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과 김용옥 - 하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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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려운 이론서적도 아닌데 책 한권 읽는데 3일이나 걸렸다. 아주 부담없는 인물비평서인데도 말이다. 설연휴임에도 이 정도라면 나는 참 놀고 먹는 백수다. 게으름증이 뼈 속까지 스며들었나보다.

 이 책은 <이문열과 김용옥> 전 2권 중 김용옥 비판에 대해 다루고 있는 하권이다. 상권이 머리말을 제외하고는 전적으로 이문열 비판에 열을 올리고 있는 반면, 하권은 책의 절반 가량만을 김용옥을 위한 장에 할애하고 나머지는 다시 이문열에게로 돌아가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그만큼 강준만 교수는 이문열에 대해서 할 말이 많았나보다.

 상권을 읽고 쓴 리뷰에서 상권은 이문열, 하권은 김용옥을 위한 책이라고 말했지만 수정해야할 듯 하다. 김용옥 비판에 대한 글을 읽기 위해서는 하권만 읽어도 충분하지만, 이문열 비판을 위한 글을 읽기 위해선 상, 하권 모두 읽어야겠다. 단 하권의 앞 절반가량의 김용옥 부분을 제외하고 말이다.

 상권과 하권이 차이점은 또 있다. 이는 엄밀하게는 상권과 하권의 차이라기보다는 강준만의 이문열과 김용옥에 대한 시선의 차이라고 해야 옳겠다. 강준만은 이문열에 대해서는 '얄짤없다'. 하지만 김용옥에 대해서는 김용옥을 둘러싼 수많은 비판을 물리치고 그를 옹호하는 면모를 보인다. 심지어 일본 가나가와대 윤건차 교수의 책 <현대 한국의 사상흐름>에서 한국의 지식인 지도에 있어서 동일하게 '비판적 자유주의' 진영에 속해있는 진중권으로부터 가혹한 비판을 받으면서까지 강준만은 김용옥을 옹호한다.

 물론 강준만은 김용옥을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김용옥 비판은 옹호에 비하면 매우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는 점이 특이하다. 또한 그의 이문열과 김용옥에 대한 관점은 내가 책을 읽기전에 가지고 있었던 두 사람에 대한 그것과도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고 있어 반갑기까지 하다.

 나는 강준만 만큼이나 구체적으로는 아니지만 이문열의 정치적 언사에 대해서 심히 불쾌했었고, 김용옥에 대한 항간의 비판에 대해서는 그가 너무 불쌍하게 느껴져서 안아주고 싶었을 정도였다. 표현이 너무 너무 과장되었나? 어쨌든 나의 두 사람에 대한 시선은 이 책을 읽기전에도 강준만의 그것과 비슷했다.

 김용옥은 주변이 모두 경기고-서울대 출신인 KS 마크를 밟은 집안에서 자랐고, 홀로 지지리도 공부못하는 바보로 취급받으며 고려대 생물학과에 입학했다. SKY대학인데 바보 취급했다니 너무한다. 그래도 먹어준다는 학벌이 아닌가? 그럼 스카이도 못간 이들은 뭐가 되나? 이것도 스카이 아닌 이들에게 가해지는 또다른 '지식폭력'이다.

 어쨌든 김용옥은 한국사회 전체에서 보자면 괜찮은 학벌이지만 그 집안에서는 나홀로 돌탱이인 고려대를 들어갔고 무지하게 스트레스를 받았나보다. 그러한 집안의 지식폭력에 시달리며 그는 고려대 철학과에 재입학해 대학원을 마치고, 대만, 일본, 미국의 최고 대학들에서 학위를 받아 한국에 '당당하게' 돌아왔다. 서울대는 가볍게 제친 것이다. 그의 학벌 앞에서 서울대는 우습다. 게다가 40중반 나이에 원광대 한의학과까지 들어가 졸업하고 한의학 자격을 획득하다니. 실로 그의 공부벽이 놀랍다. 아니 학위수집벽이라 해야겠다. 

 그렇게 그는 한국사회에서 그 누구도 무지할 수 없는 막강화력의 학벌을 가지고 떵떵거리며 자신의 철학을 펼친다. 그것도 최초로 EBS 방송을 통해 전국 생방송 중계되는 2시간 넘는 철학강의를 펼치다니 실로 놀랍다. 그런데 그 사실만으로 놀라운데 더 놀라운 것은 일반 시민들이 그의 강의에 푹 빠져 헤어나오질 못하는 사이비 종교단체의 광기와도 같은 분위기다.

 바로 여기서 김용옥에 대한 비판이 거세진다. 당신은 연예인인가, 철학자인가? 를 시작으로 도올이 펼치는 노자강의가 학계에서 통용되는 정식해석방식이 아닌갑네, 니 강의 방식이 영 마음에 안든다 왜 욕설을 지껄이느냐는 등 비판도 가지가지다. 자신을 천재, 신이라고 표현한 도올이 열받을만하다.

