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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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기억이란 시간이 흐를수록 멀어져 가고, 나는 이미 너무나 많은 것들을 잊어버렸다. 이렇게 기억을 더듬으면서 글을 쓰고 있으면, 나는 가끔 몹시 불안한 기분에 휩싸이곤 한다. 어쩌면 내가 기억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상실해 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기 때문이다. 내 몸 속에 기억의 외딴 곳이라고나 부를 만한 어두운 부분이 있어서, 소중한 기억들이 모두 거기에 쌓여서는 부드러운 진창으로 변해 버린 건 아닌가 하고. -24쪽

죽음은 삶의 반대편 극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 -49쪽

책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 읽은 후에 가끔씩 눈을 감은 채 책의 향기를 가슴속에 담곤 했다. 책의 향기를 맡으면서 책갈피에 손을 대고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한 기분을 맛볼 수가 있었다. -58쪽

"현대 문학을 신용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야. 다만 시간의 세례를 받지 않은 걸 읽느라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것 뿐이지. 인생은 짧아." -59쪽

나는 나오코를 안으면서 그녀에게 설명해 주고 싶었다. 나는 지금 너와 섹스를 하고 있다. 나는 네 몸 속에 들어가 있다. 하지만 이건 아무 것도 아닌 일이다. 아무 문제도 아니다. 다만 육체의 뒤섞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우린 서로의 불완전한 육체를 맞댐으로썸나 이야기할 수 있는 것들을 지금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우린 다만 서로의 불완전함을 나누어 가지고 있는 것이다, 라고. -210쪽

"저, 저, 뭔가 말해 줘"
"무슨 이야기?"
"뭐라도 좋아. 내 기분이 좋아질 만한 것."
"너무 사랑스러워."
"미도리"
"이름을 불러 줘."
"너무 사랑스러워, 미도리."
"너무라니 얼마만큼?"
"산이 무너져 바다가 메워질 만큼 사랑스러워"
"자긴 정말 표현 방법이 아주 독특한 걸"
"네게서 그런 말을 들으니 흐뭇한데"
"더 멋진 말을 해줘"
"네가 너무 좋아, 미도리"
"얼마만큼 좋아?"
"봄철의 곰만큼"
"봄철의 곰?"
"그게 무슨 말이야, 봄철의 곰이라니?"
"봄철의 들판을 네가 혼자 거닐고 있으면 말이지, 저쪽에서 벨벳같이 털이 부드럽고 눈이 똘망똘망한 새끼곰이 다가오는 거야. 그리고 네게 이러는거야. '안녕하세요, 아가씨. 나와 함께 뒹굴기 안하겠어요?' 하고. 그래서 너와 새끼곰은 부둥켜안고 클로버가 무성한 언덕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온종일 노는 거야. 그거 참 멋지지?"
"정말 멋져"
"그만큼 네가 좋아" -354쪽

"내 헤어 스타일 괜찮아?"
"굉장히 좋아"
"얼마나 좋아?"
"온 세계의 숲에 있는 나무가 다 쓰러질 만큼 멋져"
"정말 그렇게 생각해?"
"정말 그렇게 생각해."-394쪽

나는 아무리 애를 써도 잠을 이룰 수 없는 밤에 나오코의 여러 가지 모습을 생각했다.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 속에는 나오코의 추억이 너무나 가득히 채워져 있었고, 그 추억들은 정말 작은 틈새를 억지로 헤집고 잇따라 밖으로 튕겨 나오려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분출을 억누르는 것은 아무래도 불가능했다. -410-411쪽

그 장소에서 죽음이란 삶을 결말짓는 결정적인 요인이 아니었다. 거기서 죽음이란 삶을 구성하는 많은 요인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나오코는 죽음을 안은 채 거거ㅣ서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괜찮아, 와타나베. 그건 그저 죽음일 뿐이야. 마음 쓰지 말아."하고. -4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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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8-01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은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글이 마음속으로 쏙쏙 들어옵니다. 책을 손에서 놓고 잠깐씩 눈을 감고 생각해보았던 장면들입니다.저는 특히 58쪽 문장을 읽으며 공감했어요.

