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로그 digilog - 선언편
이어령 지음 / 생각의나무 / 2006년 4월
절판


시루떡은 사람 손으로 일일이 공들여 만든 것으로 집마다 그 맛이 다 다르다. 하지만 공장에서 다량으로 생산된 스팸 통조림 맛은 백이든 천이든 그 맛이 똑같다. 무엇보다도 시루떡은 잔칫날처럼 어쩌다가 만들어먹는 별식인데 비해서 스팸은 값싸고 장기간 보존이 가능하여 미군 부대에서 매일 같이 먹는 대표적 군용 식품이다. 그래서 시루떡을 보면 "왠 떡이냐?"하고 놀라지만 스팸을 본 병사들은 "어제도 스팸! 오늘도 스팸! 내일도 스팸! 다음주도 스팸!"이라고 투덜댄다고 한다.

...중략...

그러므로 스팸이란 말은 벽에 부딪힌 오늘의 정보사회의 실상이 어떤 것인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같은 것만 되풀이해서 먹으면 금세 식상해진다. 그리고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이 있듯이 배가 고프면 음식 맛을 더 잘 느끼지만 반대로 배가 부르면 산해진미라도 그 맛을 알 수가 없다. 스팸은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정보포식'상태와 그러한 정황 속에서 우리가 잃고 있는 디지털의 '정보현실감'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36-37쪽

숟가락은 주로 국문을 떠먹는 것으로 음에 속하는 것이고, 젓가락은 양에 속하는 것으로 고체형 마른 식품을 집는데 사용된다. 건식에 편중되어 있는 서양의 식기가 접시 위주로 되어 있는데 비해 습식 문화의 한국 식기는 종기 뚝배기 사발 등 움푹 팬 것들이 많다. 그러니까 같은 동북 아시아권 가운데서도 '음양 조화'의 문화를 가장 철저하게 생활화한 것이 바로 한국 문화라고 할 수 있다. -62쪽

"정보가 샌다" "정보를 흘린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정보를 물과 같은 액체로 생각한 것이다. 물꼬를 자기 논에다 대던 농경시대적 개념이다. 그러나 "정보를 캔다" "정보를 묻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정보를 무슨 석탄이나 노다지 같은 것으로 알고 있는 산업시대인에 속한다. 그런가 하면 "정보가 환하다" "정보에 어둡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정보는 액체도 고체도 아닌 빛이다. 만화에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전구를 그려놓듯 에디슨 시대의 유물인 것이다.
"정보를 맡았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사냥꾼들이 사냥감을 추적할 때 짐승이 지나간 채취를 통해 추적하던 원시적 감각의 산물이다. 정보는 이렇게 수렵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잠재의시의 산물이기도 하다.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지식 정보의 새로운 기술을 옛 패러다임으로 읽고 있다는 증거다.
정보기술을 새 패러다임으로 비유하자면 그것은 액체도 고체도 아닌 '공기'라고 말할 수 있다. 공유는 해도 독점할 수 없는 것이 공기이며 지식이다. 사용을 해도 없어지지 않고 순환하는 것 또한 공기의 속성이며 정보의 특성이다. 그러므로 '가치'는 있어도 '가격'은 없는 것이 공기이며 지식정보다. -130-1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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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8
제인 오스틴 지음 / 민음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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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은, 내가 보기에는 가장 흔한 결함이야." 메리가 자신의 깊은 사고력을 뽐내며 말했다. "내가 지금까지 읽은 바로 미루어 볼 때, 오만이란 실제로 아주 일반적이라는 것, 인간 본성은 오만에 기울어지기 쉽다는 것, 실재건 상상이건 자신이 지닌 이런저런 자질에 대해 자만심을 품고 있지 않은 사람은 우리들 가운데 거의 없다는 것이 확실해. 허영과 오만은 종종 동의어로 쓰이긴 하지만 그 뜻이 달라. 허영심이 강하지 않더라도 오만할 수 있지. 오만은 우리 스스로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와 더 관련이 있고, 허영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해 주었으면 하는 것과 더 관계되거든."-31쪽

