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생각하다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강명순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2월
품절


어느 누구도 그것에 대해 물어보지 않았을 때는
나는 그것에 대해 알고 있다. 하지만 누군가로부터
그것에 대한 질문을 받고, 그것에 대해 설명을 하려하면
나는 더 이상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9쪽

시인이란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모르고 있는 것에 대해 쓰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비록 잘 알지는 못하지만 아주 정확하게 알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정확하게-알지-못함>, 즉 <도대체-나는-그것이-무엇인지-모르겠다>는 사실이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붓이나 펜, 혹은 악기를 집어 들도록 만드는 가장 원초적인 동력이 된다. -11-12쪽

플라톤에 의하면 바보들은 그들 자신에게 만족하고 있기 때문에 아름다움이나 선함, 혹은 성스러운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다. 현명한 사람들 역시 이미 그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단지 중간에 있는 사람들, 바보와 현자의 중간에 있는 사람들만 그것을 추구한다. -22쪽

사랑에 빠지게 되면 누구나 어느 정도 멍청해진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을 확인하려면 자신이 쓴 연애편지를 한 20-30년쯤 지난 후에 다시 읽어보라. 기록으로 남아있는 그 멍청함, 치기, 우월감, 그리고 맹목적인 사랑을 보고 얼굴이 빨개지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또한 내용은 얼마나 유치하고, 문체는 또 얼마나 격정적인가. 평균 이상의 지적인 사람조차 그런 상태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어리석은 짓을 하고,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어리석은 내용을 써내려 간다는 사실이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좀더 너그러운 시각에서 말한다면, 순진무구해서 그런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또한 그것에서 오히려 공감과 감동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런 행동은 사랑이 사람을 얼마나 멍청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입증해 줄 뿐이다. -36쪽

사랑은 언제나 이성의 상실, 자포자기, 그로 인한 미성숙함이라는 대가를 치러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잘 해야 우스꽝스러운 코미디가 되는 것이고, 최악의 경우에는 세계 정치사의 대재앙이 되는 것이다. -38쪽

나 살아있는 그 존재를 찬양하리,
불꽃같은 죽음을 동경하는 그런 존재를.

사랑의 밤들의 서늘함 속에서,
당신의 증인이었고, 이제 당신 자신이 증인이 된 그 속에서,
촛불이 고요히 타오를 때,
낯선 느낌이 당신을 사로잡네.

이제 더 이상 당신은
어둠 속 그늘에 싸여 있지 않네,
새로운 욕망이 당신을 사로잡네,
더 높은 곳에서의 성교라는 욕망이.

그곳이 아무리 먼 곳이라도 당신은 두렵지 않네,
당신은 황홀경에 빠져 훨훨 날아오르네,
그리고 빛을 열망하는 당신,
이제 당신은 드디어 나비로 불타오르네.

하지만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못하네,
그렇다 : 죽으면 그리 되리라!
이 어두운 지상에서는
당신은 단지 우울한 손님일뿐.

괴테 <행복한 동경> -56-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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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한 권의 책이었다
소피 카사뉴-브루케 지음, 최애리 옮김 / 마티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그 자체로서 하나의 작품이고 세상이 된 책이다. '세상은 한 권의 책이었다'라는 제목을 단 출판사는 정말 탁월한 선택을 했다. 어쩜 이렇게 이 책을 압축적으로 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제목은 이 책의 모든 내용을 담아내고 있는 동시에 책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이 책 그 자체를 표현하기도 한다. 이 책 안과 밖에 모든 세상이 담겨있다.

  "신이 세상을 창조했듯이 사람은 한 권의 책을 만들었다"
 "그의 빛 깊은 곳에서 나는 보았노라. 우주에 흩어진 모든 것이 사랑에 의해 한 권의 책으로 엮어진 것을"

  이 책에 딱딱하게 곧이곧대로 부제를 붙이자면 '책의 역사'가 가장 적절한 선택일 것이다. 제 1장의 책 만들기 에서부터 시작해서, 책값과 책수집가들, 책도둑을 살피고, 3장에서 책을 읽는 독자들의 변천사를 다룬다. 4장에서는 책에 그림을 그린 채식사들의 작업과 그 예술의 결정체들을 보여주며 마무리 한다.

