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역사 21세기
마이클 화이트.젠트리 리 지음, 이순호 옮김 / 책과함께 / 2005년 3월
평점 :
절판


 

  아 이런 불성실한 독자같으니. 출판사 '책과함께'로부터 이 책을 받은지 어언 몇달이 지났는지 셀 수도 없다 이제. 너무나 미안해서 고개도 못들겠다. 책 읽고 싶다고 함부로 도서신청을 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절실히 든다. 제목이 참 끌렸고, 내가 충분히 관심 갖는 분야의 도서이기에 신청을 했는데, 결국 가장 늦게 리뷰를 올린, 가장 불성실한 독자가 되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출판사 여러분. <한권으로 보는 마르크스>는 제 날짜까지 올렸답니다. 꾸벅.

  지금은 21세기 초반. <가상역사 21세기>의 저자 마이클 화이트와 젠트리 리는 불과 21세기가 시작한지 얼마 안된 시점에서 21세기를 마무리짓는 저서를 쓰겠다고 나섰다. 주변 사람들이 뜯어 말릴 것은 당연한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저자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21세기의 역사를 쓰고 있다. 노스트라다무스 처럼 예언이라도 하겠다는 것일까? 아니다. 결코 아니다. 그들은 예언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예언이라는 것은 어떤 믿을 수 없는 힘에 의거해 신내린 인간이 앞으로 언제쯤 지구가 종말할 것이다, 언제쯤 대재앙이 닥칠 것이다 라고 그야말로 말 그대로 '예언'하는 것인데 비해, 두 저자가 하고자 하는 작업은 '예언'이 아닌 '예상'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한참 뒤의 미래에 어떤 일이 발생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 저자들 역시 모르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가상역사 21세기>의 저자는 앞으로 일어날 수많은 일들의 가능성 중 단 하나에 대해서 서술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제목이 'THE' 로 시작하지 않고 'A'로 시작하는 것이다. 단지 많은 가능성 중 하나를 이야기해보고자.  

  이 책은 매우 두껍다. 장장 532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은 모두 미래의 가능한 이야기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다. 아니 도대체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미래에 대해서 무슨 할 말이 이리 많을까? 뭘 근거로 해서 이렇게 방대한 책을 저술할 수 있었을까? 이건 내가 이 책을 읽는 내내 궁금했던 질문 중의 하나이다. 도대체 뭘 근거로 해서!

  <가상역사 21세기>는 지구상의 모든 분야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생물학의 혁명, 쾌락, 죽음, 전쟁, 핵, 국제문제, 테러, 세계대국, 지진, 주식, 인구증가, 기아, 외국인, 대륙공동체, 아프리카, 일본, 멕시코, 중국, 네트워크, 오락, 가상세계, 사랑, 예술과 문화, 로봇, 환경, 물, 생태계, 우주 등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분야는 어느 하나만 딱 찝어서 말하기도 어려운 무거운 주제들 뿐이다. 아니 이것들을 도대체 어떻게 다 다룬단 말인가? 그가 모든 분야의 전문가도 아니고 저 많은 주제를 가지고 미래를 이야기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정말 이야기한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방대하고 깊은 지식과 자료수집 능력에 찬사를 보냈다. 정말 대단하다. 모든 분야의 '과거의 역사'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있지 않는 한 그 분야들의 미래를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얼마나 영양가 있는 책인지를 논하기에 앞서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저자는, 또 이 책은, 대단하다.

  또 하나의 의문. 이 책을 소설로 분류해야 할까, 아니면 인문사회과학 서적, 그 중에서도 역사서로 분류해야 할까? 소설은 허구를 다룬다. 이 책도 허구를 다룬다. 허구를 다루는 모든 책은 소설이다? 아니다. 꼭 그렇지는 않다. 소설은 허구를 다루지만, 허구를 다룬다고 다 소설은 아니다. 소설에는 등장인물과 사건의 요소가 포함되어야 한다. 이 책에는 등장인물이 없다. 물론 중간중간 가상의 인물이 등장하지만 그들은 각각의 주제를 설명하는데 제시되는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다. 그럼 역사서인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역사서라는 것은, 지금을 기준으로 하여 시간상으로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서 그 '사실'을 서술해 놓은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사실도 아니고, 과거의 일도 아니다. 그럼 뭐야. 소설도 아니고 역사서도 아니야?

