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balmas님의 "관계론, 대중들, 민주주의-에티엔 발리바르의 스피노자론"

답변이 너무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사실 질문들이 상당히 좋고 근본적인 쟁점들에 관한 것이어서, 답글로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제가 사실은 "스피노자와 푸코에서 통치의 문제"라는 논문을 한편 쓰고 있는 중인데, 그 논문에 제기하신 질문 중 일부에 대한 답변이 담길 것 같습니다.  

첫번째 질문의 경우가 그런데요, 적대와 갈등을 환원 불가능한 정치의 요소로 사고한다는 것이 장점이 될 수 있느냐라고 질문하셨습니다. 더욱이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에서는 전쟁으로서의 정치의 문제가 "반동 귀족"인 불랭빌리에와 관련되어 있는데, 어떻게 그것이 장점이 될 수 있느냐고 반문하셨죠. 이 질문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세 가지 답변만 드릴게요.  

(1) 적대와 갈등을 환원 불가능한 정치의 요소로 본다는 것은, 보기에 따라서는 장점이 될 수도 있고 단점이 될 수도 있겠죠. 그런데 글의 맥락에서 제가 이 점을 장점이라고 본 이유는, 바로 이러한 관점 때문에 스피노자의 정치학이 근대 사회계약론의 맹목을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회계약론이 정치의 궁극적인 지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당연히 장점이 될 수 없겠지만, 그것이 지닌 한계 내지 이데올로기적 측면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에게는 장점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이것은 사회계약론 전체를 파괴한다거나 배척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2) 불랭빌리에에 관한 쟁점인데요, 불랭빌리에는 사실 스피노자주의자였습니다. 프랑스어로 스피노자 저작을 번역하기도 했죠. 이런 점에서 본다면 그를 단순히 "반동 귀족"이라고 보는 건 좀 성급할 수 있습니다.  

(3) 스피노자와 푸코의 사상을 전쟁으로서의 정치학, 또는 정치를 갈등과 적대로 보는 두 가지 관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 만큼 양자 사이에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지만 또 상당한 차이점도 있죠. 두 사람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밝히는 문제는 현대 정치 이론의 쟁점들을 해명하는 데도 꽤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두번째 질문은, 민주화로서의 스피노자주의가 현재의 상황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질문하셨죠. 그건 한 마디로 답변드리기는 어려운 문제입니다. 다만 제가 질문을 잘 이해했다면, 질문의 핵심 논점은 국가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의 문제와 결부돼 있는 것 같습니다. 곧 국가는 기본적으로 지배의 도구로서 국가장치인가 아니면 국가는 시민들의 자기-통치 제도인가와 관련된 문제죠. 원칙적으로는 두 가지 측면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텐데요, 마르크스주의와 자유주의가 공유하고 있는 점은 국가를 지배의 도구로 이해한다는 점입니다. 스피노자가 의미가 있다면 국가의 양면성, 따라서 해방 또는 민주주의의 양면성을 잘 이해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마지막으로 번역에 관한 질문을 하셨는데, 그건 오역이라고 하기는 어렵지 않은가요? 왜 그걸 오역이라고 느끼셨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스피노자의 사상"이 아니라 "스피노자"라고 해서 그렇게 생각하신 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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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3-03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음... 제가 아직 학부생인지라 표현력이 많이 떨어집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정확히 질문드리고 싶었던 것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에서는 큰 두가지 방법, 법-철학적 접근과 역사-정치적 접근 두 가지가 그려졌었죠. 하지만 사실 제가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에서 굉장히 의아하게 느꼈던 것은 푸코가 역사-정치적 접근을 '찬양한다'고 말한 부분이었습니다. 그러한 전쟁으로서의 정치가 푸코는 결코 긍정적으로 보지 않았던 불랭빌리에와 인종주의라는 최악의 결과물을 낳을 수 있는데도 그것이 찬양된다고 한 부분이지요. 오히려 제 의문은 푸코가 서술한 이 두가지 방법 외에 다른 어떤 길을 모색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최소한 그것에 대한 필요성은 있지 않은지에 대한 의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읽은 네그리는, 혹은 네그리가 빌려 쓴 가타리의 전망은 바로 이 필요성에 훌륭하게 답하고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불랭빌리에에 관한 부분은 제가 푸코가 말한 면만을 봤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어쩌면 제가 푸코가 말한 것을 오독했을 수도 있겠지요... 공부가 부족해서 그런 것이니 너그러이 봐주시기 바랍니다.
(3)에 대한 의문도 드는데요, 그렇다면 전쟁으로서의 정치와 갈등과 적대로서의 정치 사이에 중요한 에피스테메 상에서의 차이가 있다고 봐도 되는건가요?

얼핏 느끼기엔 발리바르의 스피노자는 폴리비오스의 반복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스피노자는 마키아벨리와 가깝기 보다는 오히려 폴리비오스에 가깝다고 생각이 듭니다. 과정으로서의 민주화를 생각한다면, 그러한 과정 자체에 어떤 긍정적인 변화를 지금 우리가, 또는 당시의 스피노자가 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일까요? 발리바르가 본 스피노자의 생각이 정치적으로 현행적일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하게 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선 제가 네그리의 책을 읽지 않아 확신이 없긴 합니다만, '철저하게 정치적인 한에서의 스피노자'라는 말은 스피노자가 말한 내용 그 자체의 타당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기 보다는 그것의 현재적 활용에 보다 더 큰 의의를 둬야한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반면 '스피노자의 철학이 철저하게 정치적'이라는 말은 스피노자가 어떤 내용을 말했고 그 내용 전체가 정치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제가 지금 단순히 생각하기에는 네그리가 스피노자에게서 분절을 발견하고 한 쪽에 다른 쪽보다 더 큰 의의를 부여한다면 전자가, 그렇지 않고 연속적인 것으로 본다면 후자가 더 옳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스스로 공부해야 할 부분을 너무 많이 묻는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바쁘실텐데 시간을 훔쳐가는 것 같아 죄송합니다.

우물 안 개구리 2010-03-10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역사적 변화를 만들어내고 역사를 이끌어가는 주체는 누구인가 하는 문제는 오랫동안 논쟁의 주제가 되어 왔습니다. 중요한 것은 누가 주체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주체'라는 범주란 무엇이며 주체로 호명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누가 "시민"이라는 주체인가 하는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시민"이라는 범주란 무엇이며 "시민"이라는 주체로 호명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누가 누구를 "시민"이라고 呼名하는가?

우물 안 개구리 2010-03-10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발마스 님(또는 스피노자)은 국가를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필수적인 구성요소로 보고 계시는 건가요? 가령 로빈슨 크루소와 프라이데이, 이 둘밖에 없는 섬에서도 국가가 민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필수적인 구성요소인가요? 그 주장이 맞다면 민주주의란 영원히 실현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요? 항상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한 "과정"이 민주주의라는 것은 사실상 "미완"의 과정이 되는 것이 아닐런지? 아마 민주주의에 반대하는 흐름과 그것을 실현시키려는 흐름이 밀고 당기기를 지속해 나갈 수밖에 없을 겁니다.

우물 안 개구리 2010-03-10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위에 계신 ...님이 혹시 전에 그건 푸코적이지 않다고 얘기한 그 분인가요? 푸코를 아주 좋아하시는 모양이군요. 저는 ...님이 제기하시는 '좋은' 질문과 '근본적인' 쟁점들에 관한 것을 건드릴 능력이 없습니다. 역사학의 인습적인 개념에 대해 새롭게 사유하게 해준다는 면에서 푸코에게 관심이 있을 뿐이죠. 아마 ...님은 이런 문제에 관심 없을 겁니다. ...님에게 한 마디 하자면 무엇이 옳으냐 마느냐 어떤 주장과 해석이 맞느냐 틀리냐는 별로 안 중요합니다. 어떤 이론이나 학설들의 기저에 놓여있는 사유방식과 이데올로기가 무엇인가 하는 거죠. 그 사유방식이 형성된 맥락과 그 사유방식이 무엇을 배제하거나 삭제하느냐가 더 중요한 거죠. 발마스 님 얘기도 그렇게 들어야 합니다.

... 2010-03-11 00:53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실상 푸코의 팬이라고 해도 좋을 겁니다. 푸코가 쓴 책은 거의 다 읽었고, 요즘엔 강의록들을 재밌게 보고 있죠. 개인적으로는 지식의 고고학이 다시 출간됬으면 좋겠어요. 전 영어는 읽어도 한문은 못 읽는 녀석인지라... 그걸 못 봤거든요. 아무튼 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엔 그것 역시도 타당성이라는 관점에서 파악되어야 할 겁니다. 다양한 타당성들이 있는거죠. 정치적인 타당성, 논리적인 타당성, '반복'적인 타당성, 역사적인 타당성... 왜냐하면 푸코만을 따라가면 푸코에게 고유한 아포리아들에서 멈춰설 수 밖에 없기 때문이죠. 푸코도 푸코주의자들을 바라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우물 안 개구리 2010-03-10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발마스 님도 결국은 새로운 개념이나 담론을 생산하려고 시도하는 분이고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옳다 그르다는 어디까지나 그 다음입니다. "시민"이라는 개념만 해도 그렇습니다. 언어가 기표와 기의의 차이를 동반할 수밖에 없다면 "시민"이라는 개념도 모호할 수밖에 없어요. 그것이 발화될 때 권력이 작동한다는 말이죠. 가령 진보적인 역사담론을 생산한다고 해서 그 담론의 소비자들의 수많은 차이들을 억압하지 않는 게 아니라는 거죠. 중요한 것은 발마스 님(또는 스피노자)의 담론이 무엇을 넘어서고자 시도했고 어떤 한계에 봉착했느냐는 거죠. 그 외에 다른 것은 그 다음입니다. (따져 보지 말라는 얘기는 안 했습니다. 우선 순위가 그렇다는 겁니다.)

우물 안 개구리 2010-03-10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유럽의 근대 과학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정복을 뒷받침하는 수학적 기초를 확립한 것이고 데카르트가 정초한 근대 철학은 사실상 자아/타자의 인식론적 권력관계를 확립한 것입니다. 저는 스피노자와 푸코가 여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더 궁금합니다. 푸코는 스피노자의 주장 뿐 아니라 다른 주장들에 대해서도 모호한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많으니 좀 답답할 거 같고 스피노자는 어떨지 모르겠군요. 발마스 님이나 ... 님이 문제의식 중에 이런 것이 포함되어 있는지 알 수 없으니 누구한테 도움을 받아야 하나?

우물 안 개구리 2010-03-10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리고 사족으로 스피노자가 살았던 시기에 "근대 국가"는 없었습니다. 절대주의 시대와 겹치는 것처럼 보이는데 제도적 유사성을 강조하면서 그것을 "근대 국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아니죠. 그저 과도기일 뿐.... 그렇게 보면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서 반드시 "근대 국가"가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주장도 가능합니다. 자, 쓸데없는 얘기는 여기까지입니다. 프리즘 총서가 나오는 것을 다시 축하드립니다. 다만 개정판 나올 때마다 과거의 오역이나 실수를 바로 잡았다는 얘기를 들으면 저는 오히려 우울합니다. 미리 산 사람들이 손해라는 얘기가 되기 때문이죠. 다시 들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럼 이만...

2010-03-12 21: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23 11: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10-04-01 18:55   좋아요 0 | URL
아 제가 댓글을 이제서야 봤습니다. [마르크스의 유령들]은 지금 수정판을 내기 위해 준비중이니까 조금만 기다리시면 새로운 판본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서산철학강좌’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는 지난 2005년 2학기부터 76회에 걸쳐 ‘서산철학강좌’라는 철학 공개강좌를 진행해 왔습니다. 철학을 물론 학제간의 대화를 통해 연세대학교 안팎의 학생들에게 인문학에 대한 관심을 일깨우고 동서양 사상의 전통과 흐름을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한 ‘서산철학강좌’는 그동안 우리나라의 대학 사회에 부재했던 개방적인 학술강연문화의 새로운 길을 여는 데 첫발을 내딛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고 평가합니다.

2010학년도 1학기에는 “자유주의를 넘어서”라는 주제로 다섯 차례의 강좌를 마련했습니다. 3월 11일(목) 오후 6시 30분부터 외솔관 110호에서 열리는 ‘서산철학강좌’에 많은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2010학년도 1학기 서산철학강좌

시간: 목요일 오후 6시 30분-8시 30분

장소: 연세대 외솔관 110호

주최: 연세대 철학연구소 (http://yonsei-phil.cyworld.com)

후원: 연세대 인문학연구원



주제: 자유주의를 넘어서


제77회 (3월 11일)

한나 아렌트: 자유, 권리 그리고 글로벌 시민권

김 선욱(숭실대)



제78회 (3월 18일)

마이클 왈쩌: 자유주의를 넘어서 복합적 평등으로

정 현철(연세대)



제79회 (3월 25일)

에티엔 발리바르: 봉기적 시민권을 위하여

진 태원(고려대)



제80회 (4월 1일)

칼 슈미트: ‘정치적인 것’의 귀환과 자유주의 비판

나 종석(연세대)



제81회 (4월 8일)

악셀 호네트: ‘탈전통적 공동체’와 연대

이 현재(서울시립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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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10-03-02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이번 강좌 전부 끌리는군요. 시간이 될 거 같은데 이번엔 꼭!

tiffany 2010-07-29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계 정세의 흐름 및 그에 대한 대응을 고민하는 분들에게 얼마간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

글을 올립니다. 번역까지 해드리면 좋겠지만, 저도 제 코가 석자인지라 ...

그리 어렵지 않은 글이니까 누가 다른 분이 번역을 좀 해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조만간 그린비 출판사에서 나올 [헤겔 또는 스피노자] "2판 역자 후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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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또는 스피노자 2판 역자 후기 
 

2004년 이제이북스에서 처음 이 책이 출간될 때 나는 이 책의 2판을 낼 수 있게 되리라고는 거의 생각하지 못했다. 피에르 마슈레가 국내에 얼마간 알려져 있기는 했지만 세계적인 유명세를 얻고 있는 철학자도 아니고 이 책 자체가 시시각각 변화하는 시류를 쫒는 책들과 달리, 어찌 보면 고색창연하다고 할 만한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오늘 재판 역자 후기를 쓸 수 있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이 책에 대한 독자들의 뜨거운 관심과 애정 덕분이 아닐까 한다.

이 책이 처음 출간된지 6년 남짓한 시간이 흘렀지만, 그동안 국내의 스피노자 연구 상황은 상당히 변화했다. 이 책을 비롯하여 들뢰즈의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발리바르의 [스피노자와 정치], 네그리의 [전복적 스피노자], 마트롱의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 같은 현대 스피노자 연구의 걸작들이 소개되었고 유능한 스피노자 연구자들이 좋은 연구 논문들을 발표하고 있다. 아울러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도 매우 높아져서 이제 스피노자는 명실상부 한국 인문사회과학의 공통의 자원, 또는 말하자면 공통의 통념이 되었다고 할 만한 상황이 되었다. 앞으로 기회가 닿는 대로 스피노자의 원전도 번역ㆍ소개해서 스피노자주의가 공통의 통념에서 더 나아가 한국 인문사회과학의 제3종의 인식이 될 수 있도록 배전의 노력을 기울일 생각이다. 독자 여러분의 지속적인 관심과 성원, 협력을 바란다.

재판을 내면서 초판에서 발견된 몇 가지 잘못들 및 오식들을 바로잡고 새로운 참고문헌을 보충했다. 그리고 참조 및 인용의 편의를 위해 가급적 초판과 동일한 페이지 수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어려운 출판 상황에서도 이 책의 초판 발행을 기꺼이 맡아주었던 이제이북스의 전응주 사장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리고, 이 책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준 그린비 출판사 여러분들께도 깊이 감사드린다.

