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이면 충분해
로라 스콧 지음, 이문영 옮김 / 빅북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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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아이를 낳으면 나의 마음이 바뀔 거라고도 했다. 그들은 아이 때문에 인생의 기쁨과 경이를 느낀다고 말했다. 내가 그 기쁨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 답답해하고, 슬퍼했다. 그들에게 나는 인생에서 어떠한 경험을 ‘놓치고’ 있으며, 그 경험의 결여로 온전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232
"출산을 권장해야 한다는 믿음은, 의도적으로 아이를 낳지 않은 사람들을 부정적으로 평가한 많은 연구에 나타나듯 전반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낳지 못한 사람과 아이를 낳은 사람에 비해, 자발적으로 아이를 낳지 않은 사람은 사회적으로 덜 환영받으며, 적응력과 성숙도가 떨어질 뿐 아니라 더 물질적이고, 더 이기적이며, 더 개인주의적이라고 흔히 인식된다."(크리스틴 박, 논문 ‘무자녀 선택’)

243
이 용어(딩크)는 상대적으로 부유하며 아이가 없는 사람들을 의미하지만, ‘여피’와 같이 돈을 잘 쓰고 물질주의적인 생활방식을 일컬을 때 흔히 사용된다.

245
아이가 없으니 일을 더 해도 괜찮지 않느냐는 오해는 여전히 널리 퍼져 있다. 대기업의 임원인 클라우디아는 이렇게 불평한다.
"우리가 아이가 없다는 이유로 일주일 내내 24시간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공평해요. 인생에서 일이 전부가 아니잖아요. 아이가 없는 사람에게도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동감하지 않는 것 같다. 아이가 없는 사람들에게 일 이외의 삶은 없다고 생각한다. "아이가 없으세요? 그럼 뭘 하세요?"

252
출산을 장려하는 사회에서는 출산의 의무를 거부하거나 부모가 되는 일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을 ‘아동혐오증’이나 ‘이기적’이라고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추정과 소수집단이라는 위치 때문에 많은 ‘무자녀’ 부부가 ‘이방인’의 범주에 속하며, 여전히 오해와 비난을 받는다.

263-264
"아이를 키우는 친구들은 항상 우리에게 아이를 낳으라고 압박했어요. 그때 아이 때문에 심하게 골머리를 썩는 친구를 보면 항상 저는 ‘봐라. 그래서 내가 아이를 안 낳는 거잖아’라고 말했지요. 그러면 그들은 예외 없이 정신을 차리고 ‘오, 그래도 보람을 많이 느껴’라고 말해요. 물론 그럴 거예요. 그리고 그들에게는 좋은 일일 테고요. 하지만 우리는 보람을 못 느껴요, 개인적으로."(닉)

264
자기계발 분야의 권위자인 필 맥그로는 "위대한 가족을 만드는 7가지 원칙"이라는 책을 쓰기 위해 2000명 이상의 부모를 조사했다. 그들 중 3분의 1에 가까운 사람이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 알았더라면 아마 아이를 낳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항목에 동의했다.

270
"의도적으로 아이를 낳지 않은 사람들은 ‘부모가 되는 일은 좋은 것이라는 관념’에 질문을 던짐으로써 의도적으로 ‘가치의 충돌’을 유발한다. 왜 아이를 낳지 않았는지 ‘사람들은 상세히 모르고, 어느 정도는 자세하게 알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에 아이 없는 사람들이 최악의 동기를 지닌다고 비난한다. ‘대부분의 사람이 세상을 보는 방식에 근본적으로 도전하기’ 때문이다."

272
"무자녀 혁명"을 쓴 매들린 캐인은 아이 없는 여성들이 말한 ‘무수한 혜택’을 강조했다. 그중에는 경제적, 정서적, 시간적 압박감으로부터 해방된 자유가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그녀는 이러한 혜택을 누리는 무자녀 부부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 또한 끈질기게 지속된다고 지적했다.
"참으로 역설적이다. 우리는 은퇴한 이들이 여행하며 즐기는 일은 지지하지만, 젊은 사람들이 그러는 꼴은 보지 못한다."