콜린스 씨는 똑똑한 사람도, 함께 있기에 즐거운 사람도 분명 아니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지루했고, 그녀에 대한 그의 애정도 상상 속에나 존재하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렇지만 어찌 됐든 그녀는 남편을 갖게 될 것이었다. 남자나 혼인 관계 그 자체를 중시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혼은 언제나 그녀의 목표였다. 좋은 교육을 받았지만 재산이 없는 아가씨에겐 오직 결혼만이 명예로운 생활 대책이었고, 결혼이 가져다줄 행복 여부가 아무리 불확실하다 해도 결혼만이 가장 좋은 가난 예방책임이 분명했다. -177쪽

"얘. 리지. 그런 기분에 빠져들지마. 그럼 네가 불행해져. 사람마다 상황과 성격이 다르다는걸 충분히 고려해야지. 콜린스 씨의 사회적 지위와 샬럿의 신중하고 무던한 성격을 생각해봐. 샬럿네가 대가족이라는 것, 재산으로 보자면 그만하면 훌륭한 결합이라는 것도 생각해야겠고. 그리고 샬럿이 우리 사촌한테 애정이나 존경심 같은 감정을 느낄 수도 있다고 믿어보려고 해봐. 모두를 위해서 말이야."-194-1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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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몰랐다. 이 영화 다 끝날 때까지 실화인줄. 주인공이 죽은 뒤 장례식에서 그의 생몰연도가 나오기 전까진. 그냥 허구라고 해도 이렇게 슬픈데, 실화라니. 잔인하다. 아 슬프다. 무슨 멜로 영화도 아닌 걸 보면서 또 눈물 흘리다니, 자꾸만 눈물 흘러 손으로 한번 훔치고 두번 훔치고.

 요새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나 책을 계속해서 접하게 된다. <인 콜드 블러드> 도 조그만 평온한 마을의 선량한 일가족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고, 최근 봤던 영화 <뎀> 역시 2002년 루마니아 살인 사건을, <드리머> 역시 한 소녀의 말에 대한 사랑을 담아낸 실화다. 실화는 확실히 감동을 배가 시켜준다. 더군다나 그것이 실화란 걸 모르고 접했던 영화나 책의 경우, 끝에 가서 실화임을 알게 되면 정말 감정이 북받쳐 오른다. 내내 울컥 울컥하며 참아낸 슬픔이 터져나온다.

 <래더49>는 미국의 한 소방서의 이야기이다. 소방관을 소재로 한 영화는 꽤 많지만 같은 소재라고 할지라도 모두 각기 다른 내용을 담고 있고, 그때마다 각각의 영화를 보면서 각기 다른 점들을 느끼게 된다. <분노의 역류> <리베라메> <볼케이노> 등등.



* 동네 슈퍼에 만난 수습대원 잭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다. 둘은 10년이 넘는 결혼 생활동안 싸우기도 했지만, 그것조차 서로의  사랑 때문이었다. 가정을 이루고 아름답게 살아가는 두 사람을 보며 내 마음도 따뜻해졌다.

 수습으로 들어와 어리버리대던 시절부터 10여년의 세월 동안 함께 했던 동료와 그의 상사 소방서장 마이크 케네디는 그를 보내며 말한다. "사람들은 묻는다. 모두 불길을 뛰쳐 나올 때 어떻게 그 속으로 뛰어들 수 있는지... 그것은 바로 용기이다. 잭이 지금까지 구한 사람들, 잭이 지금까지 지켜낸 건물들은 셀 수 없습니다. ... 잭의 인생을 축복합시다."

  영화를 통해 본 잭은 누구보다 생명을 지켜내고자 하는 의지가 강한 사람이었으며, 그의 상사 마이크의 말마따나 소방관이 천직인 사람이었다. 그는 누구보다 용기있었으며, 자신의 동료가 구조대원(구조대원은 제일 먼저 화재 현장에 나가 사람을 구출해내는 역할을 맡는다. 불을 끄는 것은 밖에서 할 수 있지만 구조대원은 불길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으로 활약하다 죽자, 그 자리에 자신이 들어간다. 결국 그는 그의 동료의 뒤를 따라 구조대원으로 활약하다 생을 마감했다. 1971년에 태어나 2003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불과 서른 셋. 그에겐 이쁜 딸과 귀여운 아들이 있었으며, 사랑하는 아내가 있었다.

