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음악 : 불멸의 사운드트랙 이야기 살림지식총서 164
박신영 지음 / 살림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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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언더 스코어링'은 고전 영화음악에서 흔히 사용되던 기법으로 '미키 마우징'이라 불리기도 한다. 디즈니 만화영화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으로, 주인공의 행동에 따라 음악이 그 장면을 추적하는 스코어링 방법이다. 발레와 서커스에서 이미 하나의 스타일로 굳어졌으며 영상과 일치하는 매력으로 등장인물의 감정을 보다 증폭시키는 효과를 이끌어낸다.

'언더 스코어링'과 비슷하게 들리지만 전혀 다른 뜻을 갖고 있는 '오버 스코어링'은 스코어가 영화 속의 다른 음향에 비해 좀더 과장된 소리로 들리게 하는 방법이다. 영화 속의 효과음은 거의 제거된 채 처음부터 끝까지 스코어만 들리는 기법으로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데에 있어 탁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자칫하면 영화의 흐름을 깨는 역효과도 일으킬 수 있어 작업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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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살림지식총서 222
이진홍 지음 / 살림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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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한번, 죽음도 한번, 태어남도 한번, 소멸도 한번뿐이다." (쉴러)-8쪽

어떤 하나의 현상에 대해서 고찰한다는 것은 이성의 질서에 따라서 고찰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살은 부분적으로는 오히려 열정과 병리학의 질서를 따른다. 이것이 자살에 대해서 생각하고 말하는 것을 어렵게 한다. 자살에 대한 이성적인 논증들을 알고는 있지만 그 논증들이 자살자의 고통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반면 자살자의 고통을 전해주는 말은 이성적인 논증에 이르지 못한다. 인간이 인간을 진실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감정이입이 필요하고, 나의 과학적 논증이 적어도 과학이라고 자처하려면 현상에 의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자살에 관한 논증들은 이 둘 사이를 영원한 평생선처럼 오락가락하는 것이다.-9쪽

인간은 오직 침묵 속에서만 자신을 가장 잘 제어할 수 있을 뿐이다. 그 경우가 아니라면 그는, 말하자면 끊임없는 장광설로 자신이 누구인지 모를 정도가 될 뿐으로서 오히려 자기가 아닌 타인으로서 자신을 유포하는 셈이다.(디누아르, <침묵의 미덕>)-13쪽

인생이란 어떤 희생을 치러서라도 오래 끌어가지 않으면 안 되늰 것과 같은 그런 애착이 가는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대의 본질이 원래 어떻게 만들어져 있든 간에 남과 마찬가지로 그대 역시 죽지 않을 수 없으며, 품행이 나쁘고 신을 모독하는 일을 해온 사람도 마찬가지로 죽어간다. 그러므로 자연이 인간에게 부여하는 온갖 선물 중에서 적절한 시기에 죽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 없다는 것을, 각자는 무엇보다도 자기의 영혼의 약으로서 기억해 두는 것이 좋다. 더구나 그 가운데서도 가장 뛰어난 선물은 자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플리니우스, <박물지> 제28권 제 1장)

신이라고 할지라도 결코 만능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신은 설사 스스로 자살하기를 바란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것이 가능하다. 스스로 죽음을 결정하는 것이야말로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가자 최상의 선물이다.(플리니우스, <박물지> 제2권 제7장)-18-19쪽

"자살은 설사 그 사람 자신에 있어서는 부정한 일이 아니라 할지라도 국가에 대해서는 하나의 부정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5권 15장)-25쪽

자살이란 각자가 자기 자신에게 빚지고 있는 사랑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자 그가 속한 공동체에 대한 모욕이기 때문에, 그리고 만일 이것이 의도적이고 자유롭게 영속적으로 행해진다면 오직 신에게만 속하는 권한을 사취하는 신에 대한 범죄이므로 자살은 치명적인 죄악으로 간주해야 한다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33쪽

