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굿바이 레닌>은 극장 상영관을 통해 개봉한 영화는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무슨 국제영화제에서 선보인 작품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는 영화는 아니다. 내가 이 영화를 처음 접한 것은 일간신문 문화면을 통해서였으며, 조금이나마 영화의 장면들을 살펴볼 수 있었던 기회는 일요일 낮에 하는 어느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서였다. 그러나 충분히 그 장면들만으로도 이 영화를 나를 사로잡았고 집에 디비디도 없던 시절, 무턱대고 인터넷 주문을 통해 굿바이 레닌의 디비디를 구입했다. 그만큼 인상적이었고 감동적이었다는 말씀.
단 한번도 거짓말을 하지 않은 사람이 정말 있을까? 사람이라면 누구나 살아가면서 한번쯤은 거짓말을 할 터. 영화 속에서 동독시민인 크리스티아네의 아들 알렉스가 베를린 장벽 철거 시위대에 들어섰다 경찰의 진압을 받는 것을 보고 알렉스의 엄마 크리스티아네는 그만 현장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지고 만다. 엄마가 코마상태로 병원에 있는 동안에 동독은 서독으로서의 흡수통일에 가까워지게 되고 동독에는 자본주의의 상징인 버거킹과 맥도날드의 로고가 건물에 걸리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엄마가 의식을 찾은 뒤, 아들 알렉스는 엄마의 심장마비를 막기 위해 열렬한 공산주의자인 엄마를 위해 통일된 사실을 숨기려 온갖 거짓말을 하게 된다. 그야말로 선의의 거짓말. 영화 <굿바이 레닌>을 통해 거짓말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거짓말의 상황>
거짓말에는 두 가지가 존재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나쁜 의도를 가지고 하는 거짓말이고, 두 번째는 좋은 의도를 가지고 하는 거짓말이다. 나쁜 의도를 가지고 하는 거짓말의 경우 이는 사기다.
첫 번째, 나쁜 의도의 거짓말
「인건이는 혜림이와 사귀고 있는데 얼마전 영화모임에서 지선이를 알게 되었고 혜림이 몰래 지선이를 만나 데이트를 했다. 인건이와 지선이가 영화를 보는 두 시간 동안 인건이는 혜림이에게서 몇 건의 문자메세지를 받았지만 이를 무시했다. 전화도 세 차례 왔지만 모두 무시했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연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중에 혜림이를 만났을 때 그녀가 이에 대해 추궁하자 자느라 전화 온줄 몰랐다고 거짓말을 했다.」
이는 나쁜 거짓말의 예이다. 인건이는 분명히 혜림이 몰래 지선이와 데이트를 했으며,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하지 않고 알리바이를 만들어내 혜림이를 속였다. 누가 봐도 인건이가 잘못한 상황이고 혜림이만 불쌍해졌다. 그렇다면 과연 나쁜 거짓말은 ‘언제나’ 용납될 수 없는가?
위의 사례에 약간의 상황을 덧붙여보자.
「인건이는 영화를 매우 좋아한다. 혜림이와 사귀기전에는 여러 여자친구들과 데이트하며 영화 보기를 즐겼지만 혜림이와 사귄 뒤로는 영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혜림이 때문에 꼭 보고 싶은데 놓친 영화들이 부지기수다. 아 오늘 또 저 영화 개봉했어. <도쿄타워>. 인건이는 영화를 보고 싶어한다. 무지. 하지만 혜림이는 별로 내켜하지 않는다. 아니 도대체 그럼 내가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이 영화가 비디오로 출시될 때까지 기다려야한단 말야? 너무 억울하다. 그래서 인건이는 ‘너무나 영화가 보고 싶어서’ 혜림이 몰래 지선이를 만나 영화를 봤다. 꼭 지선이가 아니어도 되지만 기왕이면 더 마음이 가는 사람과 함께 보는 것이 낫지 않은가? 그런데 혜림이가 영화보는 중간에 전화를 했다. 마음이 찔렸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혜림이에게는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나는 나쁜 의도로 그런 게 아니란 말이다. 남들이 보면 나보고 못됐다고 하겠지만」
좀전의 상황에 약간의 상황을 더 추가했다. 어떤가? 분명 위에서 이 상황을 나쁜 거짓말 이라고 했지만 인건이의 변론을 듣고 보니 나쁜 의도로 그랬다고 몰아붙이기엔 인건이가 불쌍하지 않은가? 앞에서 거짓말을 나쁜 거짓말과 좋은 거짓말 두가지로 나눠봤지만 거짓말을 좀더 세분화 시킬 필요가 있다.
