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적 대상들의 존재 양식에 대하여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13
질베르 시몽동 지음, 김재희 옮김 / 그린비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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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주말 [경향신문] "명저 새로 읽기" 코너에 실릴 서평을 하나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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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생각은 얼마나 독창적일 수 있을까? 사실 사람들의 생각이 독창적인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이라고 믿는 것은 익히 알려진 통념들이기 십상이다. 철학자나 인문학자의 경우도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극히 드문 경우를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철학자나 인문학자의 생애는 ‘누구누구에 대한 연구’에 바쳐진 생애이며, 그것도 이른바 대가들이 남긴 누구누구에 대한 연구에 주석을 다는 일에 바쳐진 생애인 경우가 허다하다.

이렇게 본다면 프랑스의 기술철학자 질베르 시몽동(1924-1989)은 경이로운 예외가 아닐 수 없다.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와 니체, 프로이트의 독창성을 칭송하는 뜻에서 그들을 19세기 사상의 사생아라고 부른 적이 있는데(애비 없는 자식이라는 말이야말로 사상가에게는 최고의 호칭이 아닌가), 그렇다면 시몽동이야말로 마땅히 20세기 사상의 사생아라고 부를 만하다. 그는 기술에 관한 우리의 두 가지 통념을 완전히 뒤엎으면서 기술에 관한 새로운 사상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기술에 관해 너무 비관적이거나 너무 낙관적이다. 한편으로 사람들은, 공상과학영화에서 즐겨 다루듯이, 기술이 자연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결국 인간을 기술의 노예로 만들게 되리라는 막연한 공포심을 갖고 있다. 그런가 하면 기술 예찬론자들은 기술이 인간을 고된 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켜왔으며, 앞으로도 더욱 안락하고 풍요로운 삶을 보장해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전자가 기술적 대상은 (자연 및) 인간에 대해 적대적 존재자라는 생각에 기반을 두고 있다면, 후자는 기술적 대상을 오직 인간의 유용성에 봉사하는 단순한 도구로 간주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하지만 시몽동에 따르면 이 두 가지 극단적인 태도는 기술적 대상에 대한 동일한 인식에서 유래한다. 그것은 기술적 대상의 본질은 자동성이라는 믿음이다. 20세기 후반 사이버네틱스 이론을 통해 널리 유포된 이런 믿음은 기술적 대상 또는 간단히 말하면 기계에 대한 세 가지 통념을 함축한다. 하나는 기계가 미리 결정된 작용만을 하도록 규정돼 있다는 결정론적 통념이다. 둘째, 따라서 기계는 전적으로 수동적인 존재자라는 생각이다. 셋째, 이 두 가지 통념은 결국 기계는 인간과 전혀 무관한 것이며(왜냐하면 인간은 자유롭고 능동적인 존재자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반(反)인간적이라는 생각을 낳는다. 기계는 인간이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도구로 남을 때 유용한 것이지만, 기술적 자동성은 인간의 통제를 넘어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시몽동은 우선 자동성이 기술적 대상의 본질을 이룬다는 생각을 반박한다. 기술의 본질은 오히려 비결정성에 있다. 곧 기술적 대상은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외부 정보에 대한 감수성을 지닌 열린 체계다. 다만 생명체는 완전히 “구체화”되어 있는 데 반해, 기계는 항상 어느 정도의 “추상성”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를 지닌다. 쉽게 말하면, 기계는 생명체와 달리 정보를 생산하고 소통할 수 있는 독자적인 힘을 보유하고 있지는 않다는 뜻이다.

따라서 기술적 대상들은 자신의 고유한 진화 과정에 따라 발전하지만, 인간의 작용을 필요로 한다. 이때 인간과 기술적 대상의 관계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아니라,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의 관계다. “인간은 자기 주위에 있는 기계들의 상설 발명가이자 조정자로 존재하는 기능을 갖는다. 인간은 자신과 함께 작용하는 기계들 가운데 존재한다.”(14쪽)

그렇다면 기술을 두려워하고 배척하는 생태운동가들이나 기술의 유용성에 대한 맹목에 젖은 테크노크라트들 모두 기술적 소외를 강화하고 있을 뿐이다. 시몽동이 보기에 우리 문명의 중요한 과제는 이러한 기술적 소외를 극복하는 것, 곧 기술공학적 문화를 만들어내는 데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인문학 독자들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과학기술자들과 생태 운동가들에게 널리 읽혀야 할 책이다.

필자가 알기로 이 책은 아직 어느 나라에서도 완역된 적이 없으며, 영역본이 이제 출간을 앞두고 있다. 그것은 시몽동의 사상이 그만큼 혁신적이고 독창적이어서 외국만이 아니라 프랑스 국내에서도 그동안 충분히 그 진가를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중요한 책을 유려한 한글로 읽게 된 것은 역자의 헌신적인 노고 덕분이다. 역자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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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중앙] 겨울호에 실릴 글을 한 편 올립니다.

앞으로 다루고 싶은 주제를 스케치해본다는 생각으로 한번 써봤습니다.

아직 교정이 끝나지 않은 글이기 때문에 인용은 불허합니다.

이 글에 대해 토론이나 인용을 원하는 분은 [문예중앙] 겨울호에 실린 판본을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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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 보편적이면서 독특한

 

개인이라는 단어만큼 우리에게 익숙한 것도 드물 것이다. 오늘날 ‘개인’이라는 단어는 그것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우리 삶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말 중 하나다. 그것은 존재론적 단위이자 사회정치적 단위이고, 우리 생활의 기본 단위인 것으로 파악된다. 자연은 물리적 원자들과 생명을 가진 개체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 상식으로 통용된다. 또 국가는 개인들의 생명과 재산,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정치 조직으로 정의되고, 시민사회는 독립적인 개인들로 이루어진 영역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우리들은 각자 하나의 개인으로서 저마다의 ‘삶의 주인’이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보면 개인은 상당한 불신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공동체적 전통이 강한 우리 사회에서 개인은 공동체의 질서나 조화를 깨뜨리기 쉬운 것으로 지목되곤 한다. 개인의 의견, 개인의 이익 추구는 국익이나 국가 발전, 전체의 조화를 위해 희생되어야 하고 손해를 감수해야 마땅한 것으로 치부된다.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나 단체들에게도 개인이 불신받기는 마찬가지다. 이 경우 개인은 자본주의적 세계관이나 가치관의 화신으로 지탄받는다. 곧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신자유주의적인 경쟁의 질서에 매몰된 이기적 태도로 비판받으며, 개인의 권리나 자유 운운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착취 질서를 은폐하기 위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수사법에 불과하다고 간주된다. 이렇게 본다면 개인은 한편으로 가장 기본적인 상식으로 통용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가장 불신 받는 표현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질문을 던져볼 수도 있을 것이다. 개인이라는 말이 보통 생각되는 것처럼 정말 그렇게 자명한 것일까? 개인에 대해 찬성하거나 반대하기 이전에 과연 우리는 개인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 사회에는 개인에 대한 통념(notion)은 널리 퍼져 있지만, 개인에 대한 개념(concept)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여기서 ‘통념’과 ‘개념’의 구별은 프랑스 인식론 전통의 용어법을 따랐다. 가스통 바슐라르와 루이 알튀세르, 미셸 푸코에 이르는 프랑스 과학철학의 전통에서 concept와 notion은 비교적 체계적으로 구별된다. 전자가 과학적 또는 이론적으로 엄밀하게 구성되고 내포적ㆍ외연적으로 그 의미가 잘 규정된 개념을 가리킨다면, 후자인 notion은 엄밀하게 다듬어지지 않은 상식적인 생각이나 이데올로기적 관념들을 가리킨다. 가령 우리는 시간과 공간에 대해 다양한 통념들을 가질 수 있지만, 뉴턴이나 아인슈타인, 또는 호킹 등과 달리, 누구나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개념들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마르크스나 베버, 하버마스 등이 국가에 대한 독창적인 개념들을 제시한 반면, 대개의 사람들은 국가에 대한 통념만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는 적어도 부족한 것이 아닐까?

사실 어떤 용어가 널리 통용되면 통용될수록, 따라서 그 용어가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면 받아들여질수록, 그 용어가 갖는 고유성 내지 독특성은 상실되기 쉽다. 내 생각에는 개인이라는 말이 여기에 해당되는 것 같다. 개인이야말로 보편적이면서 독특한 어떤 것, 따라서 보편성과 독특성이 역설적이게도 서로 분리할 수 없게 결합된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이라는 말에 함축된 보편성과 독특성의 역설적인 결합을 가장 잘 파악한 사람 중 하나(따라서 또한 개인을 가장 잘 개념화한 사람 중 하나)는 프랑스 철학자인 자크 데리다였다. 가령 그는 2001년 미국 무역센터 테러 이후 이루어진 한 대담에서 데모스(demos)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한편으로 데모스는 모든 ‘주체’에 선행하는, 아무개의 계산 불가능한 독특성입니다. 데모스는 시민이라는 자격 모두를 넘어, 모든 ‘국가’를 넘어, 나아가 모든 ‘인민’ 심지어는 ‘인간’ 생명체로서의 생명체라는 현 상태의 정의를 넘어, 존중할 만한 비밀을 지닌 사회적 탈유대(déliason)입니다. 이와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데모스는 보편성입니다. 합리적 계산의 보편성, 법 앞에서 시민들이 갖는 평등의 보편성, 계약을 통해 또는 계약 없이 이루어진 공동 존재의 사회적 연관 등등입니다.

[자크 데리다, [상징적이고 실재적인 자살], 지오반나 보라도리, {테러 시대의 철학}, 김은주 외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4, 219~20쪽.]

 

여기서 데리다는 데모스가 역설적인 이중적 특징을 지닌 존재자라는 점을 역설하고 있다. 데모스는 한편으로 “아무개의 계산 불가능한 독특성”을 가리키는 명칭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보편성을 지칭하는 명칭이기 때문이다. 겉보기에는 수수께끼 같은 이러한 주장의 함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우회를 해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바의 개인, 곧 존재론적으로, 사회적ㆍ정치적으로 가장 기본적인 단위 내지 요소로 이해된 개인이라는 말이 확립된 것은 서양의 자유주의를 통해서였다. 존 로크에서 존 롤스에 이르기까지 서양 자유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공리는, “인간 존재자들 사이에 본성적 종속 관계는 존재하지 않고, 각각의 개인은 지고하며 모든 권위에 맞서 자기 스스로 자유롭게 결정을 내린다”[Catherine Audard, Qu'est-ce que le liberalisme?, Gallimard, 2009, p. 29.]는 점이었다.

이러한 공리는 여러 가지 함의를 지니고 있다. 우선 이것은 자유주의적인 개인 이해가 얼마나 혁명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는지 잘 보여준다. 사회 내지 국가가 개인들에 앞서 존재하지 않고 오히려 사회 내지 국가가 독립된 개인들을 기반으로 하여 성립했다는 생각은, 전근대 사회에 보편적이었던 인간학적 가정, 곧 인간들 사이에는 본성적인 불평등이 존재하며, 사회 질서는 이러한 불평등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가정을 뒤집는다. 알다시피 전근대사회와 근대사회를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차이점 중 하나는 신분적 질서의 유무에서 찾을 수 있다. 전근대사회의 사람들이 일차적으로 이런저런 신분관계(왕, 귀족, 평민, 노예 등)에 따라 규정되고 정치ㆍ사회적 위치와 행동 방식에서 제약을 당했던 것에 비해, 근대적 개인들은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모두 평등하고 자유로운 존재들로 가정되어 있다. 민주주의가 번성했던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도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평등한 권리를 지닌 이들은 자유 시민(곧 데모스)이었으며[이것은 귀족과 평민 사이의 신분적 구별의 해체를 함축하는 것이었으며, 그 자체가 대단히 혁명적인 의의를 지닌 것이었다. 프랑스의 철학자인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는 자신의 주저인 [불화]에서 이 점을 인상적으로 논증한 바 있다. J. Rancière, La Mésentente, Éditions Galilée, 1995; {불화}, 진태원 옮김, 길, 근간 참조. 아테네 민주주의에 대한 좀더 역사적이고 구체적인 논의로는 Josiah Ober, Mass and Elite in Democratic Athens: Rhetoric, Ideology, and the Power of the People,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1; {아테네 민주주의에서 대중과 엘리트}, 박재욱 옮김, 그린비, 근간 참조.], 노예들은 이러한 권리에서 배제되어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근대적인 개인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혁신적인 것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의 정치철학자 클로드 르포르(Claude Lefort)는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을 반박하면서 근대적 개인 개념이 함축하는 이러한 급진성을 잘 밝혀준 바 있다.[C. Lefort, L'invention démocratique, Fayard, 1994(초판은 1981) 및 Essais sur le politique, Seuil, 1986; {정치적인 것에 대한 시론}, 홍태영 옮김, 그린비, 근간 참조.] 그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근대적 평등과 자유의 원칙이 착취 및 억압 관계를 은폐하는 측면만을 부각시켰을 뿐, 그것 자체가 지닌 혁명적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근대 민주주의와 인권 개념은 추상적이며, 또한 그 담지자로서 개인 역시 추상적이다. 하지만 이러한 추상성은 구체적인 사회경제적 조건과 독립적인 정치 영역의 구성을 (사고)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예컨대 [인권 선언]에서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자로 선언된 인간은 추상적 개인이다. 왜냐하면 그는 국적과 관계없이(프랑스인이든 영국인이든 인도인이든, 또는 국적 없는 난민이나 망명객이든 간에), 재산 유무에 관계없이(부자든 가난뱅이든, 재벌이든 노숙자든 간에), 피부색에 관계없이(백인이든 흑인이든 황인종이든 간에), 종교에 관계없이(기독교 신자든 불교 신자든 무슬림이든 간에), 성별에 관계없이(여성이든 남성이든 아니면 트랜스젠더이든 간에), 또 연령에 관계없이(어른이든 아이든, 노인이든 청년이든 간에), 사람이라는 사실 그 자체로 인해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자로 간주되며 또 그렇게 간주되고 존중받을 권리를 지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 없고 ~ 없고 ~ 없는 존재자라는 점, 다시 말해 아무런 특성도 없는 존재자라는 점에서 인권의 담지자인 또는 인권의 ‘주체’인 사람은 추상적 개인이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인권 선언이 보편적 선언으로서 효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추상성 덕분이다. 만약 여기에 어떤 제한이 붙는다면, 가령 인간은 그가 가난한 한에서, 또는 생산수단이 없는 존재자인 한에서, 약소국 국민이거나 피식민지인인 한에서만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가진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보편적인, 따라서 혁명적인 성격을 지닐 수 없을 것이다. 데리다가 ‘데모스의 보편성’에 대해 말할 때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근대적 개인,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시민으로서의 개인이 지닌 이러한 보편성이다.

하지만 이것은 근대적 개인이 말 그대로 사회에서 독립해 있는 일종의 인간학적 원자(原子)들로서 실존함을 뜻하지 않는다. 앞에서 우리가 서양 자유주의의 기본 공리라고 불렀던 것은 기술적(descriptive) 의미가 아니라 규범적(normative)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Catherine Audard, Qu'est-ce que le liberalisme?, op. cit. 참조.] 때로 개인의 독립성을 기술적인 의미로 이해하는 경우도 있으나(고전적인 사회계약론의 근간 개념 중 하나인 ‘자연상태’ 개념에는 이러한 애매성이 함축돼 있다), 이는 인간이 사회적 관계 바깥에서는 생존하기 어렵고 인간으로 성립하기도 어렵다는 점을 간과할 뿐만 아니라(18세기 이래 서양의 문학에서 종종 거론되어온 ‘늑대인간’의 이야기는 이러한 난점의 문학적 표현이다) 개인들 사이의 실제적인 불평등(신체적 능력만이 아니라 재산이나 권력, 지능 등에서의 불평등)의 존재도 설명하기 어렵게 만든다.

실제로 근대사회의 개인들은 전근대사회와 상이한 조직화 및 사회화 과정에 따라 형성되고 재생산된다. 이것을 포괄적으로 개인화(individualization) 과정이라고 부를 수 있을 텐데, 이때 개인화 과정이란, 개인들이 원초적으로 주어진 존재자가 아니라 어떤 과정을 통해 형성되고 변형되고 또 재생산되는 존재자들이라는 점을 뜻한다. 따라서 근대적 개인, 보편적인 추상적 개인의 이면에는, 이러한 개인은 생산되고 재생산되는 개인이며 특정한 메커니즘의 생산물이라는 사실이 놓여 있다. 근대적 개인에 대한 이해가 완결성을 얻기 위해서는 이러한 이면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프랑스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가 자신의 이데올로기론에서 설명하고자 한 것이 바로 이러한 이면이었다고 할 수 있다.[이는 또한 미셸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보여주려고 했던 점이기도 하다. {감시와 처벌}에서 푸코는 근대 자연권 이론 및 사회계약론의 가정과 달리, 개인은 국가 및 사회에 앞서 존재하는 자율적인 존재자가 아니라 권력에 의해 생산되는 또는 ‘제조되는’ 존재자라는 점을 밝히고자 한다. “규율ㆍ훈련을 바탕으로 하는 권력은 사람들의 힘을 감소시키기 위해서 힘을 묶어두는 것이 아니다. 그 힘들을 전체적으로 증가시키고 활용할 수 있도록 묶어두는 것이다. 권력은 자신에게 복종하는 모든 것을 일률적으로, 그리고 전체로서 굴복하게 만드는 대신 분리하고 분석하고 구분하며, 그 분해 방법은 필요하고 충분할 정도의 개체성에 이를 때까지 계속 추진된다. 유동적이고 혼란하며 무익한 수많은 신체와 다량의 힘을 개별적 요소들의 집합체―분리된 작은 독방들, 조직적인 자치제, 단계적으로 생성되는 개체의 동일성과 연속성, 조합적인 부분들―로 만들게끔 ‘훈육시킨다.’ 규율은 개인을 ‘제조한다’(fabrique). 즉 그것은 개인을 권력 행사의 객체와 도구로 간주하는 권력의 특정한 기술이다.”, {감시와 처벌}, 오생근 옮김, 나남, 1994, 255~56쪽. 강조는 푸코.]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였지만,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 개념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프로이트와 라캉의 정신분석학과 스피노자 철학에 의지하여 이를 개조하려고 했다. 이러한 개조의 핵심은 두 가지로 집약될 수 있다.

