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교육의 파시즘 - 노예도덕을 넘어서 프런티어21 1
김상봉 지음 / 길(도서출판)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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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적으로 관심갖고 있는 우리나라 철학자 중의 한 사람이다. 김상봉 교수는 그리스도 신학대학교 교수였다가 대학에서 해직된 이후 민예총 문예아카데미 교장으로 지내왔다. 학벌없는 사회 사무처장을 거쳐서 현재 정책위원장으로 있다. 대학에서 해직된 교수가 다시 일거리를 얻기 쉽지 않다는 것이 우리나라 교수사회의 상식일진대 예외적으로 전남대 철학과 교수들의 배려(?)로 지금은 전남대 철학과 교수로 가있다. 다양한 분야에 걸쳐서 굉장히 열정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말만 철학자가 아니라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의 철학자 상을 보여주고 계신 분이다. 학벌없는 사회 모임을 통해 그간 생각했던 것을 토대로 <학벌사회>라는 두꺼운 책을 낸 그가 이번에는 한국의 중고등학교 도덕교과서를 물고 늘어졌다. 나 역시 도덕,윤리 교과를 가르치고 공부하는 사람으로써 도덕교과서의 문제점을 심각히 느끼고 있었던 바, 그의 책은 매우 반가웠다. 그리고 다 읽고 난 뒤 나는 그의 주장에 100% 동감하는 바이다.

-도덕교과의 변화

  도덕 혹은 윤리 교과 만큼이나 시대의 변화상을 반영하는 교과목은 없을 것이다. 수학, 국어, 영어, 컴퓨터, 기술 등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배우고 있는 여러 교과목들이 입시제도에 따라 혹은 시대의 변화상에 따라 많은 변화를 겪었지만 그 어떤 교과목도 도덕·윤리 교과만큼이나 변화를 겪은 것은 없다. 시대가 변한다고, 입시제도가 변한다고 수학 공식이 바뀌는 것은 아니며, 컴퓨터의 작동원리가 바뀌는 것도 아니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본질이 바뀌는 것도 아니다. 다만 6차 교육 과정에서 7차 교육 과정으로 넘어오면서 수학은 수학Ⅰ과 수학Ⅱ 뿐 아니라 이과와 문과에 따라 기본수학과 실력수학으로 나뉘고, 그것이 또 세분화 되어 각각 수학 10-가, 수학 10-나, 수학 1 등 여러 가지로 분류되었다. 이는 윗세대들이 배워온 수학의 공식이 바뀐 것은 아니며, 다만 종류가 다양화되었을 뿐이라는 점에서 변화했다고 볼 수는 없다. 국어교과 역시 마찬가지로 예전엔 '국어'라는 하나의 과목만 있었지만 점차 '작문', '생활국어', '독서' 등의 다양한 영역들로 세분화되었을 뿐 우리가 사용하는 국어의 본질이 바뀌지는 않는다. 다른 모든 과목들이 다 그렇지만 유독 도덕·윤리를 포함한 사회과 교과목들에 한해서는 정치적, 시대적 변화상에 따라 교과내용도 변화하는 것이 눈에 보인다. 그 중 도덕교과는 여태 국사나 사회교과보다 그 변화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과거 이승만 전 대통령에서부터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에 이르기까지의 소위 말해 '군사독재'라고 묶을 수 있는 그 시절의 도덕교과는 지금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고 볼 수 있다. 남과 북으로 나뉘고, 남한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북한의 공산주의 세력들을 싸잡아 뿔달린 도깨비로 칭하는 교육을 해왔다. 그리하여 우리의 부모님 세대에선 정말 북한 사람들이 우리와 다른 모습 - 뿔달린 도깨비 -을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었다. 이것이 교육의 효과다. 하지만 김영삼 정부부터 현재 노무현 정부에 이르기까지의 민주화된 정부 아래 군사독재의 그늘은 걷혔고, 대외적으로는 오래전부터  표방해왔던 '진짜 민주주의' 시대에 살면서 과거와 같은 황당무계한 반공교육을 받지는 않게 되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도덕교과서는 과거의 반공주의 도덕교과서와 확연히 다른 내용을 담고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도덕교과는 시대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그럼 과연 과거의 그것과 오늘날의 그것은 확실히 다른가?

