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올리는 용어들은 "nation"과 관련된 용어들입니다. 알다시피 nation과 관련된 번역은 까다롭고 불만족스럽기
마련인데, 개인적으로 요즘 nation에 관한 문제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고 있어서 앞으로 공부를 위한 준비 작업을
해본다는 생각으로, 발리바르의 용어법의 특징들을 몇 가지 살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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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nation, 국민 형태forme nation, 민족주의nationalisme, 민족체nationalité
이 책에서 가장 번역하기 까다로운 용어들은 nation과 관련된 여러 가지 표현들이다. 이러한 어려움은 서양어에서 nation이라는 용어가 지닌 복합적 함의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기도 하지만, 발리바르가 nation을 새롭게 사고하기 위해 시도하는 독창적인 개념화에서 비롯하는 것이기도 하다. 먼저 우리의 선택을 밝혀두자면, 우리는 이 책에서 “nation”은 대부분 “국민”으로, “forme nation”은 “국민 형태”로, 그리고 “nationalisme”은 “민족주의”로(간혹 “국민주의”로 옮긴 곳도 있다), “nationalité”는 “민족체”로 옮겼다. 이러한 번역은 일반적인 용법과 달리 “국민”과 “민족”이라는 용어를 혼용해서 사용함으로써 오히려 사태를 더 혼란스럽게 만든 감이 없지 않지만, 발리바르 자신의 개념적 용법에 비추어볼 때 이러한 번역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 점에 대해 몇 가지 해명을 해보기로 하자.
nation의 문제와 관련된 발리바르의 핵심적인 이론적 기여는 “forme nation”, 곧 “국민 형태”라는 개념에서 찾을 수 있다(이 개념은 월러스틴과 공동으로 저술한 인종, 국민, 계급(1988)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이 개념은 얼핏 보기에는 그다지 독창적이거나 대단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매우 새로운 이론적 시도를 담고 있다. 국민 형태 개념은 발리바르 자신의 설명에 따르면 “그 자체로는 공동체도, 심지어 공동체의 이념형도 아니며, 규정된 “공동체 효과”를 생산할 수 있는 구조 개념”(이 책, 51쪽―강조는 발리바르)이다. 이러한 규정은 몇 가지 함의를 지니고 있다.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의 한계를 넘어서기
발리바르가 구조 개념으로서 국민 형태 개념을 도입하는 것은 nation 문제를 해명하지 못하는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무능력을 지양하기 위해서다. 이 점은 인종, 국민, 계급 5장으로 수록된 판본에는 빠졌지만, 미국 뉴욕 대학교(빙햄턴) 브로델 센터Braudel Center에서 발행하는 학술지 리뷰Review에 실린 영역본에는 포함되어 있는 「국민 형태: 역사와 이데올로기」라는 논문의 1부(이론 제 6호, 1993년에 서관모 교수가 번역하여 실린 이 논문의 국역본에는 이 부분이 포함돼 있다)에서 상세히 설명된 바 있다. 마르크스주의의 무능력에 대한 비판은 두 가지의 핵심 논점을 담고 있다.
1) 경제적 환원주의 비판
첫 번째는 마르크스주의의 경제적 환원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정치적 형태들의 발생 및 전개 과정을 민족성이나 민족적 동일성 같은 유심론적 통념들이 아니라 물질적 원인들, 곧 생산 관계들에 기반을 두고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하지만 이것은 ““부르주아” 역사 서술의 표준적 선택지들을 다른 언어로 재생산”하고 그리하여 결국 “민족에 관한 마르크스주의 논쟁들은 되풀이하여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논리적 궁지”(「국민 형태: 역사와 이데올로기」, 101쪽)에 빠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왜 이러한 일이 생겼을까? 그것은 전통적으로 마르크스주의가 이데올로기를 사회적 생산 관계 및 계급 관계에 의해 규정되는 현실을 은폐하거나 왜곡하는 담론이나 의식, “심지어 환상으로 환원하는”(같은 곳) 입장을 취했고, 따라서 nation이 갖는 상징적 효력과 실재성, 곧 그것이 정치 형태 내지 국가 형태의 구성 및 재생산에서 수행하는 핵심적 역할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마르크스주의는 한편으로 “민족체라든가 종족체와 같은 역사적 현상을 “현실적” 심층, 곧 자본주의 또는 사회주의라는 범주가 그것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해주었다고들 주장하는 그런 “현실적” 심층으로서 재도입”하든가 아니면 그것들을 담론이나 의식 또는 환상으로 이해된 “이데올로기”로 환원하려고 한 것이다. 곧 자본주의에서 nation은 부르주아 계급이 계급 적대의 현실을 은폐하고 기만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현상으로 이해되든가 아니면 식민지에서 반제국주의 투쟁을 수행하기 위한 계급 동맹의 이데올로기적 표현으로 이해되며, 반면 사회주의에서 nation은 “전 인민”이 형성되면서 계급적 적대가 소멸되는 역사적 형태로서 이해되는 것이다. 국민이라는 범주를 환원한 결과 사회주의 국가는 스스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소련 인민, 중국 인민 ...)에 체계적으로 사로잡힌 것이다. 따라서 전통적인 경제 결정론에서 벗어나 경제와 이데올로기의 “이중의 토대”라는 관점에서 nation을 물질적인 이데올로기적 현상으로 해명할 수 있는 개념을 도입해야 하며, 그것이 바로 국민 형태라는 개념이다.
