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5.24 14회 인권영화제 뉴스레터 "울림" 제 7 호 (전체 101호)
차례


  1. <영화제 소식> 인권영화제 '기막힌 후원'을 간청드립니다

  2. <국내작 소개> 오체투지 다이어리 / 감독 인터뷰

  3. <국내작 소개> 그날 이후, / 감독 인터뷰

  4. <해외작 소개> [개막작]눈을 크게 떠라-좌파가 집권한 남미를 가다 Eyes Wide Open-A Journey through Today's South America / 예고편 영상

  5. <해외작 소개> 노동의 심장 Heart of the Factory / 예고편 영상

  6. <어!울림>

  7. <1984> ‘통금 있는 여자’의 자유는 어디에?

  8. <자원활동가 편지> 무덤덤한 자원활동가의 많이 늦은 편지

  9. <편집후기>

  10. <감독 인터뷰 전문> <오체투지 다이어리> 최유진 감독

  11. <감독 인터뷰 전문> <그날 이후,> 김주현 감독



영화제 소식



인권영화제 '기막힌 후원'을 간청드립니다


 



인권영화제 기막힌 속사정

집회 신고 내고 '14회 인권영화제' 개최!

인권영화제 15주년. 거리상영 3년째.

○ 영화진흥위원회 추천 없이는 영화관 대관 불가

○ 2010년 청계광장 2회 불허 통보

○ 역사박물관 대관 불가

○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내 공연장 신청

○ 공원 전체 집회신고, 인권단 체 연대와 축제의 장으로 확대


'기막힌 후원금'의 운영

1) 예산을 알리며 후원단 모집

인권영화제 개최를 위해 꼭 필요한 예산들의 쓰임새을 나열하여 공개합니다. 이를 보시고 인권영화제 성사를 위해 단체와 개인은 각 항목을 지정하여 지원하시면 됩니다. (목돈으 로 항목 전체를 후원하실 수 있습니다. 기막힌 후원단의 최소 후원금은 5만 원입니다.

(*정기후원은 월 5,000원부터)

2) 후원금의 항목과 쓰임새(사업예산)

- 총 4일(상영시간12:00-22:00) 거리 인권영 화관을 짓기 위해 필요한 것들과 금액입니다.

- 협력업체 견적서 기준/인권영화제를 지지하시면서 최대한 배려 해 주신 가격입니다.

3) 후원방법

CMS나 계좌이체를 통해 납부할 수 있습니다. CMS를 신 청하시면 따로 은행에 신청할 필요 없이 계좌에서 자동출금되며 소득공제 영수증 발행이 가능합니다.

후원내용 (2종: 정기후원/ 기금후원)

■ 정기후원

매달 5,000원 이상을 정기적으로 후원해주시면 인권영화제를 준비하기 위해 일상적으로 필요한 재정이 튼튼해집니다.

■ 기금후원

한 번 5만 원 이상의 목돈을 후원해주시면 거리에 인권영화관을 짓기 위해 필요한 재정이 튼튼해집니다. 기금후원은 아래 항목 중 하나를 지정해서 후원하실 수 있습니다.

항목 1. 발전차: 1,800.000원 <전기사용을 위해 발전차 사용>

항목 2. 무대와 조명: 2,200,000원 <무대 위에 아시바(철제구조물)를 쌓고 조명 설치>

항목 3. 영상장비: 5,500,000원 <무대 위에 LEC(대형 영상모니터) 설치>

항목 4. 음향 장비: 3,000,000원 <영화 음성을 잘 들을 수 있도록 >

항목 5. 관객석 몽골탠트: 1,500,000원 <관객석 마련(비둘기똥/소나기대비/강렬한 햇볕 차단)>

항목 6. 관객석 좌석 500,000원 <앉아서 영화볼 수 있도록 좌석 마련(약 200~250석 *100석:서울프린지에서 무 상대여)>

※ 위 항목 중 하나를 지정하지 않으시면, 영화제 현장 운영을 위한 자원활동가와 스탭의 식비, 인권단체 부스 운영을 위한 천막, 야간 조명 등에 사용하게 됩니다.

4) 인권영화제 후원활동가가 되시 면...

■정기후원 : 인권영화제 하라 두건 / 해당 년도의 해설책자와 기념티셔츠 (현장 증정)

■기금후원 : DVD 1편 / 해당 년도의 해설책자와 기념티셔츠 (현장 증정)

■모든 후원활동가에게 인권영화제 소식지 「울림」을 보내드립니다.

5) 후원 가입 신청 및 문의

http://sarangbang.or.kr/kr/new/huwonx/form/hrfilm

전화 : 02-313-2407 ·

E-mail : hrfilmfestival@empas.com

■ 후원계 좌 (자동이체는 본인이 은행에서 직접 신청하셔야 합니다)

국민은행 031601-04-060269 (예금주: 인권운동사랑방(인권영화제))

농협 029-01-223582 (예금주: 인권운동사랑방)




이미지 클릭이 안되는 경우 여기를 ☞ '후원활동가 어디 계세요?'



▲차례

국내작 소개



오체투지 다이어리


 



지금종, 최유진Ji Geum Jong, Choi You Jin|한국Korea|2009|다큐|83분|HDV|컬러 ☞ 감독 인터뷰 보러가기

2008년, 촛불시위와 강경진압으로 어지러운 정국. 약자가 더 열악한 환경으로 내몰리는 현실에서 문규현, 전종훈신부와 수경스님이 오체투지순례를 나선다. 온몸을 낮춰 땅을 보듬는 이들을 보며 몇몇은 눈물을 훔쳤고 몇몇은 동행했다. 공동체 가치와 생명의 존엄이 무시되는 요즘, 세 성직 자의 행보가 우리에게 주는 울림은 크다.

(감독 인터뷰 전문은 울림 맨 밑단에 있습니다.)



▲차례

그날 이후,


 



김주현Kim Juhyun|한국Korea|2009|다큐|6분 18초|DVcam|컬러 ☞ 감독 인터뷰 보러가기

지적장애를 가진 홍집이는 졸업식을 마치고 세상을 향한 힘찬 발걸음을 내딛지만 쉽게 적응하지 못한다. 단순 노동으로 만족할 수 없는 홍집이의 끼는 남다르다. 특별한 기회! 가족들의 응원으로 그는 마침내 영화배우로 데뷔한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그의 외침은 편견과 오만에 포박 된 세상을 향한 유쾌한 일갈이다.

(감독 인터뷰 전문은 울림 맨 밑단에 있습니다.)



▲차례

해외작 소개



[개막작]눈을 크게 떠라-좌파가 집권한 남미를 가다 Eyes Wide Open-A Journey through Today's South America


 



곤잘로 아리존Gonzalo Arizon|프랑스France|2009|다큐|110분|DVcam|컬러
[개막작]눈을 크게 떠라-좌파가 집권한 남미를 가다'예고편 영상 보러가기

차베스는 오바마에게 선진국의 중남미 착취를 비판하는 책 ,‘라틴 아메리카의 노출된 혈관들’을 건넸다. 영화는 책이 쓰여진지 40년 후,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제국주의 착취의 폐해를 보여준다. 감독은 브라질 아마존의 콩 플랜테이션부터 볼리비아의 작은 광산, 에콰도르의 깊 은 정글까지 다국적 기업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자원의 착취, 생태의 파괴와 신자유주의에 따른 민영화의 폐해가 어떠한지 보여주며 그에 대한 대중들의 저항과 그들의 새로운 정부들이 이루려 하고 있는 정치, 경제, 사 회적 연대의 건설에 초점을 맞춘다.



▲차례

노동의 심장 Heart of the Factory


 



에르네스또 아르디또, 비르나 몰리나Ernesto Ardito, Virna Molina|아르헨티나Argentina|2008|다큐|129분|DVcam|컬러 ☞ '노동의 심장'예고편 영상 보러가기

2001년 아르헨티나의 경제위기 시기. 싸논Zanon 타 일 공장은 근로자들에게 임금 지급을 멈추고 긴급폐쇄를 발표했다. 그러나 260여 명의 노동자들은 시설을 점거하고 스스로 경영하여 타일생산을 계속해 나갈 것을 결정했다. 노동자들의 투쟁과 도전은 아르헨티나 노동 역사 와 교차한다.



▲차례

어!울림




 




* 시각장애인을 위한 해설입니다.
어!울림
일곱 번째 이야기

중림동에는 서로 다른 두 가지 풍경이 있다.

한산한 도시의 풍경과

그 속에 감춰진 치열한 풍경.

"광장은 시민들의 것이라구요!"
'검열에 반대한다'
'표현의 자유 보장하라!'

왜 그런 걸까?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만든 이: 재영
"여유 있는 사랑방은 언제쯤 볼 수 있을까요?"


이미지 편집: 소라 / 타이틀: 공기
▲차례

1984



‘통금 있는 여자’의 자유는 어디에?


 



"지금 몇 시인가요?"
"어? 10시 20분이네."
"진짜요? 아 저 지금 가봐야 되요. 죄송합니다. 다음에 또 뵐게요."
"좀 더 있다가 가. 지금 가면 아쉬운데..."
"아, 제가 11시 30분까지 들어가야 돼서요. 정말 죄송해요."

10시 20분이 되면 항상 하는 말이다. 매번 더 있다가라는 말과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열시 이십분이면 지하철역을 향해 뛴다. 지각할까 마음을 졸이 며 안 그래도 빠른 걸음을 더욱 빨리한다. 매번 저녁 약속이 있으면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못한다. 시간을 못 봐서 늦게 들어가면 안 되니까. 그렇다. 난 통금 있는 여자다. 지방에서 올라온 나는 딸 가진 부모님의 걱정과 학교생활을 더 편리하게 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기숙사에서 3년간 살고 있다. 기숙사에 살면 좋은 점? 우선 밥을 해서 먹지 않아도 된다는 점, 부모님이 안심할 수 있다는 점, 늦게 일어나도 지각하지 않고 수업 들을 수 있다는 점... 하지만 난... 자유를 잃었다.
11시 30분까지 못 들어올 시 벌점 부과, 관내 소음 유발 시 벌점 부과, 관내 전기기구 사용 시 벌점 부과, 관내 주류 반입 시 벌점 부과, 공동생활 저해 행위 시 벌점 부과, 이러한 벌점이 쌓이면 1년간 재입사 불가. 사회에 들어가면 마땅히 규칙과 규범이라는 것에 익숙해져야 한다. 하지만 개개인의 의사표명을 할 수 없게 만들고 시간까지 규정하는 것은 보호해 주겠다는 명목 아래 오히려 억압하는 것은 아닐까? 소음의 기준은 무엇이 고, 공동생활을 저해시키는 행위의 기준은 무엇인가. 혹자는 벌점 좀 받으면 어때?라고 하지만, 나같이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에게 벌점이란 학점 F만큼이나 치명적이다. 때문에 그들은 항상 시간을 확인해야 하고 항상 뛰어 야 한다.
11시 25분이 되면 조용했던 학교는 일그러진 표정을 하고 힐을 신고 뛰는 사람들과 택시들로 분주해 진다. 난 오늘도 헉헉대면서 '세이프'를 외치며 11시 29분에 기숙사 문을 통과한다.


정윤
▲차례

자원활동가 편지



무덤덤한 자원활동가의 많이 늦은 편지


 



제가 인권영화제 자원활동을 시작한지도 벌써 1년이 넘었네요. 아직도 새롭고 어려운 일들을 많이 맞닥뜨리다 보니 자원활동을 한지 꽤 되었다는 것을 잊고 지내나 봅니다. 사실 그동안 울림팀에서 주로 원고 청탁;;을 맡아 활동해오면서, ‘나중에 원고가 펑크난 긴급 상황에 내가 대타로 써야지’라는 생각에 자원활동가 편지 쓰기를 자꾸 미뤄왔었습니다. 또는 ‘완벽한 모습의 자원활동가가 된 다음에 멋진 편지를 쓰리라!’라고 쓸데없 는 생각을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지난 4월 한 달 동안 인권영화제 활동을 쉬었습니다. 활동을 쉬었다가 다시 영화제에 돌아오는 별 것 아닌 과정에서 많은 것을 느꼈어요. 먼저 제가 모든 것에 참견하지 않아도 다른 활동가들이 훌륭하게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제가 그동안 ‘내가 아니면 안 돼’라는 생각을 은근히 가지고 있었던 것인지... 다른 활동가들이 못 미더워서 그랬던 건 아닌데. 왠지 미안한 마음도 들더라고요. 그리고 내가 영화제의 모 든 과정을 완벽하게 파악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 한 달 동안 영화제 일은 이미 엄청나게 진전되어 있고, 그럴 때에는 일단 뛰어들어 일을 처리하면서 알아가야 하는 상황이니까요.
영화제가 당장 며칠 앞으로 다가온 지금도 저는 별로 긴장이 안 되네요. 인권영화제에 애정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제가 원래 좀 무덤덤한가 봐요. 영화제 걱정은 다른 사람이 다 하고 저는 하고 싶은 활동만 하며 보내 고 있는 듯?ㅋㅋ 변명하자면, 원래 각자의 방식대로 영화제를 준비하고 기대하고 즐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당신이 다른 생각을 가졌으니까요! 아무튼 저는 예고편 편집을 마무리하러 가렵니다. 그리고 이제 슬슬 현장에서 관객들을 만날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민지
▲차례

편집후기




 



아니!! 벌써!! 영화제가 이번주라니!!ㅋㅋ 컴퓨터에서만 뵙던 독자 여러분들~ 마로니에 공원에서 만나요^^ - 재영

벌써 영화제 개막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네요. 기분이 묘하네요. - 지 용

올해에는 영화제 현장에서 데일리 울림을 멋지게 만들어 내는 것이 목표!! - 민지

영화제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네요!! 마로니에 공원에서 우리 모두 표현의 자유를 외쳐보아요 ^^ -정윤

인권영화제 개막이 얼마 남지 않았네요. 영화제 기간에도 울림의 목소리는 계속됩니다!^^ -소라

인권영화제 블로그입니다 http://blog.naver.com/hrfilms/



▲차례

감독 인터뷰 전문



<오체투지 다이어리> 최유진 감독


 

감독 인터뷰 보러가기

감독님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구요, 학생회와 민노당에서 일을 하면서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이후 다큐에 관심이 생겨서 이렇게 영화에 참여하게 되었고요. 지금 은 영화촬영을 위해 구입한 카메라 비용을 갚기 위해 아버지 사무실에서 일을 도와드리고 있어요.

혹시 종교가 있으신가요?

종교는 없어요. 부모님은 모두 카톨릭 신자세요. 하지만 어릴 때부 터 부모님들이 종교를 강요하시지는 않으셨어요.

영화를 만드시게 된 동기 또는 오체투지에 참가하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이 영화가 첫 작품이구요. 함께 영화를 찍은 지금종 감독님이 촬영할 사람이 한 명 더 필요하다고 해서 지원해서 참가하게 되었어요. 촬영을 위해 독립다큐멘터리 제작과정 수업을 들었구요. 저 자신의 수행의 의미로서도, 자기 몸을 던져 세상을 향해 이야기하시는 세 분을 기록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오체투지 순례단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제목을 보고는 자칫 비슷비슷한 화면들과 이야기들이 영화를 지루하게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가졌었는데, 실제 83분의 시간이 길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영화 속 세 분이 3보 후 1배를 하는 모습 자체만으로도 큰 감동이 있었고요. 작품을 만들면서 감독님이 중점을 두신 점은 어떤 부분인가요?

사실 처음에는 세 분의 이야기가 많이 듣고 싶었어요. 근데 오체투지 시작 후에는 말을 굉장히 아끼시더라구요. 수행이 굉장히 고된 것도 이유의 하나이겠지만 마치 묵언수행을 하신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처음엔 말을 걸어보려고 노력했는데, 그분들이 온몸으로 보여 주시는 것만으로도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하시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세 분뿐 아니라 순례에 참가하는 다른 분들의 모습 역시 감동적이었고 그분들을 담는 일 또한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어요.

작품 을 만들며 직접 오체투지에도 참여해 보셨는지요? 느낌이 어떠셨는지 궁금합니다.

직접 오체투지를 해보고 싶어서 참여한 것도 있었어요. 처음에는 좀 지저분하다, 힘들겠다는 생각도 들었는데요. 직접 해보 니까 반복되는 행동 속에서 머릿속이 텅 비고 맘이 정화되는 느낌이었어요. 영화 속에서 한 분이 수행을 하며 처음 촛불을 들 때의 초심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이야기도 있었는데요. 저 역시 나이가 들면서 느꼈던 복잡함이나 고민들을 많이 정리하면서 내 스스로를 돌아보고 초심으로 돌아가는 느낌을 받았어요.

영화를 찍으면서 인상 깊었던 에피소드가 있다면요?

길을 가시던 나이 많은 할머니께서 비가 오면 좋겠다고 푸념하시는 것을 찍은 게 있었어요. 할머니의 삶이 보이는 좋은 장면이었는데 제가 초보라 그만 사운드를 못 잡았어요. 게다가 그날 하루 종일.... 그날 좋은 장면들이 참 많았는데. 저녁에 울었어요. 이날 이후로는 꼭 이어폰을 끼고 사운드를 확인해요.

감독님이 관객들에게 가장 보여주고 싶은 영화 속 장면은 무엇인가요?

첫 작품인데 모든 장면이 다 소중하죠. 중간에 한 아주머님이 딸과 29년 만에 화해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세 분의 모습을 보고나니 평생을 반성하며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씀을 하시는데요, 촬영 중이셨던 지금종 감독님도 함께 우셨어요. 삶을 반성하며 사시려는 모습이 참 인상 깊었던 것 같아요. 또 화면 속에서는 잠깐 뿐이지만 오체투지단을 방문해주시는 많은 분들의 따뜻한 마음 하나하나가 모두 저에게는 감동이었어 요.

스님, 신부님들이 가장 힘들어 하셨을 때가 언제였나요?

스님께서 무릎 수술을 두 번 하셨는데요. 오체투지 중 엎드려서 일어서지를 못하시더라구요. 결국 중간에 일찍 접고 숙소로 돌아 갔는데요. 많이 걱정됐었어요. 그때가 가장 큰 고비였었던 것 같아요. 다행이 많이 회복되셔서 끝까지 함께 하실 수 있었고요.

두 분이 공동연출을 하셨는데, 서로 의견이 다를 경우 어떻게 풀어가셨나요?

나이나 경험, 성별 등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 보니 중간중간 트러블도 많았어요. 하지만 지 감독님이 이야기도 많이 들어주셨고, 저도 할 얘기는 하는 스타일이에요. 대화로 잘 풀어나간 것 같아요. 또 그런 충돌 덕에 더 좋은 작품이 나온 거 같고요.

최근 봉은사 사태라든지 천주교 주교회의의 4대강 반대 성명 등 종교계의 정치 발언이 계속되고 있는데요. 이를 보시는 감독님의 생각이 궁금합니 다.

그동안은 종교계가 정치적 발언을 많이 자제해 왔던 거라고 생각을 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23년 만에 명동에서 시국미사가 열렸잖아요. 한 신부님께서 ‘역사의 시계바늘을 20년 전으로 되돌린 정부의 반생태적 반민주적인 행태가 지금을 비상시국이라고 느끼게 한다’고 하셨는데요. 이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의 반대와 걱정을 무시하고 계속 저러는 걸 보면 참 무슨 생각인지 답답해요. 그저 소수의 부자들만을 위해 뒤도 돌아보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뒷감당을 어찌 하려는지...
사실 종교계까지 이렇게 목소리를 내는데 정작 우리 젊은 세대들이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는 다는 게, - 예전엔 투쟁의 선두에는 항상 학생들이 있었다는데 - 그리고 오히려 종교인들의 이런 반응에 반대하는 목소리 들을 낸다는 게 참 안타깝고 답답해요. 한편으로는 그들의 처참하고 힘든 현실이 느껴지기도 하지만요.