  아내는 언제나 잭을 걱정했다. 잭이 다칠까봐 항상 잭을 걱정하고 염려했다. 그가 소방관 생활을 시작한지 10년이 넘는 동안, 결혼한지 10년이 넘는 동안 그녀는 잭을 보아왔고, 주변의 죽어가는 동료를 봐왔다. 걱정은 당연하고, 어쩌면 잭의 죽음을 조금은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의 마음의 준비 때문일 것이다. 집앞에 도착한 차에서 잭이 내리지 않고, 그의 동료와 신부님이 내리자 그녀는 순간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대놓고 엉엉 울지는 않는다. 속으로 참고 참고 또 참고 마지못해 나오는 눈물이다. 감당하기 벅찬 슬픔이다.   잭이 남들보다 더 열심히 더 앞서서 사람들을 구조하고, 뉴스에 나오고, 표창을 받을 때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날이 오리란 것을.



* 잭은 저 잔해더미 속에서 결국 구조되지 못한 채 숨을 거두었다. 2003년의 어느날. 그를 살리기 위해 노력한 그의 동료들, 그의 상사 소방서장 마이크는 어디에 있는지 알지만 그를 구출 할 수 없었다. 그들의 아픔이야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

  한 여자만을 사랑했던 좋은 남편이자, 두 아이의 친절하고 자상한 아빠였으며, 언제나 웃음을 선사해주는 좋은 이웃이었으며, 그 누구보다 믿음직스러운 소방대원이었던 잭은 그렇게 사람들에게서 떠나갔다. 오직 사람들의 머리 속에 그에 대한 좋은 기억만을 남겨둔채.

  영화에서는 2003년 불타는 건물 안에 갇혀 죽은 잭을 담아냈지만, 어디 위험한 일을 하다 사라진 목숨이 한둘이랴. 강도와 맞서다 죽은 경찰관들, 잭과 같이 불더미 속에서 사람을 구조하려다 죽어간 소방대원들이 셀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지금껏 그렇게 자신의 사명을 다 하다 죽어간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모른다. 평소에 그들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으니까. 영화가 그려낸 잭의 삶은 목숨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모든 소방대원을 대표한다. 그들에게 경의를.  

***
소방서장 마이크와 주인공 잭의 얼굴이 눈에 익었다 싶었는데 찾아보니, 마이크 역을 맡은 사람은 존 트라볼타. 영화 <페이스 오프>에서 형사로 나왔던 인물이다. 잭은 호아킨 피닉스로 영화 <앙코르>에 나왔던 쟈니 캐쉬, <글래디에이터>의 못된 왕 코모두스로 나왔던 인물이다. 그의 경우엔 영화마다 너무나 다른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서 처음엔 못알아봤다. 어떻게 <글래디에이터>의 코모두스가 <래더49>의 잭이 될 수 있는지. <앙코르>의 쟈니캐쉬도 너무나 다른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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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6-04-23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분노의 역류 보면서 극장에서 통곡을 했답니다...

마늘빵 2006-04-23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노의 역류>도 슬프죠. ㅠ-ㅠ 메피스토님도 눈물이 많으신가봐요. 흙
 



 * 스포일러 경고  : 이 영화는 제목만 알고 가서 봐야합니다. 
 * 내내 공포감을 조성하는 드르륵 드르륵 소리의 정체는 극장에서 확인해보시길

  공포영화의 계절이 돌아오는가. 겨울의 기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일찌감치 공포영화들이 채 녹지도 않은 땅을 헤집고 하나 둘 머리를 내밀고 있다. 얼마전 <엑소시스트>가 다시 나오더니, 이번엔 <뎀>이다. 여기서 말하는 뎀은 'THEM'. 영어로 '그들'이다. 범인의 이름을 대신해 '그들'이라는 칭호가  사용되었고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하는데 과연 어떤 이유일까?

  개봉한지 이제 이틀된 따끈따끈한 영화다. 프랑스 영화사 스튜디오 까날에서 비밀리에 만들어진 영화로, 베를린 국제 영화제 필름 마켓에서 처음 소개되었다. 범인을 칭하길 '그들'이라고 하질 않나 영화를 몰래 만들질 않나. 도대체 왜?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2002년 나는 군대에, 사람들은 전국 곳곳 거리에 나와 대~한민국을 외치던 그 때, 지구 반대편 루마니아에서는 충격적인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2002년 10월 7일을 시작으로 일주일간의 수사끝에 범인은 밝혀졌고, 루마니아 국민들은 모두 충격에 휩싸였다. 이 사건은 불과 4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루마니아 언론은 이 사건에 대한 기사를 모두 검색에서 삭제했다.