소크라테스는 자살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도덕적으로 나쁜 것임을 인정하고 있지만 이것이 철학자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철학자에게 죽음은 평정을 가지고 맞이해야 할 단순한 불행이 아닌, 자기 존재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즉, 그는 일반인에 대해서는 원하는 때에 죽을 권리를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철학자에게는 인정하고 있다. -62쪽

극기주의는 그것이 자신의 영역에 속하는 것과 그 영역의 경계 밖에 잇는 것을 구분해야 한다는 점에서 합리적이고 자신의 영역에 속하는 것은 확고하게 붙잡아야 한다는 점에서는 자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중략...
다시말한다면 자살 행위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가 합리적인 결정에 따른 것이기만 하다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내적 자유에 가치를 두는 것이다. -65쪽

고통에서 해방시켜줄 방법이 죽음 말고는 다른 것이 없을 때 이 세계를 떠날 시간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은 오직 철학자에게만 속하는 지고의 존엄이다. (세네카)-66쪽

그런데 모두가 자살을 개인적 의지의 승리로 간주하고는 있지만, 그 의지도 그 승리가 쟁취되는 순간에는 그 지지의 근거를 잃고 만다. 만일 시체가 다시 되살아난다면 그 승리가 결정적인 것만큼이나 순간적이라는 것을 알 것이지만 이제 그 승리를 연장시키고 그 기억을 보존하고 그 결과를 전개시켜 나가야 하는 것은 남아 있는 전 인류의 몫이 된단 말인가? 자살을 어떠한 고난에도 불구하고 살고자 하는 의지의 부정이라고 인정하지 않고, 그 반대로 생에 대한 보다 밀도 깊은 긍정의 징표로 간주한다는 것은 역설이 아닐 수 없다. 한 개인으로서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죽음의 의지가 존중되어야 한다면 이것 또한 이기적인 쾌락이라는 비난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살고자 하는 욕망과 이 의지의 실현 사이의 장애가 너무 크기 때문에, 삶에서 의지를 실현시킬 다른 방법이 없으므로 그 의지라는 현상 자체를 소멸시켜 버리는 자살 이라는 형태로서 그것을 확인한다는 것은 의지를 보존하기 위해서 고통을 거부한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68-69쪽

만일 자살이 허용된다면, 모든 것이 허용되어야 한다. 만일 모든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면 자살 또한 허용되어서는 아니 된다.
이것이 바로 윤리의 본질에 관한 문제다. 자살은 말하자면 가장 근본적인 죄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살을 알아보려고 시도하는 것은 수증기의 본질이 어떤 것인가를 알아보기 위해 수은 증기를 만져보려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중략) 그런데 자살은 그 자체로서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지 않은가 (비트겐슈타인)-71-72쪽

"각자가 자신을 위해서 스스로 결정하는 곳에서 (타인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란 그를 위해 걱정해 주는 것뿐이다."(키에르케고어)-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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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06-06-06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괜찮던가요?

마늘빵 2006-06-06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요? 네! 요 책 읽고 에밀 뒤르켐의 <자살론>을 보면 딱 좋지 않을까 싶어요.
나아가 4만원에 육박하는 <죽음 앞의 인간>도 볼 수 있다면 더 좋을듯. 자살에 대해 짧은 시간 안에 축약적으로 볼 수 있는 책입니다.

가넷 2006-06-06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이것 말고도 살림지식총서중 몇권 골라잡아서 지를까 생각중인데.. . 질러야 할까봐요. 정말 저렴한 가격에 질은 어떨지 궁금했었는데... 그리 나쁜 평들은 없는것 같으니까...음.;

마늘빵 2006-06-06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살림지식총서 괜찮은 거 많아요. 예전에 봤던 <르몽드>도 좋았고. 이번에 새로 산 <영화음악>도 아직 안봤는데 괜찮을거 같아요. 싸고 좋아요. 책 중에 제일 싸지 않을까 생각.

비로그인 2006-06-07 0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님의 밑줄긋기 74쪽 때문에, 키에르케고르를 더욱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더도 덜도 아닌 딱 그만큼이지요.