비로그인 2006-08-02 0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젇 58쪽을 읽으면서 너무 좋다고 생각했는데...^^ 이래서 책이 너무 좋아요^^

마늘빵 2006-08-02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승연님 / 반갑습니다. 처음인듯... ^^ 이 책 참 생각해 볼 것이 많은 책이었어요. 그래서 몇년 뒤에 다시 봤을 때 또다른 느낌으로 접하고 싶어요.
슈슈님 / 연애는 잘 되어가시나요? ㅋ

이리스 2006-08-08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9 페이지의 글귀는 내 스무살 다이어리에 앞장에 적혀 있던 것. ㅋㅋ
아, 다시 <상실이 시대>라니 10년이 지나서 보니 이것 참 새롭다.

마늘빵 2006-08-09 0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나도 이거 다시 봤삼. 2년전인가 보고 다시 보니 새롭던데...

이쁜하루 2006-08-17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다시 읽고 싶어지네용 ^^
 



  장래 시인이 되고 싶었던 한 청년에게 총 556만원을 훔친 상습절도죄로 징역 17년 형이 내려졌다. 당시 대통령 전두환의 동경 전경환이 새마을 사업 비리로 약 70억 상당의 돈을 횡령하고 징역 7년형이 내려졌으며, 2년 3개월 뒤 풀려놨다. 17년형을 받은 한 청년은 이에 반발하며 1988년 10월 8일 교도소 이감 중 동료 12명과 함께 탈주에 성공하여 서울 한 복판에서 9일간 인질극을 벌이다 죽었다.

  영화 <홀리데이>는 그런 영화다. 1988년 대한민국에서 서울 올림픽이 끝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 한복판에서 일어났던 인질극을 그린 영화다. 그 인질극의 주인공 지강헌을 그린 영화다. 지강헌은 가난한 삶을 살았지만 시인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불우한 환경을 극복하지 못하고 상습 절도로 17년을 선고받았으며,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이 자신보다 훨씬 많은 70억을 횡령하고도 2년 3개월만에 풀려나자 분노했다. 정당한 분노였다. 분노란 것에 '정당한'이라는 수식어를  쓸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지만. 어쨌든 그것은 당연했다.

  대부분의 탈옥수들이 잡혔지만, 지강헌을 비롯한 총 4명은 이후 8일간 강도짓을 하며 버텼고, 서울 북가좌동의 한 가정집에 들어가 인질극을 벌이다 경찰의 포위를 받고, 일부는 자살, 지강헌 역시 할 말을 다 한 채 깨진 유리조각으로 목을 찔러 자살을 시도했으나, 숨이 붙어있는 상태에서 경찰의 총탄 두 발을 맞아 다음날 죽었다.



  지강헌은 경찰의 불심검문에도 단 한번도 걸리지 않았으며, 기회가 있었기에 충분히 도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애초 탈주를 시도한 원인이 되었던 것에 대해 할 말을 다 하고자 인질극을 벌이며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죽어갔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돈이 있으면 죄가 있어도 죄가 아니고, 돈이 없으면 죄가 없어도 죄가 있다. 물론 지강헌은 상습절도죄로 수감되었지만, 그의 불우한 환경이 아니었다면 그는 그의 희망대로 훌륭한 작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환경이 사람을 변화시켰고, 그 책임을 환경탓만으로 돌릴 수는 없지만, 그는 고개를 끄덕일만한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죽어갔다. 비지스의 홀리데이 대신 스콜피언스의 홀리데이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그는 자신의 원대로 말을 다 한 채 죽어갔다.

  "웃기는 소리하지 마라! 이 사회는 너희처럼 큰소리치는 놈들이 망쳐 놓은 거다! 너희 같은 놈들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됐고, 돈 없는게 죄다! 나는 돈 없고 빽 없는 놈이라 이렇게 된 거다! 도둑놈? 범죄자는 바로 너희 같은 놈들인데.... 바로 너부터 죽여버리겠다!”