첫째, 알튀세르는 가상 내지 허위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와 현실 내지 진실을 단순히 대립시키는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 개념의 한계를 넘어 이데올로기의 실재성(및 더 나아가 물질성)을 개념화하려고 했다. 이데올로기를 단순한 가상 내지 허위의식으로만 이해하게 되면 어떻게 그러한 가상(예컨대 종교라든가 마르크스가 말하는 물신숭배(fetishism) 같은 것)이 지속적으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지, 또 사회적 현실을 구조화하는 힘을 갖는지 설명하기 어렵다.

둘째,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의 핵심은 종속적 주체 형성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흔히 자유로운 것으로 간주되는 개인들 내지 주체들이 바로 그 개인들 내지 주체들로서 존재하는 양식이 사실은 계급 지배의 메커니즘과 내재적으로 연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개인적인 실존 양식, 개인성 그 자체가 지배 계급의 권력에 대한 예속을 전제로 한다면,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생산양식에 대한 분석을 넘어서 이데올로기적 권력 또는 상징적 권력에 대한 분석을 필수적인 요소로 포함할 수밖에 없다. 알튀세르는 특히 호명(interpellation) 개념을 중심으로 이러한 종속적인 주체 생산의 메커니즘을 해명하려고 했다.[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 및 호명 이론에 대한 좀더 자세한 논의는, 진태원, 「알뛰쎄르와 라깡: “또는” 알뛰쎄르의 유령들 I」, 김상환ㆍ홍준기 엮음, {라깡의 재탄생}, 창비, 2002 및 진태원, 「스피노자와 알튀세르에서 이데올로기의 문제—상상계라는 쟁점」, {근대철학} 제3권 1호, 2008을 참조하기 바란다.]

따라서 이것은 자유주의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철학적 근대성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제기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자유로운 개인을 뜻하는 자유로운 주체라는 범주는 칸트 이래 근대 철학의 핵심 원리로 존재해왔는데, 개인 내지 주체라는 것이 이데올로기적 호명 메커니즘의 산물이라면, 개인 내지 주체는 정의상 종속적인 주체인 셈이며 근대철학의 가정과는 달리 본질적으로 종속화(assujettissement)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반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은 심각한 난점을 함축하고 있다. 그의 이데올로기론은 현대 인문사회과학에서 가장 혁신적인 이론 중 하나로 널리 찬사를 받았지만, 동시에 격렬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는 이러한 이론을 전제할 경우 평등하고 자유로운 주체 내지 개인의 가능성을 좀처럼 사고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만약 모든 개인 내지 주체가 정의상 이데올로기적 호명의 산물이라면, 따라서 종속적인 개인 내지 주체라면, 그렇다면 해방의 주체, 평등하고 자유로운 개인들을 어떻게 사고할 수 있는가?[이는 특히 영미권 맑스주의자들이 알튀세르에게 제기한 주요한 비판 논점이었으며, 테리 이글턴이나 슬라보예 지젝 같은 현대 비평가들에 의해 되풀이되고 있다. 이 비판이 특히 잘 나타난 책으로는 Slavoy Zizek,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Verso, 1989;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이수련 옮김, 인간사랑, 2001 참조. 이러한 비판에 맞서 알튀세르 이데올로기론의 강점을 옹호하려는 시도로는, 진태원, 「스피노자와 알튀세르에서 이데올로기의 문제: 상상계라는 쟁점」, {근대철학}, 앞의 글을 읽어보기 바란다.]

실제로 알튀세르 이데올로기론의 밑바탕에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핵심을 법 이데올로기로 파악하는 관점이 놓여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비판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알튀세르가 말하는 법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바로 평등과 자유 같은 것이다. “법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개인은 법인으로서 법률적으로 자유롭고 평등하며 의무가 있는 법적 인격이다. ... 법 이데올로기도 외관상 이와 유사한 담론을 펼치지만 사실은 전혀 다르다. 그것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인간은 본래(본성상, par nature) 자유롭고 평등하다. 따라서 법 이데올로기에서는 (법인들이 아니라) ‘인간들’의 자유와 평등에 ‘토대가 되는’ 것이 법이 아니라 자연이다.”[루이 알튀세르, {재생산에 대하여},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7, 121~122쪽. 강조는 알튀세르.] 따라서 알튀세르에게 ‘평등’과 ‘자유’는 법 이데올로기이며, 이러한 법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이 강제 없이도 자발적으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속으로 들어가고 또 그것이 ‘정상적으로’ 재생산되도록 그 체계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게끔 해준다.

그렇다면 과연 이데올로기론을 따를 경우, 우리는 항상 종속적이고 예속적인 개인 내지 주체를 전제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현대 이데올로기론, 더 나아가 현대 정치철학의 핵심 과제 중 하나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제시하는 데 있다. 그리고 현대 정치철학의 논의를 주도하는 사상가들, 곧 에티엔 발리바르나 자크 랑시에르, 알랭 바디우(Alain Badiou) 등과 같은 철학자들이나 슬라보예 지젝(Slavoy Zizek)이나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같은 이론가들의 저작에서 우리는 알튀세르가 남겨 놓은 질문에 대한 상이한 답변들을 발견할 수 있다.[발리바르가 알튀세르의 사상, 특히 그의 이데올로기론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에티엔 발리바르, 「비동시대성: 정치와 이데올로기」, {알튀세르와 마르크스주의의 전화}, 윤소영 옮김, 이론, 1993을 참조할 수 있다. 알튀세르가 발리바르 이외에 에르네스토 라클라우 같은 포스트맑스주의 정치이론가나 지젝을 비롯한 슬로베니아 학파, 또는 주디스 버틀러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알튀세르 효과}에 수록된 다음과 같은 글들이 참조할 만하다. 서관모, 「알튀세르에게서 발리바르에게로: 이데올로기의 문제설정과 정치의 개조」; 최원, 「인셉션인가, 호명인가? 슬로베니아 학파, 버틀러, 알튀세르」; 김정한, 「알튀세르와 포스트맑스주의: 라클라우와 지젝」, 진태원 엮음, {알튀세르 효과}, 그린비, 2011.]

이 문제를 여기서 길게 다룰 수는 없기 때문에, 다시 앞의 인용문으로 돌아가 데리다가 말하는 “아무개의 계산 불가능한 독특성”의 의미에 대해 잠시 살펴보기로 하자. 이 표현이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우리는 데리다의 다른 대담에서 찾을 수 있다. 데리다는 {비밀에 대한 취향}이라는 대담집에서 민주주의의 본질적인 권리 중 하나로 “답변하지 않을 권리”를 꼽은 바 있다.[Jacques Derrida & Maurizio Ferraris, A Taste for the Secret, Polity, 2002, p. 26.] 곧 민주주의에서는 누구에게나 답변의 권리, 반론의 권리가 보장되어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며 동시에 답변하지 않을 권리도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답변하지 않을 권리’란 법적인 문제에서 불리한 진술을 거부하거나 침묵할 수 있는 권리 같은 특수하고 제한된 권리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답변하지 않을 권리란 그것에 앞서 어떤 정체성을 갖지 않을 권리, 나에게 주어지거나 강제된 정체성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뜻한다. 이것은 어떤 정치 공동체의 동등한 구성원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의미하는 보편성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아무런 공동체에도 속하지 않을 권리, 익명적인 누군가로 존재할 권리, 비밀을 지닌 존재자로 살아갈 권리를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 데리다는 또한 “나는 가족의 일원이 아니다”(je ne suis pas de la famille)라고 말한다. 이것은

 

‘나는 나 자신을, 가족에 대한 나의 소속을 기초로 하여 정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하지만 이는 좀더 비유적으로는 내가 어떤 집단의 일부도 아니라는 것, 나는 나 자신을 어떤 언어 공동체, 국민 공동체, 정치 정당 내지 어떤 종류의 집단이나 파벌, 어떤 철학적이거나 문학적인 학파와 동일시하지 않음을 뜻하기도 합니다. ... 나를 ‘당신들 중 하나’로 간주하지 말라, ‘나를 당신들 가운데 하나로 셈하지 말라’ 나는 항상 나의 자유를 유지하고 싶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에게 이는 독특하기 위한, 타자이기 위한 조건일 뿐만 아니라 타자들의 독특성 및 타자성과 관계를 맺기 위한 조건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이 가족의 일원일 때 그는 자신을 무리 속에서 잃고 말 뿐만 아니라 타자들 역시 잃고 맙니다. 타자들은 단순히 장소들이나 가족 기능들, 곧 집단, 학파, 민족 내지 동일한 언어를 말하는 주체들의 공동체를 구성하는 유기적 총체 속에서의 자리들 내지 기능들이 되고 맙니다.

[Jacques Derrida & Maurizio Ferraris, A Taste for the Secret, 같은 곳.]

 

그렇다면 이것은 일체의 정치적 소속, 일체의 정체성을 거부하는 무정부주의적 주장을 뜻하는 것일까?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은 이유는, “아무개의 계산 불가능한 독특성”이라는 데리다의 개념, 또는 “나는 가족의 일원이 아니다”라는 수행문적 주장은 정치 공동체에 대한 참여를 단순히 거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부연한다. “가족의 성원이 되지 않으려는 나의 바람은 가족의 성원이 되려는 나의 바람이라는 사실에 의해 전제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어떤 공동체에 속하려는 욕망, 소속 자체에 대한 욕망은 우리가 소속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함축합니다. 만약 내가 실제로 가족의 일원이라면, 나는 ‘나는 가족의 일원이 되고 싶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Jacques Derrida & Maurizio Ferraris, 같은 책, p. 28—강조는 데리다.]

따라서 ‘나는 가족의 일원이 아니다’라는 수행문적 주장은 오히려 일차적으로 모든 개인은 항상 이미 어떤 정체성을 갖고 있으며, 어떤 소속을 지닐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나는 가족의 일원이 아니다’라는 주장은 그러한 정체성이나 소속을 순순히 받아들이기보다는 비판하고 거부하려는 태도를 함축한다(데리다가 이 문장은 사실이나 존재 방식을 서술하는 문장이 아니라 수행문(performative)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는 그러한 정체성이나 소속이 폐쇄나 동질화의 위험, 곧 개인들을 “단순히 장소들이나 가족 기능들, 곧 집단, 학파, 민족 내지 동일한 언어를 말하는 주체들의 공동체를 구성하는 유기적 총체 속에서의 자리들 내지 기능들”로 만들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가족의 일원이 아니다’라는 주장 속에는 모든 개인이 가질 수밖에 없는 정체성과 소속이 좀더 개방적이고 좀더 자유로운, 좀더 평등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정치적 바람, 정치적 요구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데리다가 다른 저작에서 사용한 표현을 빌린다면, 이는 “도래할 민주주의”(démocratie à venir)에 대한 요구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특히 J. Derrida, Voyous, Galilée, 2003 참조. 이 책은 {불량배들}(이경신 옮김, 휴머니스트, 2003)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돼 있지만, 번역이 좋지 않으므로 불어본이나 다른 외국어본을 참조해야 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나는 가족의 일원이 아니다”라는 수행문은 또 다른 의미에서 무정부주의적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문장은 어떤 정체성과 어떤 소속, 따라서 어떤 공동체가 민주주의적인 공동체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 공동체는 무정부주의에 기초를 두어야 함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물론 이 때의 무정부주의란, 흔히 비난의 의미로 거론되는 무정부주의와는 거리가 있는 개념이다. 그것은 최근 랑시에르와 발리바르가 각자 이론화한 의미에서의 아나키(anarchy), 다시 말하면 “토대 없음”, “아르케 없음”이라는 뜻에서 안-아르케(an-archē)를 가리킨다. J. Rancière, La mésentente, op. cit.; {불화}, 앞의 책 및 E. Balibar,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PUF, 2010을 각각 참조. 그리스어로 아르케는 어떤 시원(始原)과 동시에 원리라는 의미를 지닌다. 정치적인 의미에서 본다면 아르케는 어떤 정치 공동체를 기초 짓는 근거 내지 토대, 또는 본래적인 의미에서의 권위를 뜻한다. 따라서 “토대 없음”으로서의 안-아르케가 의미하는 것은, 첫째, 민주주의에는 본질상 자연적이거나 객관적인 토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혈통이나 신성(神性) 또는 무력이나 부, 아니면 (지적) 능력 같은 특정한 어떤 기초에 근거를 두게 되면 민주주의는 데모스의 권력(demokratia)이 아니라, 그러한 기초를 보유한 어떤 소수 집단의 권력이자 통치, 곧 과두제로 변질된다. 랑시에르가 “모든 국가는 과두제 국가다”(J. Rancière, La haine de la démocratie, Éditions la Fabrique, 2005, p. 79; {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 허경 옮김, 인간사랑, 2011, 154쪽. 번역은 약간 수정)라고 일갈했던 것은 이 때문이다. 둘째, 그 말은, 민주주의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토대는 (철학적으로 말한다면) 부정적인 토대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부정적’이라는 것은 그러한 토대가 창조된 것 내지 발명된 것이지, 실체적이거나 객관적인 것이 아님을 뜻한다. 근대 민주주의가 추상적 개인의 보편성에 기초를 둔다고 했을 때, 여기서 기초의 역할을 하는 보편성은 인간이라는 존재자의 자연적 본성(생물학적 종으로서 인간)이나 신학적 속성(곧 ‘신의 모방’으로서 인간), 또는 존재론적 특성(하이데거가 말하는 현존재(Dasein)까지 포함하여)에 함축된 것이 아니다. 이러한 본성이나 속성 또는 특성 어디에도 민주주의적 인간의 보편성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객관적 토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보편성은 (말년의 알튀세르가 유고에서 말한 것처럼) 강한 의미에서 우발적인 것이다. 곧 그러한 보편성은 억압에 맞서 저항하고 지배에 맞서 자신들의 권리를 쟁취하려는 인간들의 집합적 행위를 통해 발명된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데리다의 관점에 따를 경우 어떤 정치 공동체가 얼마나 민주주의적인지 측정하는 한 가지 기준은 그 정치체가 얼마나 많은 무정부주의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지, 얼마나 무정부주의의 제도화에 성공하고 있는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근대 민주주의의 토대를 이루는 개인, 보편적인 추상적 개인은 동시에 아무개의 계산 불가능한 독특성을 포함하며 또 포함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개인은 좀더 평등하고 좀더 보편적인 정체성을 가질 권리를 지니면서 동시에 일체의 정체성들로 완전히 포섭되거나 환원될 수 없는 계산 불가능한 아무개로, 다른 사람이 아닌 오직 나 자신으로 존재할 권리 역시 지니고 있다. 개인이란 이러한 두 가지 권리의 변증법(물론 이러한 변증법은 기원도 없고 목적도 없는 무한한 변증법, 곧 알튀세르가 말한 의미에서 과잉결정된(surdéterminée) 변증법일 것이다) 속에 존재하는 어떤 것, 그러한 변증법의 공간 속에서 구성되고 재구성되고 또 전환되는 어떤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적인 사회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우리 사회에 속한 개인들이 얼마나 “나는 가족의 일원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개인들인지에 달려 있다. 보편적이거나 독특한 것이 아니라, 독특하면서 보편적인, 보편적이면서 독특한, 개인들, ‘나’들인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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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le 2011-11-10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예중앙 겨울호는 꼭 사봐야겠는데요.

balmas 2011-11-10 20:44   좋아요 0 | URL
줄님 오랜만이세요. 문예중앙 편집위원들이 들으면 좋아하겠습니다.^^

박하순 2011-11-26 0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 읽었습니다! ^^

balmas 2011-11-26 10:59   좋아요 0 | URL
박 위원장님 안녕하세요?^^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 궁금하네요. 잘 읽으셨다니 기쁘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합니다. ㅎㅎ

박하순 2011-11-27 0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전 뭐 그럭저럭 지냅니다. ㅎ
 

이번 달 중순쯤 출간될 [알튀세르 효과] "엮은이 서문"을 올립니다. 이 책을 처음 구상했던 때가 2009년 초였으니까

약 2년 반의 시간이 흘렀네요. 외국 학자 9명과 국내 학자 10명, 무려 19명 필자의 글을 수록한 800쪽이 넘는

방대한 책이 이제 거의 마무리를 짓고 출간을 앞두고 있으니까 감회가 남다릅니다. 

좋은 책의 출간을 애써준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특히 필자들과 역자들, 그린비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아래의 글은 최종 교정이 끝난 글이 아니기 때문에 인용을 불허합니다. 토론 및 인용을 원하는 분들은

책에 수록된 출판본을 대상으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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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알튀세르 효과, 효과 속의 알튀세르

 

 

오늘날 한국의 독자들에게 루이 알튀세르(1918~1990)라는 이름이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엮은이가 약 2년 반 전에 알튀세르에 관한 공동 논문집을 기획하면서 계속 품고 있었던 질문이다.

아마도 알튀세르는 맑스주의 철학자 중에서, 또 프랑스 철학자 중에서도 세대에 따라 가장 인지도 편차가 큰 인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40대 이상의 독자들에게 그는 80년대 말과 90년대 초 한국 인문사회과학계를 뜨겁게 달구었던 이른바 “한국사회성격논쟁”과 “맑스주의 위기론”의 중심에 있던 인물로 기억될 것 같다. 당시 웬만한 인문사회과학도라면 누구나 그의 책을 한 권쯤 소장하고 있었고, 과잉결정(또는 중층결정)이나 호명 같은 그의 주요 개념들은 가장 널리 운위되던 지적 담론 중 하나였다. 반면 오늘날 20대 독자에게 그는 에티엔 발리바르나 슬라보예 지젝 또는 자크 랑시에르나 알랭 바디우의 이름과 함께 간혹 거명되는 이름 중 하나일 것 같다. 요컨대 구세대 독자에게 알튀세르는 한때 우리나라에서 잠깐 지적으로 유행했으나 이제는 잊혀진 추억 속의 철학자라면, 신세대 독자에게 그는 오늘날의 지적 담론을 이해하기 위한 먼 배경 중 하나, 이를테면 “기타 등등” 속에 포함될 만한 나열의 대상 중 하나가 된 셈이다.