  군사독재 시대를 마감하고 민주화 정부를 맞이한지 1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도덕교과서가 기존에 다루고 있던 반공교육을 이제는 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분명 우리네 도덕교육은 과거의 그것과는 분명 달라졌다. 하지만 그 본질은 바뀌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뀌지 않았다. 학생들은 아직도 수업시간에 '나'보다는 '단체'와 '국가'를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국가를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해야하는가, 개인과 공동체가 대립할 때 어떻게 해결해야하는가 등과 같은 부분에서 단체나 국가를 위해 개인을 희생할 것을 강요받고 있다. 그리고 도덕교사인 나는 학생들에게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이는 '반공'만 빠졌을 뿐 다른 내용은 군사독재시절의 그것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  

  -도덕교과의 성격

  도덕을 제외한 중·고등학교에서 다루고 있는 교과목들이 "객관적인 사실 자체로부터 합리적으로 어떤 바람직한 행위규범을 이끌어내려 하지만, 도덕교과는 사실이 아니라 당위를 가르쳐야 하는 교과인 까닭에 문제가 되는 사실에 대해서는 학문적으로 거의 아무 가르침도 주지 못하면서 무슨 말을 하든 습관적으로 반드시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식으로 말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사회적인 문제들에 대해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식의 당위적인 진술을 늘어놓게 되지만, 막상 사회적 문제의 내용에 대해서는 사회교과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치밀하고 체계적으로 가르칠 수 없다. 결과적으로 문제가 되는 사실에 대해 제대로 된 이해나 성찰도 없는 상태에서 학생들에게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당위규범만을 타율적으로 주입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그렇게 주어지는 당위 규범들이 과거 국민윤리 교육의 잔재 때문에 지극히 수구적이고 때로는 반도덕적이기까지 하다는데 있다."

  우리네 도덕교과서는 기술·가정, 사회, 국사 등의 여러 교과목들이 짬뽕된 내용으로 이루어져있으며, 그 내용들이 체계이지도 않고, 지식을 전달해줄 만한 꺼리도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내용들이 '객관적 지식이나 사실'을 배제한 행위명령만을 담고 있다. '행위명령'은 주어진 어떤 상황과 사건하에서는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 저렇게 행동해야 한다라고 해답을 제공함으로써 던져진 상황과 사건에 대한 학생들 개개인 스스로의 생각과 판단을 가로막는다는 점에서 문제가 크다 하겠다. 또 하나의 문제는 그 행위명령의 기준이 과거 군사독재 시절의 '국민윤리'교과의 그것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앞서 '도덕교과의 변화'에서도 언급했듯 시대는 변화했으되 교과의 내용은 본질적으로 변화하지 않았다. 

-결론

 우리나라 도덕교과는 외국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나라안의 역사와 문화를 반영하고 있고, 본래의 도덕교육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왔다. 학생의 도덕성 함양을 목표로 해야 할 도덕교과가 과거 군사독재 시절을 겪으면서 도덕성 함양이 아닌 반공성 함양이 목표가 되었고, 지금은 '반공'부분은 삭제되었지만 그 자리에 '국가'가 들어서 있다.

  도덕교과는 당연히 학생들의 도덕성 함양을 목표로 해야 하고 이에 걸맞는 교육내용과 평가방법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과거, 그리고 오늘날의 도덕교과는 그것이 마땅히 해야 할 역할들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문제상황 제시를 통해 깊이있고 다양한 사고를 열어줌으로써 학생 개개인 스스로가 나름대로의 '자기도덕성'을 만들어 가야 할 진대, 우리네 도덕교과는 대신 행동명령을 내림으로써 답안을 제시하고 있어 그 중간과정은 당연히 생략되고, 결론 또한 미리 정해주고 있다. 교과서가 내리고 있는 결론은 학생들이 습득하고 따라야 할 행동의  표본이 되며, 그리하지 않을 경우 그에 반하는 행동들은 모두 비난의 대상이 된다.

