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글을 하나 올립니다.  

지난 봄에 그린비 출판사에서 출간된 [인터뷰-한국 인문학 지각변동]에 수록된 인터뷰 원고입니다. 

최종 교정이 끝나기 전의 판본이니 혹시 인용하거나 토론하고 싶은 분들은 책을 참고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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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태원과의 인터뷰

 

 

맑스주의의 위기와 포스트주의

김항: 지난 20년 동안 한국 인문․사회과학 연구를 생각해 보면, 현실 사회주의권의 붕괴로 인한 맑스주의의 퇴조, 서양 현대철학의 유입, 문화 연구나 페미니즘 등의 새로운 시각, 민족주의 비판 등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하여 인간관이나 공동체관이나 제도관 자체가 변화했다고 총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변화에 대해 진태원 선생님께서는 어떤 식으로 평가하시는지 먼저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진태원: 20년 동안 제일 중요한 변화라면 맑스주의가 실추했다는 점을 들 수 있겠죠. 70~80년대, 특히 80년대 한국 인문․사회과학의 가장 주요한 성과를 맑스주의의 복원이라고 할 수 있다면, 이건 상당히 역설적인 현상입니다. 그 시기 유럽이나 다른 나라에서는 맑스주의의 실추가 너무 명백하고 ‘사회주의가 얼마 안 남았다. 사회주의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많이 했기 때문이죠. 70년대 말~80년대 초에 이미 기정사실화됐던 일들인데, 한국에서 맑스주의의 복원은 80년대의 중요한 화두였다는 게 상당히 역설적이고 독특한 현상이에요. 80년대 한국에서의 맑스주의의 복원은 세계사적인 시간하고 차이가 있었던 거죠. 전반적으로 사회주의가 무너질 거란 생각을 잘 안 했던 거 같아요. 페레스트로이카가 1차적으로 충격을 줬는데, 페레스트로이카는 소련 내부개혁의 시도였으니까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었고요. 물론 상당히 비판적인 시각도 많았고, 그렇지는 않다 해도 얼마간 미심쩍게 보는 사람들도 있었죠.

어쨌든 87년에 한국에서 민주화가 이뤄지고, 한국사회성격 논쟁(사구체 논쟁)이 85년부터 시작이 돼서 88년 정도가 제일 뜨거웠던 거 같아요. 87~88년이 정점이었던 거죠. 그런데 89년에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90년에 소련 해체가 일어난 것에 큰 충격을 받으면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전향을 했습니다. 그렇지 않고 여전히 맑스주의를 고수하거나 아니면 이러저러한 개조를 통해 맑스주의를 구원하려고 했던(또는 한국에서의 맑스주의의 복원 작업을 지켜내려고 했던) 사람들도 있었죠.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그 수가 줄어들고 이제는 진짜 소수가 되긴 했지만 말입니다. 따라서 80년대 말~90년대 초에 맑스주의적인 작업을 수행하던 분들의 가장 중요한 화두는 동구권을 중심으로 벌어진 사회주의 붕괴의 흐름 속에서 어떻게 맑스주의를 지킬 것인가 또는 한국의 상황에서 맑스주의의 복원을 포기하지 않은 가운데 어떻게 맑스주의를 개조할 것인가라는 문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이론지의 창간(1992)이라는 것도 그런 관점에서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이혜령: 한국적 상황에서 맑스주의의 복원과 세계사적 상황에서 그것의 해체를 어떻게 수용해 내느냐?

 

진태원: 한국적인 상황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나름대로 변용할 것인가? 또는 한국적인 시간성에 근거하여 어떻게 세계사적 시간의 흐름을 지연시킬 것인가? 그게 아마 당시 맑스주의자들(특히 이른바 PD 진영에 속한)의 중심적인 고민거리이자『이론』지의 출간 배경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무튼 맑스주의의 실추가 지난 20년 간의 흐름 중에서 제일 두드러진 것이었다면, 두 번째 중요한 변화는 이것과 맞물린 이른바 포스트주의의 등장이라고 생각합니다. 맑스주의의 어떤 위기, 또 사회주의권의 붕괴가 대략 80년대 말~90년대 초이고, 한국에서 현대 프랑스철학, 또 미국의 포스트모더니즘 문화 연구 등이 수입된 때도 80년대 말~90년대 초라고 보면 그 두 시기가 엇물리죠. 그래서 이 포스트주의, 특히 포스트 맑스주의 및 포스트구조주의로 지칭되는 현대 프랑스철학과 포스트모더니즘 문화 연구, 또 나중에 가면 포스트 콜로니얼리즘이 있죠. 포스트 맑스주의는 90년대 초에 일찍 소개가 된 편입니다. 다른 나라나 다른 지역에서도 비슷한 현상들이 있긴 했지만, 한국에서는 두드러지게 나타난 현상이에요.

맑스주의가 실추하고 포스트주의의 부상이 같이 진행되다 보니까 포스트주의가 맑스주의의 대안, 대안 이데올로기, 대안 이념으로 등장을 했죠. 포스트주의를 수용했던 분들이 반드시 ‘맑스주의는 끝났다. 맑스주의는 더 이상 회생 불가능하다. 맑스주의는 과거의 유산이다.’ 하는 생각을 가졌다고 보지는 않는데, 시대적인 분위기가 기묘하게 엇물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는 그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게 맑스주의의 유산하고 포스트주의의 흐름 간에 생산적인 대화나 토론이 이뤄지기 어려운 일종의 시대적인 분위기, 지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낸 것 같아요. 그래서 맑스주의를 복원하거나 유지하려고 했던 사회과학자들은 포스트주의에 대해 아주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에, 포스트주의의 수용을 주도했던 서양 문학이나 프랑스 철학 연구자들은 반드시 맑스주의를 배격하려는 뜻은 없었지만, 비맑스주의적인 관점 내지 어떤 점에서는 반맑스주의적인 관점에서 포스트주의를 수용했다는 점에서 맑스주의를 해소시키는 데 일조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런 분위기가 결국 양자 사이의 생산적인 토론을 불가능하고 어렵게 만들었던 측면들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부정적인 결과 중의 하나가 근대성 논쟁이라든가 민족주의에 대한 논의인 것 같습니다. 가령 예를 들면 임지현 선생 같은 분들이 90년대 후반~2000년대 초에 『당대비평에서 했던 ‘우리 안의 파시즘’ 논의라는 게 포스트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은 문제제기죠. 예를 들면 호명 이론이나 푸코의 규율권력론, 그리고 파시즘에 대한 역사적 연구 등이 결합돼서 ‘우리 안의 파시즘’ 논의가 나오고, 그게 국민국가․민족주의에 대한 전면적인 비판으로 이어지고 나중에 대중독재로까지 가죠. 그러면서 이론적인 전선이—임지현 선생 개인의 취향이랄까. 그것도 이론적인 입장일 수는 있겠지만—너무 과잉되게 반맑스주의․반민중민주주의․반민족운동 쪽으로 형성이 된 것 같아요. ‘우리 안의 파시즘’이라든가 반파시즘․반민족주의 논의로 국민국가의 역사적 한계를 문제 삼는 게 꼭 반맑스주의라든가 반민중운동의 태도와 입장을 취할 필요가 있었을까는 의문입니다. 그렇게 된 데는 임지현 선생의 개인적인 입장 여부를 떠나 80년대 말 이후에 한국의 지적인 흐름에서 맑스주의와 포스트주의가 분리되고, 상호 대치하게 된 상황이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포스트주의 수용 문제

 

이혜령: 포스트주의가 한국에서 다소 편향된 입장 속에서 수용되었다는 말씀이시죠?

 

진태원: 예.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80년대 말~90년대 초 이래로 포스트주의가 그렇게 수용이 된 것 같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추상적인 수용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처음에 미국에서 공부했던 영문학자들이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구조주의 수용을 주도했는데, 80년대 영미문학 이론과 문화이론계를 주름잡던 사람들이 데리다와 푸코, 라캉, 리오타르 등이었죠. 그런 흐름을 미국에서 유학하면서 비평이론으로 배웠던 분들이 글도 쓰고 분석하고 문헌들을 번역하고 그러면서 수용이 됐던 거죠. 그분들은 자신들의 전공 분야와 관련해서 한 것도 있죠.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우리나라에 미치는 미국 인문사회과학의 영향이라는 게 굉장히 막강했으니까요. 미국에서 유행하던 담론들을 “이런 게 유행한다. 이런 게 많이 뜨더라. 번역을 한번 해보자.” 이렇게 해서 수용한 것도 있고요. 90년대 초의 수용은 상당히 추상적인 거였는데, 말하자면 어떤 저작이 있는지 보자, 이런 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푸코․들뢰즈․데리다의 저작이 그렇게 수용이 됐다고 봅니다. 그게 한국의 학문 담론적인 상황에서는 근대성에 관한 문제제기와 민족주의․국민국가 비판 쪽으로 구체화된 형태로 나타나게 된 게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김항: 20년 동안의 변화에 대한 선생님의 개괄적인 평가를 들어보면 논쟁이 중구난방이었고, 부정적으로 평가하자면 ‘맑스주의의 위기’ 이후에 진전이 된 게 없다는 이야기로 들립니다. 인간과 공동체와 제도를 어떻게 파악할 것이냐에 대해 뭔가 새로운 패러다임이 나왔어야 되는데, 여전히 답보 상태였다고 선생님께서 파악하고 계시는 게 아닌가 합니다.

 

진태원: 네, 그렇습니다. 그 주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포스트주의의 수용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 맑스주의를 복원하고자 시도한 것은 이론적인 수준이라든가 결과라든가 이런 것에 대한 평가 여부를 떠나서 현실적인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거죠. 한국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한국 사회는 어떤 종류의 자본주의 사회이고, 이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식의 전략과 전술이 필요한가 등과 같이 매우 현실적인 문제의식에서 출발해서 나름대로 한국 사회를 분석하는 틀을 만들고 식민지반봉건 사회론이나 주체사상 같은 것을 극복하려는 시도였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포스트주의 수용의 최대 약점 중 하나는 그런 게 없다는 점입니다. 포스트주의는 수입 자체부터 무언가 현실적인 문제의식에서 수입한 게 아니었죠. 그러니까 어떤 구체적인 현상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사고하는 데 “이런 이론과 패러다임을 한 번 원용해 보면 어떨까?” 해서 그것을 더 구체화하고 그 와중에서 변형이라든가 개선이 이뤄지고 이런 식이 아니라 “영미권에서 이게 요즘 뜬다더라, 요즘 미국 학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담론이라더라” 라는 식의 태도에 따라 수입이 된 거죠. 지금도 크게 사정은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인문사회과학계의 학자들이나 대학원생들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영미권의 지적 흐름이나 유행입니다. 예컨대 지젝이나 아감벤 같은 학자들이 우리나라에서 유행하는 것은 어떤 실질적인 문제의식이 수반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이것은 물론 이들의 지적 역량을 부인하려는 뜻은 아닙니다). 최신의 이론 사조나 학문 동향에 관심을 기울이고 공부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그것을 소개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이라면 왜 이런 담론이나 이론이 중요한지, 그것이 이런저런 현상들을 분석하고 설명하는 데 어떤 의의가 있는지 분명히 이해하고 또 입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포스트주의 담론을 소개한 분들에게서 그런 문제의식을 찾기는 쉽지 않았던 것 같아요.

반면 포스트 담론들 자체는 원래 아주 구체적인 문제의식에서 생겨난 것이었죠. 포스트맑스주의를 예로 들면, 라클라우(Ernesto Laclau)하고 무페(Chantal Mouffe)가 85년에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Hegemony and Socialist Strategy; 한국어판은 『사회변혁과 헤게모니, 김성기 외 옮김,, 터, 1990)이라는 공저를 냈는데, 그건 정말 그 사람들 사회에서 아주 현실적인 문제의식에서 나온 책이거든요. ‘동구권에서 구현되었던 사회주의는 더 이상 역사적인 전망이 없다. 그리고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노동운동의 영향력이 전 같지 않다. 그 대신에 신사회운동으로서 페미니즘이나 환경 문제라든가 인종이라든가 다양한 사회운동이 분출하고 새로운 투쟁들이 나왔을 때, 이런 상황에서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현실적으로 실행 가능한 사회주의 전략으로는 어떤 게 있을까? 이 사회주의 전략을 모색하는데 가장 큰 장애물은 뭘까?’ 그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것이 바로 노동자계급 중심주의였거든요. 노동자계급이 항상 중심에 있고, 다른 문제들은 다 여기에 종속되어 따라야 한다는 문제설정으로는 선진 자본주의에서 현실적인 변혁이라는 걸 사고할 수가 없는 거죠. 또한 라클라우의 초기 이론적 작업의 중심 배경이 되었던 중남미 현실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노동자 계급에 중심을 둔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 이론으로는 중남미에서 실질적인 변혁 운동이나 사회 운동을 수행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따라서 라클라우와 무페의 헤게모니 이론은 중남미 현실에서 실행할 수 있는 일종의 연합전선 전술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려는 시도라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노동자계급 중심주의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는 데 적절한 이론이 뭐가 있을까 봤더니 라캉이나 데리다의 문제제기가 상당히 의미가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과 접목을 시켜서 독창적인 문제설정을 만들어 낸 거죠.

우리나라의 포스트주의 수용에서 그런 문제의식이 있었을까 생각해 보면 한두 가지 사례를 제외한다면 찾아보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제가 볼 때는 김진석 선생의 90년대 초반 시도 중에 상당히 재밌는 발상들이 있었는데, 아쉽게도 그 이후 이론적으로 충분한 성과를 낳거나나 반향을 일으킨 것 같지는 않습니다. 가령 김진석 선생의 첫 번째 저서인 『탈형이상학과 탈변증법 (문학과지성사, 1992)에 보면 ‘탈’이라는 말의 중의적 의미(가면을 쓴다, 체계에 탈을 내다, 곧 장애를 일으키다, 체계에서 벗어나다)를 원용해서 데리다의 해체론 및 탈구조주의 일반을 재해석하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한국어의 특성을 활용해서 데리다의 언어유희의 묘미를 살리는 언어적 감각도 돋보이고 사상을 독자적으로 이해하고 변용하려는 태도도 의미가 있었죠. 전반적으로 그런 식의 포스트주의가 수용될 때부터 이거는 “외부에서 이런 게 유행하니까 한번 해보자. 우리도 한번 번역해 보고 읽어 보자”는 문제의식 이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결과를 낳기가 어려운 것이었고요. 그러다가 말씀드렸던 것처럼 90년대 말 이후 근대성 논쟁이라든가 민족주의 비판․국민국가 비판 같은 것이 현실적인 문제의식과 접목돼서 나타난 현상이었다고 봅니다. 하지만 또한 그것은 또 그것대로 상당한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혜령: 결국 맑스주의가 상정하던 ‘현실’이라는 개념이 더 이상 통용되지 못하게 된 거 같습니다. 근대성 논의나 일상적 파시즘 논의는 그런 현실하고 달리 일상이나 내면 등을 문제 삼는 거니까요.

 

진태원: 이혜령 선생님이 지적하신 문제가 아까 김항 선생님 말씀하고 연결되는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공동체․제도를 바라보는 시각이 변화했다고 봤을 때, 아까 김항 선생님이 맑스주의적인 시각으로 본다면 상부구조 쪽으로 관심이 옮겨가지 않았느냐는 문제제기를 해주셨는데, 일리 있는 지적이라고 봅니다. 영국의 맑스주의 역사가인 페리 앤더슨(Perry Anderson)이 ‘서구 맑스주의’(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비공산권의 맑스주의를 지칭한다는 점에서 ‘서방 맑스주의’라고 하는 게 옳겠죠)라는 것 자체가 상부구조 중심의 흐름이었다고 얘기한 적이 있는데, 상당히 일리가 있는 지적입니다(『서구 마르크스주의 연구, 장준오 옮김, 이론과현실, 1987). 루카치라든가 그람시라든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사상은 결국 다 상부구조를 어떻게 재해석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의식입니다. 그걸 돌이켜서 반추해 보면 상부구조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이유가 역사적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는 거죠. 말하자면 ‘노동자계급이 형성이 되어 있고, 숫자도 많아지고 세력화․조직화가 돼 있는데, 왜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가?’ 또는 ‘전통적인 맑스주의에서 얘기했던 것처럼, 생산력의 발전이 생산관계의 변화를 가져오고, 그에 이어 상부구조의 변화를 가져오는 식으로 경제가 사회변혁의 결정적인 원인이 되는 게 아니더라, 경제와 상부구조 사이에는 굉장히 의미 있는 간극 같은 것이 존재한다. 노동자계급임에도 불구하고 극우파에 투표를 한다든지 파시즘이나 나치를 지지하는 것 같은, 말하자면 자기 계급에 대한 배반 같은 현상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게 상당히 중요한 과제가 아니었던가 싶어요.

그런 점에서 본다면 80년대 말 이후의 포스트주의의 수용, 문화 연구나 페미니즘의 수용, 그리고 근대성 논쟁, 민족주의․국민국가 비판 이런 것들은 상부구조론 내지 이데올로기론 또는 상징권력론이나 문화이론을 중심으로 한 문제의식이었겠지만, 양자를 동일시하기 어려운 측면도 존재합니다. 가령 서구 맑스주의자들이 상부구조를 강조했을 때, 그 사람들에게는 ‘사회 전체의 변혁은 여전히 가능하다. 문제는 이 괴리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노동자계급의 자기 배반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런 게 중요한 과제였다면 80년대 말 한국에 수용된 포스트주의 같은 경우에 그런 문제의식은 없는 것 같습니다. 아마 변혁이나 급진적인 민주주의에 대한 전망이 불가능하다고 보는 기본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 아닐까 하는데요,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가 미친 영향이겠죠.

 

알튀세르에서 현대 프랑스 철학으로

 

김항: 포스트주의 수용에서의 문제점을 잘 말씀해 주신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그런 편향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적극적으로 현대 프랑스철학의 정치적 성격을 강조하면서 작업을 해오셨다고 생각합니다. 일례로 선생님께서는 한국에서는 드물게 데리다의 정치적 측면을 강조하는 작업을 해오셨죠. 그런 의미에서 이제 수용의 문제가 아니라 현대 프랑스철학 자체의 문제로 넘어가 보고 싶습니다. 그 안에 내재한 문제 설정이나 한계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앞에서 파악한 한국사회의 문제로 넘어오면 어떻게 상황이 다르게 보이는지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편하게 왜 선생님께 중요한 철학자가 알튀세르(Louis Althusser)였고 발리바르(Étienne Balibar)였는가, 이런 부분부터 말씀해 주시면 이해하기가 쉬울 것 같습니다.