* 어두운 지하터널로 숨어봐야 소용 없다. 여긴 '그들'의 아지트다. 결코 빠져나갈 수 없다.



* 그렇게 달렸건만 내가 머물 곳은 여기구나. 밤새도록 달려 이른 새벽 도착했으나 나를 봐주는 이는 없다. 뒤에선 '그들'이 달려오고 있다. 여기서 끝이구나.

  교사 클레멘타인은 퇴근 후 소설가인 남자친구 루까를 만나러 그의 숲 속 깊은 곳의 그의 집으로 향한다. 아무도 없는 조용하고 큰 별장에서 두 사람은 둘만의 오봇하고 사랑스런 시간을 보내고 잠든다. 새벽 한 시가 넘은 시각, 클레멘타인은 학생들의 시험지를 채점하기 위해 홀로 1층 쇼파에 앉아있었으나 잠의 적막을 틈타 들리는 수상한 소리. 무시하고 남자친구의 품 속에서 잠을 청하지만 새벽 3시. 침묵을 깨는 또 다른 수상한 소리, 빛.

 드르륵. 드르륵. 드르륵. 드르륵. 도대체 어디서 들려오는 소리일까. 무슨 소리일까. 알 수 없는 소리가 커다란 집을 휘감는다. 누군지 확인하러 간다는 루까와 뒤를 다르는 클레멘타인. 아니 무슨 남자가 이렇게 겁도 없어. 아무런 무기도 지니지 않은 채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가는 루카. 하지만 겁도 없는 건 그때뿐이다. 상황은 순식간에 돌변하여 루까는 다리에 상처를 입고 돌아오고, 손잡이는 막 돌아가고, 기분 나쁜 소리는 계속 들려오고, 밖에선 누군가 돌아다니고 있다. 한 명이 아니다! 도대체 몇명이나.

  인간의 공포는 매우 사소한 곳에서 시작된다. 악령을 소재로 하여 공포를 전해주는 <엑소시스트>나 <오멘>과 같은 작품도 있지만, 대개의 공포영화는 매우 사소한 곳에서 출발한다. 평소엔 신경쓰지도 않던 티비소리, 하지만 아무도 없는 조용한 방안에서 갑자기 들려오는 티비소리는 내겐 공포다. 삐이걱. 어릴적 아무도 없이 집에 혼자 있는 때가 있었다. 바람에 살며시 문이 열리는 것이었건만 그 소리는 나를 공포로 몰아넣었고 나는 손에 무기를 들고 조그만 우리집을 화장실, 안방, 내 방 하나하나 조심스레 문을 열고 무기를 들이밀곤 했다.

  때로 공포는 거울에서 오기도 한다. 아무도 없이 혼자 있을 때, 거울 속에 비친 나는 꼭 내가 아닌 것만 같다. 손을 살며니 내밀고 나를 향해 다가올 것만 같다. 내가 찡그렸을 때 갑자기 거울 속 내가 기분나쁘게 웃기라도 한다면?

  영화 <뎀>에서 보여지는 공포 또한 매우 사소한 부분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숲 속 한 가운데 숨어있는 커다란 저택. 전화 끊기도, 전기 끊기도, 누가 현관문을 부수고, 밖에서 조명을 쏘아대고, 드르륵드르륵 이상한 소리를 내며, 갑자기 달려든다면 이 상황에서 견딜 수 있는가 누가 있겠는가.

  잔머리 굴려 저택에서 빠져나오긴 했지만 그런다고 도망갈 곳이 있는건 아니다. 달려도 달려도 숲뿐인 것을. 나는 도망치고, 그들은 쫓아온다. 여러명이 사방에서 나를 조여온다. 그들은 그걸 즐기고 있다. 내가 공포에 질린 것을 즐기고 있다. 있는 힘을 다해 달렸지만 막다른 골목이다. 아 죽는구나. 그래 죽는거다 그렇게. 공포에 질린 채로.

