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바디우의 존재론 강의록

  

  

 

 

  수요일마다 르네21(http://www.renai21.net)에서 듣는 '들뢰즈와 바디우의 철학' 강의. 다섯 번째쯤 되는 것 같다. 바쁜 일로 두 번을 빠졌고, 세 번 중 두 번은 들뢰즈, 그리고 최근에 들은 강의가 바디우다. 들뢰즈 강의를 두 번 빠지긴 했지만 들뢰즈의 핵심 개념은 알았고, 들뢰즈보다 더 수학적 개념을 차용하여 어렵게 언어를 구사한다는 바디우에 입문한다.  

  들뢰즈나 바디우나 이름만 들어본 건 마찬가지. 들뢰즈와 바디우 강의를 들으면서, 오히려 기존에 알던 철학자보다 모르던 철학자를 백지 상태에서 접수하는 것이 공부하는 데는 더 낫지 않나 생각해본다. 오랫만에 생소한 형이상학과 존재론에도 빠져들고, 나름 매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르네21에서 수요일마다 하는 다른 강좌들은 강사가 중간에 달라지기도 하는데, 내가 듣는 이 강의는 한 분이 들뢰즈와 바디우를 모두 가르치신다.  

  선생님은 키가 작으시고 수염을 깔끔하게 기르셨다. 그냥 봐도 철학자 또는 예술인 같은 모습인데, 말을 하시기 전에는 좀 진지하고 무겁게 느껴지고, 말을 하시면 활달하고 열정적으로 변하신다. 좁은 강의실에서 십여 명의 나이대가 다양한 학생들 앞에서 조금이라도 더 알려주기 위해 애쓰시는 모습을 보면, 내가 이렇게 따라가기 버거워 해도 되나 싶기도 하고, 들뢰즈 강의 때는 한 번 꾸벅꾸벅 졸아 죄송하기도 하다. 근데 강의 땐 다 알겠던데 들뢰즈의 글을 읽으니 다시 생소해지더라는.

  바디우가 들뢰즈보다 더 어렵다고 하셔서 겁먹었는데, 첫 강의를 들어보니 바디우의 개념을 이해하는 과정은 무난히 통과한 것 같다. 내가 이해한 바를 잊지 않기 위해 강의록도 작성하고, 선생님이 쉽게 예를 들어 말한 바를 그대로 받아 적어놓기도 했다. '프랑스 철학'이라고 할 만한 것은 들뢰즈와 바디우가 처음인데, 이런 게 프랑스 철학의 특징인가 하고 일반화시켜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프랑스 철학 어지간히 수학을 좋아한다. 덕분에 고등학교 때 이후 접할 일이 없던 미분과 적분, 함수 그래프에, 자연수, 무한수, 루트 별별 것들이 다 뇌의 폐기 처분 코너에서 보류 코너로 자리를 바꾼다.  

  내일이 또 강의 날이다. 바디우를 몇 차례 더 입문한 뒤 선생님은 들뢰즈와 바디우를 미학, 정치철학 영역 등에서 비교하겠다고 하셨다. 그러니까 이 강의는 존재론과 형이상학에서 시작해 미학과 정치철학 등의 영역으로 확장하는, 들뢰즈와 바디우의 모든 면을 한번 제대로 훑는 강의가 될 것. 정치철학쯤 가면 내 눈이 더 반짝거리지 않을까 싶다. 그러길 기대한다.  

