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사건
엘리에트 아베카시스 지음, 이세진 옮김 / 예담 / 2006년 9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읽고 몇몇 여성들에게 물어봤다. 여자에게 있어서 행복한 사건이 뭐일 것 같아요? 어떤 이는 남자, 어떤 이는 소개팅, 어떤 이는 결혼, 어떤 이는 임신, 어떤 이는 남편의 죽음 이라 했다. 남편의 죽음은 제일 가까이에 있는 그녀의 대답. -_-  엘리에트 아베카시스라는 어려운 이름을 가진 프랑스의 작가의 소설 <행복한 사건>은 저들의 대답 중 어느 한 가지를 다룬 책이다.

  이 소설의 제목은 써있는 그대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정 반대의 의미를 함유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여성에게 있어 '임신'이라는 것은 나와 사랑하는 남자의(물론 강간이나 원나잇 등의 원인으로 임신도 가능하지만 이런 것은 예외로 치고) 아이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그것은 일종의 하나의 사랑의 결실이기에 임신한 여성에게도, 임신한 여성을 아내로 가지고 있는 남자에게도 행복한 사건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임신과 동시에 출산과 동시에 모든 환상은 깨져버리고 말았다. 아 행복했던 나날이여. 연애는 달콤했고 신혼생활 또한 달콤했으나, 임신과 출산으로 달콤함은 쓴 맛이 되어버렸다. 아아 행복했던 나날이여.

  "니콜라는 내 배에 올려진 아기를 보았다. 그제야 겨우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눈에 천사의 얼굴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아기는 내가 기대하던 장밋빛 뺨에 미소를 띤 얼굴이기는커녕, 이게 왠 원숭이 새끼인가 싶었다. 털 많고, 지저분하며, 태지와 분비물을 뚝뚝 흘리고, 온몸이 붉은색과 보라색으로 얼룩덜룩하며, 예쁜 구석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P72)

  "그보다도, 이 애는 누구인가?
레아. 이기주의와 무관심으로 똘똘 뭉친 괴물, 오로지 제 개인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 나를 써먹는 아이, 타인에 대한 관심은 눈곱만치도 없이 오직 자신의 생존에만 맹목적으로 매달리는 존재, 그저 먹는 것 말고는 다른 생각이 전혀 없는 식충이. 아기는 오로지 먹기 위해 살았다. 아기는 식사를 끝내자마자 어느새 소화시켜 버리고는 다시 배를 채워야만 했다. 아기에게는 먹는 것 말고는 뭐든 의미가 없었다. 그렇지만 권력은 예외일지도. 아기는 권력을 좋아했다. 아기가 권력을 휘두르는 순간에는 만사 제치고 달려가야지, 안그러면 분노를 터뜨렸다. 아기는 화가 나기 시작하면 얼굴이 새파래졌다. 그리고 히스테리, 조울증, 정신분열증 등 광기의 온갖 징후를 여실히 드러냈다. " (P94)

  아아 세상에 어느 엄마가 어디 다리밑에서 주워온 아이도 아니고, 남편이 바람피다 생긴 아이를 데려온 것도 아닌, 제 아이를 향해 이토록 가혹한 말을 쏟아낼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이 진정 '행복한 사건'이란 말인가. '행복'은 어느새 '불행'으로 치환되어버렸다. 나는 불행해 나는 불행해 나는 불행해. 어서 이 괴물을 어떻게 좀 해줘.

  철학 박사 논문 심사를 앞두고 있는 그녀는 갑작스레 닥쳐버린 이 현실이, 헤어나올 수 없는 이 현실이, 너무나도 힘겹다. 나는 어떻게 하라고. 내 인생은, 내 할 일은. 다 끝났지 뭐. 이놈의 애새끼가 애물단지로 둔갑하고 내 인생을 갉아먹고 있다. 이눔의 시끼, 이눔의 시끼.

  하지만 그녀는 곧 이런 혼란 속에서 주변의 다른 엄마들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남편과의 다툼, 외도, 돌아온 현실 속에서 생각한다. 그녀는 어느새 철학자가 되어있다. 인생의 철학자가.

