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이전부터 화제가 되었던 영화. 박찬욱 감독의 복수극 마지막 작품인 <친절한 금자씨>가 '이영애'라는 우리나라 최고의 여배우를 통해 개봉전부터 여론몰이를 했듯, 허진호 감독의 <외출>은 일본에서 제일 잘나가는 욘사마(배용준)와 손예진이라는 두 배우를 통해 개봉전부터 확실히 눈도장을 찍어놨다. 국내 개봉 후 영화의 흥행성적과 상관없이 일본에서는 '욘사마'만으로도 흥행을 거둘 것으로 보인다.
국내 개봉한지 며칠 지나지 않은 지금. 많은 이들이 <외출>에 대해서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로 아름다운 영상과 유머를 보여주었던 이명세 감독의 후속작 <형사>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고, <외출>도 이를 뒤이을 것으로 보인다. 내가 좋아하는 감독, 박찬욱, 이명세, 허진호가 모두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안타까울 뿐이다.
<친절한 금자씨>는 너무나 부자연스럽도록 짜맞춘 듯한 줄거리와 대중성의 부재로 인해 관객으로부터 외면을 받았고, <형사>는 러닝타임이 긴 뮤직비디오일뿐 이라는 평가를 내릴 수 밖에 없었다. <외출>은 너무나 잔잔하고 지루한 영화라는 정도가 아마도 많은 이들의 소감이라 생각된다.
일찍이 <8월의 크리스마스>로 성공적인 데뷔를 시작했고, 이어서 내놓은 수작 <봄날은 간다>로 관객들의 가슴을 오래도록 시리게 한 허진호 감독. 나 역시 <8월의 크리스마스>로 그를 주목했고, <봄날은 간다>로 확실히 그의 팬이 되었다. 심지어 나는 집구석에 디비디 플레이어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 생애 최고의 영화로 <봄날은 간다>를 뽑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사놓고 한번도 보지 않은 디비디를 소장하고 있기까지 하다. <봄날은 간다>를 봤던 그 날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그때는 겨울이었다. 어둠이 짙게 깔린 종로 바닥. 아는 한 여자후배(별 사이 아녔음)와 이 영화를 보고 나오는 걸음이 너무나 무거웠다. 함께 걸었지만 한참 동안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속으론 울고 있었고, 한편으론 유지태의 캐릭터에 감정이입되어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그리고 몇날며칠을 그렇게 보냈다.
"어떻게 사랑이 변할 수 있니?" 라는 이영애를 향한 유지태의 그 말. 당시 나에겐 너무나 충격이었다. 사랑도 변한다. 변한다고. 사랑이 변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건 나의 소망일 뿐. 현실에서 사랑은 변한다. 다만 나는 그 사랑이 변하지 않길 바랄뿐. 시련의 상처를 받은지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유지태의 저 의문형의 소리없는 절규는 나의 가슴에 와 못을 박았다.
시간이 한참 흘러 난 허진호 감독이 만들었다는 말만 믿고 이 영화를 봤다. 배용준과 손예진이 아닌 '허진호'라는 사람때문에. 그리고 그닥 큰 만족감을 안겨주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만족스럽다. 잔잔하고 지루하지만 깊이가 있는 영화였다. 함께 영화를 본 이는 그냥 그랬다고 하지만, 허진호 감독은 나를 배반하지 않았다. <외출>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 어떤 이는 별 다섯개를 다 주며 극찬을 하지만 어떤 이는 영화보는 도중에 나가버린다. 내가 이 영화를 봤을 때 영화에 대한 실망감과 지루함을 견디지 못한 커플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 나갔다. 그리고 이건 내가 영화를 봤을 때의 그 시간, 그 장소에서만 벌어진 일이 아님을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이 영화를 봤던 다른 이로부터 듣고 알았다. 그래. 실망할만도 하다. 배용준과 손예진 씩이나 나왔고, <봄날은 간다>를 만들었던 허진호 감독이 아니었던가. 그렇게 홍보를 해대고 사람들의 뇌리속에 팍팍 꽂혀 반드시 봐야 할 영화 목록에 올려놨던 그것이 아닌가. 그러니 큰 기대를 한 만큼 실망도 큰 법이다. 이해는 된다. 그리고 이미 영화를 본 나도 이 영화가 흥행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다.