 

진태원: 제가 알튀세르에 관심을 갖게 된 건 80년대 말쯤입니다. 처음에는 루카치라든가 마르쿠제, 헤겔-맑스주의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저작에 훨씬 관심이 많았고 재밌게 읽었습니다. 알튀세르는 흔히 구조주의자라고 불렸고, 역사나 주체 문제를 사고하지 않는다는 얘기가 80년대 중반에도 계속 있었죠. 그런 평가 때문에 알튀세르에는 별 관심이 없었어요. 읽을 만한 책도 없었고요. 그러다가 처음 알튀세리안들 책을 접한 게 89년이었어요. 발리바르의 󰡔민주주의와 독재(최인락 옮김, 연구사, 1988)도 있었는데, 저는 그 책보다도 『역사유물론 연구(이해민 옮김, 푸른산, 1989)라는 책을 처음 읽었고 그 책에서 상당히 감명을 많이 받았습니다. ‘역사유물론을 이렇게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구나’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제가 그 이전까지 알고 있던 역사유물론(보통 ‘사적 유물론’ 또는 줄여서 ‘사유’라고 했죠)은 구 소련에서 교과서로 사용되던 책들에서 소개된 것이었습니다. 이 책들은 당시에 과 학회나 동아리 세미나 때 주로 사용되던 것들인데, 나름대로 역사유물론을 체계화하려고 애를 쓰고 있긴 하지만, 뭐라고 할까요 생명력이 없는 도식적 체계, 이를테면 김이 다 빠져버린 맥주 같은 역사유물론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선배들이 읽히고 친구들이 모두 읽으니까 같이 읽고 공부하고 또 제가 선배가 돼서는 후배들에게 또 가르치기는 하는데, 배우고 읽고 가르쳐도 별로 흥이 나지 않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헤겔 맑스주의 철학자들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도, 그 사람들의 책 속에는 이런 류의 도식화되고 무미건조한 체계와는 전혀 다른 생생하고 깊이 있는 논의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사람들의 책에는 뭔가 어두운 구석이라고 할까요, 비관적인 논조가 지배적이라는 인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 사람들 역시 혁명이나 변혁의 주체, 계급투쟁 등에 관해서 열심히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뭔가 진정한 믿음이 담긴 그런 이야기는 아니었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역사유물론의 도식이 지배하는 현실 맑스주의(또는 변혁운동)의 정치와 비관적이지만 매력적인 헤겔 맑스주의 사이의 괴리에 대해 꽤 고민했던 기억이 납니다.

발리바르의 책에서 감명을 받았다면, 그것은 그 책이 이러한 괴리를 극복할 수 있는 전망 같은 것을 제공해줄 수 있겠구나 하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역사유물론에 대한 생생하고 깊이 있는 철학적 해석, 현실 정치와 철학의 괴리를 극복할 수 있게 해주는 새로운 관점 같은 것이 거기에 담겨 있다고 느꼈던 것이죠. 또한 알튀세리엥 맑스주의가 통상적인 평가와는 너무나 다른 아주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이론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 책의 초점을 이루는 개념은 ‘계급투쟁’이었으니까요. 말 그대로 역사유물론 연구죠. 발리바르는 60~70년대에 자신을 포함한 알튀세르엥들이 수행했던 작업을 크게 세 개의 시기로 구별한 바 있습니다. 60년대에는 과학적인 맑스주의를 추구하는 인식론적인 성격이 강했다면, 70년대 초중반의 작업은 계급투쟁을 초점에 둔 정치적인 관점에서 맑스주의를 재해석하는 것이었고, 70년대 후반 이후에는 이데올로기의 문제에 입각한 맑스주의 재해석이라는 것이죠. 『역사유물론 연구』나 『민주주의와 독재』는 정치적 관점에서 맑스주의를 재해석하려는 시기의 대표적인 저작들이었습니다. 정치적인 맑스주의 재해석은 다른 말로 한다면 맑스주의를 레닌주의적인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작업들이었고, 그래서 더 더욱 인상이 깊었어요. 당시에 제가 레닌 저작 중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책이 『국가와 혁명이었는데, 발리바르 책은 마치 이 책의 관점에서 맑스주의 전체를 재해석하려는 시도처럼 느껴졌습니다.

어쨌든 발리바르의 저작들 덕분에 당시 한창 진행 중에 있던 사회성격논쟁에 더 관심을 갖게 됐고 조금 더 잘 이해하게 됐습니다. 윤소영 교수를 비롯한 이른바 PD그룹이 이론적인 준거로 삼고 있던 책들이 바로 그 책들이었으니까요. 어떤 사람들은 80년대 PD그룹의 작업을 레닌주의와의 대화, 레닌과의 대화라고 평가를 하는데, 그렇게 볼 수 있는 여지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레닌주의적인 맑스주의를 한국에서 복원하는 일이 PD그룹이 주체사상에 맞서 수행한 중요한 작업입니다.

『역사유물론 연구 이후로 알튀세르나 발리바르의 다른 책들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죠. 당시에는 국내에 별로 번역된 책이 없었기 때문에, 주로 학교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구할 수 있는 영역본 책이나 논문들을 복사해서 읽었습니다. 『맑스를 위하여』나 『자본을 읽자 또는『자기비판의 요소들 같은 책들을 처음 접한 게 그 무렵입니다. 그러다가 90년대 초 사회주의 국가들이 몰락하고 맑스주의의 위기에 관한 논쟁이 제기되면서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의 저작들이 다수 번역되었습니다. 물론 그 중 상당수는 번역의 질에 문제가 많았고, 당시 발리바르가 수행하던 작업을 단편적ㆍ일면적으로 소개하는 것들이었다는 점에서 얼마간 문제가 있기는 했습니다. 어쨌든 알튀세르는 80년에 부인을 목 졸라 죽이고 정신병원에 유폐되었기 때문에, 80년대~90년대 한국에서 알튀세르 수용이라는 것은 주로 발리바르의 시각으로 재해석된 관점에 따라 전유된 알튀세르의 사상이었죠. 이런 흐름을 따라가다가 다른 프랑스철학자들에도 관심을 갖게 된 것 같습니다. 제일 처음에 푸코 책을 봤던 것 같아요. 상당히 인상 깊었어요. 푸코에 관해서 제일 처음 봤던 책이 김현 선생의 책이었습니다.

 

이혜령: 󰡔시칠리아의 암소󰡕(문학과지성사, 1990)요?

 

진태원: 아니『미셸 푸코의 문학비평(문학과 지성사, 1989)이었습니다. 김현 선생 외에 여러 사람이 푸코의 글들을 편역한 책이죠. 제가 그 책에서 제일 인상 깊었던 건, 그 책에 나타난 푸코의 모습이 굉장히 사변적인 철학자의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까지 풍문으로 듣던 푸코는 권력이론을 주로 다루고 성의 문제에 관심이 많은 이론가, 따라서 뭔가 철학자라고 보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죠. 게다가 가십성의 소문들도 많이 떠돌았기 때문에, 푸코를 비롯한 프랑스철학자들은 문란하고 방종적인, 재기는 넘치지만 진지하고 깊이 있는 면모는 찾아볼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죠. 그런데 이 책에서 막상 접한 푸코는 매우 사변적이면서도 헤겔-맑스주의라든가 이런 쪽과는 굉장히 다른 식의 사변을 전개하는 그런 철학자였고, 저에게는 그 점이 아주 매력 있게 다가왔습니다. 『말과 사물』이나 『감시와 처벌』또는 󰡔성의 역사󰡕같은 책들은 나중에 읽었죠. 하여간 제가 처음 읽은 푸코 책은 그 책이었는데, 재밌는 점이 뭐냐면 나중에 그 책의 원문들을 보니까 그 책에 실린 번역에 오역이 아주 많았다는 점입니다. 제가 그때 푸코한테 매력을 느꼈던 것은 굉장히 사변적이면서 잘 알듯 말듯 뭔가 오묘한 거였는데, 나중에 보니까 알듯 말듯했던 부분들은 다 오역이었어요. 『미셀 푸코의 문학비평』이라는 제목 아래 모아 놓은 글들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푸코의 사상이라고 알고 있는 것들과는 상당히 다른, 푸코의 독특한 측면들을 묶어서 낸 글인데다 오역들이 심해서 번역본으로서는 문제가 많은 책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책을 옮긴 대부분의 역자들이 김현 선생의 제자뻘 되는, 20-30대의 젊은 불문학도들이었습니다. 당시로서는 아주 생경한 사상이 담긴 데다 깊은 사변적 성찰로 가득찬 그 글들을 젊은 불문학도들이 제대로 이해해서 번역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을 겁니다. 어쨌든 그 오역본 덕분에 저는 푸코에 대해 아주 깊은 인상을 받게 됐고, 지금도 그 책에서 받은 인상은 깊이 남아 있습니다.

데리다의 글은 80년대 말에 문학잡지나 아니면 문학 관련 책에 한두 편씩 번역되어 소개되었죠. 미국에서 문학을 공부하고 온 분들이 주로 했는데, 처음에는 그렇게 큰 매력을 못 느꼈죠. 그러다가 나중에 92년인가에 『입장들(박성창 편역, 솔, 1992)이라는 책이 번역이 됐는데, 저는 그 책이 상당히 인상이 깊었어요. 맑스-레닌주의와의 관계나 정치에 관한 문제, 또 데리다 작업의 전반적인 성격 등을 잘 알 수 있는 좋은 대담집이었기 때문입니다. 데리다가 맑스-레닌주의의 필요성에 대해 긍정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에 대해 거리를 두는데, 그 문제제기가 상당히 의미가 있다 싶더라고요. 물론 당시에는 데리다를 잘 몰랐고 또 저 나름대로는 스스로 맑스주의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데리다의 문제제기 방식이 상당히 성가시게 느껴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 이후로 데리다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제가 데리다를 본격적으로 읽게 된 때가 90년대 중반쯤인데, 이 당시 데리다가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전개라는 이중적인 정세를 배경으로 하여 법의 힘(1990)라든가 『마르크스의 유령들(1993) 같이 정치적이고 실천철학적인 책을 연속적으로 내기 시작해서 그런 책들을 많이 읽게 됐어요. 주로 영어 번역본으로 봤죠. 그러면서 데리다의 문제제기가 상당히 의미가 있다 생각했어요. 물론 데리다의 초기 저작들에도 관심이 있었는데, 저는 특히 데리다의 에크리튀르(écriture)개념에 끌렸습니다. 에크리튀르라는 개념은 일단 우리말 번역에 상당히 문제가 많습니다. 데리다의 초기 저작 중에 L'Écriture et la difference(1967)란 책이 있습니다. 데리다가 그 전에 썼던 여러 논문들을 묶어서 펴낸 책인데, 이 책에는 유명한 푸코와의 논쟁의 시발점이 된 [코기토와 광기의 역사]라든가 레비나스의 타자론에 대한 해체론적 독서인 [폭력과 형이상학], 바타이유에 관한 논문인 [제한 경제에서 일반 경제로], 그리고 미국에서 현대 프랑스 철학 수용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인문과학에서 구조, 기호, 작용](이 글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에 관한 해체론적 분석입니다) 같이 빼어난 논문이 다수 수록되어 있죠.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데리다 사상이 국내에 제대로 수용되려면 이 책을 비롯해 『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1967)나 『철학의 주변들/여백들』(1972) 같은 책들이 제대로 번역되고 또 주석서나 해설서가 출간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 책은 현재 우리말로는 『글쓰기와 차이(남수인 옮김, 동문선, 2001)라고 번역됐는데, 본문은 차치하고라도 일단 제목 번역에 문제가 있죠. 좀더 적절하게 번역한다면 ‘기록과 차이’나 ‘문자기록과 차이’ 이렇게 해야 됩니다. 데리다가 말하는 에크리튀르는 작문이라는 의미에서의 글쓰기를 뜻하는 게 아니라, 로고스를 가능하게 하면서 동시에 불가능하게 만드는 기록 내지 기입(inscription)을 가리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에크리튀르는 어떤 것과 다른 것 사이의 차이를 가능하게 하는 거리두기의 작용, 공간 만들기와 시간적인 지연 작용의 지주 내지 매체라고 할 수 있겠죠. 따라서 기록이 없다면 차이도, 동일성도, 로고스도 없는 셈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에크리튀르가 로고스의 근거라고 할 수는 없는데, 그것은 벌써 에크리튀르가 로고스에 의해 파악 가능하다는 것, 포섭 가능하다는 것을 함축합니다. 반대로 에크리튀르는 로고스의 절대적 한계 내지 타자죠(이 때문에 데리다는 유물론적인 철학자, 그것도 가장 급진적인 유물론자 중 한 사람입니다). 데리다가 그라마톨로지(grammatologie는 어근을 분철하면 gramme + logos, 곧 문자/기록에 관한 학문입니다)의 불가능성에 관해 말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는 그라마톨로지, 곧 기록에 관한 학문을 구성하려는 책이 아니라 반대로 그러한 학문의 불가능성에 관한 텍스트입니다).

그 책의 문제제기가 저에게는 굉장히 인상이 깊었어요.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도 같은 생각이지만, 데리다의 ‘해체’(저는 déconstruction이라는 개념의 번역어로는 ‘탈구축’이라는 말이 훨씬 더 좋다고 생각하지만, 여기에서는 일단 보통 많이 쓰이는 ‘해체’라는 용어를 사용하겠습니다)를 어떻게 봐야 할까, 그것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또는 그것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까라는 질문에 대해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 해체는 유물론의 한 형태라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봅니다. 사실 유물론 중에서도 굉장히 래디컬한 유물론이죠. 왜냐면 데리다 이전의 유물론이라는 것은 어떤 것이든 간에 관념론의 원리들하고 타협하는 유물론이었거든요. 곧 ‘기원’이라든가 ‘원리’, ‘본질’ 또는 ‘목적’이라든가 ‘주체’ 같은 불변적이고 토대적인 공리들을 자기 이론의 전제로 삼는다는 점에서 관념론과 상당히 타협적인 것이었죠. 반면 데리다는 그 관념론의 기본 원리들과 가장 비타협적인 투쟁을 수행하는 철학자, 누구보다 과감하게 관념론의 기본 원리들(데리다가 로고스 중심주의나 팔루스 중심주의 또는 현존의 형이상학 등으로 불렀던 것)을 해체하는 철학자라는 생각이 들었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없습니다. 데리다는 주류 철학계의 철학자들로부터 비합리주의자나 허무주의자, 상대주의자라는 비판을 누구보다 많이 받았는데, 그것은 역으로 데리다가 기존 철학의 기본 원리나 전제들을 가장 심각하게 위협한 인물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죠. 따라서 데리다를 제대로 보고 평가를 하려면 그의 해체론이 어떻게 유물론을 래디컬하게 만드는지를 봐야 합니다.

이것은 물론 상당히 역설적인 유물론입니다. 왜냐면 『마르크스의 유령들의 용어를 빌리자면, 결국 유물론이라는 것은 ‘유령’(spectre)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주장하니까요. 가장 비실재적이고 가장 허깨비고, 그런 것의 대명사가 유령인데도, 유물론은 유령을 통해서 가능하다, 유령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주장하니, 유물론은 관념에 대한 물질의 우위를 주장하는 학설이라는 통념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역설적이고 기괴한 소리로 들릴 수밖에 없죠. 하지만 데리다의 얘기는 우선 우리가 유령이나 허깨비 같은 것에 대해 실재성이나 물질성을 부여할 때에 유물론을 좀더 일관되게, 좀더 철저하게 사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의 실재성, 물질성에 대해 말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현실에서 이데올로기가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물질적인 효력을 발휘하는 데도 오직 경제만이 현실적이고 물질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경우 이미 빌헬름 라이히 같은 사람이 제기했던 것과 같은 질문, 곧 왜 노동자들은, 대중들은 혁명에 복무하지 않고 파시즘이나 나치즘을 지지하는가, 왜 박정희를 숭배하는가라는 질문이 또 다시 제기될 수밖에 없습니다. 당연히 민족주의나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같은 문제에도 맹목적일 수밖에 없죠. 유령의 유물론은 더 나아가 모든 동일성(identity)은 어떤 균열을 포함할 수밖에 없으며, 동일성은 바로 이러한 균열, 어긋남으로부터 비로소 성립 가능하다고 주장하죠. 따라서 그것은 불변적이거나 본질적인 동일성을 인정하지 않을뿐더러, 탈구축적인 동일성의 추구를 유물론 및 유물론 정치의 핵심 기준으로 설정합니다. 정치 공동체나 사회구조에 대해서도 당연히 탈구축적이고 다원적인 관점을 옹호하는데, 다만 데리다 식의 해체론적 정치를 이해할 때 유념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데리다를 너무 조야한 의미의 반구조주의자나 반제도론자 또는 무정부주의자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점입니다. 말하자면 데리다는 동일성이나 정치 제도, 사회 구조에서 탈주하자, 벗어나자라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해체적인, 탈구축적인 동일성, 제도, 구조를 구축하자고 하는 사람이죠. 데리다는 국가주의자도 아니지만 무정부주의자도 아닙니다. 그게 바로 데리다가 유물론자인 이유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점이 저한테 매력적이었던 것 같아요. 결국 맑스주의에 대한 데리다의 문제제기도 포지티브하게 본다면 아마 그런 관점에서 맑스주의를 비롯한 해방사상․해방운동을 어떻게 재구성하고 개조할 것인가 볼 수 있는 점이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그 다음에 개인적인 얘기를 좀더 해본다면 저한테 들뢰즈는 일차적으로 니체와 스피노자 연구자로서의 들뢰즈입니다. 제가 들뢰즈 책 중에 제일 인상 깊게, 아주 재밌게 읽은 책이 들뢰즈가 쓴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이진경 옮김, 인간사랑, 2003)라는 책과 『니체와 철학(이경신 옮김, 민음사, 2001)이라는 책입니다. 들뢰즈는 니체 연구자고, 스피노자 연구자다, 이것이 제가 들뢰즈를 보는 일차적인 관점입니다. 제가 스피노자를 연구하게 된 중요한 동기를 제공해 준 사람도 들뢰즈와 알튀세르라고 볼 수 있는데요. 알튀세르의 이론적 작업에서 스피노자 철학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은 이전에 알튀세르 책들을 읽을 때 어렴풋이 눈치채기는 했지만, 에티엔 발리바르와 피에르 마슈레(Pierre Macherey) 같은 그의 제자들의 스피노자 연구들을 접하고 이해하기 전까지는 그것이 과연 어떤 점에서 그런 것인지, 또 그것이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해석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 점에 관해서는 이미 다른 기회에 몇 번 이야기한 적이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다시 거론하지 않겠습니다(관심 있는 분들은 다음과 같은 제 글들을 참조하시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스피노자의 현재성], 『모색2호, 2001; [범신론의 주박에서 벗어나기-프랑스에서 스피노자 연구 동향], 『근대철학2권 2호, 2007; [관계론, 대중들, 민주주의: 에티엔 발리바르의 스피노자론], 『시와반시71호, 2010년 봄호).

스피노자 철학의 현대적인 해석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저에게는 오히려 들뢰즈가 일차적인 길잡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들뢰즈의 스피노자론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은 실체와 속성의 관계에 대한 표현이론적 해석과 평행론 해석, 공통 통념(common notion)에 대한 해석이었습니다. 이런 해석을 통해 들뢰즈가 보여주려고 한 스피노자는 기존의 금욕주의적이고 범신론적인 스피노자와는 전혀 다른, 아주 역동적이고 능동적인 철학자, 실천적인 철학자로서의 스피노자였죠. 한국에는 스피노자에 관한 두 가지 상이 있습니다. 하나는 서양철학계에서 통용되는 범신론 철학자의 상이죠. 스피노자가 범신론자라는 것은 한국의 서양철학계에서는 거의 상식에 가깝습니다. 또 하나의 상은 사과나무의 철학자라는 상입니다. 거의 모든 국민이 다 알고 있을 만큼 유명한 금언이 있죠.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이 금언 덕분에 스피노자는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철학자로 꼽히곤 합니다. 스피노자가 전혀 알지도 못한 문장이 스피노자의 금언으로 알려져 그가 일종의 국민철학자로 사랑받게 된 사정이 과연 어떤 오해에서 비롯한 것인지 자못 궁금할 따름입니다. 어쨌든 들뢰즈가 제시한 스피노자의 상은 이 두 가지 상과는 매우 다른, 강력한 해방의 사상가라는 상입니다. 네그리(와 하트)의 다중의 정치철학은 그 자신도 말하듯이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재해석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그의 스피노자 해석에 강력한 영감을 준 것이 바로 들뢰즈의 스피노자 연구였습니다. 이런 식의 스피노자 이해는 아주 매혹적이고 또 여러 가지 장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더욱이 들뢰즈의 연구는 상당히 정밀하고 독창적인 독해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영미권의 스피노자 연구자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죠. 제 경우도 들뢰즈의 연구를 통해서 스피노자 철학의 현재성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고, 스피노자 철학이 매력적인 연구 주제라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물론 나중에 좀더 공부를 해나가는 과정에서 이러한 해석이 라이프니츠 내지 베르그손의 시각에 따라 재구성된 스피노자 해석이라는 것을 알게 됐고, 또 여러 가지 문제점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됐지만, 그의 스피노자 연구의 독창성과 중요성은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입니다.