***

  범인은 밝혀졌다. 그리고 루마이나는 충격에 사로잡혔다. 국가적 패닉상태를 맞이했다. '그들'은 10살에서 15살의 어린 청소년들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말했다. 왜 그랬어요? 재밌잖아요. 재미삼아 사람을 공포에 몰아넣고 찌르고 잔인하게 살해했다. 그들은 그것을 즐겼다. 살인이 목적이 아니었다. 살인은 그저 한참 재미본 뒤에 마지막에 오는 결과물일 뿐이었다. 상대를 위협하고 공포에 몰아넣고 쫓으며 상처 입히고 때로는 풀어줬다가 다시 또 쫓고. 그들은 그걸 즐겼다. 클레멘타인과 루카가 범행의 대상인 것은 두 사람이 그들에게 원한을 사서가 아니라 한적하고 고요한 곳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그들이 가는 주변에 있는 집이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산이 있기 때문에 오른다라고 누가 말했던가. 그들은 거기에 숲이 있고 거기에 집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범행 대상으로 삼았다. 그들에게 '왜?'라는 질문은 무의미 하다. 그런 멍청한 질문도 없다. 재미인 것을 어쩌랴. 재밌는 것을 어쩌랴. 왜 라는 질문은 행위의 목적이 있을 때 성립하는 물음이다. 그들에겐 목적이 없다. 왜 라는 물음에 굳이 답변을 내놓는다면 그냥, 정도가 가장 훌륭한 대답일 듯 하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사람들이 충격에 휩싸인건 그들이 어린아이들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아이들이 그렇게 교활하고 못될 수가 있는가. 세상의 때가 채 묻기도 전에 어떻게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청소년 범죄는 점차  심각해지고 있다. 전북 익산이었던가. 우리나라에서 중학교 남학생들이 한 여학생을 대상으로 집단 성폭행한 사례가 있었다. 한번이 아니었다. 그런 사례는 끊임없이 나왔다. 아버지가 돈이 있는데 안내놓는다고, 어머니가 혼냈다고 찔러죽인다. 영화 <공공의 적>에만 나오는 일이 아니다.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다. 실화다. 신문에 오르내리는 실화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그래선 안되는 거다. 정말 그래선 안되는 거다. 청소년들이 저지르는 범죄는 성인의 범죄보다 더 한 경우들이 많다. 성인들은 죄를 저지르고 잘못한 것이라도 알지, 범행을 저지른 청소년들은 그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잘못을 알지도 못한다. 이런 아이들을 어리다고 내보내고, 기껏해야 소년원에 잠깐 머무는 정도로 끝내서는 안된다. 사회의 책임이라고? 아니다. 사회의 탓으로 돌리지 말자. 어른들이 교육을 잘못 시킨 탓이라고? 그러지 말자. 사회에도 어른들에게도 잘못은 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그들의 잘못을 사회나 어른들의 잘못으로 환원할 수는 없다. 그들은 죄 값을 치뤄야 한다. 루마니아의 '그들' 은 다수가 풀려났고, 일부는  소년원에 있다 했다. 그래서는 안된다. 우발적인 잘못이나 실수에 대해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이건 계획된 잔혹한 범죄다. 이유도 없다. 이유도 없이 사람을 대상으로 장난치고 데리고 놀다(?) 죽인다. 그들도 그들이 저지른 행위에 맞먹는 대가를 치뤄야만 한다.

  <뎀>은 그냥 공포영화로 끝낼 영화는 아니다. 이 영화는 그저 이미 끝난 사건에 대해 감독이 재구성하고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다. 실화다. 영화에서 보여지는 범행의 과정은 그저 '추측'일지 모르지만 내용은 '사실'이다. 사실이지만 사실이 믿어지지 않기에 너무나 충격적이기에 영화로 만들어진 것이다. 영화는 흥행을 목적으로 하고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를 원한다. 감독은 그저 있었던 일을 영상으로 만들어냈을 뿐이다. 그리고 관객에게 던져줬다. 그리고 관객들은 이 영상을 본다. 그리고 충격받는다. 이 영화는 공포영화로서가 아니라 그 사실로서 모든 이들이 봐야 할 영화다. '그들'과 비슷한 연배의 청소년들이 봐야 할 영화다. 어떻게 그렇게 잔혹할 수 있는지. 그렇게 아무런 생각 없이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는지.

 

***

<루마니아 살인 사건의 전모>

2002년 10월 7일 오후 5시 35분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근교 스나고브 지역의 외진 국도에서 모녀로 추정되는 시체 2구와 심하게 훼손된 차량 한 대가 발견되었다. 차량 안에는 10대로 보이는 소녀가 목이 졸린 채 숨져 있었고, 얼마 떨어지지 않은 도로 옆의 수풀 속에서는 흉기에 난자 당한 중년 여성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사건 당일 갑자기 내린 소나기로 범인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고, 수사는 미궁으로 빠졌다.

