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문학] 봄호에 실릴 글을 한 편 올립니다. 발터 벤야민 특집 중 한 편으로 실릴 글인데, 벤야민과 데리다, 발리바르의 폭력론 또는 폭력의 비판을 개략적으로 소묘해보는 글입니다. 아직 교열과 교정이 다 끝난 글이 아니니까 당연히 인용은 불가능합니다. 인용이나 공적인 토론을 원하는 분들은 [세계의 문학] 봄호에 실린 텍스트를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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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쉬볼렛―벤야민, 데리다, 발리바르
언젠가는, 더 이상 역사에 속하지 않는, 유사메시아적인 어느 날엔가는, 마침내 복수의 숙명에서 벗어날 정의를 염원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자크 데리다, 마르크스의 유령들, 진태원 옮김, 이제이북스, 2007, 58쪽.]
문제는 우리가 이 도래할 혁명들을 욕망할 만한 것들로 생각할 수 있을지 [...] 또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더 낫다면, 문제는 어떤 조건들 아래에서 우리가 이 혁명들을 욕망할 만한 것들로 생각할 수 있을지 아는 것이다.
[Étienne Balibar, “Sed intelligere”, Lignes(nouvelle série) 4, 2001.]
I. 머리말
발터 벤야민의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는 그 문체나 내용만큼이나 비범한 수용사를 지닌 글이다. 벤야민의 유명한 여러 글 중에서도 지난 20여년 동안 이 글만큼 많은 토론과 논란의 대상이 된 것은 없을 것이다.[발터 벤야민,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 진태원 옮김, 법의 힘, 문학과지성사, 2004. 앞으로 벤야민 글의 인용은 이 번역본에 준거할 것이며, FL이라는 약칭 아래 본문 중에 쪽수만 표기하겠다. 그리고 법의 힘 인용 역시 FL이라는 약칭 아래 본문 중에 쪽수만 표기하겠다.] 이것은, 단 하나의 텍스트만을 거명한다면, 1989년 데리다가 미국의 카르도조 법대 대학원에서 했던 저 유명한 강연 법의 힘 덕분에 가능하게 된 일이다. 사실 법의 힘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그 책의 2부인 「벤야민의 이름」) 이전까지 벤야민은 주로 문예이론이나 매체이론 또는 유명한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를 중심으로 논의되어 왔을 뿐,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데리다의 책 이후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는 벤야민 연구의 중심적인 대상 중 하나로 부각되었고 이 글을 비롯한 초기 벤야민의 정치신학적 연구를 20세기 독일 (유대) 사상의 흐름 속에서 고찰하는 작업들도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데리다 책의 비범한 통찰력과 문제제기 덕분에 벤야민 글의 중요성이 온전히 부각된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에 관한 이후의 연구 전체가 데리다의 관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도 아니고 사실 이 글의 의의나 잠재력이 데리다의 해체적인 독서를 통해 온전히 소진되었다고 하기도 어렵다. 역시 한 가지 사례만 들자면, 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연작은 이를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과연 벤야민 글의 어떤 매력이 이처럼 당대 최고의 철학자들 및 이론가들을 사로잡을 수 있었을까? 벤야민의 글의 매력은, 물론 그 글이 지닌 깊이와 미묘한 분석, 독창성에서 생겨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해방의 이념(그것을 공산주의라고 하든, 민주주의라고 하든, 아니면 봉기 일반이라고 하든 간에)이 모든 정치의 환원 불가능한 요소로 존재한다는 것, 다시 말하면 해방의 이념을 포함하지 않는 정치는 진정한 의미의 정치로 간주될 수 없다는 점을 빼어나게 역설하고 있다는 데서 생겨난다. 따라서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에 관한 토론과 평가는 벤야민이 주장하는 해방의 이념이 어떤 것이며, 그것이 함축하는 난점들은 무엇인지, 또 그것이 데리다를 비롯한 동시대의 이론가들에 의해 어떻게 변용되고 있는가에 관한 논의를 포함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좀더 근저에서 본다면 벤야민 글의 진정한 중요성과 매력은 그가 (처음은 아니겠지만) 매우 드물게도 이러한 해방의 이념을 폭력의 문제설정을 통해 다루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한다. 폭력론의 관점에서 해방의 문제를 다룬다는 것은 해방과 폭력이 상호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침투하고 또 서로 자신의 반대물로 전화될 수 있다는 것, 더 나아가 해방이 일의적이지 않다는 것, 다수의 해방들, 다수의 혁명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따라서 해방 운동에 내재적인 도착 가능성을 방지하거나 적어도 줄이기 위해서는 어떤 실천이 필요한지, 여러 가지 해방들 또는 폭력들을 어떻게 식별할 것인지, 그것들을 식별하기 위한 기준은 어떤 것인지가 폭력론의 핵심 문제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 글에서 다룰 발터 벤야민과 자크 데리다, 에티엔 발리바르가 모두 독일어 게발트(Gewalt)―보통 ‘폭력’으로 번역되는―라는 단어의 복합적 의미를 염두에 두면서 논의를 전개하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게발트의 다의성, 심지어 애매성과 모순성은 폭력이라는 지시체가 함축하는 다의성과 애매성, 모순성을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
벤야민 이후로, 그리고 데리다와 발리바르 이후에는 더욱더, 감히 말하자면 정치에 관한 진정한 논의는 폭력에 관한 질문을 생략하거나 우회할 수 없게 되었으며, 폭력론은 정치철학의 근본 물음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이러한 관점에서 벤야민과 자크 데리다, 에티엔 발리바르의 폭력론을 간략하게 살펴보려는 시도다.
II. 벤야민과 순수 폭력의 정치학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의 이론적 대담성은 무엇보다도 법 일반을 정의의 타자로 설정한다는 점에 있다. 사람들의 상식적인 정의감에 따를 경우 법은 정의의 타자가 아니라 정의의 수호자,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본질적인 수단 중 하나다. 적어도 법이 공정하게, 원칙대로 적용된다는 것을 가정한다면 그렇다. 따라서 어떻게 하면 좀더 효과적인 법을 제정하고 좀더 공정한 절차와 좀더 엄정한 집행을 통해 법의 원칙을 있는 그대로 실현하고 집행할 것인가 여부가 정의의 근본 문제 중 하나가 된다.
반면 벤야민에게 법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본질적인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정의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근본적인 장애물이다. 그것은 법이 본질적으로 수단과 목적의 관계에 따라 실행되는 폭력이며, 그로 인해 순수한 정의, 또는 순수한 폭력의 가능성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따라서 벤야민에게 정의의 문제는 법과는 다른 종류의 폭력이 가능한지, 곧 수단과 목적 관계의 바깥에서 폭력의 문제를 사고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문제로 제기된다.