이 책의 2판이 “프리즘 총서”의 한 권으로 나오게 된 것은 역자로서, 총서기획자로서 더욱더 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이 한국의 스피노자 연구에 대해 했던 일을 “프리즘 총서”가 한국 인문사회과학을 위해 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2010년 3월 2일

 
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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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반시] 봄호에 실릴 글을 한 편 더 올립니다. [시와 반시] 편집위원으로 있는 함돈균 선생의 요청으로 쓰게 된 글인데, 

앞으로 매호마다 정치 사상가에 관한 코너를 실을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번 호에는 에티엔 발리바르에 관한 두 편의 글이 

실릴 예정인데, 제 글하고 최원 선생이 쓴 글이 실린다고 합니다. 이 글 역시 교열과 교정이 완료되지 않은 글이기 때문에 

인용이나 공적인 토론을 원하는 분들은 [시와 반시]에 실린 텍스트를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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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론, 대중들, 민주주의―에티엔 발리바르의 스피노자론

I. 하나가 아닌 스피노자

 

어떤 철학자의 사상이란, 그의 주요 저작(가령 데카르트의 󰡔성찰󰡕,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또는 스피노자의 󰡔윤리학󰡕)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어서, 면밀하게 텍스트를 분석하고 내용을 잘 파악하게 되면, 있는 그대로 온전하게 독자들에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철학자의 사상은 각각의 시대마다 수용과 변용, 해석과 굴절, 보존과 창조의 과정을 겪게 마련이다. 따라서 어떤 철학자의 사상, 더 나아가 어떤 철학자는 단 하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스피노자 역시 단 하나의 스피노자만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말하자면 17세기의 스피노자가 있고, 18세기의 스피노자, 19세기의 스피노자, 20세기의 스피노자가 있으며, 또한 미국의 스피노자, 독일의 스피노자, 프랑스의 스피노자, 한국의 스피노자가 반드시 동일한 것도 아니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간단히 말하자면 스피노자 자신이 스피노자 그 자신으로 존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스피노자의 철학, 스피노자의 사상은 흔히 그의 필생의 저작이라고 불리는 󰡔윤리학󰡕 속에 있는 그대로, 완성된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윤리학󰡕이 스피노자의 가장 중요한 저작이라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윤리학󰡕은 스피노자 사상의 목적지도 스피노자 사상의 정점도 아니다. 스피노자의 생애는 스피노자 그 자신이 되어가는 (기원도 목적/끝도 없는) 과정이었으며, 스피노자의 사상은 마지막 (미완의) 저작인 󰡔정치론󰡕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형성되고 수정ㆍ변용ㆍ개선되어 갔다. 그런 의미에서도 스피노자의 사상은 탁월한 반목적론적 사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하나의 텍스트란 외부의 환경으로부터 거리를 둔, 닫혀 있는 소우주가 아니다. 텍스트는 다른 텍스트들을 비롯한 외부 환경과의 끊임없는 교섭을 통해 비로소 실존하고 재생산될 수 있는 것이며(이 점에 관해서는 󰡔윤리학󰡕 2부 정리 13 이하에 나오는 이른바 「자연학 소론」 참조), 텍스트의 내부란, 텍스트 외부의 흔적들의 결과이다. 따라서 스피노자 사상 그 자체는, 스피노자 이전의, 스피노자 바깥의 사상들과의 교섭의 산물이며, 또한 스피노자 이후의 사상들의 영향의 산물이다. 스피노자의 사상은 늘 지금 여기의 사상이다. 이 글에서 에티엔 발리바르(Étienne Balibar)의 스피노자 연구를 검토하면서 스피노자의 현재성에 대해 재론해보려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필자는 스피노자의 현재성에 관해 이전에 한두 편의 소개글을 쓴 바 있다. 진태원, 「스피노자의 현재성: 하나의 소개」, 󰡔모색󰡕 제 2호, 2001; 「범신론의 주박에서 벗어나기: 프랑스에서 스피노자 연구 동향」, 󰡔근대철학󰡕 2권 2호, 2007.]

 

II. 범신론에서 관계론으로

 

스피노자 철학을 보는 전반적 관점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에티엔 발리바르의 입장은 관계론적인 관점 또는 그의 고유한 용어법에 따라 말하면 관(貫)개체론적(transindividual)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발리바르의 입장은 스피노자 철학을 해석하는 두 가지 주요한 관점, 곧 범신론적 관점과 역량론적 관점에 대한 이중적 비판을 함축한다.

스피노자 철학은 전통적으로 범신론 철학으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범신론’(pantheism)이라는 말은, 신이란 초월적이거나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연 만물과 다르지 않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자연 만물 안에는 신성이 깃들어 있다는 의미로도 읽을 수도 있다. 첫 번째 의미는 왜 스피노자의 철학이 당대의 유럽에서 혁명적인 의미를 지녔는지, 왜 정치ㆍ신학 권력에 그토록 위협적인 느낌을 주었는지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피에르 벨(Pierre Bayle)에서 하인리히 야코비(Heinrich Jacobi)에 이르는 스피노자 비판가들이 범신론은 무심론이라고 집요하게 비판했으며, 반대로 디드로에서 포이어바흐, 플레하노프에 이르는 유물론 사상가들이 같은 이유로 스피노자를 예찬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하지만 스피노자 자신이 부인하고 있듯이(73번째 편지 참조), 이는 스피노자의 신 또는 실체 개념에 대한 정확한 해석은 아니다.)

반면 두 번째 의미로 읽으면 범신론은 하나의 신비주의를 뜻하게 된다. 노발리스가 스피노자를 “신에 취한 사람”이라고 불렀듯이,『윤리학』에는 신에 관한 무수한 표현들이 나온다. 사실『윤리학』은「신에 대하여」라는 제목이 붙은 1부에서 시작해서 신을 향한 사랑 및 특히 신의 지적 사랑을 “구원 또는 지복(至福) 또는 자유”의 길로 제시하는 5부로 끝을 맺고 있다. 그렇다면 신이 자연 만물과 다르지 않은 것으로 제시되는 것은 당연하거니와 신과의 합일이야말로 스피노자 철학의, 인간의 삶의 궁극적인 목표로 간주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스피노자 철학을 범신론 철학으로 이해하는 것은 사실 이러한 애매성과 유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지난 1960년대 이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전개된 새로운 스피노자 연구, 역량론적 해석이라고 부를 수 있는 새로운 흐름은 하나의 사상사적 사건이라고 할 만하다. 이 해석은 스피노자를 애매성의 질곡에서 빼내어 근원적인 해방의 철학자로 복원시켰기 때문이다. 68년의 반역은 역량론적 해석의 동력이었으며, 들뢰즈나 마트롱, 네그리를 비롯한 여러 주석가들에 의해 스피노자는 어떤 의미에서는 마르크스보다 더 탁월한 해방의 철학자로 부활했다. 가령 들뢰즈는 그의 국가박사학위 부논문이었던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에서󰡕 스피노자를 “미신과 예속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철학자”라고 불렀으며, 펠릭스 가타리와 공동으로 저술한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는 스피노자를 “철학의 그리스도”라고 지칭한 바 있다. 아울러 󰡔제국󰡕과 󰡔다중󰡕으로 국내에 잘 알려진 이탈리아의 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는 스피노자의 마지막 미완성 저작 󰡔정치론󰡕(1677)에 등장하는 ‘물티투도’(multitudo)라는 개념(이 개념은 국내에서는 보통 ‘다중’이라고 번역된다)을 스피노자 철학의 가장 위대한 유산으로 간주하면서 이 개념을 통해 스피노자는 홉스에서 헤겔에 이르는 근대성의 지배적인 흐름에 맞설 수 있는 새로운 정치적 구성의 주체를 제시하고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Antonio Negri, The Savage Anomaly,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0. 이 책은 국역본이 있지만 번역이 좋지 않아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안토니오 네그리, 󰡔전복적 스피노자󰡕, 이기웅 옮김, 그린비, 2004 참조.] 사실 󰡔제국󰡕과 󰡔다중󰡕에서 잘 드러나듯이 어떤 의미에서 1990년대 이후 그의 작업 전체는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이러한 재해석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또한 1960년대 스피노자 연구의 새로운 장을 열어놓은 알렉상드르 마트롱은 그의 대작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이 책은 얼마 전에 국내에 번역되었다. 김문수ㆍ김은주 옮김,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 그린비, 2008 참조.]에서 스피노자의 정치학은 일종의 “현자들의 공산주의”를 추구하고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역량론(puissantialisme)[역량론이라는 명칭은 프랑스의 스피노자 연구자인 앙드레 토젤이 처음으로 사용한 것이다. 그는 근대 초기 신학-정치론의 구도를 소묘하고 이러한 구도에서 스피노자의 입장이 지닌 독창성을 해명하는 과정에서 스피노자 철학의 입장을 역량론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에 따르면 스피노자의 역량론은 신인동형론에 기초를 둔 인격신 개념을 해체하면서 무한하게 많은 무한한 속성들로 구성된 자기원인으로서의 실체 개념을 이론적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토젤은 역량론을 스피노자 자신의 철학적 입장으로 간주하고 있지만, 이는 사실은 1960년대 말 이후 전개된 새로운 스피노자 연구의 관점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André Tosel, “Quel devenir pour Spinoza? Rationalité et finitude”, in Lorenzo Vinciguerra ed., Quel avenir pour Spinoza? Enquête sur les spinozismes à venir, Kimé, 2001.]은 그 명칭에서 드러나듯 역량(potentia)[potentia 또는 프랑스어로 하면 puissance라는 개념은 국내에서 간혹 ‘역능’이라는 용어로 번역되기도 한다. 하지만 ‘역능’이라는 번역어는 우리말에 존재하는 단어가 아닐뿐더러 스피노자 철학을 이해하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potentia를 ‘역량’으로 번역하는 이유에 대한 좀더 자세한 설명은 에티엔 발리바르, 󰡔스피노자와 정치󰡕, 진태원 옮김, 이제이북스, 2005에 수록된 필자의 용어 해설 “역량-권능/권력/권한” 중에서 특히 317-18쪽 참조. ]이라는 개념을 스피노자 철학의 중심에 놓는다. 스피노자의 자연은 무엇보다도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 변화가 이루어지는 역동적인 자연이며, 신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역량에 따라 무한하게 많은 실재들을 생산하는(『윤리학』1부 정리 11, 정리 16) 내재적인 원인, 자기 원인이다. 하지만 신이 이처럼 절대적인 역량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유한한 실재들, 개체들에게는 자유의 여지가 조금도 남아있지 않은 게 아닌가? 이러한 반문에 대해 역량론자들은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신 또는 실체의 절대적 역량이 양태들의 자유를 불가능하게 한다고, 실체와 유한한 실재들이 서로 대립 관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실체와 양태들 사이의 관계를 외재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실체는 양태의 타동적 원인이 아니라 내재적 원인(1부 정리 18)이다. 곧 실체의 역량은 양태들의 자유를 배제하기는커녕 오히려 양태들 자신이 원인으로서 작용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코나투스 개념은 유한한 실재들이 스스로 어떤 결과들을 산출할 수 있는 원인이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3부 정리 7 및 정리 54 참조)

하지만 역량론적 해석은 스피노자 철학의 독창성, 그 이론적 진면목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을까? 게루, 들뢰즈, 마트롱 또는 마슈레와 같은 대가들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역량론적 해석은 여전히 많은 모호함을 드러낸다.[스피노자의 존재론에 대한 역량론적 해석의 난점들에 대한 좀더 상세한 논의는 진태원,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관계론적 해석󰡕(서울대학교 철학과 박사학위 논문, 2006) 중 1-4장 참조. 이 논문은 󰡔스피노자 또는 관계론󰡕이라는 제목으로 수정ㆍ확장되어 올해 안에 도서출판 길에서 출간될 예정이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자. 그렇다면 원인으로서의 역량을 지니고 있음에도 왜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지와 수동성에 빠져 있는가? 이러한 예속은 어디에서 유래하며 이는 어떻게 개조될 수 있는가?

이를 설명하기 위해 들뢰즈는 “수동력과 능동력이라는 별개의 힘”을 가정한다. “우리의 수동력은 불완전성 또는 우리의 능동적 힘 자체의 유한성이나 제한에 불과하다.”[Gilles Deleuze, Spinoza et le problème de l'expression, Minuit, 1969, p. 204.] 이 수동력은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이는 “우리 자신과 구별되는 외부 실재로부터 작용을 받아들이는” 데서 비롯한다. 다시 말해 본질의 차원에서 우리는 능동적인 원인이지만, 실존의 차원에서, 우리와 구별되는 다른 존재자들과의 마주침의 차원에서 우리는 수동적이며 이것이 우리의 예속의 뿌리를 이룬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불완전성, 유한성, 제한을 극복할 수 있을까? 들뢰즈는 공통 통념(notio communis)의 이론을 해법으로 제시한다. 곧 여러 가지 마주침들 중에서 “좋은 마주침”, 우리의 본성과 합치하는 존재자들과의 마주침을 선별하고 이를 통해 공통 통념들을 형성함으로써, 우리는 수동성에서 능동성으로 이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존의 차원에서 인간들은 상상과 수동성에 빠져 있는데 어떻게 이러한 선별이 가능하겠는가? 더 나아가 인간이 외부 실재들에 의해 변용되지 않고서는 실존할 수 없는데, 수동력이 유한성이나 제한에 불과하고 “아무 것도 표현하지 않는다”면, 들뢰즈 또는 역량론적 해석가들이 추구하는 능동성은 외부 실재들과의 관계에서 벗어남, 곧 해탈함을 의미하는 것 아닌가? 또는 원초적으로 주어진 능동적인 본질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이는 목적론과 어떻게 다른가?

발리바르가 스피노자 철학을 관계론으로, 그것도 가장 일관되고 근원적인 관계론 철학 중 하나로 읽을 것을 제안한다면, 그것은 역량론을 배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열어놓은 스피노자 연구의 새로운 차원을 좀더 풍부하게 개척하고 확장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매우 당혹스러운 주장으로 들릴 수 있다. 스피노자는 대표적인 실체의 철학자이며, 따라서 관계론 철학과는 가장 거리가 먼 사람이 아닌가? 더 나아가 이는 매우 통속적으로 이해될 위험도 안고 있다. 하지만 발리바르가 제안하는 관계론을, 모든 것은 서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세상에 고립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식의 주장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스피노자의 철학을 관계론으로 해석하자는 것은 무엇보다 스피노자 철학의 대상과 목표를 좀더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관계론에 따르면 스피노자 철학의 대상은 개체화 내지 주체화 또는 같은 말이지만 ‘사회적 관계에 대한 분석’이다. 그리고 스피노자 철학의 목표는 인간의 원초적인 삶의 조건을 이루는 예속적 관계를 개조할 수 있는 길을 보여주는 데 있다. 좀더 부연해보자.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서양철학의 전통적인 용법과 대조적으로 스피노자에게 실체는 하나의 개체 또는 하나의 실재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에게 실체는 자연 전체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체는 오히려 무한하게 많은 인과연관들의 집합 내지 (현대적인 용어를 사용한다면) 체계와 다르지 않다. 실체가 지닌 절대적인 역량, 무한하게 많은 실재들을 무한하게 생산해내는 역량은 자의적이거나 우연적으로 실행되지 않는다. 그것은 엄밀하게 규정된 인과관계에 따라 필연적으로 전개된다. 그리고 이처럼 그러한 생산역량이 자의적이지 않고 엄밀히 규정된 인과관계에 따라 전개되기 때문에 자연에 대한 합리적 인식과 실천적 지향이 가능하게 된다. 그렇다면 스피노자의 ‘존재론’에 대한 인식은 인과연관의 질서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다른 내용을 갖지 않는다.(1부 정리 18, 정리 25, 정리 28, 2부 정리 7 참조)

그러나 이러한 인과관계를 결정론적인 관계로,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선형적인 관계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스피노자는 실체와 다른 존재자, 따라서 사실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양태들’ 내지 ‘변용들’(affectiones)이라고 부른다. 양태라는 명칭은 실체와 존재하는 모든 것들 사이의 관계가 내재적이라는 것을 잘 드러내주며(왜냐하면 양태는 항상 어떤 실체와 독립해서 존재할 수 없으며 그 실체의 내부에서만 존립할 수 있기 때문에), ‘변용들’이라는 명칭은 존재하는 것들의 본질과 실존의 양상이 어떤 것인지 잘 보여준다.