『니체와 철학은 또 다른 의미에서 제가 아주 재미있게 읽은 책 중 하나입니다. 이 책은 이미 국내에 두 차례에 걸쳐 번역됐지만(『니체—철학의 주사위』, 신범순ㆍ조영복 옮김, 인간사랑, 1994;『니체와 철학』, 이경신 옮김, 앞의 책), 두 개의 번역본 모두 문제점이 많아서 실제 국내 독자들 사이에서 별다른 반향을 얻지 못한 것 같은데, 제가 보기에는 들뢰즈 철학의 많은 요소들이 담겨 있는 중요한 책입니다. 그가 약관의 나이에 첫 번째 저서(흄에 관한 졸업논문이었죠)를 낸지 9년만에 출간한(1962년) 성숙기의 첫 번째 저작이기도 하죠. 제가 보기에 흥미로운 점은 이 책이 니체의 철학을 ‘도덕의 계보학’에 입각하여 재해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마치 하이데거가 서양 형이상학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허무주의에 입각하여 니체를 재해석하는 것과 비견될 만한 독법인데, 실제로 들뢰즈가 겨냥했던 적수는 헤겔과 그의 변증법이었죠.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통해 역사와 사회를 해석하는 변증법 모델을 제시했다면, 들뢰즈는 그러한 모델에 맞설 수 있고 또한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비변증법적 차이의 모델을 니체의 주인과 노예의 계보학에서 찾은 셈입니다. 적대와 갈등을 역사와 사회의 기본적인 동력으로 제시하면서도 변증법 모델과 달리 목적론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그리고 니체 자신의 귀족주의 및 인종주의에서 탈피할 수 있는) 가능성을 들뢰즈는 주인의 소수화에서 찾고 있죠. 따라서 니체 철학에서 계보학의 중심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들뢰즈의 니체 해석은 푸코의 해석과 공통적이지만, 동시에 큰 차이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나중에 푸코와 들뢰즈가 결별하게 된 것은 니체에 대한 이러한 관점의 차이와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는데, 다시 맑스주의와 포스트주의의 관계라는 첫번째 문제제기로 돌아가본다면, 80년대 말 이후에 한국 인문․사회과학계의 동향에 대해 저는 개인적으로 매우 불편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맑스주의나 알튀세르 하는 분들은 현대 프랑스철학이라든가 포스트주의에 대해 굉장히 반감이 강하고 거부감이 깊은데, 제가 볼 때는 이 둘을 분리한다는 것은—알튀세르나 발리바르 또는 다소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랑시에르 같은 사람의 입장도 저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데—포스트주의라고 부르는, 좀더 좁혀서 말하면 포스트 구조주의라고 우리가 부르는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을 맑스주의와 분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바람직한 것도 아닙니다. 국내에서는 특히 윤소영 교수 같은 분들이 이런 식의 적대적 관계를 조장하고 분리의 필요성에 대해 강조하곤 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별 근거도 없을 뿐더러 방향도 잘못된 거라 생각합니다. 그 양자를 분리하는 건 불가능하고 바람직한 것도 아닙니다.

다른 한편으로, 포스트주의를 수용하시는 분은 “아직도 알튀세르야? 아직까지도 알튀세르를 보냐? 맑스주의를 여태까지 보냐?” 이런 얘기들을 하는데요. 제가 생각할 때, 포스트 구조주의라든가 포스트맑스주의, 포스트 콜로니얼리즘을 주도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보면 다 개인적으로 맑스주의자에서 출발했던 사람들이고, 나름대로 맑스주의가 역사적으로 직면했던 한계들을 각자의 방식으로 해결하기 위해서 작업을 했던 사람들이에요. 그 과정에서 자기의 개별적인 사상을 개척했던 사람들이죠. 데리다나 들뢰즈, 또는 푸코, 리오타르 같은 사람들이 다 그런 사람들이지요. 어떤 식으로든 맑스주의의 세례를 받았고, 한계를 느꼈고, 그것을 개조하려고 노력했어요. 포스트 콜로니얼리즘도 마찬가지죠. 에드워드 사이드 같은 사람도 그렇게 볼 수 있고, 특히 서발턴 연구의 대표자인 가야트리 스피박(Gayatri Spivak)이나 라나지트 구하(Ranajit Guha) 같은 사람들은 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라클라우나 무페 같은 사람은 물론이고요. 따라서 포스트주의를 맑스주의 분리시키려는 시도는 제가 볼 때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이중적 측면에서 그렇습니다. 우선 그런 시도는 포스트주의의 생성 조건 또는 그 원초적인 문제의식을 파악하기 어렵게 만들고, 그 작업을 넓은 의미의 맑스주의 운동사 속에서 이해하는 것도 어렵게 만듭니다. 이것은 맑스주의에 포스트주의를 종속시키는 문제가 아니라, 포스트주의의 문제의식은 맑스주의와의 관계를 떠나서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더 나아가 그런 시도는 포스트주의와 맑스주의의 접합 내지 비판적 소통이 낳을 수 있는 창발적인 가능성들을 처음부터 봉쇄한다는 점에서도 문제가 있습니다. 양자의 접합이나 소통은 둘 사이의 조화나 통합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조화나 통합이 동질화, 동화의 가능성을 전제한다면, 접합이나 소통 또는 혼융은 반대로 환원 불가능한 차이와 갈등을 가정합니다. 그러한 차이와 갈등이 없다면, 접합이나 소통의 필요성도 없겠죠. 이 점에 대해서는 특히 로버트 영의 저작들이 이미 풍부한 논증과 예시들을 제공해준 바 있죠(『백색신화』, 김용규 옮김, 경성대출판부, 2008 ; 『포스트식민주의 또는 트리컨티넨탈리즘』, 김택현 옮김, 박종철출판사, 2005). 한국에서의 포스트주의가 조금 더 의미 있고 생산적인 결과를 내려면 맑스주의를 어떻게 애도할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데리다 말을 빌리자면 한국에서 맑스주의는 아직도 유령으로 떠돌고 있는데, 굉장히 불행한 유령이죠. 맑스주의에 걸맞은 애도 작업이 이뤄지지 않은 거예요. 저는 이게 여전히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 어떻게 맑스주의의 유산들을 결산할 것인가? 유령을 어떻게 애도할 것인가? 이것은 포스트주의 하시는 분들한테도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맑스주의를 생략한 가운데, 맑스주의에 대한 독자적인 애도를 하지 않은 가운데, 그냥 포스트주의에서 곧바로 출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제가 볼 때 그것은 큰 오산입니다. 데리다가 말했듯이 그러면 그럴수록 맑스주의라는 유령, 맑스주의의 유령에 사로잡히기 마련이죠. 그런 의미에서 맑스주의의 유산과 포스트주의의 작업들 간에 생산적인 대화, 또는 논쟁과 토론은 여전히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이혜령: 선생님께서 지금 맑스주의에서 프랑스 현대철학으로 단계를 밟아 설명해 주셨으니까 ‘아, 그렇구나’ 생각하게 되지만, 사실 지난 20년의 경과가 꼭 그렇게 전개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포스트주의는 인문․사회과학계에서 맑스주의와 상관없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죠. 생산적이냐는 둘째 치고라도요. 그래서 맑스주의와 포스트주의 사이의 대화, 그리고 맑스주의에 대한 정당한 애도가 어떤 생산성을 갖는지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셔야 할 듯합니다.

 

진태원: 적절한 질문이신데요. 예를 하나 들어보면요. 맑스주의의 역사적인 한계가 ‘노동의 인간학’ 또는 ‘노동자계급 중심주의’라고 얘기를 많이 합니다. 근데 노동의 인간학이라는 게 정확히 어떻게 맑스주의에 한계를 미쳤는지, 그리고 노동자계급 중심주의가 맑스주의의 실천적인 한계라면 노동자계급 중심주의가 아닌 어떤 노동운동, 노동자운동을 해나갈 것인지? 또, 과거 맑스주의의 핵심 개념이었던 잉여가치의 착취 말인데요, 결국 잉여가치의 착취가 자본주의의 물질적이고 규범적인 한계 내지 모순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변혁의 물질적이고 규범적인 토대가 마련될 수 있었죠. 만약에 노동의 인간학을 우리가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 자본주의적 착취의 문제는 없는 걸로 하고 그냥 갈 것인지? 그러면 노동자운동이라는 것은 사회의 민주주의와 민주화라든가 사회의 개조․변혁을 위해서 더 이상 의미가 없는 영역인지? 이런 질문들이 방치가 돼 있단 얘깁니다. 노동의 인간학을 해체한다는 것은 그것을 포기한다거나 청산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의 재구성 내지 개조를 촉구하는 것이 바로 해체의 작업입니다. 사실 데리다는 초기부터 해체는 이중 운동이라는 점을 역설하죠. 데리다에 따르면 해체의 전략은 우선 ‘전복’의 단계, 곧 ‘어떤 주어진 순간에 위계질서를 전복하는 것’을 필요로 합니다. 이는 “전복의 단계를 무시하는 것은 대립의 갈등적이고 종속적인 구조를 망각하는 것”이며 이에 따라 “사실상 이전의 영역을 현상 유지시키고 이에 효과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박탈”(󰡔입장들󰡕, 박성창 옮김, 앞의 책, 65쪽-강조는 데리다)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러한 전복이 기존의 체계 내에서 대립항들의 전도에 그치게 된다면 계속해서 지배구조 자체를 재생산시키는 결과를 낳기 때문에 두번째로 해체는 지배구조에 대한 “긍정적 전위(轉位)”(déplacement affirmatif)(󰡔입장들󰡕, 93쪽)를 시도하는 데까지, 곧 기존의 지배 구조의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구조, 좀더 개방적이고 좀더 평등한 새로운 관계 설정을 형성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déconstruction이라는 데리다의 개념을 ‘해체’라고 번역하는 것은 데리다의 이 개념이 지니고 있는 능동적이고 포지티브한 측면을 축소시키거나 소거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그것보다는 탈-구축이라는 번역어가 déconstruction의 이중 운동을 표현하기에 훨씬 적합하죠. 그런데 déconstruction의 부정적인 측면이 부각되는 것이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외국에서도 해체론을 비난하거나 폄훼하는 이들은 주로 해체론의 이런 이미지를 부각시키죠. 따라서 이 문제는 단순히 번역의 문제만으로 해소되지는 않습니다.

 

이혜령: 제가 전에 마침 메이데이에 대학로를 걸어가다가 찌라시를 한 장 받아 왔는데 이런 문구가 써 있었어요. “자율주의자, 들뢰지안, 트로츠키스트, 투쟁하라! 혁파하라!”고 되어 있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이런 구호가 나오는 까닭이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문제를 통째로 괄호쳤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진태원: 제가 볼 때는 맑스주의가 포스트주의에 반감을 갖는 이유 중 하나도 그런 데 있습니다. 통속화된 의미의 포스트주의는 기존의 노동의 인간학 및 맑스주의의 한계를 드러내고 그것을 전화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기보다는 오히려 청산하거나 포기하자는 주의니까요. 결국 어떤 문제제기를 하고, 문제를 해결하자는 게 아니라 문제를 아예 말소시켜 버리는 셈이죠. 하지만 만약 노동의 인간학이 문제가 된다면, 그것은 다른 모든 범주나 가치들을 노동이라는 범주에 종속시키고 그리하여 그 범주에 대해 초월적인 가치를 부과하는 것, 그것을 맑스주의나 사회운동을 사고하기 위한 불가침의 범주로 간주하는 따위의 태도들이 문제이기 때문이죠. 따라서 노동의 인간학이 문제라고 해서 역으로 사회나 역사를 사고할 때 또는 사회운동을 사고할 때 노동이라는 범주를 아예 배제하고 노동 계급이나 노동자 계급을 거론하는 것을 낡은 태도로 간주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의 해체론적 사고방식과는 전혀 무관한 방식입니다. 사실 노동의 인간학이 문제라고 해서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자들이 착취되고 또 어떤 경우에는 초과 착취되고 그런 현상이 사라지는 건 아니죠. 그리고 노동자계급 중심주의가 문제라고 해서 노동자운동이라는 게 불필요한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포스트주의의 문제제기라든가 논의 구조를 보면 실제로 노동의 인간학을 해체하는 것과 노동의 인간학을 배제하고 청산하는 것을 혼동하는 경향들이 있고,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이 후자를 노동의 인간학의 해체로 간주하려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그게 제가 아까 얘기했던 맑스주의의 유령이 계속 떠돌고 있고, 맑스주의에 걸맞은 애도가 이뤄지지 못했다는 얘긴데요. 포스트주의 담론들이 이 문제를 다루고 그것에 관해 일관되고 설득력 있는 자신의 대안을 마련하지 않는 한, 포스트주의가 현실적이고 자생적인 한국식의 담론이나 이론 또는 문제설정으로 재생산되고, 창조되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적어도 반동적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맑스주의와 포스트주의의 가교

 

김항: 한편에서는 포스트주의의 현학적이고 원리적인 사변이, 다른 한편에서는 맑스주의의 낡은 식상한 용어들이 90년대 중반 이후 각각 자기 걸음을 하게 된 거죠. 사실 포스트주의는 현실에서 유리되었고, 맑스주의는 이론적 갱생을 하지 못했던 것으로 파악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아마 둘 사이의 가교란 이론과 현실의 거리를 좁히는 문제아닐까요?

 

진태원: 그렇죠. 그것은 보통 말하는 학제 연구의 필요성과도 연결되겠죠. 그런 것을 할 수 있는 장, 제도적인 기반이 상당히 부족하다는 측면도 있지만요. 그 다음에 아까 얘기하고 조금 더 관련되는 측면에서 보자면 제가 생각할 때에는 맑스주의하고 포스트주의의 생산적인 대화․토론․논쟁에서 상호전화—이런 것들의 추구는 꼭 여기 한국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런 과감한 표현을 써도 될지 모르겠는데, 20세기에 굉장히 중요한 사상적인 아방가르드 운동을 두 개를 뽑는다면 제 생각에는 한편으로는 서구 맑스주의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포스트주의가 있다 이렇게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서구 맑스주의하고 포스트주의가 서로 만나 상호 토론을 하고 논쟁하고 상호 전화해서—서구 맑스주의나 포스트주의와 다른 새로운 형태의 사상운동을 생성해 내느냐는 것은 어떻게 보면 20세기의 결산, 21세기의 진로를 개척하는 문제하고도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외국의 경우를 봐도 맑스주의하고 포스트주의가 생산적으로 결합된 예는 그렇게 많지가 않아요. 반대로 생산적으로 결합된 예들 가운데는 빼어난 작업들이 대부분이지요. 아까 얘기했던 라클라우나 무페 같은 작업도 굉장히 중요한 성과라고 볼 수 있고(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제가 그들의 이론에 모두 동의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저런 견해의 차이나 비판점들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들의 작업이, 불어식으로 표현한다면 “시대를 만들었다”(faire la date)는 점은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서발턴 연구 같은 것도 마찬가지로 볼 수 있고요. 국내에는 이제 라나지트 구하의 책이 번역돼서 막 서발턴 연구의 본격적인 수용이 이루어지기 시작하고 있지만, 제가 생각하기에는 서발턴 연구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젝 같은 사람도 결국 맑스주의의 유산하고 라캉의 정신분석을 결합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넓은 의미에서 맑스주의와 포스트주의의 결합을 시도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죠. 물론 지젝 자신은 의도적으로 포스트주의와 라캉의 유산을 분리시키려고 하지만요.

별로 주목받지 못하고 있기는 하지만, 제가 볼 때는 발리바르 같은 사람이 데리다라든가 들뢰즈, 푸코 이런 포스트주의의 유산하고 맑스주의 유산을 결합하려는 시도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발리바르는 제가 지금 거론한 사람들보다 더 오랫동안 맑스주의의 업적과 한계, 전화의 가능성들을 모색해왔고, 다른 사람들이 모두 맑스주의를 포기하거나 청산했을 때에도 여전히 맑스주의자로 자처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꺼리지 않은 사람이었죠. 그런 의미에서 앞에서 언급한 그 누구보다도 더 맑스주의자라는 칭호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때문인지 발리바르가 맑스주의의 유산과 포스트주의의 유산을 결합하는 방식 역시 다른 이들과는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우선 발리바르는 일관되게 맑스주의의 문제설정 속에서, 맑스주의의 역사 속에서 이러한 결합의 가능성들을 모색하고 있죠. 가령 포스트주의 담론의 주요 주제 중 하나인 폭력의 문제를 다루는 방식에서 이 점이 잘 나타납니다. 폭력의 문제를 다루는 이론가들은 대부분 맑스주의와 무관하거나 맑스주의와 상당히 거리가 있는 방식으로 폭력의 문제를 제기합니다. 데리다가 [폭력과 형이상학](『기록과 차이)이나 『법의 힘』 , 『불량배들등과 같은 저작에서 폭력의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 그렇고 아감벤이 호모 사케르 연작 같은 데서 폭력이나 전체주의의 문제를 사고하는 방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면 발리바르는 폭력의 문제를 다룰 때 늘 맑스주의의 역사 및 그 역사 속에서 맑스주의자들이 직면했던 아포리아라는 문제설정을 견지하죠. 이 점은 그가 쓴 [게발트](Gewalt)라는 논문에서 잘 드러납니다(에티엔 발리바르,『폭력과 시빌리테』, 진태원 옮김, 난장, 근간에 수록).

 

이혜령: 서양이론의 수용이 많이 달라진 것 같아요. 산발적이기보다는 들뢰즈 번역처럼 꾸준히 지속적으로 이뤄진다는 것이죠. 소개되는 사상가도 많아졌죠. 그래서 번역-해석-실천의 장이 확장되고 토착화되는 양상을 보인 것 같습니다.

