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헌법재판소가 한덕수 탄핵에 대한 선고를 먼저 하겠다고 결정을 내린 것을 보면서 


많은 시민들이 헌법재판소의 장난질이 도를 넘는구나 생각하셨을 듯합니다. 


정말 친위쿠데타를 제압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번 절감하게 됩니다. 


이와 관련해서 탄핵과 정권교체 이후 개헌 및 개혁의 과제가 한 가지 더 늘었는데요, 


헌법재판소를 현재처럼 유지해서는 안 되고 근본적으로 개혁해야 한다는 과제가 


제기됩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마침, 평소에 제가 생각했던 바를 아주 속시원하게 잘 설명해주는 


최근 기사가 있어서 링크를 해둡니다. 



온 국민이 헌법재판소만...이게 정상인가 - 오마이뉴스




노회하면서도 정치적으로 보수적이고, 권력에 유약하고 기회주의적인 데다가 


거의가 다 서울대 출신의 50대 이상의 판사 출신 재판관들로 이루어진 헌법재판소가 


뭔가 공명정대하고 의연하게 문제를 해결해줄 것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애초에 잘못된 생각이겠죠.


누가 봐도 뻔한 불법적이고 위헌적인 쿠데타에 대해 좌고우면하는 것 자체가 비상식적일


뿐더러, 얄팍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속셈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재판 일정으로 장난질하는 것을 보자니 속에서 천불이 납니다. 


지난 번에도 말했지만, 이번에 많은 시민들이 새삼 깨닫게 된 것은 


"관료들은 영혼이 없다"는 말이 얼마나 잘못된 말인가 하는 점입니다. 


관료들은 아주 분명한 영혼을 갖고 있습니다. 


검찰 같은 공안기구 관료들만이 아니라 한덕수, 최상목 같은 행정부 관료들, 


헌법재판관들 같은 사법부 관료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고위 공직자들이 어떻게 하나같이 


저렇게 보수적이고 심지어 극우적인 영혼을 갖고 있고, 


참으로 졸렬한 기회주의적 속성을 갖고 있는지 아연실색하게 됩니다.


이런 관료들이 정부의 요직을 독점하고 있으니 친위쿠데타를 제압하는 게 어려울 수밖에 없죠.



헌법재판소의 이런 장난질을 감내하면서 


이제나저제나 하고 광장에서 탄핵 인용 판결을 목을 빼고 기다리는 시민들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각종 집회를 관리하느라 몇 달째 갖은 고생을 하는 경찰관들의 처지도 안쓰럽고


가뜩이나 어려운 경기에 4달 가까이 전개되는 내란 사태에 고통을 겪고 있는 


자영업자들의 처지도 딱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탄핵 인용 판결 및 정권교체에 만족할 수는 없죠. 


탄핵과 정권교체를 넘어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모두 건강히 이 어려운 고비를 잘 넘기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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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에 권두언을 올렸던 [황해문화] 126호, 2025년 봄호가 출간됐습니다. 


(권두언은 다음 주소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https://blog.aladin.co.kr/balmas/16245839)


이번 호는 지난 겨울 탄핵 광장에 참여했던 시민 51명의 목소리를 담고 있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의 독서와 성원을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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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3월 7일 서울과학기술대학교에서 <내란 이후 저항과 연대의 문화정치> 연속 포럼 2차 대회가 


열립니다. 이번 2차 대회는 <'광장'의 문화정치를 통해 본 다른 사회의 전망과 제7공화국>이라는 


주제로 진행됩니다. 


저도 "아나키즘, 공화주의, 사회주의: 새로운 민주주의의 이율배반"이라는 주제로 발표를 


하게 됐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의 많은 성원과 참여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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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황해문화] 봄호 (제126호) "권두언" 올립니다. 


이번 [황해문화]는 <광장에서 현장으로!: 우리가 꿈꾸는 새로운 세상>이라는 주제 아래 


전권 특집호로 꾸몄으며, 모두 51명의 시민들의 글이 실렸습니다. 


많이 관심 갖고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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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의 놀람, 세 개의 질문, 세 가지 과제

 

 

작년 123일 느닷없이 비상계엄령이 선포되면서 탄핵 정국이 시작된 지 두 달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정국이 안정되기는 고사하고 하루하루 예측할 수 없는 격류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라 전체가 요동치고 있다. 계엄령 선포와 국회의 해제 의결, 대통령 탄핵 소추와 헌법재판소 탄핵 심판 개시, 대통령의 체포와 구속과 같은 일들이 숨 가쁘게 전개되면서 이제 탄핵 심판 절차가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지만, 과연 그것으로 이번 사건이 종결될지 아니면 또 다른 사건의 서막 내지 발단이 될지 쉽게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먼 과거의 유산이 되었다고 믿었던 것, 다시는 되풀이되지 말아야 할, 그리고 이미 우리가 극복했다고 믿었던 것이 마치 프로이트가 말했던 억압된 것의 귀환인 양,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앞에서 불쑥 솟아올라, 단단하다고 믿었던 우리의 민주주의 헌정 질서, 우리 사회의 상징적 질서의 토대 자체를 뒤흔들고 있다.