 강준만은 이들의 모든 가지각색의 비판들을 종합해 반론을 펴고 도올을 구해준다. 하지만 그라고 도올의 모든 것을 포용하지는 않는다. 극우 언론을 비롯한 수구반동세력의 입을 빌어 글을 쓰는 것이나 노태우, 김영삼의 똥구멍을 핥는 용비어천가를 내놓은 것도 영 못마땅하다. 이점에서는 나 또한 강준만에 동의한다. 나도 도올의 이런점만은 영 못마땅하다.

 하지만 이를 제외하고는 도올이 철학을 대중화시킨 점이나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학문을 아무나 접할 수 있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지금까지의 지식폭력으로부터 대중을 해방시키는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매우 고무적이다. 철학은 그들만이 언어가 아니다. 지금껏 그랬을지 모르지만 도올은 이를 거부하고 쉽게 쉽게 쓰고 일부러 재밌으라고 욕도 섞고 무당이 굿하듯 쇼도 하면서 강연을 한 것이다.

 그가 자신에 대한 비판에 답하지도 않고 오로지 자기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또다른 지식폭력이긴 하지만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던 핵심적인 지식폭력, 지식의 독점을 깼다는 점에 비하면 그의 또다른 지식폭력은 아주 사소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김용옥을 매우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그는 학문을 혼자만 소유하려하지 않았고 대중과 함께 하길 바랬으며, 그것이 비록 쇼라는 형식을 통해 온갖 욕설이 난무하는 환경에서 벌어졌다 하더라도 대단한 일임은 인정해야한다. 우박 쏟아지듯 하는 비판에 결국 방송을 그만두고 잠적해버렸지만 나는 그가 다시 나와 광기를 부려줬으면 하는 바램이다.


덧붙이며...

 나는 한국사회에서 영향력있는 SKY 학벌을 지니고 있지 않다. 나는 도올과도 같은 학벌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으며 대학을 수직서열화시키는 이 사회에 환멸을 느끼고 있다. 대학의 수직서열화는 곧 한 개인의 인생의 수직서열화로 연결된다. 학벌을 타파하자는 구호는 간혹 곳곳에서 들리고 있지만 아직 멀었다. 학벌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사라진 듯 보일 뿐이다.

 나는 서울의 중위권 학부 대학을 나와 스카이중 한 곳인 고려대 대학원으로 간다. 그러나 우리네 학벌사회에서 적용되는 것은 석사, 박사를 어디서 땄느냐보다는 학부를 어디나왔느냐다. 그 점에서 나는 비록 고려대로 가 석사를  받는다해도 학벌사회의 피해자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도올이 지식폭력의 희생자였다고 하지만 도올은 나에 비하면 상위층에서 시작해 최상위층으로 올라선 셈이다. 나는 바닥에서 시작해야한다.

 또한 서열화에 있어서 나보다 못한 대학을 나온 이들은 나보다 더 밑에서부터 그들의 인생을 시작해야한다는 점에서 나보다 더한 지식폭력을 경험한다고 볼 수 있겠다. 학벌타파가 유일한 해법이지만 학벌은 타파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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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5-02-09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첫직장에서 이대석사가 한명 있었는데 어느날 사장이 그 사람에 대해 "학력세탁이나 한 것이 말이야"라고 하더군요. 그게 무슨 말인가 했는데 그 사람이 다른 여대학부를 나오고 대학원을 이대로 갔다 해서 한 말이더군요^^ 약간 끔찍하죠?

마늘빵 2005-02-09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이런 너무하네요. 대학원을 좋은데 나와도 그걸 또 세탁했다고 하는군요. 우리나라의 학벌구분이 역시 '학부'에 있다는걸 증명하는 한 사례네요.
 
이문열과 김용옥 - 하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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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주의는 하나의 인식론임과 동시에 하나의 신앙이기도 한 것이다. 그것은 진리라는, 포착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실존한다고 일컬어지는 현상에 대한 존경만이 아니라 숭배까지를 요구한다. 대학들은 그런 이데올로기의 제조공장이자 그런 신앙의 신전이 되어왔다. 하버드대학은 그 문장에 진리(veritas)라는 말을 새겨놓고 있다. ...... 문화적 이상으로서의 진리는 하나의 아편으로서, 그것도 어쩌면 근대세계에서 유일하게 심각한 아편으로서 기능해왔다."
이매뉴얼 워러스틴, <역사적 자본주의/자본주의 문명>(창작과 비평사, 1993), 85-86 -15쪽

"한국 사회, 특히 지식계엔 '긴장'이 필요하다. 지금 그게 너무 없어서 탈이다. 이름을 얻으면 얻는 만큼 언제든지 씹힐 수 밖에 없다는 걸 각오해야한다. 그건 매우 공평한 게임이다. 유명 지식인들이 씹히지 않게끔 몸조심하고 계속 공부도 열심히 하는 가운데 나라가 잘 된다."-70쪽

