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 경고

  이번달에는 별로 영화를 보지 못했다. 보고픈 괜찮은 작품들은 꽤 있었지만 한번 외출에 쓰이는 비용과 현재 해야만 하는 일의 압박, 또 여러가지 신경써야하는 것들 등 정신적 여유의 부족에 기인한다. 오랫만의 가족들의 나들이. 아침에 운동을 다녀오고 밥을 먹고 있는데 어머니께서 영화볼까, 그러신다. 당연히 영화 좋아하는 나는 귀가 솔깃, 분명 어제 해야할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빨리 보고 갔다와서 하면 되지, 라는 마음으로 승락. 택한 영화는 뮌헨이었다. <홀리데이>를 볼까 했는데 롯데씨네마에서도 이 영화는 저녁 몇 타임 밖에 상영하지 않았다. CGV랑 갈등을 일으키더니 이번엔 롯데씨네마? 보고픈 영화가 극장을 점거하고 있는 자본의 힘에 따라 간판을 올렸다 내렸다 늘였다 줄였다 하는 것이 영 못마땅하다.

  1972년 9월 5일.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의 일이었다. 그날, 전 세계는 침묵했다. 그러나 2006년 지금 전 세계는 흥분한다. 왜 그때 세계가 침묵을 했는지는 모른다. 나는. 하지만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곳에서 벌어질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작고 큰 충돌들, 아랍권 국가 사이에서의 수많은 다툼은 더이상 특별할게 없는지라 뉴스감이 될 수 없다. 자동차가 처음 생겼을 때 교통사고로 사람이 죽으면 그것은 뉴스감이 되었겠지만, 자동차가 사람숫자에 버금갈(?) 지금에 와서 교통사고로 사람이 죽는 것은 동네에서 보던 익숙한 고양이가 어느날 길거리에 죽어있던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다. 불행히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충돌은 언제나 있어왔고, 지금도, 앞으로도 변하지는 않을 듯 하며, 여기에 관심 갖는 이도 소수일 뿐이다.

  스티븐 스필버그 작품이라고, 에릭 바나가 나온다고 해서 섣불리 이 영화를 봤다간 실망감과 짜증과 지루함이 엄습하리라. 이 영화는 절대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문제에 관심이 없는 이가 재미삼아 볼 건 못된다. 테러영화라고, 액션이라고 해서 헐리우드 특유의 화려한 총격장면이나 전쟁씬이 등장하진 않는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다. 밋밋하고 지루하게 진행되는 이 영화가 두시간 반에 육박하는 러닝타임을 가지고 있는 건 재미를 기대한 관객들에겐 고역이다. 그래서 이 영화에 대한 평가는 별 하나가 수두룩하다. 아무리 유명한 감독과 배우가 영화를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관객들에겐 '따분'과 '지루' 가 현실을 지배한다.  

  나름 잘 알지는 못하지만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문제에 관심이 있다고 생각하고, 또 심지어는 스타벅스 10% 할인되는 신용카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타벅스의 회장이 유대인이며(그건 죄가 아니다), 두 나라간의 전쟁에 이스라엘측 무기구입비를 대준다는 이야기를 듣고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지 않는 나다. 촘스키의 수많은 미국비판과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문제에 대한 책들에도 관심(만) 있어 하는 나로서는 이 영화를 꼭 보고 싶었다.



* 아브너에겐 사랑스런 아내가 있다. 막 태어난 아기가 있다. 그는 가정의 평화를 위해, 국가의 평화를 위해 테러단의 대장이 되지만, 그것은 평화로 가는 길이 아니었다.



* 아브너의 이스라엘 테러단. 왼쪽에서부터 차량 도주 전문 스티브, 대장 아브너, 뒤처리 전문 칼, 폭탄제조가 로버트, 문서위조 전문 한스. 저들 중 살아남을 자는 과연 몇이나 될까.