 

진태원: 80년대 말 이후에 20년 동안에 한국에서 수용된 포스트주의 중에서 또는 현대 프랑스철학자 중에서 제일 체계적으로 번역이 많이 되고 논의되는 철학자는 푸코와 들뢰즈라고 생각합니다. 푸코가 국내에서 널리 읽히고 또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원용이 되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봅니다. 우선 푸코 저작들이 많이 번역돼 있다는 사실을 들 수 있겠죠.『감시와 처벌』,『성의 역사』,『광기의 역사』,『지식의 고고학』같은 주요 저작들이 거의 모두 번역되어 있고, 다른 프랑스 철학자들의 저작과 비교해볼 때 번역의 질도 좋은 편입니다. 물론 『말과 사물』이나『임상의학의 탄생』같은 저작들은 번역에 상당히 문제가 많아서 언젠가는 재번역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최근에 프랑스와 영미권을 비롯하여 외국 학계에서 큰 화제를 낳고 있는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들도 번역되고 있죠. 현재까지는 『비정상인들』(1975)과『“사회를 보호해야 한다”』(1976) 같은 두 권의 강의록이 번역되었는데, 앞으로 후기 푸코 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통치성에 관한 강의록이 속속 번역될 것으로 보입니다. 주요 저작들이 읽을 수 있게 번역이 되지 않는 상태에서는 어떤 사상가든 간에 제대로 논의되고 연구될 수가 없습니다. 서양 인문학을 연구하는 분들 가운데는 번역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분들이 있는데, 저는 그건 큰 착각이라고 봅니다. 가령 국내에서 현대 영미철학이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은 주요 영미철학자들의 저작이 거의 번역되지 않는 이유도 크다고 생각합니다. 콰인이나 데이빗슨의 저작이 번역되지 않는 상황에서 그들이 한국 인문학에 의미 있는 흔적을 남길 수 있을까요? 그건 불가능하죠. 개인적인 연구를 위해서는 원서를 읽는 것으로 충분할 수 있겠지만, 한국의 인문학이라는 문화적 제도를 고려한다면 번역이 없는 사상은 생명력이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한국에서 플라톤의 사상적 삶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고 봐야죠. 따라서 지난 90년대 이후 한국 학계에서 푸코가 의미 있는 흔적을 남긴 것은 그의 주요 저작들이 비교적 잘 번역된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둘째, 푸코는 맑스 이후에, 또는 맑스와 달리 정치와 사회 또는 문화를 어떻게 읽고 분석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가장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는 해결책을 제시해줄 수 있는 철학자가 아닌가 싶습니다. 푸코가 반드시 맑스와 대립한다고 볼 수는 없고 또 맑스와 동일한 영역, 동일한 지평을 탐구한 사상가도 아니지만, 푸코는 어쨌든 맑스 없이도 정치와 사회를 분석할 수 있고 또 맑스가 간과한 영역들에서도 중요한 문제들이 존재한다는 점을 보여준 사람이죠. 예컨대 이성과 광기의 대립 또는 정상과 비정상의 대립이 근대성의 핵심적인 구성소 중 하나라는 점을 보여주었고, 학교, 감옥, 병원 등과 같이 우리가 보통 정치와 무관한 장소라고 생각하는 곳이야말로 진짜 정치, 진짜 권력이 작동하는 영역이라는 점을 밝혀냈죠. 그 때문인지 국내에는 푸코의 문제설정을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전유하거나 아니면 푸코의 관점에서 맑스주의의 변형 내지 개조를 추구하려는 시도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푸코는 맑스의 대안처럼 받아들여졌죠.

들뢰즈와 가타리는 약간 사정이 다른 것 같습니다. 들뢰즈/가타리의 국내 수용과 확산에서는 특히 수유너머의 연구자들, 이진경 선생이나 고병권 선생, 고미숙 선생 같은 분들의 노력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을 합니다. 들뢰즈의 책들이 많이 번역이 되고, 좋은 번역들이 이루어진 것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세부적으로 따진다면 이런저런 문제점들이 있겠지만, 가령 『천 개의 고원』이나『차이와 반복』또는『의미의 논리』,『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같은 책들이 번역이 되지 않았다면, 들뢰즈가 그처럼 많이 논의되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들뢰즈나 가타리 저작 중에도 번역에 상당히 문제가 있는 것들이 있죠. 『반(反)오이디푸스』, 『니체와 철학』같은 책들이 그렇습니다. 아무튼 그런 번역들을 바탕으로 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것들을 읽고 각자의 공부 분야에서 응용을 시도하고, 그것을 또 삶의 문제라든가 정치적 현상을 해석하는 기반으로 삼는 시도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게 어떤 이론적인 성과라든가 실천적인 의미가 있는 문제제기를 했느냐를 평가하기 이전에 그 방향과 태도, 자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거라고 봅니다.

국내의 들뢰즈 연구(들뢰즈와 가타리는 여러 권의 저작을 공동 저술했지만 국내에서는 주로 들뢰즈에 관심의 초점이 맞춰졌다는 점에서 이렇게 부를 수 있겠죠)는 상당히 특수한 현상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가령 프랑스나 영미권을 비롯한 외국의 사례를 볼 때 국내처럼 들뢰즈가 대중적인 현상으로 나타난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외국의 경우 들뢰즈(/가타리)는 『반오이디푸스』가 대중적으로 큰 호응을 얻은 것을 제외하고는 늘 학계의 소수파적이고 이단적인 현상이었죠. 들뢰즈에 열광하고 그들의 저작을 활용하거나 발전시키려는 학자들은 어느 나라에나 존재하지만 그들은 학계에서 늘 소수이고 또 대중적인 영향력도 미미한 편입니다. 반면 국내에서 들뢰즈는 2000년대 그야말로 대중적으로 광범위한 반향을 불러일으켰죠. 대중들이 들뢰즈 책을 실제로 읽고 그 내용을 이해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보다는 들뢰즈 사상의 무언가가 대중의 욕망 내지 대중의 상상력을 자극했던 것 같아요.

제가 볼 때에는 들뢰즈에 대한 대중적인 열광은 무엇보다 노무현 전(前) 대통령 시절과 상당히 겹친다는 점이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0년대 한국의 정치와 사회ㆍ문화를 규정하는 핵심 단어 또는 (정신분석적인 의미에서의) 증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을 인민주의(populism)라고 부를 수도 있겠죠. 단 이 경우 인민주의에 대한 부정적이거나 심지어 악마적인 평가(과천연구실에서 나온 『인민주의 비판』이라는 책은 이런 경향을 단적으로 대변하는 책입니다)에서 벗어나 그것이 지닌 양가성을 공정하게 파악한다는 점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인민주의로서의 노무현 현상은 기성의 제도 정치에 대한 실망감과 그것을 변혁하거나 넘어설 수 있는 진정한 정치에 대한 대중의 열망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진정한 정치는 맑스주의적인 정치는 아닙니다. 대중의 시각(또는 대중의 상상계)에서 볼 때 맑스주의(또는 운동권)는 또 하나의 제도 정치이고 기성의 낡은 정치죠. 대중은 엘리트들이 좌우하고 부자와 권력자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데 불과한 기성의 정치를 넘어서 보통 사람들, 서민들의 아픔과 이해관계에 관심을 기울여주는 정치를 원했고, 노무현 대통령은 이런 대중의 열망, 대중의 상상계에 부합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유명 대학 출신도 아니고 집안의 배경이라든가 권력의 연줄 같은 것과도 무관한 인물, 그러면서도 사시에 합격해서 변호사가 되고 정치권에서 입지를 다질 만한 능력을 지닌 인물, 기성 정치인들과 달리 계파나 정치적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자신이 옳다고 믿는 가치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인물이 바로 노무현이라는 정치인이었고, 민주화 이후 고양된 대중의 정치적 자신감과 새로운 정치에 대한 열망이 그를 2000년대 한국 정치의 정점으로 이끌어올린 것이죠.

노무현 현상에 대한 정확한 분석이나 평가는 이 대담의 주요 논점이 아닌 만큼 더 이상 논의하지는 않겠지만, 제가 볼 때에는 들뢰즈 사상의 대중적인 인기, 또는 대중적인 상상계 속에서 이해된 들뢰즈 사상은 노무현 현상의 사상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가지 측면에서 볼 때 그런데요, 우선 2000년대 국내에 소개되고 확산된 들뢰즈 사상은 맑스주의에 대한 (상상적) 보충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한국의 들뢰즈는 맑스주의를 계승하되, 그것이 지닌 역사적 한계를 교정하고 넘어설 수 있는, 좀더 세련되고 일반화된 맑스주의입니다. 적어도 대중들은 그렇게 받아들였죠. 이 경우 맑스주의를 계승한다는 것은 엘리트가 아닌 피지배 대중들을 정치와 문화의 주체로 간주한다는 점, 그리고 제도적인 정치 바깥에서 진정한 정치를 추구한다는 점을 의미합니다. 반대로 맑스주의의 한계를 넘어선다는 것은 노동자 계급을 중심으로 설정하지 않는다는 점, 이미 보수화되고 제도화된 ‘운동권’을 넘어 진짜 대중, 진짜 서민의 욕망과 이해관계를 표현해줄 수 있는 정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따라서 둘째, 대중들이 보기에 들뢰즈 사상은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의 문제를 표현하고 또 그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아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사상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탈주론’에서 그것을 찾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욕망’ 개념에서 찾기도 했고 아니면 ‘소수자’ 이론에서 찾기도 했지만,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매우 난해한 들뢰즈의 사상에서 자신들의 구체적인 삶의 문제들에 대한 해법을 찾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볼 때 이진경 선생과 고미숙 선생은 대중들에게 들뢰즈 사상의 이 두 가지 측면을 각각 구현해준 사람들로 비쳤던 것 같습니다. 공교롭게도 이러한 대중적 들뢰즈 또는 상상적 들뢰즈는 노무현 대통령의 퇴임 및 비극적인 죽음과 비슷한 시기에 퇴조를 겪은 것 같은데, 앞으로 과연 들뢰즈 사상이 지난 10여년 동안 누렸던 인기와 권위를 지속시킬 수 있을지, 새로운 동력을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푸코와 들뢰즈는 체계적으로 번역ㆍ소개되고 또 나름대로 심화ㆍ확장되었다는 점에서 90년대 이후 포스트주의 내지 프랑스철학의 수용사에서 의미 있는 자취를 남겼다고 봅니다.

 

이혜령: 그런 의미에서 포스트주의와 맑스주의의 대화에 선생님께서는 기본적으로 많은 실망들도 하셨지만, 믿음과 긍정적인 가능성들을 생각하고 계신 게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

 

진태원: 저는 맑스주의를 공부하는 분들, 또는 아직도 맑스주의 관점에서 연구를 하고 실천을 모색하는 분들하고, 포스트주의적인 관점에서 작업을 하는 분들이 각자 노력을 하고 작업을 해야 된다고 봅니다. 이것은 포스트주의 하는 사람들만의 작업이 아닙니다. 맑스주의 하는 분들도 포스트주의의 성과나 문제제기를 좀더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봅니다. 제가 볼 때는 그 점에서 상당히 중요한 문제는 맑스주의의 역사를 소개하고 연구하고 검토하는 게 아닌가 합니다. 한국에서 맑스주의 연구하는 분들이 아직도 상당수 있지만, 맑스주의 역사를 연구하고 소개하는 분들은 거의 없거든요. 하지만 맑스주의 역사를 연구하고, 소개하고, 평가하지 않고서 맑스주의를 애도하는 것, 곧 맑스주의의 역사적 한계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특히, 근대성의 맥락에서 맑스주의를 어떻게 위치 지을 것인지, 근대성에서 맑스주의가 어떤 의미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고, 또 맑스주의의 한계가 근대성의 한계들과 어떻게 연동돼 있는지, 근대성의 전체적인 구조와 전개, 그것의 한계 등과 맑스주의 역사에 대한 연구를 결합하는 작업들이 많이 소개가 되고, 또 한국의 연구자들도 스스로 해야 합니다. 이러한 작업은 아마 조금 더 폭넓은 시야에서 맑스주의를 애도하고 포스트주의의 역사적인 위상 같은 것을 규정하는 데도 중요할 겁니다.

 

김항: 맑스주의라고 하는 원리라든가 교조적인 체계가 아니라 실제로 맑스주의가 사유되었던 방식 자체를 계보적으로 연구하는 작업을 지역이나 국가에 얽매이지 않고 계속 해나가는 건 상당히 방대한 프로젝트가 될 것 같습니다.

 

진태원: 이것은 한 집단이나 사람의 과제가 아니라 상당히 포괄적인 연구 방향이라고 볼 수 있을 텐데요. 가령, 이런 거죠. 맑스주의라는 것은 그냥 생겨난 게 아니라 그 이전에 프랑스혁명이나 영국에서의 혁명 또는 대중운동하고 분리될 수가 없습니다. 프랑스혁명이나 영국에서의 혁명운동은 조금 더 이른 시기에 사상적이고 제도적인 운동의 흐름하고 연결이 되어 있고요. 또, 포스트콜로니얼 시각에서 보면 그런 것하고 세계의 식민지 분할 패권경쟁하고 연결되는 측면들도 연구가 되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프랑스혁명에 관한 체계적인 소개나 연구가 상당히 드문 편이죠. 영국혁명은 더 그렇고요. 또 아시아나 남미, 아프리카의 반식민 해방투쟁과 대중운동의 역사에 대한 연구도 찾아보기 쉽지 않은 형편입니다. 아무튼 맑스주의의 역사를 근대성의 역사라는 시각에서 연구하는 건 앞으로 인문․사회과학의 중요한 연구방향 과제가 아닌가 합니다.

 

한국연구재단 체제와 한국 철학계의 폐쇄성

 

김항: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지금까지 말씀하신 맑스주의와 포스트주의의 가교나 근대성의 역사로서 맑스주의의 역사 연구 등을 위해서는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이 모일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연구재단의 지원이 그런 기반을 제공해 주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죠. 다만 그런 상황 속에서도 철학과 다른 학문 분야 사이의 교류는 80년대 이후 급격하게 줄어든 것 같습니다. 신기한 건 글 쓸 때, 프랑스철학을 인용하지 않는 문학 연구자가 없을 정도로 철학이 많은 연구자들에게 대중화되었음에도 실제로 철학하시는 분들과 인적으로 교류하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아무튼 이런 제도적 기반과 학문간, 특히 철학과 타학문간의 교류 문제에 관해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진태원: 질문은 크게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인문․사회과학 연구에서 연구재단(구 학진) 체제라는 걸 어떻게 볼 수 있느냐 하나 하고, 프랑스철학을 중심으로 봤을 때 철학하고 다른 인문․사회과학 분과와의 상호작업, 공동작업, 학제적인 작업의 부족이나 결여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느냐 두 가지 문제라고 보는데요.

첫번째 문제와 관련해서 저는 연구재단 체제의 문제점에 관해서 지적하는 사항들에 공감할 수 있는 점도 있는데, 어떤 측면에서는 문제를 너무 과장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저는 문제점도 있다고 보지만, 결국 연구재단 문제는 한국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 자신의 문제를 연구재단에 전가하는 측면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약간 사정이 달라졌을 수 있겠지만, 지난 10여 년 간 김대중․노무현 정권 하에서 연구재단의 역할이 반드시 부정적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또 연구재단이 그렇게 경직된 기관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이 조직에 대해 사람들이 흔히 ‘논문식 글쓰기’를 강요한다, 또는 어젠다 중심이다, 심지어는 이런 얘기도 하지요, 돈 가지고 인문․사회과학을 관리․통제하려고 한다, 그런 문제제기들을 하는데, 그게 어떤 점에서는 일리가 있는 점도 있지만, 너무 과장한다고 생각해요. 돈 가지고 인문․사회과학자들을 관리하려고 한다는 지적은 돈 걱정 없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말이죠. 학위를 마치고 아무 일자리도 없이 강의나 나가는데, 연구과제라도 있어서 그거 지원해서 생계에 보탬이 되는 거는 시간강사들한테 통제의 문제가 아니죠. 원래 과제를 만든 이유 자체도 연구자들한테 인건비를 지원하자는 취지들도 있는 거니까 이걸 돈을 가지고 통제하려고 한다는 것은 과장된 것이라 봅니다. 물론 인문학에 대한 지원이 대규모 사업형태로 이루어져야 하느냐 오히려 개인 중심으로 지원이 이루어져야 하지 않느냐, 또 비정규직 학자들에 대해 장기적인 연구 기반을 제공할 수 있는 지원 방안이 부족하다는 등의 비판은 일리가 있고 또 대안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 다음에 논문식 글쓰기라든가 등재지 중심의 업적평가, 즉 양적인 평가는 연구재단에 떠넘길 문제는 아니라고 봐요. 만약에 인문․사회과학자들이 충분히 거기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느끼고, 그걸 개선할 수 있는 대안들을 가지고 있다면 저는 연구재단에서 어느 정도 그걸 수용하고 개편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근데 인문사회학자들이 그런 대안이 없었던 거죠. 그것을 어떻게 개선할지에 대한 구체적인 문제의식이나 해결방안이 없으니까 그게 계속 강요처럼 느껴지는 거죠. 저는 이런 문제에서는 인문사회학자들의 문제가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비평 논문 같이 학술지 논문 등재지 이외에 다른 계간지라든가 이런데 실린 글들의 업적은 인정을 안 해주냐? 업적으로 인정해 달라.” 이런 것도 인문․사회과학자들이 문제의식을 갖고 체계적인 대안을 마련한다면 충분히 마련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근데 사람들 보면 놀라운 게 가령 연구재단에서 어떤 규정 같은 것을 만들면 아무 문제제기 없이 그냥 따라가요. 가령 대학에 있는 선생들 만나면 등재지에 글 쓰라고, 꼭 등재지에 쓰라고 합니다. 왜? 등재지만 업적 평가가 되니까. 그러면 제가 비등재지도 업적 평가에 들어갈 수 있게 만들면 되지 않냐 하는데, 사람들이 그렇게 하려는 생각을 못해요. 또, 그런 걸 하긴 귀찮아하고, 그걸 하려면 뛰어다니고, 사람들 모아서 학교에 건의도 해야 되고, 연구재단에도 얘기를 해야 되니까 그냥 따라가요. 연구재단으로서는 국정감사도 받아야 되니 쉽게 바꾸려 하지 않죠.

 

이혜령: 계량화와 투명화가 필요한 거죠.

 

진태원: 국가기관으로서 자기들의 규칙이 필요한 집단이자 기관이죠. 그것을 인문․사회과학의 실정에 맞게 변화시키고, 그걸 좀더 유리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인문․사회학자들밖에 없는 건데, 그냥 따라 가요. 인문․사회과학자들을 보면 어떤 점에서는 마치 공무원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나쁘게 말하면 복지부동 같은 태도도 있는 것 같고, 위에서 어떤 지시가 내려오면 그냥 그대로 순응하고 따라가는 경향이 있는데, 그건 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혜령: 저는 연구재단 시스템의 가장 큰 문제는 비평공간을 축소시켰다는 점보다는, 논문 글쓰기를 규칙화하면서 분과 학문체제는 강화했다는 점 같습니다. 사실 논문 쓰기와 심사를 규격화하고 엄격화하면서 글의 질은 나아졌지요. 그런데 분과학문 간의 융합을 강조하면서도 논문 중심의 글쓰기 체제는 분과 학문의 울타리를 공고히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진태원: 연구재단 지원방식 또는 체제의 문제점은 공론 기능을 약화시켰다는 걸 들 수 있을 것 같아요. 연구재단의 지원방식이 학회를 중심으로, 학회에서 내는 학술지를 중심으로 지원을 하기 때문에 선생님 말씀하신 것처럼 오히려 과 단위 분과학문 단위로 분산시키고, 그걸 고착화하고, 대신에 여러 분과 사람들이 모여서 공론의 장을 형성하는 여지를 상당히 축소시킨 점들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 점도 논란이 됐던 것 같은데요. 가령, 『창비』 같은 학술지를 등재지로 할 거냐 말거냐. 그거 가지고서도 아마 논란이 있었던 것 같은데요. 그걸 등재지로 해야 된다고 하는 분들은 『창비가 사회적으로 중요한 공론장으로서 기능을 하고, 또 의미 있는 글들이 많이 실리니까 학술지로서 평가해 줘야 한다라는 관점을 갖는 거고요. 반면에, 왜 『창비에게만 그런 특혜를 주냐는 문제제기 논란이 있는 거죠. 결국 현재 연구재단의 지원방식으로는 공론을 형성하고, 학제적 연구를 촉진하는 건 어려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혜령: 이것도 저것도 등재지가 되어야 한다는 차원으로는 해결이 안 된다는 거죠.

 

진태원: 맞습니다.

 

이혜령: 그래서 선생님이 얘기하신 것처럼 인문학자들의 대안적인 상상이 필요한 거구요.