"어떻게 해서든 자기 메시지 전파를 위해 대중을 만나고자 하는 사람이 '대중매체 중독증'을 갖는건 당연한게 아닐까? 텔레비젼과 김용옥은 상호 공생관계였지 김용옥이 무리를 저질러가며 무슨 치열한 롤비를 한건 아니지 않은가. 우리가 진짜 문제삼아야 할 '대중매체 중독증'은 좌파, 진보적 지식인들이 '조선일보'를 상종하는게 아닐까?"-83쪽

"번역이란 정보의 대중화, 민중화, 즉 민주화를 뜻한다. 내가 알고 있는 민주화란 '누구든지 같이 참여한다'는 것이다. 칸트의 번역은 우리말을 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칸트철학에 같이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같이 참여할 수 있게 한다는 그러한 전제가 없는 번역은 참다운 번역이 되지 못한다. 칸트의 저작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칸트에 대하여 강의한다는 것은 칸트를 독점한 자가 그러한 능력이 없는 자들에게 칸트를 강요하는 일방적 부과에 불과하다. 이것이 바로 해방 후 오늘날까지 우리 학계를 지배해 온 '주입식 교육'이라는 것의 정체다! 정보가 민주화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그 정보를 독점한 자만이 특권을 누리게 된다. ... 중략 ... 논쟁에 있어서도 그들의 발언은 절대적 권위를 지닐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토론이 부재하여 상호간에 자극, 발전이 없게 되고, 따라서 그러한 학계는 정체되고 마는 것이다."-85쪽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고전이 아닙니다. 모든 고전은 몽땅 다시 해석되어질 수 있으며 또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성경이건 똥경이건 모든 고전에 고전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모든 정치권력에 맹목적으로 복속하는 것과 동일합니다. 그러한 고전 이해는 '왕정시대'에 살았던 인간들의 멘탈리티에나 적합한 것인데 오늘 '민주시대'를 구가하는 인간들도 고전 이해에 있어서는 그러한 멘탈리티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위선이며 괴리감이며 불철저성입니다."(김용옥, <절차탁마대기만성 : 도올문집> 3-4쪽)-88쪽

"지식인이 민중을 저항으로 유도할 경우에는 반드시 결과에 대한 책임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김동춘)-92쪽

"김용옥은 원래부터 편협하고 보수적인 학계와는 거리가 멀었으며 학계의 인정을 받으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학계가 그에게 제공할 수 있는 건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다."-101쪽

"그러나 적어도 현재 상태에서 말한다면 지금 내가 우리 지식사회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은 정직하게 느낀대로 표현해내야 하겠다는 결심입니다. 분노를 너무 성숙시키고 절제하여 애쓰다 보면 잘못된 것에 대한 본질적인 파악력을 놓쳐버릴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철저하게 분노를 표출하고 그 대가로 자신을 고독 속으로 밀어넣음으로써 역사 앞에 철저한 단독자로서 설 수 있다는 사실은 창조적 사상가로서의 특권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용옥, 김현 <김용옥의 '저술세계' : 철학에서 연극, 영화, 동화론까지> '조선일보' 1989년 6월 27일, 9면.-107쪽

"나는 욕을 하나의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가 건전하게 수용해야 할 하나의 문화 양식인 것이지요.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가 말한 것처럼 언어는 권력의 한 체계입니다. 즉 욕설을 저속한 것으로 규정하는 계층의 사람들은 그 권력 체계에서 득을 보고 있는 자들이라는 것이지요. 그 사람들이야말로 사실은 욕설보다 더욱 저급한 차원에 있는 권력의 노예일 수가 있습니다. 나는 이 욕설의 사회화를 통해 우리의 기존 언어관에 혼란을 일으키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역사를 보편 한 시대가 혁명을 겪기 위해서는 먼저 새로운 언어 체계가 나오게 돼 있습니다. 이런점에서 나의 책에 나오는 욕설은 매우 중요한 선례를 남기게 될 것으로 봅니다."
(김용옥, 김현 <김용옥의 '저술세계' : 철학에서 연극, 영화, 동화론까지> '조선일보' 1989년 6월 27일, 9면.-107쪽

