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6년 9월
절판


장난스럽게 듣고 있던 선우가 자세를 바로하고 혜완을 마주했다.
"그건 그렇지만 너도 한 가지 알아둬야 할 게 있는데...... 너한테는 약간 말이야..... 남자한테 오해를 하게 할 만한 부분이 있어. 나야 오해 안하지만 다른 사람들 말이야."
담배를 입에 가져가려던 혜완이 문득 동작을 멈추었다.
"그게 뭔데?"
반응이 생각보다 격렬했기 때문인지 선우가 입을 우물거렸다.
"말해봐. 그게 뭔데?"
"뭐라고 딱 꼬집을 수는 없지만 첫째로 말이야 넌 너무 잘 웃고...... 그리고 너무 정이 많아. 남자들은 그러면 가끔 오해해. 더구나 넌 지금 혼자고......"
혜완이 입술을 물었다. 선우가 실수를 깨달은 듯 서둘러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늦은 듯했다. -84쪽

"어쩌면 결혼 생활이 그렇게 이어져왔는지도 몰라. ...... 얼마 전에 <까미유 끌로델>이라는 영화를 보았는데 나는 알 수 있었어. 로댕이 왜 전부인을 버리지 않았는지. 예술을 할 때 그는 까미유 끌로델이라는 동료가 필요했지만 일상에서 그는 하녀가 필요했던 거야. ...... 예술에 대한 토론은 날로 새로워지니까 파트너가 늘 일정할 필요는 없지만 반복되는 일상에선 누군가 익숙한 사람이 좋았을 거야. 가령 미역국을 끊일 때 그가 조개를 넣고 소금간을 하는 미역국을 좋아하는지 아니면 쇠고기를 넣고 참기름에 달달 볶아 간장간을 하는 미역국을 좋아하는지 말야...... 애 아빠는 쇠고기 쪽을 좋아했거든. 나는 그가 좋아하는 그런 식의 입맛을 한 백 가지는 넘게 알고 있었지. 어쩌면 그게 우리 결혼 생활을 유지시켰을 거야." -115쪽

걷다가 돌아보니 밤이었다. 언제나 밤은 그렇게 왔다. 켜켜이 조금씩 내리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커다란 솜이불을 후루룩 펼치고 그것이 내려앉듯 짧은 시간에 어둠이 거리를 덮는 것이다. 거의 푸른색에 가까운 어둠 속에서 거리에 밝혀진 불빛들이 영롱했다. -144쪽

생은 언제나 갑작스럽게 불어닥치지 않았던가. 언제나 제멋대로 그녀가 어떤 준비도 하기 전에 생은 그녀의 머리칼을 잡아 다른 골목길로 내팽개치지 않았던가...... 그러나 갑작스레, 더 돌아보지 말고 해치워버리자. 돌연히 다가온 이 이별의 기회를 다시는 놓치지 말고..... 놓치고 나서 이 가을밤을 또다시 잠 못 이루지 말고..... 그녀는 걸음을 천천히 내딛었다.
그러나 생이 그녀를 예까지 데려와 팽개쳐버린 것이 사실이라 해도...... 그렇다고 해도...... 모든 것이 그녀의 손을 거쳐서 지나갔다. 선택은 어쨌든 그녀가 했던 것이다. -154쪽

- 같이 방송국 시험 안볼래?
혜완은 고개를 저었다.
- 왜?
- 웃을 수가 없어서 ......
- 그게 무슨 소린데.
- 아나운서들은 맨날 웃고 있잖아. 난 내가 싫은 일 있으면 하루 종일 화를 내고 있어야 직성이 풀리거든.
- 난 뭐 웃기 싫을 때도 잘 웃을 수 있다는 말같이 들리는구나. 하지만 그것도 소질이지.
농담이었지만 사실이기도 했다. 싫은 사람이 인터뷰 상대자로 나온다면 혜완은 그것이 아무리 카메라 앞일지라도 싫은 표정을 지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경혜는 할 수 있었다. 나쁜 느낌이 전혀 없이 그것은 소질이었고 어쩌면 어른스러움이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쩌면 웃고 싶지 않을 때도 웃어야 된다는 걸 자연스레 깨닫는 일인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210-211쪽

