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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
알랭 드 보통 지음, 이강룡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지난 번에 읽었던 스위스의 젊은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의 <나는 너를 왜 사랑하는가>에 이어서 접한 그의 두번째 작품. (두번째란 의미는 순전히 내가 그를 접함에 있어서의 두번째. 그가 책을 낸 순서와는 상관이 없다)
이런식의 개그는 절대 식상하지만, 절대 보통 사람 같지 않은 알랭 드 보통 씨는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이라는 책을 통해서도 그만의 특유한 문체를 사용하며 독자를 즐겁게 해주고 있다.
최근 알랭 드 보통의 작품들이 새롭게 디자인되어 출판계를 강타하고 있다. <나는 너를 왜 사랑하는가>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여행의 기술>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 등 그의 책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고 있다. 마치 <다빈치 코드>가 대박을 터뜨리자 댄 브라운의 이전의 다른 작품들이 쏟아져나온 것처럼 말이다. 출판사 입장에서는 한번 대박 터뜨린거 그의 이름을 빌려 다 팔아보자는 속셈이겠지만 그걸 알면서도 나는 즐겁다. 이런 기회에 이 즐거운 작가를 접하게 되었으니 말야.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이라는 책의 원래 제목은 <KISS & TELL>로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유명한 인물과 맺었던 밀월 관계를 언론 인터뷰나 출판을 통해 대중에게 폭로하는 행위를 뜻한다고 한다. 그런데 어쩌다 그런 다소 딱딱하고 뉴스거리같은 책의 제목이 우리네 번역서에는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이라는 달콤한 언어로 표현이 되었던가? 그건 모를 일이다. 출판사만이 알일.
절대로 이 책에서는 우리가 키스하기 전에 무슨 말들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키스를 못해봐서 키스를 하려고 하는데 뭔 말을 해야할지 고민 중인 남녀나 남들이 키스하기 전에 무슨 말을 하는지 궁금해하는 분들은 이 책에서 손 떼시라. 아무리 찾아봐야 없으니깐. 키스는 말 없이 그냥 하면 되지 않남? ㅡㅡa 뭔 말이 필요햐?
파아란 깨끗한 하늘에 뭉게 구름 둥실둥실 떠있는 책의 표지와 완벽한 정사각형은 아닐지라도 다른 책들과는 확연히 다른 크기를 가진 이 책은 단번에 우리의 눈길을 끌기는 한다. 하지만 일부 책 수집가들에게는 이 책은 모양새가 튀는지라 다른 책들과 함께 공동체를 형성하여 같은 선상에 꽂아넣기는 애매한 책. 그래서 불만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제목이나 모양새나 이래저래 출판사가 독자들의 눈길을 좀 끌어볼라고 애쓰기는 무진장 애썼다.
근데 도대체 책 내용에 대해서는 언제 이야기하는거야? 너는 아직까지 서론적인 이야기만 하고 있잖아! 라고 짜증내지말길. 나는 원래 책 내용이야기보다는 딴 이야기를 잘 하니깐. 이게 내 감상문의 끝일지도 모르는거야.
읽은지는 꽤 시간이 흘렀는데 선뜻 감상문을 작성하기가 힘들었다. 어떤 이유에서일까? 일에 치여 시간이 부족했던 것도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읽은지 상당 시간이 흐른 뒤에서야 감상문을 작성하는 것은, 이 책에 대한 감상문을 함부로 서투르게 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말 재밌게 봤고, 뭐 대단한 내용이 들은건 아니지만, 아껴주고 싶은 책이다. 나중에 다시 보게 될지 어떨런지는 모르지만 모양새나 내용이나 너무나 마음에 들어 옆에 두고두고 간직하고픈 책이기에 함부로 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상당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나는 그냥 지 멋대로 감상문을 갈기고 있다.
외관에 대한 감상은 여기서 그만! 너는 너무 외모만을 보고 있잖니?
"훌륭한 삶을 쓴다는 것은 훌륭한 삶을 사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이다" 라는 나는 잘 알지못하는, 하지만 보통씨는 책에서 이 사람들 자주 언급하고 있는, 리튼 스트래치 라는 사람의 문구로 책은 뚜껑을 연다.
'시작하며, 어린시절, 가족관계, 음식과 이사벨, 기억, 사생활, 다른 이의 눈을 통해 본 세상, 남자와 여자, 심리, 결말을 찾아서, 끝내며, 옮긴이의 말'이라는 12개의 장으로 나뉘어져 있는 이 책은, 제목에서 보면 혹시 알랭 드 보통 자신의 자서전을 쓰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내용을 읽기 전에 제목에서 난 그런 느낌을 받았다.