  72년 뮌헨 올릭픽 선수촌에서 테러가 발생, 이스라엘 선수단 9명이 사살되었다. 팔레스타인 '검은 9월단'은 이곳에 침입, 선수단 9명을 인질로 잡았으나 협상이 결렬되자 모두 살해했다. 이후 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영화는 이후의 사태를 다룬다. 물론 여기까지만 사실이고, 뒤의 이야기는 허구다. 11명의 검은 9월단이 모두 생존한 것으로 보고, 이스라엘은 이들을 하나하나 찾아내어 복수를 가한다. 아브너(에릭바나)는 이 테러단(?)의 대장이다. 그리고 그를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은, 장난감 제조자에서 폭발물 전문가로 변신한 로버트, 차량도주전문가 스티브, 뒤처리 전문가 칼, 문서위조 전문가 한스로 구성된다. 총 5명의 소규모 테러단은 11명 중 6명에게 복수를 가하는데 성공한다.

  팔레스타인의 테러와 이스라엘의 보복, 그리고... 테러는 끝이 없다. 살육은 살육을 부른다. 피는 피를 부른다. 검은 9월단을 하나하나 찾아 복수에 성공하기만 하던 아브너에게도 두려움은 찾아온다. 나의 사랑스런 아내와 태어난 딸이 위험하다는 생각, 내가 도청을 당하고, 테러의 대상이 되었다는 생각. 그래서 그는 침대를 들추고 찢고, 전화를 분해하고, 텔레비젼 뒤를 뜯는다. 자기 조직이 테러에 성공했던 방법들로 똑같이 당할까봐.

  테러의 시작은 어디서부터였는지 모르지만, 테러는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고, 앞으로도 다를 바는 없어 보인다. 내가 누군가를 테러하면 나 또한 언젠가 누군가로부터 테러당할 수 있다. 운이 좋아 살아남는다 해도 나는 죽는 그 순간까지 누군가 나를 죽일 거라는 두려움에 떨며, 내가 죽인 그 많은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살아가야한다. 죽음과 다를 바가 무엇이랴.

  복수는 정의로운가?

  이스라엘 아브너의 테러단은 정의실현을 위해 복수를 한다. 정의란 무엇인가. 복수는 정의로울 수 있는가. 정의의 문제는 몫의 문제이다. 남보다 더 많이 가지려고 하는데서 비롯된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역시 마찬가지다. 서로가 성지를 차지하기 위해 싸운다. 내가 상대에게 불의를 입었을 때, 나는 상대에게 불의를 돌려줘야하는가? 만일 돌려준다면 그것은 복수가 될 것이요, 돌려주지 않는다면 불의는 나에게서 그칠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법정에서 사형이라는 불의를 당했지만, 이에 불복하거나 친구들의 권유에 따라 탈옥을 시도하지 않았다. 그것은 불의를 행하는 것이라 하여. 나는 아테네로부터 불의를 당했지만, 내가 불의를 당했다고 상대에게 불의를 되돌려주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나 또한 그와 마찬가지로 불의를 행하는 자가 되어버리므로.

  복수가 정의 실현의 한 방법임은 틀림없다.  복수라는 말 ekdikesis는 ek + dikesis 의 합성어이다. ek는 영어 from을, dikesis는 justice를 의미한다. 복수는 정의로부터 왔다. 그러므로 복수는 정의 실현의 한 방법이다. 하지만 정의실현의 많은 방법 중 하필 복수를 택하게 된다면, 나는 상대에게 당한 불의를 갚기 위해 불의를 행하는 자가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것은 불의를 행한 상대와 내가 다를 바 없다는 의미이고, 내가 상대를 같은 인격체로서 대하지 않는 순간 나 역시 그가 된다.

  그들은 안다. 내가 당한 만큼 상대에게 똑같이 갚으려 한다면, 그와 나나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지금도 테러를 한다. 복수를 한다. 왜냐면 내가 당한 것에 대한 분노를 감추지 못해서. 결국 돌아오는 것은 더 큰 테러일 뿐인데도. 이 영화는 끊임없는 복수의 참상을 잘 보여준다. 내가 테러의 영웅이 되었다고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아브너는 뒤늦게 깨닫는다. 절망감과 죄책감과, 두려움에 사로잡히면서. 두 나라 간에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선, 테러를 중단해야한다. 상대와 같이 불의를 행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영화는 그걸 보여준다.