  지금 우리는 이렇게 손쉽게 책을 구경하고, 약간의 돈만 지불하면 쉽게 책을 구입할 수 있지만, 그때 그시절에는 책이 매우 귀했다. 그것은 하나의 예술작품이고, 돈 많은 부자들만이 소유할 수 있는 고가의 보물이었다. 종이가 아닌 양피지와 파피루스로 만들어진 책들은, 성서의 경우 한 권을 만들기 위해 양 200마리를 죽여야 한다고도 했다. 아 이런 불쌍한 양들. 양만 죽느냐. 아니다. 소가죽도 쓰인단다. 또 책장을 만들기 위해 양과 소를 죽이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책에 쓸 필기구가 필요했다. 펜이 흔치 않았던 그 시절에, 가장 고급스럽게 사용되었던 것이, 거위의 깃털이라고 했지. 거위의 깃털 중에서도 네번째 깃털이 가장 부드럽게 쓰여졌나보다. 그러니 종이에 필기구에 벌써 동물들의 희생과 거금의 돈이 따른다. 여기에 오늘날처럼 글자만 쓰여져있는 책이 아닌, 책에 삽화를 넣고, 그림을 그리고, 꾸미는 작업을 하는데에 또 대단한 노력이 들어간다. 그런 작업을 하는 이들을 채식사라 불렀는데, 이 책 안에 소개된 그들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입이 떡 벌어진다. 정말. 책에 들어간 삽화정도로 치부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박물관에 걸려있어야 할 유명 화가들의 작품과도 같다. 그러니 책이 비싸고, 귀할 수 밖에 없다. 아무나 책을 소유할 수 없었기에 그들은 자신만이 소유하는 책이 그만큼의 값어치를 하길 바랬고, 하나뿐인 책을 위해 온갖 정성과 노력을 기울였다.

   중세에는 주로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에 의해 책이 만들어졌으나, 이후 도서관과 학교로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필경사라는 직업과, 채식사라는 직업이 따로 생겨났다. 책이 있음에도 공부를 하지 않는 지금의 우리들은 너무나 행복한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것이다. 엄청나게 비싼 책값과 그 돈을 주고도 구할 수 없는 책들을 구입하기 위해 얼마나 힘들었을고. 책이 귀했기에 또 책을 훔치는 이들도 있었는데, 마치 오늘날 고가의 노트북이나 피엠피를 훔치는 도둑들에 비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하여 13세기의 한 성서에는 이런 경고문구까지 적혀있었다.  

"이 책은 파리 생빅토르의 소유이다. 이 책을 훔치거나 이 경고문을 숨기거나 지우는 자는 천벌을 받을지어다. 아멘. 이 장서는 프랑스 왕비이며 성왕 루이의 모후였던 블랑슈가 파리 생빅토르 교회에 기증한 것이다."

 "이 책을 훔치는 자는 교수형을 당할지어다"  

  아니 어떻게 교회에서 이런 문구를 사용할 수가 있는가. 사람들의 행복을 기도해야 할 교회에서, 사랑과 자비의 정신을 실천해야 할 교회에서 어찌 이런 문구가 사용될 수 있단 말인가. 하기야 오늘날의 일부 교파에서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불행을 눈감는 이들이 어디 한둘이랴. 책을 훔치면 천벌을 받고, 교수형을 당할 것이라니. 아 정말 무섭다. 책 하나 훔쳤다가 지옥가게 생겼다. 얼마나 책이 귀했고, 책 도둑이 극성을 부렸으면 저런 문구가 붙여있었을까 싶다.  

  고대와 중세를 거슬러 올라오는 책의 역사는, 한마디로 문명의 역사이고, 세상의 역사이다. 책 안에는 모든 세상이 담겨있다. 그 안에 세상을 창조한 하느님이 있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있고, 왕과 왕비가 있고, 음악이 있고, 건축이 있다. 책은 지식을 전파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그치지 않고, 그림과 음악과 건축 등등의 예술,문화 작품들을 포함하고 있다. 책 안에는 모든 역사와 세상이 담겨있었다. 