마늘빵 2006-06-07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쥬드님 / ^^
 

 * 스포일러 경고

  "뫼비우스의 띠처럼 얽힌, 두 여인의 위험한 유혹"이라는 포스터문구를 보고, 아 좀 야한 영화구나, 싶었는데 기대(?)와는 달리 야하다기보다 무서운 영화였다. 그렇다 스릴러 공포였던 것이다. 하지만 허리우드식의 스릴러 공포와 같이 숨조차 쉴 수 없을 만큼의 긴박감과 빠른 이야기 진행은 찾아 볼 수 없다. 느릿느릿하고 천천히 다가가지만 순간순간 섬뜩 놀라게 하는 고요한 밤바다에서 밀려오는 파도와 같은 공포라고나 할까. 공포는 못생기고 기괴하게 생긴 괴물이나 전기톱을 든 잔인한 살인마에게서도 느낄 수 있지만, 평온하고 행복한 연못에 커다란 돌맹이 하나 던져놓는 것에서 오기도 한다.  

  그들이 오기전까지는 행복했었다. 그 누구보다 서로에게 헌신적인 결혼 3년차 젊은 부부, 알랭과 베네딕트에겐 이보다 더 행복할 순 없다. 퇴근 후 아기자기하고 조용한 집안에서 정성껏 만든 저녁식사를 함께 하고, 함께 티비도 보고, 또 사랑의 장난질(?)도 나누는 그들은 그 누구보다 행복하다. 행복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들은 아름답고 이쁜 사랑을 나눈다. 하지만, 그들이 오면서 두 사람의 행복은 깨지기 시작했다. "지금의 이 행복이 얼마나 오래갈 것 같아?" 라고 대뜸 질문을 던지는 검은 선그라스낀 사장의 아내 알리스. 마치 우리 둘의 행복이 부러워 시샘하는 듯 하다. 질투 혹은 더 나아가 저주?  



* 늦은 밤의 이 평온하고 행복한 저녁식사를 깰 자 누구더냐.



* 몰래 부엌에서 키스하다 들켜버렸다. 근데 빤히 바라보고 있는 저 여자는 뭐야. 
 

  알리스는 이 편안하고 안락한 저녁식사를 망쳐버렸다. 알랭의 사장이자 그의 남편인 리차드를 향해 계속 퍼부어대는 저주의 발언들, 신경질적인 태도는 식탁 위의 평화를 깨버렸다. 사장 부부를 보내며 "내가 저렇게 되면 안락사 시켜줘." 베네딕트는 우스게소리로 그랬을지 모르나 자신이 정말 그리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어느날 갑자기 알랭에게 접근하는 알리스, 대뜸 집에 찾아와 아파 누워있겠다더니 권총자살해버린 알리스, 이를 어찌 받아들일 것인가. 이상한 일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베네딕트가 이상해졌다. 그녀는 알랭을 향해 신경질을 내고 저주를 퍼붓는다. 안락사시켜야 하나? 그러게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 

  영화는 리처드와 알리스 부부, 알랭과 베네딕트 부부, 이렇게 네 사람을 등장시키며 각각의 인물들의 숨겨진 욕망과 환타지를 보여준다. 알리스는 알랭을 유혹하고, 유혹을 받아들이지 않지만, 만약 베네딕트가 아니었다면 그 유혹에 응했을 알랭, 베네딕트는 리처드를 유혹하고, 리처드는 이를 달갑게 받아들인다. 그녀가 내가 좋다는데 어쩌겠어 라는 리처드의 말에 사랑은 변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하는 알랭. 

