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 전부터 화제가 되었던 이 영화. 섹시함의 대명사 안젤리나 졸리와 근육남 브래드 피트에 관한 소문들로 이 영화는 따로 홍보를 하지 않아도 될만큼 사람들의 머리 속에 각인되었을 터. 연예인들의 사생활에 깊이 관심을 갖는 편이 아니라 자세한 건 모르지만 둘이 결혼한다고 한거 같은데. 흠. 피트에겐 두 명의 자녀가 있다고 한거 같고. 맞나? 그런데 최근 일본의 어느 한 여배우가 졸리는 자신과 그렇고 그런 사이며 결코 피트가 바라는 그런 가정적인 여성이 될 수 없을거라고 해서 또 화제가 되고 있다지? 흠.

  <미스터 앤 미세스 스미스>. 우리 말로 번역하면 <스미스 부부>고 또 이게 더 부르기 편하다. 콜롬비아에서 우연히 만난 두 남녀. 피트 졸리에게 반하다. 졸리 피트를 꼬시다. 둘이 쿵짝. 결혼을 해버렸네. 덥썩. 그러나 짧은 시간 동안 만난 두 남녀 서로에 대해 얼마나 알 것인가. 피트와 졸리 둘다 서로를 속이고 있었으니 이런 둘 다 일급 킬러들이었던 것. 졸리는 변호사 사무실에 나간다고 속였던가? 피트는 건축가라고 했고. 일거리(?)가 있을 때마다 서로 각자 적당한 이유를 서로에게 둘러댄 체 사건을 해결하고 돌아오는 이들. 집에선 여지없이 다정다감한 부부다. 그런데 이런! 두 회사에서 지시한 목표물이 같은 인물이었던 것. 서로 그 자를 처치하기 위해 나서지만 서로 방해하는 바람에 목표물은 도망가버리고, 회사에서 쿠사리 먹게 생겼다. 목표물을 처치하기 전에 일을 방해한 서로를 제거해야만 하는 이들. 드디어 서로의 정체를 파악하게 되고 지금까지의 결혼 생활이 거짓(?)이었음을 깨닫게 되는데. 정말?  당연히 거짓이 아니었지. 진심으로 만나 사귀었고, 사랑했고, 결혼했다. 하지만 각자 직업을 속였을 뿐.



* 이런 집이 쑥대밭이 되었잖아. 둘이 서로를 공격하다 이제는 서로의 회사를 향해 합심해 대응한다.



* 두 회사의 공격으로 아예 사라져버린 둘만의 보금자리. 이제 어쩔겨? 졸리는 장화를 신고 있어도 이쁘다.

  사실 <스미스 부부>를 보기 전에 이 영화에 대해 꽤 많은 기대를 했었다. 비디오 소개 프로그램 같은에서 화려한 액션씬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런데 그닥 액션씬이 화려하진 않다. 그 프로그램에서 보여준 장면이 전부 다 였던 것. 그다지 스토리가 있지도 않고 그저 거짓말과 오해로 인해 파경을 맞은 부부가 다시 서로를 이해하고 화해하게 되면서 권태기를 극복하는 뭐 그런 이야기.

  오래사귄 커플들에게나 결혼한지 오래된 부부들에게 권태기는 찾아오기 마련. 이를 제대로 극복하지 못하면 헤어지는 것이고, 극복하면 계속 관계는 유지되는 것이고. 어찌 극복할 것인가는 각자의 마음 먹기에 달렸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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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시보 2005-12-16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 저도 이 영화 봤습니다. 다 때려치우고 그저 졸리와 피트를 한 화면에서 원없이 본다는 것으로도 지 할일은 다 한 영화가 아닌가 싶어요. (뭐 이 헐리우드식 액션 영화에 대단한 무언가를 기대를 한 사람은 없겠지요?) 아무튼 권태기. 그것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저도 이 영화 리뷰를 쓰면서 권태기 얘기를 잠깐 했었는데요. 극복 방법은 글쎄요. 님 말처럼 각자의 마음 먹기에 따라 달렸겠지요. 저는 사랑은 결국에는 노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짓도 안해도 이뻐 죽는건 처음 몇달이지 그 다음부터는 서로 노력해야 한다고 봅니다.

마늘빵 2005-12-16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네. 님의 리뷰를 한번 봐야겠는데요? 저도 좋아하는 졸리를 실컷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좋았어요. 근데 졸리의 섹시미가 이 영화에선 별로 안느껴지는듯. ㅋㅋ 권태기는 머. 흠. 참 그게 힘들듯해요. 어캐 극복하느냐.

이리스 2005-12-16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때, 이 영화의 모든 스토리가 그저 권태기에 빠진 부부의 상상이었다는 그런 설도 나돌았었지. 나름 설득력이 있었다고 봐. 지독한 권태기에는 상상도 약이 되는 법. ㅋ

다락방 2005-12-27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의 마지막, 브래드피트가 손가락 열개를 펼쳐 보이며 "10점만점"을 줬던게 너무너무 근사했어요. 우히히 :)

마늘빵 2005-12-27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그건 왜 기억이 안나는지 모르겠어요. ㅡㅡ; 졸았나? 조금 지루한 영화이기도 했어요. ^^
 
도덕교육의 파시즘 - 노예도덕을 넘어서 프런티어21 1
김상봉 지음 / 길(도서출판) / 2005년 10월
품절


"도덕교과는 사실이 아니라 당위를 가르쳐야 하는 교과인 까닭에 문제가 되는 사실에 대해서는 학문적으로 거의 아무 가르침을 주지 못하면서 무슨 말을 하든 습관적으로 반드시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식으로 말을 하게 된다."(머리말)-9쪽

"한국의 도덕교육은 착한 노예를 기르기 위한 것이었을 뿐, 한번도 긍지 높은 자유인을 기르기 위한 도덕교육이었던 적이 없었따. 노예가 아무리 착하다 하더라도, 노예적 삶이란 결코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의 이상일 수 없다. 우리는 그것이 우리 시대의 엄연한 시대 정신이라 믿는다. 인간을 자유인으로 만들지 않으면서 오직 착하게만 만들려는 것은 언제나 불온한 시도이다. 도덕이 아무리 숭고한 옷을 걸치고 나타난다 하더라도, 그것이 인간을 정신적으로 노예화하는 장치라면 우리는 그런 도덕을 단호히 거부하지 않으면 안된다. 인간성의 자유로운 자기실현에 앞서는 어떤 도덕도 정당성을 가질 수가 없다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첫번째 가치인 것이다."(머리말)-13쪽