"소위 논문이라는 형식 자체가 근대 서구 대학교육에서 성립한 모종의 특수 형식을 지칭하는 것이지 철학논문 일반의 절대적 기준이 될 수가 없음은 명백하다. 좀 더 자세히 그 일치된 관념을 분석해 보면 그것이 너무도 막연하고 근거 없는 허구임이 드러난다. 그들의 관념은 이런 것이다. 일인칭을 쓰지 않는 서술문으로 감정의 표현이 없이 메마르게 쓸 것, 엄숙하고 고상한 말들만 골라 나열할 것, 철학사의 기존 개념의 조합속에서만 맴돌 것, 그리고 설명없는(저자, 책명 등만 나열하는) 주석을 붙일 것 등등이다. ...중략... '논문'이란 '자기의 주장을 펴서 시비적부를 가리는 글'이며 여기에 어떠한 일정한 양식이 주문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자기의 주장을 펴기 위해서, 또 자기 나름대로 체계를 의식하면서, 동원될 수 있는 모든 양식이 자유롭게 동원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김용옥, 최영애 <도올 논문집>(통나무, 1991), 92-94)-127쪽

"나는 '공정한' '잣대'를 가지고 한국 진보적 지식인의 '치정주의'를 비판하는 강준만이 '살랑살랑 꼬리를 치는' 정도를 넘어 아예 노태우, 김우중 똥구멍을 핥으려 했던 김용옥 '똥' 강아지를 종자있는 강아지 족보에 올려놓고 '대국적으로 밀어 주자'고 말한 걸 읽은 기억이 난다" (진중권)-135쪽

"저는 지식인의 저널리즘 행위 또는 대중매체 이용 행태와 그 내용에 대해서만 이야기해 왔습니다. 그래서 철학자도 건드리고 국문학자도 건드리고 경제학자도 건드리고 정치학자도 건드리고 소설가도 건드려 왔습니다. 제가 아무리 그 분야에 대해 문외한일망정 그들이 대중매체를 통해 일반 대중을 상대로 생산해내는 현실 참여적 글과 말에 대해서는 평가할 자격과 능력이 저에게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도 저의 그런 믿음이 타당하며 그런 믿음에 근거한 저의 시도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159쪽

"내 경험으로 말하자면 분노는 결코 맹목이 아니다. 그것도 판단하고 선택하고 용납하고 거부한다. 그러니 분노하지 않는 법을 배울 게 아니라 제대로 분노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왕주, <쾌락의 옹호>(문학과 지성사, 2001), 43쪽)-177쪽

"권력은 반드시 부패하게 돼 있지만 또 반드시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권력은 무조건 악이라고 공격하면 최악의 권력만 살아남는다는 걸 알아야 한다.
나는 '열린 권력'이라는 개념을 주장하고 싶다. 스스로 비판하고 비판을 환영함으로써 권력의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권력을 지향하자는 것이다. 달리 말씀드리자면, 권력의 부작용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는 유형의 권력은 존재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하자는 것이다. 권력은 무조건 악이라는 주장은 최악의 권력에 봉사하는 어리석은 자해행위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184쪽

"'지식폭력'을 살펴보자. 대학을 나오지 못했거나 서울대를 나오지 못한 사람들은 서울대에 아무리 많은 문제가 있어도 서울대 비판을 꺼려한다. 누군가가 글이나 말에 유명한 서양 사상가 이름을 들먹이면서 이야기를 하면 그 사상가가 누구냐고 묻기가 어렵다. 그리고 그 사람 주장에 뭔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소설 한 편을 읽어도 뭔가 남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지식으로 위압감을 느끼게 하는 그런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게 다 '헤게모니'가 성립된 '지식폭력' 현상인 것이다."-204쪽

"삶과 앎이 따로 노는 사회에서는 삶과 유리된 앎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기득권 강화를 위해 삶과 관련된 지식을 폄하하기 마련이며, 바로 그런 풍토 속에서 '지식폭력'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214쪽

"학력자격이 보증하는 '교양'은 지배자 측의 정의에서 '완벽한 인간'의 기본적 구성요소의 하나이고, 그 결과 교양 없음은 그 사람의 정체성과 인간으로서의 위엄을 훼손하는 본질적인 결함으로 인식되는데, 모든 공식적 상황, 즉 자신의 신체와 매너, 언어와 함께 다른 이들 앞에 설 때, 그 사람은 침묵을 강요당하게 된다."
(피에르 부르디외, <구별짓기 :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下>(새물결, 1996), 642-643)-232쪽

"관찰된 대상에 따라 관찰 지점을 변하게 할 수 있고 각각의 관점을 연속적으로, 그리고 분리해서 취할 수 있는 그들의 성향과 적응력 때문에 그들은 좌익과 우익에게 다른 쪽이 취하는, 또는 취해야 할 이미지를 돌려보내면서 좌우익 어느 쪽도 지지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일종의 중립주의를 취한다. 그들은 이러한 객관성의 외양을 논쟁적으로 사용하는데 탁월하다"
(피에르 부르디외, <예술의 규칙 : 문학 장의 기원과 구조>(동문선, 1999), 367)-236쪽

