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NA님의 "다시 droit de cite에 대하여"

최원 형 댓글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문제에 관해 별로 더 논의를 계속 할 만한 필요를 느끼지는 않습니다. "정치체의 권리"라는 용어 해설 항목을 쓴 이유 중에는 최원 형이 그 용어를 너무 좁은 의미로 이해하는 것 같아서 그 점을 지적해보려는 의도도 포함돼 있는데, 최원 형이 그것을 인정한 이상 저로서는 이 문제에 관해 더 왈가왈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사실 발리바르가 "droit de cite"를 politeia의 등가어로 생각해볼 수도 있겠다고 지적한 곳은 그 각주 하나 뿐이고 다른 데서는 이와 관련된 논의를 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런 마당에 짧은 각주 하나에 의지해서 droit de cite의 의미의 가능한 극한치를 억측하고 그것에 근거해서 번역 용어를 결정하는 것은 별로 적절치 못하다고 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최원 형 논의는 다소 지나친 추론이 아닌가 합니다. 저로서는 "정치체의 권리"라는 번역어를 바꿔야 할 별다른 이유를 찾기가 어렵군요. 발리바르가 droit de cite를 politeia의 등가어로 생각하는 것이 가능하고 또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면, 조만간 자신의 글에서 본격적으로 논의하겠죠. 이 문제는 그때 가서 좀더 정확한 근거를 갖고 이야기하는 게 좋다고 봅니다.  

끝으로 한두 가지 지적하자면, 최원 형은 마치 내가 "cite를 politeia의 등가물이라고" 주장한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저는 용어해설에서 전혀 그런 식으로 말한 적이 없습니다. 만약 cite가 politeia의 등가물이라면 droit de cite가 아니라 그냥 cite를 politeia의 불어 번역어로 제시하면 되는데, 발리바르가 무엇 때문에 그 각주를 달았을까요? 그러니 왜 최원 형이 그런 식의 언급을 하는지 이해하기가 어렵군요. 또 하나 용어 해설에서 혹시 제가 그런 식의 인상을 줬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발리바르가 방리유 소요에 관한 글에서 droit de cite를 방리유의 시테와 연결해서 사용한다고 말한 적도 없습니다. 제가 말한 것은 발리바르가 그 글에서 cite라는 용어에 담긴 지명으로서의 함의를 지적한다는 점입니다. 그런 점에 유추해볼 때 droit de cite라는 용어에는 또한 시테라는 방리유 지역 거주지 주민들의 권리라는 함의가 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 저의 논점이었죠. 그러니까 제가 하지도 않은 말을 보태면서 자의적이라고 문제 삼는 것은 좀 경솔한 태도가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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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 2009-11-02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선 씨테와 방리유의 관련에 대해서라면, 저는 진태원 선배가 번역하는 책에 수록한 droit de cite의 '용어해설'에서 방리유의 이주자들의 거주단지로서의 '씨테'를 언급하는 것은 그 함의를 뒷받침 할 수 있는 어느정도의 근거가 있을 때에 가능한 것 아닌가 하는 의견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발리바르가 그런 식의 연결을 실제로 전혀 논한 적이 없는데, 그런 식의 함의가 있다고 '용어해설'에서 말하면(선배도 아시다시피 진선배의 '용어해설'이 갖는 한국에서의 이론적 정치적 영향력은 엄청난 것이지요. 이것마저 부인하시지는 않기를 바랍니다^^), 그건 자의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지요. 제가 생각하기엔 별로 '경솔한' 지적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진선배가 cite를 '정치체'로 옮기는 것은 (전부터 계속 말했듯이) cite가 물리적인 영토로서, 또 사람들의 거주지, 생활터전으로서의 의미를 상당히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정치체"로 한정하는 것이 문제가 있다고 보기 때문에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발리바르가 정치체의 의미와 droit de cite를 연결시킴에 있어서도 제가 보기엔 그가 cite를 정치체로 보기보다는 droit de cite를 정치체(이자 시민권인 것으)로 보고 있다고 여겨진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진선배가 "cite를 politeia의 등가물"이라고 문자그대로 말하지는 않으셨지만, cite를 정치체로 번역하시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되면 droit de cite를 정치체로 볼 수 있다는 발리바르의 말과는 좀 차이가 있다고 말씀드린 것이지요. (cite의 헌정/헌법이 정치체이고 cite 자체는 좀 더 물리적 의미를 동반하는 것 같다는 말입니다.)


어쨌든 "정치체의 권리"라는 번역을 고수하시고자 하는 진선배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다만 저는 민족/국민 문제도 그렇고 droit de cite번역도 그렇고, 한 번 잘못 길을 들어서면 그 효과를 앞으로 교정하기 어려울 수 있으니 돌다리도 두드려가자는 차원에서 제가 생각하기에도 좀 집요하다 싶게 말씀을 드렸네요. 혹시 기분이 상하시지는 않았을까 걱정이 되는데, 만일 조금이라도 그랬다면 기분 푸시기 바랍니다. 제가 원래 좀 가시 같은 짓을 많이 하잖습니까?

그럼 또 뵙겠습니다.^^

balmas 2009-11-03 0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예 잘 알겠습니다. 최원 형 생각이 그런 것이군요.
 

 


정치체의 권리droit de cité

 

발리바르는 이 책에서 “droit de cité”라는 표현을 여러 번 사용하고 있으며, 1998년에 출간되고 2002년 증보판으로 재출간된 저서에서는 아예 책의 제목으로 사용하고 있다(Droit de cité: Culture et politique en démocratie, PUF, 2002). 프랑스어에서 “avoir droit de cité”라는 표현은 관용적으로는 “~에 대한 권리를 갖다”, “~에 속할 권리를 갖다”를 의미한다. 가령 “Google Voice n'a pas droit de cité sur l'iPhone”라는 문장은 “구글 보이스는 아이폰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발리바르는 이 책 및 다른 곳에서 이 용어에 대해 몇 가지 차원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첫째, 이 용어의 가장 좁은 의미는 이주노동자 및 외국인들이 누려야 할 “거주의 시민권”이다. 발리바르는 34쪽에서 이 점을 명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출신에 대한 차별 없이 외국인들에 의한 정치체의 권리(또는 거주의 시민권)의 획득.” 따라서 이런 관점에서 보면 발리바르가 말하는 droit de cité란, 지난 80년대 이후 프랑스 및 유럽 정치의 핵심 쟁점이 되어온 이민자들 및 이주자들이 유럽 안에서 누려야 할 출입 및 거주의 권리를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발리바르는 이 책 및 다른 책에서 이 용어에 대해 훨씬 더 일반적인 의미를 부여해서 사용하고 있다. 가령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이를 잘 보여준다. “반대로 국민적 동일성 또는 내가 조금 전에 그 발생에 관해 환기한 바 있는 허구적 종족성에 특징적인 폐쇄성은 세계화의 사회적‧경제적‧기술적‧통신적 현실만이 아니라 “유럽에서의 정치체의 권리droit de cité en Europe”라는 의미로 이해된 “유럽적인 정치체의 권리”라는 관념, 곧 유럽의 건설을 통한 민주주의의 확장이라는 관념과 양립 불가능하다.”(30쪽) 또한 다음 구절도 참조할 수 있다. “[유럽적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대안은 무엇인가? 다양한 집합적 상황과 개인적 삶의 궤적 속에서 외국인들과 특히 “이민자들”이 지닌 정치체의 권리라고 우리가 부를 수 있는 것이 바로 그 대안이다. 정치체의 권리는 시민권을 떠받치고 또 그것을 예비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권리는 현대 세계의 요구들에 적용되기 위해 이 권리가 어떤 법적인 양상들에 따라 설립되고 전환되어야 하는가에 관해 예단하지 않는다. 정치체의 권리는 국적 부여 기준의 변경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도 있고(...), 지역적, 국민적, 유럽 공동체적 차원에서 국적과 독립하여 모든 거주자들에게 전진적으로 정치적 권리들을 확대함으로써 이루어질 수도 있다. 이 권리는 “자유주의”의 승리에 상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전혀 다른 체류권 및 노동권의 결연한 해방에 상응한다. ... 그렇다면 우리는 정치체의 권리droit de cité 및 그것을 넘어 시민권 역시 단지 위로부터 허락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는 아래로부터 구성되는 것이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108쪽) 더 나아가 발리바르는 이 책 356쪽의 주 20)에서 우리말로는 보통 “국가” 또는 “정체”(政體)라고 번역되는 그리스어 폴리테이아politeia의 가능한 번역어 중 하나로 바로 droit de cité라는 용어를 제시하고 있다. 이 경우 이 용어는 헌정constitution이라는 의미 또는 (발리바르가 좀더 정확히 제안하듯이) “시민권 헌정”이라는 의미와 등가적인 의미를 지닌다.

마지막으로 이 용어는 또한 “시테”라는 특수한 프랑스식 지명과 관련된 함의도 갖고 있다. 지난 2005년 프랑스 방리유 봉기에 관해 성찰하는 글에서 발리바르 자신이 지적하듯이 프랑스에서 시테는 대도시 주변 지역(방리유)에서 주로 이민자나 이주자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지역을 가리키는 명칭이다. 이 지역은 전 세계 대도시에서 볼 수 있듯이 정치적ㆍ사회적ㆍ문화적 권리들에서 차별받는 주변적인 집단들이 거주하는 일종의 “게토”다. 따라서 “시테의 권리”라는 것은 이들이 시민으로서,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자격을 지니고 있고 또 마땅히 그러한 권리가 부여되어야 함을 함의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droit de cité라는 표현을 하나의 우리말로 모두 담기에는 어려움이 있지만, 이 책에서는 모든 시민, 따라서 모든 인간이 어떤 정치체에 거주하고 체류하고 시민으로서의 권리들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를 가리킨다는 의미에서 정치체의 권리라고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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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다시 droit de cite에 대하여
    from Droit de cité (씨테에 대한 권리) 2009-10-31 06:21 
    역시 이래서 토론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상당히 생산적입니다. 진태원 선배가 '입국거주권'이라는 말로 포착될 수 없는 몇몇 예들을 들어줌으로써, '입국거주권'이라는 번역이 곤란하다는 것이 잘 드러난 것 같습니다. 사실 이러한 번역이 cite라는 말의 유희 가능성을 억제하기 때문에, 전에도 "씨테에 대한 권리"라고 놔두는 것이 가장 최선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던 거죠. 다른 예들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지만, politeia에 대
 
 
 

발리바르의 "국민 사회 국가" 개념에 대한 용어 해설을 올립니다. 개인적으로 이 개념은 발리바르의 가장 중요한  

사회학적 개념이 아닌가 합니다. 기존의 정치학이나 사회학에서 널리 쓰이는 "복지 국가"나 "사회 국가"와 비교해볼 때  

빼어난 이론적 강점과 독창성을 지니고 있고, 진정한 의미에서 국가 형태의 역사, 헌정의 역사를 분석할 수 있는 

기초를 제공해주는 중요한 개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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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사회 국가État national-social

 

국민 사회 국가 개념은 발리바르가 󰡔인종, 국민, 계급󰡕에서 처음 도입된 이래, 최근 광범위하게 사용하고 있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일차적으로 “복지 국가welfare state” 내지 “사회 국가Sozialstaat” 또는 프랑스에서 이 두 용어에 상응하는 개념인 “l'État-providence”(단어 그대로 하면 “섭리 국가”라는 뜻이다)를 대체하기 위해 도입되었다. 왜 “복지국가”나 “사회국가”라는 말 대신 “국민 사회 국가”라는 생소한 용어를 도입할까?

