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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의 심리학 -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6가지 불변의 법칙 설득의 심리학 시리즈
로버트 치알디니 지음, 이현우 옮김 / 21세기북스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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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설득의 심리학>, 로버트 치알디니 저, 이현우 역, 21세기북스

<아침형 인간>에 이어 그다지 마음에 끌리지도 않는 책을 연달아 두권이나 봤다. <설득의 심리학> 역시 최근 베스트셀러 자리에 올랐던역시 '처세술'에 관련된 책이다.

좋다. '설득'은 '타인으로 하여금 나의 의견을 수용하도록 해 타인이 내가 의도한 행동을 하게끔 만드는 것'이므로, 사람과 사람의 의사소통을 전제한다는 점에서는 매력적인 소재다. 한번 읽어보자.

그러나 나는 이 책을 채 절반도 읽기전에 내 손에서 놔야했다. 도저히 끝까지 읽어줄 수가 없었다. <아침형 인간>은 끝까지 읽었지만, 이 책만큼은 끝까지 읽을 수가 없었다. 이 책은 <부자아빠 가난한 아빠>를 떠올리게 했다.

이 책에서 거의 대부문의 사례에서 '설득'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소비자'요, 설득하는 자는 '판매자'이다. '설득'의 목적이 '타인으로 하여금 내가 원하는 행동을 하게 만드는 것'이 맞기는 하지만, 이 책에서의 '설득'의 목적인 좀더 한정적으로 사용되어 오로지 물건을 '판매'하는데에 집중하고 있다. 사람과 사람간의 의사소통의 하나인 '설득'조차도 그저 '물건을 사고 팖'이라는 부분으로 제한적으로 정의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나만의 편견일지도 모른다.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설득'의 비법을 굳이 '판매'라는 상황으로 축소시켜야하는 것은 왜일까? 책의 저자는 심리학과 교수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이 책은 경영학의 관점에서 쓰여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은 왜일까? 책을 팔아먹기에는 심리학적 관점보다는 경영학적 관점이 좀더 나았던 것일까?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불쾌함을 억누를 수 없었다. 괜한 흥분일지도 모른다. 내가 너무 민감한 것일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불쾌함을 가지고 이 책을 끝까지 읽어줄 수 는 없었다.

물건 팔아야하는 장사꾼들에게는 이 책이 유용할지 모르지만 '설득'이나 '심리학'이라는 주제로 진지한 성찰을 기대한 독자에게는 이 책은 '썩은 사과'이다. 책의 제목만 보고 읽기를 시도한 나의 탓도 있지만, 진지하지 못한 주제로 마치 진지한 척 하는 책의 모습은 반갑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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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04-11-15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건 안 읽고 (세일즈맨이 읽어야 할 것 같아서) "대화의 심리학"을 읽었는데 그건 도움되는 얘기들이 많았어요 물론 제 삶에 적용시키지는 못했지만^^

마늘빵 2004-11-15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그럼 그 책을 시도해볼까요
 
사르트르 한길로로로 46
발터 비멜 지음 / 한길사 / 1999년 8월
평점 :
품절


최근 며칠 도서관을 다니면서 빌린 책이다. 우리에게는 '실존주의 철학자'로 알려진 프랑스의 근대 철학자 사르트르의 일상과 그의 저서에 관한 축약적인 이야기다.

이 책의 순서는 사르트르의 저서가 출간된 순서에 따르고 있다. 물론 여기에 소개된 작품들이 그의 모든 저서는 아니다. 가장 유명한 실존주의 소설 <벽>과 <구토>가 빠져있고, 철학적 작업들 또한 생략되어 있다. 단지 그의 생애를 차근차근 살펴감에 있어 도움이 되는 작품들을 중심으로 시간의 순으로 나열했을 뿐이다. 그의 작품은 희곡, 잡지, 소설 등의 장르를 넘나들며, '글'로써 씌여지는 모든 형식에 대해서 그는 가로지르기를 하고 있다. 각종 비평과 철학논문, 소설, 희곡 등에서 그의 글빨은 위력을 발휘했다.