"사회주의자라고 낙인찍히지 않기 위해 오로지 민족주의만을 연구해야 하고, 잡문은 입장이 들어가므로 학술 논문만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문 사회의 정서는 정신병적 상황이다. 분단과 군사독재는 우리를 이러한 정신병적인 상황으로 몰아갔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 한번도 전복적인 자유주의나 개인주의가 나타난 적이 없다. 그러한 전복적인 개인주의자라면 이러한 우상과 위선의 덩어리를 그냥 두었을 리 없다. 따라서 나는 한국의 자유주의자들을 의심한다. 나의 일은 정치가 아니며 나는 정치를 모른다는 사람들을 더욱 의심한다. 그래서 인간의 논리, 혹은 문화의 이름으로 '정치'를 떠난다는 것은 그것보다 더 위험한 결과를 낳을 가능성이 많다."
(김동춘, <탈정치의 시대에 '정치'를 생각한다>, '현대사상' 제 4호(1997년 겨울), 263-264쪽)-239쪽

"현재 한국 사회의 주요 갈등 구도는 '좌우'의 문제가 아니라 최소한의 '상식-반 상식' 문제라는 게 나의 소신인 것이다."-253쪽

"일부 좌파, 진보적 지식인이 저지르는 '지식폭력'은 크게 보아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도덕적 우월감'을 주무기로 사용하는 '지식폭력'과 또 다른 하나는 실천은 전혀 없이 '허공에만 대고 떠드는 거대 담론'을 주무기로 한 '지식폭력'이다."-2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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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크루트. 국내채용정보사이트가 아니다. 영화 제목이다. 내가 좋아하는 몇 안되는 외국 영화배우들 중 일부인 알파치노와 콜린파렐 주연의 심리스릴러. 좋아하는 배우에 좋아하는 영화장르까지 딱이다.

 영화 <리크루트>의 소재는 미국범죄영화에서 흔히 우려먹는 CIA 이다. 그러나 다른 영화가 CIA를 그저 영화에 출연하는 한 인물의 근무지 혹은 주변배경 정도로 그치는데 반해 <리크루트>에서 CIA는 좀더 깊이있게 영화 속으로 침투한다. 엄밀히 CIA훈련과정에서 벌어지는 조교와 교육생간의 관계, 교육생들간의 관계, 그리고 고도의 심리전 등 CIA는 주변배경이 아닌 영화 자체로서 써먹힌다.

  영화를 보면서도 콜린파렐이 경험하고 있는 현장이 훈련일까 실제일까 궁금해하며 긴장을 놓을 수 없다. 반전과 반전이 거듭하고, 끝내 뭔지 모르겠다 하는 혼란을 틈타 막판 뒤집기가 진행되며 마무리짓는 영화는 비로소 영화가 끝난 뒤에야 아 그거구나 하며 꼭 붙잡고 있던 마음을 놓게 된다.

 난 이와 같은 심리스릴러가 좋다. 그냥 스릴러도 좋아하지만 거기에 고도의 심리전을 펼치는 스릴러라면 더더욱 좋다. 또 스릴러가 아니더라도 미묘한 심리전이 들어가 있는 법정영화도 좋아한다. 이런 영화는 가슴으로 느끼는 영화이기 보다는 관객의 머리 속에서 치밀한 싸움이 진행되며 뭘까 뭘까 끊임없이 생각하고 생각에 가지를 치며 추리를 하게 만든다. 영화가 지적욕구를 유발시키고 채워주는 것이다. 물론 가슴을 따뜻하게 울리는 감동적인 영화들도 매력적이지만 머리싸움을 끌어내는 스릴러도 매력이 있다.

 주인공으로 나오는 콜린파렐을 내가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폰부스>와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통해서였다. 지적인 이미지에 날렵한 체격을 지닌 그는 앞의 두 영화와 본 영화에서 모두 지능적인 역할을 맡고 소화내했다. 그 전에는 그가 출연한 수많은 영화들에서 그의 존재를 느낄 수는 없었다.

 그는 <스피드>와 <매트릭스>시리즈를 통해 일약 스타덤에 오른 키아누 리브스보다도 배우로서 더 매력적이다. 키아누 리브스보다 미끈하고 완벽한 역할은 아니지만 그가 영화 속에서 소화해내는 역할들은 지능적이지만 어딘가 부족한 듯한 냄새를 풍기는 약간은 어설픔이 들어있는 그런 인간이다. 물론 배우로서의 역할이 본인과 동일시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특정의 역할을 제대로 소화해내기 위해선 배우 본인에게 들어있는 잠재적인 요인들이 표출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 어설픈 지적인 남자의 이미지를 콜린파렐이 제대로 소화해냈고 나는 거기서 그의 매력을 느끼는 것이다.