 

진태원: 아무튼 저는 모든 것을 꼭 연구재단의 문제라고 돌리기는 어려운 점들이 있다고 봅니다. 두번째 질문하신 게 철학하고 다른 인문․사회과학하고 공동작업이 부족하지 않느냐고 말씀하셨는데요, 제가 볼 때는 80년대와 최근의 분위기 차이도 있는 것 같습니다. 80년대 철학이 다른 학문들하고 교류도 하고 같이 작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맑스주의라는 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건데, 그게 무너지고 난 다음에는 그걸 묶을 수 있는 틀이 별로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다음에 철학하고 다른 학문 분과의 교류가 없다는 것은 사실 철학 자체의 문제점이 더 많다고 생각을 합니다. 왜냐면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90년대 이후에 두드러진 현상 중의 하나는 다른 인문․사회과학 분과에서 철학을(특히 프랑스철학이겠죠) 참조하거나 준거로 삼는 경향이 많아졌다는 건데, 정작 프랑스철학, 또 일반적으로 철학을 하는 분들은 다른 분야에서 어떻게 참조하는지에 별로 관심이 없어요. 국문학에서 프랑스철학을 어떻게 수용을 하고 있는지, 또 역사학자들이, 예를 들어 임지현 선생 같은 분들이 알튀세르나 푸코를 어떻게 수용을 하고 있는지 이런 데 관심이 없는 거죠.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러한 수용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대안을 제시할 만한 능력도 부족한 것 같고요.

왜 관심이 없냐 하면 서양철학, 프랑스철학도 마찬가지지만, 서양철학하는 분들의 관심은 프랑스나 독일, 영미 쪽에 가 있지 한국에 관심이 없습니다. 한국어로 글을 써도 관심은 프랑스나 영미 쪽 논의나 연구동향에 가 있지, 여기서 어떤 문제가 이뤄지고 있는가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아요. 그것은 유럽이나 영미쪽이 현재의 인문사회과학의 본산이고 또 그쪽에서 이루어지는 논의의 수준이 훨씬 높으니까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측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좀 비판적으로 본다면 그것은 한국의 프랑스 철학을 비롯한 한국의 철학 일반이 갖는 대외종속적․타율적 속성, 한국 인문학자로서 프랑스철학 연구자들이나 다른 철학 연구자들이 갖는 ‘뿌리 없음’ 때문이라고 볼 수 있는데, 저는 오히려 그게 더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을 합니다. 철학이라는 게 원래 추상적인 학문이긴 하지만, 그 추상적인 학문에도 그것이 성립하고 발전하고 변형되는 맥락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중요하고 강력한 철학자들일수록 이러한 맥락을 잘 이해하고 있고 늘 이 맥락을 조회하면서 자신의 사상을 가다듬고 발전시키죠. 한국에서 상당히 논의가 많이 되고 수용이 많이 된 철학자들, 데리다, 들뢰즈, 푸코, 리오타르, 최근에는 랑시에르, 발리바르, 아감벤 같은 사람들이 대단한 점들이 뭐냐면 그 사람들의 문제의식 자체가 너무 구체적이라는 겁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들 현실에서 부딪히는 문제를 가지고 자기들이 물려받은 사상적인 자원을 무기로 해서 문제를 사고합니다. 자기 선배들의 철학과 싸우면서 자기들의 입장을 형성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사람들인데, 그들의 사유의 밑바닥에는 항상 자신이 살아가고 사고하는 현실의 맥락에 대한 준거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아무리 추상적인 얘기를 하더라도 그 추상적인 얘기들이 어떤 문제의식에서 나왔는지 분명하게 추적할 수가 있어요. 따라서 이들의 사상은 논리적으로 설득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람들의 작업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작업이 어디에서 발원했고 또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그 실천적인 방향이 뚜렷해요. 우리나라 철학자들에게는 그런 게 없죠. 들뢰즈를 전공하는 철학자, 또 데리다를 논의하는 철학자 또는 푸코를 연구하는 철학자는 존재하지만, 그들이 왜 그 사람들을 전공하고 연구하는지, 그것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파악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유행에 편승한다는 비판들이 제기되곤 하죠. 저는 사상의 유행이라는 게 반드시 부정적인 것이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상이 유행한다면 그것은 그 사상이 시대의식을 잘 구현하고 있고 또 동시대가 직면한 문제들을 첨예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죠. 철학사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각각의 시대에 유행했던 사상들의 기록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철학 및 좀더 일반적으로 인문사회과학 연구 일반은 어떤 의미에서는 항상 유행을 따를 수밖에 없는데요,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따를 것인가, 어떻게 ‘그들의’ 유행을 ‘우리의’ 유행으로 만들 것인가, 그들의 유행과 우리의 유행 사이에 어떻게 차이를 만들어낼 것인가죠.

따라서 문제는 프랑스 철학을 비롯한 서양 인문사회과학을 공부하면서 어떻게 한국이라는 리퍼런스를 준거로 기입해 넣을 것인가, 또는 어떻게 한국이라는 준거점에서 프랑스 철학을 수용하고 변용할 것인가라는 점인데, 상당수의 서양 인문학 연구자들은 이런 리퍼런스의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나(왜냐하면 이미 프랑스, 독일, 영미 같은 리퍼런스가 있기 때문에) 아니면 그 문제를 괄호에 넣고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한국이라는 리퍼런스가 기입될 경우 보편성이나 객관성이 훼손될 수 있다는 것이죠. 아마도 이런 태도가 한국의 서양 인문학 연구를 더욱 더 추상적으로 만들고 자족적이고 폐쇄적으로 만들지 않는가 합니다.



김항: 데리다를 읽든 들뢰즈를 읽든 문자 하나하나를 따라가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어떤 문제에 맞닥뜨려서 그 난해한 이야기들이 구체성을 띠고 제시가 되었냐고 하는 상황까지 포함해서 연구해야 그걸 우리 스스로의 처지와 맞춰서 상대화하고 거기서 수용을 할 건 하는 태도들이 생겨날 수 있겠죠. 그때 비로소 다른 학문 분과들하고 문이 열릴 것 같은데요. 한국의 철학이 그 단계에 계속 안 가고 있다는 말씀이시죠?

 

진태원: 맞습니다. 김항 선생님이 잘 아실 텐데요. 우리나라와 비교해본다면 일본 학자들이 그런 걸 잘 하는 것 같아요. 제가 일본 학계의 전통이나 분위기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국내에 소개된 몇몇 사람들 책을 보면 가라타니 고진 같은 사람도 그런 걸 잘하는 사람들이고, 사카이 나오키 같은 학자도 마찬가지죠. 이 사람들은 무슨 문제를 논의하든지 간에 항상 일본이라는 리퍼런스를 밑바탕에 깔고서 이야기를 하더군요. 우리나라에서는 데리다를 굉장히 추상적이고 난해한 사상가, 현실 문제와는 그다지 관련이 없는 현학적인 철학자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는데, 데리다 연구하는 일본 학자들 보면 데리다 얘기하면서 꼭 일본의 문제를 같이 얘기합니다. 가령 얼마 전에 『주권의 너머에서라는 책이 번역된 우카이 사토시 같은 학자는 프랑스나 영미권에도 잘 알려진 데리다 연구자인데, 책 전반에 걸쳐 데리다 사상을 전제하면서 그것을 일본과 동아시아를 비롯한 현실 문제에 대한 사고 속에서 녹여내는 것이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데리다 사상으로 일본의 문제, 아시아의 문제, 팔레스타인의 문제를 어떻게 사고할 것인가, 그리고 이러한 사고 속에서 데리다 사상을 어떻게 발전시키고 변용할 것인가가 핵심 문제의식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우리나라 철학 전공자들한테서는 그런 걸 볼 수가 없어서 굉장히 유감입니다.

 

이혜령: 결국 선생님이 아까 말씀하신 맑스주의와 포스트주의의 생산적 대화와도 연결이 되는 문제네요.

 

김항: 저는 한국의 현대철학 연구자들의 저작들을 많이 읽고 있습니다. 내용이 훌륭해서라기보다는 도대체 이들의 현재적 생명력은 무엇일까 하는 의문에서요. 그건 아마 그 딱딱한 철학연구서에서 그것이 마주했던 현실을 찾아내는 일이 아닐까 싶어요.

 

한국 철학 연구의 전망

 

이혜령: 화제를 좀 바꾸자면 오히려 철학 자체는 매우 대중화된 측면이 있다고 봅니다. 90년대 후반 이후에 과 자체는 지방대 같은 데서는 없어지기도 하지만, 철학이 인문학 담론의 한가운데에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진태원: 그게 프랑스철학이 한국에 수용되는 특징하고 관련이 있다고 보는데, 프랑스철학의 한국적 수용은 첫째로 말하면 비철학적인 수용이라 볼 수 있어요. 프랑스철학이 많이 수용된 곳은 철학과가 아니고 철학 외에 다른 분과들에서 많이 수용되었습니다. 지금 한국 철학과를 보면 프랑스철학 전공자가 많지 않아요. 프랑스철학을 전공한 학자들이 전임 교수로 존재하는 철학과 숫자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90년대 이후 한국의 인문사회과학에서 가장 널리 논의되고 원용되는 철학이 프랑스철학인데, 정작 대학의 철학과에는 프랑스 철학 전임 교수가 드물다는 것은 한국 철학계가 상당히 폐쇄적이라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한 사례라고 볼 수 있겠죠. 다른 한편으로 프랑스철학 전공자 중에서는 베르그송 전공자들이 숫자가 제일 많아요. 그런데 베르그송은 그 철학의 중요성이나 탁월함과 별개로 90년대 이후 국내의 다른 인문사회과학 분과에서는 별로 영향을 못 미쳤습니다. 제가 볼 때는 앞으로도 특별히 큰 영향을 미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90년대 이후 국내 인문사회과학계에 프랑스 철학이 널리 수용되었다는 사실은 대학의 학문 제도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현상입니다.

두 번째로, 한국에서 프랑스 철학의 수용은 굉장히 비제도적인, 대중적인 수용이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프랑스철학의 수요, 또 그것에 대한 관심은 전문적인 연구자들도 있겠지만, 일반 교양대중들의 관심들에 힘입은 바가 상당히 크다고 봅니다. 이런 현상의 정확한 원인은 잘 모르겠어요. 한국사회가 사회적으로 봤을 때에 교양대중들의 철학에 대한 지적인 필요․욕구가 상승한 결과일 수도 있고요. 또, 출판을 중심으로 프랑스철학에 수용된 결과일 수도 있겠고요. 프랑스철학의 수용을 주도한 사람은 철학자들이 아니고, 대개 출판사하고 문학이론을 한 분들이었으니까요. 어쨌든 제도적으로는 프랑스철학이 별로 수용됐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대학에서 지금 들뢰즈나 데리다나 푸코나 리오타르 철학을 배울만한 곳이 거의 없거든요.

 

김항: 일본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인터디시플리너리한 학과에서는 리오타르 논문도 받아주지만, 철학과에서는 베르그송이나 데카르트죠. 메를로-퐁티까지가 한계인 것 같습니다.

 

진태원: 어떻게 보면 포스트 구조주의라는 철학 자체가 굉장히 성격이 특이합니다. 이게 어떻게 보면 포스트 철학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고 할까요. 그 사람들의 작업 자체가 전통적인 철학 분과에 포섭되지 않는 글쓰기 방식으로 이루어졌고, 또 그들이 다루는 영역이나 소재들도 그렇고, 다루는 주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푸코 이전에 누가 광기를 주제로 철학 분야의 국가박사학위 논문을 썼겠습니까? 데리다가 문자기록(écriture)이라는 문제로 그라마톨로지에 관한 책을 쓴 것도 마찬가지죠.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프랑스 철학이 철학과 바깥에서 수용되고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자연스러운 점이 있죠. 철학과에서 수용하기 어려운 방식의 논증․스타일․주제를 다루니까요. 그런 것도 개인적인 관심 중의 하나인데요. 포스트구조주의 이후에 철학이라는 게 어떻게 변모되었을까? 과연 철학이라는 게 예전과 같은 그런 식으로 생존할 수 있을까? 철학은 이제 자신의 고유한 영역이라는 것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고, 다른 분과학문 속에서 그 학문들에 기생하여, 말하자면 유령으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하게 된 것은 아닐까?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철학에게 상당한 자유와 해방의 효과를 낳을 수 있는 게 아닐까 ...

 

이혜령: 대학에서의 철학과는 어떤 식으로 가야 될까요?

 

진태원: ‘데카르트 이후’에 철학의 성격이 완전히 달라졌고, ‘칸트 이후’라든가 ‘맑스 이후’라든가 철학의 성격이 달라졌듯이 아마 포스트 구조주의도 역시 철학이라는 분과에 대해서 상당히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것 같습니다. 프레드릭 제임슨 같은 사람은 ‘포스트 철학’(post-philosophy)에 대해 말한 적이 있죠.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보는데요. 실제로 일어날 가능성은 희박하겠지만, 철학과라는 것이 없어지고, 그 대신 대학의 모든 과에 철학이나 그 비슷한 것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한두 명씩 존재하는 일이 일어난다면 어떨까요? 가령 문학 분야의 학과에 문학적인 철학을 전공하는 학자가 있고, 경제학과에는 경제적인 것에 관한 철학을 연구하는 학자가, 수학과에는 수리적인 것의 본성을 따지는 학자가 존재하는 식이죠. 제가 생각하기에 포스트구조주의로서의 프랑스철학이 철학에 미친 효과는 철학이 더 이상 다른 학문, 다른 분과와 독립적인 자신의 영역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졌다는 점인 것 같습니다. 일종의 철학의 해체, 또는 철학의 탈-구축인 셈이죠. 하지만 보수적인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그것이 반드시 반철학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김항: 어떻게 보면 장르 파괴적인 거네요.

 

진태원: 그런 성격들이 좀 있죠.

 

김항: 두 시간 정도 진한 이야기를 나눴는데요. 더 나가면 ‘철학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까지 갈 것 같습니다. 오늘, 긴 시간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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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iked-83 2011-08-09 09: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선생님, 저 박찬경 입니다. 외국에 나갔다가 바로 회사에 다니느라, 새움에 간지도 벌써 몇 년이네요. 웅기형과는 종종 보았습니다. 조만간 새움에서든 어디에서든 꼭 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선생님께서 글들도, 이 인터뷰도 안 보이는 곳에서 틈틈히 소중하게 읽고 있습니다.^^

balmas 2011-08-10 03: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찬경아 오랜만이다.^^ 회사에 취직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잘 다니고 있는지 궁금하구나. ㅎㅎ 그래 조만간 시간 나면 한번 보기로 하자.

강병호 2012-01-27 06: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참 좋은 인터뷰입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이렇게 내용이 알 찬 인터뷰를 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내공이 필요한 것인데.
말씀하신 것들의 대부분에 적극적으로 동의합니다.
특히 인문학자들 스스로의 반성의 필요성에 대한 지적.
인문학은 지원이 적다, 이런 말에 스스로 취해서 투정만 할 줄 알지, 자기반성은 알 줄 모르는 것 같아요.
자기<반성>을 못 하는데 어떻게 철학을 하겠어.
등재지에만 글 쓰지 않고,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곳에 투고하는 그 노력, 정말 쉬운 것 아니죠. respect!

balmas 2012-01-27 19:10   좋아요 1 | 수정 | 삭제 | URL
새해 복많이 받아라.
정색을 하고 말하니 좀 민망하다.^^

Jeronimo 2022-12-22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너무 감사합니다. 특히 연구재단 글이 인상깊습니다.
댓글저장
 

[헤겔연구] 제27호(2010년 6월)에 실린 글을 한 편 올립니다.  

제 학위논문 3장의 일부를 다소 손을 본 뒤에 발표한 글입니다.  

혹시 인용하시거나 논평하실 분은 [헤겔연구]에 수록된 판본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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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용과 연관의 인과론―스피노자 인과 이론에 대한 한 가지 해석

 

 

I. 머리말

 

스피노자의 인과 이론은 그의 철학 체계의 다른 부분들에 비해 그다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예컨대 근대 철학의 인과론을 다루는 책(Nadler 1993)의 「서문」에서 스티븐 내이들러는 근대 철학의 인과론을 데카르트의 상호작용론과 기회원인론,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론으로 분류하고 있으며, 스피노자의 인과론에는 아무런 자리도 마련해 놓지 않고 있다. 또 그의 인과론에 대해 논의하는 경우에도 다소 막연하거나 모호한 주석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예컨대 갈릴레이에서 흄에 이르는 근대 철학에서 인과론의 문제를 다루는 책에서 엘하난 야키라(Elhanan Yakira)는 스피노자를 말브랑슈, 라이프니츠와 더불어 근대의 기계적 인과론에 대한 “반대자”(dissidents)로 분류하면서 그의 인과론을 간략히 소개하고 있지만, 형이상학적 차원의 몇 가지 언급에 그치고 있다.[Yakira 1994, pp. 80 이하 참조.] 근대 철학에서 인과론 논쟁에 관해 최근에 출간된 또 다른 개론서의 경우는 “원인들과 충족 이유”라는 제목이 붙은 한 장에 걸쳐 스피노자를 라이프니츠와 더불어 다루고 있지만, 라이프니츠와 달리 스피노자의 인과론에 대해서는 간략한 요약 정도로 그치고 있다.[Clatterbaugh 1999. 이 책은 서양근대철학에서 인과이론을 개관하는 데 상당히 유용한 책이지만, 뒤에서 살펴볼 것처럼 스피노자의 인과이론에 대한 전형적인 오해 중 한 가지를 반복하고 있다.]

스피노자 연구자들의 논문이나 저서에서도 스피노자의 인과론에 관한 논의는 상당히 드문 편이다. 스피노자의 인과론만을 전적으로 다루는 글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편이고, 몇몇 연구서나 주석서를 제외하면, 스피노자의 인과론을 독립적인 주제로 논의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Gueroult I, 8-10장 ; Donagan 1988 중 6장 1-4절; Macherey 1992a 등 참조. 그 이외에 Deleuze 1999의 “자기원인” 항목도 참조. ] 그리고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스피노자의 인과론에 대한 여러 주석가들의 논의에는 상당한 오해가 담겨 있다. 이처럼 스피노자의 인과이론에 관한 논의가 드물 뿐만 아니라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스피노자가 자연철학에 관한 체계적인 저술을 남기지 않았다는 데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근대 철학에서 인과론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 것은 갈릴레이의 물리학 혁명이 계기가 되었으며 그 이후에도 인과론에 대한 논의는 주로 자연학과 관련하여 전개되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스피노자 철학에 체계적인 자연철학이 부재하다는 사실은 스피노자가 자신만의 독자적인 인과론을 지니고 있었는지 의심해 볼 만한 이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근대 철학에서 인과론의 또 다른 쟁점은 신체와 정신, 물질과 사고의 관계에 대한 문제였다. 데카르트가 신체의 형상으로서 영혼/정신이라는 중세적인 사고방식을 거부하고 사유와 연장을 엄격하게 구분한 이후, 인간이라는 하나의 통일체(적어도 우리의 경험에 의거했을 때)를 이루는 두 부분인 신체와 정신의 관계는 무엇인가라는 문제가 새롭게 제기된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에 관해 데카르트가 제기한 해법, 곧 신체와 정신 사이의 상호작용이라는 해법이 내포하는 애매모호함 때문에, 스피노자와 말브랑슈, 라이프니츠 같은 철학자들은 각자 이 문제에 대해 독자적인 대안을 모색했다. 하지만 다른 철학자들과 달리 스피노자는 신체와 정신을 하나의 통일체로 간주했기 때문에, 적어도 인과론의 측면에서 본다면 그리 주목을 끌 만한 입장이 되지 못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하지만 Della Rocca는 정신과 신체의 동일성에 관한 스피노자의 주장은 그의 인과론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 Della Rocca 1991 참조.]

