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만간 후마니타스 출판사에서 출간될 에티엔 발리바르의 [우리, 유럽의 시민들? 세계화와 민주주의의 재발명]의
"역자 해제"를 올립니다. 많은 분들이 이 책의 출간을 오랫동안 기다려왔는데, 이제서야 마무리를 짓게 돼서
한편으로 죄송스럽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속이 아주 후련합니다.
아무쪼록 널리 읽히고 토론돼서, 현재 많이 위축되어 있는 국내의 좌파 정치를 재개하는 데
일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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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해제
에티엔 발리바르는 특별한 소개가 필요하지 않을 만큼 국내에 잘 알려진 프랑스의 철학자다. 특히 지난 1980년대 말 이래 한국 마르크스주의 논쟁의 흐름에 대해 얼마간의 지식이 있는 독자들이라면 새삼 소개할 필요가 없는 이론가가 바로 발리바르다. 그래도 벌써 20여 년의 시간이 흘렀고 새로운 세대, 새로운 독자들이 생겨난 만큼 기억을 되살려보는 의미에서 그의 지적 이력을 간단히 정리해보기로 하자.
1942년 프랑스 부르고뉴 주의 아발롱Avallon에서 태어난 발리바르는 1960년 파리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하여 루이 알튀세르, 조르주 캉귈렘, 자크 라캉 등에게 사사했다. 특히 1965년 알튀세르, 피에르 마슈레, 자크 랑시에르, 로제 에스타블레Roger Establet 등과 함께 저 유명한 “자본”을 읽자Lire le Capital[“자본”을 읽자 완역본은 알튀세르 사망 20주년이 되는 2010년 올해 그린비 출판사에서 국내 최초로 출간될 예정이다.]에 공저자로 참여하여 약관 23세의 나이에 일약 세계적인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로 부상했다. 그 뒤에는 1970년대 중반 유로코뮤니즘을 통해 표출된 마르크스주의 위기에 대한 대응으로 역사유물론 5연구(1974),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하여(1976) 등을 저술했다. 그리고 1970년대 말~80년대 초에는 이데올로기, 대중, 국가의 문제를 둘러싸고 알튀세르와 (미완의) 논쟁을 전개하면서 “마르크스주의에서 이데올로기의 동요”에 관한 분석을 통해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의 종언을 선언한다. 철학자로서 발리바르의 초기 작업은 이것으로 종결된다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그가 전개해온 작업은 크게 세 가지 소주제로, 곧 근대의 철학적 인간학에 대한 계보학적 탐구, 구조주의 운동에 대한 철학적 평가, 자본주의의 세계화와 유럽 건설이라는 정세에 대한 이론적ㆍ정치적 분석 등으로 분류될 수 있다. 특히 1990년대 후반 이후 그가 가장 정력적으로 몰두하고 있는 연구 주제는 자본주의의 세계화 및 유럽 건설이라는 정세에서 민주주의의 새로운 전망을 모색하는 것이다. 이 주제에 관한 핵심 저작은 1992년 출간한 민주주의의 경계들 및 1998년에 발표한 정치체에 대한 권리, 그리고 2001년에 출간되었고 지금 우리가 소개하는 이 책을 꼽을 수 있으며, 또한 유럽 건설과 좀더 직결된 두 권의 저작도 이 주제에 포함될 수 있다.[É. Balibar, L'Europe, l'Amérique, la guerre. Découvrte, 2003; Europe, Constitution Frontière, Editions du Passant, 2005]
여기에 더하여 발리바르는 평등자유명제라는 저작을 얼마 전에 출간했는데[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PUF, 2010]이 책은 국민 사회 국가의 위기 및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초래하는 “탈-민주화dé-démocratisation”에 대한 유일한 대안으로 “민주주의의 민주화démocratisation de la démocratie”라는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그가 지난 20여 년 동안 수행했던 민주주의에 관한 연구를 결산하면서 새로운 방향을 개척하는 문제작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가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의 아포리아 및 자본주의의 세계화에 대한 이중적 성찰을 배경으로 지난 20여 년 간 몰두해온 주제 중 하나인 폭력과 시빌리테에 관한 저작 역시 올해 초 출간되었다. 1996년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어바인)에서 했던 웰렉 도서관 강의Welleck Library Lectures를 중심으로 폭력에 관해 쓴 여러 글을 묶은 이 책은 발리바르의 지적 작업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현대 정치철학, 특히 폭력의 정치철학에 대해서도 하나의 이정표가 될 만한 업적으로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Violence et civilité, Galilée, 2010. 이 책의 부분 국역본은 역자의 번역으로 올해 상반기에 난장 출판사에서 출간될 예정이다] 한 가지 더 추가하자면, 지난 1989년 발표한 「시민 주체」[“Citoyen sujet. Réponse à la question de Jean-Luc Nancy : Qui vient après le sujet?”, in Cahiers confrontation 20: Après le sujet qui vient, Aubier-Montaigne, 1989] 이래 그가 이런저런 기회에 꾸준히 발표해온 근대 철학적 인간학에 관한 연구들 역시 시민 주체: 철학적 인간학에 관한 시론들이라는 제목 아래 조만간 출간될 예정이다.[Citoyen sujet: Essais d'anthropologie philosophique, Paris: PUF, 근간] 근대 민주주의의 인간학적ㆍ철학적 전제들을 탐구하는 이 저작은 철학사 연구자로서 발리바르의 탁월한 능력을 잘 엿볼 수 있는 저작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렇게 볼 때 올해와 내년은 발리바르가 지난 20-30여 년 간 추구해왔던 이론적 작업에서 하나의 분수령을 이루는 시기가 될 것으로 보이며, 또한 그의 작업을 총괄적으로 이해하고 평가하기 위한 중요한 기반이 마련되는 시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사실 다른 철학자들과 달리 발리바르는 단행본 저작을 중심으로 이론 작업을 수행하는 철학자가 아니다. 그는 현대 철학자로서는 매우 드물게도 이런저런 정세들에서 직면하는 구체적인 쟁점들을 다루기 위해 논문이나 개별 발표문 등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구체화하고 확장해왔으며, 이것은 사실 꽤 엄밀한 인식론적ㆍ철학적 관점을 수행적으로 실천하려는 태도의 일환이다.[발리바르는 매우 엄밀한 인식론적 관점을 지닌 철학자이지만 그것을 그 자체로 체계화하는 데는 큰 관심이 없고 정치철학적인 논의에서 그것을 구현하는데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독자들에게는 그의 인식론적 입장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 문제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은 다음 저술들을 참조하기 바란다. 「바슐라르에서 알튀세르로: ‘인식론적 단절’ 개념」, 이론 제 13호, 1995; É. Balibar, “Conjectures and Conjunctures: Interview with Etienne Balibar”, Radical Philosophy 97, September/October 1999; Lieux et noms de la vérité, Éditions de l'Aube, 1994; “Histoire de la vérité: Alain Badiou dans la philosophie française”, in Charles Ramond ed, La pensée multiple, Harmattan, 2002] 하지만 바로 이 때문에 그의 작업을 꾸준히 따라온 사람들이 아니고서는 오랜 기간에 걸친 그의 면밀한 탐구를 정확히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의 문제제기의 중요성이나 논의의 독창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발리바르의 연구가 덜 논의되는 이유 중 하나는 아마도 여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랜 시간에 걸친 그의 작업이 단행본 저작들로 출간되고 또 국내에 계속 번역ㆍ소개된다면, 그의 작업은 단지 외국만이 아니라 국내에서도 중요한 이론적ㆍ실천적 논의 기반을 제공해줄 것으로 기대한다. 현대 철학자들 중 그만큼 구조적ㆍ정세적인 문제들에 대한 광범위하고 구체적인 경험적 분석들을 사상사 내지 지성사의 주요 주제들과 결합하여 새로운 이론적 통찰과 방향을 제시해주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가 앞으로 그의 저작들을 몇 권 더 번역ㆍ소개하려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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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서막」 이외에 3부 12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각의 장은 독자적인 쟁점을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6가지 주제가 이 책의 핵심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 주제들은 비단 이 책만이 아니라 다른 저술들에서도 발리바르 작업의 중심 주제(또는 중심적인 문제의식)를 이루고 있다.
1. 역사적 공산주의의 종언과 유럽 건설
우선 이 책의 논의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가장 먼저 쓰인 두 편의 글, 곧 5장인 「공산주의 이후의 유럽」과 9장인 「유럽에는 아무런 국가도 존재하지 않는다」를 먼저 읽는 게 좋다. 이 두 글은 1980년대 말~1990년대 초의 세계 정세, 특히 유럽 정세에 대한 발리바르의 탁월한 분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지만, 그 이후 전개되는 그의 이론적 작업의 현실적 함의를 이해하는 데에도 필수적인 자료다.
