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바다 - 풍림명작신서 17
헤밍웨이 / 풍림 / 1993년 1월
평점 :
절판


 


 

 

 

 

 

미국의 소설가. 자연주의적인, 또는 폭력적인 테마나 사건을 무감정의 냉혹한 자세로 불필요한 수식을 일체 빼버리고 신속하고 거친 묘사로 사실만을 쌓아 올리는 하드보일드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다. 1953년 퓰리처상을 받고 1954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헤밍웨이의 집 /

플로리다주 키웨스트에 있는 미국의 대표적인 하드보일드 문학가 헤밍웨이의 집.

 

 <노인과 바다>는 어니스트 헤밍웨이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고전 중의 고전으로 분류되어 각종 추천도서에 오르내리는 작품이며 이 책을 읽은 사람은 많지 않더라도 이 책의 이름이나 헤밍웨이를 모르는 이는 없다.

 내가 이 책을 구입한 것이 중학교 시절로 추정된다. 나는 책을 구입하면 구입한 날짜를 적어두는 습관이 있는데 그것은 내가 본격적으로 책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면서였고,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책을 읽지 않는 학생이었기 때문에 가끔 구입한다고 하더라도 날짜나 이름을 적지는 않았다. 이 책엔 아무런 기록이 없는 걸로 봐서 내가 중고등학생이었을 때 구입한 것이고, 책의 출판년도가 1992년 판본인 것으로 추정, 중학교 시절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1992년은 내가 초등학생일 때지만 초등학교 땐 책을 사질 않았다. 따라서 그 후 몇년후인 중학교로 추정하는 것이다.

 어찌되었건 이 책은 내가 구입한지 10년이 넘은 지금에야 나의 손에 다시 들어왔다. 집에 켜켜히 쌓아둔 보지 않은 여러 책들 중에 한권으로 묻혀 지내다 이제야 나의 손길을 받게 된 것이다.
 
 읽었던 기억은 난다. 하지만 읽다 만 것으로 생각된다. 꼬마아이가 등장하는 앞의 몇 장면들이 눈에 선하지만 바다위의 전투는 내 기억에 없기 때문이다. 다소 지루한 면이 있고 생동감이 떨어지는 이 책이 어린 학생의 눈에 쉽게 들어올리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수면제쯤으로 생각되었겠지. 사르트르의 <구토>를 읽듯이.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로 인해 1953년에 퓰리처상을, 1954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았다고 한다. 1899년 7월 21일에 태어나 1961년 7월 2일에 생을 마감하다. 62세의 삶을 살았으니 당시로는 살만큼 산 것으로 생각되지만 그는 자살로서 목숨을 끊었다. 늙어 죽은 것이 아니라 엽총으로 자신을 쏨으로써 죽었다. 그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엽총으로 자살한 것으로 그것도 '추정'될 뿐이다.

 낚시와 스포츠를 좋아하는 의사인 아버지와 음악을 좋아하고 종교심이 있는 어머니를 두었던 그는 아마도 예나 지금이나 사회의 존경을 받으며 부유한 삶 또한 누릴 수 있는 의사라는 직업을 둔 아버지 밑에서 자라며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지 않았을까 싶다.

 경제적 풍요로움은 항상 문화적 풍요로 직결되지는 않지만 문화적 풍요를 누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준다. 헤밍웨이가 대학을 가지 않고도 기자로  활동한 것이나 소설가로서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이런 여유로움이 어느 정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물론 노벨문학상을 받기까지는 그의 타고난 혹은 끊임없는 노력에 의한 글발이 주요 요소였겠지만 말이다.
 
 아버지와 함께 낚시를 한 경험을 바탕으로 <노인과 바다>는 탄생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의 소설 속에서 나이든 어부는 그의 아버지를 모델로 한 것은 아니었을까. 물론 의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낚시를 취미로 삼는 그의 아버지의 이미지와 소설 속의 힘겨운 할아비의 이미지는 선뜻 일치하지 않지만 말이다.