  찾아보면 요새 좋은 강좌들이 많다. 바쁜 직장인들도 일주일에 하루쯤 틈을 내어 이렇게 생소한 공부에 공을 들이는 건 어떨까. 아트앤스터디와 같은 동영상 강좌도 있고, 철학아카데미와 같은 입문/전공 철학 오프라인 강좌, 또 수유너머와 같은 공동체 세미나, 르네21과 같은 서양, 동양, 교양 각 영역별 하나씩 개설되는 오프라인 강좌도 있다. 교육 기간에 따라서 싸면 10만 원 좀 넘고, 비싸면 40만 원 정도 한다. 이 강의들이 내 삶에 미칠 영향을 생각하면 결코 비싼 돈이 아니다. 한 번 빠져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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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알랭 바디우의 존재론 강의록
    from 자유, 그리고 자유 2011-10-11 12:27 
    르네21 수요인문강의 중 '들뢰즈의 철학과 바디우의 철학', 바디우의 존재론편.강사 박정태. (선생님께서는) 알랭 바디우의 책은 많이 번역이 되었는데, 그의 책을 번역한다는 건 무지 어려운 작업이라 하셨다. 제목을 잊었는데 오래 전에 어떤 출판사가 판권을 사갔는데 아직도 번역이 되지 않았다고. 번역된 책들 제목을 보니 그 중 내가 인터넷 공간에서 알게 된 분께 선물을 드린 책도 보인다. 사랑 예찬. 제목만 보면 연애 지침서 같지만 아니다. 어떤 철학자
 
 
Ritournelle 2011-10-11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랑스 철학(자)들이 수학을 좋아하는 측면은 바디우나 라캉에게서 특히 더 부각이 되는 것 같아요. 들뢰즈의 경우엔 수학이 바디우처럼 강하게 부각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차이와 반복>에서 미/적분을 자신의 존재론 혹은 형이상학으로 전유하는 대목이 보이지만, 그 강도가 바디우처럼 강하지는 않지요. 하지만 바디우는 미/적분이 아니라 집합론을 자신의 존재론 혹은 형이상학, 더 나아가 정치철학으로까지 밀고나가지요. 라캉의 경우엔 수학이 정신분석의 이론화와 분석화[이 둘은 상호동형적 관계에 있지만]에 적극적으로 활용되는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 그나저나 공부=인문학 정말 열심히 하시네요.바쁜 회사 생활에서도. 건투를 빕니다.

마늘빵 2011-10-11 15:36   좋아요 0 | URL
네, 들뢰즈는 양반이군요. 바디우가 좀 더 심하긴 한 거 같아요. 첫 강 들어보니. 무화과나무님 들뢰즈, 라깡, 바디우를 다 아시는군요. ^^

'생활인'이 되지 않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 요즘 어찌 지내시나요?

Ritournelle 2011-10-11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사학위 논문을 집필 중에 있습니다. ㅋ.
아, 그리고 바디우는 프랑스에서 들뢰즈 연구의 권위자입니다. 물론 들뢰즈를 매우 색다르게 해석하는 독특한 취향을 가지고 있지만요[생전에 들뢰즈가 다른 철학자들을 해석했던 방식과 유사한 방식으로 바디우도 들뢰즈에 대해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게 유효한 것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리고 박정태 선생은 바디우 제자예요. 학위논문도 바디우 밑에서 들뢰즈에 대해서 썼고. ㅋ. 전 개인적으로 직장 생활자들?의 고통을 직접적으로는 겪어보지는 못했지만, 직장인들을 구원하는 것은 봉급과 여가가 아니라 <인문학>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저 같은 지식인에게 그 반대로 돈과 여가이겠지만...이 무슨 기묘한 역설과 모순인지? 아! 그리고 저번에 알라딘 중고샵에 대한 페이퍼는 매우 유효하게 읽었습니다...건강하세요...

마늘빵 2011-10-12 09:35   좋아요 0 | URL
아, 그러시군요. 박정태 샘 바디우 제자라는 건 말씀하신 거 같아요. 정말, 먹고 살기 어려울 때에도 저는 빚을 내가면서 강의를 듣고 다녔네요. 마음이 힘들 땐 그런 강의가 더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어서 논문 마무리하시길!
 

 

 
  



*왼쪽은 들뢰즈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 홀로 읽고 있는 누구나 철학 총서, 오른쪽은 강의하시는 박정태 선생님이 번역하고 엮은 강의 주교재다.
 