그렇다면 왜 뜬금없이, 이제는 추억 속의 인물이 되었거나 아니면 익명에 가까운 인물이 된 철학자에 대해 이런 거창한 논문집을 기획하게 된 것일까? 아마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런 의문을 품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 논문 모음집은 알튀세르 사망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마련되었다는 것이 일차적인 답변이 될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당대 프랑스 지성계를 대표하는 철학자 중 한 사람이었던 알튀세르는 1980년 11월 16일 정신착란 상태에서 부인을 목졸라 살해한 뒤 여러 정신병원에서 요양생활을 하다가 1990년 사망했다. 따라서 저명한 철학자나 사상가를 기념하기 위해 탄생 몇 주년, 사망 몇 주년을 따지는 것이 널리 통용되는 방법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알튀세르라는 철학자, 20세기 후반의 맑스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 중 한 사람이 사망한지 20년이 되는 해를 맞아 그에 관한 기념 논문집을 기획하는 게 특별히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 논문집을 마련하게 된 이유가 단지 그것뿐이라면, 굳이 왜 알튀세르에 관한 논문집이냐 하고 의문을 가질 만한 사람들도 있을 듯하다. 더욱이 이런 의문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는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거나 그에 관해 무관심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그를 좋아하고 그의 사상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을 법하다. 사실 이 후자의 사람들이 그런 의문을 품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지극히 정당하고 또 알튀세르 자신의 사상에 부합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철학은 자율적인 것이 아닐뿐더러 그 자체로는 무에 불과하며, 철학은 소멸되는 것을 자신의 소명으로 한다고 역설했던 사람이 바로 알튀세르이기 때문이다.[“[철학] 범주들의 기능은 이론 영역 내부에서, 참이라고 선언된 관념들과 거짓이라고 선언된 관념들 사이에서, 과학적인 것과 이데올로기적인 것 사이에서 “경계선을 그리는” 데 있다. ... 모든 철학은 주요한 경계선을 긋는 데서 성립하며, 이러한 경계선 긋기를 통해 철학은, 자신과 대립하는 경향을 표상/대표/상연하는 철학들의 이데올로기적 통념들을 몰아낸다. ... 여기서 철학사는 자신이 산출하는 무 속에서 무화된다. 이러한 무는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무는 과학적 실천, 과학적인 것과 그것의 타자, 곧 이데올로기적인 것의 운명을 쟁점으로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 이렇게 되면 철학은 역사를 지니고 있지만 거기에서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이해 가능해진다. 왜냐하면 실존하는 철학 범주들을 전치하거나 변형하고, 따라서 철학 담론 ... 속에서 이러한 변화들을 산출하는 각각의 철학적 개입은 철학적인 무(우리는 이것이 되풀이된다는 것을 앞에서 살펴봤다)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경계선은 실제로는 아무것도 아니며, 심지어 하나의 선도, 분할의 흔적도 아니며, 나뉘어진다는 단순한 사실, 따라서 [관념론과 유물론 사이에] 거리를 냄으로써 생겨난 공백이기 때문이다.” 루이 알튀세르, 「레닌과 철학」, 박노자 외, 󰡔레닌과 미래의 혁명󰡕, 그린비, 2008, 318-319쪽. 강조는 알튀세르.] 그러니 단순히 생몰 연대만을 이유로 그에 관한, 거창하다면 거창한 논문집을 기획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알튀세르 자신의 지적 원칙, 철학적 정신에 어긋나는 일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묻거니와, 왜 오늘날 이처럼 여러 사람들이 알튀세르에 관한 공동 논문집에 참여하게 된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엮은이를 비롯해서 기꺼이 이 기획에 참여할 뜻을 밝힌 여러 필자들이 암묵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생각 때문일 것 같다. 그것은 알튀세르의 사상에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상적 효력을 지니고 있고 현재를 사고하기 위해 꼭 필요한 요소들이 적어도 몇 가지 존재한다는 생각이다. 사람들에 따라 그러한 요소들이 어떤 것인가에 관해서는 당연히 이견이 존재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데올로기론이야말로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고, 또 다른 사람은 과잉결정 (및 과소결정) 개념을 중심으로 한 변증법의 쇄신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또는 마키아벨리에 대한 매우 독창적인 독해야말로 오늘날 가장 의미 있는 알튀세르 사상의 유산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엮은이로서는 알튀세르에 관한 공동 논문집에 참여해준 필자들이 그가 여전히 우리에게 무언가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해줄 수 있고, 또 우리 역시 그의 사상에 관해 무언가 새로운 점을 밝혀낼 수 있다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고 믿는다.

또한 이것은 이 논문집의 필자들만의 생각은 아니라고 믿는다. 실제로 외국의 여러 학자들, 오늘날 사상계를 주도하는 상당수의 이론가들에게서도 이러한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일례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슬로베니아 출신의 이론가 슬라보예 지젝은 자신의 출세작인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1989) 첫 페이지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우리의 첫 번째 테제는 오늘날 지적 무대의 전경을 차지하고 있는 대논쟁인 하버마스-푸코 논쟁이 또 다른 대립, 이론적으로 훨씬 광대한 알튀세르-라캉 논쟁을 은폐하고 있다는 것이 되리라. 알튀세르 학파의 갑작스런 실추에는 무언가 수수께끼 같은 게 있다. 이는 이론적 패배의 관점에서는 설명될 수 없다. 이는 그보다는 알튀세르의 이론 내에는 마치 쉽게 잊혀지고 “억압”되어야 할 어떤 외상적 핵이 존재하기 때문인 듯하다.”[Slavoy Zizek,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Verso, 1989, p. 1(󰡔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이수련 옮김, 인간사랑, 2002, 20쪽). 번역은 다소 수정했다.] 당시에는 신출내기 이론가의 다소 엉뚱한 도발처럼 여겨졌던 이러한 주장은, 사실 그 이후 꽤 오랫동안 지젝의 이론적 작업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 중 하나가 되었고, 지젝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점차 새로운 반향을 얻게 되었다.

사실 1989년 당시만 하더라도 알튀세르와 그의 동료들의 작업은 현대 사상계의 무대에서 거의 완전히 퇴장한 것처럼 보였다. 알튀세르 자신은 1980년 부인을 살해한 뒤 공적인 무대에서 자취를 감췄고 그의 제자들 중 몇몇(니코스 풀란차스, 미셸 페쇠)은 자살로 비극적인 생을 마감했다. 1970년대 영미권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발리바르의 자본주의 분석이나 마슈레의 문학생산이론은 당시에는 더 이상 아무런 새로운 논의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사실 알튀세르 및 알튀세리엥들은 미국보다는 영국의 좌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것도 1970년대 중반 이후에는 상당 부분 영향력을 상실했다.] 그 대신 80년대 이후 데리다와 푸코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포스트구조주의” 내지 “포스트모더니즘”이 영미 이론계의 전경을 차지했다.[“포스트모더니즘”이나 “포스트구조주의”라는 용어법이 과연 현대 프랑스철학을 지칭하기에 적절한 것인가 여부는 중요한 논의 주제 중 하나다. 영미권에서는 현대 프랑스철학에 부정적인 이들이나 그것을 지지하는 이들이나 모두 이러한 용어법을 즐겨 사용하지만, 실제로 리오타르를 제외한 다른 프랑스철학자들은 이 용어법들로 자신들이 지칭되거나 분류되는 것에 완강히 저항한 바 있다. 국내에서도 대부분 이러한 영미식 용어법을 무비판적으로 사용하고 있으나, 철학의 내용 자체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나 이론의 정치에 대한 고려를 위해서도 이 용어법 자체에 대한 비판적 검토는 중요한 이론적 과제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는 알튀세르에 대한 이해나 수용의 문제와도 무관하지 않다. 영미권 학계에 미친 프랑스철학의 영향에 관해서는 특히 Yves Cusset, French Theory: How Foucault, Derrida, Deleuze, & Co. Transformed the Intellectual Life of the United State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08 참조.] 또한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곧이어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연쇄적으로 몰락한 뒤에는 맑스주의 자체가 이론의 영역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알튀세르의 비극적 퇴장은 맑스주의의 종말에 대한 환유적 표현이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젝의 예언적인 선언 이후 놀랍게도 알튀세르 및 그와 함께 작업했던 철학자들의 사상은 다시 현대 사상계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지젝과 발리바르, 자크 데리다, 주디스 버틀러 등의 작업을 통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은 현대 사상의 가장 뜨거운 쟁점 중 하나로 부각되었다.

가령 지젝은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과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을 모르나이다],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같은 일련의 저작들(어떤 의미에서는 그의 저작 전체)을 통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에 대한 라캉주의적 대안을 제시하는 데 몰두했다. 그의 작업의 이론적 성과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릴 수 있으나,[엮은이가 보기에 지젝의 해석은 알튀세르 이론(특히 그의 이데올로기론)의 핵심을 충분히 해명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가 대안으로 제시하는 라캉주의적 이데올로기론은 알튀세르 자신의 이론에 오히려 미달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좀더 자세한 논의는 진태원, 「알튀세르와 스피노자에서 이데올로기의 문제: 상상계라는 쟁점」, 󰡔근대철학󰡕 3권 1호, 2008를 참조하고 슬로베니아 학파와 버틀러의 알튀세르 해석에 대한 비판적 논의로는 이 책 4부에 수록된 최원의 글을 참조.]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현대 인문사회과학의 중심 쟁점으로 부각시키는 데 그의 작업이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또한 발리바르는 맑스ㆍ엥겔스에서 알튀세르에 이르는 역사적 맑스주의의 아포리아의 근원에는 이데올로기 개념의 동요가 존재한다는 점을 매우 세심하고 포괄적인 분석을 통해 입증했으며,[에티엔 발리바르, 「맑스주의에서 이데올로기 개념의 동요」, 󰡔대중들의 공포󰡕, 서관모ㆍ최원 옮김, 도서출판b, 2007 참조.] 이러한 아포리아에 대한 해법으로 국민형태(forme nation)라는 개념을 제시한 바 있다. 이 개념은 알튀세르 이데올로기론의 핵심을 이루는 이데올로기의 물질성 개념과 종속적 주체 생산으로서의 호명 개념[이 점에 관해서는 이 책 3부에 수록된 파스칼 질로의 글 참조. 또한 진태원, 「알뛰쎄르와 라깡, ‘또는’ 알뛰쎄르의 유령들 I」, 김상환ㆍ홍준기 엮음, 󰡔라깡의 재탄생󰡕, 창비, 2002와 「알튀세르와 스피노자에서 이데올로기의 문제: 상상계라는 쟁점」, 앞의 글을 각각 참조.]을 국민(ㆍ사회)국가에 대한 분석으로 확장함으로써, 국민과 국민주의/민족주의 및 인종주의에 관한 맑스주의의 맹목(이것은 사실 맑스주의 이데올로기론의 아포리아에서 유래한다)을 극복할 수 있는 한 가지 길을 제시해주고 있다.[발리바르의 국민형태 개념 및 국민주의/민족주의 이론에 대해서는 특히 E. Balibar & I. Wallerstein, Race, nation, classe: Les identités ambiguës, Éditions La Découverte, 1988(󰡔인종, 국민, 계급: 애매한 정체성들󰡕, 그린비, 근간) 및 「국민적 인간」, 󰡔우리, 유럽의 시민들?󰡕, 진태원 옮김, 후마니타스, 2010을 각각 참조. 국민사회국가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특히 에티엔 발리바르, 󰡔정치체에 대한 권리󰡕, 진태원 옮김, 후마니타스, 2011을 참조.] 그밖에도 발리바르는 “평등자유”(égaliberté) 개념, 시민권 헌정 이론, 시민다움(civilité)의 정치철학 등을 통해 알튀세르의 사상 또는 “사유양식”(mode de la pensée)을 비판적으로 계승하고 있다.

다른 한편 자크 랑시에르와 알랭 바디우는 오늘날 프랑스와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이론계에서 가장 널리 읽히고 논의되는 철학자들이다. 이 두 사람은 온전한 의미에서 알튀세르의 제자라거나 알튀세리엥으로 분류하기는 어려운 철학자들이다. 랑시에르는 발리바르, 마슈레, 로제 에스타블레(Roger Establet)와 함께 [“자본”을 읽자]의 공동 저술에서 참여했으나 68운동 이후 알튀세르와 결별했으며, 1974년에는 “스승 살해”라는 평가를 받은 [알튀세르의 교훈]을 출간하면서 알튀세르와 사상적으로 완전한 단절을 시도했다.[Jacques Rancière, La leçon d'Althusser, Gallimard, 1974. 랑시에르의 알튀세르 비판의 논점들에 대해서는 이 책 4부에 수록된 박기순의 글 참조.] 바디우는 [“자본”을 읽자] 공동 저술에 참여하지 않았고 알튀세르의 제자라고 할 수도 없는 사람이었지만, [맑스를 위하여]와 [“자본”을 읽자]가 출간된 이후 알튀세르 작업의 대의에 공감을 표명했으며, 1966~67년 당시 알튀세르가 조직한 비공개 연구 모임에 참여하기도 했다.[알튀세르 유고의 편집자 중 한 사람인 프랑수아 마트롱(François Matheron)에 따르면, 1966~67년 알튀세르는 스피노자 철학에 기반을 두고 바디우, 발리바르, 이브 뒤루(Yves Duroux), 마슈레 등과 함께 “우리의 󰡔윤리학󰡕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진정한 철학 작품”을 공동으로 저술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변증법적 유물론의 요소들󰡕(Éléments du matérialisme dialectique)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책은, 알튀세르의 다른 많은 구상과 마찬가지로 출간되지 못했다. “Présentation”, in L. Althusser, Ecrits philosophiques et politiques, vol. II, op. cit. 참조.] 하지만 마오주의로 전향한 이후 그 역시 알튀세르에 대한 비판가로 전향했다. 이후 이 두 사람이 각자 독자적으로 개척한 사상의 경로는 알튀세르 자신의 문제설정과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이지만, 이들의 사상 속에는 여전히 알튀세르의 개념들 내지 문제설정의 효과가 작용하고 있다.[바디우와 알튀세르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 책 4부에 수록된 서용순의 글을 참조하고, 랑시에르 사상에 미친 알튀세르의 문제설정, 특히 이데올로기론의 효과에 대해서는 E. Balibar, “Interview with Étienne Balibar”, in Beth Hinderliter et al. eds., Communities of Sense: Rethinking Aesthetics and Politics, Duke University Press, 2009 참조.]