영화에서 보면 오체투지의 목적지가 북한의 묘향산이라고 나오는데요.

원래는 북한까지 오체투지가 계획되어 있었어요. 북측과도 허가 등 어느 정도 이야기가 진전되고 있었던 걸로 알고 있고요. 남쪽에서 이런저런 문제가 생기면서, 북한에서 허가를 취소하면서 무산되었죠.

앞으로 어떤 작품을 만들고 싶으신지?

다음에는 장편이 아닌 짧은 단편을 하고 싶어요. 막막하고 아프고 답답한 이야기 보다는 따뜻하고 밝은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싶구요. 4대강 관련된 이야기도 하고 싶지만 지금은 여건이 좋 지 않아서... 하지만 계속 다큐를 찍고 싶어요.

영화에서 아스팔트 길과 사람의 길, 도시와 농촌, 느린 것과 빠른 것 등이 대비되는 장면들을 보면서, 빠르게 돌아가려고만 하는 세상의 모순을 상징적으로 보 여주는 것이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독님의 의도가 있었다면 듣고 싶네요.

저만해도 10,20대를 경주하듯이 살아왔어요, 경주마처럼. 무엇 때문에 사는지 뭘 원하는 지도 모르고 있는 것 아닌가, 소중한 가치, 대안적인 삶이 있을텐데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오체투지가 그런 삶을 가슴 깊이 느끼게 해준 수행이었던 것 같아요. 굉장히 느리거든요. 답답하다 싶을 정도로. 언제 서울에 가나 싶어요. 하루 세끼 먹는 게 가장 기쁜 일이고. 근데 오히려 천천히 가면서 보니까 전에 차를 타고 다니면서는 보이지도 않았던 길가의 작은 풀, 온갖 벌레 같은 작은 생명들이 보이더라구요. 스님도 ‘살아있는 모든 존재 생명에 대한 경의를 표하고 자신을 반성하고 이기심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많다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세상이 힘들어 점점 더 소극적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어지는 상황에서 한걸음 멈춰 서서 내가 어떻게 사는게 더 좋을까? 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어요. 또 굳이 도시에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도 그 때 버린 것 같아요. 어렸을 때 부모님 덕에 제주도에서 살았었는데요. 어렸을 때 생각이 많이 났어요.

두 달여간 함께하신 오체투지를 마치고 나 서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무엇이었나요?

아 안 끝날 줄 알았는데 이제야 끝나는구나, 허전하고 아쉽고 그랬어요. 어서 빨리 편집을 끝내야겠다고 생각했구요.

권해효 씨가 내레이션을 하셨 는데 개인적인 친분이 있으셨나요?

지금종 감독님과 친분이 있어요. 노개런티로 해주셨어요. 좋은 분이시더라구요

인권영화제가 15주년을 맞이하였습니다. 거리 상영을 지지하는 메시지와 축 하 인사 부탁드립니다.

표현의 자유를 이런 식으로 무시하는 한국사회가 아직도 갈 길이 먼 거 같아요. 거리 상영에 많은 분들이 함께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인권영화제 15주년 축하드립니다!!


* 인터뷰 질문과 기사의 분량을 고려하여 임의로 편집한 부분이 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차례

<그날 이후,> 김주현 감독


 

감독 인터뷰 보러가기

감독님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영상은 어떻게 만들게 되셨는지, 이전에 만든 다른 작품이 있으신지 말씀해 주세요.

영상에 관심이 있어서 영상학과에 들어갔어요. 학교 졸업 작품으로 <파랑새>라 는 단편영화를 찍었고요. (<파랑새>는 극영화이지만) 이번에는 제가 가장 잘 할 수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다큐멘터리를 찍게 되었어요. 저희 가족에 대한 진실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어요.

어떤 계기로 이번 작품을 찍게 되셨는지요?

장애를 가지고 있는 동생이 있잖아요. 사춘기 때에는 동생을 소개하는 것이 부끄러웠어요. 대학교 들어갔을 때에도 (친구들이) “동생은 뭐하냐? 군대 안 가냐?” 이렇게 물어볼 때 “동생이 지적장애라서 안 간다.”라고 말하면 상황이 어색해지는 거예요. 친구들이 동정이나 연민의 감정을 가지고 바라보는 거죠. 저는 우리 가족이 되게 평범하고 행복하게 잘살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 어요.
대학교 다닐 때 동생 졸업식에 갔는데요. (영화) 처음 시작할 때 보면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잖아요. 그 장면을 그때 찍은 거예요. ‘이걸 가지고 영화를 찍어야 되겠다.’하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졸업하고 나면서 찍 게 된 거죠.

아주 가까운 관계인 가족을 대상으로 설정하면서 고민되었거나 어려웠던 점들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가족이 대상이니까 촬영하면서 오히려 더 자연스럽지 못하게 되는 장면 들이 있잖아요. 카메라 앞이라서 오버하게 되거나 하던 행동을 안 하게 되는 그런 것들을 자연스럽게 찍느라고 오랫동안 계속 촬영하고 그랬던 것 같아요. (제 영화가) 우리 가족의 평범한 일상을 담은 것이잖아요. 가족들 은 “이런 걸 촬영해서 무슨 의미가 있냐.”하고 자꾸만 문제제기를 하는데, 저는 의미가 있어서 찍는 것인데 이걸 왜 찍냐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니까 가끔씩 회의가 들 때가 있었어요.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걸 보면서 가족 들은 “그때 좀 협조적으로 할 걸”하는 이야기를 해요.

지적장애인이 일상 속에서 느끼는 어려움들은 어떤 것이 있나요?

홍집이가 어렸을 때 일인데, 홍집이보다 어린 아이들이 홍집이 를 둘러싸고 있고 홍집이는 엉엉 울고 있는 거에요. 제가 보고 있지 않을 때에도 그런 일들이 많이 일어난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혼자서는 밖에 잘 안 나가려고 해요. 교회나 작업장 같이 늘 다니는 곳에는 혼자서도 잘 가 지만 낯선 곳, 새로운 곳엔 잘 안 가려고 해요. 기억 속에 남아있는 안 좋은 기억 때문에 사람들과 만나는데 거부감을 느끼는 것 같아요. 영화에도 나왔지만 드럼 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은데, 드럼을 배우게끔 하려고 해도 안 가려고 해요.

지적장애인들을 대할 때 이런 점들은 꼭 지켜주었으면 좋겠다는 점이 있나요? 비장애인들을 위한 조언 또는 충고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다 알고 계실 테지만, 장애를 특별한 것이라 여기지 말고 편하게 대하시면 좋겠습니다.

동생의 장애가 계기가 되어, 다른 장애를 가진 장애인분들이나 장애인 인권 전반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 것도 같습니다.

(다른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 제가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장애인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편이고요. 물론 다른 장애인들 보다 지적장애인에 관심을 가지고 있죠.

지적장애인의 직 업교육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 설명해주세요. 홍집 씨처럼 직업교육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개선책이 필요하다면 어떤 내용으로 구성되어야 할까요?

학교를 졸업하면 장애인 복지관에 가서 직업훈련을 받게 되고, 그곳에서 소개를 시켜주면 일자리를 얻어서 나가게 되는 거예요. 직업교육이 특별한 것이 아니고 되게 단순한 작업이에요. 직업훈련을 한다기보다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도록 하는데 중점을 두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청결하게 하는 것, 하기 싫은 일이라도 시간 맞춰서 일하도록 하는 것, 친구들과 잘 지내는 것, 시간약속 잘 지키는 것과 같은 것 말예요. 홍집이는 직업교육에 만족하지 못한다기보다는 처음에 시작할 때 어려움을 가지고 있어서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한 건데요. 사실 같은 또래라고 해도 일하는 능력이 다를 수 있잖아요. 친구들과 잘 안 맞아서 홍집이가 싫어하는 것도 있고 그래요. 비슷한 친구들끼리 잘 묶어서 해주시면 재미있게 일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건 좀 어려울 것 같고요. 개선책이라고 하면, 이것도 좀 어렵겠지만, 일하는 친구들이 능률이 높지 않아서 돈을 제대로 받지 못 하더라도 정부에서 지원을 해주신다면 좀 더 보람되게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영화에서 나타나는 감독님 가족의 모습이 화목해 보였습니다. 가족 자랑 좀 해주시겠어요?

저희 집이 특별히 화목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래도 어렸을 때부터 가족들이 홍집이를 중심 으로 돌아가긴 했어요. 홍집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야 하니까. 항상 같이 걱정하고 고민하고,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그러다 보니 가족들이 홍집이를 중심으로 묶어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뭐, 항상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고요. 동생이 항상 늦게 일어나고 그러니까 싸우게 되고 그래요.

얼마 전 감독님께서도 결혼을 하시고 아기를 낳으셨는데요. 감독님에게 가족이란 어떤 의미이며, 가족 구성원 사이에 어떤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지금 (출산 후에) 처음 자유 시간을 가지게 된 거에요. 아기를 위해서 희생하고 있는 부분들이 있는 것 같이요. 계속 보호해주고, 지켜봐 줘야 하니 까. 서로 희생하는 부분도 있고 이해하면서 많이 노력해야 되겠죠.

아기 얘기 좀 해주세요.

아기가 너무 우량아여서요.(웃음) 신생아 같지가 않아서. 들 때도 무겁고, 모유 수유를 하는데 양이 넉넉지가 않은 거예요. 밥 달라고 악쓰고 발버둥 칠 때면 쩔쩔 매면서 우유를 먹이고 그래요. 그래도 자는 모습 보 면 천사 같고 꼼지락거리는 모습을 보면 행복해요.

홍집 씨와 다른 가족들의 근황을 알려주시겠어요?

아빠랑 작은 누나는 지금 회사 다니고 있고요. 저는 아기 낳아서 같이 살고 있고요. 홍집이는 원래 다니던 곳에 계속해서 다니고 있어요. 엄마는 여러 가지 일 하고 계신데, 작년에 갑상선암 수술 받으신 것 이번에 2차 수술을 받으시거든요. 좀 힘들어 하시지만 많이 나아지신 것 같아요.

차 기작 계획은 어떻게 되나요? 홍집 씨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또 만들 계획이 있으신가요?

홍집이가 무언가를 특별히 하게 된다면 영화를 찍을 수도 있겠지만, 저는 가족과 동생에 대해서 이미 하고 싶은 이 야기를 다 했기 때문에 그럴 계획은 없고요.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지적장애인들을 위해서 뭔가 하고 싶은데요. 책을 읽다 보니까 헝가리에 지적장애인들이 모여서 생활하는 곳이 있더라고요. 술 마시는 곳도 있고, 디스코 장도 있고, 연애도 하고 그렇게 같이 마을을 이루어서 자유롭게 사는데 정말 행복하게 잘 산다고 하더라고요. 동생이 자라면서 비장애인들과 부딪히면서 겪은 어려움이 있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지적장애인들끼리만 생활하 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면서, 고립된 장소에서 그들끼리만 사는 것도 문제가 있을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런 공동체에 대해서 찍어보고 싶어요. 장단점이 무엇인지,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곳이 없잖아요. 다큐멘 터리 공부하면서 찍어보고 싶어요. 외국에 나가야 하는 거니까 준비를 많이 해야 되겠죠, 언어적인 문제도 그렇고. 남편은 이런 거 많이 좋아해서, 나중에 일을 그만두고서라도 지원을 해주겠다고 그래요.(웃음)

감독님께서는 지적장애인들끼리 살아야 한다기보다는, 어려움이 있더라도 비장애인들과 같이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비장애인들과 같이 사는 게 가장 이상적이지만, 아이들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는 따로 생활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해요. 홍집이가 가족 내에서는 말을 별로 안 하는 편이거든요. 그런데 학교 다닐 때에는 자신감이 충만해서 인기도 많고, 끼가 있어서 무대에서 춤도 잘 추곤 해요. 후배 여자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아요. 그 안에 있으면 자신감도 생기고 행복하게 잘 지내는 것 같아요. 밖에서는... 어렸을 때 어떤 기억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안 좋은 기억이 많은 것 같아요. 밖에 잘 안 나 가려고 하고. 어릴 때는 놀리거나 놀림을 받거나 할 수도 있는 건데, 이 때 교육을 잘 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부모님들이 좀 도와주면 편견을 없애는 게 쉽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장애인인권영화제에 상영이 되었습니다. 관객들 반응이 어떠했나요?

그때 저는 출산 직전이라서 못 갔고 홍집이랑 엄마랑 같이 가셨거든요. 둘이서 감독과의 대화도 했다고 하더라고요.(일동 웃음) 홍집이는 <마더>도 찍고, 자기가 주인공인 영화도 앞에 나가서 보니까 연예인이 된 것처럼 그러거든요. 저번에 <마더> 찍었을 때에도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영화배우 김홍집 인사드립니다.’ 이렇게 문자로 다 보냈거든요. 이제는 국민배우라고.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 홍집이를 많이 좋아해주시니까. 끝나고 사진도 찍고 이러니까 어깨가 으쓱으쓱 하는 거죠. 홍집이가 자신감도 많이 생기고 되게 좋았던 것 같아요.

인권영화제가 15주년을 맞았습니다. 축하메시지나 지지메시지 부탁드립니다.

울림 열심히 보고 있어요. 열심히 하시고 분위기도 화목하고 좋은 것 같더라고요. 자부심이나 보람도 많이 느끼면 서 하시는 것 같고요. 되게 부러운 것 같아요. 열심히 활동하시는 분들 보면서 자극되는 여러 사람들도 있는 것 같아서... 영화제 잘 되었으면 좋겠고 사람들 많이 왔으면 좋겠어요. 응원 열심히 할게요. 화이팅!

* 인터뷰 질문과 기사의 분량을 고려하여 임의로 편집한 부분이 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차례
울림을 만드는 사람들 : 인권영화제 울림팀


인권영화제
서울시 중구 중림동 398-17 3층 (우) 100-360
전화 02-313-2407 팩스 02-365-5364 이메일 hrfilmfestival@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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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ffany jewelry 2010-07-06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울림을 만드는 사람들 : 인권영화제 울림팀 http://www.elinkslondonsale.com
 

 발리바르가 지난 달 그리스에서 시작된 유럽의 금융위기에 대해 쓴 아주 최신의 글을 한 편 올립니다. 

정세의 긴박함에 대한 절박한 심정이 절절히 담겨 있는 글인데요, 유럽의 금융위기를 비롯한

세계 정세의 흐름 및 그에 대한 대응을 고민하는 분들에게 얼마간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 

글을 올립니다. 번역까지 해드리면 좋겠지만, 저도 제 코가 석자인지라 ...  

그리 어렵지 않은 글이니까 누가 다른 분이 번역을 좀 해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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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다음과 같은 짧은 편지에 첨부파일로 동봉되어 있습니다. 

 

 Chers amis, chères amies, dear friends,
Je prends la liberté de vous communiquer un texte sur la crise européenne que je viens d'achever. Merci à ceux d'entre vous qui ont bien voulu me faire bénéficier de leurs remarques sur une version antérieure. Je suis en train de rechercher des possibilités de publication. N'hesitez pas à le fire circuler si vous le jugez utile ou intéressant.  
Bien cordialement à vous, EB

Please find attached an essay on the current crisis of Europe that I have just completed. I thank those of you who have reacted to previous versions, this was very helpful. I am currently looking for places of publication. Please don't hesitate to circulate the text if you find it useful or interesting.
All my best, EB

글은 영어본과 불어본으로 되어 있는데, 앞에 있는 것이 영어본이고 뒤에 있는 것이 불어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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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tienne BALIBAR





EUROPE: FINAL CRISIS?

Some Theses
(May 22, 2010)




1. This is only the beginning of the crisis

Within one single month, we have witnessed Prime Minister Papandreou of Greece announcing his country’s default, an expansive European rescue loan offered to him on the condition of devastating budget cuts, soon followed by the “downgraded rating” of the Portuguese and Spanish debts, a threat on the value and the very existence of the Euro, the creation (under strong US pressure) of a European security fund worth € 750 bn, the Central European Bank’s decision (against its rules) to redeem sovereign debts, and the announcement of budget austerity measures in several member states. Clearly, this is only the beginning. These latest episodes of a crisis which started two years ago with the collapsing of the US housing credit forecast others. They show that there is more than ever a risk of financial crash, provoked by the huge amount of rotten stocks which have been accumulated over the last decade through the combination of unwarranted loans and the transformation of credit default swaps into financial products by the banks. “Black Peter”, the sum total of unrecoverable debts, is running around fast, and the States can’t catch up. The speculation is now targeting the currencies and the public debts. But the Euro is the weak link in the chain, and so is Europe itself. There can be little doubt that catastrophic consequences are coming.

2. The Greek protest: rightly so!

A first, immediate, effect of the “remedy” applied on the Greek crisis was the angry protest of the Greek population. It is debated whether this should be seen as a coward denial of the population’s responsibility, or a normal rejection of an unjust collective punishment. Leaving aside the criminal episodes which have interfered, it seems to me that the protest of the Greek was fully justified, for at least three reasons. First, we have been witnessing a completely insane denunciation of the whole Greek people: the corruption and the lies of the politicians (whose beneficiaries, as everywhere, are essentially the rich, cultivating tax evasion on a grand scale) where blamed on the people as such, indiscriminately. Second, once again (and this time probably was too much), the government has betrayed its electoral promises, without any form of democratic debate. Lastly, Europe did not display any real solidarity towards one of its member-states, but imposed on it the coercive rules of the IMF, which protect not the nations, but the banks, and promise deep and endless recession. Most serious economists agree that this will lead even more inevitably to a default of the Greek Treasury, and will spread the crisis, rising the already high rates of unemployment, especially if the same rules are imposed on other countries whose “rating” on the financial market can become downgraded at any moment: which is exactly what the “orthodox” party is asking for.

3. Politics hiding its name.

The Greek were the first victims, but they will hardly be the last, of a politics of “rescuing the European currency” whose strategic dispositions (mainly imposed by Germany) are, first and foremost, a general restriction of public expenses (admittedly, the Constitutional Treaty involved a rule of maximum budget deficit, but this was never enforced…), and in addition a (rather mild) control of speculation and the free movements of hedge funds and traders, already announced after the crisis of the subprimes and the actual or virtual crash of the US banks in 2008. To this, neo-keynesian economists add another request: moving towards the creation of a European economic government (especially through the unification of tax policies), possibly also correlating and enhancing industrial investments. For want of such measures, they claim, a single European currency will prove unsustainable.

