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회를 다녀왔다. 종로에 위치한 피카디리 극장 개관기념 시사회였나보다. 26일에 개관을 앞두고 사람들에게 다시 극장이 열었음을 알리기 위한 시사회여서 그런지 같은 영화를 두고도 여러 상영관에서 동시에 시사회를 가졌다. 한국 영화관의 오랜 역사인 서울극장과 피카디리, 그리고 단성사. 이제 피카디리가 개관했고, 단성사 또한 맞은 편에서 공사 완공을 기다리고 있다. 이제 서울극장으로 편중되던 종로의 영화관객들이 세 곳으로 분류되면 한층 복잡스러움이 가실 것으로 여겨진다.

 영화 <노트북>은 정말이지 감동이었다. 다른 어느 로맨스보다도 깊은 여운과 잔향을 일으키는 영화였다. <병 속에 담긴 편지>와 <워크 투 리멤버>를 영화화 한 원작 소설가 니콜라스 스파크스의 또다른 원작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또 이 영화는 작가 스파크스의 장인의 실제 러브스토리라고 하여 더욱 감동을 배가해준다. 스파크스가 장인의 러브스토리를 듣고서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니 그에게도 이 작품은 이전 작품과는 다르게 다가왔을 것으로 보인다.

 17살 여름 어느 한 시골마을에 놀러온 도시 소녀와 목공 일을 하는 시골 청년과의 뜨거운 사랑. 그리고 7년간의 헤어짐. 재회. 그리고 사랑. 그 사랑이 맺어졌고, 두 노인이 함께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에서는 눈물이 흐른다. 힘겨운 사랑이었고, 힘겹게 맺어진 사랑이었던 만큼 이들의 사랑은 노년에 이르러서도 절실하다. 마치 17살 처음으로 두 젊은이가 사랑에 빠졌을 때처럼 말이다.

 7년간의 공백동안, 두 사람에게는 각기 연인이 있었다. 노아에게도 마을의 전쟁미망인이 있었고, 엘리에게도 돈많고 근사한 마음착한 청년 론이 있었다. 어쩌면 이들 두 사람은 노아와 엘리의 사랑으로 인해 상처를 받은 또다른 아픔의 주인공들이다. 엘리는 노아를 다시 만나기전까지 론을 무척이나 사랑했으니 론에겐 이 사실이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물론 노아에겐 언제나 미망인을 대함에 있어서도 그녀의 눈에서 엘리를 찾았지만 말이다.
 
 무척이나 감동적이었고 중간중간 간혹 두 사람의 서투른 행동과 엉뚱함 때문에 즐겁기도 했던 영화였다. 다시 보고픈 영화.

 P.S.
 뒷 좌석에는 어떤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 혼자 오셔서 영화를 봤는데, 아니 시사회를 어떻게 신청하고 오셨을까 하는 궁금증도 들었고, 그리고 왜 또 혼자오셨을까 하는 의문도 있었다. 이 할아버지는 영화 내내 "아 참 감동적인 영화야" "사랑은 저렇게 하는거야" "나도 17살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우리 지선엄마랑 함께 와서 봐야지" 등등의 영화해설(?)을 하는 바람에 영화에 감정몰입하기 힘들었지만 재밌기도 했다. 할아버지~ 늦지 않았습니다. 할머니와 이쁜 사랑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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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비효과. 고등학교 때 <카오스>란 책을 보다 알게된 이론이다.

 "중국 상해에서 나비가 날개짓을 하면 미국 뉴욕에서 태풍이 일어난다."

 카오스 이론은 98년 당시 수능문제지에 자주 등장하던 지문이었다. 기억이 새록새록. 아련한 먼 옛날이야기는 여기서 그만하고...

 영화 <나비효과>는 기대이상이었다. 정말 대단한 영화였다. 물론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의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 어떤 이들은 뭐 이런 영화가 있냐고 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극찬을 한다. 나는 극찬을 하는 입장이다. 놀라운 소재를 대중적으로 잘 풀어낸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처음에는 무슨 이야기인지 아리송하지만 영화가 진행되면 될수록 슬슬 감을 잡게 된다.

 이 영화의 제목이 '나비효과'인 것은, 주인공의 끊어진 기억이 6년후 10년후의 주인공과 친구들의 미래를 뒤바꿔놓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작은 일이 큰 일을 만들어낸다는 의미에서 쓰인 듯 하다.