  가수 유승준이 병역을 거부하고 미국으로 갔을 때, 국방부는 그의 국내 출입을 금지시켰으며, 국가는 병역을 거부하고 국적을 포기한 자는 국내에서 이익활동을 할 수 없다고 규칙을 정하였고, 언론들은 선동적 기사를 찍어내 비난여론을 부추겼다. 그러나 과연 유승준의 행동이 잘못된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도덕교사인 나는 그렇지 않다라고 대답하고 싶다. 하지만 이미 도덕교과서를 통해 개인보다 국가가 우선이라고 배운 학생들은 당연히 군대를 안가는 유승준과 같은 이들을 비난하고 욕을 할 것이다. 양심적 병역거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양심은 무슨 양심, 국가가 정하고 있는 의무를 거부하고 있는 그들을 어떻게 그냥 놔둘 수 있느냐는 식으로 결론이 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결론이 도출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정해져있는 결론을 다시 반복하는 것이다.

-덧붙이며

  도덕과 윤리를 가르치는 교사로서 수업을 할 때마다 교과서의 애국주의, 전체주의적 성격에 강한 반발심을 느낀다. 나부터 거부감을 일으키는 내용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왜냐면 나의 거부감은 나 개인의 의견이고, 월급 받고 일하는 나로서는 국가가 만든 교과서대로 수업을 할 수 밖에 없으므로. 교과서와 반대되는 주장을 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 교과서와 반대로 가르침으로써 학생들에게 혼란을 주지 않기 위해, 다만 선생님은 이런 부분은 이렇게 생각한다 라고 다른 의견을 제시해주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도덕교과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나뿐 아니라 많은 선생님들이, 많은 학자와 학생들이 느끼고 있는 것으로, 분명코 개정되어야 한다. 아니면 폐지하고 철학으로 대체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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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Y 2006-01-01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덕 시험을 본 애들 말하길, 착한 사람이 되서 답을 고르면 도덕 시험 문제 다 틀린데요.-..-a

깐따삐야 2006-01-01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과거에 비해 많이 바뀐다고 바뀌었는데도 여전히 대부분의 교과서가 자유롭게 사고하는 인간이 아니라 회의 없이 복종하는 인간을 길러내는 데 치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결국 똑똑한 아이들은 교과서는 학교 시험용으로 공부하고 이외의 시간엔 '거꾸로 된 세상의 학교'나 '인권은 교문 앞에서 멈춘다'와 같은 체제 비판적인 책들을 읽는 진풍경이 벌어지곤 합니다. 씁쓸한 풍경이지요...

마늘빵 2006-01-01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브라이니님 / 네. 중학생만 돼도 도덕시험과 도덕성과는 별 상관이 없다고들 하죠.
깐따삐야님 / 자유롭게 사고하고 회의하며 생각하는 인간을 길러야 될 도덕교과서가 국가에 복종하고 충성하는 애국시민을 양성하는데에 치중하고 있어요. 국가 이데올로기죠. 똑똑하고 생각있는 애들은 도덕교과서 내용엔 관심이 없습니다. 정말. 다른 책들을 읽으며 자기사고를 키워나가죠. 조지오웰의 <동물농장>이나 <1984년> 같은.

이리스 2006-01-01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꾸욱... ^^

코마개 2006-01-02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학으로 대체 해야 한다에 한표! 당췌 철학이 없어요.

사마천 2006-01-27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번 공감합니다. 저도 경찰이 시위대 패는 장면이 나오니까 가끔 우리나라 경찰은 나쁜짓을 한다고 했더니 와이프가 반대하더군요. 아이가 헷갈린다고. 하지만 솔직한 심정으로 학교가 다 맞다고 가르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제가 대학때 들었던 말 중에 하나가 학자는 부모와 밥상에서 밥 먹으며 왜 이 사람이 내 부모일까하고 의심도 할 줄알아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런 의미에서 가장 싫은 교육이 바로 도덕교육입니다.

마늘빵 2006-01-27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마천님 / 네 저 역시 도덕을 가르치지만 가장 맘에 안드는 과목이기도 해요. 내가 생각하는 것과 책이 가르치는 바가 다르니 아이들에게 설명하기 난감할 때도 한 두번이 아닙니다. 그럴때는 어떻게 해야하지? 그러다가 결국 책의 내용을 가르치고, 하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라고 다른 의견을 제시해주곤 하죠. 그치만 학생들이 나중에 도덕시험 공부를 할 땐 제 이야기는 까먹고 교과서의 내용을 '정답'으로 간주하고 공부하겠죠. 철학이 절실히 필요한 때입니다. '철학사의 지식'이 아닌 '철학'이.
 