변용으로서 존재하는 실재들은 명칭대로 늘 변화하며, 변화를 통해서만 존립한다. 우선 변용들은 다른 실재들에 의해 변용됨으로써 성립하고 실존한다. 외부 환경, 외부 실재들과 교섭하고 이를 통해 변용되지 않는 실재는 단 한 순간도 존립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변용되기는 들뢰즈가 말하는 ‘수동력’이 아니다. 변용되기는 역량의 제한이나 우리의 불완전성의 징표가 아니라 우리의 역량이 성립하고 축적되기 위한 조건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변용들로서의 실재들은 또한 변용함으로써 존립한다. 곧 변용되기를 통해 성립한 역량을 바탕으로, 규정된 조건에서 규정된 방식으로 어떤 결과를 산출하면서 실재들은 실존한다. 변용되기와 변용하기는 상관적인 작용 또는 하나의 동일한 과정의 두 측면이다.

따라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 개체들로서의 실재들의 본질을 규정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변용되기와 변용하기의 관계다(스피노자가 ‘운동과 정지의 관계’라고 부르는 것의 존재론적 함의는 여기서 찾을 수 있다).[이 점에 관한 좀더 상세한 논의는 발리바르, 「스피노자에서 개체성과 관개체성」, 󰡔스피노자와 정치󰡕 참조.] 스피노자의 개체들은 일종의 원자 내지는 원초적인 존재론적 단위가 아니라, 변용의 인과연관을 통해서 전개되는 개체화 과정의 결과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존재론’은 개체들 내지 존재하는 실재들이 생성, 변화, 소멸하는 과정과 메커니즘에 대한 탐구를 의미한다. 좀더 현대적인 용어법에 따라 말하자면 스피노자주의적인 철학이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타자와의 관계 또는 사회적 관계에 앞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자율적 존재자로서의 주체들이 아니라 그러한 주체들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주체화(subjectivation) 과정 내지 주체화 양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이점에 관해서는 특히 É. Balibar, “Le structuralisme: une destitution du sujet?”, Revue de Métaphysique et de Morale. no.1/2005 참조.]

하지만『윤리학』이라는 제목이 가리키듯이 스피노자의 진정한 관심사는 존재론 그 자체, 또는 그 과학적 표현으로서 자연학 그 자체에 대한 탐구에 있지 않았다. 그의 철학함의 대상은 항상 이미 사회적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삶이었으며, 그의 철학함의 목표는 대개는 수동적이고 예속적인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예속적 관계들을 합리적이고 호혜적인 관계들로 개조하는 데 있었다. 이것 역시 알튀세르와 푸코 등이 이론화한 현대적인 문제설정에 따라 말하자면 스피노자주의가 관심을 기울이는 문제는 주체화와 예속화(subjection)의 갈등적인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어떤 경우에 수동적이고 예속적인(스피노자에게 이 양자는 거의 동의어에 가깝다) 삶을 살아가게 되는가? 스피노자에게 수동성은, 들뢰즈가 주장하는 것과 달리, 외부의 실재들로부터 작용을 받는 것(변용되기), 그것들에게 영향을 받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인간의 삶의 자연적 조건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는 부정적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수동성은 우리가 부분적인 원인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윤리학󰡕 3부 정의2 참조). 다시 말해 우리가 어떤 것을 수행하거나 생산할 때, 이러한 활동이 우리 자신과 다른 것에 의해 전유되고 활용될 때, 우리는 수동적이고 예속적이다. 반대로 능동성은 외부로부터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활동의 전체적인 원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물리적으로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수동적이고 예속적인 상태에 있을 수 있으며, 개인적인 역량이 미약하다 하더라도 능동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곧 역량이 양적인 개념이라면, 수동과 능동은 질적인 개념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관계론적인 개념이다.

그렇다면 수동성에서 능동성으로의 이행, 또는 예속적인 삶의 조건을 이성적이고 능동적인 방향으로 개조하는 것은 우리들 각자를 부분적인 원인으로 만드는 예속적인 관계를 변화시키는 것을 뜻하며, 이러한 관계에 따라 우리들 각자가 수동적으로 개체화되는 양상을 변화시키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각자의 윤리적 해방은 예속적인 관계를 개조하려는 집합적인 실천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으며, 역으로 정치적 변혁은 다른 사람들의 삶의 조건을 개선하려는 각자의 윤리적 노력(스피노자가 ‘도의심’(pietas)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는 발리바르가 ‘시빌리테(civilité)’라고 부르는 것의 선구적인 형태로 간주될 수 있다) 없이는 성공할 수 없다.

 

III. 정치학자 스피노자

 

오늘날 스피노자 철학이 새삼 주목받는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그의 철학이 지닌 정치철학적 함의 때문이다. 스피노자를 범신론자로 규정하는 것이 낳은 주요한 효과 중 하나는 스피노자 정치학의 배제 또는 스피노자 철학의 정치철학적 함의에 대한 부인이었다. 사실 근대 서양사상사에서 스피노자는 대개 형이상학자로 간주되었을 뿐 아주 드문 경우를 제외한다면 정치학자로 여겨지지 않았다. 여기서 핵심은 스피노자를 형이상학자로 간주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스피노자가 형이상학자라는 사실을 이유로 스피노자가 정치학자라는 점을 (원칙적으로) 부정하는 데 있다. 곧 스피노자는 형이상학자라는 언표는 암묵적으로 스피노자에게는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간에 정치학이 없다는 언표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좀더 미묘한 형태로 변형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스피노자가 정치적 저술을 남기긴 했지만, 역시 스피노자 철학의 본질 내지는 요체는 그의 형이상학에 있다는 식으로 표현될 수도 있고, 좀더 구체적으로 스피노자 철학의 본질 내지는 요체는 󰡔신학정치론󰡕이나 󰡔정치론󰡕이 아니라 󰡔윤리학󰡕에 있다고 표현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경우 범위는 다시 더 좁혀지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윤리학󰡕은 5부로 이루어져 있고, 1부에서 5부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부는, 상이한 제목이 달려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상이한 논의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다시 이런 식의 주장이 제기되곤 한다. 곧 󰡔윤리학󰡕의 핵심은 1부에 있는데, 왜냐하면 「신에 대하여」라는 제목이 붙은 데서 알 수 있듯이 1부는 유일한 실체로서 신을 주제로 하고 있고, 바로 여기서 형이상학이 논의되기 때문이다.[이는 사실은 헤겔로부터 유래하는 태도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피에르 마슈레, 󰡔헤겔 또는 스피노자󰡕, 앞의 책 1장 참조.] 또는 프랑스의 스피노자 주석가였던 마르샬 게루(Martial Gueroult)가 󰡔윤리학󰡕 1, 2부에 대한 기념비적인 주석서를 남긴 데서 알 수 있듯이, 존재론을 다루는 1부와 인식론을 다루는 2부가 󰡔윤리학󰡕의 핵심이라는 주장을 듣는 것도 어렵지 않은 일이다.

이 경우 배제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이다. 그렇다면 왜 스피노자가 자신의 철학의 요체를 담고 있는 이 책에 󰡔제 1철학󰡕이나 󰡔형이상학󰡕 또는 그냥 간단히 󰡔철학󰡕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고 하필 󰡔윤리학󰡕이라는 제목을 붙였을까? 왜 그는 1부와 2부로 끝내지 않고, 그보다 훨씬 더 길게 5부까지 책을 썼을까? 물론 다음과 같은 질문은 더욱 더 제기되지 않는다. 왜 그는 󰡔윤리학󰡕의 집필을 중단하고 5년여 동안이나 󰡔신학정치론󰡕 같은 사소한 책을 쓰는 데 몰두했을까? 왜 그는 생애의 말년에 󰡔정치론󰡕 집필에 몰두했으며, 왜 그럼에도 그 책을 완성하지 못했을까?

1960년대 이후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긴 프랑스(및 이탈리아)의 스피노자 연구의 가장 중요한 의의 중 하나는 지난 150여 년 간 스피노자 해석의 역사를 지배해왔던 범신론적 관점을 대체하는 새로운 관점을 구성했으며, 스피노자 철학의 핵심에 정치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해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따라서 피에르 마슈레의 간명한 구분법에 따를 경우 18세기의 스피노자가 유물론적 스피노자였고 19세기의 스피노자는 범신론적 스피노자였다면, 20세기의 스피노자는 정치적 스피노자라고 할 수 있다.[P. Macherey, “L'actualité philosophique de Spinoza” in Avec Spinoza, PUF, 1992 참조.] 발리바르 역시 네그리를 따라 “스피노자의 사상이 철저하게 정치적”[발리바르, 󰡔스피노자와 정치󰡕, 148쪽.]이라는 점을 긍정하고 있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사상이 철저하게 정치적”이라는 주장이 그 자체로 일의적인 것은 아니며 상이한 관점의 여지를 함축하고 있다.

가령 알렉상드르 마트롱은 프랑스의 스피노자 연구자들 중에서도 스피노자의 철학 체계에서 정치학의 중요성을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체계적으로 입증한 사람인데, 그에게 스피노자의 사상이 정치적이라는 주장은 발리바르와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 그에게 이 주장은 스피노자의 정치학은 스피노자의 형이상학 또는 존재론에 함축되어 있는 개체성에 관한 일반 명제로부터, 또 󰡔윤리학󰡕 3부 이하에서 전개되는 인간학에 관한 명제로부터 체계적으로 연역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역으로 󰡔윤리학󰡕으로 대표되는 스피노자의 체계는 인간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에 관한 논의를 통해서만 완결될 수 있다는 점을 뜻한다. 따라서 마트롱은 󰡔윤리학󰡕의 마지막 5부에 나오는 (겉보기에는) 매우 수수께끼 같고 비의적秘義的인 내용들이 사실은 정치학적으로 이해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고 주장한다.[특히 알렉상드르 마트롱,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 참조. 그 이후 발표한 여러 논문에서 이런저런 문제들에 관한 마트롱의 생각은 조금씩 변화하고 좀더 치밀하게 다듬어지고 있지만, 이런 점에서는 불변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더욱이 마트롱은 80년대 후반 이후에는 스피노자의 형이상학, 곧 그의 존재론과 인식론을 체계적으로 고찰하는 데 몰두하고 있다.]

반면 네그리 같은 경우는 마트롱과 달리 스피노자의 체계는 연역적이고 통일적인 게 아니라, 단절적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스피노자 철학은 초기부터 후기까지 변화하지 않은 채 완전한 연속성을 유지하고 있는 게 아니라, 근본적인 단절을 경험한다. 이러한 단절은 바로 스피노자가 󰡔신학정치론󰡕을 집필하던 시기(1665~1670년)에 발생했는데, 이를 통해 스피노자는 신플라톤주의 형이상학자에서 실천적인 구성의 정치학자로 변모한다. 다시 말해 마트롱의 주장과 달리 󰡔윤리학󰡕 1-2부에 담겨 있는 스피노자의 철학은 르네상스 신플라톤주의 신학의 유산에서 완전히 탈피하지 못한 초월적 형이상학이며, 스피노자 철학의 정수, 스피노자 철학의 진정한 핵심은 󰡔윤리학󰡕 3-4부와 󰡔정치론󰡕에 담겨 있는 실천적 구성의 존재론/정치학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네그리에게 “스피노자의 철학이 철저하게 정치적”이라면, 이는 스피노자의 형이상학과의 단절을 먼저 요구한다.

발리바르의 입장은 이 두 사람의 관점과 구분된다. 우선 그는 네그리와 달리 스피노자의 형이상학 내지 존재론과 정치학 사이에는 단절이 아니라, 연속성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발리바르의 관점에 따를 경우 스피노자의 정치학은 스피노자의 존재론을 특징짓는 관개체론적 관점에 따라 논증되고 서술되고 있으며, 따라서 그의 존재론(및 인식론)은 정치학의 주장 및 분석을 이해하기 위한 개념적인 전제 또는 적어도 도구가 된다는 점에서 정치학의 논의에 내재적인 것이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형이상학과 정치학의 인위적인 구분 내지 절단은 스피노자 사상의 일관성을 파악하는 데서나 스피노자 사상의 전개 과정을 이해하는 데서나 적절하지 못하다는 것이 발리바르의 관점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마트롱과 달리 존재론과 정치학의 관계는 연역적인 관계가 아니라고 보고 있다. 곧 스피노자의 인간학과 정치학에 관한 논의는 그의 형이상학적 기초로부터 연역적으로 도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존재론에 내재한 난점 내지는 아포리아를 드러내고, 또 더 나아가 이를 새롭게 파악할 수 있는 통찰을 제공해준다는 것이다(이는 특히 「스피노자 반(反)오웰」에서 대중들이라는 개념 또는 ‘대중들의 공포/대중들에 대한 공포’(la crainte des masses)라는 개념에 대한 분석에서 살펴볼 수 있다). 따라서 발리바르가 네그리처럼 양자 사이에 단절이 존재한다고 파악하지는 않지만, 스피노자의 정치학이 그의 형이상학 체계에 대해 파생적인 위치에 있지 않고 구성적인 지위를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는 네그리에 좀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발리바르가 네그리와 공유하고 있는 또 다른 점은 스피노자의 철학을 당대의 정치적ㆍ이데올로기적 정세 속에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트롱은 스피노자의 정치학을 그의 철학 체계로부터 엄밀하게 연역해내는 데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당대의 정세와 같은 ‘외재적인’ 요인들은 거의 고려하지 않고 있는 반면[이런 점에서 마트롱은 스피노자 연구에서 마르샬 게루의 구조적ㆍ발생적 방법론을 계승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게루는 󰡔윤리학󰡕의 1, 2부, 곧 스피노자의 존재론과 인식론을 연구의 대상으로 한정하고 있고(그는 󰡔윤리학󰡕의 나머지 부분들은 그의 연구서 3권에서 다룰 예정이었으나, 죽음 때문에 실현되지 못했다), 서양 철학의 전통과 스피노자 철학을 매우 체계적으로 대비하여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마트롱과 대비되지만, 구조적인 방법을 택한다는 점이나 이론적 체계 외부의 요인들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마트롱과 일치한다. 이는 크리스치안 라즈리(Christian Lazerri)나 로랑 보브(Laurent Bove) 같은 그의 제자들의 연구에서 마찬가지로 엿볼 수 있는 특징이다.], 네그리와 발리바르는 스피노자의 철학이 당대의 정치적 상황이나 이데올로기적 형세 속에서 형성되었으며, 또 그것들에 대한 대응과정에서 변모하고 발전해 나갔다고 본다는 점에서는 일치하고 있다. 다만 네그리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상호관계라는 좀더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적인 관점을 채택하여, 스피노자의 철학적 발전을 발흥하고 있던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 대한 해방적 생산력의 저항과 대응이라는 노선 위에서 고찰하고 있는 반면[네그리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지배관계와 생산력/해방 운동이라는 두 가지 대립항에 대해 매우 체계적으로(그리고 얼마간 독단적으로) 두 가지 사상적 계보를 할당하고 있다. 곧 전자는 홉스에서 루소, 헤겔로 이어지는 초월적 매개의 노선이며, 후자는 마키아벨리에서 스피노자를 거쳐 마르크스로 이어지는 노선, 다시 말해 일체의 외재적 매개를 거부하고 스스로를 조직하고 표현하는 내재적 구성의 노선이다.], 발리바르는 넓은 의미의 이데올로기론의 관점에서 스피노자의 정치적 개입과 이론적 분석을 고찰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두 사람의 차이는 네그리가 스피노자에서 마르크스에 결여된(또는 마르크스를 능가하는) 정치적 존재론(다시 말해 해방적인 생산력을 이론화할 수 있는 개념적 수단)을 찾고 있는 반면[이러한 스피노자의 정치적 존재론, 특히 다중 개념은 마이클 하트와 공저한 󰡔제국󰡕이나 󰡔다중󰡕의 핵심적인 이론적 기초를 이루고 있다.], 발리바르는 스피노자에게서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또는 일반화된 경제론)을 보완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 비판(또는 일반화된 이데올로기론)을 찾고 있다는 점에서 비롯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이 점에 대해서는 특히 「스피노자, 루소, 마르크스: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에서 정치의 타율성으로」, 󰡔스피노자와 정치󰡕 참조.]

