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 해방
피터 싱어 지음, 김성한 옮김 / 인간사랑 / 1999년 11월
구판절판


각 개인은 한 명으로 계산되며 그 이상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 벤담
-39쪽

보편이라는 관점에서 보았을 때, 한 개인의 선은 다른 사람의 선 이상의 중요성을 갖지 않는다. - 헨리 시즈윅
-39쪽

고통은 우리가 느끼는 무엇이며, 우리는 다양한 외적 징후들로부터 타인들이 고통을 느낀다고 추론할 수 있을 따름이다.
-47쪽

고통을 가하는 문제와 관련해 평등의 원리를 적용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고통과 괴로움은 그 자체가 나쁘며, 따라서 괴로움은 고통을 받는 존재가 소속되어 있는 인종이나 성 또는 종과 무관하게 억제되거나 최소화되어야 한다. 동일한 강도와 지속성을 갖는 고통은 동일하게 나쁘며, 그것을 인간이 느끼는가 또는 동물이 느끼는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57쪽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물에게는 거리낌 없이 고통을 가하면서 동일한 이유로 사람에게는 유사한 고통을 가하려 하지 않는다. 이러한 측면에서 그들은 종차별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58쪽

인간의 생명, 그리고 오로지 인간의 생명만이 존엄하다는 믿음은 일종의 종차별주의적 믿음이다.
-59쪽

나는 종차별주의를 반대한다고 해서 그것이 모든 생명에 동등한 가치가 있음을 함축하는 것은 아니라고 결론을 내린다. 자기 인식, 장래를 내다볼 수 있는 능력, 그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과 포부를 가질 수 있는 능력, 타인과 의미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 등은 고통의 문제와는 별다른 관계가 없다. 왜냐하면 설령 한 존재가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 외의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고통은 고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금 나열한 능력들은 목숨을 앗아가는 문제를 따져볼 경우에는 고려의 대상이 된다.
-62-63쪽

문제는 그들이 이성적 사고를 할 수 있는가가 아니다. 또한 그들이 이야기할 수 있는가도 아니다. 문제는 그들이 고통을 느낄 수 있는가이다. - 칸트
-3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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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 - 육식주의를 해부한다
멜라니 조이 지음, 노순옥 옮김 / 모멘토 / 2011년 2월
구판절판


한 국가가 얼마나 위대하며 도덕적으로 진보했는지는 동물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 마하트마 간디
-5쪽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게 아니라 우리의 주관대로 본다. - 아나이스 닌(프랑스 출신 작가)
-11쪽

믿음이 궁극적으로 행동을 이끌어낼 뿐 아니라 행동이 믿음을 강화한다.
-18쪽

미각이란 게 대체로 문화를 통해 습득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기호가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며, 거기서 벗어난 것은 불쾌하고 혐오스럽게 여긴다.
-19쪽

보이지 않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은 매우 비슷해 보인다. - 들로스 B. 매콘(미국 철학자)
-27쪽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다. - 비트겐슈타인(오스트리아 출신 철학자)
-27쪽

채식주의자는 단순히 ‘식물을 먹는 사람’이 아니다. 식물만을 먹는 것은 신념체계에 바탕을 둔 ‘행동양식’이다. ‘채식주의자’라는 용어는 핵심적 신념체계가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반영한다. ‘주의자’라는 접미사는 일정한 주의, 즉 일련의 원칙을 주장하고 지지하며 실천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35쪽

육식주의는 특정 동물들을 먹는 일이 윤리적이며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신념체계다. 육식주의자, 즉 곡기를 먹는 사람은 육식동물과 다르다. 육식동물은 생존하기 위해 육식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육식주의자는 또 잡식동물이라고만 할 수도 없다. 인간을 포함한 잡식동물은 식물과 육류를 모두 섭취할 수 있는 생리적 능력을 지닌 동물이다. 그러나 ‘육식동물’과 마찬가지로 ‘잡식동물’이라는 용어도 개체의 생물학적 특징만을 기술하지 철학적 선택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육식주의자는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선택에 따라 곡기를 먹는데, 선택은 항상 신념에서 비롯된다.
-36-37쪽

