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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시골의사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
프란츠 카프카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평점 :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던 카프카. 하지만 내가 그를 접한 것은 지금에와서다. 그의 이름을 들었을 적이 고등학교 때였음에 비한다면 늦어도 한참 늦은 것이다. 대개 실존주의 문학가의 계열에 이름을 올리는 그는 알베르 까뮈, 사르트르 등과 함께 우울한 작가로 알려져있다. 그리고 실제 그의 소설 <변신>을 읽고 난 뒤의 느낌도 '우울허다' 이다. 그의 삶도 우울했고, 정신도 우울했고, 글도 우울했다.
언젠가부터라고 할 것 없이 티비 뉴스에, 아침 신문에, 함께 살던 가족을 죽이거나 유기하는 사례는 지겹게 보아왔다. 며칠전에는 버린 것은 아니었지만 재산이 약 60억가량 있는 할머니의 두 딸과 아들이 서로 치고박고 하는 통에 할머니가 비관자살한 기사를 볼 수 있었다. 건실하게 잘 큰 자녀들이 이제 자신의 재산을 가지고 다투고 있는 꼴이 못마땅했고 자기때문이라는 생각을 가졌던 것 같다. 처음엔 여타 자살과 같은 사례인줄 알았는데 경찰이 조사를 하다보니 이 할머니 재산이 60억인지라 타살의 가능성을 점쳐보고 조사에 착수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자살은 맞는데 못난 자녀들의 다툼때문이라고 하니 우울허다. IMF 이후로 가장의 실직이 눈에 두드러지고 빚더미에 앉은 가족 전체가 함께 자살하거나 아빠가 아내와 자식들을 모두 살해하고 자살한 사건들도 꽤 있었다. 장인 장모와 말다툼을 하다 그들을 살해한 사위의 이야기도 있었다. 종류도 가지가지고 셀 수도 없다.
그레고르는 <변신>에서 벌레로의 변신을 통해 가족과 자신의 일상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 이런 시도는 그가 지금껏 알고 있지 못한 것들을 깨닫게 해주는 계기가 된다. 너무나 익숙했기 때문에 알지 못했던 것들을.
어느날 아침, 영업사원인 그레고르 잠자는 거대한 벌레로 변해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일어나려고 하지만 넓고 딱딱한 등짝때문에 바둥바둥 거릴뿐 옆으로 움직일 수도 없다. 다리를 움직여봤지만 웬 짧고 가느다란 벌레 다리가 꿈틀할 뿐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그레고르는 회사에 가려고 애쓴다. 내가 회사에 제시간에 가지 못하면 분명 사장은 날 자르려고 할꺼야. 그래 그놈이라면 충분해. 난 우리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어서 일어나서 회사로 가야해. 자신의 몸이 벌레로 변한 상황에서조차 그는 오로지 회사 생각 뿐이다. 꿈틀거리며 기어서라고 나는 회사에 기필코 가야한다. 반드시 정상출근해 열심히 일한다음 벌어오는 돈으로 우리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한다. 가족들만이 나를 지켜줄 수 있어.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회사에 지각한 나를 추궁하기 위해 지배인이 왔고, 그가 나를 처음 봤다. 그는 놀래 도망갔고, 아버지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어머니는 놀래 식탁위로 올라가고, 동생도 놀라긴 마찬가지. 헉! 에그머니나! 이게 머래?! 벌레로 변신한 나를 반겨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내 방구석에 처박혀서 동생이 가져다주는 음식을 먹으며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 아빠, 엄마는 이런 동생을 대단하게 여긴다. 그때까지만 해도 동생은 하찮은 존재였는데. 그러나 먹을 것을 주는 것도 잠시. 이내 나는 천덕꾸러기가 되어버렸다. 내가 회사에 나가지 못하자 아빠는 은행 경비(?)로 취직을 했고, 엄마는 바느질을, 동생은 상점 점원으로 취직했다. 오로지 나만이 가족을 부양해야한다는 생각을 가졌던 기존의 사고가 깨어지는 순간! 이런! 회사에 출근하지 못하는 나 때문에 궁핍해지리라 예상했건만 오히려 가족들은 더욱 활기찬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결국 동생의 주도하에 나는 굶고 말라 비틀어져 죽어버리고 말았다. 가족은 모두 결근계를 작성하고 여행을 떠났다. 룰루. 랄라.
카프카에게 있어서 벌레되기란 어떤 의미인가? 이는 우리가 집에서 키우는 개나 아니면 우리와 생김새가 비슷한 원숭이, 침팬지로 변신하는 것과는 전혀 의미가 다르다. 흔히 벌레라고 하면 손으로 꾹꾹 눌러 죽여야 할 존재, 에프킬라 맛좀 봐야할 존재, 징그럽고 더러운 존재, 있어서는 안될 존재로 여겨진다. 나는 겁이 많아 벌레를 잘 못죽이나 대개의 사람들은 벌레의 죽음 앞에서 숙연함이나 불쌍함을 느끼지는 않는 듯 하다.
하지만 카프카에게 있어서 벌레란 하찮은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모습으로는 뚫기 어려운 벽의 비상구를 찾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내가 원한 것은 자유가 아니라 출구였다.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처한 나를 구원해줄 출구.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신한 것은 어쩌면 가족이라는 테두리 속에서 가족모두의 인생을 등에 짊어지고 가야할 내가 압박감에 못이겨 비상구를 찾고 싶어했던 것이고, 그것이 벌레란 존재로 드러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가족으로부터 소외를 당한 경험이 있는가? 나는 사실 없다. 그런 것을 느낀 적도 없다. 하지만 우리 아버지는 항상 느끼고 있을 것이다. 어머니와 동생은 아버지를 싫어한다. 그나마 나만이 아버지에 대해서 아무렇지 않다. 아버지는 지금 따로 나가서 계신다. 별거는 아니다. 그냥 이놈의 집구석이 갑갑할 뿐이다. 어디에 계신지도 모른다. 묻지 않았으니까. 아버지가 돈을 잘은 아니더라도 그럭저럭 벌어오실 때에는 그나마 나았다. 하지만 퇴직하고 퇴직금으로 주식해서 날리고, 재산이 눈에 띄게 줄어들고 이제 남은 것 하나 없는 이 시점에서 아버지는 소외당했다. 아무도 반겨주지 않는다. 비단 우리집의 문제만은 아닐 터이다. 대개의 가정들에서 아버지는 돈을 벌어오는 존재이고, 돈을 버는 기계로 취급당하기도 한다. 돈을 벌지 못하면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이용당하고 소모당하는 것이다. 그리곤 버려진다. 소외된다.
카프카의 그레고르는 가장은 아니었지만 실질적으로 돈을 벌어오는 가족의 중책을 맡았다는 점에서 우리네 가족의 가장와 다를바 없다. 그는 가족으로부터 이용당했고, 가족주의의 환상에 빠졌었으며, 쓸모가 다 한 뒤에 버림받았다. 카프카의 <변신>은 우리네 가족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