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를 믿지 마라! - 아이들과 교사를 바보로 만드는 초등 교과서의 비밀
초등교육과정연구모임 지음 / 바다출판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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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부터 7차 개정 교과서가 적용되었다. 대개 교과서는 5년 주기로 교육과정이 개편되면서 함께 바뀌는데, 지난 7차 교과서는 10년 간 사용됐다. 시대의 흐름이 빨리 바뀌는 데 비해 교과서가 현실을 반영하는 속도는 더딜 수밖에 없다. PC통신에서 인터넷으로 넘어와 널리 사용되던 때이고, 그로부터 10년후인 2010년은 아이패드와 아이폰이 출현한 시기다. 매체와 기기의 변화는 담아내는 내용물의 속성까지도 변화시키기 마련이다. 10년 전에 만들어진 책이면 한참 옛날이다. 고전과 같이 대대로 물려 널리 읽기를 권장하는 책도 아니고, 교육용으로 공교육 현장에서 사용되는 책이다. 때문에 학교 교사들이나 교수들, 학부모 등 새로 바뀌는 교과서에 대한 기대가 컸다.   

   바뀐 교과서는 어떨까. 국어와 국사, 도덕 교과서가 국정에서 검정으로 넘어왔다. 국정 교과서는 나라에서 주관하여 만드는 단일종이고, 검정 교과서는 국가가 민간 출판사에 맡겨 경합을 붙이는 시스템이다. 국가에서 일괄적으로 만들어 배포하는 국정보다 민간이 경쟁하는 방식에서는 더 품질 좋은 교과서가 개발될 수밖에 없다. 사진이나 삽화뿐만 아니라 서술 내용까지도 모두 해당한다. 확실히 좋아졌다. 그러나, 여전히 보는 이에 따라서는 못마땅하다. <교과서를 믿지 마라>는 초등학교 교사들이 개정된 교과서에 대한 불편한 시선을 담아냈다. 비슷하게 불편함을 느꼈던 분들은 이 책에 호응할 수밖에 없다. 교과부와 본 교과서의 저자들은 자신들을 비판하는 이 책을 불편해할 것이다.  

  읽다보면 교육과정이나 교과부의 문제가 아니라 집필자의 문제다 싶은 것도 있다. 가령 교과서가 학생들이 보기에 어렵게 서술되어 있는 것은 교육 과정상 어려운 내용을 넣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교과서 집필자가 그 내용을 쉽게 풀 수 있음에도 어렵게 서술한 탓이기도 하다. 각 교과서마다 다르지만, 집필에 참여하시는 분은 현장 교사와 교수로 나눠져 있다. 교수가 썼다고 해서 항상 어렵고, 현장 교사가 썼다고 해서 항상 쉬운 것은 물론 아니다. 나이와 신분에 상관없이 집필자들은 대개 학생들 난이도로 쉽게 풀어쓰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을 편집자가 해결하거나 집필자 중 필력이 뛰어난 분이 해결해야 하는데, 둘 다 못한 경우에는 어려운 내용, 어려운 서술이 그대로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또 책에서 언급한 내용 중 어떤 것은 검정 교과서의 제작 시스템상 어쩔 수 없기도 하다. 국가는 민간 출판사에 맡기고, 민간 출판사는 집필자를 불러모아 교과서 내용을 만들어 나가고 고치고 고쳐서 국가에 제출한다. 국가는 제출된 여러 교과서를 일정 기간 동안 전문가들의 검토를 받아 합격과 불합격을 판정한다. 불합격한 교과서의 출판사는 대개 투자금 전액을 날린다. 합격한 교과서의 출판사와 저자들은 채택율에 따라 각기 수익금과 인세를 배분받는다. 교과서는 사실 돈이 되지 않는다. 저자들은 채택율에 따라 큰 돈을 손에 쥐기도 한다. 그러나 거의 채택이 되지 않는 교과서의 경우 저자들은 이미 계약금을 가져갔고, 출판사는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채택이 많이 되면 양자가 이득을 보지만, 채택이 안 되면 출판사가 손해보는 방식이다. 