  르네21(http://www.renai21.net)의 <들뢰즈의 철학과 바디우의 철학 강의>. 두 번 들었다. 세 번째 강의였지만 두 번째 강의를 빼먹은 탓이다. 첫 강의에서 들뢰즈 철학의 세계관과 다섯 가지 특징을 배웠다면, 이번 강의에서는 들뢰즈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한 사건 발생 논리, 그리고 수학의 미분과 적분을 끌어들여 어떻게 해석하는지를 살폈다. 아직까지는 들뢰즈 철학을 이해하기 위한 개념 공부라고 봐야 한다. 칸트 철학을 공부할 때 선천과 선험의 개념을 구별하는 것처럼.  

<사건의 발생 논리>

  우선 들뢰즈의 '사건의 발생 논리'를 이해할 때 차등화와 차이화의 개념을 구별해야 한다. 프랑스어에서 (발음이 맞는지 모르겠는데 이렇게 들었다) '디페랑씨아씨옹'이라고 똑같이 소리나는 두 단어에서 '씨'라는 소리가 나는 부분의 스펠링이 't'와 'c'로 각기 다른데, t가 들어간 디페랑씨아씨옹을 박정태 선생님은 '차등화'라고 번역을 하고, 'c'가 들어간 디페랑씨아씨옹을 '차이화'라고 번역을 하신다. 프랑스어로 표현했을 때의 언어상의 미묘한 차이를 한글로 번역했을 때도 살리고 싶었던 것. 디페랑씨(t)아씨옹은 차등화, 미분화로, 디페랑씨(c)아씨옹은 차이화, 분화, 육화, 적분화로 번역한다.  

  위의 개념 구별로부터 다음과 같이 나아간 내용을 정리해볼 수 있다. 배운 내용을 쉽게 정리해보고 싶지만 배운 내용보다 더 쉽게 전달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첫째, 잠재의 차원에서 다수가 '완벽하게' 결정되어 있는 무엇, 이것은 잠재의 차원에서 다수가 차등화되어 있는 무엇이다. 둘째, 현실의 차원에서 다수가 '온전하게' 결정되어 있는 무엇, 이것은 현실의 차원에서 다수가 차이화되어 있는 무엇이다.  

<개별 미분화/개별 적분화>

  다음으로, 들뢰즈에게 있어서 개별 미분화와 개별 적분화 개념을 이야기해 보자. 고등학교 때 누구나(?) 배운 수학의 미분과 적분 개념을 그대로 가져다가 해석한다.

  일단 기억을 더듬어서 미분 f(x)란 곡선을 곡선의 구간으로 나누고, 곡선과 관련된 각 구간을 이루는 점을 수학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미분은 곡선을 쪼개 점으로 만들고, 각 점의 수학적  성격을 순간변화율로 파악하는 역할을 한다. 적분 s(x)는 원래 함수의 면적을 나타내는 함수이다.   

 들뢰즈는 이러한 수학적 미분과 적분에서, 미분을 잠재적 영역으로, 적분을 현실적 영역으로 해석한다. 'y는 x제곱'의 현실적 영역 속의 곡선을 미분화하여 '무한하게' 잘게 쪼개고 또 쪼개고 하면-이때 무한하게 쪼갠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감각적으로 쪼개는 것에서 나아가 사유의 영역에서도 무한하게 세세하게 쪼개는 것을 의미한다- 잠재적 차원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때 잠재적 영역 속 점들의 수학적 성격은 순간 변화율의 함수이다. 시간에 적용하여 살피면, '현실적 영역 속의 곡선'은 시간의 분열에서 '과거의 보존'을 의미하며, '잠재적 영역 속 점들의 수학적 성격'은 시간의 분열에서 '현재의 흐름'을 의미한다.  

  잠재적인 것은 애매한 것이고, 이성적 개념의 틀을 벗어나는, 개념 바깥의 구체적인 것, 그리고 특이한 것이다. '개념 바깥의 구체적인 것'이란 말은, 예를 들어 짜장면(국립국어원님께서 표준어로 격상(?)시켜주셨다)을 먹고 '맛있다'라고 표현하는 것, 이것을 제외한 짜장면을 먹고 느끼는 나머지 감정들, 느낌들, 감각들이 바로 '구체적인 것'이다. 특이한 것은 흔히 느끼듯 뭔가 벗어나 있는 것.