 배우들의 연기로보나 탄탄한 시나리오로 보나 극적 사실감으로 보나 손색이 없는 영화다. 세번 봤지만 그래도 재밌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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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말아톤>을 알기 전에 TV의 어느 아침 프로그램을 통해 먼저 그와 그의 어머니를 접했다. 내가 그를 본 것은 잠깐이었지만 그의 어머니의 입을 통해 듣게 된 그동안의 사연은 정말이지 인간 승리였다. 그렇게 <말아톤>의 주인공 배형진과의 만남은 시작되었다.

 <말아톤>은 그와 같은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충분히 화제거리가 되었고 그 감동의 세월을 보기 위해 관객들은 영화관을 찾았다. 나 역시 그들 중 한 명일 뿐이었다.

 사실 이 영화를 통해 관객이 기대할 것은 실화의 내용과 감동뿐이다. 알만한 사람들은 이미 다른 매체를 통해서 대강의 줄거리는 접했을 것이지만 그들은 줄거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영화를 보기 위해 영화관을 찾는다.

 실제모델 배형진, 영화 속 인물 윤초원. 그는 5살 어린아이의 지능을 가진 20살 청년이다. 외관상 보기에는 괜찮은 외모와 몸매를 가지고 있지만 그의 행동 하나하나는 어린아이와도 같다. 초코파이와 얼룩말, 달리기를 좋아한다.

 그가 실제로 달리기를 좋아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오직 그만이 알뿐. 자폐증을 앓고 있는 아이를 위해 젊은 시절부터 자신의 인생을 바쳐가며 아들을 위한 삶을 살아온 엄마 경숙은 아들을 온전히 바꿔놓음으로써 자신의 인생을 보상하려고 한다. 그녀는 이 사실을 뒤늦게야 깨닫게 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아이에게 지나치게 강요한 나머지, 엄마로부터 버림받을 것이 두려운 초원은 그저 엄마가 원하는 일이면 좋단다. 결코 싫다,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달리기는 그저 엄마가 아이에게 강요한 한 가지 일에 불과했던 것일까? 엄마는 아니라고 애써 부정하면서 나중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아이에게 주입시킨 것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정말 초원이가 원했던 것도 달리기였다. 초원이는 달리기 위해 홀로 춘천까지 갔다.

 이 영화는 자폐증을 앓고 있는 한 청년의 인간승리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한편 어머니라는 존재의 강한 모성애를 느끼게 해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 모성애는 때로는 지나친 집착으로 내몰리기도 하지만 그것마저도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랑이 지나치게 부족하면 영화 속 초원의 동생 중원이와 같이 반항심이 가득해지기도 하지만 사랑이 지나치면 아이에게 지나친 스트레스와 압박감을 줄 수도 있다. 단지 초원이는 이를 표현하지 못했을 뿐이다.

 이 영화의 감독 정윤철은 <말아톤>이 그의 첫 장편데뷔작일 정도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나도 처음 들었다. 그의 이름을. 그는 이 영화를 찍기 위해 실제 인물 배형진과 함께 마라톤 클럽에 가입해 일년여동안 함께 뛰었다고 한다. 뛰면서 그의 마음을 읽으려 했고 느끼려 했다. 영화 <말아톤>의 감동적인 장면 하나하나는 온전히 그의 이러한 기나긴 노력의 산물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기는 쉽다. 왜냐면 줄거리를 따로 만들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화를 실화만큼이나 감동적으로 그려내는 것은 어렵다. 실화가 감동적인 것은 그것이 실화여서가 아니라 실화에 담긴 구구절절한 사연으로 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제 3자가 그 사연의 눈물겨운 이야기들을 엮여내 감동을 재현하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감독은 그것을 느끼고자 실제의 삶 속으로 뛰어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때의 체험은 결코 헛되지 않았음이 이 영화를 통해 증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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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05-03-19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늘 애들 데리고 자동차 극장 가려고 합니다~
 
이문열과 김용옥 - 상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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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년 10월에 구입하고선 읽다 만 책이다. 2001년 12월에 입대 했다가 2004년 1월에 나왔으니 책이 출간된지는 오래되었으나 내가 이 책을 구경한 건 기껏해야 1년정도라고 할 수 있겠다. 지금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를 기점으로해서 한겨레 신문의 칼럼연재를 중단하고, 스스로 되돌아보는 시기를 갖겠노라며 절필을 선언했지만, 당시 강준만 교수가 한참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을 때였다.

 강준만 교수는 엄청난 다작가다. 그는 한국사회에 대해 무슨 할 말이 그리도 많은지 책 내기를 책 읽기 하듯이 한다. 절필을 선언하기 전까지 그가 수년간 낸 책만 해도 수십권은 될 것이다. 그의 저작이 너무 많아 일일이 세는 것이 귀찮고 힘들다.

 어떤 이들은 그의 저작들의 수준을 이야기하며 다작을 하는 대신 전문성이 떨어진다고도 비판하지만 그가 써내는 책이 학술서도 아닌 사회비평서라는 점에서 일정한 깊이를 유지하면서 그만한 다작을 하기란 힘들다는 점은 인정해야겠다.