  “대한민국의 비리를 밝히고 죽겠다! 영등포 교도소에서 죽지 못한 게 한이다 ‘有錢無罪, 無錢有罪’ 우리나라 법이 이렇다!”

 “나는 지금 무척 행복하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 있고, 내 할말 다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있다. 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시를 한편 남기겠다. 내 유언을 한마디로 줄이면 나는 행복한 거지가 되고 싶었던 염세주의자이다!”

  이것이 지강헌이 남긴 말이다. 나는 행복한 거지가 되고 싶었던 염세주의자라는 말. 그는 정말 그랬을 것이다. 행복한 거지가 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를 그대로 두지 않았다. 세상에 대한 비관은 세상에 대한 증오로 바뀌었다. 증오는 희망으로 변하지 않았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88년 지강헌이 죽어가며 한 말이지만 2006년 아직도 이 말을 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것은 왜일까. 얼마전 판사들이 변호사로부터 뇌물을 받고 판결을 내려줬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한 두명이 아니라 엄청난 규모의, 꽤나 높은 직책에 있는 이들조차도, 우리가 믿고 우리의 죄를 심판해달라고, 우리의 억울함을 벗겨달라고 요청해야할, 판사들이 뇌물을 받고 판결을 내렸다. 그리고 그 판결은 애초 요구받았던 그대로였다. 돈이 있으면 확실히 죄가 있어도 죄가 아니다. 그리고 돈이 없다면 죄가 없어도 죄이다. 아이에게 고기를 먹이고 싶어서 정육점에서 고기를 훔치고, 동네 구멍가게에서 라면을 훔치다 잡혀간 사람들, 물론 그들은 죄를 지었다. 절도죄를. 하지만 그것은 순수하게 그들의 잘못이라 말 할 수는 없을 터이다. 돈이 없으면 반드시 죄가 되는건 아니지만, 죄를 저지르기 쉽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아직도 유효하다. 약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앞으로 20년이 지난 뒤에 이 말이 입가에 다시 맴돌지 않길 바랄 뿐이다. 그러나. 안다. 그것이 오직 희망사항이란 것을. 정의는 언제나 현실과 멀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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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인 2006-07-26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有錢無罪 無錢有罪 라는 말! 요즘이 더 맞는 시대인 것 같습니다.

프레이야 2006-07-26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보며 당시 뉴스에서 나오던 장면이 겹쳐지더군요. 저 창살 장면 .. 미화된 부분도 있었지만 괜찮았던 영화에요..

마늘빵 2006-07-27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어린시절이라 이런 사건이 있는줄도 몰랐어요. 나중에야 알았죠.

책방마니아 2006-07-27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 이런 사건 있는지 정말 몰랐단 말이야? 우리 초등학교 3학년 땐가 이 사건이 티비에서 생중계로 방영되었던 게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데? 나도 이 영화를 보면서, 1988년 올림픽을 열면서 (당시 정부의 정당성을 국내외적으로 인정 받기 위한 꼼수였다고 볼 수 있지) 이미지 개선을 위해 서울 내 빈민촌 등이 철거되는 과정이 씁쓸하게 느껴지더라. 근데 이 영화 속 가상의 인물을 연기한 최민수 말이야. 목소리 너무 오버하는 거 같더라. 비열한 연기를 하는 것 까진 좋은데, 너무 겉멋 들이는 것 같아 좀 거슬렸음 ~

마늘빵 2006-07-27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민수 연기는 항상 좀 그렇더라구. 느끼하구 오버하는 느낌. 음. 난 이런 사건 있는줄 몰랐는데. 그때 내가 뭐 하고 놀았길래 그렇지. 하긴 그땐 뉴스같은거 거의 안봤어. -_-
 