사르트르의 부인이자 유명한 작가이기도 한 시몬 드 보부아르는 열다섯 살 이후(1929년)의 사르트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르트르는 글을 쓰기 위해 살았다. 그는 모든 일의 증인이 되어, 필연성에 바탕으로 그 일들에 대해 사유하며, 그것들을 새롭게 창작할 수 있는 천부의 갖고 있었다."

나아가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새롭게 창조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창조는 부분적으로는 우리들의 작품이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고작 책 속에서만 그러한 새로운 창조에 기여할 수 있을 뿐이다."

사르트르는 1905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해군장교였으나 사르트르가 두 살때 해외에서 병으로 죽었다. 어머니는 사르트르가 열 두살 때 재혼했으며, 그는 주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밑에서 성장했다. 이 책의 지은이는 이러한 사르트르의 가정적 환경을 작가 보들레르의 삶에 비유를 한다.

"보들레르의 경우, 어머니의 재혼으로 말미암은 어머니와의 이별이 그를 고립시켰고, 그로하여금 고독의 저주를 받아들일 결단을 하게 했고, 동료들로부터 그를 이탈시켰으며, 그를 고통스럽게 했다. 반면, 사르트르의 경우 아버지의 결손, 즉 '낯선' 가정에서의 성장은 그로 하여금 자기 주장을 힘있게 펼칠 수 있게 해주었다."

즉, 사르트르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결손으로 인해 아버지의 대리역할을 할 수 밖에 없었고, 자신이 하고픈 말, 주장에 대해서는 거침없이 의견을 펼쳤다는 것이다. 이것이 후에 사르트르를 영향력있는 비평가의 반열에 올려놓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사르트르는 희곡부문에서도, 문학과 철학부문에서도, 비평부문에서도 대단한 활동을 펼쳤다. 1937년 최초의 단편소설 <벽>이 프랑스 문학잡지 '누벨 르뷔 프랑세즈'에 발표되었고, 1938년 중편소설 <구토>, 1939년 단편집 <벽>이 출간되었다. 이 두 책으로 인해 사르트르는 프랑스의 주요 문학가중 한명이 된 것이다. 또한 철학분야에서는 '감정의 이론에 대한 시론'을 냈고, 이후 1940년에는 '상상적인 것'이라는 논문을 냈다. 이후 세계대전으로 인해 저술활동은 중단되었으나 1943년부터 <파리떼>, <존재와 무>, <자유의 길>, <닫힌 문> ,<보들레르>, <정치에 대한 이야기>, <변증법적 이성에 대한 비판> 등의 그의 주요한 업적들은 이 시기에 쏟아졌다.

그의 일생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하나 서술하자면 끝도 없거니와 여기서 마무리짓고, 내가 그에게 관심을 갖는 이유에 대해 잠시 언급하겠다.

개인적으로 사르트르를 처음 접한 것은 고등학교 윤리책 서양철학 부분에서 하이데거, 니체, 쇼펜하우어, 야스퍼스와 함께 다뤄지던 때였고, 이후에 나는 왜 인지는 모르겠으나 서점에서 사르트르가 쓴 책을 아무거나 구입해서 읽기 시작했다. 그 책이 사르트르의 소설 <구토>이다. 이 책은 굉장히 졸린 책이다. 뭘 말하려는 건지, 도대체 사건이란 것도 발생하지 않으며, 소설의 진행은 더디고, 재미도 없다. 하지만 뭔가 특별하다는 느낌은 받았다. 당시 나는 이 책을 다 읽지 못했고, 이후 졸업한 뒤에도 읽기를 시도했으나 역시 중간쯤해서 또 멈추게 되었다. 결국 지금까지도 나는 이 책을 다 읽지 못했다.

이후 사르트르를 접한 것은 내가 경제학과에서 철학과로 전과를 한 이후 서양근대철학사를 배우면서였고, 한국일보 편집위원 고종석씨가 존경하는 사람이 사르트르라는 점에 이끌려 그에게 더욱 관심을 쏟게 되었다. 난 개인적으로 고종석씨를 존경하기 때문이다. 고종석씨가 존경하는 사르트르니 관심이 가는 것은 당연하다. 고종석씨는 철학과 출신은 아니고, 언어학 박사를 한 분인데 아마도 그의 비평가적 모습을 좋아하는듯 하다. 사르트르는 지금까지도 서양의 위대한 지식인 중 한명으로 손꼽히고 있다. 철학적, 문학적 업적 뿐 아니라 비평가로써의 역할도 대단했기 때문이다.