2002년 10월 11일 오후 1시경 부쿠레슈티 경찰서로 클레멘타인이라는 여교사의 실종 신고가 접수되었다. 경찰은 실종된 여교사의 집을 찾았고, 찾아간 집안에서 진흙 묻은 여러 발자국과 혈흔을 발견, 곧장 주변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수색 결과, 집 안의 모든 전기선과 전화선이 잘라낸 듯 끊겨져 있었고, 곳곳에는 깨진 유리 파편과 핏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2002년 10월 12일 오후 3시 경 주변 수색을 펼친 지 하루가 지나 저택 부근의 숲속에 폐쇄된 지하 수로에서 남녀의 사체가 발견되었고, 두 사람은 실종 신고 된 여교사 클레멘타인과 그녀의 남자친구인 루까로 밝혔졌다. 부검 결과 두 사람은 사망한 지 5일 정도 지난 것으로 밝혀졌다.

2002년 10월 15일 경찰은 비슷한 지역에서 닷새 간격으로 시체가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동일범의 소행으로 판단, 수사망을 좁혀갔고 마침내 여교사의 집 바닥의 발자국과 주변의 증거물을 토대로 범인검거에 성공했다.

이후 경찰의 사건보고 발표로 ‘그들’이 범인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2002년 전 유럽은 혼란에 빠졌고, 그 해 10월은 루마니아에서 잊을 수 없고, 잊혀지지도 않는 가장 충격적인 달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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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콜드 블러드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트루먼 카포티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0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진실 혹은 거짓, 픽션 오어 논픽션. 트루먼 카포티의 <인 콜드 블러드>를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허구를 다루는 소설의 형식을 빌어 사실을 전달해주고 있는 새로운 장르의 책이다. 간략히 줄여 '논픽션 노블'이라고 불리우는 이 기법은 저널리즘의 방법론과 소설의 작법을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소설이지만 소설로 그칠 수 없는, 저널이지만 저널로 그칠 수 없는 '글'이다.

  1959년의 미국 캔자스 주의 작고 조용한 동네 홀컴에서는 일가족이 무참하게 피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도대체 왜. 이 작고 조용한 마을에, 더군다나 마을 주민들로부터 신망을 받고 있는 좋은 분들이 모두 살해당했다. 뉴욕타임즈의 기사를 보고 <앵무새 죽이기>의 저자 하퍼 리와 함께 이 작은 마을로 달려온 트루먼 카포티는 이곳에 머물며 사건의 진행과정을 보게된다. 그들이 이 마을에 머무는 사이 두명의 범인이 체포되었고, 그들은 두 살인자의 살인동기와 과정, 삶에 대해서 인터뷰를 하고, 보고 듣고 겪은 모든 것을 기록하였다. 음성 녹음을 통해 재생하지 않고 카포티는 오로지 자신의 기억에 의존해 사건의 시작과 끝을 엮어냈다.

  책의 분량은 가벼운 추리소설로 생각하고 읽어나가기엔 꽤나 두껍다. 본문만 526쪽에 달하는 이 소설(?)은 카포티가 이 책에서 밝히고 있듯 100% 사실만을 바탕으로 하여 꾸며진 소설이다. 있는 사실 그대로를 조합하여 하나의 줄거리가 있는, 마치 실제로 사건 현장에서 카포티가 직접 사건을 목격이라도 한 듯한 이 소설은, 살해장면이나 배경의 세밀한 묘사와 살인범들의 내면에 숨어 엿보는 듯 자세한 심리묘사로 사건의 현장감을 더해주고 있다. 마치 카포티의 눈을 빌려서 사건현장에서 그들을 몰래 지켜보는 듯 하다. 카포티는 비록 마을에 체류하며 이런저런 객관적인 정보들을 수집하고, 범인들과 인터뷰를 함으로써 풍부한 자료수집을 했다고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미 상황종료된 사건에 대해 이만큼 실감나게 재현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으리라. 마치 영화를 보는 듯 하다.

  살인은 왜 일어났을가? 누가 이들을 살해했을까? 

