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지난 신문 칼럼인데, 흥미로운 글이어서 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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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세상]



민주당과 전자주민증 그리고, 삼성

[기고] 민주당은 反정보인권 세력이다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renewal_col&nid=64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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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12-01-13 0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의 주민등록법은 흔히 말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도 매우 강력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요.개인별 식별번호,거주지 등록제,거기에 지문날인까지... 예전에 주민등록할때 좀 개겼던 기억이 납니다. 결국 하긴 했지만 동네에서 제일 마지막에 한다고 타박하던 직원들과 한판했었습니다. 요즘 인근 바다를 비롯해 공동어시장에 가장 많이 깔린 물고기가 '정치'지요. 어물전 꼴뚜기같은 예비후보들만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치를 반mb와 선거로만 집중시키고 있는....여기까지만 해야지요.ㅎㅎ 대중의 열화같은 성원에 찬물을 끼얹을 수는 없고, 엘리트도 아니면서 억울하게엘리트 누명을 쓰고 병맞을 수도 없으니까.하여간 배설의 쾌감만큼이나 위의 생활밀착형 정치에 더 깊은 관심이 있었으면 합니다.(주민등록증만큼 생활밀착적인게 없지요.지갑 속에 늘 들어 있는데 ㅎㅎ ) 그나저나 몇 년전만 해도 번역하신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서점에서 볼 수 있었는데 요즘은 싹 종적을 감췄더군요.최근에서야 읽어보려고 찾는데 없더군요. 헌책방에도 그닥. 재판이나 그런 계획은 없는지요? ... 아ㅡ늦었지만 새해 복도 많이 받으시구요.신정과 구정사이에 절묘하네요ㅋㅋ

balmas 2012-01-13 16:53   좋아요 0 | URL
드팀전님, 오랜만이세요.^^ 새해 복많이 받으시고 올해는 새로운 정치의 희망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생활밀착형 정치가 필요하다는 데 깊이 동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생활 속의 불의나 불공정성을 불편하게 느끼고 거부하는 시민들이 더 많아져야 할 것 같아요. 물론 저도 포함됩니다. :)
[마르크스의 유령들]은 그린비 출판사에서 2판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원고는 진작에 넘겼는데, 출판사에서 다른 책들을 내느라 아직 출간 준비를 못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래도 올해 안에는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드팀전 2012-01-13 1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저도 기억해주시고.ㅎㅎ 재판 소식 감사합니다.
 

그린비 출판사 홈페이지에 갔더니 2012년 출간 예정 도서 목록이 보여서 퍼옵니다.


정말 흥미진진한 책들이 많이 보이네요.


2012년 한 해 동안 그린비 책만 읽기에도 벅찰 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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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greenbee.co.kr/blog/1650



그린비출판사 2012년 출간계획 대공개!!



2012년이 밝은 지도 어언 며칠(!)입 니다. 언론에서 흑룡의 해니 뭐니 아무리 떠들어도, 마야인들이 종말을 말했건 멸망을 말했건, 그린비출판사는 올해도 열심히 책을 만들고 웹서비스를 굴립니다. 볼테르의 소설 주인공인 캉디드 씨가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밭을 열심히 갈아야죠. 그래야 독자 여러분께 풍성한 먹을거리를 드릴 수 있을 테니까요. 자, 그럼 2012년 그린비출판사에서 나올 책들, 그 화려한 목록을 함께 살펴보실까요?

올 겨울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간디작살’ 미셸 푸코 님입니다. 1995년에 번역 출간되었다가 절판된 디디에 에리봉의 『미셸 푸코, 1926~1984』(박정자 옮김)가 전격(!) 복간됩니다. 푸코의 삶을 가장 생생하게 그려 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푸코 평전이지요. 기대하셔도 좋습니다(한 대목 맛보시려면? 이곳을 클릭하세요!). 그리고 또 하나, 2월 중에는 그린비출판사가 주최하는 ‘푸코 심포지엄’이 열릴 예정입니다. 2010년 여름 열렸던 ‘알튀세르 효과’ 심포지엄의 후속편으로 진태원, 심세광, 서동진 선생님 등 쟁쟁한 연구자들께서 총출동하십니다. 역시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책은 하반기 혹은 내년에 나올 예정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미셸 푸코, 1926~1984』는 새롭게 선보이는 ‘그린비 인물시리즈 he-story’의 스타트를 끊는 책이기도 합니다. 위대한 사상가들의 삶과 사유를 엿볼 수 있는 이 시리즈에는 『마르셀 모스 평전』(Marcel Mauss, 마르셀 푸르니에 지음, 변광배 옮김), 『비판과 확신: 폴 리쾨르 인터뷰집』(La critique et la conviction: Entretiens avec François Azouvi et Marc de Launay, 변광배 옮김), 『홉스봄 평전』(Hobsbawm: History and Politics, 그레고리 엘리어트 지음, 신기섭 옮김) 등이 올해 출간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쉽게 만나기 힘들었던 인물들의 숨은 매력을 놓치지 마시길!!