  합격한 교과서라 하더라도 국가는 투자비 전액을 주지는 않는다. 각 항목을 계산해 보고하지만, 그 항목들은 실제 들어간 비용보다 낮은 금액이다. 게다가 교사용 씨디에 대해서는 한 푼 돌려주지 않는다. 씨디는 출판사가 채택율을 높이기 위해 만드는 부록이기 때문이다. 그 부록을 어느 출판사나 다 하고 있고, 안 하면 현장에서 욕을 먹는 상황이니 울며 겨자먹기로 어쩔 수 없이 손해를 감수하는 상황인 셈이다. 교사용 지도서 역시 큰 돈이 투자되고, 원가를 뽑으려면 한 권에 몇 만 원씩 책정해야 하지만, 교과부는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여기서도 손실이 발생한다. 이러다보니 검정 체제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모험을 걸 수 있는 자본력 있는 출판사만이 도전을 하게 된다. 출판사는 그 수익을 교과서에 따른 교재(문제집)에서 내야 하는데, 교재가 팔리지 않으면 결국 수익이 아니라 명예만 남는다.  

  초등교과서뿐만 아니라 중고등교과서에서도 윗 단계에서 배워야 할 내용이 자꾸 아래로 내려오는 경향이 있기는 하다. 10년 전에 학교를 다니신 분들은 현재 교과서를 보며 그때 배웠던 내용을 떠올려보자. 대학 학부 전공 과정에서 배워야 할 내용들이 고등학교로 내려오고, 고등학교에서 배워야 할 내용이 중학교로, 중학교에서 배워야 할 내용이 초등학교로 내려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초등학교에서 배워야 할 내용은, 결국 학교에 오기 전에 어디에선가 해결해야 한다. 이 책에서 저자들이 지적하는 부분은 여기에 있다. 한글도 제대로 모르는 아이들에게 어려운 받아쓰기를 시키고, 덧셈도 못하는 아이에게 나눗셈을 하라고 하니 아이들은 좌절할 수밖에 없다. 입학 전부터 아이들이 따로 선행 학습을 하니 지식 습득의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교과서에 담는 내용을 일단 쉽게 바꾸고, 너무 많은 지식을 한꺼번에 담으려 하지 말고, 집필자들은 제 능력이 안 되면 쓰지 말고, 능력이 되는 분들만 집필에 참여해야 한다. 대개는 대표저자의 인맥에 따라 그 나머지 집필자들이 꾸려지고, 때에 따라서는 지도교수와 제자의 주종관계를 이루는 경우도 있어, 교과서 집필이 올바로 되지 않는다. 학생들은 경쟁으로 고통받고 있다. 배워야 할 내용은 많고, 내용마저 어렵고, 어려운 내용을 어렵게 서술한다면 이들은, 끊임없이 좌절만 반복해서 경험하게 될 것이다. 교육과정은 물론 해당 나이보다 약간 높게 설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나 지금은 '약간'이 아니라 '많이' 높였기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하나 더. 국정보다는 검정, 검정보다는 인정 교과서 체제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만, 인정 교과서의 경우 해당 지역 교육청의 허가만 있으면 되기에 단기간에 빨리 제작하려는 습성이 있어 오류의 발생 확률이 높고, 문장이나 내용 구성이 엉망이 되기 쉽다. 따라서 인정보다는 검정 시스템을 널리 적용할 필요가 있으며, 검정으로 할 경우에는 여러 민간 업체가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는 방식을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자본이 시장을 쓸어버리는 논리는, 교과서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자본이 시장을 쓴 다음에는 사실상 여러 좋은 교과서가 경쟁하는 생태계가 아니라 몇 개의 그냥 교과서가 나눠먹는 형태가 될 것이다. 이것은 국가, 교과부가 고민해야 할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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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를 믿지 마라! - 아이들과 교사를 바보로 만드는 초등 교과서의 비밀
초등교육과정연구모임 지음 / 바다출판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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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초등학교에 처음 영어 교과를 도입할 때도 역시 가장 큰 이유는 사교육비 경감이었다. 하지만 사교육비가 기하급수로 늘어났고 영어 실력은 여전히 그 자리다. 영어 시간 외에는 영어를 쓸 필요가 없는 우리 사회에서 영어를 어떤 맥락에서 접근해야 할지, 효과적인 영어 학습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거의 없었다. 그저 영어를 많이 접하면 실력이 좋아질 것이라고 했지만, 영어학자들은 영어를 일찍 공부할수록 영어가 중요하다는 사회적 메시지가 강해져 사교육비가 늘어날 것이라고 했다. 또 외국어이기 때문에 배울수록 실력이 나아지고 자신감이 생기기보다는 더 어렵다는 생각만 하게 된다고 한다. -26쪽