발리바르의 정세 분석(또는 “정세” 속에서 “추측”을 통해 사고하기)의 가장 빼어난 사례 중 하나라고 할 만한 「공산주의 이후의 유럽」의 논의를 여기서 요약할 생각은 없지만 이 책 전체의 논지와 관련하여 핵심 논점 몇 가지는 지적해둘 필요가 있다. 우선 (지금도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에게서 흔히 엿볼 수 있는 태도지만) 역사적 공산주의의 종언,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적 종언이라는 현실을 어떤 식으로든 부인하려는 이들의 태도와 달리 발리바르는 공산주의의 종언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으며, 1980년대 말 이전에 이미 1930년대(반파시즘)와 1970년대(68 혁명 운동)의 패배를 통해 예비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은 공산주의 자체의 완전한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공산주의, 다시 말해 일정한 역사적 시기 동안 이런저런 제도적 형태 속에서 구현되었던 하나의 공산주의의 종언이다. 정치가 존재하는 한 공산주의 그 자체의 종언이란 있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공산주의는 해방의 이념과 운동의 이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표현되는 역사적 공산주의의 종언은 우리가 살아온 20세기의 역사적 순환의 종결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심각한 제도적ㆍ이데올로기적 효과를 산출할 수밖에 없다. 발리바르는 그 중에서도 유럽 건설과 공산주의의 종언 사이의 연관성에 주목한다. 그것은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역사적 공산주의를 특징지었던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와 국경들의 제도화 사이의 모순이다. 정의상 공산주의는 국민 국가들로 구성된 지정학적 질서 및 그것들 사이의 패권 경쟁을 넘어서 피억압 인민의 해방을 위한 보편적인 이름이 되어야 마땅하지만, 현실 역사 속에서 공산주의는 유럽 대륙을 두 개로 분할하고 또 각각의 진영을 하위 공간으로 쪼갬으로써 국경들을 제도화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여기에는 물론 서방의 봉쇄 정책 및 내부의 반혁명 세력의 준동이라는 요인이 작용했다. 그러나 역사적 공산주의는 이러한 반혁명 세력의 공격에 맞서 “자기 봉쇄, 고립의 내면화 및 조직화라고 불러 마땅한 방식으로밖에는 대응하지 못했”으며, 자신들의 고유한 토대 위에서 싸우지 못했다. 그 결과 “소련의 강제수용소는 그것이 실제로 표상했던 공포 이상으로, 체계 전체의 상징물이 될 수 있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가 본래적인 의미의 공산주의의 이념과 운동의 표현이라면, 국경들의 제도화는 역사적인 정세 속에서 이러한 이념과 운동이 제도적으로 구현되었던 형태라고 부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을 좋은 전자와 나쁜 후자의 단순한 이분법으로 환원해서도 안되고, 또한 전자를 비판적 마르크스주의와 동일시하고 후자를 교조적 마르크스주의 내지 국가 공산주의와 동일시해서도 안된다. 발리바르가 문제 삼는 것은 약 150여년에 걸친 역사적 공산주의 전체의 순환으로서, 여기에는 이념과 운동, 제도가 모두 포함되고, 동쪽의 이른바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을 비롯하여 비사회주의 국가의 공산당들 및 비판적 마르크스주의까지 모두 포함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이념과 제도, 운동의 복합체로서 역사적 공산주의 전체를 관통하는 모순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둘째, 이러한 모순은 1980년대 말 이후 동유럽을 비롯한 유럽 전역에서 분출하기 시작한 민족주의 발흥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그 이유는 20세기에 제도적으로 구현된 역사적 공산주의가 그 자체로 국민 사회 국가의 한 형태였으며, 동쪽에서든 서쪽에서든 공산주의는 국민 사회 국가의 고유한 이데올로기로서 민족주의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스탈린의 이른바 “일국 사회주의”를 통해 수행된 소련 국민 국가(또는 러시아 민족 국가)의 구성이 그 전범이 되거니와,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동유럽에서 과거 공산당의 지도자들이 곧바로 새로 탄생한 국민 국가의 민족주의 지도자들로 변신한 것에서도 이 점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이는 서쪽의 이른바 자유주의 국가들에서는 민족주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서유럽의 고유한 민족주의의 편견에 불과하며(특히 프랑스가 전범을 이루는 공화주의적 보편주의라는 형태를 띠는 민족주의), 첨예한 민족주의가 먼저 등장한 곳이 바로 서유럽이다. 유럽 몇몇 지역에서 나타나는 분리 독립주의 운동만이 아니라, 좀더 근본적으로는 유럽 경제 공동체 내에서 각국의 이해관계를 둘러싼 갈등과 더불어 비유럽권 지역 출신 주민들에 대한 인종주의 및 외국인 기피증이 고조되는 현상들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역사적 공산주의의 몰락은 이러한 상황에서 국지적인 소민족주의의 분출을 조장했을 뿐만 아니라, 유럽 내에서 서쪽과 동쪽 간의 불평등한 관계를 강화하면서 새로 구성되는 유럽 연합을 위계적이고 배타적인 구조로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따라서 유럽 건설과 관련하여 발리바르가 주목하는 세 번째 측면은 “국가 없는 국가주의”의 출현이다. 국가 없는 국가주의란 진정한 의미의 국가, 곧 시민들의 호혜적인 정치 공동체로서의 국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가운데, 행정적이고 억압적인 관행들이 지속되고 정치가 사적인 권력들 및 이해관계들의 우발적인 타협으로 대체되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러한 상황을 낳은 주요 원인은 물론, 시장의 자율화는 효율성을 증대시킬 뿐만 아니라 개인들의 자유의 증대를 가져온다는 의미에서 민주주의도 확대한다고 믿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과정에 따라 공공성이 전반적으로 약화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경제적’(또는 경제주의적) 설명만으로는 국가 없는 국가주의가 생겨나게 된 원인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을뿐더러 그것이 초래하는 파국적 효과들도 제대로 해명하기 어렵다. 발리바르는 1980년대 말~1990년대 초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연쇄적인 붕괴가 낳은 상황은 내전 이후 러시아에서 발생한 상황 및 1920년대 유럽에서 파시즘을 탄생시킨 상황과 구조적으로 매우 유사하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왜 이러한 파국적인 효과들이 생겨나는지, 그리고 그것이 국가 공산주의로서 역사적 공산주의의 종언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설명하는 것이 이론적ㆍ실천적으로 매우 중대한 과제가 된다.
발리바르는 그 원인을 무엇보다 오늘날의 국가는 개인들의 일상적인 존재 조건 그 자체가 되었다는 사실에서 찾는다. 이것은 사실 알튀세르가 그의 이데올로기론에서 이데올로기의 물질성과 동일화(identification) 메커니즘을 결합함으로써 이미 설명한 바 있다. 발리바르는 이데올로기론에 대한 알튀세르의 테제를 받아들이되, 그것을 역사적인 이데올로기 형성체, 특히 국민 형태 개념으로 정정하고 구체화하고 있다(국민 형태 개념에 대해서는 “용어 해설” 참조). 이처럼 오늘날 국가가 개인들의 존재의 물질적ㆍ상징적 지주가 되었기 때문에 가장 억압적인 국가를 포함한 국가의 붕괴는 광범위한 대중들에게 동일성 또는 정체성 상실의 공포감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공포감은 국가의 부재(동유럽의 경우) 내지 약화(서유럽의 경우)를 벌충해줄 수 있는 상상적인 대체물로서 강력한 절대적 공동체에 대한 열망으로 표출되며, 이러한 공동체를 훼손하거나 위협하는 타자들에 대한 강렬한 적대감을 수반한다. 따라서 1990년대 이후 유럽 전역에서 일상화된 인종주의 및 민족주의와 외국인 기피증은 단순히 경제적 세계화의 결과가 아니라 고유한 이데올로기적 메커니즘의 효과라고 할 수 있다.
발리바르는 이러한 상황은 새로운 유럽 공동체, 곧 이전의 국민 국가들에서 이룩했던 것보다 더 많은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역사적으로 진보적인 정치체로서 유럽의 건설을 어렵게 할 뿐만 아니라 유럽의 존재 자체를 의문에 빠뜨리게 된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유럽 연합이 추구하는 것이 미국이나 중국 같은 열강들과 어깨를 겨룰 수 있는 새로운 패권 세력으로서의 유럽, 동쪽의 새로운 ‘식민지’를 통해 경제적인 번영을 추구하려는 유럽, 민족주의의 새로운 쟁패장으로서의 유럽이라면, 그것은 역사적으로, 원칙적으로 존재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역사적 공산주의의 몰락과 새로운 유럽의 건설이라는 과제 사이의 쟁점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수십 년 동안,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수 세기 동안 공산주의와의 관계가 긍정적이면서 또 부정적으로 유럽에서 연대를 형성하는 데 기여해왔다면, 오늘날 “공산주의의 종언”에 대한 우리의 집합적인 대응 방식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유럽의 존재 그 자체다.” 역으로 말한다면, 역사적 공산주의의 종언이 낳은 파국적 효과들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유럽이라는 정치 공간 내에서는) 유럽이라는 새로운 종류의 정치체가 현실 사회주의를 포함한 근대 정치의 제도적 핵심을 이루었던 국민 사회 국가의 한계를 넘어서는 민주주의의 진전을 이룩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5장은 비단 이 책만이 아니라 90년대 이후 발리바르의 지적 작업 전체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2. 국민 사회 국가의 위기: 시민권=국적 등식
다른 한편 「유럽에는 아무런 국가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동일한 정세에 주목하면서도 1980년대 이후 유럽 정치의 핵심 문제로 등장한 이주자 문제와 민족주의ㆍ인종주의의 폭발이라는 측면을 집중 분석한다. 발리바르는 특히 이러한 현상과 국가 형태 사이의 관계라는 문제에 주목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오늘날 확산되고 있는 인종주의가 생물학적 차이에 근거를 둔 인종주의도 아니고 문화적이거나 사회학적인 차이의 도착(倒錯)에 근거를 둔 것도 아니며, “국가의 개입에 의해 중개된 타자와의 관계”,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타자와의 관계로 투사되고 우회적으로 경험된, 국가와의 갈등적 관계”이기 때문이다.
