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컬티. 영어 Faculty는 능력, 재능, 기능 이라는 의미 이외에도 교직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아마도 이 영화제목의 패컬티는 후자의 의미로 쓰인 것 같다. 이 영화는 한 고등학교의 교직원들이 외계생물체에 의해 정신을 지배받으면서 전개되기 때문이다.

우주의 어느 행성에 살던 외계생물체는 행성에 물이 마르자 살 수가 없어 지구로 왔다. 이 생물체가 처음으로 머문 장소는 해링톤 고등학교. 재정난에 허덕이며 학생들의 뮤지컬로 올리지 못하고, 미식축구에도 넉넉한 지원을 하지 못한다. 학교 컴퓨터가 낡아 교체해야하나 이것도 그저 바램뿐이다. 그러던 어느날 윌리스 축구코치가 드레이크 교장을 살해하고, 숙주를 심었다. 이후 다른 교직원들에게도 외계생물체의 숙주가 자리잡고 이들은 학생들과 지역주민들을 지배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7명의 아웃사이더 학생들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눈치채고 따로 모여 저들에 대항할 채비를 한다.

영화의 시나리오는 단순한 면이 없지 않지만 이 정도의 시나리오를 가지고 나름대로 긴박감 있게 사건을 진행시켜 그다지 오락영화로서의 지루함은 별로 없다. 특별히 세계적으로 알려진 스타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감독이 유명한 것도 아니다. <황혼에서 새벽까지>와 <스파이 키드>를 만든 감독인데 이 작품들도 그다지 큰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라고 본다면 말이다.

외계숙주에 대한 영화야 이제 질리도록 봤고, 이 정도의 시나리오는 영화를 보지 않아도 충분히 예상 가능하다. 단지 범인이 누구냐 하는 것이 영화를 끝까지 보게 만드는 힘이 될 뿐이다. 그럭저럭 괜찮은 영화다. 오락용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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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 김훈 世說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너는 어느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라는 책을 읽었다. 우선 제목이 참 길다. 하지만 매우 땡기는 제목이다. 제목만 보기에는 일종의 편가르기에 대해 다루고 있는 듯 하고,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에 대한 이야기들이 담겨있을 것 같다. 그리고 실제로 책 안에 그런 내용이 담겨 있다.

 원래 이 책의 제목은 이것이 아니었다.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가 원 제목이었는데, 출판사 측에서 책의 여러 글들을 아우르는 제목이 본 제목인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 보다는 <너는 어느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가 책의 메시지와 더 가깝다고 생각해 저자와의 협의하에 바꾼 것이라고 한다.

 사실 내가 봤을 때도 원제 <아들아... >로 했을 경우 책의 첫 몇몇 글들에는 부합할지 모르지만 이후의 다른 여러 글들을 아우르는 제목은 되지 못한다. 저자는 본래 자신의 아들이 이 글을 봐주기를 바라며 썼던 것 같지만 그것은 저자의 개인적인 생각이고, 전체적인 책의 내용과 이 책을 읽을 독자를 생각하는 출판사 입장에서는 달랐을 것이다. 책을 판매하는데 있어서도 본래의 제목보다는 나중의 제목이 훨씬 낫다. 나 또한 본래 제목을 달고 있었더라면 이 책을 구입하지 않았을 것이다.

 저자 김훈은 본래 한국일보 기자였고, 나중에는 시사 주간지 기자를 지냈다. 그리고 나이먹은 지금에 와서 쓴 소설 <칼의 노래>가 노무현 대통령이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안 심사 기간 동안에 청와대에서 칩거하며 읽은 책이라 하여 전국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각종 언론에 오르내리며 엄청난 판매부수를 올리게 되었다. 물론 순전히 대통령이 읽은 책이라해서 이만큼의 판매가 됐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일단 책을 알리는 결정적 계기가 된 것만은 확실하다. 이 책으로 인해 김훈은 2001년 동인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뒤늦게 독자들에게 다가간 셈이다.