교과서를 살펴보면 아이들이 배워서 도달해야 하는 목표인 성취 기준과 평가 수준이 너무 높다는 생각이 든다. 교육 내용은 현재 아이들의 발달 시점보다 약간 높게 설정하는 것이 적절한 법이다. 이는 '학습이 발달을 선도한다'는 비고츠키의 말이나 배움의 공동체를 유행시킨 시토마나부는 '높은 레벨의 배움'에 도전해야 한다는 말에서도 알 수 있다. 하지만 현재의 교과서는 아이들을 너무 높은 수준에 올려놓는 바람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성취 기준과 평가 기준이 너무 높으면 아이들에게 도전력이 생기는 게 아니라 아예 포기하고 만다. 많은 아이들을 열등생으로 만드는 교육 내용, 교과서가 되는 것이다. -66-67쪽

초등 영어가 들어오면서 사교육업계는 큰 시자을 하나 개척하였고, 영어로 사회적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부모들의 경쟁까지 더해지면서 급기야 2007년에 영어 사교육비만 15조에 이르렀다. 소득에 따른 사교육비 지출은 천차만별로 학습지 방문교사부터 영어 원어민 수업, 조기유학까지 그야말로 부모 능력에 따라 고르는 상황이 되었다. 상류층의 경우 심지어 유치원에서 중학교까지 영어 사교육비가 1억 원이나 된다는 신문보도도 있었다. 사교육비를 벌기 위해 학부모들은 비정규직이라도 마다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영어 격차'는 곧 소득계층과 비례하기 때문이다.-176쪽

현장에 있는 교사는 수업하고 일하는 틈틈이 주말에 몇 번 워크숍을 한 뒤 곧바로 몇 단원을 맡아 쓰게 된다. 교원대학교에서 공부하는 교사는 뭔가 더 배우려고 대학원에 갔다가 배우기도 전에 일을 맡아 교과서를 만들거나 실무를 돕게 되는 것이다. 교과서는 전국에 흩어진 교사들이 각자 만들다 보니 같은 책 안에서도 진술 방식이나 구성 방식이 다르고, 단원마다 다른 느낌이 나기도 한다. 한 번 쓰고 마는 것이 아니라 여러 번 수정하고 검토해야 하는데 만나기가 쉽지 않아 나중에는 몇몇 사람이 고칠 때도 있다. 그러면 자기 이름이 올라가 있지만, 전혀 자신이 쓴 게 아니라는 항변도 나오게 된다. -262쪽

