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부터 그린비출판사에서 '프리즘 총서'라는 제목의 총서를 하나 시작하게 됐습니다. 이야기는 작년 초부터 나와서   

한 1년 간 이런저런 준비를 마치고 올해 초부터 이제 책을 내게 됐습니다. 총서의 기획과 운영은 예전부터 해보려고 하던 

일이었는데, 그린비 출판사의 후의와 배려 덕분에 올해부터 시작하게 됐습니다. 안팎으로 엄혹한 상황이어서 더 부담스럽고

어깨가 무거운데, 멀리 내다보고 한 걸음씩 나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아낌없는 조언과 질책, 격려를 부탁드립니다.  

이 글은 프리즘 총서를 소개하기 위해 써본 것인데, 다소 거창한 것 같아서 좀 쑥스럽긴 하지만, 총서에 대한 평소의 

생각을 한번 정리해봤습니다. 앞으로 기회가 되면 좀더 논의를 다듬고 발전시켜보고 싶지만, 지금으로서는 "프리즘 총서"에  

대한 일종의 소개문으로 얼마간 쓸모가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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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즘” 총서를 시작하며

 

 

총서에 대하여

 

총서는 국내의 독자들에게 익숙하면서도 사실은 매우 낯선 어떤 것이다. 국내 출판계에는 지금까지 다수의 총서들이 존재해왔고 또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이름은 “총서”(叢書)나 “신서”(新書) 아니면 “문고”나 “시리즈” 등과 같이 제각각 불려 왔지만, 인문사회과학 출판사들에서는 여러 가지 형태로 총서를 선보였다. 가령 창비의 “창비신서”나 민음사의 “이데아 총서” 또는 문학과지성사에서 내는 “현대의 지성”, “우리 시대의 고전” 같은 것들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또 인문사회과학 전문 출판사들에서 조금 더 작은 규모로, 하지만 좀더 전문적인 주제를 중심으로 펴내는 총서들도 존재한다. 1990년대 초에 솔 출판사에서 출간했던 “입장” 총서는 당시에 국내에 막 소개되고 있던 알튀세르와 데리다, 들뢰즈, 세르 등의 저작을 소개하고 루카치, 벤야민, 아도르노 및 국내 비평가들의 저작을 함께 출간함으로써 많은 관심을 끈 바 있다. 또 문학동네에서는 “모더니티 총서”라는 표제 아래 조르주 바타유, 한스 로베르트 야우스, 라인하르트 코젤렉 등과 같은 현대의 주요 사상가들의 저작을 펴내기도 했다. 최근의 주목할 만한 사례로는 후마니타스에서 내는 “폴리테이아 총서”, 경성대 출판부에서 펴내는 “경성대 문화총서” 등이 있다. 이 두 총서는 뚜렷한 주제를 중심으로 국내외의 주요 저작들을 지속적으로 펴냄으로써 총서라는 이름에 걸맞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국내에는 엄밀한 의미의 총서가 존재했던 적은 그리 많지 않고, 또 그것이 출판 활동의 필수적인 요소로 인식되지도 못한 것 같다. 여기서 엄밀한 의미의 총서란, 주로 인문사회과학계의 지식인들이 해당 학문 분야의 최전선에서 새로운 담론들을 생산하거나 소개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학풍 내지 학문적인 흐름을 형성해나가는 지적 중심을 가리킨다.

 

프랑스에서 총서의 위상

 

국내와 달리 외국, 특히 학술 선진국이라고 할 만한 구미의 여러 국가에서 이런 의미의 총서는 출판 및 학술 활동의 기본적인 토대이자 형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중에서도 프랑스 인문사회과학계와 출판계는 가히 총서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할 만큼 총서 형식이 출판의 핵심 원리 중 하나로 존재하고 있다. 국내에 잘 알려진 프랑스의 저명한 사상가들은 거의 대부분, 프랑스어로는 “콜렉숑”(collection)이라고 불리는 총서를 중심으로 자신들의 학문적인 활동을 전개하면서 동료들 및 후학들과 더불어 독자적인 사상의 흐름을 개척했다.

예컨대 구조주의의 전성 시대에 루이 알튀세르는 프랑수아 마스페로(François Maspéro) 출판사에서 “이론”(théorie) 총서를 중심으로 에티엔 발리바르, 피에르 마슈레, 도미니크 르쿠르, 미셸 페쇠 같은 제자들과 더불어 마르크스주의의 개조 작업을 수행한 바 있다. 또한 자크 데리다는 동료들인 장-뤽 낭시, 필립 라쿠-라바르트, 사라 코프만과 함께 처음에는 플라마리옹(Flammarion) 출판사에서, 나중에는 갈릴레(Galilée) 출판사에서 유명한 “효과 속의 철학”(la philosophie en effet)이라는 총서를 해체론의 본산으로 삼아서 활동했다. 폴 리쾨르 역시 쇠이유(Seuil) 출판사에서 “철학의 질서”(L'ordre philosophique)라는 총서를 만들어 수많은 외국 철학자들 및 프랑스 철학자들의 저작을 출간한 바 있다. “철학의 질서”는 현재는 알랭 바디우가 바르바라 카생과 함께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피에르 부르디외는 미뉘(Minuit) 출판사에서 “공통감”(sens commun)이라는 총서를 맡아서 자신의 저작들을 비롯하여 프랑스 국내외의 철학, 사회과학, 언어학, 예술론 분야의 걸작들을 출간하고 소개했다.

프랑스의 총서들은 이처럼 세계적인 학자들만이 운영하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 학계에서 나름의 학문적 위치를 인정받는 학자들은 너나없이 모두 한두 개의 총서를 맡고 있으며, 심지어 5-6개의 총서를 담당하는 연구자들도 존재한다. 그리고 총서를 맡은 학자들의 학문적인 역량에 따라 어떤 총서들은 프랑스 지식계를 대표하는 학문 활동의 거점으로 인정받는다. 가령 저명한 헤겔 연구자이자 프랑스 강단철학계의 거목이었던 장 이폴리트(Jean Hyppolite)가 프랑스대학출판부(PUF)에서 창설했고 현재는 프랑스 데카르트 연구의 대표자 중 한 사람인 장-뤽 마리옹(Jean-Luc Marion)이 맡고 있는 “에피메테우스”(Epimethée) 총서는 프랑스 철학사 연구에서 가장 권위 있는 총서로 인정받고 있다.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쥘 뷔유맹의 [대수의 철학], 장-프랑수아 쿠르틴의 [수아레즈와 형이상학의 체계], 장-뤽 마리옹의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적 프리즘], 피에르-프랑수아 모로의 [스피노자. 경험과 영원] 등과 같은 20세기 후반 프랑스 강단 철학 연구의 걸작들이 이 총서에서 배출되었다. 따라서 이 총서에서 책을 출간하는 것은 그만큼 학문적인 성과를 인정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피에르 마슈레, 피에르-프랑수아 모로, 프랑수아즈 발리바르 등이 1982년에 프랑스대학출판부에서 창설한 “철학들”(Philosophies)이라는 총서는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스피노자와 정치], [클라우제비츠와 전쟁], [뒤르켐과 자살] 같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고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는 사상가들의 한 가지 주제를 다루는 책들을 펴내고 있다. 이 총서에서 내는 책들은 문고본 판형으로 권당 120여쪽(최근에는 160여쪽으로 증면되었다) 분량의 작은 책들이지만, 총서에 참여하는 저자들이 프랑스 철학계를 주도하는 학자들(가령 에티엔 발리바르, 피에르 마슈레, 피에르-프랑수아 모로, 프랑수아즈 다스튀르 등) 및 유망한 신진 학자들이기 때문에, 책들이 하나 같이 우수한 수준을 자랑하고 있으며, 현재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철학 총서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다.

그밖에도 인문학계에는 수없이 많은 총서들이 존재하며, 갈리마르나 쇠이유, 프랑스대학출판부 등과 같은 대형 출판사에는 각각 수십 개에서 수백 개의 총서들이 존재한다.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내는 수십 개의 총서들 중에는 유명한 “사상 총서”(Bibliothèque des idées)가 있으며, 이 총서는 지난 수십 년 동안 갈리마르 출판사의 인문학 출판의 상징으로 인식되어 왔다. 모리스 메를로 퐁티의 [지각의 현상학](1949), 미셸 푸코의 [말과 사물](1966), 알렉상드르 쿠아레의 [뉴턴 연구](1968), 레지스 드브레의 [이미지의 삶과 죽음](1992) 등이 이 총서에서 출간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단적으로 입증해준다.

따라서 프랑스 학계 및 출판계의 흐름을 보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권위 있고 신망 받는 총서들에서 어떤 책들이 나오고 있는지, 저명한 학자들이 새로 시작한 총서들이 어떤 것인지 살펴봐야 한다. 누가 어떤 총서들을 맡아서 어떤 책들을 내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프랑스 학계나 인문사회과학 출판계의 동향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미국 학계에서 총서의 역할

 

프랑스처럼 철저하게 총서 체제로 운영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최근에는 영미권 출판계에서도 여러 가지 주목할 만한 총서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그 중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지난 1970년대 이후 미국 인문학계에 “비평 이론”(critical theory) 내지 “이론”(theory)이라는 새로운 사조가 형성되는 데서 총서가 수행한 역할이다.

“비평 이론”이나 “이론”은 미국 인문학계에서 대륙 철학, 특히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불리는 현대 프랑스 철학과 그것을 원용하는 다양한 인문학 작업들(문학, 역사학, 여성 이론, 정치학, 인류학, 유럽 철학 등)을 통칭하는 명칭이다. 최근에는 정치철학과 사회철학 연구에서 대륙 철학 내지 포스트구조주의적 이론을 원용하는 작업들을 “정치 이론”(political theory)이라는 명칭으로 따로 부르기도 한다. “이론”은 주로 영문학과나 불문학과, 독문학과, 비교문학과 같은 문학부들, 그리고 인문학부 같은 데서 많이 하며, 유럽, 특히 프랑스의 철학자들이 소속되어 강의나 강연, 연구활동을 하는 곳도 이런 곳이다. 예컨대 데리다나 발리바르 같은 사람은 캘리포니아 대학(어바인)의 불문학 및 로만스어 학부 소속이었고, 우리가 볼 때에는 철학자들로 분류될 수 있는 미국의 학자들(프레드릭 제임슨, 주디스 버틀러, 로돌프 가쉐 등)도 소속은 이처럼 문학부 쪽에 두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 <이론>이라는 분야는 대개 1960년대 말부터 이루어진 프랑스 철학 및 인문학의 수용, 특히 1966년에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열린 유명한 구조주의 학술회의에서 시작되었다고 본다. 이 회의에는 데리다와 라캉, 롤랑 바르트, 르네 지라르, 장-피에르 베르낭 같이 이후에 프랑스 구조주의 철학과 문화계를 대표한 사람들이 거의 모두 참석했으며, 이 회의 이후 미국에 본격적으로 구조주의 및 프랑스 철학과 이론이 수입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미국의 철학계는 분석철학이 주도하고 있기 때문에 철학과에서는 이 사람들을 수용할 만한 여지가 없었고, 대신 이 사람들은 불문학과나 비교문학과 등으로 초빙이 되었다.

따라서 프랑스 철학자들 및 다른 유럽의 철학자들이 문학부 소속으로 활동하게 된 건 얼마간 우발적인 제도적 환경 때문이었는데, 이게 놀랍게도 매우 중요한 결과를 낳게 된다. 미국의 문학 이론계는 1950년대까지 신비평이라는 흐름이 지배적이었으며, 1960년대 이후로 소수의 이론가들이 이 흐름을 대체할 새로운 비평이론을 모색하고 있었다. 여기에 공명한 게 바로 구조주의였다. 구조주의는 신비평의 이론적 엄격함 못지않은 엄밀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신비평처럼 문학 자체의 영역에 폐쇄되어 있는 게 아니라, 사회 및 문화 일반으로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 문학계에서 구조주의는 점차 확산되고 큰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구조주의 자체는 원래 철학에서 처음 시작된 게 아니라 인류학이나 기호학, 정신분석학, 마르크스주의 및 과학사 같은 인문사회과학 영역에서 시작되었으며, 이 분야에서 활동하는 이론가들이나 이 분야에 관심을 가진 철학자들이 각 영역의 문제들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다듬어지고 확산된 지적 흐름이었다. 그래서 구조주의는 워낙 그 성격 자체가 학제적 특성을 강하게 지니고 있고 인문사회과학 영역 전반을 아우르는 다양한 분야를 포괄하고 있어서 좁은 의미의 문학 분야를 넘어서 인문사회과학 영역 전체에 걸친 논의에 개입하게 되었고 이들 분야에 새로운 활력을 제공해 주었다.

1970년대 초에 미국에서는 이처럼 인문학 전반의 문제를 다루는 새로운 학술지들이 창간되는데, [크리티컬 인콰이어리](Critical Inquiry)나 [다이아크리틱스](Diacritics) 등과 같은 학술지들이 대표적이다. 이 학술지들은 구조주의를 비롯한 프랑스 철학만이 아니라, 기호학과 문학이론, 인류학, 사회학, 마르크스주의, 정신분석, 영화이론, 페미니즘, 탈식민주의 같은 다양한 분야의 논의들을 소개하고 토론하기 위한 장을 제공해 주었다. 이 학술지들의 대표적인 필자들이 바로 데리다, 폴 드 만, 푸코, 리오타르, 에드워드 사이드, 가야트리 스피박, 주디스 버틀러 같은 사람들이었다. 이 학술지들이 큰 성공을 거두고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비슷한 성격의 학술지들이 여럿 창간되기 시작하고 “이론”의 영향력이 더 확대되었다.

그리고 “이론”이라는 새로운 학문 분야의 출현과 관련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총서의 역할이다. 이론의 형성 및 확산에서 특히 큰 역할을 담당한 것은 1980년대와 90년대 중반까지 약 15년간 미네소타 대학 출판부에서 발행했던 “문학의 이론과 역사”(Theories and History of Literature)라는 총서다. 비교문학자인 블라드 고드지히(Wlad Godzich)와 독문학자 요헨 슐테 자세(Jochen Schulte-Sasse)가 편집 책임을 맡았던 이 총서는 주로 프랑스와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철학자, 문학이론가, 비평가들의 책을 100여 권 가까이 번역ㆍ소개함으로써 미국 인문학계의 새로운 흐름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이 총서에서 출간된 대표적인 책들로는 장-프랑수아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 조건』, 『쟁론』, 들뢰즈/가타리의 『카프카. 소수 문학을 위하여』, 테오도르 아도르노의 『미학이론』, 모리스 블랑쇼의 『무한한 대화』, 만프레트 프랑크의 『신구조주의란 무엇인가?』, 장-뤽 낭시의 『무위의 공동체』, 조르조 아감벤의 『언어와 죽음』, 미하일 바흐친의 『도스토예프스키 시학의 문제들』 등이 있다.

존 힐리스 밀러 같은 대표적인 비평이론가가 평가하듯이 “‘문학의 이론과 역사’ 총서는 10여년 이상 동안 중요한 이론 저서들을 이용할 수 있게 해줌으로써 미국의 지적인 삶에 엄청난 기여를 했다The Theory and History of Literature series has done an immense service to American intellectual life for more than a decade in making available important books in theory.” 그 결과 <이론>이라는 분야는 단순히 문학이론이나 문학비평의 한 조류가 아니라 새로운 학문으로 평가받는 결과를 낳았으며, 데리다 같은 사람은 “이론”의 등장을 20세기 후반의 가장 주목할 만한 학문적 사건으로 꼽은 바 있다.

90년대 중반 이후 이 총서가 중단된 다음에는 스탠포드 대학 출판부에서 지금도 출간 중에 있는 “자오선”(Meridian) 총서나 “현재의 문화적 기억”(Cultural Memory in the Present) 같은 총서가 비슷한 역할을 계속 수행하고 있다. 이 두 개의 총서에서는 데리다, 레비나스, 블랑쇼, 장-뤽 낭시, 베르나르 스티글레, 조르조 아감벤, 로베르토 에스포지토 등과 같은 현대 사상의 거장들의 저작을 다수 번역ㆍ소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영어권의 중견 이론가 및 신예 학자들의 저작들을 출간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 인문사회과학계에서 이러한 총서들은 외국의 사상들을 독자적으로 변용하고 재창조하는 데서 중요한 기여를 해왔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면모는 미국 인문사회과학계의 대표적인 총서 중 하나인 “독일 사회사상 연구”(Studies in German Social Thought)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사회철학자인 토머스 매카시(Thomas McCarthy)의 책임 아래 MIT 대학 출판부에서 펴내고 있는 이 총서는 특히 프랑크푸르트 학파와 하버마스의 이론을 미국에 체계적으로 도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이 총서에서 출간된 하버마스의 저작은 [공론장의 구조변동], [현대성에 대한 철학적 담론], [탈형이상학적 사유], [사실성과 타당성] 등 20여권에 이르며, 80년대 중반 이후에 출간된 거의 모든 하버마스의 저작들이 이 총서에서 출간되었다. 그밖에도 아도르노나 호르크하이머 같은 1세대 프랑크푸르트 학파 사상가들 및 악셀 호네트를 필두로 한 3세대 학자들의 저작도 체계적으로 소개된 바 있다. 따라서 “독일 사회사상 연구” 총서가 없었다면 오늘날 영미권에서 프랑크푸르트 학파 및 하버마스의 사상이 자신의 영향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저명한 좌파 학술 출판사인 버소(Verso) 출판사의 경우에도 다수의 총서를 운영하고 있다. 가령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샹탈 무페가 맡고 있는 “프로네시스”(Phronesis) 총서에서는 두 사람의 저작들만이 아니라 정치철학 및 사회이론에 관한 빼어난 저서들을 여러 권 펴내고 있으며, 마이크 데비이스가 편집을 맡은 “헤이마켓” 총서에서는 주로 문화정치에 관한 주제를 중심으로 50여권에 이르는 저작들을 출간하고 있다. 그밖에도 시카고 대학 출판부나 뉴욕대학 출판부 같은 대형 대학 출판부들을 비롯해서 영미권의 대형 출판사들에서도 여러 가지 총서들을 운영하고 있다.

 

인문사회과학에서 총서의 의미

 

구미 학술계에서 총서가 지니는 이러한 위상을 감안해봤을 때, 총서가 학술 활동 및 출판 활동에서 갖는 의미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다.

첫째, 총서의 일차적 의미는 인문사회과학 연구와 출판을 연결하는 교량의 역할에서 찾을 수 있다. “출판”은 “publishing”이라는 원어가 가리키듯이 좁은 의미의 상업적 활동을 넘어서 사회 전체에 대해 지식과 정보의 내용을 생산ㆍ유통하고 그것을 통해 공론장을 형성하고 발전시키는 것을 자신의 본질적인 목표로 삼아왔으며, 또 마땅히 그것을 추구해야 한다. 더욱이 전자통신기술 및 인터넷의 발전으로 인해 오늘날의 “publishing”은 전통적인 의미의 문자 매체 및 활자 인쇄의 영역을 넘어 각종 전자 매체를 사용하는 영역까지 범위가 확대되었다. 게다가 웹사이트와 블로그 등을 통한 지식과 정보의 생산과 유통이 활성화되면서, “publishing”은 과거와 같이 생산자와 소비자의 엄격한 구별과 위계를 더 이상 전제할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오늘날 출판이 지니는 의미는 훨씬 더 막중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사정을 감안해보면 그동안 우리나라의 인문사회과학계나 출판계는 모두 급격히 변화하는 여건 속에서 “publishing”이 갖는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해왔다고 보기는 어렵다. 지난 1990년대 초에 일부 지식인들이 전자출판이 열어놓을 새로운 미래에 대해 자못 기술결정론적인 낙관론을 펼친 적이 있으나, 새롭게 확장되고 변화된 출판 공간에서 인문사회과학 고유의 성찰적이고 비판적인 사유의 과제를 어떻게 심화하고 전진시킬 것인가에 대해 진지한 고찰이 수행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 사이에 한국 인문사회과학계는 신자유주의적인 학술 영역 재편 속에서 점점 비판적 사고를 위한 입지를 잃어갔고, 인문사회과학 출판계 역시 지적 시장의 개방과 학습 교재 및 실용서적 중심의 출판 흐름 속에서 대중적인 저술들의 출판에서 자신의 활로를 찾아왔다. 하지만 대중성 일변도의 출판만으로는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한국 인문사회과학 출판의 수준을 향상시키는 데에도 뚜렷한 한계가 존재한다. 그만그만한 수준의 대중적인 교양서들의 출판만으로는 독자들의 지적 욕구들을 얼마간 충족시킬 수는 있을지 몰라도 스스로 사고하고 스스로 지적 활동을 수행하는 교양 대중을 형성하는 데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대중의 형성을 목표로 하지 않는 한 오늘날 “publishing”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의 인문사회과학계와 출판계가 공통으로 직면한 과제 중 하나는 한국 사회 공론장의 강화와 교양 대중의 확장이라는 선순환 구조의 확립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학계의 노력만으로 가능한 것도 아니고 뜻있는 출판인들의 선의로 해결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학계는 대학의 좁은 울타리 안에 안주하면서 오직 등재지 논문 쓰기에 매달리는 소극적 자세에서 벗어나 인문사회과학 고유의 비판적 사유의 과제를 감당해야 하고, 출판계는 “publishing”이라는 개념이 본래 함축하는 “공론 형성”이라는 의미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양자의 노력을 구체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한 방법을 총서 체제의 구축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의미에서 총서 체제가 그러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한 가지 방안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은 프랑스와 미국의 사례에서 본 것처럼 총서 체제가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지식의 생산과 유통, 소비를 좀더 체계적으로 조직하고 긍정적인 경쟁 관계를 도모하는 장으로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이 총서 체제가 갖는 두 번째 의의라고 생각한다.

2000년대 한국 지식 사회의 중요한 변화 중 하나는 이전보다 공론장의 기능이 크게 위축되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의 학술계, 특히 인문사회과학계가 이른바 “학진 체제”로 재편되고 등재학술지 중심의 학술지원정책이 정착되면서, 과거 한국 사회의 공론을 형성하고 확장하는 데 중요한 기능을 했던 공론 학술지의 기능이 약화되고 그 대신 각종 전공 분야의 학술지를 내는 분과학회를 중심으로 인문사회과학은 점점 더 협소한 전공 분야로 축소되고 파편화되어갔다. 등재학술지 중심의 지원정책이 학술 평가 체계를 세우고 그것을 통해 개별 논문의 수준을 향상시킨 것은 긍정적인 기여라고 볼 수 있으나, 그 대가로 인문사회과학 고유의 비판적 기능이 약화된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특히 87년 이래 한국 사회가 이른바 민주화의 시기로 접어든 이후 민주주의를 공고하게 다지기 위해서는 또는 말하자면 “민주주의를 민주화”하기 위해서는 공론장의 확장과 내실화가 필수적이었지만, 90년대 이후 한국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흐름에 편입되고 사회 전체가 신자유주의적인 사회화의 방향에 따라 재편되면서 사회적 공공성과 더불어 공론장 역시 크게 위축되고 말았다. 물론 신자유주의적인 사회화가 거의 전세계적인 현상이며, 대부분의 나라에서 공공성과 공론장의 기능 약화를 피하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특별히 우리나라 인문사회과학계나 출판계를 탓할 문제는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는 신자유주의에 저항하고 그것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기 위한 비판적 인문사회과학의 노력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고, 남미를 비롯한 주변부 국가들에서도 대안적인 세계화를 위한 움직임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는 데 비하면, 한국의 경우 개별적인 몇몇 사례들을 제외하고는 특별히 주목할 만한 비판적인 지적 흐름이 나타나지 못하고 있다. 지난 10여 년 동안 “인문학의 위기”를 외치는 목소리는 여러 차례 있었지만 그것이 인문사회과학 스스로 자신의 체질을 개선하려는 노력과 얼마나 연결되었는지는 의문이다. 정권이 바뀐 이후에야 비로소 비판적인 목소리가 나오고 있지만, 이것이 협소한 정치적 이해관계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좀더 체계적으로 비판적인 논의를 조직하려는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정한 이론적 입장을 선도하거나 공유하는 지식인들이 총서를 조직하여 작업한다면 좀더 효율적인 이론의 생산과 유통 및 대중적인 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작업이 가능하며 또 실제로 많은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은 이미 프랑스나 미국 등의 사례에서 충분히 입증이 되었다. 문제는 국내의 지적ㆍ물질적ㆍ제도적 조건 속에서 이러한 모범적인 사례들을 얼마나 독자적으로 수용하고 변용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셋째, 총서 형식은 교양 대중과의 지적 소통을 위한 의미 있는 장으로서 기능할 수 있다. 지난 1990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광범위한 교양 대중의 형성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의 경제 규모가 질적ㆍ양적 측면에서 비약적으로 성장하고 1980년대 이후에는 고등교육 졸업자가 크게 증가하면서 교양 대중의 규모가 급격히 성장했다. 그리고 교양 대중의 증가는 인문학에 대한 수요의 증가로 이어져서 대학 바깥에서 다수의 인문학 연구 공간이 생겨나고 대중 교양 강좌들이 개설되었다. 또한 출판에서도 대중적인 인문학 저술의 수요가 눈에 띄게 증가했다.

그러나 이처럼 두드러진 교양 대중의 확장에도 불구하고 정작 대학에서는 이러한 수요를 적절하게 수용하지 못하고 그것을 대학 바깥의 사설 기관들에게 일임하는 경향을 보여 왔다. 인문학 위기에 대한 목소리는 바로 대학 영역 안에서의 인문학의 위축을 우려하는 목소리와 다르지 않다. 문제는 이러한 목소리 속에 대학 바깥에 존재하는 교양 대중과의 지적 소통의 문제에 관한 관심과 고민은 그다지 많이 담겨 있지 못했다는 점이다. 대학의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은 인문학 수요가 증가했다는 사실 자체는 반기고 있지만, 그러한 수요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교양 대중과 어떻게 소통해야 할지, 또한 우리 사회의 문제들을 어떻게 비판적이고 성찰적으로 다루어야 할지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동안 출판계는 대중 교양서와 인문서 출간으로 “공론 형성”의 기능을 대신해왔다.