그에 따르면 이 개념은 의도적으로 도발적인 함의를 내포하고 있지만(이는 나치즘의 약자가 국가사회주의 (또는 국민 사회주의) National Sozialismus라는 점을 염두에 둔 말이다), 이는 최근 우리나라나 일본의 몇몇 지식인들(임지현, 김철, 권혁범, 니시가와 나카오, 또는 부분적으로는 사카이 나오키 등)이 주장하듯이 괴물로서의 국민 국가론 또는 국민 국가 전체주의론(다시 말하면 모든 국민 국가는 그 자체로 전체주의적이거나 파시즘적이다)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개념은 왜 당대의 정세에서 복지국가가 전체주의 국가의 대안적인 형태였는지(따라서 양자 사이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해명하고, 더 나아가 왜 국민국가가 사회국가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었는지, 또 반대로 왜 사회 국가는 국민 국가의 틀 속에서만 가능했는지 좀더 정확히 이해하기 위한 목적에서 고안된 개념이다. 따라서 발리바르가 복지 국가 내지 사회 국가라는 표현 대신 이 개념을 쓰는 이유는, 복지 국가나 사회 국가라는 개념이 서유럽의 특정한 국가들의 성격 및 정책을 표현하기 위한 한정된 개념인 데 반해, 발리바르가 목표로 삼는 것은 19세기 이래 국민 국가 역사 전체이기 때문이다. 곧 서유럽이든 동유럽이든 아니면 다른 주변부 국가들이든 관계없이 국민 국가 자체의 전개 과정을 설명하고 더 나아가 그것이 20세기 후반에 직면한 위기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국민 사회 국가라는 개념이 더 적합하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발리바르에 따르면 국민 사회 국가는 “국민에 대한 소속은 사회적 권리의 향유를 위한 본질적인 조건이 되었으며, 역으로 이러한 사회적 권리들에 대한 인정(이 원리는 이제 헌법에 명기되어 있다)은 그것이 힘의 정치 및 국민 주권에 대한 긍정의 정치 속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사실”(Balibar, Droit de cité, p. 105)을 나타낸다. 좀더 부연하자면 이는 다음과 같은 점을 의미한다.

첫째, 이것은 19세기 말 이래로 국가의 “국민적 형태”, 곧 국민 국가(사실은 국가 그 자체)를 보존하는 데서 계급 투쟁의 조절이 결정적인 문제였다는 점을 의미한다. 자본에 의한 착취와 과잉착취에 저항하는 노동자 계급의 투쟁(내적인 위협)과 함께 식민지를 둘러싼 제국주의적인 경쟁과 전쟁(외적인 위협)에 맞서 국민 국가의 형태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종류의 사회정책과 안전보장 제도를 마련하여 노동자 계급을 국민 국가 내부로 통합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했다는 의미다.

둘째, 반대로 이러한 계급투쟁 및 사회적 갈등을 지배 계급에 이익이 되도록 조절하기 위해서는 “국민”이라는 특권적인 공동체 형태를 부과하고 작동시키는 것이 필수적이다. 다시 말하면 각각의 개인에게 그들이 노동자이기 이전에, 농민이기 이전에, 부르주아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국민이라는 것을 각인시키고 또 각종의 이데올로기 장치들을 통해 실제로 그들을 한 사람의 국민으로 형성하고 재생산하는 메커니즘을 마련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처럼 국민 국가가 국민 사회 국가로 전환되면서 다음과 같은 효과가 산출된다. 우선 사회권이 시민권으로 통합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곧 여러 가지 사회권들(무상 교육, 의료 보험, 실업 수당, 양육비, 주거 보조비 ...)이 시민권 자체 속으로 통합되었으며, 각각의 시민 또는 국민은 개인적 권리와 정치권 이외에 사회권을 기본권으로 향유하게 되었다. T. H. 마샬의 고전적인 정식화에 따르면 이때부터 시민권은 사회적 시민권이 되었다(Marshall, “Citizenship and Social Class”, in Citizenship and Social Class and Other Essays, U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50). 곧 사회권은 단지 가난한 자들에 대한 시혜나 구제의 의미(이는 또 하나의 차별을 의미한다)를 띠는 것이 아니라 관련된 나라의 모든 시민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보편적 권리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회적 시민권은 민주주의의 중요한 진전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의 등장 이후 이러한 사회권을 기본권에서 배제하려는 움직임이 강화되었으며, 이에 따라 사회권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시대에 가장 첨예한 정치적 쟁점 중 하나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발리바르는 사회권들이야말로 “시민권에서 가장 정치적인 부분”(Balibar, “Communisme et citoyenneté”, Actuel Marx, p. 147)이라고 주장한다.

국민 사회 국가의 또 다른 효과는 사회권의 귀속에서 국민이냐 아니냐가 기본적인 판단 기준이 되었다는 점이다. “시민권=국적nationalité”이라는 등식이 국민 국가의 핵심을 이룬다는 발리바르의 말은 이점을 가리킨다. 이는 다시 말하면 각각의 국민 국가, 특히 발전한 국가들 내에는 수많은 이주 노동자들 및 외국인들이 거주하고 있음에도 이들에게는 시민권이 제대로 부여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이들에게는 일체의 정치적 권리가 인정되지 않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국민 사회 국가로의 전화는 국민국가의 민주화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진전을 나타내면서 동시에 그러한 권리를 국민으로 제한했다는 점에서는 새로운 차별의 전개 과정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국민 사회 국가의 두 가지 효과는 신자유주의적인 세계화가 전개되고 국민 사회 국가가 위기에 빠지면서 극적인 모순을 낳게 된다. 곧 한편으로 사회권이 축소되고 사회적 시민권이 약화되면서 노동자 계급 중 다수가 “재프롤레타리아화”되고 빈곤이 확대되는 경향이 발생한다. 이는 단지 주변부나 저발전 국가들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중심부 내지 발전된 국민국가들 내부에서 “중심-주변”과 “부유-빈곤”의 차이가 확대되는 현상으로 발전한다. 또한 더 나아가 사회적 시민권 자체로부터 구조적으로 배제되는 집단들이 출현한다. 유럽을 비롯한 발전된 국민 국가들에서 이것의 희생양이 되는 것은 이주자 및 이민자들이다. 그 근본 이유 중 하나는 이들이 각 국민 국가에서 가장 취약한 집단들에게 특히 증오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회권에 가장 의존하는 이 후자의 집단들은 사회권의 보존 및 획득의 문제를 보편적 권리의 문제로 인식하지 않고 제로섬 경쟁의 문제로 간주한다. 따라서 자신들이 겪는 어려움과 불안은 자신의 경쟁자들인 이들 외국인 이민자들 및 이주자들에 있다고 생각하게 되고 이들에 대해 증오심과 배척감을 갖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이들은 이들과의 차별을 통해 자신들의 우월성 내지 국민으로서의 자부심을 얻게 된다. 유럽의 극우파 정당들이 이들을 기반으로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해나간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따라서 국민 사회 국가의 위기 속에서 진보 세력의 투쟁은 단지 기존의 사회적 권리를 보존하고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국민과 비국민 사이의 차이와 불평등을 그대로 방치하게 되며, 이는 다시 그러한 차이와 불평등을 통해 자신의 존재의 우월감과 국민으로서의 자부심을 느끼는 사회적 취약 집단들이 극우파를 지지하는 것을 간접적으로 조장하고 정당화하는 결과를 낳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다시 국민과 비국민 사이의 불평등을 강화하고 사회적 차별을 구조화하는 결과를 낳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보 세력의 투쟁은 한편으로 사회적 권리를 보존하고 강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의 외연을 국민의 차원을 넘어서 외연적으로 확장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이 점을 좀더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국민 사회 국가 개념이 지닌 또 다른 의의에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이 개념이 근대 국민 국가의 역사를 보편적 시민권의 진전 및 확대 과정으로서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이다(물론 이는 국민 국가의 역사는 아무런 문제점이나 모순도 없는, 순조롭고 평화로운 발전의 역사였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 점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이 책 4장에서 전개되는 발리바르와 프랑스 사회학자인 도미니크 쉬나페Dominique Schnapper 사이의 논쟁을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 도미니크 쉬나페는 프랑스의 신공화주의를 대표하는 사회학자로서 국민국가의 위기 시대를 맞아 공화주의적 전통 위에서 “국민” 개념을 옹호하려고 시도한다.(Schnapper, La Communauté des citoyens, Gallimard, 2003) 그녀에 따르면 “시민들의 공동체”로 이해된 국민이라는 개념은 정치적 삶에 대한 개인들의 능동적 참여라는 의미에서의 시민권의 본질적인 토대이며 또한 세계화 시대에 채택할 수 있는 유일하게 현실적인 해법이다.

그녀의 핵심 논거는 두 가지로 제시된다. 첫째,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국민은 특수한 신분이나 위계, 종족적ㆍ문화적 차이에 기초하지 않고 “개인들의 존엄성을 ... 그들이 지닌 보편적 인간이자 시민으로서의 자격과 연계한다”(Schnapper,La Communauté des citoyens, p. 106)는 점 때문에 다른 어떤 정치공동체보다 더 보편적이다. 둘째, 따라서 국민은 다른 어떤 집단들보다도 덜 배타적이며 덜 폐쇄적이다. 국민이라는 정치 공동체가 모종의 배타성을 지닌다면 그것은 외국인이라는 타자다. 하지만 이러한 배타성은 배척이나 차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식별discrimination”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곧 모든 동일성은 불가피하게 타자들과의 차이, 타자들과의 거리를 통해 정의되듯이 국민 역시 자신의 타자로서 외국인을 통해 정의된다는 의미에서 국민은 외국인이라는 타자에 대해 배타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녀는 종족적이거나 문화적ㆍ언어적 실체에 기반을 둔 정치 공동체나 “입헌적 애국주의”에 근거를 둔 하버마스식의 포스트 국민적 정치체보다 국민이야말로 여전히 현실적이면서도 민주주의적인 정치 공동체의 기초로 간주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쉬나페의 주장에 대해 발리바르는 국민 국가가 보편주의적인 정치체라는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다고 해서 국민 국가가 배타성이나 배제성에서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편주의적이면서 동시에 배제적이라는 점, 따라서 정치 공동체의 보편적 형태가 지닌 모순을 첨예한 형태로 드러낸다는 점에 있다고 주장한다. 어떤 점에서 국민 국가 또는 국민 사회 국가는 보편적이면서 배제적인가? 발리바르는 외연적(동화적) 보편주의와 내포적 보편주의라는 두 가지 개념으로 이를 해명한다. 외연적 보편주의라는 개념이 지시하는 것은 국민 국가와 식민화 사이의 본질적인 연관성이다. 곧 유럽의 국민 국가들의 형성 및 그들 사이의 패권 경쟁은 식민지 경쟁으로 이어졌는데, 식민화에 나선 각각의 국민국가들은 이를 보편성의 관점에서 이해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러한 식민화는 단순한 약탈이나 침략의 견지에서가 아니라 선교의 사명 내지 인류 전체의 문명화라는 사명이라는 관점에서 수행되었으며, 더욱이 내면화된 신념에 따라 수행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보편주의적 관점에도 불구하고, 식민화를 통해 비유럽의 피식민지 인구들은 지배자들의 국적에는 포함되었지만, 식민지 본국의 시민들과 동등한 지위를 누리지는 못한다. 따라서 같은 국적을 지닌 시민들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동등한 지위와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비시민들이 생겨나게 된다. 이것이 하나의 모순이다.