  역사서다. 우리가 흔히 인식하고 있는 고정된 관념으로서의 역사서는 아니다. 분명히. 하지만 이 책은 역사서다. 저자의 주장에 대해 옮긴이가 말하고 있는 부분을 잠깐 살펴보자.

  "과연 그럴까? 역사는 꼭 인류 사회의 지나온 변천 과정만을 더듬어 가야 하는 것일까? 사실만을 다뤄야 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는 것이 <가상역사 21세기>를 쓴 저자의 주장이다. 과거의 자취를 현재의 관점으로 바라보든 현재의 관점으로 미래의 모습을 예측하든 역사는 다 같은 역사라는 것이다."  (옮긴이의 말 中)

  역사는 꼭 인류의 과거일만을 서술해야하는가? 사실만 다루어야하는가? 아니다. 현재를 기준으로 하여 과거를 살펴보는 것도 역사이지만, 현재를 기준으로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를 예측해보는 것도 역사다. 흔히 미래를 다루는 학문을 '미래학' 이라고 하지만 더 큰 범주에 있어서 미래학은 역사에 포함된다. 넓은 범주의 의미에서 미래를 다루는 이 책 또한 역사서라고 분류할 수 있겠다.

  저자는 정말 대단한 자료수집능력을 갖추고 있다. 또한 그 많은 지식을 자기화시켜서 씹고 또 씹고 곱씹어서 짜깁기하고 재구성해내어 미래를 바라본다.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정말 내가 21세기를 다 산뒤에 지난 과거를 정리하는 듯한 기분이다. 아니 어쩜 그렇게 세심하게 또 논리적으로 마치 일어났던 일을 머리로 재구성해 바라보듯이 쓸 수가 있단 말인가. 그는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에서 현재로 와서,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 '그냥 생각'이라고 말하고선, 정말 미래에 발생활 확실한 일들을 책으로 써낸 것일까, 하는 의문도 든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렇게 자세히 쓸 수가 있어. 다 말이 돼잖아.

  그가 예상하는 미래의 모습은 밝다. 대개의 소설들이 미래의 암울한 측면들을 바라봤던데 비해, 그가 바라보는 우리의 미래는 생각보다 확실히 밝고 긍정적이다. 정말 그의 말대로만 미래가 진행됐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핵전쟁과 같은 부분은 빼고. 그가 예상하는 미래는 간혹 테러나 핵전쟁과 같은 우울하고 슬픈 사건들도 있지만, 큰 맥락에서 봤을 때 매우 긍정적이다. 밝은 미래를 서술하고 있다. 그래서 책을 다 읽고 난 뒤에도 기분이 좋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이런 분야에 있어서 우리의 미래는 어떨까, 그는 또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궁금했다. 그래서 쉬지 않고 후딱 읽었다. 진작 이렇게 읽었으면 좋았을 것을. 책 두께에 지레 겁먹고 미루고 미루다 여기까지 왔다. 나중엔 자포자기상태로 그냥 놔뒀다가 내내 마음이 찜찜했는데 이제서야 그 찜찜함을 거둔다. 어쨌든 즐겁게 읽었고, 책의 편집과 구성에 대해서도 만족한다. 물론 두꺼운 책에 비해 값싼 책값도 만족.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 세개인 이유는 그저 가능한 미래의 모습을 재미로 읽어본다는 의미를 가질 뿐, 이 책에 대한 대단한 필요성을 느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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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달 2006-02-01 0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이렇게 책을 많이 읽으시는데, 운동은 또 언제 하신대요?
부지런하셔라 >o<