교과서의 질과 수준은 좀 나아졌을까? 집필진에 참여한 교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교과서 체계가 새로워진 면이 많다고 한다. 하지만 많은 교사들은 교육과정 자체가 어렵고 검정기준을 통과해야 하니 여전히 내용이 어렵고 양이 많은 데다, 새로운 시도를 하고 싶은 맘까지 더해져 오히려 더 어렵지 않을까 걱정한다. 자칫 교과부가 교육과정이나 교과서에 대한 책임을 출판사로만 넘기고 질적 개선노력을 하지 않는 건 아닌가 의구심을 제기하는 의견도 있다. -2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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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설주의보
윤대녕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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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랫만에 다시 소설을 손에 들었다. 얼마만인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책 자체를 멀리하고 있었다. 의도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마음에 상처가 깊어 다른 어떤 것에 시선을 줄만한 여유가 없었다. 지금도 상황이 달라진 것은 아니고, 앞으로도 오래 지속되겠지만, 위로 받을 곳이 필요했다. 딱딱한 인문학, 사회과학 서적에도 간간히 눈길을 주고는 있지만, 단번에 읽히고 이해하기 쉬운 책들만 집어들게 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는 아니지만, 어쩌다 윤대녕을 추천 받았고, 이 책을 선택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 그리고 관계에서 비롯되는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일곱 개의 짧은 이야기를 합쳐 책을 냈지만, 각각의 이야기는 따로 떨어져 존재하지 않는다. 새로운 이야기지만 '윤대녕'이라는 소설가만의 내면 세계와 문장, 표현이 그대로 스며들기 때문이다. 한 번쯤 가봤을 만한 장소에서, 한 번쯤 겪어봤을 법한 사건으로 이루어져 있음에도 빠져들게 되는 건, 등장인물들 간에 설정된 관계에서 그들의 말과 행동이 미묘한 지점을 가로지르기 때문이다. 찬찬히 그들의 심리를 들여다보게 된다. 그들이 주고받는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고민했을 소설가의 모습도 떠올려 본다.  

  나이가 들면서 오래 만나온 사람들의 존재가 더더욱 소중하고 그리워진다는 작가의 말. 만나서 헤어지는 순간부터 그리워지고,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는 그는-윤대녕은 스스로가 만나고 헤어지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러한 심정으로 계속 글을 쓰면서 살아가고 싶다 한다. 윤대녕의 이러한 심정이 짧은 각각의 소설에 배어 있다.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앞으로도 또 만날 것이다. 오래 만나온 좋은 사람과의 만남이 지속되면 좋겠지만,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닌 묘한 상황으로 지속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일부는 나의 잘못이기도 했고, 일부는 누구의 잘못도 아니기도 했다. 타인이 내게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없진 않겠지만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타인에게 잘못한 것만이 유독 기억난다. 그때 그러지 않았어야 했는데, 하는 식의 후회도 든다. 윤대녕의 이 소설을 한 문장 한 문장 마음으로 읽으며 지난 일들이 자꾸 떠오른다. "사람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의 바람이 불고 있어 아프고, 하릴 없이 그 바람 맞으며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들이 있어 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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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롬나드 2011-04-18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님~~저 현아예요. 오랜만이죠?^^
무슨 일 있으셨던 거예요? 에구구.
그래도 윤대녕 소설로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으신 것 같아 제가 더 기분이 좋네요.
힘내세요...!

봄 하면, 윤대녕인데..올해는 어째 윤대녕 소설들이 손에 잘 안잡히네요.
뭔가 뒤숭숭하게, 시간이 흘러가고 있어요.
좀 더 따뜻해지면 한번 봬요~~*

마늘빵 2011-04-19 01:26   좋아요 0 | URL
네, 지난 번이랑 닉네임이 다른 것 같은데. ^^
잘 지내죠?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제겐 아직 겨울이 끝나지 않았네요. 윤대녕 소설은 처음 접했어요. 조용히 카메라가 따라다니는 홍상수 류의 영화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따뜻해지면 만나요.
 
대설주의보
윤대녕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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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챙이가 헤엄치듯 별들이 밤하늘에서 이동하고 있었다.-37쪽

낯선 곳을 경험하는 것은 실제로 낯선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더 낯선 일이거든. 말하자면 지나간 것의 흔적, 내 안에 가라앉아 있는 것, 흐름 위에 멈춰 서 있는 것, 이런 것들이 내가 지금 흥미를 가지고 있는 것들이지. -51쪽

마당에 덮여 있던 햇살의 농담이 사포로 문질러놓은 듯 거칠게 변하고 있었다.-65쪽

그녀는 남자들의 시선을 많이 받아본 여자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포기하기 힘든 오만함과 아슬아슬한 동요의 기미가 독거미처럼 몸에 달라붙어 있었다.-95쪽