* 두 사람은 해변을 거닐며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폰카도 찍는다.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외도. 그리고 교통사고. 강원도의 어느 작은 병원에서 만난 한 남자와 한 여자. 영화를 그렇게 시작한다. 배우자의 교통사고가 가져온 커다란 충격, 당혹감은 이내 사실확인 후의 분노로 변질되고, 체념, 반복되는 일상의 지루함으로 연결된다. 병원에서의 만남에 이어, 약국에서의 만남, 모텔에서의 만남, 커피숍에서의 만남, 피해자 장례식으로의 함께함, 전혀 모르던 한 남자와 한 여자는 이렇게 잦은 만남을 갖으며, 서로가 가진 충격과 아픔을 달래기 위해 이야기를 나누고 가까워진다.
"깨어나면 어떻게 하실거에요?"
"복수하려고요" (피식)
배우자의 사고로 인한 슬픔은 분노와 아픔으로 변해가고, 서로 대화를 나누며 이런 농담을 주고받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농담이 아닌 진담이 되어버린다. 정말 그둘이 사귐으로해서 병실에 누워 깨어나지 못하는 두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복수를 한 셈이다. 복수는 상대가 확실히 인지하게 될 때 그 진정성이 드러나는 법이지만, 누워있는 이들이 볼 수 없는 걸 어찌하랴. 애초 두 사람은 복수를 하려고 사귄건 아니었다. 하지만 사귀게 됨으로써 일종의 복수가 되어버렸다. 복수 아닌 복수가.
"우리 지금부터 뭐할까요?"
"뭐하고 싶으세요?"
이내 장면은 두 사람의 손을 붙잡고 조심스럽게 어딘가로 걸어가며, 카메라는 H.O.T.E.L. 이라고 쓰여진 건물의 간판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내 호텔방. 두 사람은 서로를 탐닉한다.


여자의 남자는 죽고, 남자의 여자는 살았다. 남자는 깨어난 여자에게 말한다.
"그 사람 죽었어..."
여자는 흐느낀다. 크게 운다. 남자는 병실문을 닫고 조용히 나온다.
남자는 이미 죽은 남자의 여자와 사랑에 빠졌지만, 난 이 남자가 불쌍했다. 오랜시간 곁에서 지켜주며 살아나길 기도해준 그에게 깨어난 여자는 이미 죽은 남자를 향한 울부짖음으로 그를 다시 고통스럽게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깨어난 여자가 '최근' 사랑했던 남자는 '이미 죽은' 그 남자였으므로. 또 남자는 누워있던 그녀가 아닌 다른 여자를 사랑하므로. 그것이 사랑이다 아니다 말할 수는 없다. 육체적인 탐닉으로 시작했지만 둘은 분명 사랑했다. 자신의 남자를 잃고 난 여자는 사랑하는 남자가 깨어난 여자 곁에 머물자 슬피 운다. 하지만 남자도 둘 사이에서 괴로워하며 슬피 운다.
내 사람이 다른 사랑에 빠진다...
신뢰했지만 배신 당하고 그로 인한 당혹감과 분노로 마음이 망가진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랑을 시작하면서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사랑은 아이러니다.
* 일부러 두 주인공의 이름을 쓰지 않았고, 남자와 여자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누워있는 한 여자와 그의 남편, 누워있는 한 남자와 그의 아내, 이렇게 영화 속엔 네 명의 남녀가 등장한다. 난 그들 각각을 지칭할 때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대명사'를 사용함으로써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랬다. 영화감상이 남자와 여자라는 호칭으로 인해 누굴 지칭하는지 모를 정도로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영화를 본 사람은 알고 안 본 사람은 누구를 지칭하는지 모를지도 모르겠다. 이런 불편함을 감수해주시길 읽는 이에게 부탁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