마늘빵 2006-02-01 0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V
 
가상역사 21세기
마이클 화이트.젠트리 리 지음, 이순호 옮김 / 책과함께 / 2005년 3월
절판


과연 그럴까? 역사는 꼭 인류 사회의 지나온 변천 과정만을 더듬어 가야 하는 것일까? 사실만을 다뤄야 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는 것이 <가상역사 21세기>를 쓴 저자의 주장이다. 과거의 자취를 현재의 관점으로 바라보든 현재의 관점으로 미래의 모습을 예측하든 역사는 다 같은 역사라는 것이다.
(옮긴이의 말 中)-5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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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봉되기 한참 전부터 엄청난 홍보를 해대더니 개봉된 지 얼마 안된 지금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은 별 한개의 평점을 내리고 있다. 끄덕끄덕. 한개는 좀 짠가. 그럼 두개. 더는 못줘. <무극>이 개봉된 건 지금이지만 이 영화 이전에 장동건이 나온 영화가 하나 더 있었다. <태풍>. 사실 처음에 두 영화 모두 장동건이 출연하는 영화들이고, 장동건이 한류열풍 주역의 한 명이기에, 맨 신문에 한류열풍 어쩌구 하면서 두 영화가 자주 언급되었었다. 난 <무극> 과 <태풍>이 같은 영화인줄 알았다. -_-V  우리나라에선 <태풍>이고, 해외에선 <무극>인줄 알았지. <무극>이 해외에서는 또 <The promise>로 내걸린다고 하니, 머 그런면에선 일치. 요새 우리 나라 영화들이 해외에 자주 걸리는 바람에 국내 제목과 해외 제목이 딴판이 경우가 많고, 홍보 역시 <무극>으로도 되고, <The pomise>로도 되니 정신이 없을 밖에. 나만 그런가?

  무극. 한자로는 없을 無 자 , 다할 極 자를 써서, 다함이 없음? 흠. 영원하다. 뭐 이런 의미인듯 하다. 영화 속에서도 운명의 여신이라고 나온 자가 허공에 떠서 이런 말을 건네고 간다.

  한 번 운명을 받아들이면,
  강물이 거슬러 올라갈 수 없듯이,
  시간을 되돌릴 수 없듯이,
  죽은 사람이 살아날 수 없듯이,
  무엇도 그 운명을 바꿀 수 없다.



* 물에 잠긴 외나무 다리에서 운명의 여신은 옷자락 펄럭이며 말한다. 미래의 왕비 칭청에게. 그녀의 운명에 대해서.



* 도대체가 너무나 바보스럽고 멍청하고 순해빠진 노예 쿤룬. 하지만 그는 너무나 순수하고 착하다. 첫 만남에서 칭청을 구해내고 그녀를 위해 폭포로 뛰어든 그. 칭청의 사랑을 얻는다. 그도 칭청을 사랑한다. 하지만 사랑은 과연 이루어질 수 있을지.

 

  설국이라는 나라에서 태어난 쿤룬(장동건)은 자신의 출생에 대해선 모른 채, 지금 현재 노예의 상태다. 노예로서 전쟁의 칼받이가 되어 나서지만 다른 노예가 다 죽어도 그는 죽을 수 없다. 빛보다 빠른 그 몸동작. 아니 영화 초반부터 그가 네 발로 길고 긴 협곡을 발도 보이지 않도록 달리는 통에 헉! 일단 충격 먹고 들어갔다. 어 이 영화 장난이 아니네? 현실과 거리가 먼 환타지의 세계를 다루고 있군. 사실 그건 모르고 봤으니까. 난 이 영화가 환타지인지 몰랐다. 그냥 스케일 큰 중국 무협 영화이려니 했지.

  왕비 칭청을 둘러싼 쿠앙민 장군과 그의 노예 쿤룬의 사랑 이야기. 칭청은 이미 어릴적 운명의 여신으로부터 자신을 사랑한 남자를 모두 잃게 된다고 들은 바 있다. 그러니 그녀는 사랑에 빠져서는 안된다. 하지만 사랑에 빠져버렸고, 그녀를 사랑한, 그녀가 사랑한 남자들은 모두 죽음을 맞이했다. 어떻게 죽건. 아름다움과 우러름을 받는 대신, 사랑하는 남자의 죽음을 운명으로 삼게 된 그녀의 사랑이야기의 끝은 어떻게?