None of these are purely technical: but they are entirely political measures, which all citizens ought to be allowed to debate, because all of them will be affected by the outcome. However, to the extent that it exists, the discussion is deeply biased, because essential determinations are hidden or dismissed:
- Any policy of defending or devaluing a currency in the conjuncture of crisis leads to a radical alternative: either it subjects the economic and social decisions to the power of the financial market (including its “rating” criteria, working as self-fulfilling prophecies, and its allegedly absolute “judgments”), or it adds to the capacity of the State (and more generally the public institutions) to limit the market’s instability and grant long term economic interests a primacy over short term speculation. It cannot be both!
- In its current form, under the influence of the dominant social forces, the European construction may have produced some degree of institutional harmonization, and generalized some fundamental rights, which is not negligible, but, contrary to the stated goals, it has not produced a convergent evolution of national economies, a zone of shared prosperity, far from. Some countries are dominant, others are dominated, with respect to shares in the markets, or concentration of financial capital, or industrial dependency. The peoples may not have antagonistic interests, but the nations increasingly do.
- Any “keynesian” strategy to generate public “trust” in the economy rests on three interdependent pillars: a stable currency, a rational system of taxes, but also a social policy, aiming at full employment and increasing the popular consumption to sustain the demand. This third aspect is systematically ignored in most current commentaries, obviously not by chance.

4. Globalization’s real trends.

All this debate concerning the Euro monetary system (which, let us not forget, some important European countries refused to join, including the UK, Sweden, and Poland) and the future of Europe will remain entirely abstract unless it is articulated to the real trends of Globalization: precisely those trends which the financial crisis will powerfully accelerate, unless they are politically addressed by the peoples which they affect and their leaders. How can we summarize them? First, we are witnessing a transition from one form of international competition to another: no longer (mainly) a competition among productive capitals, but a competition among national territories, which use tax exemptions and pressure on the wages of labour to attract more floating capitals than their neighbours. Now, clearly, whether Europe works as an effective system of solidarity among its members to protect them from “systemic risks”, or (pushed by States who are momentarily more powerful, and their public opinions) simply sets a juridical framework to promote a greater degree of competition among them and their citizens, this will determine the future of Europe politically, socially, and culturally. But there is a second tendency: a transformation of the international division of labour, which radically destabilizes the distribution of employment in the world. This is a new global structure where North and South, East and West are now exchanging their places. For Europe, or most of it, it will automatically entail a brutal increase of inequalities: a collapsing of the middle classes, a shrinking of skilled jobs, a displacement of “volatile” productive industries, a regression of welfare and social rights, a destruction of cultural industries and general public services. This is why resistances against supranational political integration which believe to protect the sovereignty of the States will in fact weaken the defences of each nation. They will also precipitate a return to the ethnic conflicts, which the European construction wanted to overcome for ever. However, it is also clear that a greater political integration of Europe cannot become created “from above”, by a bureaucratic decision. It requires democratic participation and advances in each country and the continent as such.

5. Populism: a peril, or a resource?

We cannot, accordingly, but ask the question: is this the beginning of the end for the EU, a construction that had started 50 years ago on the basis of an age old utopia, but now proves unable to fulfil its promises? The answer, unfortunately, is yes: sooner or later, this will be inevitable, and possibly not without some violent turmoil. Unless it finds the capacity to start again on radically new bases, Europe is a dead political project. But the breaking of the EU would inevitably abandon its peoples to the hazards of globalization, to an even greater degree. They would be little else than carcasses floating along the stream of the river... Conversely, a new foundation of Europe does not guaranty any success, but at least it gives her a chance of gaining some geopolitical leverage, in her own benefit and the benefit of others. With one condition, however: that all the challenges involved in the idea of an original form of post-national federation are seriously and courageously met. And they are anything but huge: setting up a common public authority, which is neither a State nor a simple “governance” of politicians and experts; securing genuine equality among the nations, thus fighting against reactionary nationalisms, whether on the side of the “strong” or the side of the “weak”; and above all reviving democracy in the European space, thus resisting the current processes of “de-democratization” or “statism without a State”, produced by neo-liberalism, and the colonization of its administrations by a bureaucratic caste, which is also largely the source of the corruption in the public markets.

Something obvious should have been long acknowledged: there will be no progress towards federalism in Europe (the one that is now advocated by some, and rightly so) if democracy itself does not progress beyond the existing forms, allowing an increased influence for the people(s) in the supranational institutions. Does this mean that, in order to reverse the course of recent history, to shake the lethargy of a decaying political construction, we need something like a European populism, a simultaneous movement or a peaceful insurrection of popular masses who will be voicing their anger as victims of the crisis against its authors and beneficiaries, and calling for a control “from below” over the secret bargainings and occult deals made by markets, banks, and States? Yes indeed. There is in fact no other name with which we can call a becoming political of the people. I agree that it can lead to other catastrophes, which is why we need strong constitutional rules to be observed, and, above all, political forces to emerge again in the European arena, who introduce a culture of uncompromising democratic ideals and imaginary into this “post-national” populism. But the risk is greater if nationalism prevails in whichever form.

6. European Left? Where is it?

In this part of the world, such forces were traditionally called “the left”. But the European Left also is now bankrupt, nationally and internationally. In the broader political space, stretching across borders, that is now relevant, it has lost every capacity to express social struggles or launch emancipatory movements. It has surrendered to the dogmas and rationales of neo-liberalism. Consequently it has been ideologically disintegrated. Deprived of any strong popular support, those parties which represent it nominally are now powerless spectators and commentators of the crisis, for which they offer no specific and collective response. They have remained passive after the financial shock in 2008, still passive when the IMF recipes (which in other times, on other continents, they had vigorously criticized) where imposed on Greece, passive again when it was proposed to “rescue the Euro” at the expense of wage labourers and ordinary consumers. And they proved unable to launch a public debate on the possibility and the means of a Europe of the solidarity…

We may well wonder, in these conditions, what is going to happen when the crisis enters its next phases? When national policies, increasingly repressive, lose their social contents, or their remaining social alibis? There will be protest movements, almost certainly, but they will find themselves isolated, possibly they will become deviated towards violence, or recuperated by racism and xenophobia (which are already surging all around us). In the end they will produce more powerlessness, more despair. This is tragic, since the capitalist and nationalist right itself, now on the offensive, is also strategically divided: it was clear when stopping public deficits was pitted against investment policies, and it will be even more the case when the very existence of common European institutions is at stake (British evolution being a good symptom of what looms ahead). There was here an occasion to seize, a strong word to say about. But the question also concerns the intellectuals: what should and could be a democratically elaborated political action against the crisis at the European level, walking on both legs (economic administration, social policy), eliminating corruption and reducing the inequalities which foster it, restructuring debts and defining common objectives in order to legitimize transfers of tax resources between mutually interdependent nations? It is the task of progressive intellectuals, whether they see themselves as reformists or revolutionaries, to discuss this subject and take risks. If they fail to do it, they will have no exc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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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tienne BALIBAR





EUROPE : CRISE ET FIN ?



J’offre ici à la réflexion et à la discussion quelques thèses sur la situation européenne inspirées par les événements du dernier mois, et arrêtées à la date du 21 mai 2010.



1. La crise ne fait que commencer.

En quelques semaines, on aura donc vu la déclaration de faillite du gouvernement Papandreou, l’imposition à la Grèce d’un plan d’austérité sauvage en contrepartie du prêt européen, puis la « baisse de notation » de l’Espagne et du Portugal, la menace d’éclatement de l’euro, la création du fonds de secours européen de 750 milliards (à la demande, notamment, des Etats-Unis), la décision contraire à ses statuts par la BCE de racheter des obligations souveraines, et l’adoption des politiques de rigueur dans une dizaine de pays. Ce n’est qu’un début, car ces nouveaux épisodes d’une crise ouverte il y a deux ans par l’effondrement du crédit immobilier américain en préfigurent d’autres. Ils démontrent que le risque de krach persiste ou même s’accroît, alimenté par l’existence d’une masse énorme de titres « pourris », accumulée au cours de la décennie précédente par la consommation à crédit et la titrisation des default swaps et autres produits dérivés. Le « mistigri » des créances douteuses court toujours, et les Etats courent derrière lui. La spéculation se porte désormais sur les monnaies et les dettes publiques. Or l’euro constitue aujourd’hui le maillon faible de cette chaîne, et avec lui l’Europe. Les conséquences en seront dévastatrices.

2. Les Grecs ont raison de se révolter.

Premier effet de la crise et du « remède » qui lui a été appliqué : la colère de la population grecque. Ont-ils donc tort de refuser leurs « responsabilités » ? Ont-ils raison de dénoncer une « punition collective » ? Indépendamment des provocations criminelles qui l’ont entachée, cette colère est justifiée pour trois raisons au moins. L’imposition de l’austérité s’est accompagnée d’une stigmatisation délirante du peuple grec, tenu pour coupable de la corruption et des mensonges de sa classe politique dont (comme ailleurs) profitent largement les plus riches (en particulier sous forme d’évasion fiscale). Elle est passée, une fois de plus (une fois de trop ?), par le renversement des engagements électoraux du gouvernement, hors de tout débat démocratique. Enfin, elle a vu l’Europe appliquer en son propre sein, non des procédures de solidarité, mais les règles léonines du FMI, qui visent à protéger les créances des banques, mais annoncent une récession sans fin prévisible du pays. Les économistes s’accordent à pronostiquer sur ces bases un « défaut » assuré du Trésor grec, une contagion de la crise, et une explosion du taux de chômage, surtout si les mêmes règles s’appliquent à d’autres pays virtuellement en faillite au gré des « notations » du marché, comme le réclament bruyamment les partisans de « l’orthodoxie ».

3. La politique qui ne dit pas son nom.

Dans le « sauvetage » de la monnaie commune, dont les Grecs auront été les premières victimes (mais ne seront pas les dernières), les modalités prévalant à ce jour (imposées notamment par l’Allemagne) mettent en avant, prioritairement, la généralisation de la « rigueur » budgétaire (inscrite dans les traités fondateurs, mais jamais véritablement appliquée), et secondairement la nécessité d’une « régulation » - très modérée - de la spéculation et de la liberté des hedge funds (déjà évoquée après la crise des subprimes et les faillites bancaires de 2008). Les économistes néo-keynésiens ajoutent à ces exigences celle d’une avancée vers le « gouvernement économique » européen (notamment l’unification des politiques fiscales), voire des plans d’investissements élaborés en commun : faute de quoi le maintien d’une monnaie unique s’avérera impossible.
Ce sont là, à l’évidence, des propositions intégralement politiques (et non pas techniques). Elles s’inscrivent dans des alternatives à débattre par les citoyens, car leurs conséquences seront irréversibles pour la collectivité. Or le débat est biaisé par la dissimulation de trois données essentielles :
- la défense d’une monnaie et son utilisation conjoncturelle (soutien, dévalorisation) entraînent soit un assujettissement des politiques économiques et sociales à la toute-puissance des marchés financiers (avec leurs « notations » autoréalisatrices et leurs « verdicts » prétendument sans appel), soit un accroissement de la capacité des Etats (et plus généralement de la puissance publique) à limiter leur instabilité et à privilégier les intérêts à long terme sur les profits spéculatifs. C’est l’un ou c’est l’autre.
- sous couvert d’une harmonisation relative des institutions et d’une garantie de certains droits fondamentaux, la construction européenne dans sa forme actuelle, avec les forces qui l’orientent, n’a cessé de favoriser la divergence des économies nationales, qu’elle devait théoriquement rapprocher au sein d’une zone de prospérité partagée : certaines dominent les autres, soit en termes de parts de marché, soit en termes de concentration bancaire, soit en les transformant en sous-traitants. Les intérêts des nations, sinon des peuples, deviennent contradictoires.
- le troisième pilier d’une politique keynésienne génératrice de confiance, en plus de la monnaie et de la fiscalité, à savoir la politique sociale, la recherche du plein emploi et l’élargissement de la demande par la consommation populaire, est systématiquement passé sous silence, même par les réformateurs. Sans doute à dessein.

4. A quoi tend la mondialisation ?

A quoi bon, au demeurant, réfléchir et débattre de l’avenir de l’Europe ou de sa monnaie (dont plusieurs grands pays se tiennent à l’écart : la Grande Bretagne, la Pologne, la Suède), si on ne prend pas en compte les tendances réelles de la mondialisation ? La crise financière, si sa gestion politique demeure hors d’atteinte des peuples et des gouvernements concernés, va leur apporter une formidable accélération. De quoi s’agit-il ? D’abord, du passage d’une forme de concurrence à une autre : des capitalismes productifs aux territoires nationaux dont chacun, à coup d’exemptions fiscales et d’abaissement de la valeur du travail, tente d’attirer plus de capitaux flottants que son voisin. Il est bien évident que l’avenir politique, social et culturel de l’Europe, et de chaque pays en particulier, dépend de la question de savoir si elle constitue un mécanisme de solidarité et de défense collective de ses populations contre le « risque systémique », ou bien au contraire (avec l’appui de certains Etats, momentanément dominants, et de leurs opinions publiques) un cadre juridique pour intensifier la concurrence entre ses membres et entre leurs citoyens. Mais il s’agit aussi, plus généralement, de la façon dont la mondialisation est en train de bouleverser la division du travail et la répartition des emplois dans le monde : dans cette restructuration qui intervertit le Nord et le Sud, l’Ouest et l’Est, un nouvel accroissement des inégalités et des exclusions en Europe, le laminage des classes moyennes, la diminution des emplois qualifiés et des activités productives « non protégées », celle des droits sociaux comme des industries culturelles et des services publics universels, sont pour ainsi dire déjà programmés. Les résistances à l’intégration politique sous couvert de défense de la souveraineté nationale ne peuvent qu’en aggraver les conséquences pour la plupart des nations et précipiter le retour (déjà bien avancé) des antagonismes ethniques que l’Europe prétendait dépasser définitivement en son sein. Mais inversement, il est clair qu’il n’y aura pas d’intégration européenne « par en haut », en vertu d’une injonction bureaucratique, sans progrès démocratique dans chaque pays et dans tout le continent.

5. Nationalisme, populisme, démocratie : où le danger ? où le recours ?

Est-ce donc la fin de l’union européenne, cette construction dont l’histoire avait commencé il y a 50 ans sur la base d’une vieille utopie, et dont les promesses n’auront pas été tenues ? N’ayons pas peur de le dire : oui, inéluctablement, à plus ou moins brève échéance et non sans quelques violentes secousses prévisibles, l’Europe est morte comme projet politique, à moins qu’elle ne réussisse à se refonder sur de nouvelles bases. Son éclatement livrerait plus encore les peuples qui la composent aujourd’hui aux aléas de la mondialisation, comme chiens crevés au fil de l’eau. Sa refondation ne garantit rien, mais lui donne quelques chances d’exercer une force géopolitique, pour son bénéfice et celui des autres, à condition d’oser affronter les immenses défis d’un fédéralisme de type nouveau. Ils ont nom puissance publique communautaire (distincte à la fois d’un Etat et d’une simple « gouvernance » des politiciens et des experts), égalité entre les nations (à l’encontre des nationalismes réactifs, celui du « fort » aussi bien que celui du « faible ») et renouveau de la démocratie dans l’espace européen (à l’encontre de la « dé-démocratisation » actuelle, favorisée par le néolibéralisme et par « l’étatisme sans Etat » des administrations européennes, colonisées par la caste bureaucratique, qui sont aussi pour une bonne part à la source de la corruption publique).
Depuis longtemps, on aurait du admettre cette évidence : il n’y aura pas d’avancée vers le fédéralisme qu’on nous réclame aujourd’hui et qui est en effet souhaitable, sans une avancée de la démocratie au-delà de ses formes existantes, et notamment une intensification de l’intervention populaire dans les institutions supranationales. Est-ce à dire que, pour renverser le cours de l’histoire, secouer les habitudes d’une construction à bout de souffle, il faille maintenant quelque chose comme un populisme européen, un mouvement convergent des masses ou une insurrection pacifique, où s’exprime à la fois la colère des victimes de la crise contre ceux qui en profitent (voire l’entretiennent), et l’exigence d’un contrôle « par en bas » des tractations entre finance, marchés, et politique des Etats ? Oui sans doute, car il n’y a pas d’autre nom pour la politisation du peuple, mais à la condition – si l’on veut conjurer d’autres catastrophes - que de sérieux contrôles constitutionnels soient institués, et que des forces politiques renaissent à l’échelon européen, qui fassent prévaloir au sein de ce populisme « post-national » une culture, un imaginaire et des idéaux démocratiques intransigeants. Il y a un risque, mais il est moindre que celui du libre cours laissé aux divers nationalismes.

6. La Gauche en Europe ? quelle « gauche » ?

De telles forces constituent ce que traditionnellement, sur ce continent, on appelait la Gauche. Or elle aussi est en état de faillite politique : nationalement, internationalement. Dans l’espace qui compte désormais, traversant les frontières, elle a perdu toute capacité de représentation de luttes sociales ou d’organisation de mouvements d’émancipation, elle s’est majoritairement ralliée aux dogmes et aux raisonnements du néo-libéralisme. En conséquence elle s’est désintégrée idéologiquement. Ceux qui l’incarnent nominalement ne sont plus que les spectateurs et, faute d’audience populaire, les commentateurs impuissants d’une crise à laquelle ils ne proposent aucune réponse propre collective : rien après le choc financier de 2008, rien après l’application à la Grèce des recettes du FMI (pourtant vigoureusement dénoncées en d’autres lieux et d’autres temps), rien pour « sauver l’euro » autrement que sur le dos des travailleurs et des consommateurs, rien pour relancer le débat sur la possibilité et les objectifs d’une Europe solidaire…
Que se passera-t-il, dans ces conditions, lorsqu’on entrera dans les nouvelles phases de la crise, encore à venir ? Lorsque les politiques nationales de plus en plus sécuritaires se videront de leur contenu (ou de leur alibi) social ? Des mouvements de protestation, sans doute, mais isolés, éventuellement déviés vers la violence ou récupérés par la xénophobie et le racisme déjà galopants, au bout du compte producteurs de plus d’impuissance et de plus de désespoir. Et pourtant la droite capitaliste et nationaliste, si elle ne reste pas inactive, est potentiellement divisée entre des stratégies contradictoires : on l’a vu à propos des déficits publics et des plans de relance, on le verra plus encore lorsque l’existence des institutions européennes sera en jeu (comme le préfigure peut-être l’évolution britannique). Il y aurait là une occasion à saisir, un coin à enfoncer. Esquisser et débattre de ce que pourrait être, de ce que devrait être une politique anticrise à l’échelle de l’Europe, démocratiquement définie, marchant sur ses deux jambes (le gouvernement économique, la politique sociale), capable d’éliminer la corruption et de réduire les inégalités qui l’entretiennent, de restructurer les dettes et de promouvoir les objectifs communs qui justifient les transferts entre nations solidaires les unes des autres, telle est en tout cas la fonction des intellectuels progressistes européens, qu’ils se veuillent révolutionnaires ou réformistes. Et rien ne peut les excuser de s’y dérober.


(21 mai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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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발리바르-유럽의 위기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from 욕망하는 서재 2010-05-25 13:41 
    0. 들어가며 발마스님이 서재에 올린 발리바르의 유럽 위기에 대한 최신 글을 읽는다. 발리바르나 유럽 위기나, 한국 사정이 너무 긴박해 딴 나라 이야기처럼 들린다. (아니 사실 딴 나라 이야기이다!?)  천안함과 6.2 선거를 제외하면, 태국 사태에 가장 눈이 돌아가지 않을 수 없는데, 그래도 유럽에선 뭔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공통감각을 유지하기 위해서 읽는다. 하여간 알라딘 서재에 소개되는 책은 말할 것도 없고, 올라오는 글만 읽기에도 하
 
 
1MB 2010-05-26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입소문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역시 굉장한 곳이군요!