  "아이를 갖고 그 아이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행복을 희생한다. 자기 인생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데도 배턴을 넘겨주기 위해 스스로 희생한다. 그래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따르는 것이다. 이 모든 방정식을 풀거나 풀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아이를 낳고, 번성하며,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고, 부모에게 꽉 매여 살고, 좀 자유로워지는가 싶으면 이제 자식들에게 더 꽉 매여 살아간다. 행복, 그래 행복이다. 하지만 한 순간이다...... 그게 인생이다. 그리고 그것이 인생에서 기대할 수 있는 전부다...... " (P238)

  소설 제목 '행복한 사건'은 '행복하면서도 불행한 사건'의 요약된 제목이다. 연애와 결혼, 그리고 둘만의 신혼생활은 매우 달콤했다. 하지만 아이가 생기면서 닥쳐오는 일상의 변화들은 너무도 이전의 달콤함에 비해 쓰디 쓰다. 애 새끼는 밤낮으로 울어대지, 밥달라 칭얼거리지, 밥먹이고 나면 끅끅 대며 한 시간 동안 트름해야지, 똥오줌도 못가리고, 싱긋싱긋 웃다가 앙앙 울어대기도 하고, 집안의 모든 권력을 다 쥐고 있다. 애 새끼가 어떤 행동을 하면 마당쇠와 무수리는 개그맨도 됐다가, 요리사도 된다. 원하는대로 - 원하는 바가 뭔지를 차라리 말이나 해줬으면 좋으련만 - 최고의 권력자를 위해 무슨 일이든 해야한다. 그러나 이내 그것이 현실이고, 인생임을 그리고 행복임을 깨닫는다. 다만 이전의 달콤함과는 다른 따뜻함의 느낌으로 행복은 찾아왔다. 그것이 아기가 사랑하는 두 남녀에게 선사한 선물과도 같은 또다른 사랑이다.

  분명코 결혼한 부부가 아기를 낳느냐, 안낳느냐 하는 부분은 두 사람의 인생에 있어 매우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아기를 낳지 않음으로써 생기는 경제적 여유를 가지고 두 사람은 좀더 많은 문화생활과 여행을 향유할 수 있다. 또한 아이에 시달리며 이런저런 집안일들에 치여살 필요도 없고 오직 두 사람의 즐거움을 그리고 각자의 원하는 바의 인생을 살면 된다. 하지만 아기를 낳는 순간 그것은 소설 속에서 작가가 그려낸 천국에서 지옥으로 옮겨간 듯한 인생을 감수해야만 한다. 그것이 천국이 되는가 지옥이 되는가 하는 문제는 두 사람에게 달려있다. 사랑하는 서로의 모습을 아기를 통해 볼 수 있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입가에 미소가 활짝 벌어지는 행복한 일이다. 어떤 길을 선택하는가는 두 사람에게 달려있다. 그러나 생각컨대 후자를 택한다 할지라도 갑작스레 변한 현실이 고달프기는 하겠지만 '고달픔=불행'은 아니리라. 변화는 언제나 두렵고 혼란스럽다. 하지만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평온이 찾아온다.

  "책은 사르트르의 소설 <구토>와 카프카의 <변신>을 떠올리게 한다. 사르트르와 카프카 만큼이나 염세적이고 어둡지는 않지만, 오히려 밝고 재밌지만, 내면 묘사에 있어서는 사르트르 못지 않았다. 임신한 여성의 1인칭 시점으로 서술된 이 소설은, 어떤 특별한 사건이 전개되며 줄거리가 진행된다기보다 정체된 상태에서 '임신'이라는 테마를 가지고 주인공의 심리변화에 따라 시선을 옮겨가고 있어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었던 작품이다. 평생 임신과 출산을 경험해 보지 못할 내가, 임신한 여성이 겪는 심리적 변화를 미리 경험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혹여 언젠가 결혼을 해서 사랑하는 아내가 아이를 갖게 되는 날, 아마도 나는 이 소설을 떠올리지 않을까 싶다." (<행복한 사건>  표지 뒷면에 실린 나의 글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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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10-01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님, 리뷰 쓰셨네요^^ 전 아직입니다.. 뒤쪽 책날개에 있는 님의 서평을 읽어보았어요. 그러잖아도 이름을 보고 님이길래 알라딘에 밝혀서 공개하고 소문 퍼뜨릴까^^ 생각중이었는데요.. 그래도 되나요? 리뷰도 멋집니다..

마늘빵 2006-10-01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핫. 배혜경님 제 이름을 알고 계셨나요? ^^ 쑥쓰... 제가 머 여기에 인용하면서 밝혔는데요 뭐. ^^ 감사합니다.