301
제이슨은 모든 동물과 인간에게 종을 번식시키려는 본능이 있다고 믿는 과학자다. 하지만 지구가 그 종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때 그 종의 수가 감소한다고 믿는다. 대부분의 환경 전문가들은 지금 인구 성장을 제한하는 방법을 찾지 않으면, 의도적으로 아이를 낳지 않아서가 아니라 병, 기아, 유아 사망의 증가 등으로 인구가 감소할 가능성이 크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311
두 사람 모두 아이를 낳을 거라고 예상하면서도 결혼하기 전에 ‘아이 대화’를 나누는 경우는 드물다. 두 사람 모두 정말로 아이를 원한다 해도 아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일은 꼭 필요하다. 인생 계획에 따라, 몇 명을 낳은 것인지, 아이를 낳지 않을 수도 있는지 등을 이야기하라. 이렇게 대화를 하면 두 사람 모두 실제로 일이 닥쳤을 때 상황 판단을 제대로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한 사람 혹은 두 사람 모두 억울함을 느낄 위험이 적어진다.

312
"정말로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면, 아이를 원하지 않는 배우자를 만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낳고 싶은 아이의 수에 대해 의견이 다를 때, 그보다 더 빨리 관계를 깨뜨리는 요인은 없으니까요. 한 사람은 아이를 원하지 않고 다른 한 사람은 한 명 혹은 둘셋 이상을 원할 때 특히 그렇죠. 타협이란 있을 수 없어요. 중간 입장이 불가능해요. 아이를 반쪽만 낳을 순 없잖아요.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는 한 명도 너무 많아요."(제리)

319
아이가 없는 사람은 다양한 사회의 공동체에서 여전히 다른 존재로 취급당하거나, 대체로는 무시된다. 무자녀 부부의 숫자는 수백만이지만, 눈에 전혀 띄지 않는다. 의도적으로 아이를 낳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의 인구 집단으로 목소리를 내고, 부끄러움이나 조건 없이 아이를 낳지 않기로 한 결정을 당당히 표현할 때가 되었다. ‘우리는 아이가 없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선택이었다. 다른 방법은 없었다.’

321
"의도적으로 아이를 낳지 않았다고 저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에요. 이는 본질적인 부분으로, 제가 살아갈 인생을 제가 선택한 거예요."(조디)

327
아이를 낳지 않은 6대 동기 
1. 지금 이대로의 생활, 부부관계에 만족한다. 아이를 낳는다고 삶이 더 좋아지지 않을 것이다. 
2. 자유와 독립에 가치를 둔다. 
3. 양육의 책임을 짊어지고 싶지 않다. 
4. 아기를 갖고 싶은 욕구, 모성, 부성본능이 없다. 
5. 아이를 키우면서는 하기 힘든 일을 인생에서 성취하고 경험하고 싶다. 
6. 시간과 에너지를 관심사나 욕구, 목표에 집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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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테일의 힘 - 작지만 강력한, 우리에게 부족한 1%는 무엇인가 디테일의 힘 1
왕중추 지음, 허유영 옮김 / 올림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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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어느 회사에서 무엇이 잘못되고 있는지를 알려면 중역실이나 본사에서 듣는 말에 의존해서는 절대 안 된다. 회사의 문제점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있게 마련인데, 흔히 회계부서 같은 데서 일하는 사람들이 그렇다.(케네스 콕, 영국 기업전문 변호사)

145
애덤 스미스는 분업의 장점을 다음의 3가지로 꼽았다.
-근로자의 숙련도가 향상되면 생산성도 제고된다.
-교체작업으로 인한 시간 낭비를 막을 수 있다.
-한 가지에 주의력을 집중시킬 수 있기 때문에 전문화에 도움이 된다.

178
자신의 직업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작은 일이란 없다. 그리고 작고 간단한 일이라고 해도 하기 쉬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전력을 다하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노력이 필요하다.

181
내 부하직원들은 내가 매우 엄격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늘 두 가지 원칙을 강하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하나는 맡은 일은 반드시 정해진 시간 안에 정해준 기준에 맞춰 끝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미 끝낸 일이라도 스스로 검토하여 문제점이 없다고 확신할 수 있을 때 보고하라는 것이다.

