고 나서 다시 일차방정식 푸는 기분이야."
-232쪽

하나의 사랑이 완성되었다는 말은, 누군가와 영원을 기약하는 순간이 아니라 지난한 이별 여정을 통과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입에 올릴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사랑할 때보다 어쩌면 헤어질 때, 한 인간의 밑바닥이 보다 투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가끔은 행복하게 사랑하는 연인들보다 평화롭게 이별하는 연인들이 더 부럽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헤어진 남자와 다시 만나는 일이 정당화 될 수 있을까? -316쪽

어쩌면 우리들은 사랑에 대해 저마다 한 가지씩 개인적 불문율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닐까 싶다. 문제는, 자신의 규칙을 타인에게 적용하려들 때 발생하낟. 자신의 편협한 경험을 토대로 만들ㅇ러진 기준을, 타인에게 들이대고 단죄하는 일이 가능할까. 사랑에 대한 나의 은밀한 윤리감각이 타인의 윤리감각과 충돌 할 때, 그것을 굳이 이해시키고 이해받을 필요가 있을까. 유희가 만나는 남자가 이혼남이든 유부남이든 수도승이든 내가 터치하지 않는 것처럼, 내가 한 다스의 남자를 만나든 한 두름의 남자를 만나든 유희 식의 윤리로 재단되고 싶지는 않았다. -3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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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0-23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으며 많이 서늘했어요.
별로 좋아하지 않는 스타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구절 한 구절 마음 속에 박히더라구요.

씩씩하니 2006-10-25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14,316,330이..저랑,,,,일치해요,,ㅎㅎㅎ
솔직한 문장들이 가슴에 와닿았던 책 같애요...

마늘빵 2006-10-25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승연님 / ^^ 아 저 정이현한테 반했어요.
씩씩하니님 / ^^ 네. 역시 좋은 문장은 누구나 다 알아보는 법이죠. 참 좋았어요. 즐겁기도 하고, 이런 저런 생각도 했고.
 
행복한 이기주의자
웨인 W. 다이어 지음, 오현정 옮김 / 21세기북스 / 2006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언제나 자기계발서 따위의 것들을 투덜투덜 거리며 읽건만 또 다시 내 손에 이 따위의 자기계발서가 잡히는 것은 어인 일일꼬. 그래도 베스트셀러라고, 독자들로부터 별 다섯개의 평가를 받는다고, 믿고서 없는 독서시간 투자하여 읽어줬건만 역시나 돌아오는 것은 실망이요, 투덜거림이다. '자기계발서'라고 분류되는 것들 중에서 나를 만족시킨 것은 에스콰이어에서 나온 <남자생활백서> 일뿐. 이거 자기계발서 맞지?

  '행복한 이기주의자'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 녀석은, 현대를 살아가는 개인으로서 가장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들이 필요한가, 만족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논하고 있다. 저자는 과감히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는, 개인의 행복만을 위해서는, 이기주의자가 될 필요가 있다고 당당히 외치고 있으며, 그의 주장은 흔히 우리가 도덕교과서에서 볼 수 있는 우리 민족과 겨레와 이웃과 사회와 국가의 안녕과 질서유지를 위해서는 어찌해야한다는 말도 안되는 어거지성 주장을 내놓는 것에 비하면 솔직하고 현실적이어서 좋다. 나는 말이지 도덕을 가르치면서도 저 따위의 '민족' '국가' 겨레' '사회' 란 단어들만 보면 치가 떨린다. 저 멀리 어느 땅에서는 국가가 개인을 위해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지말고, 개인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를 고민하라고 했지만 미쳤냐. (나 또 흥분. 도덕윤리 교과서라고 하는 것들은 이제 개인이 행복해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하는가, 개인이 온전히 독립적으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하는가 하는 등의 고민들로 가득차야 한다고 주.장.)