고종석씨 또한 각종 에세이집, 소설, 비평쓰기 등 다양한 글쓰기 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봐 그는 사르트르를 닮아가려고 애쓰는듯 하다. 고종석씨를 한국의 사르트르라 하면 과찬일까? ^^;

앞으로는 기회가 있다면 사르트르의 비평적 저술을 찾아 읽어보련다. 나 또한 그의 철학적, 문학적 업적보다는 비평적 업적에 더 관심이 쏠리기 때문이다.




* <사르트르>에 대한 메모 *

# 시, 문학

작가에게 언어는 도구이지만, 시인에게 언어는 봉사의 대상이다.

작가 => 언어를 기호로써 고찰, 낱말은 심부름꾼, 유용한 관심적 형식 중시
시인 => 언어를 사물로써 고찰, 낱말은 야생의 상태, 자연적 사물 중시

기호 : 본질 - 어떤 것을 지시

"작가는 말하는 사람이다. 작가는 지칭하고, 증명하고, 명령하고, 거부하고, 묻고, 맹세하고, 모욕하고, 확증하고, 말을 흘린다"


# 글쓰기의 중요단계

자신이 무엇을 쓰려고 하는가?
자신이 무엇에 대해 태도를 결정하려 하는가?
자신이 왜 그것에 대해 태도를 결정하려 하는가?

이후 중요한 것이 '문체'이다.
문체의 조건 : 주의를 끌어서는 안되고, 눈에 띄지 않아야 한다.

# <파리떼> 에서의 자유

자신을 결정할 수 있음. 그리고 그러한 결정이 나의 결정이라는 사실과 내가 나 자신을 나의 결정과 동일시한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다는 의미


# '초월' : '이미 실현된 것'을 넘어 '가능적인 것'을 향해 서는 것. '넘어섬'


# 사르트르가 보는 '17-20세기의 철학의 세번의 창조적 세기'

1. 데카르트, 로크에 의해 규정된 시기
2. 칸트와 헤겔에 의해 규정된 시기
3. 마르크스에 의해 규정된 시기


# 사르트르에 있어서의 실존

실존(Ex + istenz) : 바깥에 서다
=> 신의 사유의 결과물, 창조된 존재

본질(essense) : 불변, 개체공통성
실존 : 가변, 개체고유성

예) 돌멩이, 사람의 본질은 '무엇임', 실존은 '무엇으로써 있음'
'무엇으로써 있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볼 수 있는, 경험할 수 있는 것을 토대로 정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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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생애와 사상
카를 포르랜더 지음, 서정욱 옮김 / 서광사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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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생애에 대한 책이 최근 여러권 출간되었지만, 그중에서도 꽤 두꺼운(?) 편인 이 책은, 그의 삶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를 볼 수 있을 것 같아 선택했다.

책의 목록은 크게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제 1장 부모의 집/초년기/김나지움 시절(1724-1740)
제 2장 대학교 시절과 가정교사 시절(1740-1754)
제 3장 15년간의 사강사 시절과 석사시절(1755-1770)
제 4장 순수이성비판이 나오기까지(1770-1781)
제 5장 학문의 전성기(1781-1790)
제 6장 노년기(1790-1804)

즉, 시간의 순서에 따라 그의 생애에 중심이 되는 사건을 토대로 크게 6장으로 나눈 것이다.

칸트의 삶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들은 바는 '칸트연구'라는 철학과 수업중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통해서다. 칸트는 시간이 되면 정확히 일어나서 식사를 하고, 오후 몇시에는 산책을 나가 어디까지 돌고, 언제부터는 독서를 하였으며, 잠은 언제 잤다라는 시시콜콜한 하지만 너무나도 규칙적이고 계산적인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마치 그의 철학과도 같이. 칸트의 철학은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 비판이 주요 저서로 꼽히는데, 그의 책을 보고 있노라면 머리가 아플 지경이다. 너무나 어렵다. 하지만 굉장히 체계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의 삶도 그의 철학과 같았던 모양이다.