이러한 괴리를 넘어서 교양 대중과 좀더 의미 있는 지적 소통을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총서 체제를 구축하는 일이 필수적이다. 그것은 대학이 지닌 인문사회과학 역량을 좀더 효과적으로 교양 대중에게 제시하는 일이면서 출판사가 지닌 공론 형성의 기능을 좀더 충실히 수행하는 길이기도 하다. 교양 대중은 단지 지식의 객체, 교양 지식의 소비자인 것만은 아니다. 스피노자와 그람시 또는 랑시에르가 각각 강조했듯이 인간은 사고하며 대중은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교양 대중과의 지적 소통은 대학의 연구자들이 대학 바깥의 대중들에게 자신들이 지닌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일방적인 방식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그것은 대학의 인문사회과학 담론이 사회의 좀더 넓은 대중들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동시에 대중들이 지닌 집단적인 창발적 능력이 새로운 지적 담론과 상상력을 고무하는 상호 구성적인 방식으로 작동해야 한다. 우리는 총서 체제가 이러한 관계 방식을 고무하기 위한 유용한 매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프리즘 총서의 지향

 

프리즘 총서는 총서가 수행할 수 있고 또 수행해야 하는 이러한 역할에 대한 자각에 더하여 지난 20여 년 동안 한국의 인문사회과학 학계 및 출판계의 동향에 대한 비판적 반성 위에서 출발한다. 프리즘 총서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목표는 신자유주의라는 “유일사상”이 지배하는 시대에, 단일한 백색의 빛을 뿜어대는 그 유일사상을 분해하고 그 빛에 감춰진 다양한 사고 및 실천의 잠재력들을 드러내는 것이다.

현실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하고 미국 중심의 새로운 세계질서가 전개되기 시작한 이후 신자유주의는 단순한 경제 정책이나 이데올로기 또는 시장 원리의 확산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거시적인 국가 구조 및 사회적 관계에서부터 보통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삶을 전면적으로 재구조화하는 총체적인 지배 원리로 군림해왔다. 더욱 심각한 것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난이나 고발, 심지어 저주의 목소리는 넘쳐나지만, 정작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설득력 있는 이론과 정책 및 제도적 실천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서유럽에서는 좌파 정당들마저 정권을 잡은 이후에는 신자유주의를 대부분 수용하는 일이 일어나곤 했다. 여기에 대한 반발로 일부 좌파 지식인들이나 단체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급진적인 반(反)자본주의적 전망을 제시하지만, 입장의 선명함에 비해 설득력 있는 분석과 논리가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신자유주의가 유일사상이며 총체적인 지배 원리로 군림해왔다고 해서 그것이 단일한 중심으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다. 푸코가 말했듯이 권력은 항상 다양하며 긍정적으로 작동하며, 그것이 총체적인 지배 효과를 산출한다고 해도 그것은 다양한 층위에서 상이한 방식으로 구축되고 재구축되고 변화하고 수렴하면서 작동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를 단일한 권력, 단일한 지배 원리로 간주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관점에서, 신자유주의의 관점에서 신자유주의를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유일한 중심이나 단일한 메커니즘으로 환원하지 않고서도 그것이 발휘하는 총체적인 지배효과를 분석하고 해체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이 오늘날 비판적 인문사회과학의 근본 과제라고 믿는다.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신자유주의 자체에 대한 구체적이고 다면적인 분석이 필수적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가 산출하는 총체적인 지배 효과에는 사회 구조의 재편성과 더불어 인간과 사회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익 추구자로서의 개인, 유일한 조직 원리로서의 시장 원리)의 이데올로기적 관철이 포함될 뿐만 아니라, 과거 역사 및 미래의 전망에 대한 획일화도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진정한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근대성의 형성 과정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이해가 동반되어야 하고 현재의 사회적 지평을 넘어서기 위한 풍부한 정치적 상상력의 개발도 요구된다. 또한 근대 문명의 핵심 요소 중 하나였던 제국주의/반제국주의, 식민화/반식민주의의 첨예한 대립이 남긴 유산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더불어 그것을 지양하는 새로운 문명의 가능성이 모색되어야 한다. 이 모든 작업은 그 자체로 철학적인 것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심미적 감수성의 도야를 요구하는 일이다.

이처럼 역사와 사회, 인간에 대한 포괄적인 전망에 기초하여 신자유주의의 총체적인 지배 효과들을 해체하고 그것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들을 사고하고 모색하는 것이 프리즘 총서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길이다.

끝으로 한 가지 덧붙이자면, 지난 1990년대 말 이후 한국 인문사회과학계에서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사상가들에 대한 물신숭배 경향이다. 마르크스주의라는 거대한 변혁의 사상과 조직 체계가 와해된 이후 그 빈 자리는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을 비롯하여 각종 현대 사상가들 및 이론가들의 이름들로 채워져 왔다. 데리다, 라캉, 푸코, 들뢰즈, 가타리, 보드리야르, 하버마스, 호네트, 라클라우/무페, 지젝, 네그리, 아감벤, 랑시에르, 고진 등과 같은 현대 이론의 스타들의 이름과 그들의 주요 개념들이 마치 유명 연예인이나 패션 브랜드처럼 회자되어 왔고 또 소비되어 왔다. 하지만 과연 그들의 사상이 한국 사회의 문제들과 현상들을 이해하고 분석하는 데 얼마나 기여해왔는지, 새로운 사유와 문제의식을 개발하고 고무하는 데 얼마나 효과적으로 활용되어 왔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스럽다. 그들의 숱한 저작들은 값비싼 로얄티를 물어가며 끊임없이 번역ㆍ출판되고(하지만 많은 경우 심각한 오역의 문제점을 내포한 가운데) 팔려왔지만, 그것들이 얼마나 꼼꼼하게 읽히고 응용되고 비판받고 변용되어 왔는지 역시 의심스럽다. 오히려 그 사상가들은, 그들의 저작들은, 마치 조금 갖고 놀면 싫증나는 장난감처럼, 한 계절 입고 나면 금방 촌스러워 보이는 패션 상품처럼 그렇게 판매와 구매의 좁은 회로 안에서만 유통되었던 것은 아닌가?

프리즘 총서가 지향하는 또 다른 목표 중 하나는 이러한 불모의 사상가 물신숭배에서 벗어나 문제를 개발하고 분석을 고무하고 행동을 촉발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프리즘 총서는 대중적으로 회자되는 명망 높은 사상가들의 저작보다는 역사와 사회에 관한, 우리 시대의 핵심 쟁점들에 관한 깊은 성찰과 근원적인 문제제기를 담고 있는 저작들을 발굴하고 소개할 것이다. 하나의 위대한 사상, 위대한 텍스트는 항상 자신이 속한 컨텍스트에 대한 면밀한 관찰과 깊은 숙고의 결과로 생겨나며, 그러한 천착 덕분에 자신이 원래 속해 있던 좁은 컨텍스트를 넘어 광범위한 영역에서 반향을 미치고 새로운 사고와 실천을 촉발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사상에 고유한 소비와 전유의 방식은 이름을 소비하고 숭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컨텍스트 속으로 그것을 끌어들이고 그 속에서 그것의 적합성과 효용성을 시험해보는 데 있다. 새로운 사상, 새로운 개념, 새로운 문제들은 그러한 시험 과정 속에서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프리즘 총서의 구성

 

프리즘 총서는 7개의 프리즘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의 프리즘은 전체 프리즘의 지향을 구현하면서도 고유한 분야에서 제 각각 독특한 색채를 발산하게 될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프리즘 세계를 지배하는 유일사상, 신자유주의의 다층적인 면모를 드러내기

이 프리즘에서는 현재 세계를 지배하는 유일한 사상, 유일한 이데올로기로서 신자유주의의 해체를 추구할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유일사상이라는 것은 그것이 단일한 이데올로기와 조직, 실천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의미하지 않으며, 또한 신자유주의가 절대적 이데올로기로서의 지위를 유지한다고 해서 그것이 아무런 내적 모순이나 간극, 공백을 포함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신자유주의의 프리즘”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경제 환원주의적 관점에서 벗어나 신자유주의를 좀더 면밀하고 다각적으로 분석하고 해체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신자유주의를 비난하고 저주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그것의 거대한 이데올로기적 위력과 정치ㆍ경제ㆍ문화적 뿌리들을 드러내는 것은 세심하면서도 끈기 있는 노력을 필요로 한다. “신자유주의의 프리즘”에서는 이러한 노력을 구체적이고 치밀하게 보여주는 저작들을 계속 출간할 것이다. 예컨대 신자유주의를 단순한 이데올로기나 정책이 아니라 새로운 지배적 합리성의 구성 과정으로 이해하는 크리스티앙 라발ㆍ피에르 다르도의 [새로운 세계 이성]과 세계화 시대에 출현하는 새로운 전쟁의 양상을 분석하는 메리 칼도어의 [새로운 전쟁과 낡은 전쟁] 등이 그 사례들이다.

탈-근대성의 프리즘 근대 세계를 형성한 여러 갈래의 길을 보여주기, 또 다른 장래의 가능성들을 열어놓기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논쟁의 의미는, 일부의 오해와는 달리, 근대성의 종언에 대한 선언 여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근대성에 대한 새로운 독서 방식들 사이의 갈등에 있다. 만약 근대성의 종언과 탈근대성의 도래와 같은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근대성(들)에 대한 전혀 새로운 인식을 통해서만 가능하게 될 것이다. “탈-근대성의 프리즘”은 이러한 의미에서 근대성(들)을 읽는 새로운 방식, 근대성을 형성하고 근대의 출구로 이끄는 다양한 길들의 가능성들을 보여주고자 한다. 교조적인 근대의 정통으로 복귀하지 않으면서 또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새로운 독단에 맞서서 탈-근대의 새로운 전망들을 개척하는 것, 그것이 탈-근대성의 프리즘의 목표다. 이를 위해 탈-근대성의 프리즘에서는 주로 근대성의 형성 및 전개 과정을 보여주는 독창적인 저작들을 소개할 예정이다. 사상적인 측면에서는 에티엔 발리바르의 [스피노자와 정치], 피에르 마슈레의 [헤겔 또는 스피노자]가 재출간될 것이며, 사회사적인 측면에서는 사회적 시민권의 형성 및 전개 과정을 치밀하게 분석한 로베르 카스텔의 대작 [사회 문제의 변모], 제라르 누아리엘의 [국가, 국민, 이민], 정신분석의 사회 문화사에 관한 탁월한 저작인 엘리 자레츠키의 [영혼의 비밀] 등이 우선 소개될 것이다.

생명권력의 프리즘 생명 그 자체를 좌우하게 된 권력의 지도를 그리기

생명에 대한 인식과 기술, 권력의 발전은 20세기 후반 이후 현대 사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다. 생명공학의 비약적 발전은 두 가지 대립적인 이데올로기 속에 우리의 사고와 행동의 틀을 가두는 경향이 있다. 그 한쪽 편에 기술 유토피아가 섣부른 열광을 자극한다면, 다른 쪽 편에는 생명의 종말에 관한 묵시록적 경고가 맹목적인 공포를 조장하고 있다. 이러한 이중적인 정념의 굴레에서 벗어나 이미 우리의 삶과 존재 자체의 일부가 된, 생명에 대한 미시적이고 거시적인 권력의 메커니즘과 그것에 내재한 위험과 잠재력을 경험적이면서 개념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생명권력의 프리즘”이 추구하는 바다. 이를 위해 생명권력의 프리즘은 생명 그 자체는 처음부터 자연적이면서 동시에 인공적인 것이었으며, 권력은 지배이면서 자유의 조건이라는 것을 기본 전제로 삼는다. 생명권력의 프리즘을 통해 출간될 저작으로는, 영미권 통치성 학파의 대표자인 니컬러스 로즈의 [생명 그 자체의 정치]와, 인류학적인 현장 조사와 마르크스주의 잉여가치론 및 포스트구조주의의 독창적인 결합을 통해 생명권력 분석의 새 지평을 제시한 카우시크 선더 라한의 [생명자본] 등이 있다.

 

정치적인 것의 프리즘 또 다른 사회를 상상하는 정치적 사유의 모험에 참여하기

정치적 사유는 오랫동안 마르크스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의 좁은 틈새에 갇혀 왔으며, 국내에서는 여전히 이 두 가지 대립항들 사이에서 질식된 채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지난 30여 년 동안 외국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된 정치이론의 발전을 감안해보면 이것은 크나큰 지체이고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정치적인 것의 프리즘”은 오늘날 외국에서 논의되는 가장 빼어나고 독창적인 정치적 사유의 면모들을 소개함으로써 한국에서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을 일깨우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민주주의, 인민주권, 시민권, 대표, 입헌주의, 인민주의(populism), 인권, 노동, 혁명 같이 매우 익숙해 보이는 개념들을 낯설게 만듦으로써, 곧 해체함으로써, 새로운 정치적 사유의 가능성들을 모색해보기로 하자. 정치적인 것의 프리즘에서는, 현대 민주주의 이론의 대가인 클로드 르포르의 고전, [정치적인 것에 관한 시론], 시민권 및 공동체에 관한 독창적인 저작인 헤르만 판 휜스테렌의 [시민권 이론], 포퓰리즘에 관한 혁신적인 저서인 벤자민 아르디티의 [자유주의 가장자리의 정치] 등이 소개될 예정이다. 

예술의 프리즘 세계와 불화하는 감각의 움직임들을 탐색하기

21세기는 문화의 시대라는 종종 들리는 매혹적인 구호는, 사실은 오늘날 예술은 신(新)귀족들의 재테크 수단과 다를 바 없는 것이 되었고 예술가들은 자본 축적 회로의 말단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로 포섭되었다는 사실의 역설적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한 철학자의 표현대로 하면 정치는 감각의 질서의 문제이고 감각의 질서가 함축하는 세계와의 불화를 가장 명징하게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여전히 예술이라면, 예술은 자본과 권력에 대한 포섭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러한 포섭의 사실 덕분에 처음부터 정치적인 저항의 출발점들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또한 다른 철학자의 표현을 빌릴 경우 예술은 탁월한 시빌리테(civilité)의 도구라면, 예술은 저항의 또 다른 방식을 실천하기 위한 시금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의 프리즘”은 그러한 실천들을 모색하기 위한 장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예술의 프리즘에서는 피에르 마슈레의 [문학생산의 이론을 위하여] 새 번역본과 장-뤽 낭시/필립 라쿠-라바르트의 [문학적 절대], W.J.T. 미첼의 [그림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외에 미술과 영화, 물질 문화 및 미학 일반에 관한 저작들이 출간될 것이다.

철학적인 것의 프리즘 명사로 정형화된 철학이 아닌, 동사로서의 철학적인 것을 실천하기

오늘날 철학은 다시 새로운 기로에 서 있다. 그것이 어떤 미래(들)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던 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철학의 형태와 실천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초래할 새로운 전환기에 우리가 놓여 있다는 점이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철학사란 철학이 자신의 영역들을 하나하나씩 상실하면서 자신의 정체를 재규정해온 역사라고 할 수도 있는데, 아마도 오늘날 문제가 되는 것은 이제는 아무런 영역도 남지 않은 철학의 활동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곧 철학은 자신보다 더 철학적인 탈-분과학문들의 등장으로 인해 이제 포스트 철학의 시대로의 진입을 강요당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철학의 장래를 기약하는 한 가지 방법은 급진적인 유명론을 추구하는 데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이미 유명무실해진 자신의 영토를 고수하려는 헛된 노력 대신, 활동으로서, 실천으로서의 철학을 추구하는 것이 이미 유령화된 철학의 “경계 위에서의 삶”(sur-vie)의 방식일 것이다. 적어도 그것이 “철학적인 것의 프리즘”의 이론적 내기다. 철학적인 것의 프리즘에서 출간을 준비하고 있는 저작들로는 루이 알튀세르 등이 공동 저술한 [‘자본’을 읽자] 완역본과, 서양 유일신교의 역사를 혁신적으로 재조명하는 얀 아스만의 문제작 [이집트인 모세], 알라이다 아스만의 [기억의 공간], 베르나르 스티글레의 [기술과 시간], 헤이든 화이트의 [형식의 내용. 서사 담론과 역사적 재현] 등이 있다. 

탈식민주의의 프리즘 제국과 식민의 상처를 가로질러 새로운 세계 문명들의 가능성을 꿈꾸기

어떤 시각에서 본다면 지난 반 세기 동안의 세계사는 탈식민주의 운동들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근대성의 역사가 동시에 서구 열강들의 식민지 분할 경쟁과 그에 맞선 반제국주의 투쟁의 역사였다면, 지난 반 세기 동안의 세계사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탈-근대성의 시작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탈식민주의는 아마도 인류 문명의 새로운 전환의 다른 명칭일 것이다. 그러한 전환이 평화와 공존의 장래를 가져다줄지 아니면 또 다른 갈등과 폭력의 장래를 가져다줄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따라서 필연적인 전개 과정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동안 국내에서 탈식민주의는 미국에서 출세한 제3세계 지식인들의 이데올로기로 치부되거나 ‘근대성=식민지 근대성’이라는 등식의 이론적 정당화의 토대 정도로 기능해왔다. “탈식민주의의 프리즘”은 탈식민주의가 본래 지니고 있는 광범위한 이론적ㆍ실천적 질문들을 소개하고, 한반도 및 동아시아에서 그 질문들을 독자적으로 제기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한다. 이 총서에서는 서발턴 연구의 대표작 중 하나인 디페쉬 차크라바르티Dipesh Chakrabarty의 [유럽을 지방화하기](Provincializing Europe) 및 라틴 아메리카 해방 철학의 대가인 엔리케 두셀의 [정치에 관한 20개의 테제] 이외에 탈식민주의의 역사와 주요 쟁점을 다루는 저작들이 소개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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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다 2010-01-06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프리즘 총서의 지향" 절의 3번째 문단의 3번째 줄 "지배 이데올로"를 "지배 이데올로기"로 고쳐야 할 것 같습니다.

balmas 2010-01-07 17:17   좋아요 0 | URL
예 감사합니다. 고치도록 하겠습니다.

truth 2010-01-06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흥미로운 책들이 많네요. 특히 생명권력 프리즘과 신자유주의 프리즘 쪽. 라한의 경우는 국내강연을 듣지 못하고 강연문만 읽어서 아쉬웠는데, 번역본을 벌써 만나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네요. 기대됩니다.

balmas 2010-01-07 17:18   좋아요 0 | URL
관심 있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관심에 보답할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전출처 : ksammy님의 "ksammy님이 작성하신 방명록입니다."

글쎄요, [철학과 인문과학]은 내가 지금 내용이 잘 생각나지 않아서 [프로이트와 라캉]에 한정해서 말하자면, 이 글과 강의록 사이의 차이는 무엇보다도 발표된 글과 미공개 강의 사이의 차이라고 할 수있겠죠.  

[프로이트와 라캉]에서는 주로 라캉의 업적이 어떤 것이고 그것이 왜 인문사회과학, 특히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중요한지 역설하고 있다면, 강의록에서는 라캉의 업적을 중요하게 간주하면서 그것을 동시대의 인문사회과학의 장 속에 위치시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죠. 그 과정에서 라캉의 한계 내지 애매성도 지적하게 되고, 근대 서양 철학 및 인문사회과학의 맥락에서 그의 이론 작업을 검토하고 있죠. 아마 당시에 마르크스주의와 프로이트주의 사이의 전략적 동맹을 추구하고 있던 알튀세르 입장에서는 라캉의 한계에 대해 공공연히 이야기하기는 좀 껄끄러웠을 겁니다.  

사실 이론적으로 굉장히 조심스러운 문제이기도 하구요. 어쨌든 라캉의 애매성 내지 한계에 대한 분석은 [담론이론에 관한 세 개의 노트]에서는 더 분명해지게 되죠. 따라서 나중에 [프로이트 박사의 발견]에서 제기된 라캉에 대한 비판은 이미 초기 작업에서부터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할 수 있겠죠.^^  

물론 [프로이트 박사의 발견]에서 알튀세르의 주장은 이전의 글들과 비교해볼 때 두 가지의 차이점을 보여줍니다.  

1) 메타이론적 관점의 변화 [담론들의 이론에 관한 세 개의 노트]에서는 말 그대로 메타이론(과학들의 과학)을 구성하려는 야심이 표현되고 있는 데 반해, [프로이트 박사의 발견]에서는 이러한 메타이론적 야심이 포기되고, 그 대신 사상으로서의 프로이트주의를 강조하게 되죠. 이제 알튀세르가 보기에 프로이트의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결과로서의 과학이 아니라 운동하고 있는 사상, 작용으로서의 과학입니다.  

2) 프로이트와 라캉의 차이에 대한 강조 바로 여기에서 또 다른 차이점이 나오는데, 그것은 프로이트와 라캉의 차이점에 대한 강조입니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프로이트가 하나의 완성된 과학을 구성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제안한 이론적 ‘가설들’을 결코 확정적이라고 간주하지 않"은 반면, 라캉은 “무의식의 어떤 과학적 이론 대신에 정신분석학의 어떤 철학을 세상에 내놓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러한 알튀세르의 주장은 자신의 초기 작업에 대한 일종의 자기비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제 알튀세르는 메타이론, 과학들의 과학을 추구하기보다는 활동, 작용으로서의 과학을 중시하는 쪽으로 관점을 바꾼 것이죠.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그는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또 다른 상동성을 발견합니다. 이 점은 그 다음해에 발표된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에 대하여]에서 좀더 명시적으로 드러나고 있죠.  

도움이 좀 되셨는지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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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22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발마스 님은 알뛰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중세사회와 관련해서 설명하려는 조르즈 뒤비의
‘세 위계’를 추천할 정도로 알뛰세르를 사랑하는 분이시다. 다만 홉스봄에 대해서만은 포퓰리스트에게 찬
성하는 바이다.

한국의 학계는 홉스봄에 대해서는 진보 내지는 좌파만이 아니라 보수 내지 우파도 칭찬한
다. 좌우를 막론하고 홉스봄을 번역해서 팔아 먹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 것이다. 왜 그는
그렇게 인기가 있을까? 그의 글들을 읽으며 내 나름대로 결론을 내려 보았다. 홉스봄은 맑
스주의 역사학자이면서 동시에 아카데믹한 역사학자이다. 우파들은 하나의 학문 분과인 역
사학 안에서 아카데믹한 학자로서의 모습을 그에게서 찾는 거고 진보나 좌파는 그것만이 아
니라 홉스봄이 대놓고 떠드는 맑스주의자로서의 발언을 상찬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로 홉스봄이 맑스주의자일까? 내가 보기에는 아니다.

그냥 전문적인 역사학자. 다만 좀 개방적인 역사학자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좌우에게 사
랑받는 것이다.

홉스봄을 읽다 보면 말로는 안 그런데 글을 보면 역사는 역사학자만이 하는 것이지 일반민
중들은 역사학을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뿌리깊게 갖고 있는 사람이다.

가령 구술사 또는 일반 민중들이 자신의 삶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 이런 것을 토대로

역사를 만드는 것을 굉장히 혐오한다. 역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만이 역사학이라는 학문을 할 수 있는 거지. 일반 민초들은 그러한 자격이 없다라는 생
각을 뿌리깊게 가진 사람이 홉스봄이다. 과연 맑스주의자가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위의 포퓰리스트는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만이 학문을 할 수 있는 거지. 일반 민초들은
그러한 자격이 없다라는 생각을 뿌리깊게 가진 사람이 발마스 님이라고 비난하고 있는 것이
다.

이 사이트에 방문하신 분들 중에 포퓰리스트의 말에 동의할 사람은 없다고 믿는다.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에서 발행하는 [민족문화연구]에 실릴 글을 하나 올립니다.  최근 한국 인문사회과학계에서 

적잖은 논란거리가 되고 있는 국민국가론에 관해 비판적으로 다룬 글입니다. 원래는 비판적인 고찰을 담은 1부와  

그것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 2부로 이루어진 글인데, 이번 발표한 글에서는 1부만 수록했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2부는 따로 발표할 생각입니다. 혹시 이 글을 인용하거나 비판적인 논의를 하실 분들은 12월 말에 인터넷으로 발행될  

[민족문화연구]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민족문화연구]는 아래 사이트로 가시면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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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이라는 노예? 전체주의적 국민국가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2009년 5월 11일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단 제62차 월요모임에서 처음 발표된 이 글은 원래의 발표문의 제1부에 해당하는 글이며, 󰡔민족문화연구󰡕에 투고하기 위해 상당한 수정과 첨삭을 거쳤다. 국민국가에 관한 대안적 관점을 제시하는 제2부는 독립된 논문으로 추후 발표될 것이다. 월요모임 발표 당시 여러 가지 좋은 논평을 해준 동료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세 명의 익명의 심사위원들의 꼼꼼하고 건설적인 논평 덕분에 보잘 것 없는 논문을 훨씬 더 말끔하게 정리하고 보완할 수 있었다. 이 자리를 빌려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그 분들의 모든 지적을 수용하지 못한 것은 필자의 시야와 능력의 한계 때문이며,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필자에게 있음을 밝혀둔다.]