* 스포일러 경고

  조디 포스터, 덴젤 워싱턴, 윌리엄 데포 라는 특급 배우와 스파이크 리 라는 검증받은 감독의 이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다 보고 난 뒤에 가장 먼저 찾게 되는 것은 시나리오의 주인공이다. 매년 수없이 많은 헐리우드 액션/범죄/스릴러 영화들이 출몰하지만 다 거기서 거기인지라 이제 더 이상의 신선한 소재들이 나올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혹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와 같은 신선한 영화들이 나오기도 하지만, 대략 다 거기서 거기. <인사이드맨>은 다르다. 이 영화를 보고 나를 압도한 것은 배우들도 감독도 아니었다. 화려한 액션씬도 아니었다. 줄거리였다. 시나리오.

  러셀 게르위츠. 그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도 그런 것이 그의 데뷔자이 <인사이드맨>이니 뭐 할 말 있겠는가. 롱아일랜드 출신에, 컴퓨터 공학자였다가 부동산 중개업까지 두루거쳤다는 그는 <인사이드맨>의 시나리오로 대번에 헐리우드의 행운아가 되었다. 물론 운 뿐 아니라 그의 노력도 무시할 수 없었겠지만. 이 영화의 성공 이후 그는 이후 두 편의 범죄영화 시나리오를 주문받았다고 한다.



* 푸른페인트작업복에흰마스크에검은선그라스. 너는 누구냐.

  "범죄가 인질의 경계가 사라진 그곳에서 완전 범죄는 시작된다" 
  
  월 스트리스의 한 은행이 대낮에 무장강도 몇 명에 의해 점령됐다. 수십명의 고객과 은행직원들이 있었고, 경찰도 있었지만, 순식간에 은행은 범죄의 현장으로 둔갑했다. 핸드폰과 열쇠를 압수당하고, 남자와 여자로 분류되어 속옷을 제외하고 다 벗은 채 푸른색 페인트 작업복과 하얀 마스크가 주어졌다. 인질과 범인은 구별되지 않는다. 다만 총을 들고 명령하는 자가 범인이다. 하지만 이 역시 곧 알쏭달쏭해진다. 범인은 인질로 위장하고 인질 틈에 뒤섞여있다. 누가 인질인지는 모른다. 누가 범인인지도 모른다. 범인의 얼굴을 보지 못했고, 인질 틈에 섞여있는 범인의 얼굴을 봤다 해도 그를 범인이 아닌 같은 인질로 봤으니 더우 헷갈릴 밖에.

  은행에서 없어진 것도 없고, 죽은 사람도 없다. 범죄현장은 특공대에게 주도권이 넘어가고 현장은 마무리되었지만 범인도, 사라진 돈도, 죽은 사람도 없다. 당연히 범죄현장이라고 할 수 도 없다. 몇시간동안 인질을 붙잡은자가 누군지도 모른다. 이대로 사건은 마무리 될 것인가. 완전 범죄는 가능했다. 그것은 내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지 않으면 된다. 의외로 간단하다. 사라진 것은 은행소유주가 나치 치하에서 돈을 긁어모았다는 문서와 다이아몬드. 그러나 계좌에 기록되어있지 않으니 없어졌다 할 수도 없고.

   이런 어이없는 영화는 처음이다. 사건은 미해결로 끝났다. 아니 그것을 미해결이라고 해야하는가. 담당형사의 상사의 말마따나 없어진 것도, 다친 사람도 없으니 된거 아니냐. 묻어라. 월 스트리트 한 복판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된 인질극은 그저 아무 것도 아닌 일로 묻혀지게 생겼다. 정말 어이 없다. 하지만 와 이런 시원한 영화가 있나 싶다. 결코 이 영화에 투자한 시간이 아깝지 않다. 128분, 두 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은 절대 지루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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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에서 제일 인기 없는 감독, 김기덕.
  대한민국 영화계에서 버림받은 감독, 김기덕. 
  그치만 유럽에서 제일 잘나가는 감독, 김기덕.