다소 수수께끼처럼 들리는 이 테제는 무엇보다도 인종주의가 현대적인 국가, 곧 국민 사회 국가의 제도 그 자체 속에 객관적으로 기입돼 있음을 가리킨다. 하지만 이것은 (세계 체계론을 포함하는)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 해석이 특권화하는 것처럼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이 노동력의 차별적인 재생산 메커니즘을 체계적으로 활용하고 있고, 이 과정에서 남쪽 출신의 이주 노동자들이 주된 착취 대상으로 존재한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발리바르 자신이 지적하듯이 이러한 분석은 “경제 구조와 이데올로기 형성체 사이의 무매개적인 상응”을 가정하고 있으며, 개인들의 일상적인 관계 및 대중의 사고와 국가의 관계, 특히 국가의 해체 내지 국가 제도의 위기가 미치는 영향에 대한 분석을 결여하고 있다.
인종주의가 국가 인종주의로, 제도적 인종주의로 존재한다는 것은, 인종주의가 국민 국가의 유기적 이데올로기로서 민족주의와 “대체 보충적인” 관계를 맺고 있음을 의미한다. 대체 보충supplément이라는 개념은 데리다가 루소의 언어기원에 관한 시론에서 말parole과 문자 기록écriture의 관계를 다루는 방식을 가리키기 위해 고안해낸 것이다(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루소 자신이 사용한 쉬플레망supplément이라는 단어를 개념적으로 좀더 급진화한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이 개념은 원래 기원적인 것(루소의 경우에는 말)을 보충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문자 기록)이 결국에는 기원적인 것을 대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종주의가 민족주의를 대체 보충한다는 것은 정확히 두 가지를 의미한다. 첫째, 인종주의는 민족주의의 특수성을 대체 보충하는 것이며, 따라서 “과잉 민족주의sur-nationalisme”로 나타난다. 이런 의미에서의 인종주의는 정치 공동체로서의 국민과 단순한 정치 이데올로기로서의 국민주의가 지닌 취약성을 보완하기 위해 민족의 순수성과 통일성을 추구하는 “전체적 민족주의”로 나타난다. 프랑스의 극우 정당인 국민 전선이 “국민 우선”이라는 구호로 추구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의 전체적 민족주의이며, 이 때문에 국민 우선은 강력한 인종주의적 구호라고 할 수 있다. 둘째, 하지만 인종주의는 또한 보편성의 측면에서 민족주의를 대체 보충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인종주의는 “초민족주의supra-nationalisme”, 곧 하나의 국민 단위의 민족주의를 넘어선 국제주의적 민족주의로 나타난다. 가령 유럽 전체에 걸쳐 나타난 반유대주의가 한 사례가 될 수 있으며, 좀더 의미심장한 것으로는 19세기~20세기에 유럽 국가들이 세계적인 식민지 패권 경쟁 속에서 서로 갈등과 투쟁을 벌이면서도 동일한 백인 문명을 공유하는 동등한 인종 공동체의 한 성원으로서 서로를 인정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또한 과거의 사실, 과거의 이데올로기에 그치지 않고 오늘날 유럽 연합의 건설 과정에서도 유럽적인 아파르트헤이트의 형태로 표출되고 있다.
오늘날 유럽에서 수구적 민족주의와 더불어 유럽 주민과 비유럽 주민의 체계적인 구별 및 차별 현상이 나타나는 원인을 발리바르는 국민 사회 국가의 위기에서 찾고 있다. 용어 해설에서 설명한 것처럼 국민 사회 국가는 “국민에 대한 소속은 사회적 권리의 향유를 위한 본질적인 조건이 되었으며, 역으로 이러한 사회적 권리들에 대한 인정(이 원리는 이제 헌법에 명기되어 있다)은 그것이 힘의 정치 및 국민 주권에 대한 긍정의 정치 속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사실”을 해명하기 위해 사용되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근대 국가가 국민 국가에서 국민 사회 국가로 전환되고 20세기 후반에 와서 위기에 봉착할 수밖에 없게 된 원인을 해명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발리바르의 이론 작업에서 정치 사회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간주될 수 있다.
발리바르는 국민 사회 국가가 함축하는 배제 원리의 핵심을 시민권=국적이라는 등식에서 찾는다. 이것은 한 마디로 하면 “정치적 의미의 소속을 뜻하는 시민권을 갖는다는 사실, 시민적 권리 및 의무의 보유자라는 사실과, 국민이라는 역사적 공동체에 속한다는 사실, 국적을 나타내는 증명서들과 징표들을 소유한다는 사실 사이의 등가성”을 가리킨다. 이처럼 시민권과 국적 사이에 등식 관계가 성립하게 되면, 시민권, 곧 개인적 권리와 정치적 권리 및 사회적 권리가 국적을 가진 사람들(국민들)에게만 부여되고 외국인들이나 이주자들은 이러한 권리의 향유에서 배제되는 것을 자연스러운 사실로 받아들이게 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국민 사회 국가는 프랑스 혁명을 비롯한 근대 시민 혁명에 의해 확립된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에 이념적 기초를 두고 있다. 따라서 국민 사회 국가는 모든 사람은 본래적으로 평등하고 자유로우며, 또한 모든 사람은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향유하는 한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누릴 수 있다는 원리에 근거를 두고 있음에도, 시민권=국적이라는 배제의 등식에 따라 이러한 원리를 제한하고 축소하는 것이다. 발리바르에 따르면 이것이 국민 사회 국가의 역사적 전개 과정을 규정하는 근본적인 모순이다.
유럽 연합의 건설로 인해 이러한 모순은 한층 더 첨예해진다. 왜냐하면 유럽 연합의 건설은 지금까지 국민 국가에서 이루어졌던 민주주의와 시민권의 발전 정도를 질적으로 넘어서는 훨씬 더 진전된 민주주의를 구현해야 하지만, 현재 진행 중인 유럽 건설에서는 유럽 회원국 소속 국민들에게만 유럽 시민권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유럽 회원국 소속 국민들이 아닌 사람들, 곧 주로 이주 노동자들은 한편으로는 각 국가의 시민권에서 배제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유럽 시민권으로부터도 배제되는 이중의 배제 상태에 놓이게 된다. 따라서 새로운 민주주의의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자처하는 유럽의 한 가운데에서 일체의 권리로부터 배제된 새로운 종류의 인구들이 구성되는 셈이다. 그는 이러한 배제 상황을 지칭하기 위해 서슴없이 유럽적인 아파르트헤이트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유럽이라는 초국민적 정치체가 내포하고 있고, 그것이 민주주의적인 정치체로 자처하기 위해서 해결해야만 하는 모순은 국민 국가를 넘어선 시민권의 보편화 대 아파르트헤이트 사이의 모순이라고 할 수 있다.