휘저으면 손에 묻을 듯한 검붉은 노을이 들녘 저 끝에 걸려 있었다. -130쪽

본인 말에 의하면 일찌감치 뜨거운 물에 빠졌다 나온 경험이 있는 여자였다. 그 때문일까. 그녀의 목소리는 도마에 밴 붉은 양념처럼 가슴을 저미는 구석이 있었다.-133쪽

거리메 부슬부슬 비가 듣고 있었다.-134쪽

삼촌은 된서리를 맞은 파처럼 온몸을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137쪽

그녀는 비가 내리듯 조용히 어깨를 흔들며 잠깐 흐느꼈다.-147쪽

하늘이 회색 이불보처럼 서서히 내려앉고 있었다.-174쪽

섬들이 눈앞에 검은 무덤들처럼 떠 있었기에 -215쪽

변소에 앉아 있다 난데없이 지붕에 폭탄을 맞은 심정으로-223쪽

뜨거운 모래밭에 앉아 누군가 금바늘을 들고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격이었다.-225쪽

한 번 배신당하면 두 번 다시 울어주지 않더군. 시는 또 물질적으로 눈물과 성분이 같거든. 그것이 굳어 고요한 새벽에 푸르른 돌로 변하게 되지.-229쪽

거뭇거뭇 눈발이 휘날리는 게 보였다.-229쪽

젖은 모래처럼 몸이 피곤한데 잠이 안 오네요.-229쪽

이처럼 상대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과 이해의 의지조차 없이 우리는 그녀와 만나왔고 또 무감하게 헤어졌던 것이다. 도대체 우리는 무슨 일을 하며 나이를 먹어가고 또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것일까. 사는 게 모두 어리석고 잔인한 속임수라는 생각이 들었다.-234쪽

난지도 뒤편으로 검붉은 노을이 기억의 잔해인 듯 무참히 소멸해가고 있었다. -235쪽

무엄하게 차오르는 검은 밀물을 멀거니 눈여겨 보던 유석이 짐짓 몸서리를 치며 웅얼거렸다.-2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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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 영원히 철들지 않는 남자들의 문화심리학
김정운 지음 / 쌤앤파커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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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제목 한번 기가 막히게 지었다. 이 책이 불과 1년반만에 58쇄까지 찍을 수 있었던 데에는, 제목이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텔레비전에도 볼 수 있었던 김정운 교수의 맛깔난 입담을 글로 담아냈다고 보면 된다. 구어체의 장난끼 가득한 문장을 구사하여 읽기 편하다.  

  제목은, 간단히 말하면 말장난이다. 많은 사람들이 제목을 보고 말장난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일단은 호기심으로 책에 관심 갖게 된다. 결혼을 '아주 가끔' 후회하는 남편과 '아주 가끔' 만족하는 아내의 이야기다. 심리학을 공부했고, 여가경영학과에서 가르치며, 한 마디로 '잘 놀아야 한다, 행복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바쁘게 사는 사람이다.   

  본인과 아내의 사적인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포함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개인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면서 간단히 프로이트와 문화심리학 이론 등을 끼워넣어 서술한다. 제목으로 잠재적 독자의 눈을 사로잡고, 은밀한 이야기로 첫 장을 시작하고, 그렇게 계속 끌고 간다. "사십대 후반의 철없는" 남자의 수다를 장시간 들은 기분이다. 수다는 물론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재미있었다.  

  그러나 기대가 컸던 탓인지, 책이 쉽고 재밌게 읽히는 것을 떠나서 마지막 장을 덮고 나니 조금 허전하다. 부담 없이 바라만 보고 있어도 재밌는 방송국 아침마당 같은 책이다. 그러나 아침마당 프로그램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로선, 이 책도 그냥 그렇다. 개인적인 견해다. 수다가 필요하신 분에겐 괜찮다. 책을 많이 찍었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이 재밌게 읽었다는 의미로 환원시켜도 될 듯하다. <정의란 무엇인가>처럼 팔려도 읽히지 않는 책도 있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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