2 월에 새롭게 선보일 시리즈가 하나 더 있는데요, 바로 ‘사이 시리즈’입니다. 이화여대 이화인문과학원 탈경계연구단의 기획으로, 사이와 경계에서 생성되고 있는 새로운 존재와 사유를 그려 보고 발굴하고자 하는 시리즈예요. 우리 ‘사이’니까 조심조심 드리는 말씀인데요, 솔직히 좀 심하게 흥미롭지 않습니까? ㅎㅎㅎ 1차분으로 『주체와 타자 사이』(김애령), 『텍스트와 이미지 사이』(조윤경), 『매체와 감각 사이』(천현순) 세 권이 출간되고요, 이후 『인간과 기계 사이』, 『예술과 기술 사이』, 『경건과 욕망 사이』, 『미학과 정치 사이』 등 흥미로운 저작들이 이어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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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월 초에는 독특한 책이 한 권 찾아갈 예정인데요, 작년 봄 일본 전역을 충격과 비탄에 빠뜨렸던 일본 대지진에 관한 책입니다. 3월 11일 일본 동부 대지진은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니라 일본 사회의 근본을 뒤흔든 사회적 현상이기도 했는데요, 이에 대해 요시모토 다카아키(吉本隆明), 쓰루미 슌스케(鶴見俊輔) 등 보수 논객부터 아나키스트까지 다양한 인물들이 사상적 측면에서 대지진이라는 현상을 조망하고 이후 나아갈 길을 모색하고자 했습니다. 이 책 『사상으로서의 3.11』, 기대할 만합니다!

지 금-여기에서 살아 숨 쉬는 고전 다시 쓰기 프로젝트, ‘리라이팅 클래식’도 계속됩니다. 『일리아스, 영웅들의 전장에서 싹튼 운명의 서사시』로 독자들을 낯선 그리스 고전의 세계로 인도해 주셨던 강대진 선생님께서 『일리아스』와 짝을 이루는 『오뒷세이아』로 다시 한번 독자들을 초대합니다. 또 하나, 김풍기 선생님께서는 서산대사가 쓴 불교 입문서 『선가귀감』을 리라이팅하십니다. ‘귀감’이 될 만한 책이라는 이름에 부족함이 없는 이 고전이 어떤 모습으로 독자들을 만날지 기대됩니다. 양명학의 대가 이탁오의 센세이셔널한 책 『분서』 역시 채운 선생님의 글로 새롭게 태어나 센세이션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기다리시고 좋아해 주시는 모리스 블랑쇼 선집 중에서는 『카프카에서 카프카까지』(De Kafka à Kafka, 이달승 옮김)와 『카오스의 글쓰기』(L'ecriture du Desastre, 박준상 옮김) 두 권이 출간될 예정이고요, 그에 맞서는 동양 대표(?) 루쉰 전집은 화개집과 화개집속편을 비롯하여 계속해서 출간될 예정입니다.