이러한 모순은 또 다른 보편주의, 곧 내포적 보편주의를 통해 좀더 첨예한 형태를 띠게 된다. 발리바르가 내포적 보편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인권선언”에서 구현된 것처럼,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고 자유롭다는 것, 곧 평등=자유라는 명제를 가리키며, 또한 그것과 내재적으로 연결된 모든 인간은 시민이라는 것, 곧 인간=시민이라는 명제를 가리킨다.(“인권선언”에 대한 발리바르의 해석은 Balibar, “Droits de l'homme et droits du citoyen: la dialectique moderne de l'égalité et de la liberté”, in Les frontières de la démocratie, La Découverte, 1992; 「인권과 시민권. 평등과 자유의 현대적 변증법」, 윤소영 엮음, 󰡔인권의 정치와 성적 차이󰡕, 공감, 2003 참조) 내포적 보편주의가 함축하는 모순은 다음과 같은 점이다. 만약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자유롭다면, 또는 적어도 그럴 권리를 지니고 있다면, 그리고 각각의 개인들이 누리는 평등과 자유는 그가 시민으로 존재하는 한에서만,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누리는 한에서만 누릴 수 있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낳는다. “시민권의 배제 ... 는 인간성 또는 인간 규범 바깥으로의 배제와 달리 해석되고 정당화될 수 없다.”(이 책, 127쪽) 다시 말하면 모든 사람은 그가 사람인 한에서 평등과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따라서 시민으로 존재할 수 있는 원초적인 권리를 갖고 있지만, 역으로 이러한 권리는 그가 시민으로 존재하는 경우에만, 곧 특정한 정치체, 특정한 국민국가의 성원으로 존재하는 한에서만 실제로 향유되고 행사될 수 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그가 어떤 국가의 국적을 갖고 있지 않는 한에서는, 곧 그가 이러저러한 국민이 아닌 한에서는 실제로는(잠재적으로는) 인간성을 박탈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한나 아렌트는 1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에서 무수히 생겨난 국적 없는 사람들이 이러한 모순을 실제로 체험하고 구현했음을 보여준 바 있다(Arendt,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Harcourt, 1951; 󰡔전체주의의 기원 1󰡕, 박미애ㆍ이진우 옮김, 한길사, 2006, 9장 참조).

이러한 모순은, 보편적인 시민권의 체계로서 근대 국민 국가는 항상 그것과 맞짝을 이루는 배제의 체계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함축한다. 그리고 국민 국가에서 국민 사회 국가로의 전환은 이러한 모순을 한층 더 강화한다. 왜냐하면 이미 국민 국가 체계에서 시민권이란 그것을 갖지 못한 사람들에 비해 커다란 특권(권리들에 더하여 누릴 수 있는 자격이자 심지어 신분)이었으며, 따라서 모든 사람이 누려야 할 기본권이라는 자신의 본래 의미와 모순되는 것이었지만, 국민 사회 국가에서 사회권이 기본권으로 포함됨으로써 시민권을 누리는 본래적 의미의 시민들과 그것에서 배제된 비시민들(소수자들 및 이주 노동자들) 사이의 차별은 훨씬 더 강화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의 정부는 이러한 차별을 폐지하려고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더욱 더 조장하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값싼 노동력의 수요는 항상 존재하기 때문에, 미등록(불법)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수입 제한과 고용 금지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미등록 이주 노동자들의 (불법) 수입과 고용은 관행적으로 허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들을 합법화하는 데서 생기는 사회적 비용과 법적ㆍ행정적 문제점 때문에 각 국가들은 이들을 계속 불법적인 상태에 놓아두려고 한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이들의 노동으로 노동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면서 동시에 불법 행위를 조장하고 그것을 구실로 하여 주민들의 불안과 공포를 조장하고 사회적 치안을 강화하려는 국가의 기만적인 이중적 행태가 전개된다.

발리바르는 유럽 연합의 건설로 인해 이러한 모순은 한층 더 첨예해진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유럽 연합의 건설은 지금까지 국민 국가에서 이루어졌던 민주주의와 시민권의 발전 정도를 질적으로 넘어서는 훨씬 더 진전된 민주주의를 구현해야 하지만, 현재 진행 중인 유럽 건설에서는 유럽 회원국 소속 국민들에게만 유럽 시민권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유럽 회원국 소속 국민들이 아닌 사람들, 곧 주로 이주 노동자들은 한편으로는 각 국가의 시민권에서 배제되는 것과 동시에 유럽 시민권으로부터도 배제되는 이중의 배제 상태에 놓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로운 민주주의의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자처하는 유럽의 한 가운데에서 일체의 권리로부터 배제된 새로운 종류의 인구들이 또한 구성되는 셈이다. 그는 이러한 배제 상황을 지칭하기 위해 서슴없이 유럽적인 아파르트헤이트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유럽이라는 초국민적 정치체가 내포하고 있고, 그것이 민주주의적인 정치체로 자처하기 위해서 해결해야만 하는 모순은 국민국가를 넘어선 시민권의 보편화 대 아파르트헤이트 사이의 모순이라고 할 수 있다.“하지만 아파르트헤이트와 “민주적”이고 “사회적인” 근대 국민 국가 사이에는 명백한 모순이 존재한다. 이 때문에 위와 같은 상황은 우리를 다음과 같은 불가피한 양자 택일로 인도한다. 사회국가 및 사회적 시민권을 완전히 해체하거나 아니면 순수하게 국민적인 정의에서 시민권을 전진적으로 분리시키고 관국민적인 성격을 지닌 사회적 권리들을 보증하거나.”(이 책, 221쪽)

따라서 국민 사회 국가론의 또 다른 의의는 그것이 국민 국가의 역사를 모순과 갈등의 전개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국민 국가 비판론자들은 국민 국가의 역사를 분석하지 않을뿐더러, 이러저러한 역사적 사례를 예시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억압과 배제의 권력으로서 국민 국가가 자신의 전일적 지배를 관철하고 자신의 힘을 증대해온 것을 입증하기 위해 제시되는 데 불과하다. 그들에게 국민 국가는 그 역사 전체에 걸쳐 동일한 본질과 동일한 기능, 동일한 효과를 산출해 왔을 뿐이다. 반면 국민 사회 국가의 관점에서 본다면 국민 국가는 역사적으로 동일하지 않을뿐더러, 국민 국가의 형태들이 변화해온 것은 바로 사회적 적대와 갈등 때문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19세기 말 이래, 특히 20세기 중엽 이래 서유럽 국가들이 사회 보장 제도를 실시하고 노동자들에게 광범위한 사회적 권리들을 허용한 것은, 노동자들의 지속적인 투쟁과 세력 확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투쟁의 성과는 헌법을 비롯한 사회적 제도들 속에 물질적으로 각인되어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발리바르가 지적하듯이 사회적 투쟁이 강력하게 전개됐던 서유럽 국가들에서 특기할 만한 점은 노동자들의 사회권이 헌법 자체 내에 명문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가장 먼저 사회권을 헌법 속에 명문화한 나라는 이탈리아인데, 1948년 헌법은 “이탈리아는 노동에 기초를 둔 민주주의 공화국이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또한 1958년 프랑스 헌법은 “주권”이라는 조항에서 “프랑스는 분할될 수 없고 정교분리적이며 민주주의적이고 사회적인 공화국이다”(제 2조)라고 명시하고 있다. 독일연방공화국의 1949년 기본법(오늘날에는 독일 전체로 확장되었다)은 “독일연방공화국은 민주주의적이고 사회적인 연방국가”라고 명시하며, 28조 1항은 다음과 같은 형태로 이를 좀더 정확히 명시한다. “각각의 주에서 헌법적인 지위를 지니는 조항들은 이 기본법이 정의하고 있는 공화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이며 사회적인 법치국가의 근본원리와 일치해야 한다.”(이 책, 360쪽)

이처럼 사회권이 명문화되었다는 것은 첫째, 사회권이 인권 및 기본적인 정치권 등과 동등한 인간의 기본권으로 제도화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사회 보장과 교육권, 의료권, 노동권 등은 단순히 빈자들에 대한 시혜의 의미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또 시민이라면 누구나 누릴 수 있고 누려야 하는 권리로서 확립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둘째, 이는 노동자들을 비롯한 대중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누리고 더 확장하기 위한 중요한 물질적 거점을 마련했다는 점을 의미한다. 지난 1990년대 이후 유럽에도 강하게 밀어닥친 신자유주의적인 흐름 속에서도 여전히 광범위한 사회권이 영위되고 있는 것은 이러한 물질적 토대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국민 국가 내에서 확립된 사회권이 여전히 모순에 빠져 있음을 잘 보여주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권리를 누릴 자격은 해당 국가의 시민들 또는 국민들에게만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럽 각국의 시민들 내지 국민들이 누리는 사회권은 다른 나라의 국민들은 배제한 가운데, 특히 유럽 각국에 거주하는 비유럽(및 비서유럽) 지역 주민들에 대한 차별을 함축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국민 사회 국가 개념은 앞으로 사회적 투쟁의 방향과 목표가 어떤 것이 되어야 할지 시사해주는 지표의 구실을 한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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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올리는 용어들은 "nation"과 관련된 용어들입니다. 알다시피 nation과 관련된 번역은 까다롭고 불만족스럽기 

마련인데, 개인적으로 요즘 nation에 관한 문제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고 있어서 앞으로 공부를 위한 준비 작업을  

해본다는 생각으로, 발리바르의 용어법의 특징들을 몇 가지 살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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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nation, 국민 형태forme nation, 민족주의nationalisme, 민족체nationalité

 