 

세 번의 놀람

 

스피노자 철학 개념을 빌려서 말한다면, 이번 정국에서 많은 사람들은 세 번의 놀람”(admiratio, wonder)을 경험했을 것이다. 첫 번째 놀람은 12.3 비상계엄 선포 자체에서 일어났다. 이번 비상계엄령은 197910.26 사건 이래로 45년만에 군사 쿠데타가 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고 믿었던 대다수 시민들의 생각을 비웃듯이, 잠자리를 준비할 늦은 밤 시간에 너무나 태연하게 선포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가짜 뉴스인 줄 알았다고 토로하듯이, 텔레비전에 나와 담담한 어조로 비상계엄령을 선포하는 대통령 모습이 차라리 딥페이크 영상으로 된 가짜 뉴스 화면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그것은 생생한 현실이었고, 시민들이 그 짧은 순간에 선포된 계엄령의 역사적 무게가 어떤 것인지 깨닫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SNS를 통해 계엄령 선포에 관한 소식이 급속히 전파되었고, 어떤 이들은 지난 날 경험했던 역사적 기억을 떠올리며 공포에 젖었고 어떤 이들은 채 실감은 하지 못하면서도 계엄령 선포가 앞으로 어떤 파장을 미칠지 걱정하면서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서로의 안부를 묻기도 했다. 밤늦은 시간 용감하게 계엄군을 막기 위해 국회로 달려간 시민들도 적지 않았고, 결국 그들의 영웅적인 저항 덕분에, 그리고 국회의원들이 신속하게 국회로 집결한 덕분에 계엄령은 짧은 시간 내에 유혈 사태로 이어지지 않은 채 해제될 수 있었다.


상상하고 싶지 않지만, 만약 비상계엄령 선포 소식을 듣자마자 국회로 간 용감한 시민들이 없었다면, 만약 국회의원들이 신속한 판단력으로 국회로 집결하여 계엄 해제를 의결하지 못했다면, 또한 군인들이 상관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지 않고 태업을 하지 않았다면, 그리하여 계엄령이 의도대로 진행되었다면, 과연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 만약 그랬다면, 불행하게도 많은 정치인들과 시민들이 죽거나 다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이번 계엄령 선포로 인해 일어난 역사적 퇴행은 우리 사회에 훨씬 더 깊은 상처를 남겼을 것이다. 따라서 첫 번째 놀람은 공고하다고 믿었던 한국의 민주주의 헌정이 얼마나 취약한 것인지에 대한 깨달음에서 오는 놀람이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민주주의의 취약함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는 일임이 널리 입증되고 있다.


두 번째 놀람은 남태령 대첩에서 경험한 놀람이다. 작년 1221일과 22일 사이에 서울의 관문인 남태령에 진입하려는 농민 시위대가 경찰에 막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있을 때, 다수의 시민 시위대가 농민들에 합류하여 밤샘 투쟁을 전개함으로써 결국 농민 시위대가 서울에 진입하는 역사적 승리를 거두었다. 가히 남태령 대첩이라고 할 만큼 중요하고 뜻깊은 싸움이었다. 그것은 비상계엄과 국회의 탄핵소추 의결 이후 이번 탄핵 정국을 규정했던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이 사건이 중요한 이유는 2016년 박근혜 탄핵 당시 농민 시위대가 넘지 못했던 남태령 고개를 넘어서 처음으로 서울 시내로 진입할 수 있었다는 점 때문만은 아니다. 남태령 대첩이 중요했던 것은 무엇보다 우리 사회에서 불평등과 차별, 배제에 시달리는 소수자들 사이의 저항의 연대가 이번 탄핵 정국을 이끌어가는 민주주의의 핵심 동력이라는 점을 잘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서로 외롭게 싸워왔던 소수자들, 사실 우리 사회 시민들 대다수를 이루고 있는 을()들은, 타인들이 직면한 문제에서 자신들의 문제를 발견했고, 마치 자신들의 문제인 것처럼 타인들의 문제 해결을 위한 싸움에 동참함으로써 승리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었다. “남태령 대첩은 을들의 연대가 무엇인지, 그것이 어떻게 민주주의의 진전에 기여하는지 보여준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할 만한 것이었다.


마지막 세 번째 놀람은 올해 119일 새벽 우리 헌정사에서 처음으로 대통령 윤석열에 대한 구속영장이 발부되자, 흥분한 극우파 시위대가 서부지방법원에 침입하여 폭동을 일으킨 사건이 촉발한 놀람이다. 만약 이번 탄핵 정국이 앞의 두 가지 사건 및 그것들이 촉발한 놀람에 한정되었다면, 이번 탄핵 정국의 정치적 파장의 범위는 훨씬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서부지방법원 폭동이 발생함으로써 현재의 정국은 훨씬 더 복잡하고 근원적인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서부지방법원 폭동이 충격적인 것은 이번 탄핵 정국이 단지 내란에 관한 것이 아니라 동시에 내전과 관련된 것임을 뚜렷이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내란과 내전의 차이는 어떤 것인가? 글자 하나 차이에 불과한 두 단어는 상당히 중요한 차이를 품고 있다. 무엇보다 내란이 법적인 용어라면, 내전은 법 바깥의, 그리고 법 이전 내지 법 이상의 용어라는 점이 문제다. 윤석열 대통령이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심판 절차를 밟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에 더하여 내란죄 피고인으로 형사재판을 받게 된 것은 형법상 내란 수괴 혐의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윤석열 대통령 변호인단을 비롯한 지지자들은 내란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강변하고 있지만, 어쨌든 그것은 법적인 틀 내에서 이루어지는 공방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내전은 법을 벗어나는 문제다. 실제로 윤석열 변호인단과 극우 시위대는 내란죄 혐의를 부인하는 데 그치지 않고 헌법재판소를 비롯한 사법부 전체를 공격하면서 탄핵소추가 인용될 경우 내전이 벌어질 것이라는 경고를 수차례 제기하고 있다. 내전에 대한 이러한 경고는 법적인 틀 자체, 우리 헌정 자체를 부인하고 그것을 파괴하겠다는 경고인 셈이다. 서부지방법원 폭동이 충격적인 것은, 그것이 우발적인 범행이 아니라 이러한 의미의 내전의 전초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그것이 내전의 전초를 가리킨다면, 설령 헌법재판소에서 탄핵 인용 판결이 난다고 해도, 심지어 그 이후 2달 이내에 치러질 조기 대선에서 야당 후보가 승리한다고 해도 현재의 탄핵 정국을 특징짓는 적대적 대립은 종결되지 않고, 부정선거론을 매개로 해서 차기 정권 내에서도 지속적으로 전개될 것이다. 이번 탄핵 정국이 지난 2016~17년 박근혜 탄핵 정국에 비해 훨씬 더 심각하고 복잡한 쟁점을 포함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다.