개념(槪念)에 대한 사유가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공간이네요.
다름이 아니라 제가 하고 싶은 얘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시민(市民)이라는 개념을 고대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논의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을까요?
물론 그 때도 시민이라는 말을 사용했겠지만 그게 오늘날의 시민과 같은 말은 아닙니다.
근대 부르주아 혁명인 프랑스 大혁명 당시에 "시민"은 과거의 개념들과 단절했습니다.
그야말로 갑작스럽게 "시민"이라는 개념이 태어난 겁니다.

그런데 이 곳에서 "시민"이라는 개념이 논의되는 방식을 보면 마치 "시민"이라는 개념이 고대 그리스로부터 기원해서 시대를 달리해 가며 그 개념의 내용이 바뀌기는 하지만 "시민"이라는 개념이 "끊임없이 발전하고 계승 및 지속되는 것"이라는 사유(思惟) 방식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기원으로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이어지고 발전해 나간다"는 그 사유 방식.
저는 그것을 단계적으로 발전해 나간다는 "발전주의적인 역사주의" 또는 "기원의 망상"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개념을 역사적으로 사유하기 위해서는 계승 및 지속 또는 발전보다는 그 "개념의 단절"을 찾는 게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과거로부터 이어지던 것이 단절되고 난데없이 갑작스럽게 불쑥 출현하는 "단절".
개념에 대한 사유를 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역사적인 "단절"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저는 시민이라는 개념은 그런 식으로 "단절"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고대 그리스 사회가 "민주주의 사회"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늘날의 사회들 중에서 "민주주의 사회"가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DJ 시대나 노빠 시대와 마찬가지로 지금의 MB 시대도 당연히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文字 그대로 民이 스스로 主人이 된 시대는 없었디고 주장합니다.

발리바르에게 흥미있는 것은 이러한 "시민"의 문제와 관련된 것들입니다.

저는 시민과 시민사회가 근대의 네이션-스테이트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며 네이션-스테이트를 넘어설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저는 시민들을 구성하는 사회집단 중 하나인 부르주아 계급에 의해 이미 시민이나 시민사회는 국가권력에 통합되어 버렸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시민"이라는 주체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미 주어져 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 "주체"가 진짜든 아니든 누군가에 의해 "시민"이라는 주체로 불리고 있다고 판단합니다.

단지 국가권력을 비롯해 다양한 형태의 권력들이 다양한 층위(종교, 젠더, 계급, 문화, 정치, 경제 등)에서 사람들의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제한하거나 배제하고 때로는 확장하는 것. 그러한 권력이 지배하는 현실과 개념으로서의 시민이 가진 괴리에 관심이 많습니다.

앞으로 발리바르와 발마스 님에게 많을 것을 배우고 싶습니다.

스스로의 情念을 이기지 못해 여기 글을 올립니다. 앞으로는 듣기만 하겠습니다.

tiffany & co 2010-07-06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근대 부르주아 혁명인 프랑스 大혁명 당시에 "시민"은 과거의 개념들과 단절했습니다.
그 야말로 갑작스럽게 "시민"이라는 개념이 태어난 겁니다.

buy cheap pandor 2010-07-07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는 시민들을 구성하는 사회집단 중 하나인 부르주아 ..

pandora on sale 2010-07-07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DJ 시대나 노..

pandora bracelet 2010-07-29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세계 정세의 흐름 및 그에 대한 대응을 고민하는 분들에게 얼마간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

글을 올립니다. 번역까지 해드리면 좋겠지만, 저도 제 코가 석자인지라 ...

그리 어렵지 않은 글이니까 누가 다른 분이 번역을 좀 해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전출처 : balmas님의 "발리바르-우리, 유럽의 시민들? [역자 해제]"

"해체 불가능한 것"은 발리바르 식으로 말하면 "이상적 보편성"이죠. 가령 "평등-자유 명제" 같은 것이 대표적인 해체 불가능한 것이 되겠죠. 정치적으로 문제가 많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네요. 그 미국인 교수가 누군지는 잘 모르겠지만, 데리다에 관한 최근의 논의나 유럽 정치철학의 최근 흐름에 대해서는 아주 무지한 사람인가 봅니다. 그런 사람들 이야기에 일일이 대꾸할 만한 가치도 없지만, 질문하신 님 자신이 문제가 많다고 하셨으니 어떤 문제가 있는지 한번 들어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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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4-15 1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해체 불가능한 정의는 도달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신적 폭력에 대한 끊임없는 기다림으로 밖에 가지 않는 것 아닌가요? 마치 기독교 역사주의처럼, 그 어떤 정립적이거나 보존적인 폭력도 결국엔 해체 불가능한 정의에는 도달할 수 없으니까요. 그런 것을 정의로 설정한 뒤에 어떤 정치가 가능한 건지 잘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정의가 항상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한 뒤에, 그 다음에 모든 사람이 다 같이 민주주의를 좋아할 것이라고 대체 어떻게 믿을 수 있을지, 그런 이들에게 대체 뭐라고 답하면 좋을지, 애초에 민주주의를 따라가야 할 해체할 수 없는 이유가 있기는 한 것인지. 어떤 비정형의 정의 개념이라고 말하고, 그 내용은 실상 비어있고 그 비어있다는 데에서 강점을 찾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서는 대체 '나치즘적 정의'를 변명하는 하이데거에게 뭐라고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더군요.
푸코는 촘스키와 한 대담에서 '정의가 계급없는 사회에서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고 말했는데, 이걸 어떻게 반박할 수 있나요? 대체 도달 불가능한 정의, 그걸 생각해야 할 이유는 뭔가요? 전 답을 못 찾겠습니다. 정의가 지금 널리 쓰이고 있다는 아주 단순한 사실 이외에 정의에 대체 무슨 특권을 줄 수 있는 것인지...

balmas 2010-04-16 01:19   좋아요 0 | URL
ㅎㅎ 데리다가 정의가 불가능하다고 했나요? 해체 불가능하다고 했지.^^ 그리고 나치즘적 정의에 관한 이야기도 나왔는데, 그건 그게 과연 해체 "불가능한" 것인지 따져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도달 불가능한 정의는 다른 말로 하면 완성 불가능한 정의가 되겠죠. 정의가 완성되면 역사가 완성되고 세상의 종말이 오는 걸 테니까, 적어도 그런 식의 종말론이나 목적론을 믿지 않는다면, 정의는 도달 불가능한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겠죠. 그리고 왜 이걸 생각해야 하느냐고 하셨는데, 발리바르가 말하는 이상적 보편성이라는 것도 그런 것이죠. 그것이 없이는 사회 정의나 해방 같은 것도 생각하기 어려운 것. 이상적 보편성, 해체 불가능한 정의 같은 것들은 사실 원초적으로 따진다면 내용이 비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첫째는 객관적 토대가 없기 때문에 그렇고, 둘째는 구체적인 내용들이 거기에서 파생되니까 그렇겠죠. 푸코 이야기는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지 모르겠는데, 그게 어떤 점에서 데리다 이야기와 모순되는 것인가요?^^

답변 주셔서 감사한데,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많이 뒤섞여 있어서 더 이상 이야기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답변 주신 걸 보니 미국의 자유주의(보수주의?) 정치철학자인 마크 릴라(Mark Lilla)의 데리다 비판과 상당히 유사한 점들이 있는 것도 같고 어떤 대목에서는 토머스 맥카시 같은 사람들이 예전에 제기했던 비판과도 상통하는 점이 있는 것 같네요. 데리다에 관한 이런 식의 비판들의 문제점이나 난점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논문을 한편 쓰는 수밖에는 없을 듯하군요.

... 2010-04-16 11:27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데리다에 관해서는, 제가 일단 더 공부를 해야겠군요. 이에 대해서는 저와 더 논쟁해보셔야 얻는 것 없이 시간만 뺏기실 겁니다; 그 어떤 정립적/보존적 행위도 정의롭다고 부를 수 없는데 정의가 현실에서 가능하다는 게, 지금 엄청 혼란스럽네요. 제가 대체 뭘 잘못 읽은 것인지 더 확인해봐야겠습니다. 전 마크 릴라를 읽었는데 그의 거의 황당한 푸코 비난에는 기가 질리더군요. 하지만 데리다에 대해서는 푸코 만큼은 잘 알지는 못하기 때문에 혼란스러웠고, 그의 비판이 어느 정도 맞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논문을 쓰신다음 그걸 제가 읽을 수 있다면 그것이 제일 좋을 것 같네요.

푸코가 한 말의 맥락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the idea of justice in itself is an idea which in effect has been invented and put to work in different types of societies as an instrument of a certain political and economic power or as a weapon against that power. But it seems to me that, in any case, the notion of justice itself functions within a society of classes as a claim made by the oppressed class and as justification for it(...)And in a classless society, I am not sure that we would still use this notion of justice.(...)you can't prevent me from believing that these notions of human nature, of justice, of the realisation of the essence of human beings, are all notions and concepts which have been formed within our civilisation, within our type of knowledge and our form of philosophy, and that as a result form part of our class system; and one can't, however regrettable it may be, put forward these notions to describe or justify a fight which should-and shall in principle--overthrow the very fundaments of our society. This is an extrapolation for which I can't find the historical justification. That's the point."

우물 안 개구리 2010-04-16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답변 감사합니다. 제가 너무 소프트커버에 집착했나요? 자제하겠습니다. ...님은 정말 진지하군요. 그렇다고 해도 발리바르는 푸코도 아니고 데리다도 아닌데 마치 제 얘기처럼 엉뚱한 면이 있네요. 굳이 쓸데없이 개입하자면 아무래도 미국은 "자유주의"가 득세하는 공간이예요. 무슨 얘기를 해도 "자유주의"적 관점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더군요. 제가 보기에 미국인들이 말하는 다원주의나 상대주의 또는 포스트모더니즘은 어떤 식으로든 자유주의와 연관되어 있다고 봅니다. 데리다를 얘기하면서 슬쩍 나치즘을 끌어들이는 발상 자체가 그렇지 않나요?

저도 데리다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데리다의 사상 자체가 목적론과 대결하는 독특한 사유방식이라고 봅니다. 추상적인 얘기를 많이 해서 알아 듣기는 힘들지만 항상 목적론이나 결정론 및 종말론에 시비를 건다고 봐도 좋지 않을까요? 데리다를 읽다보면 우리가 얼마나 목적론에 사로잡힌 존재인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고 할까요. 그런 점들이 포스트식민주의와 공명하는 면도 있어 보이고요. 어딘가 알튀세르의 향기를 느끼게 해주는 면도 있어 보입니다.(가령 역사는 주체도 목적도 없는 과정이라는 식으로) 데리다의 해체가 유물론인지는 모르겠지만 유물론과 결합 가능하다고 봅니다. 아마 그 미국인 교수는 유물론자가 아닐 겁니다.

식견 높은 분들이 많으니 엉뚱한 얘기를 하면 혼날 듯 하니 그쳐야 하겠네요.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를 Real한 것에 대한 想像적 재현이라고 했습니다. 푸코를 좋아하는 폴 벤느는 담론과 이데올로기를 서로 다른 것으로 얘기하죠. 이데올로기는 허구적인 것이라는 전제를 깔면서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나 제가 이해하는 알튀세르의 주장은 그 누구도 Real한 것을 알지 못하면서 어떤 것을 마치 Real한 것으로 "상상"할 뿐이라는 거죠. 즉 누구도 Real을 모른다. 그런데도 각자 스스로의 견해나 주장을 Real한 것으로 주장하지만 결국에는 "상상"이라는 거죠.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폴 벤느의 주장과 다르게 "모든 담론은 이데올로기" 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이데올로기일 수밖에 없다고요. 모든 담론은 항상 불완전한 무엇이 아닐까요? 발리바르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도 있다는 얘기죠.

저는 ... 님이 제가 소프트커버에 집착하는 것처럼 어떤 것이 틀림없이 "Real"하다고 전제하면서 질문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보다는 각각의 주장들의 차이를 확인하면서 그 주장들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이나 맥락, 그것의 한계 지점부터 검토하는 편이 좋다고 제안하고 싶습니다. 자의적인 읽기는 피해야 하지만 텍스트를 읽는 방식이 하나로 고정될 필요는 없는데 제가 보기에 ...님은 텍스트를 읽는 "고정된 형태의 읽기"가 있다고 생각하시는 듯 합니다. 이거야말로 "자의적인 오독"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알튀세르를 잘 아시는 발마스 님한테 혼날 것 같은 얘기만 썼군요. 발마스 님이 저한테 "너는 알튀세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셔도 딱히 반박할 말은 없습니다. 앞으로 발마스 님한테 혼나면서 배워보고 싶군요.

... 2010-04-16 18:02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고정된 형태의 읽기 같은 건 없죠. 데리다를 그래도 조금이나마 읽었는데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사람이 A를 말했는데 제가 이 사람은 A'를 말했어라고 한다면, 그건 당연히 잘못이죠. A를 어떻게 해석할지는 마음대로지만요.
물론 발리바르는 독특한 사람이고 독특하기 때문에 읽는거죠. 그 사람이 푸코랑 똑같은 이야기만 한다면 푸코를 읽지 왜 발리바르를 읽겠습니까 ㅋ 하지만 만약 푸코의 중요한 몇몇 논점들을 반박할 수 없고 그것이 옳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접점들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하는지 보기를 요구하는게 학문하려는 사람의 당연한 입장 아닐까요...? 전 최소한 그렇습니다.
전 이데올로기에 관해서는 들뢰즈와 푸코의 입장을 확고하게 믿고 있습니다. 이데올로기는 없고, 단지 그 자리에서 적절한 방식으로 활용되는 전략들이 있다고 생각해요. 효과가 문제인 거지, 허위이고 말고가 문제가 아니라는게 제 생각입니다. 그래서 이데올로기에 관해 말하는 사람을 볼 때마다 어디까지 받아들이고 어디부터 거절해야 할 지 고민하게되죠. 최소한 따옴표 이데올로기라도 썼으면 하는게 제 바램입니다만.. 뭐 제 바램일 뿐이죠.
미국에 관해서는 미국에 살아본 적도 없고, 미국에 대한 괜한 편견만 있어서 미국 사람 책들은 잘 읽지도 않아서 뭐라고 하기가 힘드네요;; 이왕이면 미국보다는 유럽 저자들을 읽는 것이, 아까운 시간 동안에는 더 좋다는 생각이 있어서 말이죠. 기회가 닿으면 어떤지 잘 살펴보고 싶습니다만. 정치외교학과를 다니고 있는데 비교 정치니 국제 정치 모두 미국의 '과학적' 이론들이 판을 치고 있어서 전 기가 질립니다. 문자 그대로 전쟁터에서 농사 짓는 것 같이 보이는데, 아직 제가 함부로 뭐라고 왈가왈부할만큼 공부를 많이 한 것도 아니고 하니.

그리고 실재에 관해서는 뭔가 지금도 끝나지 않은 라캉-들뢰즈 논쟁이 생각나는군요. 전 후자를 일단 선호합니다.

우물 안 개구리 2010-04-28 16:17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역시 입장 차이가 있군요. 굳이 선호하는 입장을 밝히자면

미국에서 활동하는 인도 출신의 spivak이 "Can the subaltern speak?"에서 들뢰즈와 푸코에 대해 비판한 거 알고 계시죠. 거기에서 그녀는 들뢰즈와 푸코에게는 전세계적으로 효과를 발휘하는 이데올로기의 작동을 무시하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거 자체가 이미 유럽중심주의라는 식으로 맹렬히 비난했죠. 아래에서 누군가 저에 대해 쓴 게 있는 거 같은데 대충 맞는 얘기입니다.

저는 알튀세르나 spivak의 이데올로기 개념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리고 들뢰즈나 푸코보다는 이 사람들 견해에 더 기울어져 있습니다. 뭐, 이데올로기가 눈에 보이는 게 아니기 때문에 어차피 쉽게 결론이 날 리가 없긴 합니다. 어쨌든 저는 이데올로기가 수많은 사람들을 지배하는 "REAL하다고 간주되는 판타지"에 가깝다고 봅니다. 가령 神의 존재가 Real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많지 않습니까? 허위를 가름하는 문제가 아니라 결국에는 想像적 관계의 재현이 아닐까요?

어쨌든 제 얘기에 답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다른 입장에서 ...님의 견해를 들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덧붙이면 발마스 님은 분명히 또 이것과 다르게 생각하시겠죠.
 

조만간 후마니타스 출판사에서 출간될 에티엔 발리바르의 [우리, 유럽의 시민들? 세계화와 민주주의의 재발명]의  

"역자 해제"를 올립니다. 많은 분들이 이 책의 출간을 오랫동안 기다려왔는데, 이제서야 마무리를 짓게 돼서  

한편으로 죄송스럽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속이 아주 후련합니다.  

아무쪼록 널리 읽히고 토론돼서, 현재 많이 위축되어 있는 국내의 좌파 정치를 재개하는 데  

일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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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해제

 

에티엔 발리바르는 특별한 소개가 필요하지 않을 만큼 국내에 잘 알려진 프랑스의 철학자다. 특히 지난 1980년대 말 이래 한국 마르크스주의 논쟁의 흐름에 대해 얼마간의 지식이 있는 독자들이라면 새삼 소개할 필요가 없는 이론가가 바로 발리바르다. 그래도 벌써 20여 년의 시간이 흘렀고 새로운 세대, 새로운 독자들이 생겨난 만큼 기억을 되살려보는 의미에서 그의 지적 이력을 간단히 정리해보기로 하자.