3. 헌정의 역사, 국가의 역사
국민 사회 국가의 위기라는 정세 인식은 국민 국가의 역사, 더 나아가 헌정의 역사에 관한 이론적 탐구로 이어진다. 이 책을 비롯한 발리바르의 최근 작업에서 시민권 개념이 점점 더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시민권이 서양 정치 제도의 핵심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시민권 개념에 대한 발리바르의 연구는 고대 그리스 이래 서양 정치 제도의 전개 과정에 대한 일종의 계보학적 탐구의 문제설정에 따라 수행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점은 무엇보다 폴리테이아politeia 개념에 대한 새로운 번역 제안에서 엿볼 수 있다. 폴리테이아는 보통 “국가” 내지 “정체”(政體)로 번역되며, 서양 정치 철학의 근간을 이루는 개념 중 하나다. 따라서 이 개념에 대한 새로운 번역어의 제안은 동시에 서양 정치 철학 전통 및 민주주의 개념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함축할 수밖에 없다. 발리바르는 이 책 12장에서 “시민권 헌정”이 폴리테이아에 대한 가장 적합한 번역어라고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새로운 “시민권 헌정”(저는 이 용어야말로 고대의 폴리테이아 개념에 대한 가장 적합한 번역어라고 믿습니다)의 문제 ...”(348쪽) 또한 2001년에 발표한 다른 글에서도 이 번역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저는 오래전부터 폴리테이아라는 단어는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서는 단 하나의 개념과 관련되어 있으며 줄곧 이 개념의 발전을 추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맥락에 따라 “시민권”이나 “정치체에 대한 권리”로, “헌정”이나 “정체(政體)”로 “번역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이 개념, 곧 “시민권 헌정”이라는 개념은 분명 복잡한 것입니다. 이 개념 속에 함축되어 있는 것은, 시민들의 공동체에 대한 한정(예속자들의 배제, 그들을 오이코스oikos라는 사적 영역으로 억압하기, 외국인들을 열등한 권리의 지대에 제한하기), 공적인 문제들을 숙의할 수 있는 인민 대중의 권리, 그리고 관직들 내지 권력 행사를 상호성이라는 통념(통치자들 역시 피통치자들이라는 통념 또는 적어도 그들은 피통치자들의 심의를 받는다는 통념) 위에 정초하기, 또한 각자의 능력에 따라(이는 중우정치 또는 일반이익에 속하는 것을 단적으로 대중의 이익과 동일시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관직들을 배분하는 것 등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시민권 헌정”에 대한 이 최초의 소개의 중심에서 매우 강한 긴장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러한 긴장은 폴리테이아와, 이소노미아isonomia[법 앞에서의 평등] 내지 아이쿠아 리베르타스aequa libertas(이것을 우리는 “평등한 자유”로 번역해왔습니다)라는 서로 분리 불가능한 통념들 사이에 존재하는 경향적인 갈등에 의해 명시적으로 표현됩니다. 이러한 긴장이 뜻하는 것은, 헌정은 어떤 의미에서는(아마도 여기에 헌정의 획득할 수 없는 균형의 이상이 존재할 것입니다) 전복적인 성격을 지닌 자신의 원리/시초principe의 전복적 결과들에 저항하기 위해 작동하는 수단들 전체로 정의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Citoyenneté démocratique ou souveraineté du peuple?”, in Droit de cité, 앞의 책, pp. 193-94; 「민주주의적 시민권인가 인민 주권인가?」, 정치체에 대한 권리, 진태원 옮김, 후마니타스, 근간]
이 대목에는 폴리테이아를 “시민권 헌정”으로 번역하는 발리바르의 이론적 의도가 잘 드러나 있다. 이러한 번역은 우선 헌법 또는 헌정의 중심에는 시민권이 존재함을 의미한다. “하지만 나는 이 모든 질문[법의 원천의 위계화, 권력 분할 및 균형, 정치 체제의 규정 등과 같은 헌법의 법적 정의들에 관한 질문들―인용자]을 유럽 이사회가 계속 해서 언급하고 있지만 결국에는 제한적이고 형식적으로 제시하는 데 그치고 있는 질문, 곧 시민권의 질문에 종속시킨다. 어떤 법적 텍스트는 시민권의 형태를 정의함으로써 헌법으로서의 효력을 획득한다. 그리고 역으로 제도들 및 사회적 규칙들(또는 법학자들이 말하는 바에 따르면 “규범들”)을 정초함으로써 시민들의 집합체는 “제헌 권력”의 기능을 획득하게 된다.” 지난 20여 년 동안 진행된 발리바르의 작업, 특히 최근 10여 년 동안의 작업에서 시민권이라는 개념이 논의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국내 일각에서는 그가 사회 민주주의자 내지 자유주의자로 변모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보내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식의 평가는 그의 이론적ㆍ정치적 노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에서만이 아니라 그의 문제제기의 깊이와 범위를 너무 과소평가한다는 점에서도 문제가 있다.
그런 식의 평가가 지닌 문제점은 사회 민주주의나 자유주의가 하찮은 이데올로기에 불과하고 발리바르가 그런 류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힐 리가 없다는 점 때문이 아니다(사회 민주주의나 자유주의는 그 나름의 이데올로기적ㆍ이론적 강점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런 식의 의혹이 대개 마르크스주의=진리, 사회 민주주의/자유주의=변절/기만이라는 냉전의 이데올로기적 유산(또는 제3인터내셔널의 이데올로기)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이후의 유럽」 이래로 그가 지속적으로 강조해온 것은 마르크스주의가 역사적 패배 및 영원한 망각의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20세기 내내 국제 공산주의 운동을 괴롭혀온 이데올로기적ㆍ정치적인 분할(볼셰비키 대 사회 민주주의, 소비에트 노선 대 중국식 노선, 정통 마르크스주의 대 제 3세계주의 등)을 극복할 수 있는 문제설정을 창안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세계화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이러한 분할이 기반을 두고 있던 현실 자체(발리바르가 “현실적 보편” 또는 “보편의 현실적 구현”이라고 부른 것)가 심원하게 변모된 상황에서 과거의 이데올로기적ㆍ정치적 대립을 그대로 고수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이기까지 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따라서 둘째, 그런 식의 의혹은 시민권 개념에 대한 발리바르의 연구는 근대 정치의 이론적ㆍ제도적 기반을 새롭게 파악하려는 시도에서 유래하며, 그것이 함축하는 인간학적ㆍ정치적ㆍ제도적 함의에 대한 근원적인 재검토(곧 고대적인 도시 국가에서 국민 사회 국가에 이르는 서양 헌정의 역사, 국가 형태의 역사에 대한 포괄적인 재고찰)와 시민권 개념에 대한 발본적인 개조를 목표로 한다는 사실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다. 폴리테이아에 대한 재정의에서 볼 수 있듯이 발리바르에게 “시민권”은 사회학이나 정치학에서 흔히 말하듯이 단순한 “소속 개념”으로, 곧 이러저러한 정치 공동체(특히 국민 국가)에 대한 소속 및 그것과 결부된 권리와 의무의 집합으로 한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민권은 시민을 시민으로, 곧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이며, 시민들이 자신들의 호혜적 관계를 지속하고 확장하기 위한 물질적 지주, 곧 제도적 기반은 어떤 것인가에 대한 규정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국가를 포함한 정치 제도가 시민들의 공동체, 곧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들의 호혜적 집합으로 규정되는 한에서 시민권은 정치 제도의 본질을 이루는 것이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지속되어온 우리의 이론적 전통이 부여한 이중적 의미에서 이해된 “시민권” 개념에 따르면, 시민권은 시민들, 곧 일정한 지위를 공동으로 지니는 인격들 내지 역사적ㆍ사회적 “행위자들”의 집합, 공동체로서의 폴리테이아이자, 경계들/국경들의 문제설정에서 출발하여 이 동일한 행위자들을 위한 공적 공간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또한 그것의 틀을 형성하거나 한정하는 제도적 체계의 형태 내지 이념으로서의 폴리테이아다.”
그렇다면 발리바르가 폴리테이아 개념에 대한 기존의 번역어에 불만을 표시할 때 염두에 둔 것은 기존의 번역어들이 이러한 이중적 측면을 적절하게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기존의 번역은 맥락에 따라 폴리테이아를 “헌정/구성”(다른 경우에는 “국가 형태”, “정체” 등)이나 “시민권”(시민의 권리의 제도 및 실행이라는 이중적 의미에서)으로 옮기는데, 전자든 후자든 항상 동일한 논쟁이 문제가 된다.”(이 책 368쪽 주 20) 따라서 그의 최근 작업에서 시민권 개념이 중심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것은 사회 민주주의적인 또는 자유주의적인 “퇴보”나 “변절”의 징표라기보다는 오히려 헌정의 역사 내지 국가 형태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근대 국민 국가의 한계를 평가하고 그것에 대한 탈근대적 대안을 모색하려는 지극히 야심적인 이론적 기획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 및 다른 저작들에서 나타나는, 유럽 연합의 건설에 대한 깊은 관심 역시 유럽 연합이 근대 국민 국가의 한계를 넘어서는 민주주의의 새로운 전진, 헌정 형태의 쇄신을 이룩해야 한다는 이론적 신념에서 나온 것이다. 실제로 그는 지난 2005년 유럽 헌법안에 대한 각국의 국민 투표를 통해 야기된 유럽 헌정의 위기의 핵심 문제는 단지 어떤 헌법안을 만들고 채택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실존하지 않는 정치적 집합체를 “구성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이 말은 곧 유럽 연합은 지금까지의 국가 형태 내지 헌정 형태와 구별되는 새로운 헌정 구성의 시도이어야 하며, 민주주의의 역사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놓는 것이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유럽 연합은 기존의 국민 국가 수준에서 형성되었던 제도들을 유럽이라는 초국민적 수준으로 그대로 옮겨놓는 데 그쳐서는 안 되며, 시민권 개념의 쇄신을 중심으로 일종의 헌정 형태의 혁명을 이룩해야 한다는 것이다.