"나도 그저 봉건적인 여자 만나서 살림이나 하게 하면서 살고 싶은 마음도 있어. 그 여선생을 집안에까지 인사시켰던 것은 니가 이혼녀라서가 아니라, 그래서 집안하고 싸워야 될 일이 번거롭고 두려웠기 때문이 분명히 아니라...... 니가 니 입장을 분명히 하지 않는 한, 우리는 결국 얼치기 결혼 생활을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었던 거야. 내가 사랑했던 씩씩하고 꿋꿋했던 서혜완이는 어느날 갑자기 주눅이 든 채로 내게 기대기 시작했어. 그리고는 핑계를 댔지. 사회가, 남자들이, 혹은 내가 너를 그렇게 만든다고 말이야. 아니, 우리 어머니들은 그보다 강했어. 여자로 태어난 이상 넌 그것과 당당히 맞섰어야 했어...... 혼자서라도 우선 혼자서라도...... 다시 말하지만 내가 너에게 정말로 원하는 것은 그거야." (선우가 혜완에게)-272쪽

"나 실은 그 여선생한테 결혼 못하겠다고 했어. 너를 만나서 그 이야기를 하려고 했었는데..."
선우는 말을 하면서 혜완의 시선을 피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몇 번 눈을 깜박이던 혜완의 시선이 천천히 낙엽이 뒹구는 보도로 떨어졌다.
이미 가을도 깊었고 저 멀리서 겨울을 몰고 오는 바람만 두 사람 사이를 황량하게 스쳐가고 있었다.
"어느 날 그 여선생이랑 누나네 지벵서 만나기로 했지. 내가 가니까 여선생이 먼저 수제비를 만들고 있었어. 잘못 간을 맞추는 바람에 간이 조금 짰지...... 내 성격 알지...... 좀 짜군요. 내가 말했어. 그러자 그녀가 몹시 당황한 얼굴을 했어. 누나가 말했지. 요즘 요리 학원에도 다니고 있어 곧 좋아질 거야...... 그런데 빌어먹게도 하필이면 그때 니 생각이 난 거야...... 너 같으면 이렇게 말하겠지. 난 글 쓰는 것도 바빠. 간이 짜면 물을 좀더 부어 먹어. 싱거우면 간장을 치고...... 넌 나보다 요리 더 못하잖아? 만들어준 것만도 고맙다고 해야 옳을 것이지...... 왜 고맙다는 소리는 쏙 빼고 불평부터 하니? 넌 어머니나 누나가 요리를 해줘도 고맙다는 생각 안하는 것 같더라. 안 그래? 그건 분명히 고마운 거야. 이렇게 말이야. 말도 안되는 고집을 세워가면서......" -2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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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5년 4월
구판절판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왜냐하면 저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5쪽

할렘은 이를테면 뉴욕시와 그리고 도심지에서 돈을 벌며 사는 부자들에 대한 하느님의 고발이다. 할렘의 유곽과 윤락녀들과 마약중독자들과 기타 모든 것들은 파크 애비뉴의 의젓하고 세련된 가식 속에서 무수히 행해지는 이혼과 음행의 거울이요 우리 사회 전반에 대한 하느님의 평가이다.
(토마스 머튼)-6쪽

느끼지 못하는 것보다 사악한 것은 한 가지 뿐이지.
그건 당신이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거야.
(찰스 프레드 앨퍼드 <인간은 왜 악에 굴복하는가>)-17쪽

사람을 괴물처럼 대하면 그 사람은 괴물이 된다.
(범죄심리학)-35쪽

왕이시여! 이 때문에 울지 마소서
저들이나 또 다른 이들 가운데 그토록 짧은 삶에서
삶보다 죽음을 한 번 이상 원치 않은 이가 없나이다.
(헤로도투스 <역사>)-59쪽