따라서 이 세 번의 놀람은 2016~17년의 탄핵과 이번 탄핵 사이의 차이점을 잘 드러내준다. 두 개의 탄핵의 첫 번째 차이점은 박근혜 탄핵이 이른바 국정농단사건으로 촉발이 됐고 직권남용과 뇌물수수 등이 탄핵의 주요 이유가 되었다면, 이번 탄핵은 불법적이고 위헌적인 비상계엄령 선포 및 계엄포고령 발표, 국회, 국회의원 및 선거관리위원회 같은 헌법기관의 권능 행사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는 점이 탄핵의 주요 이유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요컨대 박근혜 탄핵이 헌법 위반과는 무관한 것이었다면, 윤석열 탄핵은 12.3 비상계엄령 선포에서 비롯된 헌법 위반 및 헌정 자체를 문란하게 한 행위가 탄핵의 핵심 사유로 제시되는 것이다. 두 개의 탄핵 가운데 윤석열 탄핵이 훨씬 더 중대하고 복잡한 위상을 갖는다는 점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둘째, 이러한 차이점으로 인해 국민의힘을 비롯한 여권 및 우파의 대응이 지난 번 탄핵과 여실히 달라지고 있다는 점이 또 하나의 중요한 차이다. 지난 박근혜 탄핵에서 여당의 상당수는 탄핵 찬성에 합류했으며,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 판결을 대부분 수용했을 뿐만 아니라, 조기 대선 과정 및 그 결과에 대해서도 대부분 수용하는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이번 탄핵 정국에서는 윤석열 측 변호인들만이 아니라 여당인 국민의힘 지도부 및 주요 중진 의원들까지도 탄핵소추의 핵심 사유인 비상계엄령 선포의 위헌적위법적 성격을 인정하지 않고 그것의 정당성을 강변하면서 오히려 헌법재판소를 비롯한 사법부의 권위를 부정하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이는 2017년 탄핵에 이어 두 번째 대통령 탄핵을 당할 경우, 우파 세력이 입게 될 치명적인 정치적 정당성의 손상을 우려한 결과인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이번 탄핵은 헌법 위반 및 헌정의 문란 행위가 탄핵 소추의 주요 사유인 만큼, 국민의힘을 비롯한 우파 세력이 탄핵으로 인해 갖게 될 피해는 훨씬 더 막대할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여권은 처음부터 태극기 부대로 지칭되는 극우파 대중운동을 오히려 조장하고 그 세력에 편승하려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윤석열의 비상계엄령이 촉발한 이번 탄핵정국을 자신의 정치적 위기를 엉뚱하고 기괴한 방식으로 돌파하려는 부조리하고 몽상적인 시도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윤석열 및 국민의힘의 행태가 실로 기괴하고 부조리한 면모를 보인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기괴하고 몽상적인 것으로 보이는 그러한 행태가 대중의 정치적 무의식을 자극하고 있으며, 위협적인 정치적 힘으로 표출되고 있다는 점이다. 요컨대 국민의힘을 비롯한 여권의 정치적 지지 없이, 또한 대중의 동원이 없이 소수의 몽상가들의 부조리하고 착란적인 행위에 그쳤다면, 12.3 친위쿠데타 시도는 큰 문젯거리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이제는 여권의 주류 자체가 그러한 몽상에 편승하여 극우화되고 있는 만큼 그것은 새로운 차원의 정치적 위험으로 자라나고 있다. 최근 국내에 출간된 바버러 월터의 󰡔내전은 어떻게 일어나는가󰡕가 보여준 바는, 내전은 그런 식으로 시작되기 마련이라는 점이다.


셋째, 두 개의 탄핵의 또 다른 핵심 차이점은, 남태령만이 아니라 한강진, 여의도, 광화문 등에서 열리는 집회에서 볼 수 있듯이, 박근혜 탄핵 때와 달리 이번 탄핵 집회에서는 탄핵이나 대선 같은 대의를 위해 장애인운동이나 성소수자운동, 농민운동이나 이주노동자운동, 또는 팔레스타인 연대운동이나 사회적 참사 피해자 운동 같은 소수자운동이 양보를 해야 한다거나, 소수자운동의 다양한 쟁점은 나중에다뤄도 된다는 식의 배제와 위계화의 움직임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남태령 대첩이 상징적으로 보여주듯 서로의 투쟁에 연대하고, 서로가 서로의 투쟁을 증언해주는 상호증언 연대가 이번 탄핵 집회의 기조를 이루고 있다. 이것은 이번 탄핵이 박근혜 탄핵 과정을 되풀이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는 암묵적이고 명시적인 입장이 사람들 사이에서 광범위한 공감을 얻고 있음을 보여준다.