그러나 이런 이유들에도 불구하고 스피노자 철학에는 인과론에 대한 매우 체계적인 관점이 담겨 있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스피노자의 인과론은,[이하에서 스피노자 저작은 다음과 같은 약어로 표시하겠다. 스피노자 전집은 G라는 약칭 아래 권 수는 로마자로, 페이지 수는 아라비아 숫자로 표시할 것이다. 스피노자의 각각의 저작 및 󰡔윤리학󰡕의 정의와 공리, 정리, 증명, 주석 등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표시한다.
󰡔지성개선론󰡕: TIE, 󰡔소론󰡕: KV, 󰡔데카르트의 철학원리󰡕: PPD, 󰡔윤리학󰡕: E
정의: D, 공리: A, 정리: P, 증명: d, 따름정리: c, 주석: s, 보조정리: L
E II P29s → 󰡔윤리학󰡕 2부 정리 29의 주석
KV II, 17, §5 → 󰡔소론󰡕 2부 17장 5절
]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E I P18)
내재적 인과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중요한 것은 여기서 “내재적”이라는 관형어가 지니는 의미가 무엇인지 밝혀내는 일이다. 왜냐하면 대개의 주석가들은 내재적 인과관계를 협소하게 해석하여 유한 양태들 사이에 존재하는 (이른바 “타동적”) 인과관계와 대립하는 것으로, 또는 그것과 외재적인 관계에 있는 것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인과론이 내재적 인과론이라고 해서, 이를 근대 자연과학에서 확립된 외재적 인과관계(상대성 이론적 인과론이라는 의미에서)와 대립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이는 내재적, 외재적이라는 용어를 상식적인 관점에 따라 잘못 이해하는 것일뿐더러, 자칫 전근대적인 자연학으로 후퇴할 위험을 안고 있다. 스피노자의 내재적 인과론은 갈릴레이 이후 확립된 상대론적 인과론을 전제하고 있으며, 이를 동역학적 관점에서 발전시키려는 시도로 간주되어야 한다.

따라서 스피노자 인과론의 쟁점은 외재적 인과론을 수용하면서 어떻게 각각의 물체들에게 내재적인 인과역량을 부여할 수 있는지 이해하는 데 있으며, 우리가 보기에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은 변용(affectio)과 연관(connexio)이라는 두 개념에서 찾아야 한다. 변용이라는 용어는 󰡔윤리학󰡕에서 매우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고 존재론에서 인간학에 이르는 스피노자 철학 체계의 일관성을 파악하는 데 핵심적인 개념이지만, 이상하게도 그동안 주석가들에 의해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또한 연관—또는 연쇄(concatenatio)—이라는 개념은 빈도가 매우 드물긴 하지만, 스피노자의 용어법들이 대개 그렇듯이 매우 전형적이고 일관된 용법을 보여주고 있다. 이 두 개념은 스피노자가 말하는 내재적 인과론이, 내면적 인과론 내지는 신과 피조물 사이에 존재하는 수직적 인과론이라기보다는 유한 양태들의 외재적이고 무한한 변용의 인과연쇄를 통해 전개되는 인과론이라는 점을 밝혀줄 수 있다.

 

II. 내재적 원인과 타동적 원인

 

1. 초기 저작의 인과론

 

인과론과 관련하여 초기 저작과 󰡔윤리학󰡕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은 초기에 사용되던 스콜라철학적 용어법이 󰡔윤리학󰡕에서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으며, 더 나아가 용어들이 상당히 단순해졌다는 점이다. 초기 저작 가운데 인과론에 관한 용어법들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곳은 󰡔소론󰡕 1부 3장이다. 스피노자는 여기서 8가지 측면에서 작용인을 구분하면서 신이 어떤 원인인가를 밝히고 있다.

 

작용인을 여덟 개의 부분으로 나누는 게 관례적이므로, 이제 신이 어떻게,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원인인지 탐구해보기로 하자.

 

1. 우리는 신이 그의 행위의 유출적 또는 생산적 원인(uytvloejende ofte daarstellende oorzaak/emanantive or productive cause)이며, 행위의 발생과 관련해서는 능동적 또는 작용적 원인(doende ofte werkende oorzaak/active or efficient cause)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를 한 가지로 취급하는데, 왜냐하면 이것들은 서로를 함축하기 때문이다.

2. 그는 내재적 원인(inblyvende oorzaak/immanent cause)이지 타동적 원인(overgaande oorzaak/transitive cause)이 아닌데, 왜냐하면 그는 모든 것을 자기 자신 안에서 실행하지 자기 바깥에서 실행하지는 않기 때문이다(왜냐하면 그의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3. 신은 자유 원인이지 자연적 원인이 아니다. [...]

4. 신은 자기 자신을 통한 원인(oorzaak door zig zelfs/cause through himself)이지 우연적 원인(toeval oorzaak/accidental cause)이 아니다. [...]

5. 신은 그가 직접 창조한 결과들(물질 속의 운동 등과 같은)의 주요 원인이며, 여기에는 부차적 원인을 위한 여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부차적 원인은 특별한 실재들로만 한정된다(신이 강한 바람으로 바다를 마르게 할 때라든가, 이와 유사한 자연 중의 다른 모든 특별한 실재들의 경우처럼). [...]

6. 우리의 앞선 증명들로부터 명백하듯이, 신만이 최초의 또는 창시적인 원인(eerste ofte beginnende oorzaak/first or initiating cause)이다.

7. 신은 또한 일반적 원인이지만, 이는 그가 상이한 실재들을 생산한다는 관점에서 그럴 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는 신에 대해서는 결코 언급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결과를 생산하기 위해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8. 신은 무한하고 부동적인, 그리고 우리가 그가 직접 창조했다고 말하는 실재들의 가까운 원인(naaste oorzaak/proximate cause)이지만, 그는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특수한 실재들로부터 떨어져 있는 원인(laaste oorzaak/remote cause)이다.(KV I 3 §2; G I 35-36)

 

“관례적”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인과론에 대한 이러한 구분은 당대의 강단철학의 용어법들에 기초를 두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스피노자 자신의 관점에 따라 얼마간 변형된 것이다.[게루에 따르면 이는 Adrien Heereboord라는 레이든 대학의 철학교수의 󰡔논리학 해설󰡕(Hermeniea Logica)(1650)이라는 책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이 책은 그의 스승인 Franco Bürgersdijk의 󰡔논리학 개요󰡕(Synopsis Burgersdiciana)에 대한 해설이다. Gueroult 1968, p. 245-46의 주 7) 참조.] 게루에 따르면 이 구분법은 6가지 측면에서 독창적인데, 이 중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세 가지 점이다. 첫째, 스피노자는 여기서 이미 신의 내재성을 확립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내재성은 “단지 원인과 결과가 동일한 존재 안에 있다”는 것만이 아니라, “열이 불 안에 포함되어 있고 빛이 태양 안에 있듯이 결과가 원인 안에 담겨 있기 때문에, 모순에 빠지지 않고서는 하나 없이 다른 것을 정립할 수 없다는” 점까지 함축한다(Gueroult 1968, p. 250). 따라서 이는 󰡔윤리학󰡕에 나오는 내재적 원인 개념과 거의 동일한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둘째, 신을 자유 원인으로 규정하되, 이를 자연의 필연성과 대립시키지 않고 동일시한다는 점이다. 셋째, 강단철학자들이 기초로 삼던 아리스토텔레스식의 4원인론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스피노자가 작용인만을 유일한 원인으로 간주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용어법들 중 󰡔윤리학󰡕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은 내재적 원인과 타동적 원인, 자유 원인과 떨어져 있는 원인/가까운 원인뿐이며, 나머지 용어들은 더는 사용되지 않고 있다. 더욱이 떨어져 있는 원인/가까운 원인은 󰡔소론󰡕보다 훨씬 더 내재적인 관점에서 이해되고 있다. 가령 우리가 뒤에서 살펴볼 󰡔윤리학󰡕 1부 정리 28의 주석의 용법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따라서 󰡔윤리학󰡕의 용어법은 󰡔소론󰡕보다 훨씬 더 단순해졌을 뿐만 아니라, 원인의 내재성을 좀더 강조하는 방향으로 변모했음을 알 수 있다.

 

2. 󰡔윤리학󰡕에서 내재적 원인과 타동적 원인

 

따라서 내재적 원인과 타동적 원인이라는 용어의 의미가 중요한 문제로 제기된다. 스피노자는 󰡔윤리학󰡕 1부 정리 18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은 만물의 내재적 원인이지 타동적 원인이 아니다(Deus est omnium rerum causa immanens, non vero transiens).[이와 거의 동일한 표현이 73번째 편지에도 나온다. “왜냐하면 저는 신은 만물의 타동적 원인이 아니라 내재적 원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G IV 307.]

 

이 정리는 보통 스피노자의 인과론이 내재적 인과론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전거로 많이 활용된다. 그런데 이 정리에서 좀더 주목해야 할 점은 뒷부분에 나오는 “타동적 원인”의 의미가 무엇이며, 내재적 원인과 타동적 원인 사이의 관계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다. 곧 신이 내재적 원인이라면, 따라서 신과 양태들 사이의 관계가 내재적 인과관계라면, 반대로 양태들, 특히 유한 양태들 사이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는 타동적인 인과관계인가? 만약 그렇다면, 스피노자에게는 신과 양태들 사이에 성립하는 내재적 인과관계와 유한 양태들 사이에 성립하는 타동적 인과관계라는 이중적 인과관계가 존재하는 것인가? 하지만 󰡔윤리학󰡕 어디에서도 유한 양태들 사이의 인과관계가 타동적 인과관계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사실 “타동적 원인”이라는 표현은 󰡔윤리학󰡕에서 단 두 차례, 곧 1부 정리 18과 그 증명에서만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타동적 인과관계의 원래 의미, 곧 “타동적 원인은 자기 바깥에 결과들을 생산하는 것이다”(causa transiens est quae producit effectum extra se)라는 의미를 생각했을 때, 만약 유한 양태들 사이에 성립하는 관계가 타동적 인과관계라면, 유한 양태들은 자신들이 지닌 원인으로서의 지위를 어떤 타자, 곧 신에게 의존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면, 스피노자의 신은 정리 18에서 내재적 원인으로 제시되기는 하지만(또는 오히려 바로 그 때문에), 데카르트의 신과 마찬가지로 피조물 또는 유한 양태들의 인과적 힘을 독점하는 존재자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게 된다.[Clatterbaugh는 바로 이런 관점을 보여준다. “따라서 특수한 실재들의 영역에서는, 각각의 특수한 실재의 과거와 미래에까지 미치는 신을 넘어서는 원인들의 무한한 연쇄가 존재한다. 데이비드 사반(David Savan)이 지적하듯이 “각각의 유한 양태는 이러한 두 가지 인과적 축의 교차(intersection다).” 이러한 “교차”를 의미 있게 생각하려면, 신과 창조의 관계에 대한 스피노자의 관점은 데카르트의 협력론과 아주 강한 유사성을 띠어야 한다.”(Clatterbaugh 1999, p. 136)] 또한 이는 스피노자가 연장에 내적인 역량을 부여하고 운동과 정지를 연장의 무한 양태로 만들어, 자연 안에서 작용하는 힘을 자연에 내재적인 것으로 만들었다는 사실과 어긋날 수밖에 없다.[스피노자는 연장을 신의 속성 중 하나로 격상시킴으로써 데카르트와 달리 연장을 단순한 “길이, 넓이, 깊이”가 아니라 “연장하는 행위”(actum extendendi)(PPD II D1)로 이해할 수 있었으며, 연장에 독자적인 역량을 부여할 수 있었다. 취른하우스(Tschirnhaus)에게 보내는 81번째 편지에서 스피노자가 명시하고 있는 점이 바로 이것이다. 스피노자에서 연장의 지위에 관한 좋은 논의로는 Jaquet 2004; Matheron 1998 참조.] 따라서 스피노자가 말하는 타동적 원인이라는 개념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것과 내재적 원인 사이의 관계가 무엇인지가 해명되지 않는 한, 스피노자의 인과론을 정확히 해명하는 일은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3. 타동적 원인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윤리학󰡕 1부 정리 28

 

이 문제와 관련하여 중심적인 논의 대상이 되는 것은 󰡔윤리학󰡕 1부 정리 28이다. 왜냐하면 여러 주석가들은 이 정리에서 타동적 인과성이 예시된다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 정리가 타동적 인과성을 제시한 것이라면, 스피노자 철학에는 신과 양태들 사이에 성립하는 내재적 인과성과 유한 양태들 간에 성립하는 타동적 인과성이라는 두 가지 종류의 인과성이 존재하는 셈이 되며, 그 경우에는 이 두 종류의 인과성 사이에 어떤 관계가 존재하는지 해명하는 것이 주석가들의 주요 과제가 된다. 반면 우리가 이를 타동적 인과성을 예시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면, 이 정리에서 스피노자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해명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그리고 여기 제시된 인과성이 내재적 인과성과 어떻게 관련되는지 역시 해명할 수 있어야 한다.

우선 1부 정리 28을 살펴보자.

 

모든 독특한 실재, 곧 유한하고 규정된 실존을 갖는 모든 실재는(Quodcumque singulare, sive quaevis res, quae finita est), 역시 유한하고 규정된 실존을 갖는 다른 원인에 의해 실존하고 작업하도록 규정되지 않는 한(nisi ad existendum et operandum determinetur ab alia causa), 실존하고 작업하도록 규정될 수 없으며, 이 후자의 원인 역시 유한하고 규정된 실존을 갖는 다른 원인에 의해 실존하고 작업하도록 규정되지 않는 한 실존하고 작업하도록 규정될 수 없으며, 이처럼 무한하게 나아간다(et sic in infinitum).

 

이는 얼핏 보기에는 하나의 유한양태가 다른 유한양태에 의해 실존하고 작업하도록 규정되는 관계가 무한한 수의 유한 양태에 이르기까지 계속 선형적으로 지속되는 양상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가장 탁월한 스피노자 연구자들까지도 이 정리를 일종의 “악무한”의 한 형태, 곧 유한한 실재들 사이에 존재하는 외재적 인과론 내지 타동적 인과론의 전형적인 양상을 표현하는 것으로 해석해 왔다.[이러한 경향은 Joachim 1901, pp. 70 이하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며, 게루에게서도 엿볼 수 있다(Gueroult 1968, pp. 338 이하 참조). 게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독특한 실재들은 이중의 필연적 규정―하나는 신에게 유래한 규정(정리 26-27)이고 다른 하나는 외적 원인들에서 유래한 규정(정리 28)―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완전히 규정되어 있다.”(같은 책, p. 340) 그리고 매우 미묘한 방식이기는 하지만, 들뢰즈(Deleuze 1969)나 마슈레(Macherey 1992b; 2010)에서도 부분적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문제는 (1) 여기서 나타나는 외재적 인과론과 다른, 좀더 본질적이고 좀더 동역학적인 인과론의 모델을 찾아내고 (2) 이러한 인과론의 모델에 기초하여 외재적 인과론, 타동적 인과론의 한계를 평가하는 게 된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견해가 이런 관점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일시적 연쇄의 각각의 고리는 독특한 실재의 한 관념이며, “각각의 독특한 실재는 [...] 다른 독특한 실재에 의해 실존하고 작업하도록 규정되어야 하며, 이 후자의 실재 역시 다른 실재에 의해 규정되어야 하고, 이처럼 무한히 나아간다.”(󰡔윤리학󰡕 1부 정리 28) 이러한 “무한히”는 하나의 포괄적이고 일관된 전체를 지시하지 않는다. 반대로 내재적인 관념들의 연쇄의 무한성은 전혀 상이한 종류의 것이다. [...] 내재적 연쇄의 무한성은 실재의 포괄적이고 통합된 측면을 지시한다. [...] 내재적 연쇄는 하나의 자기원인으로서의 신은 그의 속성들의 양태들인 모든 특수한 실재의 원인이라는 점을 가리킨다. [...] 타동적 인과 연쇄의 고리들은 기껏해야 원인들의 집계(aggregate)를 구성하는 반면, 내재적 인과 연쇄의 고리들은 일관된 총체적 체계를 구성한다.(Gilead 1990, p. 456)

 

흥미 있는 것은 이런 주석가들은 다음과 같은 1부 정리 25의 주석의 의미도 이원론적으로 해석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한 마디로 말하면, 신은 자기원인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또한 만물의 원인이라고 말해야 한다(ut vero dicam, eo sensu, quo Deus dicitur causa sui, etiam omnium rerum causa dicendus est).(E I P25s)

 

다시 말해 그들은 “신은 자기원인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또한 만물의 원인”이라는 명제의 의미를, 타동적 인과연쇄와 구분되는 내재적 인과관계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 우리가 인용한 주석가는 이 점에서도 전형적이다. 그는 1부 정리 25의 주석에 준거하면서 “내재적 연쇄는 하나의 자기원인으로서의 신은 그의 속성들의 양태들인 모든 특수한 실재의 원인이라는 점을 가리킨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타동적 인과연쇄는 무엇인가? 내재적 인과관계가 이미 신과 만물의 인과관계를 포괄한다면, 이는 신과 무관한 연쇄란 말인가? 다시 이를 해석하는 데는 두 가지 방식이 존재한다. 첫 번째 부류는 이러한 인과연쇄를 가상이나 착각에 불과한 것으로, 곧 인간의 유한한 인식의 결과인 것으로 간주한다. 이는 요아힘과 같은 관념론적 입장의 해석가들에게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관점이다. 다른 한편 이러한 인과연쇄를 단순한 가상이나 착각으로 간주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진정한 인과관계, 신와 양태들 사이의 내재적 인과관계에 대해서는 외재적이거나 부수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입장이 있다. 이들에 따르면 신과 양태들 사이의 내재적 인과관계가 양태들의 본질의 질서를 표현한다면, 이러한 타동적 인과관계는 양태들, 특히 유한 양태들 사이의 실존의 질서를 표현한다. 들뢰즈나 마슈레의 저작 일부에서 이런 입장을 엿볼 수 있다.[Deleuze 1969, pp. 179 이하; Macherey 2010, 252-53쪽 이하. 예컨대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보자. “모든 유한 양태는 무한한 원인들의 연쇄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이다. 이는 모든 유한한 규정이 자신의 내재적 원인―이는 실체 자체다―의 무한한 역량에 의해 무한한 동시에 자신의 타동적 원인들의 무한한 다양성에 의해서도 무한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는 같은 책의 다른 부분에 나오는 구절과 어긋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무한자와 유한자의 절대적 동일성이라는 결론을 내려야 한다. 무한자와 유한자는 그 사이에 대응이나 종속 관계만 확립될 수 있는 두 개의 독립적인 질서가 아니다. 이 둘을 분리시키는 상상의 추상적 관점이 아닌 다음에야 다른 것 없이는 나머지 하나는 아무것도 아니며, 이것들은 각자의 바깥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다. 규정 개념에 대한 헤겔 식 해석은 마치 변용들은 실체의 불변적 본질에 비한다면 작위적인 실존자들에 불과하다는 듯 실체와 변용들을 분리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한 해석은 유지될 수 없다.”(같은 책, 261쪽) ] 따라서 역설적이게도 이들은 내재적 인과관계의 내재성을 부단히 강조하면서도 결국 진정한 인과관계로서 내재적 인과관계와 대립 상태에 있는 외재적 인과관계를 설정하며, 이렇게 해서 스피노자의 인과관계를 이원론적으로 파악하게 된다. 우리가 보기에 이는 스피노자가 자신의 자연학 및 인과이론에서 전제하고 있는 근대 물리학의 상대성 이론의 관점을 제대로 고려하지 못한 데서 나오는 결과인 것 같다.[주지하다시피 상대론적 인과론이란 갈릴레이(및 데카르트)가 정식화한 등속직선운동 개념에 입각하여 뉴턴이 제시하고 아인슈타인이 이론적으로 완성한 것을 의미한다. 관성원리에 따르면 모든 물체는 외부의 작용이 없는 한 계속해서 등속직선운동을 하게 된다. 하지만 외부 원인이 작용할 경우 이러한 운동은 방해를 받아 직선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운동의 방향이 변화된다. 직선에서의 이러한 일탈은 마치 직선에 접한 원의 곡선과 같은 궤도를 따라 움직이게 되는데, 뉴턴은 계속해서 이러한 변화를 일으키는 원인을 설명하기 위해 “힘” 개념을 도입했다. 아인슈타인은 이를 다음과 같이 간명하게 정식화한 바 있다. “뉴턴의 목표는 다음 질문에 답하는 것이었다. 우리 행성계 천체들의 한 순간의 운동 상태가 알려지면 이 천체들의 운동을 완전히 계산해낼 수 있는 단순한 규칙이 있는가? [...] 뉴턴의 운동 법칙은 다음 질문에 답하는 것임을 주목해야 한다. 질점의 운동 상태가 외력의 영향 하에서 무한히 짧은 시간 안에 어떻게 변화하는가? 뉴턴이 모든 운동에 적용되는 공식에 도달한 것은 무한히 짧은 시간 동안 일어나는 것을 고려함으로써(미분법칙) 이루어진 것이었다.” Einstein 2003, 303-304쪽(강조는 인용자) 스피노자는 아직 뉴턴적인 의미의 “힘” 개념을 알지 못했으며, 따라서 뉴턴-아인슈타인적인 의미의 상대론적 인과론을 정식화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갈릴레이가 정식화한 등속직선운동 개념을 정확히 알고 있었으며(이 점에 대해서는 Lécrivain 1977; 1978 참조), 그것을 기반으로 자신의 내재적 인과론을 정식화한다. 이런 의미에서 갈릴레이가 발견해낸 등속직선운동, 곧 관성 원리와 스피노자의 내재적 인과론을 대립시키는 것은 스피노자 인과론을 정확히 이해하는 데 장애가 된다.]