1942년 프랑스 부르고뉴 주의 아발롱Avallon에서 태어난 발리바르는 1960년 파리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하여 루이 알튀세르, 조르주 캉귈렘, 자크 라캉 등에게 사사했다. 특히 1965년 알튀세르, 피에르 마슈레, 자크 랑시에르, 로제 에스타블레Roger Establet 등과 함께 저 유명한 󰡔“자본”을 읽자Lire le Capital󰡕[󰡔“자본”을 읽자󰡕 완역본은 알튀세르 사망 20주년이 되는 2010년 올해 그린비 출판사에서 국내 최초로 출간될 예정이다.]에 공저자로 참여하여 약관 23세의 나이에 일약 세계적인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로 부상했다. 그 뒤에는 1970년대 중반 유로코뮤니즘을 통해 표출된 마르크스주의 위기에 대한 대응으로 󰡔역사유물론 5연구󰡕(1974),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하여󰡕(1976) 등을 저술했다. 그리고 1970년대 말~80년대 초에는 이데올로기, 대중, 국가의 문제를 둘러싸고 알튀세르와 (미완의) 논쟁을 전개하면서 “마르크스주의에서 이데올로기의 동요”에 관한 분석을 통해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의 종언을 선언한다. 철학자로서 발리바르의 초기 작업은 이것으로 종결된다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그가 전개해온 작업은 크게 세 가지 소주제로, 곧 근대의 철학적 인간학에 대한 계보학적 탐구, 구조주의 운동에 대한 철학적 평가, 자본주의의 세계화와 유럽 건설이라는 정세에 대한 이론적ㆍ정치적 분석 등으로 분류될 수 있다. 특히 1990년대 후반 이후 그가 가장 정력적으로 몰두하고 있는 연구 주제는 자본주의의 세계화 및 유럽 건설이라는 정세에서 민주주의의 새로운 전망을 모색하는 것이다. 이 주제에 관한 핵심 저작은 1992년 출간한 󰡔민주주의의 경계들󰡕 및 1998년에 발표한 󰡔정치체에 대한 권리󰡕, 그리고 2001년에 출간되었고 지금 우리가 소개하는 이 책을 꼽을 수 있으며, 또한 유럽 건설과 좀더 직결된 두 권의 저작도 이 주제에 포함될 수 있다.[É. Balibar, L'Europe, l'Amérique, la guerre. Découvrte, 2003; Europe, Constitution Frontière, Editions du Passant, 2005]

여기에 더하여 발리바르는 󰡔평등자유명제󰡕라는 저작을 얼마 전에 출간했는데[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PUF, 2010]이 책은 국민 사회 국가의 위기 및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초래하는 “탈-민주화dé-démocratisation”에 대한 유일한 대안으로 “민주주의의 민주화démocratisation de la démocratie”라는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그가 지난 20여 년 동안 수행했던 민주주의에 관한 연구를 결산하면서 새로운 방향을 개척하는 문제작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가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의 아포리아 및 자본주의의 세계화에 대한 이중적 성찰을 배경으로 지난 20여 년 간 몰두해온 주제 중 하나인 폭력과 시빌리테에 관한 저작 역시 올해 초 출간되었다. 1996년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어바인)에서 했던 웰렉 도서관 강의Welleck Library Lectures를 중심으로 폭력에 관해 쓴 여러 글을 묶은 이 책은 발리바르의 지적 작업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현대 정치철학, 특히 폭력의 정치철학에 대해서도 하나의 이정표가 될 만한 업적으로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Violence et civilité, Galilée, 2010. 이 책의 부분 국역본은 역자의 번역으로 올해 상반기에 난장 출판사에서 출간될 예정이다] 한 가지 더 추가하자면, 지난 1989년 발표한 「시민 주체」[“Citoyen sujet. Réponse à la question de Jean-Luc Nancy : Qui vient après le sujet?”, in Cahiers confrontation 20: Après le sujet qui vient, Aubier-Montaigne, 1989] 이래 그가 이런저런 기회에 꾸준히 발표해온 근대 철학적 인간학에 관한 연구들 역시 󰡔시민 주체: 철학적 인간학에 관한 시론들󰡕이라는 제목 아래 조만간 출간될 예정이다.[Citoyen sujet: Essais d'anthropologie philosophique, Paris: PUF, 근간] 근대 민주주의의 인간학적ㆍ철학적 전제들을 탐구하는 이 저작은 철학사 연구자로서 발리바르의 탁월한 능력을 잘 엿볼 수 있는 저작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렇게 볼 때 올해와 내년은 발리바르가 지난 20-30여 년 간 추구해왔던 이론적 작업에서 하나의 분수령을 이루는 시기가 될 것으로 보이며, 또한 그의 작업을 총괄적으로 이해하고 평가하기 위한 중요한 기반이 마련되는 시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사실 다른 철학자들과 달리 발리바르는 단행본 저작을 중심으로 이론 작업을 수행하는 철학자가 아니다. 그는 현대 철학자로서는 매우 드물게도 이런저런 정세들에서 직면하는 구체적인 쟁점들을 다루기 위해 논문이나 개별 발표문 등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구체화하고 확장해왔으며, 이것은 사실 꽤 엄밀한 인식론적ㆍ철학적 관점을 수행적으로 실천하려는 태도의 일환이다.[발리바르는 매우 엄밀한 인식론적 관점을 지닌 철학자이지만 그것을 그 자체로 체계화하는 데는 큰 관심이 없고 정치철학적인 논의에서 그것을 구현하는데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독자들에게는 그의 인식론적 입장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 문제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은 다음 저술들을 참조하기 바란다. 「바슐라르에서 알튀세르로: ‘인식론적 단절’ 개념」, 󰡔이론󰡕 제 13호, 1995; É. Balibar, “Conjectures and Conjunctures: Interview with Etienne Balibar”, Radical Philosophy 97, September/October 1999; Lieux et noms de la vérité, Éditions de l'Aube, 1994; “Histoire de la vérité: Alain Badiou dans la philosophie française”, in Charles Ramond ed, La pensée multiple, Harmattan, 2002] 하지만 바로 이 때문에 그의 작업을 꾸준히 따라온 사람들이 아니고서는 오랜 기간에 걸친 그의 면밀한 탐구를 정확히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의 문제제기의 중요성이나 논의의 독창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발리바르의 연구가 덜 논의되는 이유 중 하나는 아마도 여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랜 시간에 걸친 그의 작업이 단행본 저작들로 출간되고 또 국내에 계속 번역ㆍ소개된다면, 그의 작업은 단지 외국만이 아니라 국내에서도 중요한 이론적ㆍ실천적 논의 기반을 제공해줄 것으로 기대한다. 현대 철학자들 중 그만큼 구조적ㆍ정세적인 문제들에 대한 광범위하고 구체적인 경험적 분석들을 사상사 내지 지성사의 주요 주제들과 결합하여 새로운 이론적 통찰과 방향을 제시해주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가 앞으로 그의 저작들을 몇 권 더 번역ㆍ소개하려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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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서막」 이외에 3부 12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각의 장은 독자적인 쟁점을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6가지 주제가 이 책의 핵심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 주제들은 비단 이 책만이 아니라 다른 저술들에서도 발리바르 작업의 중심 주제(또는 중심적인 문제의식)를 이루고 있다.

 

1. 역사적 공산주의의 종언과 유럽 건설

 

우선 이 책의 논의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가장 먼저 쓰인 두 편의 글, 곧 5장인 「공산주의 이후의 유럽」과 9장인 「유럽에는 아무런 국가도 존재하지 않는다」를 먼저 읽는 게 좋다. 이 두 글은 1980년대 말~1990년대 초의 세계 정세, 특히 유럽 정세에 대한 발리바르의 탁월한 분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지만, 그 이후 전개되는 그의 이론적 작업의 현실적 함의를 이해하는 데에도 필수적인 자료다.

발리바르의 정세 분석(또는 “정세” 속에서 “추측”을 통해 사고하기)의 가장 빼어난 사례 중 하나라고 할 만한 「공산주의 이후의 유럽」의 논의를 여기서 요약할 생각은 없지만 이 책 전체의 논지와 관련하여 핵심 논점 몇 가지는 지적해둘 필요가 있다. 우선 (지금도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에게서 흔히 엿볼 수 있는 태도지만) 역사적 공산주의의 종언,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적 종언이라는 현실을 어떤 식으로든 부인하려는 이들의 태도와 달리 발리바르는 공산주의의 종언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으며, 1980년대 말 이전에 이미 1930년대(반파시즘)와 1970년대(68 혁명 운동)의 패배를 통해 예비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은 공산주의 자체의 완전한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공산주의, 다시 말해 일정한 역사적 시기 동안 이런저런 제도적 형태 속에서 구현되었던 하나의 공산주의의 종언이다. 정치가 존재하는 한 공산주의 그 자체의 종언이란 있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공산주의는 해방의 이념과 운동의 이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표현되는 역사적 공산주의의 종언은 우리가 살아온 20세기의 역사적 순환의 종결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심각한 제도적ㆍ이데올로기적 효과를 산출할 수밖에 없다. 발리바르는 그 중에서도 유럽 건설과 공산주의의 종언 사이의 연관성에 주목한다. 그것은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역사적 공산주의를 특징지었던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와 국경들의 제도화 사이의 모순이다. 정의상 공산주의는 국민 국가들로 구성된 지정학적 질서 및 그것들 사이의 패권 경쟁을 넘어서 피억압 인민의 해방을 위한 보편적인 이름이 되어야 마땅하지만, 현실 역사 속에서 공산주의는 유럽 대륙을 두 개로 분할하고 또 각각의 진영을 하위 공간으로 쪼갬으로써 국경들을 제도화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여기에는 물론 서방의 봉쇄 정책 및 내부의 반혁명 세력의 준동이라는 요인이 작용했다. 그러나 역사적 공산주의는 이러한 반혁명 세력의 공격에 맞서 “자기 봉쇄, 고립의 내면화 및 조직화라고 불러 마땅한 방식으로밖에는 대응하지 못했”으며, 자신들의 고유한 토대 위에서 싸우지 못했다. 그 결과 “소련의 강제수용소는 그것이 실제로 표상했던 공포 이상으로, 체계 전체의 상징물이 될 수 있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가 본래적인 의미의 공산주의의 이념과 운동의 표현이라면, 국경들의 제도화는 역사적인 정세 속에서 이러한 이념과 운동이 제도적으로 구현되었던 형태라고 부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을 좋은 전자와 나쁜 후자의 단순한 이분법으로 환원해서도 안되고, 또한 전자를 비판적 마르크스주의와 동일시하고 후자를 교조적 마르크스주의 내지 국가 공산주의와 동일시해서도 안된다. 발리바르가 문제 삼는 것은 약 150여년에 걸친 역사적 공산주의 전체의 순환으로서, 여기에는 이념과 운동, 제도가 모두 포함되고, 동쪽의 이른바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을 비롯하여 비사회주의 국가의 공산당들 및 비판적 마르크스주의까지 모두 포함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이념과 제도, 운동의 복합체로서 역사적 공산주의 전체를 관통하는 모순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둘째, 이러한 모순은 1980년대 말 이후 동유럽을 비롯한 유럽 전역에서 분출하기 시작한 민족주의 발흥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그 이유는 20세기에 제도적으로 구현된 역사적 공산주의가 그 자체로 국민 사회 국가의 한 형태였으며, 동쪽에서든 서쪽에서든 공산주의는 국민 사회 국가의 고유한 이데올로기로서 민족주의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스탈린의 이른바 “일국 사회주의”를 통해 수행된 소련 국민 국가(또는 러시아 민족 국가)의 구성이 그 전범이 되거니와,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동유럽에서 과거 공산당의 지도자들이 곧바로 새로 탄생한 국민 국가의 민족주의 지도자들로 변신한 것에서도 이 점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이는 서쪽의 이른바 자유주의 국가들에서는 민족주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서유럽의 고유한 민족주의의 편견에 불과하며(특히 프랑스가 전범을 이루는 공화주의적 보편주의라는 형태를 띠는 민족주의), 첨예한 민족주의가 먼저 등장한 곳이 바로 서유럽이다. 유럽 몇몇 지역에서 나타나는 분리 독립주의 운동만이 아니라, 좀더 근본적으로는 유럽 경제 공동체 내에서 각국의 이해관계를 둘러싼 갈등과 더불어 비유럽권 지역 출신 주민들에 대한 인종주의 및 외국인 기피증이 고조되는 현상들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역사적 공산주의의 몰락은 이러한 상황에서 국지적인 소민족주의의 분출을 조장했을 뿐만 아니라, 유럽 내에서 서쪽과 동쪽 간의 불평등한 관계를 강화하면서 새로 구성되는 유럽 연합을 위계적이고 배타적인 구조로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따라서 유럽 건설과 관련하여 발리바르가 주목하는 세 번째 측면은 “국가 없는 국가주의”의 출현이다. 국가 없는 국가주의란 진정한 의미의 국가, 곧 시민들의 호혜적인 정치 공동체로서의 국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가운데, 행정적이고 억압적인 관행들이 지속되고 정치가 사적인 권력들 및 이해관계들의 우발적인 타협으로 대체되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러한 상황을 낳은 주요 원인은 물론, 시장의 자율화는 효율성을 증대시킬 뿐만 아니라 개인들의 자유의 증대를 가져온다는 의미에서 민주주의도 확대한다고 믿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과정에 따라 공공성이 전반적으로 약화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경제적’(또는 경제주의적) 설명만으로는 국가 없는 국가주의가 생겨나게 된 원인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을뿐더러 그것이 초래하는 파국적 효과들도 제대로 해명하기 어렵다. 발리바르는 1980년대 말~1990년대 초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연쇄적인 붕괴가 낳은 상황은 내전 이후 러시아에서 발생한 상황 및 1920년대 유럽에서 파시즘을 탄생시킨 상황과 구조적으로 매우 유사하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왜 이러한 파국적인 효과들이 생겨나는지, 그리고 그것이 국가 공산주의로서 역사적 공산주의의 종언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설명하는 것이 이론적ㆍ실천적으로 매우 중대한 과제가 된다.

발리바르는 그 원인을 무엇보다 오늘날의 국가는 개인들의 일상적인 존재 조건 그 자체가 되었다는 사실에서 찾는다. 이것은 사실 알튀세르가 그의 이데올로기론에서 이데올로기의 물질성과 동일화(identification) 메커니즘을 결합함으로써 이미 설명한 바 있다. 발리바르는 이데올로기론에 대한 알튀세르의 테제를 받아들이되, 그것을 역사적인 이데올로기 형성체, 특히 국민 형태 개념으로 정정하고 구체화하고 있다(국민 형태 개념에 대해서는 “용어 해설” 참조). 이처럼 오늘날 국가가 개인들의 존재의 물질적ㆍ상징적 지주가 되었기 때문에 가장 억압적인 국가를 포함한 국가의 붕괴는 광범위한 대중들에게 동일성 또는 정체성 상실의 공포감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공포감은 국가의 부재(동유럽의 경우) 내지 약화(서유럽의 경우)를 벌충해줄 수 있는 상상적인 대체물로서 강력한 절대적 공동체에 대한 열망으로 표출되며, 이러한 공동체를 훼손하거나 위협하는 타자들에 대한 강렬한 적대감을 수반한다. 따라서 1990년대 이후 유럽 전역에서 일상화된 인종주의 및 민족주의와 외국인 기피증은 단순히 경제적 세계화의 결과가 아니라 고유한 이데올로기적 메커니즘의 효과라고 할 수 있다.

발리바르는 이러한 상황은 새로운 유럽 공동체, 곧 이전의 국민 국가들에서 이룩했던 것보다 더 많은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역사적으로 진보적인 정치체로서 유럽의 건설을 어렵게 할 뿐만 아니라 유럽의 존재 자체를 의문에 빠뜨리게 된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유럽 연합이 추구하는 것이 미국이나 중국 같은 열강들과 어깨를 겨룰 수 있는 새로운 패권 세력으로서의 유럽, 동쪽의 새로운 ‘식민지’를 통해 경제적인 번영을 추구하려는 유럽, 민족주의의 새로운 쟁패장으로서의 유럽이라면, 그것은 역사적으로, 원칙적으로 존재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역사적 공산주의의 몰락과 새로운 유럽의 건설이라는 과제 사이의 쟁점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수십 년 동안,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수 세기 동안 공산주의와의 관계가 긍정적이면서 또 부정적으로 유럽에서 연대를 형성하는 데 기여해왔다면, 오늘날 “공산주의의 종언”에 대한 우리의 집합적인 대응 방식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유럽의 존재 그 자체다.” 역으로 말한다면, 역사적 공산주의의 종언이 낳은 파국적 효과들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유럽이라는 정치 공간 내에서는) 유럽이라는 새로운 종류의 정치체가 현실 사회주의를 포함한 근대 정치의 제도적 핵심을 이루었던 국민 사회 국가의 한계를 넘어서는 민주주의의 진전을 이룩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5장은 비단 이 책만이 아니라 90년대 이후 발리바르의 지적 작업 전체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2. 국민 사회 국가의 위기: 시민권=국적 등식

 

다른 한편 「유럽에는 아무런 국가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동일한 정세에 주목하면서도 1980년대 이후 유럽 정치의 핵심 문제로 등장한 이주자 문제와 민족주의ㆍ인종주의의 폭발이라는 측면을 집중 분석한다. 발리바르는 특히 이러한 현상과 국가 형태 사이의 관계라는 문제에 주목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오늘날 확산되고 있는 인종주의가 생물학적 차이에 근거를 둔 인종주의도 아니고 문화적이거나 사회학적인 차이의 도착(倒錯)에 근거를 둔 것도 아니며, “국가의 개입에 의해 중개된 타자와의 관계”,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타자와의 관계로 투사되고 우회적으로 경험된, 국가와의 갈등적 관계”이기 때문이다.

다소 수수께끼처럼 들리는 이 테제는 무엇보다도 인종주의가 현대적인 국가, 곧 국민 사회 국가의 제도 그 자체 속에 객관적으로 기입돼 있음을 가리킨다. 하지만 이것은 (세계 체계론을 포함하는)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 해석이 특권화하는 것처럼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이 노동력의 차별적인 재생산 메커니즘을 체계적으로 활용하고 있고, 이 과정에서 남쪽 출신의 이주 노동자들이 주된 착취 대상으로 존재한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발리바르 자신이 지적하듯이 이러한 분석은 “경제 구조와 이데올로기 형성체 사이의 무매개적인 상응”을 가정하고 있으며, 개인들의 일상적인 관계 및 대중의 사고와 국가의 관계, 특히 국가의 해체 내지 국가 제도의 위기가 미치는 영향에 대한 분석을 결여하고 있다.

인종주의가 국가 인종주의로, 제도적 인종주의로 존재한다는 것은, 인종주의가 국민 국가의 유기적 이데올로기로서 민족주의와 “대체 보충적인” 관계를 맺고 있음을 의미한다. 대체 보충supplément이라는 개념은 데리다가 루소의 󰡔언어기원에 관한 시론󰡕에서 말parole과 문자 기록écriture의 관계를 다루는 방식을 가리키기 위해 고안해낸 것이다(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루소 자신이 사용한 쉬플레망supplément이라는 단어를 개념적으로 좀더 급진화한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이 개념은 원래 기원적인 것(루소의 경우에는 말)을 보충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문자 기록)이 결국에는 기원적인 것을 대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종주의가 민족주의를 대체 보충한다는 것은 정확히 두 가지를 의미한다. 첫째, 인종주의는 민족주의의 특수성을 대체 보충하는 것이며, 따라서 “과잉 민족주의sur-nationalisme”로 나타난다. 이런 의미에서의 인종주의는 정치 공동체로서의 국민과 단순한 정치 이데올로기로서의 국민주의가 지닌 취약성을 보완하기 위해 민족의 순수성과 통일성을 추구하는 “전체적 민족주의”로 나타난다. 프랑스의 극우 정당인 국민 전선이 “국민 우선”이라는 구호로 추구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의 전체적 민족주의이며, 이 때문에 국민 우선은 강력한 인종주의적 구호라고 할 수 있다. 둘째, 하지만 인종주의는 또한 보편성의 측면에서 민족주의를 대체 보충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인종주의는 “초민족주의supra-nationalisme”, 곧 하나의 국민 단위의 민족주의를 넘어선 국제주의적 민족주의로 나타난다. 가령 유럽 전체에 걸쳐 나타난 반유대주의가 한 사례가 될 수 있으며, 좀더 의미심장한 것으로는 19세기~20세기에 유럽 국가들이 세계적인 식민지 패권 경쟁 속에서 서로 갈등과 투쟁을 벌이면서도 동일한 백인 문명을 공유하는 동등한 인종 공동체의 한 성원으로서 서로를 인정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또한 과거의 사실, 과거의 이데올로기에 그치지 않고 오늘날 유럽 연합의 건설 과정에서도 유럽적인 아파르트헤이트의 형태로 표출되고 있다.

오늘날 유럽에서 수구적 민족주의와 더불어 유럽 주민과 비유럽 주민의 체계적인 구별 및 차별 현상이 나타나는 원인을 발리바르는 국민 사회 국가의 위기에서 찾고 있다. 용어 해설에서 설명한 것처럼 국민 사회 국가는 “국민에 대한 소속은 사회적 권리의 향유를 위한 본질적인 조건이 되었으며, 역으로 이러한 사회적 권리들에 대한 인정(이 원리는 이제 헌법에 명기되어 있다)은 그것이 힘의 정치 및 국민 주권에 대한 긍정의 정치 속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사실”을 해명하기 위해 사용되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근대 국가가 국민 국가에서 국민 사회 국가로 전환되고 20세기 후반에 와서 위기에 봉착할 수밖에 없게 된 원인을 해명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발리바르의 이론 작업에서 정치 사회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간주될 수 있다.