2) 사회 구성체 개념의 애매성
두 번째는 사회 구성체라는 역사 유물론의 핵심 개념이 지닌 애매성이다. 발리바르에 따르면 마르크스 자신이 사용한 사회 구성체 개념은 “사회 또는 시민 사회 개념의 현학적 쌍생아”에 불과하며, 이후 마르크스주의에서 각각의 사회 내지 국가의 역사적 종별성을 설명하기 위해 발전된 이 개념은 “국가 이데올로기들이 제출하는 관념적 실체들을 순수하고 단순하게 수용하는 대가를 치르”(같은 글, 103쪽)게 된다. 다시 말해 “우리가 “러시아 사회 구성체”나 “프랑스 사회 구성체”나 “중국 사회 구성체”에 대해 그것들이 자연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처럼 말할 때, 이는 우리가 곧바로 nation[이 경우에는 민족―인용자]의 초역사적 실존이라는 공리를 흡수했다는 것을 뜻한다. nation[곧 민족]을 그 안에서 생산 양식의 역사가 일어나는 틀로 변전시키면서 말이다.”(103-104쪽)
따라서 발리바르에 따르면 마르크스주의의 사회 구성체 개념은 사실은 “민족”으로서의 “nation”의 상이한 표현에 불과한 것이었다. 발리바르는 이러한 종래의 사회 구성체 개념을 쇄신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관점을 제안한다. “그럴 게 아니라 우리는 사회 구성체를 그 통일성이 여전히 의심스러운 채로 있는 한 구성물을 뜻하는 것으로서, 적대적인 계급들의 형세, 곧 전적으로 자율적이지는 않으며 다른 사회 구성체들에 대한 대립 속에서만, 또 바로 이 적대를 통해 장기에 걸쳐 발전한 권력 투쟁, 갈등하는 이해 집단들, 갈등하는 이데올로기들과 같은 것을 통해서만 상대적으로 종별적이게 되는 그런 형세를 뜻하는 것으로서 사용해야 한다.”(같은 글, 104쪽) 그리고 사회 구성체 개념을 쇄신하기 위해 발리바르가 도입하는 것이 바로 forme nation, 곧 국민 형태라는 개념이다.
국민 형태 개념의 의미
국민 형태 개념의 강점은 nation을 역사적 실체, 그것도 오래된 역사적 기원을 지니고 있고 장구한 진화 과정을 거쳐온 실체로서 이해하지 않고 어떤 구조적 메커니즘에 의해 일정한 역사적 시기에 생산되고 또 그 이후 경쟁적인 과정을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재생산된 것으로서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이다. 발리바르에게 nation은 대략 16세기 중반 이후, 곧 자본주의적 세계 경제의 형성과 비슷한 시기에 “비가역성의 문턱”을 넘어서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그것과 경쟁적인 다른 국가 형태들(제국이나 몇몇 도시를 중심으로 형성된 초국민적인 정치ㆍ상업 복합체 등)과의 경쟁에서 승리하면서 근대 부르주아 혁명들 이후 약 200여년에 걸친 격렬한 갈등을 거쳐 보편적인 근대적 국가 형태 또는 그러한 국가 형태를 특징짓는 상상적 공동체로 정착되었다. 그리고 국민 형태는 정확히 말하면 이러한 상상적 공동체로서의 nation이 어떤 의미에서 근대적인 국가 형태를 규정했으며, 그것의 지속적인 재생산에 기여했는지 설명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다. “그러나 “구”민족들의 경우에도 최근 몇 세기 동안에 제조된 것임을 우리가 잊는 경향이 있는 이 신화는 따라서 효과적인 이데올로기 형태, 그 속에서 국민 구성체의 상상적인 독특성이 현재에서 과거로 돌아감으로써 일상적으로 구성되는 이데올로기적 형태다.”(같은 글, 109쪽―번역은 다소 수정)
하지만 이것은 어설픈 포스트 모더니즘에 착안한 몇몇 반(反)국민 국가론자들이 주장하듯이 국민 국가라는 것이 “근대의 발명품”이라거나 순전한 이데올로기적 가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발리바르의 논점은 nation이 지닌(그리고 nation을 통해 개별적인 주체들로 형성된 각각의 개인들이 지닌) 고유한 이데올로기적 가상에 의거하지 않는 가운데 nation이 근대 국가 형성에서 수행한 규정적 역할, 따라서 그것의 상상적 (또는 제도적) 실재성을 설명하고, 그러한 역할을 위해 왜 nation에 고유한 이데올로기적 상상계가 필요한 것인지에 대해 해명하는 것이며, 또한 왜 오늘날 nation이 역사적 한계에 봉착했고, 그것을 내재적으로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떤 대안이 필요한지 제시하는 것이다. 발리바르는 이 점과 관련하여 국민 형태 개념이 지닌 세 가지 측면을 강조한다.