217
우리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경쟁업체의 경영진이 직원들을 세심하게 관리하지 못하고 디테일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부족했기 때문이다.(프레드 터너, 전 맥도날드 회장)

223
베르너의 경영이념은 직원들이 독립적이고 자주적으로 고객들을 대할수록 기업이 더욱 기업다워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DM은 능력과 실적에 따른 부의 차등 분배라는 자본주의사회의 기본 원칙을 따르지 않고 있다. DM 직원의 연봉 수준은 동종업계 최고지만 인센티브나 상여금은 전혀 없다. 이에 대해 베르너는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직원들에게 인센티브를 지급하는 것이 옳지 않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인센티브를 준다는 것은 경영자가 직원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증거다. 실적에 따라 직원들에게 인센티브를 준다고 할 때 사장의 마음속에는 직원들이 본래 더 잘할 수 있는데도 부가적인 동기부여가 없기 때문에 하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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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발견 - 어떻게 개인을 찾아가는가 1500 - 1800
리햐르트 반 뒬멘 지음, 최윤영 옮김 / 현실문화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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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나는 세계시민이 되기를 원하고 모든 사람에게 속하기를 원하지만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중 누구에게도 소속되기를 원치 않는다. 천국시의 시민 명단에 오르는 행운이 있으면 좋으련만."(에라스무스, 1522년 울리히 츠빙글리에게 씀)

49-52
"나는 나의 책이 나를 만드는 것 이상으로 나의 책을 만들지 않았다. 이는 바로 저자의 살이며 피인 책이며 오로지 나만 다루었고, 나의 인생의 한 부분으로서 다른 사람들을 다루지 않았으며 다른 책들처럼 그 어떤 낯선 목적을 위해 쓴 것도 아니다."(몽테뉴, "엣세"를 쓴 배경에 대해)

52-53
"독자여, 여기 이 책은 정직한 마음으로 쓴 책입니다. 이 책은 이미 시작부터 내가 집안일이나 사사로운 일을 말하는 목적 외에는 아무런 목적이 없다고 당신에게 미리 밝힙니다. (후략)" (몽테뉴, "엣세" 1580년 서문)

71
학교는 개인을 충성스러운 신민으로 교육했고 공들여 습득한 개인의 문화 기술로 ‘공공에 봉사’하도록 만들었다. 학교는 사람들이 처음으로 자신을 ‘합리적으로’ 성찰하고 분석하도록 교육시켰다. 그렇게 했기 때문에 시민 사회에서 근대의 개인화가 주제 혹은 문제로 부각되었다. 교회, 국가, 학교는 사람들이 자신을 통제하고 분석하도록 시켰다. 이러한 목표를 완벽하게 이루지 못했던 것은 확실하지만 이러한 요소들이 없었더라면, 다시 말해 외부로부터의 자극이 없었더라면, 현재 우리가 근대 초기의 자기통제나 자기인식과 주관적 독자성의 흔적에서 발견하는 것들은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었다.

105
많은 일이 학교 영역에서 행해져서 학생의 연령에 맞춘 교재와 교육과정을 만들고 학급을 나누었으며 학교교육이라는 자산이 사회를 개선시키고 ‘바람직한 질서’를 공고히 한다고 인정받은 시기는 17세기였다. 그러나 이때 잊어서는 안 되는 사실은 계몽주의 시기까지는 학교교육에서 인생을 사는 데 가장 중요한 문화 기술을 주입시키는 것, 다시 말하면 읽고 쓰고 계산하는 것, 교리문답의 암기, 즉 기독교도덕의 암기와 엄격한 훈육, 신에 대한 외경, 복종 등만이 중요한 과제였다는 것이다. 가정교육과 가정 외 교육은 모두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고 전통을 보존하는 데 기여했다. 계몽된 교육자들조차 자신의 관심이나 소원은 억제해야 하고 자기애는 본래부터 죄악이므로 뿌리째 뽑아버려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106
학생들은 "육체적이고 외적이고 정신적이며 영원한 행복을 향상시키도록 교육받아야 한다. 부모들은 아동들이 본인의 전체 행복을 책임질 수 없는 동안만이 아니라 미래에도 자신의 안녕을 담당하고 제대로 해낼 수 있게 하는 의무를 진다."(Lawrence Srerne)