  책을 읽는 내내 마치 하나의 영화를 보는 듯한, 하나의 잘 만들어진 추리소설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은 것은 비단 나 뿐만이 아니리라. 책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더 많은 의문이 생기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더 빨리 눈을 돌리며 한편으로 머리 속에서 지금까지 읽은 내용을 가지고 나름대로 또 사건을 재결합해보며 궁금증을 해소하려 애썼다. 카포티가 그 나름대로 이 책을 쓰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고 머리 속에서 사건을 연결하려했다면 나는 카포티가 내게 던져준 정보들을 가지고 내 나름대로 사건을 재구성하는 작업을 했다고나 할까.

  이 책을 통해서는 여러가지 분야의 다른 주제들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하나는 사형제도에 관해서. 사형제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 과연 이와 같은 무자비한 자들에게도 사형을 면케해주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내 자신에게 다시 던져볼 기회를 주었다. 우리사회에서 발생하는 흉악 범죄 행위들에 대해 신문쪼가리의 작은 기사를 통해 접하게 되는 그 사건의 체감온도는 제로에서 왔다리갔다리. 그러나 현장에 있었을 피해자에게는 체감온도 200도 였으리라. 그럴 때보면 기본적으로 사형제 반대다 라는 입장은 너무나 쉽다. 내가 직접 당하지 않았으니까.

  왜 살해 당햇을까, 살인 동기가 무엇일까, 라는 질문은 사건을 체험하지 않은 자들이 당연히 갖게 되는 첫번째 궁금증이지만, 현장에 있었을 피해자들에겐 쓸데 없는 질문이라는 것. 그것은 무의미하다.  

  두번째는 앞서 이야기한 허구를 담고 있는 소설이란 장르와 객관화된 사실을 담아야 할 리포트 혹은 기사의 어울리지 않는 조합. 이런 책은 처음이었다. 아 이렇게 조합도 가능하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 책.

  세번째는 인간의 性에 관한 물음. 섹스가 아닌 성품에 관한 물음. 인간은 선한 존재인가, 악한 존재인가. 아주 오랜 시절부터 시작되어온 고리타분한 질문이지만 아직도 모를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 중 한 가지. 두 범인의 가정환경과 배경으로 보아 두 사람의 잘못이라기보다 사회의 잘못이라고 탓을 해야하는 걸까. 사회의 잘못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인가, 하는 등등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

  <인 콜드 블러드>는 단순히 소설로서 내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것은 내용면에서 형식면에서 내게 많은 충격을 주었고, 새로움을 경험하게 하였다. 그리고 또 많은 주제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이 책 그 자체만으로 놓고보았을 때도 그 작품성은 인정되지만 나 개인에게 있어서도 의미있었던 책이다.

  카포티 자신은 네 살 부모의 이혼을 겪었고, 이후 어머니의 재혼으로 트루먼 카포티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 학교를 다니다 열 일곱살에 중퇴를 했고, 신문사 사환으로 일했으며, 독특한 옷차림으로 주목을 받기도 했다고. 소설이 서서히 여러 잡지에 소개되기도 했고, 사교계에서도 한 인물 했으며, 연극, 영화, 전기, 뮤지컬에도 관심과 재능을 보였던 그다. 그리고 <인 콜드 블러드> 이 책으로 대박을 터뜨려, 그는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쥐게 되었다. 그러나 약물중독의 합병증으로 생긴 간질환으로 생을 마감하다. 그의 나이 61세. 다양한 일을 하며 또 사교계에서 재미도 맛보며 인생을 즐겼던 그는 작품 하나를 남겨두고 떠났다. 대개 '작품'이라 칭송받는 작가들이 사후에 그 업적을 인정받아 살아생전에 이런저런 명예와 부의 즐거움을 맛보지 못하는 반면, 그의 경우는 모든 것을 다 누리고 갔으니 후회없으리라. 영화 <카포티>에서는 저자가 직접 나서서 이 책을 집필하게 된 과정을 보여준다고 하니 카포티 개인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은 - 나를 포함하여 - 영화를 보면 그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듯 하다.

  

 ***
초반에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의 각각의 등장인물들에 대한 묘사와 평온한 일상의 삶을 그려낸 부분은 지루했으나 이 역시 르포르타주로서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부분이라 생각한다. 사건 발생 이전의 그것은 카포티가 임의로 만들어낸 허구에 가까운 부분이겠지만, 그것은 뒤에 일어날 평온을 깨는 반전을 위해서는 필요한 부분이었다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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