비로그인 2006-10-02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독특한 시선이네요. 보통 아이를 낳으면 낳는 고통보다 키우는 기쁨을 먼저 더 크게 이야기하곤 하는데 '지옥'이라고까지 표현하는 것을 보니 상당히 육아를 버거워하는가봅니다.그래도 아이가 커가는 과정이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라고까지 하잖아요. 님께서 혹시 이 책을 읽고 출산과 육아의 과정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실까봐 강조하는데 아이 키우기 정말 재밌어요. 다시 하라면 못하겠지만요.
 
미덕과 악덕에 관한 철학사전
A. C. 그레일링 지음, 남경태 옮김 / 에코의서재 / 2006년 8월
품절


"남들에게 어떻게 살라고 강요하기보다는 각자 자신의 뜻에 맞게 살도록 내버려두는 편이 인류에게 훨씬 더 큰 이득이다."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21쪽

타인에 의해 저질러진 도덕적 실책을 용서하는 것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훌륭한 태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도가 있다. 동정심을 전혀 보이지 않는 사람들, 즉 고문, 살인, 폭력, 강간, 억압을 일삼는 사람들과 그것을 명하는 사람들은 그 한도에서 벗어난다. 세계 역사를 살펴보면 그런 자들의 이름이 너무나 잘 알려져 있어 여기서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을 듯 하다.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은 낭비일뿐더러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짓을 저질러도 된다고 용인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런 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비가 아니라 세상을 위한 정의다. -26쪽

예절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대체로 자신의 가치를 잘못 인식한다. 그리고 아르바이트 의대생일지 모르는 웨이터나 짬이 나면 문학상을 겨냥하여 소설을 쓰고 있을지 모르는 버스 운전기사를 인간 자체로서가 아니라 직업으로(더 구체적으로는 소득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결례는 여기서 나온다. 다른 사람을 자기 마음대로 규정짓거나 돈으로 환산하게 되면 상대방을 목적이 아닌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칸트가 말했듯 인간을 그렇게 대하는 것은 큰 무례일 뿐 아니라 큰 잘못이기도 하다. -29쪽

(그래서는 안되겠지만) 설사 화해 불가능한 가치들이 공존한다는 상대주의적 견해를 인정한다고 해도, 그리고 그 딜레마를 해결할 방책을 도저히 못 찾겠다고 해도, 사회의 존립이 걸린 그 끊임없이 흔들리는 미묘한 평형을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가 최선의 희망을 걸어야 할 것은 바로 예의다. -29쪽

타협은 양측 모두에게 만족을 주어야 한다. 자신의 원래 몫은 전혀 잃지 않으면서 얻어내야 할 것보다 더 많이 얻었다는 즐거운 믿음을 양측에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유능한 협상가는 양측 모두 자신이 똑똑해서 그런 성과를 거두었다고 믿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31쪽

용기와 양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가장 힘든 상태에서 가장 값진 교훈이 나온다는 것을 안다. 그렇게 보면 진짜 패배란 패배감에 빠져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하는 경우다. -42쪽

주관적 관점에서 볼 때 죽음은 태어나지 않은 상태, 혹은 꿈없이 잠을 자는 상태와 다를 바 없으므로 아무런 공포를 수반하지 않는다. 다만 두려운 것은 장차 죽으리라는 예상이다. 하지만 죽음 역시 생명 활동의 일부분이다. 오로지 살아 있는 존재만이 죽을 수 있는 것이다. 먹고, 걷고, 행복을 느끼고, 병에 걸리는 여느 일상 행위들처럼 죽음 역시 하나의 기쁨일 수 있다. 다만 죽음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죽음의 경험은 다른 사람들을 떠나보낼 때만 겪게 되는데, 이때 커다란 슬픔이 따른다. 그러므로 우리가 겪는 죽음은 사실 우리 자신의 경험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오로지 삶만을 경험할 뿐 죽음을 경험하지는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주관적을 볼 때 불멸의 존재나 다름없다. -47쪽

자연주의적 견해에서 보면 죽음은 태어나지 않은 것과 동일하므로 특별히 가져가느냐에 따라 좋고 나쁨이 정해질 따름이다. 죽음이 가져가는 것이 견딜 수 없는 영원한 고통이라면 좋은 죽음이요, 기회와 희망,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가져간다며 나쁜 죽음이다. 죽음의 당사자는 죽음으로 자신이 무엇을 잃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죽음 자체가 나쁘지 않다는 주장도 있다. 나쁜 것은 무엇인가를 잃는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잃으리라는 예상인 것이다. -49쪽