  "어떤 이들은 신을 발견하기 위해 책을 읽는다. 그러나 더 큰 책이 있으니 창조된 세계 자체가 그것이다. 사방 위아래를 둘러보고 눈 여겨 보라. 그대가 발견하고자 하는 신은 먹물로 글씨를 쓰는 대신 지으신 만물을 그대 눈 앞에 두신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스콜라 철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은 원죄 이후 불완전한 존재가 되어 세상이라는 책을 제대로 읽지 못하게 되었으며, 그래서 신이 인간에게 그 뜻을 계시한 책 곧 성서를 주셨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이 모든 세상은 신의 손가락으로 씌어진 한 권의 책과도 같다. ... 그러나 까막눈이는 책을 펼치고 글자를 들여다보아도 읽지 못하듯이, 어리석은 자연의 인간은 성령에 속한 것을 알지 못한다..."(위그 드 빅토르)  

  책을 좋아하는 이들은 이 책 한권을 소장함으로써 뿌듯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중세의 그 귀했던 책들 못지 않게 이 책은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종이 위에 책의 역사를 서술하고, 선명하고 눈에 부신 아름다운 그림들을 담아낸 하나의 예술작품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한 권의 책이었고, 이 한 권은 세상을 담고 있다. 책 수집가들은, 애서가들은, 결코 이 책을 지나칠 수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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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 2006-03-20 0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엄청난 지름질 리뷰로 임명합니다ㅠㅠ
그냥 순순히 꾸욱.

마늘빵 2006-03-20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이 책은 절대 안사고는 못배기는 책이에요. 고대와 중세의 책에 관한 모든 역사와 뒷이야기가 담겨있다는. 책을 논하는 책 답게 종이도 최상급입니다. 삽화의 질도 최고최고.

반딧불,, 2006-03-20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
댓글로 지름질. 아프락사스님 나뽀요.

마늘빵 2006-03-20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비로그인 2006-03-20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반디북에서 읽었는데요.역자해설도 친절하고, 번역도 잘되었고 갖고싶은책이죠. <독서의 역사>의 오역을 생각하면.. 요시미 순야의 <소리의 자본주의>와 함께 읽으면 연결점이 있어요.책을 낭독하다가 묵독 했는데 현대에는 라디오를 통해서 생각이 전달되는 시대의 변화!!!

하이드 2006-03-20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점에서 봤을때는 재미없어보이던데 =3=3=3

마늘빵 2006-03-20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하이드님 책의 역사를 멋드러진 삽화와 함께 살펴보는 재미라고나 할까요.

드팀전 2006-03-20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두 탱스 투.... 기록한번 세워보삼.

마늘빵 2006-03-20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드팀전님 감사합니다.

stella.K 2006-03-23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중세시대 교회가 좀 무섭긴 하죠? 저런 글을 써놓다니...그만큼 교회가 책을 중하게 다뤘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비싼 시절이었고...교회 권위라는 것도 있고...하지만 기독교가 책의 발전에 이바지 했던 점도 있지요? 특정 종교 옹호하는 것처럼 들려 조심스럽긴 합니다요.
요즘 인간의 이기심과 이타심이 인류발전에 얼마나 기여했을까 그런 거 생각해 보고 있는 중입니다요.^^

마늘빵 2006-03-23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스텔라님 네 이 책에서도 기독교가 책의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에 대해서 자주 언급하고 있어요. 필사라는 것도 다 수도원에서 시작한 것이니까요.
 
세상은 한 권의 책이었다
소피 카사뉴-브루케 지음, 최애리 옮김 / 마티 / 2006년 2월
구판절판


"그의 빛 깊은 곳에서 나는 보았노라.
우주에 흩어진 모든 것이
사랑에 의해 한 권의 책으로 엮어진 것을"
-단테의 <신곡> '천국편' 中--5쪽

호화로운 수서본을 만들기 위해서는 양피지를 자주색이나 검정색으로 물들여 금색이나 은색으로 글씨를 쓰기도 했다. 가죽은 파피루스나 종이보다 더 견고하고 불에도 잘 타지 않는다. 장정을 하는 데 다시 쓸 수도 있고, 이미 쓴 글씨를 긁어내고 새 글씨를 쓸 수도 있다. 그렇게 해서 덧쓴 수서본을 '팔랭프세스트'라 한다. -18쪽

"이 책은 파리 생빅토르의 소유이다. 이 책을 훔치거나 이 경고문을 숨기거나 지우는 자는 천벌을 받을지어다. 아멘. 이 장서는 프랑스 왕비이며 성왕 루이의 모후였던 블랑슈가 파리 생빅토르 교회에 기증한 것이다." (밑줄그은 이 주 : 13세기 어느 성서에 쓰여진 말)