작년에 잠시 쉬었던 ‘작가가 사랑한 도시’ 2차분도 올해 다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고티에의 상트-페테르부르크』(심재중 옮김), 『뒤마의 세비야』(이채영), 『모리스 바레의 스파르타』(정광흠), 『알베르 토마의 시베리아 횡단특급』(박명욱), 『스탕달의 피렌체』(이찬규) 등이 예정되어 있으니 내년 휴가지 고민에 참고하시고요(?), 작년에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홀로 외로이(하지만 강력하게!) 출간되었던 ‘개념어총서’의 바통은 기억(진은영), 욕망(박정수), 통치성(심세광), 탈식민주의(김은중) 등이 이어받을 예정입니다. 와, 정말 다 사고 싶은데 너무 많아서 고민이시라고요? 괜찮아요. 이 두 시리즈는 가격이 무척이나 착해서 다 사셔도 지갑이 별로 안 얇아지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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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준히 출간되어 벌써 8권이 나왔고, 라틴아메리카와 탈식민주의에 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트랜스라틴 총서’의 포진도 든든합니다. 『브라질의 간결한 역사』(História concisa do Brasil, 보리스 파우스트 지음, 최해성 옮김), 『하위주체성과 재현』(Subalternity and Representation, 존 베벌리 지음, 박정원 옮김), 『신들의 전쟁』(The War of God, 미카엘 로위 지음, 김항섭 옮김) 등이 출간 예정이지요. 러시아의 사회‧문화를 다각도에서 조망하는 ‘슬라비카 총서’도 작년에 출범하여 『혁명의 정치학』(Politologiya revolyutsii, 보리스 카칼리츠키 지음, 정재원 옮김), 『민족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the Nation, 마를렌 라뤼엘 지음, 김태연 옮김), 『러시아의 자아 정체성 찾기』(Russia in Search of Itself, 제임스 빌링턴 지음, 박선영 옮김) 등으로 꾸준히 이어집니다.

작 년에 『우리가 아는 장애는 없다』로 닻을 올린 ‘장애학 컬렉션’에게는 2012년이 도약의 해입니다. 장애를 ‘고쳐야 할 병’으로만 보는 기존 장애학의 담론을 벗어나 그것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살펴보는 이 시리즈는 여성학‧역사학‧지리학 등 각 분과학문의 관점들과 결합하여 점점 확장되어 갈 예정입니다. 올해에는 『거부된 몸』(The Rejected Body, 수전 웬델 지음, 김은정‧강진영‧황지성 옮김), 『장애의 역사』(Corps infirmes et societes, 앙리 자크 스티케 지음, 오영민 옮김), 『장애의 지리학』(Geographics of Disability, 브렌던 글리슨 지음, 최병두‧임석회‧이영아 옮김), 『장애학의 오늘을 말하다』(Disability Studies Today, 콜린 반스 지음, 김도현 옮김) 등이 출간을 기다리고 있지요.

이 외에도 여러 흥미로운 타이틀들이 독자들과 만나기 위해 그린비 사무실 하드디스크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바울의 정치신학』(Die politische Theologie des Paulus, 야콥 타우베스 지음, 조효원 옮김), 『젠더와 민족』(Gender and Nation, 니라 유발-데이비스 지음, 박혜란 옮김), 『헤겔』(Hegel, 찰스 테일러 지음, 정대성 옮김), 『후설 철학에서의 발생의 문제』(Le problème de la genèse dans la philosophie de Husserl, 자크 데리다 지음, 심재원 옮김) 등 서양 철학의 준고전급 명저들도 줄줄이 대기 중이고요, 『생명자본』(Biocapital, 커식 선더 라한 지음, 안수진 옮김)과 『생명이론』(군지페기오 유키오 지음, 이정우‧박철은 옮김)도 생명을 얻을 예정이랍니다. 『대중들』(Crowds, 제프리 쉬냅 지음, 양진비 옮김)과 『망각을 거부하라』(拒絕遺忘, 첸리췬 지음, 길정행‧신동순‧안영은 옮김) 같은 대작들도 빼놓을 수 없고요.

국내 저자의 철학 저서도 알차게 준비되어 있습니다. 메를로-퐁티의 자유 개념에 관한 『신체와 자유』(심귀연), 레비나스의 윤리학을 고찰한 『해체와 윤리』(문성원)를 비롯하여 『화이트헤드의 가능태와 현실태』(김영진), 『20세기의 매체철학』(심혜련) 등이 독자 여러분들을 찾아갈 예정입니다. 자, 어때요? 이만하면 진수성찬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린비의 책들과 함께 마음의 밭을 가는 2012년 되시기를 바라면서,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성 격 급하신 분들을 위해 1~2월 출간 예정 도서만 모아서 정리해 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머지는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 『젠더와 민족』, 『바울의 정치신학』, 『미셸 푸코, 1926~1984』, 『신체와 자유』, 『해체와 윤리』, 사이 시리즈(『주체와 타자 사이』, 『매체와 감각 사이』, 『텍스트와 이미지 사이』)

- 편집부 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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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에 후마니타스 출판사와 [정치체에 대한 권리] 출간 기념 인터뷰를 했는데,

그동안 차일피일 미루다가 이번에 올려놓습니다.