"언젠가 모든 일이 잘 되리라는 것은 우리의 희망이고, 오늘 벌어진 모든 것이 좋다는 것은 우리의 착각이다." (볼테르) -54쪽

"희망은 인간의 고통을 연장시킨다는 의미에서 가장 나쁜 악이다."(니체) -55쪽

희망은 실현 여부를 떠나 하나의 미덕이다. 희망은 그 자체로 독립적인 가치이자 목적이며, 용기와 상상력, 가능성과 기대에 찬 긍정적인 태도와 관련이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한 사람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사람의 업적이 아니라 그 사람의 희망을 알아야 한다. 지금 우리가 추구하는 최선은 희망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55-56쪽

"한쪽이 솔직하면 서로가 소직해지고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게 된다. 이 점은 포도주나 사랑이나 마찬가지다." (몽테뉴)-65쪽

살아가기 위해 거짓말이 꼭 필요하다는 사실은 인생의 잔인한 한 측면이다.(니체) -66쪽

결과와는 무관하게 어떤 일이 있어도 거짓말이 용납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플라톤 같은 사람들은 진실을 알면서도 거짓을 말해야 하는 상황에서 곤혹감을 느낀다(차라리 진실을 모르는 상태에서 틀린 말을 한다면 거짓말이 아니다) 그런 경우 이중의 죄를 짓게 된다. 하나는 진실을 알면서도 숨긴 죄요, 또 하나는 의도적으로 상대방을 거짓으로 이끈 죄다.
이런 곤란한 점 때문에 후대의 철학자들, 특히 칸트 같은 사람은 철학자들만 아는 영리한 태도를 취했다. 그에 의하면 거짓말은 어떤 일이 있어도 인정할 수 없지만, 거짓말과 다르고 의미도 약한 부정확한 말은 때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완전한 거짓말이 상대방을 독살하는 수준이라면 부정확한 말은 멀리서 공격하는 정도라는 것(칸트의 비유)이다. -68쪽

조국과 친구 중 어느 한쪽을 배반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조국을 배반할 배짱을 가졌으면 좋겠다" (포스터)

"친구란 내가 잘못된 길을 걸을 때도 같은 편을 들어주는 것" (마크 트웨인) -75쪽

망상은 착각과 다르다. 착각은 원래 감각기관의 왜곡된 인식에 의해 생기는 것으로, 심리보다는 신체적인 문제에 원인이 있다. 흔히 보는 마술쇼가 착각을 유도하는 좋은 사례다. 하지만 착각은 믿음인아 희망의 의미로도 쓰인다. 가령 어떤 사람이 자신의 아내나 직업에 관해 착각할 때 그것은 의식적인 오해다. 착각은 망상보다 약하고 덜 나쁜 상태를 가리키며, 병리적인 것이 아니라 실수로 인해 빚어진다. -86쪽

무엇인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것이 살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공자) -89쪽

민족주의를 갈구하는 욕구 자체는 나쁠 것이 없으나 문제는 그것이 수용해서는 안되는 욕구와 섞인다는 데 있다. 우리느 모두 자신의 일을 스스로 해결하고자 한다. 거기까지는 좋다. 또한 우리는 우리의 발전을 가져오고 개인과 집단의 정체성을 만들어준 문화를 높이 평가한다. 여기까지도 좋다. 그러나 민족주의자들은 다른 집단과 문화가 자신들의 문화를 저해한다고 설득한다. 그래서 그것을 막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민족성, 지리, 언어 또는 종교의 일체성으로 규정되는 독특한 집단의 구성원이라고 생각해야 하며, 주변에 벽을 세워 '외국인'을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타자를 그냥 타자로 보는 것만으로 부족한 것이다. 거기서 더 나아가 타자를 우리의 생활 방식, 우리의 일, 심지어 우리의 딸들에게까지 위협적인 요소라고 간주해야만 한다. -108쪽

증오는 인간의 나약한 면을 보여준다. 자신의 두려움과 불안을 밖으로 표출하여 다른 것에 고착시키는 유치한 정서이기 때문에 그렇다. 충분한 근거를 바탕으로 다른 사람을 미워할 경우(예컨대 정직하자ㅣ 못하거나, 악의가 있다거나, 배신을 한 경우) 적절한 반응은 경멸할 만한 사람에게는 그 이상의 격렬한 감정을 내비칠 가치가 없다. 프랑스의 작가 라 로슈푸코가 말했듯이 "증오심이 지나치게 격해지면 그 대상을 증오할 가치조차 없어진다."
도덕주의자들, 즉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소심한 도덕관념(특히 최근들어 나타나는 실패한 가족적 가치관)을 강요하는 사람들은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이면 누구나 증오할 자세를 갖추고 있다. 그러한 심리는 이렇게 분석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과 다른 결정이나 생활양식을 두려워하고, 남들의 관심과 경험에 무지하며, 스스로 중요하다고 여기는 규율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질시하고, 남들이 하는 일에 대해 혐오와 분노를 느끼는 것이다. 바로 이런 것들이 증오의 구성요소다. -119 쪽