확고히 들어선 이데올로기가 그 상태를 유지하는 주된 방법은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남아 있는 주된 방법은 이름 없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름을 붙이지 않으면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으면 의문이나 이의를 제기할 수도 없으므로.
-40쪽

거짓말을 하려면 거창하게, 단순하게, 그리고 거듭해서 하라. 그러면 결국은 다들 믿게 된다. - 아돌프 히틀러
-47쪽

고통의 경험은 주관적이므로 다른 사람의 고통을 부정하기는 쉽다. 바꿔 말해 우리는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그가 무엇을 느끼고 있을지는 추정밖에 할 수 없는데, 그가 고통스러워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편이 우리한테 유리하다면 그게 사실이라고 아주 쉽게 믿어 버린다. 우리의 가정은 우리의 믿음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타인에게 고통을 가하도록 허용하는 그 신념체계는 자기보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한다.
-76쪽

무시한다고 해서 사실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올더스 헉슬리(영국 작가)
-99쪽

오랜 세월 고기는 마음대로 착취할 수 있는 자유를 상징해 왔다. - 닉 피데스(영국의 사회인류학자) -108쪽

어리석은 얘기들을 믿으면 우리는 잔혹한 행위를 저지르게 될 것이다. -볼테르(프랑스의 철학자, 작가)
-129쪽

권위에 대한 무분별한 존경은 진실의 가장 큰 적이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독일 출신 미국 과학자)

-129쪽

채식주의자들은 늘 자신의 선택에 대해 설명해야 하고, 먹는 음식을 옹호해야 하며, 다른 사람이 불편해하는 데 대해 사과해야 한다. 사람들은 고정관념으로 그들을 보면서 히피나 섭식장애자로 규정하는가 하면, 심지어 반인간적인 사람으로 여기기도 한다. 채식주의자가 가죽 제품을 걸치면 위선자 소리를 듣고, 일절 착용하지 않으면 순수주의자나 극단주의자로 치부된다. 이처럼 그들의 깊은 감수성은 육식주의 세상의 온갖 편견과 도발에 끊임없이 부대끼고 상처 받는다. 육식주의에 순응하여 가장 저항이 적은 길로 가기를 거부하고 소수자로 사는 일은 무척이나 힘들다.
-146쪽

‘자연스럽다’가 ‘정당화할 수 있다’와 같은 의미가 되는 것은 ‘자연화’라는 과정을 통해서다. 자연화와 진정한 자연스러움의 관계는 정상화와 정상성의 관계나 마찬가지다. 한 이데올로기가 자연화된다는 것은 그 신조들이 자연의 법칙(신념체계가 과학이 아니라 종교에 뿌리를 둔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법)과 일치하는 것으로 생각된다는 얘기다. 자연화는 사물이 의당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믿음을 반영한다. 이를테면 육식은 단지 사물의 자연적 질서를 따르는 일로 받아들여진다. 자연화는 생물학적인 논리로 이데올로기가 근거를 제공함으로써 그것이 유지되게 한다.
-147-148쪽

원래부터 늘 그러했으며 따라서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그러할 듯이 보이게 만듦으로써 역사의 렌즈는 이데올로기에 ‘영원성’을 부여한다.
-149쪽

지식의 가장 큰 적은 무지가 아니라 안다는 환상이다. -스티븐 호킹(영국의 물리학자)
-157쪽

한 사람의 죽음은 비극이다. 한 집단의 죽음은 통계다. - 31세 육식 남성
-169쪽

인류 역사에서 저질러진 사실상 모든 잔학행위는 현실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직시할 수 없다고 생각한 대중들이 고개를 돌렸기에 가능했으며, 반면에 평화와 정의를 위한 모든 혁명은 증언하기를 결심하고 다른 이들에게도 같은 행동을 요구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정의를 지향하는 모든 운동의 목표는 사회적 실천 곧 관행이 사회적 가치를 반영하도록 집단 증언을 활성화하는 데 있다. 운동은 증언자의 수가 임계질량이라 할 수준을 넘어설 때 성공한다. 권력의 저울을 운동 쪽으로 기울이기에 충분한 수의 증언자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1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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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 발상에서 좋은 문장까지
이승우 지음 / 마음산책 / 2006년 3월
평점 :
품절