따라서 발리바르에게 “스피노자의 철학이 철저하게 정치적”이라면, 이는 스피노자의 철학이 󰡔신학정치론󰡕과 󰡔정치론󰡕이라는 두 가지 저서로 축소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또 이 두 권의 저서야말로 스피노자의 가장 중요한 저서라고 주장한다는 뜻도 아니다. 이는 당대의 네덜란드 연합주 공화국에서 제기되었던 정치적 쟁점들에 대한 스피노자의 관심과 개입으로부터 스피노자의 정치학이 자신의 문제, 자신의 대상을 얻어왔으며, 이러한 문제, 대상은 󰡔윤리학󰡕을 포함한 스피노자의 성숙기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철학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정치학, 더 나아가 현실의 정치적 쟁점에 대한 그의 개입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점에서, 스피노자의 철학은 철저하게 정치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IV. 다중 또는 대중들

 

지난 1980년대 이후 스피노자 정치학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개념을 하나 든다면, 물티투도multitudo라는 개념을 들 수 있다. “많은”, “다수의” 또는 “큰”이라는 뜻을 지닌 물투스(multus)에서 유래한 이 용어는 하지만 스피노자 정치학에 고유한 어휘가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 및 키케로 이래 서양의 많은 정치철학자들에서 등장하고 있으며, 17세기 철학에서는 특히 홉스와 스피노자의 저작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홉스의 경우 물티투도는 법 제도의 틀 안에서 구성된 인민(people)과 대립하는 것으로서, 고유한 정치적 실재성을 지니지 못한 군중 내지는 무리라는 의미를 지닌다.[󰡔시민론De Cive󰡕 영역본에서는 이를 crowd로 번역하고 있다. Hobbes, De Civ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8 참조.] 따라서 홉스 정치학의 원칙에 따를 경우 물티투도는 적법한 정치적 지위를 갖지 못하고 심지어 전혀 정치적 행위를 수행할 수도 없다. 이 때문에 물티투도는 정치학의 대상이 될 수 없지만, 불법적인 소요와 폭력으로 정치적 질서를 위협한다는 점에서는 홉스 정치학이 꼭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 중 하나였다. 홉스는 물티투도를 서로 독립해 있는 “다수의 개인들” 또는 “다수의 의인(疑人)들(persons)”로 해체함으로써 이 과제를 해결하려고 했다.[이 문제에 관한 좀더 자세한 논의는 진태원,「󰡔신학정치론󰡕에서 홉스 계약론의 수용과 변용: 스피노자 정치학에서 사회계약론의 해체 I」, 󰡔철학사상󰡕 제19집, 2004 참조.]

반면 스피노자는 물티투도에 대해 좀더 미묘한 태도를 보여준다. 정치학에 관한 스피노자의 첫 번째 주저인 󰡔신학정치론󰡕(1670)에서 이 개념은 단 세 차례만 사용되고 있으며, 거의 이론적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6년 뒤에 씌어진 󰡔정치론󰡕에서는 사용 빈도도 늘어날뿐더러, 스피노자의 논의의 핵심 대상으로 등장한다. 󰡔정치론󰡕에서 이 개념은 한편으로 주권 내지 통치권을 규정하는 위치에 놓인다. “대중들의 역량에 의해 정의되는 법/권리를 보통 통치권(imperium)이라 부른다. 공동의 동의에 따라 국정의 책임을 맡은 이가 이 통치권을 절대적으로 보유한다.”(󰡔정치론󰡕 2장 17절(강조는 인용자). 또한 3장 2절, 7절, 9절도 참조)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스피노자는 물티투도를 결코 자기통치적인 주체로 간주하지는 않는다. 그는 물티투도의 삶을 지배하는 정념적인 동요에 대해 두려움을 품고 있었고, 이를 조절하고 제어할 수 있는 제도적인 매개를 추구했다. 따라서 󰡔정치론󰡕에서 물티투도는 기본적으로 양가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980년대 이후 물티투도가 스피노자 정치학의 핵심 개념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네그리의 스피노자 연구서인 󰡔야생의 별종󰡕(1981)과 발리바르의 「스피노자, 반오웰」(1982)이라는 논문 덕분이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물티투도 개념이 스피노자 정치학만이 아니라 스피노자 철학 전체에 대해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닌다는 점에서는 일치하지만, 어떤 점에서 이 개념이 중요한가에 관해서는 상당히 다른 입장을 보여준다.

첫째, 두 사람은 물티투도 개념이 스피노자의 철학 체계 전체를 새롭게 고찰하는 계기를 제공해준다고 본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네그리는 물티투도 개념이 󰡔윤리학󰡕 1, 2부의 핵심 범주들인 실체, 속성 같은 초월적인 형이상학적 개념들 없이 유한양태들의 차원에서 완전한 구성의 존재론을 전개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을 중시하며, 이 때문에 이 개념이 스피노자의 철학 체계를 재정초하는 역할을 담당한다고 본다. 곧 네그리가 볼 때 물티투도 개념이 스피노자의 최후의 미완성 저작인 󰡔정치론󰡕에서 비로소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한다는 사실은, 이때에 이르러서야 스피노자가 󰡔윤리학󰡕 1~2부를 비롯한 초기 저작에 여전히 남아 있는 초월적인 형이상학적 잔재를 극복하고 온전한 내재성의 존재론, 곧 다중의 정치학을 구축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반면 발리바르에게 물티투도라는 개념의 중요성은 이 개념이 󰡔윤리학󰡕 1부와 2부에서 전개된 스피노자의 철학, 특히 그의 ‘존재론’을 대체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 있지 않고, 오히려 ‘존재론’에서 자연학, 그리고 인간학에서 정치학에 이르는 스피노자의 철학 체계를 관개체성의 관점에서 재고찰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둘째, 네그리가 물티투도를 일종의 정치적 주체, 더 나아가 해방 운동의 주체로 간주하는 데 비해, 발리바르는 물티투도가 근본적으로 양가적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큰 차이를 보인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네그리는 스피노자의 물티투도가 현대 사회학의 주요 주제 중 하나인 대중(mass)이나 군중(crowd)과 구분되는 존재론적 위상을 지닌다고 본다. 곧 대중이나 군중은 자신의 독특성을 상실한 익명적인 개인들의 집합, 따라서 지배장치에 포섭되어 있는 수동적인 집단을 가리키는 데 반해, 스피노자의 물티투도는 능동적인 역량과 독특성을 지닌 개인들의 결합체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네그리는 물티투도는 초월적인 통일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자율성을 지닌 다수의 독특한 개인들의 결합체라는 점에서 해방 운동의 정치적 주체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발리바르는 스피노자의 물티투도는 ‘존재론적’으로 토대의 위치에 있기는 하지만 수동적인 집단으로서 대중이나 군중이라는 차원도 포함하고 있다고 간주한다. 그리고 발리바르에 따르면 물티투도에 고유한 이러한 양가성, 이중성은 결코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는 스피노자의 역량의 존재론이 관계론적 존재론이라는 것, 곧 능동과 수동의 끊임없는 변이과정이라는 것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적대와 갈등을 환원 불가능한 정치의 요소로서 사고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발리바르에게 물티투도의 양가성이라는 관점의 중요성은 정치를 막연한 유토피아적(또는 목적론적) 이상이 아니라 실질적인 개조와 변혁 운동으로 사고할 수 있게 해주는 개념적 토대가 된다는 점에 있다.

셋째, 이러한 차이점은 두 사람이 선호하는 용어법의 차이로 이어진다. 네그리는 스피노자가 사용하는 라틴어 물티투도(multituo)를 줄곧 멀티튜드(multitude)라고 번역해서 사용한다. 그리고 국내의 네그리 연구자들은 다시 이를 다중(多衆)이라는 말로 번역하고 있다. 이는 물티투도가 지닌 ‘다수, 여럿’의 의미(곧 주권의 초월적 ‘하나’에 대립하는)를 포함하면서 동시에 네그리의 주장과 일치하게 물티투도를 정치적 주체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번역어라고 볼 수 있다. 반면 발리바르는 물티투도에 대한 가장 좋은 번역어는 ‘masses’, 곧 ‘대중들’이라고 분명히 지적하고 있으며, 스피노자의 물티투도 개념을 단수로 쓰인 multitude, 곧 ‘다중’으로 번역하는 데 대해 명시적으로 반대하고 있다. 이는 스피노자의 물티투도 개념이 지닌 이중성 내지는 양가성을 보존하기 위한 태도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라틴어 원어는 하나인 데 반해, 이 용어에 대한 적어도 두 가지 상이한 현대적 번역과 용법이 존재하는 셈이다.

 

V. 과정으로서의 민주주의

 

물티투도를 이해하는 관점의 차이는 민주주의 및 정치에 대한 상이한 해석들과 직결된다. 오늘날 많은 스피노자 연구자들 및 현대 정치 이론가들이 스피노자의 민주주의론에 주목하는 데에는 얼마간 역설이 존재한다.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에서 민주정을 “가장 자연적인” 국가, “본래적인 국가에 가장 근접한”[Tractatus theologico-politicus = Traité théologico-politique / Texte établi par Fokke Akkerman, traduction et notes par Jacqueline Lagrée et Pierre-François Moreau, PUF, 1999, p. 648.] 국가라고 주장했으며, 미완성으로 남은 󰡔정치론󰡕의 마지막 11장에서는 민주주의야말로 “완전하게 절대적인” 정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스피노자 민주주의론 및 그의 정치학의 진면목은 그가 민주주의를 어떻게 분석하고 설명하느냐를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신학정치론󰡕 16장 및 20장에서 민주정은 형식적인 정의(“민주주의는 자신의 권력 안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집합적 주권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의 연합된 전체다”[같은 책, pp. 514-16.])와 더불어 규범적인 가치 부여를 받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의 구체적인 제도적 면모는 분석되지 않고 있다. 더욱이 󰡔정치론󰡕은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가 막 시작되는 11장에서 겨우 4절만 쓰고 중단된 채 미완성으로 남고 말았다. 따라서 민주주의를 가장 자연적인 국가 내지 완전하게 절대적인 정체로 규정하면서도 그것의 구체적인 제도적ㆍ정치적 면모는 어느 저작에서도 충실히 설명하지 않고 있는 것이 스피노자 정치학의 근본 역설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그러한 민주주의론에서 스피노자 정치학의 핵심을 발견하려는 스피노자 연구자들의 태도는 더욱더 역설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생각해볼 때 스피노자의 󰡔정치론󰡕이 미완의 민주주의론으로 남겨졌다는 사실은 스피노자 정치학의 중요한 공백이자 난점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가령 마트롱이나 네그리에서 볼 수 있듯이) 이러저러한 보충을 통해 그러한 공백을 메우려고 시도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일 텐데, 발리바르는 이러한 공백을 메우려고 하지도 않을뿐더러 오히려 그러한 공백의 사실 자체에서 스피노자의 민주주의론의 최대의 강점을 발견한다. “이 때문에 역설적으로 󰡔정치론󰡕의 미완성은 이론적 이점을 내포한다. 즉 민주주의의 이론 대신에 그것은 모든 체제들에 응용될 수 있는 민주화의 이론을 부각시키는 것이다.”[발리바르, 「스피노자, 정치와 교통」, 윤소영 옮김, 󰡔알튀세르의 현재성󰡕 공감, 1996, 180쪽(강조는 발리바르).] 󰡔정치론󰡕의 미완성에서 민주주의의 이론 대신 민주화의 이론을 발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음 두 개의 인용문이 이러한 질문에 대해 한 가지 실마리를 제공해줄 수 있을 것 같다.

 

“스피노자는 우리가 민주주의자라는 용어에 부여할 수 있는 의미에서 민주주의자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아마도 오히려 바로 이 때문에 그는 우리 시대에 예속화에 맞서 사고할 수 있는 시사점들과 수단들을 제공해주고 있으며, 이는 그가 민주주의 제도들을 기술하는 데 성공했을 경우보다 더 오래 지속적인 의의를 지닐 것이다.”[발리바르, 󰡔스피노자와 정치󰡕, 207-08쪽.]

 

“나는 우리가 스피노자를, 그 자신의 보수적인 테제들에 맞서 그의 변혁적인 경향에 좀더 가깝게 변혁/전환시킴으로써 읽을 수 있다는 입장을 제기하고 싶다. 하지만 그의 변혁적 경향은 민주주의 국가를 정의하려는 실패한 시도에 있다기보다는 민주주의를 국가―또는 국가장치―의 변혁/전환으로서 엄격하게 사고하려는 견줄 수 없는 노력에 있다.”[발리바르, 같은 책, 201쪽(강조는 발리바르).]

 

첫 번째 인용문에서 발리바르가 지적하고 있듯이 스피노자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의미에서의 민주주의자와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한편으로 스피노자가 권리=역량이라는 관점에 따라 주관적 권리 개념, 곧 오늘날의 용어법대로 하면 인권이라는 개념에 대해 지극히 비판적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스피노자는 인민의 자발적인 자기 통치 내지 대중의 자기 통치라는 관념에 대해서도 지극히 회의적이었다.[이 점에서 적어도 스피노자의 정치학은 네그리나 하트가 주창하는 다중의 정치학과는 거리가 있다. 이 점에 관한 좀더 자세한 논의는 진태원, 「대중의 정치란 무엇인가? 다중의 정치학에 대한 스피노자주의적 비판」, 󰡔철학논집󰡕 제 19집, 2009 참조.]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대중들로의 복귀라는 표현인데, 스피노자는 󰡔정치론󰡕 이곳저곳에서 대중들로의 복귀를 어떻게 해서든 피해야 하는 위험 또는 파국적 상황으로 묘사하고 있다. 특히 다음 두 개의 인용문에서 이런 함의가 잘 드러난다. “국가의 형태는 동일하게 남아 있어야 하며, 따라서 왕은 유일해야 하고, 항상 같은 성이어야 하며, 권력은 분할 불가능해야 한다. [...] 그렇지 않을 경우 주권적 권력은 필연적으로 주민 대중에게 넘어가게 되는데, 이는 가능한 변화 중 가장 큰 변화이며, 따라서 매우 위험하다.”(󰡔정치론󰡕 7장 25절) “왕들은 유한하고 회의체들은 무한정하게 영속된다. 따라서 일단 회의체로 양도된 권력은 결코 대중에게로 복귀하지 않는다. [...] 따라서 우리는 충분한 다수로 이루어진 회의체에 부여된 권력은 절대적이라고, 또는 이러한 조건에 아주 근접한다고 결론내리게 된다.”(󰡔정치론󰡕 8장 3절)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피노자를 보수주의자나 반민주주의자로 간주할 수는 없으며, 오히려 스피노자는 근대 민주주의론의 맹점을 잘 드러내주고 그것을 극복하거나 적어도 보완할 수 있는 이론적 대안을 제시해준다. 이것은 특히 세 가지 측면에서 그렇다.

1) 스피노자가 대중들로의 복귀를 위험한 것 내지 파국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그가 아나키즘의 원칙적 가능성을 부인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실천적으로 해방적이지도 않다고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나키, 곧 정치적 관계의 해체는 폭력과 갈등의 폭발을 의미하며, 개인들에게는 생명과 안전의 위협을 뜻한다. 따라서 자연 상태와 유사한 이러한 아나키 상태에서 개인들의 평등과 자유는 현실적이라기보다는 상상적인 것에 불과하다. 스피노자가 “시민 사회의 목적은 평화와 삶의 안전”(󰡔정치론󰡕 5장 2절)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좀더 근원적으로 본다면 이것은 스피노자가 민주주의(및 정치적 관계 일반)를 본질적으로 취약한 것, 또는 선험적인 토대가 없는 것으로 간주했음을 의미한다.