"인간의 도덕적 능력이란 이처럼 실현되어야 할 과제로서의 인간성, 곧 당위로서의 인간성의 이상을 스스로 정립하고 스스로 추구하며, 스스로 실현할 수 있는 능력에 다름 아니다."-23쪽

"법은 명료하고 효율적이기는 하지만 복종하는 사람들의 자발성을 이끌어내지 못할 때에는 언제라도 시민의 저항에 직면할 위험을 안고 있다.
...중략...
그러므로 권력을 권리로 만들고 그 권력에 대한 복종을 의무로 만들기 위해서는 법의 구속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반드시 도덕적 훈육을 통하여 사람들을 세뇌하고 길들여 그들로 하여금 법을 통해 강제하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권력에 복종하도록 만들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사람들을 아예 도덕적 의무의 형태로 권력에 순종하도록 만드는 교육이 바로 한국의 도덕교육이다."
-28쪽

"자유인의 도덕은 주관적으로 자기에 대한 관심과 긍지 그리고 객관적으로는 자기를 위하여 좋은 것을 추구하는데서 시작되지만, 노예를 위한 도덕은 자기 아닌 타인을 위해 좋은 것, 즉 주인을 위하여 좋은 것을 강요하는 것에 존립한다. 그런데 한국의 도덕 교과서는 이 점에서 자유인의 도덕이 아니라 노예의 도덕을 가르치는 책이다."-34쪽

"첫째로 현실적으로 정착되어 있는 불평등한 사회관계에서 아래에 있는 사람이 지켜야 할 도덕뿐만 아니라 위에 있는 사람이 지켜야 할 도덕 역시 학생들이 배울 필요가 있다."
"둘째로 도덕교육은 사회적 약자에게 예절을 강요하는 만큼, 사회적 갖아의 폭력과 횡포에 대해 어떻게 자기를 지켜야 할지도 말해주어야 한다."-38-39쪽

"스스로 동의한 법에 복종하는 것은 자율성의 표현이지만 남이 제정한 자의적 법칙에 따르는 것은 노예적인 굴종일 뿐이다. 법은 오직 우리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일반의지의 표현일 때에만 정당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것은 내가 동의할 수 없는 악법이요, 악법에 저항하는 것은 자유인의 긍지에 속하는 일이다."-59쪽

"세상 어느 나라든 자라나는 세대에게 이익의 원리가 아닌 순수한 도덕의 원리를 온전히 가르치려 애쓰는 나라가 몇이나 될까마는 한국의 경우처럼 도덕교과의 이름을 걸고 그토록 노골적으로 잘사는 것과 올바르게 사는 것을 뒤섞는 나라는 다시 없을 것이다."-87쪽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도덕을 학문적으로 탐구하는 학문은 일차적으로는 윤리학인데, 윤리학이란 철학의 한 분야이므로 도덕의 어미학문은 당연히 철학이라 해야 한다. 그런데 한국의 도덕교과는 어미학문이 없다. 그 대신 학제적 접근이라는 유령이 어미학문의 자리를 대신한다. 학제적 접근이란 여러 학문들이 같이 도덕교과의 어미학문 노릇을 한다는 말과 같은데 여기에 속하는 학문들이 "한국학, 철학 특히 윤리학을 비롯한 규범과학, 정치학 사회학을 비롯한 사회과학" 그리고 "지도방법이나 평가면에서는 심리학과 교육학"이 도덕교과에 학제적으로 참여하게 된다."-88쪽

"다른 교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런 학문적 혼합이 유독 도덕교과에서는 학제 간 접근이라는 그럴듯한 이름 아래 정당화되는 까닭이 무엇인가? 그것은 학문적 이유나 교육적 이유 때문이 아니라, 다른 무엇보다 한국의 도덕교육의 교육목표 자체가 참된 도덕성의 함양이 아니라 국민윤리의 주입에 있었기 때문이다."-89쪽

"현재 한국의 도덕교육의 핵심 영역은 "인성 교육과 민주 시민 교육" 그리고 "통일 대비 교육과 국가 안보 교육"이다. 도덕교과의 존재 이유는 참된 도덕적 능력의 함양이 아니라 이데올로기 교육에 있는 것이다."-91쪽

"도덕교과가 구체적인 삶의 문맥에서 윤리와 도덕의 문제를 성찰하기 위해 요구되는 것은 도덕교과가 윤리학의 테두리를 벗어나 다른 학문과 뒤섞여 학제 간 연구와 교육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구체적 문맥 속에서 윤리적으로 사유하는 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이다."-94쪽

"참된 도덕교육을 위해 합당한 학문은 철학밖에 없다. 왜냐하며 직,간접적으로 가치를 다루는 모든 학문들 중에 오직 철학만이 타율적 목적에 봉사하지도 않고, 외부로부터 주어진 전제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도 않으면서 도덕적 가치 일반을 그 자체로서 성찰하는, 자유로운 정신의 학문이기 때문이다."-110쪽

"법칙이 단지 법칙이라는 이유만으로 학생들을 구원으로 이끌 수 있다는 오해는 도덕적 법칙에 대한 무반성으로 나타난다. 법칙이 법칙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끌 수 있다는 생각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법칙이 법칙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자체로서 정당하다는 확신에 뿌리박고 있기 때문이다."-146쪽

"도덕교육의 과제는 학생들이 사물의 진리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만사를 스스로 생각하고 그 이치를 스스로 깨우치고 터득하도록 생각의 능력을 계발하는 것이다."-176쪽

"현실적 교육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저학년으로 가면 갈수록 모범적 신례들의 제시가 중심이 되어야 하며, 고학년으로 가면 갈수록 도덕적 판단력의 훈련이 도덕교육에서 더 큰 비중을 차지해야 할 것이라는 정도는 말 할 수 있을 것이다."-219쪽

"학생들은 정답이 없는 곳에서 자기 나름의 대답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그 대답을 찾는 과정은 형식적이고 계산적인 사유의 과정이 아니라 윤리적 숙고와 도덕적 성찰의 과정이어야 한다. 도덕교육이 떠맡아야 할 일은 주어진 도덕적 문제 상황 앞에서 무엇이 좋으며 무엇이 나쁜지, 무엇이 옳으며 무엇이 그른지를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도덕적 판단력을 길러주는 것이다."-232쪽