1. 들어가는 말

 

이 글은 2000년대 들어서 국내외의 몇몇 필자들이 국민국가라는 주제에 관해 보여주는 이론적ㆍ정치적 문제점에 대해 몇 가지 비판적 질문들을 던져 보고, 그러한 문제점에 대한 해법을 제안해보려고 한다. 내가 염두에 둔 필자들은 임지현, 권혁범, 김철, 니시카와 나가오 내지 사카이 나오키 같은 학자들이다.[이하에서 호칭은 모두 생략한다.] 이들은 이론적으로 의미 있는 문제제기와 실천적인 지향으로 인해 국내에서 상당한 공감과 더불어 이론적 영향력을 얻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들의 작업에 대해 한편으로 공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적지 않은 불편함과 거리감을 느끼게 된다. 공감하는 이유는, 다른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도 국내의 뿌리 깊은 종족적 민족주의와 그것이 정치적ㆍ문화적ㆍ일상적인 측면에서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들에 대해 면밀한 비판과 더불어 대안을 모색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한 진보 세력에서도 이러한 민족주의적인 지향이 강하게 남아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러한 비판의 필요성은 더욱 절실하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내가 그들의 작업에 대해 거리감을 느끼는 이유는, 민족주의 및 그것과 긴밀하게 결부된 군사독재와 보수주의에 대한 이들의 비판적 성찰이, 결국에는 국민 자체, 국민 국가라는 범주 자체에 대한 전면적인 기각과 부정을 낳기 때문이다. 뒤에서 좀더 상세히 살펴보겠지만, 이들은 처음에는 민족주의에 대한, 특히 민족주의의 부정적인 측면들(종족적ㆍ배타적ㆍ획일적ㆍ가부장적 측면들)에 대한 비판을 전개하다가 그것을 넘어서 민족 내지 국민과 더불어 국민국가 자체를 문제 삼기에 이른다. 그것은 이들이 단순히 민족주의만이 아니라 근대 정치의 병리적 측면들 전체가 국민과 국민국가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화를 맞아 근대의 지배적인 정치형태로서 국민국가가 위기에 처해 있다든가 국민국가가 종언을 맞이했다는 명제는 이제 별다른 반응을 불러일으키지 못할 만큼 자명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물론 이것은 그 명제를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국민이라는 정치 공동체 및 국민국가의 진보적 성격을 비가역적인 역사적 성취로 간주하는 정치학자나 사회학자들도 적지 않다. 따라서 그들이 보기에 중요한 것은 국민 내지 국민국가를 새로운 역사적 상황에 맞게 개조하고 재구성하는 것이며, 국민이나 국민국가를 전면적으로 기각하는 것은 오히려 근대의 정치적 성취를 훼손하거나 상실할 위험을 안고 있다. 이런 입장을 잘 보여주는 저작으로는 Rogers Brubaker, “The Manichean Myth: Rethinking the Distinction Between 'Civic' and 'Ethnic' Nationalism”, in Hanspeter Kriesi et al., ed., Nation and National Identity: The European Experience in Perspective (Chur: Rügger, 1999); “In the Name of the Nation: Reflections on Nationalism and Patriotism”, Citizenship Studies 8-2, 2004; Dominique Schnapper, Qu'est-ce que la citoyenneté? (Paris: Gallimard, 2000); La Communauté des citoyens (Paris: Gallimard, 2003) 등을 참조. 필자는 이들의 입장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데, 그것은 이들의 입장이 자칫 국민이나 국민국가를 초역사적인 정치적 준거(또는 규범적 모델)로 만들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쉬나페는 ‘국민nation’이라는 모델은 포기할 수 없는 보편적 규범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와 관련된 좋은 논의로는 Étienne Balibar, Nous, citoyens d'Europe? (Paris: La Découverte, 2001) 4장 및 Droit de cité (Paris: PUF, 2002) 9장 참조.] 따라서 국민이나 국민국가 그 자체를 비판하거나 거부하는 이들의 논의는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국민이나 국민국가라는 개념들이 어떤 점에서 비판을 받거나 거부되어야 하며, 또 그렇다면 그것에 대한 대안은 어떤 것인가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일이다. 내가 이들의 작업에 거리감이나 불편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이들의 논의가 그 선명한 주장만큼 충실한 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으며, 때로는 자가당착적인 결론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 때문이다. 자가당착이라는 강한 표현을 쓴 이유는, 민족주의와 국가주의 및 그것에 기반을 두고 있는 독재 권력의 문제점을 드러내고 그것들에 대한 좀더 민주주의적이고 윤리적인 대안을 모색하려는 이들의 실천적인 문제의식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비판이나 그들이 제시하는 논거들 자체가 오히려 그러한 실천적 문제의식의 실현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좀더 분명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이들이 제기하는 국민국가에 대한 비판들은 근대 국민국가가 드러낸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강렬하게 드러내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근대 국민국가를 가능케 했던 이념적ㆍ제도적ㆍ운동적인 기반들에 대한 인식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왜냐하면 뒤에서 좀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근대 국민국가에 대한 이들의 비판은 국민국가를 억압과 배제의 동질적인 권력 메커니즘으로 제시할 뿐만 아니라 국민국가에 의해 형성된 국민은 오직 복종과 예속만 수행할 뿐인 철저하게 수동적인 또는 (이들 중 몇몇 사람들이 자발적인 예속을 강조하고 있으므로) 오히려 예속적인 주체로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이는 근대 국민국가의 복합성과 양가성을 드러내는 좋은 관점이 아닐뿐더러, 그것을 비판하고 넘어서기 위한 실천적 노력에도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 같다. 이처럼 국민국가를 획일화된 국가, 전체주의 국가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국민국가에 대해 전면적인 예속이냐 아니면 전면적인 거부냐 하는 이분법적 인식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국민국가를 내재적으로 비판ㆍ개조할 수 있는 길, 또는 국민국가의 내재적 전화를 모색할 수 있는 길을 정확히 인식하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으며, 의도와 달리 국민국가를 가공할 만한 위력을 지닌 악마적인 권력체로, 빅브라더의 공간으로 신화화하는 결과를 낳게 되기 때문이다.

이 글은 이러한 관점에서 위에서 언급한 필자들의 국민국가 비판에 대해 검토해보고 그러한 비판들에 대한 한 가지 대안을 모색해보려는 시도다. 이를 위해 우리는 2절에서 먼저 이 글이 비판적으로 다루려고 하는 필자들의 공통적인 문제의식을 추출해볼 것이다. 그 다음 3절에서는 이들의 논의를 네 가지 측면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해볼 것이다. 마지막 4절에서는 이들의 작업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필요한 몇 가지 이론적 전제들을 제시해볼 것이다. 이 글은 주로 문헌 해석과 비평의 방법을 채택하고 있다. 그것은 이 글이 제한된 지면에서 다수의 필자들을 다루고 있고 또 그들의 논의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논점을 될 수 있는 한 상세히 소개하고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이러한 방법이 얼마간 효과적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 글은 학제적인 관점에서 일종의 이데올로기 비판을 겨냥하고 있지 대안적인 국민국가론을 제시하거나 논의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는 점을 미리 밝혀두겠다. 그동안 이들의 작업이 국내의 인문사회과학계에 미친 영향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비판적인 작업도 나름대로 의미를 가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2. 국민국가가 왜 문제인가? 전체주의적 국민국가론의 문제의식

 

내가 이 글에서 비판적으로 다뤄보려는 필자들은 한국과 일본의 비판적 지식인들이다. 그들은 각자의 전공분야와 학문적ㆍ정치적 입장에 따라 다소의 견해 차이는 보여주지만, 공통적인 출발점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한국과 일본에서 팽배해 있는 민족주의를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은 과거 식민지와 제국의 관계에 있었고, 그에 따라 상이한 역사적 전개 과정을 거쳐 왔음에도 공통적으로 강한 민족주의적 지향을 보여주고 있으며, 탈냉전 이후 세계화가 전개되는 정세에서도 이러한 민족주의적 지향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는 것이 이들의 문제의식이다. 더욱이 이러한 민족주의적 지향은 탈냉전 이후 세계의 유일 초강대국으로 군림한 미국의 동아시아 패권 전략과 결부되어 동아시아의 평화와 안전을 위협하고 한국과 일본의 우경화를 부추긴다는 점에서 더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따라서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은 단순히 학문적이거나 이론적인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 사람들의 화해와 평화로운 삶의 영위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민족주의에 있다는 지극히 실천적인 문제의식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민족주의는 단순히 추상적인 관념이나 가상적인 허위의식, 따라서 지적인 깨우침을 통해서 손쉽게 빠져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왜냐하면 민족주의는 민족 내지 국민의 존재 그 자체를 생산하거나 ‘제작’하는 이데올로기 체계이며, 따라서 국민국가가 존속하는 한 민족주의는 사라질 수 없고 지속적으로 재생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국민국가는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하여 자신이 본래적으로 지니고 있는 억압과 배제의 속성을 유지하고 확장해가며, 역으로 민족주의는 국민국가의 제도들을 통해 끊임없이 개인들을 국민들로 생산하거나 제작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에 따르면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은 필연적으로 국민국가 자체에 대한 거부 및 그것에 대한 대안의 모색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내가 보기에, 이 글에서 다룰 필자들의 국민국가 비판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 및 동유럽의 민족 문제에 관한 전문 연구자에서 출발해서 연구 영역을 점차 확장해온 임지현이 최근 몇몇 글과 저서에서 보여주는 태도는 이러한 국민국가 비판의 전형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는 󰡔민족주의는 반역이다󰡕라는 저서에서는 민족주의를 “고정 불변의 이데올로기로서가 아니라 역사적 변화에 열려 있으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만들어나가는 ‘운동’”(임지현 1999, 7면)으로 볼 것을 요구하고 있다.[이 글에서 주로 다루는 필자들의 경우 인용의 편의를 위해 각각 다음과 같은 약어를 사용하고, 본문 중에 면수만 표기하기로 하겠다.
강명관, 󰡔국문학과 민족 그리고 근대󰡕, 소명출판사, 2007 ⇒ 강명관 2007.
권혁범, 󰡔국민으로부터의 탈퇴󰡕, 삼인, 2004 ⇒ 권혁범 2004.
김철, 󰡔‘국민’이라는 노예: 한국문학의 기억과 망각󰡕, 삼인, 2005 ⇒ 김철 2005.
니시카와 나가오, 󰡔국민이라는 괴물󰡕, 윤대석 옮김, 소명출판, 2001 ⇒ 니시카와 나가오 2001.
사카이 나오키ㆍ임지현, 󰡔오만과 편견󰡕, 휴머니스트, 2003 ⇒ 사카이 나오키ㆍ임지현 2003.
임지현, 󰡔민족주의는 반역이다󰡕, 소나무, 1999 ⇒ 임지현 1999.
임지현, 「‘전지구적 근대성’과 민족주의」, 󰡔역사문제연구󰡕 제 4호, 2000 ⇒ 임지현 2000.
임지현, 「다시, 민족주의는 반역이다」, 󰡔창작과 비평󰡕, 117호, 2002년 가을호 ⇒ 임지현 2002.
임지현, 「'대중독재'의 지형도 그리기」, 임지현ㆍ김용우 편, 󰡔대중독재 1: 강제와 동의 사이에서󰡕, 휴머니스트, 2005 ⇒ 임지현 2005a.
임지현, 「대중독재테제」, 임지현ㆍ김용우 편, 󰡔대중독재 2: 정치 종교와 헤게모니󰡕, 휴머니스트, 2005 ⇒ 임지현 2005b.]
이는 “궁극적으로 민족에 대한 우리 사회의 정의가 인종적인 것 혹은 종족적인 것으로부터 공공적인 것 혹은 시민적인 것으로, 영어 식으로 표현한다면 ‘ethnic nationalism’에서 ‘civic nationalism’으로 이동해야 한다고 믿는다”(같은 책, 8면)는 저자의 입장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입장을 좀더 부연 설명한다. “그것은 프랑스 혁명을 추동했던 시민적 민족주의 혹은 식민지의 저항 민족주의가 지녔던 혁명적 역동성을 견지하면서,
권력과 같이 짜여진 텍스트로부터 민족주의를 구출해 내는 첫걸음이 아닐까 한다. 민족주의는 더 이상 체제를 옹호하는 권력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건설을 기약하는 반역의 이데올로기로 재창조되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다.”(같은 책, 같은 곳)

그의 입장은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보수성 및 특히 진보 운동 진영에 내재하는 보수성에 대한 성찰을 거쳐(임지현 1999, 339면 이하) 인민주권론에 대한 (슈미트식의) 해석을 매개로 하여(임지현 2002), 결국 󰡔오만과 편견󰡕부터는 민족주의는 물론이거니와 국민국가 자체에 대한 전면적 기각이라는 입장으로 바뀌게 된다. 이 책의 한 대목은 그의 문제의식을 선명히 보여준다. “저는 요즘 나치즘이나 파시즘, 혹은 스탈린주의 등을 ‘대중독재’라는 개념으로 묶을 수 있는지의 여부를 고민하고 있는데요. ‘대중독재’가 갖는 뚜렷한 특징은 국민국가적 근대성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잘 짜인 행정기구, 지방의 개별 촌락 단위까지 침투한 동원의 메커니즘, 다양한 커뮤니케이션 장치들을 통해, 대중의 일상적 사고와 생활에 관철되는 지배 헤게모니는 국민국가의 완성도와 정비례하는 것이 아닐까요? (...) 대중의 국민화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사실상 영국ㆍ미국식의 ‘대중민주주의’와 독일ㆍ이탈리아식의 ‘대중독재’는 그 형식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참여에 의존하는 국가적 동원체제에 뿌리박고 있다는 점에서 사실상 국민국가의 근대 권력이 낳은 쌍생아입니다.”(사카이 나오키 & 임지현 2003, 138-39면―강조는 인용자)[이하 별도의 언급이 없는 경우 인용문의 강조 표시는 모두 인용자가 한 것이다.]

한문학 전공자인 강명관에게서도 이와 유사한 인식을 엿볼 수 있다. 그는 한국 민족주의의 기본 속성을 “순수성과 우월성”으로 규정한 뒤, “다른 컨텍스트를 무시한 [채―인용자 추가] 오로지 민족의 우월성이란 코드로만 역사와 문화를 읽어내는 것, 이것이 민족주의의 최대 모순”(강명관 2007, 46면)이라고 지적하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를 국민국가 내지 민족국가 일반에 대한 비판으로 확장한다. “개인은 한국인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개인이 민족주의에 의해 한국인으로 제작된 것이다. 모든 국가의 개인은, 태어난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국가 권력에 의해 국민으로 제작된다. 민족주의는 존재하지 않는 동일성을 구성한다. (...) 국가는 이처럼 다양한 기구와 장치를 통해 민족-국민을 제작한다. 민족-국민은 이런 기구의 작동 속에 놓여 있다. 개인의 동의 여부는 물어보지 않는다. 나에게 의견을 말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동의하지 않아도 태어나는 그 순간 이후 민족-국민으로 제작될 뿐이다.”(같은 책, 46-7면)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진 한 대담에서도 그는 동일한 논지를 펴고 있다.[강명관, 「‘내재적 발전론’ 비판 …“국문학사는 존재하지 않는 ‘서구의 근대’ 찾기였다」, 󰡔교수신문󰡕 2007년 10월 1일 참조.]

국문학자인 김철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질서정연한 통사적(統辭的)-통사적(通史的) 서사”(김철 2005, 9면)야말로 좌우 갈등을 넘어서 오늘날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권력의 핵심 메커니즘이라는 인식을 보여준다. 그에게 이러한 인식은 오늘날 매우 절실한 비판적 과제인데, 왜냐하면 “박정희 정권에 저항하고 광주의 살륙자들[원문 그대로―인용자]과 싸웠던 이른바 진보적 민중주의”(같은 책, 12면) 역시 21세기에 접어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이러한 “국민적 정체성의 확립”이라는 이념의 테두리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그는 특히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그를 공포에 사로잡히게 했던 두 가지 경험을 환기한다. 하나는 시청 앞에 운집한 수십만의 군중과 그들이 내뿜는 열기와 함성에 대한 경험으로, 그는 이 광경에서 “수십만 군중이 하나의 ‘덩어리’로 꿈틀거리는 모습”을 보았으며, “총칼로 무장한 직접적이고도 물리적인 폭력이 횡행하던 시대에서 느끼지 못했던 공포를 처음으로 느꼈다.”(같은 책, 11면) 또 하나는 한국의 이른바 ‘진보적’ 지식인 중 한 사람(유홍준)이 붉은 악마의 응원에 대해 썼던 한 신문 칼럼의 충격이다. “오늘의 젊은이들은 개인주의자들이어서 건강하고 성실한 공동체 의식을 발견하기 어렵고, 전쟁이라도 나면 전쟁터로 뛰어갈 젊은이가 몇이나 될까 걱정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붉은 악마’는 그들의 핏속에서 여전히 민족과 국가라는 유전적 인자가 자리잡고 있음을 보여주었다”는 논지의 이 칼럼은 그로 하여금 “‘핏속에 흐르는 민족과 국가라는 유전자’를 자랑스럽게 떠벌리는 진보주의자들의 권력 쟁취가 전리품을 놓고 다투는 이전투구의 장으로 전락하지 않을 가능성은 얼마나 될 것인가”(같은 책, 11-12면) 회의하게 만든다.

따라서 김철은 “한국 근대성의 핵심을 반제ㆍ반봉건의 ‘주체적 저항사’로 보는 것”(같은 책, 23면)을 한국 근대사 및 근대문학사의 기본 구도로 파악하면서, 이러한 관점의 한계를 민족과 국가에 대한 반성적 성찰의 결여에서 찾는다. 다시 말하면 제국주의와 독재에 대한 저항이 지닌 도덕적 정당성에 대한 일방적 강조로 인해 “그 저항이 마침내 도달하고자 하는 근대 국가의 유례없는 전체주의적ㆍ국가주의적 폭력성”(24면)이 은폐된다는 점이야말로 핵심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따라서 종래의 민족ㆍ민중주의적 역사 인식에 담겨 있는 이분법적이고 평면적인 시각, 곧 저항/협력, 아/비아, 민족/반민족, 정통/비정통이 선명하게 대립하는 시각을 넘어서 “파시즘이라는 새로운 인식론적 모드를 통해 한국에서의 모더니티를 해명”(25면)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식민지 이래 지금까지 한반도 주민의 근대적 삶을 지배해온 정치적ㆍ사회적ㆍ문화적 메커니즘은 바로 그 강력한 파시즘적 국가주의 그 자체였다.”(26면)

정치학자인 권혁범의 저작은 다소 거친 논의를 포함하고 있지만, 국민국가 비판의 문제의식을 선명하게 드러내준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국민으로부터의 탈퇴’라는 도발적인 제목이 붙은 책에 담긴 그의 국민국가 비판은 크게 세 가지 논점으로 집약된다(권혁범 2004). 첫째, 국가주의 및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의 필요성이다. 권혁범 역시 김철과 마찬가지로 그가 학생 시기를 보냈던 유신 독재 시절의 기억을 상기시키고, 2002년 한일 월드컵 대회의 집단적인 거리 응원에서 가감 없이 드러난 ‘대~한민국’이라는 구호에 대한 불편함을 지적하면서, 21세기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는 획일적인 국가주의, 민족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더욱이 군사 독재에서 벗어난 지금까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국익’과 ‘민족’을 우선시하는 풍조가 사라지지 않는 것은 국가주의나 민족주의의 문제가 단순히 정치적 독재에 한정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따라서 둘째, 국가주의에 대한 비판은 필연적으로 국민 그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확장된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이제 ‘국민’이라는 집단 주술에서 벗어날 때가 아닌가 묻는다.”(권혁범 2004, 10면) 왜 국민이 집단주술인가? 그것은 “일단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국민’ 의식이 자리 잡을 때 거기서 개성적이고 독자적인 개인의 삶과 자유가 피어나긴 어려워”(같은 책, 7면)지기 때문이다. 이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렇다. 우선 ‘국민’이라는 표현은 “국가의 일부로서의 강제성, 국가가 부과하는 정체성과 의무를 정당화하면서 사회 속의 개인을 조직화된 집단의 부속물로서 자동적으로 동원하기 때문이다.” 또한 “‘국민’ 속에는 이미 국가라는 선험적 실체가 규정하는 집단 동질적 주체가 스며들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수용하는 순간 “이미 복잡한 개별적 차이, 자유, 인권, 다양성은 한 걸음 뒤로 밀려나기 쉽다. 국민주의는 국가를 삶의 주체로 각인시키며 일정한 규범을 모든 개인에게 강제한다.”(같은 책, 8면) 따라서 다양한 개인들의 욕구와 권리, 인권이 보장되기 위해서는 국민으로부터 탈퇴해야 한다. 셋째, 국가는 본성상 억압적이고 배타적인 기계이기 때문에 인권 보장 및 개인의 해방은 국가에서 벗어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관점이다. 국민이 억압적이고 배타적인 성격을 띠는 이유는, 국민이 속하는 국가 자체가 억압적이고 배타적인 기계이기 때문이다(210면).

따라서 “‘나쁜 국민국가’를 ‘좋은 국민국가’로, ‘문제 있는 국민’을 ‘진정한 국민’으로” 만드는 것, “분단이나 독재가 ‘정상적인 주권 국민국가’를 방해해 왔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국민’으로서 ‘대한민국’의 자주권을 회복하고 통일국가를 완성하는 방향으로 나가”(10면)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없다. 문제는 “이제 한국사회에서 ‘국민’이 아니라 주민, 시민, 혹은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개인들이 ‘국가’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긴장 관계를 유지하면서 한 사회나 국제적 문제를 모색하고 해결하는”(같은 곳) 것이다. 한국의 경우 “근대화는 성공적으로 이룩했지만 보편적 이념으로서의 개인의 해방은 여전히 미완의 과제”이며, “새로운 개인들의 출현 속에서 사회적 의미와 관계망은 재구성될 것이고 그와 함께 탈근대의 전망이 손에 잡힐 것”(190-91면)이다.

 

3. 국민이라는 괴물? 국민국가 비판의 논점과 그 난점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이들의 국민국가 비판은 각자 상이한 분과학문에서 상이한 측면에 초점을 맞춰 이루어지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논점을 중심으로 전개된다고 볼 수 있다.

 

1) 예속과 배제의 체계로서 국민국가

 

이들의 국민국가 비판은 우선 근대 이후의 국민국가를 예속과 배제의 체계로 간주한다는 특징을 보여준다. 국민국가에 대한 이러한 성격 규정을 가장 단도직입적으로 드러내는 사람은 권혁범이다. 그는 국가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국가란 무엇인가? 그것은 공공재의 창출과 배분을 주도하는 강제 권력으로 기능하면서 법적ㆍ제도적 일관성을 위해 ‘국민’을 하나의 획일적 기준에 정렬시키고, 독점적 폭력의 위협을 통해 사회 구성원들에게 일정한 복종을 강제하는 외생적 메커니즘이다. 따라서 그것은 근본적으로 수많은 개개인의 특성과 사정을 외면할 수밖에 없는 단순한 기계다.”(권혁범 2004, 32-3면) 과연 국가라는 것이 이처럼 강제 권력이고, 독점적 폭력의 위협을 통해 복종을 강제하는 외생적 메커니즘이며, “수많은 개개인의 특성과 사정을 외면할 수밖에 없는 단순한 기계”일까? 그것은 너무 환원적인 이해 방식이 아닐까? 다소 과도하다 싶은 이러한 규정은, 개인들 및 시민사회에 대한 상관적인 규정을 통해 완화된다. “그렇기 때문에 근대 국가의 민주화 역사에서 국민국가의 형성과 팽창은 시민사회에 의한 끊임없는 견제와 확장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 사회 계약의 주체가 없는 거대한 통치 기구로서의 국가의 존재는 그 자체가 반인간적ㆍ반개인적이다.”(같은 책, 33면) 따라서 권혁범은 국민국가라는 지배의 장치, 단순한 기계에 대립하거나 그와 맞서는 시민사회 및 그것을 구성하는 개인들을 전제하는 셈이다.

그러나 이 경우 이런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만약 개인들 및 시민사회가 국가의 바깥에 있는 것이고 국가와 맞서는 것이라면, 왜 처음부터 개인들은 국가를 형성했을까? 국가는 단순히 개인들을 예속시키고 강제하고 획일화하는 기계 장치임에도, 왜 굳이 사회계약이라는 번거롭고 모험적인 절차를 거쳐서 국가를 구성했을까? 하지만 권혁범 자신이 언급하듯이 근대 국가는 “민주화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곧 근대 국가에는 인권을 비롯한 기본권의 확립과 시민권의 확장이 역사적으로 기입되어 있다. 어떻게 예속과 강제, 획일화의 기계로서 근대 국가, 국민국가 속에 민주화의 역사가 기입될 수 있을까? 그것이 어떻게 논리적으로 가능할까? 그는 “시민사회에 의한 끊임없는 견제와 확장”에 대해 언급한다. 다시 말하면 국가 바깥에 위치한 개인들 및 시민사회가 예속과 강제의 장치로서 국가를 견제한 덕분에 국가는 민주화될 수 있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굳이 국가를 유지할 필요 없이, 아예 국가에서 벗어나면 어떨까?