  영상미는 아름다웠지만 부담스럽게 아름다웠고, 줄거리는 부재. 요즘 영화들의 러닝타임이 대개 두 시간을 훌쩍 넘기는 데 비해, 이 영화는 102분의 러닝타임. 즉 한 시간 사십분 정도의 러닝타임을 보유하고 있지만, 영화는 너무나 지루하다. 아니 뭐야. 뭐 좀 터질려고 하면 또 암것도 아니고, 뭐 좀 있는가 싶으면 별거 없고. 기대감만 잔뜩 부풀리게 하고선 바람 빼놓는다. 장동건의 연기는 좋았지만 연기가 빛을 발할 만큼 받쳐주는 영화도 아니었고, 쓸데 없이 스케일만 크고 지나치게 미화된 영상미 때문에 되려 없는 줄거리 마저도 퇴색되어버리는 영화였다. 우리나라의 <단적비연수>를 생각하면 될듯. 뭐 한중일 삼개국의 배우들이 출연하고, <패왕별희>를 만들었던 첸 카이거 감독이 지휘한다하여 기대 좀 했더만 에이 아니올시다. 너무 다들 바람만 들어갔어. 실컷 띄워놓고 아무것도 아닌 영화는 간판이 얼마 못간다. 제작비나 뽑을까 모르겠다. 장백지도 별로 이쁜지 모르겠고.

  이만한 영상미와 스케일을 준비할 여력이면 줄거리에 좀 신경을 쓰지, 하는 아쉬움이 절실한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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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시보 2006-01-31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백지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살이 너무 많이 빠져서 그런지 예전의 얼굴이 사라졌습니다. 좀 마귀할멈같은 인상이라고나 할까요? 무극은 영상 자체가 너무 뽀샤시해서 보기가 망설여졌는데 님 평을 읽고나니 볼 마음이 더 없어집니다..^^

마늘빵 2006-01-31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백지를 아주 이쁘고 도도한 왕비 컨셉으로 잡았는데, 제가 봤을 땐 별로 이쁘지도 않았어요. 교통사고 야기는 몰랐는데. 흠. 그렇군요. 영상이 지나치게 뽀샤시해요. 과대하게. 많이 실망했어요. 원래 장동건 볼라고 본거긴 하지만.
 

 

 

 

 

 

  오늘도  또 한편의 영화를. 전에 본 영화인가 싶었는데, 이상하게 본거 같은데 감상문이 없다. 아마 영화를 보고 감상을 남기기 전 시기에 봤던 영화인 듯 싶다. 그냥 제목만 말하면 기억이 안나는데 영화를 보다보면 슬슬 머리 속 구석에 박혀있는 장면들이 기어나온다.



* 일본의 기습침공으로 인해 모든 함대가 격침당했다. 선원들은 책을 읽다가, 요리를 하다가, 누워 자다가 어이없이 당해버렸고, 폭탄에, 기관총 난사에, 또 침몰된 항공모함 속에서 바다와 함께, 그대로 죽음을 맞이했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을 다루고 있는 이 영화는, 사랑 이야기로 포장한 전형적인 미국식 애국주의 영화이다.  2차 대전이 진행되고 있던 시기, 아직 전쟁을 지켜보고 있는 미국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인해 진주만에 정박하고 있던 모든 함대가 격침당하고 수많은 해군과 공군이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일본군은 350대의 전투기를 날렸고, 피해는 그 중 29대. 미국은 모두 싹쓸이 당했다. 병원을 제외하고는. 당연히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으로서 자존심이 상할 밖에. 대통령은 장군들을 모아놓고 복수를 다짐하며 방책을 논의, 지금껏 단 한번도 시도한 적이 없는 작전을 펼친다.



* 에블린과 그녀가 사랑했던 첫번째 남자이자 마지막 남자가 된 래프트.