"누군가를 증오하는 것은 그 내부에 있는 자신의 일부분을 증오하는 것이다."
(헤르만 헷세) -120쪽

집단을 통째로 증오하기는 쉽지만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을 증오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가령 우리가 어떤 개인을 미워하거나 경멸할 수는 있다. 하지만 충동적으로 증오감을 드러내는 것은 다른 문제다. 결국 자기 내부에 깊은 거부감이 있다는 것이므로 그것은 무엇보다 증오하는 사람 자신의 정서적 결핍을 명확히 드러낸다. 게다가 어떤 집단의 일원일 경우 반대 집단을 증오하는 것은 더 쉽다. 증오는 집단정신의 자연스러운 정서이며, 일종의 신앙심처럼 광범위하게 퍼지는 무형의 히스테리이기 때문이다. -120쪽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증오하면 그 증오가 점점 커져 곧 전 인류를 증오하게 된다." (사르트르) -120쪽

보복을 하려는 사람은 자신의 적과 똑같은 사람이다. 그러나 보복을 포기하면 적보다 우월한 사람이 된다. (프랜시스 베이컨) -121쪽

"쾌락의 추구가 진정 죽음과 고통의 두려움을 몰아낼 수 있다면, 또 욕망은 한계를 가르쳐 줄 수 있다면 무절제를 비난할 이유가 없다." (에픽테토스) -126쪽

"포도 덩굴은 세 종류의 포도를 키운다. 첫째는 쾌락이요, 둘째는 도취요, 셋째는 구역질이다." (아나카르시스)-128쪽

"인간 최악의 불행은 자신이 이미 가진 것을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가지지 못한 것,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을 빼앗긴다는 사실이다." (자크 마리탱) -132쪽

교회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교회가 주도하는 자선활동이 국내외에서 큰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사실이다. 다른 세속적인 지원 단체와 마찬가지로 교회의 자선활동 역시 필요하다. 그러나 다음의 세 가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첫째, 세속적인 단체들은 인도주의적인 측면에서 활동하는 것이므로 초자연적인 힘에 관한 믿음에 호소하여 근거를 설명하거나 동기를 찾을 필요가 없다. 둘째, 세속적인 단체들은 도움을 받는 사람들에게 명시적인거나 암묵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특정한 세계관, 가령 로마가톨릭교나 기타 교단 등 특정 신앙을 내세우지 않는다. 셋째, 종교단체들의 보잘것없는 자선활동은 역사적으로 종교가 세계에 가한 엄청난 양의 고통을 상쇄하지 못한다. -140쪽

인간이 미신을 믿는 이유는 상상력이 지나쳐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상상력이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산타야나) -176쪽

외설은 정확한 법적 정의를 내리기 불가능한 용어다. 법정의 관행상 그것은 '판사에게 충격을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버틀란트 러셀) -183쪽

요컨대 훌륭한 야망은 책임성 있는 야망이다.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대가를 치를 각오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단순한 야망은 노력 없이 도약하려 하고 손쉽게 사다리를 오르려는 욕심이다.
그 차이를 익숙한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면, "작가가 되고 싶다"라고 말하는 사람과 "글을 쓰고 싶다"라고 말하는 사람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 전자는 칵테일파티에서 돋보이고자 하는 태도이고, 후자는 책상에서 홀로 긴 시간을 보내기로 결심한 태도다. 또한 전자는 지위를, 후자는 과정을 원한다. 어떤 사람이 되려는 것이 전자라면 어떤 일을 하려는 것이 후자인 것이다. -215-216쪽

거울을 보면 자신의 얼굴을 알 수 있고, 예술 작품을 보면 자신의 영혼을 알 수 있다. (조지 버나드 쇼) -220쪽

아무 할 일 없이 자유로운 상태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즐거움은 일하는 것이다. (마크 트웨인) -226쪽