  저자가 말하려는 바는 참 맘에 들지만, 그가 '행복'을 풀어나가는 그 과정이라고 하는 것들이 영 못마땅하올시다. 어쩌면 지금 내가 말하려는 바는 '자기계발서'라는 모든 책들에 대한 '못마땅함'일 수도 있겠다. 이런 류의 책들은 꼭. 반드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똑같다. 개인이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어떠어떠한 지침들이 있고, 이 규칙을 지켜야한다. 규칙을 지키기위해서는 지금의 너의 행동방식들은 이러이러해서 문제가 있고, 이렇게 고쳐야 한다. 뭐 이런거. 도.대.체.가. 스스로 고민과 사색을 거침으로서 뭔가를 얻게 만드는 법이 없다. 그냥 명령하고 지시한다. 그게 자기계발서가 자기주장을 풀어가는 방식이다. 그런거 말고, 정말 '행복'에 대해 뭔가를 생각하게 하고 깨우침을 주려면 말이지, 이 딴 책 말고 일상의 철학함을 담아놓은 사색적인 글들이 훨씬 낫지 않겠어? 책을 읽으면 뭔가 좀 남아야하는데 말이지 남는게 없어. 개인을 변화시키자면 명령이나 지시 이런 것들보다는 책을 읽는 이의 머리와 마음을 움직여야할거 아니겠어? 나만 그런가? -_-

  하여간 영 맘에 안들어 이런거. 내 돈 주고 본 책이 아니니 그나마 덜 억울하지. 적어도 시간과 돈 중에 돈은 버리지 않았으니깐. 아 버렸구나. 동네 책방에서 빌려 본 값. 내 돈 내놔.

  * 보기 싫으면 너 혼자 곱게 보지 않을 것이지 왜 싫다면 봐 놓고 징징거리고 투덜거리냐고 말한다면 할 말 없다. -_- 그러나 난 이런 자기계발서가 베스트셀러가 되는 이런 현실이 영 못마땅하다. 그건 이 책과 수많은 베스트셀러가 되는 자기계발서 만의 문제는 아니잖아. 그러니 난 이런 문제를 지적하는거라고.  하나 더. 근데 여기 미샤 3종 화장품은 왜 들어가. 쟤랑 무슨 관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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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0-22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나마 별 하나도, 별점을 넣지 않으면 리뷰 등록이 되지 않아 넣으신 것이지요? 그 맘 잘 압니다.

이매지 2006-10-22 1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자기개발서 엄청 싫어해요. 내 돈 들여서는 절대 안 사는-_-;

비연 2006-10-23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 하나....................^^;;;

비로그인 2006-10-23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 없이 리뷰를 쓰는 건 안되나봐요? 저는 쓰고 싶지 않은 건 안 써서 몰랐어요.

비로그인 2006-10-23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님의 입말이 귓가에 들리는 듯 하네요. 뚜렷한 지침을 제시해주고 고치라는 거, 생각하기 싫어하는 독자들이 읽고 싶어하는 거죠. 전 지금 독서시간 안배에 대해 고민중에요. 내 생각과 다른 책을 끝까지 읽어야 할지 말지.. 님은 끝까지 읽고 리뷰까지 써주는 친절을! (사실 저도 시작하면 아까워서 그럴 것 같긴 해요.) 나쁜 것을 경험하는 것도 내 의견을 명확하게 해준다는 면에서 의미있는 것 같다는 위로~가 되려나?

비로그인 2006-10-23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역시 자기개발서류를 싫어하지만 늘 똑같은 상술(?)에 넘어가곤 한답니다. 그만큼 지금의 제 자신이 마음에 안 든다는 방증일 수도 있겠고, 여태까진 속았어도 이번만은 다를지 모른다는 엉뚱한(?) 믿음도 약간은 있는 거 같고... 무언가 특별한 것을 담고 있는 거 같아 보이는 녀석들도 제 zero 에 가까운 실천력을 생각하면 결과적으로는 제 삶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때가 많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별은 다른 분들 리뷰를 따라 주게 되더라고요. 이런 데서 나타나는 소심한 성격;; (아마도 유일하게[?] 별 하나 준 책이 있는데, 다름 아닌 이문열의 <선택>이랍니다. 읽음서 '쓰레기닷!!!'라는 생각을 했던--+)

lovelyhi 2006-10-29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신기하네요. 저는 이 책 읽고 정말 많이 느끼고 너무 좋았는데. 다 각자 다를 수 밖에 없지만..저에게 따끔하게 충고해주는 것 같아서 좋았어요.