 * 스필버그는 유대인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의 검은 9월단을 테러하는 것을 영화 줄거리로 삼고 있다. 영화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팔레스타인이 시작했고, 이스라엘인들은 그에 대한 복수를 하는 것 뿐이라고. 그러면서 아브너를 비롯한 5명의 테러단과 이스라엘에 면죄부를 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진실이 아니다. 아무 것도 모른 채 이 영화를 있는 그대로만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잘생긴 에릭바나의 테러단에게 동정심을 가져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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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06-02-19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생각보다 별루었었죠. 스필버그의 지나친 휴머니즘 강조가 넘 역력해서.
가족애 부분도 그렇고. 아무리 중립적이려고 해도 이스라엘인에 대한 배려가
눈에 띄어서 더욱 그러했구요. 쩝.

마늘빵 2006-02-19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생각보다 별로였어요. 그냥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어떤지를 알려주는 정도였죠. 전 이걸 재료로 삼아 테러와 복수, 정의에 관한 문제를 생각해본거구요. 원래 그럴 의도로 영화를 봤지만, 그렇지 않은, 재미를 찾기 위해 이 영화를 본 많은 이들은 크게 실망했을거에요. 저도 실망했어요. 지루했고.

balmas 2006-02-22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스포일러 경고 때문에 페이퍼 본문은 안읽고 댓글만 읽는 나의 센스~~ ㅋㅋ

마늘빵 2006-02-22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발마스님 영화 보세요. 생각할 거리는 좀 있습니다. 박진감이나 흥미, 재미를 기대할 순 없지만.

balmas 2006-02-22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럴까요? 사실은 한번 보려고 했던 영화예요. :-)
 
위대한 사상가들 - 소크라테스. 석가모니. 공자. 예수
카를 야스퍼스 지음, 권영경 옮김 / 책과함께 / 2005년 8월
품절


소크라테스에게 교육이란 많이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서로 대화를 통해 진리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소크라테스 부분)-13쪽

지식은 물건처럼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 스스로 깨달음으로써 얻을 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지식을 얻는다는 의미는 예전에 알고 있던 사실을 다시 회상하는 것과 같다. 모르면서도 지식을 추구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궤변론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나는 아는 것만을 추구할 따름이다. 만약 내가 안다면 더 이상 추구할 필요가 없으며, 모른다면 추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철학적 사고방식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추구하는 것으로, 무의식중에 예전에 알고 있던 기억을 현재의 밝은 의식으로 끌어내어 확인하는 과정이다.
(소크라테스 부분)-18쪽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사실을 자신은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죽음은 가장 큰 행복일지도 모르는데, 사람들은 가장 큰 불행으로 알고 두려워한다. 더욱이 꿈도 꾸지 못하는 깊은 수면처럼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무의 상태가 죽음이라면, 영원한 시간도 아름다운 하룻밤의 꿈에 불과하다. 혹은 죽음이란 영혼이 한 세상에서 다른 세상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즉, 그곳은 죽은 사람들이 모두 모여있고, 정의로운 재판관이 진리를 말하고, 억울하게 재판을 받고 사형을 당한 모든선한 사람들과 만나 대화를 나누면서 좋은 사람들과 지혜에 관해 토론을 하고, 무한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세상이다. 그러므로 죽음과 마찬가지로 불행이란 것도 선한 사람들에게는 살아 있을 때나 죽었을 때나 일어날 수 없다."(소크라테스) -30쪽

이러한 상태(항상 깨어있는 상태)에 놓일 때 우리는 비로소 명상에 들어가 무의식의 심연까지 몰입할 수 있다. 의식은 육체를 뚫고 들어가 마지막 심연까지 무의식을 맑게 정화시킨다. 이처럼 무의식의 심연까지 정화시키는 것이 바로 에토스의 원칙이며, 명상과 철학적 사변의 원칙이다.
...중략...
"파멸의 소지가 될 수 있는 것은 모두 버려라. 늘 깨어있는 상태에서 행동하고 경험하라." (석가모니 부분)-67쪽

"진정한 기적은 중생을 올바른 신념과 내면의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자, 스스로 명상의 세계에 몰입해 깨달음을 얻고 해탈할 수 있는 자에게만 일어난다. 모든 개인의 마음은 바람이 불고 물이 흐르듯이 변화무쌍하기 때문이다." (석가모니)-68쪽