4. 신자유주의, 민주주의, 시민권: 민주주의와 시민권의 이율배반
이미 발리바르는 이 책에 수록된 글 중 가장 먼저 씌어진 「유럽에는 아무런 국가도 존재하지 않는다」와 「공산주의 이후의 유럽」에서부터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오늘날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가장 강력한 힘들 중 하나라는 점을 명시하고 있으며, 최근의 여러 글에서도 이 점을 지속적으로 환기하고 있다. 하지만 발리바르는 모든 문제를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탓으로 환원하지도 않으며, 특히 자본 및 금융의 세계화를 민주주의 쇠퇴의 핵심 원인으로 간주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자칫 민주주의가 직면한 아포리아를 외부 요인의 문제로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른바 북쪽의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국가들에서 목격하게 되는 민주주의의 후퇴 내지 “탈 민주주의화” 현상은 또한 근대 국민 사회 국가, 특히 그것이 이룩한 최대의 민주주의적 성과로서 사회적 시민권의 한계에서 생겨난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볼 경우에만 신자유주의의 정치적(또는 반(反)정치적) 함의를 좀더 정확히 인식할 수 있고, 그것에 맞서기 위한 실천적 투쟁의 방향들을 모색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발리바르는 국민 사회 국가의 위기의 핵심을 시민권=국적 등식에서 찾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러한 등식을 가능하게 했던 서양 정치 제도의 근본적인 갈등을 민주주의와 시민권 사이의 이율배반적인 관계에서 발견한다. 민주주의와 시민권의 이율배반이란 먼저 무제한적이고 보편적인 “평등(한) 자유égaliberté”에 대한 요구 및 그것을 실현하려는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는 바로 그 무제한적인 보편성 때문에 본질적으로 확고한 토대를 지닐 수 없으며 완결될 수도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어떠한 형태의 공동체로도 한정될 수 없으며, 그것을 초과하고 해체하는 부정성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두 번째로 시민들은 정의상 공동체 바깥에서는 존재할 수 없으며 물질적인 제도적 체계 속에서 자신들의 권리 및 공동의 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규정된 시민권의 체계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이러한 시민권의 체계로서 국가는 정의상 배제의 경향을 띨 수밖에 없으며, 더 나아가 자신의 정치적 기초를 이루는 민주주의의 보편성을 한정하고 심지어 구축(驅逐)하려는 경향을 지니게 된다. 시민권 체계를 본질로 하는 국가는 민주주의를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제도적 산물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민주주의적 기초 자체를 잠식하고 탈민주주의화하려는 경향을 지니는 것이다. 이것이 발리바르가 말하는 민주주의와 시민권의 이율배반의 의미다.
발리바르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정세에서 이러한 이율배반은 두 가지 형태로 첨예하게 전개된다고 주장한다. 하나는 국민 국가 내지 국민 사회 국가의 기본적인 배제의 원리를 이루는 시민권=국적의 강화라는 형태다. 이것은 민족주의의 분출 및 제도적 인종주의의 강화로 나타나고, 유럽의 차원에서는 유럽적인 아파르트헤이트라는 모습으로 표현된다(이 점에 대해서는 “용어 해설”의 ‘국민 사회 국가’ 항목 참조). 두 번째 형태는 신자유주의와 좀더 직접 결부되어 있는 것으로서, 발리바르가 “반(反)정치”로서의 신자유주의 정치라고 부르는 것이다. 여러 이론가들이 지적하듯이 신자유주의는 전통적인 자유주의와 사뭇 구별되는 형태를 띤다. 그것은 전통적인 자유주의의 기본 원리가 정치와 경제 영역을 엄격히 구별하고 후자의 자율성을 위해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하려고 하는 것인 반면, 신자유주의에서는 시장을 급진적으로 탈규제화하면서 동시에 국가가 이른바 ‘시민 사회’의 여러 영역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시장의 작용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시장의 기준(효용 원리)을 강화하고 확산하도록 촉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의 핵심은 이윤 및 효용의 가치를 무제한적으로 추구하는 신자유주의적 주체 형성에서 찾을 수 있다.
발리바르가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정치를 반정치라고 부르는 이유는 정치 활동에 내재적인 갈등적 요소들을 급진적으로 제거하고 효용을 개인 및 집단 활동의 유일한 기준으로 삼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준에 어긋나는 개인들과 집단의 활동을 막기 위해 신자유주의적 국가는 정치적ㆍ사회적 갈등의 요인을 “예방적으로 개입”하고 차단할뿐더러, 각각의 개인들과 집단이 효용 원리를 유일한 판단 및 행위 기준으로 “자생적으로” 채택하도록 다양한 장치(강압, 규율, 문화적, 윤리적 모델의 장려와 보급 등)를 통해 고무하고 강제한다. 따라서 신자유주의는 시민들의 정치 참여를 최소화하고 정치적 반대나 저항, 불복종 등을 억압한다는 의미에서 “반민주주의적anti-democratic”일 뿐만 아니라, 정치 참여나 저항, 더 나아가서는 민주주의적 원리 자체의 무용성을 주장하고 조장한다는 의미에서 “무(無)민주주의적a-democratic”인 성격을 띤다는 것이 발리바르의 관점이다.
5. 세계화와 반(反)폭력의 정치
민주주의와 시민권 사이의 이율배반에 관한 인식은 이 책의 또 다른 핵심 주제를 이루는 반폭력의 정치 내지 시빌리테의 정치와 연결된다. 대중들의 공포에 수록된 「정치의 세 개념: 해방, 변혁, 시빌리테」에서 발리바르는 오늘날의 정치는 더 이상 근대 시민 혁명들에서 구현된 고전적인 해방의 정치로 국한될 수 없고, 정치를 규정하는 정치 외부의 조건들(마르크스에게는 생산 관계, 푸코에게는 권력 관계)의 변혁을 핵심 과제로 삼는 변혁의 정치와 동일시될 수도 없으며, 여기에 더하여 정치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폭력(특히 극단적 폭력)의 퇴치 및 감축을 목표로 삼는 반폭력의 정치를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 책은 이러한 관점 위에서 세계화 시대 반폭력의 정치의 구체적인 쟁점들과 목표들을 검토하고 있다. 이 주제는 이 책의 7장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어지고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이 책 전체가 이러한 주제의 변주라고 할 수도 있다.
발리바르가 이처럼 반폭력의 정치를 중시하는 것은 우선 종래의 정치가 폭력의 문제에 맹목적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특히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한 해방과 변혁의 정치의 경우 이러한 맹목은 좀더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이러한 정치는 자신이 피억압자들(프롤레타리아이든, 식민지 주민들이든 아니면 흑인이나 소수자 또는 여성이든 간에)의 관점에서 모든 종류의 착취와 억압, 폭력을 타파하고 해방을 이룩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고 단언하는데, 그것이 자신의 활동의 해방적인 성격을 강조하면 강조할수록 그만큼 자기 자신이 산출하는 폭력에 대해서는 더욱 더 맹목적일 수밖에 없고, 또 그만큼 그것이 주장하는 해방의 정치는 억압과 배제의 정치로 전도되기 쉽기 때문이다. 실제로 발리바르는 폭력과 시빌리테에 수록된 여러 글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한 해방과 변혁의 정치 사상에 내재한 이러한 맹목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역사적 마르크스주의가 종언을 맞이하게 된 근본 원인 중 하나를 여기에서 찾고 있다. 따라서 새로운 형태의 해방 및 변혁의 정치가 가능하기 위한 조건은 폭력의 문제를 정치하게 분석하고 효과적으로 퇴치할 수 있는 조건 및 수단을 어떻게 창출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주요한 전언 중 하나다.
더 나아가 발리바르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전개되면서 본격화되고 있는 새로운 종류의 폭력(또는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서 반폭력의 정치의 또 다른 필요성을 발견한다. 그것은 그가 “극단적 폭력” 내지 “잔혹”이라고 부르는 폭력이다. 이러한 폭력은 객관적인 원인과 결과, 주체와 타자, 가해자와 피해자, 인간성과 자연(동물성)의 경계가 불분명해지고 와해되는 가운데 발생하는 폭력이며, 또한 그러한 경계를 더욱 불분명하게 만드는 폭력이다. 이른바 주변부 세계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자연 재해 및 전염병의 창궐, 대규모의 종족ㆍ종교 분쟁, 대량 학살과 인종 청소, “일회용 인간들”의 생산과 재생산 같은 현상들이 바로 극단적 폭력의 주요 사례들이다. 이러한 현상들은 합리적인 정치 활동의 조건들 자체를 잠식하고 더 나아가 인간학적 기초를 와해시킨다는 점에서, 해방의 정치를 비롯한 정치 일반에 대해 근본적인 도전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반폭력의 정치는 단순히 정치의 한 부분 내지 분야라기보다는 정치의 존립 및 재개 가능성의 성패가 달려 있는 근본 쟁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폭력에 어떻게 맞설 것인가? 우선 이러한 반폭력의 정치는 지극히 어려운 것이라는 점을 지적해두자. 그 이유는 이러한 정치가 전통적인 의미의 정치의 경계를 넘어서 대중들의 동일화 과정, 곧 대중들의 가장 내면적인 삶과 물질적인 이데올로기 국가 장치들 사이의 관계를 문제 삼고 그것을 개조하고 변혁하는 것을 과제로 제시하며, 그것도 인민 대중들 자신의 과제로 제시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정치가 요구되는 상황은 극단적 폭력의 일반화와 더불어 세계적인 “예방적 반(反)혁명 내지 반봉기”(이 책, 224쪽)가 추구되는 상황이기 때문에, 실질적인 반폭력의 정치가 어떻게 가능할지 사고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이러한 예방적 반혁명 내지 반봉기에 맞서 혁명적 대항 폭력을 추구하려는 유혹이 생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발리바르는 이러한 해법에 대해 명시적으로 반대한다. “예방적인 반혁명에 대해 대칭적으로 혁명을 대립시켜야 하는 게 아닐까요? 반봉기에 대해서는 봉기를 대립시켜야 하는 게 아닐까요? 한편으로 본다면 바로 이런 논리야말로 20세기를 [...] ‘극단의 시대’로 만들어 왔습니다. 분명히 문제가 되는 것은, 자기 자신의 내적인 ‘척도’조차 초과했던 또는 모든 대항 권력을 파괴했던 사회적 지배 구조들과 권력관계들을 변혁하는 것이지만, 저는 앞의 질문에 대해 부정적으로 답변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아니 오히려 질문 자체를 전위시키고 복잡화해야 한다고 믿습니다.”(이 책, 246쪽)
이러한 관점에서 발리바르는 원칙적으로 두 가지 정치의 결합의 필요성을 지적하고 있다. 하나는 모든 헌정에 내재적인 구성적 봉기의 역량을 복원하고 확장하려는 운동으로서 시민권의 정치이며, 다른 하나는 정치 공동체의 자기 비판으로서 시빌리테의 정치다.