110
자신에 대한 의식과 개성은 자연적 천성이 아니라 사회적 ‘교육’의 결과였다. 그 가운데 외적 규범들은 모든 사회적 계층들을 구속했고, 이 규범들은 근대 초기에만 한정되지 않았으며 때로 단절되기도 했지만 오랜 과정을 통해서 ‘내면화되었다.’ 다소 차이는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원래 금지되었기 때문에 하지 않았던 일들을 나중에는 자유의지로 하지 않게 되었다. 올바른 사회적 행동에 대해 후천적으로 인식을 얻게 되었고 이것이 삶을 통제했다. 규율화 과정은 이전의 인간의 독자성 사상에 대한 배려를 하지 않았지만 새로운 독자성(인간의 존엄) 사상, 즉 성찰적 독자성에 대한 전제조건을 만들어주었다. 이 새로운 독자성은 이전의 독자성처럼 사회적으로 매개된 것이었다.

179
18세기에 자기, 자신의 삶, 자기감정과 느낌을 루소만큼 자기 일의 중심에 놓은 사람은 없었다. 루소의 극단적인 주관주의는 계급이나 궁정, 교회 및 종교 등 모든 전통과 결별을 고했다. 그는 자아를 인생의 중심으로 털어놓았다. "내가 고백을 하는 가장 본래의 목적은 인생의 모든 상황에서 나의 내면을 정확하게 토로하는 데 있다. 나는 내 영혼의 이야기를 약속했고, 이를 충실하게 쓰기 위한 다른 보조수단은 필요 없다. 나는 단지 지금까지 했듯이 내 안을 깊이 들여다보기만 하면 된다."

209
17세기에 오면서 편지를 쓰는 사람들의 범위가 확대되었다. 도시 시민들과 귀족들이 글을 깨우치면서 그리고 계층에 따라 각기 가족의식이 형성되면서 편지 왕래가 촉진되었다.

209-210
16세기 사람들이 글을 말하는 것처럼 썼다면 17세기에는 형식을 갖춘 표준어가 발전했다. 계급간의 차이가 강조되고 ‘당신’이라는 존칭이 도입되었으며 호칭의 비중이 커지고 편지를 쓰는 사람은 자신을 지나치게 낮추었다. 자신의 본심을 감추는 이러한 인위적인 양식은 바로 ‘궁정식’ 사교 방식을 따른 것이다.

224
(근대 초기 사회에서) 결혼은 삶의 공동체와 노동 과정, 재산, 그리고 가정의 근간을 뒤흔들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개인의 생각과 소망을 인정하는 제도였다. 결국 혼인은 각 사람의 개인적 목표이기도 했지만 신분 계층 사회에서 자기 몫을 하려면 꼭 필요한 전제 조건이기도 했다.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할당된 자리는 제대로 된 사회의 가장자리였다.

252
"자기 생각이란 진리의 최고 시금석을 자기 안에서(즉 자기 자신의 이성 안에서) 찾는 것이며, 계몽이란 언제나 자기 스스로 생각하라는 격언이다."(칸트, "생각을 지향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1786)

253
계몽의 "표지"는 다른 모든 사람의 의견으로부터의 "독립과 자유다. 우리의 모든 지식과 신앙은 스스로의 연구와 노력으로 얻어낸 우리의 재산인 것이며 우리 정신의 형식에 밀착되어 있다. 계몽주의는 그런 의미에서 생각이나 행동에서 우리의 모든 소질과 능력을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어디에서나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는 용기와 능력을 가진 사람은 계몽주의의 최고 수준에 도달한 것이다. 그는 자유를 통한 자기 정신의 가장 고유한 형식을 거치지 않는 것을 참이라고 받아들이는 데에서 완전히 벗어났기 때문에 진정한 자기 사상가다."(아담 베르크, "계몽주의가 혁명을 유발하는가", 1795)

254
자기교육은 개인 홀로 하는 과정이 아니었고 이후의 신인문주의처럼 자기 자신 안에 목표를 두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았다. 교회와 궁정이라는 전통적인 문화 중심지 바깥에서 계몽주의식의 자기 형성은 글과 말을 통해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눔으로써만 완성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자기교육의 가장 핵심적인 매체는 같은 생각을 가진 동료들과 함께하는 독서와 토론이었다. 이러한 자기교육 과정의 증거는 18세기에 오간 수많은 서신들에 남아 있다.