끝에서 두번째 여자친구
왕원화 지음, 문현선 옮김 / 솔출판사 / 2005년 8월
평점 :
절판


 

  매우 두꺼운 소설이긴 하지만 줄거리의 빠른 전개로 인해 그렇게 집중해서 봐야 할 책도, 오래오래 곱씹으며 생각해야 할 책도 아니다.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우리는 사랑일까> 와 같은 책들이 문장 하나하나 씹고 되새기며 읽어야하는 데 반해 왕원화의 <끝에서 두번째 여자친구>는 마치 잡지를 보듯이 훑어 읽어도 무방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소설이 알랭 드 보통의 연애소설보다 우리에게 주는 메세지의 질이 떨어진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연애소설이 교훈을 줘야 할 의무는 없지만, 우리는 연애소설을 읽음으로써 우리의 지난 날들을 되돌아보며 나의 사랑을 성찰하게 된다. 알랭 드 보통은 소수의 등장인물과 장면의 변화없이 정체된 자리에서 머리 속으로 사랑에 대한 상념을 펼치는 반면, 왕원화는 많은 등장인물과 빠른 사건 전개 속에서 각각의 놓여있는 상황 속에서 뭔가를 느끼도록 해주고 있다. 등장인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대사 한줄에는 별 의미를 찾아볼 수 없지만 그들의 대사가 모이고 하나의 장면이 만들어지며 메세지를 전달한다.

  "맞아요. 그날밤, 두팡은 날 '메아리 입구' 앞으로 데려갔고, 거기서 큰 소리로 '나는너를 사랑해'라고 외쳤어요. 난 아주 기뻤고, 줄곧 메아리를 들었어요."
"그곳의 메아리는 오래가죠?"
"아주 오래. 심지어는 이 가게에서도 메아리를 들을 수 있어요. 그리고 오늘까지, 난 줄곧 메아리를 들었죠."
밍홍은 머리를 카운터에 대고 있었는데, 문득 조금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사실 그 '나는 너를 사랑해'라는 말은 진작부터 존재하지 않았어요. 맞죠?"
안안이 물었다.
한바탕 기나긴 침묵으로 무거운 숨소리마저 메아리가 뒤어 돌아왔다.
"말해봐요. 맞죠?"
"난 몰라요. 난 두팡이 아니니까."
"당신은 당연히 알고 있어요! 당신은 사실 두팡과 마찬가지로...... 당신들은 모두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줄 몰라요......"
밍홍은 고개를 떨구었다.
"당신은 나랑 같아요." 안안이 말했다.
"우리가 어떻게 같죠?"
"우린 다 알거든요. 사실 그 '나는 너를 사랑해'라는 말은 진작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걸."
"난 몰라요."
"당신은 당연히 알고 있어요! 린밍홍, 사실 당신도 나랑 같아요 우린 모두 '메아리 입구'앞에 살고 있죠......"

(428쪽)

  안안의 대사와 밍홍의 대사를 따로 놓고 봤을 때 그건 아무것도 아닌 문장이 된다. 하지만 두 사람의 대사가 '대화'로 바뀌는 순간, 저들의 이야기는 나의 가슴을 울린다.

  왕원화의 소설 <끝에서 두번째 여자친구>에서의 '끝에서 두번째 여자친구'란 말 그대로이다. 한 여자가 있고 이 여자는 그동안 몇명의 남자들을 사귀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그 남자들이 모두 이 여자와 사귀고 헤어진 이후에 결혼할 여자들을 만났다. 그러니 이 여자는 그 남자들의 마지막 여자친구 바로 이전의(!) 여자친구가 된 셈이다. 결혼까지 골인하기 바로 직전의 여자친구라는 의미. 모든 사랑이 결혼으로 연결 될 필요는 없지만 많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 결혼하기를 원한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 속 인물 저우치는 그간의 남자친구들과 사랑을 하며 결혼에 이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한 비극적인 인물이다. 사랑했으나 사랑에 실패한.