포스트 맑스주의의 제창자로 유명한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샹탈 무페의 정치철학 역시 알튀세르의 맑스주의를 비판적으로 극복하려는 노력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두 사람 모두 알튀세르의 문제설정에서 출발했으나,[이 점에 대해서는 특히 Ernesto Laclau, Politics and Ideology in Marxist Theory, NLB, 1977을 참조할 수 있다.] 그람시의 영향 아래 알튀세르의 구조적 맑스주의에 대한 대안을 모색했으며,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포스트맑스주의였기 때문이다.[에르네스토 라클라우ㆍ샹탈 무페,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 이승원 옮김, 후마니타스, 근간 참조.] 실제로 이들의 작업에서는 과잉결정이나 절합(articulation), 이데올로기 같은 알튀세르 사상의 주요 개념들이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알튀세르의 사상에 대한 이해 없이 현대 사상의 주요 흐름(적어도 그 한 부분)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울러 1992년 알튀세르의 ‘자서전’을 필두로 알튀세르의 유고들이 출간되고 여러 나라에서 이 유고들이 속속 번역되면서 알튀세르 사상에 대해 새로운 관심들이 생겨나고 있다.[알튀세르의 유고는 프랑수아 마트롱을 중심으로 얀-물리에르 부탕(Yann-Moulier Boutang)과 올리비에 코르페(Olicier Corpet)의 편집 아래 2011년 현재까지 총 11권이 출간되었다. 이 유고는 크게 네 종류로 분류될 수 있다. (1) 자서전적인 저술: L. Althusser, L'avenir dure lontemps, Stock/IMEC, 1992(수정증보판, 2007)(루이 알튀세르,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권은미 옮김, 이매진, 2008); Journal de captivité: Stalag XA, 1940-1945, Stock/IMEC, 1992 (2) 정신분석학에 관한 저술: Ecrits sur la psychanalyse, Stock/IMEC, 1993; Psychanalyse et sciences humaines, Pocket, 1996 (3) 정치와 철학에 관한 저술: Sur la philosophie, Gallimard, 1994(󰡔철학에 대하여󰡕, 서관모ㆍ백승욱 옮김, 동문선, 1995); Ecrits philosophiques et politiques, vol. 1, Stock/IMEC, 1994(부분번역: 󰡔철학과 맑스주의󰡕, 서관모ㆍ백승욱 옮김, 새길, 1996); Ecrits philosophiques et politiques, vol. 2, Stock/IMEC, 1995(󰡔마키아벨리의 가면󰡕, 오덕근ㆍ김정한 옮김, 이후, 2001[이 책은 󰡔철학ㆍ정치 저작집󰡕 2권에 수록된 알튀세르의 미완의 저서 󰡔마키아벨리와 우리󰡕(Machaivel et nous)를 영역본을 대본으로 옮긴 것이다]); Sur la reproduction, PUF, 1995(󰡔재생산에 대하여󰡕,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7); Politique et Histoire, de Machiavel à Marx: Cours à l'Ecole normale supérieure de 1955 à 1972, Seuil, 2006(󰡔정치와 역사: 알튀세르 정치철학 강의록󰡕, 진태원 옮김, 후마니타스, 근간) (4) 서간집: Lettres à Franca (1961–.1973), Stock/IMEC, 1998; Lettres à Hélène, Grasset, 2011.] 이는 구조적 맑스주의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1960~70년대와 사뭇 다른 시각에서 알튀세르 사상을 다루고 있는 연구서들이 꾸준히 출간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여기에는 프랑스와 영미권 및 유럽의 알튀세르 연구자들이 출간한 탁월한 논문집들만이 아니라,[특히 주목할 만한 논문집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꼽을 수 있다. Sylvain Lazarus ed., Politique et philosophie dans l’æuvre de Louis Althusser, PUF, 1992(바디우, 발리바르, 랑시에르, 엠마뉘엘 테레 등의 논문 수록); Sur Althusser: passages, collectif, L'Harmattan, 1993(네그리, 장-마리 벵상 등의 논문 수록); Michael Sprinker & E. Ann Kaplan eds., The Althusserian Legacy, Verso, 1993(발리바르, 알렉스 캘리니코스, 워렌 몬탁 등의 논문 수록); Henning Böke et al. eds, Denk-Prozess nach Althusser, Argument Verlag, 1994(발리바르, 바디우, 라스트코 모츠니크 등의 논문 수록); Gregory Elliott, ed., Althusser: A Critical Reader, Blackwell, 1994(폴 리쾨르, 악셀 호네트, 피에르 빌라르, 피터 듀스 등의 논문 수록); Jacques Lerza, ed., Depositions: Althusser, Balibar, Macherey, and the Labor of Reading, Yale French Studies, 88, 1995(발리바르, 마슈레, 몬탁 등의 논문 수록); Antonio Callari & David Ruccio, eds., Postmodern Materialism and the Future of Marxist Theory: Essays in the Althusserian Tradition, Wesleyan University Press, 1996(발리바르, 몬탁, 네그리, 테레 등의 논문 수록); François Matheron, ed., Lire Althusser aujourd’hui, L’Harmattan, 1997(가브리엘 알비악, 프랑수아 마트롱, 네그리 등의 논문 수록); Pierre Raymond, ed., Althusser philosophe, PUF, 1997(자크 비데, 피에르-프랑수아 모로 등의 논문 수록); Pierre Macherey, Histoires de dinosaure. Faire de la philosophie, 1965–997, PUF, 1999; Maria Turchetto ed., Althusseriana Quaderni, vol. 1~4, Mimesis, 2004~2009(알튀세르에 관한 부정기 간행물. 발리바르, 몬탁, 마리아 투르케토, 비토리오 모르피노, 요시히코 이치다 등과 같은 저명한 알튀세리안들의 논문 모음).] 알튀세르의 여러 주제를 다루는 주목할 만한 작업들,[Robert Pfaller, Althusser: Das Schweigen im Text, Wilhelm Fink Verlag, 1997(알튀세르의 인식론과 이데올로기론); Isolde Carim, Der Althusser-Effekt: Entwurf einer Ideologietheorie, Passegen Verlag, 2002(이데올로기론); Gibson-Graham, J.K., Stephen A. Resnick and Richard D. Wolff eds., Class and Its Others, Minnesota University Press, 2000(계급, 인종, 성적 차이 등의 절합); Gibson-Graham, J.K., Stephen A. Resnick and Richard D. Wolff eds., Re/Presenting Class: Essays in Postmodern Marxism. Duke University Press, 2001(탈근대 맑스주의); Stephen A. Resnick and Richard D. Wolff, Class Theory and History: Capitalism and Communism in the USSR, Routledge, 2002(소련 역사에 대한 재구성); Warren Montag, Louis Althusser, Palgrave Macmillan, 2003(미학과 문학이론); Wal Suting, “Althusser’s Late Thinking about Materialism”, Historical Materialism, vol. 12, no. 1, 2003(우발성의 유물론); Miguel Vatter, “Machiavelli After Marx: The Self-Overcoming of Marxism in the Late Althusser”, Theory & Event, vol. 7, no. 4, 2005(알튀세르와 마키아벨리); Jan Mieszkowski, Labors of Imagination: Aesthetics and Political Economy from Kant to Althusser, Fordham University Press, 2006(알튀세르의 미학); Irène Fenoglio, Une auto-graphie du tragique: Les manuscrits de “Les faits” et de “L'avenir dure longtemps” de Louis Althusser, Editions Academia, 2007(‘자서전’에 대한 문체론적 연구).] 그리고 알튀세르 사상을 좀더 폭넓은 역사적 시각에서 재조명하려는 작업들이 망라돼 있다.[William S. Louis, Louis Althusser and the Traditions of French Marxism, Lexington Books, 2005; Gregory Elliott, Althusser: The Detour of Theory, Brill, 2006(1987년 초판에 주목할 만한 “후기”가 추가된 2판); Peter D. Thomas, The Gramscian Moment: Philosophy, Hegemony and Marxism, Brill, 2009; André Tosel, Le marxisme du 20e siècle, Editions Syllepse, 2009.] 주목할 만한 것은 이른바 “정통 맑스주의”의 교리들과 무관하게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과 영미권의 젊은 연구자들이 신자유주의의 위기가 심화되는 정세에서 새로운 맑스주의 또는 새로운 역사유물론을 구성하기 위한 핵심 자원으로 알튀세르 사상을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의 작업을 통해 과연 알튀세르가 어떤 모습으로 재탄생하게 될지 또는 어떤 효과들을 새롭게 발휘하게 될지 귀추가 주목된다.[David McInerney, ed., Althusser and Us, Borderlands: E-Journal, vol. 4, no. 2, 2005(비토리오 모르피노, 몬탁 등의 논문 수록) URL: http://www.borderlands.net.au/issues/vol4no2.html (2011. 10. 20 접속); Yoshiyuki Sato, Pouvoir et résistance: Foucault, Deleuze, Derrida, Althusser, L'Harmattan, 2007(이데올로기론과 인과성 이론); Jean-Claude Bourdin, ed., Althusser, une lecture de Marx, PUF, 2008(비데, 이브 바르가, 프랑크 피쉬바흐 등의 논문 수록); Pascale Gillot, Althusser et la psychanalyse, PUF, 2009(이데올로기론과 정신분석); Andrea Cavazzini, Crise du marxisme et critique de l'État: Le dernier combat d'Althusser, Editions le clou dans le fer, 2009(후기 알튀세르의 정치학과 공산주의 이론); Mikko Lahtinen, Politics and Philosophy. Niccolo Machiavelli and Louis Althusser's Aleatory Materialism, Brill, 2009(우발성의 유물론과 마키아벨리); Isabelle Garo, L'idéologie ou la pensée embarquée, Éditions la Fabrique, 2009(이데올로기론); Foucault, Deleuze, Althusser & Marx : La politique dans la philosophie, Éditions Demopolis, 2011(프랑스 철학과 정치); Sara Farris and Peter Thomas, eds., Encountering Althusser, Continuum Press, 2012(근간).]

하지만 엮은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알튀세르의 사상이 오랜 몰이해와 배제의 시련을 거친 끝에 이제 다시 부활하고 있다, 다시 한 번 알튀세르 사상의 전성기가 도래할 것이라는 마치 무협지 같은 스토리를 늘어놓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오늘날의 인문사회과학에서 제기되는 여러 가지 쟁점들을 해명하는 데서 알튀세르 사상의 요소들은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독자들에게 다시 한 번 환기하고 싶기 때문이다.

맑스주의를 비롯한 좌파 운동과 이론 작업이 거의 고사 직전에 이른 오늘날 한국에서 알튀세르에 관해 흔히 볼 수 있는 두 가지 대립적인 태도는 무관심한 배제교조적 향수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른바 “포스트 담론”을 다양하게 원용하는 지식인들에게 알튀세르는 더 이상 아무런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으며, 심지어 구태의연한 맑스주의자나 교조주의 철학자로 경멸되거나 배척받는 경향도 심심치 않게 엿볼 수 있다. 이 경우 알튀세르는 다양한 포스트 담론의 대표자들, 곧 들뢰즈, 데리다, 푸코, 또는 좀더 최근에는 지젝, 바디우, 랑시에르, 아감벤 등과 무관한, 유행에 뒤떨어진 구시대의 인물로 간주된다.[지난 20여년 간 한국 인문사회과학에서 ‘포스트 담론’이 어떻게 수용되었고 어떤 식으로 변용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지성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문제다. 특히 한국 포스트 담론의 반맑스주의(및 반알튀세르주의) 경향에 관해서는 심층적인 고찰과 토론이 이루어져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이 점에 관한 예비적인 고찰로는 「진태원과의 대담」, 김항ㆍ이혜령 엮음, 󰡔인터뷰-한국 인문학 지각변동󰡕, 그린비 2011을 참조.] 정반대로 맑스주의를 고수하려는 매우 드문 지식인들 중 일부는 알튀세르를 고전 맑스주의라는 신성한 성채의 보루로 간주하면서 그를 일체의 포스트 담론과 분리시키려고 한다. 그들에 따르면 일체의 포스트 담론이란—프레드릭 제임슨의 유명한 정식을 사용한다면—“후기 자본주의의 문화논리” 또는 좀더 조야한 표현법에 따르면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며, 따라서 오늘날 맑스주의의 주요 과제는 일체의 포스트 담론과 투쟁하는 것이 된다.

이 두 가지 경향은 전혀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한 가지 근원적인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이론이나 사상을 파악하는 지극히 본질주의적이고 정태적인 관점이다. 알튀세르를 유행에 뒤떨어진 맑스주의 철학자로 간주하는 이들 중 상당수가 이른바 “요즘 뜨는 사람들”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이러한 관점과 무관하지 않다. 이들에 따르면 사상의 현재성 또는 현실적인 사상이란 “요즘 뜨는 사람들”, 특히 요즘 미국에서 뜨는 사람들에게서 찾을 수 있을 뿐, 이미 유행이 지나간 사상들은 더 이상 현재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 이들에게는 심지어 이미 들뢰즈, 푸코, 데리다도 구식의 인물들에 불과하다. 이들에게 알튀세르를 비롯한 맑스주의 사상가들이 현재성을 얻게 되는 것은 그들이 다시 한 번 “미국에서 뜨는” 때가 될 것이다. 상당히 경박해 보이는 (하지만 꽤 널리 공유되고 있는) 이러한 태도의 밑바탕에는 사상의 현재성과 사상의 유행, 그것도 미국 학계의 유행을 혼동하는 관점이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의 사상이 현재성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좀처럼 어려운 일인데, 왜냐하면 과거의 것이 회귀할 수 있다는 것, 또는 과거의 것이 여전히 현재의 사태에 효과를 산출할 수 있다는 것(말하자면 “비동시적인 것들의 동시성”)은, 선형적 시간성을 사상의 시간성과 혼동하는 이들에게는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반면 알튀세르와 “포스트 담론”을 교조적으로 대립시키는 이들에게 알튀세르 사상의 핵심은 러시아혁명(또는 중국혁명)에 대한 해석으로서의 과잉결정 이론이나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에서 찾을 수 있다. 이들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에 거의 무관심하고, 우발성의 유물론이나 알튀세르의 마키아벨리 해석에 냉담한 이유는, 그것이 고전 맑스주의와는 거의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이들이 아마 이데올로기론에 관심이 있다면, 그것은 자본주의 국가가 어떻게 계급 지배를 재생산하는지, 교육 이데올로기 장치가 그러한 재생산에서 어떻게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지에 관한 관심의 소산일 것이다. 알튀세르에 대한 이런 식의 해석이 지극히 선별적이며 지극히 환원적이라는 점을 분명히 지적해야 한다. 이러한 해석은 알튀세르를 정확히 이해하는 데에도 장애가 될 뿐만 아니라, 장래의 어떤 맑스주의(들) 또는 역사유물론(들)을 재구성하는 데에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알튀세르를 포함한 맑스주의는 불변하는 본질을 지닌 어떤 것이며, 이러한 본질은 어떠한 오염이나 훼손으로부터도(특히 이른바 “포스트 담론”으로부터) 단호히 보존되어야 할 무엇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식의 해석을 통해서는 알튀세르의 맑스주의 자체가 지극히 이단적이고 비정통적인 요소들을 통해 구성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망각될 수밖에 없으며, 맑스주의의 역사가 이질적인 요소들 사이의 복잡다단한 논쟁과 내적 갈등, 분화와 굴절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 장래에 도래하게 될 “맑스주의”(엮은이 자신은 다소 회의적이지만, 아마도 여전히 이런 이름이 장래에도 불리게 될 것이라면) 역시 이질적이고 다양한 형태를 띨 수밖에 없으리라는 사실이 이해가 될 수 없다.

이들과 달리 알튀세르와 오랫동안 같이 작업했던 그의 제자이자 동료 중 한 명이었고 또 그의 사상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 중 하나인 에티엔 발리바르는 1996년 [맑스를 위하여] 재판에 붙인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이제] 모든 맑스주의는 상상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들 중 일부, 서로 매우 다르고 사실은 매우 적은 또는 소수의 텍스트들이 대표하고 있는 몇 가지 맑스주의는 여전히 사고하고 행동하도록, 따라서 현실적 효과들을 생산하도록 만들 수 있는 힘을 보유하고 있다. 나는 [맑스를 위하여]의 “맑스주의”가 능히 이것들에 포함된다고 믿는다.”[E. Balibar, “Avant-propos pour la réédition de 1996”, in L. Althusser, Pour Marx, Éditions La Découverte, 1996, p. VI.] 한 마디 덧붙인다면, 여기에는 [맑스를 위하여]의 맑스주의만이 아니라 알튀세르의 다른 저작들, 예컨대 [“자본”을 읽자]나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 또는 [마키아벨리와 우리]의 맑스주의도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논문집이 목표로 하는 것은 단순히 알튀세르 20주년을 기리기 위한 것이 아니고, 그의 사상의 위대함, 그의 맑스주의의 독창성을 찬양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그보다 이 논문집의 목표는, 그의 사상의 여러 요소들 가운데 오늘날에도 여전히 가치를 지니고 있고 여전히 현실적인 효과들을 생산해낼 수 있는 주제들을 살펴보고, 알튀세르 사상과의 비판적 대결을 통해 독자적인 이론의 세계를 구축한 현대 사상가들의 작업 속에서 알튀세르 사상이 어떤 영향을 미쳤고 또 어떤 식으로 변용되거나 지양되고 있는지 검토해보는 것이다.

좀더 궁극적으로 본다면 이러한 목표는, 오늘날 알튀세르의 사상을 무관심하게 망각하거나 맹목적으로 배척하지 않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교조적으로 되풀이하거나 회고적으로 찬양하지도 않으면서, 알튀세르의 사고 양식, 곧 맑스(주의)의 사고 양식을 다시 한 번 재개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던져 보고, 각자 나름대로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사고해보려는 또 다른 목표를 함축하고 있다.

엮은이가 보기에 철학자로서, 맑스주의자로서 알튀세르의 가장 비범한 측면은 그의 비교조적인 사유 양식, 가장 이단적인 방식으로 맑스주의를 쇄신하고 구원하려고 했던 그의 사유 양식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공산당의 정치적 사상 통제가 공공연히 이루어지던 시대에 그는 대담하게도 비맑스주의적인 사상의 요소들을 동원하여 맑스 사상의 핵심을 복원하고 맑스주의를 개조하려고 했다. 스피노자 철학을 원용하여(더욱이 그의 스피노자 해석은 당대의 맥락에서 볼 때 가장 이단적이고 가장 특이한 해석이었는데, 놀랍게도 오늘날 그의 해석은 현대 스피노자 연구에서 매우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1960년대 이후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 학계에서 스피노자 연구의 흐름에 관해서는 진태원, 「피에르 마슈레의 스피노자론」, 피에르 마슈레, 󰡔헤겔 또는 스피노자󰡕, 진태원 옮김, 그린비, 2010(제2판); 「범신론의 주박에서 벗어나기-프랑스에서 스피노자 연구 동향」, 󰡔근대철학󰡕 제2권 2호, 2007; 「관계론, 대중들, 민주주의: 에티엔 발리바르의 스피노자론」, 󰡔시와 반시󰡕 71호, 2010 등을 참조하라.]) 헤겔의 변증법과 구별되는 맑스주의 변증법을 사고하려는 시도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및 스피노자의 상상계 이론을 통해 맑스주의적인 이데올로기론을 구성하려는 시도, 바슐라르나 캉길렘에 근거하여 맑스주의 인식론을 쇄신하려는 시도 등이 그 단적인 사례들이다. 그의 사상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효력을 발휘하고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 그것은 그의 사상이 지닌 이러한 이단적 성격, 개방적 성격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알튀세르에 대해 다시 한 번 사고해보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그의 사상을 교조적으로 되풀이하거나 단순히 찬양하는 데 그친다면, 그것은 알튀세르에 대한, 알튀세르의 사상에 대한 가장 큰 배반이 될 것이다. 알튀세르의 사상은 비판적 대결을 거치지 않고서는 이해되거나 수용될 수 없는 사상, 새롭게 변용되고 굴절되는 것을 통해서만 계승되고 재개될 수 있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의 세계적인 스피노자 연구자인 피에르-프랑수아 모로(Pierre-François Moreau) 교수는 젊은 시절 파리 고등사범학교의 알튀세르의 제자 중 한 사람이었는데, 그는 [스피노자와 현대철학]이라는 제목으로 서강대 서동욱 교수와 엮은이가 편집을 맡아 출간을 준비 중인 공동 논문집에 수록될 대담에서 “이제 우리가 알튀세르의 이런저런 분석에 더 이상 동의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적어도 그는 우리에게 사고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고 말한 바 있다.

그의 사망 20주기를 기념하여 마련된 이 공동 논문집이 아무쪼록 우리 모두 다시 한 번 그에게 사고하는 법을 배우는 자리가 되기를, 그에게 사고하는 법을 배운 사람들에게 또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는 법을 배우는 자리가 되기를, 서로가 서로에게 사고하는 법을 배우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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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집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국내 필자 10명의 글과 외국 학자 9명의 글이 수록돼 있다.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이 모두 알튀세르의 사상을 지지하거나 옹호하고 있지는 않으며, 어떤 글들은 상당히 비판적인 시각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엮은이가 보기에 이 책에 수록된 19편의 논문은 각자 뚜렷한 개성과 논점을 지니고 있으며, 알튀세르 사상의 핵심 주제들과 알튀세르가 산출한 효과들에 관해 의미 있는 분석을 제시하고 있다. 19명의 필자들의 입장과 논점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릴지 여부는 독자들의 몫이지만, 엮은이로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글들이 앞으로 한국의 알튀세르 연구에 대해 각자 의미 있는 효과를 산출하게 되리라는 점이다. 그것은 알튀세르라는 원인이 자신의 효과들 속에서 실존하는 방식 또는 알튀세르라는 유령이 사후의 삶(sur-vie)을 살아가는 방식, 삶과 죽음의 경계 위에서 살아가는(sur-vivre) 방식이 될 것이다.

1부는 “알튀세르의 주제들”이라는 제목 아래 6편의 글을 묶었다.