이를 위해 벤야민은 일차적으로 법적 폭력의 유형들(법정립적 폭력과 법보존적 폭력)을 규정하려고 한다. 벤야민은 먼저 당대 법철학의 두 가지 주요 사조인 자연법 사상과 법실증주의를 비판하는데, 이 두 가지 사조는 겉보기에는 서로 대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공통적인 독단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당한 목적은 정당화된 수단을 통해 성취될 수 있고, 정당화된 수단은 정당한 목적을 위해 사용될 수 있다는 것”(FL 141)이다. 이러한 수단과 목적의 순환적 관계에서 벗어날 경우에만 우리는 “원칙으로서의 폭력 그 자체에 대한 척도”를 얻을 수 있으며, “원칙으로서의 폭력 일반”이 그 자체로 “윤리적일 수 있는가”(FL 139-40)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
하지만 벤야민은 폭력의 비판이라는 과제를 수행하는 데서 자연법 사상보다는 법실증주의가 더 적절한 출발점이 될 수 있음을 긍정하는데, 그것은 법실증주의가 적법성 여부라는 기준에 기대어 승인된 폭력과 승인되지 못한 폭력을 구별하려고 시도하기 때문이다. 곧 역사적 인정을 얻은 적법한 목적을 위해 수행되는 폭력은 적법한 폭력이며, 그러한 인정을 결여하고 있는 자연적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폭력은 불법적 폭력인 것이다. 물론 이러한 구별 자체는 가설적인 출발점의 역할을 할 뿐 곧바로 그것의 한계를 드러낸다. 그러한 한계는 “개인들에 맞서 폭력을 독점하려는 법의 이해관계”(FL 144)에서 단적으로 나타난다. 벤야민은 법의 이러한 이해관계에서 단순히 “법적 목적들을 보존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오히려 법 자체를 보존하려는 [법의] 의도”(같은 곳)를 간파한다. 곧 법은, 자신의 바깥에 존재하는 폭력에 대해 그것이 부당한 목적을 추구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법 바깥에 있다는 사실 자체 때문에 위협을 느낀다. 왜 이러한 위협을 느끼게 될까? 그것은 “법적 상황의 객관적(sachliche) 모순”(FL 145) 때문이다.
벤야민이 법적 상황의 객관적 모순이라고 부르는 것은, 법은 폭력 일반을 자신의 타자로 간주하지만, 법은 그 기원에서 폭력에 의존하고 있으며 또한 폭력 없이는 자신을 보존할 수도 없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법은 자신이 독점하는 폭력은 적법한 힘 내지 강제력으로, 자신과 다른 폭력은 불법적인 폭력으로 규정하면서 양자 사이에 절대적인 차이를 부여하려고 하지만, 실제로는 폭력을 독점하지도 못하며 폭력들 사이에서 절대적인 차이를 만들어내지도 못한다. 벤야민은 이것을 파업권과 전쟁권의 사례를 통해 설명한다. 파업권은 법질서 내부에 국가와 별개의 폭력권을 부여받은 법적 주체가 존재한다는 사실, 따라서 법질서 자신이 폭력을 독점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전쟁권의 경우에는 처음에는 강탈적인 폭력으로 보였던 전쟁이 사실은 새로운 법을 부과하고 정립하는 폭력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두 경우에서 법은 또 다른 법질서를 정초하려는 폭력과 맞서 있는 하나의 폭력일 뿐임이 드러난다.
마찬가지로 벤야민은 국민개병제도의 핵심에서 법보존적 폭력을 발견하며, 이 때문에 국민개병제도에 대한 평화주의적이거나 행동주의적 비판은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법보존적 폭력은 이것들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현존하는데, 그것은 이러한 폭력이 “계약의 결과와 마찬가지로 모든 계약의 기원”(FL 153)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무리 평화적으로 체결된 것처럼 보이는 계약이라 할지라도,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계약의 파기나 위반 때문에 항상 폭력을 낳을 수 있다. 벤야민은 더 나아가 모든 법적 계약은 필연적으로 폭력적인 기원을 가질 수밖에 없으며, 어떤 법 제도가 자신 안에 잠재적으로 현존하는 폭력을 망각하게 되면 그 제도는 타락하게 된다고 지적한다. 그는 당대 바이마르의 의회에서 이러한 타락의 사례를 발견한다.
이처럼 어떤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수단으로서의 모든 폭력은 법정립적이거나 법보존적”(FL 152)이라면, “모든 법이론이 파악한 것과는 다른 종류의 폭력들에 관한 질문이 절실히 제기된다.”(FL 160) 이러한 폭력은 목적과의 관련 없이 그 자체로 고려되고 사용된다는 점에서 “순수 수단”적인 폭력이며, “순수 수단의 정치”(FL 156)라고 할 수 있다. 벤야민은 진심의 문화가 존재하고, 진실한 예의, 공감, 평화의 사랑, 신뢰 등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비폭력적인 일치가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시민적인 화합의 기술로서의 대화”를 가장 심원한 사례로 간주한다. 그렇다면 순수 수단은 정치의 영역에서는 불가능한가? 벤야민은 “어떤 조건들 아래에서는” 파업 역시 순수 수단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조르주 소렐을 따라 정치적 총파업과 프롤레타리아 총파업을 구별한다.[조르주 소렐, 폭력에 대한 성찰, 이용재 옮김, 나남, 2007 중 특히 5장 참조.] 현존하는 지배 관계를 전복하면서 새로운 법질서 및 새로운 국가 권력의 구성을 목표로 하는 한에서 전자는 여전히 법적 폭력의 틀, 따라서 수단-목적 관계 속에 사로잡혀 있으며, 그런 한에서 여전히 폭력적이다. 반면 후자는 지배 집단의 존재 근거인 국가 권력의 파괴라는 단 하나의 과제를 설정하며 승리의 모든 물질적 이득에 무관심하다는 점에서 “순수 수단으로서 비폭력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프롤레타리아 총파업, 또는 다른 말로 하면 혁명이 비폭력적이라는 것은 우리의 직관에 어긋나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의미에서 총파업 내지 혁명이 비폭력적일까? 벤야민은 소렐에 의지하여 엄격한 관점에 따라 실행된 총파업은 오히려 부분적 파업보다 더 비폭력적일 수 있음을 지적한다. 더 나아가 프롤레타리아 총파업은 새로운 지배 계급의 구성과 다르지 않은 새로운 국가 권력의 구성(법정립적 폭력)을 목표로 삼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폐지를 목적으로 지니고 있기 때문에 비폭력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프롤레타리아 총파업은 자연적 목적이 됐든 적법한 목적이 됐든 일체의 목적-수단 관계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순수 수단으로서 비폭력적이라고 할 수 있다.[이 문제에 대해서는 사실 소렐 역시 폭력(violence)과 무력(force)을 구분하면서 폭력에 대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무력의 목적이 소수가 통치하는 어떤 사회질서의 수립을 부과하는 것임에 반해서, 폭력은 이 사회질서의 파괴를 지향하는 것”이다. 폭력에 대한 성찰, 242쪽.] 따라서 벤야민이 “인간이 발현하는 최상의 순수 폭력에 부여되는 이름인 혁명적 폭력”(FL 168)이라고 말했을 때, 최상의 순수 폭력은 그것이 수단-목적 관계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는 또한 순수한 비폭력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벤야민은 그의 글 뒷부분에서 수단-목적 관계에서 벗어나 있는, 곧 어떤 지정된 목적을 지향하지 않는 폭력의 가능한 사례들로서 신화적 폭력과 신성한 폭력을 검토한다. 하지만 신화적 폭력은 수단이 아닌 ‘발현’(Manifestation)이고 따라서 “비매개적 폭력”이기는 하지만, 인간과 신 사이의 경계를 설정한다는 점에서, 따라서 “폭력으로부터 자유롭게 독립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필연적이고 내밀하게 연루되어 있는 목적을 권력의 이름 아래 법으로 제정”(FL 162)한다는 점에서 법정립적 폭력의 하나임이 드러난다. 따라서 폭력의 비판의 과제는 이러한 직접적 폭력의 신화적 발현을 파괴할 수 있는 순수하고 직접적인 폭력, 곧 신성한 폭력에 대한 질문을 낳는다. 신화적 측면과 모든 측면에서 대립하는 신성한 폭력은 법파괴적이고 면죄해주는 폭력이며 피를 흘리지 않고 목숨을 앗아가는 폭력이다.