  이성의 지배하에 평온한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한 삶일까. 아니면 나의 내면의 욕망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한 삶일까. 영화는 이와 같은 질문을 던진다. 이성의 통제 아니면 내면의 거침없는 욕망. 어쩌면 '바람직한' 이라는 표현보다는 '행복한' 이라는 수식어가 더 적절한지도 모르겠다. 나는 왜 사는가, 라는 질문 앞에 행복하기 위해서, 라고 대답한다면, 궁극적인 삶의 목표는 행복이 될테니까. 하지만 행복하기 위해 우리가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지는 의문.   네 사람의 저녁식사 이전의 알랭과 베네딕트의 평온한 일상이 행복인지, 아니면 저녁 식사 이후에 전개되는 기존의 평화를 깨버린 욕망이 행복인지는 그들 각자의 마음 속에 달려있는 일.  

  영화제목 '레밍'은 스칸디나비아에 거주하는 쥐과의 '레밍'을 의미한다. 레밍은 선두 레밍이 절벽에서 떨어지면 뒤에 따르는 나머지 레밍들도 그를 따라 떨어져버리는 어처구니 없는(?) 행동을 보여준다. 이에 대해 학계에서는 이런저런 가설을 내놓지만 그 어떤 것도 확실하게 레밍의 자살(?)을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그들이 왜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지는. 알리스의 신경질적이고 괴이한 행동들은 어디에서부터 기인하는지 모르나 베네딕트에게로, 알랭에게, 리처드에게 전해짐으로써 마치 레밍의 행동패턴과도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가 네 사람 사이에 끼지 전까지는 그녀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괜찮았다. 하지만 그녀의 출연 이후 베네딕트를 시작으로 나머지  세 사람은 모두 이상하게 변해간다. 이성은 간데 없고 감정만 남았다. 욕망, 시기, 질투, 거침없는 욕설, 저주 이 모든 것들이 그들을 지배한다.  

  영화는 생각거리를 툭 던져놓고는 엔딩 크레딧을 올린다. 아니 어쩌라는거지, 결론이 뭐야, 깜깜한 극장안에서 올라오는 엔딩 크레딧을 보며 사람들은 한동안 넋놓고 앉아있다. 그런면에서 영화는 불친절하다. 하지만 난 불친절한 영화가 좋다. 결론이 정해져있는건 재미없다. 감독은 분명 어떤 의도를 가지고 영화를 만들었을테지만 그것은 감독이 영화를 보는 관점이고, 결론을 맺듭짓지 않음으로써 그는 관객에게 많은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결론은 관객 각자의 마음 속에 있다. 내게 있어 이 영화를 보는 주된 코드는 '행복'이었다. 니들이 언제까지 행복할 것 같으냐, 라는 알리스의 말은 내가 영화를 보는 주된 질문이자 관점이었다. 지금의 평온함과 일상의 안락, 행복함은 영원하지 않다. 또 진실되지도 않다. 그것은 포장된 행복이며, 나의 이성의 통제하에 주문걸어온 행복이며, 지속적인 행복과도 거리가 멀다. 하지만 이를 부정한다면 그 또한 나의 삶에 불안과 고통을 가져다줄터. 행복은 무엇이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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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6-06 14: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 스포일러 경고

  마치 2005년 개봉되었던 영화 <콘스탄틴>을 보는 듯 한 기분이었다. 시기상으로 1999년에 개봉된 <엔드 오브 데이즈>가 1편이라고 볼 수 있겠지. 전혀 상관관계는 없고 내 맘대로의 어거지 이어붙임이다. 확실히 <콘스탄틴>보다는 좀더 흥미로움도, 스릴도, 시나리오의 탄탄함도 떨어졌다. 하지만 나름 괜찮았던 작품이다. 

  <엔드 오브 데이즈>와 <콘스탄틴> 두 영화 모두 종말을 다루고 있다. 악의 지배의 시기가 도래한다. 1999년에 개봉된 <엔드 오브 데이즈>의 경우 2000년 밀레니엄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관심을 받지 않았을까 싶다. '엔드 오브 데이즈'. '종말'이다. 2000년이 오는 순간 세계는 종말을 맞이할 것이라고 한참 종교계에서 분위기를 띄웠던 그때가 생각난다. 신문에는 미국 어느 주에서는 생필품이 동났다는 기사도 실렸고, 어디에서는 사람들이 집회를 가지고 회개하라!, 라고 외치고 다녔다는 기사도 봤다. 은행을 비롯한 금융계에서는 2000년이 오는 순간 컴퓨터가 오류를 일으킬까봐 노심초사 걱정하며 불안해했고, 일부 사람들은 아무런 마음의 동요 없이 일상을 살아갔다. 나는 후자에 속했더랬다.