나쁜 거짓말에는 남을 속여서 자신의 이득을 챙기고 타인에게 정신적, 물질적 피해를 줄 수 있는 거짓말이 있는 반면, 남을 속이고 자신의 이득을 챙기고 또 알려질 경우 타인에게 정신적, 물질적 피해를 줄 수도 있지만 드러나지 않을 경우 피해를 주지 않을 수도 있는 거짓말. 이렇게 두 가지로 나눠봐야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집을 계약했다가 중복계약으로 사기를 당해 지금껏 모은 모든 돈을 날려버린 경우는 나쁜 거짓말의 전자에 속하고, 위의 사례는 후자에 속한다. 계약사기는 드러나지 않을 수가 없는 명백히 타인에게 나쁜 결과를 초래하는 범죄이고, 후자의 경우는 드러나지 않을 수고 있는 경우이다. 나는 후자의 거짓말이 나쁘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두 번째, 좋은 의도의 거짓말
자 이제 두 번째 좋은 의도의 거짓말을 한번 살펴보자. 흔히 말해 ‘선의의 거짓말’이라고도 부른다. 영화 속 장면에서 알렉스가 엄마를 살리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이제는 나오지 않는 동독제품을 만들어내고, 통일사실을 숨기기 위해 라디오 안테나를 부러뜨리고 고장났다고 하는 장면, 창문 밖 고층 빌딩에 걸린 맥도날드 간판을 보고 놀란 엄마를 위해 맥도날드는 50년대에 동독에 처음 만들어낸 것이라고 가짜 뉴스를 제작하는 장면 등 알렉스의 거짓말은 엄청나다. 이 많은 거짓말들이 모두 정당화 될 수 있는가?
「사냥꾼이 토끼를 잡으려고 하는데 토끼가 얼른 도망쳐 어느 오두막집으로 들어가 사정을 했다. 한번만 숨겨주면 절대로 은혜를 잊지 않겠노라고. 사냥꾼이 오두막에 도달해서 물었다. “혹시 이쪽으로 지나가는 토끼 봤소?” “네. 저쪽 방향으로 재빠르게 도망치던걸요.” “아 예. 감사합니다.” 사냥꾼은 오두막 주인이 잘못 알려준 방향으로 달려갔다. 토끼는 오두막 주인에게 감사하단 인사를 전하고 다른 방향으로 도주했다.」
전형적인 선의의 거짓말의 사례이다. 토끼를 살리기 위해 오두막 주인은 사냥꾼에게 거짓말을 했다. 만일 사실을 그대로 말했더라면 토끼는 여지 없이 잡혀 구이가 됐을 것이다. 누가 봐도 이 오두막 주인의 행동은 칭찬받을 만하다. 단 한번의 거짓말로 토끼의 목숨을 살렸으니 말이다.
알렉스도 영화 속에서 셀 수도 없을 만치 많은 거짓말을 했지만 이는 모두 엄마를 살리기 위해서였다. 엄마는 결국 죽는 순간까지도 통일사실을 몰랐지만 그것은 엄마가 마음편히 세상을 하직할 수 있게 하기 위한 알렉스의 ‘배려’였다. 수많은 거짓말들을 애써 하지 않고 엄마가 깨어난 순간 “엄마 동독이 서독에 흡수통일됐어요.” 라고 말했다간 엄마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을 터. 알렉스의 효성이 대단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선의의 거짓말은 언제나 정당한가?