우선 알튀세르의 주요 제자 중 한 사람이자 저명한 스피노자 연구자이기도 한 피에르 마슈레는 「알튀세르와 청년 맑스」라는 글에서 알튀세르 맑스 독해의 기점을 이루는 청년 맑스에 관한 글(마슈레는 이 글이 “마치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글”이었다고 회고한다)을 다루고 있다. 마슈레는 특유의 엄밀하고 꼼꼼한 분석으로 알튀세르의 청년 맑스론에 담긴 핵심 논점들을 해명하면서 동시에 그 글에 담긴 알튀세르의 애매성 역시 드러내고 있다. 마슈레에 따르면 그 글은 “청년 맑스”에 관해 대립했던 두 관점인 당시의 수정 맑스주의(인간주의적 맑스주의)와 정통 맑스주의가 실제로는 동일한 입장, 곧 맑스 사상을 청년에서 노년에 이르기까지 “동질적인 전체”로 간주하는 입장을 공유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더 나아가 이러한 입장은 사상이나 이론에 대한 관념론적 관점의 표현임을 밝히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따라서 알튀세르가 저 유명한 청년 맑스와 성숙기 맑스의 “절단”(또는 “단절”)이라는 테제를 제시했을 때, 그것은 일차적으로 맑스의 사상을 당대의 이데올로기적 장 속에서, 그리고 역사적 현실의 변동과 연계하여 고찰하려는, 사상사에 대한 일종의 유물론적 관점의 표현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마슈레의 논점이다.

1부의 두 번째 글은 변증법이라는 주제에 관한 글이다. 진태원은 「과잉결정, 이데올로기, 마주침」이라는 제목으로 알튀세르의 사상적 여정을 관통하는 변증법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가 문제로 삼는 것은 변증법에 대한 문제를 초기 알튀세르의 저작에 고유한 관심사로 한정하려는 연구 경향이다. 이러한 경향과는 반대로 변증법의 문제는, [맑스를 위하여], [“자본”을 읽자]만이 아니라,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 더 나아가 말년의 우발성의 유물론에서도 지속적으로 알튀세르의 주요 관심사였다는 것이 그의 핵심 주장이다. 그는 이를 “과소결정 없는 과잉결정”, “과잉결정 없는 과소결정”, “체계 안에서 체계를 벗어나기”라는 표제들 아래 고찰하고 있다.

알튀세르는 맑스 사상의 핵심을 “역사 대륙의 발견”이라는 비유로 표현하곤 했다. 탈레스가 수학이라는 과학의 대륙을 발견하고 갈릴레이가 물리학이라는 대륙을 발견했다면, 맑스는 역사라는 새로운 과학의 대륙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알튀세르에게 맑스의 역사유물론은 혁명의 과학이지만 동시에 과학의 혁명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 만큼 맑스의 역사유물론은 과연 역사학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 또 알튀세르의 역사유물론 개조는 역사학적으로 얼마나 의미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은 알튀세르의 주제를 다루는 1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질문이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아날학파의 일원이면서 동시에 맑스주의자이기도 했던 피에르 빌라르(Pierre Vilar)만큼 이 질문을 정교하고 깊이 있게 다룬 사람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건설 중에 있는 역사학인 맑스주의 역사학: 알튀세르와의 대화」라는 글(1973년 발표된 이 글의 제목에 사용된 진행형의 표현이 오늘날의 독자들에게는 아마 너무 낯설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에서 매우 세심하면서도 깐깐하게 알튀세르의 역사유물론 개조 작업을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그는 알튀세르와 그의 동료들이 맑스가 미완의 상태로 남겨둔 역사과학, 곧 역사유물론에 대해 그것의 이름에 걸맞은 과학의 지위를 부여하려고 하는 시도가 때로는 지나치게 이론주의적인 경향을 띠고 있으며, 역사가들, 가령 아날 학파의 대가들인 뤼시엥 페브르, 에르네스트 라부르스, 페르낭 브로델 등의 실제 작업을 경솔하게 무시한다고 비판한다. 역사가들이 현실 역사에 대한 재구성 작업에서 부딪치는 어려움들은 이론적 개념들의 재구성이나 창안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학의 구성이 순전히 경험적인 조사로 이루어질 수는 없으며, 폭넓은 조사에서 이론의 구성으로, 다시 사례들을 통한 방법론의 검토로 나아가는 과정을 부단히 되풀이해야 하기 때문에, 그리고 맑스주의 역사학이 다수의 개념들(생산양식, 사회구성체, 시간, 민족 등) 사이의 모호한 관계 때문에 곤란을 겪고 있기 때문에, 알튀세르의 새로운 개념화의 시도가 긍정적인 효과를 산출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평가에 기초하여 빌라르는 논문의 말미에서 영속적인 난점을 재확인하고 열린 길들에 대해 전망하고 있는데, 알튀세르에 대한 연구(및 장래의 역사유물론에 대한 모색)는 여전히 이러한 논평에서 가치 있는 조언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미학으로 (재)생산되지 않는 미학: 알튀세르 예술론의 어떤 (불)가능성」이라는 글에서 최정우가 시도한 것은 알튀세르가 남긴 미학 내지 예술에 관한 단편적인 글들 속에서 “유물론적 미학”이라는 역설적인 미학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살펴보는 것이다. 사실 알튀세르 사상의 비범한 한 측면은 그가 결코 체계적인 이론을 만들어내지 않은 분야들에서도 풍부한 효과를 산출했다는 점이다. 최정우에 따르면 이는 미학의 경우에 특히 사실이다. 알튀세르는 유명한 「피콜로 극단: 베르톨라치와 브레히트」를 비롯하여 겨우 4-5편의 짧은 예술론을 남겼을 뿐이지만, 이 산발적인 성찰들에서 우리는 유물론 미학의 구성 (불)가능성에 관한 근본적인 통찰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최정우가 볼 때 이처럼 알튀세르의 예술론이 산발적이고 단편적이라는 사실은 알튀세르의 예술론, 더 나아가 유물론 미학의 성격에 대해 증상적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알튀세르가 추구한 유물론 미학은 결코 미학이라는 학문적ㆍ제도적 틀 속에서 체계화되지 않는 것이며, 미학으로서 (재)생산되지 않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하나인 미학이라는 학문ㆍ제도를 내파하는 효과를 산출하는 것이어야 한다. 단 그러한 효과는 외부에서 미학을 규정함으로써(사회주의 리얼리즘 같은 식으로) 산출될 수 없으며, “오직 내부의 효과들을 통해서만” 산출될 수 있다. 최정우는 「‘피콜로 극단’: 베르톨라치와 브레히트」에서부터 「브레히트와 맑스에 대하여」, 「크레모니니, 추상적인 것의 화가」 같은 글들을 섬세하게 읽으면서 이를 설득력 있게 논증하고 있다. 오늘날 유물론적 미학 내지 예술(론)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이들은 이 글에서 많은 시사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의 저명한 맑스주의 철학자 앙드레 토젤의 「루이 알튀세르의 우발성의 유물론의 우발성들」이 1부의 다섯 번째 글을 이룬다. 앙드레 토젤은 파리 고등사범학교 출신이지만 알튀세르의 작업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가운데 그의 사상을 수용해왔다. 그는 알튀세르만이 아니라 그람시나 루카치 같은 맑스주의자들에게서도 큰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전공 분야인 스피노자를 비롯하여 비코, 칸트, 헤겔 등과 같은 다른 철학자들에 대해서도 빼어난 업적을 남겼다. 맑스주의 역사에 대한 연구나 스피노자 연구에서 알 수 있듯이, 토젤은 복잡다단한 사상의 흐름을 간명하면서 요령 있게 파악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다.[A. Tosel, Le marxisme du 20e siècle, op. cit. 및 「스피노자라는 거울에 비추어본 맑스주의」, 󰡔트랜스토리아󰡕 제5호, 2005, 박종철출판사 참조.] 이 책에 수록된 글에서도 그는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알튀세르의 유고들 중에서 독자들에게 가장 충격을 준 것은 「마주침의 유물론의 은밀한 흐름」이나 [철학에 대하여] 같은 텍스트들일 것이다. 이 텍스트들에서 그는 마치 자신이 출간했던 저작들에서 주장했던 이론이나 개념들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그 대신 전혀 새로운 이론, 곧 마주침의 유물론이나 우발성의 유물론을 제창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는 자신이 “유일한 유물론의 전통”이라고 부르는 우발성의 유물론의 계보에서는 맑스나 엥겔스, 레닌이 아니라, 에피쿠로스와 루크레티우스, 마키아벨리, 홉스, 루소, 하이데거, 비트겐슈타인, 들뢰즈, 데리다를 위치시키고 있다! 이 때문에 이 텍스트들은 때로는 (정신 상태가 온전치 못한 정신병자의) 비합리적인 주장으로 치부되거나 충격을 노린 도발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반면 토젤은 이 텍스트는 그저 비합리적인 도발이나 단지 ‘파괴’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맑스주의에 내재한 목적론적ㆍ관념론적 요소들을 ‘해체’하고 좀더 유물론적인 맑스주의를 건설하려는 (생전의 저작들과 연속선상에 있는) 알튀세르의 지속적인 노력의 소산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토젤은 이 텍스트들 속에는 “합리주의 전통의 해체”를 위한 요소들과 “새로운 [유물론적] 개념성의 구성”을 위한 요소들이 모두 존재하며, 이러한 요소들에 대한 알튀세르의 탐구는 맑스주의를 쇄신하기 위한 목적에 따라 수행되고 있음을 명쾌하게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는 이러한 알튀세르의 시도에 담겨 있는 긴장과 공백, 난점들도 날카롭게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토젤의 이 글은 앞으로 우발성의 유물론에 대한 탐구를 위한 훌륭한 출발점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

요즘에는 거의 다뤄지지 않는 주제이기는 하지만, 1960-70년대에 알튀세르에 관한 논의에서 가장 큰 화두가 되었던 것은 그의 [자본] 독해였다. 알튀세르 이전에도 [자본]은 맑스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책으로 인정받았고 수많은 분석과 논쟁의 대상으로 존재해왔다. 자크 비데에 따르면 알튀세르의 작업의 독창성은 그 이전의 다른 시도들과 달리 [자본]을 비롯한 맑스의 저작을 진정한 과학성의 기준에 따라 고찰하고 평가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과학성의 기준에 따를 경우 [자본]을 비롯한 맑스의 저작은 신성한 과학, 곧 초기 맑스에서부터 후기 맑스에 이르기까지 완성되고 일관된 어떤 동질적인 사상을 표현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불완전성과 공백, 균열, 한계들을 지닌 채 끊임없이 재구성되고 정정되고 개작되는 과정에 있는 어떤 사상의 표현이 된다. 따라서 맑스 사상의 이러저러한 한계를 말하고 [자본]에 담겨 있는 헤겔주의적ㆍ목적론적 요소들을 비판하는 것은 맑스의 업적을 깎아내리거나 맑스 사상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맑스 및 맑스주의를 불가침의 교리, 무오류의 신성한 권위에서 해방시켜 그것에게 온전한 진리성을 부여할 수 있는 첩경이다.

자크 비데는 이러한 알튀세르의 시도가 정통 맑스주의의 교리와 문구를 반복하는 데 불과했던 당시의 맑스주의와 얼마나 다른 것이었으며, 이것이 얼마나 거대한 해방의 효과를 산출했는지 회고하고 있다. 하지만 알튀세르 자신의 “사유양식”에 부합하는 탁월한 이론가 중 한 사람으로서 비데는 단지 알튀세르 작업을 예찬하거나 되풀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지난 수십 년 동안 자신이 수행해왔던 [자본]에 대한 독자적인 연구에 입각하여 알튀세르 독해의 한계를 지적하고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한다.[자크 비데의 주요 저작에는 국내에 소개된 󰡔“자본”의 경제학ㆍ철학ㆍ이데올로기󰡕, 박창렬ㆍ김석진 옮김, 새날, 1995 이외에 다음과 같은 저작들이 있다. J. Bidet, Théorie de la modernité, PUF, 1990; Théorie générale, PUF, 1999; Explication et reconstruction du Capital, PUF, 2004; (& Gérard Duménil), Altermarxisme, un autre marxisme pour un autre monde, PUF, 2007; L’État-monde, libéralisme, socialisme et communisme à l’échelle mondiale, Refondation du marxisme, PUF, 2011.] 특히 그는 호명을 단지 이데올로기적 종속 메커니즘으로 이해하는 것은 근대적 생산관계에 대한 알튀세르의 협소한 이해의 소산이며, 이것은 그가 [자본]의 틀에 갇혀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호명은 “자유로운 평등 또는 계약성에 대한 선언”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비데의 평가에 대해서는 찬반이 엇갈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알튀세르의 작업이 [자본]을 읽는 데 도움을 주었던 것처럼, 비데의 작업 역시 우리가 알튀세르를 읽는 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는 점은 분명히 언급할 수 있다.

2부에는 “알튀세르의 원천들”이라는 제목 아래 세 편의 글을 모았다. 먼저 양창렬은 「알튀세르를 위하여 원자론을 읽자」에서 알튀세르 사상에서 원자론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지 독자들을 설득하고자 한다. 알튀세르가 1980년 이전까지 출간한 저서들에서 원자론자들의 이름은 아주 드물게 등장한다. 가장 의미 있는 대목은 1975년 업적 학위를 받기 위해 아미엥에 있는 피카르디 대학에 제출한 ‘박사 학위 업적 소개문’인 「아미엥에서의 주장」에 나온다. 여기에서 그는 “맑스주의 변증법의 문제는 유물론의 우위에 대한 변증법의 종속이라는 조건 아래에서만, 그리고 이 유물론이 변증법이 되기 위해서 변증법은 어떤 형태를 취해야 하는가를 아는 조건 아래에서만 제기될 수 있다”[루이 알튀세르, 󰡔아미엥에서의 주장󰡕, 김동수 옮김, 솔, 1991, 147쪽. 강조는 알튀세르.]고 주장하면서 “에피쿠로스에서 스피노자와 헤겔에 이르기까지 맑스 유물론의 전제를 구성하는 이 심원한 친화성”[루이 알튀세르, 같은 책, 146쪽.]에 대해 지적하고 있다.

스쳐 지나가듯 언급된 이 논점들은 그의 사후에 출간된 유고들에서는 핵심 주제로 등장하는데, 양창렬은 풍부한 문헌 검토와 세심한 논증을 통해 원자론의 전통이 흔히 알려진 것보다 알튀세르의 사상에서 훨씬 더 중요한, 더욱이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그는 흔히 동일한 사상의 두 가지 표현으로 간주되는 “마주침의 유물론”과 “우발성의 유물론”이 각각 상이한 쟁점을 갖고 있는 표현이라는 점을 논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60년대의 맑스주의 개조 작업 및 라캉 정신분석학과의 비판적 대결에서 이미 원자론에 대한 알튀세르의 관점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음을 밝히고 있다.

긴 분량만큼이나 아주 풍부하고 독창적인 논의가 담겨 있는 이 글은 알튀세르 사상을 새롭게 파악하려는 이 논문집의 목표 매우 잘 부합하는 글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글이 제기하는 알튀세르에 대한 원자론적 독해와 스피노자주의적 독해 사이의 긴장, 라캉 정신분석학과의 대결에서 원자론적 범주의 중요성, 데리다/하이데거와 알튀세르에서 공백, 주변/여백 개념의 차이 등의 쟁점은 앞으로 새로운 알튀세르 효과들을 낳게 될 것이다.

국내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가장 뛰어난 알튀세리엥 중 한 사람으로 꼽을 만한 인물인 엠마뉘엘 테레는 「하나의 마주침. 알튀세르와 마키아벨리」에서 알튀세르의 또 다른 사상적 원천으로 마키아벨리를 제시한다. [마키아벨리와 우리]를 비롯한 유고들이 출간된 이후 알튀세르의 우발성의 유물론 및 정치철학 일반에 미친 마키아벨리의 영향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는 이제 잘 알려져 있다.[알튀세르와 마키아벨리의 관계를 다루는 최근의 논의들 중에서는 특히 Mikko Lahtinen, Philosophy and Politics: Niccolò Machiavelli and Louis Althusser's Aleatory Materialism, op. cit.가 주목할 만하다.] 테레의 글에서 놀라운 점은 알튀세르의 유고가 출간되기 이전에 이미 마키아벨리가 그의 사상의 주요 원천 중 하나라는 점을 명쾌하게 밝혀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테레가 보기에 마키아벨리는 네 가지 측면에서 알튀세르의 관심을 끌었다. 첫째, 마키아벨리가 근대의 지배적인(곧 부르주아) 정치 이데올로기인 사회계약론에 대한 반계약론적 대안을 나타낸다는 점이다. 맑스가 자본주의의 시초 축적에는 약탈과 수탈, 폭력이 존재했음을 드러냈던 것처럼, 마키아벨리는 계약과 동의의 이면에 존재하는 폭력과 간계가 정치의 현실적 모습임을 밝혀냈다. 둘째, 알튀세르에게 마키아벨리는 혁명의 이론가였다. 어떻게 연속성과 반복에 의해 규정되는 역사 속에 새로운 것을 도입할 수 있는가? 정치에서 시작이란 무엇인가? 어떤 식으로 하면 새로운 정체를 확립하고 새로운 국가를 창건하고 새로운 시대를 개시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마키아벨리의 저작 전체를 관통하고 있으며, 이것은 또한 알튀세르의 근원적인 관심사였다. 셋째, 또한 마키아벨리는 연대기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이론적 중요성과 가치의 측면에서 첫 번째 근대적인 정치이론가였다. 이 점에서 알튀세르는 그람시와 많은 점에서 일치하지만, 알튀세르는 그람시와 달리 정치에서 대중의 우위라는 사상은 마키아벨리에게서 찾을 수 없다고 본다. 알튀세르가 피렌체의 서기장에 주목한 마지막 이유는 그가 진정한 유물론자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유물론은 무엇보다 현실의 환원 불가능한 다수성을 긍정하는 관점이며, 따라서 기원론이나 목적론을 근원적으로 거부하는 철학이다. 우리는 이러한 입장을 알튀세르의 유고 전체에 걸쳐 읽을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몇몇 한계에도 불구하고 테레의 글은 알튀세르와 마키아벨리의 관계에 대한 연구만이 아니라 알튀세르에 관한 연구에서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2부의 마지막 글은 알튀세르와 스피노자의 관계를 다루는 피에르-프랑수아 모로의 「알튀세르와 스피노자」다. 이 글에서 간명하고 핵심을 찌르는 모로 특유의 논의 스타일이 유감없이 발휘된다. “스피노자에 관한 한 모로에게 낯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찬사를 받을 만큼 걸출한 스피노자 연구자이자 알튀세르 사상을 속속들이 꿰뚫고 있는 알튀세르의 제자답게 모로는 그의 스승의 사상에 미친 스피노자 철학의 영향을 독창적으로 밝혀낸다.