소설 쓰기에 관한 한 뭐 하나 뺄 것이 없다. 모든 문장이 영양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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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 발상에서 좋은 문장까지
이승우 지음 / 마음산책 / 2006년 3월
품절


이 세상에 태어나는 한 편의 소설은, 그 소설이 탄생하는 순간까지의 그 작가의 삶의 총체다.
-11쪽

이야기의 부재는 죽음이고, 이야기의 존재는 삶이다. 삶이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진실인 것처럼, 이야기가 삶을 만드는 것 또한 진실이다. 이야기가 없으면 삶도 없는 것.
-14쪽

광야는 길이 아닌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은 길이 아닌가. 만들어진 ‘하나의’ 길이 없기 때문에 모든 곳이 길이 아닌 곳, 그곳이 광야가 아닌가. 정해진 하나의 길이 없기 때문에, 데려다줄 정해진 경로가 따로 없기 때문에, 어디로든 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헤맬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17쪽

공통의 기억이 많은 사람은 많이 운다. 울게 하는 것은 그의 죽음이 아니라, 그와 함께했던 기억이다.
-18쪽

공유한 기억이 많으면 헤어지기가 괴롭다. 그와 함께 만든 이야기가 나의 삶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의 부재는 나의 이야기, 나의 삶을 충격한다.
-21쪽

참여는 창조적인 행위이다. 작가가 자기 소설에 마침표를 찍는 순간 소설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독자가 그 책을 읽음으로써 완성된다.
-23쪽

우리는 읽으면서, 보면서, 들으면서 이야기를 변형시킨다. 우리의 삶이 이야기와 섞인다. 이야기는 이야기를 낳는다. 이야기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수없이 많은 이야기들의 자궁이다. 책은 아직 씌어지지 않은 많은 책들의 모태이다.
-24쪽

독자들은 어떤 작품에 대해 자전적이지 않느냐고 묻는다. 나의 대답은 이렇다. 모든 소설은 궁극적으로 자전적이다. 작가는 여러 권의 책을 통해 한 편의 자서전을 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 우리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그런 점에서 누구나 작가다.
-25쪽

널리 알려진 비유를 들면, 소설가는 자신의 생애라는 집을 헐어 그 벽돌로 소설이라는 집을 짓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소설가의 일대기를 쓰는 전기작가는 소설가가 세운 것을 허물어버린 것을 다시 세우는 것이다. (밀란 쿤데라, <소설의 기술>)
-26쪽

소설을 천천히 꼼꼼하게 읽고 있는 사람은 이미 소설 쓰기를 시작한 사람이다.
-27쪽

경험이 없이도 쓸 수 있다. 그가 읽어왔다면. 하지만 읽지 않고는 쓸 수 없다. 아무리 경험이 많다고 해도. 경험의 가치를 폄하하려는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읽기의 중요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다.
-28쪽

"저는 작가들을 운명적으로 타고난 사람, 즉 작가로서의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 사람으로 보지 않습니다."(페루 문호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29쪽

소설을 읽은 사람이 소설을 쓴다. 한 권의 책이 하나의 새로운 소설을 잉태하게 했다면, 그렇게 잉태된 하나의 새로운 소설은 그 한 권의 과거의 책 속에 무정형의, 이를테면 일종의 가능태의 형식으로, 미리 존재했던 것이라고 말해야 옳다.
-32쪽

그러니까 소설을 쓰려는 살마은 자신이 가진 거울이 이 세상에 대해 어떤 불만과 의혹, 어떤 욕망과 의도를 가지고 있는가를 먼저 살펴야 한다. 왜냐하면 소설은, 어떻게 말하든 소설을 쓰는 사람의 세계 해석이고, 그 해석의 뿌리는 그의 욕망과 의도이기 때문이다.
-39쪽