  육군 중위 대니와 래프트, 두 사람은 어릴적부터 형제처럼 자라난 둘도 없는 친구 사이. 래프트는 군에서 만난 간호사 에블린과 사랑에 빠진다. 브리튼 전투에 지원한 래프트, 전투기는 바다로 가라앉고 에블린에게 전해진 사망소식. 옆에서 지켜보던 대니, 에블린을 위로해주다가 사랑에 빠져버렸다. 이런. 하지만 래프트는 살아 돌아왔다. 죽은 줄 알았던 연인이 살아돌아오니 당혹감을 감출 수 없는 에블린과 대니. 하지만 이것으로 끝은 아니었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에 맞선 도쿄 침공에 두 사람이 차출되고, 그곳에서 대니는 죽었다. 대니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에블린, 또다시 상처를 받고. 대니의 부탁으로 에블린의 예전 연인 래프트는 에블린의 곁에서 대니의 아이와 함께 가정을 꾸린다.

  한 남자를 사랑했고, 그의 사망 소식을 접했다. 그러나 그는 돌아왔다. 그의 친구를 사랑했고, 그는 사망했다. 다시 옛 남자와 사랑을 나누고 가정을 꾸린다. 이런 가혹한 운명의 장난. 에블린은 차례로 사랑했던 두 사람의 사망 소식을 접했고, 한 사람은 살아왔으나, 한 사람은 죽었다. 아무리 영화지만 참 너무한다. 여자의 심정이 어떻겠느냔 말이다. 사랑했던 첫 남자의 사망소식을 접하고 홀로  슬픈 나날을 보낸 에블린, 그리고 곁에서 보살펴주던 그의 친구와 사랑에 빠진 일, 충분히 이해된다. 하지만 래프트가 돌아온 뒤 그의 친한 친구와 자신의 여자가 사랑하는 연인이 되었단 사실에 충격받는 것 역시, 친구 대니를 미워하는 것 역시 또 이해된다. 내가 래프트라면, 내가 대니라면 어찌할까. 영화에서와 같은 일은 발생하지 않겠지만, 래프트의 입장이 되었더라도, 대니의 입장이 되었더라도, 각기 두 사람이 영화 속에서 보여줬던 말과 행동들을 나 역시 따르지 않을까 싶다.

 제 2 차 세계대전의 진주만 기습 상황을 재현했다는 의미에서 볼 만한 영화, 또 가혹한 운명의 장난질 속에서 보여준 세 사람의 행동에서도 '사랑'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던 영화. 그럭저럭 괜찮은 영화. 단지 너무나 긴 러닝타임이 다소 지루하기는 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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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그네 오늘의 일본문학 2
오쿠다 히데오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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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탁월한 선택이었다. 2005년의 12월, 인터넷 서점의 할인행사 물품 중 고를만한게 없을까 뒤지던 중에 <공중그네> <인터폴> 셋트를 발견. 아니 두 권을 한권 값에 준다네. 이런 할인행사 때는 왕창 많이 지를 염려도 있지만, 한 두개쯤은 질러주는 센스도 있어야.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시작으로, 보통 씨의 책을 다 찾아 읽다가, 연애소설로 나의 관심이 이동, 연애소설에서 이제 일본소설로 관심이 이동 중이다. 그리하여 최근 일본의 몇몇 작가들의 작품을 하나씩 골라 맛보고 있는 중. <공중그네> 역시 그 와중에 나에게 발탁(?)된 놈이다.  

  오쿠다 히데오라는 작가. 소설가로 데뷔하기 전 기획자, 잡지편집자, 카피라이터, 구성작가 등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비슷한 관련 분야의 다양한 직업 변천사 때문인지 모르지만, 처음부터 소설가로 데뷔한 작가들에게 묻어나오는 정통 소설의 구도를 과감히 깨버린다. 아카데미를 통해 영화를 제대로 배운 감독과 생판 아무 것도 없이 맨땅에 헤딩하기로 영화를 배운 감독과의 차이라고 할까. 지나치게 도식화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오쿠다 히데오의 <공중그네>에서는 그런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유쾌한 한편의 코믹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 하지만 코믹영화라고 해서 그냥 웃고 떠들고 즐기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숨어있는 하나의 교훈.  