이러한 질문에 대해 권혁범은 모호한 입장을 보여준다. 그는 한편으로 서구적 근대 국가 자체에서도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우리’가 서구적 근대 국가의 모습이나 근대적인 정체성을 최종적이고 이상적인 목표로 설정하고 그것을 위해 노력한다면 오히려 그것은 폭력, 차별, 억압을 만들어내는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같은 책, 58면)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음과 같은 위험도 경계한다. “그러나 사실은 지구화가 그 대신 탈국민국가적ㆍ친자본적 소비 주체를 ‘개인’으로서 재생산한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또한 그 과정에서 중심부의 이익 재생산에 유리한 ‘서구적’ 주체를 전세계에 확산시킨다는 비판도 일리가 있다.”(같은 책, 58-9면)

여기에서 권혁범은 지구화가 보여주는 또 다른 가능성에 기대는 편을 택한다. “지구화는 단순히 자본 간 혹은 자본-노동 간의 싸움뿐만 아니라 국가 간의 관계를 융합함으로써 비국민국가적ㆍ다중적 정체성을 확장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다문화에 대한 노출과 경험을 통해 다양한 타자를 실제적으로 인지함으로써 ‘차이들의 공존’을 모색할 수 있는 실천적 근거를 제공할 수도 있다. 국제 노동력 이동을 통해 ‘국민’과 ‘민족’의 실제적 공간 재배치가 일어나고 운송과 통신 수단의 발달로 가치들 사이의 경쟁이 확대되면서 다중적인 국가 횡단적ㆍ탈민족적 주체가 생겨날 수도 있다. 그러한 주체들 속에서 ‘우리’는 ‘국민’ 혹은 ‘민족’이 아니라 ‘여성’, ‘동성애자’, ‘생태주의자’, ‘아시아인’, ‘탈국적 코리안’, ‘주변부 노동자’ 혹은 ‘개인’ 등으로 다르게 혹은 중층적으로 규정될 수 있다. ‘우리’를 넘어서 공동체가 생산해 내는 사회적 주체로서의 ‘나’ 아닌 좀 더 근원적이고 개성적인 ‘나’로 재탄생할 수도 있다. 그때 질문은 “우리는 누구인가?”에서 “나는 누구인가?”로 바뀌어도 좋을 것이다.”(같은 책, 59면)

권혁범의 입장은 그가 자유방임 자본주의를 긍정하든 긍정하지 않든 간에, 국가 바깥의 원초적 개인들을 가정한다는 점에서 고전적인 자유주의적 개인주의 또는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가 지칭했던 원자론적 입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Charles Taylor, “Atomism”, in Philosophy and the Human Sciences: Philosophical Papers 2,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5).] 이런 관점에서 국가는 최소화될수록 좋은 것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아예 사라지는 것이 좋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간과하는 것은 1991년 냉전해체 이후 2001년 9.11 이전까지 지구 곳곳에서 벌어진 분쟁으로 인해 360만 명의 인명이 희생당하고 수천 만 명의 이주민이 발생했다는 점이다.[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 󰡔세계분쟁과 평화운동󰡕, 아르케, 2004 참조. ] 이러한 분쟁의 본질적인 특징은 국가 간 분쟁이라기보다는 국가의 해체에 따른 국가권력의 부재 상황에서 주로 발생했다는 데 있다. 게다가 이들 희생자의 대부분은 여성과 아동 같은 사회적 약자들이었다. 따라서 한 사회의 첨단 엘리트들은 수시로 국경을 넘나들면서 범세계적 노마드로, 세계 시민으로 다중적인 동일성을 지니고 살아갈 수 있겠지만, 대다수의 사회적 약자들에게 국가의 해체는 죽음이나 재앙일 수밖에 없다. 이는 비단 현재의 세계화 국면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에 수많은 ‘국가 없는 사람들’이 경험했던 일이기도 하다.

권혁범과 다소 다른 측면에서 사태를 고찰하기는 하지만, 임지현에게서도 유사한 주장을 엿볼 수 있다. 그에게도 국민국가는 기본적으로 억압과 배제의 장치이며, 서구의 국민국가든 동구의 국민국가든 아니면 다른 어떤 곳의 국민국가든 그것은 변함이 없다. “그런데 가령 서유럽이나 미국의 내셔널리즘은 보편주의ㆍ인권ㆍ인민주권론에 입각했기 때문에 좋은 내셔널리즘이고, 동유럽이나 주변부의 내셔널리즘은 혈통이나 민족 구성 등 객관적인 것에 기초했기 때문에 배타적인 변종 내셔널리즘이라는, 서구중심적 이분법에 대해서는 경계해야 합니다. 서구의 내셔널리즘이 자유주의 및 인권과 결합된 좋은 내셔널리즘이라는 환상은 이미 반유대주의의 존재 자체에 의해서 여지없이 무너졌습니다. (...) 서유럽의 내셔널리즘 역시 보편주의, 인권, 시민의 권리 등을 확장하는 그러한 개념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끊임없이 타자를 배제하고 억압하는 전략에 입각해 있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사카이 나오키 & 임지현 2003, 102-03면) 임지현은 “뿐만 아니라”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국민국가가 긍정적인 측면을 지닌다는 점을 인정하는 듯 보이지만, 그가 이 책 및 다른 글들에서 지속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그러한 긍정성은 국민국가 및 내셔널리즘의 부정적인 측면에 의해 상쇄되며, 더욱이 그러한 긍정성도 이제 세계화를 맞이하여 역사적으로 시효만료되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는 첫 번째 문단에서 볼 수 있듯이 ‘보편주의ㆍ인권ㆍ인민주권론’의 긍정성을 서구 중심주의라는 틀에 따라 미리 기각하고 있다.[사실 ‘좋은 내셔널리즘’과 ‘배타적인 변종 내셔널리즘’을 이분법적으로 설정해놓고 그것을 서구 중심주의라고 비판하는 것은 너무 상투적인 수사법이어서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 임지현의 대담자인 사카이 나오키가 이러한 임지현의 수사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문제제기하는 것은 정당하다. “종종 프랑스 사상의 nation과 독일 사상의 Volk로 대비해서 이야기하지만, 이를 두 가지 국민사조의 차이로 이해하기보다는 근대국가의 국민이 표현되는 쌍이라고 이해할 수는 없을까요? 즉 보편주의적ㆍ인공적인 국민과 특수주의적ㆍ자연적인 민족은 발리바르가 말하듯이 모든 국민국가에서 공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사카이 나오키 & 임지현 2003, 112면)]



2) 추상적 권력관

 

두 번째 문제점은 이들의 국민국가 비판이 추상적 권력 개념을 함축한다는 점이다. 내가 말하는 추상적 권력 개념은 세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 이러한 관점은 일종의 초월적인 권력의 주체를 가정하고 있다. 명시적으로 권력의 주체라는 표현이 사용되느냐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권력이 어떤 대주체의 의지나 욕망에 따라 작동하는 것으로 간주된다는 점이다. 둘째, 이것은 또한 권력의 동질성을 가정한다. 내가 다루고 있는 필자들 중 누구도 다수의 권력들이 존재한다거나 권력은 자체 내에 애매성이나 양가성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권력은, 적어도 근대 이후에는 항상 국민국가의 권력이며, 국민국가의 권력은 그것이 복지 자본주의 국가의 권력이든, 나치즘이나 파시즘의 국가 권력이든 아니면 사회주의 국가의 권력이든 또는 주변주 탈식민지 국가의 권력이든 항상 동일하고 동질적인 속성으로, 곧 내부적인 타자들이나 소수자들을 억압하여 획일적인 국민으로 만들고, 대외적인 타자들을 배척하고 그들과 패권을 다투는 힘으로 나타난다. 셋째, 권력의 부정성이다. 이들에게 권력은 예속시키고 억압하고 강제하고 배제하는 힘일 뿐, 권력은 긍정적인 힘으로, 적어도 자연적인 생산의 역량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이들에게 권력의 생산성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국민을 제작’하거나 개인들 내지 국민들의 자발적인 복종을 유도한다는 점에 있다. 권력이 지니는 유일한 생산성, 긍정성은 좀더 잘 포획하고 좀더 잘 규율하고 좀더 잘 복종시킬 수 있는, 지배의 기술적 생산성이다.

임지현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이러한 추상적 권력 개념을 잘 드러내준다. “타자를 복종시키는 수단이라는 점에서 권력의 속성은 변하지 않는다. 단지 타자를 복종시키기 위한 매개들이 역사적으로 변할 뿐이다.”(임지현 2002, 186면) 그리고 그는 더 나아가 근대 권력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근대 권력의 역사적 특징은 그것이 마치 지배를 욕망하지 않는 듯한 외양을 띤다는 데 있다. 그것을 가능케 한 사상적 기제는 국가의 절대적이고 영속적인 권력인 주권이 인민에게 있다는 인민주권론이었다.”(같은 글, 같은 곳)

또한 임지현은 사카이 나오키와의 대담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지배의 욕망’이나 ‘권력의 욕망’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가령 다음과 같은 표현들이 그렇다. “비단 유대인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독일인 동성연애자나 정신이상자, 선천적 장애인들을 격리시키고 끝내는 처형했던 나치즘의 역사 또한, 국민국가의 형성 과정이 그 경계의 내부에서조차 근대 권력의 욕망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배제하고 타자화하는 역사라는 사실을 잘 드러내줍니다.”(사카이 나오키 & 임지현 2003, 46면)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국민국가의 지배 헤게모니가 아무런 마찰이나 갈등 없이,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지배하지 않는 듯한 외향[원문 그대로―인용자]을 갖추면서 지배를 내면화하는 좋은 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파시즘이라는 것은 근대를 욕망한 권력이 대중민주주의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근대를 욕망한 길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같은 책, 334면) 이러한 권력에 대한 언급들은 국민국가에 대한 전체주의론적 비판이 추상적 권력관을 전제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3) 복종의 숙명을 짊어진 국민: 주체화 없는 예속화

 

추상적인 권력 개념은 주체화 없는 예속화, 곧 복종의 숙명을 짊어진 국민이라는 관점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관점을 가장 첨예하게 드러내는 사람은 아마도 니시카와 나가오일 것이다. 그는 국민국가의 특징을 다섯 가지로 요약한 뒤 [그것들은 (1) 명확한 국경의 존재 (2) 국가주권 (3) 국민 개념의 형성과 국민통합 이데올로기의 지배(내셔널리즘) (4) 이러한 정치적ㆍ경제적ㆍ문화적 공간을 지배하는 국가장치와 제도 (5) 국제관계다.] “사람은 어떻게 국가로 회수되는가”라는 제목 아래 개인들이 어떻게 국민국가로 포섭되고 예속되는지 신랄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국민국가 내에서 사람들은 문학과 예술, 역사, 가족과 학교, 과학과 학문, 종교, 텔레비전과 신문 및 각종 정보, 스포츠 등을 통해 국가로 회수될 뿐만 아니라 또한 “생활과 노동의 장을 통해 (...) 질병과 범죄를 통해, 혹은 그러한 것에 대한 공포심을 통해 국가로 회수”(니시카와 나가오 2002, 306면)된다. 더 나아가 “사람은 반체제운동을 통해 국가로 회수됩니다. 자발적인 반체제운동 자체가 시간이 흐르면 차차 체제화되어 갑니다. 모든 반체제운동은 그것이 국가권력의 탈취를 목적으로 삼는 한, 국가권력을 통해 자기의 주장을 실현하려고 하는 한, 즉 또 하나의 국가를 지향하는 한 마지막에는 체제화되어 국가로 회수됩니다. (...) 사람은 여성해방운동과 페미니즘을 통해서조차 국가로 회수됩니다.”(니시카와 나가오 2001, 307-12면) 그에게는 국민, 또는 국민을 구성하는 개개인들은 삶과 존재 그 자체 속에서 이미 국가에 회수되고 있고 또 회수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이러한 운명은 반체제운동을 통해서도, 여성해방운동 같은 인권 운동을 통해서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가 다음과 같이 덧붙이는 것은 사실이다. “국민국가는 실로 교묘하게 만들어진 인공적 기계이고 그것의 강제력은 압도적이지만, 우리들은 국가로 회수되는 순간에도 반드시 전면적으로 회수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위화감과 반발심을 품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것이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같은 책, 314면) 그러나 만약 모든 삶만이 아니라 반체제운동을 통해서도, 여성해방운동과 페미니즘을 통해서도 국가로 회수될 수밖에 없다면, “위화감과 반발심을 품”는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 국민국가론 비판이 좀더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막연히 탈국민국가의 가능성을 추정하거나 전제하기보다는 그것이 국민국가 내에서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내재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하지만, 니시카와 나가오의 저서에서는 그것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그것은 국민화를 주체화 없는 예속화의 과정으로, 국민국가에 대한 전적인 예속과 포섭(‘회수’)으로 파악하는 관점에서는 사실 불가능한 설명이다.

이러한 문제점은 임지현에게서도 뚜렷이 드러난다. 그는 알튀세르의 호명론을 통해 국민국가는 예속적인 주체들을 호명하고 생산하는 메커니즘이라는 점을 역설한다. “알튀세르를 패러디하면, 민족/국민의 담론은 결국 개별화된 시민사회의 성원들을 국민으로 ‘호명’하는 근대 국민국가의 담론화 전략인 것이다. 그 전략의 목표는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규율하여 자율적으로 국가의 규칙과 통제에 따르는 국민적 주체를 생산하는 데 있다. (...) 일반의지의 이름으로 시민사회의 개개인이 민족/국민으로 호명될 때, 그것은 사실상 ‘생활세계의 식민화’가 시작되는 순간이며 내면화된 규율과 가치를 통해 합의와 자발적 복종을 유도하는 국가권력의 헤게모니가 작동하는 순간이기도 한 것이다.”(임지현 2002, 191면) 국민국가의 예속화 메커니즘의 무서움은 그것이 단순히 강제나 억압으로 작동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국민 개개인이 스스로, 자발적으로 국민국가의 권력에 복종하도록 유도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각각의 개개인이 자유로우면 자유로울수록, 그가 자발적이면 자발적일수록 그는 더욱 더 국민국가의 권력에 속박되며, 국민국가의 권력은 더욱 더 강고해지고 확장된다. 그야말로 악마적인 힘이 아닐 수 없다.

알튀세르의 호명론에 대한 편향적 이해는 차치한다 하더라도[임지현은 이 대목에서 알튀세르를 원용하여 국민들의 자발적인 복종론을 정당화하고 있는데, 이는 몇 가지 점에서 알튀세르에 대한 오독이고 그릇된 적용이라는 점을 밝혀두고 싶다. 첫째, 임지현이 잘못 이해하고 있는 점은 알튀세르의 호명론은 자발적 예속에 대한 설명이나 심지어 정당화가 아니라, 지배자의 관점에서 본, 이데올로기 내부의 관점에서 본 예속의 메커니즘에 대한 기술(記述)이라는 점이다.(이 점에 대한 좀더 자세한 설명은 진태원, 「라깡과 알뛰쎄르: ‘또는’ 알뛰쎄르의 유령들 I」, 김상환ㆍ홍준기 옮김, 󰡔라깡의 재탄생󰡕, 창비, 2002 중 391-92면 참조) 둘째, 따라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은 그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예속의 불가피성 내지 지배의 전일성이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들」의 「부기」에서 이데올로기론은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사회적 적대와 갈등의 관점에서만 이해되고 설명될 수 있다는 점을 명료하게 지적하고 있다. “우리는 다만 계급들의 관점에서만, 다시 말해 계급 투쟁의 관점에서만 하나의 사회구성체에 존재하는 이데올로기들을 설명할 수 있다. (...) 뿐만 아니라 특히 그러한 관점에 입각해서 우리는 AIE들 내에서 구현되고 대립하는 이데올로기들이 어디에서 비롯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L. Althusser, 󰡔재생산에 대하여󰡕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7, 410면―강조는 알튀세르) 알튀세르는 단일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복수의 이데올로기들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들을 일방적으로 지배 이데올로기들을 전달하고 주입하는 장치들이 아니라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와 피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가 투쟁을 벌이는 장소나 쟁점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호명론을 전일적인 지배를 설명하기 위해 활용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것은 알튀세르의 이론적 관점과는 어긋난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만약 모든 개개인이 항상 이미 국민국가에 호명되고 포섭되어 있다면, 그것에 저항하거나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또는 현재 국민국가들이 위기에 처해 있는 게 사실이라면, 어떻게 국민국가는 완벽한 통제와 예속화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을까? 특히 자크 아탈리(Jacques Attali)의 주장처럼 “국민국가들은 사태의 진행과정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했으며, 세계화의 힘들에 대해 세계의 운명 속에서 방향을 정하고 모든 종류의 공포에 맞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넘겨주었”으며 이제 “개인주의가 승승장구하고 있다. 누구도, 또는 거의 누구도 다른 이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 그 또는 그녀에게 중요성을 지닌다고 더 이상 믿지 않는다. 누구도 또는 거의 누구도 투표가 그 또는 그녀 자신의 삶의 조건 및 따라서 세계의 조건을 의미 있게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고 믿지 않는다”[Zygmunt Bauman, “Freedom From, In and Through the State: T.H. Marshall's Trinity of Rights Revisited”, Theoria, no. 108, December 2005, p. 17.]는 사실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임지현의 주장이 좀더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우선 이러한 사실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지 설명하는 게 필요해 보인다.[임지현의 경우 이러한 문제를 “의도의 순수성”을 강조함으로써 회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는 󰡔대중독재󰡕 2권 말미에 첨부한 「대중독재테제」에서 자신의 논리가 지닌 위험을 경계하면서, 대중독재 패러다임의 의도는 그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지금까지의 설명이라면, 대중독재가 반대나 저항을 위한 조금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는, 완벽하고 철저하게 봉합된 정치 기계 혹은 괴물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또 동의와 합의를 일방적으로 강조함으로써 명백한 테러 현상을 무시하도록 조장한다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것은 대중독재 패러다임의 의도와는 거리가 멀다.”(임지현 2005b, 612면) 그러면서 이러한 오해에 대한 해법을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동의 자체의 다양한 층위에 대한 이해가 전제된다면 그러한 오해도 불식될 것이다. 대중독재에서 발견되는 동의는 내면화된 강제, 강제된 동의, 수동적 동의, 타협적 순응, 무의식적 순응 등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층위를 보여준다. 또 체제에 포섭된 것처럼 보이는 파시즘의 일상 세계와 동의 구조 속에도 다양한 저항의 지점들이 파편적으로 존재한다.”(같은 글, 612-13면)
임지현의 이러한 언급은 그가 자신의 논리가 낳을 수 있는 부정적인 또는 자가당착적인 효과를 의식하고 있음을 나타내준다는 점에서는 얼마간 긍정적인 측면이 존재한다. 하지만 문제는 과연 그가 지금까지 주장해온 전체주의적 국민국가론 또는 대중독재론에서 어떻게 “다양한 저항의 지점들이 파편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반대자들의 비판을 의식해 내 이론은 이런 것도 포함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그것을 타당하고 설득력 있게 설명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적어도 지금까지 그의 작업은 자신의 의도의 순수성(곧 국민국가론이나 대중독재론은 반대나 저항의 불가능성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변하는 데 머물러 있을 뿐, 과연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논증하지는 못하고 있다. 사실 “‘대중독재’는 왜곡된 근대화 혹은 전근대의 잔재의 불가피한 산물이라기보다는 근대 국가 체제의 성과를 역사적으로 전유한 근대 독재인 것”(같은 글, 601면)이며 “근대의 정치적 주체는 기실 개개인의 자율적 의지가 아니라 ‘통제되고 유도된 대중화’ 과정의 산물인 것”(같은 글, 602면)이라고 주장한 가운데, 어떻게 다른 식의 설명이 가능하겠는가? 임지현 및 기타 다른 논자들이 국민국가론이 지금까지 전제해온 인식론적 틀이나 논리 구조에서는 반대나 저항의 가능성을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면) 지극히 어려울뿐더러, 그러한 틀이나 논리를 전제하는 한 국민국가의 역사에 대한 생산적인 설명을 제시하기도 어려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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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자본주의의 역사, 국민국가의 역사 부재

 

이 점은 국민국가의 역사에 대한 인식의 부재, 따라서 국가 형태의 획일화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발리바르는 마르크스의 대중과 계급의 변증법 사상에 관해 고찰하면서 마르크스 및 그 이후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중요한 한계 중 하나로 “자본주의 자체의 역사를 사고하고 분석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지적한 바 있다.[에티엔 발리바르, 󰡔대중들의 공포󰡕, 서관모ㆍ최원 옮김, 2007, 304면.]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비롯한 대부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자본주의는 근원적으로 역사적인 생산양식이다. 곧 그것은 봉건제를 대체하면서 시작한 것이며 또한 언젠가는 종말을 맞을 수밖에 없는 한시적인 생산양식이다. 마르크스에게 부르주아 정치경제학자들의 근본적인 한계 중 하나는 이러한 자본주의의 역사성을 인식하지 못한 채, 자본주의적 제도들 및 범주들이 마치 초역사적인 것인 양 간주한다는 데 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역사성은 인식했지만, 곧 그것이 한시적인 생산양식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자본주의 그 자체가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점, 따라서 자본-임노동 관계는 자본주의의 처음부터 끝까지 동일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구별되는 상이한 형태들 속에서 표현된다는 점은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다. 요컨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18세기 말의 자본주의와 19세기 말의 제국주의적 자본주의, 또 20세기 말의 자본주의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에게 “계급투쟁은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식으로만 작용한다. 곧 계급투쟁이 자본주의를 파괴하지 않는 한 자본주의는 계속 동일하게 그대로 존속한다.”[발리바르, 같은 책, 319면―번역은 약간 수정.]

마찬가지로 전체주의적 국민국가론자들에게 공통적인 문제점 역시 국민국가의 역사에 대한 인식의 부재를 꼽을 수 있다. 이들에게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 이래 태동한 국민국가는 계속 국민국가였을 뿐 아무런 내재적인 형태 변화나 구조 변화도 겪지 않는다. 국민국가는 내부의 소수자들에 대한 억압과 외부의 타자들에 대한 배제라는 두 가지 기본적인 특징으로 규정되며, 18세기 말의 국민국가든 20세기 중엽의 국민국가든 아니면 20세기 말~21세기 초의 국민국가든 간에, 그것이 소멸하지 않는 한 국민국가는 늘 억압과 배제의 권력 메커니즘으로 존속할 수밖에 없다. 가령 임지현은 근대 국민국가의 형성 과정이 “내부자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억압 과정”(임지현ㆍ사카이 나오키 2003, 47면)이었음을 지적한다. 따라서 프랑스 혁명이나 나치즘이 모두 동일한 억압과 배제의 메커니즘을 보여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같은 책, 47-8면 참조) 더 나아가 대개 민주주의의 확대의 징표이자 근거로 간주되는 보통선거권과 여성참정권 획득 역시 그가 보기에는 국민국가의 지배 헤게모니의 강화를 나타내는 징표일 뿐이다. “보통선거권과 여성참정권 획득으로 프롤레타리아트와 여성이 ‘국민’ 속에 편입되었을 때, 국민국가의 지배 헤게모니는 사실상 더 강화되는 경향이 있다. 이 점에서 정치적 민주화는 근대 권력의 정당화 또는 합리화 가정이기도 했다. 그것은 국민국가에 포박된 근대 민주주의의 역설이라 하겠다.”(임지현 2002, 191면) 국민국가라는 틀 속에서 이루어지는 한 정치적 민주화는 근대 권력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는 기능을 수행하며, 따라서 국민국가의 지배력을 더욱 강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리하여 그는 ‘대중독재’ 내지 ‘국민독재’라는 개념을 통해 국민국가의 동일한 본성과 토대를 파악하려고 시도한다. 그것의 핵심 기준은 자발적 동원이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사카이 나오키 & 임지현 2003, 135-6면 참조).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파시즘이나 나치즘과 서유럽의 민주주의 국가들 사이에는 별다른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파시즘이나 나치즘, 스탈린주의, 군사 독재 같은―옮긴이] ‘대중독재’와 [서유럽의―옮긴이] ‘대중민주주의’는 그 형식적 차별성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의 간격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양자는 대중의 자발적 동원 또는 근대 국민국가의 틀 속에 대중을 포섭한다는 목표를 공유하면서도, 단지 그들이 놓인 역사적 조건의 차이 때문에 달랐을 뿐입니다. (...) 양자는 모두 권력의 지배욕망을 감추고 대중의 의지와 욕망에 충실한 외양을 띠고 있습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대중의 욕망을 만들어내고 유도하는 근대적 기제가 있었기에 가능합니다.”(사카이 나오키 & 임지현 2003, 186면)

한편 사카이 나오키는 1930년대 이래 근대 국민국가가 전환을 겪었음을 지적하고 있지만, ‘총력전 체제’라는 명칭을 통해 이러한 전환을 획일화한다. “총력전 체제란 합중국의 뉴딜 정책, 일본의 만주국 건설, 소련에서 시행된 일련의 5개년 계획, 독일의 강제적 균질화 등을 모두 시야에 넣은, 새롭고도 광범위한 사회 편제를 가리킵니다. 총력전체제의 특징 중 하나는 자본주의가 산출한 계급 분리나, 차별받는 주변집단을 국민국가에 최대한 통합시켜, 국가 전체가 그것을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자산으로 가장 유효하게 이용하려고 하는 체제라는 점입니다. (...) 이런 제도가 총력전이 끝난 1945년 이후 현재까지 계속되는데요, 그러다가 1980년대에 세계적으로 커다란 전환이 일어납니다. 다시 말해 총력전 체제를 재검토하는 과정에서 대학의 독립법인화나 사회복지와 관련된 신자유주의의 주장이 맹위를 떨치고 있지 않습니까? (...) 하지만 총력전 체제의 유제는 지금도 강력하게 남아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국민건강보험이라는 사고방식, 그리고 국민교육이라는 사고방식 말입니다.”(사카이 나오키 & 임지현 2003, 332-34면)

사카이 나오키의 주장은 자본주의의 역사, 국민국가의 역사에 대한 나름대로의 관점을 피력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총력전 체제’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그에게 이러한 복지 정책 또는 생명정치의 과정은 국민국가에 대한 포섭의 과정이고 각각의 개인들이 국민으로서 국민국가의 규범을 좀더 내면화하고 국민국가에 좀더 강하게 의존하게 되는 과정으로만 나타난다는 점이다. 따라서 ‘총력전 체제’로서의 사회 정책, 생명정치는 천황제 아래의 일본이나 나치즘 체제의 독일, 스탈린 치하의 소련, 루즈벨트 시절의 미국 등을 가릴 것 없이 본질상 동일한 것이다. 이것은 인식론적 관점의 문제 이전에 복잡한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과도한 단순화라는 측면에서도 문제가 있는 관점이 아닐 수 없다.[반면 최근 출간된 한 저서에서 볼프강 쉬벨부시는 독일의 나치즘과 이탈리아의 파시즘, 그리고 미국의 뉴딜 정책의 유사성 및 그것이 20세기에 남긴 유산을 꼼꼼하고 통찰력 있게 분석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임지현이나 사카이 나오키와 달리 “공통성의 영역을 찾는 일은 동일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며 “비교하는 것은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볼프강 쉬벨부시, 󰡔뉴딜, 세 편의 드라마󰡕, 차문석 옮김, 지식의풍경, 2009, 40-1면)라는 점을 명시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더 나아가 그는 파시즘이나 나치즘을 악마화하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하면서 “1930년대에 이들 양 체제의 대중적 인기는 억압성이 아니라 평등성에 기인했던 바가 더 컸다는 사실”(34면)을 지적한다.]