평화는 승리의 기대감보다 더 좋고 안전하다. (리비우스)-229쪽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것은 늘 어린이로 살아가려는 것과 같다. (키케로) -242쪽

동물 행동학자들은 원숭이와 영장류의 사회구조를 구분한다. 전자는 무리의 힘을 폭력적으로 동원하여 질서를 유지하는 '고통'의 사회구조이며, 후자는 자신을 돋보이게 하여 사회적 서열을 정하는 '쾌락'의 사회구조라는 것이다. 비비원숭이의 경우 대장 수컷이 자신의 힘을 과시하면 다른 비비들은 도망을 친다. 반면에 침팬지의 대장 수컷이 그렇게 하면 다른 침팬지들은 앉아서 지켜본다. -248쪽

늙는다는 것은 바쁜 사람이면 가질 수 없는 나쁜 습관이다. (앙드레 모루아)-260쪽

선물의 가치를 가격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사실은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시의 적절하고, 배려가 담겨 있고, 참된 우정이나 사랑이 깃든 선물의 가치는 도저히 돈으로 측정할 수 없다. 그러한 선물은 주는 사람의 자아 일부분을 전달한다. 그 선물 속에는 주는 사람이 받을 사람을 열심히 생각한 결과, 무엇이 자신의 느낌을 가장 잘 대변해줄지 정성껏 찾고 고른 과정이 반영되어 있다. -263쪽

"나는 당신에게 무엇을 주었는지 알지만 당신은 나에게 무엇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냉철한 이야기다. 하지만 그것은 다음의 진리를 말해준다. 자신이 받은 선물이 진정 무엇이었는지 아는 사람은 선물을 준 상대방을 아주 잘 알거나 무척 사랑한다는 것이다. -265-2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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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휘소 평전 - 한국이 낳은 천재 물리학자 이휘소의 삶과 죽음
강주상 지음 / 럭스미디어 / 2006년 8월
구판절판


노벨상은 학문적 성취에 대한 최고의 인정이다. 그러나 노벨상이 학자의 목표가 될 수는 없다. 학문을 닦다 보면 큰 공헌을 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그 공이 인정되는 과정이 노벨상이다. 마치 올림픽 경기에서 금메달을 추구하는 태도로 노벨상을 바라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흔히 업적도 중요하지만 행운도 따라야 한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학문의 분야는 다양하고 심도가 깊은 것이다. 노벨상은 기초 연구 결과를 중시하기 때문에 국가적으로 기초 과학 발전의 중요한 지표가 된다. 과학상 분야에서 노벨상을 배출한 나라는 30여 개국인데 한국은 포함되지 않는다. 여러 명을 배출한 나라들은 G7처럼 경제 선진국이거나 러시아, 중국, 스페인처럼 오랜 역사와 전통이 뚜렷한 나라들이다. 한국은 세계 10위권 경제강국이고 역사와 전통에서는 어느 나라 못지 않은 자부심을 자랑하면서도 아직까지 한 명의 노벨 과학상 수상자도 배출하지 못한 것은 과학 교육과 기초 과학 연구에 무언가 문제가 있음을 시사한다. -1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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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휘소 평전 - 한국이 낳은 천재 물리학자 이휘소의 삶과 죽음
강주상 지음 / 럭스미디어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휘소 평전>은 지난 세월 이휘소란 유명한 물리학자의 삶에 대한 오해를 밝혀주고자, 그의 삶에 대한 진실을 말해주고자 나온 책이다. 많은 논란이 되었다고 하는 - 나는 읽지 않아 모르겠다 - <소설, 이휘소> 와 유명한 것은 알고 있다만 난 아직 읽지 않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통해 드러난 물리학자 이휘소는 사실 여부를 알 수 없는 각종 오해와 허위 조작에 의해 포장되었다고 주장한다. 학자로서 42살의 젊은 나이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그가 지금 이렇게 다시 주목을 받는 것은 그가 남긴 업적들이 너무나도 뛰어나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인 77년 그는 페르미 연구소 연구심의회 참석을 위해 콜로라도로 가던 중 키와니 부근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함께 동행했던 그의 가족들은 무사했다.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지나고 2006년 그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 '한국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었다. 그것이 지금 이 책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35년 가난했던 시절, 일반적인 가난한 가정에 비해서는 유복하다 할 수 있는 집에서 태어나 줄곧 모범생의 길을 걸으며 당시 가장 인기 있었다고 하는 서울대 화공학과에 입학했다. 이후 전공을 물리학으로 바꾸어 오하이오 대학에 편입하였고, 여기서 학사 졸업, 이후 학비문제로 고민하다 피츠버그 대학 대학원에서 석사를,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박사를 받아, 그곳에서 교수생활을 했다. 이후 대학과 연구소를 거치며 활발한 연구활동을 했다.