슬픔 속에서 빵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
눈물에 젖은 채 내일을 갈망하며 밤을 지새우지 못한 사람
그들은 모른다 성스러운 힘을
(괴테)-70쪽

네가 어떤 사람인지 내게 말해보아라.
네가 어떤 하느님을 믿고 있는지 내가 말해주리라.
(니체) -90쪽

조용히 기다려라. 그리고 희망 없이 기다려라.
왜냐하면 희망은 그릇된 것에 대한 희망일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 없이 기다려라.
왜냐하면 사랑도 그릇된 사랑에 대한 사랑일 것이기 때문이다.
(T.S.엘리어트 <네 개의 사중주>)-105쪽

누구에게나 슬픔은 있다. 이것은 자신이 남에게 줄 수 없는 재산이다.
모든 것을 남에게 줄 수는 있지만 자신만은 남에게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신이 소유한 비극은 있다.
그 비극은 영원히 자신이 소유해야 할 상흔이다.
눈물의 강, 슬픔의 강, 통곡의 강,
슬픔은 재산과는 달리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 분배되어 있다.
(박삼중 스님)-126쪽

사람들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대지에 입을 맞추세요.
그리고 온 세상을 향하여 큰 소리로 외치세요.
"나는 살인자입니다."하고.
(한때 사형수였던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중, 소냐의 말)-140쪽

저는 기적을 믿지 않습니다.
다만 기적에 의지해 살아갈 뿐입니다.
(칼 라너)-154쪽

주위의 모든 사람이 진흙 같은 빵 한 조각 때문에 투쟁할 때
고상한 즐거움을 누리는 게 옳다고 할 수 있을까?
(크로포트킨)-175쪽

사형제도는 그 벌을 당하는 자들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있으나 마나 한 제도이다. 정신적으로 수개월 내지 수년동안 육체적으로
생명이 다하지 않은 제 몸뚱이가 둘로 잘리는 절망적이고도
잔인한 시간 동안 그 형벌을 당하는 사형수에게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다른 품위라고는 아무 것도 없으니, 오직 진실이라는 품위라도
회복할 수 있도록 이 형벌을 제 이름으로 불러서 그것이 본질적으로
어떤지 인정하자. 사형의 본질은 복수라는 것을.
(알베르 카뮈 <단두대에 대한 성찰>)-214쪽

우리는 곰팡내 나는 지하실과 비좁은 감옥에 앉아서
금가고 파괴적인 운명의 기습을 받아 신음한다. 우리는 결국 사물에
그릇된 광채와 잘못된 존엄성을 더 이상 부여하지 않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구제받지 못한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해야 한다.
(나치의 감옥에서 죽은, 알프레드 델프) -237쪽

너무 늦게 당신을 사랑했나이다.
이토록 오래되어도 늘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이다지도 늦게야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나이다.
(성 아우구스틴)
-254쪽

신비롭게도 사람이 삶을 배우는 데 일생이 걸린다.
더더욱 신비롭게도 사람이 죽음을 배우는데 또 일생이 걸린다.
(세네카)-269쪽

그가 못된 행실을 한 자라고 해서 사람이 죽는 것을 내가 기뻐하겠느냐?
주 야훼가 하는 말이다.
그런 사람이라도 그 가던 길에서 발길을 돌려 살게 되는 것이
어찌 내 기쁨이 되지 않겠느냐?
(구약, <에제키엘서>)-287쪽

나는 항상 이것만은 말하고 싶었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틀림없다고 확신하는 것은
우리들은 언제나 어려움에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어려운 쪽이 바로 우리들의 몫이지요.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2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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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10-09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69쪽 세네카의 말이 가슴에 박힙니다. 그리고 카뮈의 단두대에 대한 성찰도... 오늘 이 책을 선물 받았어요. 영화보다 더 좋을 듯 싶네요.