인터뷰가 실린 [후마니타스 통신 11월호]를 보시려면 아래 주소로 가보세요.


http://www.humanitasbook.co.kr/webzine/20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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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정치체에 대한 권리』 (발리바르 지음, 2011년 10월 출간)의 옮긴이 진태원


질문 1.
『정 치체에 대한 권리』가 드디어 출간이 되었습니다. 그간 진태원 선생님은 후마니타스와 에티엔 발리바리의 저서 두 권(『우리, 유럽의 인민들?』)을 번역, 출간하셨습니다. 두 권 모두 한편으로는 활동가로서의 발리바르가 지닌 실천적 개입의 측면이 특히 두드러진다고 할 수 있을 듯합니다. 다만, 그러다 보니 국내 독자들에게는 발리바르가 개입하는 지점들이 다소 낯설 수도 있을 듯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국내에 번역, 소개하면서 가장 염두에 두었던 점은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요. 말하자면, 정세적 개입의 성격을 가지는 내용들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개입들이 일관되게 던지고 있는 중요한 질문들 말입니다.


답변 1.
당 연히 이 두 권의 책은 실천적인 개입에 대한 개인적인 보고나 경험담에 그치는 것은 아닙니다. 발리바르는 철학자이기 때문에 자신의 실천적인 개입의 함의에 대해 고도의 이론적인 성찰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두 권의 책에서는 여러 가지 이론적인 주장들을 제시하고 있는데요, 핵심적인 것은 세 가지 정도 될 것 같습니다.

첫째, 근대 정치체의 한계와 그것의 극복에 관한 주장입니다. 발리바르는 근대 정치체를 국민국가 또는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국민사회국가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의 핵심적인 모순을 시민권=국적이라는 등식으로 표현하죠. 다시 말하면 정치적 주체로서의 자격을 뜻하는 시민권을, 국적을 소유한 사람들에게만 부여한 것이 근대 정치체의 한계를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유럽연합이라는 기획이 발리바르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은, 이러한 기획이 근대 정치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정치적 실험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발리바르는 현실의 유럽연합은 신자유주의적 노선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역사적 소명과 어긋난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유럽연합이 자신의 소명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근대 정치체인 국민사회국가가 이룩한 민주주의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유럽연합은 붕괴하거나 좌초하게 될 것이라는 진단입니다.

둘째, 정치체에 대한 재정의가 또 다른 중요한 논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치체’라는 우리말에 해당하는 서양어로는 폴리테이아, 레스 푸블리카, 키비타스, 커먼웰스, 시테와 같은 다양한 명칭들이 존재합니다. 발리바르는 이러한 명칭들을 관통하는 정치체의 핵심을 ‘시민권 헌정’(constitution of citizenship)으로 재정의합니다. 이러한 재정의는 정치체의 근간이 시민들의 봉기적 구성 행위에 있음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정치체는 초월적이거나 자연적인 기초를 갖지 않으며, 억압과 압제, 또는 소수의 지배에 맞서 자신들의 권리를 쟁취하려는 인민의 봉기적 행위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헌정’으로 번역되는 constituion이라는 단어는 또한 ‘구성’이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는데, 이러한 이중적 의미가 뜻하는 바는 헌정으로서의 정치체는 시민들의 봉기적 구성에 근거를 둔다는 것이죠. 물론 발리바르가 말하는 ‘봉기’란 꽤 넓은 의미를 갖습니다. 그것은 독재 정권에 대항하는 대규모의 시위일 수도 있고 고전적인 혁명적 봉기일 수도 있지만, 시민불복종 운동이나 청원 운동 등 역시 넓은 의미의 봉기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발리바르가 『정치체에 대한 권리』에서 미등록 이주자 탄압에 맞선 시민불복종이나 국민전선의 발흥에 대항하는 시민들의 반역을 촉구하는 것은 일시적이거나 상황적인 태도라기보다는 정치체의 본질에 대한 재정의에 기반을 둔 주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근대 정치체의 한계를 극복하는 새로운 정치체를 구성하는 것 역시 이러한 시민들의 봉기적 행위를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발리바르는 좀 더 최근의 저작들에서는 봉기와 헌정 사이의 긴장 관계, 또는 민주주의와 시민권 사이의 이율배반적인 관계에 천착하면서 자신의 성찰을 좀 더 급진적으로 발전시키고 있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 유럽의 시민들?』이나 『정치체에 대한 권리』를 읽어 본다면, 발리바르의 작업이 얼마나 새로운 통찰을 제시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국내 독자들에게 조만간 그런 기회가 찾아올 것으로 믿습니다.