"이 책을 훔치는 자는 교수형을 당할지어다" -90쪽

책 한권을 소유하거나 빌리는 것, 손에 책을 드는 것, 읽어나가면서 기계적으로 책장을 넘기는 것, 우리 시대에는 대수롭지 않은 이 모든 동작들이 중세에는 극히 드물고 엄숙하기까지 한, 학문이나 재산을 많이 가진 특권층에 국한된 것이었다. 기독교는 책이라는 물건을 거의 신성한 위치에 두어 '책의 문명'을 탄생시켰다. 그리하여 독서란 비록 소수에게 국한되기는 했지만 긍정적인 함의를 지니는 행동으로 간주되었다. -93쪽

"어떤 이들은 신을 발견하기 위해 책을 읽는다. 그러나 더 큰 책이 있으니 창조된 세계 자체가 그것이다. 사방 위아래를 둘러보고 눈 여겨 보라. 그대가 발견하고자 하는 신은 먹물로 글씨를 쓰는 대신 지으신 만물을 그대 눈 앞에 두신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214쪽

스콜라 철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은 원죄 이후 불완전한 존재가 되어 세상이라는 책을 제대로 읽지 못하게 되었으며, 그래서 신이 인간에게 그 뜻을 계시한 책 곧 성서를 주셨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이 모든 세상은 신의 손가락으로 씌어진 한 권의 책과도 같다. ... 그러나 까막눈이는 책을 펼치고 글자를 들여다보아도 읽지 못하듯이, 어리석은 자연의 인간은 성령에 속한 것을 알지 못한다..."(위그 드 빅토르)

"인간이 원죄로 타락하면서... 자연이라는 책은 파괴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이 책의 뜻을 밝히기 위해 또 다른 책이 필요해졌으니, 그것이 바로 성서이다."(보나벤투라)-214-215쪽

"우리는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앉은 난쟁이들과도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대인들보다 더 많은 것을 더 멀리까지 볼 수 있지만 그것은 우리 자신의 눈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들의 높직한 어깨 위에 올라앉은 덕분이다."(베르나르 드 샤르트르)-2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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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 경고

  암울한 미래사회를 배경으로 한 한판의 복수극. <브이 포 벤데타>를 한 줄로 설명하자면 이렇게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워쇼스키 형제가 각본을 담당하고, <매트릭스> 사단의 신인감독 제임스 맥티그가 지휘한 <브이 포 벤데타>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이 영화 역시 또 평가가 극과 극을 달리고 있다. 아마도 이 영화를 보려는 관객들은, 대부분 <매트릭스>를 떠올리며 '워쇼스키 형제'라는 광고문구를 보고 극장을 찾을 것이다. 나 역시 포스터 중간에 걸친 '워쇼스키 형제'라는 문구에 혹 하고 끌렸으니. 처음 듣는 감독의 이름, 또 별로 관심없는 나탈리 포트만과 휴고 위빙. 절대로 '워쇼스키 형제' 없이는 지금의 예매율 2위를 기록할 수는 없다.

  나는 이런 영화를 좋아한다. 암울한 미래 사회와 복수극. 내가 관심있어 하는 두 가지 소재가 한 영화에 모두 담겨있으니 더더욱 끌릴 수 밖에. '워쇼스키 형제'는 나로 하여금 이 영화에 대해 처음 관심갖게 만들었지만, 영화가 다루고 있는 소재는 나를 극장으로 불러들였다. 이 영화는 매트릭스 사단의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워쇼스키가 그러하고, <매트릭스>의 제작진이었던 초짜 감독이 그러하고, 이 영화에서 결코 얼굴 한번 드러내지 않는 휴고 위빙이 또 그러하다. 그는 <매트릭스>에서 스미스요원으로 활약했다. 그러니 <매트릭스> 사단의 영화라고 볼 수 밖에.



* 총과 칼의 대결, 일대 다의 대결. 하지만 승자는 브이. '승리의 브이'는 그에게로 돌아갔다. 하지만 총알세례를 받고도 끄덕없던 브이는 모든 총알을 막아내진 못했다. 결국 이 싸움으로 인해 영웅은 잠든다.