  다시, 이러한 일련의 개념 정립 과정과 시간에 적용하는 논리를 통해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억은 단지 지나간 회상의 의미로만 있는 것이 아니다. 기억은 현재의 지각과 부딪히면서 지각의 의미를 보다 명확히 해주고 있다."  

<정리 발언>

  기존의 개념을 활용하여 자기 이론을 세우는 철학자들과 달리 칸트나 들뢰즈처럼 기존의 언어로 풀어낼 수 없는, 기존의 언어를 활용하지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거나 아니면 단어를 새로 창조해내는 이들의 철학을 공부할 땐 이렇게 개념을 먼저 알고 접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쓴 글을 한 줄도 읽어낼 수가 없다. 박정태 선생님은 열정적으로 무척 쉽게 전달하려고 애쓰셨고, 들뢰즈가 언급한 어떤 영화의 장면을 보여주시기 위해 쭈그리고 앉아 노트북을 두 손으로 들고 계시기까지 했다. 수강생은 여전히 열 명안팎으로 적지만 그 수와 관계 없이 의욕이 넘치신다. 대학에 안정적으로 자리잡고 있는 많은 교수들의 마인드와는 무척 다르다.

  르네21은 기획 단계에서 저서든 번역서든 좋은 책이 있으면, 그 책을 기준으로 강사를 섭외한다고 한다. 이번에 개설된 단 한 개의 서양 철학 강좌도 역시 마찬가지. 동양 철학 강좌의 김교빈 선생님, 수요 교양 강좌, 금요 강좌 또한 마찬가지다. 열악한 환경에서 기획하고 강의를 운영하는 분들과 열정적인 선생님께 고맙다는 인사를! 빼먹지말고 계속 들어야 하는데. 한 번 빼먹는 바람에 세 번째 강의를 못따라갈까봐 지레 겁먹기도 했다. 다음 강좌는 아마도 알랭 바디우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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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 2011-09-21 0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들뢰즈 어렵죠ㅜ 근데 박정태 선생님은 예전에 한번 수업들었을 뿐이지만 좋은 분이었던 기억이 나네요. 혹시 수업 때 사탕 나눠주시지 않던가요 ㅎㅎ

마늘빵 2011-09-21 08:57   좋아요 0 | URL
수업 들으셨군요. ^^ 열정적이신 분입니다. 사탕은 안 주셨는데, 아마 연령대가 좀 높은 분들이 많아서 그럴지도... ^^ 계속 공부하고 계시죠?

바라 2011-09-21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아직 ㅜ 요새 논문 쓰고 있었는데 엉망이나마 거의 써 가는 것 같습니다;;. 아프님도 환절기 잘 넘기시구요~

마늘빵 2011-09-22 09:56   좋아요 0 | URL
어제도 강의 들었는데 하나도 모르겠어요. ㅠㅠ 좌절입니다. 넘 어려워요. 얼른 끝내세요. ^^ 계속 학계에 계실 예정이신가요? 감기 조심하시고요.
 

 

 

 

 


  철학을 전공했으나 들뢰즈와는 인연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학부 시절엔 프랑스 철학을 다루는 강의가 아예 없었고, 들뢰즈는 당시 한국 강단에 막 수입된 최신(?) 학문이었기에 학부생들이 다룰 만한 철학자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학부 때부터 들었고, 졸업한지 수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이름을 듣고만 있다. 대학원에 가서도 윤리학을 공부했기에 존재론, 형이상학을 다루는 들뢰즈는 역시 전공 외 영역에 있었다.  

  르네21에서 들뢰즈 강의를 한다. 지난 수요일 첫 강의를 들었고, 들뢰즈의 철학에 입문했다. 정확히 그 강의는 들뢰즈와 바디우를 다룬다. 바디우는 들뢰즈보다 늦게 이름을 접했고, 모르기는 역시 마찬가지다. 첫 강의는 들뢰즈 존재론의 바탕이 되는 철학을 배웠다. 수강생들은 대학생 또래부터 장년층까지 다양했고, 그 수는 많지 않았다. 한 10여명 정도. 그 분들은 모두 왜 이 강의를 들을까. 단지 들뢰즈를 알고 싶어서, 아니면 강유원 선생님의 말마따나 노후를 즐기기 위해서. ^^ 아무도 모른다. 어쨌든 적지만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들뢰즈를 함께 듣는다.  