 

III. 변용과 연관: 1부 정리 28의 인과론적 의미

 

1. 󰡔윤리학󰡕 1부 정리 28 해석의 쟁점

 

다시 1부 정리 28로 돌아가 보면, 여기서 스피노자가 말하는 독특한 실재들의 인과연쇄가 신과 유한 양태들 사이의 내재적 인과연쇄와 다르지 않다는 점은 1부 정리 26에 의해 간단히 입증될 수 있다. 왜냐하면 여기서 스피노자는 “어떤 것을 작업하도록 규정된 실재는 필연적으로 신에 의해 그렇게 규정된다(a Deo necessario sic fuit determinata)”고 말하기 때문이다. 곧 정리 26은 “실재들이 작업하도록 규정하는” 원인을 신으로 제시하고 있으며, 정리 28에서는 이 동일한 실재들이 실존하고 작업하도록 규정하는 원인을 다른 독특한 실재로 제시하고 있다. 이는 곧 정리 28에 나오는 무한하게 많은 독특한 실재들이 적어도 다른 실재들이 실존하고 작업하는 것을 규정하는 원인이라는 점에서는 신과 다르지 않음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1부 정리 26의 증명에 따르면 이처럼 “실재들이 그에 따라 어떤 것을 작업하도록 규정된다고 이야기되는 것(Id, per quod res determinatae ad aliquid operandum dicuntur)은 필연적으로 실정적인 어떤 것(quid positivum)이다.”(강조는 인용자) 따라서 정리 28에 나오는 각각의 독특한 실재들은 단순한 착각이나 가상이라고 할 수 없으며, 더 나아가 내재적 인과관계 바깥에 있는 타동적 원인들로 간주할 수도 없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다면, 대개의 연구자들만이 아니라 게루나 들뢰즈, 마슈레 같은 스피노자 연구의 대가들도 이 간단한 내용을 파악하지 못해서 1부 정리 28에 제시된 인과관계를 타동적 인과관계로 간주하고, 그리하여 스피노자의 인과론을 내재적 인과론과 타동적 인과론이라는 이중적 인과론으로 해석하는 것인가? 이는 너무 안이한 생각인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보기에 주석가들의 이런 경향은 1부 정리 24 및 그 따름정리의 내용을 본질과 실존의 이원론의 방향에서 해석하는 데서도 유래하지만,[들뢰즈는 정리 24와 정리 25에 근거하여 양태의 본질이 양태의 실존과 구분되는 본질만의 독자적인 실존을 지니고 있다는 특이한 주장을 제시하고 있다.(Deleuze 1969, pp. 174 이하) 이는 들뢰즈의 스피노자 독해의 라이프니츠주의적 성격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 사례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필자가 보기에 정리 24와 정리 25는 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비창조론적인 사고를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반증하는 것 그 이상이 아니며, 이를 본질과 실존의 이원론적 사고를 위한 지주로 활용하는 것은 스피노자 철학의 고유성을 침해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또한 근대 물리학이 이룩한 상대론적 함의를 과소평가하는 데에도 그 이유가 있는 것 같다. 다시 말해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갈릴레이와 데카르트가 제시하고 있는 관성 원리를 단순히 기계적인 인과”을 나타내는 것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이런 관점에서는 물체들이나 유한 양태들은 자기 내부에 인과적인 힘을 지니지 못한 채 외부 원인의 작용에 따라 타동적이거나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렇다면 유한 양태들 사이의 인과성을 제시하고 있는 1부 정리 28이 타동적 인과관계를 표현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또 스피노자 철학이 이러한 인과론의 한계를 넘어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주석가들이 될 수 있는 한 1부 정리 28의 의미를 축소하고 그 대신 신과 유한 양태들 사이의 내재적 인과론을 부각시키려고 애쓰는 것도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된다면, 스피노자 철학과 근대 물리학의 이론적 연관성을 보여주는 것은 더욱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으며, 내재적 인과론이라는 미명 아래 오히려 운동의 상대성 원리 이전의 자연학으로 후퇴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따라서 신과 유한 양태들 사이의 인과론과 유한 양태들 사이의 인과론을 서로 배타적인 것으로 해석하지 말고, 또 이들 각각을 내재적 인과론과 타동적 인과론으로 해석하지도 말고, 오히려 둘 사이의 필연적 연관성, 더 나아가 동일성을 보여줄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2. ‘자연학 소론’

 

이를 위해서는 우선 1부 정리 28이 운동의 상대성 원리나 관성 원리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스피노자는 이미 󰡔데카르트의 철학원리󰡕 정리 14와 15에서 관성 원리를 간결하게 제시하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를 동역학적 관점에서 파악하려고 시도한다.[정리 14는 관성 운동을 하고 있는 물체에서 속도의 지속을 가리키며, 정리 15는 운동 방향의 지속을 가리킨다. 더 나아가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철학원리󰡕에서부터 이미 갈릴레이와 데카르트의 운동학적 관점에 만족하지 않고, 이를 동역학적인 관점에서 변형시키고 있다. 이는 스피노자가 2부 정의 8의 두 번째 논평에서 운동과 힘을 분리시키고 있다는 점에서부터 분명히 드러난다. 레크리뱅은 이를 다음과 같이 명료하게 지적하고 있다. “운동 개념과 힘 개념의 분리는 갈릴레이 작업의 엄격한 연장선상에서 힘은 더 이상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방식으로 운동의 원인으로 간주될 수 없으며, 운동을 변용시키는 변화들, 곧 가속, 감속, 방향의 변화의 원인으로 간주되어야 함을 보여준다.”(Lécrivain 1978, p. 113―강조는 인용자)] 하지만 󰡔데카르트의 철학원리󰡕는 데카르트의 자연학에 대한 해설이라는 틀 안에서 논의를 전개하기 때문에, 스피노자 자신의 관점을 충분히 담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이 문제에 관한 스피노자의 독자적인 관점을 파악하려면 󰡔윤리학󰡕 2부의 「자연학 소론」을 검토해봐야 한다.

스피노자는 보조정리 3과 그 따름정리에서 1부 정리 28에 나오는 인과성 모델을 관성 원리와 결부시켜 논의한다. 우선 보조정리 3은 1부 정리 28을 운동과 정지의 관점에서 다시 서술한다.

 

보조정리 3

운동중이거나 정지해 있는 물체는 다른 물체에 의해(ab alio) 정지하거나 운동하도록 규정되었어야 했으며, 이 다른 물체 역시 다른 것에 의해 운동하거나 정지하도록 규정되었고, 이처럼 무한하게 나아간다(et sic infinitum).

 

이 정식과 1부 정리 28의 유일한 차이점은, 여기서는 운동 중이거나 정지해 있는 물체들 사이의 인과관계가 고찰되는 반면, 1부 정리 28에서는 독특한 실재로서의 유한 양태들 사이의 인과관계가 고찰된다는 점이다. 곧 여기서 고찰되는 물체들은 부분들을 갖고 있지 않고 부분들 사이의 관계도 갖고 있지 않은 단순 물체들이다.[이는 실제로 단순 물체들, 또는 “가장 단순한 물체들”이 실존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 물체들은 복합 물체, 곧 개체가 운동과 정지의 관점에서 추상적으로 고찰되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 물체들은 운동이나 정지와 같은 한 가지 상태로 특징지어진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이는 운동의 상대성 원리나 관성 원리와의 관련성을 좀더 정확히 보여준다.

이 물체들이 단순하다는 것, 곧 이 물체들이 한 가지 상태로만 특징지어진다는 것은 이 물체들은 아직 자신의 본질, 자신의 내면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물체들은 외부의 물체들과 거의 구분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이 물체들은 그 자체로 외재성의 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물체들은 운동하고 있느냐 정지하고 있느냐에 따라서만 구분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갈릴레이가 확립한 운동의 상대성 원리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물체의 운동이나 정지는 그 본성에 따라 규정되지 않고 다른 운동체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규정된다는 점에 있다. 운동은 어떤 물체의 본성과는 무관한, 다른 운동과의 연관성 속에서만 존재하며, 그 속에서만 식별될 수 있다(동일한 운동도 우리가 어떤 좌표계를 택하느냐에 따라 운동하거나 정지하는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의 두 체계에 관한 대화󰡕(1632)에 나오는 둘째 날 대화에서 살비아티(Salviati)와 심플리키오(Simplicio), 사그레도(Sagredo) 사이에서 전개되는 논쟁의 핵심 쟁점이 바로 이것이다. Galilei 1967, pp. 116 이하 참조. 이에 관한 좋은 주석으로는 Balibar 1983 및 Koyré 1966 참조.] 이런 의미에서 운동은 물체의 본성과 무관하다는 의미에서 외재적이며, 또 다른 운동과의 관련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관계적이라고 할 수 있다. 보조정리 3에서 제시되는 인과관계는 바로 이러한 두 가지 특성, 곧 운동의 외재성과 관계성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우리가 관심을 갖는 1부 정리 28의 독특한 실재들은 이런 의미의 단순한 물체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자신의 본질을 지니며 자신을 합성하는 부분들도 지닌 존재자들이다. 따라서 우리가 보조정리 3으로부터 1부 정리 28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아직 몇 가지 측면을 더 살펴보아야 한다. 우선 「자연학 소론」에서 개체, 곧 복합 물체를 어떻게 정의하는지 살펴보자. 스피노자는 다음과 같이 개체를 정의한다.

 

같은 크기를 지니고 있거나 크기가 서로 다른 일정한 수의 물체들이 다른 물체들에 의해 제약되어/압력을 받아(coercentur) 서로 의지할 때, 또는 그것들이 같은 속도나 서로 다른 속도로 운동하고 있을 경우에는 일정하게 규정된 어떤 관계에 따라 자신들의 운동을 서로 전달할 때, 우리는 이 물체들이 서로 연합되어 있으며, 이것들 모두가 단 하나의 물체 또는 개체를 합성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개체는 물체들 사이의 이러한 연합에 의해 다른 모든 개체들과 구분된다.(G II 99-100)

 

이 정의에 대한 좀더 자세한 분석을 위해서는 별도의 논의가 필요하므로 여기서는 간단하게 이 정의의 핵심 논점만 추출해보자. 이 정의에 따르면 개체는 부분들로 합성되어 있는 복합 물체이며, 개체의 개체성을 구성하는 것은 “일정하게 규정된 어떤 관계에 따라 자신들의 운동을 전달하는”(ut motus suos invicem certa quadam ratione communicent) 부분들이다. 곧 개체의 개체성은 단순히 부분들로 합성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서로 일정하게 규정된 어떤 관계에 따라 운동을 전달한다는 점에서, 또는 보조정리 5의 표현을 빌리자면 “운동과 정지의 관계”(motus & quietus rationem)를 지닌다는 점에서 성립한다. 따라서 복합 물체들이나 독특한 실재들 일반의 개체성은 부분들이 서로 주고받는 운동과 정지의 어떤 관계에 의거한다. 그리고 이러한 개체들 자체도 또한 서로 일정한 운동과 정지의 관계를 맺게 되면, 새로운 개체를 형성하게 된다.

그러나 개체의 부분들이 서로 주고받는 이러한 운동과 정지의 관계는 폐쇄적인 관계가 아니다. 왜냐하면 「자연학 소론」의 요청 3에 따르면, 물체를 이루고 있는 개체들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인간 신체의 경우에는 매우 많은 방식으로) 외부 물체에 의해 변용되기 때문이다.[“요청 3. 인간 신체를 합성하는 개체들, 따라서 인간 신체 그 자체는 매우 많은 방식으로 외부 물체들에 의해 변용된다.”] 또한 요청 4에 따르면 개체는 자신의 보존을 위해서는 여러 가지 다른 물체들을 필요로 하며, 이러한 다른 물체들을 통해 지속적으로 재생되기 때문이다.[“요청 4. 인간 신체는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 매우 많은 수의 다른 물체들을 필요로 하며, 이것들은 말하자면 인간 신체를 지속적으로 재생시킨다(a quibus continuo quasi regeneratur).” 예컨대 공기를 들이마시는 것이나 음식물을 통해 양분을 섭취하는 것 등이 이것의 사례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개체를 구성하는 부분들 사이의 운동과 정지의 관계는 처음부터 외부 물체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이러한 외부 물체들과의 관계가 개체의 보존에 필수적이기 때문에, 개체의 개체성, 곧 개체의 내면성은 항상 이미 외재성을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처럼 복합 물체인 개체들의 본질을 구성하는 부분들 사이의 관계가 처음부터 외부 물체들과의 관계를 함축한다면, 보조정리 3에서 본 것처럼 가장 단순한 물체들의 차원에서 성립하는 운동의 외재성과 연관성은 여전히 복합 물체들의 차원에서도 성립한다고 할 수 있다.

 

3. 변용과 연관의 인과론

 

여기서 다시 1부 정리 28로 돌아가서, 지금까지의 논의에 근거하여 그것이 제시하는 인과관계의 특성을 검토해보자. 1부 정리 28에 제시된 인과관계는, 지금까지의 논의에 따르면 외재성과 연관성이라는 두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독특한 실재는 일차적으로 자기 자신의 역량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독특한 실재에 의해서만 실존하고 작업하도록 규정되어 있으며, 이 후자의 독특한 실재 역시 다른 독특한 실재에 의해 그렇게 규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독특한 실재들 사이의 인과관계는 외재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독특한 실재들 사이의 이러한 관계는, 하나의 독특한 실재의 실존과 작업을 규정하는 원인 역시 다른 원인에 의해 항상 이미 규정되어 있는 한에서 선형적일 수 없으며, 또한 폐쇄적인 것도 아니다.

1부 정리 28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두 가지 특성을 가장 정확하게 지적해주는 사람은 에티엔 발리바르다. 그는 프랑스의 과학철학자였던 질베르 시몽동(Gilbert Simondon)이 20세기 중반 전기공학 이론을 “변조”(modulation) 이론으로 재구성한 데서 실마리를 얻어, 스피노자의 인과이론을 변용의 인과이론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그의 핵심 논점은 󰡔윤리학󰡕 1부 정리 28을 비선형적인 인과도식으로 재해석하는 데 있다. 그는 1부 정리 28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해석하자고 제안한다.

 

실존하기는 작업하기(opérer), 또는 다른 실재들에 대해 활동하기(agir)를 의미한다. 하지만 이 작업 자체는 항상 필연적으로 다른 실재 또는 원인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 따라서 “원인 짓기”는 다른 사물이 작업하는 (또는 결과를 생산하는) 방식 자체를 변양시키는 (또는 시몽동이 신호이론의 어휘를 빌려와서 말하듯이 “변조하는”) 사물의 작업이다. 이 때문에 원인들의 무한한 연관은 독립적인 선형적 계열들의 추가나 원인과 결과의 계보(A는 B를 “원인 짓고”, B는 C를 “원인 짓고”, C는 ... )가 아니라, 독특한 변조들의 무한한 연관망에 의해서만, 또는 변조하면서 동시에 변조되는 활동들의 동역학적 통일성에 의해서만 제대로 표상될 수 있다(어떤 A의 작업에 대한 B의 변조 활동은 어떤 C들의 활동에 의해 변조되며, C들은 어떤 D들의 활동에 의해 또한 변조되고 ...).(Balibar 2005, 216-17쪽)[이는 Balibar 1996, 217쪽, 주 135)에 나오는 도식을 통해 좀더 간명하게 표현될 수 있다.]

 

그리고 그에 따르면 1부 정리 28이 제시하는 스피노자의 인과론 도식은 두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 이 위상학은 비선형적이다. 곧 다수의 항들의 상호작용은 여기서 파생되는 것이 아니라, 인과 활동의 “기본 구조” 안에 항상 이미 함축되어 있는 원초적인 것이다. 둘째, 이 위상학을 구성하는 “연관의 질서”(ordo et connexio 또는 concatenatio)는 원자적인 항들(이것이 대상들이든 사건들이든 아니면 현상들이든 간에) 사이에서가 아니라, 사실상으로는 항상 개체들인 독특한 실재들(res singulares) 사이에서 확립된다.(Balibar 2005, 215-16쪽)

 

사실 1부 정리 28에 따르면 어떤 독특한 실재가 실존하고 작업하기 위해서는, 곧 원인으로서 작용하기 위해서는 그 실재는 먼저 다른 독특한 실재에 의해 실존하고 작업하도록 규정되어야 한다. 예컨대 A가 원인으로서 작용하기 위한 조건은 A가 B의 결과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A는 결과일 때, 오직 그 때에만 원인으로서 작용할 수 있다. 이는 자연 안에는 절대적인 원인, 곧 어떤 무엇의 결과도 아니고 스스로 원인인 그런 존재자 내지 실재는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물론 자연 그 자체인 실체는 예외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실체는 하나의 존재자나 실재가 아니라는 점을 감안하면, 어떤 존재자나 실재도 절대적 원인일 수는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면 이는 인과 연쇄의 최초의 항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음을 뜻하는데, 왜냐하면 최초의 항은 정의상 결과 없는 원인, 다른 어떤 것의 결과가 아닌 원인을 가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피노자가 정리 28에서 제시하고 있는 연쇄는 선형적인 연쇄라기보다는 구조적인 연관망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를 개념적으로 요약해서 말한다면 스피노자의 인과론 개념은 일차적으로 연관의 인과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연관의 인과론이라는 말은 단순히 동어반복적인 표현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인과론은 기본적으로 원인과 결과의 관계, 따라서 인과 연관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관”(connexio 또는 concatenatio)이라는 개념은 다음과 같이 좀 강한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1) 연관이라는 개념은 무엇보다도 개체들은 다른 개체들과의 관계에서 독립하여 성립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곧 관계들 이전에 미리 이러저러한 개체들이 존재하고 그 이후에 비로소 이 개체들이 서로 인과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개체들은 관계들을 통해 성립하며 관계들을 통해 자신을 재생산하고 존속할 수 있다. 연관의 인과론에서는 최초의 개별적인 항이라는 것은 성립할 수 없으며, 항상 이미 (무한하게) 많은 원인들이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 이는 스피노자의 철학이 함축하는 반목적론의 또 다른 측면이다. 왜냐하면 목적이라는 개념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세계의 시작이라는 의미에서 창조나 기원이라는 개념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과관계에서 이러한 기원이나 시초는 결과 없는 원인, 최초의 원인이라는 형태로 등장한다. 따라서 역으로 목적론을 배제하기 위해서는 우선 기원이나 시초를 전제하지 않아야 하며, 더 나아가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선형적인 형태로 나타나지 않아야 한다.