  김기덕 감독 만큼이나 말 많은 감독도 없으리라 생각한다. 전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감독이지만 정작 국내에서는 완성된 영화를 걸만한 극장이 없는, 상반된 두 가지 모양새를 가지고 있는 감독이다. 그의 영화에서 보여지는 가학과 피학의 변태성, 그리고 적나라한 잔인함, 여성비하적 태도 등이 대중이 싫어하는 주된 이유일 터이다. 남성보다는 많은 여성들이 김기덕 감독을 싫어하고, 또 그를 좋아하는 매니아적 여성팬층도 있는 것은 또다른 묘한 모습이다. <해안선>이라는 영화 역시 그가 지금껏 해왔던 작업의 연장선이다. 장동건이 주연으로 출연했다고 해서 세간의 관심을 좀더 이끌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김기덕 표' 영화는 어디가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보여지는 군대생활의 장면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나 현재에는 찾아보기 힘든 요소들도 가지고 있다. 아무리 군대가 민주화된다 하더라도 역시 군대인 점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고, 그렇기에 변할 수 없는 부분도 당연히 있다. 왜냐면 군대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민주화된 현대의 군대에서 이 같은 장면들이 많이 사라진 것은 또 사실이지만, 지역에 따라, 부대에 따라 차이가 있고, 여전히 어떤 곳은 이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또다른 사실일터이다. (참고로 내가 근무했던 강원도 강릉의 어느 부대 또한 그러했었다. 그리고 나는 영화에서 보여지는 많은 부분을 몸소 체험했다. 당하는 자로서) 소위 말하는 까라면 까 정신. 하라면 한다, 할 수 있다, 등등의 무대뽀식 상하 명령과 복종의 체계. 내가 군대를 싫어하는 주된 요인이다.   영화는 이를 적나라하게 그대로 보여준다.

   "경고! 밤 7시 이후 이곳을 접근하는 자는 간첩으로 오인되어 사살될 수도 있습니다" 

  간첩 잡는데 혈안이 되어있는 강상병. 군사 경계 지역 안에서 야밤에 쾌락을 즐기던 남자와 여자. 강상병의 야시경에 신원을 알 수 없는 남자가 잡히고 그대로 발포, 사살. 남자는 포탄에 온몸이 찢겨죽고, 여자는 미쳐버렸다. 괴물체를 잡았다는 이유로 포상을 받은 강상병은 휴가 중 애인으로부터 버림받고, 부대에 왔으나 정신이상으로 의가사제대, 하지만 그는 미친 채 다시 부대로 돌아와 부대원들을 하나 둘 사살한다. 정사를 벌이다 애인이 죽어버리고, 자신은 미쳐버린 미영은 헤헤 거리고 주변을 돌며 부대원들와 섹스를 하고, 임신한다. 동생의 임신을 알게 된 오빠는 끝내 그들 중 하나를 찔렀다가 경찰서로 연행된다.

  이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영화에서 다소 작위적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나간 것도 사실이지만, 감독은 대한민국의 군사적 현실을 지적하고 싶었던 것이다. 간첩을 잡기 위해 밤에 잠도 자지 않고 눈에 불을 켜고 해안경계근무를 서는 병사들이 간첩이 아닌 민간인을 사살하고 표창받는 어이 없는 현실을, 죄 없는 사람 죽이고 포상휴가까지 받은 병사가 사람을 죽였다는, 죄 없는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하다 미쳐가는 현실을, 남들이 보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소대장을 비롯한 부대원들이 미친여자를 강간하고 임신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야밤에 초소안에서 아이를 지워버리는 그런 현실을. 너무나 작위적이라고 말 할지 모르지만 해안경계근무를 서며 부대에 근무해본 경험으로 말하건대, 현실과 많이 어긋났다고 이야기할 수 없다. 민간인과 군인의 충돌로 인한 사고사례는 하루에도 몇건씩 접수되고 있으며, 군인의 민간 여자 강간, 강도, 폭력, 절도 등등의 사건들은 상당부분 병사들에게 전파되지 않고 묻혀진다. 그것이 대한민국 군대의 현실이다.