2) 하지만 스피노자는 어떻게 보면 모순적이게도 대중들의 역량을 정치체의 기초로 간주했으며, 이 때문에 스피노자는 단순히 보수주의자로 머물지 않고 매우 새로운 민주주의론을 사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네그리가 간주하듯이 스피노자가 다중 또는 대중들을 자율적인 정치적 주체로 간주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스피노자의 의도는 정치란 초월적(가령 신)이거나 자연적인 토대(가령 인간의 자연적 사회성)에 기초를 둘 수 없으며, 오직 인간들, 대중들의 집합적인 실천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데 있다(또는 적어도 그것이 발리바르가 스피노자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스피노자에게서 “개인들이나 한 국가의 모든 시민 사이의 내용 없는 평등이 아닌 진정한 평등은 제도들 및 집합적 실천의 결과로만 성립할 수 있”[발리바르, 󰡔스피노자와 정치󰡕, 96쪽.]는 것이다.

이 때문에 스피노자의 민주주의는 보수주의 전통이 주장하는 중우정치로서 민주주의라는 관점과 다르지만, 근대 계약론에서 유래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법적 관점과도 다르다. 게다가 이는 루소나 마르크스주의에서 유래하는 인민민주주의 개념과도 차이가 있다. 전자의 두 관점이 대중의 근원적인 정치적 무능력과 통제 불가능성을 가정하고 있는 데 반해, 후자는 대중의 혁명적 역량을 선험적으로 전제하고 있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전자처럼 대중 그 자체는 정치체제에 파괴적이고 위협적인 존재라는 보수적 관점을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또한 후자처럼 대중은 정치체제를 구성하는 근원적인 역량이라는 관점을 고수하고 있다. 이 때문에 전자와 후자의 관점 모두에게 스피노자의 정치학은 기형적인 괴물(또는 네그리의 저서의 제목을 빌리면 ‘야생의 별종’)로 보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스피노자는 미완성으로 남아있는 󰡔정치론󰡕의 마지막 11장에서 민주주의야말로 “완전하게 절대적인” 정체라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대중 개념을 포함하지 않고서는 민주주의 개념을 제대로 사고할 수 없으며, 역으로 민주주의 개념을 “절대적으로” 사고하기 위해서는 모든 정체의 구성적 토대로 대중 개념을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발리바르가 보기에 이는 스피노자 정치학의 아포리아일 뿐만 아니라,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의 몰락 이후 한층 더 분명하게 드러난 근대 정치학 자체의 아포리아다.

따라서 부재하는 원인으로서의 스피노자의 역설적인 민주주의론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첫째, 이것은 계약론에서 유래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법적 관점을 비판하는 의미를 지닌다. 곧 민주주의를 하나의 통치 유형이나 정체로만 이해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정치적 핵심을 법적 제도의 틀 안에 가두는 결과를 낳게 된다. 따라서 둘째, 민주주의는 완성된 형태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봉기와 구성, 해체와 재구성을 거듭하는 과정으로서 존재한다.

3) 스피노자가 아나키즘을 원칙적으로 불가능하고 실천적으로는 위험한 발상으로 간주하는 이상, 민주주의가 구현될 수 있는 유일하게 가능한 방식은 정치 제도 및 대표를 강화하는 방식뿐이다. 그러나 흔히 오해되는 것처럼 이러한 대표는 힘이나 권한의 전면적인 위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스피노자가 유명한 50번째 편지에서 홉스와 자신의 차이를 “저는 항상 [사회상태에서도] 자연권을 온전하게 보존하고, 어떤 국가이든 간에 주권자는 그가 신민을 능가하는 역량을 발휘하는 만큼 신민에 대한 권리를 가질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자연상태에서 늘 그렇듯이 말입니다”[Spinoza opera, vol. 4, ed, Carl Gebhardt, Carl Winter, 1925, pp. 238-239. ] 라고 명시할 때 염두에 둔 것은 역량의 완전한 양도, 따라서 권리의 완전한 위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스피노자적인 의미의 대표란, 그가 대중들의 역량을 국가의 토대로 간주하는 한에서 시민들이 공적 기능을 수행하기 자신들의 힘 내지 권한을 대표자들에게 양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이러한 대표를 통해 시민들이 좀더 커다란 집합적인 역량을 획득할 수 있고 이를 통해 통치자들의 자의적인 권력이나 권한의 남용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통제를 통해 “인민은 말하자면 자기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수단들을 얻게 된다.”[É. Balibar, Droit de cité, PUF, 2002, p. 185.] 실제로 스피노자는 󰡔정치론󰡕에서 군주정과 귀족정을 분석하면서 두 정체에 본질적인 한계(군주정은 권력의 독점, 귀족정은 계급 불평등)를 교정하기 위해 대중적인 토대를 강화하고 정치를 합리화할 수 있는 수단들을 찾는다. 그것은 각 정체에 고유한 한계 내에서 국가 장치를 개조하고 민주화하려는 작업, 각 정체를 “완전화”하려는 작업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군주정과 귀족정이 민주주의에 가까워질수록 각 정체의 법적 구별은 형식적인 것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스피노자에게 민주주의는 하나의 특정한 정체의 이름이 아니라 국가 장치의 지속적인 민주적 변혁/전환의 과정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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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2-25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는 스피노자의 역량의 존재론이 관계론적 존재론이라는 것, 곧 능동과 수동의 끊임없는 변이과정이라는 것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적대와 갈등을 환원 불가능한 정치의 요소로서 사고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에서 말한 바로 그 전쟁의 정치와 연관되어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장점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인가요? 같은 전쟁으로서의 정치학이 반동 귀족(불랭빌리에)와 인종주의에서도 사용되었는데 말이죠.

그리고 그러한 과정으로서의 민주주의, 혹은 민주화로서 스피노자를 읽는다면 그것이 지금 처한 구체적 상황들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건가요? 대중들의 공포(대중들이 느끼는 공포)는 항상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구체적인 논리와 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데올로기라고 불러도 괜찮을지 모르겠네요. "권리를 양도한다" 는 것이 우스꽝스러워지는 것은 바로 그 지점으로부터 아닐까요? 이데올로기는 먼저 권리를 이미 양도되었다고 간주하고 또 그 이데올로기로 실질적으로 대중들을 설득하니까요. 과연 그런 상황에서 국가-이데올로기 장치이자 그 결과물-로의 회귀가 적절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요? 전 이런 생각이 가끔 두렵고 항상 반대합니다.

그리고 덧붙여서 (전 프랑스어 원서를 읽을 줄 모릅니다) <대중들의 공포(도서출판 b, 최원/서관모 옮김)>의 번역에서는 "철저하게 정치적인 한에서의 스피노자"라고 되어 있는데, 이 번역이 잘못된 것인가요? 알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balmas 2010-02-27 01:33   좋아요 0 | URL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제가 그런데 지금은 시간내기가 어려워서 내일 답글을 드릴게요.

balmas 2010-03-02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답변이 너무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사실 질문들이 상당히 좋고 근본적인 쟁점들에 관한 것이어서, 답글로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제가 사실은 "스피노자와 푸코에서 통치의 문제"라는 논문을 한편 쓰고 있는 중인데, 그 논문에 제기하신 질문 중 일부에 대한 답변이 담길 것 같습니다. 첫번째 질문의 경우가 그런데요, 적대와 갈등을 환원 불가능한 정치의 요소로 사고한다는 것이 장점이 될 수 있느냐라고 질문하셨습니다. 더욱이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에서는 전쟁으로서의 정치의 문제가 "반동 귀족"인 불랭빌리에와 관련되어 있는데, 어떻게 그것이 장점이 될 수 있느냐고 반문하셨죠. 이 질문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세 가지 답변만 드릴게요. (1) 적대와 갈등을 환원 불가능한 정치의 요소로 본다는 것은, 보기에 따라서는 장점이 될 수도 있고 단점이 될 수도 있겠죠. 그런데 글의 맥락에서 제가 이 점을 장점이라고 본 이유는, 바로 이러한 관점 때문에 스피노자의 정치학이 근대 사회계약론의 맹목을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회계약론이 정치의 궁극적인 지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당연히 장점이 될 수 없겠지만, 그것이 지닌 한계 내지 이데올로기적 측면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에게는 장점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이것은 사회계약론 전체를 파괴한다거나 배척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2) 불랭빌리에에 관한 쟁점인데요, 불랭빌리에는 사실 스피노자주의자였습니다. 프랑스어로 스피노자 저작을 번역하기도 했죠. 이런 점에서 본다면 그를 단순히 "반동 귀족"이라고 보는 건 좀 성급할 수 있습니다. (3) 스피노자와 푸코의 사상을 전쟁으로서의 정치학, 또는 정치를 갈등과 적대로 보는 두 가지 관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 만큼 양자 사이에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지만 또 상당한 차이점도 있죠. 두 사람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밝히는 문제는 현대 정치 이론의 쟁점들을 해명하는 데도 꽤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두번째 질문은, 민주화로서의 스피노자주의가 현재의 상황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질문하셨죠. 그건 한 마디로 답변드리기는 어려운 문제입니다. 다만 제가 질문을 잘 이해했다면, 질문의 핵심 논점은 국가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의 문제와 결부돼 있는 것 같습니다. 곧 국가는 기본적으로 지배의 도구로서 국가장치인가 아니면 국가는 시민들의 자기-통치 제도인가와 관련된 문제죠. 원칙적으로는 두 가지 측면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텐데요, 마르크스주의와 자유주의가 공유하고 있는 점은 국가를 지배의 도구로 이해한다는 점입니다. 스피노자가 의미가 있다면 국가의 양면성, 따라서 해방 또는 민주주의의 양면성을 잘 이해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마지막으로 번역에 관한 질문을 하셨는데, 그건 오역이라고 하기는 어렵지 않은가요? 왜 그걸 오역이라고 느끼셨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스피노자의 사상"이 아니라 "스피노자"라고 해서 그렇게 생각하신 건지요?
 

[세계의 문학] 봄호에 실릴 글을 한 편 올립니다. 발터 벤야민 특집 중 한 편으로 실릴 글인데, 벤야민과 데리다, 발리바르의  폭력론 또는 폭력의 비판을 개략적으로 소묘해보는 글입니다. 아직 교열과 교정이 다 끝난 글이 아니니까 당연히 인용은 불가능합니다. 인용이나 공적인 토론을 원하는 분들은 [세계의 문학] 봄호에 실린 텍스트를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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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쉬볼렛―벤야민, 데리다, 발리바르

 

언젠가는, 더 이상 역사에 속하지 않는, 유사메시아적인 어느 날엔가는, 마침내 복수의 숙명에서 벗어날 정의를 염원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자크 데리다, 󰡔마르크스의 유령들󰡕, 진태원 옮김, 이제이북스, 2007, 58쪽.] 

문제는 우리가 이 도래할 혁명들을 욕망할 만한 것들로 생각할 수 있을지 [...] 또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더 낫다면, 문제는 어떤 조건들 아래에서 우리가 이 혁명들을 욕망할 만한 것들로 생각할 수 있을지 아는 것이다.
[Étienne Balibar, “Sed intelligere”, Lignes(nouvelle série) 4, 2001.]
 

I. 머리말

 

발터 벤야민의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는 그 문체나 내용만큼이나 비범한 수용사를 지닌 글이다. 벤야민의 유명한 여러 글 중에서도 지난 20여년 동안 이 글만큼 많은 토론과 논란의 대상이 된 것은 없을 것이다.[발터 벤야민,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 진태원 옮김, 󰡔법의 힘󰡕, 문학과지성사, 2004. 앞으로 벤야민 글의 인용은 이 번역본에 준거할 것이며, FL이라는 약칭 아래 본문 중에 쪽수만 표기하겠다. 그리고 󰡔법의 힘󰡕 인용 역시 FL이라는 약칭 아래 본문 중에 쪽수만 표기하겠다.] 이것은, 단 하나의 텍스트만을 거명한다면, 1989년 데리다가 미국의 카르도조 법대 대학원에서 했던 저 유명한 강연 󰡔법의 힘󰡕 덕분에 가능하게 된 일이다. 사실 󰡔법의 힘󰡕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그 책의 2부인 「벤야민의 이름」) 이전까지 벤야민은 주로 문예이론이나 매체이론 또는 유명한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를 중심으로 논의되어 왔을 뿐,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데리다의 책 이후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는 벤야민 연구의 중심적인 대상 중 하나로 부각되었고 이 글을 비롯한 초기 벤야민의 정치신학적 연구를 20세기 독일 (유대) 사상의 흐름 속에서 고찰하는 작업들도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데리다 책의 비범한 통찰력과 문제제기 덕분에 벤야민 글의 중요성이 온전히 부각된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에 관한 이후의 연구 전체가 데리다의 관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도 아니고 사실 이 글의 의의나 잠재력이 데리다의 해체적인 독서를 통해 온전히 소진되었다고 하기도 어렵다. 역시 한 가지 사례만 들자면, 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연작은 이를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과연 벤야민 글의 어떤 매력이 이처럼 당대 최고의 철학자들 및 이론가들을 사로잡을 수 있었을까? 벤야민의 글의 매력은, 물론 그 글이 지닌 깊이와 미묘한 분석, 독창성에서 생겨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해방의 이념(그것을 공산주의라고 하든, 민주주의라고 하든, 아니면 봉기 일반이라고 하든 간에)이 모든 정치의 환원 불가능한 요소로 존재한다는 것, 다시 말하면 해방의 이념을 포함하지 않는 정치는 진정한 의미의 정치로 간주될 수 없다는 점을 빼어나게 역설하고 있다는 데서 생겨난다. 따라서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에 관한 토론과 평가는 벤야민이 주장하는 해방의 이념이 어떤 것이며, 그것이 함축하는 난점들은 무엇인지, 또 그것이 데리다를 비롯한 동시대의 이론가들에 의해 어떻게 변용되고 있는가에 관한 논의를 포함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좀더 근저에서 본다면 벤야민 글의 진정한 중요성과 매력은 그가 (처음은 아니겠지만) 매우 드물게도 이러한 해방의 이념을 폭력의 문제설정을 통해 다루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한다. 폭력론의 관점에서 해방의 문제를 다룬다는 것은 해방과 폭력이 상호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침투하고 또 서로 자신의 반대물로 전화될 수 있다는 것, 더 나아가 해방이 일의적이지 않다는 것, 다수의 해방들, 다수의 혁명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따라서 해방 운동에 내재적인 도착 가능성을 방지하거나 적어도 줄이기 위해서는 어떤 실천이 필요한지, 여러 가지 해방들 또는 폭력들을 어떻게 식별할 것인지, 그것들을 식별하기 위한 기준은 어떤 것인지가 폭력론의 핵심 문제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 글에서 다룰 발터 벤야민과 자크 데리다, 에티엔 발리바르가 모두 독일어 게발트(Gewalt)―보통 ‘폭력’으로 번역되는―라는 단어의 복합적 의미를 염두에 두면서 논의를 전개하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게발트의 다의성, 심지어 애매성과 모순성은 폭력이라는 지시체가 함축하는 다의성과 애매성, 모순성을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

벤야민 이후로, 그리고 데리다와 발리바르 이후에는 더욱더, 감히 말하자면 정치에 관한 진정한 논의는 폭력에 관한 질문을 생략하거나 우회할 수 없게 되었으며, 폭력론은 정치철학의 근본 물음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이러한 관점에서 벤야민과 자크 데리다, 에티엔 발리바르의 폭력론을 간략하게 살펴보려는 시도다.

II. 벤야민과 순수 폭력의 정치학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의 이론적 대담성은 무엇보다도 법 일반을 정의의 타자로 설정한다는 점에 있다. 사람들의 상식적인 정의감에 따를 경우 법은 정의의 타자가 아니라 정의의 수호자,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본질적인 수단 중 하나다. 적어도 법이 공정하게, 원칙대로 적용된다는 것을 가정한다면 그렇다. 따라서 어떻게 하면 좀더 효과적인 법을 제정하고 좀더 공정한 절차와 좀더 엄정한 집행을 통해 법의 원칙을 있는 그대로 실현하고 집행할 것인가 여부가 정의의 근본 문제 중 하나가 된다.