1) 국민 구성체의 형성 과정에 대한 설명
첫째, 국민 형태 개념은 근대 국민 구성체들의 형성 과정을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보다 좀더 정확히 설명할 수 있게 해준다. 이 점과 관련하여 발리바르는 페르낭 브로델과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역사적 자본주의론의 이론적 기여를 받아들인다.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적 설명은 국민(국가)의 형성과 근대 자본주의에 고유한 시장 구조 및 계급 구조의 발전 사이의 조응이라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국민의 형성을 부르주아의 프로젝트로 이해한다. 하지만 이러한 이해 방식은 자본주의 생산 관계에서 특정한 국가 형태, 곧 국민 국가를 연역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하지만, 마르크스 자신을 비롯해 어떤 마르크스주의자도 이것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것은 이러한 연역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브로델과 월러스틴은 국민 국가의 형성이 역사적 자본주의, 곧 중심부와 주변부로 조직되고 위계화된 근대 세계 경제의 형성과 연결돼 있음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이 경우 근대 국민의 형성은 식민화 과정과 필연적으로 결부된 과정으로 이해된다. 발리바르의 간명한 주장에 따르면 “어떤 점에서 근대의 모든 “민족”은 식민화의 산물”(같은 글, 112쪽)인 것이다. 더 나아가 그들의 이론은 국민 국가는 처음부터 근대 자본주의의 국가 형태가 된 것이 아니라 그것과 경쟁하는 다른 국가 형태들(제국, 도시 동맹 등)과의 경쟁에서 승리함으로써 헤게모니적인 형태가 되었음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런 점에서 역사적 자본주의론은 근대 국가 및 국민 공동체의 형성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이론적 틀이라고 할 수 있다.
2) 이데올로기론으로서의 국민 형태 개념
하지만 국민 국가의 형성 및 재생산 과정을 이해하는 데서 역사적 자본주의론의 기여는 거기까지다. “통합된 세계 시장의 틀 안에서 정의되는 국민 국가의 경제적ㆍ행정적 기능은 사회적 “형태” 또는 “구성체”로서의 국민에 대한 이해의 반쪽만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이 책, 47쪽) 왜 국민이 근대 국가의 헤게모니적인 형태가 되었는지, 다시 말해 근대 국가가 왜 단지 국민 국가가 아니라 국민 사회 국가인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자본주의론이 아니라 (특히 알튀세르에서 유래하는, 하지만 본질적인 정정이 필요한) 이데올로기론이 필수적이다.
(2-1) 상상적 공동체로서의 국민
알튀세르에서 유래하는 이데올로기론의 강점은 무엇보다 상상과 현실을 조야하게 대립시키는 관점(알튀세르 자신이 “실증주의적” 관점이라고 부른)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다수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자생적으로 사로잡혀 있는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토대 내지 경제만이 실재적이고 이데올로기는 허위 의식 내지 왜곡된 표상, 심지어 가상 및 환상이다(알튀세르나 발리바르가 사용하는 “l'imaginaire” 개념을 “가상적인 것” 내지 “가상”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따라서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관점과 단절하려는 그들의 입장을 오히려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이렇게 되면 민족주의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민족 내지 국민 자체도 순전히 대중들의 착각 내지 왜곡된 표상(계급적 관점의 부족에서 생겨나는)의 산물로 이해된다. 그러니 민족주의나 민족 내지 국민과 관련된 문제들은 진짜 문제가 아니라 가짜 문제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될 수밖에 없다.
반면 발리바르는 상상계의 실재성, 물질성을 강조하는 알튀세르의 관점(이는 무엇보다 스피노자 철학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진태원, 「스피노자와 알튀세르에서 이데올로기의 문제: 상상계라는 쟁점」, 근대철학 3권 1호, 2008 참조)에 충실하게 국민 내지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사회적 공동체가 상상적 공동체라고 규정한다. “제도들의 기능 작용을 통해 재생산되는 모든 사회적 공동체는 상상적이다. 다시 말해 이 공동체들은 개인적 실존을 집합적 이야기의 짜임 속에 투사하는 것에, 공통의 이름을 인정하는 것에, 기억도 할 수 없는 과거의 흔적으로 체험되는 전통들(이러한 전통들이 근래의 상황 속에서 제작되고 주입된 경우에도)에 의거한다. 하지만 이것은 결국 일정한 조건들 속에서는 오직 상상적 공동체들만이 현실적 공동체들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Race, nation, classe: Les identités ambiguës, La Découverte, 1988, p. 126; 「국민 형태」, 117-118쪽―번역은 다소 수정) 사실 모든 공동체는 어떤 공동의 동일성 내지 정체성에 대한 결속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이러한 공동의 동일성을 그 성원들이 자신의 동일성으로 내면화(또는 상상화)함으로써 재생산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공동체의 현실적 기반은 바로 상상계의 효력 및 실재성에 있다는 것이 납득될 수 있다.
