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이건 서평이라기보다 소개글에 가깝다고 해야 하는데,
[시사인]에서 요청이 들어와서 지난 주에 출간된 {뉴레프트리뷰}에 대한 서평을 써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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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판 [뉴레프트리뷰]―사실, 사고, 사건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이른바 386세대 중 한 명인 필자에게 [뉴레프트리뷰]는 화려한 아우라가 휘감고 있는 눈부신 지적 권위의 상징이었다. 레이먼드 윌리엄스, 에릭 홉스봄, 프레드릭 제임슨 등과 같은 영미권의 마르크스주의자들만이 아니라 테오도르 아도르노, 루이 알튀세르, 위르겐 하버마스 같은 유럽의 저명한 사상가들의 글을 ‘원전으로’ 처음 접한 곳이 바로 이 잡지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2000년 이후 새출발을 선언하면서 좌파적 색채가 퇴색했다는 평가들도 있지만, 여전히 [뉴레프트리뷰]는 화려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훨씬 다채로워지고 풍부해졌다. 페리 앤더슨의 폭넓은 시야, 서브프라임 사태 같은 현재의 화급한 쟁점에 대한 로빈 블랙번의 깊이 있는 분석, 또 장밋빛 미래, 꿈의 도시로 각광받던 두바이의 허상을 적나라하게 들춰내는 마이크 데이비스의 뛰어난 통찰을 한꺼번에 읽을 수 있는 곳이 이 잡지 말고 또 어디 있겠는가?
또한 사회주의의 역사를 매체론으로 재조명하는 레지 드브레의 신선한 시각, 자본주의 사회의 미학적 형식의 모순들에 대한 테리 이글턴의 명민한 탐색, 칸트에서 리오타르에 이르는 미학적/감성적 전위 운동에 대한 자크 랑시에르의 탁월한 해석은 [뉴레프트리뷰]가 건조한 사회과학적 분석을 넘어 문화적ㆍ감성적 삶의 맥박에도 귀를 기울이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이것만이 아니다. 그동안 국민국가적인 틀 안에 갇혀 있던 사회정의의 문제를 범세계적인 시야에서 재구성하려는 낸시 프레이저의 야심찬 기획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아감벤에 이르는 생명정치 노선에 대한 맬컴 불의 간명한 지도 그리기는 이 학술지의 저변에 흐르는 철학적 질문의 깊이를 느낄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한국어판 창간호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알랭 바디우와 커식 선더 라한의 글이다. 사르코지의 프랑스 대통령 당선이 상징하는 역사적 의미를 공산주의 운동의 흐름 속에서 풀어내는 바디우의 글은 과연 대가다운 솜씨라고 할 만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신진 인류학자인 선더 라한의 글은 생명자본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창하면서 마르크스의 자본 분석을 21세기 생명공학의 영역으로 확장ㆍ쇄신하고 있다. 이 젊은 거장이 앞으로 어떤 행보를 보여줄지 자못 궁금하다.
낯 뜨거운 자화자찬이라고 힐난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필자는 이것이 ‘사실’의 범주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사실’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나 현재에 있는 일”을 의미한다. 따라서 18편의 글을 묶은 한국어판 [뉴레프트리뷰]가 출간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더욱이 그 글들이 한결같이 뚜렷한 개성과 높은 지적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과연 영어판 [뉴레프트리뷰]의 명성은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다.
문제는 ‘사실’은 ‘사고’일 수도 있고 ‘사건’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역시 국어사전에 따르면 ‘사고’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1. 뜻밖에 일어난 불행한 일. 2. 사람에게 해를 입혔거나 말썽을 일으킨 나쁜 짓.” 한국어판 [뉴레프트리뷰]의 출간은 혹시 사실은 사실이되, 사고로서의 사실인 것은 아닌가?
사실 그럴 만한 소지는 다분하다. 혹시 이 한국어판은 영어판 필자들의 화려한 면면을 내세워 그저 책이나 팔아먹으려는 어두운 거래의 소산이 아닐까? 아니면 국내 좌파 담론의 실종 내지 약화의 타개라는 그럴 듯한 구실을 내세워 스스로 사고하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그 책임을 회피하려는 교묘한 수단이 아닐까? 그것도 아니면 지적 권위주의 내지 심지어 지적 제국주의에 대한 무분별한 맹종이 아닐까? 사실 타리크 알리의 「한국어판 서문」 마지막 문장 “한국어판의 발행은 우리의 목소리가 극동에까지 이르렀음을 뜻하며, 이를 계기로 중국어판과 일본어판도 나오기를 기대해본다”에서 그들의 자신감을 넘어 오만함을 느끼는 독자들도 여럿 있을 것이다(‘극동’이라는 유럽중심적인 지정학적 범주 사용을 껄끄럽게 느끼는 이들은 더 많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또한 ‘사건’일 수도 있다. 사건은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거나 주목을 받을 만한 뜻밖의 일”이라고 한다. 한국어판 [뉴레프트리뷰]가 단순한 ‘사실’을 넘어, 위험한 ‘사고’의 함정을 피해, 하나의 ‘사건’으로 기록될 수 있을까?
그것을 판단하기에는 아직 너무 이르다. 한 가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굳이 독자적인 편집위원회를 꾸려서 우리의 상황에 꼭 필요하고 도움이 되는 글들을 따로 가리고 추린 다음, 여러 차례에 걸친 교열과 교정을 거쳐 책을 펴낸 것은, 한국어판이 영어판의 단순한 복제판에 그쳐서는 안된다는 출판사와 편집위원회의 공통의 의지의 표현이라는 점이다.
더 나아가, 결국 무위에 그치기는 했지만, 한국어판을 처음 기획할 때 다른 외국 학술지의 좋은 글들도 함께 수록하려 하거나 한국 필자들의 글을 실으려고 했던 것은, 이 책이 한국어판 ‘뉴레프트리뷰’가 되기보다는 ‘한국어판’ 뉴레프트리뷰가 되어야 하며, 그것이 이 책을 좀더 의미 있게 만들 수 있다는 기본 원칙의 발로였다.
그렇다면 한국어판 [뉴레프트리뷰]는 역설적인 운명을 타고난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한국어판은 일찍 소멸할수록 그만큼 더 좋은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내용이 좋다 한들 [뉴레프트리뷰]는 외국인, 그것도 주로 서구인들이 자신들의 관점에서,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펴낸 학술지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것을 그대로 우리말로 옮겨서 정기적으로 출간한다는 것은, 출판사와 편집위원회의 뜻이 아무리 갸륵하다 해도 역시 옹색한 형편을 면하기는 어렵다.
그러니 한국어판 [뉴레프트리뷰]가 기록해야 할 진정한 ‘사건’은 아마도 자신의 소멸이라는 사건일 것이다. 더는 존재의 이유가 없어질 때, 더는 출간의 필요성이 없게 될 때 한국어판은 자신의 소임을 끝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도 한국어판에 대한 꼼꼼하고 능동적인 독서는 필수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독자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 외국 학술지 한국어판의 출간이라는 평범한 사실을 사건화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독자들 자신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