셋째, 끝으로 반(反)폭력의 정치 또는 시민다움(civilité)의 정치에 관한 분석이 발리바르 정치철학의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에서 발리바르가 정치체를 시민권 헌정으로 재정의하면서 봉기적 시민권을 강조한다고 말했는데요, 이것은 사실 고전적인 해방운동(근대 부르주아혁명 및 사회주의혁명 또는 반식민 해방 투쟁 등)의 지지자들이 공유하고 있던 관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여기서 더 나아가 혁명이나 반역, 봉기 등이 내포하는 구조적인 한계 또는 그것의 도착적인 효과라는 문제를 제기합니다.
흔히 오해되는 것과는 달리 발리바르의 반폭력의 정치 내지 시민다움의 정치는 일상적인 용어법에서 말하는 ‘비폭력’을 뜻하지 않습니다. 전에 어떤 강연회에 간 적이 있는데, 거기서 어떤 분이 발리바르의 반폭력에 관해, ‘결국 발리바르 얘기는 화염병을 써도 좋다는 얘기냐, 쓰면 안 된다는 얘기냐’라고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이 질문이 발리바르의 반폭력의 정치에 대한 상당수 국내 독자들(특히 이른바 ‘좌파’ 내지 ‘마르크스주의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의 이해 정도를 단적으로 표현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발리바르에게 이것은 아예 문젯거리도 되지 않는 질문입니다. 발리바르는 정치에는 불가피하게 폭력이 개입하기 마련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지배계급의 구조적인 폭력이나 억압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그것을 물리치기 위한 폭력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폭력 없이 권리를 쟁취하거나 억압 내지 지배를 해체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렇게 해야겠죠. 하지만 수많은 역사적 경험들이 보여 주듯이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더욱이 화염병을 쓰느냐 아니냐, 심지어 무기를 사용하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철학적으로 금지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닙니다. 절박한 상황에 몰린 사람들이라면 누가 그것을 금지한다고 해도 결국 사용하기 마련입니다.

발리바르가 반폭력의 정치 내지 시민다움의 정치를 말하는 것은 제가 보기에는 크게 세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 째, 반폭력의 정치의 논점은 고전적인 혁명이나 반역, 봉기 등에 내재한 도착적 효과를 감축하거나 제어하는 문제입니다. 어떻게 해방을 위한 혁명이나 봉기가 다시 소수의 지배자를 위한 억압과 독재의 정치를 낳게 되었을까, 왜 프롤레타리아의 해방(및 인간의 해방)을 목표로 내걸었던 사회주의 운동이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지배로 귀착되게 되었을까? 이러한 질문에 대해 상이한 답변들이 제시될 수 있겠지만, 발리바르의 논점은 이러한 도착이나 퇴락에는 폭력의 애매성에 대한 맹목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둘 째, 발리바르가 염두에 둔 ‘폭력’은 일반적인 의미의 폭력이 아니라 극단적 폭력입니다. 그는 특히 초객체적 폭력과 초주체적 폭력이라는 극단적 폭력의 두 가지 형태를 언급한 바 있습니다. 초객체적 폭력은 ‘수백만 명에 달하는 쓸모없는 인간들의 전면적 제거’와 ‘구조의 재생산 전체를 초과하는 객관적 잔혹의 일상성’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초주체적 폭력은 어떠한 변혁도 목표로 삼지 않는 희망 없는 반역, 목적 없는 폭력의 일반화 같은 현상들 및 이른바 ‘민족 청소’나 대량 학살 같은 현상에서 나타나는 ‘증오의 이상화’ 현상, 곧 자기 내부에 있는 타자성과 이질성의 모든 흔적을 제거함으로써 정체성을 순수하게 구현하려는 맹목적이고 초주체적인 의지 작용을 뜻합니다. 이 두 가지 극단적 폭력이 오늘날 세계 정치에서 가장 심각한 문젯거리들에 속한다는 점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를 이론화하고 그에 대한 해법을 고민하는 철학자는 매우 드뭅니다. 반면에 발리바르는 이러한 극단적 폭력의 문제에 대한 해법의 모색 없이는 해방의 정치, 변혁의 정치를 개조하는 일은 불가능하고 주장할 만큼 이러한 문제들을 중요한 정치적 사유의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셋째, 발리바르가 말하는 폭력은 좁은 의미의 폭력, 곧 물리적 힘의 행사나 공격, 착취, 억압 등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독일어 게발트(Gewalt)의 다의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권력과 권위 등을 함께 뜻합니다. 따라서 반폭력의 정치나 시민다움의 정치가 목표로 하는 것은 좁은 의미의 폭력을 금지하거나 줄이려는 것이라기보다는, 폭력이 정치를 구조화하는 메커니즘을 개조하거나 변혁하는 문제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당연히 공동체란 무엇인가,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경계란 어떤 것인가 같은 사변적인 문제에 대한 답변을 요구하며, 또 그것에 부응하는 제도적 형태들은 어떤 것인가라는 구체적 쟁점을 수반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발리바르가 『우리, 유럽의 시민들?』에서 언급하는 ‘운명 공동체’ 개념이나 『정치체에 대한 권리』에서 제시하는 ‘다양체로서의 우리’ 같은 개념들은 시민다움의 정치의 핵심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질문 2.
국 내에서는 지젝, 랑시에르, 아감벤 등을 비롯해 민주주의에 대한 정치철학적 맥락에서 되짚어 보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특히 발리바르를 통해 민주주의의 문제, 정치철학의 문제를 재사고하는 것이 가진 장점은 무엇일런지요.