소설가가 되기 위해 소설을 쓰는 것이 아니고 소설을 쓰기 때문에, 쓰는 동안 소설가로 불리는 것이다. 소설가이기 때문에 소설을 쓰는 것이 아니고 소설을 쓰기 때문에 소설가인 것이다. 소설가가 소설을 쓰는 것이 아니라 소설을 쓰는 사람이 소설가인 것이다.
-40쪽

기억은, 온전히 나에게 속해 있고, 내 안에 있으며, 내 일부이고, 내 존재의 근간이다. 기억에 대해 나보다 더 잘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기억은 직접 경험과 간접 경험을 망라한 과거의 모든 유의미한 경험들의 집합이다. 그러나 기억은 단순한 과거 경험의 퇴적이 아니고 편집된 과거이다.
-42쪽

좋지 않은 발상이 형상화의 과정을 거쳐 좋은 소설로 태어날 수 있는 길은 거의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소설 쓰기는 발상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시작이 가장 중요하다.
-45쪽

이 세상에 씌어지지 않았거나 씌어졌으되 시원찮은 모든 소설들의 작가는 그 순간을 소중하게 포착하지 못했거나 아직 그런 순간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물론 과장해서 하는 말이다. 하지만 순전한 과장만은 아니다. 나무를 품고 있지 않은 씨앗은 없다.
-46-47쪽

낯익은 일상을 낯설게 만들어야 한다.
-65쪽

소설가는 신비주의자여서는 안 된다. 궁리하고 추리해야 한다.
-67쪽

삶이, 삶에의 두껍고 깊은 참여가 소설을 만든다.
-69쪽

소설은 막연한 생각이나 실체가 없는 이미지가 아니라 정교한 조형물이다.
-70쪽

설계도를 만드는 작업이 더 중요하다. 설계도를 만드는 데 들이는 시간이 소설을 쓰는 데 들이는 시간보다 더 많아야 한다. 말하자면, 소설을 다 써놓고 소설을 써야 한다.
-74쪽

질문이 없으면 대답도 없다. 질문이 없으면 소설도 없다. 여기서 중요한 의문문은 ‘왜’와 ‘어떻게’이다.
-75쪽

감추기와 드러내기의 교묘한 게임이 소설 쓰기이다.
-88쪽

소설 쓰기는 ‘기르기’보다 ‘만들기’쪽이다.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하는’ 것이다. 자연이 아니라 인공이다.
-93쪽

스토리는 사건이 일어난 순서에 따라 단순하게 늘어놓는 것이다. 플롯은 사건들을 일어난 순서에 따라서가 아니라 인과관계라든지 전달의 효과라든지 하는 다른 기준에 따라 엮어내는 것이다.
-98쪽

구체가 소설의 핵심이다. 거듭 말하지만, 소설은 육체여야 한다. 그러니까 소설 쓰기는 전혀 고상한 일이 아니다. 우리의 삶이 고상하지 않기 때문에 소설 또한 고상하지 않다. 삶이 지리멸렬하고 구질구질한 것처럼 소설 쓰기 또한 지리멸렬하고 구질구질하다. (중략)
압축과 비약에 대한 유혹에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삶은 압축되지 않고, 될 수 없고, 비약할 수도 없다. 강물 속으로 몸을 밀어 넣어야 한다. 그리하여 물이 당신의 몸속으로 스미게 해야 한다. 그 길밖에 없다.
-108-109쪽

말이 아니라 그림이고, 주장이 아니라 이야기여야 한다. 소설을 읽는 독자는 작가가 하는 주장을 듣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보여주는 이야기를 보는 것이다.
-112쪽

말하는 사람의 욕망과 의도와 입장에 의해 해석되고 재구성되지 않은 사건이란 없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들을 때 그 사건과 함께 그 사건을 옮기는 사람의 욕망과 의도도 함께 듣는 셈이다.
-122쪽

서사는 동사를 필요로 하고 묘사는 형용사를 필요로 한다.
-147쪽

묘사와 서사, 대화와 설명이 서로 섞여서 소설의 문장을 이룬다.
-148쪽

은유적인 문장은 의미의 전달을 지연시키긴 하지만 의미의 전달을 방해하는 문장은 아니다.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하는 장식으로서의 문장은 공허하고 무의미하다.
-150쪽

