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출처 : http://www.empas.com

 흔히 책의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책을 다 보지 않고도 책의 목차만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대개의 영화는 영화제목만으로 영화내용을 알기는 어렵다. 물론 대놓고 이 영화는 어떤 영화다 라고 말해주는 경우도 있긴 하다. 오늘 본 영화 <바버샵>이 그렇다. 해석하면 '이발소'다. 우리에게 있어서 '이발소'는 참 퇴폐적인 냄새를 풍긴다. 과거에는 그저 아저씨들이 머리카락 손질하는 곳, 면도하는 곳 정도로 생각되었지만 언제부턴가 이 이발소는 이발소의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는 곳이 아닌 퇴폐윤락업소의 다른 이름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영화 <바버샵>의 '이발소'는 남자들이 머리카락을 자르고, 면도를 하는 곳이 맞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곳은 시카고의 우울한 흑인동네의 컨트리클럽의 역할을 해주고 있다. 하지만 이발소 주인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할아버지 대에서 이어져 내려오던 이발소를 고리대금업자에게 팔아버리고 난 뒤에야 깨닫게 된다. 결국 그는 이발소를 자기집처럼 편히 드나드는 그곳 사람들을 가만히 보게 되면서 이를 깨닫게 되어 결국 이발소를 다시 찾게 된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 대부분이 흑인이다. 물론 백인도 있지만 그 백인 역시 흔히 말하는 흑인과 백인을 구분짓는 얼굴색이 아닌 뭔가 가지고 있는 자와 못 가진 자의 기준을 적용했을 때 이발소에서 일하는 백인은 '흑인'으로 분류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에 나오는 인물은 모두 흑인이다. 이발소 안에서의 다양한 개성과 삶을 가진 사람들의 정신없는 대화 속에서 이들의 삶의 애환과 희망을 느낄 수 있다. 그들은 누구보다 진솔하다.

 영화는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미국 개봉당시 2003년 9월에 두주간이나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던 작품이다. 사실 이 영화가 그리 대단해보지는 않는다.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할 만한 영화도 아니라고 보여진다. 그러나 감동적인 영화인 것만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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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갑내기 과외하기>의 김경형 감독의 코믹작품, <라이어>. 역시 <동갑내기 과외하기>에서 보여주었던 그의 특유의 자연스러운 웃음이 <라이어>에서도 적용되었다. <라이어>는 물론 이전작품에 비해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약간은 어딘가 엉성해보이는 스토리에 그다지 짜임새를 가지고 있지도 못했다. 하지만 사건이 점점 커질수록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상황 속에서 억지스럽지 않은 매끄러운 웃음 유발이 좋았다.

 순수 코미디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관심있게 영화를 보면서 웃는 일은 거의 없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쇼파에 누워 키득키득 거리며 웃게 되는 것은 그만큼 자연스러웠다는 증거일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라이터를 켜라>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라이터를 켜라>는 내가 본 최악의 영화였다. 억지스러운 상황연출과 웃음. 정말이지 내용도 없는 영화에 웃음까지 억지스러우니 볼 거 다 본 영화다. 어쩌면 <라이어> 또한 그와 비슷한 결과를 얻을 수도 있었다. 내용이 없다는 점에서... 하지만 자연스러운 웃음 유발이 이 영화를 살려냈다고 본다.

 "거짓말은 더 큰 거짓말을 부른다."
 "정직하게 살자."
 라는 교훈 아닌 교훈을 주는 영화다.

 주진모와 송선미, 서영희의 연기도 좋았고, 감초역할을 해주는 공형진과 손현주, 임현식의 연기도 볼만하다. 단, 영화 도입부에 나오는 섹스장면이 단지 앞에서 흥미를 끌기 위한 짧은 컷이었다는 점이 끝내 아쉽다. ^^; 끝까지 기대하며 봤지만 섹스장면은 그게 끝. 기대하지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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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불평등 기원론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27
장 자크 루소 지음, 주경복 옮김 / 책세상 / 200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장 자크 루소. 그의 이름을 어설프게나마 접한 것은 고등학교 사회 혹은 정치경제 시간이었으리라. 루소가 어쩌고, 로크가 어쩌고, 홉스가 어쩌고, 볼테르, 몽테스키외 등등의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이름과 그들의 저작을 짝짓기 하며 외우고 있을 때 나는 그냥 이들의 이름과 저작의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그냥...