이 책에서 가장 번역하기 까다로운 용어들은 nation과 관련된 여러 가지 표현들이다. 이러한 어려움은 서양어에서 nation이라는 용어가 지닌 복합적 함의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기도 하지만, 발리바르가 nation을 새롭게 사고하기 위해 시도하는 독창적인 개념화에서 비롯하는 것이기도 하다. 먼저 우리의 선택을 밝혀두자면, 우리는 이 책에서 “nation”은 대부분 “국민”으로, “forme nation”은 “국민 형태”로, 그리고 “nationalisme”은 “민족주의”로(간혹 “국민주의”로 옮긴 곳도 있다), “nationalité”는 “민족체”로 옮겼다. 이러한 번역은 일반적인 용법과 달리 “국민”과 “민족”이라는 용어를 혼용해서 사용함으로써 오히려 사태를 더 혼란스럽게 만든 감이 없지 않지만, 발리바르 자신의 개념적 용법에 비추어볼 때 이러한 번역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 점에 대해 몇 가지 해명을 해보기로 하자.

nation의 문제와 관련된 발리바르의 핵심적인 이론적 기여는 “forme nation”, 곧 “국민 형태”라는 개념에서 찾을 수 있다(이 개념은 월러스틴과 공동으로 저술한 󰡔인종, 국민, 계급󰡕(1988)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이 개념은 얼핏 보기에는 그다지 독창적이거나 대단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매우 새로운 이론적 시도를 담고 있다. 국민 형태 개념은 발리바르 자신의 설명에 따르면 “그 자체로는 공동체도, 심지어 공동체의 이념형도 아니며, 규정된 “공동체 효과”를 생산할 수 있는 구조 개념”(이 책, 51쪽―강조는 발리바르)이다. 이러한 규정은 몇 가지 함의를 지니고 있다.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의 한계를 넘어서기

발리바르가 구조 개념으로서 국민 형태 개념을 도입하는 것은 nation 문제를 해명하지 못하는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무능력을 지양하기 위해서다. 이 점은 󰡔인종, 국민, 계급󰡕 5장으로 수록된 판본에는 빠졌지만, 미국 뉴욕 대학교(빙햄턴) 브로델 센터Braudel Center에서 발행하는 학술지 󰡔리뷰Review󰡕에 실린 영역본에는 포함되어 있는 「국민 형태: 역사와 이데올로기」라는 논문의 1부(󰡔이론󰡕 제 6호, 1993년에 서관모 교수가 번역하여 실린 이 논문의 국역본에는 이 부분이 포함돼 있다)에서 상세히 설명된 바 있다. 마르크스주의의 무능력에 대한 비판은 두 가지의 핵심 논점을 담고 있다.

1) 경제적 환원주의 비판

첫 번째는 마르크스주의의 경제적 환원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정치적 형태들의 발생 및 전개 과정을 민족성이나 민족적 동일성 같은 유심론적 통념들이 아니라 물질적 원인들, 곧 생산 관계들에 기반을 두고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하지만 이것은 ““부르주아” 역사 서술의 표준적 선택지들을 다른 언어로 재생산”하고 그리하여 결국 “민족에 관한 마르크스주의 논쟁들은 되풀이하여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논리적 궁지”(「국민 형태: 역사와 이데올로기」, 101쪽)에 빠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왜 이러한 일이 생겼을까? 그것은 전통적으로 마르크스주의가 이데올로기를 사회적 생산 관계 및 계급 관계에 의해 규정되는 현실을 은폐하거나 왜곡하는 담론이나 의식, “심지어 환상으로 환원하는”(같은 곳) 입장을 취했고, 따라서 nation이 갖는 상징적 효력과 실재성, 곧 그것이 정치 형태 내지 국가 형태의 구성 및 재생산에서 수행하는 핵심적 역할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마르크스주의는 한편으로 “민족체라든가 종족체와 같은 역사적 현상을 “현실적” 심층, 곧 자본주의 또는 사회주의라는 범주가 그것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해주었다고들 주장하는 그런 “현실적” 심층으로서 재도입”하든가 아니면 그것들을 담론이나 의식 또는 환상으로 이해된 “이데올로기”로 환원하려고 한 것이다. 곧 자본주의에서 nation은 부르주아 계급이 계급 적대의 현실을 은폐하고 기만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현상으로 이해되든가 아니면 식민지에서 반제국주의 투쟁을 수행하기 위한 계급 동맹의 이데올로기적 표현으로 이해되며, 반면 사회주의에서 nation은 “전 인민”이 형성되면서 계급적 적대가 소멸되는 역사적 형태로서 이해되는 것이다. 국민이라는 범주를 환원한 결과 사회주의 국가는 스스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소련 인민, 중국 인민 ...)에 체계적으로 사로잡힌 것이다. 따라서 전통적인 경제 결정론에서 벗어나 경제와 이데올로기의 “이중의 토대”라는 관점에서 nation을 물질적인 이데올로기적 현상으로 해명할 수 있는 개념을 도입해야 하며, 그것이 바로 국민 형태라는 개념이다.

2) 사회 구성체 개념의 애매성

두 번째는 사회 구성체라는 역사 유물론의 핵심 개념이 지닌 애매성이다. 발리바르에 따르면 마르크스 자신이 사용한 사회 구성체 개념은 “사회 또는 시민 사회 개념의 현학적 쌍생아”에 불과하며, 이후 마르크스주의에서 각각의 사회 내지 국가의 역사적 종별성을 설명하기 위해 발전된 이 개념은 “국가 이데올로기들이 제출하는 관념적 실체들을 순수하고 단순하게 수용하는 대가를 치르”(같은 글, 103쪽)게 된다. 다시 말해 “우리가 “러시아 사회 구성체”나 “프랑스 사회 구성체”나 “중국 사회 구성체”에 대해 그것들이 자연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처럼 말할 때, 이는 우리가 곧바로 nation[이 경우에는 민족―인용자]의 초역사적 실존이라는 공리를 흡수했다는 것을 뜻한다. nation[곧 민족]을 그 안에서 생산 양식의 역사가 일어나는 틀로 변전시키면서 말이다.”(103-104쪽)

따라서 발리바르에 따르면 마르크스주의의 사회 구성체 개념은 사실은 “민족”으로서의 “nation”의 상이한 표현에 불과한 것이었다. 발리바르는 이러한 종래의 사회 구성체 개념을 쇄신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관점을 제안한다. “그럴 게 아니라 우리는 사회 구성체를 그 통일성이 여전히 의심스러운 채로 있는 한 구성물을 뜻하는 것으로서, 적대적인 계급들의 형세, 곧 전적으로 자율적이지는 않으며 다른 사회 구성체들에 대한 대립 속에서만, 또 바로 이 적대를 통해 장기에 걸쳐 발전한 권력 투쟁, 갈등하는 이해 집단들, 갈등하는 이데올로기들과 같은 것을 통해서만 상대적으로 종별적이게 되는 그런 형세를 뜻하는 것으로서 사용해야 한다.”(같은 글, 104쪽) 그리고 사회 구성체 개념을 쇄신하기 위해 발리바르가 도입하는 것이 바로 forme nation, 곧 국민 형태라는 개념이다.

국민 형태 개념의 의미  

 

국민 형태 개념의 강점은 nation을 역사적 실체, 그것도 오래된 역사적 기원을 지니고 있고 장구한 진화 과정을 거쳐온 실체로서 이해하지 않고 어떤 구조적 메커니즘에 의해 일정한 역사적 시기에 생산되고 또 그 이후 경쟁적인 과정을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재생산된 것으로서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이다. 발리바르에게 nation은 대략 16세기 중반 이후, 곧 자본주의적 세계 경제의 형성과 비슷한 시기에 “비가역성의 문턱”을 넘어서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그것과 경쟁적인 다른 국가 형태들(제국이나 몇몇 도시를 중심으로 형성된 초국민적인 정치ㆍ상업 복합체 등)과의 경쟁에서 승리하면서 근대 부르주아 혁명들 이후 약 200여년에 걸친 격렬한 갈등을 거쳐 보편적인 근대적 국가 형태 또는 그러한 국가 형태를 특징짓는 상상적 공동체로 정착되었다. 그리고 국민 형태는 정확히 말하면 이러한 상상적 공동체로서의 nation이 어떤 의미에서 근대적인 국가 형태를 규정했으며, 그것의 지속적인 재생산에 기여했는지 설명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다. “그러나 “구”민족들의 경우에도 최근 몇 세기 동안에 제조된 것임을 우리가 잊는 경향이 있는 이 신화는 따라서 효과적인 이데올로기 형태, 그 속에서 국민 구성체의 상상적인 독특성이 현재에서 과거로 돌아감으로써 일상적으로 구성되는 이데올로기적 형태다.”(같은 글, 109쪽―번역은 다소 수정)

하지만 이것은 어설픈 포스트 모더니즘에 착안한 몇몇 반(反)국민 국가론자들이 주장하듯이 국민 국가라는 것이 “근대의 발명품”이라거나 순전한 이데올로기적 가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발리바르의 논점은 nation이 지닌(그리고 nation을 통해 개별적인 주체들로 형성된 각각의 개인들이 지닌) 고유한 이데올로기적 가상에 의거하지 않는 가운데 nation이 근대 국가 형성에서 수행한 규정적 역할, 따라서 그것의 상상적 (또는 제도적) 실재성을 설명하고, 그러한 역할을 위해 왜 nation에 고유한 이데올로기적 상상계가 필요한 것인지에 대해 해명하는 것이며, 또한 왜 오늘날 nation이 역사적 한계에 봉착했고, 그것을 내재적으로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떤 대안이 필요한지 제시하는 것이다. 발리바르는 이 점과 관련하여 국민 형태 개념이 지닌 세 가지 측면을 강조한다.

1) 국민 구성체의 형성 과정에 대한 설명

첫째, 국민 형태 개념은 근대 국민 구성체들의 형성 과정을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보다 좀더 정확히 설명할 수 있게 해준다. 이 점과 관련하여 발리바르는 페르낭 브로델과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역사적 자본주의론의 이론적 기여를 받아들인다.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적 설명은 국민(국가)의 형성과 근대 자본주의에 고유한 시장 구조 및 계급 구조의 발전 사이의 조응이라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국민의 형성을 부르주아의 프로젝트로 이해한다. 하지만 이러한 이해 방식은 자본주의 생산 관계에서 특정한 국가 형태, 곧 국민 국가를 연역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하지만, 마르크스 자신을 비롯해 어떤 마르크스주의자도 이것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것은 이러한 연역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브로델과 월러스틴은 국민 국가의 형성이 역사적 자본주의, 곧 중심부와 주변부로 조직되고 위계화된 근대 세계 경제의 형성과 연결돼 있음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이 경우 근대 국민의 형성은 식민화 과정과 필연적으로 결부된 과정으로 이해된다. 발리바르의 간명한 주장에 따르면 “어떤 점에서 근대의 모든 “민족”은 식민화의 산물”(같은 글, 112쪽)인 것이다. 더 나아가 그들의 이론은 국민 국가는 처음부터 근대 자본주의의 국가 형태가 된 것이 아니라 그것과 경쟁하는 다른 국가 형태들(제국, 도시 동맹 등)과의 경쟁에서 승리함으로써 헤게모니적인 형태가 되었음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런 점에서 역사적 자본주의론은 근대 국가 및 국민 공동체의 형성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이론적 틀이라고 할 수 있다. 