"철학적으로 고찰해보면 한국의 도덕교육이 보여주는 독선적이고 무모한 율법주의는 잘못 받아들인 칸트주의에 기초한다. 즉 그것은 윤리학의 역사에서 칸트의 비길 데 없는 공적은 철저히 외면한 채 칸트의 오류만을 확대 재생산하고 있는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한국의 도덕교육은 도덕성의 본질을 칸트가 말했던 주체의 자유롭고 자율적인 입법능력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칸트가 말했던 추상적이고 형식적인 의무감에서 찾음으로써 칸트가 말하는 도덕을 자유인의 도덕에서 노예도덕으로 뒤바꿔놓은 것이다."-278쪽

"인간은 처음에는 법칙을 그 자체로서 긍정함으로써 직접 의식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법칙에 위배되는 일을 부정함으로써 간접적으로 법칙을 예감하게 된다."-280쪽

"분노해야 할 일에 대해 분노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은 도덕교육의 중요한 과제이다. 이를 위해 먼저 교사는 자연스럽게 분노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그는 학생들 앞에서 올바르게 분노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281쪽

"법칙 비판은 결국 올바른 법칙 수립의 능력을 함양하기 위한 방법에 속한다. 학생들은 무엇이 올바르고 무엇이 아닌지르 반복해서 비판적으로 검사함으로써 법칙을 수립할 때 지켜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법칙 및 규범교육은 무엇을 가르치든 궁극적으로 법칙을 따르는 기질이 아니라 법칙을 수립하는 능력을 기르기 위한 교육이어야 한다. 그것만이 자유인에 합당한 규범교육인 것이다."-292쪽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말없이 선을 실천함으로써 그 선이 다른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그들 역시 같은 길을 걷도록 모범을 보이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그런 도덕적 겸손이 가장 먼저 실천하고 모범을 보여야 할 사람들은 다름아닌 교사들인 것이다. 학생들은 그 모범을 보고 자라면서 자율적이고 주체적으로 입법하면서도 언제나 타인에게 겸손을 잃지 않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293쪽

"정의는 올바름의 현실태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올바름은 그 자체로서는 아직 규정되지 않은 (즉자적인) 보편적 사랑이요, 규범과 법칙을 통해 비로소 구체적으로 (또는 대자적으로) 표현된다. 그 규범과 법칙이 실현된 상태가 바로 정의이다. 그러니까 정의란 올바름이 구체적으로 실현된 상태이며 보편적 사랑의 즉자대자적 진리이다. 그리고 이 단계에서 도덕적 의식은 다른 무엇보다 공정성에 주목하는 의식으로서의 의무감이다."-294쪽

"법은 완전한 균형과 공정성에 도달할 수는 없다. 설령 어느 순간에 그럴 수 있다 하더라도 현실의 권력관계는 언제나 변하는 까닭에 법이 지향하는 균형과 공정성이 언제나 그대로 유지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정당한 법을 마땅히 지켜야 하겠지만 법 자체를 절대시하는 어리석음에 빠져서는 안된다"-2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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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일' 영화 제목이 '내일'이다. 우리말로 바꿔서 극장에 걸어놨다면 아마도 지나가는 사람들 마다 웃겠지?! 영화 제목들은 그냥 놔두면 괜찮은데 우리말로 바꾸면 뭔가 어색하고 이상한 것들이 꽤 많다. 이건 다 우리가 외국어를 너무나 우러러보고, 우리말을 천시하기 때문일까 라는 생각도 해본다. 음 이런 야기는 나중에 길게 따로 하기로 하고, 어찌되었든 이 영화 <내일>은, 내일 우리에게 무슨 일이 닥칠까? 란 물음을 부제로 집어넣으면 딱인 영화이다.

  영화 포스터에 그려져있는 저것은 무엇?! 하얀 북극곰의 형상인가. 처음엔 그렇게 봤다. 살빠진 북극곰. 그러나 저건 눈보라로 만들어진 허리케인이다. 지구 온난화 현상으로 북극의 빙하가 녹으면서 해류의 흐름을 바꾸어 놓아 결국 지구가 빠른 시일내에 빙하기 때와 비슷하게 바뀐다는 내용이다. 이산화탄소 CO2의 대량 방출로 지구는 점점 따뜻해지고 있다. 사실 2005년 지금 우리가 춥다고 난리를 치지만 춥긴 개뿔. 하나도 안춥다. 그러는 너는! 안추워서 감기 걸렸냐?! 훌~쩍. 그래도 한 10년전에 비해서는 안춥지 않냐? 니가 10년전에 추위를 알기나 해?! 아 예~. 여튼간에 예전엔 추웠던거 같다. 더 예전엔 더 추웠겠지? 지구가 점차 따뜻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인 듯 하고, 네덜란드는 그래서 나라 주변의 해수면이 상승해 자기네 영토로 바닷물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둑을 쌓는다고 하지 않는가? 조만간(?) 바닷물은 더 높아질테고, 일본도 작아질테고, 우리나라도 남한땅이 줄어들지 않을까?

  지구 온난화 현상을 막기 위해 1997년에 교토 의정서가 생겼다. 영국, 미국, 캐나다, 프랑스, 독일, 일본, 우리나라, 우크라이나 등의 여러 국가들이 여기에 가입했다. 그리고 몇년전(?) 작년, 재작년쯤인가?! 미국이 탈퇴했다. 2001년정도이라라. 미국의 부시대통령이 우리는 이런거 안해. 니들끼리해. 하고선 나갔다. 그럼 우째?! 미국이 가장 이산화탄소 방출량이 높은데?! 그 다음에 누구? 러시아, 다음이 일본, 그 다음 독일, 그 다음 캐나다, 그 다음... 어쩌구 하다가 11위 한국. 내가 이 순위를 다 외우고 있는건 수업 시간에 6반을 돌면서 설명했더니 자동으로 외워졌다. 이산화탄소를 많이 배출하려면 일단 영토가 넓어야 되고, 인구도 많아야 하고, 산업적으로 많이 발달해있어야 한다. 미국이나 러시아는 영토가 커서 그렇다치고, 일본이나 독일은 뭐니. 나머지 5위부터는 수치가 작았지만, 1위-4위까지는 수치가 엄청 났다.  막대그래프에 의하면.

