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이 필요한 시간 - 강신주의 인문학 카운슬링
강신주 지음 / 사계절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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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래 만난 분은 이 책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심리학이 사람들을 치유하려는 책이 나오다가 이제 철학이 그 역할을 맡으려는 것 같다." 나 또한 동의한다. 많은 철학 교양서가 나오고 있는데, 그 중 상당수는 현실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의 심리를 치유하기 위한 글이다. 재미를 찾는 사람들은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을 찾고,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은 책을 찾는 시대다. 철학이 그 흐름의 중심에 있다. 강신주 선생님의 <철학이 필요한 시간>은 이러한 독자들의 갈망과 출판의 흐름을 잘 포착했다.    

  장자와 노자의 철학을 새롭게 해석한 책을 낸 이후, 대중 교양 분야로 발을 넓혔다. 강단보다는 대중을 선택한 것이다. <철학, 삶을 만나다>, <상처받지 않을 권리>, <철학 VS 철학> 등은 이러한 시도에 대한 결과물이다. 그리고, 이번에 낸 <철학이 필요한 시간>도. 매일 같은 삶을 살아가는 직장인들이라면 "나는 왜 이러고 살지?"라는 의문을 한 번쯤 가져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하고 잠들고, 다시 또 일하고 잠드는 일상을 반복한다. 이 책은 그들을 위한 '인문 공감 에세이'라고 한다.  

  부제도 '강신주의 인문학 카운슬링'이다. 제목에 저자 이름을 걸 수 있는 때는, 저자가 이미 알려진 사람일 경우다. 인문 교양서를 읽는 독자들은 정해져 있고, 그들 중 상당수가 강신주의 고정 독자라고 생각하지 않고서는 이렇게 하기 어렵다. "자기 위로와 자기 최면이 아닌 아파도 당당하게 상처를 마주할 수 있게 하는 인문학이 필요"하다고 말하며, 칸트, 혜능, 데리다, 장자 등의 동서양, 한국 철학자들의 고전을 통해 상처를 대하는 법을 알려준다.   

  그러나 컨셉은 아주 잘 잡았지만, 책을 열어보면 기존에 나온 '책에 관한 책'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 기존에 나온 다른 종류의 책들도 사실 '컨셉'을 걷어내고 나면 비슷한 책들이 많다. 책은 저자와 컨셉, 내용을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서 독자층과 판매량이 정해진달까. 그동안 그가 내놓은 책 중에서는 가장 많이 판매되었고, 많은 독자에게 사랑받았다. 출판사는 기존 고정 독자에서 벗어나 독자층을 넓히고자 했고, 그게 통했다. 그러나 강신주의 깊고 넓은 내공을 기대한 나로서는 이보다 더 나아간 뭔가를 원했다. 내공이 센 분이 쓴 책에 대해서는 그만큼 깊은 뭔가를 바라게 된다.  

  대중 강연을 많이 하면서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러한 경험을 철학에 접목하여 글로 풀어내려 한 시도는 괜찮았다. 경험과 철학 사이 어느 지점에서 포인트를 찾아야 했는데, 아무래도 '삶'보다는 '철학책'으로 쏠린 점이 없잖아 있다. 목차를 이렇게 잡지 말고 조금 다른 방식으로 풀어봤으면 어땠을까 생각도 든다. 좋은 책이지만 아쉬움에 말이 길어졌다. 강신주 입문서로는 나쁘지 않다.

  덧) 책의 맨 뒤에 몇 장에 걸쳐서 '더 읽어볼 책'을 몇 줄 안내글과 함께 소개하고 있는데-이런 방식은 아마도 책세상 문고판에서 처음 시도되지 않았나 싶다-이 책을 읽은 이후, 관심 있는 책을 찾아 읽기 좋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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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하라 고양이 - 가끔은 즐겁고, 언제나 아픈, 끝없는 고행 속에서도 안녕 고양이 시리즈 2
이용한 글.사진 / 북폴리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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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은 우연이다. 살면서 고양이를 알게 된 것. 그리고 그 우연이 인연이 되었다." 시인의 집에는 고양이가 산다. 정확히는 길냥이다. 시인은 오지를 떠돌다 동네를 떠돌았고, 동네를 떠돌다 고양이를 만났다. 사람들은 흔히 길에서 보는 주인이 없는 고양이를 '도둑 고양이'라고 부르며 기피하지만, 시인에게 고양이는 또 하나의 이웃이었다. 2009년 <안녕 고양이는 고마웠어요>에 이어 낸 고양이와의 두 번째 만남을 기록했다. 시인의 거주지가 바뀐 탓이다.   