 영화 속에서 켈리를 사랑하는 에반은 자신의 여러 기억의 통로를 통해 이동한 미래의 현실이 자신에게 혹은 켈리에게 너무나 암울한 것을 발견하고 다시 어린시절의 기억으로 돌아가 미래를 뒤바꾼다. 켈리는 때로는 에반과 사랑하는 대학생으로 나오고, 때로는 창녀로, 때로는 고향 음식접의 서빙녀로 등장하며 다양한 인생살이를 보여준다. 결국 에반은 켈리와 자신의 어머니, 그리고 그의 친구들의 온전한 삶을 위하여 켈리와 자신이 모르던 사이가 되는 길을 택하고 만다. 비록 사랑하는 켈리와 헤어지더라고 말이다.

 극장판에서는 에반이 켈리와 거리에서 스쳐지나가는 것으로 끝나지만, 감독판에서는 에반이 어머니 뱃속 태아로 돌아가 자살하는 것으로 끝난다고 한다. 전자가 좀더 로맨스적이고, 자연스럽다면, 후자는 스릴러적이다. 감독판은 후에 원하는 사람에 한해 디비디로 감상하고, 전자의 줄거리가 좀더 대중적 인기를 끌기에는 적합한 듯 하다.

 오랫만에 대단한 영화를 본 느낌이다. 영화 팜플렛에 나온대로 이 영화는 <메멘토>와 <매트릭스>를 섞어놓은 듯한 대작이다. <메멘토>의 단점은 영화를 여러번 봐도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감지하기가 쉽지 않은 반면, <나비효과>는 영화가 의도하는 바가 뚜렷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좀더 대중적이라고 볼 수 있다.

 <나비효과> 강력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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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04-11-23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본 게 감독판인 모양이네요 감독판이 훨씬 나을 것 같은데요? 뱃속에서 죽은 걸로 끝나야 점성술사가 영혼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한 게 맞죠^^
 
칸트 평전 - 한 꼬마가 세계적 현자가 되기까지 미다스 휴먼북스 10
만프레트 가이어 지음, 김광명 옮김 / 미다스북스 / 2004년 5월
평점 :
절판



 

 칸트의 사후 200주년을 기념하여 세계적으로 동시 출간되는 로볼트 출판사의 <칸트 평전> 한국어판인 이 책은 칸트의 일대기를 다룬 전기라고는 하나 쉽게 읽히지 않는다.

 저자는 미국의 촘스키 언어학을 공부한 철학자이며, 역자는 나의 학과 선생님이신 김광명 선생님이다. 김광명 선생님은 서울대 철학과와 같은 대학원 미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뷔르츠부르크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한국칸트학회 회장을 지냈으며, 우리학교에서 칸트를 가르치시고 있다. 그래서 더욱 눈이 가는 책이다.

 선생님께서는 수업중에도 칸트의 생활상의 에피소드를 가끔씩 말씀해주시곤 한다. 이의 연장이라고 생각하고 <칸트평전>을 읽어봤다.

 일단 이 책을 다 읽고 난 뒤의 느낌은 어렵다다. 나는 석사과정생이 아니라 칸트를 전공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철학을 전공하고 있고, 그래도 서양철학에 더 관심을 가지고 4년을 보냈음에도 칸트는 잘 알지 못한다. '칸트연구'라는 수업을 들었음에도, 칸트는 헤겔과 더불어 알기 어려운 철학자 중 하나이다. 오히려 헤겔보다 칸트는 더 어려워 보인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은 정말이지 무슨말인지 모르겠다.

 전기이지만 칸트의 생활상보다는 그의 학문적 줄거리에 촛점을 맞추고 있는 탓에 칸트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어렵고 지루하다. 지나치게 칸트의 학문적 업적이나 다른 철학자들과의 관계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후반부에 칸트의 생활상에 대해서도 나오기는 한다.

 칸트의 일생은 생의 말미에 좀 풀리기는 했지만, 그가 교수직을 얻기까지는 너무도 암울했다. 그는 교수직에 여러번 도전했지만 번번히 실패했고, 계속해서 방 두개짜리 조그마한 집에서 세를 얻어살며 생을 근근히 이어가야했다. 칸트는 3살과 22살에 어머니와 아버지를 모두 잃고, 홀로 생활해야했다. 국가에 의존하지 않고자 학비를 벌기 위해 개인가정교사 생활을 시작했고, 그의 생활은 가난의 연속이었다. 물론 나중에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서 형이상학 논리학 교수직을 얻은 뒤로는 대체로 경제적으로도 여유있는 생활을 했고, 말미에 가서는 아무도 보지 않는 어려운 책인 <순수이성비판>을 우여곡절 끝내 출판하기도 했다. 물론 이는 시간이 지난후에 정당한 평가를 받았지만 말이다.