만일 칸트가 이 사태에 대해 코멘트를 한다면 어땠을까? 칸트는 <거짓말할 권리>라는 글에서 위의 예와 비슷한 경우를 예로 들고 있다. 한 친구가 내 집에 숨었고, 살인강도가 나타나 나에게 친구의 행방을 묻는다. 이는 위의 사례보다 더 독한 경우다. 위에서는 사냥꾼을 피해 도망온 토끼를 구해준 경우이지만, 칸트의 예는 살인범에게 친구를 내주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트는 거짓말할 권리는 어떤 경우에도 허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즉 그에게 있어서 불가피한 상황에서 진실을 말하는 것은 그로 말미암아 생겨날지 모르는 많은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에게 요구되는 형식적 의무이다. 그에 의하면, 허위 진술은 “내가, 나에게 부당하게 말하도록 강요하는, 그에게 잘못을 행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 이것은 인류 일반에게 행해진 하나의 잘못(ein Unrecht)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어떤 구체적인 상황 하에서 행해진 거짓말의 문제가 그 상황 속에 있는 개인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은 인류 전체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음을 칸트가 주장한다는 사실이다. 지금 우리가 알기 원하는 문제는 한 인간이 구체적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 허용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문제에 대한 칸트의 대답은 ‘거짓말할 권리가 보편적 원칙으로 성립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거나 ‘진실에의 의무가 예외를 가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위의 예에서, 거짓말을 하든 하지 않든, 발생하는 결과는 우연적이라고 생각한다. 칸트는 당신이 거짓말을 함으로써 당신의 친구가 살인강도에게 희생되는 경우와 진실을 말했음에도 그 친구가 그 살인강도에게 희생되지 않을 수 있는 경우를 생각해 본다. 그리고 당신이 거짓말을 했을 경우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당신에게 있다고 말한다. 또 당신이 엄격하게 진실했다면 공적인 정의의 차원에서 예견되지 못한 결과가 있었다 할지라도 당신에게 잘못이 없다고 말한다. 요컨대, 칸트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진실을 말하든 결과가 좋거나 나쁜 것은 우연적이라는 것이며, 그 우연적인 결과를 예상하여 원칙을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칸트의 입장에서 보자면, 진실하지 않을 권리란 것은 우연적인 것에 불과한 결과를 미리 예상하여야만 성립될 수 있는 것으로 원칙으로서의 자격을 가지지 못한다.”(「칸트 윤리학에 있어 거짓말 문제」, 김종식)
선의의 거짓말은 누군가의 생명을 살리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거짓말의 대상이 되는 상대에게 결과적으로 해를 끼치지 않는, 되려 이득을 전달해주는 결과를 얻기 때문에 거짓말을 한다고 하여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나 역시 이에 동감하는 바이다. 하지만 칸트의 의견에도 일리는 있다. 내가 주어진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함으로서 생기는 결과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는 일이다. 이는 순전히 우연적인 것이다. 내가 거짓말을 하는 길을 택했다고 해서 타인이 이로인해 이득을 보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득을 보게 되리라는 생각은 순전히 나의 머리 속에서, 아직 발생하지 않은, 사건에 대한 추측일 뿐이다. 거짓말을 했고 결과가 나빴다면 이는 나의 양심을 속인 첫 번째 잘못과 나의 잘못된 선택에 대해 타인이 입은 해까지 포함해 두 개의 잘못을 범하게 되는 꼴이 된다. 그러므로 선의의 거짓말이 언제나 정당화 되는 것은 아니며 단지 그것은 나의 의도의 문제일 뿐 ‘선의의 결과’까지 담보하는 것은 아니기에 언제나 옳다고 말할수도 없다. 따라서 칸트에 의하면 <굿바이 레닌> 속에서 알렉스의 선의의 거짓말은 순전히 그 혼자만의 자신의 거짓말에 대한 낙관에서 비롯된 행위일뿐 그렇다고 해서 - 물론 영화 속에서는 그 거짓말로 인해 엄마가 기분좋게(?) 돌아가셨지만 - ‘반드시’ 선의의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므로 잘못이다.
거짓말을 학생들을 대상으로 교육 할 때는 거짓말에 대한 다양한 상황을 주어준 뒤 각자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행동은 어떤 것인지를 말해보도록하고 서로 다르게 생각하는 부분에 대해서 토론을 진행해보는 것이 좋을 듯 싶다. 내가 생각한 행동과 남이 생각한 행동의 차이와 각각의 행동이 불러올 결과까지 이야기를 하다보면 거짓말에 대한 생각이 기존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고 나아가 생각의 넓이와 범위가 확장되고 또한 깊어지리라 생각한다.
* 이 글에 들어간 필자의 관점은 논의를 활발히 하기 위해 본래의 제 생각보다 극단으로 약간 치우친 경향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