 <노인과 바다>에는 등장인물이 몇 없다. 노인, 아이가 주인공이고, 곁가지로 동네 어부와 마지막에 어떤 여인네만이 등장한다. 아이의 아버지는 실제 등장하진 않고 대화 속에서 언급될 뿐이다. 그러니 영화로 찍자면 아이의 아버지는 등장하지 않는다. 초저예산 영화가 될 법하다. 다른 배경도 필요없다. 그냥 허름한 바닷가 근처의 집과 바다, 허름한 배만이 필요할 뿐.

 노인이 배를 이끌로 사흘 밤낮으로 사투를 벌이며 커다란 고기를 잡고 돌아오는 길, 상어떼의 습격(?)을 받아 어렵게 잡은 고기를 빼앗기고 만다. 사흘 밤낮의 수고가 허물어지는 순간이고 맥빠지는 순간이다. 잠도 자지 않고 오로지 이 고기를 잡기 위해 사투를 벌였건만 노인은 실패했다. 내가 죽을지언정 이 고기를 빼앗길 수는 없다는 신념으로 상어떼들을 하나 둘 물리치지만 떼로 몰려드는 이들을 힘없는 노인이 홀로 막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해보인다.

 이 소설은 다소 따분하다. 하지만 그 따분함은 어쩌면 삶에 있어서의 고독과 삶에 내던져진 단독자로서의 마주함이다. 앞서 이 따분함을 또다른 바다 건너편의 나라 출신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장 폴 사르트르의 소설 <구토>에 비교했지만 이들은 정말 비슷한 정신세계를 바탕으로 소설을 그려내고 있다.

 그 고독함과 쓸쓸함, 힘겨움은 한낮 바다 위의 노인과 고기의 싸움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는 우리가 삶에서 마주해야 할 고난을 표현한다. 우리는 그 노인이고 고난은 고기와 상어떼다. 하나의 고난을 겨우 이겨냈다 할지라도 뒤이어 닥치는 또다른 시련은 우리를 지치게 만든다. 그렇다고 나 죽었소 하고 무기력하게 있으면 정말 죽는다. 연속되는 시련을 이겨내고 돌아오는 길. 비록 이득없는 헛된 승리라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의 소중한 경험이고 삶의 자산이다. 우리는 다음에는 그러지 않을테니까. 다음에는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당하지 않을테니까.

 나는 헤밍웨이의 다른 소설들을 읽지 않았다. 아직은. 하지만 <노인과 바다>로 인해 다른 소설들에도 눈길이 가는 것은 사실이고, 아마도 또 기약없이 '언젠간'이라는 말로 대신해야겠지만 그의 소설을 접해볼 것이다. 그때 다시 만나자. 헤밍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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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난 이런 영화인줄은 몰랐다. 대략 내가 예상한 바는 영화 <비포선셋>이나 <비포선라이즈> 정도의 단촐한 대화형식의 로맨스인줄 알았다. 예상은 빗나갔다. 이는 전적으로 내가 사전에 영화 줄거리를 검색해보지 않은 탓, 광고를 미리 접해보지 않은 탓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마음에 안들었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대체로 흡족했다. 하지만 나 같은 생각을 하고 이 영화를 보러 온 사람들은 아마도 실망하는 부류가 더 많으리라 생각된다. 더불어 이 영화는 흥행에 있어서는 그다지 성공적일 것 같지도 않다.

 미국영화이지만 미국식 사랑 영화라기보다는 프랑스식의 사랑 영화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고, 확실히 사랑에 있어서 조차도 비주류 영화-주류와 비주류가 뭐냐고 묻는다는 건 우습지만-로 분류되는 영화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비주류 영화들이 소수의 관객만을 만족시키듯이 이 영화 또한 그 공식을 벗어나지는 않을 터이고 다수의 관객을 만족시킨다는 전제가 깔려야하는 흥행성적에는 그다지 영향력이 없다는 말이다.