  길에서 만나게 되는 개들은, 대개는 주인이 있거나 주인이 있었지만 주인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길에서 만나는 고양이는 대부분 주인이 없이 길에서 태어나 길에서 먹고 자고 길에서 죽는 생을 반복한다. 많은 고양이들이 그런 삶을 살아가지만, 사람들의 눈에는 그네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고양이는 사람을 피하고, 사람도 고양이를 피하는 까닭이다. 간혹 차 밑이나 으슥한 골목에서 고양이를 만나는 경우가 있다. 어쩌다 사람을 피하지 않는 고양이를 만나기도 한다. 빤히 쳐다본다. 사람과 만나는 것이 익숙해진 탓일까.  

  한 번은, 집앞의 쓰레기 봉투를 헤집고 있는 고양이와 마주했는데, 낼름 도망가더니 멀리 가지 않고 골목 귀퉁이에 서 있다. 내가 가던 길을 걷고 봉투에서 멀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원하는대로 나는 집으로 들어갔고, 고양이는 다시 봉투로 기어왔다. 그 봉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고양이는 뭘 먹겠다고 계속 헤집어놓고 있었다. 그래서, 집에 있던 참치캔을 따서 집 앞에 두었더니 처음엔 경계하던 녀석이 그걸 다 먹어버렸다. 흔적도 남겨놓지 않고. 그러나 다시 그 고양이를 만난다 해도 참치를 먹은 고양이인지 구별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 책에는 고양이의 생이 담겨 있다. 시인이 사는 동네에는 많은 고양이들이 살고 있고, 처음에는 그들을 구별하지 못했지만, 곧 그들의 거처와 특징, 가족 관계까지 꿰게 된다. 어느날 갑자기 어떤 고양이가 사라지면 그 고양이의 행방을 궁금해하기도 한다. 십중팔구 누군가에게 맞아 죽거나 겨울을 나지 못한 경우다. 고양이는 사람들 곁에서 어울리는 동물은 아니지만, 분명 같은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다. 울고 웃고 아파하는 또하나의 존재를 우리 곁으로 불러온다. "가끔은 즐겁고, 언제나 아픈, 끝없는 고행 속에서도 명랑하라 고양이." 

  덧) 이 책에 실린 고양이 사진은 시인이 직접 찍었다. 이런 장면을 어떻게 포착했을까 싶을 만큼 재미난 사진도 많다. 그만큼 시인이 길에서 고양이와 지낸 시간이 많다는 증거일 게다. 또 사진을 통해 알 수 있는 건, 고양이가 카메라를-아니, 정확히는 카메라를 든 시인을- 바라보는 눈빛이 친근하다는 것이다. 매번 밥주고 물주고 놀아주기에 이런 표정이 나올 수 있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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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스탕 2011-04-15 0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울동네 고양이 대빵이에요. 하하하~~
음식물 쓰레기 버리러 가면서 고양이 먹이를 따로 챙겨주기 때문에 쓰레기통 근처에서 야옹~ 하고 한 번 울어주면 많게는 10마리 가량의 고양이들이 제 주변으로 모이죠. 울 작은 녀석의 선망의 대상이에요 ^^

오랜만에 댓글 남기는 기분.. 건강하게 봄날 지내세요~ :D

마늘빵 2011-04-15 11:12   좋아요 0 | URL
^^ 고양이 엄마시군요. 고양이들이 몰리는 정도면 밥을 자주 주셨다는 건데. 봄은 봄인데 봄 같지가 않아요.
 
철학이 필요한 시간 - 강신주의 인문학 카운슬링
강신주 지음 / 사계절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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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소나를 찢어버리고 맨얼굴이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는 자신의 삶을 연기가 아니라, 삶으로서 살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인문학이 우리에게 페르소나를 벗고 맨얼굴로 자신과 세계에 직면할 수 있는 힘을 주려고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반면 거짓된 인문학은 여러분에게 더 두텁고 화려한 페르소나를 약속할 것이다. 거짓된 인문학은 진통제를 주는 데 만족하지만, 참다운 인문학적 정신은 우리 삶에 메스를 들ㄹ이대고,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려고 한다. -15쪽

간혹 인간이 겪는 고통의 양은 불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단지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고통을 일시불로 갚느냐, 아니면 할부로 갚느냐를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정직하고 솔직하다는 것은 일시불로 고통을 겪어내는 것이다. 반면 자기 최면과 위로에 빠진다는 것은 할부로 고통을 겪어내는 것이다. 할부로 고통을 겪는다면, 할부가 끝날 때까지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도 사라진다. 일시불로 정직하고 솔직하게 고통을 겪어내자. 그러면 남은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희망이 우리에게 덤으로 남겨질 것이다. -16쪽