이들의 관점은 서구 자유주의 국가들의 이데올로기적인 자기 정당화에 대한 비판의 시도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곧 서구 자유주의 국가들은 나치즘이나 파시즘, 또는 스탈린주의와 달리, 그리고 동유럽 국가들이나 주변부의 개발도상국가들과 달리, 자신들은 선진화된 민주주의 국가이며, 개인의 인권과 자유, 평등이 구현되어 있는 국가로 자처하곤 한다. 이들은 바로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기만을 비판하기 위해 서유럽 국가들 역시 대중들의 국민화 및 자발적 동원에 의존해 있고, 그에 기반하여 개인들을 억압하고 또 배제한다는 점에서는 다른 전체주의 국가들과 차이가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은 결국 모든 민주주의는 지배자의 정당화 외피에 불과하며, 민주주의에 대한 대중들의 참여와 헌신은 결국 지배 권력을 더욱 강화하고 견고화한다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리고 서유럽 자유주의 국가들의 이데올로기적 기만이나 가상을 비판하고 분쇄하기 위해 굳이 모든 국민국가는 결국 ‘대중독재’, ‘국민독재’일 뿐이라는, 곧 전체주의 국가들일 뿐이라는 극단적인 논법이 필요한 것일까? 그러한 극단적이고 얼마간 단순화된 논법에 의존하지 않고도 서유럽 국가들(및 근대 국민국가 일반)의 내적 모순과 문제점들을 해명하는 길은 없는 것일까? [에티엔 발리바르는 2차대전 이후 프랑스와 같은 소위 ‘복지국가’ 또는 발리바르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국민사회국가État national-social’와 파시즘을 동일시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지난 50여년 동안 산업적이고 외회정치적이며 포스트식민주의적인 사회들(프랑스 같은)이 경험했던 상대적인 사회적 평형이 파시즘과 친화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못한다. 비록 이러한 사회적 평형이 불평등도 배제도 동원과 정상화의 강제도 모면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라 해도 그렇다.” É. Balibar, Droit de cité, p. 8.]

 

4. 국민국가의 내재적 비판을 위하여

 

결국 국민국가에 대한 이들의 대안은 국가 없는 개인, 국가 없는 사회가 가능하며, 또 그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으로 집약된다. 권혁범이 국가 바깥에 있는 개인들을 전제하고, “개인의 해방”을 “인간의 보편적 욕구”(권혁범 2004, 190면)라고 주장할 때 이러한 사정이 분명히 드러난다. 또한 니시카와 나가오가 사람들의 삶의 거의 모든 영역, 모든 측면이 국가로 회수된다고 주장하면서 “국민국가는 붕괴되어야 할 것, 뛰어 넘어야 할 것이고, 따라서 국민국가에 대해 밝은 미래를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니시카와 나가오 2001, 315면)하다고 말할 때에도 이 점은 명백하다.

임지현의 경우 이런 관점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지는 않지만[임지현은 네그리ㆍ하트의 제국론과 다중론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하면서도(“공화주의적 문제의식을 소중히 하면서 국민주권의 주술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로서 네그리ㆍ하트의 ‘탈근대적 공화주의’가 주목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임지현 2002, 191-92면) 그것을 온전히 수용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예컨대 하트와 네그리가 󰡔제국󰡕에서 제시한 ‘포스트모던 공화주의’의 가능성은 처음부터 봉쇄된 셈입니다. 물론 그것이 얼마나 실현 가능성이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만 (...)”(사카이 나오키 & 임지현 2003, 285면)], 국민국가에 대해 다음과 같은 대안의 가능성을 피력할 때 그의 관점 역시 권혁범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선 관계도 자기 자신의 오류에 열려 있고 따라서 다른 번역의 가능성에 열려 있는 관계를 지향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아무래도 솔리대러티(solidarity)보다는 어소시에이션(association)이 더 오해의 소지가 없을 것 같은데요. 글쎄요. 21세기의 연대 형태는, 일종의 형용모순이겠지만, ‘무정부주의적 연대’가 특정한 해석에 기초한 자기 폐쇄적인 연대를 대체하는 방식이 되지 않을까요?”(사카이 나오키 & 임지현 2003, 435면) 하지만 이매뉴얼 월러스틴이 잘 지적한 것처럼[이매뉴얼 월러스틴, 󰡔자유주의 이후󰡕, 강문구 옮김, 당대, 1996, 4장 참조.], 어소시에이션이라는 것은 19세기에 생시몽이 제창한 이른바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의 기본 관념이라는 점에서 전혀 새로운 전망이라고 하기 어렵다. 더욱이 가라타니 고진이 지적하듯이 “A[국가사회주의―인용자]의 소멸과 더불어 D[리버테리언 사회주의(어소시에이션)]도 쇠퇴했다”면[가라타니 고진, 󰡔세계공화국으로󰡕,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 b, 2008, 19면.], 어떻게 21세기 연대 형태가 ‘무정부주의적 연대’ 또는 ‘어소시에이션’이 될 수 있을지 이해하기 어렵다.[가라타니 고진은 이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부연한다. “그러나 이미 서술한 것처럼 국가사회주의가 쇠퇴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리버테리언 사회주의도 쇠퇴하고 말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리버테리언 사회주의(어소시에이셔니즘)가 단순히 이념적이어서 현실적이지 않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거기에 자본, 네이션, 그리고 국가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소시에이셔니즘은 자본, 네이션, 국가를 거절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좋지만, 왜 그것이 존재하는가를 충분히 사고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그것들에 걸려 넘어지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가령 리버테리언 사회주의와 같은 종류가 부활한다고 해도 자본, 네이션, 국가에 대한 인식이 없으면 같은 전철을 밟게 될 것입니다.”(가라타니 고진, 앞의 책, 27면) 가라타니 고진 자신이 제안하는 대안에 대한 평가와는 무관하게 이러한 주장은 주목할 만하다. ]

이들의 작업은 민주주의적인 관점에서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비판하고 국민국가의 역사적ㆍ내생적 한계들을 비판한다고 말하지만, 이론적으로 본다면 오히려 그것들에 대한 저항과 대안 모색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결과를 낳는 것 같다. 국민국가가 괴물처럼 가공할 만한 지배의 장치, 기계로 묘사되면 될수록, 국민국가가 모든 개인들을 포섭해서 정신만이 아니라 신체에도 지배의 흔적을 새겨 넣고 그들의 자발적인 복종을 강화한다고 간주하면 할수록, 또한 근대의 세계사 전체가 이러한 의미에서의 국민국가의 확산과 강화의 역사로 간주되면 될수록, 도대체 어떻게 그처럼 악마적인 힘을 가진 국민국가에 저항할 수 있는지, 어떻게 탈국민국가의 길로 접어들 수 있는지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다룬 필자들이 모두 ‘개인의 해방’이나 ‘무정부주의적 연대’, ‘탈국민화, 비국민화’ 같이 막연한 전망에 머물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들의 작업은 비판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게 아닌가, 한 번의 작업에서 모든 것을 바랄 수는 없으며 대안의 모색은 차후의 작업에서 기대해봐도 좋지 않은가라는 반론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문제는 민족주의와 국가주의 및 국민국가에 대한 비판이 이들과 같은 문제설정 위에서 전개되는 한, 오히려 그것에 대한 유효한 이론적ㆍ실천적 대안을 모색하는 것은 지극히 어렵다는 점에 있다.

서두에 밝힌 것처럼, 이 글은 이 글에서 다룬 필자들을 전적으로 거부하거나 그들의 주장을 모두 배척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 자신은 대상이 된 필자들의 문제의식에 상당 부분 깊이 공감하고 있으며, 특히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에 대한 비판,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헤게모니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저항, 소수자와 이주자들의 권리에 대한 존중의 필요성 등에 대해서 전적으로 공감한다. 이런 측면에서 이 글은 이를 테면 동지적인 비판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실천적인 문제의식에 공감하는 만큼 이들의 작업에 대한 이론적인 비판과 대안의 모색은 더욱 절실히 요구된다는 것이 또한 나의 생각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마지막으로 국민국가에 대한 내재적 비판을 위해 필요한 세 가지 사항들을 지적해보고 싶다.

 

1) 이데올로기에서 대중의 존재론적 우위

 

첫째, 이데올로기에서 대중의 존재론적 우월성이라는 관점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살펴본 논자들은 민족주의 및 국민국가를 넓은 의미에서 이데올로기적인 지배와 예속화 메커니즘으로 이해하고 있다. 문제는 그러한 지배와 예속화를 강제에 의한 것으로 이해하든, 아니면 임지현이 특히 강조하는 것처럼 일종의 자발적 예속으로 이해하든 간에(임지현 2005a, 19면), 이러한 관점은 항상 이데올로기를 지배자에 의한 피지배자의 지배와 예속화의 수단 내지 도구로 이해한다. 여기에 전제되어 있는 관점은 피지배 계급 내지 대중은 존재론적ㆍ인간학적 또는 정치적으로 항상 열등하고 수동적이라는 생각이다. 대중들이 자발적으로 동의한다고 해도, 그것은 결국 대중들은 사태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가운데 우매하게 지배자의 이데올로기적 기만이나 술책에 말려들어간다는 식의 가치 판단을 이미 함축하고 있다. 이 경우 설명이 불가능한 것은 피지배 대중들이 자주 반역을 하고 또 어떤 경우들에는 새로운 역사적 전환 및 민주주의의 진전을 이룩한다는 점이다. 인권선언을 통해 인권과 시민권을 근대 국가의 이념적 기초로 확립한 프랑스 혁명이 그랬고 19세기의 노동운동과 20세기의 여성운동이 그랬으며, 20세기 후반 미국 및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흑인인권운동이 그랬다. 지배 세력에 의한 기만과 조작의 시도들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그 이전에 대중들의 능동적인 저항과 반역의 시도들(적어도 그 가능성)이 항상 존재하기 때문이다.

에티엔 발리바르와 자크 데리다는 각자 최근 저작에서 이 점을 강조한 바 있다. 발리바르는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에 관한 글에서 “내가 보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히려 ‘이데올로기’의 기능작용 속에서 특권적인 능동적 역할을 피억압자들 또는 피착취자들에게 (적어도 잠재적으로) 부여하는 이유들을 설명하는 것이다.”[에티엔 발리바르, 「비동시대성: 정치와 이데올로기」, 윤소영 옮김, 󰡔알튀세르와 마르크스주의의 전화󰡕, 이론, 1993, 183-84면―강조는 발리바르.] 이것은 다시 말해 지배 이데올로기가 진정으로 지배적인 효과를 산출하기 위해서는 그것은 피지배대중들의 상상계에 뿌리를 두어야 하며 그러한 상상계를 자기 나름대로 구성하고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데리다는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유령성, 곧 이데올로기를 모든 사회적 관계가 형성되기 위한 조건으로 제시하면서 동시에 모든 이데올로기, 모든 종교 안에는 대중들의 해방에 대한 열망이 담겨 있음을 지적한다. 그가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자크 데리다, 󰡔마르크스의 유령들󰡕, 진태원 옮김, 이제이북스, 2007, 322-24면 참조.]이라고 부른 것은 이처럼 계시 종교나 이데올로기 일반 안에 존재하는, 그리고 그러한 종교나 이데올로기를 가능하게 해주는 근원적인 해방의 열망, 해방의 경험의 형식을 가리킨다. 이 두 사람이 주장하듯이 이데올로기에서 피지배자 또는 대중의 존재론적 우월성이라는 관점을 택할 경우에만 우리는 국민국가 및 민족주의의 강고한 지배 구조를 해명한다는 구실 아래 국민국가 전체를 전체주의로 획일화하는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

 

2) 권력에 대한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관점

 

둘째, 푸코가 강조했듯이 권력을 부정적이고 억압적인 또는 포획적인 관점에서 이해하지 않고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 글에서 다룬 필자들의 또 다른 특징은 권력에 대해 추상적이고 부정적인 관점을 전제한다는 점이다. 특히 임지현은 그가 주창하는 대중독재론의 이론적 전거로 푸코를 명시적으로 거론하고 있음에도(임지현 2005b, 605-06면), 푸코가 여러 차례에 걸쳐 역설한 권력의 긍정성, 생산성, 다양성과 정면으로 대립하는 권력관을 보여준다. 이는 그의 대중독재론이나 국민독재론이 푸코나 알튀세르에 관한 상당히 피상적인 인식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을 짐작케 해준다.

하지만 푸코는 그의 관점과 달리 규율권력이라는 개념을 처음 도입한 󰡔감시와 처벌󰡕(1975) 및 󰡔성의 역사 1권: 앎의 의지󰡕(1976),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1997) 같은 저작에서 지속적으로 권력을 부정적이고 억압적인 것으로 인식해서는 안되며, 긍정적이고 생산적이며 다원적인 것으로 이해할 것을 역설한다. 특히 다음과 같은 푸코의 언급은 임지현 식의 권력관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그러니까 개인들을 복종시키고 억압하는 권력이 적용되는, 또 타격을 가하는, 일종의 기본적인 핵이나 최초의 원자, 다수의 불활성 물질 등으로 개인을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 권력을 전면적이고 동질적인 지배의 현상으로 간주하지 말 것이다.”[미셸 푸코, “Il faut défendre la société”: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77-1978) (Paris: Seuil, 1997); 박정자 옮김,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동문선, 1998, 48면―번역은 약간 수정.]

푸코가 권력을 부정적이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것으로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을 때 염두에 둔 것은 권력을 단순히 지배, 그것도 전일적 지배와 동일시하거나 권력에 의해 작동되는 주체화 양식을 철저한 예속화 양식과 동일시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1982년에 쓴 「주체와 권력」이라는 글에서 그 당시까지 전개된 자신의 작업을 세 가지로 분류하면서 자신의 연구의 일반적 주제는 권력이 아니라 주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예속화(assujettissement 또는 sujétion) 양식과 주체화(subjectivation) 양식의 갈등적인 과정에서 산출되고 그러한 과정 속에서 자기를 변형시켜나가는 주체에 대한 탐구가 자신의 주요한 관심사라는 것이다. 실제로 푸코는 규율 권력에 대한 분석, 특히 󰡔감시와 처벌󰡕이나 󰡔비정상인들󰡕에서 근대 규율 권력이 어떻게 개인 주체들을 예속적 주체로 생산해내는지 분석한 반면, 생명 권력/생명 정치 개념이 도입된 이후 말년의 몇몇 글에서는 예속적 주체들, 규율된 주체들이 생산되는 예속화 양식과 구별되는 주체화 양식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우리가 권력을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것으로 인식할 때에만, 권력의 기술에 따라 예속적인 주체가 산출되는 것과 동시에 또는 그 이전에, 권력의 작용 속에는 항상 이미 저항의 가능성이 들어 있다는 것, 또는 예속적인 주체는 항상 이미 그 예속에 저항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것을 사고할 수 있다. 곧 권력은 본질적으로 관계론적인 것이며, “관계로서의 권력은, 고착된 상태의 권력 관계, 곧 지배와 구별되며, 그 자체 안에 항상 저항과 자유의 가능성을 담고 있다. 물론 이러한 저항과 자유 역시 관계론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다시 말해 예속과 지배가 관계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저항과 자유 역시 관계들로 구성”[진태원, 「생명정치의 탄생: 미셸 푸코와 생명권력의 문제」, 󰡔문학과 사회󰡕 제 75집, 2006년 가을호, 235면―강조는 원문.]되는 것이다.

 

3) 국민국가의 모순들이라는 문제설정

 

셋째, 국민국가 및 민족주의에 대한 분석에서 국민국가의 역사라는 관점을 이해하고 또 채택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사소한 지적처럼 들릴 수도 있다. 왜냐하면 국민국가는 이러저러한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전개되어 왔으며, 따라서 국민국가에 대한 분석에서 그러한 역사적 전개과정에 대한 인식은 당연한 전제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국민국가의 역사’라는 표현으로 말하려는 것은 국민국가의 역사를 내적으로 규정해왔던 모순들이 무엇이고 그러한 모순들의 전개과정에 의해 국민국가의 역사적 형태들이 어떻게 결정되었는가라는 문제다.

내가 본문에서 다룬 필자들은 모두 국민국가를 일방적인 억압과 배제, 예속의 체계로 이해할 뿐, 이를테면 국민국가가 민주주의를 확장하려는 경향과 지배 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그것과 반대되는 경향의 모순적인 갈등의 산물로 이해하지 않는다. 이들의 비판과 달리 근대 국민국가는 전체주의적 국가와 동일한 것이 아니며, 국민 모두를 예속시키고 외국인을 비롯한 타자들은 항상 배격하는 억압적이고 패권적인 국가와 동일한 것도 아니다. 역사적으로 국민국가들이 그러한 문제점을 드러냈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드러내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그에 앞서 근대 국민국가는, 프랑스 혁명의 기본 이념이 담긴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관한 선언󰡕이 보여주듯이, 개인들의 자유와 평등의 이념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그러한 이념들은 역사적으로 헌법을 통해, 각종의 사회적 제도와 장치들을 통해 구현되고 확장되어 왔다. 이를 끊임없이 잠식하고 약화시키는 반경향, 곧 시민들의 기본적인 권리들을 축소하거나 박탈하고 억압적이고 치안적인 장치들을 강화하는 경향도 줄곧 동반되어 왔으며,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반경향들은 국민 국가 속에 구조적으로 기입되어 있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그것은 유일한 경향은 아니었으며, 그것에 대한 완강하고 지속적인 저항과 투쟁을 모면할 수도 없었다. 따라서 이러한 저항과 투쟁이 존재하며, 그것을 통해 성취된 역사적 성과들이 근대 국민 국가들의 헌정 자체 속에 기입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이 점에 관해서는 Donald Sassoon, One Hundred Years of Socialism: The West European Left in the Twentieth Century (New York, NY: The New Press, 1998) 중 6장 참조. 발리바르는 근대 국민 국가의 이러한 모순적인 역사적 전개과정을 파악하기 위해 국민국가 대신, 특히 흔히 사용되는 복지국가나 사회국가라는 용어 대신 ‘국민사회국가’라는 개념을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이 점에 관해서는 É. Balibar, Nous, citoyens d'Europe? 4장 및 Droit de cité, pp. 105 이하를 각각 참조하라. ]

또한 ‘국민’은 강제적인 억압 권력으로서의, 개인들 하나하나를 남김없이 포획하고 복종시키는 예속 권력으로서의 국민 국가에 사로잡힌 신민들과 동일한 것도 아니다. 이들이 간과하는 것은 개인이라는 범주 자체가 국민국가를 통해 형성되었으며, 오늘날에는 더욱 더 국가를 벗어난 개인이라는 것은 성립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강명관이 말하듯 국민국가가 개인들을 국민으로 ‘제작’한다는 것은 적절한 말이 아니다. 국민국가는(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권력은) 국민이 아니라 개인들 자체를 제작한다(이런 표현을 개인들은 자연적 존재자들이 아니라 인위적 존재자들이라는 의미로 사용한다면).[내가 알기로 ‘제작한다’(fabriquer)는 표현은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근대 규율권력과 관련하여 처음으로 사용한 것이다. 그리고 푸코는 정확히 ‘개인들을 국민으로 제작한다’고 하지 않고 “개인을 제작한다”(Michel Foucault, 󰡔감시와 처벌󰡕, 오생근 옮김, 나남, 1994, 225면)고 말한다. 그리고 이 경우에만 󰡔감시와 처벌󰡕이 지닌 전복적인 의미가 살아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국민국가에 대해 푸코의 표현을 가져다 쓸 수 있는가 하는 점은 논의의 여지가 있다. 푸코는 국민국가가 개인을 제작한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규율권력이 제작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푸코 자신의 관점에서 본다면 전자는 형용모순에 가까운 표현일 수 있다.] 국민 이전에 독립적인 개인들이 존재한다고, 따라서 국가 외부에, 국가와 독립하여 개인들이 일종의 자연 상태 속에서 성립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개연성이 적은 주장이다. 개인들은 국가에 의해 제작되는 것 또는 형성되는 것 이외에 달리 존재하거나 성립할 수가 없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개인들은 철저히 종속적이고 예속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것은 권력을 (의지와 욕망을 가진) 초월적인 대주체의 권력으로 가정하는 것이며, 권력의 작용을 부정적인 것으로만 파악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권력의 메커니즘을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전한, 목적론적 메커니즘으로 이해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개인들이 국가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 또는 개인들은 국가를 통해 성립하고 국가를 통해 생존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개인들이 누릴 수 있는 자유와 권리는 국가 안에서, 국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지그문트 바우만은 T. H. 마샬(Marshall)에 대한 재독해를 통해 이 점을 명확히 밝혀주고 있다. Z. Bauman, “Freedom From, In and Through the State”, op. cit. 참조.] 이를 천부적 자연권으로서의 인권 개념에 대한 비판 및 (일종의) 전도를 통해 처음으로 명확히 지적한 사람은 바로 한나 아렌트였다. 1차 세계 대전과 2차 세계 대전 사이에 유럽 출신의 모든 유대인 및 특히 여성 유대인들이 그랬듯이 복잡다단하고 곡절이 많은 삶을 살았던 한나 아렌트는 1920년대에서 1940년대까지의 정세, 특히 유럽에서 파시즘이 출현하던 위기의 시대에 자유주의 나아가 근대 정치-이데올로기 전반이 근본적으로 무력했던 이유를 성찰하면서 시민권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아렌트는 특히 이 시기에 발생한 거대한 ‘무국적’(stateless) 난민들의 비참한 상태를 관찰하면서, 근대 국민 국가의 이데올로기적 기초인 인권 이념이 근본적으로 진실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다.[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1󰡕, 박미애ㆍ이진우 옮김, 한길사, 2006, 9장 참조.]

근대적 인권 이념에 따르면 실정적이고 특수한 시민권은 그에 앞서 존재하는 자연적이고 보편적인 인권의 제도화이며, 이러한 인권은 시민의 권리와 정치적 제도에 대해 보편적인 정당성의 원리를 제공해 준다. 따라서 인권은 시민권보다 더 광범위하고 또 그로부터 독립적이다. 이 때문에 인권은 국가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 역시 권리들을 보장받을 수 있게 해 주는 기초가 될 뿐만 아니라, 그런 사람들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점점 더 중요해진다. 하지만 아렌트가 볼 때 사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녀가 볼 때 시민의 권리가 제거되거나 역사적으로 파괴되면 인권 역시 파괴되었다. 왜냐하면 인권이 시민권을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권이 인권을 기초하며, 따라서 국가나 제도가 보장하지 않는 자연적 권리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아렌트가 제시하는 ‘권리들을 가질 권리’는 추상적 인권 개념에 대한 반박이며 그것의 전도라고 할 수 있다.[아렌트의 이 개념이 지닌 복합적이고 때로는 모순적인 함의 및 그것이 미친 영향에 대해 여기서는 길게 논의하기 어렵다. 이 개념에 관한 상이한 해석들로는 특히 다음과 같은 저작들을 참조할 수 있다. 자유주의적 해석으로는 Michael Ignatieff, Human Rights as Politics and Idolatry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1), 칸트주의적 해석으로는 Seyla Benhabib, 󰡔타자의 권리󰡕, 이상훈 옮김, 철학과현실사, 2004, 반폭력의 정치라는 관점에서의 해석으로는 É. Balibar, Nous, citoyens d'Europe? 중 특히 7장, 민주주의적 관점에서의 비판으로는 Jacques Rancière, “Who Is the Subject of the Rights of Man?”, South Atlantic Quarterly, vol. 103, no. 2/3, 2004를 각각 참조.]

따라서 개인들이 국가를 떠나서는 생존할 수 없으며 자유를 누릴 수도 없다는 것은 개인의 자유가 근원적으로 제한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개인들의 존재 그 자체, 그리고 개인들이 향유할 수 있는 권리와 자유는 역사적으로 가변적이고 탄력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17세기의 개인과 18세기의 개인, 또 오늘날의 개인은 동일한 개인이 아니다. 또 어떤 의미에서 서유럽의 발전된 나라에서 살아가는 개인들과 아프리카 및 다른 저발전 국가들에서 폭력과 기아, 자연 재해를 겪으며 간신히 목숨을 부지해가는 사람들은 똑같은 개인, 똑같은 인간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는 서구 중심주의 내지 유럽 중심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한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개인들의 존재와 그들이 누리는 자유와 평등이 역사적으로 가변적인 만큼 그러한 불평등과 그러한 비동일성은 현재와 장래에 얼마든지 해소되거나 적어도 격차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국민국가의 역사적 한계들을 비판하기 위해 국민국가를 획일적인, 억압적ㆍ배제적 권력으로 간주할 필요도 없으며, 개인들이 국가 곧 국민국가를 통해서만 성립하고 실존한다는 것을 예속의 숙명적 필연성으로 받아들일 필요도 없다. 또 국민국가의 위기를 마침내 절대 악으로부터, 악마적인 지배 권력으로부터 벗어날 종말론적인 약속의 시간으로 이해할 필요도 없다. 국민국가가 역사적 존재이고 국민 역시 역사적 존재인 한에서, 국민국가와 국민은 전환 가능하며 그것도 내재적인 방식으로 전환 가능하다. 그러한 전환이 반드시 다행스러운 방향으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보장은 없지만, 그러한 방향으로 전개되도록 모색하고 노력할 수는 있다.