 단지 이 영화가 혹시라도 관객을 좀더 끌어모을 수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영화가 재밌다는 입소문 때문이 아니라 쥬드 로를 보러 오는 여성관객과 줄리아 로버츠나 나탈리 포트만을 보러오는 남성관객 때문이리라. 즉 영화 내용과 상관없이 자기가 좋아하는 배우들을 보러오기 때문일 것이라는 말이다.

 영화는 "안녕! 낯선 사람" (헬로우! 스트레인져) 라는 대사로 급속한 스토리 전개가 이어진다. 저마다 제 갈길을 가는 도심의 복잡한 거리에서 두 남녀가 반대방향에서 마주보고 걷다 서로를 쳐다본다. 여자는 교통사고를 당하고 깨자 그를 향해 "안녕! 낯선사람"이라는 대사를 날려준다. 물론 현실에서 그럴 여자는 찾아보기 힘들 듯.

 둘의 사랑이 이어지고, 남자의 외도, 그리고 여자의 이별선언, 또 다른 여자의 외도, 그의 남편의 이별선언. 네 사람이 엮고 엮이는 스토리는 영화 <콘스탄틴>의 유행어(?) "또 엮였군요"를 연상시킨다. 아 이런 또 엮여버렸다. 엮이면 언젠가 꼬이게 마련이다. 두 남자와 두 여자는 서로 엮여 꼬여버렸고 결국 꼬임의 결과는 이별이다.

 이들의 사랑방식은 지극히 비정상적이다. 아닌가? 정상이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비정상성을 숨기고 싶어하기 때문에 이것이 비정상적인 사랑방식으로 보이는걸까? 진실은 스스로만 알 수 있다. 이상한 사랑이기는 하지만 가능한 사랑이기도 하다는 것이 나의 감상. 그렇다고 내가 저들의 사랑방식으로 사랑을 하는 것은 아니다. 난 27살 먹는 동안 사랑이라고는 그다지 경험이 없는 초짜이니 말이다. 육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모두 떠나서. 사랑 그 자체로서.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사랑을 모른다고 말 할 수는 없다. 단 한번의 사랑이라 할지라도 강하게 왔다 가면 쓰라린 법이다. 사랑은 서서히 갑작스레 왔고 서서히 진행되다 갑작스레 떠났다. 원래 사랑은 그런 거다. 어제까지 사랑했던 이들이 다음 날 "헤어져"라고 말하는 건 그땐 충격이지만, 그리고 그 상황을 경험하는 당시에도 충격이겠지만, 그리고 상황이 종료된 이후에도 충격으로 남아있겠지만,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애써 준비하지 않을 뿐이다.

 상당한 수위의 상당한 시간 동안의 노출씬. 역시 영화는 18금이었다. 난 몰랐다. 영화를 직접 보기 전까지 이 영화가 18금이라는 사실을. 하지만 알았더라도 18금이 뭐 오늘날 대수로운 정돈가. 같은 18금이라하더라도 영화마다 천차만별인 것을. 하지만 단체로 관람하기에는 다소 야했다. 하핫. 이 영화를 보며 8명의 남녀가 단체 관람을 한 팀은 우리 밖에 없을 터. 뻘쭘.

 그들을 비정상이라 말하지 마라. 당신의 마음 속에도 그들의 캐릭터가 존재하고 있으니. 다만 표출되지 않았을 뿐.

 아웃사이더, 비정상, 변태, 괴짜, 우울, 사랑 이라는 키워드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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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05-02-14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웃사이더, 비정상, 변태, 괴짜, 우울, 사랑 이라는 키워드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추.천....켁..보려고 했는데 마지막 멘트가...=.=;;

마늘빵 2005-02-14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 ^^; 비연님도 혹시 마음 속에 그런 키워드 하나쯤은 없나 생각해보세요. 전 많은데...ㅋㅋ

2005-02-14 18: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자와 21세기 - 1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1999년 11월
절판