발리바르는 국민 사회 국가가 함축하는 배제 원리의 핵심을 시민권=국적이라는 등식에서 찾는다. 이것은 한 마디로 하면 “정치적 의미의 소속을 뜻하는 시민권을 갖는다는 사실, 시민적 권리 및 의무의 보유자라는 사실과, 국민이라는 역사적 공동체에 속한다는 사실, 국적을 나타내는 증명서들과 징표들을 소유한다는 사실 사이의 등가성”을 가리킨다. 이처럼 시민권과 국적 사이에 등식 관계가 성립하게 되면, 시민권, 곧 개인적 권리와 정치적 권리 및 사회적 권리가 국적을 가진 사람들(국민들)에게만 부여되고 외국인들이나 이주자들은 이러한 권리의 향유에서 배제되는 것을 자연스러운 사실로 받아들이게 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국민 사회 국가는 프랑스 혁명을 비롯한 근대 시민 혁명에 의해 확립된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에 이념적 기초를 두고 있다. 따라서 국민 사회 국가는 모든 사람은 본래적으로 평등하고 자유로우며, 또한 모든 사람은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향유하는 한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누릴 수 있다는 원리에 근거를 두고 있음에도, 시민권=국적이라는 배제의 등식에 따라 이러한 원리를 제한하고 축소하는 것이다. 발리바르에 따르면 이것이 국민 사회 국가의 역사적 전개 과정을 규정하는 근본적인 모순이다.

유럽 연합의 건설로 인해 이러한 모순은 한층 더 첨예해진다. 왜냐하면 유럽 연합의 건설은 지금까지 국민 국가에서 이루어졌던 민주주의와 시민권의 발전 정도를 질적으로 넘어서는 훨씬 더 진전된 민주주의를 구현해야 하지만, 현재 진행 중인 유럽 건설에서는 유럽 회원국 소속 국민들에게만 유럽 시민권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유럽 회원국 소속 국민들이 아닌 사람들, 곧 주로 이주 노동자들은 한편으로는 각 국가의 시민권에서 배제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유럽 시민권으로부터도 배제되는 이중의 배제 상태에 놓이게 된다. 따라서 새로운 민주주의의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자처하는 유럽의 한 가운데에서 일체의 권리로부터 배제된 새로운 종류의 인구들이 구성되는 셈이다. 그는 이러한 배제 상황을 지칭하기 위해 서슴없이 유럽적인 아파르트헤이트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유럽이라는 초국민적 정치체가 내포하고 있고, 그것이 민주주의적인 정치체로 자처하기 위해서 해결해야만 하는 모순은 국민 국가를 넘어선 시민권의 보편화 대 아파르트헤이트 사이의 모순이라고 할 수 있다.

 

3. 헌정의 역사, 국가의 역사

 

국민 사회 국가의 위기라는 정세 인식은 국민 국가의 역사, 더 나아가 헌정의 역사에 관한 이론적 탐구로 이어진다. 이 책을 비롯한 발리바르의 최근 작업에서 시민권 개념이 점점 더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시민권이 서양 정치 제도의 핵심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시민권 개념에 대한 발리바르의 연구는 고대 그리스 이래 서양 정치 제도의 전개 과정에 대한 일종의 계보학적 탐구의 문제설정에 따라 수행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점은 무엇보다 폴리테이아politeia 개념에 대한 새로운 번역 제안에서 엿볼 수 있다. 폴리테이아는 보통 “국가” 내지 “정체”(政體)로 번역되며, 서양 정치 철학의 근간을 이루는 개념 중 하나다. 따라서 이 개념에 대한 새로운 번역어의 제안은 동시에 서양 정치 철학 전통 및 민주주의 개념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함축할 수밖에 없다. 발리바르는 이 책 12장에서 “시민권 헌정”이 폴리테이아에 대한 가장 적합한 번역어라고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새로운 “시민권 헌정(저는 이 용어야말로 고대의 폴리테이아 개념에 대한 가장 적합한 번역어라고 믿습니다)의 문제 ...”(348쪽) 또한 2001년에 발표한 다른 글에서도 이 번역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저는 오래전부터 폴리테이아라는 단어는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서는 단 하나의 개념과 관련되어 있으며 줄곧 이 개념의 발전을 추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맥락에 따라 “시민권”이나 “정치체에 대한 권리”로, “헌정”이나 “정체(政體)”로 “번역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이 개념, 곧 “시민권 헌정”이라는 개념은 분명 복잡한 것입니다. 이 개념 속에 함축되어 있는 것은, 시민들의 공동체에 대한 한정(예속자들의 배제, 그들을 오이코스oikos라는 사적 영역으로 억압하기, 외국인들을 열등한 권리의 지대에 제한하기), 공적인 문제들을 숙의할 수 있는 인민 대중의 권리, 그리고 관직들 내지 권력 행사를 상호성이라는 통념(통치자들 역시 피통치자들이라는 통념 또는 적어도 그들은 피통치자들의 심의를 받는다는 통념) 위에 정초하기, 또한 각자의 능력에 따라(이는 중우정치 또는 일반이익에 속하는 것을 단적으로 대중의 이익과 동일시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관직들을 배분하는 것 등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시민권 헌정”에 대한 이 최초의 소개의 중심에서 매우 강한 긴장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러한 긴장은 폴리테이아와, 이소노미아isonomia[법 앞에서의 평등] 내지 아이쿠아 리베르타스aequa libertas(이것을 우리는 “평등한 자유”로 번역해왔습니다)라는 서로 분리 불가능한 통념들 사이에 존재하는 경향적인 갈등에 의해 명시적으로 표현됩니다. 이러한 긴장이 뜻하는 것은, 헌정은 어떤 의미에서는(아마도 여기에 헌정의 획득할 수 없는 균형의 이상이 존재할 것입니다) 전복적인 성격을 지닌 자신의 원리/시초principe의 전복적 결과들에 저항하기 위해 작동하는 수단들 전체로 정의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Citoyenneté démocratique ou souveraineté du peuple?”, in Droit de cité, 앞의 책, pp. 193-94; 「민주주의적 시민권인가 인민 주권인가?」, 󰡔정치체에 대한 권리󰡕, 진태원 옮김, 후마니타스, 근간]

 

이 대목에는 폴리테이아를 “시민권 헌정”으로 번역하는 발리바르의 이론적 의도가 잘 드러나 있다. 이러한 번역은 우선 헌법 또는 헌정의 중심에는 시민권이 존재함을 의미한다. “하지만 나는 이 모든 질문[법의 원천의 위계화, 권력 분할 및 균형, 정치 체제의 규정 등과 같은 헌법의 법적 정의들에 관한 질문들―인용자]을 유럽 이사회가 계속 해서 언급하고 있지만 결국에는 제한적이고 형식적으로 제시하는 데 그치고 있는 질문, 곧 시민권의 질문에 종속시킨다. 어떤 법적 텍스트는 시민권의 형태를 정의함으로써 헌법으로서의 효력을 획득한다. 그리고 역으로 제도들 및 사회적 규칙들(또는 법학자들이 말하는 바에 따르면 “규범들”)을 정초함으로써 시민들의 집합체는 “제헌 권력”의 기능을 획득하게 된다.” 지난 20여 년 동안 진행된 발리바르의 작업, 특히 최근 10여 년 동안의 작업에서 시민권이라는 개념이 논의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국내 일각에서는 그가 사회 민주주의자 내지 자유주의자로 변모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보내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식의 평가는 그의 이론적ㆍ정치적 노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에서만이 아니라 그의 문제제기의 깊이와 범위를 너무 과소평가한다는 점에서도 문제가 있다.

그런 식의 평가가 지닌 문제점은 사회 민주주의나 자유주의가 하찮은 이데올로기에 불과하고 발리바르가 그런 류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힐 리가 없다는 점 때문이 아니다(사회 민주주의나 자유주의는 그 나름의 이데올로기적ㆍ이론적 강점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런 식의 의혹이 대개 마르크스주의=진리, 사회 민주주의/자유주의=변절/기만이라는 냉전의 이데올로기적 유산(또는 제3인터내셔널의 이데올로기)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이후의 유럽」 이래로 그가 지속적으로 강조해온 것은 마르크스주의가 역사적 패배 및 영원한 망각의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20세기 내내 국제 공산주의 운동을 괴롭혀온 이데올로기적ㆍ정치적인 분할(볼셰비키 대 사회 민주주의, 소비에트 노선 대 중국식 노선, 정통 마르크스주의 대 제 3세계주의 등)을 극복할 수 있는 문제설정을 창안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세계화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이러한 분할이 기반을 두고 있던 현실 자체(발리바르가 “현실적 보편” 또는 “보편의 현실적 구현”이라고 부른 것)가 심원하게 변모된 상황에서 과거의 이데올로기적ㆍ정치적 대립을 그대로 고수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이기까지 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따라서 둘째, 그런 식의 의혹은 시민권 개념에 대한 발리바르의 연구는 근대 정치의 이론적ㆍ제도적 기반을 새롭게 파악하려는 시도에서 유래하며, 그것이 함축하는 인간학적ㆍ정치적ㆍ제도적 함의에 대한 근원적인 재검토(곧 고대적인 도시 국가에서 국민 사회 국가에 이르는 서양 헌정의 역사, 국가 형태의 역사에 대한 포괄적인 재고찰)와 시민권 개념에 대한 발본적인 개조를 목표로 한다는 사실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다. 폴리테이아에 대한 재정의에서 볼 수 있듯이 발리바르에게 “시민권”은 사회학이나 정치학에서 흔히 말하듯이 단순한 “소속 개념”으로, 곧 이러저러한 정치 공동체(특히 국민 국가)에 대한 소속 및 그것과 결부된 권리와 의무의 집합으로 한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민권은 시민을 시민으로, 곧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이며, 시민들이 자신들의 호혜적 관계를 지속하고 확장하기 위한 물질적 지주, 곧 제도적 기반은 어떤 것인가에 대한 규정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국가를 포함한 정치 제도가 시민들의 공동체, 곧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들의 호혜적 집합으로 규정되는 한에서 시민권은 정치 제도의 본질을 이루는 것이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지속되어온 우리의 이론적 전통이 부여한 이중적 의미에서 이해된 “시민권” 개념에 따르면, 시민권은 시민들, 곧 일정한 지위를 공동으로 지니는 인격들 내지 역사적ㆍ사회적 “행위자들”의 집합, 공동체로서의 폴리테이아이자, 경계들/국경들의 문제설정에서 출발하여 이 동일한 행위자들을 위한 공적 공간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또한 그것의 틀을 형성하거나 한정하는 제도적 체계의 형태 내지 이념으로서의 폴리테이아다.”

그렇다면 발리바르가 폴리테이아 개념에 대한 기존의 번역어에 불만을 표시할 때 염두에 둔 것은 기존의 번역어들이 이러한 이중적 측면을 적절하게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기존의 번역은 맥락에 따라 폴리테이아를 “헌정/구성”(다른 경우에는 “국가 형태”, “정체” 등)이나 “시민권”(시민의 권리의 제도 및 실행이라는 이중적 의미에서)으로 옮기는데, 전자든 후자든 항상 동일한 논쟁이 문제가 된다.”(이 책 368쪽 주 20) 따라서 그의 최근 작업에서 시민권 개념이 중심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것은 사회 민주주의적인 또는 자유주의적인 “퇴보”나 “변절”의 징표라기보다는 오히려 헌정의 역사 내지 국가 형태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근대 국민 국가의 한계를 평가하고 그것에 대한 탈근대적 대안을 모색하려는 지극히 야심적인 이론적 기획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 및 다른 저작들에서 나타나는, 유럽 연합의 건설에 대한 깊은 관심 역시 유럽 연합이 근대 국민 국가의 한계를 넘어서는 민주주의의 새로운 전진, 헌정 형태의 쇄신을 이룩해야 한다는 이론적 신념에서 나온 것이다. 실제로 그는 지난 2005년 유럽 헌법안에 대한 각국의 국민 투표를 통해 야기된 유럽 헌정의 위기의 핵심 문제는 단지 어떤 헌법안을 만들고 채택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실존하지 않는 정치적 집합체를 “구성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이 말은 곧 유럽 연합은 지금까지의 국가 형태 내지 헌정 형태와 구별되는 새로운 헌정 구성의 시도이어야 하며, 민주주의의 역사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놓는 것이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유럽 연합은 기존의 국민 국가 수준에서 형성되었던 제도들을 유럽이라는 초국민적 수준으로 그대로 옮겨놓는 그쳐서는 안 되며, 시민권 개념의 쇄신을 중심으로 일종의 헌정 형태의 혁명을 이룩해야 한다는 것이다.

 

4. 신자유주의, 민주주의, 시민권: 민주주의와 시민권의 이율배반

 

이미 발리바르는 이 책에 수록된 글 중 가장 먼저 씌어진 「유럽에는 아무런 국가도 존재하지 않는다」와 「공산주의 이후의 유럽」에서부터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오늘날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가장 강력한 힘들 중 하나라는 점을 명시하고 있으며, 최근의 여러 글에서도 이 점을 지속적으로 환기하고 있다. 하지만 발리바르는 모든 문제를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탓으로 환원하지도 않으며, 특히 자본 및 금융의 세계화를 민주주의 쇠퇴의 핵심 원인으로 간주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자칫 민주주의가 직면한 아포리아를 외부 요인의 문제로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른바 북쪽의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국가들에서 목격하게 되는 민주주의의 후퇴 내지 “탈 민주주의화” 현상은 또한 근대 국민 사회 국가, 특히 그것이 이룩한 최대의 민주주의적 성과로서 사회적 시민권의 한계에서 생겨난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볼 경우에만 신자유주의의 정치적(또는 반(反)정치적) 함의를 좀더 정확히 인식할 수 있고, 그것에 맞서기 위한 실천적 투쟁의 방향들을 모색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발리바르는 국민 사회 국가의 위기의 핵심을 시민권=국적 등식에서 찾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러한 등식을 가능하게 했던 서양 정치 제도의 근본적인 갈등을 민주주의와 시민권 사이의 이율배반적인 관계에서 발견한다. 민주주의와 시민권의 이율배반이란 먼저 무제한적이고 보편적인 “평등(한) 자유égaliberté”에 대한 요구 및 그것을 실현하려는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는 바로 그 무제한적인 보편성 때문에 본질적으로 확고한 토대를 지닐 수 없으며 완결될 수도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어떠한 형태의 공동체로도 한정될 수 없으며, 그것을 초과하고 해체하는 부정성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두 번째로 시민들은 정의상 공동체 바깥에서는 존재할 수 없으며 물질적인 제도적 체계 속에서 자신들의 권리 및 공동의 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규정된 시민권의 체계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이러한 시민권의 체계로서 국가는 정의상 배제의 경향을 띨 수밖에 없으며, 더 나아가 자신의 정치적 기초를 이루는 민주주의의 보편성을 한정하고 심지어 구축(驅逐)하려는 경향을 지니게 된다. 시민권 체계를 본질로 하는 국가는 민주주의를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제도적 산물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민주주의적 기초 자체를 잠식하고 탈민주주의화하려는 경향을 지니는 것이다. 이것이 발리바르가 말하는 민주주의와 시민권의 이율배반의 의미다.

발리바르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정세에서 이러한 이율배반은 두 가지 형태로 첨예하게 전개된다고 주장한다. 하나는 국민 국가 내지 국민 사회 국가의 기본적인 배제의 원리를 이루는 시민권=국적의 강화라는 형태다. 이것은 민족주의의 분출 및 제도적 인종주의의 강화로 나타나고, 유럽의 차원에서는 유럽적인 아파르트헤이트라는 모습으로 표현된다(이 점에 대해서는 “용어 해설”의 ‘국민 사회 국가’ 항목 참조). 두 번째 형태는 신자유주의와 좀더 직접 결부되어 있는 것으로서, 발리바르가 “반(反)정치”로서의 신자유주의 정치라고 부르는 것이다. 여러 이론가들이 지적하듯이 신자유주의는 전통적인 자유주의와 사뭇 구별되는 형태를 띤다. 그것은 전통적인 자유주의의 기본 원리가 정치와 경제 영역을 엄격히 구별하고 후자의 자율성을 위해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하려고 하는 것인 반면, 신자유주의에서는 시장을 급진적으로 탈규제화하면서 동시에 국가가 이른바 ‘시민 사회’의 여러 영역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시장의 작용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시장의 기준(효용 원리)을 강화하고 확산하도록 촉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의 핵심은 이윤 및 효용의 가치를 무제한적으로 추구하는 신자유주의적 주체 형성에서 찾을 수 있다.

발리바르가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정치를 반정치라고 부르는 이유는 정치 활동에 내재적인 갈등적 요소들을 급진적으로 제거하고 효용을 개인 및 집단 활동의 유일한 기준으로 삼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준에 어긋나는 개인들과 집단의 활동을 막기 위해 신자유주의적 국가는 정치적ㆍ사회적 갈등의 요인을 “예방적으로 개입”하고 차단할뿐더러, 각각의 개인들과 집단이 효용 원리를 유일한 판단 및 행위 기준으로 “자생적으로” 채택하도록 다양한 장치(강압, 규율, 문화적, 윤리적 모델의 장려와 보급 등)를 통해 고무하고 강제한다. 따라서 신자유주의는 시민들의 정치 참여를 최소화하고 정치적 반대나 저항, 불복종 등을 억압한다는 의미에서 “반민주주의적anti-democratic”일 뿐만 아니라, 정치 참여나 저항, 더 나아가서는 민주주의적 원리 자체의 무용성을 주장하고 조장한다는 의미에서 “무(無)민주주의적a-democratic”인 성격을 띤다는 것이 발리바르의 관점이다.

 

5. 세계화와 반(反)폭력의 정치

 

민주주의와 시민권 사이의 이율배반에 관한 인식은 이 책의 또 다른 핵심 주제를 이루는 반폭력의 정치 내지 시빌리테의 정치와 연결된다. 󰡔대중들의 공포󰡕에 수록된 「정치의 세 개념: 해방, 변혁, 시빌리테」에서 발리바르는 오늘날의 정치는 더 이상 근대 시민 혁명들에서 구현된 고전적인 해방의 정치로 국한될 수 없고, 정치를 규정하는 정치 외부의 조건들(마르크스에게는 생산 관계, 푸코에게는 권력 관계)의 변혁을 핵심 과제로 삼는 변혁의 정치와 동일시될 수도 없으며, 여기에 더하여 정치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폭력(특히 극단적 폭력)의 퇴치 및 감축을 목표로 삼는 반폭력의 정치를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 책은 이러한 관점 위에서 세계화 시대 반폭력의 정치의 구체적인 쟁점들과 목표들을 검토하고 있다. 이 주제는 이 책의 7장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어지고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이 책 전체가 이러한 주제의 변주라고 할 수도 있다.