270-271
새로운 시민 개인, 이 개인의 일상생활에서의 도덕적 자기 주장은 18세기 영국 소설에서 중요한 주제다. 유럽 대륙에서는 이러한 관심이 훨씬 적게 나타났다. 대륙에서는 영국보다 훨씬 늦게야 개인 삶의 감정이 문학에서 다루어졌는데, 이와 무관하게 ‘개인화 과정’ 자체는, 특히 독일에서, 훨씬 절제된 형식으로 나타났다. 독일의 발전에서 모범이 되었던 것은 도시귀족의 자제이자 바이마르의 추밀고문관이었던 괴테가 쓴 소설들인데, 여기에는 18세기 후반의 가능성들이 모두 나타나고 있다.

271
"현재의 나와 완전히 똑같게 나를 완성시키는 것이 내가 어렸을 때부터 가졌던 어렴풋한 소망이었다."(주인공 빌헬름 마이스터)(괴테,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

306-307 옮긴이의 말
(전략) 근대화가 우리의 보편적 일상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자는 아직도 한국적 내지는 아시아적 가치와 서구적 가치의 차이를 보여 주는 부분이 바로 이 ‘개인’이라는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주체’의 죽음이 이야기된 지도 오래고 ‘개인’ 개념 자체도-별로 제대로 논의된 적도 없이-화두가 되지 않지만 서구와 한국의 차이는 개인화 정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워낙 급격하게 변모하기 때문에 10년 뒤의 모습이 어떻게 달라질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아직 우리는 개인의 정체성보다는 가족이나 학교, 사회, 출신 지역 등 집단의 정체성을 더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다. 역자는 그 이유를 우리에게 일어났던 근대화가 서구와 달리 자의든 타의든 언제나 집단적 가치가 강력하게 주장되는 시기에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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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자본 (양장)
토마 피케티 지음, 장경덕 외 옮김, 이강국 감수 / 글항아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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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말이 필요 없음. 이 책이 일으킨 파장이 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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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14-12-09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은거예요? 우왕!!!!

마늘빵 2014-12-10 15:11   좋아요 0 | URL
정확히는 읽는 중이라...

무해한모리군 2014-12-11 11:24   좋아요 0 | URL
시작이 반이다라는 말이 있잖아요 오홍홍

아무개 2014-12-10 0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읽으셨나봐요?
우와와와!!!!
 
누구를 구할 것인가?
토머스 캐스카트 지음, 노승영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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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78
행위 자체가 도덕적으로 선하거나 적어도 중립적이어야 한다.
행위자가 나쁜 결과를 적극적으로 기도하는 것은 안 되지만 나쁜 결과를 허용할 수는 있다. 나쁜 결과 없이 좋은 결과를 얻을 방법이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
좋은 결과는 적어도 나쁜 결과만큼 직접적으로 행위에서 기인해야 한다. 말하자면, 좋은 결과는 나쁜 결과로부터가 아니라 행위로부터 직접 생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행위자는 좋은 목표를 달성하려고 나쁜 수단을 쓰는 격이 되는데, 이는 결코 허용되지 않는다.
좋은 결과는 나쁜 결과의 용인을 정당화할 만큼 바람직해야 한다.
-미국 가톨릭 주교 회의를 대표하여 페드로 오쇼그네시 주교가 발표한 법정 의견서(2013년 4월 19일) 중

96
약자는 강자에게 지배당하고 싶지 않지만 맞붙어서 이길 도리가 없으니, 원한에 사로잡혀 강자에겐 ‘악’이라는 이름표를 붙이고 자신에겐 `선`이라는 이름표를 붙여요. 말하자면 선과 악은 패배자가 정의했다는 거예요. 우리는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서, 누가 한쪽 뺨을 때리면 다른 뺨도 돌려대는 것을 선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니체는 우리가 다른 뺨을 돌려 대는 이유는 상대의 뺨을 올려붙일 만큼 강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강자에게 `악`이라는 이름표를 붙여 복수하는 것밖에 도리가 없다고 여긴다고 말하죠. 니체는 ‘자연적` 가치란 선과 악으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가치와 병약한 가치로 나뉜다고 말해요. 강자는 힘을 휘두르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껴서는 안 돼요.(미네소타 주 로체스터에서 온 마브 펠드먼, NPR 토론, 내셔널 퍼블릭 라디오, 2013년 4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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