 나는 <칼의 노래>는 읽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후속작 <현의 노래>는 읽었다. 그의 소설 속 문장들은 확실히 개성적인 그만의 문체를 지니고 있었다. 나는 소설을 많이 읽지는 않지만 소설가 중에서도 자신만의 문체를 지닌 소설가는 드물다고 본다. 그런데 김훈은 그의 첫 소설에서 그만의 색깔을 확실하게 보여줬다. 다른 여타 소설들을 잘 읽지 않는 나도 <현의 노래>를 통해서 그의 문체를 느낄 수 있었고, 이는 소설을 쓰기 전에 언론기자 생활을 하며 써두었던 칼럼모음집인 <너는 어느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라는 책을 통해서도 그 문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의 문장은 굉장히 짧지만, 힘이 있고, 은유적이면서, 체계적이지는 않지만 논리적이고, 삶에 기반한 생생함을 지니고 있다. 또한, 그의 문장은 고대 중국의 고전 속 문장을 읽는 듯 이리저리 휘돌아다니며 정곡을 찌른다. 아마도 그의 이런 짧고 강한 문장은 오랜 기자생활을 하면서 익히게 된 습관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의 문장은 이성적이지만 '머리'에 기반하기보다는 '가슴'에 기반하고 있다. 이 말은 어찌보면 모순적이다. 보통 머리로 사유한다는 것은 이성적이고, 가슴으로 사유한다는 것은 감성적이라는 뜻인데, 그는 분명 '가슴'으로 사유하면서도 그의 문장에는 이성적 논리가 담겨져있다. 그의 모든 글들이 그가 발로 직접 뛰며 경험한 것들이고, 아주 사소한 것으로부터 그는 넓고 깊은 사유를 전개한다. 그래서 그의 글은 나의 가슴을 자극한다.

 그는 얼마전 한국일보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자신의 정치성을 굳이 말하자면 '중도 우파'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회색분자가 많아야 좋은 세상이야. 회색과 중도가 깃발을 꽂지 않으면 우리사회는 어려워져. 그 깃발 아래 기회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이지만 양심적인 사람들을 데리고 가야 해. 그러면 희망이 있어. 중도란 인간의 상식이지.”

 그는 또한 그들은 물적토대를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에 좌익과 좌파가 세상을 맡아선 안된다고 하며 물적토대를 건설할 수 있는 것은 우익이라는 주장을 폈다.

 '중도좌파' 혹은 '좌파자유주의자'의 입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물론 그의 이런 발언들이 못마땅하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말에도 일리가 있어 보인다. 세상을 꾸려나가는 것은 낭만주의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니까.

 이 책에는 김훈이 그 당시의 크고작은 사회적 사건들에 대해여, 혹은 살아가는데 있어서 일어나는 주변의 일들에 대하여, 분노하고 느끼고 감동받은 것들이 고스란히 기록되어있다. 때로는 욕을 하듯 강렬하게 퍼붓기도 하고, 때로는 죽은 듯 고요하게 사색을 전개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쨌든 모든 글들에서 느껴지는 바는 '생생함'이다. 그는 이제 나이를 많이 먹었지만 아직 그의 머리와 가슴은 기운이 넘치고, 그의 문장과 글은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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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 김훈 世說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4년 3월
구판절판


"언어의 순결은 사실에 바탕한 진술과 의견에 바탕한 진술을 구별하고 사실을 묻는 질문과 의견을 묻는 질문을 구별하는 데 있다. 언어의 순결은 민주적 의사소통의 전제조건이다." ( <말하기의 어려움> 중)-65쪽

"몸속에는 산소가 가득 들어 있어야 하고 몸은 늘 민감하고도 정확하게 반응하는 감각들로 살아 있어야 한다. 글이란 '왜 쓰는가'에 대답하기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다. 글을 쓰는 일은 이 생기발랄한 몸의 살아있음을 입증하는 과정이다. 이 몸이 언어를 통해서 이미지에 가 닿을 때 그의 글은 가장 빛나는 문장을 이룬다. 문체는 몸의 일부이다. 몸이 이미지에 맞는 가장 정확한 문체를 포착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몸이 술과 담배에 절어 있어서는 끝장이다. 이 몸에 포즈가 배어 있어서는 다 끝난 것이다." ( <외로운 맹수, 소설가의 생존방식> 중)-138쪽

"무릇 사람에게는 그침이 있고 행함이 있다. 그침은 집에서 이루어지고, 행함은 길에서 이루어진다. 맹자는 말하기를 인은 집안을 편안케하고 의는 길을 바르게 한다고 하였으니 집과 길은 그 중요성이 같은 것이다. 길은 원래 주인이 없고 오직 그 위를 가는 사람이 주인이다."(신경준 <도로고>)-163쪽