실비 2006-11-02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래 자기개발서를 사서 보는데 그래도 볼수록 좋은점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근데 이책은 영 맞지 않네요.^^:;
 
행복한 이기주의자
웨인 W. 다이어 지음, 오현정 옮김 / 21세기북스 / 2006년 4월
구판절판


요컨대 우리는 주위의 상황이나 사람들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든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내가 불행하다면 그 이유는 주위의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 때문이다. 거침없고 다부진 사람이 되려면 그 생각을 바꿀 줄 알아야 한다. 일단 생각을 통제할 수 있으면 새로운 감정이 생겨날 것이며 거침없는 삶을 향해 첫발을 내딛게 될 것이다. -22쪽

스스로 자신의 생각을 판정해내는 데 안일한 사람은 있는 그대로의 금지된 것에 복종하고 말지. 그에게는 그것이 쉽거든. 그렇지만 어떤 사람들은 자기 내부에서 그 금지된 것을 스스로 느끼기도 한단 말이야. 그들에게 금지된 일들을 다른 사람들은 매일 할 수도 있고, 그들에게 허용된 일들이 다른 사람들에겐 금지되어 있는 일일 수도 있는거야. 요컨대 사람은 각자 독자적이어야 하는 거지.
(헤르만 헷세 <데미안>)-1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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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0-19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이라 그런지 데미안을 오랜만에 다시 읽고 싶어지네요.

이리스 2006-10-20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보다 미샤 3종 화장품이 더 크게 보이네. 화장품에 밑줄 그은줄 알았음 ㅋㅋ

마늘빵 2006-10-20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승연님 / 데미안 저도 좋아해요. ^^ 중학교 때 읽었는데 그땐 너무 어려웠어요.
구두누나 / 책도 사실 별루. 많이 팔렸다구 하는데 난 영 자기계발서는 다 그게 그거 가터. ㅋㅋ 화장품에 어떻게 밑줄을 그어.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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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빛바랜 오래된 옛 사진 한 장 살며시 바람에 날리는 기분이랄까. 소설을 읽고 난 뒤 마지막 장을 덮으며 살며시 눈을 감고 있는 나는, 그동안 꼬깃꼬깃 구겨넣은 마음의 응어리를 배출해낸 기분이었다. 후련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고 아직 미쳐 닦아내지 못한 눈물이 한두 방울 눈가에 맺혀있기도 하고, 똑 떨어지진 않았지만, 그리고 똑 떨어지지도 않겠지만, 딱 그만큼 슬픈 이야기. 읽는 내내 중간중간 울컥울컥 하며 와락 눈물을 쏟고픈 것을, 지나가는 길거리에서, 지하철안에서 그럴 수는 없지 않겠느냐. 꾹꾹 참아가며 눈물을 감추려 했지만 그러나, 이내 뚝 한 방울 바닥에 닿는다.

  개인적으로는 공지영이란 작가를 처음 대면한 계기이기도 했고 - 어떻게 그렇게 유명한 작가를 이제서야 대면할 수 있단 말이냐 다그치면 할 말 없다. 내가 그동안 책을 게을리 읽었다 할 수 밖에 - 그녀의 나머지 작품들에도 관심을 쏟고픈 마음이 든 책이기도 했다. 실제 그녀를 본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그녀는 작품에서 묻어나오는 손 대면 툭 터질 듯한 그런 슬픈 감성의 소유자는 아니라고 하지만, 되려 활발, 명랑, 유쾌, 발랄에 더 가까운 아주 천진난만한 소녀같은 수다쟁이 아줌마라고 하지만, 또 글을 쓰는 목적이 돈을 벌기 위함이라고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대놓고 이야기하지만, 그렇더라도, 그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더라도 소설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이미지는 너무나... 촉촉하다.