  군대 중 죽은 병사는 '자살'처리는 기본이다. 백일 휴가를 앞두고 잔뜩 들떠있던 한 녀석이 어느날 아침 바다 위에 시체로 둥둥 떠있다면, 그것은 자살이다. 군대는 재조사를 요청하는, 의문사 진상 규명을 요청하는 많은 아버지와 어머니들의 요구를 무시하고, 자살로 결론내린다. 7,80년대의 일이 아니라 지금의 현실이다. 민주화 민주화 그러지만 우리나라는 아직도 상당 분야에 있어 민주화되지 못한 곳이 수두룩하며, 군대 또한 그곳 중 한 곳에 불과할 뿐이다. 병사들의 복지를 위해 월급을 올렸다는, 병영생활개선을 위해 좁은 침상이 아니라 침대를 놓겠다는, 컴퓨터를 통해 가족들과 연락을 주고 받을 수 있게 하겠다는, 밥을 줄이고 반찬의 종류를 늘리겠다는, 기타 등등의 언론에 오르내리는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은 그저 겉모습에 불과할 뿐이다. 폭력을 근절하겠다고 외치고, 캠페인을 한다고 해도, 군대에서는 결코 폭력/가혹행위를 근절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 군인들이 더 잘 알며, 군대 내에서 행해지는 부적절한 행위들의 상당수가 아무렇지 않게 소초장 선에서, 중대장 선에서, 대대장 선에서 무마된다는 것 또한 군대를 다녀온 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터.

   영화 <해안선>은 우리나라의 군대 현실에 대한 많은 부분을 생각케해준다. 한번쯤 꼭 봐야할 영화이다. 군대에서 <블랙호크다운> 같은 전쟁영화를 보여주며  저 장면에서 쓰이는 장비가 무엇이라는둥 하는, 전쟁의 참혹함은 배제한 채 전쟁을 즐기고 있는 군대 간부들이여 각성할지어다. <블랙호크다운>을 통해 당신들이 병사들에게 보여주어야 할 것은, 각종 신종 화력무기의 강력함이 아니라 전쟁의 참혹함이다. 군대 비판을 차단하기 위해 한참 군대문화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던 <한겨레21>의 구독을 못하게하는 것도 그들의 잘못이다. 비판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 조직은 언젠가 와해될 수 밖에 없다. <해안선>과 같은 영화를, 군인이라면 꼭 봐야한다. <국방신문>에는 주적 북한을 없애자 류의 글이 아니라 군대에서 일어나는 각종 문제점들을 알리는 글이 실려야한다. 현실에 눈감지 말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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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마니아 2006-07-27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군대를 안갔다와서 그런지. 이 영화 보고 해병대 (영화 실제 배경) 출신이 제법 멋있어 보이더라구. 장동건의 연기 변신도 넘 멋있었구. 이 영화 촬영할 당시 배우들이 고생 무진장 했다더라. 김기덕 감독이 해병대 출신이라서 scene 하나하나를 실감나게 만들려고 지옥 훈련을 시켰다더라.
너 이 참에 '용서 받지 못한 자'도 한 번 보지 그래.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 작품과 동명인데. 우리랑 동갑내기 감독이 작년도에 중앙대 졸업 작품으로 만들었던 거야. 난 해안선 볼 때완 달리 이 영화 보고 군대는 정말 안좋은 곳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마 너가 이 영화 보면 저절로 욕이 나올 꺼다. 강추!!!

마늘빵 2006-07-27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영화 제목 어디서 많이 들었는데... 음. 그렇군. 그거 한번 보고 싶군. 김기덕이 해병대 출신이었나 근데? 흠. 안어울리는데.
 