"길은 그 위를 가는 자에게는 통로이지만, 길을 바라보는 자에게는 풍경이다. 그 풍경은 인간과 자연의 사이를 비집어가면서 가늘게 이어진다." (<길>)-1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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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서주의자의 책 - 책을 탐하는 한 교양인의 문.사.철 기록
표정훈 지음 / 마음산책 / 2004년 10월
품절


"나는 군중을 싫어한다. 군중이 모인 곳에서는 저항할 수 없는 신비한 영향력과 괴상하고 참을 수 없는 불편함을 느낀다. 사람이 혼자 있을 때는 지성적이지만 군중과 섞이면 지적인 창의력, 자유의지, 분별있는 사고력과 통찰력 등이 사라진다. 그래서 나는 축제가 벌어지는 거리에도, 극장에도 잘 가지 않는다." (모파상 인용)-49쪽

"한 권의 책은 한 명의 저자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수의 저자들을 갖는다. 그것은 그 책을 읽은 사람, 읽는 사람, 읽을 사람들 전체가 창조행위에 있어서 책을 쓴 사람에게 마땅히 보태어지는 까닭이다. 쓰여졌으나 읽히지 않은 책은 온전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반존재만을 가졌을 뿐이다."(미셸 투르니에의 <흡혈귀의 비상>에서)-130쪽

"모든 사물 현상과 세계를 정확히 알고 모든 문제를 투명하게 생각하고 풀어나가기 위해서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말의 의미를 정확히 규정해서 사용하는 일이다. 한 낱말의 올바른 의미규정을 개념이라고 부른다. 개념이 분명하면 할수록 그 대상에 대한 인식이나 사유는 그만큼 상대적으로 확실하고 분명해진다."(박이문 <사유의 열쇠>중)-222쪽

"책과 마주치는 기쁨은 사람과 마주칠 때의 기쁨과 똑같다. 독서의 기쁨은 해후의 기쁨이다. 그런데 모든 역사적 사건이 단순한 우연이 아닌 것 같이 독서에서의 해후도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해후란 말은 한편으로 어느 필연성을 뜻해야 한다. 완전히 우연하게 마주친 것 같지만 그것이 역시 필연이었다고 끄덕일 수 있는 것이 해후이기도 하다. 그것은 단순한 외적인 필연성이 아니라 오히려 내적인 필연성이다. 이래하여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해후했고, 괴테와 실러도 해후했다. 독서에서도 똑같이 혹은 스승으로서의 혹은 친구로서의 책과 해후하게 된다. 일생 이런 해후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많은 책을 읽어도, 결국 아무것도 안 읽은 것으나 마찬가지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그런 해후를 경험할 수 있을까? 스스로 구해야 한다. 구하는 것이 없는 자는 마주치는 일도 없을 것이다. 가령 마주친다해도 그것임을 모르고 지나칠 것이다." (미키 기요시 <독서론>)-121쪽

"결혼이란 최상의 칭호를 달아준다해도 일종의 독점이며 가장 불쾌한 것들 가운데 한 가지다. 세상의 신혼부부에 나타나는, 특히 신부의 얼굴에서 풍겨지는, 혼자 봐줄 수 없는 그 득의만면한 꼴하고 만족해하는 꼬락서리라니, 그 이상 나의 비위를 건드리는 것은 없다." (찰스램 <엘리아 수필집> )-124쪽

"내가 여태까지 이야기한 사람들보다도 더 무서운 약탈자가 있다. 바로 책을 빌려가는 족속들 말이다. 장서를 훼손시키는 자들, 서가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자들, 짝이 맞지 않는 책을 만들어내는 자들."(찰스램 <엘리아 수필집>)-124쪽

"책이 우리의 내면에서 활동할 때 우리는 조금도 수동적이지 않다. 책읽기는 무미건조한 일인가? 우리는 우리가 읽은 것으로 만들어진다. 까맣고 하얀 차원이 없는 철자들이 줄 서 있는 데서 우린 색깔을 만든다. 냄새와 동작, 그리고 울림을 만들어 낸다. 책에서 아픔과 불안이 나타날 경우 그것이 우리가 경험했던 아픔과 불안과 더불어 인생에 자극을 주지 못하면 책은 단지 종이로 남아 있을 따름이다."(마르틴 발저 <어느 책 읽는 사람의 이력서>)-130쪽