  영화 <투마로우>에서는 6주내에 지구 북반구에 빙하기가 온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어떤 영화나 마찬가지 제대로 예측하는 학자가 있으면 정치인들은 이를 씹는다. 그러고 한참 지난 뒤에 위험한 상황에 되고 나서야 그때 그 학자를 다시 불러다가 해결방안을 묻는다. 이건 어떤 재앙 영화나 다 똑같다. 마치 댄스 가수 다섯명이 나와서 한명씩 앞으로 나와 춤추다가 돌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왜냐면 그러지 않고 단번에 정치인들이 학자의 말을 믿어버리면 영화는 싱거워지기 때문이다. 뭐냐 대책 다 세워놓고. 재미없게. 그래서 재앙 영화에서 그 구도는 절.대. 바뀌지 않는다.



* 골든벨 퀴즈 대회 때문에 뉴욕에 온 샘(제일 오른쪽)과 친구들. 택시에서 내리니 하늘에 뭐가??



* 바닷물이 미국 도시를 다 먹어버리고, 자유의 여신상 상체만 겨우 보이고 있다. 자유의 여신상은 절대 미국 재앙 영화에 꼭 들어가는 주연배우다. 이것은 미국의 상징이기 때문이지.



* 뉴욕의 도서관을 눈보라가 휩쓸고 있다. 사람들은 모두 도서관안으로 들어가려 하지만 거기 뛰어가는 당신은 이미 늦었다.

  엄청난 토네이도가 미국 엘에이를 휩쓸고, 일본에선 우박에 맞아 사람이 뒤진다. 간판, 지붕, 차 몽땅 다 부서지고, 결국 미국 정부는 대피령을 내린다. 한참 지나서. 이미 북반구에 고립된 이들은 버렸다. 그리고 남부 사람들은 멕시코로 도망갔다. 멕시코는 처음에 받아주지 않았으나 미국 대통령의 남미 모든 부채를 탕감한다는 조건하에 미국인들을 받아주었다. 그야말로 세계 최강대국 미국이 무릎꿇고 사정하는 격으로 붙은 것이다. 사실 남미 부채 다 탕감해줘도 미국인들 살려주는건데 조건이 너무 약하다. 어쨌든 관대한 남미인들은 미국인들을 받아주어 난민촌까지 마련해주고 미국 남부 사람들은 생존의 위협으로부터는 피하게 된다. 하지만 북부 뉴욕 도서관에 고립되어 있는 기상학자 잭 홀 박사의 아들 샘과 여자친구 로라, 그리고 그의 친구들. 얘들 어떡하냐? 여기서  또 재앙 영화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모성애 혹은 부성애 발동. 이 미친 기상학자 잭 홀 교수는 동료를 이끌고 뉴욕 도서관으로 향한다. 가는 도중 동료 둘 다 사망. 그 혼자서 눈속에 파묻혀 보이지도 않는 도서관으로 들어가 결국 그들을 구출해낸다.

  영화는 뻔하디뻔한 스토리를 품고 있지만 영화 속에서 보여지는 온갖 무시무시한 장면들은 눈길을 끌기에충분한다. 절대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어떤 한 순간도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수 없다. 서서히 얼음이 건물을 덮치는 장면, 토네이도, 해일, 쓰나미, 태풍, 눈보라, 우박 온갖 다양한 장면들이 연출된다. 물론 다 컴퓨터 그래픽에 의한 것이지만 정말 그래도 대단하다.

  결국 영화는 가족을 소홀히 하지 말라는 가족애 강조. 또 하나 지구에 언제 재앙이 닥칠지 모르니깐 지금부터 조심하라는 경고의 메세지 하나 떨어뜨려주며 종료. 너 부시 너 보라고 만든 영화야. 어서 다시 교토 의정서에 재가입해. 이산화탄소 어쩔꺼야? 줄일거야? 말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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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 책 2005-12-15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꿈보다 해몽이라고..영화보다 님 페이퍼가 더 재미있네요..
사실, 영화도 개인적으론 재밌었다고 생각해요..더도말고 딱 오락용으로 좋은 영화여서 더 상쾌했어요..진부했음에도 ^^

마늘빵 2005-12-15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데이드리머님 / ^^ 딱히 감상이 쓸 만한게 없어서 그냥 잡소리를 좀 많이 했습니다. ㅋㅋ 영화 저도 재밌었어요. 후딱 지나간듯.

미미달 2005-12-15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투모로우 모모모모

플라시보 2005-12-16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요. 저거 허리케인이 아니라 자유의 여신상이 눈에 잠긴거 아닌가요? 성화를 손에 들고있는 그 부분만 띡 솟아 있는.. (아님 어쩌지?) 너무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저도 저 영화 재미나게 봤었는데 님 감상문이 훨 더 재밌어요.^^ (살빠진 북극곰에서 뒤집어짐.^^)

울보 2005-12-16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전 비디오로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영화관에서 보면 그 영상이 좋다고 하던데,,
내용은 별로,,,

마늘빵 2005-12-16 0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미달 / 그게 머니 ㅋㅋㅋ
플라시보님 / 헉 다시 보니깐 그런거 같은데요???! 헉. 이런. ㅡㅡa
울보님 / 내용은 예측 가능하죠 머. ^^ 저도 그 영상이 참 실감났습니다.
 

    이 영화가 나왔다는 말에 난 퍼뜩 극장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고, 나온지 한참이 지난 지금에서야 보게 되었다. 이 영화가 상영된게 올해 2월이었으니깐 10개월이나 흐른 셈이다. 그 동안 뭐했나 몰라. 상영이 종료된 이후에도 난 비됴 혹은 디비디를 빌려다가 언능 보고 싶었으나 이상하게도 항상 마음 뿐이었다. 왜 그랬나 몰라. 이제서야 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아마도 이렇게 뒤늦게 내가 보고싶어하던 영화를 보게 된 것은 내 발길이 비디오 대여점으로 향하기 힘들었기 때문이었을 터. 그것은 '귀차니즘'에 기인할 터.

  이 영화는 재즈뮤지션 레이 찰스에 대한 영화이다. 하지만  나는 레이 찰스를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보고 싶었다. 왜? 아니 레이 찰스를 모르면서 왜 이 영화가 보고 싶었는데?! 아마도 수많은 재즈 매니아들이 이 영화의 상영을 오랜시간 기다렸을 것이나 나는 어 이런 영화도 나왔네?! 뭐야? 재즈 뮤지션 레이 찰스? 음. 어디서 들어봤더라. 이런 정도의 감각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레이>가 보고 싶었단 말이다. 첫째, 그것이 실화이기에, 둘째, 그것이 뮤지션의 삶을 그렸기에. 내가 이 영화를 보고 싶은 이유는 그게 다다. 정말이다.