  2040년의 통제된 사회. 미국에 의해 제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후의 영국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다양성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사회. 피부색과 종교와 정치적 성향과 성적 취향 등등의 것은 모두 무시된다. 오직 한 가지만 존재할 뿐. 정부의 지도층과 취향을 같이 하지 않는 이들은 '정신집중 캠프'로 끌려가 자취를 감추고, 이들이 사는 거리과 집안 곳곳에는 감시 카메라와 도청기가 설치되어 있어 엄격히 통제받고 있다. 사회는 매우 평온하다. 아무도 불평불만이 없고, 전쟁과 시기, 미움, 다툼, 증오, 분노를 찾아 볼 수 없다. 마치 영화 <이퀼리브리엄>에서의 사회와 같다. 사람들의 감정까지 통제하진 않지만 모든 사람들은 감시와 통제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한편으로 조지오웰의 <1984년>을 토대로 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암울한 미래 사회를 그려낸 대부분의 영화들은 모두 조지오웰의 <1984년>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마치 화이트헤드가 "모든 철학은 플라톤의 주석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모든 암울한 미래사회를 그린 작품들은 조지오웰의 주석이다.



* 브이의 그날의 연설은 많은 이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나보다. 일년 뒤 시민들은 거리로 나왔고, 혁명은 성공했다. 수많은 브이들은 새 시대를 맞이했다.

  통금시간을 넘긴 어느 밤, 이비는 PD를 만나러 갔다가 거리에서 정부요원에게 붙잡힌다. 그러나 어디선가 나타난 괴력의 사나이로부터 도움을 받고 그와 함께 대법원의 폭파 장면을 감상(?)한다. 국회 의사당을 폭파하려다 사형당한 가이 포크스라는 사나이의 얼굴을 한 가면을 쓰고, 검은 모자, 검은 망토, 검은 부추를 신은 이 정체불명의 사나이는 도대체 누구? 횡설수설 이런저런 문구들을 붙여다가 자신을 소개하는 정신나가 보이는 이 사나이의 이름은 '브이'. 그는 셰익스키퍼의 <맥베스>의 대사를 술술 읊어대고, 이런저런 고전 속의 유명 문구들을 인용하며 세상에 맞서 싸우는 자신을 정당화한다.

  아무도 불평불만이 없는 조용한 사회. 그럼 태평천하가 아니던가? 아니 누가 이런 평온한 우물가에 커다란 돌덩이를 던지려 하는가. 브이는 테러분자인가. 시민들은 아무런 불만없이 살아가고 있지만, 브이의 출현으로 인해 서서히 깨달아간다. 우리는 정부의 통제 아래 자유를 빼앗겼음을. 그리고 1년 뒤를 기약한다. 혁명의 그날을.

  브이는 스스로 정의로운 복수를 감행한다 하지만 정의로운 복수란 것이 가능한 것일까? 영화는 암울한 미래사회를 그리며 국민들 각자의 가슴속에 자유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는 한편, 복수의 문제, 정의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과거 생체실험의 도구로 쓰였던 브이 자신은 지금 정부 고위 지도자가 되어있는 그들에게 개인적인 복수를 감행함과 동시에 국민들에게 자유를 되돌려주기 위한 정의의 복수를 시도한다.

  복수는 가능하다. 복수의 문제, 정의의 문제를 논함에 있어 함무라비 법전을 인용하지 않을 수는 없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생체실험의 대상이 되어 온갖 고문을 당하고 실험을 당한 브이는 그들에게 복수를 행함에 있어 그 수단으로 화학적 독극물을 사용한다. 하지만 고통이 없는 죽음. 주사기를 통해 독극물을 투여하고, 고요히 잠든 그들의 가슴 위에 주황장미를 얹어놓고 떠난다. 좋다. 내가 당한 만큼 돌려주는 개인의 복수는 납득 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은 정의로운가?

  아무도 불평불만이 없는 사람들, 하지만 브이는 지금의 이 사회가 잘못되었다라고 진단을 내리고, 잘못된 사회를 고치기 위해, 정의로운 복수를 한다고 말한다. 정부 지도자들은 국민들을 속였고, 통제했으며, 자유를 박탈했다. 그러니 그들에게 복수를 해야한다. 잘못된 사회를 바꿔놔야 한다고 말한다. 오직 브이 혼자만이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는 테러분자인가, 정의의 영웅인가. 우리가 보기에도 아무도 불만이 없지만 억압과 통제가 자유를 대신하고 있는 그 사회는 분명 잘못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이의 정의로운 복수는 그다지 설득력이 없어보인다. 잘못되었다는 진단엔 동의하겠는데 이에 대고 정의로운 복수를 하겠다고 홀로 나서는 브이의 처방은 선뜻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진 않는다. 무엇이 잘못일까. 그가 행하고자 하는 것은 혁명이다. 사람들에게 깨우침을 주고 일년이 지난 뒤 함께 정부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상을 열자는 것이다. 자유의 세상을 열자는 것이다.