결국 국민국가의 성격에 대한 좀더 균형 잡힌 인식을 위해서는 국민국가에 대한 비판이라는 이름 아래 국민국가를 전일적이고 전능한 예속적ㆍ배제적인 권력 메커니즘으로 간주하는 대신에, 국민국가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또 그러한 역사를 가능케 하는 국민국가에 고유한 내재적 갈등과 모순들이라는 관점에서 국민국가를 파악하려고 시도해야 한다. 더 나아가 이러한 모순과 갈등의 역사를 피지배자, 대중, 인민의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적인 관점에서 국민국가의 역사 및 성격을 해명하기 위한 좀더 적절한 방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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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09-12-14 0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almas님..이런 야심한 시각까지...;;;; 그나저나 나중에 다시 읽어보겠슴다. 지금은 몽롱~

balmas 2009-12-14 0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연님 오랜만이시네요.^^; 저는 늘 이맘 때까지 있다가 잔답니다.^^;;

마일드 2009-12-22 1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글 잘 읽었습니다. 거론하신 분들의 주장에 "끝내" 공감할 수 없는 저로서는,
중요한 점들을 잘 지적하셨다고 생각하는데, 댓글로 일일이 밝히긴 곤란하네요.
한 가지 주요하게 말씀 나눠보고 싶은 건, 제 생각에 근대 국민국가 비판자들에게는
개인과 사회와 무리(공동체)라는 세 가지에 대한 이해에 문제가 있지 않나 싶어요.
개인(개체)과 사회는 동일한 것의 양면으로 함께 탄생된 것인데 그것을 마치 대립시키
는데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개인이 국가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로와지자는 발상에는
그런 착오가 작동하는 것 같습니다.
국가가 개인을 획일화된 주체위치로 결정짓고 그 안에 가둬버린 식의 이미지...
개체는 출발점도 아니고 목표도 아닌 거 같아요. 현실 속에서는
다양한 수준에서 구성될 수 있는 무리 뿐이 아닐까요?
프랑스 혁명 등에서 주장된 개인(의 자유와 평등)이란, 국민국가의 일방적 권력 행사에 대한
대항이 아니라, 다양한 힘들의 대립 속에서 생산된 것이라 보이구요(긍정적인 면이 많은 방식으로
생산된).
권력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도 많이 공감하는데요, 국민국가 비판자들은
개인을 권력의 억압 대상이라고 주로 생각하지만(최대치가 자발적 예속이죠),
푸코도 <감시와 처벌>에서 조금 약하게나마 표현했듯이, 개체는 규율권력의 생산물로서
상시적인 감시의 대상이자 상시적인 감시의 주체입니다.
그것은 억압이기도 하지만 힘을 행사하는 기쁨이기도 하죠.
이렇게 생각한다면 국가로부터 개인이 벗어나려는 기획은 근본적으로는 착오가 아닐까 싶어요.
말씀하신대로 근대권력을 국가 혹은 국가적 방식 속에 실재하는 구체적인 사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로부터의 해방을 자꾸 상상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권력의 대상이자 권력의 주체인 존재가 어떻게 권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요?
문제는 어떤 실체로 상정되는 권력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권력을
새로 구성하는 것이 아닐까요?
근대국가 비판자들이 상상하는 개인의 자유라는 게, 푸코도 말했듯이,
사회계약론이라는 환상의 결과 이전에 실제로 규율권력이 생산하는 거 아닙니까?
요컨대, 근대국가 비판자들은 권력으로부터 개인의 자유로운 해방이라고 하는 개체환상
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개체-사회'라는 근대의 발명품을 오해한 데서 비롯된 것 같습니다.
(근대의 발명품이라고 해서 그게 나쁘다는 의미는 전혀 없습니다. 사람들의 치열한 삶 속에서
사회역사적으로 구성된 것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그 자체로 나쁜 건 아니지만,
그중 개체를 따로 떼어내서 근대국가로부터의 해방의 이미지로 만들어버리면 나쁘게 되는 거겠죠?)
계속 건필하시기 바라구요, 개체(혹은 개체환상)와 다양한 수준의 무리(공동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언젠가 표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009-12-22 15:48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문제는 근대 자체라고 봅니다. 그 근대 자체를 문제 삼기 위해서 근대민족국가에 대해 물고 늘어져야 합니다. 어쩌면 개인의 해방이 아니라 개인 자체의 파괴로 나아가야 할지도 모르죠. 근대를 뭘로 보든 근대 아닌 어떤 것을 불가능하다고 보시진 않겠죠.

balmas 2009-12-22 0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멘트 감사합니다. 개체와 공동체 문제에 대해서는 조만간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죠.^^

2009-12-22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대답을 들을 수나 있을지 의문이지만 질문이나 던져 봅니다. 어차피 이런 문제를 검토할 바에야 포스트식민주의에서 비판하는 근대민족국가나 민족주의 나아가서 근대와 식민주의의 불가분성에 대한 생각도 밝히는 게 더 좋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 사람들은 국가 이후인 정도가 아니라 근대 이후를 꿈꾸고 있지 않습니까? 어찌 보면 저 위에서 거론한 사람들보다 더 과격하지 않습니까? 나아가서 치아파스 봉기와 관련 있는 마르코스 같은 사람은 그렇다면 불가능한 꿈을 꾸고 있는 건가요?

많은 사람들을 거론하셨지만 좁게 보면 임지현 씨를 주요 타켓으로 삼으신 걸로 보이는데 사람들이 왜 그렇게 임지현 씨 얘기에 관심이 많은지 그거 자체도 흥미로운 현상입니다. 왜냐하면 임지현 씨 얘기는 전혀 새로운 게 아니거든요. 대중독재나 독재대중이나 그게 그거란 말입니다. 보아 하니 독일 일상사를 엉뚱한 방식으로 전유하고 있는 걸로 보이는데 독일 일상사의 문제의식은 임지현 씨가 말하는 그런 것과는 관계 없습니다. 그 독일 일상사 자체도 나름의 문제를 지니고 있구요. 여기서 자세히 얘기하기는 힘들겠죠.

아무래도 이건 한국 사회의 보수화 현상과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는 듯 합니다. 저는 임지현 씨 얘기를 중요한 것으로 간주하는 (어쩌면 발마스 님도 포함) 한국 사회의 정치적인 이데올로기적 맥락이 존재한다고 봅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 얘기를 단순하다고 하시는 분이 임지현 씨 얘기는 왜 이렇게 진지하게 다루시나요? 임지현 씨가 더 단순합니다. 아닌가요? 인신공격이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임지현 씨 얘기는 신경쓸 필요가 없는 얘기입니다. 별로 배울 게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땅의 지식인들에게 실망하게 됩니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포스트식민주의자들의 근대민족국가 비판에 대한 생각도 가능하다면 듣고 싶습니다. 무례하게 들리시겠지만 돌려서 얘기하는 재주가 없습니다. 실례 많았습니다.

balmas 2009-12-23 04:03   좋아요 0 | URL
의미 있는 문제제기를 하셨는데, 답글은 그냥 간단히 달겠습니다. 사실 뭐 댓글로 길게 할 수 있는 이야기도 아니겠지요. 첫째, 국민국가나 민족주의에 관한 포스트식민주의적 논의는 왜 이야기하지 않느냐고 하셨는데, 그런 논의들을 염두에 두고 있기는 합니다만, 아마 다른 논문에서 다뤄야 할 것 같아서 이번에는 다루지 않았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상당히 중요한 논의거리라고 생각합니다. 둘째, 임지현 선생을 왜 그렇게 진지하게 다루냐고 하셨는데, 제가 보기에는 임지현 선생이 중요한 문제를 제기했다고 봅니다. 물론 논의 방식이나 결론 또는 전제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 점들이 많고, 그래서 이번 글을 썼지만, 아무튼 그의 문제제기는 국민국가에 관한 이야기이든, 권력 일반에 관한 이야기이든, 아니면 전체주의나 폭력론에 관한 논의이든 또는 한국사에 관한 문제이든 간에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할 논점들을 담고 있다고 봅니다. 그의 논점이나 전제, 결론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더욱 더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게 이 글을 쓰게 된 동기 중 하나죠.
 

곧 서강대학교 철학연구소에서 펴내는 {철학논집}이라는 학술지에 실릴 글을 하나 올립니다.  

작년에 우리나라를 크게 뒤흔들었던 촛불집회를 배경으로 하여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의 다중의 정치학을 

스피노자주의적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고찰한 글입니다. 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볼 겸, 촛불집회 및 대중의 정치학에 관한 

논쟁을 시작해볼 겸, 비판적인 시각에서 써본 글입니다. 이 주제에 관해 앞으로 몇 편의 글을 더 발표할 생각인데   

이 주제에 관해 많은 비판적인 문제제기와 토론이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아직 {철학논집} 해당호가 발간되지 않아서 인터넷 서비스가 되지 않을 텐데, 이 글에 관한 논평이나 토론은  

해당 학술지를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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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의 정치란 무엇인가? 다중의 정치학에 대한 스피노자주의적 비판 
 

[이 글은 2008년 10월 6일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단의 제35차 월요모임에서 처음 발표되었다. 여러 가지 좋은 논평을 해주신 연구단 선생님들과 익명의 심사위원들께 감사드린다.]

 

 

I. 대중의 시대에서 다중의 시대로?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로 촉발되어 작년 5월부터 국내 정치를 소용돌이 속에 몰아넣었던 촛불 시위는 새로운 시위 형태를 선보이면서 다수의 언론 및 학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일부 언론과 학자는 이들의 시위가 새로운 정치 주체로서 이른바 ‘다중(多衆)’의 등장을 입증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그 사례로는 정인경 2008, 박영균 2008 및 조정환 2009를 참조.] 이러한 해석을, 일시적인 현상에 대한 지나친 호들갑이라고 넘겨버릴 수도 있지만, 이번 촛불 시위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새로운 양상을 보여준 바 있다는 점에서 일축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촛불시위의 양상과 의의에 대한 평가로는 권지희 외 2008 및 다양한 계간지 특집을 참조.]

촛불시위는 네 가지 주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 촛불시위의 가장 큰 특징은 지도부 없는 시위, 이른바 “배후” 없는 시위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이런저런 반정부 집회나 시위 또는 노동조합 중심의 집회는 운동 단체들이나 노조 단체가 지도부를 구성하고 조직 대중을 동원함으로써 진행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작년 시위는 이른바 “운동권” 활동가들이 시인하듯 운동권의 동원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통제나 지도가 전혀 먹혀들지 않았던, 그럼에도 이전 어느 때보다 거대한 군중이 모여 정권에게 큰 위협을 주었던 시위였다. 따라서 대중들의 자발적 참여야말로 촛불시위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촛불시위의 또 다른 특징으로는 참여한 개인 및 집단의 다양성을 들 수 있다. 촛불시위는 이른바 ‘운동권’ 단체들이 주도한 것도 아니고 운동권에 속한 개인들 및 단체들이 주류를 이룬 것도 아니다. 중고등학생에서부터 직장인과 가정주부, 노동단체 및 사회단체, 노년층에 이르기까지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참여했고, 극좌파 운동단체를 비롯 중도적이거나 우익적인 정치 단체(예컨대 창조한국당이나 박사모 회원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정치적 성향을 지닌 사람들이 가담했다.

셋째, 인터넷과 디지털 매체를 통한 운동 방식을 꼽을 수 있다. 촛불시위는 인터넷을 비롯한 디지털 매체가 정치적 문제에서 얼마나 커다란 동원력과 파급력을 지니고 있는지 잘 보여준 사례다. 시위를 촉발한 직접적 계기도 문화방송의 PD수첩이었으며, 이 프로그램에 공감한 사람들이 집회를 조직하고 시위에 참여하는 데에도 인터넷에서의 여론 조성이 큰 힘을 미쳤다. 이는 이후에 시위가 확산되는 데에도 결정적인 동인으로 작용했다. 더 나아가 개인적인 디지털 매체를 활용한 시위현장의 생중계를 통해 거대 언론 매체와 다른 시각으로 시위를 보도하고 또 거기에 많은 대중들이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데에도 인터넷을 비롯한 디지털 매체가 큰 역할을 했다. 아마 인터넷이 없었다면 촛불 시위는 위력과 지속성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촛불시위의 또 다른 특징은 비정치적인 정치성으로 꼽을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촛불시위는 겉보기에는 정치와 거의 관계가 없어 보이는 문제, 곧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에서 촉발되어, 대운하와 공공 부문의 사유화, 교육 문제, 한미 FTA 문제 등과 같은 다양한 쟁점들로 이슈가 확산되었으며, 그 결과 출범한지 불과 100여일밖에 되지 않은 이명박 정권을 심각한 위기로 몰아넣었다. 그 이후 미국과의 쇠고기 추가 협상이 진행되고 공권력을 강경하게 발동함으로써 눈에 띄게 약화되었으나, 촛불시위는 생활상의 구체적인 문제들이 정치적 쟁점으로 전환될 수 있음을 잘 보여준 시위였다.

이런 특징들은 촛불시위의 두드러진 차별적 요소들로 간주되어 여러 논객들 및 언론으로부터 주목과 찬사를 받았다. 실제로 이런 특징들이 촛불시위를 돋보이게 만든 요인인 것은 부인할 수 없으며, 또한 이번 촛불시위가 지난 1987년 민주화 투쟁 이후 최대의 대중적인 민주주의 투쟁 중 하나라는 점 역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새로운 민주주의의 표현인지, 또 더 나아가 새로운 정치적 주체의 출현을 예고하는 징후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이것은 촛불시위가 지니는 긍정적인 측면을 축소하거나 부인하자는 뜻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낭만적인 이상화가 낳을지도 모를 위험을 신중히 고려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보기에 촛불시위를 해석하고 평가하기 위한 기준의 하나로 다중(multitude)이라는 용어가 널리 운위되고, 그 용어를 기반으로 자신의 정치철학을 구축한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의 저작들이 거론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는 단지 네그리와 하트의 작업이 대중운동과 대중 민주주의의 기초를 재구성하기 위한 대표적인 작업 중 하나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또한 촛불시위에 참여한 대중의 자발성 및 그것이 이룩한(또는 이룩했다고 간주되는) 민주주의의 새로운 지평에 대한 찬사와, 네그리ㆍ하트의 다중의 정치학 속에는 대중과 대중운동을 보는 어떤 공통 관점이 함축돼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은 그러한 공통 관점이 무엇인지, 그것의 이론적 요소들은 어떤 것이고 또 그 강점과 난점은 무엇인지 비판적으로 검토해보기 위한 시도다.

 

II. 네그리ㆍ하트의 다중의 정치

 

1. 제국의 세 측면

 

[제국]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네그리와 하트는 자신들의 저작의 목적을 두 가지로 제시한다. 첫 번째는 세계화된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일반적인 권력론”을 제시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이러한 권력이 행사하는 “공통적인 착취 및 억압 형태”들에 맞선 “해방과 민주주의를 향한 공통적인 가능성들을 창조”([제국], 11쪽)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목표는 이 책의 두 가지 중심 개념, 곧 제국과 다중을 중심으로 구현되고 있다.

 

1) 혼합정체로서의 제국

 

제국은 네그리와 하트에게 세계화된 질서를 가리키는 개념이며, 세 가지의 특징을 지닌다. 첫째는 “혼합정체(mixed constitution)”라는 특징이다. 고대 로마의 역사가 폴리비우스에게 빌려온 이 개념은 제국을 구성하는 세 가지 권력의 층위를 표현한다. 여기서 군주정은 제국의 외교와 통화, 문화 통제를 위한 일련의 국제기구들(유엔, 세계은행, IMF, WTO, G8 등)을 가리키고, 귀족정은 자원 분배와 교환의 네트워크로서 다국적 기업이 구조화하고 국민국가의 영토적인 조직에 의해 매개된다. 그리고 민주정은 대중적인 대표 제도와 의사소통의 메커니즘을 담당하는 집단들로, 대중 매체와 문화산업 및 다수의 비정부조직들(NGO)이 그것들이다. 이들에 따르면 이러한 혼합정체로서의 제국은 영토적인 논리에 종속되어 왔던 국민국가 중심의 국제질서 또는 제국주의적인 국제질서가 종식되고 탈영토화된 범세계적인 제국적 주권이 성립되었음을 보여준다([제국], 248쪽 이하).
 

2) 통제사회로서의 제국
 

두 번째 특징은 제국적인 질서에서는 자본주의의 실질적 포섭이 확립됨에 따라 사회가 규율사회에서 통제사회로 이행했다는 점이다. 푸코가 말하는 규율 권력은 근대의 자율적인 주체가 실은 감옥이나 학교, 병원, 군대, 공장 등에서 권력의 메커니즘에 의해 제작된 예속적 개인들이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제시된 개념이며, 들뢰즈의 통제사회라는 개념은 20세기 이후 이러한 규율권력이 한층 더 강화되고 있음을 해명하기 위한 개념이다.

반대로 네그리와 하트는 이 개념들을 빌려오면서도 그것을 전도시켜서 활용하고 있다.[이는 1960년대 이래 라니에로 판지에리(Raniero Panzieri)와 마리오 트론티(Mario Tronti) 등이 주도했던 “오페라이스모(operaismo)” 운동의 사상적 기반을 이루는, 마르크스의 실질적 포섭 개념에 대한 재해석과 같은 노선에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Bowring 2004 참조.] 다음 구절은 이를 잘 보여준다. “실질적 포섭이 사회의 경제적 차원이나 문화적 차원뿐만 아니라 사회적 생명체 자체에 스며드는 것으로 이해될 때, 그리고 실질적 포섭이 규율성 그리고/또는 통제의 양태들에 주의를 기울일 때, 실질적 포섭에 대한 분석은 자본주의 발전의 직선적이며 전체주의적인 형상을 분쇄한다. 시민사회는 국가 속에 흡수되지만, 이러한 흡수의 결과, 전에는 시민사회에서 조정되고 매개되던 요소들이 [이제는 국가 속에서] 폭발한다. 저항들은 더 이상 주변적이지 않고 네트워크 속에서 열리는 사회의 중심에서 활동한다. 즉 개별적인 지점들은 천 개의 고원에서 독특화된다. 그러므로 푸코가 암묵적으로 구축한 (그리고 들뢰즈와 가타리가 분명하게 만든) 것은 [...] 최대한의 복수성과 구속할 수 없는 독특화라는 새로운 환경―사건의 환경―을 드러내는 권력의 역설이다.”([다중], 55쪽) 어떻게 이러한 전도가 가능할까? 그것은 그들이 제국에 대한, 주권적 권력에 대한 다중의 역량의 존재론적 우위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3) 비물질적 노동의 헤게모니
 

이러한 다중의 역량은 비물질적 노동을 중심으로 하는 정보적이고 소통적이며 정서적인 노동력의 확산 및 헤게모니화로 표현되며, 이를 바탕으로 공산주의의 새로운 전망이 열리게 된다는 것이 [제국]의 세 번째 근본 전언이다. 이들이 말하는 비물질적 노동이란 “서비스, 문화 상품, 지식, 또는 소통과 같은 비물질적 재화를 생산하는 노동”(같은 책, 382쪽)을 뜻하는데, 여기에는 컴퓨터와 연결되거나 컴퓨터를 작동모델로 삼는 노동, 곧 정보처리 및 소통기술과 관련된 노동과 더불어 상징적ㆍ분석적 노동, 곧 “문제를 해결하고 문제를 명시하며 전략적으로 중개하는 활동들”이 존재하며, 또한 정서의 생산과 처리를 포함하는 정서노동도 여기에 속한다.

비물질적 노동의 중요성은 이러한 노동의 각 형태 속에는 “협동이 노동 자체 속에 완전히 내재한다”는 점, 곧 “비물질적 노동은 직접적으로 사회적 상호작용과 협동을 포함한다”([제국], 386쪽)는 데에 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에 비물질적 노동의 협동적인 측면은 더 이상 이전의 노동형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외부에서 부과되거나 외부에 의해 조직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 활동 그 자체에 완전히 내재적이게 되기 때문이다. 이로써 노동이 더 이상 자기 외부의 적대적 타자인 자본에 의해 가치증식(valorizaion)되지 않고 자기 자신을 가치화(이것 역시 valorization이다)할 수 있게 되며, 이는 곧 공산주의의 가능성이 이미 잠재적으로 내재해 있음을 의미한다. “자기 자신의 창조적 에너지를 표현하는 데서, 비물질적 노동은 일종의 자생적이고 초보적인 공산주의를 위한 잠재력을 제공하는 것 같다.”([제국], 387쪽)

하지만 이는 현재 모든 노동이 비물질적인 노동으로 바뀌고 있다거나 또는 과반수 이상의 노동이 비물질적 노동이라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네그리와 하트가 강조하는 것은 이러한 비물질적 노동이 “질적인 면에서 헤게모니적인 것이 되었고, 다른 노동형태들과 사회 자체에 대해 그런 경향을 부과해왔다”(Hardt & Negri 2008, 146쪽―강조는 네그리ㆍ하트)는 점이다.[[제국]에서는 마치 비물질노동이 전반적으로 확산된 것처럼 말하고 있으며, 이는 브레넌(Brennan 2007)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에게 비판받은 바 있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에 대응하기 위해 제시된 “질적인 헤게모니”라는 관점도 여전히 난점을 안고 있다. 비물질노동론에 관한 좀더 상세한 비판으로는 Camfield 2007 참조.]

 

2. 해방과 변혁의 주체로서 다중
 

[제국]이 제목이 시사하듯 새로운 제국적 질서의 개념화와 서술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다중에 대해서는 마지막 한 장만을 할애하고 있다면, [다중]에서는 2부와 3부에 걸쳐 다중이 좀더 상세하고 세심하게 개념화되고 있으며, 다중이 추구하는 민주주의의 양상들이 논의되고 있다. [다중]의 핵심 문제는 제국의 질서에 맞선 저항과 투쟁, 변혁의 주체인 다중은 누구이고, 다중이 추구하는 민주주의의 성격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네그리와 하트의 말을 빌리자면 이는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다. “오늘날 인민의 주권에 의존하지 않고 그 대신 다중의 생명정치적인[번역본에서는 “삶정치”라고 번역된 이 개념의 원어는 “biopolitics”이며, 이와 대비되는 개념은 “biopower”, 곧 “삶정치” 내지는 “삶권력”이다. 네그리와 하트는 [제국]과 [다중]에서 “생명권력”과 “생명정치”라는 개념쌍을 주요한 이론적 도구로 활용하고 있는데, 전자가 다중의 생산력을 포섭하는 자본의 지배장치를 표현한다면, 후자는 이것에 저항하는 다중의 생산적 역량을 나타낸다. 이 두 개념은 [성의 역사 1권. 앎에의 의지](1976) 및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인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1976)에서 유래한 것들이며, 푸코에게서는 거의 등가적인 의미로 사용된다는 점에서 네그리/하트의 용법과 차이를 지닌다. 푸코의 생명권력/생명정치 개념의 의미에 대해서는 진태원 2006 참조.] 생산성에 기초를 두는 새로운 정당화 과정을 상상하는 것이 가능한가? 저항과 봉기의 새로운 조직형식들이 마침내 근대적 투쟁의 계보학 전체에 내재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가? 민주주의, 평등 그리고 자유에 기초를 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다중의 투쟁 속에, 어떠한 초월적 권위에도 호소하지 않으면서 무력 사용을 정당화할 수 있는 어떤 내재적 메커니즘이 존재하는가?”([다중], 114쪽)
 

1) 다중의 의미
 

[제국]에서 다중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규정되었다. 하나는 새로운 프롤레타리아로서의 다중이라는 규정이다. 곧 다중은 “자본주의적 생산 및 재생산 규범들에 의해 착취되고 그 규범들에 종속되는 모든 사람들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범주”(Hardt & Negri 2001, 91쪽)로 규정된다. 이는 산업 노동자 계급과 프롤레타리아를 구분하고, 다중을 새로운 종류의, 일반적인 프롤레타리아로 규정하려는 두 사람의 의도를 담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다중은 제국과 관련하여 존재론적으로 우월한 것으로 규정된다. 네그리와 하트에게 제국은 전적으로 부정적인 것은 아닌데, 왜냐하면 제국은 영토적인 논리의 한계에 매어 있던 국민국가 및 제국주의적인 한계를 넘어서 생산력의 탈영토화와 다양하고 독특한 주체성들 사이의 소통의 가능성 및 주권의 범세계적 보편성을 확립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무수한 얼굴을 한 대중운동이 지닌 이러한 구성적 측면은 실제로 제국의 역사적 건설이 지닌 긍정적 지형이다.”(같은 책, 102쪽) 두 사람은 이런 의미에서 제국과 다중은 두 개의 머리를 가진 독수리에 비유할 만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동시에 제국이 흡혈귀처럼 다중의 산노동의 피를 빨아먹어야 생존하는 단순한 포획장치에 불과한 것에 비해 다중은 제국 안에서 제국에 반대하는 세력이며, “우리의 사회 세계의 실질적인 생산력”이다. 따라서 제국적 질서가 이전 시대에 비해 무언가 성취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다중의 생산력, 생명정치의 결과이며, 제국은 이러한 존재론적 기초로서 다중에 기생하는 흡혈귀에 불과하다.

이처럼 [제국]에서 다중에 대한 규정이 개략적인 소묘에 그쳤다면, [다중]에서는 (여전히 불충분하고 빈틈이 많기는 하지만) 좀더 명확한 개념적 내용을 부여받고 있다. 우선 다중은 존재론적으로 좀더 정확한 규정성을 얻는데, 이는 이전까지 정치의 주체들로 간주되어 왔던 상이한 집단들과 다중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해명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다중과 인민(people)의 구별은 네그리와 하트가 가장 중시하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들에게 인민은 서양 정치철학사의 근간 개념 중 하나이며, 더욱이 초월적인 주권과 맞짝을 이루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민과의 차이점이 분명히 제시되어야만 다중이 갖는 존재론적 지위 및 정치철학적 함의가 분명히 드러난다.

인민은 우선 통일성과 환원의 원리로 제시된다. 곧 수없이 다양한 개인들과 계급들에게 통일성 내지 정체성을 부여하고, 이를 통해 초월적인 주권 아래로 복속시키는 원리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바로 인민이다. 이러한 인민에 대한 규정에서 이들이 가장 많이 의존하는 것은 토마스 홉스의 리바이어던 모델이다. 이는 홉스가 인민과 다중의 차이를 명확히 규정하면서 국가를 구성하는 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중을 해체하여 인민으로 형성하는 일이라는 점을 명시적으로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Hardt & Negri 2001, 149쪽 이하. 네그리 이외에도 비르노 역시 홉스를 인민과 다중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한 준거로 삼는다. Virno 2004 참조.]