모로는 알튀세르가 그의 저작에서 인용한 잘 알려진 스피노자의 문구를 분석하기보다는 철학과 철학사의 관계라는 주제를 통해 두 사람 사이의 긴밀한 유대를 밝혀낸다. 모로는 특히 세 가지 유사성을 강조한다. 첫째, 알튀세르가 철학사를 되풀이되는 유물론과 관념론의 분할의 실행으로 파악하면서 철학에는 역사가 없다는 점을 강조한 것처럼, 스피노자에게도 철학은 본질적으로 구획하기(상상 대 이성, 상상적인 철학 대 진정한 철학 등)이며, 철학사에서 발견되는 것은 이러한 구획의 반복이다. 둘째, 알튀세르에게 철학은 과학과 달리 대상을 갖지 않듯이, 스피노자에게도 “철학”이라는 용어 자체는 특정한 내용을 가리키기보다 “논박의 장소”를 가리킨다. 셋째, 알튀세르와 스피노자는 역사에 대한 매우 독창적인 견해를 제시한다. 알튀세르에게 주체는 “역사의 주체”가 아니라 “역사 속의 주체”, 곧 자신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과정에 의해 산출되는 존재자이며, 따라서 구조적으로 세계 및 자기 자신에 대한 오인과 불투명성을 지닌 존재자인 것처럼, 스피노자에게도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 무지하며, 자신의 행위와 욕망에 대해 무지하다. 그리고 이처럼 인간의 무지를 동반하는 욕망과 정념이야말로 인간 개인과 사회 집단의 삶을 규정한다는 것이 스피노자의 관점이다.

이런 의미에서 두 철학자의 공통점은 “역사 이론과, 직접적인 것의 불투명성에 대한 철학”의 본질적인 연관성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은 알튀세르가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에서 발견해낸 것처럼, 민족을 민족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개인을 개인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낳는다. 모로에 따르면 이것은 우리 시대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 중 하나다.

3부에는 “알튀세르의 동시대인들”이라는 제목 아래 4편의 글을 묶었다. 우선 「이데올로기와 주체의 구성」에서 파스칼 질로는 알튀세르 사상에서 가장 많은 논쟁의 대상이 된 이데올로기와 주체의 문제를 다룬다.

질로는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 특히 그의 호명 이론에 미친 라캉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주체의 종속적 구성이라는 문제나 대주체와 작은 주체들 간의 거울 관계라는 주제, 주체 또는 자아에 구성적인 오인이라는 개념에서 라캉의 영향력을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질로는 주체의 문제와 관련하여 라캉과 알튀세르 사이에는 근원적인 분기점, 차이점이 나타난다는 점에 주목한다. 곧 라캉은 데카르트의 코기토(나는 생각한다) 개념을 무의식의 주체를 포함한 모든 주체에 대해 타당한 지양 불가능한 모델로 간주하는 반면, 스피노자주의자인 알튀세르는 데카르트주의적인 주체 개념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에게 주체는 오히려 부르주아 철학의 첫 번째 범주를 이룬다.

질로의 글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 및 주체 개념에 미친 라캉의 영향과 그 한계를 간명하게 밝혀주고 있으며, 이런 측면에서 알튀세르의 철학을 라캉의 정신분석학의 “적용”으로 간주하는 국내 일부 라캉 연구자들의 몰이해를 바로잡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그 다음 영국의 철학자 피터 듀스는 「알튀세르와 구조주의, 그리고 프랑스 인식론 전통」에서 구조주의와 프랑스 인식론 전통의 맥락에서 알튀세르의 인식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영국 철학자로서는 보기 드물게 독일 관념론에서 하버마스에 이르는 근대 독일 철학 전통과 현대 프랑스 철학의 흐름에 모두 정통한 연구자답게 피터 듀스는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알튀세르의 맑스주의 재정초 작업이 어떻게 구조주의와 프랑스 인식론 전통에서 연원했으며 그 전통의 강점과 약점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지 세심하게 분석하고 있다.

듀스에 따르면 알튀세르의 인식론은 세 가지 이론적 원천을 통해 구성되었다. 하나는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확립된 구조주의다. 알튀세르는 구조주의를 비판하면서도 구조주의와 동일한 이론적ㆍ방법론적 전제를 공유한다. 곧 양자 모두 사회구성체를 구조들의 구조로 파악하며, 인간 개인을 이러한 구조의 단순한 담지자로 환원한다. 둘째는 바슐라르에서 유래하는 프랑스 인식론 전통으로, 알튀세르는 이러한 전통으로부터 인식론적 절단이라는 개념, 따라서 전(前)과학적인 이데올로기와 과학 사이의 근원적인 불연속성이라는 관념을 이끌어온다. 이러한 관념을 통해 알튀세르는 구조주의와 달리 역사의 과학성 및 과학의 역사성을 사고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구조주의적 전일론(全一論)에 사로잡혀 있는 까닭에, 이론과 경험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 더 나아가 현실과 이론 사이의 관계를 사고하지 못하고, 추상적인 이론의 차원에 머물러 있다.

셋째, 이는 알튀세르의 스피노자주의 때문에 훨씬 더 강화된다. 듀스에 따르면 스피노자 철학은 논리연역적 합리성만을 참된 합리성으로 간주하는 철학이며, 더 나아가 모든 현실 인식은 이러한 모델에 따라야 한다고 보는 독단주의적인 철학이다. 알튀세르의 이론의 기저에 존재하는 이러한 독단적인 전제 때문에, 결국 알튀세르의 인식론은 현실에 대한 설명력도 상실하게 되었고, 이론과 현실, 이론과 정치의 관계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다는 것이 듀스의 논점이다.

듀스의 글은 회고적으로 보면 영미 맑스주의자들이 알튀세르를 이해하는 관점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의 글에 대한 평가는 독자들의 몫이지만, 한 가지 덧붙인다면, 알튀세르에 대한 듀스의 비판은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진부한 관점(범신론 논쟁 당시 하인리히 야코비(Heinrich Jacobi)가 제시했던 관점)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런 측면에서도 알튀세르 사상에 대한 평가는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평가와 연동되어 있다.

세 번째 글에서 서동진은 「알튀세르와 푸코의 부재하는 대화」라는 제목의 글에서 알튀세르와 푸코 사이에 존재하는 기묘한 침묵을 문제 삼는다. 사실 알튀세르와 푸코 사이의 관계는 우호적이었지만 또한 침묵 속에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미묘한 관계였다. 알튀세르는 [“자본”을 읽자]를 비롯한 몇몇 글에서 푸코를 예찬했고, 푸코는 광기의 고독에 갇힌 과거의 스승을 정기적으로 방문했다. 하지만 푸코는 알튀세르를 인용하지 않았고 푸코에 대한 알튀세르의 예찬은 실질적인 이론적 원용을 결여한, 막연한 칭송이었다. 그럼에도 양자의 사상에는 또한 깊은 동질성과 친화성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서동진은 자유주의 국가 비판이라는 쟁점을 통해 양자 사이의 대화를 시도하는데, 이는 정치의 유물론의 가능성을 모색하려는 기획을 품고 있다. 그가 보기에 푸코와 알튀세르는 각자 국가의 통치화와 자본주의의 “사회 효과”라는 개념을 통해 자유주의 사회의 발생을 분석했으며, 행동방식의 통솔과 이데올로기적 호명을 통해 주체의 종속적 생산 메커니즘을 설명한다. 또한 국가를 법적이고 제도적인 것으로 간주하기보다 “장치의 유물론”이라고 할 만한 틀을 통해 파악했다. 따라서 두 사람은 서로 상이한 개념과 분석 방법을 동원하지만 결국 동일한 이론 체계를 구성했다고 결론 내려야 할까? 서동진은 오히려 푸코와 알튀세르가 공통으로 직면했던 한계를 지적한다. 그것은 선택의 선택을 실행할 수 있는 행위자, 정치의 유물론을 실행할 수 있는 “주체”라는 문제다. 이것은 푸코와 알튀세르 이후 계급투쟁을 어떻게 다시 사고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와 다르지 않다.

3부의 마지막 글에서 발리바르는 그의 두 명의 스승인 알튀세르와 데리다[발리바르는 그의 사상에 영향을 미친 네 명의 스승으로, 루이 알튀세르, 조르주 캉길렘, 장 이폴리트, 자크 데리다를 꼽은 바 있다. “넓게 말하자면 사실 나는 학생 시절에 네 사람의 위대한 스승을 만났습니다. 연대순으로 본다면 이폴리트와 알튀세르를 제일 먼저 만났고, 바로 뒤에 캉길렘을 만났으며, 데리다는 조금 나중에 만나게 됐습니다.” E. Balibar, “Philosophy and the Frontiers of the Political: A biographical-theoretical interview with Etienne Balibar”, Iris, vol. II, no. 3, 2010, p. 35. 발리바르와 데리다의 관계에 대해서는 같은 인터뷰 pp. 39 이하 참조.] 사이에서 실제로 전개되지는 않았지만 사고 가능한 하나의 “대결”(confrontation)을 추적한다. 하지만 이러한 대결은, 사람들이 어림짐작으로 생각하듯이 한 쪽을 일방적으로 편드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다층적인 지적ㆍ이데올로기적ㆍ제도적 관계로 연결돼 있었지만 생전에 서로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던 20세기 후반 프랑스 철학의 두 대가 사이의 가능한 대화를 모색해보는 일이다. 이것은 단순히 두 스승 사이의 지적 결산에 관심을 가진 한 제자의 지적 호기심이나 두 사람을 사상사 속에 편입시키려는 때 이른 시도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거대한 위력과 동시에 그 위기가 느껴지는 시기(2006년)에 맑스주의의 가능한 귀환을 예비하기 위한 시도다.

발리바르는 우선 알튀세르 유고의 핵심을 이루는 마주침의 유물론 또는 우발성의 유물론이 데리다 저작에서 실마리를 얻었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데리다는 󰡔맑스의 유령들󰡕에서 알튀세르적 맑스주의와 자신의 유령론 사이에 명확한 선을 긋는데, 그 핵심 쟁점은 목적론과 종말론 사이의 구별이다. 데리다에 따를 경우 알튀세리엥들은 목적론을 비판할 줄 알았지만, 해방의 사상과 운동에서 모종의 종말론(또는 말하자면 반(反)종말론적 종말론)이 필수적이라는 것은 깨닫지 못했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발리바르는 목적론과 종말론 구별의 중요성을 지적한 점에서는 데리다가 전적으로 옳지만, 알튀세르가 종말론을 피한 것은 그것에 담긴 목적 없는 목적성의 위험을 경계했기 때문이라고 응수한다.

하지만 결정적인 쟁점은 목적론과 종말론(그리고 반목적론과 반종말론) 맑스의 사상에 공히 존재하는 핵심 요소라는 점이다. 곧 맑스는 자본주의의 발전이 공산주의의 필연성을 낳는 것이 아니라 서로 모순되는 다수의 결말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또 때로는 파국적인 정세 속에서 보편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의 등장을 고대하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발리바르가 볼 때 알튀세르와 데리다의 “유예된 대화”가 오늘날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화를 통해 맑스의 사상 속에 내재한 목적론과 종말론의 요소들이 서로 뒤얽히는 까닭을 좀더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미래의 정치를 사고하기 위해 필수적인 요소다.

“알튀세르의 장래”라는 제목이 붙은 4부는 동시대 사상가들의 작업에 미친 알튀세르의 효과를 검토하면서 여전히 도래할 것으로 남아 있는 알튀세르 사상의 장래를 가늠해보는 6편의 글로 이루어져 있다.

4부의 첫 번째 글은 사회학자 서관모의 「알튀세르에게서 발리바르에게로: 이데올로기의 문제설정과 정치의 개조」라는 글이다. 지난 1990년대 초부터 20여 년 동안 줄곧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의 사상의 전개 과정을 추적해온 서관모는 윤소영과 더불어 한국의 알튀세르ㆍ발리바르 연구의 대표자라고 수 있는 연구자다. 그는 80여 쪽에 달하는 방대한 이 논문에서 지난 20여 년 동안 그가 수행해온 알튀세르와 발리바르 사상에 관한 연구를 집약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 긴 글을 요약하는 대신에 이 글이 지닌 의미에 대해 간단히 지적해두기로 하자. 이 글은 우선 80년대 이후 발리바르 사상의 전개과정에 대한 포괄적 평가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발리바르가 국내에 소개된 이후 그의 사상에 대한 부분적인 논의나 적용의 시도들은 다수 존재했지만, 30여년에 걸친 발리바르의 작업에 대한 포괄적인 정리와 평가의 시도로는 이 글이 처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이 글은 앞으로 국내의 발리바르 연구를 위한 필수적인 출발점의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한다. 이 글의 또 다른 미덕은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의 주요 개념들에 대한 정교한 분석 및 세심한 번역의 시도를 담고 있다는 점이다. 그동안 국내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되고 번역되던 “비의식”(inconscience), “지배 내 구조”(structure à dominante), “우세”(dominance), “과잉결정”(surdétermination), “과개인적(跨個人的”(transindividuel), “시민윤리성”(civilité) 등에 관해 필자는 세심한 논거들을 제시하면서 독자적인 번역을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용어 선택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겠지만, 알튀세르와 발리바르 사상의 이해를 위해서나 정확한 학술 용어의 정착을 위해서나 필자의 이러한 시도는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바디우 연구자인 서용순은 「알튀세르와 바디우: 정치적 주체성의 혁신을 위하여」라는 제목의 글에서 알튀세르와 바디우가 서로 만나고 갈라지는 지점들을 탐색한다. 서용순은 이를 위해 “국가와 혁명”이라는 출발점을 선택한다. 맑스주의 국가론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알튀세르는 연속과 단절의 지점에 놓인다. 국가를 계급 지배의 도구로 간주하는 점에서는 연속적이지만,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를 국가의 본질적 요소로 간주하는 점에서는 차이가 있다. 바디우는 여기에서 훨씬 더 나아가 국가를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파악하며, 이로써 맑스주의에서 벗어난다. 서용순에 따르면 두 사람은 국가 소멸을 주장하는 고전 맑스주의와 달리 국가의 영속성을 주장한다는 점에서도 공통적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점은 두 사람이 경제주의적인 계급투쟁 개념에서 벗어나 공통적으로 주체성의 정치를 추구한다는 점이다. 바디우는 알튀세르의 철학에 대한 재정의과잉결정 개념에서 주체성의 정치를 위한 요소를 발견하며, 이를 더욱 확장하여 마침내 계급적 주체 대신 대상 없는 주체 개념에 이르게 된다. 이것은 “오로지 사건과 진리의 변전을 통해 성립하는 주체, 진리에 대한 충실성으로 새롭게 정의되는 주체이다.” 따라서 서용순에 따르면 알튀세르는 고전 맑스주의에서 바디우로 나아가는 가교의 역할을 하는 셈이며, 역으로 바디우는 알튀세르라는 이론적 기반을 바탕으로 맑스주의에서 벗어났다고 할 수 있다. 서용순의 이 글은 앞으로 바디우의 정치철학에 대한 토론을 위한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줄 것으로 보인다.

알튀세르와 랑시에르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일은 박기순이 맡았다. 1965년 [“자본”을 읽자]의 공동 저자로 참여했지만, 1974년에는 [알튀세르의 교훈]이라는 책을 통해 일종의 “스승 살해”를 감행한 랑시에르는 알튀세르와 관련된 사상가들 중 가장 문제적인 인물이 아닐 수 없다. 박기순은 이러한 철저한 결별의 태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그것은 이러한 결별이 랑시에르 사상의 방향을 결정적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기순에 따르면 랑시에르가 알튀세르에게서 발견한 것은 지식인의 엘리트주의였다. 곧 대중들은 스스로 사고할 수 없으며 사고의 몫은 오직 지식인에게만 돌아간다는 전제가 알튀세르의 저작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랑시에르는 [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의 재독해를 통해 알튀세르의 철학이 플라톤에서부터 내려오는 지식인과 대중의 분리,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분리를 되풀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알튀세르 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이데올로기론은 이를 잘 보여준다. 왜냐하면 그 이론이 결국 말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적인 허위의식으로 인해 대중은 자신의 계급적 위치를 제대로 포착하지 못하며, 이러한 인식을 위해서는 지식인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알튀세르 사상은 실제로는 대중의 정치, 주체화를 사고 불가능하게 하는 철학이다.

이러한 랑시에르의 비판에 대해 지나치게 단편적이라든가 또는 외삽적이라는 반비판도 가능할 것이고, 역으로 랑시에르의 철학이 알튀세르에게 본질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입증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비판이 알튀세르 사상을 재고찰하기 위한 계기를 제공해주는 것은 분명하며, 대중 운동과 대중 정치의 기초를 새롭게 사고하기 위한 시사점을 던져준다는 점 역시 인정해야 할 것이다.