2) 이데올로기론으로서의 국민 형태 개념

하지만 국민 국가의 형성 및 재생산 과정을 이해하는 데서 역사적 자본주의론의 기여는 거기까지다. “통합된 세계 시장의 틀 안에서 정의되는 국민 국가의 경제적ㆍ행정적 기능은 사회적 “형태” 또는 “구성체”로서의 국민에 대한 이해의 반쪽만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이 책, 47쪽) 왜 국민이 근대 국가의 헤게모니적인 형태가 되었는지, 다시 말해 근대 국가가 왜 단지 국민 국가가 아니라 국민 사회 국가인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자본주의론이 아니라 (특히 알튀세르에서 유래하는, 하지만 본질적인 정정이 필요한) 이데올로기론이 필수적이다.

(2-1) 상상적 공동체로서의 국민

알튀세르에서 유래하는 이데올로기론의 강점은 무엇보다 상상과 현실을 조야하게 대립시키는 관점(알튀세르 자신이 “실증주의적” 관점이라고 부른)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다수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자생적으로 사로잡혀 있는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토대 내지 경제만이 실재적이고 이데올로기는 허위 의식 내지 왜곡된 표상, 심지어 가상 및 환상이다(알튀세르나 발리바르가 사용하는 “l'imaginaire” 개념을 “가상적인 것” 내지 “가상”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따라서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관점과 단절하려는 그들의 입장을 오히려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이렇게 되면 민족주의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민족 내지 국민 자체도 순전히 대중들의 착각 내지 왜곡된 표상(계급적 관점의 부족에서 생겨나는)의 산물로 이해된다. 그러니 민족주의나 민족 내지 국민과 관련된 문제들은 진짜 문제가 아니라 가짜 문제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될 수밖에 없다.

반면 발리바르는 상상계의 실재성, 물질성을 강조하는 알튀세르의 관점(이는 무엇보다 스피노자 철학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진태원, 「스피노자와 알튀세르에서 이데올로기의 문제: 상상계라는 쟁점」, 󰡔근대철학󰡕 3권 1호, 2008 참조)에 충실하게 국민 내지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사회적 공동체가 상상적 공동체라고 규정한다. “제도들의 기능 작용을 통해 재생산되는 모든 사회적 공동체는 상상적이다. 다시 말해 이 공동체들은 개인적 실존을 집합적 이야기의 짜임 속에 투사하는 것에, 공통의 이름을 인정하는 것에, 기억도 할 수 없는 과거의 흔적으로 체험되는 전통들(이러한 전통들이 근래의 상황 속에서 제작되고 주입된 경우에도)에 의거한다. 하지만 이것은 결국 일정한 조건들 속에서는 오직 상상적 공동체들만이 현실적 공동체들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Race, nation, classe: Les identités ambiguës, La Découverte, 1988, p. 126; 「국민 형태」, 117-118쪽―번역은 다소 수정) 사실 모든 공동체는 어떤 공동의 동일성 내지 정체성에 대한 결속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이러한 공동의 동일성을 그 성원들이 자신의 동일성으로 내면화(또는 상상화)함으로써 재생산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공동체의 현실적 기반은 바로 상상계의 효력 및 실재성에 있다는 것이 납득될 수 있다.

(2-2) 상상적인 것으로서 인민의 생산과 재생산

그렇다면 상상적 공동체로서 국민 공동체의 생산 및 재생산의 핵심 요소는 무엇일까? 발리바르는 그것을 상상적인 것으로서 인민의 생산과 재생산에서 찾는다. 이것은 인민이 자신들을 국민으로서 (재)인지하고 인민을 구성하는 각각의 개인들이 바로 이러한 국민에 대한 소속을 통해 자신들의 개인적 동일성을 형성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이것은 인민의 생산과 재생산이 상호 연관되어 있지만 서로 구별되는 두 가지 계기를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우선 집합적인 “주체”로서, 곧 국민으로서 인민의 형성이다. 근대 정치의 기본 원리 중 하나는 인민을 정치 권력의 기원 내지 정당성의 토대로 간주한다는 점이다. 이른바 인민 주권이 바로 그것인데, 이러한 인민 주권은 근대 정치의 지배적인 제도적 틀로서의 국민 국가에서는 국민 주권으로서 나타난다. 곧 인민이 자신이 속한 국가를 바로 자신의 국가로서, 다른 나라들과 대립하는 나의/우리의 조국으로서 (재)인지하고, 그것과 동시에 이러저러한 사회적 집단의 차이 및 특히 적대적인 계급적 구별에 선행하는 동일한 집단으로서(그리고 이러한 동일한 집단에 한 성원으로 속한다는 점에서는 모두 평등한 개인들로서) 자신을 (재)인지하게 되는 것은 인민이 국민으로 또는 민족으로 자신을 “표상/재현/상연하는”(이것들은 “represent”라는 개념에 모두 함축된 의미들이다) 한에서다. 따라서 집합적인 주체로서의 인민 및 국민의 구성은 “정복, 인구 이주, “영토 확정”과 같은 행정적 실천 등을 기술하는 것”(같은 글, 119쪽)으로는 제대로 해명될 수 없다. 통일적인 정치적 주체로서의 인민/국민이 구성될 수 있기 위해서는 종별적인 이데올로기의 모델, 곧 민족주의나 애국주의가 필요하다.

근대 국민 국가의 유기적 이데올로기로서 민족주의는 단지 상상적인 민족의 동일성에 대한 믿음 및 외국인에 대한 배타적인 감정 등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민족주의가 단지 이러한 믿음과 감정 등에 불과하다면, 서구의 이른바 자유 민주주의가 확립된 “선진국” 사람들이나 우리나라의 일부 지식인들이 (이른바 “남쪽” 국가들 또는 “후진국들”에 특유한) 민족주의를 마치 질병이나 집단적 광기 등으로 폄훼하는 것이 수긍될 수 있다(작년에 벌어졌던 이른바 “디워 논란”을 보라). 그리고 그 경우 민족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은 서구식으로 합리적 개인주의를 도입하거나 사회적 차이 및 소수자들에 대한 존중을 확립하는 것 등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에서만이 아니라 지극히 자유주의적이고 서구 중심적이라는 점에서 민족주의에 관한 설명 및 대응 방식으로는 커다란 한계를 지닌다.

발리바르의 국민 형태 개념은 이론적 전제 및 민족주의 현상에 대한 이해 방식에서도 지극히 자유주의적인 이러한 관점과 무관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관점에 깔려 있는 고유한 서구 중심주의 내지 서구식 민족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의도를 포함하고 있다. 발리바르는 민족주의에 대한 통상적인 사고 방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민족주의를 집합적이고 개인적인 동일성을 형성하는 핵심 메커니즘의 효과로 파악한다. 다시 말해 국민 국가의 핵심 목표는 “다른 모든 동일성을 압도하는 “국민 동일성”을 구성하는 것이고, 국민적 소속이 다른 모든 소속과 일치하고 그것들을 통합하는 데까지 이르게 하는 일”이며, “정의상 민족주의는 이것과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이 책, 55쪽) 근대 국민 국가 내에서 각 개인들은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상정하는 것처럼) 국민에 대한 소속 이전에 자신의 독자적인 개인성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저러한 국민적 개인으로서 비로소 자신의 동일성, 개인성을 얻게 된다. 국가를 구성하는 각 집단들 및 개인들은 자신들을 이러저러한 집단의 구성원이자 이러저러한 개인들이라고 생각하기에 앞서 자신들이 모두 똑같은 국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곧 그들은 국민으로서의 노동자 계급이고 국민으로서의 자본가이고 국민으로서의 선생이고 학생이고 가정 주부이고 범죄자 등등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한에서 모든 국민 국가(프랑스나 미국 같은 “이민자 국가”를 포함하는)는 정의상 민족주의적이며, 또한 그 국민 국가의 성원들은 자신들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민족주의적이다.

그런데 여기서 독자들은 아마도 한 가지 의문을 품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왜 “국민주의”가 아니라 “민족주의”라고 말하는가? nationalism이 nation의 유기적인 이데올로기이고, nation을 “국민”으로 이해해야 한다면, 당연히 nationalism은 “국민주의”라고 옮겨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러한 반론은 일리가 있으며, 사실 어떤 경우 nationalism은 “국민주의”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가령 프랑스 국적을 가진 아프리카계 흑인 이주자가 프랑스 월드컵에서 열렬하게 프랑스 대표팀을 응원하면서 끝내 프랑스 대표팀이 우승을 차지하자 감격에 겨워 “토종” 프랑스 백인과 같이 어깨를 걸고 프랑스 대표팀 응원가를 목청 높이 부를 때, 그는 우리가 보통 쓰는 “민족주의”라기보다는 “국민주의”를 구현하는 것이다. 또한 미국에 유학간 한국인 유학생 부부 사이에 태어난 자녀가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자신을 한국인이 아니라 미국인이라고 생각하고, 한미 야구 대표팀 간에 야구 경기가 벌어질 때 열렬히 미국팀을 응원할 때 그 역시 “민족주의”라기보다는 “국민주의”를 드러내는 셈이다. 또한 발리바르가 이 책 4장에서 논의하듯이 프랑스의 사회학자인 도미니크 쉬나페가 종족적인 기원 및 소속과 무관한 시민들의 공동체로서 “국민nation”을 옹호하고 그러한 국민들 사이의 결속감의 표현으로서 “nationalisme”을 말할 때 그것은 “민족주의”가 아니라 “국민주의”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럼에도 이 책에서 대부분 “nationalisme”을 “민족주의”라고 옮긴 것은 그러한 국민 성원들 사이의 일체감, 동질성은 필연적으로 그러한 동질성의 기원 및 주체에 대한 보충적인 상상계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나라 같이 이른바 “단일 민족”,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단일 종족”의 경우에는 더욱 더 사실이다. 여기서 허구적 종족성(또는 의제적(擬制的) 종족성)ethnicité fictive이라는 발리바르의 또 다른 핵심 개념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개념은 국민이 오래된 역사적 기원을 갖고 있고 연속적인 진화 과정을 거쳐온 역사적 실체 또는 심지어 (유일한) 역사적 주체라는 민족주의에 고유한 상상계를 설명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다. 이 개념에서 우선 주의해야 할 점은 “상상적”이라는 개념과 마찬가지로 발리바르가 사용하는 “허구적”이라는 개념이 “가상적”이라거나 “가짜” 또는 단순히 “공상적”이라는 의미만을 뜻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제도적 효과라는 의미, 곧 제작”(「국민 형태」, 121쪽)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이런 점에서는 어려운 번역어이기는 하지만 “의제적 종족성” 내지 “의제적 종족체”라는 번역이 일리가 있다).