  혁명은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혼자 할 수 있다고 해도 혼자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잘못된 사회를 뒤바꾸기 위한 노력은 다수의 국민들이 깨닫고 나서서 행동할 때 비로소 결실을 맺는다. 소수의 사람들의 진단만으로 사회를 뒤바꿀 수는 없다. 비록 소수의 사람들이 그 사회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할지라도 많은 이들이 사회에 불만이 없다면 그 사회는 별 문제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사회를 이루고 있는, 국가를 이루고 있는 국민들의 몫이다. 북한 사회가 독재체재라고, 아랍계 국가들이 일부다처제를 실시한다고 그들이 그르다고 말 할 수는 없다. 각 사회마다, 국가마다 문화와 정치체제는 다를 수 있다. 그 사회와 국가를 이루고 있는 다수의 국민들이 그 체제에 불만이 없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괜.찮.다. 자유를 박탈당한 영국의 미래사회가 비록 문제가 있어 보이긴 하나 많은 이들이 불만없이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도 그 자체로 괜.찮.다. 영화는 브이를 정의의 영웅으로 칭송하려는 듯 하다. 브이가 만약 국민들에게 호소하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는 정의를 실행에 옮겼다면 그것은 정의실현이라 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언론을 통해 국민에게 호소했고, 일년 뒤 국민들은 가이 포크스의 가면과 검은 망토, 검은 모자를 쓰고 거리로 나왔다. 그리고 혁명은 성공했다. 그리고 그는 영웅이 되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혁명은 성공했고, 혁명의 방법도 괜찮았다. 하지만 그것은 정의로운 복수였는가. '정의로운 복수'라는 말 속엔 이미 복수 그 자체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다. 앞서 개인적인 복수가 옳다할 순 없지만 납득가능하다고 말했던 것은, 복수를 하는 브이의 심정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슴으로 하는 것이다. 복수가 정의 실현의 한 방법임은 틀림없다.  복수라는 말 ekdikesis는  ek는 영어 from과 dikesis=justice의 합성어이다.  복수는 정의로부터 왔다. 복수 또한 정의실현의 한 방법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의 방법이 되는 것과 그것이 옳은가 하는 문제는 서로 다른 문제이며, 복수를 그 자체로 옳다고 볼 수는 없을 듯 하다. 복수를 하는 방식엔 여러가지가 존재한다. 브이의 '피의 복수'(vendetta)를 옳은 방식의 복수라 볼 순 없지 않을까.

 복수의 문제, 정의의 문제, 과연 정의로운 복수란 가능한가와 같은 문제는 내 머리 속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다. 확실한 결론은 없다. 여전히 내 머리 속은 정리안된 복수와 정의의 문제로 뒤엉켜있고 고민은 계속된다. 브이의 방식이 세상을 바꾸기 위한 불가피한 방법이었을까 하는 의문은 현재 진행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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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병에 대한 진단과 처방 - 임상철학
김영진 지음 / 철학과현실사 / 2004년 12월
평점 :
품절


 2004년 겨울에 펴낸 한 철학자의 철학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는 책이다. 저자 김영진의 말마따나 우리나라는 철학을 하기 매우 안좋은 풍토를 가지고 있다. 철학하기 나쁜 환경은 일전에 인문학의 위기를 논하던 어떤 인문학자의 의견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일부는 인문학, 철학을 하는 이들의 책임이다. 과학의 위기를 논하고 과학의 위기를 극복하자는 말들이 신문과 방송, 책을 통해 수도 없이 쏟아져 나오지만,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얼마전 신문기사를 보면, 인문학부 중에서도 철학과 독문학과 같은 학문은 더더욱 인기가 없다. 전공을 하려는 자가 없고, 성적이 낮은 학생들이 마지못해 커트라인에 잘려 철학과 소속이 된다. 교수입장에서 선배입장에서 철학에 대한 열의가 없는 이들을 학생으로, 후배로 받았으니 기분이 썩 좋을리 없다. 마지못해 그렇게 철학과에 적을 둔 이들은 마음이 없는 철학과를 떠나기 위해 다시 전과를 시도한다.