데리다가 매우 곤혹스러워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아감벤의 벤야민 해석 및 호모 사케르 연작의 초석을 이루는 법과 생명, 피의 관계보다 현재의 논의에서 더 중요한 것은 벤야민이 글의 마지막에서 신화적 폭력과 신성한 폭력을 규정하는 방식이다. 글의 마지막까지 벤야민은 “인간이 발현하는 최상의 순수 폭력”으로서 혁명적 폭력과 신성한 폭력을 동일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러나”로 시작하는 그 다음 문장에서 벤야민은 이러한 동일시를 부정한다. “그러나 순수한 폭력이 어떤 특정한 경우에 실현됐는지 결정하는 것은 인간에게는 가능하지도 절박하지도 않다. 왜냐하면 면죄하게 해주는 힘이 인간에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비교 불가능한 효과 속에서가 아니라면, 신의 폭력이 아니라 오직 신화적 폭력만이 그 자체로 확실히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FL 168-번역은 다소 수정)
이 구절은 벤야민이 순수한 폭력을 그 자체로 긍정하는 것, 다시 말해 폭력의 비판의 문제설정 없이 해방의 폭력을 단순히 주장하는 것이 함축하는 위험을 잘 알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순수한 폭력이 그 자체로 확실히 인식될 수 없다면, 그것은 확실한 인식은 수단-목적 관계에 속하며, 데리다 식으로 말하자면 계산의 질서에 속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자체로 고려된 순수한 폭력이 면죄하게 해주는 힘을 지니고 있고 법과 연루된 폭력들을 근원적으로 파괴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역사 속에 존재하는 폭력이 과연 그것인지, 당장 우리 앞에서 벌어지는 폭력이 순수한 폭력인지 확실히 판단할 수 없다. 순수 폭력은 인식의 질서, 계산의 질서를 초과하는 어떤 것이다. 그리고 모든 혁명, 모든 사건 역시 그러하다.
그렇다면 순수한 폭력은 어떤 영역에 속하며, 역사 속의 정치에서 그것이 지닌 의미는 무엇인지, 또 그것이 여전히 현실성을 지니고 있는지에 관한 물음은 여기서 더 이상 다룰 수가 없다. 다만 이렇게 해서 벤야민은 법과는 다른 종류의 폭력이 과연 가능한지, 그리고 수단과 목적 관계의 바깥에서 폭력의 문제를 사고하는 것이 가능하고 또 바람직한지에 관한 서두의 질문을 추적하는 끝에 하나의 아포리아에 부딪히게 되었다는 점만 지적해두기로 하자.
III. 법과 정의 사이에서-데리다와 차연의 폭력론
데리다가 법의 힘에서 벤야민의 폭력론에 주목하고 그것에 대한 독해를 기반으로 해체적 폭력론, 해체적인 정치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은, 이러한 아포리아와 무관하지 않다. 이 책에서 데리다의 핵심 테제 중 하나는 법은 법으로서 폭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강제되지 않는 법들도 존재하기는 하지만 법은 그 자체 내에 강제할 수 있는 힘, 강제 가능성을 포함하지 않는다면 법으로서 존립할 수 없다. 법은 법으로서, 법 자체로서 이미 그 자신 안에 폭력을, 힘을 함축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법이 지니고 있는 법의 힘은 항상 이미 법이라는 힘을 함축한다(이 책의 제목은 이런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바로 질문이 제기된다. 법이 법으로서 항상 이미 자신 안에 힘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폭력과는 다른 것이 아닌가? 다시 말해 법적인 힘, 힘으로서의 법과 법 바깥의 폭력, 법을 위협하는 힘은 서로 구별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한편으로 정당한 것일 수 있거나 어쨌든 적법한 것으로 판단될 수 있는 힘 [...] 과, 다른 한편으로 항상 부당한 것으로 간주되는 폭력 사이에는 어떠한 차이가 존재하는가? 정당한 힘 또는 비폭력적인 힘이란 무엇인가?”(FL 17) 이 질문을 편의상 질문 A라고 하자.
질문 A는 이것과 전혀 무관해보이지만, 사실은 본질적으로 연결된 또 다른 질문을 낳는다. “어떤 적법한 권력이 지닌 법의 힘과, 분명 이러한 권위를 설립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선행하는 어떤 적법성에 의해 권위를 부여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이 최초의 설립의 순간에는 합법적이지도 비합법적이지도 않고 [...] 정당하지도 부당하지도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기원적 폭력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FL 17-18) 이 질문은 질문 B라고 하자.
질문 B는 질문 A를 두 가지로 해체한다. 우선 질문 B는 적법한 힘과 불법적인 폭력 사이의 구별에 전제되어 있는 적법성과 불법성 사이의 절대적 대립을 해체한다. 곧 질문 A에서는 법 바깥에 있고 법을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된 불법적 폭력이 질문 B에서는 “기원적 폭력”으로 변화한다. 또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수 있을 것이다. 질문 A에서는 다음과 같은 이항 대립이 설정되어 있다.
