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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0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뒤늦게 발견된 헝가리의 대문호"라는 호칭까지 써가며 대단한 작품으로 칭송하고 있지만, 다 읽은 뒤의 느낌은 '글쎄...' 이다. 내가 지금 처해있는 현실 - 실연 - 에 걸맞지 않는 책이기 때문일까. 이 책을 직접 사서 본 것은 아니고 이벤트를 통해 함께 얻어보게 되었지만, '열정'이라는 제목 때문에 가슴 아픈 사랑의 사연이 담겨있는 소설이 아닐까 추측했었다. 산도르 마라이에 대해서도, <열정>이라는 책에 대해서도 어떤 작은 정보도 없이 접하게 되었기 때문에, 나의 기대와 현실이 빗나간 때문에, 결국 어긋난 기대를 가지고 책을 접하게 된 것이 잘못.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대문호'라는 호칭을 받을 만큼의 무엇이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어쩌면 이것은 취향의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소설을 그다지 많이 읽지 않았고, 따로 좋아하는 소설류가 있는 만큼 이런 류의 소설 - 지난일을 회상하며 홀로 독백하고 있는 - 에 아직 정이 들지 않았기 때문일수도 있고. 누군가가 이 소설을 통해 대단한 깨달음과 교훈과 감동을 받았다면 그것은 그 사람에게 잘된 일이고, 내가 이 소설을 하필 지금 이 시점에 접한 것은 불행한 일이다.
<열정>이라는 소설은 주지하다시피, 산도르 마라이 라는 헝가리의 소설가의 작품이다. 그는 이것 말고도 <사랑> <결혼의 변화> <이혼 전야> <유언> 등의 작품을 남겼다. 후일 헝가리가 공산주의로 자리굳히면서 망명갔던 그는 부르주아 작가로 분류되어 입국이 금지되었고, 미국에서 망명생활 중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열정>이라는 소설에 앞서 <사랑>이라는 소설을 먼저 접했으면 그에 대한 나의 인식이 조금은 바뀌지 않았을까 싶다. 나의 당면한 현실이 <열정>이라는 우정을 다룬(?) 소설을 읽기에 적합한 시점이 아니라는 점에서.
헨릭과 콘라드의 대화. 이것은 마치 소설이 아닌 한편의 연극을 보고 있는 듯 한 느낌이다. 등장인물은 단 두 사람, 관객의 시선은 한 곳을 바라보고 있다. 정체된 화면 속에서 두 사람은 마주보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헨릭의 독백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이것은 우정에 관한 소설이다. 아니다. 사랑에 관한 소설이다. 아니다. 시작은 사랑이었지만, 우정으로 건너가고, 다시 사랑으로 매듭짓는다.
헨릭과 콘라드는 둘 도 없는 친구다. 헨릭은 크리스티나와 결혼을 했고, 콘라드는 그녀와 사랑에 빠졌다. 헨릭이 사냥길에 자신을 겨누고 있는 것을 안 콘라드는 그 길로 내뺐고, 헨릭은 기다렸다. 41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 크리스티나는 이미 죽었고, 헨릭은 콘라드를 기다렸다. 콘라드는 할아버지가 된 모습으로 마찬가지로 할아버지가 된 헨릭을 찾아왔다. 이야기한다. 콘라드는. 콘라드는 지난 과오에 대해서 헨릭에게 해명을 하는 듯 하다. 하지만 해명은 간데없고 두 사람의 지난 삶에서 묻어나오는 인생의 교훈과 깨달음만 남았다.
나의 사랑하는 여인이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아내와 나의 절친한 친구가 섹스를 하고 사랑을 나눴다. 정조란 무엇이고, 나는 사랑한 여인에게서 무엇을 기대했던가? 상대방이 정조라는 것에 구속되어 행복할 수 없는데도 정조를 요구한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일까?
행복하기 위해 결혼했지만 결혼은 행복을 보장하지 않았다. 아내는 바람폈고, 나는 불행의 길을 걸었다. 아내는 그래서 행복했을까. 나는 아내와 행복했다. 이것은 누구의 '행복'의 문제가 아니라 '예의'의 문제다. 아내는 내 친구와 바람을 피고 행복했는가? 그 순간 행복했을지라도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생각지 못했단 말인가? 그로 인해 자신 또한 행복하지 않을거란걸 몰랐단 말인가? 변명해봐 콘라드!
절친한 친구에게 아내를 빼앗긴 헨릭의 이야기 속에는 우정, 사랑, 인생, 또 이해와 진실과 관계와 행복이 들어있다. 두 사람은 불꺼진 어두컴컴한 무대 위의 나무의자 위에 올라앉아 고개를 숙이고 대화를 하고 있다. 조명은 두 사람만을 비추고 있다. 자, 이제 관객이 할 일은 그들의 대화를 가만히 엿듣는 것 뿐이다. 그리고 생각하는 것 뿐이다. 당신이 올라갈 차례다. 올라가서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