  난 실화를 그린 영화들을 좋아하고, 또한 음악을 소재로 한 영화를 매우 좋아라 한다. 바이올린, 피아노, 색소폰 등등 악기를 불문하고, 록, 재즈, 컨츄리 장르를 불문하고, 그저 음악가를 소재로 한 영화라면 환영이다. 예전에 에미넴을 잘 모르던 시절 보게 된 영화 <8 mile>은 대단한 감동을 선사해주었다. 맨날 신문기사에 지 애미 욕하다 애미한테 고소당했네, 누구랑 섹스를 했네 하는 따위의 막말을 해대는 놈이라 그닥 가까이 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의 삶을 그려낸 영화 <8 mile>은 나로 하여금 그의 팬이 되지 않을 수 없게끔 했다. 난 영화가 끝난 즉시 바로 레코드점으로 달려가 그의 음반 1,2,3집을 모두 샀다. 그리고 최근 그의 베스트음반이 나왔다길래 인터넷 주문 장바구니에 넣고는 다시 생각을 고쳐먹고 지우기까지 했다. 라이브 음반이라면 당장에 결재까지 눌렀겠지만 이미 있는 음반의 곡들이 모아진 것이라 삭제.

  <백야> <데블스 어드버킷> 으로 유명한 테일퍼 핵포드 감독은 영화 <레이>를 위해서 15년간을 레이 찰스와 교류했다고 한다. 한편의 잘만든 영화를 위해서 그만큼 오랫시간의 노력을 한 것이다. 물론 처음엔 영화를 목적으로 만났을지라도 - 그것도 확실치는 않겠지만 -, 그간의 세월들은 그 둘을 친구가 되게 했을테고 - 왜냐면 핵포드 감독도 나이가 만만치 않으니깐 - 그 솔직한 교재가 재즈뮤지션 레이 찰스의 모든 것을 이 영화에 솔직히 담아대는데 이바지했을 것이다. 레이 찰스가 죽은 것이 2004년, 그리고 2005년 2월 영화 <레이>가 개봉했다. 시기상으로 딱 들어맞는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레이 찰스를 위한, 그를 기리기 위한 아주 적절한 때에, 모든 그의 팬들이, 재즈 팬들이 그를 그리워하고, 그의 죽음을 슬퍼할 그 시기에 영화는 개봉한 것이다.

  가난했던 조지아주 어린 시절, 동생을 사고로 잃고, 이후 자신은 7세에 시력을 잃었다. 어머니는 그를 맹아학교에 보냈고, 그는 그곳에서 학교생활을 보냈다.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를 좋아해 몰래 보러가고, 그곳에서 보고 들으며 음악을 배웠다. 컨츄리. 지금 그는 재즈의 왕으로 알려져있지만 본래 그가 보고 듣고 자란 음악은 컨츄리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공연중 블루스, 재즈, 컨츄리를 넘나들며 자신의 재능을 선보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맹인이자 흑인이어서 자그마한 공연을 뛰어도 다른 뮤지션들보다 못한 대우를 받았으며, 사기를 당하기도 했다. 그러다 애틀란틱 음반사로부터 제의를 받고 본격적으로 음반을 낸 뒤 성공에 성공을 거듭하여 결국 그래미 상까지 휩쓰는 쾌거를 이루고 돈도 펑펑 써도 남을 만치 벌었다. 음악에 빠져 지내며 많은 여자들과 염문을 뿌렸고, 마약에 손대기도 해 재판장에 서기도 했다. 또 조지아주의 공연에서 백인과 흑인의 좌절 차별로 흑인들이 시위를 하자 이에 공감하며 최초의 공연거부를 하기도 했고, 이것이 발판이 되어 흑인차별철폐는 물론이고 평생 공연 금지 판정을 받은 조지아주로부터 초청공연을 받아내기에 이르렀다.

  영화 <레이>는 이런 그의 모든 삶의 희노애락을 다 보여준다. 일부러 미화시키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는 감독인 헥포드가 그의 삶을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그려주기를 원했다. 그래서 가난했던 어린 시절과 수많은 여자들과의 사건들, 그리고 마약사건 등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 레이 찰스를 연기한 제이미 폭스. 대단했다. 와. 그를 다시 보게 된다. 정말 실제 뮤지션이 연기를 하는 것 같았다.



* 레이 찰스의 아내 델라와 그의 아들. 돈이 많으면 뭐해. 남편이 밖으로 나도는데. 불쌍.

  어머니는 그를 보내며 절대 마음만은 장애인이 되지 말라고 하셨다. 그는 마음을 굳게 먹고 세상에 당당히 맞섰다. 절대 맹인이라고 동정을 받거나 굴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우뚝 섰고, 결혼도 했으며, 아이도 낳았고, 음악인으로 대성공을 했다. 장애가 있는 그가 정상인이 이루기도 힘든 일을 해낸 것이다. 그에게 있어 음악은 그의 전부였고, 그 음악은 결국 그를 만들어냈다. 마약에 빠져, 음악에 빠져, 가정을 소홀히 하고 외도하고, 큰 성공을 이루기는 했지만 그는 가정에 있어서 만큼은 좋은 남편, 좋은 아빠가 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내 델라는 그의 곁을 지켜주었으며, 결국 그가 약을 스스로 끊도록 만들었다. 그는 큰 성공을 했지만 어릴 적 어머니가 말씀하신 "마음만은 장애인이 되지 말아라"라는 말에 어긋나게 살고 있음을 스스로 깨닫고 다시 태어났다.



* 가운데가 레이의 애인 마지. 레이 찰스 밴드의 코러스 세 명 중 한명으로, 훗날 레이의 아들까지 낳는다.

  레이 찰스. 난 재즈 음악에 관심이 있지만 사실 재즈 음악을 잘 모른다. 하지만 내가 에미넴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다가 그의 팬이 되었듯 레이 찰스를 모른 채 이 영화를 봤지만 지금 그의 팬이 되지 않을 수 없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조만간 내 지갑이 더 얇아지게 되리라는 예감이 든다. 레이 찰스.

 

p.s.