"최소한 대학교육은 거의 완벽하게 국가의 손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대학교육은 그 나름대로의 법칙이나 자유경쟁의 사회체제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운영되도록 방치되어야 하는 것이다. 대학이야말로 사학이 관학을 리드해야 하며, 사학은 국가제도의 통제권 상위의 도덕성에 의하여 자율적으로 운영되어야 하는 것이다. 국가의 개입이 어느 상황에서든지 긍정적 효과보다는 부정적 효과만을 잉태시켜 온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브레인 코리아"와 같은 발상 그 자체가 근원적으로 대학의 성격 자체를 잘못 이해한데서 출발한 발상인 것이다."
('방송문화의 한 전기를 위하여'에서)

밑줄그은 이 주 : 개인적으로는 도올의 주장은 오해의 소지가 많다. 내가 보기에 그의 주장은 지금의 대학들이 돈되는 과를 키우고 기업맞춤형 인재를 양성해내기 위한 체제로 돌입한 것에 대해 동의하는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그쪽으로 상당부분 오해될 염려가 있다. 아마도 그의 주장은 정부든 기업이든 간섭을 받지 말고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는 과거의 서당과도 같은 형식으로 꾸려야된다라는 말 같다.-13쪽

"기술이란 본시 삶의 예술의 모든 것을 지칭한다. 즉 기술이란 살아가는 방편으로서 필요한 모든 예술 즉 기예(테크네)를 말하는 것이다."
('21세기의 3대 과제 중)-32쪽

"과학이란, 인간의 지식을 특징지우는 어떠한 측면이다. 과학이란 기술과는 무관한 인간의 사변이성의 산물인 것이다. 과학의 특징은 인간이 살고 있는 세계를 법칙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때 '법칙적'이라는 것은 대강 희랍인들에 의하여 "연역적"인 것으로 이해되었는데, 이 연역적인 인간의 사유의 방법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수학"이라는 것이다."('21세기의 3대 과제 중)-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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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와 21세기 - 1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1999년 11월
평점 :
절판



 

 언제 어디서고 무슨 일만 하면 무슨 말만 하면 화제가 되는 도올 김용옥 선생의 대중철학서다. 실제로 EBS를 통해 노자를 강의하면서 티비로뿐만 아니라 책으로도 쉽게 읽을 수 있는 노자 철학서를 쓴 것이다. 그러나 티비를 보듯이 일반 대중이 이 책을 그냥 보기에는 무리가 따르지 싶다. 아무리 대중을 위한 책이라고 하더라도 노자를 해석하는데 있어 이론이 들어가지 않을 수는 없고, 최대한 쉽게 썼다고는 하지만 그 이론의 난해감, 여러 해석의 가능성 때문에 소설 읽듯 쉽게만 읽을 수는 없는게 사실이다.

 <노자와 21세기>에서 소개되는 책은 우리가 흔히 <도덕경>이라고 알고 있는 책이다. 오래전에는 이를 <노자>라고도 했으나 오늘날 일반적으로 알려지기로는 <도덕경>이 가장 널리 쓰인다. 그러나 <노자>가 됐든 <도덕경>이 됐든 또 그 옛날의 <덕도경>이 됐든간에 서로 다르게 불려지는 것일 뿐 이들이 모두 같은 책임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다만 <덕도경>과 <도덕경>은 道편과 德편 중 어느 것이 책의 앞부분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불리울 뿐이다.

 나는 철학과를 다니면서 노자철학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 생각해보면 기억나는 것은 "도를 도라고 말하면 이미 그것은 도가 아니다"라는 <도덕경>의 첫구절뿐이다. 공부를 게을리한 탓이겠지만 말이다.