  <공중그네> 는 총 5개의 단편소설로 구성되어있다. 각기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모두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야기의 주인공과 사건은 모두 다르다. 하지만 이야기의 구성방식은 같다. 각각의 단편 속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이라부 의사와 마유미 간호사, 두 사람의 환자 처방법이 특이하다.  

  내가 선택한 길이 과연 맞을까 의심이 들 때, 가장 친한 친구와 다퉈놓고 찜찜할 때, 여자친구로부터 시련당했을 때, 나를 보살펴준 부모님이 너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등등의 사소한 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이런 고민들, 누군가의 나의 이야기에 귀기울여주고 조언을 해줬으면 하는 바램, 딴지걸지말고 그냥 그래 그래 네가 맞아 네가 옳다 라고 이야기해줬으면 하는 바램을 갖게 된다. 내가 이 분야에서 만큼은 최고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나보다 대단한 고수를 만났다. 이 때 느끼는 좌절감. 나를 포함한 누구나 다 느껴봤을 법한 일이다.

  대학교 1학년 때 짧게나마 정식으로 드럼을 배웠고, 이후 독학하며 이런저런 밴드들을 거치고, 프로젝트를 꾸려 공연을 하기도 하면서, 학교 내에서는 나름대로 최고의 드러머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학교 내 여러 밴드들이 공연할 때 보면 아무래도 나보다 더 나은 이를 찾기가 힘들었다. 아 이런 못말릴 거만함. 내가 거만하다는 걸 안다. 사람들도. 그러면서도 그들은 날 인정해줬다. 하지만 언젠가 나보다 나이 많은 다른 밴드의 드러머가 공연하는 것을 보고 헉! 이런, 이란 반응이 자연스럽게 나온 적도. 잘 모르는 사람이지만 그는 방송국의  세션드러머까지 했다고 하니. 아 이런. 그야물로 우울안의 개구리, 정저지와는 이럴 때 하는 말.  

  홍대 앞 라이브 클럽 재머스에서 일주일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공연을 할 때, 정식 인디밴드가 되었다는 자부심. 이제 언더그라운드의 한 축까지는 아니더라도, 한 웅큼의 흙 정도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는 자부심. 하지만 또 클럽에서 마주치게 되는 대단한 실력파의 밴드들. 이 이럴 때 같은 클럽 밴드지만 정말 우울. 이렇게 노력했는데 이거 밖에 안되나. 세상이 고수는 너무나 많다. 내가 학교에서 후배에게 드럼을 가르치며 하던 말이다. 여기서 아무리 잘해봤자 나가면 고수는 엄청나다.   이럴 때 이라부 의사에게 간다면 딱 좋겠는데.

   소설 속 이라부 의사는 결코 평범하지 않다. 오랜 공부기간에서 나오는 해박한 의학지식과 권위주의적인 거만하고 뻔뻔한 태도의 의사들이 절대 아니다. 아니 뭐 이런 의사가 다 있어. 오자마다 반말 찍 하더니 처방은 안해주고 자꾸 딴소리만 해. 내가 야구선수라니깐 같이 캣치볼을 하자고 하질 않나. 서커스단이라니깐 자기도 공중그네 해보고 싶다고 정말 서커스장에 와서 매일같이 연습하지를 않나. 도대체가 이해가 안가. 당신 의사 맞아? 돌팔이 아냐? 당연 의심이 갈 수 밖에. 요즘 또 흰 가운입은 돌팔이들이 한 둘이야? 게다가 의사는 그렇다 쳐. 가슴 곡선 다 보이게 노출하고, 핫팬츠 입고 다니는, 껌 짝짝 씹으며 쇼파에 누워 패션잡지나 읽고 있는 저 여자는 뭐야. 간호사 맞아? 아니 무슨 일본 포르노 찍나. 하지만 이라부 의사를 찾아온 환자들은 다음 날 다시 이곳을 방문하게 마련. 무슨 최면술에 걸린 것도 아니고 말야.  