적법한 법의 힘 ↔ 불법적인 폭력
반면 질문 B에서는 이러한 이항 대립 중 두 번째 항목(불법적인 폭력)이 다음과 같이 변화한다. 여기서는 불법적인 폭력이 원초적인 기원적 폭력으로 분화된다.
적법한 법의 힘 ↔ 불법적인 폭력
원초적인 기원적 폭력
곧 기존의 법체계에서 볼 때 불법적인 폭력으로 간주된 것들 중 적어도 일부는 원초적인 기원적 폭력, 기존의 법체계와 구분되는 새로운 법질서를 창조할 수 있는 폭력인 것이다.
둘째, 이 질문은 더 나아가 질문 A의 이항 대립을 법정립적 폭력과 법보존적 폭력의 차이로 전위시킨다.
원초적인 기원적 폭력 = 법정립적 폭력
적법한 법의 힘 = 법보존적 폭력
따라서 처음에는 별 문제가 없는 구별로 보였던 불법적인 폭력과 적법한 법의 힘 사이의 대립은 사실은 법정립적 폭력과 법보존적 폭력의 대립임이 드러나면서 법과 불법, 합법과 위법 사이의 자명한 대립의 허구성이 폭로되고 법과 폭력 사이의 본질적인 연관성이 드러난다. 여기서 데리다가 드러내는 사태는 벤야민이 “법적 상황의 객관적 모순”이라고 부른 것과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데리다는 법의 힘에서 벤야민과 마찬가지로 순수한 폭력, 순수 수단의 폭력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일까? 데리다가 법과 정의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것을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법은 정의가 아니다. 법은 계산의 요소며, 법이 존재한다는 것은 정당하지만, 정의는 계산 불가능한 것이며, 정의는 우리가 계산 불가능한 것과 함께 계산할 것을 요구한다.”(FL 37)
또한 데리다는 “나는 어떤 지점까지는 정의의 개념―내가 여기에서 법의 개념과 구분하려고 하는―을 레비나스의 정의 개념과 연결시키려고 시도해볼 것”이라고 말하면서 “타인과의 관계, 곧 정의”라는 전체와 무한의 한 문장을 인용한다.
하지만 이는 얼마간 안이한 독법이다. 왜냐하면 데리다는 법과 정의를 구분하기는 하되 양자를 대립시키거나 분리하지는 않으며, 더욱이 법과 구분되는 정의를 그 자체로 추구하려고 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고립된 정의는 오히려 최악의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계산 불가능한 정의, 선사하는 정의라는 이념은 그것 자체로 고립될 경우에는 항상 악이나 심지어 최악에 더 가까운 것이 되고 마는데, 왜냐하면 이는 항상 가장 도착적인 계산에 의해 재전유될 수 있기 때문이다.”(FL 59)
또한 흔히 오해되는 것과 달리 데리다는 레비나스의 정의 개념을 인용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그대로 수용하지는 않는다. 이 점은 레비나스가 정의에 관한 자신의 생각의 변화를 간명하게 지적하는 한 인터뷰를 살펴보면 분명히 드러난다. “나는 전체와 무한에서 ‘정의’라는 단어를 윤리에 관해, 두 사람 사이의 관계에 관해 사용했다. [...] 이제 나에게 ‘정의’는 계산인 것, 지식인 것, 정치를 가정하는 것이다. 이는 정치적인 것과 분리될 수 없다. 이는 내가 일차적인 것으로서 윤리와 구별하는 어떤 것이다.”[“Paradox of Morality”, in The Provocation of Levinas, Routledge, 1988, p. 171.]
이 인터뷰는 정의에 관한 데리다와 레비나스의 생각의 차이점을 잘 보여준다. 레비나스는 전체와 무한에서는 정의를 윤리적 문제로 간주했던 반면, 후기에 가서는 반대로 정의를 윤리와 구별되는 정치적 문제, 곧 계산의 문제로 간주한다. 하지만 데리다는 전체와 무한에서 “타인과의 관계, 곧 정의”라는 문장을 인용할 때에도 정의를 정치의 문제로 간주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이러한 정의를 계산의 영역으로서 법과 근본적으로 구분되는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데리다의 정의 개념은 전체와 무한의 레비나스와도 다르고 후기의 레비나스와도 다른 셈이다. 더욱이 데리다는 정의 그 자체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계산 불가능한 것 그 자체가 낳을 수 있는 최악의 위험을 경계하면서 해체의 작업을 “계산 가능한 것과 계산 불가능한 것의 관계를 계산하고 협상해야”(FL 60) 하는 작업으로 제시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데리다는 벤야민에 대한 독해에서도 벤야민이 애써 구분하려고 하는 개념쌍들이 결국 구분 불가능한 것임을 보여주려고 시도한다. 특히 데리다는 법정초적 폭력과 법정립적 폭력의 대립, 그리고 정치적 총파업과 프롤레타리아 총파업의 대립은 유지 불가능한 것임을 역설한다. 그것은 이 양자 사이에는 항상 되풀이 (불)가능성(itérabilité)의 법칙에서 유래하는 “차연적 오염”(différantielle contamination)(FL 90)이 존재하기 때문이다.[되풀이 (불)가능성이라는 개념은 국내의 많은 독자들에게 생소한 개념인데, 한 마디로 하면 반복은 항상 변형을 낳기 마련이며 동일성의 보존은 차이들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개념에 대한 간략한 해설로는 자크 데리다, 법의 힘, 186-88쪽에 수록된 용어해설을 참조하라.] 데리다가 말하는 차연적 오염은 “법정초적이거나 법정립적 폭력 자체는 법보존적 폭력을 포함해야만 하며 결코 그것과 단절될 수 없다”(FL 88)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어떤 법 내지 정치체를 새롭게 정초한 폭력은 그것이 정초적 폭력으로 기억되고 존속하기 위해서는 계속 보존되어야 하며, 따라서 보존적 폭력을 자신의 구조 속에 포함해야 하기 때문이다. 역으로 법보존적 폭력은 자신이 보존하려는 것을 계속 보존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끊임없이 재정초해야 한다. 곧 원래부터 존재하는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는 보존적 폭력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데리다에 따르면 정치적 총파업과 프롤레타리아 총파업의 대립 역시 유지 불가능하다. 이런 의미에서 데리다의 폭력론은 되풀이 (불)가능성의 폭력론이며, 차연의 폭력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해방이나 진정한 정의의 실현이란 불가능한가? 데리다는 차연적 오염 내지 되풀이 (불)가능성의 논리에 따라 정치적 총파업과 프롤레타리아 총파업의 엄격한 구별 불가능성을 주장하면서 결국 해방의 이념 역시 포기하는 것 아닌가? 그 자신이 “고전적인 해방의 이상이야말로 내게는 다른 무엇보다 시의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FL 61)고 주장하고 있지만, 데리다의 해체적 독서는 해방의 이념의 시의성을 사고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가? 데리다에게는 폭력과 대항 폭력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정의로운 폭력의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 것 아닌가?[여러 사람들 중에서 특히 아감벤은 데리다의 벤야민 오독을 지적하면서 이런 방향에서 데리다를 비판하고 있다. 조르조 아감벤, 호모사케르, 박진우 옮김, 새물결, 2008; State of Exception,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5. 벤야민(과 슈미트) 해석을 둘러싼 두 사람의 차이 및 두 사람의 일반적인 철학적ㆍ정치적 입장의 차이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글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결국 허무주의 내지 적어도 상대주의적 입장에 불과한 것 아닌가?