  정말 유쾌하지 않은 경험이고, 만일 내가 그간 내가 사귄 여자친구들의 끝에서 두번째 남자친구가 된다면 이보다 슬픈 사랑의 운명이 있을까 싶다. 좋아하고 사랑하고 만나고 사귀고, 결혼은 또다른 시작이라고들 말하지만 현재 사귀고 있는 연인들에게 있어 사랑의 종말은 결혼이다. 어떤이는 연애따로 결혼따로 라고 하지만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결혼하고 싶은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이때의 '결혼'은 법적인 신고가 이루어진 결혼 뿐 아니라 함께 같은 공간안에서 사는 것을 포함한다. 즉 동거까지도 포함. 하지만 결혼식 을 통해 주위 사람들의 축하와 격려를 받고 싶은 것이 모든 연인의 바램이 아닐까 싶다.

  아직까지 내가 사귀었던 여자친구들 중 어느 누구도 결혼하지 않았고, 다행히도 난 그녀들의 끝에서 두번째 남자친구가 되는 경우는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능성은 있다. 아직 나와 내가 사귀었던 여자친구들의 나이가 주변의 재촉을 받을 정도의 결혼적령기가 되진 않았고, 그들 중 어느 누구도 나 다음에 다른 남자, 그리고 이후의 다른 남자와 사귄 사람은 아무도 없으므로. 나와 헤어진 뒤 현재 솔로이거나 아니면 다른 남자를 사귀고 있을 경우, 그녀들이 새로운 남자를 만나거나 아니면 지금 지금 사귀고 있는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될 경우 여지없이 난 '끝에서 두번째 남자친구'가 되고 만다.

  끝에서 두번째 남자친구건 세번째 남자친구건 아니면 또 몇번째 이든, 끝에서 두번째 여자친구건 세번째 여자친구건 아니면 또 몇번째이든 간에, 남녀 모두 이전의 사랑했던 사람으로부터 만남에서 이별에 이르기까지 교훈을 얻었을 것이다. 그것은 좋게 헤어지건 나쁘게 헤어지건 상관없이, 지금 그 사람이 좋건 싫건 상관없이, '사랑했던 경험'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다. 처음의 사랑에서, 두번째 사랑에서, 세번째 사랑에서 우리는 사랑을 경험할 때마다 새로운 교훈을 얻고 다음의 사랑에서 좀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을 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이렇게 교훈을 얻어 성숙한 두 남녀가 모이면 결혼을 하게 되겠지.

  "만약 어느날 그가 당신을 잃는다면, 그는 마침내 당신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이해하게 되겠죠. 지나간 잘못을 아파하며 뉘우칠 거고. 그러고는 그가 다음 여자를 만날 때는 더 나아지는 거에요. 그는 그녀와 결혼할 거고, 아주 좋은 남편이 되겠죠.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영원히 당신이 있을 거에요......" (4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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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달 2006-01-03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이 책 빌렸어요. 재미있겠다. 흐흐

마늘빵 2006-01-04 0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엉 이거 두껍지만 금방 읽을거야. 난 게으름 피우느라 오래걸렸지만. 재밌어. 마치 연속극 드라마를 보는듯한 느낌.
 
끝에서 두번째 여자친구
왕원화 지음, 문현선 옮김 / 솔출판사 / 2005년 8월
절판


어째서 이렇게 힘들여서 억지를 부리는 걸까? 억지로 얻은 것은 오래 가지 못한다.
책상위의 전화가 울렸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 그녀는 인정해야만 했다. 그녀가 얼마나 예쁘든, 그에게 얼마나 잘 해주든, 얼마나 인내심이 있든, 얼마나 보답을 바라지 않든 간에, 사랑은 생겨나기 힘들 것이다. 사랑은 달리기와 같지 않아서 삼십 분마다 반드시 삼백 킬로칼로리가 연소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일년을 뛰어도 여전히 땀 한 방울 나지 않을 수 있다. 아무도 설명해줄 수 없고, 답은 자기 혼자서 고민하고 찾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녀는 빨리냐, 아니면 늦게냐를 선택할 수 있을 뿐이고 받아들여야 한다. -292쪽

"어떤 사람은 일생동안 한번밖에 연애를 못해. 뒤에 오는 연인은 모부 복사본이지." 그레이스가 말했다.
"난 다른 사람의 복사본이고 싶지 않아요."
"그도 알아. 그래서 당신을 가까이 하지 않으려고 하는거지."
저우치도 조용해졌다.
-294쪽