  사랑에 관한 이야기, 사형제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상처받은 이들이 서로를 치유하는 이야기. 소설은 보기에 따라 여러 관점을 가지고 있지만 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된 테마는 '사랑'이다. 어린 시절 난생 처음 유부남인 사촌오빠에게 그 짓을 당하고도 어머니와 오빠들에게 '침묵'이라는 또 한번의 상처를 받은 유정, 그리고 정말 이런 환경에서라면 이런 조건에서라면 이런 삶을 살 수 밖에 없었겠다 싶은, 오히려 그런 환경에서조차 이 악물고 열심히 살다 억울하게(?) 누명 쓴 사형수 윤수. 두 사람의 슬픈 사랑 이야기다. 모르고 있었다. 우리의 사랑이 시작되었음을. 알고 있었다. 우리의 사랑이 눈물로 끝나리란걸. 한 사람에겐 생을 마감하는 시간이, 한 사람에겐 홀로 생을 살아야하는 시간이, 그러나 두 사람에겐 공통적으로 이젠 더 이상 서로를 볼 수 없는 시간이 다가오리란 걸 알면서 두 사람은 짧은 만남이었지만, 또 남들이 데이트라 부를 수 있는 그런 데이트 다운 데이트 조차 한번도 해보지 못했지만, 그 누구보다 애틋하게 서로를 생각하며 미소지었고 서로를 바라보며 웃을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이랴.

 사형수에 대한 지나친 미화다, 라는 항간의 소설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에서 우리가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그들에게도 후회와 참회와 사랑과 용서의 시간이 있었음을, 필요함을, 일깨워준 이야기라고 할까. 나의 아픔은 타인에게 고백하는 시간을 통해 비로소 스스로를 치유할 수 있건만 유정이도 윤수도 스스로를 옭아맨 마음의 감옥 안에 갇혀 살아왔다. 상처를 받은 자는 상처를 받은 자를 통해 내 상처를, 그대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 애초 치유가 목적이 아니라 그저 이야기 나눌 상대가 필요했음을 알지만 그것은 마음을 열고 세상과 소통하는 길로 나아가는 여정이었다.

  친한 친구 하나 없이 감옥에서 대면한 사형수에게 나의 어린 시절의 아픔을 고백하고, 어릴적부터 사회로부터 소외되어왔던 비운의 사형수는 나와 잘 맞지 않을 것만 같은 잘 차려입고 대학에서 강의하는 부잣집 딸내미를 만나 그날의 일을 털어놓는다. 고백하는 자와 고백받는 자의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은 누구를 위한 눈물이던가. 나의 아픔을 고백하며 그날을 떠올리며 떨구는 그간의 서러움의 눈물이던가, 죽어마땅하다고 생각한, 돈 많은 부잣집 딸내미라고만 생각한, 상대방에게도 생각지못했던 그런 아픔이 있었구나 하는 상대에 대한 동정의 눈물이던가. 나를 위한 눈물이건, 상대를 향한 눈물이건, 그것을 따져 무엇하랴.

   인생은 고통의 연속이라는 흔하디 흔한 위로의 말을 그들에게 던지기엔 너무나 우습다. 유정과 윤수는 그간 어려움에 의지해왔고, 자신이 처한 어려움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었다. 어려움을 감수하는 것과 어려움에 의지하는 것은 어쩌면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들은 언제나 어려움에 의지해야 한다"는 릴케의 싯구절은 삶은 곧 고난이고,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고난을 당하고 이겨내는 것의 연속이라는, 오히려 고난에 의지하는 것이 삶이라는 의미로 해석해볼 수 있겠지만, 두 사람에겐 너무나 버겁고 힘겨운 고난의 세월들이 있었다.

  끝내 고난은 두 사람에게 떠나지 않고, 마지막, 사랑하는 한 사람의 죽음이라는 더할 수 없는 크나큰 형벌을 통해 사랑에 종지부를 찍는다. 그간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같은 고통을 주시나이까. 어렵게 어렵게 인고의 세월을 보냈고 이제서야 비로소 마음의 응어리를 훌쩍 꺼내보았건만 삶은 그리 쉽게 나를 놓아주지 않는구나. 사랑한단 말 한 마디 못해보고, 사랑하는 사람 한번 안아보지도 못하고, 이별은 갑작스레 닥쳤다. 펌푸질 하듯 울컥거리며 끝없이 눈물은 쏟아지나 한편에선 소설 따위 읽으며 펑펑 눈물 쏟는 내 자신을 보고 싶지 않아서 참아본다. 그러나 어찌하랴. 이미 떨군 것을. 눈물 쏙 빼고 나면 그동안 뭐 그리 많이도 쌓였던지 커다란 감정의 돌덩이를 내뱉은 기분이다. 후련하다. 내 마음은 후련하나 내 가슴은 슬프다. 이제 나의 이야기를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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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6-10-15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보신 분들의 공통적인 의견은...눈물이군요...
갈등이군요 봐야하나 말아야하나..^^