2) 연관의 인과론은 또한 외부와 내부의 구분이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함축한다. 「자연학 소론」의 요청 3이나 요청 4가 잘 보여주듯이 개체는 관계를 통해 성립하며, 개체의 내면성을 이루는 관계들은 외부의 물체들이 지니고 있는 관계들로부터 계속 충원되고 대체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관계들은 각각의 개체들의 본질을 형성하기 때문에, 각각의 개체가 지니고 있는 인과 역량, 가장 내밀한 개체의 본질은 항상 이미 외재성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것으로부터 성립한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내재적 인과성과 외재적이거나 타동적인 인과성을 대립시키는 주석가들의 관점은 스피노자 인과론이 본질적으로 연관의 인과론이라는 점을 간과한 데서 비롯한다.

우리는 위에서 “A는 결과일 때, 오직 그 때에만 원인으로서 작용할 수 있다”는 말을 강조했는데, 이는 각각의 독특한 실재들이 지니고 있는 내적 본질 또는 내적 인과 역량의 원천이라는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다. 물체의 역량, 독특한 실재가 지닌 인과역량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가장 단순한 수준에서, 곧 기초적인 관성 원리의 차원에서 말한다면, 자신이 수행하는 운동을 지속하고, 또 자신이 멈춰 있는 상태에서 계속 멈춰 있을 수 있는 힘이다. 따라서 기초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물체가 지닌 인과 역량은 사실 그것이 지닌 운동의 외재성 및 연관성과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외재성 및 연관성과 동일한 차원에 놓여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는 복합 물체의 수준, 독특한 실재의 수준에서는 달라지는가? 복합 물체 또는 독특한 실재가 자신의 고유한 내면성이나 본질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본다면, 이는 분명히 단순한 물체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단순 물체의 수준에서 자신의 운동을 지속하고 또 정지의 상태를 지속할 수 있는 힘은 주어져 있는 것으로 가정되는 데 반해, 복합 물체의 수준에서 이는 그 물체 자체의 내적 본질, 내적 역량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복합 물체나 독특한 실재 일반의 본질 내지 역량은 바로 그 물체의 부분들 사이에서 성립하는 운동과 정지의 관계에서 생겨나고 이러한 운동과 정지의 관계는 외부 물체들과의 끊임없는 재생을 통해 유지된다면, 사실 독특한 실재가 지닌 내적 역량은 여전히 외재적 관계를 통해 형성되고, 더 나아가 그것에 의해 증대하거나 감소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독특한 실재의 인과 역량의 원천은 외부와 대립하는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 이루어진 내부, 내면성 속의 외재성에 있다고 할 수 있다.[반대로 데카르트는 신에 의해 실재들이 보존되는 방식과 실재들이 서로를 규정하는 방식을 분리시킨다. 󰡔세계󰡕의 한 구절은 이를 명백히 보여준다. “오직 신만이 세계 안에 있는 모든 운동―그것들이 실존하는 한에서, 그리고 직선적인 한에서―의 작자(auteur)다. 하지만 물질의 다양한 성향이 이 운동들을 불규칙적이고 곡선적인 것으로 만든다.”(AT XI 46)]

이러한 해석은 좀 멀리 떨어져 있지만, 4부 정리 29 및 그 증명에서도 확인된다. 4부 정리 29에서 스피노자는 이로움과 해로움의 조건은 본성의 공통성에 있음을 지적한다. “우리의 본성과는 전혀 다른 어떤 독특한 실재는 우리의 행위 역량을 북돋울 수도 저해할 수도 없으며, 절대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실재가 우리와 아무런 공통적인 것도 갖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좋거나 나쁠 수가 없다.” 그리고 스피노자는 다음과 같은 증명을 제시한다.

 

어떤 독특한 실재, 따라서(2부 정리 10의 따름정리에 따라) 인간이 실존하고 작업하는 역량은 다른 독특한 실재에 의해서만 규정되는데(1부 정리 28에 따라), 이 다른 독특한 실재의 본성은(2부 정리 6에 따라) 인간의 본성이 인식되게 해주는 것과 동일한 속성에 의해 파악되어야 한다.(강조는 인용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인간을 비롯한 모든 독특한 실재의 역량은 다른 독특한 실재에 의해서만 규정된다는 문장이다. 바로 1부 정리 28에 준거하는 이 문장은 1부 정리 28에서 제시된 인과연쇄가 일체의 힘을 결여한 순수하게 타동적인 인과론으로 이해될 수 없다는 점을 입증해준다.

 

IV. 맺음말: 스피노자 인과론의 윤리적 함의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스피노자의 인과론을 내재적 인과론과 타동적 인과론으로 분리해서 다루는 주석가들의 공통적인 문제점 중 하나는 그들이 스피노자에서 변용과 수동성을 혼동한다는 점이다. 사실 변용은 매우 다양한 차원에서 활용되는 스피노자 철학의 근간 개념 중 하나다. 이 개념은 󰡔윤리학󰡕 1부에서는 양태, 따라서 독특한 실재들과 동의어로 사용된다. 하지만 이는 일의적으로 규정되기보다는 주목할 만한 이중성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스피노자는 어떤 경우에는 변용들이 지니는 의존성, 따라서 수동성을 부각시키며, 반대로 다른 경우에는 변용들을 신의 본질을 표현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따라서 그것이 지닌 능동성, 또는 적어도 작용성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가령 전자는 1부 정의 5에서 잘 드러난다. “나는 양태를 실체의 변용들로, 곧 다른 것 안에 있으며, 이 다른 것에 의해 인식되는 것으로 파악한다.”(E I D5) 또한 후자의 용법은 1부 정리 25의 따름정리에서 볼 수 있다. “특수한 실재들은 신의 속성들이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되는 신의 속성들의 변용들 또는 양태들과 다르지 않다.”

이러한 이중성은 변용의 동사적 형태로는 “변용되기”(affici)와 “변용하기”(afficere)로 표현된다. 변용되기가 다른 개체들에 대한, 타자들에 대한 개체의 의존을 표현한다면, 변용하기는 각각의 개체가 다른 개체들에 대해 행사하는 작용, 영향력을 의미한다. 중요한 것은 스피노자가 이 개념을 통해 양태들의 역량의 형성과 증대/감소의 문제를 사고한다는 점이다. 이는 위에서 인용한 4부 정리 29의 증명에서 잘 나타날 뿐만 아니라, 2부 정리 14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인간 정신은 매우 많은 수의 실재들을 지각할 수 있는 소질을 지니고 있으며(apta est plurima percipiendum), 그 신체가 매우 많은 방식으로 배치될 수 있으면 있을수록 이러한 소질은 더욱 커진다(eo aptior quo ejus corpus pluribus modis disponi potest).

 

증명에서 요청 3과 요청 6에 준거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이는 「자연학 소론」의 결론에서 직접 따라 나오는 정리다. 이 정리가 첫 번째로 지적하는 것은 매우 많은 실재들을 지각할 수 있는 인간 정신의 소질이나 능력은 신체가 매우 많은 방식으로 배치되는 능력에 비례한다는 점이다. 곧 신체가 외부 물체들로부터 많은 방식으로 변용되고(요청 3) 이를 통해 얻은 변용의 역량으로 매우 많은 방식으로 외부 물체들을 변용하고 배치할 수 있게 되면(요청 6), 그만큼 정신의 지각의 능력도 증대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신의 능력은 신체의 능력에 비례하며, 신체의 능력은 변용되는 능력과 변용하는 능력의 증대와 다르지 않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정신의 지각 능력과 신체의 변용 능력이 스피노자에게는 양태의 인과 능력을 형성한다. 따라서 게루나 들뢰즈, 마슈레를 비롯한 해석가들이 사고하듯이 유한 양태들의 역량은 타동적 인과론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신과의 내적 인과론을 통해 양태들에게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실존하는 다른 양태들과의 관계를 통해 형성되고 증대/감소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인과론을 이원적으로 해석하는 주석가들은 이러한 변용을 곧 수동성과 같은 것으로 사고하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해 변용 그 자체는 수동적이지도 능동적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수동성과 능동성으로의 분화를 가능하게 하는 일반적인 존재론적, 인식론적 범주임에도 불구하고, 타자에 의해 변용된다는 사실을 수동성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역으로 능동성은 타자에 의해 변용되지 않는 것으로, 곧 타자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 것으로 사고될 수밖에 없으며, 유한 양태들이 지니는 인과 역량 역시 독특한 실재들 사이의 변용과 무관한 관계, 곧 (양태들과 독립해 있는) 신과의 직접적인 관계(그들은 이것이 내재적 인과론의 의미라고 이해한다)를 통해서 획득되는 것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이는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스피노자의 인과론이 근대 물리학의 이론적 핵심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파악하기 어렵게 만들 뿐만 아니라, 스피노자의 인간학 및 윤리학의 특징도 이해하기 힘들게 만든다. 왜냐하면 능동성과 수동성 또는 적합성과 부적합성은 스피노자의 인간학과 윤리학의 핵심 범주들인데, 이 범주들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변용 개념에 대한 이해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변용을 수동성과 동일시하게 되면, 끊임없는 변용하기-변용되기의 관계 속에서 실존하는 인간의 삶 자체에서 어떻게 합리적인 인식의 형성이 가능하고 또 실존 조건들에 대한 능동적인 개조가 가능한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스피노자를 숙명론자나 신비주의자로 해석하는 대개의 관점들은 바로 여기서 생겨나게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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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 Spinoza. Complete Works, trans. Samuel Shirley, Indianapolis: Hackett.

 

2. 기타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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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9): 박기순 옮김, 『스피노자의 철학』, 서울: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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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yré, Alexandre1966): Études galiléennes, Paris: Herm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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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 󰡔헤겔 또는 스피노자󰡕 ,진태원 옮김, 서울: 그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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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바디우의 [비미학]에 대한 서평 하나 올립니다.  

[창작과비평] 가을호에 실릴 글인데, 아직 교정이 다 끝난 글이 아니니까  

혹시 인용하시거나 논평하실 분은 [창작과비평] 가을호 원문을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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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보다 더 플라톤주의적인 예술론

 

알랭 바디우는 말의 온전한 의미에서, 곧 좋은 의미와 나쁜 의미 모두에서 체계적인 철학자다. 유럽철학과 영미철학을 막론하고 오늘날 저술 활동을 하는 철학자 중에서 알랭 바디우만큼 체계성을 철학의 핵심으로, 철학이 포기할 수 없는 권리이자 의무로 간주하는 철학자는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비미학}은 그의 철학의 체계성이 두드러지는 책들 중 하나다.

이 책에서는 ‘비미학’이라는 특이한 제목이 먼저 관심을 끈다. 바디우 자신의 설명에 따르면 비미학은 “철학과 예술이 맺는 관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 관계에서 예술은 스스로 진리를 생산하는 것으로 간주되며, 이 관계는 어떤 방식으로도 예술을 철학을 위한 대상으로 만들려 하지 않는다.”(5면) 어떤 의미에서 이 책 전체는 이 정의에 대한 부연 설명이자, 이 정의의 예시 또는 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정의의 첫 부분은 이 책의 관심이 철학과 예술의 관계에 대한 재정립에 있음을 시사한다. 바디우는 이 관계에 대한 세 가지 전통적인 관점을 제시한다. 지도적(플라톤적) 도식의 테제는 예술은 진리를 담을 수 없다는 것 또는 모든 진리는 예술 밖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술이 가장하는 직접적인 진리의 매력에 사로잡히지 않고 철학이 예술을 통제하는 것이 필요하다. 반면 낭만적(또는 해석학적) 도식에 따르면 예술만이 진리를 담을 수 있으며, 예술은 참의 현실체다. 세 번째 고전적(아리스토텔레스적) 도식에서도 예술은 진리를 담을 수 없지만, 이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예술의 목표는 진리가 아니라 카타르시스이며, 예술의 규범은 영혼의 감정을 다스리는 유용성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20세기에 이 세 가지 도식은 각각 예술에 대한 맑스주의적(지도적), 정신분석적(고전적), 해석학적(낭만적) 관점으로 나타난다. 이 책에서 바디우의 핵심 테제는, 이 세 가지 도식이 오늘날 포화 상태에 이르렀으며, 이제 “새로운 도식, 철학과 예술을 맺는 네 번째 도식을 제안”(22면)해 볼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네 번째 도식, 곧 비미학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술은 스스로 진리를 생산하는 것으로 간주”되지만 어떤 식으로든 예술은 철학을 위한 대상이 아니다. 바디우는 이것을 내재성과 독특성이라는 범주로 규정한다. 곧 진리는 예술 작품의 예술적 효과 안에 있지 외부에 있는 어떤 진리를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라는 점에서 예술과 진리의 관계는 내재적이다. 또한 예술이 말하는 진리는 절대적으로 예술에 고유한 것이라는 점에서 독특한 것이다. 따라서 비미학은 매우 역설적인 또는 매우 기묘한 철학적 과제가 된다. 진리를 생산하는 것은 철학이 아니라 예술이지만, 그러한 진리가 존재함을 보여주는 것은 바로 철학이기 때문이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 대목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품게 될 것 같다. 왜 예술이 이러한 진리를 필요로 할까, 그것은 철학의 관심사가 아닐까? 또는 바디우 자신은 극구 부인하겠지만, 그것은 철학에 의한 예술의 통제 내지 포섭의 시도, 예술에게 진리 생산의 권리를 전적으로 부여하는 만큼 더욱 더 교묘한 포섭의 시도가 아닐까? 이것은 비미학적인 작품 분석을 통해 해명되어야 할 의혹이다.

따라서 2장 이하에서 시와 산문, 연극, 춤, 영화 같은 예술 분야의 작품들에 대한 분석이 나오는 것은 자연스럽다. 이 책에서 특히 부각되는 것은 말라르메와 베케트이며, 그 중에서도 하나를 꼽자면 말라르메의 시다. 바디우는 말라르메의 시와 베케트의 산문 사이에는 (거의) 완전한 대응이 존재하지만(222면), 그럼에도 유일한 차이가 남는다고 말한다. 그것은 소설가가 “죽음을 허용하지 않는 것처럼 잠을 허용하지 않는” 데 반해, “말라르메의 경우에는 시적인 작업 이후에도 물음의 중지, 즉 구원적인 중단을 통해 그림자들을 다시 만날 수 있”(223면)기 때문이다. 무슨 뜻일까?

이 책을 비롯한 바디우의 여러 텍스트에서 말라르메의 시가 예술의 전범으로 나타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말라르메야말로 “사유로서의 예술”을 가장 대표적으로 구현하는 시인이며, 시 “자신의 정체성이 사유”라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시인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말라르메로 대표되는 현대시가 “언어의 살 속에서 선사된 어떤 사유의 실제적 존재”가 아니라 “이 사유가 스스로를 사유하는 데 쓰이는 모든 작용의 집합체”(43면—번역은 수정)라는 점을 의미한다. 곧 현대시는 세계를 모방(또는 반영)하거나 기술하지 않고 어떤 의미를 표현하지도 않으며, 철학적인 설명이나 해석을 필요로 하지도 않은 채, “언어의 한계에서 도래하는 현전으로서의 다수에 관한 진리를 만들어낸다.”(46면) 시는 “있음il y a”의 순수 관념을 현재화하는 능력인 것이다.

이것은 바디우의 비미학이란 플라톤주의적 예술론, 따라서 반(反)아리스토텔레스주의, 반(反)리얼리즘적인 예술론임을 말해준다. 시 또는 예술을 세계의 모방이나 반영과 무관한 것으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현전 그 자체의 구현이 아니라 “사라지려는 것을 붙잡아놓음을 통해 사건을 명명하는 모든 행위”(55면)를 시적이라고 부른다는 점에서 그렇다. 또한 이러한 예술의 과제, 이러한 활동에 미치지 못하는 것들을 진리의 능력이 없는, 따라서 예술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플라톤이 진리의 이름으로 예술을 추방하려 했던 것에 비해 바디우는 오히려 진리의 이름으로 예술을 복권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그의 예술론은 플라톤보다 더 플라톤적인 예술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비미학은 예술 일반에 관한 이론이 아니라 어떤 예술, 예술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예술들, 또는 그것에 속할 만한 몇몇 작품들과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예술적 절차 및 짜임에 관한 이론일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디우의 비미학은, 그의 철학 자체와 마찬가지로 매우 폭력적이다. 그는 독자들을 무관심하게 놓아두지 않으며, 선택을 강제한다. 예수가, 루소가 자유를 강제했듯이, 그는 진리를 강제한다. {비미학}은 그 강압의 힘과 매력을 여실히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물론 아쉽게도 그의 철학과 마찬가지로 그의 비미학 역시 많은 추종자를 얻기는 어려워 보인다. 어쩌면 그것은 필연적 귀결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것을 필연화하는 것이 또 다른 사유의 의무일 것이다.

전체적으로 공들인 번역이고 가독성도 무난한 편이지만, 간혹 몇몇 개념들을 너무 풀어쓰는 바람에 그 개념의 소통 가능성이 제약 받는 경우가 있다. 가령 “예술의 철학적 정체성 찾기”(23면)에서 “정체성 찾기”는 “identification”의 번역인데, 이런 번역은 개념만이 아니라 문장의 의미 전달까지도 어렵게 만드는 것 같다. ‘identification’은 ‘정체성 부여’로 고치고, 해당 구절은 “예술에 대한 철학의 정체성 부여는”으로 옮기는 게 좋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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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튀세르 효과-사망 20주년, 알튀세르를 다시 생각한다]는 제목으로 알튀세르 심포지엄을 소개하기 위한 

목적으로 짧은 글을 하나 써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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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한국의 독자들에게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 1918~1990)라는 이름이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제가 약 1년 전에 알튀세르에 관한 공동 논문집을 기획하고 또 이 심포지엄을 준비하면서 계속 품고 있었던 질문입니다.

아마도 알튀세르는 맑스주의 철학자 중에서, 또 프랑스 철학자 중에서도 세대에 따라 가장 인지도 편차가 큰 인물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40대 이상의 독자에게 그는 80년대 말과 90년대 초 한국 인문사회과학계를 뜨겁게 달구었던 이른바 ‘한국사회성격논쟁’과 ‘맑스주의 위기론’의 중심에 있던 인물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당시 웬만한 인문사회과학도라면 누구나 그의 책을 한 권쯤 소장하고 있었고, ‘과잉결정’(또는 중층결정)이나 ‘호명’ 같은 그의 주요 개념들은 가장 널리 운위되던 지적 담론 중 하나였습니다. 반면 오늘날 20대 독자에게 그는 에티엔 발리바르나 슬라보예 지젝 또는 자크 랑시에르나 알랭 바디우의 이름과 함께 간혹 거명되는 이름 중 하나일 것 같습니다. 
 
[......]

나머지 내용은 아래 주소를 방문하시면 읽을 수 있습니다. :) 

 http://althusser.greenbee.co.kr/category/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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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글을 올리네요.^^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올해가 알튀세르가 사망한지 2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래서 '조촐하게' 알튀세르에 관한 심포지엄을 하나 기획하게 됐습니다. 

다행히 뜻을 같이 해준 분들이 많고 그린비 출판사에서 열심히 노력해주셔서  

준비에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아래는 심포지엄 웹자보입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아래 링크된 주소에 가시면  다른 관련 자료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아직 자료들이 많이 올라와 있지는 않은데, 조만간 여러 자료들이 올라올 테니  

자주 가보세요.^^

 

 

  

좀더 자세한 내용은 아래 블로그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althusser.greenbee.co.kr/category/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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