1. 그가 집을 나가 밖에서 수많은 여자들과 관계를 맺고, 밖에서 낳은 자식까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지켜준, 되려 그를 보살펴준 헌신적인(?) 그의 아내 델라에게 존경을. 이게 존경할 만한 일인지 아니면 바보라고 욕을 해줘야 할 일인지 모르겠지만 어쨌건 레이 찰스는 여자복은 타고난 듯 하며, 그중에도 그의 아내 델라는 최고다.

2. 이런식으로 인종차별반대에 앞장 설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자신이 인종차별의 희생자였으면서도 그는 크게 성공한 뒤에도 인종차별에 관해 별 관심이 없었다. 나는 그저 연예인이에요. 그래 너 연예인 맞다. 그런데 너도 흑인이다. 레이는 나중에 조지아주에서 사람들이 시위를 하고 그에게 직접 말을 건네며 도와줄 것을 요청한 뒤에 비로서 이에 대해 인식한 듯 하며, 수많은 이들이 인종차별 반대에 오랜동안 힘써왔음에도 그들의 이름은 뒤에 묻히고, 오직 그가 인종차별철폐에 대단한 공을 세운 것 마냥 되어버렸다. 난 이게 좀 못마땅하다.

3. 우리나라에서라면 이게 가능할까 싶다. 저때가 1940년대부터의 미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지금 2005년 현재 우리나라에서 저런 뛰어난 재능을 가진 장애인이 저만한 성공을 할 수 있을까 의심스럽다. 아마도 봉제공장에서 박음질을 하거나 집에서 구슬을 꿰거나 길에서 도장을 파고 있지 않을까. 흑인이면서 장애인인 그가 그 차별을 극복하고 그만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대단한 의지와 노력도 한몫했겠지만 사회적인 분위기도 뒷받침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비록 그 때가 흑인차별과 장애인 차별이 있던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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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영엄마 2005-12-15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잘 읽고 갑니다.(__)

마늘빵 2005-12-15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안녕히 주무세요.
 



  영화 <굿바이 레닌>은 극장 상영관을 통해 개봉한 영화는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무슨 국제영화제에서 선보인 작품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는 영화는 아니다. 내가 이 영화를 처음 접한 것은 일간신문 문화면을 통해서였으며, 조금이나마 영화의 장면들을 살펴볼 수 있었던 기회는 일요일 낮에 하는 어느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서였다. 그러나 충분히 그 장면들만으로도 이 영화를 나를 사로잡았고 집에 디비디도 없던 시절, 무턱대고 인터넷 주문을 통해 굿바이 레닌의 디비디를 구입했다. 그만큼 인상적이었고 감동적이었다는 말씀.


  단 한번도 거짓말을 하지 않은 사람이 정말 있을까? 사람이라면 누구나 살아가면서 한번쯤은 거짓말을 할 터. 영화 속에서 동독시민인 크리스티아네의 아들 알렉스가 베를린 장벽 철거 시위대에 들어섰다 경찰의 진압을 받는 것을 보고 알렉스의 엄마 크리스티아네는 그만 현장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지고 만다. 엄마가 코마상태로 병원에 있는 동안에 동독은 서독으로서의 흡수통일에 가까워지게 되고 동독에는 자본주의의 상징인 버거킹과 맥도날드의 로고가 건물에 걸리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엄마가 의식을 찾은 뒤, 아들 알렉스는 엄마의 심장마비를 막기 위해 열렬한 공산주의자인 엄마를 위해 통일된 사실을 숨기려 온갖 거짓말을 하게 된다. 그야말로 선의의 거짓말. 영화 <굿바이 레닌>을 통해 거짓말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거짓말의 상황>

  거짓말에는 두 가지가 존재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나쁜 의도를 가지고 하는 거짓말이고, 두 번째는 좋은 의도를 가지고 하는 거짓말이다. 나쁜 의도를 가지고 하는 거짓말의 경우 이는 사기다.


  첫 번째, 나쁜 의도의 거짓말


  「인건이는 혜림이와 사귀고 있는데 얼마전 영화모임에서 지선이를 알게 되었고 혜림이 몰래 지선이를 만나 데이트를 했다. 인건이와 지선이가 영화를 보는 두 시간 동안 인건이는 혜림이에게서 몇 건의 문자메세지를 받았지만 이를 무시했다. 전화도 세 차례 왔지만 모두 무시했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연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중에 혜림이를 만났을 때 그녀가 이에 대해 추궁하자 자느라 전화 온줄 몰랐다고 거짓말을 했다.」


  이는 나쁜 거짓말의 예이다. 인건이는 분명히 혜림이 몰래 지선이와 데이트를 했으며,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하지 않고 알리바이를 만들어내 혜림이를 속였다. 누가 봐도 인건이가 잘못한 상황이고 혜림이만 불쌍해졌다. 그렇다면 과연 나쁜 거짓말은 ‘언제나’ 용납될 수 없는가?


  위의 사례에 약간의 상황을 덧붙여보자.


  「인건이는 영화를 매우 좋아한다. 혜림이와 사귀기전에는 여러 여자친구들과 데이트하며 영화 보기를 즐겼지만 혜림이와 사귄 뒤로는 영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혜림이 때문에 꼭 보고 싶은데 놓친 영화들이 부지기수다. 아 오늘 또 저 영화 개봉했어. <도쿄타워>. 인건이는 영화를 보고 싶어한다. 무지. 하지만 혜림이는 별로 내켜하지 않는다. 아니 도대체 그럼 내가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이 영화가 비디오로 출시될 때까지 기다려야한단 말야? 너무 억울하다. 그래서 인건이는 ‘너무나 영화가 보고 싶어서’ 혜림이 몰래 지선이를 만나 영화를 봤다. 꼭 지선이가 아니어도 되지만 기왕이면 더 마음이 가는 사람과 함께 보는 것이 낫지 않은가? 그런데 혜림이가 영화보는 중간에 전화를 했다. 마음이 찔렸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혜림이에게는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나는 나쁜 의도로 그런 게 아니란 말이다. 남들이 보면 나보고 못됐다고 하겠지만」


  좀전의 상황에 약간의 상황을 더 추가했다. 어떤가? 분명 위에서 이 상황을 나쁜 거짓말 이라고 했지만 인건이의 변론을 듣고 보니 나쁜 의도로 그랬다고 몰아붙이기엔 인건이가 불쌍하지 않은가? 앞에서 거짓말을 나쁜 거짓말과 좋은 거짓말 두가지로 나눠봤지만 거짓말을 좀더 세분화 시킬 필요가 있다.