(2-2) 상상적인 것으로서 인민의 생산과 재생산
그렇다면 상상적 공동체로서 국민 공동체의 생산 및 재생산의 핵심 요소는 무엇일까? 발리바르는 그것을 상상적인 것으로서 인민의 생산과 재생산에서 찾는다. 이것은 인민이 자신들을 국민으로서 (재)인지하고 인민을 구성하는 각각의 개인들이 바로 이러한 국민에 대한 소속을 통해 자신들의 개인적 동일성을 형성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이것은 인민의 생산과 재생산이 상호 연관되어 있지만 서로 구별되는 두 가지 계기를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우선 집합적인 “주체”로서, 곧 국민으로서 인민의 형성이다. 근대 정치의 기본 원리 중 하나는 인민을 정치 권력의 기원 내지 정당성의 토대로 간주한다는 점이다. 이른바 인민 주권이 바로 그것인데, 이러한 인민 주권은 근대 정치의 지배적인 제도적 틀로서의 국민 국가에서는 국민 주권으로서 나타난다. 곧 인민이 자신이 속한 국가를 바로 자신의 국가로서, 다른 나라들과 대립하는 나의/우리의 조국으로서 (재)인지하고, 그것과 동시에 이러저러한 사회적 집단의 차이 및 특히 적대적인 계급적 구별에 선행하는 동일한 집단으로서(그리고 이러한 동일한 집단에 한 성원으로 속한다는 점에서는 모두 평등한 개인들로서) 자신을 (재)인지하게 되는 것은 인민이 국민으로 또는 민족으로 자신을 “표상/재현/상연하는”(이것들은 “represent”라는 개념에 모두 함축된 의미들이다) 한에서다. 따라서 집합적인 주체로서의 인민 및 국민의 구성은 “정복, 인구 이주, “영토 확정”과 같은 행정적 실천 등을 기술하는 것”(같은 글, 119쪽)으로는 제대로 해명될 수 없다. 통일적인 정치적 주체로서의 인민/국민이 구성될 수 있기 위해서는 종별적인 이데올로기의 모델, 곧 민족주의나 애국주의가 필요하다.
근대 국민 국가의 유기적 이데올로기로서 민족주의는 단지 상상적인 민족의 동일성에 대한 믿음 및 외국인에 대한 배타적인 감정 등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민족주의가 단지 이러한 믿음과 감정 등에 불과하다면, 서구의 이른바 자유 민주주의가 확립된 “선진국” 사람들이나 우리나라의 일부 지식인들이 (이른바 “남쪽” 국가들 또는 “후진국들”에 특유한) 민족주의를 마치 질병이나 집단적 광기 등으로 폄훼하는 것이 수긍될 수 있다(작년에 벌어졌던 이른바 “디워 논란”을 보라). 그리고 그 경우 민족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은 서구식으로 합리적 개인주의를 도입하거나 사회적 차이 및 소수자들에 대한 존중을 확립하는 것 등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에서만이 아니라 지극히 자유주의적이고 서구 중심적이라는 점에서 민족주의에 관한 설명 및 대응 방식으로는 커다란 한계를 지닌다.
발리바르의 국민 형태 개념은 이론적 전제 및 민족주의 현상에 대한 이해 방식에서도 지극히 자유주의적인 이러한 관점과 무관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관점에 깔려 있는 고유한 서구 중심주의 내지 서구식 민족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의도를 포함하고 있다. 발리바르는 민족주의에 대한 통상적인 사고 방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민족주의를 집합적이고 개인적인 동일성을 형성하는 핵심 메커니즘의 효과로 파악한다. 다시 말해 국민 국가의 핵심 목표는 “다른 모든 동일성을 압도하는 “국민 동일성”을 구성하는 것이고, 국민적 소속이 다른 모든 소속과 일치하고 그것들을 통합하는 데까지 이르게 하는 일”이며, “정의상 민족주의는 이것과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이 책, 55쪽) 근대 국민 국가 내에서 각 개인들은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상정하는 것처럼) 국민에 대한 소속 이전에 자신의 독자적인 개인성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저러한 국민적 개인으로서 비로소 자신의 동일성, 개인성을 얻게 된다. 국가를 구성하는 각 집단들 및 개인들은 자신들을 이러저러한 집단의 구성원이자 이러저러한 개인들이라고 생각하기에 앞서 자신들이 모두 똑같은 국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곧 그들은 국민으로서의 노동자 계급이고 국민으로서의 자본가이고 국민으로서의 선생이고 학생이고 가정 주부이고 범죄자 등등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한에서 모든 국민 국가(프랑스나 미국 같은 “이민자 국가”를 포함하는)는 정의상 민족주의적이며, 또한 그 국민 국가의 성원들은 자신들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민족주의적이다.