답변 2.
이 문제에 관해서는 길게 이야기하기는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별도의 자리에서 본격적으로 토론해 보고 싶은 주제이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간단하게 다음과 같은 점만 지적해 두겠습니다. 제가 보기에 동시대의 다른 정치철학자들과 비교해 볼 때 발리바르가 갖는 강점 내지 독창성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대개의 다른 정치철학자들, 특히 유럽의 정치철학자들이 지극히 환원주의적인 경향을 보여 주는 반면, 발리바르는 정치를 복합적이고 다면적으로 사고합니다. 동시대의 유럽 정치철학자들에게서 놀라운 점은 이들이 다방면에 걸쳐 매우 풍부한 지식을 갖고 있고 고전 철학의 전통에도 정통해 있지만, 정치적 사유에서는 대개 강한 환원주의적 경향을 보인다는 점입니다. 가령 아감벤에게 정치의 문제는 주권과 생명의 문제로 환원되고, 랑시에르는 정치란 오직 평등의 문제일 뿐이라고 강변하고, 지젝은 고전적인 혁명론을 실재의 차원에서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또 바디우나 네그리 역시 환원주의적이라는 점에서는 이들에 결코 뒤지지 않습니다. 반면에 발리바르는, “해방, 변혁, 시민다움: 정치의 세 가지 개념”이라는 논문에서 볼 수 있듯이, 정치를 한 가지 개념이 아니라 적어도 세 가지 개념을 통해 사고하려고 합니다. 제가 보기에 이것은 주목할 만한 장점입니다. 이러한 복합적 사유는 마르크스주의 전통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 변혁의 문제 설정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그것이 고전적인 시민혁명의 이상인 자율성의 정치와 어떻게 연결돼 있는지 이해할 수 있게 해주고, 더욱이 이 두 가지 정치의 한계를 시민다움의 정치 또는 반폭력의 정치라는 문제 설정으로 극복할 수 있는 길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둘째, 첫 번째 측면과 연결된 것인데, 대개의 유럽 정치철학자들은 말하자면 ‘바깥의 정치’를 추구합니다. 이것은 마르크스주의가 남겨 놓은 유산이라고 할 수도 있겠는데, 이들이 보기에 진정한 정치는 제도적인 정치 바깥에 존재한다는 것이죠. 다만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생산관계 또는 넓은 의미에서의 경제가 진정한 정치로서 바깥의 정치의 장소였던 반면, 이들은 각자 다른 영역에서 바깥의 정치를 발견합니다. 하지만 발리바르는 이들과 달리 바깥의 정치를 위해 제도적인 정치 또는 시민권 헌정의 영역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바깥의 정치와 제도 정치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에 주목합니다. 간단히 말한다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발리바르가 보기에 제도 정치는 ‘바깥의 정치’로서 봉기에 근거를 두고 있는 반면, 바깥의 정치는 제도의 영역 속에서 구현되고 관철되지 않으면 지속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정치는 단지 ‘바깥’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제도’로 국한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양자 사이의 긴장과 갈등, 또는 상호 견인 관계야말로 발리바르가 생각하는 정치의 장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질문 3.
발리바르의 저서들을 번역하면서, 특히 어려웠던 점은 없으셨는지요. 혹은 『정치체에 대한 권리』를 번역하면서, 개인적으로도 매우 흥미로웠고 감동적이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요, 특히 어떤 점들에서 그러했는지요.