"내가 다른 사람들과 같은 정도로 책을 읽었다면 다른 사람들과 같은 정도에 머무르고 말았을 것"(토마스 홉스)-266쪽

"책읽기 가장 좋은 곳은 침상, 말안장, 화장실이다. 책 읽고자 하는 뜻이 진실하다면 장소는 문제될 게 없다." (송나라 구양수)-2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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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서주의자의 책 - 책을 탐하는 한 교양인의 문.사.철 기록
표정훈 지음 / 마음산책 / 2004년 10월
평점 :
품절


독서평론가 표정훈씨가 2004년의 10대 도서로 뽑은 책 목록에 자신의 저서인 <탐서주의자의 책>을 집어넣었다. 물론 책을 읽는 한 개인으로서 지극히 주관적인 관점에서 뽑은 약간은 장난끼어린 목록이었지만 그 안에 자신의 저서를 집어넣었다는 것은 그만큼 스스로의 책에 대해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표정훈씨는 사실 '독서평론가' 라는 직함외에도 번역가, 출판평론가, 칼럼니스트, 저술가, 작가 등 다양한 이름을 가지고 있고, 이는 어떻게 보면 한 분야에 대한 직업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뚜렷하지 못하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지만, 다르게 보자면 그만큼 활동영역이 넓고 각각의 분야에서 꽤나 비중있는 역할을 했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표정훈씨의 경우에는 후자로 해석하는 것이 맞겠다.

<탐서주의자의 책>은 표정훈 개인에 대한 자서전적 성격이 강하다. 서강대 철학과를 나와 성균관대 대학원 유학과에서 공부하면서 그는 책을 무수히도 많이 접했을 것이지만 이미 어린시절부터 그는 책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고, 어린시절부터 대학원을 졸업하기까지 꾸준한 책에 대한 관심을 통해 지금의 그가 있을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저자 스스로 이 책을 가리켜 "쓰고 말하여 표현하고 싶은 것, 되새김질하여 기억하고 싶은 것, 돌이켜보아 성찰하고 싶은 것. 이 책은 내가 표현하고(文), 기억하고(史), 성찰하고(哲) 싶은 것들을 적은 지극히 개인적인 문, 사, 철의 기록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스스로가 지금까지 봐온 책들 중 기억하고 싶은 것과 책에 대해 말하고픈 것들, 그리고 오랜동안의 책에 대한 사색의 글이 담긴 자서전인 것이다.

이 책에 담긴 단편적인 글들에서 느껴지는 것은, 저자는 굉장히 책을 사랑한다는 것이고, 책을 많이 읽었고, 책을 소유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물론 당연히 그의 직업이 서평가인만큼 이는 어디까지나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짧은 글들에서 느껴지는 그 지극한 책에 대한 사랑은 부럽기까지 하다. 나 역시 책을 사랑하는 사람 중 한명이지만 나는 그처럼 어린시절부터 책에 대해 관심을 갖었던 것도 아니요, 많은 책을 읽은 것도 아니요, 많은 책을 소유하지도 못했다. 고작 책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보인 것은 대학 3,4 학년때나 됐기 때문이다. 책을 좋아하는 이 치고는 참 늦다.

나는 저자의 책에 대한 이런 깊은 사유과 고민들에 질투가 난다. 이는 책에 대한 저자의 사랑의 깊이가 부럽고, 나도 그만큼이나 책을 사랑하고 싶다는 욕구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또한 그는 스스로를 '매문가賣文家'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직업으로서의 '서평가'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는 그는 내게 있어 되고픈 희망직이기도 하다. 물론 나는 표정훈씨만큼이나 잘 할 자신이 없어 그것만으로 밥벌어 먹을 용기는 감히 엄두도 나지 않아 '투잡스'로 다른 직업을 가진 채 서평가를 하고 싶다. 어쨌거나 그가 너무나 부러운 것은 사실이고, 평론가로서 자서전격 에세이를 펴 내 독자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다는 지금의 그의 위치가 너무도 부럽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생각지 못한 다양한 부분에 대해 나의 두뇌에 충격을 가해준 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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