정직한 인문학이 건네는 불편한 목소리를 견디어낼수록, 우리는 자신의 삶에 더 직면할 수 있고, 나아가 소망스러운 삶에 대한 꿈도 키울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17쪽

온갖 억압과 고통을 극복하여 현재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영위해야만 한다. 자신의 삶을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지금 노예의 굴종과 비겁을 감내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노예로 살기를 결정한 셈이고, 지금 주인의 당당함과 자유를 쟁취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주인으로 살기를 결정한 셈이다. -25쪽

이 몸이 바로 보리수.
마음은 맑은 거울
날마다 힘써 깨끗이 닦아야 하리라!
먼지가 앉지 않도록
(신수)

보리는 본래 나무가 아니며
맑은 거울에는 (거울의) 틀이 없다.
본래 아무것도 없는데
어디에 먼지가 모이겠는가!
(혜능)-66쪽

인문학은 주어진 현실과 인간의 삶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면서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꿈꾸려는 학문이다. -69쪽

관찰자는 모든 것의 원천입니다. 관찰자가 없으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관찰자는 모든 지식의 기초입니다. 인간 자신, 세계 그리고 우주와 관계되어 있는 모든 주장의 기초입니다. 관찰자의 소멸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의 종말과 소멸을 의미할 것입니다. 지각하고, 말하고, 기술하고, 설명하는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투라나, <있음에서 함으로>)-93쪽

(아렌트는) ‘사유’란 하지 않아도 상관이 없는 ‘권리’가 아니라 반드시 수행해야만 할 ‘의무’라고 강조한다. -155쪽

선물이 주어지는 조건으로서의 이런 ‘망각’은 선물을 주는 쪽에서만 근본적인 것이 아니라, 선물을 받는 쪽에서도 근본적인 것이다. 특히 선물을 주는 주체에게 선물은 되갚아지거나 혹은 기억에 남겨지거나, 아니면 희생의 기호, 다시 말해 상징적인 것 일반으로 남아 있어서는 결코 안 된다. 상징은 즉시 우리를 또 다른 상환으로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사실 선물은 주는 쪽에게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측면 모두에서 선물로 드러나지도, 선물로 의미되지도 않아야 한다. (데리다, <주어진 시간>)-165-166쪽

소통이란 단어를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흔히 소통이란 의사소통을 상징하는 커뮤니케이션의 번역어 정도로 이해되고 있다. 그렇지만 ‘트다’라는 뜻의 ‘소’와 연결하다라는 뜻의 ‘통’이란 글자로 구성되어 있는 소통이란 개념은 더 심오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소통은 구체적으로 막혔던 것을 터서 물과 같은 것이 잘 흐르도록 하는 작용을 나타내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통’이라는 개념보다 ‘소’라는 개념이 더 중요하다고 하겠다. 막혔던 것을 터버리지 않는다면, 물과 같은 것이 흐를 수 없다. ‘소’라는 개념은 우리 마음으로부터 선입견을 비운다는 것, 그러니까 장자가 말했던 ‘비움’이나 ‘잊음’과 같은 맥락에서 사용된다. 마음으로부터 선입견을 비워야만 타자와 연결될 수 있는 희망을 품을 수 있을 것이다. -193-194쪽

여가 시간은 노동을 하지 않는 시간이어서 자유로운 시간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대중매체는 우리의 자유를 가만두지 않는다. 대중매체를 통해 우리는 자신이 노동해서 만든 상품에 대한 소비 욕망을 증폭시키고 있다. 결국 여가 시간의 활동마저도 자본주의는 자유롭게 내버려두지 않는 것이다. -251쪽

이상이란 나는 이렇게 살아가겠다는 이념이자, 동시에 자신의 삶을 자신이 결정하겠다는 자유정신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상은 현실이란 급류와 맞서 싸우겠다는 결연한 각오이자 다짐이기도 하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상을 잃지 않으려고 버텼던 몇몇 위대한 인물에 대해 우리는 이렇게 말하곤 한다. "그는 정말로 주체적인 삶을 살았다."고. 주체적으로 살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무엇보다 먼저 그것은 주인으로서 살았다는 것, 바꾸어 말하자면 노예처럼 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주체는 자유인이라는 것이다. -2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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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발견 - 정치에서 가능성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정치학 강의
박상훈 지음 / 폴리테이아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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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의 해결을 위해서가 아니라 논쟁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다."(알버트 A, 허쉬만, <열정과 이해관계>)-9쪽

나는 진보적인 것보다 정치적인 것이, 또 정치적인 것보다 인간적인 것이 더 넓고 풍부한 세계이며 진보파가 사회적으로 큰 성취를 이루려면 인간과 정치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24쪽