반면 벤야민에게 법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본질적인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정의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근본적인 장애물이다. 그것은 법이 본질적으로 수단과 목적의 관계에 따라 실행되는 폭력이며, 그로 인해 순수한 정의, 또는 순수한 폭력의 가능성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따라서 벤야민에게 정의의 문제는 법과는 다른 종류의 폭력이 가능한지, 곧 수단과 목적 관계의 바깥에서 폭력의 문제를 사고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문제로 제기된다.

이를 위해 벤야민은 일차적으로 법적 폭력의 유형들(법정립적 폭력과 법보존적 폭력)을 규정하려고 한다. 벤야민은 먼저 당대 법철학의 두 가지 주요 사조인 자연법 사상과 법실증주의를 비판하는데, 이 두 가지 사조는 겉보기에는 서로 대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공통적인 독단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당한 목적은 정당화된 수단을 통해 성취될 수 있고, 정당화된 수단은 정당한 목적을 위해 사용될 수 있다는 것”(FL 141)이다. 이러한 수단과 목적의 순환적 관계에서 벗어날 경우에만 우리는 “원칙으로서의 폭력 그 자체에 대한 척도”를 얻을 수 있으며, “원칙으로서의 폭력 일반”이 그 자체로 “윤리적일 수 있는가”(FL 139-40)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

하지만 벤야민은 폭력의 비판이라는 과제를 수행하는 데서 자연법 사상보다는 법실증주의가 더 적절한 출발점이 될 수 있음을 긍정하는데, 그것은 법실증주의가 적법성 여부라는 기준에 기대어 승인된 폭력과 승인되지 못한 폭력을 구별하려고 시도하기 때문이다. 곧 역사적 인정을 얻은 적법한 목적을 위해 수행되는 폭력은 적법한 폭력이며, 그러한 인정을 결여하고 있는 자연적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폭력은 불법적 폭력인 것이다. 물론 이러한 구별 자체는 가설적인 출발점의 역할을 할 뿐 곧바로 그것의 한계를 드러낸다. 그러한 한계는 “개인들에 맞서 폭력을 독점하려는 법의 이해관계”(FL 144)에서 단적으로 나타난다. 벤야민은 법의 이러한 이해관계에서 단순히 “법적 목적들을 보존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오히려 법 자체를 보존하려는 [법의] 의도”(같은 곳)를 간파한다. 곧 법은, 자신의 바깥에 존재하는 폭력에 대해 그것이 부당한 목적을 추구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법 바깥에 있다는 사실 자체 때문에 위협을 느낀다. 왜 이러한 위협을 느끼게 될까? 그것은 “법적 상황의 객관적(sachliche) 모순”(FL 145) 때문이다.

벤야민이 법적 상황의 객관적 모순이라고 부르는 것은, 법은 폭력 일반을 자신의 타자로 간주하지만, 법은 그 기원에서 폭력에 의존하고 있으며 또한 폭력 없이는 자신을 보존할 수도 없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법은 자신이 독점하는 폭력은 적법한 힘 내지 강제력으로, 자신과 다른 폭력은 불법적인 폭력으로 규정하면서 양자 사이에 절대적인 차이를 부여하려고 하지만, 실제로는 폭력을 독점하지도 못하며 폭력들 사이에서 절대적인 차이를 만들어내지도 못한다. 벤야민은 이것을 파업권과 전쟁권의 사례를 통해 설명한다. 파업권은 법질서 내부에 국가와 별개의 폭력권을 부여받은 법적 주체가 존재한다는 사실, 따라서 법질서 자신이 폭력을 독점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전쟁권의 경우에는 처음에는 강탈적인 폭력으로 보였던 전쟁이 사실은 새로운 법을 부과하고 정립하는 폭력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두 경우에서 법은 또 다른 법질서를 정초하려는 폭력과 맞서 있는 하나의 폭력일 뿐임이 드러난다.

마찬가지로 벤야민은 국민개병제도의 핵심에서 법보존적 폭력을 발견하며, 이 때문에 국민개병제도에 대한 평화주의적이거나 행동주의적 비판은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법보존적 폭력은 이것들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현존하는데, 그것은 이러한 폭력이 “계약의 결과와 마찬가지로 모든 계약의 기원”(FL 153)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무리 평화적으로 체결된 것처럼 보이는 계약이라 할지라도,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계약의 파기나 위반 때문에 항상 폭력을 낳을 수 있다. 벤야민은 더 나아가 모든 법적 계약은 필연적으로 폭력적인 기원을 가질 수밖에 없으며, 어떤 법 제도가 자신 안에 잠재적으로 현존하는 폭력을 망각하게 되면 그 제도는 타락하게 된다고 지적한다. 그는 당대 바이마르의 의회에서 이러한 타락의 사례를 발견한다.

이처럼 어떤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수단으로서의 모든 폭력은 법정립적이거나 법보존적”(FL 152)이라면, “모든 법이론이 파악한 것과는 다른 종류의 폭력들에 관한 질문이 절실히 제기된다.”(FL 160) 이러한 폭력은 목적과의 관련 없이 그 자체로 고려되고 사용된다는 점에서 “순수 수단”적인 폭력이며, “순수 수단의 정치”(FL 156)라고 할 수 있다. 벤야민은 진심의 문화가 존재하고, 진실한 예의, 공감, 평화의 사랑, 신뢰 등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비폭력적인 일치가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시민적인 화합의 기술로서의 대화”를 가장 심원한 사례로 간주한다. 그렇다면 순수 수단은 정치의 영역에서는 불가능한가? 벤야민은 “어떤 조건들 아래에서는” 파업 역시 순수 수단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조르주 소렐을 따라 정치적 총파업과 프롤레타리아 총파업을 구별한다.[조르주 소렐, 󰡔폭력에 대한 성찰󰡕, 이용재 옮김, 나남, 2007 중 특히 5장 참조.] 현존하는 지배 관계를 전복하면서 새로운 법질서 및 새로운 국가 권력의 구성을 목표로 하는 한에서 전자는 여전히 법적 폭력의 틀, 따라서 수단-목적 관계 속에 사로잡혀 있으며, 그런 한에서 여전히 폭력적이다. 반면 후자는 지배 집단의 존재 근거인 국가 권력의 파괴라는 단 하나의 과제를 설정하며 승리의 모든 물질적 이득에 무관심하다는 점에서 “순수 수단으로서 비폭력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프롤레타리아 총파업, 또는 다른 말로 하면 혁명이 비폭력적이라는 것은 우리의 직관에 어긋나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의미에서 총파업 내지 혁명이 비폭력적일까? 벤야민은 소렐에 의지하여 엄격한 관점에 따라 실행된 총파업은 오히려 부분적 파업보다 더 비폭력적일 수 있음을 지적한다. 더 나아가 프롤레타리아 총파업은 새로운 지배 계급의 구성과 다르지 않은 새로운 국가 권력의 구성(법정립적 폭력)을 목표로 삼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폐지를 목적으로 지니고 있기 때문에 비폭력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프롤레타리아 총파업은 자연적 목적이 됐든 적법한 목적이 됐든 일체의 목적-수단 관계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순수 수단으로서 비폭력적이라고 할 수 있다.[이 문제에 대해서는 사실 소렐 역시 폭력(violence)과 무력(force)을 구분하면서 폭력에 대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무력의 목적이 소수가 통치하는 어떤 사회질서의 수립을 부과하는 것임에 반해서, 폭력은 이 사회질서의 파괴를 지향하는 것”이다. 󰡔폭력에 대한 성찰󰡕, 242쪽.] 따라서 벤야민이 “인간이 발현하는 최상의 순수 폭력에 부여되는 이름인 혁명적 폭력”(FL 168)이라고 말했을 때, 최상의 순수 폭력은 그것이 수단-목적 관계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는 또한 순수한 비폭력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벤야민은 그의 글 뒷부분에서 수단-목적 관계에서 벗어나 있는, 곧 어떤 지정된 목적을 지향하지 않는 폭력의 가능한 사례들로서 신화적 폭력과 신성한 폭력을 검토한다. 하지만 신화적 폭력은 수단이 아닌 ‘발현’(Manifestation)이고 따라서 “비매개적 폭력”이기는 하지만, 인간과 신 사이의 경계를 설정한다는 점에서, 따라서 “폭력으로부터 자유롭게 독립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필연적이고 내밀하게 연루되어 있는 목적을 권력의 이름 아래 법으로 제정”(FL 162)한다는 점에서 법정립적 폭력의 하나임이 드러난다. 따라서 폭력의 비판의 과제는 이러한 직접적 폭력의 신화적 발현을 파괴할 수 있는 순수하고 직접적인 폭력, 곧 신성한 폭력에 대한 질문을 낳는다. 신화적 측면과 모든 측면에서 대립하는 신성한 폭력은 법파괴적이고 면죄해주는 폭력이며 피를 흘리지 않고 목숨을 앗아가는 폭력이다.

데리다가 매우 곤혹스러워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아감벤의 벤야민 해석 및 󰡔호모 사케르󰡕 연작의 초석을 이루는 법과 생명, 피의 관계보다 현재의 논의에서 더 중요한 것은 벤야민이 글의 마지막에서 신화적 폭력과 신성한 폭력을 규정하는 방식이다. 글의 마지막까지 벤야민은 “인간이 발현하는 최상의 순수 폭력”으로서 혁명적 폭력과 신성한 폭력을 동일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러나”로 시작하는 그 다음 문장에서 벤야민은 이러한 동일시를 부정한다. “그러나 순수한 폭력이 어떤 특정한 경우에 실현됐는지 결정하는 것은 인간에게는 가능하지도 절박하지도 않다. 왜냐하면 면죄하게 해주는 힘이 인간에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비교 불가능한 효과 속에서가 아니라면, 신의 폭력이 아니라 오직 신화적 폭력만이 그 자체로 확실히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FL 168-번역은 다소 수정)

이 구절은 벤야민이 순수한 폭력을 그 자체로 긍정하는 것, 다시 말해 폭력의 비판의 문제설정 없이 해방의 폭력을 단순히 주장하는 것이 함축하는 위험을 잘 알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순수한 폭력이 그 자체로 확실히 인식될 수 없다면, 그것은 확실한 인식은 수단-목적 관계에 속하며, 데리다 식으로 말하자면 계산의 질서에 속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자체로 고려된 순수한 폭력이 면죄하게 해주는 힘을 지니고 있고 법과 연루된 폭력들을 근원적으로 파괴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역사 속에 존재하는 폭력이 과연 그것인지, 당장 우리 앞에서 벌어지는 폭력이 순수한 폭력인지 확실히 판단할 수 없다. 순수 폭력은 인식의 질서, 계산의 질서를 초과하는 어떤 것이다. 그리고 모든 혁명, 모든 사건 역시 그러하다.

그렇다면 순수한 폭력은 어떤 영역에 속하며, 역사 속의 정치에서 그것이 지닌 의미는 무엇인지, 또 그것이 여전히 현실성을 지니고 있는지에 관한 물음은 여기서 더 이상 다룰 수가 없다. 다만 이렇게 해서 벤야민은 법과는 다른 종류의 폭력이 과연 가능한지, 그리고 수단과 목적 관계의 바깥에서 폭력의 문제를 사고하는 것이 가능하고 또 바람직한지에 관한 서두의 질문을 추적하는 끝에 하나의 아포리아에 부딪히게 되었다는 점만 지적해두기로 하자.

III. 법과 정의 사이에서-데리다와 차연의 폭력론

 

데리다가 󰡔법의 힘󰡕에서 벤야민의 폭력론에 주목하고 그것에 대한 독해를 기반으로 해체적 폭력론, 해체적인 정치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은, 이러한 아포리아와 무관하지 않다. 이 책에서 데리다의 핵심 테제 중 하나는 법은 법으로서 폭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강제되지 않는 법들도 존재하기는 하지만 법은 그 자체 내에 강제할 수 있는 힘, 강제 가능성을 포함하지 않는다면 법으로서 존립할 수 없다. 법은 법으로서, 법 자체로서 이미 그 자신 안에 폭력을, 힘을 함축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법이 지니고 있는 법의 힘은 항상 이미 법이라는 힘을 함축한다(이 책의 제목은 이런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바로 질문이 제기된다. 법이 법으로서 항상 이미 자신 안에 힘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폭력과는 다른 것이 아닌가? 다시 말해 법적인 힘, 힘으로서의 법과 법 바깥의 폭력, 법을 위협하는 힘은 서로 구별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한편으로 정당한 것일 수 있거나 어쨌든 적법한 것으로 판단될 수 있는 힘 [...] 과, 다른 한편으로 항상 부당한 것으로 간주되는 폭력 사이에는 어떠한 차이가 존재하는가? 정당한 힘 또는 비폭력적인 힘이란 무엇인가?”(FL 17) 이 질문을 편의상 질문 A라고 하자.

질문 A는 이것과 전혀 무관해보이지만, 사실은 본질적으로 연결된 또 다른 질문을 낳는다. “어떤 적법한 권력이 지닌 법의 힘과, 분명 이러한 권위를 설립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선행하는 어떤 적법성에 의해 권위를 부여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이 최초의 설립의 순간에는 합법적이지도 비합법적이지도 않고 [...] 정당하지도 부당하지도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기원적 폭력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FL 17-18) 이 질문은 질문 B라고 하자.

질문 B는 질문 A를 두 가지로 해체한다. 우선 질문 B는 적법한 힘과 불법적인 폭력 사이의 구별에 전제되어 있는 적법성과 불법성 사이의 절대적 대립을 해체한다. 곧 질문 A에서는 법 바깥에 있고 법을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된 불법적 폭력이 질문 B에서는 “기원적 폭력”으로 변화한다. 또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수 있을 것이다. 질문 A에서는 다음과 같은 이항 대립이 설정되어 있다.

적법한 법의 힘 ↔ 불법적인 폭력

반면 질문 B에서는 이러한 이항 대립 중 두 번째 항목(불법적인 폭력)이 다음과 같이 변화한다. 여기서는 불법적인 폭력이 원초적인 기원적 폭력으로 분화된다.

적법한 법의 힘 ↔ 불법적인 폭력

                        원초적인 기원적 폭력

곧 기존의 법체계에서 볼 때 불법적인 폭력으로 간주된 것들 중 적어도 일부는 원초적인 기원적 폭력, 기존의 법체계와 구분되는 새로운 법질서를 창조할 수 있는 폭력인 것이다.

둘째, 이 질문은 더 나아가 질문 A의 이항 대립을 법정립적 폭력과 법보존적 폭력의 차이로 전위시킨다.

원초적인 기원적 폭력 = 법정립적 폭력

적법한 법의 힘 = 법보존적 폭력

따라서 처음에는 별 문제가 없는 구별로 보였던 불법적인 폭력과 적법한 법의 힘 사이의 대립은 사실은 법정립적 폭력과 법보존적 폭력의 대립임이 드러나면서 법과 불법, 합법과 위법 사이의 자명한 대립의 허구성이 폭로되고 법과 폭력 사이의 본질적인 연관성이 드러난다. 여기서 데리다가 드러내는 사태는 벤야민이 “법적 상황의 객관적 모순”이라고 부른 것과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데리다는 󰡔법의 힘󰡕에서 벤야민과 마찬가지로 순수한 폭력, 순수 수단의 폭력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일까? 데리다가 법과 정의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것을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법은 정의가 아니다. 법은 계산의 요소며, 법이 존재한다는 것은 정당하지만, 정의는 계산 불가능한 것이며, 정의는 우리가 계산 불가능한 것과 함께 계산할 것을 요구한다.”(FL 37)

또한 데리다는 “나는 어떤 지점까지는 정의의 개념―내가 여기에서 법의 개념과 구분하려고 하는―을 레비나스의 정의 개념과 연결시키려고 시도해볼 것”이라고 말하면서 “타인과의 관계, 곧 정의”라는 󰡔전체와 무한󰡕의 한 문장을 인용한다.