이런 의미로 이해된 허구적 종족성은 실존하는 어떤 국민이 오래된 종족적 기원을 지니고 있으며(가령 골족의 후손, 단군의 자손,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天照大神)의 후예 등), 그 국민은 동일한 기원을 공유하면서 오랫동안 세대를 거치면서 희노애락을 함께 해온 유구한 역사적 실체(또는 오히려 주체)로서의 민족으로 표상된다. 바로 이러한 허구적 종족성 때문에 국민 국가 내의 집단들 및 개인들은 자신들이 이러저러한 사회적 조건의 차이를 초월한 이해관계의 동일성을 지닌 같은 민족이라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표상이나 인식이 단순히 공상적이거나 가상적인 의식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교육 제도나 가족 제도 같은 사회적 제도를 통해 체계적으로 훈육되고 각종 의례나 절차, 관행 등을 통해 일상적인 삶 속에서 재생산된다(발리바르는 「국민 형태」에서는 특히 언어와 계보가 허구적 종족성을 산출하는 두 가지 지주라는 점을 보여준 바 있다).

따라서 nationalism은 특히 그것이 강력하면 강력할수록 필연적으로 이러한 허구적 종족성을 더 강하게 반영하기 마련이며, 허구적인 또는 상상적인 역사적 실체로서의 “민족”을 자신의 기초로 삼게 된다. 우리가 nationalism을 “민족주의”라고 옮긴 것은 이데올로기로서의 민족주의에는 이러한 허구적 종족성이 (다소간 강렬하게) 담겨 있다는 점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3) 국민 사회 국가의 위기

국민 형태 개념이 지닌 또 다른 의의는 근대 국가의 헤게모니적인 형태로서의 국민이 어떤 내적 모순에 의해 오늘날 위기에 빠지게 되었으며,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이다.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발리바르는 “배제는 국민 형태의 본질 자체다”(55쪽)라고 단도직입적으로 주장한다. 왜 배제가 국민 형태의 본질을 이룰까? 발리바르의 이러한 주장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그것은 “(전자본주의적 구성체에서는 알려지지 않았던) 이 전형적으로 근대적인 거대한 등식”(“Communisme et citoyenneté. Réflexions sur la politique d'émancipation à la fin du XXe siècle”, Actuel Marx, n. 40, 2006, p. 146), 곧 “시민권=국적nationalité”이라는 등식이 근대 국민 국가 및 좀더 정확히 말하면 국민 사회 국가의 본질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래에 나오는 “국민 사회 국가” 항목에서 좀더 상세히 설명하겠지만, 발리바르에게 근대 국민 국가는 본질적으로 국민 사회 국가의 경향을 지니고 있었으며, 19세기 말 이후 특히 20세기에 접어들어서는 이러한 경향이 현실화된다. 국민 사회 국가란, 한편으로 국민 국가가 내부의 사회적 적대와 갈등(특히 계급 투쟁)을 해결함으로써 자신을 재생산하기 위해서는 국민으로서의 시민들에게 개인적ㆍ정치적 권리 이외에 (국가마다 얼마간 정도 차이는 존재하지만) 다양한 종류의 사회적 권리(의무 교육, 가족 수당, 실업 보험 등)를 부여해야 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국민 국가는 동시에 사회 국가의 성격을 띠어야 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국가를 구성하는 각 집단들 및 개인들이 자신들을 이러저러한 집단의 구성원이자 이러저러한 개인들이라고 생각하기에 앞서 모두 똑같은 국민이라고 생각할 때 그 국가는 자신을 지속적으로 재생산할 수 있다. 따라서 국민이라는 것이 국가의 구성원의 자격이자 개인으로서의 동일성의 조건이 되기 때문에, 시민권이 국적을 가진 성원들에게만 부여되고 이러저러한 외국인들 및 이주자들에게는 그러한 시민권이 배제된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적인 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발리바르가 근대 국민 국가는 국민 사회 국가이며 그것의 핵심은 시민권=국적 등식이라고 말할 때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국민 국가는 이것과 모순되는 또 다른 본질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근대 국민 국가의 역사가 외연적이고 내포적인 두 가지 측면에서 보편주의가 확산되고 진전되어온 역사라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이것은 국민 국가가 프랑스 혁명을 비롯한 근대 시민 혁명의 이념적 토대인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곧 발리바르 자신의 해석을 따르면 인간과 시민의 동일성, 그리고 자유와 평등의 동일성 명제에 근거하여 형성되었다는 사실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근대 국민 국가의 본질을 이루는 시민권=국적의 등식은 이러한 외연적이고 내포적인 보편주의를 모순에 빠뜨렸으며(왜냐하면 권리 선언에서 모든 사람은 시민이며, 시민으로서의 모든 사람은 동등하게 자유롭다고 주장되었음에도, 국민 국가의 틀 속에서는 오직 국적을 가진 사람들만이 그러한 자유와 평등, 권리들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전개되고 유럽 연합 건설이 진행 중인 오늘날 이러한 모순은 훨씬 더 첨예한 형태로 전개되고 있다.

이에 따라 발리바르는 이 책의 첫 번째 장인 「국민적 인간」에서 「국민 형태: 역사와 이데올로기」에서 전개한 논의들을 전제하면서 새로운 논점들을 추가하고 있다. 그것은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및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전개 이후 유럽을 비롯한 세계 도처에서 종족 및 민족 갈등이 불길처럼 번져나갔으며, 완고한 민족주의ㆍ인종주의 이데올로기에 편승한 극우 세력 및 집권 세력들의 반(反)이민 정책이 민주주의적 유럽 건설을 가로막는 주요한 장애물(유럽적인 아파르트헤이트)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 이러한 민족주의의 확산 및 강화는 근대 국민 국가의 본질을 이루는 배제, 곧 시민권=국적이라는 등식에 기반을 두고 있다. “민족주의는 국민적 제도에 상응하는 유기적 이데올로기이며, 국민적 제도는 가시적이거나 비가시적인, 하지만 항상 법과 관행들 안에 물질화되어 있는 배제의 규칙, “경계들/국경들”의 정식화에 의거하고 있다. 따라서 배제는 국민 형태의 본질 자체다. 또는 배제가 아니라면, 이것은 같은 국민이냐 아니면 외국인이냐, [국민] 공동체에 속하느냐 속하지 않느냐에 따라 특정한 재화와 권리에 대해 불평등한 접근을 강제하는 것이다.”(이 책, 55-56쪽)

따라서 오늘날 유럽에서만이 아니라 세계 도처에서 전개되는 반동의 정치에 맞서기 위해서는 단지 사회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투쟁만이 아니라 이러한 배제와 차별에 대한 투쟁도 동시에 전개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발리바르는 심지어 오늘날 정치의 근본 쟁점은 국민의 소속과 해방의 목표들(곧 인권과 시민권) 중 어떤 것을 옹호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나로서는 오늘날 민주주의적이거나 자유주의적인 정치와 보수주의적이거나 반동적인 정치 사이의 경계선은 (유일하지 않다면) 본질적으로 종족 차별과 국민성/국적의 차이에 대한 태도 여부에, 국민의 소속과 해방의 목표들(인권과 시민권) 중 어느 것을 일차적인 것으로 간주하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심지어 세계경제에서 지배적인 국민들의 경우에도 자족적인 국민성은 존재하지 않게 된 세계에서, 배제와 차별에 맞선 투쟁의 정치들이 정의되고 작동되는 양상들은 점점 더 민주주의의 시금석을 이루게 된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국민 국가가 민족주의 없이 존재할 수 있다고 믿는, 또는 외국인의 수용 및 거부라는 문제에 관해 본다면, 그 “본성”상 또는 그 “예외성” 덕분에 개방적이고 관용적이며 “보편주의적”인 국민 전통이 존재하며, 반대로 역시 그 본성상 또는 그 역사적 특수성 때문에 불관용적이고 “특수주의적”인 국민 전통도 존재한다고 믿는 가상에 저항해야 한다. 이런 관념은 바로 민족주의적 편견에 불과하다. 같은 이유 때문에 나는 우리가 본질적인 특성들을 통해 “선하고” 진보적인 민족주의와 “악하고” 반동적인 민족주의를 구분할 수 있다는 관념 역시 거부한다. 문제의 핵심은 항상, 경제적 이익, 외교적‧군사적 균형 및 사회적 갈등과 더불어서만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와 더불어, 특히 우리의 고유한 이데올로기적 규정들의 장 안에서 정치를 실행하는 것의 어려움이다.”(57-58쪽)

따라서 국민 형태 개념이 지닌 이론적ㆍ실천적 의미는 오늘날 전개되는 반동의 정치의 이데올로기적 기초를 해명하고 그것에 맞서기 위한 지점들을 제공해준다는 점에서도 찾을 수 있다.

번역에 대하여

이런 관점에서 보면 “forme nation”이라는 개념을 “민족 형태”라고 번역하는 것은 사실은 발리바르의 이론적 단절 및 쇄신의 시도를 종래의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 함축된 오류로 환원시킬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우리말의 “민족”이라는 단어는 정확히 “자연적으로 주어져 있는” “nation의 초역사적 실존”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단군을 시조로 하는 수천년의 역사를 지닌 오랜 민족, 외세의 끊임없는 침입을 겪고 급기야 1910년에는 일제에게 강점당하는 비극을 겪은 뒤 1945년 감격적인 해방을 맞이했지만, 다시 5년 뒤에는 끔찍한 내전을 겪으면서 둘로 쪼개진, 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통일되어야 할 단일 혈통과 단일한 언어를 지닌 세계에서 보기 드문 단일 민족이라는 관점이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상상계를 설명하기 위해 도입한 개념에 다시 그러한 상상계를 반영하는 “민족”이라는 번역어를 제시하는 것은 발리바르의 핵심 논점을 오히려 모호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왜 “nationalisme”은 “국민주의”라고 하지 않고 “민족주의”라고 번역하는가? 사실 한두 군데에서는 이것을 “국민주의”라고 옮겼다. 그 이유는 발리바르가 여러 차례에 걸쳐 언급하는 프랑스 공화주의가 말하는 “nation”은 종족적인 기초가 아니라 정치적 계약(발리바르 자신도 인용하는 에른스트 르낭의 유명한 표현을 빌리자면 “매일매일의 국민투표”로서의 국민이라는 관념이 이를 잘 표현해준다)에 기반을 둔 정치 공동체를 뜻하며, 따라서 이들이 옹호하는 “nationalisme”은 통상적으로 이해되는 종족적 순수성, 혈통이나 영토의 고유성에 기반을 둔 “민족주의”보다는 “국민주의”로 옮기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다른 경우에는 “nationalisme”을 “민족주의”로 옮긴 것은 앞서 지적했듯이 내셔널리즘이 근대적인 “nation”의 또 다른 측면으로서의 종족적 기원 및 역사적 연속성에 대한 상상계, 곧 발리바르가 “허구적 종족성”이라고 부른 것을 표현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발리바르가 이 책에서 사용하는 “nationaité”라는 개념은 “시민권=국적” 등식에서 볼 수 있듯이 한편으로는 “국적”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개념은 (아직 국가를 형성하지 못한) 개별적인 민족 공동체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다음과 같은 구절이 대표적이다. “역사적 과정은 우연과 굴곡, 단절들의 영향을 받는 과정이며, 이것은 뚜렷하게 구분되는 두 가지 실재, 곧 한편으로는 세계 속에 실존하고 있고, 과거부터 실존해 왔으며 미래에도 실존하게 될 개별 민족체들nationaités과 다른 한편으로는 국민 형태(또는 민족체의 형태) 그 자체를 문제 삼는다. 나는 우선 이런 구분에 집중해 볼 생각인데, 내가 보기에 집합적 동일성의 감정이 낳는 혼란들과 투사들을 깨뜨리기 위해서는 이런 구분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국민들 또는 민족체들은 다소간 오랫동안 지속되는, 어쨌든 여러 세대(...) 동안 지속되는 제도들이다. 국민들 또는 민족체들은 감정, 집합적 기억, 이데올로기와 정치 구조, 행정, 경제적 이해관계 등에 따라 다소간 통합되며, 이 모든 요소는 자신들의 고유한 “역사성”을 갖고 있다. 내가 보기에 일반 규칙은, 역사적 국민들은 주어진 어떤 시기에 동일한 제도적 틀 안에서 인구를 통합하는 여러 가지 실존하는 가능성들 중 하나를 실행한다는 게 될 것 같다.”(이 책, 44쪽)