마늘빵 2006-10-09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영화도 봤는데 영화보다 책이 낫습니다. 영화를 먼저 봐서 책을 보며 울컥 울컥 한 부분이 많았어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5년 4월
구판절판


"왜 이제야 나한테 왔어? 귀국하고 내가 몇 번 수녀원으로 전활 했는데 늘 안 계시더라구."
"그래...... 고모가 많이 바빴어. 그래서 미안해. 변명하자면 난 네가 이제 그만 서른이 넘었으니...... 다 큰 줄 알았던 거지."
미안하다는 말을 듣자, 마음이 서늘해왔다. 고모가 내게 미안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내가 미안했다. 서른이 넘도록 아직 다 크지도 못해서, 나는 미안했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처럼 그런 표현들을 할 수가 없었다. 미안해, 고마워, 사랑해 같은 말들을, 그냥 건성으로 하는거 말고 진정 그 말이 필요할 때, 그 말이 아니면 안 되는 바로 그때에는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31쪽

신기하게도 기억은 그 당시에 보이지 않았던 많은 것들을 보게 해준다. 무대 구석에서 작은 제스처를 하는 엑스트라에게 비추어지는 핀 라이트처럼, 기억은 우리에게 그 순간을 다시 살게 해줄 뿐 아니라 그 순간에 다른 가치를 부여한다. 그리고 그 가치는 때로 우리가 우리의 기억이라고 믿었던 것과 모순될 수도 있다. -129쪽

"목사나 신부나 수녀나 스님이나 선생이나 아무튼 우리가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 위선자들 참 많아. 어쩌면 내가 그 대표적 인물일지도 모르지...... 위선을 행한다는 것은 적어도 선한 게 뭔지 감은 잡고 있는 거야. 깊은 내면에서 그들은 자기들이 보여지는 것만큼 훌륭하지 못하다는 걸 알아. 의식하든 안 하든 말이야. 그래서 고모는 그런 사람들 안 싫어해. 죽는 날까지 자기자신 이외에 아무에게도 자기가 위선자라는걸 들키지 않으면 그건 성공한 인생이라고도 생각해. 고모가 정말 싫어하는 사람은 위악을 떠는 사람들이야. 그들은 남에게 악한 짓을 하면서 실은 자기네들이 실은 어느 정도는 선하다고 생각하고 있어. 위악을 떠는 그 순간에도 남들이 실은 자기들의 속마음이 착하다는 것을 알아주기를 바래. 그 사람들은 실은 위선자들보다 더 교만하고 더 가엾어...... ."
바보같이. 지금 그거 나 들으라고 하는 말이야? 하고 나는 묻지는 않았다. 그런데 가슴 한 구석, 내가 보여주기 싫어하는 내 속옷 깊은 곳의 흉터를 보여주는 것처럼 수치심이 몰려왔다. 나는 앞에 가는 승합차를 한 대 추월해버렸다. 차가 휘청하자 고모가 손잡이를 잡았다. -1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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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사랑과 사회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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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없다! 타월 위에는 한 점의 핏자국도 남아 있지 않다. 아무리 봐도 순백의 시트 위는 깨끗하다. 머릿속이 온통 까매지고 정신이 아뜩해져온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자전거를 타지도 않았고, 심한 운동을 한적도 없었다. 나는 다시 한번 침대 시트를 샅샅이 살피고 타월을 뒤집어보기까지 한다. 그러나 짧고 구불구불한 몇 올의 털만 떨어져있을 뿐, 내 몸에서 흘러나왔어야 할 붉은 꽃잎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시트 위에 천천히 커버를 덮는다. 그의 목소리가 귓전에 먹먹하다. "너 되게 뻑뻑하더라"
(낭만적 사랑과 사회 中)-33쪽