하지만 이는 얼마간 안이한 독법이다. 왜냐하면 데리다는 법과 정의를 구분하기는 하되 양자를 대립시키거나 분리하지는 않으며, 더욱이 법과 구분되는 정의를 그 자체로 추구하려고 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고립된 정의는 오히려 최악의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계산 불가능한 정의, 선사하는 정의라는 이념은 그것 자체로 고립될 경우에는 항상 악이나 심지어 최악에 더 가까운 것이 되고 마는데, 왜냐하면 이는 항상 가장 도착적인 계산에 의해 재전유될 수 있기 때문이다.”(FL 59)

또한 흔히 오해되는 것과 달리 데리다는 레비나스의 정의 개념을 인용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그대로 수용하지는 않는다. 이 점은 레비나스가 정의에 관한 자신의 생각의 변화를 간명하게 지적하는 한 인터뷰를 살펴보면 분명히 드러난다. “나는 󰡔전체와 무한󰡕에서 ‘정의’라는 단어를 윤리에 관해, 두 사람 사이의 관계에 관해 사용했다. [...] 이제 나에게 ‘정의’는 계산인 것, 지식인 것, 정치를 가정하는 것이다. 이는 정치적인 것과 분리될 수 없다. 이는 내가 일차적인 것으로서 윤리와 구별하는 어떤 것이다.”[“Paradox of Morality”, in The Provocation of Levinas, Routledge, 1988, p. 171.]

이 인터뷰는 정의에 관한 데리다와 레비나스의 생각의 차이점을 잘 보여준다. 레비나스는 󰡔전체와 무한󰡕에서는 정의를 윤리적 문제로 간주했던 반면, 후기에 가서는 반대로 정의를 윤리와 구별되는 정치적 문제, 곧 계산의 문제로 간주한다. 하지만 데리다는 󰡔전체와 무한󰡕에서 “타인과의 관계, 곧 정의”라는 문장을 인용할 때에도 정의를 정치의 문제로 간주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이러한 정의를 계산의 영역으로서 법과 근본적으로 구분되는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데리다의 정의 개념은 󰡔전체와 무한󰡕의 레비나스와도 다르고 후기의 레비나스와도 다른 셈이다. 더욱이 데리다는 정의 그 자체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계산 불가능한 것 그 자체가 낳을 수 있는 최악의 위험을 경계하면서 해체의 작업을 “계산 가능한 것과 계산 불가능한 것의 관계를 계산하고 협상해야”(FL 60) 하는 작업으로 제시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데리다는 벤야민에 대한 독해에서도 벤야민이 애써 구분하려고 하는 개념쌍들이 결국 구분 불가능한 것임을 보여주려고 시도한다. 특히 데리다는 법정초적 폭력과 법정립적 폭력의 대립, 그리고 정치적 총파업과 프롤레타리아 총파업의 대립은 유지 불가능한 것임을 역설한다. 그것은 이 양자 사이에는 항상 되풀이 (불)가능성(itérabilité)의 법칙에서 유래하는 “차연적 오염”(différantielle contamination)(FL 90)이 존재하기 때문이다.[되풀이 (불)가능성이라는 개념은 국내의 많은 독자들에게 생소한 개념인데, 한 마디로 하면 반복은 항상 변형을 낳기 마련이며 동일성의 보존은 차이들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개념에 대한 간략한 해설로는 자크 데리다, 󰡔법의 힘󰡕, 186-88쪽에 수록된 용어해설을 참조하라.] 데리다가 말하는 차연적 오염은 “법정초적이거나 법정립적 폭력 자체는 법보존적 폭력을 포함해야만 하며 결코 그것과 단절될 수 없다”(FL 88)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어떤 법 내지 정치체를 새롭게 정초한 폭력은 그것이 정초적 폭력으로 기억되고 존속하기 위해서는 계속 보존되어야 하며, 따라서 보존적 폭력을 자신의 구조 속에 포함해야 하기 때문이다. 역으로 법보존적 폭력은 자신이 보존하려는 것을 계속 보존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끊임없이 재정초해야 한다. 곧 원래부터 존재하는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는 보존적 폭력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데리다에 따르면 정치적 총파업과 프롤레타리아 총파업의 대립 역시 유지 불가능하다. 이런 의미에서 데리다의 폭력론은 되풀이 (불)가능성의 폭력론이며, 차연의 폭력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해방이나 진정한 정의의 실현이란 불가능한가? 데리다는 차연적 오염 내지 되풀이 (불)가능성의 논리에 따라 정치적 총파업과 프롤레타리아 총파업의 엄격한 구별 불가능성을 주장하면서 결국 해방의 이념 역시 포기하는 것 아닌가? 그 자신이 “고전적인 해방의 이상이야말로 내게는 다른 무엇보다 시의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FL 61)고 주장하고 있지만, 데리다의 해체적 독서는 해방의 이념의 시의성을 사고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가? 데리다에게는 폭력과 대항 폭력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정의로운 폭력의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 것 아닌가?[여러 사람들 중에서 특히 아감벤은 데리다의 벤야민 오독을 지적하면서 이런 방향에서 데리다를 비판하고 있다. 조르조 아감벤, 󰡔호모사케르󰡕, 박진우 옮김, 새물결, 2008; State of Exception,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5. 벤야민(과 슈미트) 해석을 둘러싼 두 사람의 차이 및 두 사람의 일반적인 철학적ㆍ정치적 입장의 차이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글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결국 허무주의 내지 적어도 상대주의적 입장에 불과한 것 아닌가?

성급히 결론을 내리기 전에 다시 󰡔법의 힘󰡕의 제목에 주목해 보자. 데리다 자신의 주해에 따르면 법이라는 힘, 법이 법으로서 지니는 힘은, 법이 봉사하는 외부의 권력을 의미하지 않으며, 법이라는 것은 결국 하나의 폭력에 불과하다는 상대주의적인 함의를 갖지도 않는다. 오히려 법이라는 힘은 새로운 것을 창설하는 힘, 즉 이전에 아무것도 전제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새로운 어떤 것,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내는 수행적 힘을 가리킨다. 따라서 법은, 어떤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제정된 법(법보존적 폭력)의 경우에도 항상 어떤 새로운 것을 창설하는 힘(법정초적 폭력)을 지닐 수밖에 없으며, 반대로 법으로서의 자기 동일성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법은 최초의 창설적 순간―이런 것이 존재한다면―에도 항상 이미 보존 가능성, 곧 되풀이 (불)가능성을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법이라는 힘은 데리다가 󰡔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에서 말한 바 있는 “원(原)-폭력”(archi-violence)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결국 무엇을 의미할까?

데리다에게 원-폭력, 또는 법이 지니고 있는 수행적 힘[또는 베르너 하마허의 표현을 빌린다면 “원수행적”(afformative) 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Werner Hamacher, “Afformative, Strike”, in Andrew Benjamin & Peter Osborne eds., Walter Benjamin's Philosophy, Routledge, 1994 참조.], 또는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마르크스의 유령들󰡕 및 「마르크스의 아들들」, 󰡔마르크스주의와 해체: 불가능한 만남?󰡕, 진태원ㆍ한형식 옮김, 도서출판 길, 2009 참조.]은 혁명의 필연성을 의미한다. 곧 항상 예측할 수 없는 변화가 발생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것의 돌발은 필연적이라는 점에서 혁명은 필연적이다. 그런데 이러한 필연성, 또는―데리다의 핵심적인 양상론에 따르면―필연적 가능성은 합리적 이유 이전의, 합리적 이유의 비합리적(반(反)합리적이 아니라) 조건이라는 점에서 비이성적이며 비규범적이다. 혁명은 항상 필연적이지만, 또한 혁명은 항상 자체 내에 도착적 수행성(perverformativité)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부터 데리다의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첫째, 이 도착적 수행성을 열어 두는 것(데리다가 말하는 장래(avenir)의 의미가 이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의의 가능성, 해방의 가능성을 보존하는 길이다. 데리다에게 혁명의 역사는 목적론적 희망의 역사이면서 동시에 이 희망이 대항 폭력, 또 하나의 합법적 폭력으로 전락하는 역사이기도 하다. 항상 혁명은, 또는 적어도 마르크스(주의)가 추구했던 혁명은, 기존의 법의 위선을 고발하고 그것이 은폐하는 폭력성을 폭로하면서, 동시에 단순히 이 법의 위선을 바로잡거나 이 법의 이념과 실제 사이의 균열을 메우는 데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균열을 가능하게 했던 구조적 원인을 제거하겠다는 약속, 이러한 구조에서 불의와 착취, 지배가 생겨나기 때문에 바로 이 원인을 소멸시키겠다는 약속, 그리고 이를 통해 불의와 착취, 지배를 근원적으로 폐지하겠다는 약속을 자신의 본질의 일부로 포함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러한 목적론적 희망은 항상 대항 폭력, 곧 또 하나의 합법적 폭력으로 전락한다는 점인데, 이는 무엇보다 이것이 스스로를 역사의 완성으로 간주함으로써 원-폭력, 수행적 개방의 힘을 봉쇄하려고 시도하기 때문이다. 원-폭력은 창설의 힘 자체이고 쇄신의 가능성의 근거이기 때문에, 역사의 완성을 추구하면 할수록 폭력 또는 창설의 힘은 보존적 폭력으로 전환될 수밖에 없다. 이는 다시 말하면 폭력을 일소하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폭력의 일소라는 의미에서, 도착 가능성의 소멸이라는 의미에서 궁극적 정의, 궁극적 해방 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둘째, 따라서 오히려 중요한 것은 이 도착적 수행성 내부에서 이 도착의 가능성과 맞서 싸우는 것, “폭력 내부에서 폭력을 반대하는 것”이며, 데리다에게는 이것이 폭력의 비판으로서, 폭력의 해체로서 해체라는 정치의 본질적인 요소를 이룬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새로운 정치인가? 이러한 정치는 종말론/목적론 대 허무주의/상대주의라는 그릇된 양자택일을 넘어서 정치적인 것의 보존을 정치의 고유한 과제로 제시하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이 혁명 또는 해방의 일반화인가? 이전까지의 혁명 내지 해방 운동이 추구하던 불의의 시정, 착취의 폐지라는 목표와 함께 그 실현의 조건으로서, 이러한 해방의 실현을 불가능하게 만들던 (해방에 내재적인) 도착가능성을 제어하고 축소하는 것을 해방 운동의 핵심 과제로 제시하기 때문이다. 

IV. 폭력, 대항폭력, 반(反)폭력―발리바르와 반폭력의 정치

정치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폭력의 문제는 발리바르의 폭력론에서도 핵심 주제가 된다. 아마도 현대 정치철학자들 중에서 가장 체계적이고 가장 깊이 있게 (또 어떤 의미에서는 덜 유럽 중심적으로) 폭력의 문제를 다루는 사람은 발리바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안토니오 네그리나 알랭 바디우 또는 어떤 의미에서는 슬라보예 지젝 같은 이들에게 폭력의 문제는 지배적 폭력에 맞선 해방적 폭력(또는 대항 폭력)의 정당성이라는 문제로 환원 가능하고 따라서 (이론적으로 볼 때) 사소한 것에 불과하다면, 발리바르에게 폭력의 문제는 정치를 구성하는 세 개의 본질적인 개념(해방(émancipation), 변혁(transformation), 시빌리테(civilité)) 중 하나라는 점에서, 또는 다른 두 개념이 가능하기 위한 조건을 이룬다는 점에서 정치철학의 핵심적인 문제가 된다.

폭력의 문제를 처음으로 정치의 핵심 문제로 다루기 시작한 「폭력과 정치: 몇 가지 질문들」[“Violence et politique: Quelques questions”, in Marie-Louise Mallet ed., Le Passage des frontières, Galilée, 1994. 「반폭력과 인권의 정치」, 윤소영 옮김, 󰡔마르크스의 철학, 마르크스의 정치󰡕, 문화과학사, 1995.] 이래 발리바르에게 폭력의 문제는 항상 두 가지 문제와 결부되어 있었다. 하나는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정치의 개념을 좀더 복잡화하고 다면화해야 할 필요성이라는 문제이며, 다른 하나는 해방의 정치를 비롯한 정치 일반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새로운 폭력적 조건의 등장이라는 문제다. 따라서 발리바르의 폭력론의 함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 문제의 쟁점이 먼저 분명하게 인식되어야 한다.

발리바르에게 첫 번째 문제는 정치에 대한 단일한 개념화를 넘어서 정치를 세 개의 상이한 개념을 지닌 복합체로 인식하는 문제로 제기된다. 이것은 발리바르 정치철학의 일반적 구도가 담긴 「정치의 세 개념: 해방, 변혁, 시빌리테」에서 가장 명료하게 제시되고 있다.[서관모ㆍ최원 옮김, 󰡔대중들의 공포󰡕, 도서출판 b, 2007. 이 논문의 인용문은 CM이라는 약어와 함께 본문 중에 쪽수만 표시하겠다. 그리고 이 책에서 이 논문의 제목은 「정치의 세 개념: 해방, 변혁, 시민 인륜」이라고 되어 있는데 우리는 ‘시민 인륜’이라는 번역어를 ‘시빌리테’라는 표현으로 대체했다. 그 이유는 봉건적인 도덕 질서를 가리키는 ‘인륜’이라는 용어를 발리바르가 말하는 시빌리테 개념에 대해 사용하는 것은 (시민이라는 한정이 붙는다 해도) 얼마간 모순적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럴 바에야 음을 차용하여 시빌리테라고 부르는 것이 잠정적으로는 더 나아 보인다.] 그는 이 글에서 해방과 변혁이라는 기존의 두 가지 개념 이외에 시빌리테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해야 할 필요성을 지적하고 있다.

우선 해방 또는 정치의 자율성이란 권리의 내포적 보편성에 준거하는 정치를 가리킨다. 이것은 인간 집단(인민이나 국민, 국가 또는 인류 등과 같은)이 이제는 어떠한 자연적이거나 초월적인 권위에 복종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권위 및 역량에 기초하여 자기 자신을 통치한다는 정치의 권리 선언에 준거한다는 뜻이다. 발리바르는 1789년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에서 이러한 해방의 정치의 원칙이 가장 분명하게 표현되었다고 간주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선언󰡕에서 정치는 인민의 자기 결정의 전개이며, 인민을 구성하는 개인들은 자신들이 향유하는 권리들을 집단적으로 쟁취하여 서로에게 부여하고 보장한다는 호혜성의 원리가 뚜렷하게 선언되고 있기 때문이다(평등=자유). 이러한 의미에서 정치의 자율성을 발리바르는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정치의 자율성은 ... 정치의 주체의 자율성 없이는 인식될 수 없고, 정치의 주체의 자율성이란 역으로 인민을 구성하는 개인들이 근본적 권리들을 서로에게 부여함과 동시에 인민이 스스로 ‘만들어’진다는 사실 이외의 것이 아니다. 주체들이 서로를 위해 해방의 궁극적 원천 및 준거가 되는 한에서가 아니라면, 정치의 자율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CM 33-4)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 정치의 주체들은 보편적인 것의 담지자들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모든 인간은 아무런 조건이나 제한 없이 그가 인간인 한에서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누릴 수 있는 보편적 권리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자율성의 정치는 차별과 배제에 대한 투쟁을 본질적 목표로 삼는다.

그 다음 변혁 또는 정치의 타율성이란 정치를 규정하는 (물질적ㆍ상징적) 조건들, 특히 지배 구조 및 권력 관계들의 변혁을 중심적인 대상으로 삼는 정치를 의미한다. 발리바르 자신은 마르크스(주의)와 푸코를 변혁의 정치의 두 가지 모델로 제시한다. 주지하다시피 마르크스가 정치를 규정하는 본질적인 조건을 자본주의의 토대 내지 경제적 구조에서 찾았다면, 푸코는 규율 권력 및 생명 권력 같은 권력 관계들에서 변혁의 조건을 발견한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정치의 영역은 그것을 조건 짓는 자신의 타자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전혀 자율적이지 않고 타율적이라는 점, 따라서 진정한 정치는 정치의 영역 바깥에 존재한다고 본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또한 두 사람은 진정한 정치는 항상 새로운 주체화 양식의 가능성을 본질적인 요소로 포함한다고 본다는 점에서도 공통적이다. 마르크스에게 그것은 “자본주의적 축적에 함축되어 있는 적대적인 사회화 양식들의 갈라짐”으로, 곧 “한편에는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적 관계의 지배 아래로 개인들 및 노동력의 실질적 포섭이라 부른 사회화 양식[과] ... 다른 편에는 그가 생산자들의 자유로운 연합이라 부른 사회화 양식”(CM 45―강조는 발리바르)의 대립으로 표현된다면, 푸코의 경우에는 “권력 관계들의 장을 가로막고 권력 관계들을 유동성 없고 고정된 것으로 만들며, 운동의 모든 역전 가능성을 차단하는 ... 지배의 상태”에서 저항의 가능성, 자유화(libération)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의 문제로 나타나며, 이는 궁극적으로 “자기의 기술”, 곧 개인들 각자의 “자기에 대한 자기의 관계”(실존의 미학)로 귀착된다.