만약 그렇다면 이번 탄핵 정국은 12.3 비상계엄령 선포로 나타난 헌정의 위기에 대하여, 한편에서는 극우파 대중운동에 편승하여 그 위기를 오히려 더 심화시키고 그리하여 우리 사회의 헌정 질서 및 상징적 질서의 토대 자체를 뒤흔들려는 세력과, 다른 한편으로는 을들의 상호증언의 연대에 입각하여 위기에 빠진 헌정 질서를 구하면서 동시에 기존의 질서를 수습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그것을 한결 더 수준 높은 민주주의적 헌정으로 개조하려는 세력 사이의 투쟁을 근본 쟁점으로 삼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앞으로의 정국의 전개 과정이 입증하겠지만, 헌법재판소의 탄핵 판결로도, 그리고 그 이후 전개될 조기 대선으로도 봉합될 수 있는 쟁점이 아니다. 그것은 해방 80년의 역사에 대한 평가 및 향후 전개될 한국의 헌정의 향방이 걸려 있는, 훨씬 더 심층적이고 복잡한, 그리고 장기적인 투쟁을 요구하는 쟁점이다.

 

세 개의 질문

 

󰡔황해문화󰡕 이번 호는 광장에서 현장으로!: 우리가 꿈꾸는 새로운 세상이라는 주제 아래 전권 특집호를 마련했다. 이런 예외적인 결정을 내린 이유는, 우리가 이번 12.3 친위쿠데타 이후에 전개되고 있는 탄핵 정국을,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한국 헌정사의 분수령이 될 근본적인 중요성을 지닌 사건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는 이번 탄핵 정국에서 각자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을들의 상호증언의 연대에 참여했던 51명의 시민들이 지난 두 달여의 시간 동안 어떤 경험을 했고 어떤 문제의식을 느꼈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과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지 알고 싶었다. 각 분야의 유능한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기에 앞서 현장에서 탄핵 정국을 경험하고 스스로 그 탄핵 정국에서 익명의 행위자들로 활동한 시민들의 놀람과 감정, 의견과 고민, 다짐을 듣고 싶었다. 이에 우리는 51명의 시민들에게 다음과 같은 공통의 질문을 제시하고 그에 대한 답변을 모았다.

 

123 내란 사태를 어떻게 겪었는지. 내란 사태를 겪으면서 어떤 활동을 했고 어떤 것을 느꼈는지 개인적 경험을 말씀해주십시오.


우리 사회의 어떤 것이 바뀌고 고쳐져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평소 각자의 분야에서, 그리고 이번 내란 사태를 겪으면서 경험한 우리 사회의 중요한 문제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에 관해 말씀해주십시오.


각자가 꿈꾸는 새로운 세상에 관하여, 다른 이들과의 연대를 통해 만들어갈 새로운 세상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이게 되겠어? 이렇게 말해도 되나?’ 하는 자기검열을 넘어, 각자 활동하는 분야를 중심으로 어떻게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갈지, 그러기 위해 필요한 제도적 대안, 실천 등은 무엇인지 말씀해주세요.

 

우리는 최대한 다양한 분야 및 지역에서 활동하는 시민들을 모으고자 했고, 가급적 여러 세대의 시민들의 목소리를 듣고자 했으며, 탄핵 정국의 여러 현장들의 서로 다른 모습들을 보이고자 했다. 51명의 시민들이 보내준 답변을 편의상 5개의 범주로 분류했지만, 서로의 투쟁에 함께 하고 서로의 투쟁을 증언하려고 했던 시민들 각자의 답변은 사실 서로 교차하고 중첩되는, 그러면서도 각각의 고유한 문제의식과 고민을 담고 있었다.


이 세 개의 질문들에 대해 51명의 시민들이 보내준 답장을 읽으면서, 우리는 여러 번 벅찬 감동을 느꼈다. 그것은 그들이 각자의 글에서 보여준 놀람과 두려움, 분노와 결의, 기쁨과 사랑, 그리고 고민과 통찰, 다짐이 󰡔황해문화󰡕 구성원인 우리들이 함께 경험했던 그것이었으며, 우리가 묻고 찾으려고 했던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독자들 역시 51명의 시민들의 글을 읽으면서 우리와 비슷한 감동과 통찰, 고민과 다짐을 얻게 될 것이다.

 

세 가지 과제

 

이번 특집호에 수록된 시민들의 글을 하나씩 읽으면서 개인적으로는 이번 사건, 한국 현대사에서 하나의 분수령이 될 이번 정국에서 세 가지 과제를 발견하게 되었다.