모든 자아는 명상의 단계에 속하므로 각 단계에 해당하는 가치가 있지만 그 자체의 존재는 아니다. 진정한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감각적인 존재에서는 육체가 자아다. 명상의 첫 단계에서 이 자아는 무로 사라지고 형체가 없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자아가 나타난다. 이 영적인 자아도 더 높은 단계로 넘어가면 사라진다. 명상에서는 자아 자체를 부정한다기보다 오히려 그 상대적 효과로 다양한 단계가 더욱 분명해진다. 열반과 동일한 최고의 경지에 이르기 전까지는 진정한 자아를 얻을 수 없다. (석가모니 부분)-74쪽

생성은 순간적인 존재의 고리다.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비존재로 연결된 일시적인 존재일 뿐이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으며 동일하게 남아 있는 것도 없고 어디에도 확실히 완성된 것은 없다. 자아는 덧없는 과거의 환상으로 자아를 그 자체로 인정하며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석가모니 부분)-75쪽

이 세상에서 진리의 길을 찾는 유일한 방법은 이 세상이 사라지는 것 뿐이다. 우리는 이러한 길을 가는데 필요한 지식을 배우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이런 지식을 겸손하게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석가모니 부분)-81쪽

"아름다운 흰 연꽃이 더러운 흙에 오염되지 않듯이, 세상이 나를 더럽힐 수 없다."
(석가모니)-94쪽

"배움이 없는 생각은 권태롭고 위험하며, 생각이 없는 배움은 소용이 없다."(공자)
"나는 새로운 진리를 창조하는 사람이 아니라, 전통을 전하는 사람이며, 옛것을 존중하고 따르는 사람이다."(공자)-107쪽

"현재를 사는 사람이 과거의 방법으로 되돌아가고자 한다면 어리석은 사람이며, 불행을 초래할 뿐이다."(공자) -108쪽

진리가 옛것을 통해 분명히 드러난다면, 진리를 얻기 위해 우리는 과거를 먼저 연구해야 한다. 과거를 연구함으로써 진리와 허위를 구별할 수 있다. 이런 구분은 단순한 지식 습득이 아니라 옛것을 우리 것으로 만들려는 진정한 배움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진리란 외우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배움을 외적으로 실현시켜나가는 것이다.(공자부분)-109쪽

배움을 사랑하는 사람은 매일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하는지 잊지 않는다.

배움이 없으면 정직은 저속함이 되고, 용기는 불복종이 되며, 강인함은 괴벽이 되고, 자비심은 어리석음이 되고, 지혜는 산만함이 되고, 진실은 오히려 방해가 된다.
(공자부분)-110쪽

군자가 곧 성인은 아니다. 성인은 원래 타고나는 것이지만, 군자는 자기 훈련을 통해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진리를 소유하는 것은 하늘의 길이며,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길이다. 진리를 소유한 사람은 아무런 고통 없이 정의를 수행할 수 있고 아무런 노력 없이 성공할 수 있다." (공자)-119쪽

"너희에게 말하니, 악한자에게 대적하지 마라. 누구든지 네 오른쪽 뺨을 때리거든 왼쪽도 돌려주며, 또한 네 옷을 빼앗으려 하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벗어주라.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빌리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마라." (예수)-163쪽

"지금까지 우리가 고찰한 네 명의 위인 외에도 아브라함, 모세, 엘리야, 조로아스터, 이사야, 예레미아, 마호메드, 노자, 피타고라스 등이 있다. 그러나 이들만큼 역사적으로 깊이 있고 지속적인 영향을 준 인물은 없다. 유일하게 마호메드만은 역사적 영향력에서 네 명의 위인과 어느 정도 견줄 만하지만 인간적인 깊이에서는 이들을 따라갈 수 없다." (칼 야스퍼스)-232-2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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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6-02-19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져가서 참고할랍니다

마늘빵 2006-02-19 0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네 ^^
 
몸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4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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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번째 접한 요시모토 바나나의 책이다. 일본 소설에 입문 한 뒤로 한 명 한 명 작가를 알아가는 재미를 느끼고 있다. 가네시로 가즈키, 무라카미 하루끼, 오쿠다 히데오, 야마다 에이미, 츠지 히토나리를 거쳐서 이번엔 요시모토 바나나다. 가장 최근작 <불륜과 남미>를 읽은 이후 기대했던 만큼의 만족감을 얻지는 못했지만 그녀의 이전작들이 너무나도 호평을 받고 있어서 그 한권만으로 그녀를 판단하기에는 이르다는 생각 끝에 이번에 몇 권을 더 구입했다.