프레이야 2006-10-15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영화를 먼저 보아서인지 책을 읽으면서는 눈물이 나지 않더군요. 그보다 삶을 먼저 살다간 사람들의 경구들이 강한 인상을 주었어요. 리뷰도 좋지만 님의 따스한 감성이 더 좋습니다.^^

마늘빵 2006-10-15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님 / 눈물은 필수입니다... 좋잖아요. 책을 읽으며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게.
배혜경님 / 저도 영화를 먼저 봤어요. 전 책을 읽으면서 영화의 장면들이 자꾸 떠올라서 울컥울컥 하던데... 일부러 원작인 책을 더 나중에 봤어요. ^^

비로그인 2006-10-15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도,책도 멋져요.. 정말 눈물이 펑펑 쏟아지는 이야기에요..ㅠㅜ

마늘빵 2006-10-15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슈슈님 / ^^ 네. 한번 왈칵 쏟아내고 나면 시원해지실 겁니다.

kleinsusun 2006-10-18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상하게.....눈물이 나지 않았어요. 원래 잘 우는 편인데 말이죠.
대신....책을 읽으면서 "폭력"에 대해 생각했어요.
폭력이 폭력을 낳는 상황에 대해서.....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 준 소설이었어요.

sweetmagic 2006-10-23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못 울었어요... 진짜 잘 우는데...
책으로도 읽어 보고 싶네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6년 9월
절판


장난스럽게 듣고 있던 선우가 자세를 바로하고 혜완을 마주했다.
"그건 그렇지만 너도 한 가지 알아둬야 할 게 있는데...... 너한테는 약간 말이야..... 남자한테 오해를 하게 할 만한 부분이 있어. 나야 오해 안하지만 다른 사람들 말이야."
담배를 입에 가져가려던 혜완이 문득 동작을 멈추었다.
"그게 뭔데?"
반응이 생각보다 격렬했기 때문인지 선우가 입을 우물거렸다.
"말해봐. 그게 뭔데?"
"뭐라고 딱 꼬집을 수는 없지만 첫째로 말이야 넌 너무 잘 웃고...... 그리고 너무 정이 많아. 남자들은 그러면 가끔 오해해. 더구나 넌 지금 혼자고......"
혜완이 입술을 물었다. 선우가 실수를 깨달은 듯 서둘러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늦은 듯했다. -84쪽

"어쩌면 결혼 생활이 그렇게 이어져왔는지도 몰라. ...... 얼마 전에 <까미유 끌로델>이라는 영화를 보았는데 나는 알 수 있었어. 로댕이 왜 전부인을 버리지 않았는지. 예술을 할 때 그는 까미유 끌로델이라는 동료가 필요했지만 일상에서 그는 하녀가 필요했던 거야. ...... 예술에 대한 토론은 날로 새로워지니까 파트너가 늘 일정할 필요는 없지만 반복되는 일상에선 누군가 익숙한 사람이 좋았을 거야. 가령 미역국을 끊일 때 그가 조개를 넣고 소금간을 하는 미역국을 좋아하는지 아니면 쇠고기를 넣고 참기름에 달달 볶아 간장간을 하는 미역국을 좋아하는지 말야...... 애 아빠는 쇠고기 쪽을 좋아했거든. 나는 그가 좋아하는 그런 식의 입맛을 한 백 가지는 넘게 알고 있었지. 어쩌면 그게 우리 결혼 생활을 유지시켰을 거야." -115쪽

걷다가 돌아보니 밤이었다. 언제나 밤은 그렇게 왔다. 켜켜이 조금씩 내리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커다란 솜이불을 후루룩 펼치고 그것이 내려앉듯 짧은 시간에 어둠이 거리를 덮는 것이다. 거의 푸른색에 가까운 어둠 속에서 거리에 밝혀진 불빛들이 영롱했다. -144쪽