루소를 제대로 다시 접한 것은 대학 2학년 서양근대철학사 시간. 그러나 철학에서 루소는 칸트나 헤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거대한 사상가 그룹에는 속하지 않았던지라 이때도 그저 어설프게 지나갔다. 그리고 지금 대학 4학년. 나는 루소의 정치철학에 대한 학사논문을 쓰기로 마음 먹었다. 그리고 그의 저작을 하나하나 읽어가면서 책세상 문고에서 나온 얇은 <에밀>을 읽고, 역시 동일 출판사에서 나온 문고판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읽었다. 다음의 독서계획은 역시 그의 <사회계약론>이다. 책세상문고에서 <언어기원에 관한 시론>이라는 그의 또다른 저서가 나오기는 했지만 이는 정치철학과는 거리가 멀다 싶어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본래 <언어기원에 관한 시론>은 루소가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쓰면서 함께 언급했던 것인데 그 내용이 이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하여 따로 떼어 다시 쓴 것이다.

고등학교 때 루소를 알고 있던 것은, 그가 인간은 본래 악하다는 홉스의 견해에 맞서 인간은 본래 선하다는 성선설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장 자크 루소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인간은 자연상태에서 선악의 개념을 모르고 있는 백지상태에 불과했고, 따라서 인간은 본래 악하다는 홉스의 주장에 정면으로 반박한다.

인간은 본래 평등하게 태어났으나 어느 순간부터 불평등해졌다. 그는 인간은 본래 자연상태에서 따로따로 행동하며 살았으나 이들이 함께 모여 집단을 구성하면서 그들간의 계급이 생겨났고 따라서 누구는 핍박받고 누구는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불평등이 생겨났다고 한다. 또한 문명화된 사회에서는 예술과 학문, 문화가 발달해 사치가 극성을 이루고 이런 사치는 인간을 악하게 만드는 근원이 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인간은 한번 악해진 다음에는 다시 선한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고 하였다. 18세기 당시에는 이러한 평등과 불평등의 관계를 따지는 것은 매우 급진적인 생각이었고 루소의 생각은 지금 사회에서도 급진적이다. 그는 같은 계몽주의 사상가 라는 그룹에 속하는 볼테르, 디드로와 친분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이 저작으로 인해 볼테르로부터 '거지철학'이라는 비판을 받아야 했다.

루소가 볼테르로부터 이런 비판을 받았다는 대목은 그저 흘려버릴만한 대목이지만, 루소와 볼테르 둘 다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가슴 아픈 일이다. 볼테르의 <관용론>에도 나는 굉장한 매력을 느꼈고 그의 관용론이 현대 사회에, 우리나라에, 지금 이 시점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졌고,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 나타난 그의 생각 또한 지금에서 다시 되돌려볼만한 요소가 많다고 보기 때문이다.

당시 주민은 네 가지 계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위에서부터 순서대로 시민, 부르주아, 주민, 하층원주민이 그것이었는데, 루소는 최하층에 속하는 계급이었고, 따라서 그러한 환경적 영향이 루소가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쓰는데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루소는 사실 당대에도 이 저작으로 인해 대단한 주목을 받기도 했지만 주목을 받았지 칭송을 받지는 못했다. 그가 칭송을 받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 혁명이 이루어진 뒤였다. 프랑스 혁명의 힘을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그는 사후에야 제대로된 평가를 받았던 것이다. 대개의 위대한 사상가들이 그렇듯이 말이다.

사실 이 저작은 그다지 체계적이고 눈에 쏙 들어오는 글은 아니다. 번역자는 '더 읽어야 할 자료들' 도입부에서 이 저작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은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지만 그리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우선 <사회계약론>등에서 구체화되는 루소의 정치사상 체계의 서론적 성격을 갖는 저작이라 아직 체계성이 부족하다는 점이 그 이유가 된다. 또한 저자의 난해한 문체 때문이기도 하다."

루소라는 이름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들이라면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고, 이 저작 <인간 불평등 기원론>의 제목 또한 들어봤을 법하다. 하지만 실제로 수많은 고전 중 이 책이 그리 많이 읽히지는 않는 듯하다. 물론 번역본의 부재도 그에 한몫을 했을 것이나 이번에 책사상문고에서 번역본이 나왔으니 관심있는 사람들은 꼭 읽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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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를 보지 않아도 대충 어떤 내용의 영화이겠거니 짐작이 가는 영화. 그리고 영화를 본 뒤에도 역시 그랬군 하고 영화보기전의 예상을 다시 확인하는 영화. <우리형>은 그런 영화다. 잔잔한 감동을 기대했고, 역시 영화는 튀지 않고 무난하게 잔잔했다. 함께 영화를 본 무리 중 어떤 이는 사람이 죽기 때문에 다소 놀랬다 라고 하기도 하지만 내게는 그냥 그렇게 잔잔했다. 그래서 특별함이 없기에 대박날 영화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감성을 건드리는 영화이기에 실패할 위험부담도 적은 영화다. 신인영화감독 안권태는 그래서 무난한 출발한 셈이 됐다.