 <도덕경>에 대한 해석은 여러가지다. 엄밀하게는 판본이 여러가지라고 해야할 것이다. 1973년 마왕퇴에서 발견된 비단에 쓰여진 도덕경, 1993년 곽점촌에서 발견된 대나무에 쓰여진 도덕경, 그리고 기존에 알려져있던 왕필의 도덕경 이렇게 세 가지로 나뉘우며, 도올 김용옥 선생은 이 세가지 모두를 다 종합해서 소개하고 있다. 기존의 도덕경이 왕필의 것에 크게 의지한 반면 도올의 해석은 세 가지를 다 참고해다는 것이 특이사항이다. 그러나 난 다만 세가지가 있다는 것만 알 뿐 자세한 건 모르겠다. 이 책을 열심히 꼼꼼하게 읽는다면 그 차이를 혼자서도 깨우칠지 모르겠지만 난 그다지 열심히 읽지는 않았다. 이론적인 부분은 그냥 넘기고 도올의 경험담과 관련된 해석을 즐겨 읽었을 뿐이다. 따라서 도가사상의 이론에 관한 논쟁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도올의 도덕경이 다른 도덕경에 대한 해석본과 다른 점이 또 있다. 도올은 지극히 일상적인 체험을 기반으로 해서 도덕경을 풀이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대중서라고 칭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어릴적  할아버지와의 경험부터 최근에 자신이 세계 곳곳에서 강의했던 체험까지, 뉴질랜드에서 랍스타를 먹은 일까지 세세하게 드러내며 일상 속으로 노자를 안내한다.

 대중서라고 해서 쉽게 구입해 읽을 만한 책은 아니지만 그저 도올에 대한 에피소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고 재미를 느껴도 좋을 것이다. 더불어 홀로 이 책을 토대로 꼼꼼히 공부한다면 노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도덕경>과 관련해 그렇게 강력히 추천할 만한 책은 아니지만 참고할 만한 서적은 된다.

 

노자와 21세기(전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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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콘스탄틴>이라는 영화가 개봉되기 전부터 영화광고문구에는 항상 '<매트릭스> 그 이후'라는 문구가 따라붙었었다. 그리고 유독 매트릭스와 함께 영화의 주인공이 키아누 리브스임을 강조했다. 이 영화는 어쩌면 '매트릭스'와 '키아누 리브스'가 아니었다면 사람들에게 덜 관심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영화를 홍보하는데 있어서 그 둘을 이용해먹었다 하더라도 영화의 품질은 결코 기대이하로 떨어지지 않은 작품이다. 한 마디로 인상 깊었다.

 영화는 <매트릭스>에 버금가는 현란한 개인기(?)와 액션을 선보이지는 않지만 고독한 한 영웅의 고민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매트릭스>와 공통적이다. 그런데 그 고독한 영웅은 두 영화 모두에서 지극히 평범한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영웅은 탄생하지 않는다. 다만 만들어질 뿐이다."라는 말은 두 영화 모두에 적용시킬 수 있다.

 태어날때부터 천사와 악마를 구분하는 능력을 지닌 존 콘스탄틴. 그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악마 혼혈족과 천사 혼혈족을 볼 수 있고, 악마 혼혈족을 퇴치하는 퇴마사다. 한때 자신의 이와 같은 능력을 저주해 자살을  시도했으나 다시 살아남았고 결국은 술과 담배에 찌들어 살며 혼혈 악마를 지옥으로 돌려보내는 것을 일상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이상한 기운이 느껴진다. 악마의 아들이 이승으로 나타난 것이다. 콘스탄틴은 지상의 선악의 균등이 깨지는 것을 막기 위해, 악마의 아들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을 막기 위해 나선다.

 결국 예상했던대로 승리는 그의 것이다. 하지만 결과를 뻔히 들여다보면서도 영화의 중간중간 공포영화인지 사람 놀래키는 여러 장면들과 특수효과, 그리고 영화의 진행에 있어 전제되어있는 내용들로 인해 볼거리와 생각거리를 동시에 전해주고 있다. <매트릭스>를 처음 접했을 때의 그 수많은 충격까지는 아니지만 이 영화 역시 여러 가지 생각거리와 볼거리를 던져놓고 간다는 점에서 영화관람 후의 파장이 크다.
 