  <몸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그녀의 많은 작품들 중에 언제쯤 내놓은 것인지 모른다. 기왕이면 집필 시기를 알 수 있어서 그 순서대로 읽어나가는 혹은 역순으로 읽어나가는 재미를 누리고 싶었지만 불친절하게도(?) 그녀의 책 어디에도 그 순차는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마구잡이로 읽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그래도 그녀가 거쳐왔던 세월의 흔적들, 생각의 흔적들을 느끼고 싶었다.

  그녀가 소설가라는 사실을 모른 채 이 책을 접했을 때 무슨 과학책인줄 알았다. 몸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의학관련, 과학관련 대중서인줄 알고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요시모토 바나나'라는 작가의 이름만 기재되어있지 않다면, 이 책을 소설책으로 분류할 사람은 없을 듯 하다. 일전에 어떤 책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학교 도서관에서 철학책을 찾는데 철학분야에 끼워져있지 않고 다른 엉뚱한 곳에 가 있는 경우가 있었다. 도서관 사서들이 제목만 보고서 다른 곳으로 분류해놓은 것이다. 그럴 때면 아 뭐 실수할 수도 있지, 라는 생각이 드는 한편, 그런데 사서들은 이 많은 책들을 어떻게 제자리에 분류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가졌다.

  <몸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짧은 여러개의 단편들로 구성되어 있다. 초록반지, 보트, 지는 해, 검정 호랑나비, 조그만 물고기, 적당함 등등의 여러 단편들은 각기 다른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있지만, 하나의 통일된 주제를 담고 있다. 그 주제를 풀어놓은 것이 바로 이 책의 제목이다. 몸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난 뒤 다른 여자와 또 만나 데이트를 하며 그녀와 함께 걸었던 그 때 그 장소로 나의 발길이 향할 때, 나보다 내 몸이 먼저 자연스럽게 행동하는구나, 하는 걸 느낀다. 바로 어제 우리가 함께 했던 그 즐거웠던 시간들이 오늘, 그리고 내일, 혹은 한달 뒤 까맣게 잊혀지고 말지 모른다. 기억에서 자연스럽게 지워지고 흔적조차 남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젠가 다시 또 알게 되기도 한다. 역자 김난주는 '옮긴이의 말'에서 이런 말을 한다.

  "그런 때, 시간은 흘러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이라 생각했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이렇게 한순간에 지금이 먼 옛날이 되고 또 먼 과거의 시간이 오늘에 되살아날 수도 있는 것을, 하고 말이죠."

  함께 했던 그 행복했던 시간은 기억을 통해 영원히 '행복'으로 남을 것만 같지만, 언젠가는 기억 저장고에서 날아가버린다. 하지만 그때 내가 했던 말들,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는 비록 기억에서 사라졌지만 내 몸에 습관으로 배어있다. 단지 그걸 인지하지 못할 뿐. 언젠가 비슷한 상황이 돌아왔을 때 나는 안다. 익숙한 나의 몸짓에, 한 마디 말에, 언젠가 내가 했던 말인거 같은데, 언젠가 내가 했던 행동인 거 같은데... 나는 잊었지만 내 몸은 알고 있다. 그 모든 것을.

  요시모토 바나나는 이 책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알지 못하는,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옛 이야기를 내 몸은 기억하고 있다는 걸.

 "말하지 않아도 좋은 친구는 그리 많지 않다. 일단 억지로 얘기하기를 그만두면, 몸이 오랜 세월에 길든 서로의 리듬을 마음대로 새겨준다. 그러면 대화는 느긋하고 매끄럽다." (p51, 검정호랑나비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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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6-02-16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몸은 알고 있다~ 저도 읽어 보고 싶네요. 요시모토 바나나 참 미칠듯 질투나는작가같아요

마늘빵 2006-02-16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글을 잘 쓰더군요. 전 세계적으로 읽히는 이유도 그가 일본에서 뿐만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느낄 수 있는 보편적인 공감과 동의를 이끌어 내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어요.
 