또 한 일례로 여자친구가 그에게 청혼을 했지만 그가 도서관에서 이 결혼을 해야할지 말아야할지 고민을 하다 나왔더니 여자친구는 이미 결혼을 했더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는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칸트의 생애와 사상>을 읽고 난 뒤에 칸트가 결혼을 세번 할 뻔 했는데, 결국은 혼자 살았다는 것과, 그 결혼할 뻔한 경우 중에 위의 사례가 있다는 것이다. 첫번째 여자친구와 결혼을 할뻔 했는데 그 여자친구는 다른 남자와 결혼을 했다는 것이다. 도서관에서 몇년간 그가 고민을 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가 결혼에 대해 상당히 고민을 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된 새로운 사실은 칸트는 지금 우리가 느끼는 바와 같이 그다지 유명한 철학자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적어도 그가 성공하기까지는 말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어느 누구에게나 알고 있는 철학자의 이름을 대보라고 하면, 아마도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헤겔, 마르크스 정도는 기본으로 나오지 않을까 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그리고 유명한 칸트는 당시에는 15년간 사강사 생활을 할 정도로 힘든 생활고를 겪었다. 뛰어난 성적으로 김나지움을 졸업했고 이후에도 활발한 철학적 활동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학 교수로 채용되지는 못했다. 그의 아부할 줄 모르는 올곧은 성격도 있었고, 신에 대한 대학과 자신의 의견에도 약간의 차이가 있었고, 운도 없었다. 결국 나중에는 이학교 저학교에서 초빙을 받는 유명한 교수가 되었지만 그 전까지는 학회에 나가서도 그저 '아마추어 철학자'라고 불리우는 설움을 당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위대한 철학자는 애초부터 위대하게 평가받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결국엔 위대한 철학자라는 호칭을 받게 됐지만 말이다.

이 책은 철학자에 대한 책이지만, 그의 생애를 담고 있기에 그다지 어렵지 않다. 게다가 저자인 카를 포르랜더는 일부러 그의 사상적인 부분은 중간차단하여 그의 삶을 부각하려 했다고 하니 생무지의 초짜가 이 책을 읽더라도 그의 사상적인 부분은 건드리지 않으면서 그를 잘 알 수 있는 계기가 되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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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04-11-15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칸트라고 하면 굉장히 옛날 사람 같고 고전적인 느낌이 드는데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 를 읽어 보니, 예술을 볼 때 개인의 느낌대로 볼 것을 주장한 낭만주의 철학의 선구자였다고 하네요 그 때부터 칸트가 좀 새롭게 느껴지더라구요^^

마늘빵 2004-11-15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핫...칸트의 미학과 칸트의 인식론 체계는 참 다른 느낌을 주죠. 저도 아직 잘은 몰라요. ^^; 오늘 저희 학교 교수님이 번역한 <칸트평전>을 빌려왔는데 이 책을 읽고 다시 칸트를 알아봐야겠네요.
 
현의 노래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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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안 가결로 인해 직무정지된 노무현 대통령이 관저에서 열심히 보는 책이 김훈의 '칼의 노래'였다. 나는 '칼의 노래'를 산다는 것이 서점에서 잘못 집어 카운터에 올려놓고 계산 다 끝낸게 다시 바라보니 '현의 노래'였다. 웃지못할 실수를 하고 말았지만 이미 끝난 계산이야 어쩌랴. 돈은 한정되어 있고 '현의 노래'를 계산한 마당에 '칼의 노래'까지 살 수는 없지. 어쩔 수 없이 '현의 노래'를 먼저 읽기로 결정. 아직까지 '칼의 노래'는 읽지 못했다.

오랜 세월 기자생활로 글과의 끊임없는 소통을 해왔던 작가 김훈은 그의 수십년(?)의 글쓰기와는 다른 형태의 글쓰기인 소설로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칼의 노래'가 2001년 동인문학상을 받은 것인데, 그 전에도 김훈은 '너는 어느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밥벌이의 지겨움' 등으로 이미 주목을 받기 시작한 글쟁이였다.