 이 영화는 기독교 홍보영화인가? 영화를 보고있자면 마치 교회 다니세요, 교회 안다니면 지옥가요. 아까 지옥불 보셨죠? 라고 관객에게 말하는 듯 하다. 시나리오를 만든 사람이 독실한 기독교신자인지는 난 모른다. 하지만 영화는 애초에 천국과 지옥을 전제하고 천사와 악마의 대결구도를 만듦으로써 천국과 지옥의 존재는 당연시된다. 물론 영화 속의 가정이지만 함께 영화를 본 다른 이가 "우리 교회다니자"라는 말을 꺼낼 정도면-물론 우스개소리지만- 영화는 대단한 기독교 홍보효과를 뽑아내고 있다고 봐야겠다. 그야말로 상상속에서나 가능한 엄청난 지옥불의 세계를 보여줌으로써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믿어야하고 교회를 열심히 다녀야한다라는 메세지를 보이지 않게 흘려놓는다.

 영화 줄거리에서 특이할 점 또 하나는, 현실세계에도 천사와 악마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즉 이는 현실에도 천국와 지옥이 있다는 말이다.
현실은 선과 악이 대결하고 있으며 혼혈 천사와 악마는 인간의 행위에 전적으로 관여하지 않는다. 다만 어떤 매개를 통해 이들을 조종할 수는 있다. 천국과 지옥은 기독교에서 말하듯 죽음 뒤의 세계인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현실 속에도 존재하며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행위의 결과로 그것은 천국이 될 수도 지옥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내가 영화를 보기 전에도 본 후에도 마찬가지로 천국과 지옥은 나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의 존재여부를 내게 묻는다고 해서 이에 대한 마당한 대답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영화가 내포하고 있는 메세지에는 공감한다. 그것의 목적이 구원이든 아니든 간에 현실 세계에서 바른 행위를 하고 선하게 살라는 것이다. 구원을 제외하고는 이는 모든 종교가 말하는 현실의 삶의 태도이다. 기독교라는 영화 속 배경은 내게 있어선 그저 하나의 영화 속 장치일 뿐 내가 주목하는 것은 영화의 메시지다.

 우리네 현실 삶 속에서 혼혈 악마와 혼혈 천사가 존재한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하지만 개인에 따라 좀더 선한 본성을 키운 사람과 악한 본성을 키운 사람은 존재한다고 본다. 본래 인간은 백지상태라고 생각하며(중국의 고자의 성무성악설) 선과 악의 본성은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본다면 자라나면서 어떤 본성을 키워내느냐에 따라 지금의 나의 모습이 드러난다고 본다.

 어찌되었건 "착하게 살자"가 영화가 주는 메세지인 듯하다. 더불어 영화는 금연광고와 금주광고도 함께 하고 있다. 연신 담배만 피워대는 존 콘스탄틴은 결국 폐암으로 두달에서 일년정도밖에 못산다는 경고를 받고, 그의 친구이자 신부는 알콜 중독증세를 보이다가 결국 적시에 알콜을 섭취하지 못함으로써 사망한다. 담배피지 맙시다. 과음하지 맙시다. 공익광고가 따로 필요없다.

 키아누 리브스는 이 영화를 통해 <매트릭스>에 이어 확실한 인류의 구원자 역할을 굳히게 되었다. 고독한 사색하는 어딘가 좀 어설퍼보이는 영웅의 이미지. 인류는 어쩌면 이런저런 갈등과 분쟁 속에서 구원자를 희망하며 영화 속에서 그 갈증을 해소하는지도 모르겠다. 또, 서양식의 성장중시, 물질중시의 풍조로 인한 여러 폐해의 속출이 동양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매트릭스>에서도 그러했고, <콘스탄틴>에서도 그러하다. 레바논 태생이며 중국계 하와이인의 아버지를 두고 있는 키아누 리브스가 그 구원자 역할을 맡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는 구원자로서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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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5-02-11 0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얼핏 예고편 보니, '데블스 애드버킷' 생각 나더군요.

마늘빵 2005-02-11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그 영화 굉장히 인상깊게 봤어요. 그러고보니 소재가 비슷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