첫 번째는 공화주의의 문제다. 우리의 생각이 얼마간 일리가 있다면, 해방 80년을 맞이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헌정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 그것은 불과 7년 사이에 두 차례의 탄핵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에서 드러날 뿐만 아니라, 헌정의 주요 세력 중 하나가 헌정 자체를 부인하고 파괴하려는 시도를 공공연히 전개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또한 그것은 지난 2017년 탄핵에 힘입어 집권한 정권이 스스로를 촛불 정부로 자처하면서 국민 주권에 기초를 둔 새로운 민주주의의 시대를 열어가겠다고 다짐을 했으면서도 5년만에 허무하게도 탄핵의 심판을 받았던 그 세력에게 도로 정권을 내주고 말았다는 사실에서도 명백히 드러난다. 이러한 사실들은 이번 탄핵 정국을 새로운 대선에서 승리하는 것으로 수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크나큰 착각과 단견이 될 수 있음을 잘 말해준다.


그렇다면 현재의 헌정 위기를 딛고 우리가 새롭게 구축해야 할 민주주의 공화국의 토대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여기에 대한 답을 여러 사람이 공화주의에서 찾지만, 대개의 경우 그러한 공화주의는 내용이 막연할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공화주의를 되풀이하는 것에 그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과연 어떤 공화주의가 새로운 헌정의 토대를 제시해줄 수 있는 역량을 지니고 있을까? 이것이 우리가 제기해야 할 첫 번째 질문이다.


두 번째는 서로가 서로의 외로운 투쟁에 대한 증인이 되었던 시민들의 집회와 시위, 특히 남태령 대첩에서 볼 수 있었던 상호증언의 연대를 어떻게 지속적인 한국 민주주주의의 동력으로 삼을 것인가 하는 문제다. 나는 소수자들 간의, 을들 간의 이러한 연대가 엄밀한 의미에서 아나키즘의 특성을 지닌 운동이라고 이해한다. 아나키즘이라고 하면 국내에서는 부정적인 인식의 대상이 되거나 아니면 적어도 적극적인 전유의 대상이 되지는 못한다. 하지만 내가 볼 때 남태령 대첩 등에서 볼 수 있는 을들의 연대, 서로가 서로의 투쟁에 대한 증인이 되는 연대라는 의미에서 상호증언의 연대라고 부를 수 있는 이러한 연대를 철학적으로 제일 잘 표현해줄 수 있는 것은 바로 아나키즘이다. 그리고 이때의 아나키즘의 의미는 바로 아르케 없는 삶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사실 아나키즘anarchism의 어원 자체가 an + arche, 아르케 없음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아나키즘의 핵심을 이렇게 풀이할 수 있다.


이 경우 아르케 없는 삶이라고 하는 것은 과두제적인 지배와 복종, 위계적 질서 없는 삶이라고 이해할 수 있으며, 그렇게 본다면 아나키즘은, 생태주의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인권운동에 가장 부합하는 사상적 이념이다. 공생, 돌봄, 자율, 연대 등이 바로 아나키즘을 지탱하는 기본 이념들이며, 이는 곧 남태령 대첩을 비롯한 을들의 연대의 기본 정신이기도 하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아나키즘 운동은 깊은 트라우마를 경험했으며, 오늘날 스스로 아나키즘을 표방하고 있지는 않지만, 가장 빈곤하고 모욕당하고 배제되고 차별받는 이들이 전개하는 투쟁들, 예컨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투쟁이나 성소수자들의 투쟁, 재난 참사를 경험한 유가족들의 투쟁, 이주노노동자들의 투쟁, 농민들의 투쟁이나 밀양 탈송전탑 탈핵 투쟁의 할머니, 할아버지들 역시 이러한 트라우마를 경험해왔다. 그 트라우마의 핵심은 그들 자신 이외에는 누구도 그들의 투쟁을 인정하지 않고, 그 투쟁의 가치와 중요성을 공감하지 않았다는 점, 따라서 그들만이 외롭게 자신들만의 투쟁을 전개해왔다는 데서 생겨나는 것이다.


그런데 남태령 대첩을 비롯한 이번 탄핵 정국의 여러 집회와 시위에서 그동안 서로 외롭게 투쟁을 이어가던 사람들이 이제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고 서로의 투쟁을 자신의 투쟁으로 알아보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아르케 없는 삶, 과두제적인 지배와 복종, 위계적 질서에 휘둘리지 않는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을들이 스스로 입증한 싸움이었다고 할 수 있는 획기적인 계기였으며, 51명의 시민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를 증언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을 광장에서의 한때의 좋았던 경험으로 한정하지 말고, 어떻게 우리의 헌정 질서 내로 기입할 수 있을까? 그것이 우리가 사고해봐야 할 두 번째 질문이다.


세 번째는 민주주의의 사회적 토대에 관한 문제다. 이번 특집호에 수록된 51개의 글에서 각각의 필자들은 저마다 자신이 활동하는 영역에서 제기되는 긴급한 문제를 전하고 있다. 그것은 이주노동자가 처해 있는 차별과 착취의 이중적인 고통의 현실이기도 하고, 청소년들이 경험하는 부자유와 차별, 위계화의 문제이기도 하며, 수도권 이외의 지역 시민들이 처해 있는 지방 소멸 및 식민화의 공포스러운 경험이기도 하다. 또한 참사 피해자들이 겪어야 하는 다중적인 고통, 성 소수자들의 핍박받는 삶, “건폭으로 몰리는 건설 노동자들의 억울한 처지이기도 하고, 점점 더 극우화되는 개신교 목회자의 고민이기도 하다. 이러한 문제들 중 많은 것은 우리 민주주의의 토대를 이루는 사회적 인프라 및 법적규범적 토대와 관련된 것이다. 그런데 민주주의의 토대를 잠식하는 과두제 지배가 관철되는 영역이 바로 이것들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새로운 공화주의가 빈 말에 불과한 것이 되지 않기 위해 우리가 고민하고 개혁해야 하는 문제의 핵심은 여기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권두언을 쓰고 있는 이 시점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곧 헌법재판소의 탄핵 판결이 이루어질 것이고, 그 결과 여부에 따라 2달 이내에 조기 대선이 실시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문제의 종결이 아니라 문제 해결의 시작에 불과하다는 점을 유념하는 일이다. 우리가 비상한 헌정 위기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의 을들이 전하는 연대의 증언들에 귀를 기울이는 일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이번 특집호가 그 작업에 얼마간이나마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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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의 민주주의> 발표에 대한 후기