  나쁜 거짓말에는 남을 속여서 자신의 이득을 챙기고 타인에게 정신적, 물질적 피해를 줄 수 있는 거짓말이 있는 반면, 남을 속이고 자신의 이득을 챙기고 또 알려질 경우 타인에게 정신적, 물질적 피해를 줄 수도 있지만 드러나지 않을 경우 피해를 주지 않을 수도 있는 거짓말. 이렇게 두 가지로 나눠봐야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집을 계약했다가 중복계약으로 사기를 당해 지금껏 모은 모든 돈을 날려버린 경우는 나쁜 거짓말의 전자에 속하고, 위의 사례는 후자에 속한다. 계약사기는 드러나지 않을 수가 없는 명백히 타인에게 나쁜 결과를 초래하는 범죄이고, 후자의 경우는 드러나지 않을 수고 있는 경우이다. 나는 후자의 거짓말이 나쁘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두 번째, 좋은 의도의 거짓말


  자 이제 두 번째 좋은 의도의 거짓말을 한번 살펴보자. 흔히 말해 ‘선의의 거짓말’이라고도 부른다. 영화 속 장면에서 알렉스가 엄마를 살리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이제는 나오지 않는 동독제품을 만들어내고, 통일사실을 숨기기 위해 라디오 안테나를 부러뜨리고 고장났다고 하는 장면, 창문 밖 고층 빌딩에 걸린 맥도날드 간판을 보고 놀란 엄마를 위해 맥도날드는 50년대에 동독에 처음 만들어낸 것이라고 가짜 뉴스를 제작하는 장면 등 알렉스의 거짓말은 엄청나다. 이 많은 거짓말들이 모두 정당화 될 수 있는가?


  「사냥꾼이 토끼를 잡으려고 하는데 토끼가 얼른 도망쳐 어느 오두막집으로 들어가 사정을 했다. 한번만 숨겨주면 절대로 은혜를 잊지 않겠노라고. 사냥꾼이 오두막에 도달해서 물었다. “혹시 이쪽으로 지나가는 토끼 봤소?” “네. 저쪽 방향으로 재빠르게 도망치던걸요.” “아 예. 감사합니다.” 사냥꾼은 오두막 주인이 잘못 알려준 방향으로 달려갔다. 토끼는 오두막 주인에게 감사하단 인사를 전하고 다른 방향으로 도주했다.」


  전형적인 선의의 거짓말의 사례이다. 토끼를 살리기 위해 오두막 주인은 사냥꾼에게 거짓말을 했다. 만일 사실을 그대로 말했더라면 토끼는 여지 없이 잡혀 구이가 됐을 것이다. 누가 봐도 이 오두막 주인의 행동은 칭찬받을 만하다. 단 한번의 거짓말로 토끼의 목숨을 살렸으니 말이다.


  알렉스도 영화 속에서 셀 수도 없을 만치 많은 거짓말을 했지만 이는 모두 엄마를 살리기 위해서였다. 엄마는 결국 죽는 순간까지도 통일사실을 몰랐지만 그것은 엄마가 마음편히 세상을 하직할 수 있게 하기 위한 알렉스의 ‘배려’였다. 수많은 거짓말들을 애써 하지 않고 엄마가 깨어난 순간 “엄마 동독이 서독에 흡수통일됐어요.” 라고 말했다간 엄마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을 터. 알렉스의 효성이 대단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선의의 거짓말은 언제나 정당한가?


  만일 칸트가 이 사태에 대해 코멘트를 한다면 어땠을까? 칸트는 <거짓말할 권리>라는 글에서 위의 예와 비슷한 경우를 예로 들고 있다. 한 친구가 내 집에 숨었고, 살인강도가 나타나 나에게 친구의 행방을 묻는다. 이는 위의 사례보다 더 독한 경우다. 위에서는 사냥꾼을 피해 도망온 토끼를 구해준 경우이지만, 칸트의 예는 살인범에게 친구를 내주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트는 거짓말할 권리는 어떤 경우에도 허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즉 그에게 있어서 불가피한 상황에서 진실을 말하는 것은 그로 말미암아 생겨날지 모르는 많은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에게 요구되는 형식적 의무이다. 그에 의하면, 허위 진술은 “내가, 나에게 부당하게 말하도록 강요하는, 그에게 잘못을 행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 이것은 인류 일반에게 행해진 하나의 잘못(ein Unrecht)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어떤 구체적인 상황 하에서 행해진 거짓말의 문제가 그 상황 속에 있는 개인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은 인류 전체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음을 칸트가 주장한다는 사실이다. 지금 우리가 알기 원하는 문제는 한 인간이 구체적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 허용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문제에 대한 칸트의 대답은 ‘거짓말할 권리가 보편적 원칙으로 성립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거나 ‘진실에의 의무가 예외를 가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위의 예에서, 거짓말을 하든 하지 않든, 발생하는 결과는 우연적이라고 생각한다. 칸트는 당신이 거짓말을 함으로써 당신의 친구가 살인강도에게 희생되는 경우와 진실을 말했음에도 그 친구가 그 살인강도에게 희생되지 않을 수 있는 경우를 생각해 본다. 그리고 당신이 거짓말을 했을 경우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당신에게 있다고 말한다. 또 당신이 엄격하게 진실했다면 공적인 정의의 차원에서 예견되지 못한 결과가 있었다 할지라도 당신에게 잘못이 없다고 말한다. 요컨대, 칸트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진실을 말하든 결과가 좋거나 나쁜 것은 우연적이라는 것이며, 그 우연적인 결과를 예상하여 원칙을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칸트의 입장에서 보자면, 진실하지 않을 권리란 것은 우연적인 것에 불과한 결과를 미리 예상하여야만 성립될 수 있는 것으로 원칙으로서의 자격을 가지지 못한다.”(「칸트 윤리학에 있어 거짓말 문제」, 김종식)