“인민은 하나(일자)이다. 물론 인구는 수없이 다양한 개인들과 계급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인민은 이 사회적 차이들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종합하고 환원한다. 이와 달리 다중은 통일되어 있지 않으며 복수적이고 다양한 상태로 남아 있다. 정치철학의 지배적 전통에 따르면, 이것이 바로 인민이 주권적 권위로서 지배할 수 있고 다중이 그럴 수 없는 이유이다. 다중은 독특성들의 집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여기서 독특성은 그 차이가 동일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사회적 주체, 차이로 남아 있는 차이를 뜻한다.”([다중], 135쪽―강조는 네그리ㆍ하트)

그러나 다중이 이처럼 복수적이고 어떤 하나의 중심으로 환원 불가능하다고 해서 다중이 보통 이야기하는 대중(mass)과 같은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네그리와 하트에게 인민과 대중은 동일한 과정의 두 측면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인민이 주권의 기계로 포섭되어 획일적인 동일성을 지닌 집단을 가리킨다면, 대중은, 이러한 포섭을 전제한 가운데 동질적이고 분산되어 있는 개인들의 집합으로 해체된 인민을 가리킨다. 네그리와 하트에 따르면 대중의 특징은 단지 파편적이거나 무차별적이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또한 서로 “지리멸렬하여 공통적으로 공유된 요소들을 인정하지”(같은 책, 136쪽) 않는 상이한 개인들이나 집단을 가리킨다. 바로 이 때문에 대중이나 군중 또는 폭도는 “스스로 행동할 수 없고 오히려 지도받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근본적으로 수동적이다.”(같은 곳)

다중은 통상적인 의미의 노동계급과도 차이를 지닌다. 다중 개념과 구별되는 노동계급 개념의 근본 특징은 배제에 기초를 둔 제한된 개념이라는 점에 있다. 반면 다중은 어떠한 배제나 우열도 전제하지 않은 “개방적이고 확장적인” 개념이다. “다중은 프롤레타리아 개념에 그 가장 풍부한 규정, 즉 자본의 지배 아래에서 노동하고 생산하는 모든 사람들이라는 규정을 부여한다.”([다중], 143쪽) 하지만 그렇다고 다중이 무정형적인 집단 일체만을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네그리와 하트는 다중 역시 하나의 계급 개념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다중이 계급 개념이라는 것은 크게 두 가지를 뜻한다. 첫째, 이는 전통적인 노동자 계급 개념의 제한성과 배타성을 쇄신하고 계급의 외연과 내포를 좀더 확장하기 위해 제시된 개념이다. 둘째, 다중 개념은 마르크스의 정치적 기획과 단절하지 않고 새로운 조건 속에서 그것을 쇄신하기 위해 제시된 개념이다. “다중 개념은 계급투쟁에 대한 마르크스의 정치적 기획을 다시 제시할 수 있기 위한 것이다.”([다중], 142쪽)
 

2) 주권에 대한 다중의 존재론적 우월성

다중 개념의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은 그것이 주권에 대한 다중의 존재론적 우월성을 표현한다는 점이다. 이는 [제국]에서도 명시적으로 지적되었으며, [다중]에서도 지속적으로 강조된다. “[주권권력의] 긍정적이고 능동적인 한계는 노동 및 사회적 생산과 관련해서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다. 노동은 자본에 종속될 때조차도 언제나 자신의 자율성을 반드시 유지한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 노동의 새로운 비물질적이고 협력적이며 협동적인 형태들에서 훨씬 더 명백하게 나타난다.”(같은 책, 87쪽)

더 나아가 주권과 다중의 존재론적 차이는 주권의 양면성을 통해 표현된다. 주권의 양면성이란 주권은 자율적인 실체가 아니며 결코 절대적이지도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주권은 자신이 지배하는 피지배자들과의 관계, 보호와 복종, 권리들과 의무들 사이의 관계로 구성된다. 따라서 이러한 주권의 양면성은 일차적으로 무력에 의한 주권의 통치의 한계를 내포하며, 피지배자, 신민들의 동의를 필수적으로 요구한다(이는 자유주의적인 이론가들만이 아니라 마키아벨리나 스피노자 같은 현실주의 사상가들도 폭넓게 공유하고 있는 점이다). 하지만 네그리와 하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주권의 양면성은 “하나의 관계일 뿐만 아니라 또한 부단한 투쟁”이라는 것, 그리고 “이 관계는 주권이 도전받고 전복될 수 있는 지점”이라는 것을 함축한다고 주장한다. 주권이 양면적이고 관계적이라는 바로 그 사실로 인해 주권의 존립은 그것과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의 지속적인 참여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러한 참여, 곧 복종을 거부하게 되면, 주권은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현재의 세계화된 제국의 질서에서 좀더 극적으로 변화하게 된다. 제국의 질서 하에서 경제적 생산이 점차 생명정치적인 것이 되어 “재화의 생산만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정보, 소통, 협력의 생산, 요컨대 사회적 관계들과 사회적 질서의 생산을 목표로”(같은 책, 398쪽) 하게 되면서 제국 안에서 자본과 주권은 완전하게 중첩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본이 끊임없이 노동의 생산성에 의존하고, 따라서 비록 자신에게 적대적이지만 노동의 건강과 생존을 확보해야 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제국적 주권 역시 동의에 의존할 뿐만 아니라 피지배자들의 사회적 생산성에도 의존”하는 것이다. 또한 제국은 무제한적인 것이기 때문에, 제국이 지배하는 사람들은 착취될 수는 있어도 배제될 수는 없다. 이는 “제국이 전지구적 다중 전체와 맺는 지배 및 생산의 관계와 끊임없이 대면할 수밖에 없고, 그것이 가하는 위협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399쪽)는 점을 뜻한다.

따라서 제국의 질서 하에서 주권과 다중의 생명정치적 역량 사이에는 힘의 관계가 완전히 역전되어 피지배자들이 사회적 조직의 배타적 생산자로 등장하게 된다. 이는 주권이 곧바로 붕괴한다는 것, 따라서 권력을 곧바로 상실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지배자들이 더욱더 기생적이게 되고 주권이 점차 불필요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같은 곳―강조는 인용자) 네그리와 하트는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이에 상응하여 피지배자들은 점차 자율적이게 되고 그들 자신의 사회를 형성할 수 있게 된다”(399-400쪽―강조는 인용자)고 주장한다. 제국적 질서의 생산 그 자체가 이미 자율적인 주체의 형성, 정치적 주체로서 다중의 잠재력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3) 정치적 주체로서 다중
 

이처럼 다중의 존재론적 우월성에 대한 긍정에 그치지 않고, 오늘날 다중이 자기 자신을 정치의 주체로서 구성할 수 있는 온전한 역량을 지니고 있다는 것, 곧 다중은 엄밀한 의미에서 정치적 주체라는 것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다중]은 [제국]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우선 네그리와 하트는 단도직입적으로, 오늘날 변혁과 해방의 정치, 곧 혁명의 정치의 유일한 주체는 다중임을 천명한다. “오늘날 변혁(transformation)과 해방을 목표로 하는 정치행위는 다중을 기초로 해서만 수행될 수 있다.”(Hardt & Negri 2008, 135쪽) 그 근거는 방금 보았던 주권의 기생화와 피지배자들의 자율화에서 찾을 수 있다. 제국의 질서에 이르러 “갑자기, 일자가 지배할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일자가 결코 지배할 수 없는 것으로 보”(같은 책, 400쪽)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질문을 던져보지 않을 수 없다. 네그리와 하트가 말하듯이 주권이 점점 더 기생적이게 된다고 해도 그것이 과연 반드시 피지배자들이 점점 더 자율화된다는 것, 정치적 주체로서 다중이 일자 없이 통치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함축할까? 그들이 명시적으로 이 질문을 던지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들은 “다중이 어떻게 결정에 도달하는가”(같은 책, 402쪽)라는 문제를 핵심적인 질문으로 제기하고 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 우선 전제가 되는 것은 앞서 이야기되었던 현대 자본주의에서 비물질적 노동의 헤게모니적인 경향이다. 정보와 소통, 정서 노동을 핵심으로 하는 비물질적 노동이 헤게모니적인 지위를 차지함으로써 현대의 모든 생산에는 항상 이미 협동의 성향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자기 가치화가 가능하게 되며, 더 나아가 다중의 창조의 조건인 “공통된 것의 생산”의 가능성이 생겨나게 된다.

분명히 공통된 것의 생산 가능성은 그 자체로는 아직 정치에 미달하는데, 왜냐하면 정치는 공통된 것의 생산을 넘어 결정이 어떻게 가능한지, 어떻게 다중이 결정에 도달하게 되는지 그 가능성을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네그리와 하트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몇 가지 유비, 곧 신경생물학자들이 설명하는 두뇌 기능 모델(두뇌는 일자가 아니라 다중으로서 존재한다)이나 “다중은 마치 언어처럼 조직되어 있다”는 유비 또는 컴퓨터 소프트웨어의 협동적 발전과 소스 공개 운동이 수행한 혁신들과의 유비 등을 제시할 뿐(같은 책, 403쪽 이하), 정치 제도의 틀 안에서 어떻게 다중의 결정이 이루어질 수 있는지, 또 그 구체적인 제도적 틀의 형태는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다중이 정치적 주체, 그것도 유일하게 해방적인 정치적 주체라는 두 사람의 믿음은 굳건하다. “다중은 다양함을 유지하고 내적으로 차이를 유지한다 할지라도 공통적으로 행동할 수 있으며, 따라서 자기 자신을 지배할 수 있다. 다중은 하나가 명령하고 나머지들이 복종하는 정치적 신체라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자신을 지배하는 살아 있는 육체flesh다. [...] 다중은 민주주의, 다시 말해 만인에 의한 만인의 지배라는 법칙을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사회적 주체다.”(같은 책, 137쪽)

 

III. 다중의 정치는 스피노자주의적인 정치인가?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또 네그리와 하트 자신도 여러 차례에 걸쳐 지적하고 있듯이 이 두 저작의 저변에는 특정한 스피노자주의, 네그리가 오랜 시간에 걸쳐 이론화하고 가다듬은 스피노자주의가 관류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두 저작은 두 사람이 제국의 시대에 다시 쓰는 그들 나름의 스피노자 철학, 스피노자의 [윤리학]과 [정치론]의 새로운 종합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네그리와 하트의 다중의 정치학을 좀더 심층적으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이들이 제시하는 스피노자주의가 어떤 것인지, 또 그것이 스피노자 철학과 얼마나 부합하는 것인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1. 역량과 권력
 

[제국]과 [다중]을 관통하는 스피노자주의의 핵심에는 포텐샤(potentia)와 포테스타스(potestas), 또는 (두 개념을 번역해서 사용하자면) 역량과 권력이라는 스피노자 철학의 중심 개념쌍이 존재한다. 이러한 개념쌍에 대한 네그리와 하트의 해석 내지 변형은 스피노자 철학의 전개과정에 대한 네그리의 매우 독특한 해석과 결부되어 있다.[이 점에 관한 좀더 자세한 논의는 진태원 2001을 참조.]
 

1) 스피노자 철학 내부의 단절
 

네그리에 따르면 스피노자의 철학의 발전과정에는 상이한 두 단계가 존재한다. 첫 번째는 초기 저작에서부터 [윤리학] 1-2부에 이르는 단계(1661-1665)로, 이 단계에서 스피노자는 신플라톤주의적인 범신론적 철학체계를 제시하고 있다. 이는 능산적 자연인 실체와 속성이 소산적 자연인 (유한)양태들의 세계의 기본적(이고 초월적인) 구성 원리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잘 나타난다. 이에 비해 두 번째 단계(1670-1677), 즉 [윤리학] 3-4부와 [정치론]에서 표현되고 있는 성숙한 스피노자의 철학에서는 첫 번째 단계의 철학에 남아있던 신플라톤주의적 철학의 영향이 완전히 사라지고(네그리는 이를 특히 실체 개념과 속성 개념이 3-4부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찾는다), 그 대신 정치론에서 등장하는 다중의 역량(potentia multitudinis)이라는 개념이 기본적인 세계구성의 원리로 제시된다. 네그리는 말년에 이르러서 스피노자가 다중이라는 세계구성의 주체를 발견하게 되었고 이는 철학사에서 유례없는 완전한 내재성의 철학의 가능성을 제시해 준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네그리에 따르면 비록 스피노자가 이 개념에 따라 민주주의 이론을 완전하게 체계화하는 데는 실패했지만[미완의 민주정 이론에 대한 네그리 자신의 재구성에 관해서는 특히 Negri 1994중 3장 참조.], 이를 철학적으로 제시했다는 점에 바로 스피노자의 현재성이 있으며, 좌파의 이론가들은 스피노자가 남겨놓은 철학적 유산에 따라 이를 보다 완전하게 체계화해야 할 이론적 의무가 있다.
 

2) 역량과 권력의 계보  

스피노자 철학의 전개과정에 대한 이러한 해석을 바탕으로 네그리는 [야생의 별종]에서 스피노자의 철학을, 르네상스 시기 생산력의 발전에 의해 개시된 위기 속에서 생산력을 자본주의적인 생산관계로 조직화하려는 노선―이는 곧 권력의 노선으로, 홉스ㆍ루소ㆍ헤겔로 이어지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노선이다―과 이러한 조직화에 반대하는 노선―이는 마키아벨리ㆍ스피노자ㆍ마르크스로 이어지는 다중의 역량의 노선이다―의 대립에서 후자의 계보에 속하는 것으로 위치시킨다. 네그리에 따르면 근대성이라는 것은 “서양 합리주의의 선형적 발전도, 서양적 이성의 운명도 아니”며, “자유로운 생산력의 발전과 자본주의적인 생산관계의 지배 사이에 항상 양자택일이 존재해 온 모순적인 전개과정”이다. 따라서 다중의 자유로운 생산력 대 자본주의적인 지배관계, 또는 역량 대 권력 사이의 대립 노선이 서양 근대의 정치적ㆍ이데올로기적 공간을 구조화하는데, 스피노자는 부르주아 생산관계의 헤게모니가 성립하는 고전주의 시기(17세기)에 이러한 헤게모니에 대항하여 생산력과 존재의 충만한 역량을 강조하는 “야생의 별종(savage anomaly)”의 위치를 차지한다.

따라서 서양 근대성의 최초의 헤게모니가 성립하는 과정―이는 부르주아지의 자기구성과정과 다르지 않다―에서 이 헤게모니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대표하며, 또한 이러한 비판에 그치지 않고 세계에 대한 다중의 실천적 구성의 역량을 긍정하는 정치적 구성의 존재론을 제시한다는 점에 스피노자의 현재성이 있다.
 

3) 포텐샤와 포테스타스-존재론ㆍ신학의 차원
 

이러한 계보학의 기초에 놓여 있는 역량과 (주권적) 권력이라는 대립쌍은 스피노자 철학에서 직접 유래한다. 스피노자 철학에서 역량(potentia)과 권력(potestas) 사이의 관계는 사실 좀더 복잡하지만 네그리와 하트의 논리는 존재론ㆍ신학적인 차원에서 이 개념쌍이 지니는 의미를 전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존재론ㆍ신학의 영역에서 두 개념은 대립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곧 포텐샤는 합리적으로 인식된 신의 본성을 나타내며, 포테스타스는 신의 본성에 대한 상상적이고 미신적인 견해를 나타낸다.

[윤리학]에서 포텐샤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분명한 규정을 얻고 있다.
 

포텐샤는 실존할 수 있는 있음이다(posse existere potentia est).([윤리학] 1부 정리11의 두 번째 증명)

신 자신과 모든 실재가 그에 따라 존재하고 행위하는 포텐샤는 신의 본질 그 자체다(Potentia Dei, qua ipse, et omnia sunt, et agunt, est ipsa ipsius essentia).([윤리학] 1부 정리 34의 증명)

 

이 두 가지 규정은 각각 분명한 이론적 목표를 지니고 있다. 첫 번째 규정은 포텐샤를 잠재력으로, 곧 실행될 수도 있고 실행되지 않을 수도 있는 능력으로 이해하는 것에 반대하여 항상 현행적인 힘으로서 제시하고 있다. 두 번째 규정은 신과 피조물 또는 오히려 자연 실재들 사이에 초월적인 거리는 존재하지 않으며, 신은 모든 실재들의 실존 및 행위의 내재적 원인이라는 점을 주장한다.

반면 포테스타스는 초월자(이는 신학자들이 말하는 초월적 인격신을 의미하지만, 바로크 시대의 절대군주를 함축하기도 한다)의 의지에 따라 실행되거나 실행되지 않거나 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키며, 주로 논쟁적인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다. 다시 말해 포텐샤 개념의 경우 주체의 의지와 무관하게 필연적으로 작용하는 인과관계와 그 작용을 가리키는 데 반해, 포테스타스는 이러한 인과적 필연성을 초월하는 어떤 목적을 전제하거나 (초월적) 주체의 의지의 무한성에 의존한다는 점에 양자의 차이점이 존재한다. 따라서 이 두 개념의 구분은 당대의 신학 및 존재론에 대한 비판을 함축한다.[포텐샤와 포테스타스의 개념쌍에 대한 이상의 설명은 필자가 발리바르의 [스피노자와 정치] 번역본에 붙인 “역량potentia-권능/권력/권한potestas”의 내용 중 일부를 요약한 것이다. 이 논문에 대한 익명의 심사위원 중 한 명은 필자의 포텐샤와 포테스타스 구별에 대해 다음과 같은 문제제기를 한 바 있다. “‘포텐샤’와 ‘포테스타스’의 구분이 당대의 의인론적 신관에 대한 비판을 함축한다고 하더라도, 이로부터 전자가 존재론적 차원이고 후자가 신학적 차원이라고 단순화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그는 [윤리학] 1부 정리 35를 참조하라고 지적했다. 첫 번째 지적의 경우 그가 필자의 논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필자는 포텐샤가 존재론적 차원이고 포테스타스가 신학적 차원이라고 구별한 것이 아니라, 포텐샤/포테스타스 쌍이 존재론적이고 신학적인 차원에서 지니는 비판적 함의를 보여주려고 한 것이다. 둘째, 그는 1부 정리 35가 포텐샤와 포테스타스 사이의 구별과 제대로 부합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 “Quicquid concipimus in Dei potestate esse, id necessario est” 중에서 “in Dei potestate esse”의 경우 스피노자가 potestas를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긍정적인 의미로 쓰고 있다는 지적인 셈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스피노자가 여기서 보여주려는 것은, potestas는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가능태로서의 힘 또는 능력이 아니라 필연성을 함축한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정리는 필자의 구별을 반증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입증한다.]

네그리와 하트가 다중의 역량과 주권적인 권력을 스피노자적인 의미에서 포텐샤와 포테스타스 사이의 관계로 받아들이는 한, 그들의 용법은 스피노자 철학과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용법이 정치적 의미에서도 스피노자 철학의 내용과 합치할 수 있느냐는 점이다. 이 문제는 두 번째 개념인 다중의 문제와 직접 연결된다.
 

2. 다중 또는 대중들 

[multitudo라는 개념을 네그리나 그와 가까운 사람들은 “multitude”라고 번역하지만, 발리바르는 주로 “masses”라는 용어로 번역해서 사용한다. 네그리 식의 번역에는 물티투도를 주체로 보는 관점이 함축되어 있는 반면, 발리바르는 물티투도의 기본 특징은 양가성 내지 양면성이며, 따라서 그것을 자율적인 정치적 주체로 간주할 수 없다고 본다. 따라서 물티투도를 어떻게 번역하느냐의 문제에는 이미 그 개념에 대한 이해와 해석의 쟁점이 결부되어 있다. 나는 발리바르의 견해가 스피노자의 원래 용법에 좀더 가깝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네그리와 하트 자신의 이론적 맥락이 아닌 경우에는 스피노자의 multitudo 개념을 “대중들”이라고 번역해서 사용하겠다. ]

1) 스피노자 정치학에서 포텐샤와 포테스타스 

스피노자의 정치학에서도 포텐샤와 포테스타스는 체계적으로 구분되어 사용되지만, 존재론ㆍ신학이나 인간학ㆍ윤리학의 차원과는 달리 두 개념 사이의 관계는 대립의 관계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 대신 두 개념 사이의 관계는 비제도적인 또는 선(先)제도적인 행위 능력으로서 포텐샤와 법제도에 의해 부여받은 권력 또는 권한으로서 포테스타스 사이의 관계로 나타난다. 곧 정치학의 영역에서 포텐샤가 법적ㆍ제도적 질서의 존재론적 기초를 표현하면서 동시에 그 제도로 완전히 포섭되지 않는, 정치적 행위의 자연적 기초를 표현한다면, 포테스타스는 법제도에 따라 규정된 행위 능력이나 권한을 의미한다.[이 점에 관한 좀더 자세한 설명은 진태원 2005 및 발리바르 2005에 수록된 필자의 “역량potentia-권능/권력/권한potestas” 용어 해설 참조.] 

2) 대중들의 역량과 주권 

네그리와 하트가 말하는 다중 또는 물티투도는 지난 1980년대 이후 스피노자 정치학의 핵심 개념으로 등장했다. “많은”, “다수의” 또는 “큰”이라는 뜻을 지닌 “multus”에서 유래한 이 용어는 17세기 정치철학자들, 특히 홉스와 스피노자의 저작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홉스의 경우 물티투도는 법제도의 틀 안에서 구성된 인민(people)과 대립하는 것으로서, 고유한 정치적 실재성을 지니지 못한 “군중” 내지는 “무리”라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홉스 정치학의 원칙에 따를 경우 물티투도는 적법한 정치적 지위를 갖지 못하고 심지어 전혀 정치적 행위를 수행할 수도 없다. 이 때문에 물티투도는 정치학의 대상이 될 수 없지만, 불법적인 소요와 폭력으로 정치적 질서를 위협한다는 점에서는 홉스 정치학이 꼭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 중 하나였다.

반면 스피노자는 물티투도라는 개념에 대해 좀더 미묘한 태도를 보여준다. 정치학에 관한 스피노자의 첫 번째 주저인 [신학정치론](1670)에서 이 개념은 단 세 차례만 사용되고 있으며, 거의 이론적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고 있다. [신학정치론]에서는 오히려 좀더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는 불구스(vulgus), 곧 우중(愚衆)이나 플레브스plebs, 곧 천민 같은 용어들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6년 뒤에 씌어진 [정치론]에서 물티투도는 69번이나 등장할뿐더러 이론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이상의 내용에 대한 좀더 자세한 설명은 진태원 2005를 참조하라. 스피노자 정치학에서 대중을 표현하는 vulgus, populus, turba, multitudo 같은 어휘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Balibar 1997 외에도, Chaui 1997, Montag 1998을 참조. Chaui와 Montag의 논의는 발리바르의 관점을 약간 교정하고 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개념이 바로 대중들의 역량(potentia multitudinis)이라는 개념이다.


대중들의 역량에 의해 정의되는 법/권리를 보통 통치권(imperium)이라 부른다. 공동의 동의에 따라 국정의 책임을 맡은 이가 이 통치권을 절대적으로 보유한다.([정치론] 2장 17절)

국가의 권리 또는 주권자의 권리는 자연의 권리와 다르지 않으며, 각 개인의 역량이 아니라 마치 하나의 정신에 의해서 인도되는 것과 같은 대중들의 역량에 의해 규정된다([정치론] 3장 2절).


우선 이 구절들은 각 개인의 역량이 아니라 대중들의 역량이라는 개념을 통치권의 기초로 명시함으로써 스피노자가 [윤리학]에서 전개한 “역량의 존재론”과 좀더 부합하는 정치학의 원리를 제공해 준다.[이 점에 관한 좀더 자세한 논의는 진태원 2005 참조.]

둘째, 하지만 이는 스피노자가 대중들 자체를 일종의 “정치적 주체”로 간주했으며, 민주주의를 대중들이 직접 통치하는 체제로 간주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네그리와 하트 같이 대중들의 역량을 직접 민주정과 일치시키고, 이로써 대중들의 역량을 “대중들 전체가 보유하는 통치권”과 동일시하는 관점은 스피노자가 대중들의 역량이라는 개념을 사용할 때 항상 유지하는 대중들의 역량과 주권자 사이의 차이를 간과하고, 더 나아가 이러한 차이를 대립으로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는 스피노자의 존재론 및 인간학과 정치학의 관계를 정확히 해명하는 데 오히려 장애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관점은 대중들의 역량이라는 개념은 일차적으로는 지배 권력에 맞선 인민대중의 전복적인 힘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사회적 관계의 존재론적 기초라는 좀더 근원적인, 그리고 좀더 중립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점을 간과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는 대중들(의 운동)이란 정서적ㆍ관념적 연관망들의 집합과 다르지 않다는 점을 감안할 때, 대중들의 역량은 항상 능동성과 수동성의 갈등적인 경향 속에 들어 있으며, 항상 희망과 공포의 정서적 동요를 보여준다는 점, 따라서 대중들의 역량은 항상 제도적인 매개를 요구한다는 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만든다.[이 때문에 스피노자에게 정치의 논리는 기본적으로 투쟁과 갈등의 논리다. Moreau 2003 참조.]

법적ㆍ제도적 매개는 스피노자 정치학의 관점에서 볼 때 결코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긍정적이고 필수적인 성격을 띤다. 이 매개들이 수행하는 기능은 자생적으로는 정념적이고 갈등적인 존재들로 남아 있는 개인들 및 대중들이 마치 이성적인 존재자들이 행위하듯이 국가의 보존을 위해 행위하도록 인도하는 데 있으며, 스피노자는 이를 3장 7절에서 “마치 ~처럼(veluti)”이라는 매우 의미심장한 표현으로 지적하고 있다. 이 표현이 가리키는 것은, 대중들은 본성적으로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의 정신에 의해 실제로 인도되지는 않지만, 대중들의 역량이 국가의 보존과 안전을 위해 적절하게 활용되기 위해서는 대중들은 마치 하나의 정신에 의해 인도되는 것처럼, 법적ㆍ제도적 매개에 따라 규제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볼 때 정치학의 영역에서 포텐샤와 포테스타스 사이의 관계를 존재론ㆍ신학이나 인간학ㆍ윤리학의 영역과 달리 대립적인 관점에서 파악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주권이 없이는 국가, 정치 질서가 성립할 수 없다는 점에서 정치의 영역에서 포테스타스는 단순한 가상이나 착각 또는 기생적인 것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철학을 포텐샤의 철학, 곧 역량의 철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한편으로는 매우 적절한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역량-권력의 관계를 일의적인 대립 관계로 파악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오히려 스피노자 철학에서 양자 사이의 관계는 일종의 변증법적 관계로 나타나며, 이 점에서 네그리와 하트의 다중의 정치학은 스피노자 철학과는 거리가 있다.
 