 

 

지난 금요일 국제비교한국학회 학술대회에서 발표했던 증언의 민주주의발표문에 관해 후기 겸 해서 몇 마디 덧붙여둡니다.

 

이번 󰡔황해문화󰡕 봄호는 광장에서 현장으로! 우리가 꿈꾸는 새로운 세상을 주제로 51명의 시민들의 원고를 받아 전권 특집호로 꾸몄습니다. 발표문에서도 두 편의 글을 인용한 바 있듯이 51명 시민들의 원고 한 편 한 편이 모두 소중하고 뜻깊은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는데, 지난 금요일 발표와 관련하여 또 한 편 더 눈에 띄는 원고가 있었습니다. 청소년인권행동아수나로 활동가의 원고인데, 이 글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시민  정의가  다시  쓰이고  있다모든  시민을  위한  민주주의라는    누구도배제하지  않는  민주주의가  되었고광장의  주체는  ‘국민이나  ‘민중  것이  아닌  ‘시민들이  되었다지금까지의  투쟁을  ‘국민’  혹은  ‘민중  것으로  바꾸었을    퇴색되는  맥락과 의제들을  생각해  보자광장의  나온  시민들을  일컬어  민중이라  부를  수는  있겠으나시민의  의미가  재정의되는  만큼  민중의  의미도  좁혀지고  있지  않은가누구도  광장에  나온  시민들만이  평등한  동료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민주주의와  인권을  지키는  투쟁이  민중에  의한민중을  위한  투쟁이  된다면  배제되는  이들과  놓치는  의제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 대목에는 의미심장한 철학적 쟁점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활동가의 문제의식은 두 가지라고 볼 수 있는데, 첫 번째는 청소년을 다른 시민들이 동등한 시민으로 대우하지 않고, <보호>의 대상으로 여기거나 아니면 집회에 참가한 것을 <기특하게> 여기는 태도에 대한 비판입니다. 청소년 시민을 동등한 시민으로 대우해달라는 요청이 담겨 있습니다. 사실 미성년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식민주의>의 피해자라고 할 수 있겠죠. <보호>의 대상으로만 간주되고 자율성과 평등이 유예되어 있는 존재자니까요. 그런 점에서 보면 청소년만이 아니라 어린이 인권과 시민권을 어떻게 다시 사고하느냐는 민주주의의 핵심 의제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을 듯합니다.

 

두 번째 문제의식은 광장에서 연대하고 하나됨도 중요하지만, <나 자신으로 존재하기>도 중요하다는 것이죠. 다른 인권활동가들에게서는 잘 볼 수 없는, 청소년 활동가의 고유한 문제의식인데요, 저는 이 문제의식이 상당히 중요한 것으로 봅니다. 12.3 친위쿠데타 이후 2달 정도의 시간이 흐르면서 저는 이번 정국의 철학적 쟁점을 잠정적으로 세 가지의 철학적 관점 사이의 트릴레마 또는 이율배반을 어떻게 사고할 것인가 하는 주제로 문제화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세 가지 관점이란 1) 아나키즘 2) 공화주의 3) 사회주의입니다.

 

1) 아나키즘 모먼트

 

이번에 "남태령 대첩"을 계기로 특별히 주목하게 된 것이 바로 <아나키즘>인데요, 사실 아나키즘이라고 하면 부정적인 인식의 대상이 되거나 아니면 적어도 적극적인 전유의 대상이 되지는 않죠. 하지만 제가 볼 때 남태령 대첩 등에서 볼 수 있는 소수자들의 연대, 저는 그것을 서로가 서로의 투쟁에 대한 증인이 되는 연대라는 의미에서 <상호 증인의 연대> 내지 <서로 증인의 연대>라고 보르고 싶은데요, 이러한 연대를 철학적으로 제일 잘 표현해줄 수 있는 게 바로 아나키즘이라고 봅니다. 이때의 아나키즘의 의미는 바로 <아르케 없는 삶이 가능하다>는 것이죠. 사실 anarchism의 어원 자체가 an + arche, <아르케 없음>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아나키즘의 핵심을 이렇게 풀이하는 게 적절하다고 봅니다.

 

이 경우 <아르케 없는 삶>이라고 하는 것은 과두제적인 지배와 복종, 위계적 질서 없는 삶이라고 풀이할 수 있겠죠. 그렇게 본다면 아나키즘은, 넓은 의미의 인권운동에 가장 부합하는 사상적 이념이라고 봅니다. 여기에는 생태주의도 포함되겠죠. 공생, 돌봄, 자율, 연대 등이 바로 아나키즘을 지탱하는 기본 이념들이죠.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소수자 운동 하는 사람들에게 네가 하는 것이 바로 아나키즘이야, 이렇게 말해주면 뚱한 반응을 보일 때가 적지 않습니다.^^ 아마도 아나키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강해서 그렇겠죠.