답변 3.
발 리바르 저서를 번역하면서 어려운 점은 특히 그의 복잡한 문체입니다. 발리바르의 문장은 비교적 긴 편인데다가 괄호나 삽입구 같은 것을 많이 포함하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한 문장 안에 괄호가 서너 개 들어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우리말 한 문장으로 옮기기도 어려울 뿐더러, 독자에게 뜻을 제대로 전달하기도 어렵습니다. 그가 이런 식의 문체를 쓰는 이유는 개인적인 성향 탓도 있겠지만 그의 인식론적 관점과도 연결돼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역자로서는 매우 성가시고 괴롭지만, 어쨌든 독자들이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번역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정치체에 대한 권리』를 번역하면서 흥미로웠던 것은, 이 책의 “옮긴이 후기”에서도 말했지만, 발리바르가 자신의 사유를 전개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보통 철학자들의 사상이나 이론은 추상적인 관념들의 영역에서 전개된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이 책에서 발리바르는 고도로 추상적인 그의 논의가 현실의 정치나 운동에 대한 생생한 참여의 경험과 그것에 대한 숙고에서 비롯했다는 점을 명쾌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가 최근 저작에서 이론화하고 있는 민주주의와 시민권의 이율배반이라든가, ‘운명 공동체’ 개념, ‘공동 시민권’(co-citizenship) 개념 같은 것들은 1980년대 이후 유럽 및 프랑스 정치의 핵심 쟁점이었던 미등록 이주자, 인종주의, 국민주의, 네오파시즘 같은 문제에 대한 면밀한 고찰과 실천적 참여가 없었다면, 이론화하기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이것은 국내의 연구자나 활동가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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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balmas님의 "오래된 도시 같은 책"

에로이카님, 오랜만이시네요. 새해 복많이 받으시고 올해도 좋은 서평 많이 부탁드립니다. 저말고도 여러분들이 에로이카 님의 서평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데요.^^ 이 책은 재미가 있기는 한데 선뜻 권하기는 사실 좀 어려운 책입니다. 르페브르가 일관되고 명료하게 주제를 이끌어가지 않고 중간중간에 워낙 다른 이야기들을 많이 섞어놔서, 집중력을 갖고 읽기는 쉽지 않은 책이거든요. 특히 1장 [이 책의 구상]은 제일 나중에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책의 전반적인 개요를 보여주는 게 1장의 목표일 텐데, 제가 보기에는 오히려 책의 논점을 파악하기 더 어렵게 하는 것 같더라구요. ㅎㅎ 하여튼 이 책에서 르페브르의 글쓰기는 상당히 유별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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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의 생산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로컬리티 번역총서 3
앙리 르페브르 지음, 양영란 옮김 / 에코리브르 / 2011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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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월 7일자 [명저 새로 읽기] 코너에 실릴 서평 하나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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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철학자들의 책을 유심히 살펴본 사람이라면 한번쯤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졌을 법하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이나 베르그손의 {창조적 진화}, 또는 바디우의 {존재와 사건} 같은 책들은 한결같이 시간의 문제를 철학의 중심에 놓고 있다. 왜 이들은 시간의 문제를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할까? 반면 왜 이들은 공간의 문제는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 것일까?

 

20세기 프랑스 철학자인 앙리 르페브르는 서양철학의 이러한 경향에서 아주 예외적인 인물이다. 그는 공간의 문제야말로 우리 시대의 지배와 저항, 억압과 혁명의 핵심 쟁점이라고 간주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공간의 생산}은 그의 공간에 대한 사유를 집약하고 있는 대표적인 저작이다. 오랫동안 풍문으로만 전해지던 이 대작을 한글로 술술 읽으면서 문외한인 필자가 서평의 욕심까지 내게 된 것은 전적으로 역자의 값진 노고 덕분이다.