발리바르가 이처럼 반폭력의 정치를 중시하는 것은 우선 종래의 정치가 폭력의 문제에 맹목적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특히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한 해방과 변혁의 정치의 경우 이러한 맹목은 좀더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이러한 정치는 자신이 피억압자들(프롤레타리아이든, 식민지 주민들이든 아니면 흑인이나 소수자 또는 여성이든 간에)의 관점에서 모든 종류의 착취와 억압, 폭력을 타파하고 해방을 이룩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고 단언하는데, 그것이 자신의 활동의 해방적인 성격을 강조하면 강조할수록 그만큼 자기 자신이 산출하는 폭력에 대해서는 더욱 더 맹목적일 수밖에 없고, 또 그만큼 그것이 주장하는 해방의 정치는 억압과 배제의 정치로 전도되기 쉽기 때문이다. 실제로 발리바르는 󰡔폭력과 시빌리테󰡕에 수록된 여러 글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한 해방과 변혁의 정치 사상에 내재한 이러한 맹목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역사적 마르크스주의가 종언을 맞이하게 된 근본 원인 중 하나를 여기에서 찾고 있다. 따라서 새로운 형태의 해방 및 변혁의 정치가 가능하기 위한 조건은 폭력의 문제를 정치하게 분석하고 효과적으로 퇴치할 수 있는 조건 및 수단을 어떻게 창출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주요한 전언 중 하나다.

더 나아가 발리바르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전개되면서 본격화되고 있는 새로운 종류의 폭력(또는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서 반폭력의 정치의 또 다른 필요성을 발견한다. 그것은 그가 “극단적 폭력” 내지 “잔혹”이라고 부르는 폭력이다. 이러한 폭력은 객관적인 원인과 결과, 주체와 타자, 가해자와 피해자, 인간성과 자연(동물성)의 경계가 불분명해지고 와해되는 가운데 발생하는 폭력이며, 또한 그러한 경계를 더욱 불분명하게 만드는 폭력이다. 이른바 주변부 세계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자연 재해 및 전염병의 창궐, 대규모의 종족ㆍ종교 분쟁, 대량 학살과 인종 청소, “일회용 인간들”의 생산과 재생산 같은 현상들이 바로 극단적 폭력의 주요 사례들이다. 이러한 현상들은 합리적인 정치 활동의 조건들 자체를 잠식하고 더 나아가 인간학적 기초를 와해시킨다는 점에서, 해방의 정치를 비롯한 정치 일반에 대해 근본적인 도전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반폭력의 정치는 단순히 정치의 한 부분 내지 분야라기보다는 정치의 존립 및 재개 가능성의 성패가 달려 있는 근본 쟁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폭력에 어떻게 맞설 것인가? 우선 이러한 반폭력의 정치는 지극히 어려운 것이라는 점을 지적해두자. 그 이유는 이러한 정치가 전통적인 의미의 정치의 경계를 넘어서 대중들동일화 과정, 곧 대중들의 가장 내면적인 삶과 물질적인 이데올로기 국가 장치들 사이의 관계를 문제 삼고 그것을 개조하고 변혁하는 것을 과제로 제시하며, 그것도 인민 대중들 자신의 과제로 제시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정치가 요구되는 상황은 극단적 폭력의 일반화와 더불어 세계적인 “예방적 반(反)혁명 내지 반봉기”(이 책, 224쪽)가 추구되는 상황이기 때문에, 실질적인 반폭력의 정치가 어떻게 가능할지 사고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이러한 예방적 반혁명 내지 반봉기에 맞서 혁명적 대항 폭력을 추구하려는 유혹이 생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발리바르는 이러한 해법에 대해 명시적으로 반대한다. “예방적인 반혁명에 대해 대칭적으로 혁명을 대립시켜야 하는 게 아닐까요? 반봉기에 대해서는 봉기를 대립시켜야 하는 게 아닐까요? 한편으로 본다면 바로 이런 논리야말로 20세기를 [...] ‘극단의 시대’로 만들어 왔습니다. 분명히 문제가 되는 것은, 자기 자신의 내적인 ‘척도’조차 초과했던 또는 모든 대항 권력을 파괴했던 사회적 지배 구조들과 권력관계들을 변혁하는 것이지만, 저는 앞의 질문에 대해 부정적으로 답변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아니 오히려 질문 자체를 전위시키고 복잡화해야 한다고 믿습니다.”(이 책, 246쪽)

이러한 관점에서 발리바르는 원칙적으로 두 가지 정치의 결합의 필요성을 지적하고 있다. 하나는 모든 헌정에 내재적인 구성적 봉기의 역량을 복원하고 확장하려는 운동으로서 시민권의 정치이며, 다른 하나는 정치 공동체의 자기 비판으로서 시빌리테의 정치다.

발리바르가 시민권의 정치를 강조하는 것은 모든 정치가 그것으로 환원 가능하다거나 또는 모든 해방 운동이 시민권의 복원과 확장으로 귀결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볼 때 시민권의 정치가 “훨씬 더 직접적으로 우리의 능력 범위 안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적인 세계화 속에서 시민들의 정치 역량 자체가 축소되고 급진적으로 제거되어 가는 상황에서 일차적인 정치적 과제는 권력(정치 권력이든 시장 권력이든)을 통제하고 시민들의 이해 관계를 실질적으로 대표하는 일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시민권의 중요성은, 앞에서 말했듯이 근대적 시민권이 내포적으로 보편적인 권리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이때의 내포적 보편성은 한편으로는 정치에는 초월적(신 같은)이거나 자연적인 토대(민족이나 종족 같은)가 존재하지 않으며, 정치는 시민들이 서로서로에게 호혜적으로 권리들을 부여하고 확장하는 일임을 뜻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의 주체로서 시민들이 정의상 국적이나 종교, 성별, 인종 등에 구애받지 않는 보편적인 존재자이기 때문에, 시민권의 정치는 특히 국적 여부에 따라 시민권을 한정하는 근대 국민국가의 근본 경향(발리바르는 이를 시민권=국적이라는 등식으로 표현한다)에 맞서 반(反)차별과 반배제 투쟁을 수행하는 정치임을 뜻한다. 따라서 발리바르가 말하는 시민권의 정치란 “‘인간적인 것’이 실현되는 유일한 형식으로서 시민들의 공동체”를 실현하려는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시빌리테의 정치란 이러한 정치 공동체를 실체화하려는 위험, 곧 이러저러한 실체적 토대 위에 정치 공동체를 구성하려는 시도에 맞서 공동체를 비실체화하려는 정치를 의미한다. 발리바르는 네덜란드의 정치철학자인 헤르만 판 휜스테렌을 따라 이러한 공동체를 “운명 공동체”(community of fate)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운명 공동체란 보통의 용법과 달리 “함께 살아가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서로 간의 상호의존 관계를 폐지할 수 없는 집단들이 서로 만나게 되는 현실의 공동체”(이 책, 248쪽)를 가리킨다. 이런 공동체에서는 원주민(가령 한국인)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닌,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시민적 동일성/정체성을, 적어도 상징적으로라도 재검토해 보아야 하며, 다른 모든 이들 ― 곧 어디 출신이든, 선조가 누구든, “적법성”이 어떻든 간에 오늘날 지구의 한쪽에서 동일한 “운명”을 공유하고 있는 이들 ― 과 함께 그런 정체성을 현재 시점에서 재구성해야”(이 책 258-59쪽) 한다. 따라서 운명 공동체는 매우 급진적인 다원적 정치 공동체가 될 수밖에 없으며, 그것이 구현하는 시민권은 역시 판 휜스테렌의 표현을 빌리면 “미완의 시민권”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관점은 폭력의 비판의 문제에 관한 완전한 답변이 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우리가 폭력 안에서 폭력에 맞서는 반폭력의 정치를 구체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는 점에서는 오늘날 폭력의 비판을 위한 탁월한 준거 중 하나로 간주할 수 있다.

 

6. 변경으로서의 유럽

 

마지막으로 국경의 문제를 빼놓을 수 없다. 국경 또는 경계의 문제는 이미 1992년 저작인 󰡔민주주의의 경계들󰡕에서부터 발리바르 작업의 주요 주제로 등장했지만, 이 책 및 후속 작업들에서는 더욱더 중요한 주제로 부각된다. 발리바르는 이 책 여러 곳에서 국경/경계를 “민주주의의 반민주적 조건”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우선 국경/경계가 정치 공동체, 특히 근대 국가의 헤게모니적인 형태인 국민 국가가 성립하고 존속하기 위한 본질적인 조건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국경/경계의 설정을 통해 국민적 동일성이 물질적으로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경/경계는 자신과 타자, 국민과 비국민을 구별하기 위한 본질적인 조건이며, 따라서 국민적 경계 바깥으로 외국인들을 배척하고 더 나아가 국민 성원들 중 일부를 외국인들로 표상하여 억압하고 배제하기 위한 제도다. 이런 의미에서 국경/경계는 탁월한 배제의 제도라고 할 수 있다.

세계화의 진전에 따라 본격화된 국민 국가의 위기는 국경/경계의 약화를 낳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를 상상적으로 강화하기도 한다. 초국적 자본의 힘에 의해 국민 국가의 경제 및 사회 질서가 좌우되고 미국을 비롯한 초강대국의 군사적ㆍ정치적 힘에 약소 국민 국가들의 흥망이 달려 있는 상황에서 인민 대중은 심각한 정체성 위협을 느끼며, 이러한 공포 내지 외상을 상상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수단을 찾는다. 이 때문에 극우 정당들이 조장하는 극단적 민족주의가 쉽게 먹혀들게 되며, 특히 사회의 가장 아래쪽에 위치한 개인들 및 집단들에게 더욱 더 쉽게 수용된다. 이들은 사회권 축소(곧 실업 수당 삭감, 복지 예산 축소 등과 같은)의 직접적인 피해자이며, 이러한 피해의 원인이 이주 노동자를 비롯한 외국인들에 있다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전반적인 포퓰리즘의 확산 속에서 이러한 대중적인 민족주의 및 인종주의는 국가 정책이 점점 더 제도적 인종주의를 구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이것은 다시 국민과 외국인의 차별 및 배제 경향을 강화하게 되며, 유럽적인 수준에서(또는 더 나아가 지구 전체의 수준에서) 아파르트헤이트의 경계를 구축하는 결과를 낳는다.

더 나아가 발리바르는 오늘날 국경/경계는 더 이상 국가의 지리적 한계, 곧 국가와 국가가 지리적으로 맞닿은 지점에만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국민 국가의 중심으로 이동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경제 영역과 문화 영역에서 사적인 관계들 및 사회적 관계들이 점점 더 관국민적이고 관국경적인 차원에서 전개되는 반면, 대부분의 공적 제도는 여전히 국민 국가의 틀을 유지하는 데서 생겨나는 결과다. 이에 따라 세계화된 거대 도시들의 근교에서 다양한 인종들 간의 종족적인 경계들이 재생산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또한 아감벤 같은 사람이 특히 주목했던 것처럼 주요 국제 공항에서 볼 수 있는 구류 지대 및 검색 체계가 탁월한 예외 상태, 곧 개인의 자유를 비롯한 권리들이 정지되는 장소가 되는 현상도 생겨난다.

이러한 경향에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까? 발리바르의 답변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장기적인 제도적 창조의 과제로, 인민과 주권, 시민권과 공동체 사이의 관계를 근원적으로 개조하는 것이다. 그것은 국경/경계가 영토와 인구, 주권 사이의 관계가 물질적ㆍ제도적으로 집약되어 있는 상징적 장소이며, 따라서 세계화가 강화하고 있는 국경/경계의 모순과 갈등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민 국가의 틀에 대한 변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고대 도시 국가에서 제국으로, 또한 제국에서 국민 국가로 이행하는 과정과 비견될 만한 것이기 때문에 장기적이고 갈등적인 과정이 될 수밖에 없다. 발리바르가 그 제도적 창안의 실마리 중 하나로 제시하는 것은 소속의 시민권을 거주의 시민권 내지 “이산적 시민권diasporic citizenship”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전자가 혈통이나 언어, 문화, 국적 등과 같은 공통적인 기원과 소속을 중심으로 시민권을 사고하고 제도화하는 방식이라면, 후자는 출신의 차별 없이 외국인들에게도 정치체에 대한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는 발리바르가 이 책에서 주목하고 있는 판 휜스테렌의 운명 공동체 및 미완의 시민권 개념과 공명하는 관점이다.

다른 하나의 대응 방안은 “국경/경계의 민주화”에서 찾을 수 있다. 발리바르는 특히 국경/경계의 강화 경향에 맞서기 위한 정치의 방향을 여기에서 찾고 있다. 이것은 국경의 무조건적인 철폐라는 무정부주의적 주장(이것의 다른 표현은 세계시민주의 내지 이른바 “유목주의”다)과 분명하게 구별되어야 하는 테제다. 국경의 무조건적인 철폐는 오히려 “경제적 세력들의 야만적인 경쟁에 좌우되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이 책, 224쪽)을 불러올 수 있다. 이러한 섣부른 해법 대신 발리바르는 “국경에 대한 표상을 탈신성화하고 국가와 행정 기관이 개인들에 대하여 국경을 활용하는 방식을 쌍무적인 통제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국경의 민주화를 가능한 현실적인 해법으로 제시한다. 이 두 가지 대응 방안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것으로, 발리바르가 세계화와 유럽 구성의 정세 속에서 제시하는 기본적인 정치적 해법, 곧 모든 차원에서 시민권의 민주주의적 실천을 강화하고 정세적 요구에 부응하여 그러한 실천을 새로운 보편적 시민권의 창안으로 이끌어가는 해법의 한 가지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국경/경계 일반의 문제와 더불어 발리바르는 유럽 건설의 쟁점과 관련하여 “사라지는 매개물 유럽” 내지 “경계의 헌정 유럽”, 또는 “변경으로서의 유럽”이라는 테제를 제시한다. 유럽에 관한 발리바르의 생각을 집약적으로 표현해주는 이 테제들은 우선 유럽에 관한 자유주의적 관점 내지 더 나아가 패권주의적 관점에 대한 비판을 함축한다. 발리바르가 이 책을 비롯해서 여러 곳에서 지적하듯이 유럽 공동체는 냉전 시기에 동구 사회주의 진영과의 이데올로기적 대립의 관점에서 구상되고 구현되어 왔으며,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 이후에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미국 및 동아시아(일본, 중국)와 맞설 수 있는 초강대국의 구성이라는 관점에서 추구되어 왔다. 더욱이 네그리 같은 좌파 이론가들마저도 미국의 유일한 패권에 맞설 수 있는 대안은 유럽뿐이라는 구실 아래 이러한 구도에 동조하곤 한다.

하지만 발리바르는 유럽이 진정으로 미국의 패권주의에 맞서고, 그것에 대한 진정한 대안이 되기 위해서는 슈미트주의적인 발상에 따라 자신을 새로운 열강으로 구성하려고 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사라지는 매개물 내지 경계의 헌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발리바르의 주장은 몇 가지 논점을 함축한다.

우선 발리바르는 유럽은 공통의 문화, 전통, 소속 등(곧 발리바르가 말하는 “허구적 종족성”)에 기반을 둔 응집력 있는 동일성을 지닌 공동체라기보다는 전통적으로 다양한 경계들(터키와 근동 지역을 통해 접해 있는 서양과 동양, 지중해와 접해 있는 기독교 문명과 아랍 문명, 아프리카와 대서양을 사이에 둔 미국과 유럽 등)이 중첩되어온 곳이라는 점을 부각시킨다. 따라서 유럽 문명의 일관성과 발전의 동력을 형성해온 것은 이러한 경계들을 통한 문명들 간의 마주침과 교류, 갈등이었으며, 새로운 유럽의 건설 역시 가공의 동일성과 통합을 추구하기보다는 이러한 경계들의 중첩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또한 발리바르는 이라크 전쟁 참전 여부를 두고 불거진 유럽과 미국의 갈등 와중에서 유럽의 군사적ㆍ정치적 통일성의 추구를 비난하는 미국의 보수적 논객들에 대한 올바른 대응은 “힘의 정치politique de la puissance”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힘을 덜어내는 정치politique de la im-puissance”에 있다고 주장한다. 힘을 덜어내는 정치란, 새로운 강대국 유럽을 건설하려는 대신 기존의 강대국들(미국, 동아시아, 유럽 등) 사이의 세력 관계를 와해시키거나 변형시키는 데 초점을 두는 정치를 뜻한다. 발리바르는 복잡하고 미묘한 국제 정세 및 조건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힘을 강제하려는 것보다는 이러한 정치야말로 좀더 현실주의적이고 좀더 효과적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유럽이 유일한 초강대국 내지 제국으로서의 미국에 대한 진정한 정치적 대안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본질적인 동일성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사라지는 매개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의 사라지는 매개는 “과거의 지평 및 어휘를 통해, 그리고 극복되어야 할 제도 자체로부터 물려받은 요소들을 재배치함으로써 새로운 사회와 문명의 패턴을 위한 조건들을 창출하는 이행적 제도”를 가리킨다. 이러한 이행적 제도는 “자기 자신의 소멸 및 폐절의 조건들을 창출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라지는” 매개가 없이는 과거의 사회로부터 새로운 사회로의 어떠한 이행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이 6가지의 주제 이외에도 이 책에는 다수의 중요한 주제 및 문제, 개념들이 제시되고 시험되고 있다. 가령 관국민적 시민권의 형성을 위한 문화적 조건으로서 번역의 문제나 전면에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공산주의와 시민권의 관계, 전쟁과 정치의 관계, 생명 정치, 세속주의 같은 것들이 그러하다. 이러한 주제들은 최근 발리바르의 여러 저작에서 독립적인 주제들로 다뤄지면서 훨씬 구체화되고 있다. 그밖에도 각자의 관심에 따라 독자들은 이 책에서 역자가 간략하게 소개한 것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풍부한 시사점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옮긴이가 보기에 발리바르의 이 책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국내 독자들에게 당혹스러운 책이 될 것 같다. 우선 이 책은 좌파 지식인들, 특히 지난 20여 년 동안 그의 작업에 준거하고 이런저런 형태로 그를 원용했던 이들에게 불편한 책이 될 것 같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들에게 발리바르는 마르크스주의자, 곧 자본주의 분석을 위한 탁월한 지침이자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이론가인데 반해, 이 책에는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을 거의 찾아보기 어렵고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한 논의는 전혀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를 변절자로 비난하거나(발리바르는 이제 사민주의자가 되었다, 자유주의자가 되었다는 식의 대담한, 하지만 그만큼 우둔한 판단을 논거로 하여) 그의 새로운 저작을 (최대한) 무시하고 과거 저작, 특히 프롤레타리아 독재 및 공산주의에 관한 논의만을 선별적으로 수용하려는 태도가 심심치 않게 나타나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일이다(그런데 시민권 및 민주주의의 문제와 분리된 공산주의라는 주제가 발리바르 정치철학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

다른 한편으로 이런저런 형태의 사회 민주주의나 심지어 자유주의의 옹호자들에게도 이 책은 당혹감을 안겨줄 것 같다. 그것은 이 뜻밖의 선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라는 고민으로 표현되는 당혹감일 것이다. 그들 대부분에게 발리바르는 과거는 어쨌든 간에 이제는 더 이상 무관한 인물이 되었는데, 뜻밖에도 이 책에서 자신들의 입장과 아주 유사한 논의(시민권, 민주주의, 인권, 국민 국가, 민족주의 등)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으로 그가 이런저런 유형의 사회 민주주의적 개혁론을 정당화하기 위한 논거들로 자주 활용되리라는 것 역시 쉽게 예상해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선물 속에 담겨 있는 공산주의 내지 봉기, 변혁이라는 독(毒)(데리다는 모든 선물은 독이라고 하지 않았던가?)이 그들을 계속 당혹스럽게 만들 것이라는 점 역시 충분히 예견할 수 있다.