"난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요" 저우치가 말했다.
"전 남자친구의 결혼식은 날 힘들게 하지 않아요. 단지 날 힘들게 하는건, 내가 영원히 다른 사람들의 '끝에서 두번째 여자친구'라는 거죠."
"끝에서 두번째 여자친구가 뭐죠?"
"내가 사귀었던 남자는 둘 다 나와 헤어진 다음에 결혼할 사람을 만났거든요."-332쪽

"만약 어느날 그가 당신을 잃는다면, 그는 마침내 당신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이해하게 되겠죠. 지나간 잘못을 아파하며 뉘우칠 거고. 그러고는 그가 다음 여자를 만날 때는 더 나아지는 거에요. 그는 그녀와 결혼할 거고, 아주 좋은 남편이 되겠죠.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영원히 당신이 있을 거에요......"-402쪽

"맞아요. 그날밤, 두팡은 날 '메아리 입구' 앞으로 데려갔고, 거기서 큰 소리로 '나는너를 사랑해'라고 외쳤어요. 난 아주 기뻤고, 줄곧 메아리를 들었어요."
"그곳의 메아리는 오래가죠?"
"아주 오래. 심지어는 이 가게에서도 메아리를 들을 수 있어요. 그리고 오늘까지, 난 줄곧 메아리를 들었죠."
밍홍은 머리를 카운터에 대고 있었는데, 문득 조금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사실 그 '나는 너를 사랑해'라는 말은 진작부터 존재하지 않았어요. 맞죠?"
안안이 물었다.
한바탕 기나긴 침묵으로 무거운 숨소리마저 메아리가 뒤어 돌아왔다.
"말해봐요. 맞죠?"
"난 몰라요. 난 두팡이 아니니까."
"당신은 당연히 알고 있어요! 당신은 사실 두팡과 마찬가지로...... 당신들은 모두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줄 몰라요......"
밍홍은 고개를 떨구었다.
"당신은 나랑 같아요." 안안이 말했다.
"우리가 어떻게 같죠?"
"우린 다 알거든요. 사실 그 '나는 너를 사랑해'라는 말은 진작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걸."
"난 몰라요."
"당신은 당연히 알고 있어요! 린밍홍, 사실 당신도 나랑 같아요 우린 모두 '메아리 입구'앞에 살고 있죠......"-4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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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시보 2005-12-31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앞에서 두번째 여자 친구가 아니라 끝에서 두번째 여자친구라... 그럼 지금 사귀는 사람 바로 전의 사람을 뜻하는건가? 아...헤깔려요.

깐따삐야 2005-12-31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 앞에서 정말 쿨~ 한 여자가 되기는 너무나 힘들다니깐요. ㅜ.ㅜ

마늘빵 2006-01-01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라시보님 /네 이 여자를 만난 다음에 만난 여자와 남자들이 결혼을 하게 되는거죠. 이 여자는 사귀었던 모든 남자들이 결혼한 여자의 바로 전 여자친구일 뿐이고요. 슬픈 운명.
깐따삐야님 / 네... 남자 역시 마찬가지에요.
 

 

 

 

 

  이걸 언제적 보고 이제서야 그 감상을 올리고 앉았느냐. 정말. 언제 내가 이 영화를 봤더라? 이거 가을에 개봉하지 않았나? 춥지 않았을 때였는데. 아니 근데 2005년이 다 끝나가는 이 마당에 이제서야 감상을 올리고 있어. 사실 그 때의 그 감동 다 잊었다. 내 마음에서 사라졌다. 아 다시 끄집어내려니 힘들다. 그래서 감상이라는건 감동을 받은 그 순간, 써내려나가야하는 것이다. 그게 진짜 감상이야. 지금 이렇게 뒤늦게서야 본 영화에 대해 기록 좀 남겨보겠다고 끄적이는 이거. 에이~ 이건 감상이 아니다. 그래도. 그래도. 조금이라도 끄집어내보자.

  아 날짜를 보니 10월 7일에 개봉했단다. 그때 새드무브랑 머시기랑 한창 주가를 올릴 때였는데 보고 싶던 새드무비도 못보고.