어쨌건 그가 너도나도 다 아는 문학인 반열에 오른 것은 그의 소설 '칼의 노래'다. 더군다나 노무현 대통령이 이 책을 읽고 있다하여 더욱 유명해졌다.

'현의 노래'는 '칼의 노래'에 이어 김훈의 두번째 소설이다. 첫번째 것이 이순신을 다루었다면, 두번째 것은 가야의 악사 우륵을 다루었다.

제목은 '현의 노래'라고 했으나 이 책을 읽는 내내 듣는 생각은 왜 제목이 '현의 노래'일까 라는 물음뿐. 오히려 이 책에는 '현'보다는 '칼'이 더 많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칼의 노래2'인데... 글을 다 읽고 난 지금도 마무리가 현으로 끝났기 때문에 '현의 노래'라는 제목에 그저 고개를 끄덕끄덕 해줄 뿐이지 오히려 비중은 칼이 더 높았다는 생각이다.

한편, 책의 내용보다는 김훈의 문장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그의 소설을 보면 문장을 이루는 단어나 어조가 마치 노자의 도덕경이나 장자의 장자를 읽고 있는 듯, 물 흐르는 듯한 구성을 갖추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는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가야의 악사 우륵과 대장장이 야로를 통해서 그대로 드러난다.

"소리는 본래 살아 있는 동안만의 소리이고, 들리는 동안만의 소리인 것이요. 집사장께서 이승과 저승의 사이를 헤아리지 못하시는구려. 살아있는 동안의 이 덧없는 떨림이 어찌 능침을 편안케 하고 북두를 전정시킬 수가 있겠소. 소리가 고을마다 다르다 해도 쇠붙이가 고을들을 부수고 녹여서 가지런히 다듬어내는 세상에서 고을이 무너진 연후에 소리가 홀로 살아남아 세상의 허공을 울릴 수가 있을 것이겠소? 모를 일이오. 모를 일이로되, 소리는 본래 소리마다 제가끔의 울림일 뿐이고 또 태어나는 순간 스스로 죽어 없어지는 것이어서, 쇠붙이가 쇠붙이가 소리를 죽일 수는 없을 것 아니겠소?" (우륵의 말)

"병장기는 본래 그러한 것입니다."
"흘러서 끝이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과 같은 것입니다."
(야로의 말)

그의 문장에는 힘이 들어가 있지 않고, 애써 무엇을 수사하려고 하지도 않으며, 그저 힘을 쭉 뺀 채 화선지에 붓을 흘리듯 하다. 꾹꾹 연필로 눌러 쓴 글이라고는 하나, 실제로 그의 문장엔 힘이 없다. 마치 소설속에서의 나라의 길과, 병장기의 길, 소리의 길을 보는 듯 하다. 글의 내용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할지라도 글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김훈의 문체를 보여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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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염된 언어 - 국어의 변두리를 담은 몇 개의 풍경화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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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는 '진보주의자'나 '보수주의자' 많지만 '자유주의자'라 칭할 만한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미소양대국간의 이데올로기 논쟁이 사실상 끝났음에도 이 땅에서는 진보와 보수의 싸움이 계속되어 왔고, 그것은 한편 온당해 보인다. 이념논쟁은 종식되었지만 이념이 종식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들의 싸움은 온당하지 않다. 그들은 진보와 보수라는 이름으로 싸우고 있지만 실상 그들이 진보이고 보수인지는 의문이기 때문이다. 온건한 보수와 좀더 강렬한 보수와의 싸움으로 보는 것이 더 정직해보인다. 지금에 와서 그들 진보와 보수는 '실용주의자'라고 자청하고 있지만 실용주의에도 이념은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 또한 이념은 종식되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이념은 언제까지고 종식되지 않는다. 실용주의는 단지 내용을 담아내는 도구일 뿐이지 내용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릇이 바뀐다고 내용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내용물은 언제고 그대로 있다.