 

[여기에 대해 한홍구 선생이 이런 코멘트를 주셨어요. 사실 의병이나 독립군에는 십대가 아주 많았어요. 그러니 기록도 잘 안 남았죠. 오래 살다 간 사람은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조금이라도 흔적을 남기는데, 십대들은 이름도 제대로 몰라요. 그건 기층 민중들도 마찬가지지요. 독립전쟁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분이 10만을 훨씬 넘을 것이지만, 우리가 아는 이름은 천 명이나 될까 ... 아나키즘이 무정부주의란 말로 잘못 번역되면서 많은 오해가 생겼어요. 또 볼쉐비키들이 아나키즘의 잠재력을 두려워 해 많이 오염시키기도 하고요.

 

평화박물관의 초기 모토가 '고통의 연대'였습니다. ]

 

 

제가 작년에 읽은 책 가운데 가장 감동적인 책 중 두 권이, 미국의 아나키스트 활동가였던 엠마 골드만의 자서전 [레드 엠마]와 미국의 장애인아자 성소수자이고 유색인종 작가이자 활동가인 리아 락슈미 피엡즈나-사마라신하의 [가장 느린 정의]라는 책이었어요. 이 책들을 읽으면서 감동적이었던 게 뭐냐하면, 마르크스주의자나 사회주의자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 피억압자들, 박해당하는 이들, 요컨대 성소수자라든가 장애인이라든가 하는 이들에게 깊은 관심을 가진 게 아나키스트들이었다는 것이죠. 결국 사회에서 거의 주목받지 못한 채 외로운 싸움을 벌이는 이들에게 힘을 준 것이 아나키즘이었던 것이죠.



 



























[한홍구 선생의 코멘트. 이런 코멘트에서 잘 드러나는 한홍구 선생의 날카로운 감각을 저는 좋아합니다.^^ 이런 감각은 젊은이들보다 훨씬 더 날카롭고 흥미롭습니다.

 

김수영이 조금만 더 나갔더라면, 혹은 조금만 더 오래 살았더라면 이란 생각해 본 적 있어요.

————————

 

버드 비숍 여사를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비숍 여사와 연애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진보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네에미 씹이다 통일도 중립도 개좆이다

은밀도 심오도 학구도 체면도 인습도 치안국

으로 가라 동양척식회사, 일본영사관, 대한민국 관리

아이스크림은 미국놈 좆대강이나 빨아라 그러나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3인도교의 물속에 박은 철근 기둥도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괴기영화의 맘모스를 연상시키는

까치도 까마귀도 응접을 못하는 시커먼 가지를 가진

나도 감히 상상을 못하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

 

그러다가 작년 11월 말에 대구 학술대회에서 <마르크스주의 또는 아나키즘: 카트린 말라부의 최근 저작에 관하여>라는 주제로 발표를 하나 하면서 집중적으로 읽은 책이 데리다 제자이기도 했던 카트린 말라부Catherine Malabou가 최근에 출간한 아나키즘 정치철학에 관한 책이었어요. [도둑이야! 아나키즘과 철학Au voleur! Anarchisme et philosophie](2022)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책은 6명의 현대 철학자(라이너 슈어만, 에마뉘엘 레비나스,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조르조 아감벤, 자크 랑시에르)의 저작들을 읽으면서 이들의 사상에 얼마나 아나키즘이 깊이 침투해 있는지, 그러면서도 왜 이 사람들이 일관된 아나키즘 철학을 제시하는 데 실패했는지 분석하는 책입니다. 제가 흥미롭게 생각한 것은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인데, 거기에서 말라부가 <모든 아나키스트들은 [서로가 서로에 대한] 증인들이다>라는 말을 해요.

 

이것은 아나키즘이, 그리고 아나키스트들이 오랫동안 트라우마를 겪어왔음을 말해주는 것이죠. 그것은 아나키즘이, 아나키스트적인 봉기와 저항, 그리고 아나키스트적인 공생과 돌봄의 공동체가 존재했고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에도, “그것의 발생, 그리고 그것이 발생했음은, 자리를 갖지 못한 트라우마의 경험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누구도 아나키즘이 인정하지 않고 그것의 사상과 투쟁에 정당한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래서 아나키스트들은 서로가 서로에 대한 증인으로 남아 있단는 겁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런 트라우마의 경험은 굳이 아나키즘만의 문제가 아니예요. 오늘날 스스로 아나키즘을 표방하고 있지는 않지만, 가장 빈곤하고 모욕당하고 배제되고 차별받는 이들이 스스로 전개하는 투쟁들, 예컨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투쟁이나 성소수자들의 투쟁, 재난 참사를 경험한 유가족들의 투쟁, 이주노노동자들의 투쟁, 또는 밀양 탈송전탑 탈핵 투쟁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겪고 있는 트라우마의 경험도 역시 이런 성격의 경험이라고 봅니다. 농민들의 투쟁도 마찬가지고요. 서로가 서로에 대한 증인으로 외롭게 투쟁을 이어가는 것이죠.