 칸트의 고독한 생활에 대해서는 익히 알려져 있다. 칸트는 누이와도 25년간 연락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결혼을 해서 부인과 자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사교적인 생활을 좋아해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해 이야기를 나누길 즐겼다.

 칸트의 결혼에 대한 에피소드를 번역자인 김광명 선생님으로부터 들었는데, 이 책에는 그 재미난 이야기가 나오지 않아 아쉬웠다. 어쩌면 그것은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칸트는 사귀던 여자에게 청혼을 받았는데 그는 이 결혼을 해야할지 말아야할지 몰라 도서관에서 한참을 고민하다 나왔더니 이미 여자는 결혼한 뒤였다 라는 이야기가 있다. 칸트의 철학의 성격과 그의 생활상의 성격이 들어맞는 절묘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체계적이고 이성에 의한 명석판명함을 좋아했던 그는 시간 약속에 있어서도 철저했다고 한다. 밥을 먹고 산책을 하고 독서를 자고 자고 일어나는 시간들이 매사에 정확했다고 한다.

 서양철학에 있어서 모든 철학은 플라톤의 주석이다, 라고 말한 화이트헤드의 말도 있지만, 같은 의미에서 칸트의 이후의 철학은 모두 칸트의 주석에 불과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해본다. 키에르케고르는 <철학적 단편>이라는 책에서, 리오따르는 <차이>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칸트의 윤리학적 측면을 고려한 것으로 보여진다. 어쩌면 칸트의 영향력이 그만큼 크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철학함에 있어 플라톤만큼이나 칸트를 알아야하는지도 모른다.
 
p.s. 나는 대체로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탓에 어느 한 친구로부터 "니가 칸트냐?"라는 말을 자주 듣곤 한다. 그럴때마다 난 웃곤한다. 내가 아무리 규칙적이라 할지라도 칸트를 따라갈 수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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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지도 - 동양과 서양, 세상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선
리처드 니스벳 지음, 최인철 옮김 / 김영사 / 2004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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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간지 서평란에 소개된 글을 보고 점찍어놨다 구입하게 된 책이다. 구입한지는 한달도 더 됐지만 이제서야 보게됐다.

 실제 <생각의 지도>라는 이 책의 제목은 그럴 듯한 대단한 뭔가를 담고 있지는 않다. 마치 동양과 서양의 사고방식을 꿰뚫는 어떤 성찰을 담아내고 있을 것 같은 책의 제목은, 그러나 사실상 책을 열어보면 그다지 기대했던 바에 못미침을 알게 된다. 한마디로 책에 실망했다. 그것은 책 제목을 통한 나의 기대감이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나쁜 책'이라는 말은 아니다. 단지 나의 기대에 못미쳤다는 것 뿐이다.

 <생각의 지도>는 미국의 심리학자인 리처드 니스벳이 쓰고, 그의 제자인 서울대 심리학과 최인철 교수가 번역했다. 아무래도 저자의 밑에서 공부한 사람의 번역이라 저자를 오해했을 가능성이 없다는 점에는 안심해도 좋다. 대개의 '번역'이란 저자의 실제 의도와 번역자의 해석간의 차이를 항상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 간극을 줄여 저자의 말을 효과적으로 독자에게 전달했다면 잘된 번역이지만, 간극을 좁히지 못했다면 좋은 번역이라 할 수 없다. 일단 번역은 믿고 가자.

 동양의 사고 방식과 서양의 사고 방식. 저자는 책의 서문에서 그리 말한다. 다른 이들은 모두가 누가 알려준 것은 아니지만 동양과 서양의 사고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고 대강의 차이점을 감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가 하는 바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은 채 어떤 '감'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저자와 그의 연구진들은 이러한 차이를 구체적이고 객관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각종 실험을 한다. 그리고 실험결과를 통해 동서양의 사고방식의 차이를 도출한다.