성급히 결론을 내리기 전에 다시 법의 힘의 제목에 주목해 보자. 데리다 자신의 주해에 따르면 법이라는 힘, 법이 법으로서 지니는 힘은, 법이 봉사하는 외부의 권력을 의미하지 않으며, 법이라는 것은 결국 하나의 폭력에 불과하다는 상대주의적인 함의를 갖지도 않는다. 오히려 법이라는 힘은 새로운 것을 창설하는 힘, 즉 이전에 아무것도 전제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새로운 어떤 것,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내는 수행적 힘을 가리킨다. 따라서 법은, 어떤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제정된 법(법보존적 폭력)의 경우에도 항상 어떤 새로운 것을 창설하는 힘(법정초적 폭력)을 지닐 수밖에 없으며, 반대로 법으로서의 자기 동일성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법은 최초의 창설적 순간―이런 것이 존재한다면―에도 항상 이미 보존 가능성, 곧 되풀이 (불)가능성을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법이라는 힘은 데리다가 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에서 말한 바 있는 “원(原)-폭력”(archi-violence)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결국 무엇을 의미할까?
데리다에게 원-폭력, 또는 법이 지니고 있는 수행적 힘[또는 베르너 하마허의 표현을 빌린다면 “원수행적”(afformative) 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Werner Hamacher, “Afformative, Strike”, in Andrew Benjamin & Peter Osborne eds., Walter Benjamin's Philosophy, Routledge, 1994 참조.], 또는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마르크스의 유령들 및 「마르크스의 아들들」, 마르크스주의와 해체: 불가능한 만남?, 진태원ㆍ한형식 옮김, 도서출판 길, 2009 참조.]은 혁명의 필연성을 의미한다. 곧 항상 예측할 수 없는 변화가 발생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것의 돌발은 필연적이라는 점에서 혁명은 필연적이다. 그런데 이러한 필연성, 또는―데리다의 핵심적인 양상론에 따르면―필연적 가능성은 합리적 이유 이전의, 합리적 이유의 비합리적(반(反)합리적이 아니라) 조건이라는 점에서 비이성적이며 비규범적이다. 혁명은 항상 필연적이지만, 또한 혁명은 항상 자체 내에 도착적 수행성(perverformativité)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부터 데리다의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첫째, 이 도착적 수행성을 열어 두는 것(데리다가 말하는 장래(avenir)의 의미가 이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의의 가능성, 해방의 가능성을 보존하는 길이다. 데리다에게 혁명의 역사는 목적론적 희망의 역사이면서 동시에 이 희망이 대항 폭력, 또 하나의 합법적 폭력으로 전락하는 역사이기도 하다. 항상 혁명은, 또는 적어도 마르크스(주의)가 추구했던 혁명은, 기존의 법의 위선을 고발하고 그것이 은폐하는 폭력성을 폭로하면서, 동시에 단순히 이 법의 위선을 바로잡거나 이 법의 이념과 실제 사이의 균열을 메우는 데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균열을 가능하게 했던 구조적 원인을 제거하겠다는 약속, 이러한 구조에서 불의와 착취, 지배가 생겨나기 때문에 바로 이 원인을 소멸시키겠다는 약속, 그리고 이를 통해 불의와 착취, 지배를 근원적으로 폐지하겠다는 약속을 자신의 본질의 일부로 포함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러한 목적론적 희망은 항상 대항 폭력, 곧 또 하나의 합법적 폭력으로 전락한다는 점인데, 이는 무엇보다 이것이 스스로를 역사의 완성으로 간주함으로써 원-폭력, 수행적 개방의 힘을 봉쇄하려고 시도하기 때문이다. 원-폭력은 창설의 힘 자체이고 쇄신의 가능성의 근거이기 때문에, 역사의 완성을 추구하면 할수록 폭력 또는 창설의 힘은 보존적 폭력으로 전환될 수밖에 없다. 이는 다시 말하면 폭력을 일소하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폭력의 일소라는 의미에서, 도착 가능성의 소멸이라는 의미에서 궁극적 정의, 궁극적 해방 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둘째, 따라서 오히려 중요한 것은 이 도착적 수행성 내부에서 이 도착의 가능성과 맞서 싸우는 것, “폭력 내부에서 폭력을 반대하는 것”이며, 데리다에게는 이것이 폭력의 비판으로서, 폭력의 해체로서 해체라는 정치의 본질적인 요소를 이룬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새로운 정치인가? 이러한 정치는 종말론/목적론 대 허무주의/상대주의라는 그릇된 양자택일을 넘어서 정치적인 것의 보존을 정치의 고유한 과제로 제시하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이 혁명 또는 해방의 일반화인가? 이전까지의 혁명 내지 해방 운동이 추구하던 불의의 시정, 착취의 폐지라는 목표와 함께 그 실현의 조건으로서, 이러한 해방의 실현을 불가능하게 만들던 (해방에 내재적인) 도착가능성을 제어하고 축소하는 것을 해방 운동의 핵심 과제로 제시하기 때문이다.
IV. 폭력, 대항폭력, 반(反)폭력―발리바르와 반폭력의 정치
정치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폭력의 문제는 발리바르의 폭력론에서도 핵심 주제가 된다. 아마도 현대 정치철학자들 중에서 가장 체계적이고 가장 깊이 있게 (또 어떤 의미에서는 덜 유럽 중심적으로) 폭력의 문제를 다루는 사람은 발리바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안토니오 네그리나 알랭 바디우 또는 어떤 의미에서는 슬라보예 지젝 같은 이들에게 폭력의 문제는 지배적 폭력에 맞선 해방적 폭력(또는 대항 폭력)의 정당성이라는 문제로 환원 가능하고 따라서 (이론적으로 볼 때) 사소한 것에 불과하다면, 발리바르에게 폭력의 문제는 정치를 구성하는 세 개의 본질적인 개념(해방(émancipation), 변혁(transformation), 시빌리테(civilité)) 중 하나라는 점에서, 또는 다른 두 개념이 가능하기 위한 조건을 이룬다는 점에서 정치철학의 핵심적인 문제가 된다.