잡설이 길었다. 이땅의 진보와 보수 사이에서 자신의 위치를 지키며 양진영을 향해 쓴소리를 내뱉는 이들이 있으니 그들이 '자유주의자'이다.

일본 가나안대 교수였으며 아마도 현재 서울대 객원교수로 와있는 재일교포 윤건차 교수의 저서 <현대 한국의 사상흐름>에서는 한국의 지식인 지도를 그리면서 비판적 자유주의 진영에 강준만, 김영민, 고종석, 진중권을 집어넣고 있다. 김영민은 누구인지는 모르나 나머지 세 사람은 구체적인 사회적 문제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며 활발한 논쟁을 하고 있는 대표적인 논쟁가들이다.

세 사람 모두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기는 하나 그중에서도 고종석을 나는 주목한다.

<감염된 언어>는 고종석의 저서이다. 고종석은 성균관대를 비롯한 세 군데 대학에서 법학과 언어학을 배웠고, 영자신문사를 비롯한 언론기관에서 기자생활을 하다 어느날 갑자기 프랑스로 날아 그곳에서 어줍잖은 글쓰기(스스로가 말하길)를 계속하다 환란에 치여 한국으로 돌아와 이후 자유기고자 활동을 했다. 그러던중 한국일보의 편집위원이 되었고, 현재까지도 한국일보에 연재물 '오늘'을 비롯하여 칼럼쓰는데 힘을 바치고 있다.

그 스스로는 자신은 다른 언어로 글쓰기를 시도하다 실패하고 한국어만이 자신이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언어임을 깨닫고 평생 한국어만으로 글을 쓰려고 한다고 말한다. 프랑스어, 영어, 라틴어, 한자어, 일본어 등 그가 조금씩 기웃기웃댄 언어는 많지만 그는 오직 한국어만이 스스로가 잘 구사할 수 있는 언어라 한다. 그는 서문에 복거일, 장정일 등의 문필가들을 예로 들며 자신의 글쓰기는 아직 미숙하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고종석 또한 한국어를 잘 구사하는 글쟁이로는 최고의 위치에 올려도 된다고 본다. 나는 복거일과 장정일을 접하지 않은 채 고종석을 접했지만 그는 정말 글을 잘 쓴다. 고종석의 글에 담긴 생각들도 대부분 나의 그것과 일치하기도 하지만, 그의 글빨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그를 좋아한다. 내가 한국일보를 계속 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한국어에 대해 논하며, 한국어와 한자, 영어 등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개진하고 있다. 한글전용인가 한글 한자 병용인가, 영어공용화는 무엇인가, 한국어란 무엇인가, 한국어는 어떠해야하는가 등에 대한 구체적인 사안들에 대해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책의 대부분의 내용에서 나는 그와 생각을 같이 하지만 오직 한 부분, 영어공용화 논쟁에 대해서 만큼은 그의 생각을 따를 수 없다. 그는 영어공용화를 유보적인 입장이긴 하지만 찬성한다.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그는 영어공용화에 대한 찬성 입장을 표명하고 있지만, 나는 그의 논리전개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면서도 한편으로 이건 아닌데 하는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영어공용화를 한다고 해서 한국어를 폐기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공용화가 이루어진다면 과연 한국어가 그 틈에서 살아갈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소수의 민족주의자들만이 한국어를 사용하며 오직 박물관 언어로 보존하기에 급급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땅에서 영어과열현상은 지금으로도 족하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공용화를 선언해버린다면 한국 부모들의 교육열을 참고로 했을 때 이 땅에서 한국어는 쓰레기장 행이다. 고종석은 이 책에서 언어는 도구일 뿐 사고에 영향을 미치기는 하나, 사고를 규정짓지는 않는다고 말하지만, 과연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사고를 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가 지금까지 이루어온 문화유산과 업적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한가 라는 의문이 든다. 반드시 고전소설이 아니더라도 현대 소설을 영어로 바꾸어 읽을 때 사람들은 지금과 같은 소설속의 감정과 느낌을 그때에도 똑같이 느낄 수 있을까? 난 아니라고 본다.

<감염된 언어>는 이 땅을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한국어를 사용하는 이들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를 너무도 모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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