1990년대 이후 알튀세르의 사상이 소멸의 위기에서 벗어나 기억의 실마리를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일정 부분 슬라보예 지젝을 비롯한 이른바 ‘슬로베니아 학파’ 및 주디스 버틀러의 작업 덕분이다. 이들이 알튀세르를 과연 정확히 이해했는지 여부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적어도 이들의 작업은 알튀세르의 사상을 새로운 각도에서 재조명하고 새로운 문제설정에 따라 재활용함으로써, 윌름가의 철학자에게 다시 한 번 호명될 권리부여했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최원은 2010년의 화제작인 "인셉션"을 실마리로 삼아 슬로베니아 학파와 버틀러의 알튀세르 재전유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인셉션인가, 호명인가? 슬로베니아 학파, 버틀러, 알튀세르」라는 흥미로운 글에서 그는 테리 이글턴과 지젝, 돌라르 등이 알튀세르의 호명 개념에 대해 제기한 비판에서 논의를 시작한다. 슬로베니아 학파의 비판의 핵심은 알튀세르의 호명 이론이 악순환에 빠져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주체가 자신의 호명을 인지하기 위해 그는 이미 주체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원에 따르면 이러한 비판은 발생과 돌발이라는 범주를 구별하지 못한 데서 생기는 것으로, 발생에 맞서 돌발이라는 범주를 중시하는 알튀세르의 관점에 따르면 “X에 앞선 X”라는 형태의 순환, 이러한 “무한 계단”은 호명을 생산하거나 가능하게 만든 원인이 아니라 그것의 효과로서, 그 자체 호명에 의해 생산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는 마치 “내가 태어나기 전에 나는 어디 있었어?” 하고 묻는 천진한 어린아이의 물음과 같은 것이다. 다른 점에서는 돌라르를 비판하는 버틀러 역시 이러한 혼동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것은 최원에 따르면 버틀러가 유물론적 담론 이론이 아니라 수사학에 근거하여 자신의 이론을 전개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최원에 따르면 유물론적 호명 이론을 위해서는 여전히 알튀세르와 미셸 페쇠의 이론에 근거하는 것이 더 낫다.

지젝은 「알튀세르와 포스트맑스주의: 라클라우와 지젝의 논쟁」이라는 제목이 붙은 김정한의 글에서 다시 한 번 검토의 대상이 된다. 그는 이번에는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의 논쟁의 상대자로서 등장한다. 사실 지젝이 영미 이론계에 처음 소개된 것은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샹탈 무페가 버소 출판사에서 펴내는 “프로네시스Phronesis” 총서에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을 출판하게 되면서부터였고 라클라우가 이 책에 「서문」을 써주었을 뿐만 아니라 적어도 90년대 초까지 이들이 서로 공동의 문제설정에 따라 함께 작업을 수행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2000년대 후반 이후 왜 이 두 사람이 지적인 앙숙이 되었는지는 퍽 흥미로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김정한은 지젝과 라클라우의 논쟁을 꼼꼼하게 검토하면서 이들 사이의 쟁점을 간명하게 밝혀내고 있다. 그에 따르면 양자 사이의 논쟁은 적대 개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에 관한 논쟁으로, 라클라우가 헤겔 없는 라캉을 요구한다면 지젝은 헤겔과 함께 라캉을 읽기를 원한다. 그 결과 라클라우는 적대를 상징계의 효과로 파악하는 반면, 지젝은 상징계를 구조화하는 원리로서 “실재”에 위치시킨다. 라클라우가 더 많은 민주주의를 위한 헤게모니 투쟁을 추구한다면, 지젝은 반자본주의적 계급투쟁을 중시하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두 사람의 입장이 알튀세르의 과잉결정 개념에 대한 상이한 해석의 결과라는 점이다. 라클라우가 최종 심급 없는 과잉결정 개념을 옹호한다면, 지젝은 라캉의 실재로 이해된 최종 심급 개념을 과잉결정과 결부시키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알튀세르는 여전히 “살아 있는 유령”으로서 포스트 맑스주의의 무대를 배회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전언이다.

최원과 김정한의 글은 모두 현대 영미 인문사회과학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사상가들의 작업 속에서 여전히 알튀세르의 문제설정이 중요한 준거로 작용하거나 대안으로 존재할 수 있음을 설득력 있게 해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 두 글이 알튀세르 사상만이 아니라 현대 영미 이론계의 논쟁을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이 책은 「알튀세르와 서발턴 연구」를 다루는 안준범의 글로 마무리된다. 알튀세르 사상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추고 있고 서발턴 연구에 대한 국내의 주요 소개자 중 한 사람인 안준범이야말로 이 주제를 다루기에 가장 적합한 연구자가 아닐 수 없다.

그는 스피박을 거쳐 라나지트 구하로 가는 길을 선택한다. 스피박이 길잡이가 된 것은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라는 저 유명한 글에서 그가 알튀세르와 마슈레를 서발턴 의식에 고유한 침묵의 언표를 읽기 위한 근거로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준범은 스피박 전후로 서발턴 연구를 구분하는 통설에 거슬러, 서발턴의 ‘불가능한 역사’를 서술하는 작업을 이미 구하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에서 알튀세르, 특히 그의 징후 독해라는 개념이 독창적으로 ‘번역’된다. “텍스트 안에서 드러나지 않은 것을 필연적 부재라는 양상으로 현존하는 것으로 드러내는” 것이 징후 독해라면, 반(反)봉기의 담론 속에 산재되어 현존하지만, 반봉기 담론이 구조적 무능력으로 인해 읽지 못하는 봉기 의식의 흔적을 읽어내려는 구하의 서발턴 역사학은 징후 독해 개념을 원래의 맥락과 전혀 다른 곳으로 전위시키고 이식한, 따라서 그것을 재창조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서발턴 연구도 드물고, 이제는 알튀세르에 관한 논의도 드문 이곳에서 안준범에 의해 우발적으로 이루어진 구하와 알튀세르의 마주침, 이것이 앞으로 어떤 효과들을 생산할지 지켜보기로 하자.

 

***

 

이 책을 엮으면서 새삼 국내 인문사회과학계에 미친 알튀세르의 효과가 상당히 깊고 넓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이것은 무엇보다 이 책에 참여한 10명의 필자들이 각각의 분야에서 이 정도 수준의 독창적이고 개성 있는 논의들을 제시했다는 사실로 입증될 수 있다. 이 책에는 외국학자의 글 9편과 국내 학자의 글 10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엮은이로서 자부심과 보람을 느끼는 것은,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외국 학자들의 글과, 국내 알튀세르 연구자들의 글 사이에서 거의 차이를 느낄 수 없을 만큼 높은 수준의 글들이 여럿 수록되었다는 점이다. 다시 한 번 이 논문집을 위해 좋은 논문을 기고해준 필자들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마지막으로 엮은이로서 바라는 것은, 이 책의 제목인 “알튀세르 효과”가 단지 과거 시제로 남게 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그러한 효과는 현재 시제로 촉발되고 확산되고 심화되어야 할 뿐 아니라 미래에도 거듭 다시 일어나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이 책에서 다루어야 했지만 다루지 못한 주제들(가령 몽테스키외나 루소에 관한 논의, 법에 관한 문제, 하이데거와 알튀세르의 부재하면서 현존하는 관계, 알튀세르와 페미니즘의 관계 등), 더 나아가 미처 착상도 하지 못한 주제들이 남긴 공백을 메우는 데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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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슴츠레 2011-11-04 2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선생님 지원입니다. 막 서문을 다 읽었는데 쏟아지는 쟁점들에 정신을 못차리겠네요. 이런 글들 중 한편을 읽고 하루는 생각하고 하루는 이야기를 나누는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네요. 글쓴이나 엮은이나 편집한 이나 모두 너무너무 수고많으셨습니다.

balmas 2011-11-05 00:11   좋아요 0 | URL
오랜만이다. 잘 지내는지 궁금하구나. 잘 지내다보면 나중에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이 오겠지. 건강해라.

양창렬 2011-11-09 0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선배님, 공들여 쓰신 서문 잘 읽었습니다. 편집부에서 걸러내겠습니다만, French Theory: How Foucault, Derrida, Deleuze, & Co.의 저자가 François Cusset가 아닌지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수고하셨습니다!

balmas 2011-11-09 03:59   좋아요 0 | URL
양창렬 형 오랜만이에요.^^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합니다. 논문 쓰느라 힘들텐데, 건강은 잘 챙기고 있는지도 궁금하고. 늘 "전미래 시제"로 생각하면서 조금만 더 힘냅시다. :)

지적 고마워요. 내가 얼마전에 Yves Citton 책을 좀 읽었더니, 프레농이 섞여버린 듯. ㅎㅎ
 
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
자크 랑시에르 지음, 허경 옮김 / 인간사랑 / 2011년 9월
평점 :
품절


이 글은 오는 11월 5일 (토)부터 경향신문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명저 새로 읽기"에 실릴 서평입니다.

신문에는 지면상 다소 축약된 글이 실릴 예정입니다.

새롭게 번역된 책이 또 상당한 오역본이라는 점은 정말 유감스럽습니다.

출판사에서 좀더 책임감을 가져주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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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는가?

 

자크 랑시에르에 대한 관심이 대단하다. 지난 2008년 방한할 때까지 국내에 랑시에르를 아는 사람은 거의 드물었다. 하지만 방한과 함께 [무지한 스승],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가 출간된 이후 불과 2년여만에 10여권의 저작이 소개되고 문학계에서는 그를 둘러싼 논쟁이 뜨겁다.

왜 랑시에르가 이렇게 주목받을까? 그것은 철학, 문학, 정치, 역사, 영화 등을 가로지르는 그의 독창적인 글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정치, 특히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사유가 깊이 있고 신선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성찰이 집약된 책이 [불화]라면, [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는 좀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들에 대한 분석과 비평이 담겨 있는 책이다.

그가 우선 문제 삼는 것은 최근 저명한 프랑스 지식인들(장-클로드 밀네르, 베니-레비 등)이 제기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고발이다. 이들에 따르면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무정부주의의 과잉(자유와 권리를 누릴 만한 자격이 없는 무리들의 방종)과 무제한적인 소비(재화, 향락 등을 무제한적으로 추구하려는 성향)라는 이중의 과잉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이는 곧 민주주의가 문명의 중심에 내재하는 원죄 내지 도착(倒錯)임을 말해준다. 따라서 공산주의의 몰락 이전에는 전체주의가 문제였다면, 이제는 “대중적 개인주의”로서의 민주주의 자체가 문제다.

하지만 랑시에르에 따르면 민주주의에 대한 이들의 증오는 사실은 평등한 집단인 인민에 대한 공포이자 그들이 구현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공포의 표현이다. 플라톤 이래 서양 정치사상의 지속적인 공리 중 하나는 대중에게는 통치 능력이 결여되어 있으며, 이 때문에 민주주의는 위험한 정체(政體), 곧 독재나 전체주의로 전락할지도 모르는 정체라는 점이다. 따라서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는 사실은 “과두제적인 통치에 대한 본성적 충동”, 곧 “인민을 몰아내고 정치를 몰아내려는 충동”(169쪽-번역은 수정)의 발현이며, 인민 없는 통치, 곧 정치 없는 통치에 대한 열망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정말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이 민주주의 때문에 생겨나는 일일까? 아니면 오히려 민주주의의 결핍 때문에 생겨나는 일일까? 우리는 흔히 민주주의의 기준으로, 개인의 권리 보호, 사유재산 보장, 법치, 주기적인 선거, 권력 분립 등으로 꼽는다. 중요한 기준들이다. 하지만 이것들만으로는 현재 세계 전역에서 민주주의가 겪고 있는 위기가 설명이 되지 않는다. 왜 흔히 민주주의가 가장 발전했다고 말하는 서유럽과 미국 같은 나라들에서 소수의 금융 권력이 거대한 부를 독점하고, 인종주의 테러와 이민자 추방, 정치권의 부패와 비리 같은 현상들이 나타날까?

따라서 랑시에르는 문제의 원인을 다른 곳에서 찾는다. 곧 “우리의 “민주주의들”이 겪고 있는 악은 무엇보다 소수 지배자들의 게걸스러운 탐욕과 연결된 악”(156쪽)이다. 우리는 지금 “민주주의에서 살고 있지 않”고 오히려 “과두제적 법치국가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모든 국가는 과두제 국가다. 그럼에도 과두제 국가에 민주주의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통치자들이 선량하거나 뛰어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인민이 권리를 얻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기 때문이다. 대의제가 과두제 권력의 단순한 도구에서 벗어난 것 역시 인민이 행위를 통해 실질적 대표성이 관철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과 시민의 권리”라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현실을 부여하는 사람들의 권리다.”(158쪽) 민주주의란 자신과 타인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이들의 행위 자체인 것이다.

이 책은 지난 2009년 같은 출판사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가 심각한 오역 때문에 거센 비판을 받고 출판사 스스로 수거ㆍ폐기한 바 있다. 그럼 새로 번역된 이 책은 사정이 훨씬 좋아졌을까? 평자의 생각으로는, 지난 번 오역본보다는 상태가 다소 좋지만 학문적으로 평가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번역이다. 이런저런 다수의 오역들이 곳곳에서 눈에 띌뿐더러, “이중구속”을 뜻하는 “double bind”를 같은 페이지에서 한번은 “이중적인 모습”으로, 한번은 “이중적 연계”(74쪽)라고 번역하거나, 존 케네스 갈브레이스를 “프랭크 갈브레이스”(60쪽)로, 울리히 벡을 “율리츠 벡”(193쪽)으로 표기하는 등의 사례도 보인다. 이는 역자의 잘못도 있겠지만, 그에 앞서 출판사 편집부의 기본 소양에서 비롯한 문제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역자보다 편집부를 바꿔야 하는 것일까? 제대로 된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를 읽기 위해서는 세 번째 번역을 기다려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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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초에 나올 [정치체에 대한 권리] 역자 후기를 올립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아주 감동적으로 읽은 책이고 또 번역도 즐겁게 했던 책인데, 

독자 여러분에게도 행복한 독서의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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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후기: 수구 세력이 반역을 독점하게 만들지 말자



여기 우리가 펴내는 {정치체에 대한 권리}는 에티엔 발리바르의 저작 중에서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책이다. 가령 그의 주요 저작들 중에서 이매뉴얼 월러스틴과 공동으로 저술한 {인종, 국민, 계급: 애매한 정체성들}[Etienne Balibar & Immanuel Wallerstein, Race, nation, classe: Les identités ambiguës, La Découverte, 1988; {인종, 국민, 계급: 애매한 정체성들}, 진태원 옮긴, 그린비, 2012 에정]은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맹목점으로 남아 있던 인종, 국민의 문제를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재조명한 저작으로 오늘날 인문사회과학의 확고한 고전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대중들의 공포}(1997)는 이데올로기 개념의 동요를 중심으로 역사적 마르크스주의를 해체하고, 폭력, 경계/국경, 인종주의, 보편성 등의 문제를 통해 현대 정치철학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하는 문제작으로 1990년대 프랑스 철학계의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한 권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우리, 유럽의 시민들?}은 출간되고 나서 곧바로 영어를 비롯한 유럽의 주요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유럽 연합과 관련된 논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바 있다.

반면 {정치체에 대한 권리}는 이런 저작들에 비하면 덜 알려져 있을뿐더러 영어를 비롯한 다른 언어로도 별로 번역되지 않은 책이다. 그렇다면 굳이 서양의 다른 나라들에도 널리 소개되지 않은 이 책을 한국어로 번역해서 출간할 필요가 있을까? 어떻게 보면 이런 의문이 드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럼에도 역자가 이 책을 완역하여 출간하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책은 실천가, 활동가로서 발리바르의 면모를 가장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책이라는 점이 의미가 있다. 발리바르는 그 세대의 프랑스 철학자들(알랭 바디우, 자크 랑시에르, 장-뤽 낭시, 피에르 마슈레 등) 중에서는 국내에 가장 일찍 소개되고 또 가장 많이 읽힌 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동안 국내에 소개된 그의 저작들은 대개 아주 높은 수준의 이론적 논의를 담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독자들로서는 발리바르가 어떤 실천적인 문제의식을 통해 그의 철학적 사유를 전개하게 되었는지, 그의 추상적인 논의 속에는 어떤 정세적ㆍ실천적 경험들이 녹아 있는지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반면 이 책은 90년대 이후 발리바르 사상의 주요 요소들이 어떻게 구체적인 정세에 대한 참여와 분석을 통해 형성되었는지 명료하게 보여주고 있다.

특히 「서문」 바로 다음에 나오는 「시민불복종에 대하여」와 「우리가 “미등록 체류자들”에게 빚지고 있는 것」이라는 두 편의 글은 분량은 매우 짧지만 매우 강렬하고 생생하게 활동가 발리바르의 목소리를 전해주고 있다. 이 두 편의 글에서 발리바르는 이른바 “불법체류자” 내지 미등록 체류자를 실정법의 관점에서 무조건적인 단속이나 추방의 대상으로 삼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보호하는 사람들까지도 처벌의 대상으로 만드는 프랑스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여 왜 프랑스 시민들이 시민불복종 운동에 나서야 하는지, 매우 감동적으로 역설하고 있다. 또한 「민주주의적 시민권인가 인민주권인가?」와 더불어 이 책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국민우선에서 정치의 발명으로」에서는 평범한 시민들에게 차근차근 설명하듯이 1980년대 이후 프랑스 극우 정당인 국민전선이 세력을 점차 확장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며, 국민전선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왜 정치의 재발명이 필수적인지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분석하고 있다.

그리고 발리바르는 이러한 정세적ㆍ실천적 경험을 기록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러한 경험을 기반으로 현대 세계가 직면한 근본적인 정치적ㆍ윤리적 쟁점을 개념화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집약해서 말한다면 시민불복종이 어떤 의미에서 국가 또는 정치체의 토대를 구성하는지 이론화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정치체의 토대로서 시민불복종이라는 생각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너무 소박한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방종과 일탈, 불법 행동을 조장하려는 무책임한 발상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왜냐하면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나 최근 몇몇 정치철학자들에게서 볼 수 있듯이 종말론적 관점을 견지하는 사람들에게 시민불복종은 계급투쟁이나 혁명 같은 본질적인 개념에 비하면 얼마간 사소한 도덕적 저항이거나 심지어 기본적으로 부르주아적 질서의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개혁의 시도에 불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법치국가의 원칙과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질서를 수호하려는 입장에서 본다면, 여타의 불법 행위와 하등 다를 바 없는 시민불복종 행위는 정치체의 근본을 뒤흔드는 행위일 뿐 어떤 의미에서도 그 토대로 간주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발리바르의 관점은 양쪽 모두에게 비난받기 좋은 입장일 것이다.