  강사 박정태 선생님은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를 엮으셨다. 들뢰즈가 직접 쓴 책은 아니지만, 들뢰즈의 초기부터 이전 철학자들에 대해 쓴 논문을 모아 번역/엮은 것이다. 들뢰즈의 사유를 따라가기에는 적절한 교재다. 선생님은 열정적으로 들뢰즈의 철학을 소개했고, 전공자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가 아닌 만큼 쉽게 전달하려고 노력하셨다. 입문해보자. 들뢰즈의 철학은 다음 다섯 가지 바탕을 깔고 있다.  

  첫째, 들뢰즈의 존재론은 내재주의의 특징을 보인다. 반대되는 말은 초월주의. 존재는 존재자들에 내재하고, 존재자들은 존재에 내재한다. 신은 양태들 속에, 양태들은 신 속에 들어있다(스피노자를 받아들임). 생명은 생명의 다양한 형식들에 내재하고, 생명의 다양한 형식들은 생명에 내재한다(베르그송을 받아들임).  

  둘째, 분간불가능성. 식별불가능성이라고도 한다. 반대되는 말은 식별가능성, 분간가능성. 존재와 존재자, 신과 양태, 생명과 생명의 다양한 형식들, 잠재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들이 서로 내재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분간, 식별 불가능하게 된다. 고로 존재의 일의성이 유지된다. 플라톤에게 있어 이데아와 이데아가 깃든 것은 엄밀히 구분되지만 들뢰즈는 그렇지 않다. 이 세상은 잠재적인 것이면서도 동시에 현실적인 것. 이때 '동시에'라는 말이 분간불가능성을 일컫는다.  

  셋째, 등가성 또는 동등성. 반대말은 비등가성 또는 비동등성. 들뢰즈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의 가치가 다 똑같다. 가치의 우위와 서열을 들뢰즈의 일의성이 참아내지 못한다. 존재와 존재자들의 가치를 동일하게 본다. 플라톤에게 있어 이데아 세계와 현실 세계의 가치는 엄밀히 구분되고, 가치 또한 다르다. 플라톤에게 있어 현실의 사물은 이데아를 모방하고 분유한 것이기에 가치 측면에서 이데아 아래 줄을 서게 된다. 이데아를 기준으로 참의 정도에 따라 사물을 줄 세운다. 국가의 지도자 또한 이데아에 가장 근접한 철인을 설정한 것이다.  

  들뢰즈는 이데아와 현실 사물의 가치 체계를 뒤집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의 가치를 동등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전복이다. 현실 사물을 이데아의 위에 놓는 방식으로 뒤집는다면 그건 여전히 비등가적이고, 비동등한 것. 들뢰즈는 이를 동등하게 함으로써 플라톤을 전복한다.  

  넷째, 생기주의. 유기체로 나타나기 이전 생기주의에 따른 머리의 생산이 있어야 한다. 생기주의는 유기체를 가능하게 하는 토대이다. 존재는 존재자들의 역능이고, 생명은 생명의 다양한 형식들의 역능, 잠재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들의 역능, 신은 양태들의 역능, 존재는 존재자들을 생산함으로써 실재하는 파워. 잠재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들을 만들어내는 능력이고 동력이며 구조가 된다. 역능이란 앞의 것이 뒤의 것을 만들어내는 힘이다. 역능은 또한 자기 원인적인 힘이다.  

  플라톤의 경우 영혼이 세 가지로 나뉘어진 것과 같이 국가도 세 가지 계급으로 나뉘어져 있다. 각 영혼들이, 각 계급들이 제 역할을 잘 할 때 온전한 몸, 온전한 국가가 된다. 들뢰즈는 잠재적인 것을 선험(경험보다 논리적으로 앞서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것)적인 장으로 이야기한다. 현실적인 것들을 발생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태어난다. 따라서 선험적.  