주차장까지 걸어 나오는 동안 그는 내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 아주 잠깐 우리의 손끝이 스쳤지만 우리의 눈빛은 마주치지 않았다. 그는 자동차의 운전석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조수석의 문을 열어주지 않는건 다른 남자애들한테도 흔한 일이었따.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정말 괜찮았다. "통금이 열시라면서? 좀 늦었네." 나는 다소곳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참. 줄게 있었는데. 잊어버릴 뻔했네." 그는 뒷좌석에 손을 뻗쳐 쇼핑백을 집었다. 실내등을 켜자 황갈색 쇼핑백에 선명히 아로새겨진 루이뷔통의 로고가 드러났다. 쇼핑백 안에는 백과 똑같은 재질의 종이 상자가 들어있었다. 조심조심 상자 뚜껑을 열어보았다. 반투명하고 매끄러운 습자지로 한 겹 덮인 그것은 모노그램 캔버스 라인의 진짜 루이뷔통 백이었다. 짝퉁이 아닌 진짜 명품을 갖는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비싼 거 아니니까 부담 갖지 마. 면세점에서 그냥 하나 사놨던 거야." 높낮이가 없는 목소리였다.
(낭만적 사랑과 사회 中) -33-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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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리타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1년 4월
평점 :
품절


  <암리타>를 마지막으로 오늘을 기준으로 하여 지금까지 나온 그녀의 모든 소설을 다 읽었다. 무슨 니체 읽기 독파 같은 지적인 만족감을 주는 작업도 아니고 대뜸 왜 내가 그녀의 모든 소설들을 다 읽고 싶어졌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아마도 처음 읽었던 그녀의 어떤 소설이 너무나 좋았던 나머지 다른 모든 작품을 읽어야겠다고 시도했겠지만 전 권을 다 읽은 지금 처음의 그 느낌은 남아있지 않다. 그녀의 소설은 모두 판박이처럼 닮아있다. 각기 다른 등장인물과 줄거리를 가지고 이야기를 구성하는데도 마치 전에 읽은 그녀의 소설을 또다시 읽는 듯한 느낌이다. 내용은 이어지지 않는 시리즈를 보는 느낌이랄까. 그것은 그녀만의 독특함을 각인시켜주기도 하지만 지루함과 따분함이라는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일본 소설가들 중에서 한국인에게 가장 인기 있는 작가는 아마도 무라카미 하루끼와 요시모토 바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 중에서도 요시모토 바나나는 읽기에 거부감이 없고 편안하다. 그녀가 소설 속에서 펼쳐놓는 문장들은 아기자기하고 섬세하며 때로는 귀엽기까지 하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쓰리다. 그것은 문장이 쓰린 것이 아니라 삶이 쓰린 것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이. 어찌보면 내용면에서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온갖 어두운 삶의 모습들을 들여다보기에 너무나 현실과 동떨어져있다는 인상을 줄 법도 한데 막상 그녀의 소설을 읽고 있으면 그런 생각은 나지 않는다. 근친, 강간, 이복형제, 부모의 죽음 등등 암울한 이야기들로 가득하지만 우리가 곧 그 암울함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은 털썩 주저 앉아있는 그를 향해 손을 내미는 다른 인물들 때문일 것이다. 절망에 빠져 어두운 방구석에 처박혀 혼자 엉엉 눈물 쏙 빼고나면 정신이 맑아지는 경험이라고나 할까.

  고통과 토닥임과 치유와 정화의 과정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그녀의 소설은 이제 읽지 않아도 시작부터 끝까지의 과정이 눈에 보인다. 하지만 언젠가 내가 또 그녀의 소설을 읽은 후 리뷰를 쓰면서 언급했듯, 다 알면서도 접하게 되는 것은 그때마다 내가 안고 있는 나의 고통을 치유하고 싶기 때문이다. 홀로 된 나에게 쉽게 손 내밀어 줄 사람은 보이지 않고, 그건 내가 누군가에게 나의 고민과 고통을 털어놓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위로의 수단으로서 기분전환의 수단으로서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그들의 이야기를 찾아 함께 울어줌으로써 그도 나도 현재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마지막 소설을 읽으며 뭔가 뿌듯함을 느낄 법도 하지만 그런 것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녀의 다음 작품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눈길이 가겠지만 내가 다시 그녀의 소설을 볼지는 모르겠다. 그녀의 소설을 읽으며 별스런 재미나 감동이나 쾌락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이 중독된 상태인지도. 다시 그녀를 찾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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