그런데 여기서 독자들은 아마도 한 가지 의문을 품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왜 “국민주의”가 아니라 “민족주의”라고 말하는가? nationalism이 nation의 유기적인 이데올로기이고, nation을 “국민”으로 이해해야 한다면, 당연히 nationalism은 “국민주의”라고 옮겨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러한 반론은 일리가 있으며, 사실 어떤 경우 nationalism은 “국민주의”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가령 프랑스 국적을 가진 아프리카계 흑인 이주자가 프랑스 월드컵에서 열렬하게 프랑스 대표팀을 응원하면서 끝내 프랑스 대표팀이 우승을 차지하자 감격에 겨워 “토종” 프랑스 백인과 같이 어깨를 걸고 프랑스 대표팀 응원가를 목청 높이 부를 때, 그는 우리가 보통 쓰는 “민족주의”라기보다는 “국민주의”를 구현하는 것이다. 또한 미국에 유학간 한국인 유학생 부부 사이에 태어난 자녀가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자신을 한국인이 아니라 미국인이라고 생각하고, 한미 야구 대표팀 간에 야구 경기가 벌어질 때 열렬히 미국팀을 응원할 때 그 역시 “민족주의”라기보다는 “국민주의”를 드러내는 셈이다. 또한 발리바르가 이 책 4장에서 논의하듯이 프랑스의 사회학자인 도미니크 쉬나페가 종족적인 기원 및 소속과 무관한 시민들의 공동체로서 “국민nation”을 옹호하고 그러한 국민들 사이의 결속감의 표현으로서 “nationalisme”을 말할 때 그것은 “민족주의”가 아니라 “국민주의”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럼에도 이 책에서 대부분 “nationalisme”을 “민족주의”라고 옮긴 것은 그러한 국민 성원들 사이의 일체감, 동질성은 필연적으로 그러한 동질성의 기원 및 주체에 대한 보충적인 상상계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나라 같이 이른바 “단일 민족”,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단일 종족”의 경우에는 더욱 더 사실이다. 여기서 허구적 종족성(또는 의제적(擬制的) 종족성)ethnicité fictive이라는 발리바르의 또 다른 핵심 개념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개념은 국민이 오래된 역사적 기원을 갖고 있고 연속적인 진화 과정을 거쳐온 역사적 실체 또는 심지어 (유일한) 역사적 주체라는 민족주의에 고유한 상상계를 설명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다. 이 개념에서 우선 주의해야 할 점은 “상상적”이라는 개념과 마찬가지로 발리바르가 사용하는 “허구적”이라는 개념이 “가상적”이라거나 “가짜” 또는 단순히 “공상적”이라는 의미만을 뜻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제도적 효과라는 의미, 곧 제작”(「국민 형태」, 121쪽)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이런 점에서는 어려운 번역어이기는 하지만 “의제적 종족성” 내지 “의제적 종족체”라는 번역이 일리가 있다).
이런 의미로 이해된 허구적 종족성은 실존하는 어떤 국민이 오래된 종족적 기원을 지니고 있으며(가령 골족의 후손, 단군의 자손,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天照大神)의 후예 등), 그 국민은 동일한 기원을 공유하면서 오랫동안 세대를 거치면서 희노애락을 함께 해온 유구한 역사적 실체(또는 오히려 주체)로서의 민족으로 표상된다. 바로 이러한 허구적 종족성 때문에 국민 국가 내의 집단들 및 개인들은 자신들이 이러저러한 사회적 조건의 차이를 초월한 이해관계의 동일성을 지닌 같은 민족이라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표상이나 인식이 단순히 공상적이거나 가상적인 의식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교육 제도나 가족 제도 같은 사회적 제도를 통해 체계적으로 훈육되고 각종 의례나 절차, 관행 등을 통해 일상적인 삶 속에서 재생산된다(발리바르는 「국민 형태」에서는 특히 언어와 계보가 허구적 종족성을 산출하는 두 가지 지주라는 점을 보여준 바 있다).
