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고싶었다. 눈물 질질 짜는 뻔한 신파극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보고 싶었다. 뻔한 이야기 속에서 감동을 느끼고 싶었다. 나는 봤고, 감동했고, 눈물 흘렸다.
지난주부턴가 다른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갔다가 벽에 붙어있는 커다란 포스터를 통해 이 영화의 존재를 알게 됐다. 황정민과 전도연의 주연. 박진표 감독의 작품. 박진표 감독은 사실 잘 모른다. 여러 유망한 감독들의 참여했다고 하는 <여섯개의 시선> 이라는 영화에 참여했다는 사실 이외에는 아는 바가 없다. 감독은 제쳐두고라도 나는 황정민을 보고 싶었다. 전도연은 사실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나쁘지도 않다. 황정민은 사실 톱스타는 아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연기가 좋다. 황정민에게는 연기를 향한 열정과 진심이 느껴진다.
에이즈에 감염된 여성과의 성관계라는 소재로 인해 일찌감치 '18세 이상' 등급을 받고 장면때문이 아니라 소재 때문에 결정된 것이기에 감독도 이의제기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18세 이상' 이라는 말에 야한 장면들이 좀 있나보다 하고 예상하고 영화를 봤고, 야하다면 야할 수도 있는, 하지만 아름다운 장면들이 많이 나왔다.
영화 상영전 "실화를 바탕으로 쓰여졌습니다" 라는 글귀로 인해 어쩌면 이 영화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좀더 진지해졌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중에 그 감동이 배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언제나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영화는 쉽게 감정이입되고 감동과 눈물이 두배가 되기 마련이다. 함께 세상을 살아가는 누군가가 그의 삶 속에서 경험한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 나의 친구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허구는 허구로서 끝나지만 실화는 그 가능성을 현실속에 배태하고 있다는 점에서 쉽게 동의를 얻고 공감을 얻는다.
2002년 6월 8일자 굿데이의 기사에는 영화 속 줄거리가 고스란히 딱딱한 문체로 옮겨져있었다.
[그녀의 에이즈마저 사랑했다... 40대 순애보] "그 여자가 돌아오면 받아들이고 보호해주겠다"

* 석중이는 그녀를 본 순간 정말 말 그대로 "첫눈에 반해버렸다." 화면 저 편에는 영화 <봄날은 간다>의 포스터가 붙어있다. 이제 "사랑은 변한다"라는 진리를 설파한 대표작으로 불리우는 저 영화는 두 사람의 첫 마주침의 배경으로 자리하며 또다른 의미를 던져주고 있다.
영화 속 석중이는 목장에서 소를 기른다. 차근차근 모아온 돈이 이제 통장 5개가 되는 알부자다. 어느날 서울에서 갓 내려온 다방 아가씨 은하를 보게 되었고, 첫눈에 반해버렸다. 그녀는 차 배달도 나가고 남자들과 술도 마시며 티켓을 끊기도 한다. 그래도 좋다. 석중이는 자신이 직접 짠 우유와 장미꽃, 편지를 그녀의 집 앞에 놓아두며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다. 그녀는 우유를 가져다가 다 버린다.
"은하씨 사랑해요."
"아저씨, 달랑 사랑만 갖고 사랑이 되는 줄 아세요?"
"사랑이 뭐 그리 복잡해요? 그냥 사랑하면 되지."
둘은 자동차 극장에서 영화 <봄날은 간다>를 본다. 사랑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석중과 사랑은 다 변한다는 은하. 그래.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 석중은 옳았다. 그는 그녀가 많은 남자들과 성매매를 했다는 사실을 알고도, 그녀의 과거 남자가 찾아와 돈을 요구했을 때도, 그녀가 에이즈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그녀가 달랑 편지 하나 남기고 서울로 떠나 직업여성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그리고 그녀가 감옥에 들어가 징역을 살고 있을 때도, 석중은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를 본 순간부터 끝까지 그는 그녀를 사랑했다. 세상에 이런 사람이 어디 있을까 싶을 정도로.

* 그의 아지트. 벚꽃 떨어지는 이 장면은 두 사람의 사랑을 아름답게 표현해주고 있었다. 유치하게 '나잡아봐라' 놀이를 하며 그들은 행복을, 사랑을 만끽하고 있다.
그녀는 그의 진심어린 마음을 받아주었고 결혼했으며 잠깐이었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품 속에서 그리고 그의 가족들과 함께 인간다운 삶을 살아봤다. 그리고 행복했다. 행복이란 이런 것이구나. 파란만장했던 그녀의 지난 과거를 다 묻어준 그들과 함께 그녀는 진심으로 행복했다.

*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 떠난 그녀를 찾아다니다 초췌해진 그의 모습. 이런 그의 모습은 언론의 흥미거리로 둔갑했다.
두 사람은 그 누구보다 행복한 삶을 살았고, 그 누구보다 서로를 사랑했다. 가족고, 친구도, 친척도, 에이즈도, 세상의 비난과 멸시도 둘을 막진 못했다. 정말 사랑은 모든 것을 초월했고 영원했다. 영화 <봄날은 간다>는 "사랑은 변한다"는 진리(?)를 우리에게 느끼게 해주었지만, 그들에게 사랑은 변하지 않았다. 영원했다.
아름답고 슬픈 사연을 보면서 그 누가 울지 않을 수 있으랴. 영화나 드라마를 보며 감동을 잘 하고, 눈물을 잘 흘리는 나는 역시 울지 않으려 했지만 마지막에 힘들게 두 사람이 만나며 서로를 원하는 모습을 보며 눈물 뚝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훌쩍훌쩍. 극장 여기저기서 많은 사람들이 훌쩍이며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고, 영화관을 나서서도 난 내 눈에 눈물 흘린 흔적이 있을까봐 애써 태연한 척 하려 했다. 함께 본 약속녀도 눈물을 흘렸다.
"울었죠?" 라고 물었지만 난 "아니!" 라고 말했다. 그러나 알고 있다. 둘다 눈물 질질 짰다는 사실을.
황정민과 전도연이 아니었다면 이만큼 아름답고 슬픈 사랑을 연출해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아주 적절한 캐스팅이었고, 두 사람은 매우 빛났다. 그 밖의 다른 조연배우들도 매우 좋았다. 역시 황정민이다. 순박하고 푸근한 시골 농촌 총각의 냄새를 풍기기 위해 15킬로그램을 찌우고, 나중에 그녀를 찾아나서며 피폐해진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 다시 15킬로그램을 뺐다고 하니 대단하다. 남들은 있는 살 빼려고 해도 못빼는 통에 15킬로그램씩이나 왔다갔다 자유자재로 움직이다니. 물론 거기엔 보이지 않는 대단한 노력이 있었겠지만. 매우 만족스러운 영화.
* 뱀다리 : 실제 이 영화의 모델이 되었던 그 사람들이 이 영화를 봤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아마도 봤겠지. 자신들의 이야기인데.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함께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을까. 문득 이런 생각을 해봤다. 불과 몇년 전의 이야기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