 

“공간 분석” 내지 “공간학”(549쪽)이라는 조심스러운 명칭이 붙은 르페브르 작업의 출발점은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 분석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기획이다. 마르크스주의는 토대와 상부구조로 이루어진 생산양식에 따라 역사를 구분하며, 토대의 모순이 역사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이라고 파악한다. 르페브르는 이러한 원칙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그것의 한계를 지적한다. 이러한 역사유물론의 관점에는 “각각의 사회는 저 마다의 공간을 생산한다”(77쪽)는 전제가 빠져 있다. 이것은 각각의 사회, 곧 각각의 생산양식은 생산수단의 소유 관계에 의해 규정될 뿐만 아니라 공간에 대한 집단적 생산에 의해서도 구별된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새로운 생산양식의 출현, 다시 말해 기존 생산양식의 변혁은 기존의 공간 질서에 대한 전복과 새로운 공간 관계의 생산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 르페브르는 공간 생산의 세 가지 계기를 구별한다. 공간적 실천과 공간 재현, 재현 공간이 그것들이다. 공간적 실천이란 지각된 공간을 뜻하는 것으로, 사람들이 일상적인 반복된 활동을 통해 공간을 물리적으로 생산하고 지배하고 전유하는 작용을 가리킨다. 일하고 걷고 공부하고 놀이하는 등과 같은 개인의 일상적인 활동과 이러한 활동을 연결하는 사회적 관계망들이 공간적 실천이다.

 

반면 공간 재현이란 인지된 공간을 의미하며, 공간에 관한 다양한 종류의 이론적 담론에 따라 규정되는 공간을 가리킨다. 이것은 데카르트와 같은 철학자들이 이론화한 기하학적 공간이고 도시계획자들이 설계하는 공간이며, 그에 따라 실제의 공간을 구획짓고 배열하는 기술관료들의 공간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재현 공간이란 이미지와 상징을 통해서 체험된 공간이다. 우리는 어떤 공간이나 장소에 대해 상징적으로 이러저러한 의미를 부여한다. 나만이 알고 있는 비밀의 장소라든가 조상의 넋이 살아 있는 선산, 독립선언의 기억이 아로새겨진 성소, 젊음의 거리 등이 단순한 물리적 공간과 구별되는 재현 공간의 예들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개념적인 구별을 통해 르페브르가 보여주려는 것은 공간이 지니고 있는 중층성과 복합성이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간은 자본의 높은 수익을 보장하기 위한 장이며, 저항과 전복의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해 위계적으로 재편되는 곳이다. 강남과 비강남, 수도권과 지방 같은 간단한 구도를 상기하는 것으로 족하다. 하지만 르페브르에 따르면 공간은 단순히 지배의 공간만이 아니며 전면적으로 통제될 수 있는 곳도 아니다. 19세기에 파리 외곽으로 밀려났던 파리의 빈민들이 파리 코뮌을 통해 다시 파리의 주체로 재등장했던 것처럼, 도시는 연대와 소통, 차이와 횡단의 가능성이 구현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르페브르는 공간을 단순히 주어진 것이 아니라 생산물로서, 더 나아가 생산 작용 자체로 파악함으로써, 공간이 지닌 복합성과 활력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공간의 생산}은 기묘한 모순을 담고 있는 책이다. 한 편으로 이 책은 상당한 집중력을 요구할 만큼 꽤 복잡한 논의와 독창적인 가설들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책의 여러 대목에서 르페브르는 논의의 흐름에서 벗어나 분방한 상상력을 펼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을 충분히 음미하기 위해서는, 때로는 한 손에 펜을 들고 줄을 그으며 꼼꼼히 읽어가면서도 때로는 한 대목에 멈춰서 자유롭게 이런저런 상상을 해가면서 오랜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읽어야 한다는 것, 그것을 나는 이 책의 페이지들을 꽤 넘긴 뒤에야 깨달았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마치 오래된 도시와 같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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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이카 2012-01-07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 안녕하셨어요. 오랜만에 들어왔다가 반가워서 안부 여쭙습니다. 이 책 재미있어 보이네요. 좀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balmas 2012-01-07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로이카님, 오랜만이시네요. 새해 복많이 받으시고 올해도 좋은 서평 많이 부탁드립니다. 저말고도 여러분들이 에로이카 님의 서평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데요.^^

이 책은 재미가 있기는 한데 선뜻 권하기는 사실 좀 어려운 책입니다. 르페브르가 일관되고 명료하게 주제를 이끌어가지 않고 중간중간에 워낙 다른 이야기들을 많이 섞어놔서, 집중력을 갖고 읽기는 쉽지 않은 책이거든요. 특히 1장 [이 책의 구상]은 제일 나중에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책의 전반적인 개요를 보여주는 게 1장의 목표일 텐데, 제가 보기에는 오히려 책의 논점을 파악하기 더 어렵게 하는 것 같더라구요. ㅎㅎ 하여튼 이 책에서 르페브르의 글쓰기는 상당히 유별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