 감독이 신인이기에 감독은 위험부담이 적은 영화를 만들어야했고, 무난한 줄거리에, 영화 친구를 연상케하는 구수한 부산사투리, 그리고 원빈과 신하균이라는 뛰어난 배우를 집어넣음으로써 안전빵에 들었다.

 흔히 '언청이'라고 불리우는 선천성 기형아인 형은 항상 공부 1등을 도맡아 한다. 하지만 그의 동생 종현이는 싸움이 1등이다. 그래서 학교에서의 이들의 별명이 '형제는 용감했다'다. 둘이서 공부와 싸움으로 학교를 주름잡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맞짱대결에서 종현에게 모래를 뿌려 비겁한 술수를 쓴 상대방에게 종현이 두들겨맞자 싸움도 못하는 성현은 동생을 구하기 위해 달려들어 물씬 두들겨 맞는다. 이 장면에서 정말 '형제는 용감했다'.

 이들의 어머니는 일찍 남편을 잃고 억척스럽게 살아가며 둘을 키워냈다. 형인 성현이 수술을 정기적으로 받아야하기에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어머니는 형을 끔찍이 아끼지만 동생에겐 차갑다. 종현은 언제나 그런 어머니가 밉다.

 하지만 성현은 자기가 먼저 좋아하기 시작한 미령이를 종현이가 찜하고, 자기가 그리고 써놓은 시를 찢어가 미령이에게 주며 둘이 친하게 되자 화가 난다. 종현은 성현의 이런 마음을 알고 자신을 좋아하는 미령이를 떠나보낸다.

 성현은 고교졸업후 서울대 의대에 들어갔고, 종현은 재수를 하다 때려치고 깡패인 미령의 오빠 밑으로 들어가 동네 사람들이 빌린 돈을 받아내는 일을 한다. 친했던 두식이네 집을 발칵 뒤집어 놓고 돈을 받아냈지만 마음은 너무 아프다. 그래서 일을 그만두지만 미령오빠가 그냥 놔둘리 없다. 비오는 날 실컷 두드려맞고, 한편에서는 종현에게 맞았던 두식이가 종현이 즐겨입었던 옷을 입고 걸어가던 성현의 머리를 돌로 내리찍어 죽인다. 성현이가 종현인줄 알았던 것이다. 두식이는 결국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친구인 성현이를 자기손으로 죽여버린 셈이 되었다.

  결국 성현이는 종현이로부터 "형"이라고 듣고싶었던 하나뿐인 소원을 듣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가버렸다. 종현이는 비로소 종현이가 죽은 뒤에야 "형"이라고 부른다... 우리...형...

P.S.

  <우리형>에서는 로맨스의 비율은 그다지 크지 않다. 종현이 미령을 떠나보낸 뒤 언젠가 다시 등장할 것 같았던 미령은 이제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이후의 구도는 순전히 형제에게 집중된다. 로맨스는 그냥 양념정도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미령의 역을 맡은, 장길산 귀례아기씨 이보영은 첫 영화출연을 무난하게 소화해냈다. 영화를 보면서 어디서 많이 봤다 싶었는데 장길산의 귀례아기씨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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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후사 2004-10-10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곽경택 일파가 만드는 부산 사투리 시리즈는 정말 싫답니다.

마늘빵 2004-10-11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오랫만에 오셨네요. 부산 사투리에 대한 안좋은 기억이 있으신가요..? 좋고 싫고는 취향문제인듯... 지역의 정치적 성격과는 달리. 아마도 님은 정치색때문에 그런것 아닌지... ^^;

노부후사 2004-10-11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치적 색깔이니 하는 거창한 이유와는 무관하고요. 저는 경상도 사투리의 억양이 무섭답니다. ^^;
 

 

 

 

 