몸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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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않아도 좋은 친구는 그리 많지 않다. 일단 억지로 얘기하기를 그만두면, 몸이 오랜 세월에 길든 서로의 리듬을 마음대로 새겨준다. 그러면 대화는 느긋하고 매끄럽다. - <검정호랑나비> 中 -51쪽

지금은 초췌하게 눈 밑에 기미까지 끼어 있지만, 언젠가는 새로운 사랑을 하고 다이어트다 뭐다 시끄러워 지리라. 내가 전에 여기 왔었다는 것을 잊게 한 똑같은 힘이 그녀를 또 웃게 한다.
멈추지 않는 시간은 아쉬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름다운 순간을 하염없이 품기 위해 흘러간다. - <검정호랑나비> 中 -52쪽

나는 그의 몸매도, 할 때의 표정도, 비디오를 보며 연구한 듯 집요한 섹스 스타일도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의 욕망은 삽입도 아니고 다른 무엇도 아니고 오로지 보는 것이 전부였고, 나를 즐겁게 해주려는 생각은 별로 없는 것 같았다. 너무 집요해 나도 모르게 몇 번이나 절정에 올랐지만, 그것은 그냥 보통 섹스에서의 평범한 기분 좋음이 아니라 어딘가 뒤틀린 환희였다. 그러나 뭐라 표현하면 좋을까.
그 유난히 가는 팔도, 울룩불룩 튀어나온 등뼈도, 부숭부숭한 털도, 안경을 벗으니까 유난히 긴 속눈썹도, 햇볕에 까맣게 탄 피부도 싫다고 외면할수록 좋았다. 아무말이 없는 것도 나를 매혹시켰다.
그것은 어린 시절 바다에 놀러 가서, 파도치는 해변에서 뒹굴 때의 감각과 비슷했다. 물을 머금은 부드러운 모래가 몸 아래서 흔들리는 느낌, 그 감촉이 황홀하도록 기분 좋아서, 수영복 속으로 모래가 찔끔찔끔 들어와 나중에 성가시다는 것을 알면서도, 에이 뭐, 하고 물가에 누워 있었던 때의 그 기분. 몸을 담글 때까지는 혐오스럽지만, 한번 그 부드러운 모래의 힘에 사로잡히면 거기에 있고 싶어진다.
- <미라> 中-81-82쪽

아마도 전쟁이란 것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를 그리고 또 무엇을 '미워하자'고 정하고는, 자기 안에 잠들어 있는 증오란 증오를 전부 끌어내 거기에 쏟아 붓고 탓하는, 그런 중독 비슷한 이상한 상태에서 일어나는지도 모르겠다......
- <밝은 저녁> 中 -94쪽

그 냉정함을 듬직하다 여겼었다. 하지만 사실은 벌써부터 알고 있었다. 그는 그저 무관심하고,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과 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는 마음이 이어지지 않는 사람일 뿐이다. - <아빠의 맛> 中 -1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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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06-02-16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과학서적인 줄 알았는데 아니네요...--;;;

마늘빵 2006-02-16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그렇죠? ^^ 저도 첨에 제목만 보고 그런줄 알았어요.
 
사상의 자유의 역사
존 B. 베리 지음, 박홍규 옮김 / 바오 / 2005년 9월
평점 :
절판


<사상의 자유의 역사>를 읽기 위한 메모 몇 가지

사상의 자유라는 것이 과거 서양사회에서 종교의 자유와 일치한다고 봐도 좋을 만큼 종교, 그 중에서도 기독교는 사상의 자유를 논함에 있어 뗄 수 없는 부분이다. 이 책을 읽는 와중에 비기독교 신자인 나로선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으므로 꽤나 낯설었다. 기독교와 관련해서 또 철학과 관련해서 몇 가지 단어들의 의미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어렴풋이는 알고 있지만 도대체가 그 차이점이 정확히 뭔지, 그것이 도대체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 명확히 할 필요가 있음을 느낀다. 몇몇 단어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이 책을 읽는데 있어 많음 도움이 될 것이다.