발리바르가 시민권의 정치를 강조하는 것은 모든 정치가 그것으로 환원 가능하다거나 또는 모든 해방 운동이 시민권의 복원과 확장으로 귀결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볼 때 시민권의 정치가 “훨씬 더 직접적으로 우리의 능력 범위 안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적인 세계화 속에서 시민들의 정치 역량 자체가 축소되고 급진적으로 제거되어 가는 상황에서 일차적인 정치적 과제는 권력(정치 권력이든 시장 권력이든)을 통제하고 시민들의 이해 관계를 실질적으로 대표하는 일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시민권의 중요성은, 앞에서 말했듯이 근대적 시민권이 내포적으로 보편적인 권리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이때의 내포적 보편성은 한편으로는 정치에는 초월적(신 같은)이거나 자연적인 토대(민족이나 종족 같은)가 존재하지 않으며, 정치는 시민들이 서로서로에게 호혜적으로 권리들을 부여하고 확장하는 일임을 뜻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의 주체로서 시민들이 정의상 국적이나 종교, 성별, 인종 등에 구애받지 않는 보편적인 존재자이기 때문에, 시민권의 정치는 특히 국적 여부에 따라 시민권을 한정하는 근대 국민국가의 근본 경향(발리바르는 이를 시민권=국적이라는 등식으로 표현한다)에 맞서 반(反)차별과 반배제 투쟁을 수행하는 정치임을 뜻한다. 따라서 발리바르가 말하는 시민권의 정치란 “‘인간적인 것’이 실현되는 유일한 형식으로서 시민들의 공동체”를 실현하려는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시빌리테의 정치란 이러한 정치 공동체를 실체화하려는 위험, 곧 이러저러한 실체적 토대 위에 정치 공동체를 구성하려는 시도에 맞서 공동체를 비실체화하려는 정치를 의미한다. 발리바르는 네덜란드의 정치철학자인 헤르만 판 휜스테렌을 따라 이러한 공동체를 “운명 공동체”(community of fate)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운명 공동체란 보통의 용법과 달리 “함께 살아가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서로 간의 상호의존 관계를 폐지할 수 없는 집단들이 서로 만나게 되는 현실의 공동체”(이 책, 248쪽)를 가리킨다. 이런 공동체에서는 원주민(가령 한국인)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닌,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시민적 동일성/정체성을, 적어도 상징적으로라도 재검토해 보아야 하며, 다른 모든 이들 ― 곧 어디 출신이든, 선조가 누구든, “적법성”이 어떻든 간에 오늘날 지구의 한쪽에서 동일한 “운명”을 공유하고 있는 이들 ― 과 함께 그런 정체성을 현재 시점에서 재구성해야”(이 책 258-59쪽) 한다. 따라서 운명 공동체는 매우 급진적인 다원적 정치 공동체가 될 수밖에 없으며, 그것이 구현하는 시민권은 역시 판 휜스테렌의 표현을 빌리면 “미완의 시민권”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관점은 폭력의 비판의 문제에 관한 완전한 답변이 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우리가 폭력 안에서 폭력에 맞서는 반폭력의 정치를 구체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는 점에서는 오늘날 폭력의 비판을 위한 탁월한 준거 중 하나로 간주할 수 있다.
6. 변경으로서의 유럽
마지막으로 국경의 문제를 빼놓을 수 없다. 국경 또는 경계의 문제는 이미 1992년 저작인 민주주의의 경계들에서부터 발리바르 작업의 주요 주제로 등장했지만, 이 책 및 후속 작업들에서는 더욱더 중요한 주제로 부각된다. 발리바르는 이 책 여러 곳에서 국경/경계를 “민주주의의 반민주적 조건”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우선 국경/경계가 정치 공동체, 특히 근대 국가의 헤게모니적인 형태인 국민 국가가 성립하고 존속하기 위한 본질적인 조건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국경/경계의 설정을 통해 국민적 동일성이 물질적으로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경/경계는 자신과 타자, 국민과 비국민을 구별하기 위한 본질적인 조건이며, 따라서 국민적 경계 바깥으로 외국인들을 배척하고 더 나아가 국민 성원들 중 일부를 외국인들로 표상하여 억압하고 배제하기 위한 제도다. 이런 의미에서 국경/경계는 탁월한 배제의 제도라고 할 수 있다.
세계화의 진전에 따라 본격화된 국민 국가의 위기는 국경/경계의 약화를 낳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를 상상적으로 강화하기도 한다. 초국적 자본의 힘에 의해 국민 국가의 경제 및 사회 질서가 좌우되고 미국을 비롯한 초강대국의 군사적ㆍ정치적 힘에 약소 국민 국가들의 흥망이 달려 있는 상황에서 인민 대중은 심각한 정체성 위협을 느끼며, 이러한 공포 내지 외상을 상상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수단을 찾는다. 이 때문에 극우 정당들이 조장하는 극단적 민족주의가 쉽게 먹혀들게 되며, 특히 사회의 가장 아래쪽에 위치한 개인들 및 집단들에게 더욱 더 쉽게 수용된다. 이들은 사회권 축소(곧 실업 수당 삭감, 복지 예산 축소 등과 같은)의 직접적인 피해자이며, 이러한 피해의 원인이 이주 노동자를 비롯한 외국인들에 있다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전반적인 포퓰리즘의 확산 속에서 이러한 대중적인 민족주의 및 인종주의는 국가 정책이 점점 더 제도적 인종주의를 구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이것은 다시 국민과 외국인의 차별 및 배제 경향을 강화하게 되며, 유럽적인 수준에서(또는 더 나아가 지구 전체의 수준에서) 아파르트헤이트의 경계를 구축하는 결과를 낳는다.
더 나아가 발리바르는 오늘날 국경/경계는 더 이상 국가의 지리적 한계, 곧 국가와 국가가 지리적으로 맞닿은 지점에만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국민 국가의 중심으로 이동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경제 영역과 문화 영역에서 사적인 관계들 및 사회적 관계들이 점점 더 관국민적이고 관국경적인 차원에서 전개되는 반면, 대부분의 공적 제도는 여전히 국민 국가의 틀을 유지하는 데서 생겨나는 결과다. 이에 따라 세계화된 거대 도시들의 근교에서 다양한 인종들 간의 종족적인 경계들이 재생산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또한 아감벤 같은 사람이 특히 주목했던 것처럼 주요 국제 공항에서 볼 수 있는 구류 지대 및 검색 체계가 탁월한 예외 상태, 곧 개인의 자유를 비롯한 권리들이 정지되는 장소가 되는 현상도 생겨난다.
이러한 경향에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까? 발리바르의 답변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장기적인 제도적 창조의 과제로, 인민과 주권, 시민권과 공동체 사이의 관계를 근원적으로 개조하는 것이다. 그것은 국경/경계가 영토와 인구, 주권 사이의 관계가 물질적ㆍ제도적으로 집약되어 있는 상징적 장소이며, 따라서 세계화가 강화하고 있는 국경/경계의 모순과 갈등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민 국가의 틀에 대한 변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고대 도시 국가에서 제국으로, 또한 제국에서 국민 국가로 이행하는 과정과 비견될 만한 것이기 때문에 장기적이고 갈등적인 과정이 될 수밖에 없다. 발리바르가 그 제도적 창안의 실마리 중 하나로 제시하는 것은 소속의 시민권을 거주의 시민권 내지 “이산적 시민권diasporic citizenship”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전자가 혈통이나 언어, 문화, 국적 등과 같은 공통적인 기원과 소속을 중심으로 시민권을 사고하고 제도화하는 방식이라면, 후자는 출신의 차별 없이 외국인들에게도 정치체에 대한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는 발리바르가 이 책에서 주목하고 있는 판 휜스테렌의 운명 공동체 및 미완의 시민권 개념과 공명하는 관점이다.
