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 추석의 영화축제다. 나가서 영화보고, 안에서 영화보고, 종일 영화만 보고 있다. 좀 나가서 놀아라. 놀아. 사람들도 좀 만나고. 그래도 방바닥에 홀로 쭈그리고 앉아 벽긁고 있지 않은게 어디랴. 스스로 위안을 삼아보자.
어제 성묘를 갔다와서 잠깐 쉬고 바로 또 구로 CGV로 나갔다. 1호선 구로역에서 내리면 되는데 바보같이 난 7호선을 타고서 갔다가 2호선으로 갈아타고 다시 1호선으로 갈아타며 40분 넘게 걸려 도착했다. 이런 ㅂ보팅이. 처음부터 1호선 타고 가면 금방가는걸.
최근 영화 <외출> <형사>를 봤고, <신데렐라맨>까지 최근 개봉작 세편을 벌써 보는 셈이다. 어제 본 이 영화는 내 돈주고 보진 않았다. 영화를 쏜다는 그녀(그냥 친구임)의 말에 입이 쩍 벌어지고 아니 왜 그러니, 추석 보너스 많이 받았니, 질문을 던지며 좋아라 하는 나. 아이스크림도 사줬다. 므흐흣.
이 친구는 아침에 자기 동생과 함께 여기에 와서 이 영화를 보고는 놀다가 저녁에 다시 또 이 영화를 봤다. 너무 감동적이라 다시 한번 보고 싶었다나? 흠. 난 영화관에서 똑같은 돈 주고 봤던 영화 보는 건 못하는데 이 친구는 자신의 감동을 다시 한번 되살리기 위해서라면 그날 본 영화를 또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아주 오랜 일이지만 내가 같은 영화를 또 본 것은 <뮬란>이 유일하다. 대학 1학년 때였나. 유니텔을 하다가 벙개를 했는데 함께 만난 여자가 <뮬란>을 보자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전에 봤지만 그 영화를 볼 수 밖에 없었다. 봤던 거 또 보니깐 웃기는 대목에서도 이제 웃기지 않고, 억지로 웃었던 기억이 가물가물 난다. 그 여자 하고는 영화만 보고 헤어졌고 이후로 연락하지 않았다. 영화때문은 아니었고 그냥 맘에 들지 않아서.
영화야기하자. 자꾸 주변 잡소리 하지말고.

* 그는 한 가난한 가정의 세 아이의 다정하고 자랑스러운 아버지다. 그에게 승리를 안겨준 힘은 그의 인터뷰대로 '우유' 였다.

* 브래독의 아내. 영화 속에서 브래독 못지 않게 감동을 선사해주었던 정말 모든 어머니의 이상적 모델. 남편에게는 힘을, 아이들에겐 사랑을.
최근 영화를 볼 때마다 자꾸 르네 젤위거를 보게 된다. 이 배우 영화 참 많이 찍었지만 어째 내가 최근 보게 되는 영화마다 당신이 자꾸만 나오는게야. 남자배우는 러셀크로우. <글레디에이터>를 통해 확실하게 나의 머리 속에 그의 얼굴과 이름을 각인시켰던 그 배우. 남성미 넘치는 강한 근육과 낮게 깔린 짧고 강한 톤의 목소리. 하지만 <글레디에이터>의 그는 어디로 가고 왠 깡마른 멜깁슨이 여기에 있다냐. 개인적으로 <신데렐라맨>에 나오는 그의 모습보다는 <글레디에이터>의 그가 더 마음에 든다. 이 영화를 위해 살을 20킬로그램 쯤 쫙 뺐다고 하는데 살을 빼니 완전 '멜깁슨'이다.
<신데렐라맨>은 권투영화다. 그리고 실화를 바탕으로 썼다. 1920-30년대의 미국의 대공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권투영화이고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말을 듣고 난 이 영화가 아닌 다른 영화가 먼저 떠올랐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 이 영화도 나이 많은 늙은 여자 복서의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두 영화 모두 늙은 복서가 인간승리를 이룬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경기중 상대방의 반칙으로 전신마비상태, 식물인간으로 생을 유지하다 안락사로 마감했다는 점에서 슬펐고, <신데렐라맨>은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꼭 주인공이 죽을 듯한 분위기를 풍기다가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는 바람에 그 승리의 쾌감이 더 했다. 한쪽이 불행한 영화다, 한쪽이 행복한 영화다 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그녀 또한 늙은 나이에 시작한 복싱에서 삶의 의욕, 삶의 쾌감을 맛봤고, 그의 늙은 코치와의 진한 우정을 간직한 채 행복하게 죽어갔다.
이렇게 인간적인 사람들이 있을까 싶을 정도의 영화, <신데렐라맨>으로 돌아오자. 한때 아마추어 복서에서 프로 복서로 데뷔하며 연전연승을 거두었던 '불독' 제임스 브래독. 하지만 잦은 부상으로 연패를 거듭하며 링 위에서 잊혀지고, 마주서서 싸우지 않는 통에 복싱협회로부터 선수자격 박탈 이라는 수모까지 당하게 된다. 이후 전기, 수도 다 끊기고, 매일같이 굶고 있는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 막노동에 나서지만 벌이가 시원치 않다. 결국 할 수 없이 아내는 브래독이 없는 사이 아이들을 친척에게 보내고, 브래독은 아이들을 되찾아오기 위해 복싱협회로 가서 구걸을 하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정부보조지원금까지 타내고 아이들을 데려온 그. 이전의 매니저 조로부터 들어온 제안. 돈을 벌 기회다. 그리고 다시 재기할 기회를 맞이했다.