영화 <빌리지>를 봤다. 이 영화에 대해 알고 있던 사전지식은 영화 <식스센스>의 감독이 만든 영화라는 것 하나! 그 영화에서의 의미심장함, 반전 등을 기대하고 관람에 임했다. 그리고 결과는 그럭저럭 만족한다. 이 영화를 이미 본 다른 관객들의 평을 보면 '최악 중의 최악'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이 영화에 어떤 극적인 반전이나 긴장감 등이 살아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이 영화는 영화 <도그빌>을 보는 듯 했으니까 말이다. 사실 <빌리지>를 통해 <도그빌>을 떠올리다는 것은 좀 무리일 수도 있다. 도그빌에서는 영화촬영의 배경이나 장소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없는 캄캄한 공간에 하얀색으로 선을 그어 영역을 표시하고 그 안에서 사람들과 만나며 이루어지는 사건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빌리지>의 공간적 영화배경은 극히 한정되어 있다. 왜냐하면 영화자체가 고립된 숲속 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더 이상 공간확장을 한다면 이 영화는 전제를 무시해버리게 된다. 하지만 다른 이들의 혹평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영화에 상당한 만족감을 느낀다.

 사방이 모두 숲으로 덮힌 코빙톤 우즈라는 마을에는 소수의 가족들이 각자 자녀를 낳고 자립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들은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하지만 그 어느것 하나 부족함을 느끼거나 심리적으로 불행하거나 하지는 않다. 그야말로 지상낙원인 것이다. 이 지상낙원은 1897년 산업화가 진행된 19세기 후반 사람들의 이기심과 정신의 황폐화, 사회부패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상처를 받은 가족들이 모여 만들어진 공동체이다. 하지만 이 숲을 벗어나면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들은 알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단 한번도 숲의 경계를 넘어선 적이 없다. 이 괴물은 '빨갱이'는 아니지만 붉은 색을 좋아해서 마을에서는 절대 붉은 꽃을 기를 수 없고, 어떤 붉은 색도 용납되지 않는다. 마을의 대소사는 마을의 원로들이 모여 결정한다.
 
  그러던 어느날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노아를 치료하기 위해 루시우스는 인근 마을로 가서 치료약을 가져오겠다고 자청한다. 숲을 가로질러서 말이다. 하지만 원로들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루시우스는 단독으로 경계선을 넘었다가 두려움에 다시 돌아온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이후 마을에 괴물이 나타나 집집마다 문에 빨간색으로 선을 그어 경고를 하고, 가죽을 벗겨 죽인 산짐승들을 각집의 문에 걸어놓기까지한다. 사람들은 괴물이 마을을 해칠 것이라며 두려워한다. 한편 아이비와 루시우스가 결혼을 하기로 약속하자, 아이비를 짝사랑했던 노아는 루시우스를 칼로 찌른다. 앞이 보이지 않는 아이비는 인근마을로 가 루시우스를 살릴 약을 구해오겠다고 자청한다. 원로들중 한명인 아이비의 아버지는 괴물에 대한 소문은 모두 거짓이며 지금까지 원로들이 아무도 마을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거짓말을 했음을 밝힌다. 하지만 아이비가 가는 숲길에서 괴물은 나타나고 아이비에 의해 구덩이에 떨어져 죽는다. 그러나 그 괴물은 노아였다. 앞이 보이지 않는 아이비는 그것이 노아라는 사실을 모른채 약을 구해 돌아오고, 결국 실제 거짓이었던 괴물의 존재는 사실이 되어버린다.
 
 왜 워커는 아이비가 다른 마을에서 약을 구해오는 것을 허락했는가? 이 마을에 정착한 1세대는 각자 산업사회와 문명의 폐해를 피해 이곳으로 왔지만, 결국 이곳에서도 노아에 의해 살인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저 평화롭기만 할줄 알았던 고립된 이 숲에서 살인이 일어나자 자신들이 세운 지상낙원이 더이상 '지상낙원'으로 존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유일하게 루시우스를 치료할 약을 구해오도록 허락했던 것이다. 계속해서 이 마을이 지상낙원으로서 독립된 공간으로 유지되려면 말이다.

 <빌리지>는 단지 문명사회를 비판하기 위해 만들어진 영화는 아닌듯 하다. 오히려 그에 반해 세워진 독립된 지상낙원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다루고 있으니 말이다. 결국 고난끝에 이 마을은 계속해서 지상낙원으로서 존재하게 되지만, 지상낙원에서 조차도 문명사회의 폐해를 피할 수는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영화는 매우 단조롭고 지루하기까지하며 특별한 긴장감을 주지는 않지만 많은 의문을 품게 만든다. 그리고 그 의문에 관객 스스로가 대답하면서 깊은 사유로 나아가는 것이다. 좋은 영화는 화려하고 웃기고 감동적인 영화일수도 있지만, 학문에서의 '철학'과도 같이 새로운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런면에서 이 영화는 좋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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