  유명인들에겐 항상 뒷말과 조작된 소문이 따라다닌다. 이휘소 역시 예외는 아니었고, 젊은 나이에 미국의 어느 한 도로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하며 그의 죽음은 당시 한국의 정치상황과 연계하여 이런저런 소문으로 뒤덮혔다. 그 주장은 이것이다. 박정희가 그를 불러다 핵무기 개발을 하려고 했고, 그는 미국의 연구소에서 핵무기 개발과 관련된 연구자료를 빼돌리다 적발되어 미국 정보 기관에 의해 암살당했다는 뭐 그런 이야기. 그것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서 묘사된 그의 인생이다. 그러나 그것은 소설이었고, 실존 인물을 끌어다가 소설적 허구를 뒤집어씌운 어디까지나 거짓에 불과했다. 그러나 당시 그 책이 대박터지면서 이 책을 읽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그대로 믿었고, 그는 이론 물리학자로서가 아닌 핵물리학자로서 알려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연구는 핵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

  93년 발간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로 사실과 관련없이 오해를 받아야 했던 이휘소의 인생이 그로부터 13년이 지난 지금에야 제대로된 사실로서 다시 조명받고 있다. 더구나 이 책은 실제 미국에서 이휘소의 아래에서 지도를 받았던 제자인 강주상에 의해 씌여졌기 때문에 더더욱 믿을 만 하다. 그는 이휘소가 모친에게 보냈던 100통이 넘는 친필편지와 당신이 외딴 나라에서 만난 이휘소에 대한 인상과 보고 느낀 것을 서술하고 있다.

  이 책은 '소설'이 아닌  '평전'으로서, '거짓'이 아닌 '진실'을 말하고 있다. 글은 매우 솔직하고 담백하며 그저 있는 사실 그대로를 기술해내고 있다. 애써 기교를 부리거나 화려하게 치장하려 하지도 없던 사실을 첨가하여 과장하려 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글을 따라 13년간 오해받았던 이휘소의 태어남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인생의 행로를 따라간다. 그가 지금도 살아있다면 70대의 할아버지가 되어있을 것이고 그는 그간 왕성한 연구활동으로 어쩌면 김대중 전 대통령에 앞서 먼저 최초의 노벨상을 수상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물리학에 문외한인 인문학도인 나로서는 그의 업적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잘은 모르지만 이 책에 묘사된 그의 학문에 대한, 물리학에 대한 열정과 애정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으리라 생각한다. 늦게라도 이렇게 그가 제대로 된 시각에서 주목받은 것은 참 다행이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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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9-22 0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3년전 일부러 사서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아주 재미있게 읽고 조금전까지도 그것을 사실인냥 믿고 있었는데 허탈감과 황당함이 밀려듭니다.

마늘빵 2006-09-22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많은 이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실존인물에 대한 소설적 허구는 거짓을 진실로 만들어버리는 위험을 안고 있기에 더 조심스러워야 하는데.
 
그림 보여주는 손가락
김치샐러드 지음 / 학고재 / 2006년 8월
평점 :
품절


 

  '절대 사지 말 것'. 하지만 이 말은 애써 그와 같은 작업을 시도했던 저자 김치샐러드에게는 가혹한 말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정말 그렇다. 심심풀이로 번뜩이는 상상력으로 별다른 의도 없이 자신의 블로그에 연재하기 시작했던 명화와 이를 설명하는 '그림 보여주는 손가락'은 아무런 죄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이 '절대 사지 말 것'이라는 욕을 먹어야 하는 이유는, 저자 김치샐러드가 아닌 출판사에 있다.

  학고재. 꽤나 고전틱하고 고풍스럽기도 하고 뭔가 깊이있는 냄새가 나는 이 출판사는 그간 꽤나 묵직한 책들을 펴냈다.  <완당평전>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서서>  <미술이 걸어온 길> <미의 사색가들>이란 제목을 달고 나온 책들이 이를 보란듯이 증명하고 있다. 그런데 왜? 지금까지의 출판 행보와는 전혀 동떨어져보이는 이 가벼운 책이 나온 것은 어떤 이유일까.