  이 영화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은 네 개의 사랑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옴니버스 형식으로. 대표적인 옴니버스 형식의 사랑 영화가 <러브 액츄얼리>가 있는데, 이건 정말! 감.동. 그 자체였다. 다시 보고 싶은 영화 일 순위에 들어간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이하 '내 생애')도 그와 같은 형식을 빌려 결국 하나의 감동으로 묶어내려 한 듯 한데, 사실 거기까진 아니었다. 그리고 기대를 너무 많이 하고 가서인지 내 기대를 100% 충족시킨 영화는 아니었다. 엄정화, 임창정, 황정민  등의 스타들과 함께 한 이 영화는 출연진만 봐도 즐겁다. 임창정은 그닥 싫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 배우인데 그가 나오는 영화들이 웃음을 선사하는 것은 사실이다. 엄정화와 황정민은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어 지켜보고 있는 '관심배우'들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최고의 출연진은 그들 셋 다 아니었다. 탈렌트 주현과 오미희. 와 정말 다른 세개의 사랑보다 그 두 사람의 사랑의 장면이 나오기를 영화 보는내내 기다렸다. 극장빌딩 소유주이자 사장이지만 빌딩에 붙어있는 조그마한 카페를 운영하는 오미희를 향한 순박하고 아름다운 사랑. 정말 마음을 따뜻하게 만든다.



* 저렇게 순박하고 아름다운 사랑이 있을까. 돈 많으면 뭐하니 자기 마음의 고백도 제대로 못하는데. 주현은 몇차례의 고백이 계획대로 딱딱 안떨어지자 안달난다. 도대체 내 마음을 아는 거니 모르는 거니. 나이들어서도 저렇게 아름다운 배우가 있을까 싶다. 오미희. 다시 주목하게 된 배우다.



* 가슴아프다. 우리 둘만 있으면 다 될 줄 알았는데. 아이를 가졌다. 근데 돈이 없다. 돈을 벌기 위해 거짓말하고 지하철에서 물건판다. 그런데 물건이 안팔리고 지하철 공익요원은 자꾸만 날 쫓아낸다. 슬프다. 삶이 이렇구나. 반대편에서 오면서 남편의 이런 모습을 보게 된 그녀. 울컥. 눈물이 나온다.

 

  "사랑에 제대로 미친 남녀들의 7일간의 기적같은 연애" 라는 문구에 걸맞게 일주일 사이에 이들에겐 많은 변화가 일어난다. 위풍당당 페미니스트 여의사 엄정화와 전형적인 남성우월주의자이자 말보다 주먹이 먼저인, 하지만 마음만은 순박한 형사 황정민의 사랑 첫번째, 세상이 아무리 험악하고 살기 어려워도 우리 둘만의 사랑만으로 이겨나갈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두번째 커플, 교통사고 당한 꽃미남 가수와 그를 사랑해버린 예비수녀, 마지막으로 오드리 햅번을 사랑하는 구두쇠 극장사장 주현과 내가 곧 오드리오 라고 생각하는 오드리 오미희의 네번째 사랑. 이렇게 영화는 네 개의 각기 다른 색을 가지고 있는 사랑의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 어느 것이 아름다운 사랑이라 말하지 못한다. 사전에서 사랑이란 단어는 하나지만, 현실에서 사랑은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한 형태를 띄고 있다. 사랑은 다 비슷비슷하게 진행된다고 하지만, 아니다. 사랑은 너무나 다양하고 예측할 수 없어 사랑에 빠진 사람을 괴롭게 만든다. 괴롭지 않은 사람이 있다? 선수. 그러나 선수들이 하는 사랑도 매번 다를 수 밖에 없다. 또 그것이 사랑이 아닐 수도 있다.

 "사랑해" 라는 말 만큼이나 마음이 푸근하고 기쁘고 즐겁고 이전까지의 모든 안좋았던 기억들을 날려버릴 수 있는 단어가 있을까?