발리바르가 보기에 이 두 사람의 또 다른 공통점, 곧 이 두 사람이 모델을 제공하는 변혁의 정치의 아포리아를 이루는 것은 지배의 조건이 강화되고 확장되는 가운데 어떻게 그러한 조건을 변혁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대해서 숙명론과 주의주의 사이에서 동요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두 사람 모두 지배 상태의 강화가 동시에 그것에 저항하고 그것을 변혁할 수 있는 주체 생산의 가능성을 잠식하는 상황에서 독단적으로 그러한 가능성을 전제하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아포리아에서 정치에 대한 세 번째 개념인 시빌리테(또는 타율성의 타율성)의 정치의 필요성이 유래한다. “나는 동일성들의 폭력 자체를 대상으로 하는 정치를 특징짓기 위해 시빌리테라는 개념을 시험해 보려 한다.”(CM 57) 이러한 정치의 필요성은 바로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 비롯한다. ‘일회용 인간’의 생산이나 외관상으로는 자연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재해나 전염병, 집단 학살 등과 같은 “‘비주체성의 환상적 압력’과 함께 우리는 분명 푸코가 그 이론화를 제안한 바 있는 모든 권력 관계의 정반대편에 와 있다. 또한 우리는 정치에 대한 권리의 요구가 우스꽝스러운 것이 되어버린 상황에 처해 있다. 인간 조건의 보편성이 거기에서 쟁점이 되지 않거나, 단지 지배적 합리성의 표현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희생자들이 자신들을 해방시키면서 인류를 해방시킬 수 있는 역량을 지닌 정치적 주체로 직접 자기 자신을 사고하고 제시할 수 있는 그 어떤 가능성도 실제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CM 58―번역은 약간 수정) 따라서 시빌리테의 정치가 해방이나 변혁과 다른 대상을 지니고 있고 따라서 또 하나의 정치의 개념으로 제시될 수 있다면, 그것은 시빌리테가 문제 삼는 것이 “행위자들 사이의 인정과 소통, 갈등의 조절을 가로막는 극단적 폭력(violence extrême)의 형태들을 감소시킴으로써 정치적 활동(그 실행의 ‘시간’과 ‘공간’)의 가능성의 조건들 자체를 생산하는 것”[É. Balibar, Nous, citoyens d'Europe?, La Découverte, 2001, p. 184; 󰡔우리는 유럽의 시민인가?󰡕, 진태원 옮김, 후마니타스, 2010(근간).]이기 때문이다.

시빌리테라는 개념은 새로운 유형의 폭력으로서 극단적 폭력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첫 번째 문제는 두 번째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극단적 폭력은 일차적으로 구조적 폭력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구조적 폭력이 “체계의 재생산과 양립 불가능한 저항들을 ... 파괴하는 사회적 관계들에 본래적인 억압”을 의미하고 따라서 항상 모종의 ‘기능성’ 내지 체계적 합리성을 가정한다면, 극단적 폭력은 “수백만 명에 달하는 쓸모없는 인간들의 전면적 제거”, 따라서 “구조의 재생산 전체를 초과하는 객관적 잔혹의 일상성”(CM 59)을 의미한다. 발리바르는 이것을 초객관적 폭력과 초주관적 폭력이라는 두 가지 개념으로 설명한다. 초주관적 폭력이 가리키는 것은 어떠한 변혁도 목표로 삼지 않는 희망 없는 반역, 목적 없는 폭력의 일반화 같은 현상들 외에 1990년대 이후 여러 차례 발생한 이른바 종족 청소나 대량 학살 같은 현상들을 의미하는 증오의 이상화 현상이다. 증오의 이상화는 자기 내부에 있는 타자성과 이질성의 모든 흔적을 제거함으로써 동일성을 순수하게 구현하려는, 심지어 자기 자신을 파괴하면서도 그것을 구현하려고 하는 맹목적이고 (구체적인 개인들 및 집단들의 의지를 넘어선다는 의미에서) 초주관적인 의지 작용이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이러한 극단적 폭력의 양상들은 지구상의 특정한 지역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발리바르가 묘사한 극단적 폭력의 사례들 때문에 이것을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 등과 같은 이른바 저개발 지역이나 치열한 종족적ㆍ종교적 분쟁이 벌어지는 특수한 곳의 문제로 한정하기 쉽지만, 발리바르의 논점은 오히려 극단적 폭력이 일반적인 현상으로 확산된다는 데 있다. 특히 극단적 폭력의 문제는 동일성의 문제, 동일화(identification)(‘동일성 형성’과 ‘동일시’라는 이중적 의미에서)의 문제와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으며, 따라서 인간학의 본질적인 차원과 연루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보편적인 양상을 띤다.

극단적 폭력의 문제가 동일화의 문제와 연결되는 것은 일차적으로 이 후자가 정치의 소재 자체를 이루기 때문이다. 동일성에 대한 발리바르의 관점은 두 가지 핵심적인 이론적(이데올로기론적) 전제, 곧 동일성은 “개인들이 숨쉬는 공기만큼이나 그들의 삶에 필수불가결한 것”으로서의 상상계 속에서 구성되며, 다른 한편으로 동일성은 근본적으로 관(貫)개체적(transindividuel)이라는 것, 곧 “(순수하게) 개인적이지도 (순수하게) 집단적이지도 않다”(CM 62)는 전제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특히 데리다가 잘 보여주었듯이, 모든 동일화는 자연적으로는 부재하는 것을 인위적으로 구성하는 과정, 동일성의 형성과 분할의 양가적 과정인 한에서 항상 이미 폭력적인 과정이며, 또한 푸코가 잘 보여주었듯이 모든 동일화 과정은 정상화의 과정인 한에서 역시 폭력적인 과정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동일화는 정의상 도덕과 문명 및 폭력과 야만의 가능성을 동시에 구성하는 양면적인 과정인 셈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동일화 과정은 두 가지 극단적인 상황을 항상 가능태로서 함축하게 된다. 하나는 개인성을 “‘집괴적’이고 ‘배타적’인 하나의 유일하고 일의적인 동일성으로 환원하는 것”(CM 64―강조는 발리바르)(곧 학생은 항상 학생 이상의 다른 것이어서는 안되고, 여자는 항상 여자 이상의 다른 것이어서는 안되며, 노동자는 항상 노동자로 존재해야 하고, 한국인은 한국인과 다른, 일본인은 일본인과 다른 어떤 존재자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속류화된 포스트모더니즘이 예찬하고 또한 신자유주의적 시장의 명령이 강제하는 것처럼 아무런 고정되거나 본질적인 동일성 없이 그때그때마다 상이한 동일성들로 ‘유연하게’ 전환하는, 끝없이 부유하는 동일성이다.[É. Balibar, “De la préférence nationale à l'invention de la politique”, in Droit de cité, PUF, 2002; 「국민 우선에서 정치의 발명으로」, 󰡔정치체에 대한 권리󰡕, 진태원 옮김, 후마니타스, 2010(근간) 참조.] 첫 번째 경우가 동일성의 히스테리화를 가리킨다면, 두 번째 경우는 동일성의 평범화 또는 완전한 탈인격화를 의미한다. 세계화는 이 두 경향을 강화하면서 한 편에서는 극우 민족주의와 인종주의를 동반하는 초주관적 폭력을 낳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을 “제거할 수 있고 도구화할 수 있는 사물들의 지위로 환원시키는”[É. Balibar, “Violence et civilité. Sur les limites de l'anthropologie politique”, in Alfredo Gomez-Muller ed., La question de l'humain entre l'éthique et l'anthropologie, L'Harmattan, 2004, p. 180.] 초객관적 폭력을 낳는다.

그렇다면 이러한 폭력에 어떻게 맞설 것인가? 우선 이러한 반폭력의 정치는 지극히 어려운 것이라는 점을 지적해두자. 그 이유는 이러한 정치가 전통적인 의미의 정치의 경계를 넘어서 대중들의 동일화 과정, 곧 대중들의 가장 내면적인 삶과 물질적인 이데올로기 국가 장치들 사이의 관계를 문제 삼고 그것을 개조하고 변혁하는 것을 과제로 제시하며, 그것도 인민 대중들 자신의 과제로 제시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정치가 요구되는 상황은 극단적 폭력의 일반화와 더불어 세계적인 “예방적 반(反)혁명 내지 반봉기”[É. Balibar, Nous, citoyens d'Europe?, p. 184.]가 추구되는 상황이기 때문에, 실질적인 반폭력의 정치가 어떻게 가능할지 사고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이러한 예방적 반혁명 내지 반봉기에 맞서 혁명적 대항 폭력을 추구하려는 유혹이 생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발리바르는 이러한 해법에 대해 명시적으로 반대한다. “예방적인 반혁명에 대해 대칭적으로 혁명을 대립시켜야 하는 게 아닐까요? 반봉기에 대해서는 봉기를 대립시켜야 하는 게 아닐까요? 한편으로 본다면 바로 이런 논리야말로 20세기를 [...] ‘극단의 시대’로 만들어 왔습니다. 분명히 문제가 되는 것은, 자기 자신의 내적인 ‘척도’조차 초과했던 또는 모든 대항 권력을 파괴했던 사회적 지배 구조들과 권력관계들을 변혁하는 것이지만, 저는 앞의 질문에 대해 부정적으로 답변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아니 오히려 질문 자체를 전위시키고 복잡화해야 한다고 믿습니다.”[É. Balibar, Ibid., p. 202.]

이러한 관점에서 발리바르는 원칙적으로 두 가지 정치의 결합의 필요성을 지적하고 있다. 하나는 모든 헌정에 내재적인 구성적 봉기의 역량을 복원하고 확장하려는 운동으로서 시민권의 정치이며, 다른 하나는 정치 공동체의 자기 비판으로서 시빌리테의 정치다. 발리바르에게 시민권의 문제가 중요하다면, 그것은 앞에서 말했듯이 근대적 시민권이 내포적으로 보편적인 권리이기 때문이다. 이때의 내포적 보편성은 한편으로는 정치에는 초월적(신 같은)이거나 자연적인 토대(민족이나 종족 같은)가 존재하지 않으며, 정치는 시민들이 서로서로에게 호혜적으로 권리들을 부여하고 확장하는 일임을 뜻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의 주체로서 시민들이 정의상 국적이나 종교, 성별, 인종 등에 구애받지 않는 보편적인 존재자이기 때문에, 시민권의 정치는 특히 국적 여부에 따라 시민권을 한정하는 근대 국민국가의 근본 경향(발리바르는 이를 시민권=국적이라는 등식으로 표현한다)에 맞서 반(反)차별과 반배제 투쟁을 수행하는 정치임을 뜻한다. 따라서 발리바르가 말하는 시민권의 정치란 “‘인간적인 것’이 실현되는 유일한 형식으로서 시민들의 공동체”[É. Balibar, “Violence et civilité”, Op. cit., p. 187.]를 실현하려는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시빌리테의 정치란 이러한 정치 공동체를 실체화하려는 위험, 곧 이러저러한 실체적 토대 위에 정치 공동체를 구성하려는 시도에 맞서 공동체를 비실체화하려는 정치를 의미한다. 발리바르는 네덜란드의 정치철학자인 헤르만 판 휜스테렌(Herman van Gunsteren)을 따라 이러한 공동체를 “운명 공동체”(community of fate)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운명 공동체란 보통의 용법과 달리 “함께 살아가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서로 간의 상호의존 관계를 폐지할 수 없는 집단들이 서로 만나게 되는 현실의 공동체”[É. Balibar, Nous, citoyens d'Europe?, p. 204.]를 가리킨다. 이런 공동체에서는 원주민(가령 한국인)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닌,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시민적 동일성/정체성을, 적어도 상징적으로라도 재검토해 보아야 하며, 다른 모든 이들 ― 곧 어디 출신이든, 선조가 누구든, “적법성”이 어떻든 간에 오늘날 지구의 한쪽에서 동일한 “운명”을 공유하고 있는 이들 ― 과 함께 그런 정체성을 현재 시점에서 재구성해야”[É. Balibar, Ibid., p. 212(강조는 발리바르).] 한다. 따라서 운명 공동체는 매우 급진적인 다원적 정치 공동체가 될 수밖에 없으며, 그것이 구현하는 시민권은 역시 판 휜스테렌의 표현을 빌리면 “미완의 시민권”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관점은 폭력의 비판의 문제에 관한 완전한 답변이 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우리가 폭력 안에서 폭력에 맞서는 반폭력의 정치를 구체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는 점에서는 오늘날 폭력의 비판을 위한 탁월한 준거 중 하나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V. 맺음말

간단히 결론을 내리자면, 폭력의 비판은, 억압적 폭력이든 아니면 그것에 맞서는 대항 폭력이든 간에 폭력은 하나의 쉬볼렛임을 긍정하는 데서 출발한다.[쉬볼렛은 구약성경 사사기 12장 6절에 나오는 기사에서 유래한다. 구약시대에 전쟁에서 승리한 길르앗 병사들은 복장과 언어, 심지어 생김새까지도 비슷한 에브라임 사람들을 구분하는 데 어려움을 느꼈다. 옥수수를 뜻하는 단어인 ‘Shibboleth’을 길르앗 사람들은 ‘쉬볼렛’이라 발음하는 데 비해 에브라임 사람들은 ‘시볼렛’이라 발음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관문을 통과하는 모든 사람에게 ‘Shibboleth’을 발음하게 하여 에브라임 병사들을 색출해서 죽일 수 있었다. 데리다는 파울 첼란의 시를 다루는 책에 이 제목을 붙인 바 있다. Schibboleth: Pour Paul Celan, Galilée, 1986.] 쉬볼렛은 폭력의 상징이면서 그 자체가 하나의 폭력이며, 폭력의 쉬볼렛은 또한 항상 쉬볼렛의 폭력을 함축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너무 개략적이고 너무 서투른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벤야민과 데리다, 발리바르의 폭력의 비판의 공통점을 한 마디로 요약하여, 그것은 곧 폭력의 쉬볼렛을 넘어서는 일, 따라서 폭력의 쉬볼렛과의 차이 속에서 폭력과 비폭력, 지배와 해방 사이의 차이를 긍정하는 일이라고 말해도 될까? 혹시 그것은 또 하나의 쉬볼렛을 너무 쉽게 발화하는 일은 아닐까? 하지만 그러한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다면 폭력의 비판을 확장하고 심화하는 일은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도 폭력의 비판은 유한한 비판, 폭력 속에서 폭력과 맞서는 일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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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신적 폭력'에 대하여 [김강기명]
    from 비평루트Root/Route:: 2010-02-24 20:15 
    발터 벤야민, (1921) 후반부에 대한 한 메모 가 궁극적으로 다다르는 지점은 법정립적 폭력과 법보존적 폭력이 서로 얽히고 설켜 구분될 수 없는 지대이다. 바이마르 시대, 의회제의 타락과 보존적 폭력과 정립적 폭력의 복합체인, 즉 그 스스로 법을 제정하고 보존하는 경찰권력의 도래는 목적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도, 수단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도 넘을 수 없는 폭력 그 자체의 논리를 드러낸다. 그것도 가장 ‘민주..
 
 
balmas 2010-02-27 0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풍부한 읽을거리를 담은 웹진이네요.^^ 좋은 웹진 소개 감사합니다. 지금은 자세히 보기가 어려운데, 시간나는 대로 천천히 둘러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