다른 하나의 대응 방안은 “국경/경계의 민주화”에서 찾을 수 있다. 발리바르는 특히 국경/경계의 강화 경향에 맞서기 위한 정치의 방향을 여기에서 찾고 있다. 이것은 국경의 무조건적인 철폐라는 무정부주의적 주장(이것의 다른 표현은 세계시민주의 내지 이른바 “유목주의”다)과 분명하게 구별되어야 하는 테제다. 국경의 무조건적인 철폐는 오히려 “경제적 세력들의 야만적인 경쟁에 좌우되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이 책, 224쪽)을 불러올 수 있다. 이러한 섣부른 해법 대신 발리바르는 “국경에 대한 표상을 탈신성화하고 국가와 행정 기관이 개인들에 대하여 국경을 활용하는 방식을 쌍무적인 통제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국경의 민주화를 가능한 현실적인 해법으로 제시한다. 이 두 가지 대응 방안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것으로, 발리바르가 세계화와 유럽 구성의 정세 속에서 제시하는 기본적인 정치적 해법, 곧 모든 차원에서 시민권의 민주주의적 실천을 강화하고 정세적 요구에 부응하여 그러한 실천을 새로운 보편적 시민권의 창안으로 이끌어가는 해법의 한 가지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국경/경계 일반의 문제와 더불어 발리바르는 유럽 건설의 쟁점과 관련하여 “사라지는 매개물 유럽” 내지 “경계의 헌정 유럽”, 또는 “변경으로서의 유럽”이라는 테제를 제시한다. 유럽에 관한 발리바르의 생각을 집약적으로 표현해주는 이 테제들은 우선 유럽에 관한 자유주의적 관점 내지 더 나아가 패권주의적 관점에 대한 비판을 함축한다. 발리바르가 이 책을 비롯해서 여러 곳에서 지적하듯이 유럽 공동체는 냉전 시기에 동구 사회주의 진영과의 이데올로기적 대립의 관점에서 구상되고 구현되어 왔으며,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 이후에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미국 및 동아시아(일본, 중국)와 맞설 수 있는 초강대국의 구성이라는 관점에서 추구되어 왔다. 더욱이 네그리 같은 좌파 이론가들마저도 미국의 유일한 패권에 맞설 수 있는 대안은 유럽뿐이라는 구실 아래 이러한 구도에 동조하곤 한다.
하지만 발리바르는 유럽이 진정으로 미국의 패권주의에 맞서고, 그것에 대한 진정한 대안이 되기 위해서는 슈미트주의적인 발상에 따라 자신을 새로운 열강으로 구성하려고 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사라지는 매개물 내지 경계의 헌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발리바르의 주장은 몇 가지 논점을 함축한다.
우선 발리바르는 유럽은 공통의 문화, 전통, 소속 등(곧 발리바르가 말하는 “허구적 종족성”)에 기반을 둔 응집력 있는 동일성을 지닌 공동체라기보다는 전통적으로 다양한 경계들(터키와 근동 지역을 통해 접해 있는 서양과 동양, 지중해와 접해 있는 기독교 문명과 아랍 문명, 아프리카와 대서양을 사이에 둔 미국과 유럽 등)이 중첩되어온 곳이라는 점을 부각시킨다. 따라서 유럽 문명의 일관성과 발전의 동력을 형성해온 것은 이러한 경계들을 통한 문명들 간의 마주침과 교류, 갈등이었으며, 새로운 유럽의 건설 역시 가공의 동일성과 통합을 추구하기보다는 이러한 경계들의 중첩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또한 발리바르는 이라크 전쟁 참전 여부를 두고 불거진 유럽과 미국의 갈등 와중에서 유럽의 군사적ㆍ정치적 통일성의 추구를 비난하는 미국의 보수적 논객들에 대한 올바른 대응은 “힘의 정치politique de la puissance”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힘을 덜어내는 정치politique de la im-puissance”에 있다고 주장한다. 힘을 덜어내는 정치란, 새로운 강대국 유럽을 건설하려는 대신 기존의 강대국들(미국, 동아시아, 유럽 등) 사이의 세력 관계를 와해시키거나 변형시키는 데 초점을 두는 정치를 뜻한다. 발리바르는 복잡하고 미묘한 국제 정세 및 조건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힘을 강제하려는 것보다는 이러한 정치야말로 좀더 현실주의적이고 좀더 효과적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유럽이 유일한 초강대국 내지 제국으로서의 미국에 대한 진정한 정치적 대안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본질적인 동일성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사라지는 매개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의 사라지는 매개는 “과거의 지평 및 어휘를 통해, 그리고 극복되어야 할 제도 자체로부터 물려받은 요소들을 재배치함으로써 새로운 사회와 문명의 패턴을 위한 조건들을 창출하는 이행적 제도”를 가리킨다. 이러한 이행적 제도는 “자기 자신의 소멸 및 폐절의 조건들을 창출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라지는” 매개가 없이는 과거의 사회로부터 새로운 사회로의 어떠한 이행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이 6가지의 주제 이외에도 이 책에는 다수의 중요한 주제 및 문제, 개념들이 제시되고 시험되고 있다. 가령 관국민적 시민권의 형성을 위한 문화적 조건으로서 번역의 문제나 전면에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공산주의와 시민권의 관계, 전쟁과 정치의 관계, 생명 정치, 세속주의 같은 것들이 그러하다. 이러한 주제들은 최근 발리바르의 여러 저작에서 독립적인 주제들로 다뤄지면서 훨씬 구체화되고 있다. 그밖에도 각자의 관심에 따라 독자들은 이 책에서 역자가 간략하게 소개한 것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풍부한 시사점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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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가 보기에 발리바르의 이 책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국내 독자들에게 당혹스러운 책이 될 것 같다. 우선 이 책은 좌파 지식인들, 특히 지난 20여 년 동안 그의 작업에 준거하고 이런저런 형태로 그를 원용했던 이들에게 불편한 책이 될 것 같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들에게 발리바르는 마르크스주의자, 곧 자본주의 분석을 위한 탁월한 지침이자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이론가인데 반해, 이 책에는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을 거의 찾아보기 어렵고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한 논의는 전혀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를 변절자로 비난하거나(발리바르는 이제 사민주의자가 되었다, 자유주의자가 되었다는 식의 대담한, 하지만 그만큼 우둔한 판단을 논거로 하여) 그의 새로운 저작을 (최대한) 무시하고 과거 저작, 특히 프롤레타리아 독재 및 공산주의에 관한 논의만을 선별적으로 수용하려는 태도가 심심치 않게 나타나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일이다(그런데 시민권 및 민주주의의 문제와 분리된 공산주의라는 주제가 발리바르 정치철학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
다른 한편으로 이런저런 형태의 사회 민주주의나 심지어 자유주의의 옹호자들에게도 이 책은 당혹감을 안겨줄 것 같다. 그것은 이 뜻밖의 선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라는 고민으로 표현되는 당혹감일 것이다. 그들 대부분에게 발리바르는 과거는 어쨌든 간에 이제는 더 이상 무관한 인물이 되었는데, 뜻밖에도 이 책에서 자신들의 입장과 아주 유사한 논의(시민권, 민주주의, 인권, 국민 국가, 민족주의 등)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으로 그가 이런저런 유형의 사회 민주주의적 개혁론을 정당화하기 위한 논거들로 자주 활용되리라는 것 역시 쉽게 예상해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선물 속에 담겨 있는 공산주의 내지 봉기, 변혁이라는 독(毒)(데리다는 모든 선물은 독이라고 하지 않았던가?)이 그들을 계속 당혹스럽게 만들 것이라는 점 역시 충분히 예견할 수 있다.
또한 얼마나 많은 이들이 될지 예단할 수는 없지만, 교조적인 마르크스주의와 무관하게 여전히 그의 저작에서 가치 있는 이론적 탐구와 실천적 지침을 발견하려는 이들에게도 이 책은 또 다른 의미의 당혹감을 안겨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은 앞서 말한 대로 이 책이 공산주의와 시민권 또는 민주주의와 시민권 또는 봉기와 헌정의 이율배반적인 관계(민주주의가 적어도 공산주의의 한 측면이고 역으로 공산주의는 민주주의의 근본적인 한 형태라고 생각한다면)를 어떻게 사고할 것인가라는 지극히 어려운 과제를 현대 정치철학의 화두 중 하나로 제기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역자에게도 이 책은 처음 접할 때부터 아주 당혹스러운 책이었다는 점을 고백해두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당혹감은 역자가 이 책에 대해, 또는 발리바르의 정치 철학에 대해 느끼는 경탄의 이면이다. 내가 보기에, 국내에 소개된 프랑스 및 유럽의 많은 철학자들과 비교해보았을 때 발리바르의 이론적 작업이 지니는 강점은 우선, 해방의 정치의 이념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단일한 원리로 환원하거나 축소하지 않고 다양화한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점은 그가 정치를 하나의 개념이 아니라 세 개의 개념, 곧 “해방”, “변혁”, “시빌리테”로 확장하고 복잡화한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역사적 공산주의가 몰락한 이후에도 여전히 해방의 이념, 더 나아가 공산주의의 이념을 고수하는 이론가들은 꽤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가령 프랑스의 알랭 바디우나 슬로베니아 출신의 슬라보예 지젝 또는 약간 다른 경향을 띠고 있지만 자크 랑시에르나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같은 사람들이 한 예가 될 수 있다. 이들 사이에는 이론적으로 중요한 차이가 존재하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발리바르의 이론적 작업과 비교해본다면 매우 단조로운 정치 개념을 고수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바디우나 지젝 또는 어떤 의미에서는 랑시에르는 줄곧 해방의 정치와 국가 정치 또는 민주주의와 치안 사이의 대립을 내세우며, 진정한 정치는 해방의 정치(또는 공산주의)나 민주주의에 있다고 주장한다. 반대로 네그리와 하트는 이러한 의미의 해방의 정치보다는 변혁의 정치를 추구하며, 현대 자본주의의 발전 속에서 새로운 변혁의 주체로서 다중의 객관적 기초를 발견하려고 한다.