이 구절에서 발리바르는 얼핏 보기에는 nation과 nationaité를 등가어로 사용하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사실 양자 사이에는 얼마간의 차이가 있으며, 이는 프랑스어의 일반적인 용법에서도 나타난다. 프랑스어에서 nationaité는 보통 “국적”이라는 의미로 많이 쓰이지만, 특히 19세기에 유래한 용법에서는 “종족적ㆍ사회적ㆍ문화적 특성으로 결합된 집단들이 자신들을 nation으로 구성하려는 의지”를 가리키기도 한다. 곧 일정한 영토에 거주해왔고 같은 언어와 종족적ㆍ인종적 기원을 지니고 있지만 아직 별도의 국가를 구성하지 못하고 따라서 국민으로서 독립하지도 못한 집단, 그러나 계속 독립적인 국민으로서 존재하려고 하는 집단을 가리키는 명칭이 nationaité다. 가령 얼마 전에 분리 독립 운동을 벌였던 티베트족이나 이라크의 쿠르트족 등이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nationaité는 nation과 유사하지만,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아직 nation을 이루지 못한, 전(前)국민적인 민족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에서는 nationaité를 “국적”으로 옮기거나 “민족체”로 옮겼으며, 드물게 “민족성”으로 옮긴 곳도 있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덧붙이자면, 발리바르가 국민은 근대적 구성물이고 nation이 마치 저 오랜 옛날부터 연속적으로 전해 내려온 동일성을 지닌 역사적 실체인 양 생각하는 것은 허구적 종족성의 결과라고 말하는 것은 이제 국민의 시대, 국민 국가의 시대는 종말을 고했으며, 국민 국가를 넘어서는 새로운 정치체를 모색할 때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관국민적” 개념을 설명하면서 지적했듯이 발리바르는 자신의 관국민적 관점을 “초국민적” 관점 내지 “포스트 국민적” 관점(또는 이른바 세계 시민주의)과 분명하게 구별한다. 그것은 첫째, 세계가 여전히 국민 국가라는 기본적인 정치 공동체를 중심으로 분할되고 상호 연결되어 있는 상황에서 섣불리 포스트 국민적 정치나 세계 시민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북쪽의 이른바 선진국들에 고유한 민족주의의 다른 표현일뿐더러, 남쪽 국가들의 생존 및 발전에 불리한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민족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미명 아래 또는 우리는 이미 “민족주의 너머”에 도달해 있다는 사실을 내세우며 다른 나라들의 민족주의를 향해 비판을 제시하는 것은 십중팔구 민족주의의 또 다른 모습을 감추는 것에 불과하다.”(이 책, 42쪽)

둘째, 더 나아가 그러한 관점은 신자유주의적인 세계화의 정세에서 민주주의를 실질적으로 보호하고 강화하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문제는 국민 국가를 추상적으로 포기하거나 아니면 그것에 대한 대안을 역시 추상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 사회 국가의 역사를 내적으로 규정해왔던 모순이 무엇이고 그것을 어떻게 내재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지 모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국가 형태의 역사 또는 헌정 형태의 역사라는 관점을 채택할 경우에만 반동적인 민족주의나 추상적인 포스트 국민 국가론 내지 세계 시민주의에 빠지지 않고 각 나라나 각 지역에서 상이하게 전개되는 정세에 올바르게 대응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유럽 공동체가 현실적으로 구성되고 있는 유럽의 상황에서 초국민적 정치체의 성격 및 관국민적 시민권에 대해 논의하는 것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절박한 문제일지 몰라도 우리나라의 상황, 또는 동아시아의 정세에서 포스트 국민적 정치 내지 세계 시민 정치 운운하는 것은 자칫 추상적인 비정치,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반(反)정치를 강화하는 데 일조하기 십상이다. 이런 의미에서도 발리바르의 국민 사회 국가 개념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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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이카 2009-10-26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여러 부분에 대해서 좀 여쭤보고 싶은 부분이 많은데요. 의문들이 간명하게 정리되지 않아서 지금은 좀 힘드네요.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나중에 이 책 읽고 제대로 한 번 여쭤 보겠습니다.

nation을 민족으로 옮길 것인가 국민으로 옮길 것인가의 문제에서 제가 참으로 난감한 것은 "민족"이나 "국민"이라는 한국어 어휘가 생긴 것 자체가 역사적으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인 것 같아요. 사실 "국민"이나 "민족"이라는 말 모두 일제 식민지 시기에 생겨 널리 쓰이게 된 말인 것으로 알고 있거든요. 당시 "국민"은 내선일체의 관점에서 한반도 거주자들을 일본 본토인과 법적, 이데올로기적으로 통합하려는 관점에서 쓰여졌고, "민족"은 그러한 관점을 거부하는, 곧 일본인과의 생래적, 법적 차별성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사용되었구요.

또 지금 오래되서 잘 기억이 안 나는데, 홉스봄이 쓴 "1780년 이후의 민족과 민족주의"에서 "nation은 근대 nation state 체제의 산물이다" 뭐 이런 말을 하던 와중에, 갑자기 각주를 달아 "동아시아의 한중일에서의 민족은 이런 식으로 파악할 수 없다" 그런 말을 했던 걸로 기억하거든요. 더구나 동아시아에는 근대 이전에도, 그러니까 최소한 일본의 전국통일 이후에는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들 간의 일종의 위계적 국가체제가 자리잡혀 있었고, 곧 nation의 응집성과 nation 간의 차별성을 구성하는 정치적 권위가 존재했다는 점에서 서구의 nation 형성과는 다른 형태의, 그러나 그에 상응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또 문득 생각이 난 것은 일본의 "민족적"입니다. 자이니치 조선인이나 자이니치 대만인처럼 조상이 식민지 시절 일본으로 이주해와서 정착했지만 여전히 그 어떤 국적을 획득하는 것을 거부하며 사는 집단들의 존재인데요. 이들의 "민족적"은 그야말로 nationality임에도 불구하고, "국적이자 시민권으로서 citizenship의 부재"라는 측면에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너무 횡설수설했는데요. 정리하면 nation 번역의 어려움은 서구 역사와 동아시아 역사의 다른 궤적, 그리고 어휘 형성의 역사적 구속성, 이 둘의 중첩에 의해 훨씬 더 증폭되는 것 같다는 느낌입니다. 너무 당연한 말을 길게 늘어놓은 것 같은데, 이 말에 다 담을 수 없는 복잡함과 답답함이 남네요. 잘 봤습니다.

balmas 2009-10-26 0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으셨다니 다행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동아시아 역사의 특수성이 겹쳐 있기 때문에 nation에 관한 번역이나 논의 모두 쉽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현재 nation이나 nationalism에 관한 논의들은 대부분 유럽이나 아메리카 대륙 또는 서아시아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에로이카님의 댓글에 간략히 답변을 드린다면, nation이라는 말이 동아시아 및 우리나라에 어떻게 소개됐고 또 그것에 해당하는 번역어인 "민족"이나 "국민"이라는 용어가 처음에 어떤 용법으로 사용되었는가는 역사학적으로 의미있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용어의 원래 기원과 그 용어가 현재의 맥락에서 사용되는 방식의 문제는 구별되는 문제인 듯합니다.
그리고 제가 이번 발리바르 번역에서 제안한 번역어들은 일차적으로 발리바르 자신의 용법에 초점을 둔 번역입니다. 제가 보기에 발리바르는 주로 서구, 특히 프랑스의 사례를 염두에 두고 nation에 관한 논의를 하는데, 그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이겠죠. 그리고 그런 관점에서 보면 nation이나, nation state, 또는 nation form 같은 것들은 전형적인 근대적 현상입니다. 또는 어떻게 말하면 바로 이것들이 근대성을 구성했다고 할 수도 있겠죠. 그런 의미에서 이 용어들은 "민족"보다는 "국민"이라는 번역어로 옮기는 게 더 낫다고 본 것입니다. 또 이러한 근대성을 부인하거나 은폐하고 nation이 마치 유구한 역사적 기원을 가지고 있고 연속적인 역사적 전개 과정을 거쳐 온 것처럼 간주하는 상상적 관점들, 곧 nationalism 등을 표현하기에는 "민족"이라는 말이 낫다고 본 거구요. 동아시아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하고 이질적인 현상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의 문제는 또 다른 문제가 될 것 같습니다.

아무튼 제가 지금 근무하는 데가 "민족문화연구원"이어서 그런지(^^;) 요즘 nation에 관한 문제에 아주 관심이 많습니다. 외국에서 전개되는 다양하고 수준높은 논의에 비하면 국내에서의 논의는 다소 조야하고 상식에 의존하고 있다는 생각도 드는데, 아무튼 앞으로 해야 할 일이 꽤 많을 듯합니다.