폭력의 문제를 처음으로 정치의 핵심 문제로 다루기 시작한 「폭력과 정치: 몇 가지 질문들」[“Violence et politique: Quelques questions”, in Marie-Louise Mallet ed., Le Passage des frontières, Galilée, 1994. 「반폭력과 인권의 정치」, 윤소영 옮김, 마르크스의 철학, 마르크스의 정치, 문화과학사, 1995.] 이래 발리바르에게 폭력의 문제는 항상 두 가지 문제와 결부되어 있었다. 하나는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정치의 개념을 좀더 복잡화하고 다면화해야 할 필요성이라는 문제이며, 다른 하나는 해방의 정치를 비롯한 정치 일반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새로운 폭력적 조건의 등장이라는 문제다. 따라서 발리바르의 폭력론의 함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 문제의 쟁점이 먼저 분명하게 인식되어야 한다.
발리바르에게 첫 번째 문제는 정치에 대한 단일한 개념화를 넘어서 정치를 세 개의 상이한 개념을 지닌 복합체로 인식하는 문제로 제기된다. 이것은 발리바르 정치철학의 일반적 구도가 담긴 「정치의 세 개념: 해방, 변혁, 시빌리테」에서 가장 명료하게 제시되고 있다.[서관모ㆍ최원 옮김, 대중들의 공포, 도서출판 b, 2007. 이 논문의 인용문은 CM이라는 약어와 함께 본문 중에 쪽수만 표시하겠다. 그리고 이 책에서 이 논문의 제목은 「정치의 세 개념: 해방, 변혁, 시민 인륜」이라고 되어 있는데 우리는 ‘시민 인륜’이라는 번역어를 ‘시빌리테’라는 표현으로 대체했다. 그 이유는 봉건적인 도덕 질서를 가리키는 ‘인륜’이라는 용어를 발리바르가 말하는 시빌리테 개념에 대해 사용하는 것은 (시민이라는 한정이 붙는다 해도) 얼마간 모순적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럴 바에야 음을 차용하여 시빌리테라고 부르는 것이 잠정적으로는 더 나아 보인다.] 그는 이 글에서 해방과 변혁이라는 기존의 두 가지 개념 이외에 시빌리테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해야 할 필요성을 지적하고 있다.
우선 해방 또는 정치의 자율성이란 권리의 내포적 보편성에 준거하는 정치를 가리킨다. 이것은 인간 집단(인민이나 국민, 국가 또는 인류 등과 같은)이 이제는 어떠한 자연적이거나 초월적인 권위에 복종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권위 및 역량에 기초하여 자기 자신을 통치한다는 정치의 권리 선언에 준거한다는 뜻이다. 발리바르는 1789년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에서 이러한 해방의 정치의 원칙이 가장 분명하게 표현되었다고 간주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선언에서 정치는 인민의 자기 결정의 전개이며, 인민을 구성하는 개인들은 자신들이 향유하는 권리들을 집단적으로 쟁취하여 서로에게 부여하고 보장한다는 호혜성의 원리가 뚜렷하게 선언되고 있기 때문이다(평등=자유). 이러한 의미에서 정치의 자율성을 발리바르는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정치의 자율성은 ... 정치의 주체의 자율성 없이는 인식될 수 없고, 정치의 주체의 자율성이란 역으로 인민을 구성하는 개인들이 근본적 권리들을 서로에게 부여함과 동시에 인민이 스스로 ‘만들어’진다는 사실 이외의 것이 아니다. 주체들이 서로를 위해 해방의 궁극적 원천 및 준거가 되는 한에서가 아니라면, 정치의 자율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CM 33-4)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 정치의 주체들은 보편적인 것의 담지자들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모든 인간은 아무런 조건이나 제한 없이 그가 인간인 한에서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누릴 수 있는 보편적 권리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자율성의 정치는 차별과 배제에 대한 투쟁을 본질적 목표로 삼는다.
그 다음 변혁 또는 정치의 타율성이란 정치를 규정하는 (물질적ㆍ상징적) 조건들, 특히 지배 구조 및 권력 관계들의 변혁을 중심적인 대상으로 삼는 정치를 의미한다. 발리바르 자신은 마르크스(주의)와 푸코를 변혁의 정치의 두 가지 모델로 제시한다. 주지하다시피 마르크스가 정치를 규정하는 본질적인 조건을 자본주의의 토대 내지 경제적 구조에서 찾았다면, 푸코는 규율 권력 및 생명 권력 같은 권력 관계들에서 변혁의 조건을 발견한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정치의 영역은 그것을 조건 짓는 자신의 타자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전혀 자율적이지 않고 타율적이라는 점, 따라서 진정한 정치는 정치의 영역 바깥에 존재한다고 본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또한 두 사람은 진정한 정치는 항상 새로운 주체화 양식의 가능성을 본질적인 요소로 포함한다고 본다는 점에서도 공통적이다. 마르크스에게 그것은 “자본주의적 축적에 함축되어 있는 적대적인 사회화 양식들의 갈라짐”으로, 곧 “한편에는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적 관계의 지배 아래로 개인들 및 노동력의 실질적 포섭이라 부른 사회화 양식[과] ... 다른 편에는 그가 생산자들의 자유로운 연합이라 부른 사회화 양식”(CM 45―강조는 발리바르)의 대립으로 표현된다면, 푸코의 경우에는 “권력 관계들의 장을 가로막고 권력 관계들을 유동성 없고 고정된 것으로 만들며, 운동의 모든 역전 가능성을 차단하는 ... 지배의 상태”에서 저항의 가능성, 자유화(libération)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의 문제로 나타나며, 이는 궁극적으로 “자기의 기술”, 곧 개인들 각자의 “자기에 대한 자기의 관계”(실존의 미학)로 귀착된다.