  동양에 강시가 있다면 서양엔 좀비가 있다. 강시는 귀엽기라도 하지 좀비는 징그럽다. 어릴적 대략 내가 중학교를 다닐 무렵까지만 해도 강시영화들이 꽤 인기를 끌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홍콩 강시영화를 본 따 영구와 머시기 하는 식의 따라하기 영화를 만들곤 했었다. 그치만 지금은, 강시는 찾아 볼 수 없다. 영화 속 강시를 따라하느라 두 손 앞으로 나란히 하고 몸 뻣뻣하게 세우고는 두다리로 통통 뛰놀던 그런 놀이는 이제 보이지 않는다. 서양의 좀비는 사람을 뜯어 먹는다. 팔, 다리, 몸통은 기본이고, 허파, 간, 심장, 뇌까지도 파먹는 이 녀석들은 그야말로 식인종이다. 사람이 아니니 '인종'이라 할 수 없겠지만.



* 영원히 좀비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할 것만 같았던 피들러 그린에 좀비가 습격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영리해진 좀비는 불꽃놀이에도 끄덕않고, 강을 건너는데도 두려움이 없다. 좀비 또한 '없애야 할 것'으로 여기지 말고 그들 역시 자신들이 갈 곳을 찾아 떠나는 하나의 존재로 봐야할 것이다. 사람을 공격한다고 그들에게 죄를 물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하는 짓이 무엇인지 모른다. 무지에서 비롯된 잘못조차 죄로 봐야 할 것인가. 소크라테스는 무지에서 비롯된 죄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물론 그것은 후세의 철학자들에 의해 비판받았지만 '죄'가 성립되지 않음은 사실이다.  



* 내가 살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겠다. 돈 없는 마을 사람들이 그가 지은 요새를 공격하자 그들을 없애려하고, 있는 자들로부터 돈을 갈취해 부를 이룬 카우프만. 인간의 이기심의 극단에 서있는 자이다.

  무덤에서 살아난 시체들이 두 눈 게슴츠레 뜨고 흐느적흐느적 거리며 거리로 나와 사람들을 잡아먹기 시작한다. 갑작스런 기습에 한 웅큼 살점 뜯기고 나면 한 시간이면 좀비로 변신, 그 역시 또 다른 먹이거리를 찾아 나선다. 폐허가 되어버린 마을엔 사람은 없고 좀비만 가득하다. 남아있는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눠진다. 하나는 돈이 있는 자, 그리고 하나는 돈이 없는 자. 좀비가 지배하는 사회든, 그렇지 않은 현실이든 상관없이 언제나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뉜다. 돈이 있는 자의 대표 카우프만은 거대한 빌딩 안에 호화로운 집을 설계해놓고 돈을 받고 사람들을 입주시킨다. 그리고 돈이 없는 자는 좀비들의 공격에 벌벌떨며 마을에서 하루를 버텨나가는 것을 감사한다. 좀비 VS 사람의 구도 뿐 아니라 사람 VS 사람의 또다른 구도가 형성된다.

  좀비는 날이 갈수록 점점 학습능력이 강해지고, 사람들은 점점 더 두려움에 떨 수 밖에 없다. 안전하리라 여겨졌던 카우프만의 요새도 이제는 안전을 보장할 수 없게 되고, 좀비의 침략을 받자, 사람들은 무방비로 당한다. 돈 없는 자는 경험을 통해 좀비와 싸울 수 있는 능력을 키운 반면, 돈 있는 자는 언제나 보호받는 삶을 살아왔기에 무차별 공격을 당할 수 밖에 없다.

  영화 제목 '랜드 오브 데드', 죽음의 땅은 좀비가 점령해버린 폐허가 되어버린 마을을 지칭하기도 하지만, 사람과 사람이 서로 싸우며 못잡아먹어 안달인 현실을 지칭하기도 한다. 인류의 공적이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뉠 것이다. 자기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 타인을 해치는 자와 인류의 생존을 위해 자신을 걸고 싸우는 자. 언제나 인류의 역사는 그렇게 반복되어왔고, 먼 미래에 혹시나 외계에 있을지 모를 어떤 생물체가 지구를 정복하기 위해 내려온다해도 이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삶의 터전을 죽음의 땅으로 만드는 것은 외계인도, 괴생물체도, 좀비도 아닌 바로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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