  다섯째, 매개가 배제된 종합. 존재, 신, 생명, 잠재적인 것들의 구조가 하나, 존재자들, 양태들, 생명의 다양한 형식들, 현실적인 것들의 구조가 하나가 각각 있지 않고, 매개를 배제한 종합으로 이를 바라본다. 플라톤의 삼각형에서는 이데아 안에 현실의 여러 삼각형들이 포함되고 포섭된다. 하나가 다수를 엮고 종합하고 있다. 그러나 플라톤의 현실 삼각형은 이데아의 삼각형과 유사한 것일뿐이다. 플라톤도 종합을 보여주지만 여기엔 매개가 개입되어 있다. 존재가 집합과 비집합으로 나누어진다. 유사한 이데아의 범주에 들어가느냐 안 들어가느냐에 따라서 분화된다. 우리 현실에서도 대한민국 국민이 되기 위한 나와 너와 그에게 어떤 의무, 공통점이 있다. 이것이 매개이다. 들뢰즈에게 있어서 그 둘이 서로를 해하지 않고 종합이 되려면 매개가 없어야 한다. 다수인데 종합, 두 개인데 종합되는 것. 잠재적 차원과 현실적 차원에 매개가 개입되어 있지 않고 둘을 묶어 종합한다.

  어렵다. 하지만 플라톤과 대비하여 쉽게 풀어주셨다. 대략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있고, 다음 강의를 듣는데 어려움이 없을 듯하다. 존재론은 현실의 문제와는 많이 다르다. 철학에서 윤리학, 정치철학, 사회철학 등은 현실의 문제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존재론은 다소 구름에 붕 뜬 느낌이 들 것이다. 그러나 존재론은 지금까지 내가 인식하던 세계의 틀로부터 벗어나게 해준다. 존재론, 형이상학의 묘미가 여기에 있다. 두 번째 강의를 기대한다. 르네21에는 서양, 동양철학 강좌가 지난주부터 진행 중이고, 금요일마다 매번 다른 책의 저자와 함께 하는 교양 강의가 있다. 관심 있는 분들은 여기로. http://www.renai21.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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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화 2011-09-05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먹고 살기 바쁜 우리는 '행동하기 위한 사유하기'에 익숙하기 때문에 '사유하기 위한 사유하기'에 어려움을 느끼지요. 하지만 '행동하기 위한 사유하기'에는 반드시 뺄셈 작용이 필요해요, 가장 경제적인 행동 패턴을 만들어야 생산성과 유용성이 높아지니까. '사유하기 위한 사유하기'에는 그러한 뺄셈 작용을 최소화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노력을 기울일 때, 우리의 사유와 인식은 '있는 그대로의 것'에서 출발할 수 있습니다. 존재 그 자체에서 출발한 인식은 필요에 따른 인식보다 더 정확할 수 있고, 존재 그 자체의 본성에서 출발한 윤리는 유용성에 따른 윤리보다 더 정치적으로 올바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늘빵 2011-09-06 09:03   좋아요 0 | URL
동의합니다. ^^ 존재론 자체는 일상과는 좀 떨어져 있어보이지만, 윤리는 존재론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

yamoo 2011-09-05 1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님, 저하고 같군요^^ 진짜 학부때는 프랑스철학을 거의 안 다뤘고, 특강 형식의 강의가 개설되어도, 베르그송과 푸코 사르트르만 다루더군요~ 철학과에서는 거의 다루지 않고 영문과과 불문과 대학원 과정에 프랑스 사상사 강의에서 들뢰즈를 다루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도 들뢰즈는 까막눈이었다는..ㅎㅎ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이 책은 저도 들뢰즈에 입문하기 위해서 들뢰즈를 잘 아시는 분한테 문의해서 구입한 책이에요. 렘브레이트 서양철학사를 거의 다 보고 봤던지라 상대적으로 무척 쉽게 읽었던 책입니다.