어쨌든 내용이 보통씨의 자서전은 아니었지만, 일단 전기인 점에서나의 예상은 어느 정도 맞아떨어졌다. 단지 전기라고 함에도 불구하고 이걸 전기로 분류해야할지, 아니면 보통씨의 에세이로 분류해야할지, 아니면 소설로 해야할지 참 애매하다. 알라딘 서점에서는 이걸 '소설'로 분류하고 있고, 예스24에서도 역시 '소설'로 분류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볼 땐 차라리 소설보다는 '에세이'가 더 나을 듯 싶다. 전기와 소설과 에세이의 교집합 선상에 놓여있는 이 책은 사실상 작가 보통씨의 사색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사벨이라는 평범한 한 여자의, 그것도 나이들어 죽음에 임박한 할머니가 아닌, 힘 팔팔 넘치는 젊은 여성을 대상으로 전기라니! 우리들이 흔히 지니고 있는 전기에 대한 상식을 깨버린다. 우리들이 지금까지 읽어왔던 전기의 공통점은, "1. 죽은 인물이다 2.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또 다른 공통점이 뭐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잠깐 생각해봐도 이 두 가지 점에서는 벗어날 전기가 없다. 그런데 보통씨의 전기는 이걸 다 깼다. 왜 전기는 죽은 인물이어야하고, 위대한 업적을 남겨야 하느냐는 것이다. 평범한, 아직 인생을 다 살지 않은 사람들을 대상으로도 전기를 쓸 수 있다.
또 보통은 전기를 쓸 때에는 작가가 전기의 대상이 되는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보통은 새뮤얼 존슨의 말을 빌리기도 하고, 자신의 언어로 이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와 사회적 관계를 맺고 같이 먹고 마시며 더불어 살아보지 않았다면, 그 누구도 다른 이의 삶을 기술할 수는 없다."(새뮤얼 존슨, p45)
"진정한 전기가 되려면 저자와 주인공 사이에 어느 정도 정서적 관계가 있어야 한다." (p68)
"은유적으로 말해서 작가는 주인공과 잠자리를 같이 해야한다. 전기가 격식에 맞춰 작성된 회고록이나 학술 논문과 구분되기를 바란다면 말이다. 전기는 문자로 씌어질 수 없는 생각의 연쇄고리다. 침실의 불빛이 켜져 있는지 꺼져 있는지를 조사해본 다음에야 두 사람이 서로 아는 사이임을 알려주는 행위와는 다른 것이다."(p154)
대개의 전기작가들은 직업적인 전기작가들이고 따라서 여러편의 전기를 씀으로써 책을 내고 밥벌어먹고 살아야하는 이들이다. 그들은 한편의 전기를 쓰는데 있어서 전기의 대상이 되는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만한한 시간적 여유와 마음의 여유조차도 없다. 우리들이 접하는 전기는 그 인물의 작은 한 단면만을 보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전기가 되려면 그 인물과 먹고 마시고 자고 싸고 하면서 함께 생활에서 부대껴야하고 그 과정에서 그 인물의 세세한 부분까지 잡아낼 수 있어야한다. 그러려면 일단 인물이 죽은 뒤에 전기를 쓰는 것은 여기선 불가능하다.
보통씨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러한 상식을 쉽게 깨어버리고 이사벨이라는 여자와 함께 생활하며 그녀에 관한 이야기들을 풀어낸다. 아주 자연스럽게. 절대 인위적이기도 않고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대단했던 사건들만을 나열하지도 않는다. 처음 자위를 했던 이야기며, 남자와 관계를 맺었던 이야기며, 무슨 음식을 좋아하며 왜 좋아하는지와 같은 아주 시시콜콜하고 쓸데없어 보이는 이야기들까지도 보통은 늘어놓고 있다. 마치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전기다 라고 말하듯이.
그러면서도 알랭 드 보통은 전기를 쓰려고 마음먹은 것은 아니고, 이사벨과의 이야기를 통해서 자신이 생각한 것들을 중간중간 풀어놓는다. 그래서 이 책이 전기가 아닌 에세이로도 분류될 수 있는 것이다. 오히려 나는 그의 서술방식이 마음에 든다. 도대체 이게 소설이야, 에세이야, 전기야! 라고 짜증내지말고 기존의 형식을 과감히 파괴한-일부러 파괴한 것 같지는 않다- 보통씨의 이야기 서술방식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여보라. 너무나 사색을 깊이 한 나머지 독자들이 사색할 부분까지도 없애버리는 보통씨. 하지만 그가 깊게 사색한 것을 우리는 눈으로 살펴보며 우리의 머리 속에는 또다른 사색이 펼쳐지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사색은 또다른 사색을 낳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