 

하나. 변신론(辯神論)

영어로는 Theodicy  독일어로는 Theodizee

어원 : 신을 뜻하는 그리스어 Theos 와 정의를 뜻하는 그리스어 Dike

의미 : 악이라는 현상에 관련해 신을 변호하려는 입장

변신론은 세계 속에 창궐하는 악에 대한 책임을 신에게 전가할 수 없음을 보여 주려고 한다. 이 말은 <신의 선함, 인간의 자유, 세계의 기원에 관한 변신론>(1710)이라는 라이프니츠의 책 제목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둘. 무신론(無神論)

영어로는 Atheisme 독일어로는 Atheismus

어원 : 신을 뜻하는 그리스어 Theos 에 부정을 뜻하는 접두어 a가 붙음

의미 : 신의 존재나 신이 세계의 형성에 어떤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입장
           신에 대한 거부로부터 세계에 참여하기 시작하는 것

  이론적 관점에서 볼 때, 무신론은 우주와 인간의 시원, 진화에 대한 유물론적 설명의 결과로서 등장한다. 무신론은 불가지론과 구분된다. 불가지론은 신의 존재에 대한 언급을 거부하는 입장이다.

  실천적 유물론은 일종의 윤리학이며, 도덕적, 정치적 참여에 연관된다. 니체의 주장처럼 "신은 죽었다"는 것을 긍정하는 것은 기독교의 가치를 거부함을 뜻한다. 마찬가지로 무신론은 마르크스에서처럼 종교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사르트르에서처럼 인간의 절대적 사유에 대한 긍정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이상은 <철학사전>, 엘리자베스 클레망 외, 이정우 역, 동녘  참조)

 

셋. 이신론(理神論)

  이상주의적 입장에ㅓ 종교를 생각하거나 자연종교의 입장에서 역사적 종교를 설명하고자 하는 입장을 말한다. 신이 세계의 창조자라고 인정하긴 하지만 세계를 지배하는 인격적 존재라고는 보지 않는다. 또 일단 창조된 세계는 신의 지배를 떠나 정해진 자기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고 보면서, 기적이나 예언과 같은 불가사의한 요소는 배척한다.

(본 책 P 91 역주 참조)

 

넷. 설계논증

  설계논증이란, 세계는 목적에 적합하게끔 수단이 끝없이 조절된다는 명백한 설계의 흔적을 나타내 보이는데, 이는 강력한 지성의 의식적인 계획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밖에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이다. 흄은 단순한 지성적 존재는 그러한 결과를 설명하기에 충분한 원인이 되지 못한다는 점을 들어 이러한 추론을 논박한다. 왜냐하면 설계논증에 따를 경우 물질세계의 체계는 그 원인으로서 그에 대응하는 관념들의 체계를 필요로 하는데, 그러나 그러한 정신적인 체계 역시 물질세계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설명을 필요로 하며, 따라서 우리는 결국 원인의 무한소급에 빠져들게 되고 말기 때문이다.

(본 책 P184 본문 참조)

 

다섯. 불가지론(不可知論)

  불가지론이라는 말은 특히 종교에 관한 태도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된다. 그러나 이 말이 더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될 때는 급진적 회의주의와 동의어이다. (<철학사전> 참조)

  불가지론자들은 인간의 이성이 한계를 지니고 있으며 신학은 그 한계 밖에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과학이 취급하는 세계는 그 한계 안에 있다. 과학은 전적으로 현상만을 다룰 뿐, 현상의 배후에 놓여 있을지도 모를 궁극적인 실재의 본성에 대해서는 전혀 이야기할 것이 없다. 이 궁극적인 실재에 대해서는 네 가지 태도가 있을 수 있다.

  첫째. 궁극적인 실재가 존재할 뿐 아니라 그것에 대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알 수 있다고 확신하는 형이상학자와 신학자의 태도.

  둘째. 궁극적인 실재의 존재를 부정하기는 하지만 그러한 부정이 오로지 형이상학적 논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역시 형이상학자일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의 태도.

  셋째, 궁극적인 실재가 존재한다고 주장하기는 하지만 그것에 대해 뭔가 알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 사람들.

  넷째. 궁극적인 실재의 존재 여부를 알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 이들이 엄밀한 의미에서 불가지론자.

  * 셋째도 넓은 의미에서 불가지론자로 분류된다. 불가지론자와 무신론자의 차이는, 무신론자가 인격신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부정하는 반면 불가지론자는 그 존재 자체를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본 책 P23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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