  선의의 거짓말은 누군가의 생명을 살리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거짓말의 대상이 되는 상대에게 결과적으로 해를 끼치지 않는, 되려 이득을 전달해주는 결과를 얻기 때문에 거짓말을 한다고 하여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나 역시 이에 동감하는 바이다. 하지만 칸트의 의견에도 일리는 있다. 내가 주어진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함으로서 생기는 결과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는 일이다. 이는 순전히 우연적인 것이다. 내가 거짓말을 하는 길을 택했다고 해서 타인이 이로인해 이득을 보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득을 보게 되리라는 생각은 순전히 나의 머리 속에서, 아직 발생하지 않은, 사건에 대한 추측일 뿐이다. 거짓말을 했고 결과가 나빴다면 이는 나의 양심을 속인 첫 번째 잘못과 나의 잘못된 선택에 대해 타인이 입은 해까지 포함해 두 개의 잘못을 범하게 되는 꼴이 된다. 그러므로 선의의 거짓말이 언제나 정당화 되는 것은 아니며 단지 그것은 나의 의도의 문제일 뿐 ‘선의의 결과’까지 담보하는 것은 아니기에 언제나 옳다고 말할수도 없다. 따라서 칸트에 의하면 <굿바이 레닌> 속에서 알렉스의 선의의 거짓말은 순전히 그 혼자만의 자신의 거짓말에 대한 낙관에서 비롯된 행위일뿐 그렇다고 해서 - 물론 영화 속에서는 그 거짓말로 인해 엄마가 기분좋게(?) 돌아가셨지만 - ‘반드시’ 선의의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므로 잘못이다.



  거짓말을 학생들을 대상으로 교육 할 때는 거짓말에 대한 다양한 상황을 주어준 뒤 각자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행동은 어떤 것인지를 말해보도록하고 서로 다르게 생각하는 부분에 대해서 토론을 진행해보는 것이 좋을 듯 싶다. 내가 생각한 행동과 남이 생각한 행동의 차이와 각각의 행동이 불러올 결과까지 이야기를 하다보면 거짓말에 대한 생각이 기존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고 나아가 생각의 넓이와 범위가 확장되고 또한 깊어지리라 생각한다.

 

 

* 이 글에 들어간 필자의 관점은 논의를 활발히 하기 위해 본래의 제 생각보다 극단으로 약간 치우친 경향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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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아이 2005-12-12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생각할 기회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근데 "굿바이 레닌" 개봉했더랬어요. ^^
2. 글의 요지와는 상관없지만, 전 그 영화 보면서 어머니가 정말 끝까지 눈치를 못 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답니다. 알고도 아들의 정성에 속아준 게 아닐까 하는...
3. 그런데 칸트가 들었다는 살인강도의 예에서요, 우리는 살인강도가 물으면 꼭 대답해야 하나요? 누군가에게 질문을 받았을 때 대답해야 할 의무가 주어지나요? 침묵할 권리, 질문을 거부할 권리도 있지 않을까요? 이건 또 다른 문제가 되겠지만...

마늘빵 2005-12-12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숨은아이님 /
1. 굿바이 레닌 개봉했었나요?? 엇 왜 몰랐지. ㅡㅡ;;;; 전 국제영화제에서만 한줄 알았어요.
2. ^^ 전 그런 생각까진 안했는데. 다만 이런 생각은 했어요. 심장마비를 막기 위해 저렇게까지 힘들여가며 거짓행동을 할 필요가 있을까. 차라리 아무도 없는 시골 한적한 곳에 이사를 가서 거기서 살면 저런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될텐데 하고 말이에요. 영화는 일부러 코믹하고 재미난 상황을 연출하기 위해 그런 장면들을 넣었겠지만요.
3. 네 칸트에게 있어서는 거짓말은 절대 안됩니다. 물었을 때 대답해야할 의무가 아니라, 누군가 질문을 했을 때 그에 대해 '거짓말'을 할 의무는 절대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칸트는 철학을 함에 있어 언제나 인류전체에게 해당되는 보편적인 법칙을 세우려고 노력했고, 각각의 상황상황마다 달리 적용되는 거짓말 같은 것은 절대로 허용되지 않습니다. 다만 이때 칸트가 상정하고 있는, 주장하고 있는 바는 윤리학의 이론상의 원칙이고요, 우리네 삶의 영역에서 적용되는 실천윤리학의 문제에서는 따로 다뤄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칸트가 실제 저런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어떻게 행동할지 궁금합니다. 이론상으로는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겠지만요. ^^

플라시보 2005-12-13 0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도 굿바이 레닌 보고 싶었었는데. 이거랑 비슷하다는 우리나라 영화 (간큰가족이었나?) 를 보고 앓느니 죽지라는 걸 생각했었습니다. 흐... 하나의 영화로 이렇게 풍부한 생각을 하시는 님이 참으로 부럽습니다. 인간의 뇌란. 그 어떤 우주보다도 넓고 광활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고 갑니다.

마늘빵 2005-12-13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라시보님 / 전 이 영화 굉장히 좋아합니다. 넘 좋아해서 디비디까지 구입해놨는걸요. 참고로 제가 가지고 있는 디비디는 딱 두개인데, <봄날은 간다>와 <굿바이레닌>입니다. 조만간 <비포선라이즈>와 <비포선셋>을 구입할 생각이에요. ^^ 전 영화를 통해서, 책을 통해서, 생각꼬리물기 놀이 하는 것을 좋아한답니다. 드럼치는 거 빼고 다른 취미 하나 없이 여행도 안다니고 지금껏 살아오면서 심심하지 않았던 것은 바론 이런 놀이 때문이에요. 혼자 하는 놀이라 타인과 어울리지 못하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marine 2005-12-13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인사드려요, 아프락사스님!! 전 무슨 공산주의 혁명 이야기인 줄 알고 봤다가 다소 황당했던 기억이 납니다 ^^ 간 큰 가족이 완벽하게 패러디 한 것 같던데 굿바이 레닌과는 달리 코메디 쪽 느낌이 강합니다
비포선라이즈랑 비포선셋 너무 좋죠? 전 특히 비포선셋이 더 좋았어요 Love is a dialogue 임을 다시 한 번 확인했죠

마늘빵 2005-12-14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나님 / ^^ 네 전 간큰가족은 안봐서 잘 모르겠어요. 굿바이레닌은 독일통일의 과정을 축약적으로 보여주지만 진실된 모습들을 보여준다는 면에서, 또 그걸 코믹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대단한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통일 된 이후의 동독인들의 상실감. 지금껏 10번 넘게 본거 같은데 볼 때마다 새로운 것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비포선라이즈 선셋 은 시리즈로 사려고 했는데 지금 절판으로 되어있더라구요. 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