생은 언제나 갑작스럽게 불어닥치지 않았던가. 언제나 제멋대로 그녀가 어떤 준비도 하기 전에 생은 그녀의 머리칼을 잡아 다른 골목길로 내팽개치지 않았던가...... 그러나 갑작스레, 더 돌아보지 말고 해치워버리자. 돌연히 다가온 이 이별의 기회를 다시는 놓치지 말고..... 놓치고 나서 이 가을밤을 또다시 잠 못 이루지 말고..... 그녀는 걸음을 천천히 내딛었다.
그러나 생이 그녀를 예까지 데려와 팽개쳐버린 것이 사실이라 해도...... 그렇다고 해도...... 모든 것이 그녀의 손을 거쳐서 지나갔다. 선택은 어쨌든 그녀가 했던 것이다. -154쪽

- 같이 방송국 시험 안볼래?
혜완은 고개를 저었다.
- 왜?
- 웃을 수가 없어서 ......
- 그게 무슨 소린데.
- 아나운서들은 맨날 웃고 있잖아. 난 내가 싫은 일 있으면 하루 종일 화를 내고 있어야 직성이 풀리거든.
- 난 뭐 웃기 싫을 때도 잘 웃을 수 있다는 말같이 들리는구나. 하지만 그것도 소질이지.
농담이었지만 사실이기도 했다. 싫은 사람이 인터뷰 상대자로 나온다면 혜완은 그것이 아무리 카메라 앞일지라도 싫은 표정을 지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경혜는 할 수 있었다. 나쁜 느낌이 전혀 없이 그것은 소질이었고 어쩌면 어른스러움이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쩌면 웃고 싶지 않을 때도 웃어야 된다는 걸 자연스레 깨닫는 일인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210-211쪽

"나도 그저 봉건적인 여자 만나서 살림이나 하게 하면서 살고 싶은 마음도 있어. 그 여선생을 집안에까지 인사시켰던 것은 니가 이혼녀라서가 아니라, 그래서 집안하고 싸워야 될 일이 번거롭고 두려웠기 때문이 분명히 아니라...... 니가 니 입장을 분명히 하지 않는 한, 우리는 결국 얼치기 결혼 생활을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었던 거야. 내가 사랑했던 씩씩하고 꿋꿋했던 서혜완이는 어느날 갑자기 주눅이 든 채로 내게 기대기 시작했어. 그리고는 핑계를 댔지. 사회가, 남자들이, 혹은 내가 너를 그렇게 만든다고 말이야. 아니, 우리 어머니들은 그보다 강했어. 여자로 태어난 이상 넌 그것과 당당히 맞섰어야 했어...... 혼자서라도 우선 혼자서라도...... 다시 말하지만 내가 너에게 정말로 원하는 것은 그거야." (선우가 혜완에게)-272쪽

"나 실은 그 여선생한테 결혼 못하겠다고 했어. 너를 만나서 그 이야기를 하려고 했었는데..."
선우는 말을 하면서 혜완의 시선을 피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몇 번 눈을 깜박이던 혜완의 시선이 천천히 낙엽이 뒹구는 보도로 떨어졌다.
이미 가을도 깊었고 저 멀리서 겨울을 몰고 오는 바람만 두 사람 사이를 황량하게 스쳐가고 있었다.
"어느 날 그 여선생이랑 누나네 지벵서 만나기로 했지. 내가 가니까 여선생이 먼저 수제비를 만들고 있었어. 잘못 간을 맞추는 바람에 간이 조금 짰지...... 내 성격 알지...... 좀 짜군요. 내가 말했어. 그러자 그녀가 몹시 당황한 얼굴을 했어. 누나가 말했지. 요즘 요리 학원에도 다니고 있어 곧 좋아질 거야...... 그런데 빌어먹게도 하필이면 그때 니 생각이 난 거야...... 너 같으면 이렇게 말하겠지. 난 글 쓰는 것도 바빠. 간이 짜면 물을 좀더 부어 먹어. 싱거우면 간장을 치고...... 넌 나보다 요리 더 못하잖아? 만들어준 것만도 고맙다고 해야 옳을 것이지...... 왜 고맙다는 소리는 쏙 빼고 불평부터 하니? 넌 어머니나 누나가 요리를 해줘도 고맙다는 생각 안하는 것 같더라. 안 그래? 그건 분명히 고마운 거야. 이렇게 말이야. 말도 안되는 고집을 세워가면서......" -2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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