 오히려 그의 글이 일정부분 전문성이 떨어지고 정성이 들어가지 않아 보이는 것은 글의 내용보다는 그의 문체에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소설가도 아닌 이에게 무슨 '문체'냐고 할테지만 비평가들에게도 그만의 문체가 존재한다. 강준만은 매우 쉬운 구어체를 구사하면서 아주 알아듣기 쉽게 풀어써내는 솜씨를 가지고 있다. 직설과 풍자면에서는 진중권에 비할바가 아니지만 쉽게 풀어쓰기 면에서는 진중권보다는 강준만이 앞선다.

 <이문열과 김용옥>이라는 책은 전권 2권으로 되어있으며, 상편은 이문열에 대해서, 하편은 김용옥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하지만 김용옥만을 보고 싶다면 굳이 상편을 볼 필요는 없다. 상편과 하편은 전체적으로 이어져있는 있으며, 지식폭력과 문화특권주의를 살피는데 있어 중요한 두 명을 모두 봐야하겠지만, 이문열이나 김용옥 둘 중 한명에게만 관심을 가지고 있어 그에 대해 강준만이 어떻게 썼는가를 궁금해한다면 두 권중 한권만을 봐도 무방하다.

 강준만은 대단한 수집가다. 그가 이 책속에서 인용하는 신문기사와 각종 칼럼들은 모두 그의 수집벽에 의해 이루어진 성과다. 물론 항간에는 그를 위해 자료를 모아주는 도우미가 있다고도 하지만 자료를 모아준다고 해도 그 자료를 모두 읽어내는 것은 오로지 그가 해야하는 작업이다. 그가 이문열과 김용옥에 대해 책 한권 분량을 써낼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관심을 가지고 이들의 저서는 물론이고, 인터뷰와 칼럼, 비평까지도 모두 읽어냈다는 전제가 깔려있다고 봐야한다.

 강준만은 이문열을 무지하게 싫어한다. 그냥 아무런 이유없이 싫은 건 아닌 것 같다. 그는 이문열이 싫은 이유에 대해서 엄청난 근거를 대가며 말하고 있다. 강준만의 이문열에 대한 비판은 가차없다. 아주 매몰차다. 그래서 이문열이 이 책을 읽는다면 아마도 화병이 나서 당분간 앓아눕지 않을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치만 이문열은 이 책을 읽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그는 강준만을 자신과 동급으로 취급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문열이 흔히 말하듯 아이가 어르신을 비판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는 강준만의 비판을 하찮게 무시해버리고 말 것이 뻔하다.

 나는 이문열을 잘 모른다. 그 유명한 이문열의 <아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들>, <떨어지는 곳에는 날개가 있다> 는 물론이고 자라나는 어린이라면 인생에 한번쯤 읽을 이문열 번역의 <삼국지> 조차도 읽지 않았다. 난 황병국의 삼국지를 읽었다. 앞으로 삼국지를 추가로 읽는다고 하더라도 장정일과 황석영의 삼국지를 읽을 것이다. 이건 내가 개인적으로 이문열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소설가나 번역가로서의 그와 칼럼니스트(?)로서의 그를 엄연히 구분해야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가 싫기 때문에 그의 이름이 들어간 텍스트를 온전히 읽어낼 자신이 없다. 그에 대한 편견이 이미 심어져있는 상태에서 그의 텍스트를 온전하게 읽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물론 이는 잘못이다. 텍스트와 저자는 엄연히 구분해야하니까.

 철학자 가다머는 독자는 텍스트의 제자로서 임해야한다고 말한다. 텍스트에서 내가 원하는 부분을 얻어내고 나머지는 가지쳐 자른다면 이는 올바른 텍스트의 이해라 할 수 없다. 개인의 역사적 상황과 시대의 역사적 상황인 텍스트를 모두 반영하고 고려해야한다는 것이 가다머의 텍스트와 저자에 대한 입장이다. 이해는 한다.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이문열의 작품을 한 권도 읽지 않은 내가 강준만의 이문열 비판에 대한 저서를 읽어도 되는 걸까, 라고 속으로 질문해봤다. 그리고 대답했다. 된다. 읽어도 된다. 왜냐면 강준만은 이 책을 통해 이문열의 지식특권주의와 지식폭력을 비판하려는 것이지 그의 소설의 문학성을 비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강준만은 문학에는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문학평론가는 아니다. 그런 점에서 신문방송학과 교수인 강준만이 소설가인 이문열을 비판하는 것은 부당하진 않다. 나는 칼럼니스트(?)로서의 이문열은 잘 알고 있고 관심을 가지고 지켜봤으니 그에 대한 나의 생각은 이미 가지고 있는 상태다. 따라서 강준만의 이문열 비판을 읽더라도 내가 순전히 강준만에 의해 나의 생각이 뒤바뀌거나 휘둘릴 염려는 없다. 그런점에서 내가 강준만의 생각 속으로 소속되어버릴 염려는 거두어도 좋다.