  <그림 보여주는 손가락>에 실려있는 내용들은 개인 블로그에 심심풀이(?) 삼아 올린 것치고는 꽤나 정성스럽고 공을 들인 흔적이 보인다. 그리고 또한 이런 시도는 매우 신선했다. 그러나. 블로그에 올라와서 인기를 끌 수 있는 콘텐츠라 하더라도 그것이 책으로 내어지는 것은 또다른 문제다. 블로그에 연재되어 주목을 받는 것이 있는가 하면 책으로 출판되어 많은 사람들의 손에서 읽혀야 하는 것이 있다. 자격의 문제라고나 할까. 누가 책으로 낼 수 있는 콘텐츠의 질을 따지고 자격을 부여하는가 하는 문제를 떠나서, '종이책'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가 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이런 '자격'의 문제가 아닌 '예의'의 문제가 된다. 그래도 이 정도는 되어야 책이라 할 수 있지, 라는 엄격히 정해놓은 기준이 아닌 대략적으로 '책'이라는 것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감이 있고 최소한의 그것을 충족시켜줘야할진대, <그림 보여주는 손가락>은 결코 그렇지 못했다.

  또 다른 한편에서 반대의 긍정적인 시각으로 볼 수도 있다. 기존의 책에 대한 접근하기 어려운 이미지를 깨자는 시각이 그것이다.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뭔가 오~ 하는 감탄사와 함께 존중의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책을 읽는다는 행위 그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뭔가 대단해보이는 이미지, 일단 이것은 책이 뭔가 아무나 쉽게 접해서는 안되는, 대해서는 안되는, 고급문화쯤으로 분류되는 시각이라고나 할까. 인터넷에 연재되던 귀여니 소설이 처음 나왔을 때 이게 무슨 소설이냐 이런 정도라면 나도 쓰겠다, 라는 비판은 "기존 소설은 적어도 어느 정도의 질이라는 것이 있었다"를 전제한다. 그러나 당시 논쟁에서 한편으로는 이건 소설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것이다 등의 찬사 또한 반대에 위치해 있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라면 <그림 보여주는 손가락> 역시도 기존의 그림에 대한, 특히나 명화에 대한 고급스러운 이미지와 아무나 접해서는 안되는 접근불가능성의 장벽을 허물어주었다고 평가해도 될까. 또 김치샐러드가 블로그에 명화에 낙서(?)를 하며 연재했던 것도 이런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과 긍정적인 시각은 이런 식으로 가능할지 모르지만 개인적으로는 책읽는 행위를 티비 오락프로그램이나 드라마를 보는 것보다 상위의 문화방식으로 존중(?)하는 나로서는 이는 책에 대한 모욕이다 라고 밖에 말 할 수 없다. 위에서 밝혔듯 이와 같은 가벼운 책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시각이 존재하고 있음을, 또 생각할 수 있음을 알고 있지만, 나는 아직 책이 어느 정도의 최소한의 독자에 대한 예의로서 질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쪽이다. 나는 저자 김치샐러드를 욕하진 않는다. 그것은 블로거로서 꽤나 대단한 일을 했으므로. 하지만 학고재에 대해선 욕을 할 수 밖에 없겠다. 심심풀이 작업으로 책까지 쓰게 된 저자에게는 책이 나온 기쁨을 억누를 길이 없겠지만 이 책은 그다지 그다지 별로 결코 누군가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리고 다시 읽을 생각도 없다. 솔직히 읽다 말았다. 그 시간이면 다른 더 좋은 책을 한 권 더 볼 수 있겠다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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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6-09-21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찔려요 흑... 책으로 내선 안될 걸 몇권이나....흑.

마늘빵 2006-09-21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_- 헉. 아녀 마태님 책이 왜요. 이 책을 한번 보셔야 돼요. 그래야 이해가.
전 마태님 책 재밌게 봤는데. '책'으로서.

Kitty 2006-09-22 0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블로그는 몇번 본 적이 있는데 책이 나왔다고 해서 좀 놀랐어요.
님 말씀대로 책까지 낼 만한 내용인가? 싶어서요.
그런데 출판사가 학고재라니 더욱 놀랍군요 -_-;;

stella.K 2006-09-22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정보를 알려주는 독자가 필요하긴 하죠. 리뷰 쓰는 사람들 아프님처럼 하기 쉽지 않거든요. 특히 저 같은 사람은 읽다가 말 확률이 농후하죠.

반딧불,, 2006-09-22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감합니다. 기가 막히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