 "사랑해"

 함부로 내뱉어서도 안되는 말이지만, 너무 아껴서도 안되는 말이다. 이 단어를 내 입에서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그 순간, 나는 마법에 걸린다. 그리고 상대도 마법에 걸린다. 사랑은 너무나 다양하고 많다. 또 "사랑해"의 의미도 모두에게 다 다르다. 그러나 공통적인 것은 사랑을 하면 마법에 걸린다는 것이요, 누구도 그 마법에서 풀려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사실.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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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야자키 하야오 작품의 가장 최근작. 비디오로 출시된지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초기작과 후기작에 대한 감상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감상문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간략히 다시 이야기하면 초기작이 자연의 아름다움이나 순수함,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삶을 노래한다면 후기작들은 마법에 걸린 주인공이 좌충우돌 모험을 겪다가 마법에서 풀려나는 식의 줄거리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 대표적 후기작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바로 이 작품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다. 지금까지 봤던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 중에선 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가장 재밌었고 비록 어쩔 수 없는 상황 하에서 그리 되었지만 몇번을 반복해서 봤는지 모른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반복해서 볼 때마다 처음에 보이지 않았던 장면들, 생각지 못했던 일들에 대해 더 깊이 넓게 생각할 기회가 주어졌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2004년 12월에 개봉했으니 지금으로부터 딱 1년전이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모자상점에서 일하는 소피. 어느날 왕실마법사 하울을 만나게 되고, 잠시나마 하울과 함께했다는 이유로 그를 짝사랑하는 황야의 마녀는 소피의 상점에 간밤에 들어와 그를 90살 먹은 할머니로 만들어놓고 사라져버린다. 소피는 마녀가 간 뒤 늙어 주글거리는 자신의 손을 보고, 거울을 보고, 놀라지만 침착하다. 다음날 아무도 몰래 집을 나간 그녀, 마법을 풀기 위한 모험을 시작한다.



* 소피를 늙은 할머니로 만들어버린 황야의 마녀. 그녀의 삼겹살은 정말 왕입니다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소피가 마법을 풀기 위해 겪는 모험담을 줄거리로 삼고 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치히로가 마법에 걸린 엄마, 아빠를 구해내기 위해 모험을 하는 반면, <하울>에서는 소피가 자신의 마법을 풀기 위해 모험을 시작한다.



*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는 캐시퍼. 얘도 마법에 걸려 이 성에서 일하고 있다. 캐시퍼 없이 하울은 살 수 없다. 캐시퍼도 하울이 없이는 살 수 없다. 둘이 무슨 사랑하는 연인사이냐고? 그런건 아니고 정답은 영화 속에. ^^ 참 귀엽다. 고녀석.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요 바로 전작인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만큼이나 역동적이고 급속한 줄거리 전개와 사건들로 구성되어 있진 않다. 물론 신기하고 새로운 캐릭터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전작과 겹치는 부분이 많아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라는 것을 모르고 봐도 누구든 쉽게 알아챌 수 있다. 그것은 감독만의 개성이 그만큼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비슷비슷한 내용과 구도를 답습하고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하울>에서의 '하울'은 <센>에서의 '하쿠', <하울>에서의 '소피'는 <센>에서의 '치히로'와, <하울>에서의 황야의 마녀는 <센>에서의 유바바에 비유할 수 있다. 등장인물들의 성격이나 개성, 역할 그리고 그들 사이의 관계가 너무나도 두 작품이 비슷하다.

  그의 초기작에 비해서는 장면 하나하나에 들어간 세심한 배려가 엿보인다. 마치 허큘리스 컴퓨터에서 286 컴퓨터로 넘어오며 흑백화면이 256 칼라로 바뀌었을 때의 그 느낌, 또 256 칼라가 지금과 같이 실물과 구분이 안될 정도의 화면으로 바뀌었을 때의 그 느낌, 화면의 치밀함과 정교함 뿐 아니라 스토리의 전개나 배경음악의 설정도 확실히 초기작에 비해 훨씬 나아졌다. 그야 당연한거 아니냐?! 그래 당연한거다. 당연히 80년대의 컴퓨터 기술과 2000년대의 컴퓨터 기술은 비교할 바가 못된다. 하지만 또 초기작 중 88년에 만든 <이웃집 토토로>의 경우에는 80년대 컴퓨터 기술치고는 참 정교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다 본 뒤에, 좀더 넓게 말하면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을 다 본 뒤에는, 마음 속 저 어느곳에 숨어있던(?) 나의 순수한 마음이 나로 하여금 살며시 미소짓게 만드는 결과를 얻게 된다. 그건 미야자키 하야오 만의 매력이고 마법이다. 그의 애니메이션을 보게 되면 우리는 마법에 걸린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도 역시 그 예외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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