따라서 nationalism은 특히 그것이 강력하면 강력할수록 필연적으로 이러한 허구적 종족성을 더 강하게 반영하기 마련이며, 허구적인 또는 상상적인 역사적 실체로서의 “민족”을 자신의 기초로 삼게 된다. 우리가 nationalism을 “민족주의”라고 옮긴 것은 이데올로기로서의 민족주의에는 이러한 허구적 종족성이 (다소간 강렬하게) 담겨 있다는 점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3) 국민 사회 국가의 위기
국민 형태 개념이 지닌 또 다른 의의는 근대 국가의 헤게모니적인 형태로서의 국민이 어떤 내적 모순에 의해 오늘날 위기에 빠지게 되었으며,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이다.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발리바르는 “배제는 국민 형태의 본질 자체다”(55쪽)라고 단도직입적으로 주장한다. 왜 배제가 국민 형태의 본질을 이룰까? 발리바르의 이러한 주장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그것은 “(전자본주의적 구성체에서는 알려지지 않았던) 이 전형적으로 근대적인 거대한 등식”(“Communisme et citoyenneté. Réflexions sur la politique d'émancipation à la fin du XXe siècle”, Actuel Marx, n. 40, 2006, p. 146), 곧 “시민권=국적nationalité”이라는 등식이 근대 국민 국가 및 좀더 정확히 말하면 국민 사회 국가의 본질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래에 나오는 “국민 사회 국가” 항목에서 좀더 상세히 설명하겠지만, 발리바르에게 근대 국민 국가는 본질적으로 국민 사회 국가의 경향을 지니고 있었으며, 19세기 말 이후 특히 20세기에 접어들어서는 이러한 경향이 현실화된다. 국민 사회 국가란, 한편으로 국민 국가가 내부의 사회적 적대와 갈등(특히 계급 투쟁)을 해결함으로써 자신을 재생산하기 위해서는 국민으로서의 시민들에게 개인적ㆍ정치적 권리 이외에 (국가마다 얼마간 정도 차이는 존재하지만) 다양한 종류의 사회적 권리(의무 교육, 가족 수당, 실업 보험 등)를 부여해야 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국민 국가는 동시에 사회 국가의 성격을 띠어야 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국가를 구성하는 각 집단들 및 개인들이 자신들을 이러저러한 집단의 구성원이자 이러저러한 개인들이라고 생각하기에 앞서 모두 똑같은 국민이라고 생각할 때 그 국가는 자신을 지속적으로 재생산할 수 있다. 따라서 국민이라는 것이 국가의 구성원의 자격이자 개인으로서의 동일성의 조건이 되기 때문에, 시민권이 국적을 가진 성원들에게만 부여되고 이러저러한 외국인들 및 이주자들에게는 그러한 시민권이 배제된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적인 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발리바르가 근대 국민 국가는 국민 사회 국가이며 그것의 핵심은 시민권=국적 등식이라고 말할 때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국민 국가는 이것과 모순되는 또 다른 본질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근대 국민 국가의 역사가 외연적이고 내포적인 두 가지 측면에서 보편주의가 확산되고 진전되어온 역사라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이것은 국민 국가가 프랑스 혁명을 비롯한 근대 시민 혁명의 이념적 토대인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곧 발리바르 자신의 해석을 따르면 인간과 시민의 동일성, 그리고 자유와 평등의 동일성 명제에 근거하여 형성되었다는 사실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근대 국민 국가의 본질을 이루는 시민권=국적의 등식은 이러한 외연적이고 내포적인 보편주의를 모순에 빠뜨렸으며(왜냐하면 권리 선언에서 모든 사람은 시민이며, 시민으로서의 모든 사람은 동등하게 자유롭다고 주장되었음에도, 국민 국가의 틀 속에서는 오직 국적을 가진 사람들만이 그러한 자유와 평등, 권리들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전개되고 유럽 연합 건설이 진행 중인 오늘날 이러한 모순은 훨씬 더 첨예한 형태로 전개되고 있다.
이에 따라 발리바르는 이 책의 첫 번째 장인 「국민적 인간」에서 「국민 형태: 역사와 이데올로기」에서 전개한 논의들을 전제하면서 새로운 논점들을 추가하고 있다. 그것은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및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전개 이후 유럽을 비롯한 세계 도처에서 종족 및 민족 갈등이 불길처럼 번져나갔으며, 완고한 민족주의ㆍ인종주의 이데올로기에 편승한 극우 세력 및 집권 세력들의 반(反)이민 정책이 민주주의적 유럽 건설을 가로막는 주요한 장애물(유럽적인 아파르트헤이트)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 이러한 민족주의의 확산 및 강화는 근대 국민 국가의 본질을 이루는 배제, 곧 시민권=국적이라는 등식에 기반을 두고 있다. “민족주의는 국민적 제도에 상응하는 유기적 이데올로기이며, 국민적 제도는 가시적이거나 비가시적인, 하지만 항상 법과 관행들 안에 물질화되어 있는 배제의 규칙, “경계들/국경들”의 정식화에 의거하고 있다. 따라서 배제는 국민 형태의 본질 자체다. 또는 배제가 아니라면, 이것은 같은 국민이냐 아니면 외국인이냐, [국민] 공동체에 속하느냐 속하지 않느냐에 따라 특정한 재화와 권리에 대해 불평등한 접근을 강제하는 것이다.”(이 책, 55-56쪽)