  이라부의 환자 처방법은 특이하다. 그냥 대놓고 비타민 주사를 시도때도 없이 놓지를 않나. 아니 무슨 처방법이 그래. 비타민 제만 주사하면 다 낫는데? 하지만 다 낫는다. 정말 의학적으로 처방한 것은 비타민 주사가 전부인데도. 이라부를 찾아온 환자들의 공통점은 모두 의사소통의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 그들은 각 분야의 최고의 인물들이지만, 불안과 강박증세, 자신감 부족, 결단력 상실의 문제를 안고 있다. 분명히 이분야에서 만큼은 날 따라올 자가 없는데 하찮은 기본기에서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고, 타인에게 알려지기를 숨긴다. 누군가에게 나의 문제점을 솔직하게 상담해보고 싶지만 말 할 사람이 없고, 말할 사람이 있다 해도 내가 그런 문제로 고민한다는 자체가 이미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그러니 혼자서 끙끙 앓고 있을 밖에. 이라부는 바로 이 점을 고쳐준다. 일부러 고쳐주려고 노력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그가 환자와 함께 놀면서 환자는 저절로 자신의 문제를 발견하고 깨닫고 인정하고 마음을 열게 된다. 만병의 근원은 마음에 있나니. 마음을 열면 모든 병은 치유된다.

   분명 비정상적이고 황당한 병원이다. 의사나 간호사나 제대로 된 사람이 하나도 없다. 그러다 한번 이곳을 찾은 환자들은 다시 방문하게 마련. 그것은 어쩌면 병원에 대해, 의사에 대해 가지고 있던 기존의 고정관념들이 깨지면서, 그 자체만으로 마음을 열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환자들은 모두 의사소통의 문제를 겪고 있었으므로. 때로는 안놀아주면 울어버리는, 또 장난감 사달라고 조르고 떼쓰는 어린아이 같지만, 그의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이 환자를 완치로 이끈다. 우리가 못된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나도 같이 못된 놈이 되듯이, 착하고 순수한 어린아이들과 함께 있으면 동심의 세계로 빠져들어 마냥 투명한 유리거울 같은 상태가 되어버리는 것과 같다. 이라부의 마음이 환자들의 마음을 열게 하고 치유하게 만든 것이다. 이런 의사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살면서 아직까지 이런 비슷한 의사도 결코 보지 못했다. 물론 예전에 비해 권위주의적인 의사가 많이 줄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비지니스 차원에서 다른 병원과 경쟁해 이기려는 자들의 컨셉이 아닐까 생각. 

  이 소설 후딱 읽으며 정말 속으로 혼자서 큭큭 거린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한편의 코믹영화를 보고 난 느낌. 이라부를 직접 방문하지 않고도 벌써 마음이 후련해지고 기분이 상쾌해진다. 옮긴이의 말로 마무리를 대신할까 한다.  

 "인간의 삶에는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이 서로 경계를 알 수 없게 버무려져 있다. 그리고 사람마다 가벼움과 무거움의 정도는 다르다. 한마디로 상대적이다. 인간의 삶은 또한 겉과 속이 다르게 되어 있다. 완벽주의자는 있지만 완벽한 사람은 없듯이, 겉으로는 그렇게 보여도 속까지 그런 사람은 없을지도 모른다. 아 역시 상대적이다.

더러는 가벼워 보이던 것, 하찮던 것, 사소한 성격적 결함이 정신적 결함으로 이어지는 수가 있다. 그렇게 되는 계기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대다수의 사람은 그렇지 않닫는 것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 역시 알 수 없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누구나 만들어 쓰고 있는 가면이 어떤 방패 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자 이제 당신의 문제를 치유하기 위해 이라부를 찾아가는 길만 남아있도다. 어서 가자 이라부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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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06-01-31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뒤에 붙은 말들이 더 재미있어서 추천! ^^

마늘빵 2006-01-31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핫.

토트 2006-01-31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추천하구 가요.

마태우스 2006-02-01 0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아프락사스님 저도 이거 읽고 리뷰 쓰려고 합니다^^ 글구 저를 이라부에 비유해 주셔서 감사! 열심히 하겠습니다.

마늘빵 2006-02-01 0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 / ^^

하이드 2006-04-13 1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왜 지금 봤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