발리바르와 이들의 정치 철학 사이의 핵심적인 차이는 폭력의 문제에 관한 태도에서 찾을 수 있다. 이들 모두에게 폭력의 문제는 새로운 정치 개념을 요구하거나 기존의 해방의 정치 이념의 개조를 낳지 않는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이론적 쟁점이 되지 못한다. 폭력의 문제는 지배 계급이나 권력의 폭력성을 확인하거나 해방 운동의 정당성을 부각하는 계기가 될 뿐이며, 아니면 인권의 옹호로 귀착되는 “사소한” 문제 중 하나로 치부되곤 한다. 이들과 반대로 폭력의 문제, 반폭력의 정치의 문제를 발리바르가 자신의 이론적 작업의 중심에 놓는다면, 그것은 정치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조건들에 관한 문제로서의 폭력의 문제를 사고하지 않고서는 정치에 관한 논의는 사변적인 탁상공론에 그치거나 아니면 맹목적 독단론(정치=공산주의=민주주의=봉기 ...)과 공허한 주의주의(인민 대중이여 결단하라) 사이에서 동요할 수밖에 없다는 절박한 문제 의식 때문이다. 사실 오늘날 극단적 폭력의 분출을 통해 정치적 활동만이 아니라 인간적 영역의 경계 자체가 와해될 위험에 처해 있다면, 폭력의 문제에 관한 분석과 사고 없이 어떠한 해방 운동과 변혁 운동이 가능할 수 있는지, 민주주의의 보존과 확장을 위한 새로운 출발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따라서 그가 이러한 복합적인 정치 이론을 구축하게 된 것은 “정세conjuncture”에 대한 면밀한 주의력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발리바르는 이른바 구조적 마르크스주의의 후예이지만(또는 어떤 의미에서는 바로 그 때문에), 1980년대 이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정세에 대한 분석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정세에 기초하여 이론적 작업을 수행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해 왔다. 이것은 그가 더 이상 “과학적” 마르크스주의 내지 “과학적” 사회 이론을 추구하지 않음을 뜻한다. 다시 말해 발리바르는 어떤 공리계(이것은 생산 양식의 모순 내지 이른바 이윤율 법칙이거나 평등 원리일 수도 있고 아니면 제국과 다중의 대립이거나 공산주의적 상수 또는 주권의 구조일 수도 있다)에 입각하여 정치 이론을 연역하고 또 그것에 기반하여 정세를 환원적으로 평가하는 대신, 자본주의 및 국민 국가의 구조를 예측 불가능한 방향으로 전개시키는 각각의 정세를 바탕으로 추측과 가설에 따라 이론적 작업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책 전체에 걸쳐 세계화와 유럽 건설, 국민 국가의 위기, 중심부와 주변부의 갈등, 이민법을 둘러싼 갈등, 주변부에서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는 새로운 폭력의 경제 등에 관한 세심한 정세 분석이 이론적 논의의 출발점이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국내에 널리 소개돼 있는 현대 정치철학자들, 특히 유럽의 정치철학자들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발리바르가 국민 형태 및 국민 국가, 민족주의 및 인종주의, 시민권 등에 관한 체계적 분석을 오랫동안 수행해왔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반면 이 주제에 관한 현대 유럽 정치철학자들의 무관심은 실로 놀랄 만한 수준이다. 그들이 탈식민주의나 유럽 중심주의 문제에 관해 둔감한 이유는 여기에서 유래하는 것 같다). 현재 정치 제도들과 해방 운동이 동시에 직면한 위기에 대한 분석을 위해서는 이러한 제도들의 구조와 역사에 대한 면밀한 탐구가 필요하며, 역으로 그것들에 대한 가능한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조건들에 대한 주의 깊은 분석과 진단이 요구되는데, 국민 국가, 민족주의/인종주의, 시민권 등이야말로 이러한 탐구를 위해 다루지 않을 수 없는 중심 대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을 비롯한 발리바르의 여러 저작들은 구체적인 정치적 쟁점들에 대해 고민하고 구조적ㆍ제도적 억압과 폭력에 맞서기 위한 지침들을 모색하는 사람들, 우리의 조건들 및 문제들에서 출발하여 이론적 쟁점들을 사고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다른 어떤 정치철학자들의 작업보다 생생하고 귀중한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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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는 방법에 관해서도 한 마디 지적해두고 싶다. 이 책은, 발리바르의 다른 책들이 그렇듯이 이런저런 기회에 발표했던 글들을 묶은 일종의 논문 모음집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아무런 내적인 짜임새를 갖추지 못한 것은 아니다. 이 책의 구성에서 보듯이 발리바르는 꽤 엄밀한 논리적 구조에 따라 이 글들을 배치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의도에 따를 경우 이 책을 읽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서문에서부터 차례로 1부, 2부, 3부의 순서대로 읽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리적 순서를 따라 책을 읽을 경우 독자들, 특히 그의 작업에 대한 이해나 배경 지식이 없는 독자들은 상당히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발리바르의 최근 논의를 많이 접해 보지 못한 독자들은 오히려 시간 순서상으로 글을 읽는 편이 더 나을 수 있다. 이런 순서에 따른다면 「서막」 다음에 먼저 읽어야 할 글은 9장 「유럽에는 아무런 국가도 존재하지 않는다」와 5장 「공산주의 이후의 유럽」이다. 이 두 글은 발리바르가 1990년대 이후 민주주의와 시민권, 국민 사회 국가, 이주, 인종주의, 경계/국경, 주권 같은 주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게 된 배경을 이해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이후에 전개되는 발리바르 논의의 맹아들을 다수 포함하고 있다.
이 두 글을 읽은 뒤에는 원래의 논리적 순서에 따라 책을 읽어도 되지만, 한 번 더 권장한다면, 9장과 5장 다음에는 3, 4장을 함께 읽는 것이 발리바르의 전체 논의를 따라가는 데 도움이 많이 된다. 3장은 1990년대 프랑스 정치에서 가장 뜨거운 쟁점 중 하나였던 이민법 개정을 둘러싼 논쟁을 제시하면서 그것이 제기하는 이론적ㆍ실천적 쟁점들을 분석하기 때문에, 다른 장에서 전개되는 좀더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논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4장의 경우는 1989년 발표한 「인권과 시민권: 평등과 자유의 근대적 변증법」의 논의를 이어받아 국민 사회 국가의 모순을 외연적 보편성과 내포적 보편성의 변증법적 전개 과정으로 해명하면서 그것이 장-뤽 낭시와 자크 랑시에르 같은 철학자들이 제기하는 민주주의와 정치 공동체, 시민권 등의 문제들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해명하고 있다. 따라서 이 글은 1-2장에서 논의되는 국민 형태 및 (국민적) 동일성 개념이나 6장에서 분석되는 경계/국경 개념, 7장에서 다루는 범세계적인 폭력의 경제와 반폭력의 정치의 문제, 8장과 10장에서 논의되는 근대 시민권 헌정 및 사회적 시민권 이론, 11장의 주권 개념에 대한 계보학적 분석, 12장의 사회적 시민권에 대한 탐구 등을 따라 가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발리바르의 논의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은 한 번 시도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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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무엇보다도 지난 2년여 동안 “세미나 네트워크 새움”에서 함께 이 책을 읽고 토론하면서 책의 내용과 번역 등에 대해 여러 가지로 비판과 조언을 아끼지 않은 동학과 후배들의 노력의 결실이다. 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책을 번역하는 것은 고사하고 제대로 이해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번역 제안을 흔쾌히 받아주고 게다가 이 책의 번역과 관련된 세미나 비용을 지원해준 후마니타스 출판사에도 깊이 감사를 드린다. 특히 번역이 끝없이 지연되고 수십 번 마감 기한을 어겼지만 묵묵히 지켜보면서 격려해준 안중철 편집장님의 후의와 배려가 없었다면 번역을 마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 번 깊은 감사와 사과의 말을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