(정치는) "영혼의 구원보다 자신이 태어난 공동체의 위대함을 더 소중히 생각하는 시민을 칭송"하는 일(베버)-31쪽

"내적으로 무력하고 스스로에게 적절한 답을 줄 수 없는 자라면 정치라는 직업을 택하지 않는 것이 좋다."(베버)-35쪽

"인간의 정신은 과연 우리가 옳은지를 살펴보는 내적 의심이라는 작은 불빛을 통해서만 빛날 수 있다."(알린스키)-56쪽

분노는 정의롭지 못한 현실에 대해 묵인하지 않겠다는 결단일 때가 많다. 인간 사회가 불평등과 부정의를 줄여 갈 수 있는 것은 그런 현실에 대한 누군가의 분노 때문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가난했던 시절 부모 형제의 도움과 희생으로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우리 사회 엘리트들이, 안락한 삶에 안주하기보다 타인의 고통과 불합리한 사회 현실에 분노하고 뭔가 개선을 위해 열정을 갖는 것도 분명 좋은 일이다. 그러나 경험을 통해 점점 깨닫게 되는 것은, 분노와 열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부작용도 많다는 사실이다. 분노와 열정이 인간을 행동하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에너지라 할지라도, 그래도 뭔가 가치 있는 결실을 맺을 수 있으려면 이성과 합리성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64-65쪽

어떤 경우든 지나친 경제 중심주의는 곤란하다. 경제는 인간 공동체의 물질적 필요를 충족시켜 주는 하위 체제로 이해되어야 하며, 인간 공동체의 통합과 연대의 원리하에서 부분 체제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 경제가 체제 전체를 지배하게 하거나 공동체의 미래를 결정하게 하는 논리나 이론은 모두 좋지 않다. -1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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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 영원히 철들지 않는 남자들의 문화심리학
김정운 지음 / 쌤앤파커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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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하기 때문이다. ‘과정이 생략된 삶’을 사는 까닭이다. 모든 결과는 ‘과정’이 있기에 가능하다. 그러나 이 땅의 사내들은 이 사실을 아주 자주 망각한다. 그리고 오직 ‘결과’만 가지고 서로 비교한다. 화장실에서 옆 사람의 그곳을 흘끔거리며 열등감에 젖는 것처럼, 타인의 사회적 지위나 연봉 따위와 자신을 비교하며 한없이 움츠러든다. 오늘을 살아가는 ‘과정’에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결과’만을 생각하기 때문이다.-108쪽

과정을 즐기지 못하면 항상 불안하다. 타인의 완성된 결과와 내 미숙한 결과를 비교하기 때문이다. 이 땅의 사내들이 불안해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살면서 한 번도 과정을 즐기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또 아무리 노력해도 결과가 그리 분명하게 나타나지도 않는 세상이다. 이런 ‘결과 지향적 삶’에는 어떠한 즐거움도 없다. 결과를 이루는 순간, 또 다른 결과를 계산해야 하기 때문이다. -109쪽

세상은 기준을 정하는 사람의 의도대로 움직인다. 문제는 내가 내 삶의 소실점을 정하고 있는가다. 소실점을 자신의 의도에 따라 변경할 수 있는 사람만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 내가 선택하고, 내가 변화의 주체가 될 때 느끼는 감정이 바로 ‘재미’다. 재미는 내가 내 삶의 주인일 때만 얻어진다.
-169쪽

학교는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것을 찾아내고, 그것을 공부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학교다. 적어도 미국이나 유럽의 학교는 이런 교육학적 이념에 충실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우리의 학교는 ‘남의 돈 따먹는 방법’을 가르치는 곳으로 전락했다. 어떻게 하면 좋은 대학 들어가, 높은 연봉을 받는 좋은 직장을 갈 수 있는가에 관해서만 관심 있을 뿐이다. 그러니 아무리 좋은 학교를 나오고, 좋은 직장을 다녀도 평생을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고 살아간다. 자신의 사회적 지위로 존재를 확인할 뿐, 자신이 정말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다 보면 은퇴 이후 정말 황당해진다. -267-268쪽

논다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일에 몰입하는 것이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에 푹 빠져 나 스스로를 망각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러야 정말 놀았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내가 좋아하는 대상에 푹 빠져 시간을 보내고 나면 정말 영혼이 맑아지는 느낌이 든다. 잘 논다는 것은 이렇게 나를 망각하고, 말 그대로 정신없이 대상에 몰입하는 것이다. 쉬는 것과 노는 것은 이렇게 정반대의 과정이다. 쉬는 것과 노는 것의 적절한 조절을 통해 내면의 항상성이 제대로 유지될 수 있다. -2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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