따라서 오늘날 유럽에서만이 아니라 세계 도처에서 전개되는 반동의 정치에 맞서기 위해서는 단지 사회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투쟁만이 아니라 이러한 배제와 차별에 대한 투쟁도 동시에 전개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발리바르는 심지어 오늘날 정치의 근본 쟁점은 국민의 소속과 해방의 목표들(곧 인권과 시민권) 중 어떤 것을 옹호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나로서는 오늘날 민주주의적이거나 자유주의적인 정치와 보수주의적이거나 반동적인 정치 사이의 경계선은 (유일하지 않다면) 본질적으로 종족 차별과 국민성/국적의 차이에 대한 태도 여부에, 국민의 소속과 해방의 목표들(인권과 시민권) 중 어느 것을 일차적인 것으로 간주하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심지어 세계경제에서 지배적인 국민들의 경우에도 자족적인 국민성은 존재하지 않게 된 세계에서, 배제와 차별에 맞선 투쟁의 정치들이 정의되고 작동되는 양상들은 점점 더 민주주의의 시금석을 이루게 된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국민 국가가 민족주의 없이 존재할 수 있다고 믿는, 또는 외국인의 수용 및 거부라는 문제에 관해 본다면, 그 “본성”상 또는 그 “예외성” 덕분에 개방적이고 관용적이며 “보편주의적”인 국민 전통이 존재하며, 반대로 역시 그 본성상 또는 그 역사적 특수성 때문에 불관용적이고 “특수주의적”인 국민 전통도 존재한다고 믿는 가상에 저항해야 한다. 이런 관념은 바로 민족주의적 편견에 불과하다. 같은 이유 때문에 나는 우리가 본질적인 특성들을 통해 “선하고” 진보적인 민족주의와 “악하고” 반동적인 민족주의를 구분할 수 있다는 관념 역시 거부한다. 문제의 핵심은 항상, 경제적 이익, 외교적‧군사적 균형 및 사회적 갈등과 더불어서만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와 더불어, 특히 우리의 고유한 이데올로기적 규정들의 장 안에서 정치를 실행하는 것의 어려움이다.”(57-58쪽)
따라서 국민 형태 개념이 지닌 이론적ㆍ실천적 의미는 오늘날 전개되는 반동의 정치의 이데올로기적 기초를 해명하고 그것에 맞서기 위한 지점들을 제공해준다는 점에서도 찾을 수 있다.
번역에 대하여
이런 관점에서 보면 “forme nation”이라는 개념을 “민족 형태”라고 번역하는 것은 사실은 발리바르의 이론적 단절 및 쇄신의 시도를 종래의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 함축된 오류로 환원시킬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우리말의 “민족”이라는 단어는 정확히 “자연적으로 주어져 있는” “nation의 초역사적 실존”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단군을 시조로 하는 수천년의 역사를 지닌 오랜 민족, 외세의 끊임없는 침입을 겪고 급기야 1910년에는 일제에게 강점당하는 비극을 겪은 뒤 1945년 감격적인 해방을 맞이했지만, 다시 5년 뒤에는 끔찍한 내전을 겪으면서 둘로 쪼개진, 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통일되어야 할 단일 혈통과 단일한 언어를 지닌 세계에서 보기 드문 단일 민족이라는 관점이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상상계를 설명하기 위해 도입한 개념에 다시 그러한 상상계를 반영하는 “민족”이라는 번역어를 제시하는 것은 발리바르의 핵심 논점을 오히려 모호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왜 “nationalisme”은 “국민주의”라고 하지 않고 “민족주의”라고 번역하는가? 사실 한두 군데에서는 이것을 “국민주의”라고 옮겼다. 그 이유는 발리바르가 여러 차례에 걸쳐 언급하는 프랑스 공화주의가 말하는 “nation”은 종족적인 기초가 아니라 정치적 계약(발리바르 자신도 인용하는 에른스트 르낭의 유명한 표현을 빌리자면 “매일매일의 국민투표”로서의 국민이라는 관념이 이를 잘 표현해준다)에 기반을 둔 정치 공동체를 뜻하며, 따라서 이들이 옹호하는 “nationalisme”은 통상적으로 이해되는 종족적 순수성, 혈통이나 영토의 고유성에 기반을 둔 “민족주의”보다는 “국민주의”로 옮기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다른 경우에는 “nationalisme”을 “민족주의”로 옮긴 것은 앞서 지적했듯이 내셔널리즘이 근대적인 “nation”의 또 다른 측면으로서의 종족적 기원 및 역사적 연속성에 대한 상상계, 곧 발리바르가 “허구적 종족성”이라고 부른 것을 표현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발리바르가 이 책에서 사용하는 “nationaité”라는 개념은 “시민권=국적” 등식에서 볼 수 있듯이 한편으로는 “국적”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개념은 (아직 국가를 형성하지 못한) 개별적인 민족 공동체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다음과 같은 구절이 대표적이다. “역사적 과정은 우연과 굴곡, 단절들의 영향을 받는 과정이며, 이것은 뚜렷하게 구분되는 두 가지 실재, 곧 한편으로는 세계 속에 실존하고 있고, 과거부터 실존해 왔으며 미래에도 실존하게 될 개별 민족체들nationaités과 다른 한편으로는 국민 형태(또는 민족체의 형태) 그 자체를 문제 삼는다. 