 동양과 서양의 사고방식의 기준은 문명과 문화다. 사고방식이라는 것은 각기 그 사람이 발붙여 사는 땅의 문명과 문화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한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살고 있는 사람, 혹은 애초 미국에서 태어나 계속 미국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의 경우에는 동서양의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서양의 문명이라는 것은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시작되며, 동양은 중국에서 시작된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어떤 단체와 조직보다 개인의 행복에 사람들의 관심이 모아졌으며, 따라서 어떻게 하면 행복한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한 연구를 했다. 그리고 행복이란 '아무런 제약이 없는 상태에서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며 탁월성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리스 인들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 탁월성에 도달하고자 했다. 

  반면, 동양의 문명의 시점인 중국에서는 '행복'이란 '화목한 인간관계를 맺고 평범하게 사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개인의 탁월성을 추구하기보다는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서의 우애와 관계를 중시했고 튀지 않는 행동을 하려고 노력했다.

  이로부터 서양에서의 권리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할 수 있는 권 리'이지만, 동양에서으 권리는 '공동체 전체의 권리 중 자신의 몫을 담당하는 것'이라는 개념이 확립된다.

 대략적인 동서양의 차이점을 말해보자면 이렇다.

 동양인은 사물을 볼 때 전체 속에서 조화를 중시하며, 서양인은 각 사물의 개별성을 중시한다. 따라서 어떤 풍경을 보여줬을 때 동양인은  풍경의 전체적인 구성을 쉽게 기억하지만 서양인은 특별한 사물 하나에 집착한다.

 또, 교실에서 동양에서는 '왜'라는 질문보다 '어떻게'라는 질문이 더 많이 오가며, 서양에서는 '어떻게'라는 질문보다 '왜'라는 질문이 더 많이 오간다. 이는 서양인들이 사건을 인과관계에서 보기 때문이다. 목표지향적 사고를 하는 이들에게는 결과의 원인이 무엇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반면에 동양에서는 사건속의 인물과 사건정황과의 관계적 맥락을 중시하기에 그러한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에 관심을 가진다고 한다.

  이 책에서는 이외에도 수없이 많은 실생활의 부분의 경험을 통해 동서양의 차이를 도출해내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동양인은 꼭 그러한 사고를 하고, 서양인은 꼭 이러한 사고를 한다, 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단지 동서양인의 '경향성'을 도출한 것이지 어떤 특정 개인의 성향을 가리킨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동양인이면서 서양인보다 더 서양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렇기에 이 책의 결과를 통해 나는 동양인이니까 이런 거구나 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한가지 덧붙이지만 저자 역시 책 뒤에서 잠깐 언급하고 있기는 하지만, 섀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과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문명의 종말>과 함께 읽으면 동서양의 문화적 차이를 세계정세와 연관지어 보는 시각이 생길 수도 있겠다. 더불어 내가 한가지 더 추천하고자 한다면, 나 역시 읽지 않은 책이지만 하랄드 뮐러의 <문명의 공존>도 함께 읽으면 <문명의 충돌>에 맞서는 다른 견해를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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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엇? 지킬박사 하네? 하고 케이블 티비를 한동안 응시하고 있었는데 이상하다. 내가 알고 있던 영화랑 틀린 것이다. 제목만 같고 내용은 다른 하지만 역시 이 영화에서도 지킬박사는 등장하는 홍콩액션영화였다. 하필 제목을 똑같이 할 건 뭐람 하면서 계속 보긴 했지만, 그래도 원작을 보지 못한 아쉬움만 커졌다.

 이 홍콩액션영화에서의 지킬박사는 아내와 함께 홍콩에 신혼여행을 왔다가 홍콩 갱단에게 장기를 빼앗기고 죽음을 당한다. 하지만 관광가이드를 가장한 한의사이자 무술가인 할아비의 도움으로 지킬박사만 살아나고 폭발로 손상된 얼굴을 새로이 성형해 다른 사람으로 태어나게 만든다. 지킬은 할아비에게 한의학과 무술을 배우면서 복수를 하게 되는데...

 그런데 홍콩에 전설로만 알려졌던 미국의 배트맨이나 슈퍼맨과 같은 정의의 사도인 '호랑이'가 할아비였던 것이고, 이후의 호랑이는 바로 지킬이었던 것이다. 지킬은 그렇게 복수를 함과 동시에 홍콩의 호랑이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그다지 별 볼 것 없는 액션영화이고, 본래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 영화에서의 그런 이중적인 인간상을 보여주기보다는 오락적인 액션에 치중함으로써 단지 유명 영화의 제목을 따왔다는 인상을 풍기기만 했다. 그냥 오락용 영화로 애써 찾아보진 않아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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