 99년의 봄, 나는 경제학과에서 철학과로 전과를 했고, 철학과의 누군가는 경제학과와 경영학과로 전과를 했으며, 어떤이는 철학에 적을 두었지만, 철학에 대한 불안 때문인지 경영학이나 경제, 컴퓨터를 복수전공하는 이들도 매우 많았다. 막연하게 철학이 좋아서 철학과로 적을 옮기고 이곳에서 학사모를 쓴 나는 이와 같은 철학에 대한 좋지 않은 풍토 속에서 특이한 아이로 찍힐 수 밖에 없다.

 서문에서의 저자의 말에 따라, 철학은 "쌀 한 톨도 고무신 한 짝도 만들지 못한다."

 "물질적인 것을 생산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철학은 거의 무능력하다고 말해도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오죽했으면 철학 공부하면 밥벌이 못하고 굶어죽는다는 말까지 나왔겠는가? 필자는 이런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국가, 사회 그리고 개인들에게 철학이 끼칠 수 있는 영향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정말 크다 할 수 있다. 이 책은 철학과 현실을 접목시키기 위해 쓴 것이다. 그래서 구체적인 문제를 많이 다루었다. 그리고 철학적 병을 다루면서 진단하고 처방하는 작업을 했다. 독자들은 철학적 병이 무엇인지 매우 궁금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궁금증을 풀 수 있을 것이라고 필자는 믿고 또 희망한다. "

 저자의 철학에 대한 열정이 느껴져 기쁜 동시에, 철학을 하는 이가 철학이 필요해요, 제발 철학에 관심 좀 가져주세요, 라고 외치는 것 같아 슬프기도 하다. 이 책은 지금까지의 철학의 분류방식에서 나타나는 형이상학, 논리학, 윤리학, 분석철학, 심리철학, 인식론, 존재론 등과는 다르다. 저자는 '임상철학'이라는 또 하나의 새로운 철학을 가지고 나온다. 하지만 그 토대는 지금까지의 철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우리사회에는 많은 문제점들이 있고, 그것을 치유하는데 있어서 여러가지 분야에서 처방전이 나오지만,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철학이 그 처방전을 써야 한다고 이야기를 한다. 병에는 육체적 병과 정신적인 병이 있고, 또 하나 철학적인 병이 있다. 이 철학적인 병을 치유하는데 있어서는 당연 철학이 그 치유제가 되어야 한다. 철학적 병을 진단하고 진단에 따라 적절한 치료와 처방을 하는 철학의 새로운 분야를 '임상철학'이라 칭한다.

  철학적 병은 육체적 병과 달리 주사나 약이 필요하지 않다. 객관적으로 드러나는 육체적 병과 달리 철학적 병은 객관적인 기준이 없기 때문에 많은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철학적 병은 매우 가치 지향적이다. 또한 육체적 병과 정신적 병이 주로 본인에게만 해당하는데 비해, 철학적 병은 나를 넘어 가족, 사회, 국가 등의 타인에게 영향을 행사한다. 그래서 더 위험하고, 치유가 시급하다. 저자는 철학적 병의 예로서 몇가지 구체적인 예를 들고 있다. 광신주의, 애국주의, 파시즘이 그것이다. 어떤 잘못된 믿음으로부터 시작된 전통적인 고정관념 역시 이에 해당한다.

 철학자 김영진은 철학적 병을 진단하고 이를 처방하기 위한 방법으로, 윤리와 가치관적 차원에서 본 철학적 병과 잘못된 논리로부터 생기는 철학적 병, 또 인식론의 차원에서 살펴본 철학적 병으로 나누고, 이에 대한 처방을 시도한다. 그 시도는 매우 신선해 난 그의 주장에 푹 빠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의 주장을 따라 책을 읽어나가며 아 뭔가 부족하다, 아직 정리가 안되어있다, 아직 미숙하다, 라는 생각을 떠나보낼 수 없었다.