 강준만에 의하면 이문열은 지식폭력의 희생자다. 그는 초등학교를 제외하고 제대로된 정규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으며, 독학으로 공부하고 책읽기를 통해 오늘날에 이르렀다. 대단한 인물이다. 홀로 독학을 통해 그만한 지식을 갖추고 글쓰기를 통해 돈과 권력, 명예를 쥐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그런데 그는 지식폭력의 희생자인 동시에 가해자이기도 하다. 이렇게 달성된 현재의 그는 신분이 미천한 인물들을 무시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신춘문예라는 정규(?)과정을 거치지 않은 비평가들과 소설가들을 그는 다른 이들과 동등하게 대접하지 않는다. 이는 지식폭력의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역할바꿈을 한 그의 현실이다.

 또한 그는 대단한 문화특권주의를 가지고 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각종 언론 매체를 통해 현실 정치에 대해 발언하며 이럴 때는 칼럼니스트로 활약(?)하고, 불리할때는 자신이 소설가임을 강조한다. 자기 필요에 따라서 색깔을 달리하는 카멜레온이라는 말이다. 자신이 내뱉은 발언이 문제시 되면 그는 그의 소설가라는 문인의 위치로 돌아와 자신의 발언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다.

 이문열이 입지전적인 대단한 인물인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 그는 대단한 문화권력을 지니고 문화계뿐 아니라 정치, 사회계에서도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런점에서도 대단한 인물인 것도 사실이다. 그렇기에 그의 발언이 문제시되는 것이고, 그가 발언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 사태 또한 문제시되는 것이다.

 강준만의 이문열에 대한 비판은 그가 조목조목 드는 근거로 보아도 타당하다. 그러나 정작 이 책을 읽어야 할 사람은 이문열의 소설을 한권도 사보지 않은 나같은 사람이 아니라 이문열의 매니아들이다. 그들은 이문열의 소설을 통해 이문열을 접했고, 이문열의 문화적, 정치적 영향력을 뒷받침해주고 있는 침묵하는 지지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 책을 읽고 이문열을 다시 생각해봐야하며, 이문열의 실체를 알았다면 그의 권력을 뒷받침해주는 자신을 거둬야 할 것이다.


덧붙이며...
  나는 이문열의 책을 한권도 읽지 않았지만 앞으로는 읽을 계획이다. 다만 그것은 이문열을 알기 위해서이며 또한 책을 읽더라도 사서 보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거의 대부분의 책을 사서 보는 편이다. 그렇다고 내가 돈이 많은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보고픈 책을 모두 사보지는 못한다. 이문열의 새 책을 구입함으로써 그의 소설 몇십만부 돌파라는 기록에 한몫 보태줄 생각은 없다. 다만 헌책방 나들이를 통해 그의 책이 발견된다면 그걸 사보도록 하겠다. 그 책들은 그의 기록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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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5-02-07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내기를 책읽듯이 한다. -_-b

하이드 2005-02-07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고등학교때 뭔 멋이 들었었는지, 이문열 책 다 찾아 읽었었는데요, 요즘은 이문열 비판 속시원히한 책 있으면 끌리더군요. 이 책 궁금하네요.

마늘빵 2005-02-07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책내기를 책읽듯 한다는건 좀 심했나요? ㅋㅋ 사실 고등학교때 책에 관심을 가진 학생이라면 아무래도 유명한 소설가의 작품을 먼저 찾기 마련이죠. 전 그땐 책에 별로 그렇게 관심이 있지 않았답니다. 그때 이문열을 접하지 않은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이문열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강준만의 이 책을 권해드립니다. 더불어 이 책속에 소개된 다른 이의 이문열 비판에 대한 소개도 있어 이 책을 통해 다른 책으로 확장해나가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김승환 2006-04-12 0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이 강준만을 읽고 이문열을 읽지 않은 반면 전 강준만은 읽지 못했고 이문열은 거의 다 읽었습니다. 이문열의 소설을 읽으면 엄청난 수준의 지적 과시에 의해 의식있는 독자라면 반드시 좌절감이나 intimidation 을 느끼게끔 되있습니다. 이문열이라는 작가의 무의식 속에 내재된 지식 폭력의 의도가 그의 소설들을 통해 투영된 것이라고 짐작됩니다. 저도 의식없이 읽던 어린 시절에는 그의 소설의 마력과 흡입력에 매료되 그를 거의 숭배하다시피 했던 적이 있는데 지금와서는 그 영향력의 잔재에 의해 내 자신이 또 하나의 지식 폭력 가해자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을 목격 하며 몸서리 치게 됩니다. 님의 리뷰 잘 읽었구요 이 책을 한번 읽어봐야 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