르네21에서 강의가 있군요~ 이 강의는 몇시부터 어디에서 하는 건가요?? 저도 한 번 가봤으면 하네요~ 좋은 정보에요!

근데, 아프락사스님은 이런 정보를 어떻게 잘 아시는지 궁금합니다요..ㅎㅎ

마늘빵 2011-09-06 09:06   좋아요 0 | URL
학부에서 프랑스 철학 다루는 데가 없지 않나 싶어요. 요즘엔 또 모르겠는데. 정말 거의 불문학과 이런 쪽에서만 하는 듯하고. 아무래도 기존 교수들이 미국, 독일에서 공부하신 분들이다보니.

르네21 동, 서양 철학 강의는 수요일 일곱 시에 있고, 교양 강의는 금요일에 있어요. 사이트 들어가 보시면 확인할 수 있다는. 위치는 시청역 안쪽(광화문 방향 시청 건너편) 성당입니다. 저야 돌아다니다가 정보를 줍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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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희 지음 / 뜨인돌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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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싫어할 이유가 충분한 누군가를 싫어할 권리가 있다. 용서하고 싶지 않은 누군가를 용서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화해는 무조건 좋은 것이라는 우리의 관념이 때로 누군가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계속해서 문제를 유발시킨다. 모두와 사이좋게 지내겠다는 것은 얼마나 무모한 욕망인가. 또 모두와 사이좋게 지내라는 것은 얼마나 무리한 요구인가. -22쪽

선거 때만 되면 각종 교육 정책들이 난무하는데, 그 정책들을 보면 하나같이 사교육비 절감을 이야기한다. 선심 공약 치고 이만한 것이 없다. 사교육의 폐해는 누구나 동의하는, 정말 안전한 문제니까. 아무도 교육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 학교의 근본적인 사명에 대해 질문하지 않는다. 그저 사교육만, 사교육만 잡자고 한다. 그러고 나서 모든 문제의 원인은 대학 입시 제도에 있다고 뜻을 모은다. 위원회가 생기고, 프로젝트가 만들어지고, 정부의 예산이 새 입시 제도를 만드는 데 쓰인다. 많은 대학 교수들과 전문가들이 이를 통해 부수입을 챙기고 경력을 추가한다.
이제 입시 제도가 바뀐다. 게임의 규칙은 더 복잡해지고 더 예측하기 어려워진다. -75-76쪽

우리 사회의 큰길, 즉 규칙과 질서가 사회에 자리 잡는 과정을 생각해 보자. 사회에는 어떤 의미로든 더 큰 힘을 가진 자들이 존재할 것이고, 그들은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질서를 만들어 나간다. 그리고 그 질서가 불변의 진리인 것처럼 세상 사람들을 세뇌한다. 이 질서는 지배하는 우리에게만 좋은 것이 아니야, 세상 모두에게 좋은 것이야, 그러니 이 질서가 무너지면 세상은 끝장나는 거야, 하고 말이다. 처음에는 저항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우리의 기억은 얼마나 얄팍한지, 곧바로 질서가 지금과 다른 시절도 있었고 앞으로 다른 질서를 가진 세상이 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그 질서를 수용한다. -84-85쪽

지혜 있는 사람은 옳고 그름에 대해 두 마음을 갖지 않고, 자비로운 사람은 미래를 결코 걱정하지 않으며, 용기 있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공자)-1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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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처럼 질문하기 - 흥미진진 철학 여행
매슈 모리슨 지음, 하정임 옮김 / 다른 / 2008년 7월
절판


철학적 논쟁에는 몇 가지 방법이 있지만 우선 갖추어야 할 자세는 신중함이다. 선의의 논쟁은 논리적이고 합리적이기 때문에 반박하기가 쉽지 않다. 악의의 논쟁은 처음에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허점으로 가득 차 있다.
나쁜 의도가 있는 논쟁은 이상하고 거짓인 것을 믿게 하려고 사용된다. 재치 있는 논쟁은 누군가를 속이기는 쉽고 겉으로 보기에는 타당하게 보일지 몰라도 내면에는 수상한 점이 많다. -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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