발리바르가 보기에 이 두 사람의 또 다른 공통점, 곧 이 두 사람이 모델을 제공하는 변혁의 정치의 아포리아를 이루는 것은 지배의 조건이 강화되고 확장되는 가운데 어떻게 그러한 조건을 변혁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대해서 숙명론과 주의주의 사이에서 동요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두 사람 모두 지배 상태의 강화가 동시에 그것에 저항하고 그것을 변혁할 수 있는 주체 생산의 가능성을 잠식하는 상황에서 독단적으로 그러한 가능성을 전제하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아포리아에서 정치에 대한 세 번째 개념인 시빌리테(또는 타율성의 타율성)의 정치의 필요성이 유래한다. “나는 동일성들의 폭력 자체를 대상으로 하는 정치를 특징짓기 위해 시빌리테라는 개념을 시험해 보려 한다.”(CM 57) 이러한 정치의 필요성은 바로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 비롯한다. ‘일회용 인간’의 생산이나 외관상으로는 자연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재해나 전염병, 집단 학살 등과 같은 “‘비주체성의 환상적 압력’과 함께 우리는 분명 푸코가 그 이론화를 제안한 바 있는 모든 권력 관계의 정반대편에 와 있다. 또한 우리는 정치에 대한 권리의 요구가 우스꽝스러운 것이 되어버린 상황에 처해 있다. 인간 조건의 보편성이 거기에서 쟁점이 되지 않거나, 단지 지배적 합리성의 표현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희생자들이 자신들을 해방시키면서 인류를 해방시킬 수 있는 역량을 지닌 정치적 주체로 직접 자기 자신을 사고하고 제시할 수 있는 그 어떤 가능성도 실제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CM 58―번역은 약간 수정) 따라서 시빌리테의 정치가 해방이나 변혁과 다른 대상을 지니고 있고 따라서 또 하나의 정치의 개념으로 제시될 수 있다면, 그것은 시빌리테가 문제 삼는 것이 “행위자들 사이의 인정과 소통, 갈등의 조절을 가로막는 극단적 폭력(violence extrême)의 형태들을 감소시킴으로써 정치적 활동(그 실행의 ‘시간’과 ‘공간’)의 가능성의 조건들 자체를 생산하는 것”[É. Balibar, Nous, citoyens d'Europe?, La Découverte, 2001, p. 184; 우리는 유럽의 시민인가?, 진태원 옮김, 후마니타스, 2010(근간).]이기 때문이다.
시빌리테라는 개념은 새로운 유형의 폭력으로서 극단적 폭력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첫 번째 문제는 두 번째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극단적 폭력은 일차적으로 구조적 폭력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구조적 폭력이 “체계의 재생산과 양립 불가능한 저항들을 ... 파괴하는 사회적 관계들에 본래적인 억압”을 의미하고 따라서 항상 모종의 ‘기능성’ 내지 체계적 합리성을 가정한다면, 극단적 폭력은 “수백만 명에 달하는 쓸모없는 인간들의 전면적 제거”, 따라서 “구조의 재생산 전체를 초과하는 객관적 잔혹의 일상성”(CM 59)을 의미한다. 발리바르는 이것을 초객관적 폭력과 초주관적 폭력이라는 두 가지 개념으로 설명한다. 초주관적 폭력이 가리키는 것은 어떠한 변혁도 목표로 삼지 않는 희망 없는 반역, 목적 없는 폭력의 일반화 같은 현상들 외에 1990년대 이후 여러 차례 발생한 이른바 종족 청소나 대량 학살 같은 현상들을 의미하는 증오의 이상화 현상이다. 증오의 이상화는 자기 내부에 있는 타자성과 이질성의 모든 흔적을 제거함으로써 동일성을 순수하게 구현하려는, 심지어 자기 자신을 파괴하면서도 그것을 구현하려고 하는 맹목적이고 (구체적인 개인들 및 집단들의 의지를 넘어선다는 의미에서) 초주관적인 의지 작용이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이러한 극단적 폭력의 양상들은 지구상의 특정한 지역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발리바르가 묘사한 극단적 폭력의 사례들 때문에 이것을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 등과 같은 이른바 저개발 지역이나 치열한 종족적ㆍ종교적 분쟁이 벌어지는 특수한 곳의 문제로 한정하기 쉽지만, 발리바르의 논점은 오히려 극단적 폭력이 일반적인 현상으로 확산된다는 데 있다. 특히 극단적 폭력의 문제는 동일성의 문제, 동일화(identification)(‘동일성 형성’과 ‘동일시’라는 이중적 의미에서)의 문제와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으며, 따라서 인간학의 본질적인 차원과 연루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보편적인 양상을 띤다.
극단적 폭력의 문제가 동일화의 문제와 연결되는 것은 일차적으로 이 후자가 정치의 소재 자체를 이루기 때문이다. 동일성에 대한 발리바르의 관점은 두 가지 핵심적인 이론적(이데올로기론적) 전제, 곧 동일성은 “개인들이 숨쉬는 공기만큼이나 그들의 삶에 필수불가결한 것”으로서의 상상계 속에서 구성되며, 다른 한편으로 동일성은 근본적으로 관(貫)개체적(transindividuel)이라는 것, 곧 “(순수하게) 개인적이지도 (순수하게) 집단적이지도 않다”(CM 62)는 전제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특히 데리다가 잘 보여주었듯이, 모든 동일화는 자연적으로는 부재하는 것을 인위적으로 구성하는 과정, 동일성의 형성과 분할의 양가적 과정인 한에서 항상 이미 폭력적인 과정이며, 또한 푸코가 잘 보여주었듯이 모든 동일화 과정은 정상화의 과정인 한에서 역시 폭력적인 과정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동일화는 정의상 도덕과 문명 및 폭력과 야만의 가능성을 동시에 구성하는 양면적인 과정인 셈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동일화 과정은 두 가지 극단적인 상황을 항상 가능태로서 함축하게 된다. 하나는 개인성을 “‘집괴적’이고 ‘배타적’인 하나의 유일하고 일의적인 동일성으로 환원하는 것”(CM 64―강조는 발리바르)(곧 학생은 항상 학생 이상의 다른 것이어서는 안되고, 여자는 항상 여자 이상의 다른 것이어서는 안되며, 노동자는 항상 노동자로 존재해야 하고, 한국인은 한국인과 다른, 일본인은 일본인과 다른 어떤 존재자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속류화된 포스트모더니즘이 예찬하고 또한 신자유주의적 시장의 명령이 강제하는 것처럼 아무런 고정되거나 본질적인 동일성 없이 그때그때마다 상이한 동일성들로 ‘유연하게’ 전환하는, 끝없이 부유하는 동일성이다.[É. Balibar, “De la préférence nationale à l'invention de la politique”, in Droit de cité, PUF, 2002; 「국민 우선에서 정치의 발명으로」, 정치체에 대한 권리, 진태원 옮김, 후마니타스, 2010(근간) 참조.] 첫 번째 경우가 동일성의 히스테리화를 가리킨다면, 두 번째 경우는 동일성의 평범화 또는 완전한 탈인격화를 의미한다. 세계화는 이 두 경향을 강화하면서 한 편에서는 극우 민족주의와 인종주의를 동반하는 초주관적 폭력을 낳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을 “제거할 수 있고 도구화할 수 있는 사물들의 지위로 환원시키는”[É. Balibar, “Violence et civilité. Sur les limites de l'anthropologie politique”, in Alfredo Gomez-Muller ed., La question de l'humain entre l'éthique et l'anthropologie, L'Harmattan, 2004, p. 180.] 초객관적 폭력을 낳는다.