 

그런데 이번 "남태령 대첩"에서 서로 외롭게 투쟁을 이어가던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고 서로의 투쟁을 자신의 투쟁으로 알아보기 시작한 것이죠. 이것을 저는 엄밀한 의미의 <아나키즘적인 경험>이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따라서 청소년 인권행동 아수나로 활동가의 관점도 이런 의미의 아나키즘적인 경험을 반영한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2) 공화주의적 모먼트

 

그런데 이번 탄핵 정국의 쟁점은 아나키즘으로만 환원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또한 <공화주의적 모먼트>도 존재하거든요. 그런데 전에도 언제 말했던 적이 있지만, 공화주의는 단일한 이념도 아니고 단일한 역사를 가지고 있지도 않습니다. 공화주의는 공동체주의에 가까운 우파적인 입장도 존재하고 반면 매우 급진적인 좌파적 관점도 가능하죠. 하지만 국내에서 공화주의나 시민공화주의에 준거하는 이들은 대개, 겉으로는 진보적인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 매우 전통적인 공화주의적 입장을 채택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전통적인 공화주의는 사실 엘리트주의를 바탕에 깔고 있는 관점이죠. 요컨대 이런 공화주의로는 <과두제적 지배>라는 문제를 제대로 해명할 수 없고 거기에 대한 대안을 제시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과두제적인 지배>의 문제를 핵심 쟁점으로 삼지 않으면, 헌정 수호는 그냥 현상유지에 그칠 수밖에 없죠. 2017년 탄핵을 되풀이하는 셈입니다.

 

따라서 공화주의를 재해석하는 과제가 상당히 중요한 또 다른 과제로 제기됩니다. 마침 5월쯤에 아나키즘 학회에서 초청을 받아서 발표를 하기로 되어 있는데, 거기에서 공화주의에 대한 재해석을 다뤄보려고 합니다. 제 생각은 <아카니즘적 공화주의>가 가능한지, 그러면 어떤 원리, 어떤 제도적 틀을 통해서 그것이 가능한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요. 사실 제가 10여 년 전에 두 편의 글에서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진전시키려면 <무정부주의를 제도화>하는 게 필요하고 <무정부주의적 시민권>을 사고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번 기회에 그것을 <아나키즘적 공화주의>라는 관점에서 다뤄보고 싶습니다.

 

[한홍구 선생 코멘트: 아카니즘적 공화주의, 그거 이회영의 문제의식과도 겹친다고 봐요. 이회영은 엄청 근왕주의적이었는데, 고종이 죽자 임시정부 엘리트들의 자리다툼 싫다고 민중으로 돌진해 갔죠. 아나키즘과 공화주의도 문제이지만, 다양한 아나키스트들이 모였을 때 민주적 의사결정이 쉽지 않을 겁니다. 급한 사안에서 연대 가능하지만, 상설적인 조직화에는 어려움, 갈등, 내분, 환멸이 따르겠지요.

 

중국에서도 아나키즘이 매우 강했어요. 아나키즘의 정신이 사라진 적흑논쟁 거쳐 러시아혁명 이후 힘을 잃은 것이 중국공산당의 여러 문제점의 중요이유라고 봤는데, 찾아보니 번역이 안 되었나봐요.

 

https://www.amazon.com/Origins-Chinese-Communism-Arif-Dirlik/dp/0195054547

 

나의 답변: 예 선생님. 아주 적절한 지적이십니다. 그러니까 <아나키즘적 공화주의><공화주의적 아나키즘>은 쉽게 조화를 이루긴 어려운 표현들이죠. 매우 이율배반적이고 딜레마적인 표현들이어서, 한 방에 해결하기는 어려운 다수의 쟁점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탄핵 정국의 쟁점 자체가 이런 딜레마 내지 이율배반을 명료하게 정식화하고 개념화하라고 요구하는 것으로 보여요.]

 

이것과 관련해서 좀 미묘한 용어법의 문제도 있는데, 아시다시피 저는 <-을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을의 민주주의>라는 용어도 만들어봤는데요. 전에 장애인 활동가들하고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이라는 용어를 별로 탐탁치 않게 생각하더라고요. 대신 <마이너><마이너리티> 또는 <소수자>라는 용어를 훨씬 더 애용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더군요.

 

그게 그거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조금 전에 언급했던 세 가지 쟁점과 관련해보면, 제가 보기에 <소수자><마이너리티> 같은 용어법을 중시하는 데에는 아나키즘적인 관점이 강하게 표현되어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아나키즘의 관점만으로는 <과두제적 지배>라는 문제에 제대로 대응하기는 어렵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그것은 어제 발표문에서도 얘기한 바 있지만, <국가 바깥의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것과 비슷한 어려움이죠.

 

3) 사회주의의 쟁점

 

그리고 세번째 쟁점이 사회주의의 쟁점이라고 보는데요, 최근 사회운동이나 인권운동에서 <사회주의>의 문제는 거의 논의가 되지 않는 주제이긴 한데, 21세기의 역사적 조건에서 사회주의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서는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도, 지구 생태계의 파괴라는 문제도, 페미니즘적인 사회적 재생산의 문제도 제대로 설명할 수도 없고, 대응책을 마련할 수도 없다고 봅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21세기의 자본 축적이 더 이상 노동 착취를 대상으로 하지 않고, 재생산 전체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죠. 삶 전체의 상품화라고 부를 수도 있겠죠. 우리가 흔히 알고리즘 자본주의라고 부르는 것도 이것의 한 측면이겠고요. 이번 탄핵정국에서 사회주의의 문제가 별로 부각되지도 않고 중요한 쟁점이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기저에서는 이 문제와 어떻게든 연동이 된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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