또한 얼마나 많은 이들이 될지 예단할 수는 없지만, 교조적인 마르크스주의와 무관하게 여전히 그의 저작에서 가치 있는 이론적 탐구와 실천적 지침을 발견하려는 이들에게도 이 책은 또 다른 의미의 당혹감을 안겨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은 앞서 말한 대로 이 책이 공산주의와 시민권 또는 민주주의와 시민권 또는 봉기와 헌정의 이율배반적인 관계(민주주의가 적어도 공산주의의 한 측면이고 역으로 공산주의는 민주주의의 근본적인 한 형태라고 생각한다면)를 어떻게 사고할 것인가라는 지극히 어려운 과제를 현대 정치철학의 화두 중 하나로 제기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역자에게도 이 책은 처음 접할 때부터 아주 당혹스러운 책이었다는 점을 고백해두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당혹감은 역자가 이 책에 대해, 또는 발리바르의 정치 철학에 대해 느끼는 경탄의 이면이다. 내가 보기에, 국내에 소개된 프랑스 및 유럽의 많은 철학자들과 비교해보았을 때 발리바르의 이론적 작업이 지니는 강점은 우선, 해방의 정치의 이념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단일한 원리로 환원하거나 축소하지 않고 다양화한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점은 그가 정치를 하나의 개념이 아니라 세 개의 개념, 곧 “해방”, “변혁”, “시빌리테”로 확장하고 복잡화한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역사적 공산주의가 몰락한 이후에도 여전히 해방의 이념, 더 나아가 공산주의의 이념을 고수하는 이론가들은 꽤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가령 프랑스의 알랭 바디우나 슬로베니아 출신의 슬라보예 지젝 또는 약간 다른 경향을 띠고 있지만 자크 랑시에르나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같은 사람들이 한 예가 될 수 있다. 이들 사이에는 이론적으로 중요한 차이가 존재하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발리바르의 이론적 작업과 비교해본다면 매우 단조로운 정치 개념을 고수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바디우나 지젝 또는 어떤 의미에서는 랑시에르는 줄곧 해방의 정치와 국가 정치 또는 민주주의와 치안 사이의 대립을 내세우며, 진정한 정치는 해방의 정치(또는 공산주의)나 민주주의에 있다고 주장한다. 반대로 네그리와 하트는 이러한 의미의 해방의 정치보다는 변혁의 정치를 추구하며, 현대 자본주의의 발전 속에서 새로운 변혁의 주체로서 다중의 객관적 기초를 발견하려고 한다.

발리바르와 이들의 정치 철학 사이의 핵심적인 차이는 폭력의 문제에 관한 태도에서 찾을 수 있다. 이들 모두에게 폭력의 문제는 새로운 정치 개념을 요구하거나 기존의 해방의 정치 이념의 개조를 낳지 않는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이론적 쟁점이 되지 못한다. 폭력의 문제는 지배 계급이나 권력의 폭력성을 확인하거나 해방 운동의 정당성을 부각하는 계기가 될 뿐이며, 아니면 인권의 옹호로 귀착되는 “사소한” 문제 중 하나로 치부되곤 한다. 이들과 반대로 폭력의 문제, 반폭력의 정치의 문제를 발리바르가 자신의 이론적 작업의 중심에 놓는다면, 그것은 정치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조건들에 관한 문제로서의 폭력의 문제를 사고하지 않고서는 정치에 관한 논의는 사변적인 탁상공론에 그치거나 아니면 맹목적 독단론(정치=공산주의=민주주의=봉기 ...)과 공허한 주의주의(인민 대중이여 결단하라) 사이에서 동요할 수밖에 없다는 절박한 문제 의식 때문이다. 사실 오늘날 극단적 폭력의 분출을 통해 정치적 활동만이 아니라 인간적 영역의 경계 자체가 와해될 위험에 처해 있다면, 폭력의 문제에 관한 분석과 사고 없이 어떠한 해방 운동과 변혁 운동이 가능할 수 있는지, 민주주의의 보존과 확장을 위한 새로운 출발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따라서 그가 이러한 복합적인 정치 이론을 구축하게 된 것은 “정세conjuncture”에 대한 면밀한 주의력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발리바르는 이른바 구조적 마르크스주의의 후예이지만(또는 어떤 의미에서는 바로 그 때문에), 1980년대 이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정세에 대한 분석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정세에 기초하여 이론적 작업을 수행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해 왔다. 이것은 그가 더 이상 “과학적” 마르크스주의 내지 “과학적” 사회 이론을 추구하지 않음을 뜻한다. 다시 말해 발리바르는 어떤 공리계(이것은 생산 양식의 모순 내지 이른바 이윤율 법칙이거나 평등 원리일 수도 있고 아니면 제국과 다중의 대립이거나 공산주의적 상수 또는 주권의 구조일 수도 있다)에 입각하여 정치 이론을 연역하고 또 그것에 기반하여 정세를 환원적으로 평가하는 대신, 자본주의 및 국민 국가의 구조를 예측 불가능한 방향으로 전개시키는 각각의 정세를 바탕으로 추측과 가설에 따라 이론적 작업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책 전체에 걸쳐 세계화와 유럽 건설, 국민 국가의 위기, 중심부와 주변부의 갈등, 이민법을 둘러싼 갈등, 주변부에서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는 새로운 폭력의 경제 등에 관한 세심한 정세 분석이 이론적 논의의 출발점이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국내에 널리 소개돼 있는 현대 정치철학자들, 특히 유럽의 정치철학자들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발리바르가 국민 형태 및 국민 국가, 민족주의 및 인종주의, 시민권 등에 관한 체계적 분석을 오랫동안 수행해왔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반면 이 주제에 관한 현대 유럽 정치철학자들의 무관심은 실로 놀랄 만한 수준이다. 그들이 탈식민주의나 유럽 중심주의 문제에 관해 둔감한 이유는 여기에서 유래하는 것 같다). 현재 정치 제도들과 해방 운동이 동시에 직면한 위기에 대한 분석을 위해서는 이러한 제도들의 구조와 역사에 대한 면밀한 탐구가 필요하며, 역으로 그것들에 대한 가능한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조건들에 대한 주의 깊은 분석과 진단이 요구되는데, 국민 국가, 민족주의/인종주의, 시민권 등이야말로 이러한 탐구를 위해 다루지 않을 수 없는 중심 대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을 비롯한 발리바르의 여러 저작들은 구체적인 정치적 쟁점들에 대해 고민하고 구조적ㆍ제도적 억압과 폭력에 맞서기 위한 지침들을 모색하는 사람들, 우리의 조건들 및 문제들에서 출발하여 이론적 쟁점들을 사고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다른 어떤 정치철학자들의 작업보다 생생하고 귀중한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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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는 방법에 관해서도 한 마디 지적해두고 싶다. 이 책은, 발리바르의 다른 책들이 그렇듯이 이런저런 기회에 발표했던 글들을 묶은 일종의 논문 모음집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아무런 내적인 짜임새를 갖추지 못한 것은 아니다. 이 책의 구성에서 보듯이 발리바르는 꽤 엄밀한 논리적 구조에 따라 이 글들을 배치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의도에 따를 경우 이 책을 읽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서문에서부터 차례로 1부, 2부, 3부의 순서대로 읽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리적 순서를 따라 책을 읽을 경우 독자들, 특히 그의 작업에 대한 이해나 배경 지식이 없는 독자들은 상당히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발리바르의 최근 논의를 많이 접해 보지 못한 독자들은 오히려 시간 순서상으로 글을 읽는 편이 더 나을 수 있다. 이런 순서에 따른다면 「서막」 다음에 먼저 읽어야 할 글은 9장 「유럽에는 아무런 국가도 존재하지 않는다」와 5장 「공산주의 이후의 유럽」이다. 이 두 글은 발리바르가 1990년대 이후 민주주의와 시민권, 국민 사회 국가, 이주, 인종주의, 경계/국경, 주권 같은 주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게 된 배경을 이해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이후에 전개되는 발리바르 논의의 맹아들을 다수 포함하고 있다.

이 두 글을 읽은 뒤에는 원래의 논리적 순서에 따라 책을 읽어도 되지만, 한 번 더 권장한다면, 9장과 5장 다음에는 3, 4장을 함께 읽는 것이 발리바르의 전체 논의를 따라가는 데 도움이 많이 된다. 3장은 1990년대 프랑스 정치에서 가장 뜨거운 쟁점 중 하나였던 이민법 개정을 둘러싼 논쟁을 제시하면서 그것이 제기하는 이론적ㆍ실천적 쟁점들을 분석하기 때문에, 다른 장에서 전개되는 좀더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논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4장의 경우는 1989년 발표한 「인권과 시민권: 평등과 자유의 근대적 변증법」의 논의를 이어받아 국민 사회 국가의 모순을 외연적 보편성과 내포적 보편성의 변증법적 전개 과정으로 해명하면서 그것이 장-뤽 낭시와 자크 랑시에르 같은 철학자들이 제기하는 민주주의와 정치 공동체, 시민권 등의 문제들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해명하고 있다. 따라서 이 글은 1-2장에서 논의되는 국민 형태 및 (국민적) 동일성 개념이나 6장에서 분석되는 경계/국경 개념, 7장에서 다루는 범세계적인 폭력의 경제와 반폭력의 정치의 문제, 8장과 10장에서 논의되는 근대 시민권 헌정 및 사회적 시민권 이론, 11장의 주권 개념에 대한 계보학적 분석, 12장의 사회적 시민권에 대한 탐구 등을 따라 가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발리바르의 논의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은 한 번 시도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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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무엇보다도 지난 2년여 동안 “세미나 네트워크 새움”에서 함께 이 책을 읽고 토론하면서 책의 내용과 번역 등에 대해 여러 가지로 비판과 조언을 아끼지 않은 동학과 후배들의 노력의 결실이다. 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책을 번역하는 것은 고사하고 제대로 이해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번역 제안을 흔쾌히 받아주고 게다가 이 책의 번역과 관련된 세미나 비용을 지원해준 후마니타스 출판사에도 깊이 감사를 드린다. 특히 번역이 끝없이 지연되고 수십 번 마감 기한을 어겼지만 묵묵히 지켜보면서 격려해준 안중철 편집장님의 후의와 배려가 없었다면 번역을 마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 번 깊은 감사와 사과의 말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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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12 23: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10-04-14 07:22   좋아요 0 | URL
ㅎㅎ 그래 드디어 나오게 되는구나. :)

청년도반 2010-04-13 0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또 하나의 인고의 결실이 세상에 나오는군요. 이래저래 정신이 없어서 그간 제대로 인사도 못드렸는데, 정말 고생 많으셨고 출간 미리 축하드립니다.

선배님 말씀대로, 이 책이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그리고 "정치"를 고민하는 토론의 본격적인 출발점이 되어 "현재 많이 위축되어 있는 국내의 좌파 정치를 재개하는" 기폭제가 되기를 함께 소망해 봅니다.

balmas 2010-04-14 07:21   좋아요 0 | URL
ㅎㅎ 인고의 결실까지야.^^ 그나저나 바쁜가보다, 통 얼굴을 볼 수 없으니.

2010-04-16 0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우물 안 개구리 2010-04-14 1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자는 발리바르인데 어째서 자꾸 미셸 푸코가 연상되는 걸까요? 푸코가 좀 더 오래 살았다면 훨씬 흥미진진했을 거 같습니다. 발리바르는 푸코가 아니지만 그가 다루는 주제는 푸코가 다루어도 이상하지 않아 보입니다. 그런데 "```예측 불가능한 방향으로 전개시키는 각각의 정세를 바탕으로 추측과 가설에 따라 이론적 작업을 수행해야 한다"는 주장이 맞다면 발리바르의 글들을 안 읽어도 되는 거 아닌가요? 정세가 변하면 발리바르의 이론들도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고 보는데요. 어쨌든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책이니 읽을 겁니다.

제가 현재 동의하는 주장은 국가는 개념이라는 겁니다. 스피노자가 "개란 개념은 짖지 않는다" 하고 말했듯이 국가도 짖지않는 "개"라고 봅니다. 국가가 어떤 것을 요구한다는 것은 행정부, 사법부, 국회, 학교, 경찰, 군대, 종교 기타 등등의 제도를 장악한 사회집단이 다양한 차이를 가진 사람들을 "國民"이나 "民族"으로 呼名하면서 그들을 支配한다는 의미라는 거죠. 그 제도나 기구가 이미 지배를 행사하는 것들이며 행정부나 사법부는 평상시에는 수많은 사람들을 "국민"이나 "민족" 또는 "市民"이라고 부릅니다.그러다가 그렇게 불리는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들이 행정부의 정책에 반대한다거나 방해하는 경우처럼 그 제도나 기구를 장악한 지배집단의 생각과 맞지 않으면 언제든지 "국민"이나 "시민"에서 排除한다는 겁니다. 따라서 '국력을 신장해야 한다'는 의미는 그러한 제도나 기구 또는 그것을 지배하는 사회집단의 힘을 강화시키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위의 얘기가 현재 제 머리를 지배하는 생각입니다. 발리바르의 글을 읽고 제 생각이 교정되거나 변화할 수 있을지 궁금하군요. 이 책도 소프트커버로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balmas 2010-04-15 13:43   좋아요 0 | URL
ㅎㅎ 소프트커버로 내느냐 마느냐 하는 건 출판사에서 결정할 문제니까 제가 확답을 드리긴 어렵겠네요. 그런데 후마니타스 출판사에서는 대개 소프트커버로 책이 나오니까 이 책도 그렇게 나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물 안 개구리 님 주장에 대해서는 특별히 드릴 말씀이 없네요. 책이 나오면 한번 읽어보시고 각자 더 생각해보기로 하시죠.

... 2010-04-15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정말 읽어볼만 하겠군요. 발리바르도 고등사범이라니, 정말 세상은 고등사범을 중심으로 도는가 봅니다(?) 군대 가기 전에나 나왔으면 좋겠네요...
그나저나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에 출근하시는거라면, 지나가다 본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데리다가 <법의 힘>에서 말하는 '해체불가능한 정의론'에 대해 발리바르는 어떤 입장을 취하나요? 데리다가 해낸 논증의 강력함에 비해, 정치적으로는 너무도 많은 문제가 가능할 것 같아서-심지어 한 미국인 교수는 데리다를 하이데거식 오류가 항상 가능한 위험한 사람으로 묘사하더군요-질문드립니다.

balmas 2010-04-15 13:46   좋아요 0 | URL
"해체 불가능한 것"은 발리바르 식으로 말하면 "이상적 보편성"이죠. 가령 "평등-자유 명제" 같은 것이 대표적인 해체 불가능한 것이 되겠죠. 정치적으로 문제가 많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네요. 그 미국인 교수가 누군지는 잘 모르겠지만, 데리다에 관한 최근의 논의나 유럽 정치철학의 최근 흐름에 대해서는 아주 무지한 사람인가 봅니다. 그런 사람들 이야기에 일일이 대꾸할 만한 가치도 없지만, 질문하신 님 자신이 문제가 많다고 하셨으니 어떤 문제가 있는지 한번 들어보고 싶네요.

류우 2010-04-15 0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들르네요^^
요즘 논문 쓰는 것때문에 "복지국가"라는 용어보다는 "국민-사회국가"라는 용어에 대해서 알고 싶었는데
때마침 타이밍이 좋게 나오니 좋네요^^;

오랫동안 번역해오신 작업을 드디어 마치실 수 있게 된 것을 축하드립니다^^

balmas 2010-04-15 13:37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요즘 논문 쓰시는군요. 이 번역본이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류우 2010-04-18 0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쓰고 있다기 보다는 자료를 모으고 있는 단계라서 언제 쓸지는 모르겠네요^^;
역사학과라는 특성상 시간이 많이 필요하고 자료를 모은다고 글을 쓸 수 있는게 아니라
그림을 그리고 색칠도 해야하고 그렸다가 다시 수정하고 해야하니 말이죠.

이 번역본이 정말 도움이 되면 좀 더 그림을 그리는데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하는 막연한 기대만 하고 있지만
알튀세르-발리바르에 대한 개인적 관심때문에라도 일단은 기대하고 있습니다^-^
 

프리즘 총서의 두번째 책으로 피에르 마슈레의 [헤겔 또는 스피노자]가 출간됐습니다.  

 지난 2004년에 이제이북스에서 초판이 나온 뒤, 몇 년 간 절판됐다가 이번에 

  그린비 출판사에서 2판이 나왔습니다. 2판을 내면서 초판에 담긴 몇 가지  

  인쇄상의 오류와 용어 및 인명 표기의 잘못 등을 바로 잡고 문장 표현들도  

  여러 곳 바꾸었습니다. 하지만 초판에서 크게 달라진 점은 없기 때문에  

  초판을 읽고 논의하고 인용하셔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2판을 내기 위해서 애써준 그린비 출판사 여러분들, 특히 편집부의  

   김재훈 씨에게 깊이 감사드리고 싶네요.^^ 아주 꼼꼼하게 교정을 봐줘서 

   초판의 잘못들을 바로 잡는 데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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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 안 개구리 2010-04-07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드디어 나왔군요. 올해 몇 권(수정판을 포함해서) 정도 출간되는지 궁금하군요.

balmas 2010-04-08 03:01   좋아요 0 | URL
글쎄요, 한 10여권 정도는 낼 생각인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 2010-04-09 15:14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제 주머니가 가벼워지겠군요. 언젠가는 목침으로 사용 가능한 발마스 님의 두툼한 논문모음집이나 "스피노자 읽기(가제)" 같은 저작이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balmas 2010-04-12 21:21   좋아요 0 | URL
ㅎㅎ 예 그렇지 않아도 목침만한 책을 하나 준비중입니다.^^

... 2010-04-07 1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별 관련없는 질문인데... 논문들은 어떤 학술지에 주로 제출하시나요? 발마스 님 같은 분들이 올리는 학술지라면 꼭 읽어보고 싶은데요...

balmas 2010-04-08 03:06   좋아요 0 | URL
예, 지금까지 많이 낸 학술지는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에서 내는 [철학사상](3편), 서양근대철학회에서 내는 [근대철학](3편)이고, 그밖에 박종철출판사에서 낸 [트랜스토리아]나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에서 내는 [민족문화연구], 서울대 인문학연구원에서 내는 [인문논총], 서강대학교 철학연구소에서 내는 [철학논집], [세계의 문학], [문학과 사회], [사회비평], [현대비평과이론] 같은 곳에도 글을 실은 적이 있습니다. 이 학술지나 계간지들 중 상당수는 각 대학도서관 홈페이지에 있는 DBPIA나 한국학술정보 같은 데이터베이스에서 검색해보실 수 있고, 아니면 [민족문화연구]나 [인문논총] 같은 경우는 해당 홈페이지에서 파일을 내려받을 수 있습니다.
서재 카테고리 중에 "단상들"을 살펴보시면 제가 지금까지 발표한 글들을 올려놓았고, 거기에 출처를 표시해놓았으니까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EGEL 2012-11-16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프랑스 革命이 流血과 恐怖로 흐른 것은 個人의 自由가 國家를 무너뜨릴 만큼 지나치게 肥大해진 탓이라고 본 헤겔은 <法哲學>에서 立憲 君主制를 擁護하고 選擧制에 의한 上`下 議院의 設置와 民間 官僚에 의한 行政府를 主張했다.

balmas 님은 21世紀의 헤겔이 되려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