그렇다면 이러한 폭력에 어떻게 맞설 것인가? 우선 이러한 반폭력의 정치는 지극히 어려운 것이라는 점을 지적해두자. 그 이유는 이러한 정치가 전통적인 의미의 정치의 경계를 넘어서 대중들의 동일화 과정, 곧 대중들의 가장 내면적인 삶과 물질적인 이데올로기 국가 장치들 사이의 관계를 문제 삼고 그것을 개조하고 변혁하는 것을 과제로 제시하며, 그것도 인민 대중들 자신의 과제로 제시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정치가 요구되는 상황은 극단적 폭력의 일반화와 더불어 세계적인 “예방적 반(反)혁명 내지 반봉기”[É. Balibar, Nous, citoyens d'Europe?, p. 184.]가 추구되는 상황이기 때문에, 실질적인 반폭력의 정치가 어떻게 가능할지 사고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이러한 예방적 반혁명 내지 반봉기에 맞서 혁명적 대항 폭력을 추구하려는 유혹이 생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발리바르는 이러한 해법에 대해 명시적으로 반대한다. “예방적인 반혁명에 대해 대칭적으로 혁명을 대립시켜야 하는 게 아닐까요? 반봉기에 대해서는 봉기를 대립시켜야 하는 게 아닐까요? 한편으로 본다면 바로 이런 논리야말로 20세기를 [...] ‘극단의 시대’로 만들어 왔습니다. 분명히 문제가 되는 것은, 자기 자신의 내적인 ‘척도’조차 초과했던 또는 모든 대항 권력을 파괴했던 사회적 지배 구조들과 권력관계들을 변혁하는 것이지만, 저는 앞의 질문에 대해 부정적으로 답변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아니 오히려 질문 자체를 전위시키고 복잡화해야 한다고 믿습니다.”[É. Balibar, Ibid., p. 202.]
이러한 관점에서 발리바르는 원칙적으로 두 가지 정치의 결합의 필요성을 지적하고 있다. 하나는 모든 헌정에 내재적인 구성적 봉기의 역량을 복원하고 확장하려는 운동으로서 시민권의 정치이며, 다른 하나는 정치 공동체의 자기 비판으로서 시빌리테의 정치다. 발리바르에게 시민권의 문제가 중요하다면, 그것은 앞에서 말했듯이 근대적 시민권이 내포적으로 보편적인 권리이기 때문이다. 이때의 내포적 보편성은 한편으로는 정치에는 초월적(신 같은)이거나 자연적인 토대(민족이나 종족 같은)가 존재하지 않으며, 정치는 시민들이 서로서로에게 호혜적으로 권리들을 부여하고 확장하는 일임을 뜻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의 주체로서 시민들이 정의상 국적이나 종교, 성별, 인종 등에 구애받지 않는 보편적인 존재자이기 때문에, 시민권의 정치는 특히 국적 여부에 따라 시민권을 한정하는 근대 국민국가의 근본 경향(발리바르는 이를 시민권=국적이라는 등식으로 표현한다)에 맞서 반(反)차별과 반배제 투쟁을 수행하는 정치임을 뜻한다. 따라서 발리바르가 말하는 시민권의 정치란 “‘인간적인 것’이 실현되는 유일한 형식으로서 시민들의 공동체”[É. Balibar, “Violence et civilité”, Op. cit., p. 187.]를 실현하려는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시빌리테의 정치란 이러한 정치 공동체를 실체화하려는 위험, 곧 이러저러한 실체적 토대 위에 정치 공동체를 구성하려는 시도에 맞서 공동체를 비실체화하려는 정치를 의미한다. 발리바르는 네덜란드의 정치철학자인 헤르만 판 휜스테렌(Herman van Gunsteren)을 따라 이러한 공동체를 “운명 공동체”(community of fate)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운명 공동체란 보통의 용법과 달리 “함께 살아가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서로 간의 상호의존 관계를 폐지할 수 없는 집단들이 서로 만나게 되는 현실의 공동체”[É. Balibar, Nous, citoyens d'Europe?, p. 204.]를 가리킨다. 이런 공동체에서는 원주민(가령 한국인)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닌,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시민적 동일성/정체성을, 적어도 상징적으로라도 재검토해 보아야 하며, 다른 모든 이들 ― 곧 어디 출신이든, 선조가 누구든, “적법성”이 어떻든 간에 오늘날 지구의 한쪽에서 동일한 “운명”을 공유하고 있는 이들 ― 과 함께 그런 정체성을 현재 시점에서 재구성해야”[É. Balibar, Ibid., p. 212(강조는 발리바르).] 한다. 따라서 운명 공동체는 매우 급진적인 다원적 정치 공동체가 될 수밖에 없으며, 그것이 구현하는 시민권은 역시 판 휜스테렌의 표현을 빌리면 “미완의 시민권”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관점은 폭력의 비판의 문제에 관한 완전한 답변이 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우리가 폭력 안에서 폭력에 맞서는 반폭력의 정치를 구체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는 점에서는 오늘날 폭력의 비판을 위한 탁월한 준거 중 하나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V. 맺음말
간단히 결론을 내리자면, 폭력의 비판은, 억압적 폭력이든 아니면 그것에 맞서는 대항 폭력이든 간에 폭력은 하나의 쉬볼렛임을 긍정하는 데서 출발한다.[쉬볼렛은 구약성경 사사기 12장 6절에 나오는 기사에서 유래한다. 구약시대에 전쟁에서 승리한 길르앗 병사들은 복장과 언어, 심지어 생김새까지도 비슷한 에브라임 사람들을 구분하는 데 어려움을 느꼈다. 옥수수를 뜻하는 단어인 ‘Shibboleth’을 길르앗 사람들은 ‘쉬볼렛’이라 발음하는 데 비해 에브라임 사람들은 ‘시볼렛’이라 발음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관문을 통과하는 모든 사람에게 ‘Shibboleth’을 발음하게 하여 에브라임 병사들을 색출해서 죽일 수 있었다. 데리다는 파울 첼란의 시를 다루는 책에 이 제목을 붙인 바 있다. Schibboleth: Pour Paul Celan, Galilée, 1986.] 쉬볼렛은 폭력의 상징이면서 그 자체가 하나의 폭력이며, 폭력의 쉬볼렛은 또한 항상 쉬볼렛의 폭력을 함축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너무 개략적이고 너무 서투른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벤야민과 데리다, 발리바르의 폭력의 비판의 공통점을 한 마디로 요약하여, 그것은 곧 폭력의 쉬볼렛을 넘어서는 일, 따라서 폭력의 쉬볼렛과의 차이 속에서 폭력과 비폭력, 지배와 해방 사이의 차이를 긍정하는 일이라고 말해도 될까? 혹시 그것은 또 하나의 쉬볼렛을 너무 쉽게 발화하는 일은 아닐까? 하지만 그러한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다면 폭력의 비판을 확장하고 심화하는 일은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도 폭력의 비판은 유한한 비판, 폭력 속에서 폭력과 맞서는 일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