NA 2009-10-28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시지요? 다른 일 때문에 바빠서 오늘에야 보게 되었네요. 친절하고 자세한 설명들 잘 읽었습니다. 나중에 더 꼼꼼히 읽어봐야겠지만, 역시 견해 차이를 쉽게 좁히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가령 한 가지만 말씀드리면, 진선배님의 다음과 같은 설명은 쉽게 수긍이 가지 않습니다. "[민족이라는] 이러한 상상계를 설명하기 위해 도입한 개념에 다시 그러한 상상계를 반영하는 “민족”이라는 번역어를 제시하는 것은 발리바르의 핵심 논점을 오히려 모호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

우선, "민족"에 대한 대중의 상상을 설명하기 위해 "민족형태"라는 개념을 만드는 것(또는 그렇게 번역하는 것)이 왜 발리바르의 논점을 모호하게 한다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X를 설명하는 개념에 X-형태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저로서는 꽤 정당해 보이는군요. 오히려 "국민형태"라는 말을 사용하면 그 말이 무엇을 설명하려는 것인지가 모호해지지 않을까요? 많은 사람들은 그 개념이 민족이 아니라 국민을 설명하는 말이라고 여길테니 말입니다.

발리바르는 '민족'이 아니라 '민족형태'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그것이 (제국, 도시국가와 같은) 다른 여러 형태들 가운데 하나의 형태일 뿐이며, 동시에 (선배님도 지적하셨듯이) 구조적인 어떤 것이자 장치와 메커니즘을 통해 생산되는 효과라는 의미를 갖는다는 점을 동시에 함축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당형태라는 말도 당을 이런식으로 낯설게 만드는 효과를 갖듯이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민족형태'라는 말은 자체로 '민족'이라는 것이 자연적으로, 역사적으로 주어진 어떤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제작된 것이라는 점을 표현하고 있고, 그래서 '민족'이라는 상상계를 정확히 문제로 삼는 것임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의 의도에 잘 부합한다는 생각입니다.

게다가 이번에 읽어보니 선배님이 민족주의 대신 국민주의를 사용한 곳이 있다고 하시면서, 맥락상 "허구적 종족성"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 않은 곳에서 그렇게 옮겼다고 말씀하시니, 더욱 더 '국민형태'라는 말을 사용하면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배님이 번역하신 두 권의 발리바르의 책이 곧 나오게 될 것 같아 사실 무척 기대가 됩니다. 좋은 번역은 원본으로 읽을 때 보지 못한 많은 것을 또 보게 해주니 말입니다. 끝까지 잘 마무리하시길 바랍니다.

balmas 2009-10-29 04:24   좋아요 0 | URL
예, 댓글 달아줘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에 관해 최원 형과는 분명히 의견의 차이가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최원 형의 논거들을 보면, 사실 저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됩니다. 솔직히 말해 저는 왜 최원 형이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지 잘 이해를 못하겠어요. 최원 형의 논점이야 이해가 되지만, 발리바르의 논의를 그런 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인지 저로서는 잘 납득이 가지 않는군요. 내년쯤 기회가 되면 nation 문제에 관해 글을 한두 편 써볼 생각인데, 최원 형도 시간이 날 때 nation 문제에 관해 글을 좀 써본다면, 서로의 차이가 좀더 분명히 드러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조만간 출간될 에티엔 발리바르의 {우리는 유럽의 시민들인가?}(후마니타스)에 수록될 용어 해설 몇 가지를  

옮깁니다. 두어 개는 너무 분량이 많다 싶은데, 그래도 얼마간 독자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그냥 수록할 생각입니다.  

처음에는 용어 해설 쓰고 해제 쓰는 데 한 2주 정도면 될 줄 알았는데, 벌써 두달을 넘겨버렸네요. 책의 출간을 

기다리는 분들께 죄송하고 후마니타스 출판사 여러분들께도 죄송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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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국민적transnational  

“트랜스내셔널transnational”이라는 관형어는 최근 인문사회과학계에서 널리 쓰이고 있다. 이 용어는 보통 종래의 국민 국가적인 차원을 넘어선 정치ㆍ경제ㆍ문화적인 지평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된다. 가령 “transnational corporations”는 “거대한 규모를 가지고 본국의 기반을 바탕으로 세계적 규모에서 자본 축적을 수행하며, 이러한 축적을 가능하게 하는 전략과 조직을 갖고 있는 기업”이라는 것을 의미하며, “초국적 기업”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장시복, 󰡔세계화 시대 초국적 기업의 실체󰡕, 책세상, 2004, 41쪽). 또한 “transnational civic activity”는 국경을 초월하여 전개되는 시민 운동을 의미한다. 최근에는 “transnational terrorism” 같은 용어도 종종 사용된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이 용어는 “초국민적” 내지 “초국적” 등으로 번역하는 것이 무난해 보인다.

하지만 발리바르는 이 책을 비롯한 최근 저작들에서 “national”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접두어들을 섬세하게 구별해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transnational”을 단순히 “초국민적”이나 “초국적”으로 번역하기는 좀 어렵다. 발리바르가 주로 사용하는 용어들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용어들이다.

우선 “post-national”이라는 용어가 있는데, 이것은 이제 국민 국가 시대가 종언을 고했으며, 탈국민적인 시대, 곧 유럽 공동체라든가 기타 세계 시민적인 정치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주장하는 관점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다. 이 책에서는 하버마스가 이러한 입장의 대표자로 제시되고 있다. 하지만 발리바르는 이러한 관점에 명시적으로 반대하고 있으며, (프랑스의) 공화주의자들이 고수하는 국민 국가적 관점과 이것에 대립하는 “post-national”, 곧 “포스트 국민적” 관점의 양자택일을 넘어서기 위한 대안으로 “transnational”이라는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가령 다음과 같은 구절은 이를 잘 보여준다. “여기 유럽에서(하지만 이는 분명히 훨씬 더 일반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몇몇 국민들이 심지어 국민 형태 그 자체가 재정초 및 재생의 국면을 통과하고 있지 않은지, 또는 돌이킬 수 없게 국민 형태가 폐절되는 과정에, “포스트 국민적” 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 접어든 것은 아닌지 하는 질문이 점점 더 피할 수 없게 제기되는 만큼, 비판적 거리 두기는 점점 더 필요하게 된다. 그런데 나 자신은 문제를 이렇게 제기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믿는다. 이런 식의 양자택일들은 해결 불가능한 것으로 드러날 뿐만 아니라, 우리가 관여하고 있는 문제들을 해명하는 데 기여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37쪽)

또한 발리바르는 “supra-national”이라는 용어와 “transnational”이라는 용어를 구별한다. 전자는 국민 국가의 차원을 넘어선 정치 제도, 특히 유럽 공동체를 가리키기 위해 자주 사용된다. 물론 국민 국가의 차원을 넘어선다는 점에서 보면 “supra-national”과 “transnational” 사이에는 큰 차이가 존재하지 않으며, 실제로 양자가 상호 대체 가능한 동의어처럼 쓰이는 곳도 존재한다. 하지만 발리바르는 두 용어를 상당히 섬세하게 구별해서 사용한다. 우선 전자는 현재 유럽 공동체 건설을 주도하는 세력의 공식적 관점을 표현하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이러한 관점은 국민 국가의 존속을 옹호하는 “주권론적” 관점과 대립하여 (미국이나 일본 또는 중국과 맞설 수 있는) 유럽이라는 새로운 초강대국의 구성을 겨냥하는 “유럽 공동체적” 관점이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은 공산주의의 종언 이후에 유럽 공동체 건설이 본격화되었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다분히 신자유주의적인 색채를 띠고 있으며 “유사 제국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역사적 공산주의의 몰락은 이런 상황을 심원하게 변형시켰다. 이 사건이 없었다면 “유럽 공동체”는 유럽 대륙에 존재하는 유일한 초국민적 구성물이라는 유사 제국적인 상황에 놓이지 않았을 것이다.”(305쪽)

더 나아가 유럽 공동체는 국민 국가의 한계를 지양하고 더 많은 민주주의를 구현해야 함에도, 이러한 관점은 국민 국가의 위기를 초래한 핵심 모순, 곧 시민권=국적이라는 모순(이 점에 대해서는 뒤에 나오는 “국민 사회 국가” 항목 참조)을 약화시키거나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하게 된다. 왜냐하면 초국민적 관점은 유럽 공동체를 유럽 회원국들, 곧 유럽의 (부유한) 국민 국가들의 합으로 규정하고, 따라서 유럽 구성원은 기존 국민 국가들의 성원으로 규정하는데, 이것은 국적을 가진 성원에게만 시민권의 향유 자격을 부여하는 시민권=국적 등식을 본질로 하는 국민 국가의 모순을 해결하는 대신, 기존의 국민 국가 시민권의 특징들을 초국민적 차원으로 그대로 옮겨놓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발리바르에 따르면 이는 불가피하게 유럽적인 아파르트헤이트를 낳을 수밖에 없다. 마치 이전에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백인과 흑인 사이에 체계적인 격리가 존재했던 것처럼 유럽 대륙 내에서 유럽적인 시민권을 향유하는 주민들과 그렇지 못한 주민들(하지만 유럽 대륙에 오랫동안 거주하고 있는) 사이에 체계적인 장벽과 경계가 설립되는 것이다.

이 책에서 발리바르가 사용하는 “transnational”이라는 표현은 이러한 포스트 국민적이거나 초국민적인 관점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발리바르 자신의 관점을 나타내준다. 따라서 이때의 “transnational”은 보통 이해되는 것처럼 국민 국가를 넘어선다든가, 다른 나라의 시민들과 연대한다든가 하는 뜻보다 좀더 강하고 복합적인 의미를 지닌다. 발리바르가 다른 곳에서 간명하게 규정한 것에 따르면 “trans-national”은 “trans-frontière”, 곧 “국경/경계를 넘어섬”을 의미한다(É. Balibar, Europe, constitution frontière, Éditions du Passant, 2005, p. 17). 이 때 “국경/경계를 넘어섬”은 물리적인 의미에서의 국경을 초월한다든가 횡단한다는 의미라기보다는 (그런 의미도 포함하지만) 일차적으로는 시민권=국적을 조건 짓는 국민적ㆍ인종적 경계, 따라서 상징적이고 동일성 중심적인 경계를 넘어선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trans-national”은 무엇보다도 국민 국가 또는 국민 사회 국가의 모순의 핵심을 이루는 시민권=국적의 한계를 넘어서고 개조한다는 것을 뜻한다. 발리바르에게 “transnational”이 무엇보다 “citoyenneté transnationale”, 곧 국민적 시민권의 한계를 넘어서는 “관국민적 시민권”과 관련하여 사용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런 의미로 이해한다면 “transnational”은 국민 국가의 종언이라는 막연한 관념에 기반을 둔 추상적인 포스트 국민주의나 세계 시민주의와 달리 국가 형태의 역사, 헌정 형태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국민 국가의 내적 모순을 개조하거나 지양하고 그것에 기반하여 새로운 형태의 국가 내지 헌정의 구성을 추구하려는 발리바르의 관점을 표현하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transnational”을 보통 사용되는 “초국민적”이나 “초국적”이라는 번역어로 옮기는 대신 “관(貫)국민적”이라고 번역했다. 이러한 번역어는 시민권=국가라는 등식을 가능케 하는 국민적ㆍ인종적 경계를 가로지른다는 의미를 좀더 잘 표현해줄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을 담을 수 있다면 “횡국민적” 같은 번역어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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