* 브래독의 세컨드, 조. 겉으로는 뽀대나는 차림으로 대공황에 끄덕없는 체하지만, 실제 그의 집엔 아무 것도 없었다. 다 팔아먹은 돈으로 그는 브래독의 재기를 위해 쏟아부었다. 신의로 똘똘 뭉친 두 사내. 조와 브래독.

* '우유'를 위해 재기전을 펼치고 있는 브래독.
그는 당연히 질것이라 예상되었던 경기에서 연전연승을 이어가며 퇴물복서의 호칭 대신 '불독' '신데렐라맨'이라는 호칭을 받게 된다. 관객들의 환호. 그들은 대공황 속에서 희망을 발견했다. 아 죽어가는 집안의 가장이 링 위에서 펼친 경기로 그들의 가슴속에 희망을 불어넣어주었다. 마지막 챔피언 결정전을 앞둔 상황. 그의 상대는 이미 도전자 둘을 죽음에 이르게 한 무자비한 복서 맥스 베어. 영화 분위기가 어째 심상찮다. 마치 그가 죽을 것만 같은 분위기. 모두가 그에게 인사를 하고, 그의 안전을 걱정한다. 하지만 이건 반전을 위한 속임수였다. 영화 시작과 동시에 비춰줬던 무덤, 그리고 사람들과의 작별인사는 영화적 장치. 당연히 그는 대공황으로 힘들어 하는 국민들의 희망으로 성공적 승리를 거둔다.

* 마지막으로 막스 베어와의 힘겨운 경기를 마치고 끝내 관객들에게 승리를 안겨준 브래독과 그를 둘러싼 수많은 관중들.
브래독의 승리는 개인적으로는 '우유'를 위한 것이었으며, 뜻하지 않게 국민적 희망으로 불리우며 대공황에 허덕이는 모든 국민들에게 '희망'을 안겨주었다. 가난한 가정의 한 남편, 한 아버지로서의 작은 승리이자 국민 모두의 승리였다. 스포츠는 이렇게 전 국민적인 화제를 몰고다니며 희망을 안겨준다. 물론 정치적인 음모와 모략을 숨기기 위해 스포츠를 활용하기도 한다. 브래독의 작은 승리를 어쩌면 정부와 언론은 이를 이용하여 국민에게 희망을 불어넣어주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정권 재창출을 노렸는지도. 하지만 어쨌든 변치 않는 사실은, 세 아이의 아버지인 늙은 복서가 극적으로 재기에 성공하며 그들에게 '우유'를 안겨주었다는 사실이다. 신데렐라 브래독은 밤 12시가 넘은 시각에도 여전히 신데렐라였다.
영화가 끝나고 해설에 의하면 그는 2년뒤 다른 선수에게 챔피언 자리를 빼앗겼으며, 2차대전에 참전했고, 부두가에 사업체를 벌였으며, 다리를 건설하는데에도 참여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