   1979년 뉴욕 바티칸 교황청 밖에서 한 줄기 빛이 발견되고, 같은 날 한시에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악마의 씨를 잉태할 운명에 처한. 그녀는 자라서도 가끔씩 환청을 들었고, 환상을 보았다. 2000년이 다가오며 크리스틴은 악마의 표적이 된다. 자정 직전 그녀와 관계를 맺어야만 악의 세계가 열린다. 사탄으로부터 그녀를 보호 하기 위해 나선 전직 경찰관이자 현직 경호원 제리코 케인. 증오와 복수심으로 가득한 케인은 사탄에게 좋은 사냥감이다. 사탄은 아내와 아이가 살해당했던 그때 그 장면을 불러옴으로써 그들을 살릴 수 있다고 그를 유혹하고 케인은 괴로워한다. 그저 크리스틴만 넘겨주면 된다. 하지만 역시 예고된대로 케인은 그녀를 돌려주지 않는다. 사탄과 케인의 한판 승부. 악마와 한낮 인간의 대결의 결말은 뻔히 보이지 않는가. 하지만 이 근육질의 무자비한 케인은 악마와 싸워 이긴다. 호. 대단한걸.

   <콘스탄틴>보다는 악마와 케인의 대결에 촛점을 맞추고 액션을 많이 보여주었던 영화인지라 뭔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하기보다는 그저 보여주기로 그친면이 없지 않다. 어쩌면 그것은 아놀드 슈왈츠제네거라는 근육질 사내를 주연으로 내세웠을 때부터 예고된 일인지도 모른다. <터미네이터>에서의 불사의 이미지는 여기에서도 이어졌다. 그가 아닌 다른 배우를 내세웠다면 조금 영화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다.



* 힘주지 않아도 불끈불끈 저 근육 좀 봐. 존재자체로 공포를 안겨주는 인물이다. 무서워. 그러니 악마도 너를 무서워하지. 악마를 무찌르는 인간.



* 사탄을 열연한 가브리엘 번. 냉혹하고 잔인한 인간으로 둔갑한 악마의 연기를 잘 소화해냈다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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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6-06-05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는 아놀드보다는 가브리엘 번을 본다는 것만으로 그나마 건졌던 영화가 아니였나 생각되네요..^^

마늘빵 2006-06-05 1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저도 아놀드는 별로였어요. 가브리엘 번도 잘 모르는 배우이지만 역할에 딱 어울린다는 생각이에요. 적당한 무게감과 카리스마, 하지만 인간의 모습을 지닌 악마라고나 할까요.

책방마니아 2006-06-05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이 영화 봤던 기억이 난다. 영화 자체로서는 그다지 좋은 평을 받지 못했는데 (http://www.imdb.com 에서 검색해 보니 10점 만점에 5.2점을 받았더군.) 종말을 주제로 한 영화 (내 희미한 기억에 따르면 요한 계시록 이야기가 영화에 나왔던 거 같은데 확실치는 않군) 라는 희소성 때문에 계속 화자되는 영화라 생각함.

Mephistopheles 2006-06-06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브리엘 번....하면 유주얼 서스펙트에서 처음에 카이저 소제에게 배위에서 총맞아 죽는 사람으로 나왔었죠..^^

마늘빵 2006-06-06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유주얼 서스펙트도 아직 못봤어요. 것도 보고픈데.
 


  빈센조 나탈리 감독의 데뷔작이기도 했던 영화. 캐나다 출신의 그는 원래 만화가 지망생이었으나 애니메이션 스토리 보드 작가로 일하던중 캐나다 필름 센터에 들어가 영화에 입문하게 되었다. <큐브>는 90분동안 펼쳐지는 정육면체의 방안에서 벌어지는 공포와 생존을 위한 다툼을 다루고 있다.