3. 절대적 정체로서 민주주의  

1) 다중의 자기 지배로서 민주주의

다중의 역량과 주권적 권력 사이의 관계 또는 대중들의 역량과 주권의 관계를 둘러싼 네그리ㆍ하트와 스피노자 철학 사이의 긴장은 민주주의의 문제를 둘러싸고 지속된다. 네그리와 하트에게 절대적 정체로서 민주주의는 내재적 민주주의를 뜻한다. 여기서 내재적 민주주의란 무엇보다도 외재적인 지배장치로서, 일자로서의 주권을 필요로 하지 않는 민주주의, 따라서 다중이 자율적인 역량을 통해 스스로를 통치하는 민주주의를 가리킨다. 위에서 인용했듯이 네그리와 하트는 심지어 민주주의를 다중이 자기 자신을 지배하는 정치로 규정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앞의 인용문보다 좀더 길게 인용해보자.  

정치철학의 반복되는 진리들 중의 하나는, 오직 일자만이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군주이건, 정당이건, 인민이건, 또는 개인이건 간에 말이다. 통일되지 않고 복수적인 채로 남아 있는 사회적 주체들은 지배할 수 없으며, 그 대신 지배를 받아야 한다. [...] 다중은 다양함을 유지하고 내적으로 차이를 유지한다 할지라도 공통적으로 행동할 수 있으며, 따라서 자기 자신을 지배할 수 있다. 다중은 하나가 명령하고 나머지들이 복종하는 정치적 신체라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자신을 지배하는 살아 있는 육체다. [...] 다중은 민주주의, 다시 말해 만인에 의한 만인의 지배라는 법칙을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사회적 주체다.(Negri & Hardt 2008, 137쪽)

여기서 볼 수 있듯이 네그리와 하트에게 민주주의의 적은 초월적인 심급으로서의 일자, 특히 주권이며, 어떤 민주주의든 여전히 이러한 초월적 일자를 유지하는 한에서는 엄밀한 의미에서 민주주의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그들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은 당연하다. “다중의 민주주의는 ‘새로운 과학’, 즉 이 새로운 상황과 대면할 수 있는 새로운 이론적 패러다임을 필요로 한다. 이 새로운 과학의 제 1의 의제는 민주주의를 위해 주권을 파괴하는 것이다. 주권은 그것이 어떤 형태를 띠건 불가피하게 권력을 일자의 지배로서 제시하고, 완전하고 절대적인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침식한다.”(같은 책, 419쪽)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일체의 국가 제도 또는 정치 제도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기꺼이 제도적인 구조들의 필요성을 인정하며, 심지어 미국 독립의 이론가들 중 한 사람이었던 매디슨 식 입헌주의의 진보성을 긍정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자신이 말하는 절대적 민주주의, 다중의 민주주의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식의 직접 민주주의와 동일한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같은 책, 416쪽 이하).

하지만 그들은 과연 오늘날의 민주주의에 적합한 제도적 형식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거의 시사점을 제공하지 않으며, 다만 세 가지 점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첫째는 어떤 식으로든 주권을 파괴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 둘째는 오늘날의 민주주의 제도들은 “사회적 삶을 부단히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소통적이고 협동적인 네트워크들과 부합해야 한다”는 것, 마지막으로는 다중은 결코 하나의 동일성으로 종합될 수 없는 근본적인 차이들로, 독특성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어떠한 민주주의 제도도 이러한 근본적인 차이들을 환원하거나 획일화하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요컨대 이들의 입장은 “혁명적 현실주의는 욕망의 생성과 증식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현실정치처럼 혁명 운동에의 이러한 몰두도 [...] 자기 자신을 직접적인 상황에서 분리시키고 매개들을 꾸준히 구축할 수 있는 능력을 언제나 포함한다”(423쪽)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이들의 입장은 우리가 앞 절에서 살펴본 스피노자의 입장, 곧 대중들의 역량과 주권 사이의 상호 구성적 관계, 따라서 일종의 변증법적 관계에 관한 입장과 그다지 다를 바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여전히 두 입장 사이의 차이는 존재한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이러한 차이는 우리가 앞에서 인용한, 유일한 정치적 주체로서 다중이 자기 자신을 지배하는 민주주의와 입헌적 공화주의와 같은 제도적 매개를 필요로 하는 민주주의 사이의 차이이기도 하다. 네그리와 하트는 절대적 민주주의 또는 내재적 민주주의가 직접 민주주의와 동일시될 때 생겨날 수 있는 위험성을 잘 알고 있으며, 제도적 장치를 통해 이를 보충해야 할 필요성도 명료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들이 간과하는 것은 그들이 주장하는 내재적 민주주의는 그 정의 자체에서 자신 안에 분할과 갈등을 내포하고 있으며, 이러한 본질적인 분할과 갈등 때문에 다중을 정치적 주체로 간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민주주의를 다중이 자기 자신을 지배하는 것으로 규정하자마자 다중은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분할되고, 양자 사이에는 해소할 수 없는 갈등이 존재하게 된다. 다중이 정치적 주체, 그것도 유일한 주체라면, 그 때의 정치적 주체는 과연 지배자로서의 다중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피지배자로서의 다중을 가리키는가? 만약 전자나 후자만이 정치적 주체라면 다중은 이미 자신 안에 배제를 함축하게 되며, 만약 양자 모두 정치적 주체를 의미한다면, 유일한 주체로서 다중은 자기 분열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궁극적으로 다중이 자기 자신을 지배할 수 있게 될 때, 민주주의가 가능하게 된다”(같은 책, 405쪽)는 주장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2) 과정으로서 민주주의  

네그리와 하트의 주장과 달리 스피노자에게 주권은 국가의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대중들의 역량은 국가의 토대의 위상을 지니지만, 대중들에 고유한 내적 갈등 및 양가성 때문에 대중들은 스스로 자신의 정치적 통일성을 확보할 수 없으며, 항상 제도적인 매개로서, 통일의 형식으로서 주권을 요구한다. 이처럼 주권의 필요성을 인정하기 때문에 스피노자는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부정할 수밖에 없었을까? 스피노자는 미완의 장으로 남은 [정치론] 11장에서 민주주의를 “완전하게 절대적인(omnino absoluta)” 정체(政體)로 규정한다. 여기서 절대적인 또는 완전하게 절대적인 정체로서의 민주주의란, 민주주의는 대중들이 자기 자신을 통치하는 정체라는 것을 가리킨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바로 이 민주주의를 다루게 될 11장 이하의 내용 중에서 첫머리 4절만을 다룬 채 미완으로 남겨두고 숨을 거두었다. 이러한 미완성은 스피노자의 병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거기에는 좀더 깊은 이론적인 난점이 존재했던 것일까?

이러한 질문에 대해 발리바르는 한 가지 근본적인 답변을 제시한다. 곧 미완의 11장은 스피노자가 정체로서 민주주의를 정의하고 그 제도적인 요소들을 규정하는 데 근본적인 한계를 느꼈다는 점을 입증한다는 것이다(Balibar 2005 중 1부 3장 참조). 사실 스피노자처럼 대중들을 근본적으로 양가적인 존재로 규정한다면, 이러한 대중들이 자기 자신을 통치하는 정체로서 민주주의를 제도적으로 구체화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마치 대중들이 현명하고 유덕한 존재자들인 것처럼 가정하고서 이상적인 정체로서 민주주의를 규정하는 것은 가능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는 [정치론] 1장 첫머리에서부터 플라톤과 토마스 모어 류의 정치적 이상주의 내지 유토피아주의를 비판하고 그 대신 마키아벨리를 비롯한 “정치가들”의 입장을 지지한 스피노자로서는 택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민주주의를 “완전하게 절대적인” 정체로 찬양하면서도 역설적이게도 그것을 공백으로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발리바르는 이러한 공백은 단지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또 스피노자의 지적 정직성에 대한 징표만이 아니라, 민주주의에 관한 매우 새로운 관점의 표현으로 읽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법적으로 규정되는 정체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법적인 정치제도의 근저에 놓여 있는 하나의 본질적인 경향으로 파악하는 관점이다. 곧 민주주의는 더 이상 군주정이나 귀족정과 구별되는 하나의 정체의 문제가 아니라, 군주정과 귀족정을 포함하여 모든 정체의 근저를 이루는 (알튀세르 식으로 말하면) 정치의 부재하는 원인, 부재하는 토대의 문제로 제시된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민주주의는 모든 정체 내부에 그 정체의 토대로 존재하며, 그 정체의 완전성 내지 탁월성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이렇게 되면 군주정이나 귀족정 중에서 어떤 것이 더 바람직한 정체인지, 아니면 혼합정이야말로 가장 바람직한 정체인지와 같은, 고대 이래로 많은 정치학자들이 씨름해왔던 문제는 더 이상 핵심 문제가 아니게 된다. 오히려 각각의 정체 내부에서 그 정체의 기초를 이루는 민주주의적 토대를 강화하고 그것을 제도적으로 구현하려는 과정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 실제로 스피노자가 [정치론] 7장 이하에서 군주정과 귀족정을 분석하면서 골몰하는 문제는 어떻게 이 정체들 속에 존재하는 대중적인 요소를 강화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발리바르는 스피노자 민주주의론의 독창성은 민주주의를 하나의 정체가 아니라 모든 정체 안에 존재하는 민주화의 경향으로 파악한 데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네그리ㆍ하트와 스피노자의 정치학, 그들의 민주주의론의 핵심적인 차이는 결국 물티투도를 자율적인 정치적 주체로 간주하는지 아니면 근본적으로 양가적인 정치의 토대로 간주하는지의 차이, 곧 다중의 정치와 대중들의 정치 사이의 차이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차이를 좀더 일반화해서 말하자면, 네그리ㆍ하트와 스피노자 철학 사이의 차이점은 대표 및 국가 제도를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하느냐 아니면 그것이 지닌 본질적인 긍정성을 인정하느냐의 차이로 집약된다. 네그리와 하트에게 대표 및 국가 제도 일반은 다중의 자율적인 역량을 동일화하고(따라서 독특성들 사이의 환원 불가능한 차이를 획일화하고) 초월적인 심급의 대표들로 매개하는(따라서 그것을 외적인 타자로 대체하고 소외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이런 점에서 대표 및 국가 제도 일반은 근본적으로 부정적이고 될 수 있는 한 폐지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이는 하트와 네그리의 이론이 한편으로 법과 사회, 다른 한편으로 구성 권력과 구성된 권력 사이의 엄격한 분리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결과다. 이 점에 관해서는 Passavant 2004 참조.] 반면 스피노자에게 대표 및 국가 제도는 대중들의 근본적인 양가성을 조절하고 대중들의 부정적인 파괴적 역량(가령 민족주의적인 열광이나 소수자들 및 타자에 대한 배타성 등)을 합리적으로 중화하기 위한 핵심 장치다. 따라서 국가 제도 및 대표는 폐지되거나 적어도 축소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개조되고 합리화되어야 할 대상이다.[이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부연할 수 있다. “민주주의적 대표représentation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단지 의견과 당파의 다원성을 보증하고 활성화하는 것(이것은 물론 본질적입니다만)만이 아니라 사회적 갈등을 대표하는 것이며, 모종의 세력관계가 강제하는 “억압”으로부터 이러한 갈등을 빼어내서 공동선 내지 공동의 정의를 위해 활용할 수 있게끔 그것을 분명히 드러내는 것이다.” Balibar 2002, p. 185.(강조는 발리바르)]  

IV. 맺음말 

촛불시위에서 나타난 대중들의 모습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놀랍고 감동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생각으로는 촛불시위에 참여한 대중들의 모습에서 새로운 주체의 탄생을 읽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다. 가능하지 않은 이유는 촛불시위에 참여한 대중들은 “주체”라는 범주로 묶이기에는 너무나 이질적이고 다양한 개인들과 집단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바람직하지 않은 이유는 부정적이고 수동적인 대중과 긍정적이고 능동적인 다중을 전혀 다른 별개의 존재로 가정하는 것, 또 지금까지 수동적이고 부정적인 존재였던 대중이 이제 전적으로 자율적이고 능동적인 다중으로 변모했다고 가정하는 것은 대중이 지닌 양면성을 인식하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주관적인 희망을 객관적인 대체로 착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대중은 네그리와 하트가 생각하는 것처럼 전적으로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며, 단지 폭력적인 파괴나 약탈만을 자행하는 그런 존재도 아니다. 이른바 군중심리학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귀스타브 르봉 자신이 대중이 지닌 양면성을 분명히 인정하고 있었으며(르봉 2005), 그 이후의 여러 군중이론가들도 이 점을 긍정하고 있다.[이 점에 관해서는 특히 모스코비치 1996 참조.] 촛불시위를 평가할 때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촛불시위에 참여한 대중들 중 상당수(어쩌면 대부분)는 또한 지난 황우석 사태 때 그야말로 민족주의와 무지한 정념의 광기에 휩싸였던 바로 그 대중들이며, 또한 그들이 맞서 항의하는 그 정권을 탄생시킨 바로 그 주역들이었다는 점이다.

네그리와 하트가 제시하는 다중 개념의 한계 중 하나는 그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다중과 대중의 차이에 관해 역설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이러한 차이를 식별할 수 있는 기준은 제공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구분법에 따를 경우, 파시즘에 동조하지 않고, 획일적인 동일성에 포섭되지 않고, 민족주의적인 정념에도 휘둘리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독특성을 존중하고 스스로 자신의 독특성을 개발하면서도 다른 사람들과의 공통적인 것을 추구하고 실제로 그것을 구성하는 사람들이 바로 다중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는 늘 사후에만 그것을 식별할 수 있다는 점이다.

스피노자적인 의미에서 대중들의 양면성, 대중들의 극단적인 동요를 인식한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이러한 양면성 내지 극단적인 동요가 환원 불가능한 정치의 상수를 이룬다는 점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보편적 대의, 해방의 가치를 위해 봉기할 때 대중은 탁월한 정치적 주체, 또는 오히려 탁월한 정치적 행위자들이지만, 또한 그 대중은 민족주의나 다른 이데올로기적 정념의 노예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대중의 정치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문제는 대중 또는 대중들을 항상 이미 정치적 주체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 운동을 규정하는 예속화와 주체화의 갈등적인 변증법(예측 불가능한)을 국가를 포함한 정치적 제도화의 핵심 쟁점으로 인식하는 일이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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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강기명 2009-11-14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이구. 감사합니다.^^

안중철 2009-11-17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진선생님. 연락 부탁드립니다.

2009-11-24 11: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 2009-11-25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정말 잘 봤습니다. 글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야 없겠지만 많은 걸 다시 생각하게 해주는군요.

포퓰리스트 2009-12-01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데리다에 관심이 있어서 인터넷을 뒤지다가 우연히 여기에 들어오게 되었다. 여기 주인장은 데리다를 유럽이나 프랑스에서 쓰는 용법처럼 '포스트마르크스주의자'라고 부르고 싶은 것 같다. 여기 주인장이 포스트를 무슨 의미로 쓰는지는 잘 모르겠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그대로 쓰면서 후기구조주의라는 용법을 쓰니 좀 어리둥절하기도 하다.
처음에는 이 공간에 흥미가 있었다. 하지만 다시는 여기에 들어오지 말아야겠다. 지식인이나 지식생산자는 분명히 필요하다. 그러나 학문이라는 것이 전문적이고 특수한 지식을 다루는 소수가 다루어야 한다는 얘기에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다. 거기에 반대하는 사람은 포퓰리스트라고 규정한다. 자기 마음에 안 들면 포퓰리즘인 것이다.

이것은 나에게는 자칭 마르크스주의자인 (내가 보기에는 자유주의자인) 에릭 홉스봄을 연상시킨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자이면서 동시에 엘리트주의에 가득 찬 사람이다. 역사서술은 어디까지나 전문적인 역사학자가 하는 것이지 무지한 대중이나 민중들이 써서는 안 된다고 보는 사람이다. 그것은 학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칭 마르크스주의자인 주제에 말이다.

어쩐지 제도를 강조하는 점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제도는 어디까지나 엘리트가 지배하는 영역이 아닌가? 주인장은 자칭 마르크스주의자인 홉스봄과 다를 바 없는 엘리트주의에 빠져 있는 것 같다. 다시는 여기에 오지 않겠다. 주인장이 생각하는 스피노자도 그런 스피노자인 것으로 보인다.

익명의1인 2009-12-03 10:39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포퓰리즘이 나쁘다는 이야기는 여기서 그 누구도 한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제가 알기로 진태원 씨는 포퓰리즘을 부정적인 사태로 보기는커녕 오히려 민주주의 정치의 환원불가능한 계기로 보시지요. 엘리트주의에의 혐의 역시 때로는 전공자들끼리 이야기해서 잘 풀릴 수 있는 문제도 있다는 것이지 또 전공자들끼리만 글을 쓰고 읽어야 한다는 말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구두를 고칠 때 구둣방을 가고, 기계를 고칠 때 수리공을 찾듯이 학문도 비슷한 것이 아닐까요.

개인적으로 님의 리플을 읽고 며칠을 고민해 보았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 이 공간은 정확히 리플 남기신 분들께 도움을 주는 공간이지, 엘리트주의자 또는 먹물들의 은밀한 연대를 강화하기 위한 공간이 아닙니다. 이런 점들을 재고해 주시길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 2009-12-07 16:42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poststructuralism을 후기구조주의라고 번역하는 건 충분히 근거가 있어보입니다. 왜냐하면 저 후기구조주의는 구조주의와의 단절보다는 연속이라는 느낌이 훨씬 강하고, 특히나 포스트모더니즘하고 불필요하게 동일시하는 경우가 너무 많으니까요.
지적 포퓰리즘, 이것도 확실히 존재합니다. 다들 경악스러운 결론을 내놓기 위해 고민하죠. 이게 물론 인터넷에 한정되는 이야기만은 아닙니다만, 확실히 대화가 가지는 한계도 있어요. 많은 학자들이 논쟁이나 말하기를 불편해하는 것도 사실이에요. 말은 너무 위태로우니까요. 제가 알기론 데리다는 물론이고 들뢰즈, 푸코도 이와 같은 논지의 말을 한 적이 있었죠.
저 역시 제도에 대한 옹호로 가득한 위 글이 탐탁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래 글의 포퓰리즘 사용 역시 불만족스러웠구요. 그리고 스피노자에 대한 훈고학적 탐구로 네그리를 비판하는 것은 뭔가 약간의 문제가 있어요... 그러나 그런 것을 근거로 소통 자체에 대해 거부하는 건, 정통 마르크스주의 최악의 일면이 아닐까 싶네요.
 

최근 nation이나 droit de cite의 번역 문제를 둘러싸고 최원 선생과 몇 가지 논의를 주고 받은 적이 있다.  

알라딘 서재 주인장들이나 아니면 알라딘에 자주 들르는 분들이면 이 점에 대해 익히 알고 있으리라고 본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뜻하지 않은 결과가 초래된 것 같아서 한 마디 해두겠다. 

  

최원 형과 이 문제에 관해 몇 마디 논의를 했지만, 사실 나는 이 논의를 길게 지속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그것은 인터넷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nation 문제 같은 복잡하고 다양한 쟁점들을 다루기가 좀 어려운 것 같았고  

그리 생산적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또 droit de cite에 관한 문제는, 논의를 더 계속하기에는  

이 문제에 관한 발리바르의 언급이 상당히 제한적이어서, 계속해서 논의를 진행해봐야 특별히 더 유익한 논의가  

진행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원 선생이 상당히 의욕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논거를  

제기했지만, 나로서는 nation에 관한 문제라면 차라리 다른 지면으로 옮겨서 본격적으로 논의를 전개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내가 어떤 댓글에서 최원 선생에게 nation에 관해 좀더 긴 글을 한번 써보라고 제안한 것은 

바로 이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사실 확실히 장담하기는 어렵지만, 내년에 nation 문제에 관해 한두 편의 글을 써보고 싶었고 또 준비를 하고 있는  

참이었기 때문에, 나로서는 좀더 긴 호흡을 가지고 논의를 심화하고 싶었다. 최원 선생의 문제제기에 대해 내가  

더 이상의 반응을 하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최원 선생의 문제제기는 그 나름대로 일관성이 있고 또 꽤 오래된 

독서에 기반을 둔 것이기 때문에, 곰곰히 따져볼 만한 논점들을 여럿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몇 년 간 알라딘 서재 생활을 하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인터넷이라는 공간은 제한된 몇몇 용도를 제외하고는  

지적 논의를 전개하기는 쉽지 않고 또 그다지 적절한 공간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각자가 쓴 이런저런 글을  

올려서 더 많은 사람들이 참고하게 하는 데는 나름대로 유용한 공간이고 이런저런 시사적 쟁점들에 관해 짧은  

논의를 주고받는 데도 적절한 공간일 수 있겠지만 좀더 깊이 있는 지적 쟁점들을 다루기에는 여러 가지  

제약이 있다고 본다.   

 

우선 인터넷은 감정을 조절하기가 쉽지 않은 곳이다. 그만큼 인터넷은 즉발적인 반응이 오가는 

곳이다. 그것이 친근감과 유쾌함, 또는 슬픔의 공유와 위무 같은 것이라면 좋겠지만, 때로는 불필요한 트러블과  

소란을 낳기도 한다. 지적 논의에서 그런 것들은 최대한 절제되고 조절될 필요가 있는데, 인터넷은 그것을 어렵게 한다. 

그것은 인터넷이 글(물론 동영상이나 이미지, 음성 파일을 올리기도 하지만)을 올리는 곳이기는 하지만, 사실은  

지면보다는 직접 말을 주고받는 대화의 공간과 더 가깝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화의 공간은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욕망과 감정들이 있는 그대로 표출되는 곳이다. 아마도 인터넷은 새로운 공론장이기 이전에 새로운 욕망과 충동의 장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곳에서 깊이 있는 논의를 전개한다는 것은 좀처럼 쉽지 않다.   

 

더 나아가 인터넷은 문자 그대로 "지식의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공간이다. 지식의 민주주의란 좋은 측면도 있지만 

또 (내가 보기에는) 나쁜 측면도 포함하고 있다. 좋은 측면은, 인터넷이 존재하기 전에는 도저히 알 수도 없고 구할 수도 

없었던 정보들과 자료들을 좀더 많은 대중들이 얻을 수 있고 소통할 수 있는 장소라는 점에서 그렇다. 나같은 경우도 

만약 인터넷이 없었다면 아마 도저히 학위논문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외국 서적을 구하기 쉬워졌고 외국의 신문이나 

방송을 손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으며, 대학에 적을 두고 있다면 외국의 수많은 간행물 자료도 손쉽게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요즘은 국내외 대학들이나 단체들에서 강의나 강연 동영상 서비스를 많이 하기 때문에, 생생하게 

저명한 학자들의 육성을 들을 수도 있다. 이것은 정말 엄청난 기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터넷이 구현하는 "지식의 민주주의"에는 또 다른 측면도 존재한다. 그것은 누구나 거의 아무 주제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물론 어떤 나라들의 경우는 인터넷에 대한 검열과 통제가 중요한 정치적 쟁점이 되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경우도 최근 그러한 검열과 통제가 강화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인터넷은 상당히 

자유로운 편이다. 이처럼 누구나 아무 주제에 대해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민주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당연하고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또 권장될 만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본다면 전문적인 지적 논의에서 이처럼  

누구나 아무 주제에 대해 말할 수 있다는 것은 꼭 바람직한 것으로 보기 어려운 점도 있다. 인터넷에는 일종의  

지적 포퓰리즘이라고 할 만한 것이 존재한다. 이러한 지적 포퓰리즘은 지식의 민주화의 이면이다. 따라서 그것이 

반드시 나쁘다고 할 수도 없고 제거되어야 할 어떤 것도 아니지만, 때로는 소수의 사람들만 참여할 수 있는  

어떤 논의들이 있을 수 있고, 또 그것이 바람직한 경우들도 적지 않다.  적어도 학문은 그런 것이다.  

인터넷은 때로 그것을 망각하게 하거나  이해 불가능하게 만든다.    

 

아무튼 이번 일이 잠깐의 해프닝으로 끝나기를 바란다. 내가 보기에는 누구도 악의를 품고 있지 않았다. 선의에 의한  

폭력과 갈등도 숱하게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쨌든 악의적으로 일어난 것들보다는 더 쉽게 해소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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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 2009-11-09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태원 선배님 말씀 잘 읽었습니다. 저도 전문적인 지식인들 사이에서의 학문적 논의들의 장들이 필수적으로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인터넷에서 이론적 논쟁이 가능하다고 말한 것이 조금 와전된 것 같은데, 저는 모든 이론적 논쟁이 인터넷에서 이뤄져야 한다든지, 어떤 한계 없이 모든 사람들에 의한 모든 문제에 대한 이론적 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터넷에서 소화할 수 있는 이론적 논쟁이라는 것도 있다고 봅니다.

또 대화와 논문형식의 글을 구분할 수 있겠지만, 사실 많은 학문적 토론과 논쟁은 (인터넷이 아닌) 실제 대화를 통해서 진행되기도 합니다. 세미나가 그렇고, 또 이론가들 사이의 직접적 대담 등이 그렇지요. 저는 아주 논쟁적인 대담도 많이 봤는데, 정말 흥미진진합니다. 논쟁을 통해서 생산되는 쟁점들이 아주 재미있지요.

또 한 가지는 제 개인적인 문제인데, 제가 미국에 있다보니 사실 발언의 통로가 상당히 제한되어 있는 핸디캡이 있습니다. 그 점 사려해주십사 부탁드립니다.

인터넷은 (인터넷 신문 등의 지상논쟁이 아닌 한)사회자가 없으니 조금 문제가 있고 댓글 등이 감정적으로 흐르는 경우도 있지만, 이번 논쟁이 그랬다고 보진 않습니다. 서로 어느 정도의 자기 통제는 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요.마지막에 해프닝은 그냥 해프닝이지요. 전 어제보다는 훨씬 기분이 좋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