나는 우선 이런 구분에 집중해 볼 생각인데, 내가 보기에 집합적 동일성의 감정이 낳는 혼란들과 투사들을 깨뜨리기 위해서는 이런 구분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국민들 또는 민족체들은 다소간 오랫동안 지속되는, 어쨌든 여러 세대(...) 동안 지속되는 제도들이다. 국민들 또는 민족체들은 감정, 집합적 기억, 이데올로기와 정치 구조, 행정, 경제적 이해관계 등에 따라 다소간 통합되며, 이 모든 요소는 자신들의 고유한 “역사성”을 갖고 있다. 내가 보기에 일반 규칙은, 역사적 국민들은 주어진 어떤 시기에 동일한 제도적 틀 안에서 인구를 통합하는 여러 가지 실존하는 가능성들 중 하나를 실행한다는 게 될 것 같다.”(이 책, 44쪽)
이 구절에서 발리바르는 얼핏 보기에는 nation과 nationaité를 등가어로 사용하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사실 양자 사이에는 얼마간의 차이가 있으며, 이는 프랑스어의 일반적인 용법에서도 나타난다. 프랑스어에서 nationaité는 보통 “국적”이라는 의미로 많이 쓰이지만, 특히 19세기에 유래한 용법에서는 “종족적ㆍ사회적ㆍ문화적 특성으로 결합된 집단들이 자신들을 nation으로 구성하려는 의지”를 가리키기도 한다. 곧 일정한 영토에 거주해왔고 같은 언어와 종족적ㆍ인종적 기원을 지니고 있지만 아직 별도의 국가를 구성하지 못하고 따라서 국민으로서 독립하지도 못한 집단, 그러나 계속 독립적인 국민으로서 존재하려고 하는 집단을 가리키는 명칭이 nationaité다. 가령 얼마 전에 분리 독립 운동을 벌였던 티베트족이나 이라크의 쿠르트족 등이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nationaité는 nation과 유사하지만,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아직 nation을 이루지 못한, 전(前)국민적인 민족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에서는 nationaité를 “국적”으로 옮기거나 “민족체”로 옮겼으며, 드물게 “민족성”으로 옮긴 곳도 있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덧붙이자면, 발리바르가 국민은 근대적 구성물이고 nation이 마치 저 오랜 옛날부터 연속적으로 전해 내려온 동일성을 지닌 역사적 실체인 양 생각하는 것은 허구적 종족성의 결과라고 말하는 것은 이제 국민의 시대, 국민 국가의 시대는 종말을 고했으며, 국민 국가를 넘어서는 새로운 정치체를 모색할 때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관국민적” 개념을 설명하면서 지적했듯이 발리바르는 자신의 관국민적 관점을 “초국민적” 관점 내지 “포스트 국민적” 관점(또는 이른바 세계 시민주의)과 분명하게 구별한다. 그것은 첫째, 세계가 여전히 국민 국가라는 기본적인 정치 공동체를 중심으로 분할되고 상호 연결되어 있는 상황에서 섣불리 포스트 국민적 정치나 세계 시민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북쪽의 이른바 선진국들에 고유한 민족주의의 다른 표현일뿐더러, 남쪽 국가들의 생존 및 발전에 불리한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민족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미명 아래 또는 우리는 이미 “민족주의 너머”에 도달해 있다는 사실을 내세우며 다른 나라들의 민족주의를 향해 비판을 제시하는 것은 십중팔구 민족주의의 또 다른 모습을 감추는 것에 불과하다.”(이 책, 42쪽)
둘째, 더 나아가 그러한 관점은 신자유주의적인 세계화의 정세에서 민주주의를 실질적으로 보호하고 강화하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문제는 국민 국가를 추상적으로 포기하거나 아니면 그것에 대한 대안을 역시 추상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 사회 국가의 역사를 내적으로 규정해왔던 모순이 무엇이고 그것을 어떻게 내재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지 모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국가 형태의 역사 또는 헌정 형태의 역사라는 관점을 채택할 경우에만 반동적인 민족주의나 추상적인 포스트 국민 국가론 내지 세계 시민주의에 빠지지 않고 각 나라나 각 지역에서 상이하게 전개되는 정세에 올바르게 대응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유럽 공동체가 현실적으로 구성되고 있는 유럽의 상황에서 초국민적 정치체의 성격 및 관국민적 시민권에 대해 논의하는 것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절박한 문제일지 몰라도 우리나라의 상황, 또는 동아시아의 정세에서 포스트 국민적 정치 내지 세계 시민 정치 운운하는 것은 자칫 추상적인 비정치,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반(反)정치를 강화하는 데 일조하기 십상이다. 이런 의미에서도 발리바르의 국민 사회 국가 개념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