* 목걸이, 반지, 시계, 귀걸이 등등 장신구 하나 없이, 입고 있던 옷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흰옷으로 갈아입은 채 깬 사람들. 이 무슨 황당한 일이. 정부기관의 짓인가, 외계인의 실험인가. 것도 아니라면 한 돈 많은 녀석의 장난질.



* 각 방에 새겨져있는 의문의  숫자를 풀어라.

  장르상 공포영화로 분류된다. 무시무시한 살인마나 괴물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우물이나 티비에서 긴머리 늘어뜨리고 귀신이 나오는 것도 아닌 이 단순한 영화가 공포로 분류되는 이유는, 정육면체라는 폐쇄된 공간이 주는 공포감, 그리고 출구를 알 수 없는 미로가 주는 공포감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밖으로 나가는 출구의 존재여부조차 알 수 없이 어느 날 갑자기 갇혀버린 여섯 사람에겐 그 자체가 공포다.   언제 누가 자신을 여기에 데려왔는지조차 알 수 없는 그저 깨어나보니 이곳이었다는 여섯 사람들은 특이하게도 그 이력이 각각 다르다. 경찰, 재능있는 수학도, 자폐아, 의사, 탈옥수, 의문의 사내. 탈출구는 있다. 우리가 각각 다른 이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이를 증명한다. 그것이 우리의 존재이유다.

  공포는 아주 일상적인 것에서 시작된다. 물, 불, 어둠 그리고 폐쇄된 공간. 어린 시절 낮잠 자고 일어나니 엄마가 없었다. 시장에 간 것이다. 깜깜한 밤도 아니었고, 내가 이상한 곳에 떨어져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 자체가 나에겐 공포였다. 현관문을 열려고 했으나 키가 닿지 않아 문고리를 돌릴 수 없었고, 닿더라도 어떻게 여는지 알 수 없었다. 아주 꼬마였을 때니까. 순수하게 폐쇄된 공간에서 일어나는 공포보다는 엄마의 부재에서 오는 불안감에서 일어나는 공포라고 볼 수 있지만, 문이 잠겨있는 것도 나에겐 하나의 공포요인이었다. 결국 울며불며 현관문 앞에서 눈물을 뚝뚝흘리고 결국 잔뜩 토해놓고 현관문 주변을 엉망으로 만들어놨다. 공포는 일상 속에서 아주 순식간에 사소한 것에서 다가온다.

   정전으로 멈춰버린 깜깜한 엘리베이터 안의 공포는 공포영화에서 자주 써먹는 수법 중의 하나이다. 언젠가 또 중학교였는지 고등학교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미술실인가에 여러 여학생들이 한명의 여학생을 가둬놓고 집에 갔고, 갇힌 여학생은 다음날 발견되었지만 정신이상증세를 보였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가둬놓는다는 것 그 자체로 안에 갇힌 사람은 불안을 느낀다. 큐브는 여기에 분자화학장치, 염산총, 꼬챙이 등의 함정까지 더해놓음으로써 폐쇄된 공간의 공포를 두배로 키워놓았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이동하자니 함정밭이고, 함정을 피해간다고 하더라도 출구가 있는지도 의문이고. 6명의 배우와 독립된 공간만이 90동안 스크린을 메우고 있는 돈 안드는 영화. 매우 단순하다. 하지만 지루하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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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6-06-05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편만 보면 될꺼라고 생각되네요..그후 나온 속편들은 영....(절래절래)

월중가인 2006-06-05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저는 하이퍼큐브도 재미있었는데요~ 반전을 위해 너무 꼰게 거슬리지만 이것도 재미있었어요//

마늘빵 2006-06-05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큐브가 2편까지 있죠? 흠. 2편을 굳이 찾아보고싶지는 않고 보게 된다면 한번 보고는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