문체는 글을 쓰는 이의 개성과 체질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간결하면서도 탄력 있는 문장이 있는가 하면 관념적이고 논리적인 문장도 있고 풍자적인 요설을 앞세우는 문장도 있다.
-152쪽

진실되지 못한 글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 현란한 수사로 치장을 하게 되면, 그것은 고운 헝겊을 누덕누덕 기워 만든 보자기로 오물을 싸놓은 것처럼 흉한 냄새를 풍기게 된다. (한승원, <바닷가 학교>)
-1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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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1-06-05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글을 읽으면 소설을 쓰겠다는 분들이 많이 줄어드실듯...요즘 기본이 안되면서 소설을 쓰겠다는 분들은 좀 뜨끔하실듯 하네요^^
 
교육을 잡는 자가 대권을 잡는다 - 대한민국의 학교를 단번에 바꿀 교육 정책 제안
이기정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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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의 무능은 입시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하지만 학교는 입시교육에서만 무능한 게 아니라 입시가 아닌 다른 분야의 교육에서도 철저히 무능하다. 결국 학교는 입시로 인해 무능해진 것이 아니라 무능했기 때문에 입시에서도 무능한 것이다. 입시교육에서 무능한 학교가 입시교육 외의 교육에서 유능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흔히들 입시교육은 학생들의 창의성을 해친다고 말하지만 학생들의 창의력을 기르는 교육은 입시교육보다 훨씬 더 어렵다. 학교가 입시교육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면 입시교육을 넘어서는 수준의 교육은 더더욱 못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입시 때문에 학교가 바람직한 교육을 하지 못한다는 말은 진실의 일부만을 담고 있을 뿐이다. 또 다른 진실은 학교는 무능하기 때문에 바람직한 교육을 제대로 못한다는 것이다. -16-17쪽

방과 후 수업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 많은데, 방과 후의 수업은 적을수록 좋다. 정규수업이 부족하다면 정규수업 시간을 늘려야지 보충수업을 늘려서는 안 된다. 방과 후에 보충수업이 많은 것은 학교교육이 비정상적이란 증거에 불과하다.
-119쪽

임용시험에서 교육학을 배제해야 하는 진짜 이유는 대학에서 배운 교육학 이론이 대한민국 학교의 현실에서 전혀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하물며 교사임용고시에 합격하기 위해 공부하는 교육학이 과연 쓸모가 있을까? 그따위 공부는 학교 현장에서 학생을 교육하는 데 아무런 힘을 주지 못한다. 시간 낭비일 뿐이다.

-136쪽

교육부와 교육청의 관료들, 학교의 관료인 교장(교감)들 모두 학생들 가르치는 능력과는 철저히 유리된 시스템 속에서 승진했다. 그리고 이들은 학생들 가르치는 능력은 철저히 배제한 채 자신들의 편협한 가치관과 이익을 기준으로 하여 교사를 평가하고 승진시켰다. 사학재단도 마찬가지다. 사학재단은 학생들의 존경과 인정을 받아온 사람보다는 재단의 이익을 보장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교장에 임명했다.
-198쪽

사실 사교육 그 자체가 대단한 악은 아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공교육과 사교육의 공존이다. 하나만 있어도 될 것을 둘이 존재하는 바람에 학생과 사회가 불필요한 부담을 지고 있는 게 문제이다. 냉철하게 생각하면 굳이 사교육이 비난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둘 중 하나가 사라져야 한다고 할 때 반드시 사라져야 할 것이 사교육인 것도 아니다. 공교육이 없어지고 사교육이 존재해선 안 될 이유가 도대체 뭐란 말인가?
그렇다고 내가 지금 공교육이 없어지고 사교육이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공교육이 남고 사교육은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주장하는 것은 사교육을 무조건 악으로 몰고 가는 독단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사교육이 사라져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사교육이기 때문이고, 공교육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공교육이기 때문인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왜 공교육이 없어지면 안 되는가? 역설적인 이야기 같지만 이런 의문을 제기하는 데 게으르지 않아야 오히려 공교육이 살아날 길을 찾을 수 있다.
-2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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