발리바르의 이러한 관점이 어떤 이론적 기초에서 비롯했고 또 얼마나 다면적인 구조적ㆍ정세적 분석들을 전제하는지 여기서 길게 논의할 생각은 없다. 이 점에 관해서는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독자들이 스스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 책은 발리바르의 다른 어떤 책들보다 더 구체적이고 평이하게 서술되어 있기 때문에 교양 대중들 스스로 이 책을 충분히 읽어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이나 종말론적 정치철학의 관점 및 그 반대편의 관점들에 비해 발리바르의 입장이 지닌 강점과 의의에 대해서도 굳이 상세하게 논의할 생각은 없다. 이런 문제는 별도의 자리에서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점은 간략히 지적해두는 게 좋을 것 같다. 시민불복종을 정치체의 토대로 사고하려는 발리바르의 관점은 한편으로 정치체를 시민권 헌정constitution of citizenship으로 개념화하는 것에 근거하고 있으며[이 점에 관해서는 발리바르, {우리, 유럽의 시민들?}, 진태원 옮김, 후마니타스, 2010에 수록된 「역자 해제」 중 특히 455쪽 이하 참조.], 다른 한편으로는 “시민권=국적”이라는 등식이 근대 정치체(곧 국민사회국가[발리바르가 사용하는 ‘국민사회국가’ 개념의 의미에 대해서는, 발리바르, {우리, 유럽의 시민들?}, 앞의 책에 수록된 「용어해설」을 참조])의 핵심을 이룬다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정치체를 시민권 헌정으로 개념화하는 것은, 정치체가 자연적(혈통과 같은)이거나 초월적인 기초(종교와 같은)를 갖지 않으며 오직 시민들 자신의 호혜적인 상호 구성 활동을 기반으로 삼는다는 것을 뜻한다. 특히 근대 정치체는, 프랑스 혁명이나 미국 혁명에서 보듯이 봉건적인 예속 관계를 철폐하고 평등하고 자유로운 정치 공동체를 형성하려는 시민들 자신의 봉기적 행위에 근거하여 성립했다. 따라서 이렇게 성립한 헌정 질서는 시민들의 봉기를 자신의 정당성의 원천으로 삼고 있으며, 헌법을 비롯한 법률 문헌 안에 그 흔적을 기록해두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시민불복종을 정치체의 토대로 개념화하려는 발리바르의 관점은 무책임하게 방종과 불법행위를 조장하려는 발상이라기보다는 저항권에 입각하여 헌정 질서의 정당성을 새롭게 파악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러저러한 정부의 정책이 헌정의 정신을 위반하거나 그것을 위태롭게 할 때 헌정 자체의 이름으로 그것을 바로잡으려는 행위는 정치체의 근본을 뒤흔드는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헌정의 토대에 입각하여 헌정 질서를 재구성하려는 시도이며, 시민성을 재발명하려는 시도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시도가 오류나 과오 또는 무책임한 방종으로 판명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으며, 시민불복종의 주체들은 이러한 위험의 책임을 스스로 감수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위험을 무릅쓰고 통치자들의 부당한 정책이나 그릇된 실정법에 저항하려는 자세야말로 능동적 시민성의 핵심을 이루며, 따라서 헌정의 토대를 이룬다는 것이 발리바르의 관점이다.

다른 한편 이 책에서 문제가 되는 시민불복종 행위가 프랑스 시민들에 대한 정부의 압제에 대항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른바 ‘불법 체류자들’, 곧 프랑스 시민들의 타자들에 대한 억압에 대항하여 이루어진 행위라는 점이 또한 중요하다. 이러한 행위는 인간의 보편적 존엄성, 국적과 인종 등에 상관없이 평등과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모든 개인의 보편적 인권에 기반을 둔 고귀한 인도주의적 행위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하지만 좀더 적극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이러한 시민불복종 행위는 타자에 대한 억압이 근대 정치체의 모순(시민권=국적)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했다는 점 역시 중요하다. 다시 말해 이러한 행위의 의의는 무엇보다도 이러한 모순이 타자들의 인권 및 시민권만이 아니라 프랑스 시민들 자신의 인권과 시민권 역시 제약하고 있다는 인식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따라서 근대 정치체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좀더 민주주의적인 새로운 시민권 헌정을 구성하려는 시도와 연결된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1990년대 이래로 발리바르가 자신의 저작들에서 지속적으로 강조해온 것처럼, 이러한 새로운 시민권 헌정은 더 이상 국민국가의 질서 위에서만 구성될 수는 없다. 시민권을 국적nationality 내지 국민됨nationhood의 틀로 한정하려는 근대 국민국가에 고유한 정치 논리는 이미 처음부터 시민권의 보편성을 함축하는 그 토대와 모순적일 수밖에 없었으며, 세계화가 본격화되고 이주가 일반화하면서 국민사회국가의 모순은 한층 더 첨예한 형태로 드러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국민주권의 약화에 대한 대응으로 국민적 정체성을 강화하고 외국인을 배척하려는 수구적 국민주의 및 인종주의가 유럽 전역에서 확산되고, 유럽의 아파르트헤이트(더 나아가 범세계적인 아파르트헤이트)의 장벽이 세워지면서 수많은 외국인들/이방인들(특히 무슬림들 및 아프리카인들)이 물질적ㆍ상징적 폭력의 대상으로 내몰리는 것은 국민사회국가의 모순이 절정에 이르렀음을 말해준다. 최근 노르웨이에서 일어난 충격적인 인종주의적 테러 사건은 유럽의 그 어느 나라도 이러한 모순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따라서 발리바르가 프랑스 시민의 타자들에 대한 억압에 맞서 전개된 1996-97년의 시민불복종 운동에 주목하는 것은, 그것이 관(貫)국민적transnatinal 민주주의 운동, 관국민적 시민성의 실천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관국민적이라는 것은, 국민국가의 종언이나 소멸을 의미하지 않으며, 또한 국민과 외국인/이방인의 차이를 완전히 철폐하거나 국경의 무조건적인 개방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근대 정치의 구조적 조건으로 가정돼 있는 국경/경계의 제도가 단지 대외적인 지리적 경계를 중심으로 우리와 타자를 구별하는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정치체 내부에서 시민들의 민주주의적 삶의 질서를 제약하고 심지어 억압하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분석에 기반을 두고 있다. 따라서 “문제는 국가적인 국적이 시민성을 가두고 조건 지을 것인가 아니면 규정되어야 할 한도 내에서 시민성이 국적을 넘어서 그것을 상대화할 것인가 여부다. 어디서 그리고 누구를 위해 시민성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어떤 조건들 속에서 새로운 시민권 제도가 우리로 하여금 모순적인 두 가지 요구, 곧 차이에 대한 권리라는 요구와 차이로부터 차이화할 권리라는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게 해줄 것인가?”(101-102쪽)

그렇다면 발리바르가 말하는 관국민적 민주주의는 두 가지 차원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그것은 근대적 정치체로서 국민사회국가의 토대를 이루는 능동적 시민성의 차원을 복원하려는 뜻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능동적 시민성은 국민적인 것의 틀 속에서는 실체화된 단일한 인민주권과 논리적으로 연결돼 있다. 따라서 다른 한편으로 관국민적 민주주의는 이러한 실체화된 인민주권을 다양체로서의 우리(237쪽)로 탈-구축해야 하며, 시민들의 공동체를 “운명공동체”로, 곧 “공동체 없는 공동체, 미리 존재하는 공동체적 실체 없는 공동체, 주권의 초월성 없는 공동체”(240쪽)로 재건설해야 하는 과제를 포함하게 된다. 이러한 과제는 단지 국가적인 수준만이 아니라 지역적 수준, 초국가적 내지 국제적인 수준에서 동시에 수행되어야 할 과제다. 역자는 이러한 발리바르의 통찰이 2000년대 이후 한국 정치의 현상들을 설명하는 데서나 그러한 현상들이 표출하는 문제들에 대한 해법을 사고하는 데서 귀중한 시사점을 제공해줄 수 있다고 믿는다.

***

이 책에서 발리바르가 사용하는 주요 개념들에 대해서는 이미 {우리, 유럽의 시민들?}에 덧붙인 「용어해설」에서 설명해놓았기 때문에 이 책에는 별도의 「용어해설」을 수록하지 않았다. 다만 {우리, 유럽의 시민들?}과 몇 가지 달라진 번역어들이 있기 때문에, 그 이유에 대해 간략히 해명해두겠다.

먼저 civilité의 경우 이전에는 발음만 옮겨서 ‘시빌리테’라고 번역했는데 이 책에서는 ‘시민다움’이라는 번역어를 사용했다. 시민다움이라는 개념의 의미에 관해서는 다른 책에서 좀더 상세하게 설명하기로 하고[에티엔 발리바르, {폭력과 시민다움}, 진태원 옮김, 난장, 근간 참조], 여기서는 이러한 번역어를 택하게 된 이유를 간략히 밝혀보겠다. 우선 발리바르는 시빌리테 개념을 citoyenneté 개념, 곧 시민성/시민권이라는 개념과 긴밀하게 결부시켜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말 번역에서도 이러한 긴밀한 연관성이 드러날 수 있어야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시민다움’이라는 번역어가 이러한 상호 연관성을 표현하는 데 가장 적절한 것 같다. 곧 ‘시민다움’이라는 번역어는 발리바르가 사용하는 시빌리테 개념이 시민(곧 정치적 주체)의 본성 및 그 법적, 제도적 틀을 뜻하는 시민성/시민권 개념과 관련하여, 시민의 정치 윤리를 지칭하는 개념이라는 점을 잘 드러내 주는 것으로 보인다. 주지하다시피 우리말에서 ‘~답다’나 ‘~다움’은 본질이나 동일성을 표현하는 것을 넘어 당위나 책임 같은 윤리적ㆍ규범적 함의를 지니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시민다움은 시민성/시민권이라는 개념과 맞짝을 이루면서 후자가 지닌 윤리적 함의를 드러내는 개념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본다.

둘째, 영어의 시빌리티civility나 프랑스어의 시빌리테라는 말은 철학적인 개념이기 이전에 일상어로서 널리 사용되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말로 번역할 때에도 시빌리테라는 용어 자체는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단어라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이 용어를 사용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개념화하고 이를 통해 기존의 용법과 어떻게 차이를 두느냐 하는 점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시빌리티 내지 시빌리테의 번역은 일차적으로 이 용어들의 일상성을 살릴 수 있어야 하는데, 기존에 사용된 ‘시민인륜’이라는 번역어보다는 시민다움이라는 말이 좀더 적절하지 않은가 생각한다.

citoyenneté 개념의 경우 {우리, 유럽의 시민들?}에서는 줄곧 ‘시민권’으로 번역했는데, 이러한 번역은 citoyenneté에 담긴 이중적 함의, 곧 정치적 활동의 주체로서 시민을 뜻하는 주체적 함의와 시민의 권리와 의무에 관한 제도적 함의를 온전히 살리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경우에 따라 ‘시민성’과 ‘시민권’이라는 번역어를 함께 사용했다.

또한 nation, nationalisme, ethnicité에 대한 번역에서도 이전과 다소 차이가 존재한다. {우리, 유럽의 시민들?}에서는 nation은 대부분 ‘국민’으로 옮겼고 nationalisme은 대개 ‘민족주의’로, 그리고 ethnicité는 ‘종족성’이나 ‘종족체’로 번역했다. 하지만 이 문제에 관해 좀더 숙고해본 결과 좀더 정확하고 일관성 있는 입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nationalisme은 ‘국민주의’로, ethnicité는 ‘민족성’이나 ‘민족체’로, 그리고 ethnique는 ‘민족적’으로 옮기는 것이 더 낫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사실 nation을 ‘국민’이라고 번역하면서 nationalisme은 단순히 ‘민족주의’로 번역하거나 또는 ethnicité를 ‘종족성’이나 ‘종족체’로 옮기는 것은 용어들의 통일성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있을 뿐만 아니라 개념적 일관성이라는 점에서도 적절치 않다.

다만 대개 ‘종족적 민족주의’로 번역되는 ethnonationalisme의 경우는 ‘민족적 국민주의’를 뜻하기 때문에 줄여서 ‘민족주의’로 번역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프랑스 극우정당인 국민전선이 표방하는 “프랑스인들의 프랑스” 같은 노선이 이러한 의미의 ‘민족주의’를 잘 드러내준다. 또한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단일 민족’의 신화에 기반을 둔 우리나라의 통상적인 ‘민족주의’ 관념 역시 이러한 의미의 민족주의에 가깝다.

따라서 역자가 보기에는 nationalism을 단순히 ‘민족주의’로 이해하기보다는 ‘국민주의’와 ‘민족주의’로 분류해서 이해하는 것이 현대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현상들을 좀더 다면적으로 분석하기 위해서는 더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이 점에 관해서는 이미 다른 글에서 비교적 상세하게 다룬 적이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더 부연하지 않겠지만[이 문제에 대한 역자의 관점은 다음 글을 참조하기 바란다. 진태원, 「어떤 상상의 공동체? 민족, 국민 그리고 그 너머」, {역사비평} 96호, 2011년 가을호. 참고로 이 글은 국사학자들 및 서양사학자들과의 토론 및 논쟁을 위해 집필한 글인데, 후속 논쟁을 통해 nation, nationalism, ethnicity 등에 관한 쟁점들이 좀더 분명히 해명될 것으로 기대한다], 발리바르 정치철학의 독창성을 더 분명히 파악하기 위해서나 현대 정치(철학)의 쟁점을 구체적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나 nation, nationalisme, ethnicité, racisme에 관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전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믿는다.

끝으로 한 가지 더 덧붙인다면, 이 책에서는 이전에 ‘동일성’이라고 번역했던 identité라는 단어를 대부분 ‘정체성’이라고 옮겼다. ‘동일성’이라는 번역어가 identité에 함축된 어원적 의미라든가 이 단어가 지닌 다양한 함의를 표현하기에 더 적절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책을 비롯한 발리바르의 저작에서 이 단어가 주로 ‘정체성’이라는 의미(국민적 정체성, 인종적 정체성, 개인적 정체성 등)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말의 일상 어법을 고려할 때 ‘동일성’보다는 ‘정체성’이라는 번역어가 발리바르의 논점을 좀더 분명히 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렇게 새로 채택한 번역어들이 과연 이전의 번역어들보다 더 나은 것인지, 그리고 발리바르의 사상을 이해하고 현실 문제들을 분석하는 데 더 적절하게 활용될 수 있을지 역자로서는 완전히 확신할 수는 없다. 그런 만큼 역자로서는 이 용어들을 무조건 고집할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지금까지 역자 나름대로의 공부와 성찰을 통해 이러한 번역어의 채택이 최선이었다고 믿을 뿐이다. 앞으로 혹시 좀더 좋은 제안이 제시된다면 기꺼이 받아들이도록 하겠다.


***


이전의 책과 마찬가지로 이 책 역시 세미나 네트워크 새움의 현대정치철학 세미나 동료들과의 공동 작업의 소산이다. 오랫동안 이 책을 비롯한 관련 자료들을 함께 읽고 토론하면서 역자의 잘못된 생각이나 번역을 바로 잡아주고 여러 가지 좋은 제안을 해준 동료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미안하게도 늘 번역자 명단에 나 한 사람의 이름을 올리게 되지만, 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 번역이 나올 수 없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독자들에게도 그들의 공로가 기억되기를 바랄 뿐이다.

이 책이 출간되기까지 역자가 재직하고 있는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HK사업단의 아낌없는 세미나 지원 및 출판 지원이 큰 힘이 되었다. 주변에서 각종 행정적인 잡무와 형식적인 전시성 사업 계획들로 인해 연구자들의 연구 능력이 저하되는 일을 흔히 볼 수 있다. 하지만 연구자들의 개인적 관심사를 존중하고 격려해주는 민연 HK사업단 특유의 분위기 덕분에 역자는 늘 편안하게 연구를 수행할 수 있었다. 이 자리를 빌려 민연 HK사업단과 동료들에게 감사드린다.

{우리, 유럽의 시민들?}에 이어 두 번째로 발리바르의 책을 후마니타스에서 펴내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큰 기쁨이고 영광이지만, 게으른 역자를 만난 후마니타스 여러분들께는 큰 고통의 시간이 아니었을지 걱정스럽고 죄송하다. 오랫동안 원고를 묵묵히 기다려준 안중철 편집장님과 최미정 선생님을 비롯한 편집부 여러분들께 깊이 감사드린다. 그 분들에게 다소나마 보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2011년 9월

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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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 2011-10-01 0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진태원 선생님, 그 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먼저 번역본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다름이 아니라, civilite 번역어 관련해서, 예전에는 "시민인륜"이라는 번역어를 사용했으나, 지금은 개인적으로(서관모 선생님은 잘 모르겠습니다) "시민공존"을 사용하는 것으로 바꿨습니다.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그럼 책은 잘 읽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balmas 2011-10-01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최원 형 오랜만입니다. '시민공존'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택하셨군요. ㅎㅎ 흥미롭네요.

balmas 님에게 2011-10-04 1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반역"은 봉건적인 용어입니다. 흔히 쓰는 "대권"과 마찬가지입니다.

"국사학자"라? 그냥 역사학자라고 부르시면 안 될까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더라도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발마스 님이 선택한 번역어보다 배제한 번역어들이 더 마음에 드는 군요. 그렇다면 사실은 발마스 님은 민족문화연구원이 아니라 국민문화연구원에 계신 거군요. 저와 발마스님은 discord가 아니라 disagreement한 관계인 듯 합니다. 뭐 어차피 처음부터 대등한 관계가 아니긴 하지요.

모든 대학교수는 민주주의자가 아니지요. 대학교수라는 거 자체가 이미 어떤 종류의 권력과 지위를 지닌 거니까요.

그런데 "자본을 읽자"는 언제 나오나요?

balmas 2011-10-05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반역'이라는 표현이 좀 껄끄럽긴 하죠. 근데 불어의 revolte나 영어의 revolt 역시 "봉건적인" 용어법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국사학자를 역사학자로 부를 수 있다면 저도 좋겠는데요.^^; 새로 제안한 용어들이 맘에 안드신다니 유감이네요. ㅎㅎ [자본을 읽자]는 조금 더 기다리셔야 할 것 같아요. 내년 말까지는 내고 싶습니다. :)

menwchen 2011-10-18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 안녕하세요 ^^*
드디어 오늘 알라딘과 교보에 떳네요. 아직은 출간예정도서로 되어 있네요.
몇일 사이에 배송되겠죠...고생 많으셨습니다. 잘 읽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