  우리사회의 병폐와 문제점에 대해 철학이 치유의 역할을 해야한다는 저자의 주장에는 적극 동감하고, 그 시도도 매우 훌륭하다 생각하지만, '임상철학'이란 새로운 분야에 대한 체계적 정립은 좀더 시간을 가지고 연구해 나가야 할 사항이라 생각한다. 저자의 열정은 내 마음에 전해졌지만, 저자의 이론은 내 머리에 완전히 와닿지는 않았다. 철학을 좋아라하고, 철학을 사랑하는 나로서는 저자의 연구가 좀더 진행되고, 그의 주장에 동감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나길 바란다. 저자 혼자만의 노력으로 해결 될 일은 아니다. 그의 주장은 좀더 다듬고 보충한다면 충분히 설득력이 있으며, 철학이 외면받은 현실에서 해야할 '현실적인 과제'를 찾을 수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어쩌면 이 책은 새로운 '임상철학'을 소개하는 책이 아니라, 철학이 이 땅에서 할 수 있는, 현실에 도움을 줄수 있는, 제 역할을 찾기 위한 책인지도 모른다.

   

추가하며.

이 책을 좀더 자세히 뜯어본 결과,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임상철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려고 한 시도와 우리 사회의 문제점들을 철학적 병으로 규정하고, 철학의 제 역할을 찾아주기 위한 노력은 좋았으나, 실패했다. 저자 자신은 주장을 함에 있어 구체적이고 튼튼한 근거를 대지 못했고, 논란의 소지가 많은 부분을 저자 자신이 철학적 병으로 규정함으로써 저자 또한 철학적 병을 앓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전쟁에는 정당한 전쟁과 정당하지 못한 전쟁이 따로 있다는 말, 이것은 아마도 부시의 이라크 전쟁과 뒤이어지는 우리의 파병을 지지하기 위한 우회적인 발언이 아닐까 싶다. 모든 전쟁은 잘못이다라는 주장을 하는 이들을 철학적 병을 앓고 있는 이들로, 또한 광신주의에는 좋은 광신주의와 나쁜 광신주의가 있다는 발언 등등 매우 민감하고 예민한 부분들, 또 어떤게 잘못이고 잘못이지 않은지 검증되지 않은 부분을 건드림으로써 저자는 자신이 의사로서 환자를 처방하는 절대 권력을 지닌 자로 올라선다.

시도면에서 참신했기에 긍정적인 평가를 하려했으나, 재차 읽어본 지금, 그다지 좋은 점수를 주지 못하겠다. 철학 교수로서 논리적이지 못한 글을 쓴 죄도 숨길 수 없는 부분이다. 주장이 있으면 그에 걸맞는 튼튼한 타당한 근거가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장만 있고 근거가 없는 이야기들을 풀어내고 있다. 논리적으로 매우 문제가 많은 글이며, 철학교수라는 직함이 어울리지 않는다.

다시말하거니와 시도는 좋았으되 내용은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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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6-03-18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신학에 적을 두고 졸업을 했습니다만, 심리학이 좋았고, 지금은 여전히 문학이 좋으며 돈 안되는 일만 하고 있지요.ㅜ.ㅜ
그럼요. 철학은 현실에서 쓸모가 있죠. 근데 돈도 됐으면 좋겠어요.흐흑~

마늘빵 2006-03-18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신학도 현실성 면에서는 소외되어있죠. 다행히 우리나란 기독교과 천주교 신자가 많은지라 나갈 길이 있지만, 딱히 종교 말고도 신학이 할 수 있는 부분은 있다고 생각해요. 상담이라든가 하는. 우리나라는 인문학을 하는 풍토가 너무 조성이 안되어있어요.

stella.K 2006-03-18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너무 조성이 안되 있어요. ㅜ.ㅜ

비로그인 2006-03-19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이나 예스24 같은 인터넷콘텐츠 관련회사들 보면 직원들중에 철학과, 국문과 출신 많은데요. 이공계는 생각보다 적어요. 철학은 공부할량이 많아서 힘들지 한번 쌓으면 쓸모 많습니다. 인문학을 박대한다고 하기전에 과연 인문학도들이 얼마나 공부를 하는지 반성부터 해야 합니다.

마늘빵 2006-03-19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담뽀뽀님/ 아. 네 옳은 말씀이시네요. 인문학도들이 얼마나 공부를 하는지 반성부터 해야한다는 말. 찔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