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박의 대담 - 인도 캘커타에서 찍힌 소인 디알로고스총서 4
가야트리 스피박 지음, 새러 하라쉼 엮음, 이경순 옮김 / 갈무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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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이 좋고나쁘고를 떠나서 번역이 너무 실망스러움. 구입할 때 주의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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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8-11-19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번역 정말 나빴어요. 그런데 갈무리 책들은 대략 번역이 나쁘더라구요.

balmas 2008-11-19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딸기님이 보신 책들은 대체로 번역이 안좋았나보네요.-_-;; 저는 좋은 책들도 있었는데 ...
 
인간불평등기원론 / 사회계약론 동서문화사 월드북 10
장 자크 루소 지음, 최석기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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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사회계약론번역은서울대출판부판보다나음.용어사용이더낫기때문.값이싸다는점도장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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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식민주의 또는 트리컨티넨탈리즘
로버트 J. C. 영 지음, 김택현 옮김 / 박종철출판사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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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탈식민주의이론을역사적시각에서계보학적으로 재구성. 번역좋고내용좋고일독을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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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9월에 출간될 {철학사상} 제 29집에 수록될 글을 하나 올립니다. 이 글은 장-뤽 마리옹이라는 프랑스의 저명한 데카르트 연구자의 코기토 해석을 비판적으로 고찰한 글입니다. 아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장-뤽 마리옹은 국내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데카르트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이고 그 외에도 후설, 하이데거, 레비나스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과 가톨릭 신학 연구로 유명한 사람이죠. 성격이 아주 괴퍅하고 매우 보수적인 사람이지만, 현재 프랑스 철학계(특히 강단철학계)를 이끌어가는 사람 중 한 명이죠. 서양 근현대철학에서 주체 이론을 재구성하는 맥락에서 데카르트의 코기토 개념을 다시 읽어보려고 쓴(또 앞으로 쓰게 될) 글 중 하나입니다. 장-뤽 마리옹의 철학을 잘  모르는 분들에게는 꽤 까다로울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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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한 타자: 장-뤽 마리옹의 에고의 타자성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이 글은 프랑스의 저명한 데카르트 연구가 장-뤽 마리옹Jean-Luc Marion의 󰡔성찰󰡕 해석, 특히 에고의 타자성에 관한 테제를 비판적으로 고찰해 보려고 한다. 이를 위해 이 글에서는 특히 마리옹의 두 논문, 즉 「에고는 타인을 변질시키는가? 코기토의 고독과 다른 에고의 부재」(Marion 1991b)와 「에고의 근원적 타자성」(Marion 1996)을 중심적으로 다룰 것이다.[이 두 글은 각각 「코기토의 고독」과 「에고의 타자성」으로 약칭하고 인용의 경우 본문에 쪽수만 표시하겠다.] 이는 10년의 시차를 두고 있는 두 글(「코기토의 고독」은 원래 1986년에 발표되었다)이 주제상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을 뿐만 아니라[마리옹은 「에고의 타자성」 p. 6에서 “데카르트에 의해 확립된 에고는 유아론의 불모적인 압박 속에 머물러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하면서 각주 2)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에고는 타자를 변질시키는가?」에서 그렇다고 상정했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같은 문제를 제기한다.” 이는 이 두 논문이 서로 동일한 문제선상에 있으며, 또한 양자가 서로 상이한 결론을 내린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전자가 불가능하다고 판단을 내렸던 에고의 타자성에 대해 후자의 글은 「두 번째 성찰」에 대한 상세한 검토에 입각하여 긍정적인 답변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고의 타자성 테제에 대한 마리옹의 입장을 좀더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 두 논문을 차례로 검토하면서, 전자가 불가능한 것으로 주장했던 에고의 타자성이 어떤 근거에서 후자의 논문에서는 가능한 것으로 제시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렇게 마리옹의 논의를 따라가면서, 그가 핵심 논거로 삼고 있는 「두 번째 성찰」의 “ego sum, ego existo” 문장을 재해석함으로써 이 문장이 마리옹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거로 사용될 수 없다는 것, 또는 이 문장에 대한 마리옹의 해석은 데카르트 철학의 첨예한 경험과 제대로 부합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 이 글의 목표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데카르트의 코기토적 경험의 본성이 어떤 것인지 좀더 분명하게 드러나기를 희망한다.



I

「코기토의 고독」의 기본 목표는, 󰡔성찰󰡕에서 제시되는 초월론적 주관성의 원리가 에고에게 내재적인 타자성의 가능성을 제공해 주지 못하지만, 데카르트 철학의 다른 측면에는 타자성 내지 상호주관성의 가능성이 존재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마리옹은 이러한 가능성을 󰡔정념론󰡕에 나타나는 데카르트의 사랑에 대한 논의에서 찾는다.


「코기토의 고독」의 출발점은 데카르트의 에고, 자아에 대한 파스칼의 비판이다. “자아는 가증스러운 것이다. [...] 만약 내가 자아가 자기 자신을 모든 것의 중심으로 구성하기 때문에 자아를 증오한다면, 나는 항상 자아를 증오할 것이다.”(Pensées, § 597―「코기토의 고독」, 189) 마리옹에 따르면 여기서 파스칼의 비판 대상이 되는 자아의 이기주의 또는 자아중심주의egoisme는 도덕적 의미의 이기주의가 아니라, “초도덕적인 의미”(190)의 이기주의, 즉 절대적 이기주의이다. 절대적 이기주의란 이러저러한 경험적 영역에서 볼 수 있는 이기주의가 아니라, 모든 형태의 이기주의의 가능성의 조건을 이루는 것으로서, 이는 바로 데카르트의 에고, 코기토에서 출발한다. “만약 인간이 자신의 cogitatio를 통해 자신에게 끊임없이 되돌아오는 에고로서 자기 자신에 대해 확신한다면, 그는 가능한 모든 세계의 유일하고 불가피한 중심으로 자신을 고정시켜야 한다. [...] 요컨대 (사물을 사유하는 나 자신을) 사유하는 에고ego cogito(me cogitare rem)의 자기 지시적 설립은 단지 인식의 이론적 영역하고만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 타인에 대한, 그리고 타인에 의한 인정이라는 소위 실천적 영역―실은 전적으로 이론적인 것인―도 지배한다.”(191)


절대적 이기주의에 대한 파스칼의 비판이 이처럼 데카르트의 에고를 겨냥하고 있고, 또한 이러한 비판이 역사적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면, 다시 말해 근대성 일반에 대한 문제제기를 의미한다면[{데카르트 연구Questions cartésiennes} 1, 2권에서 마리옹의 관심은 단지 데카르트 철학에 대한 문헌학적, 고증적 주석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는 데카르트-(하이데거-)레비나스로 이어지는 노선 위에서, 근대성의 원천이자 또한 근대성 자체에 의해 왜곡되고 망각된 근대성의 이면으로서의 데카르트, 즉 탈근대성의 또 다른 가능성을 개시하는 데카르트의 면모를 부각시키는 것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사실 그의 궁극적인 관심사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코기토의 고독」이나 「에고의 타자성」은 이러한 기획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글들이다.], 무엇보다 긴요한 질문은 실천적 질문이다. 이는 특히 마리옹처럼 데카르트에서 단지 근대성의 원천만이 아니라 또한 탈근대성의 또 다른 입구를 발견하려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러하다. 왜냐하면 근대성의 지평을 형성하는 데카르트가 절대적 이기주의의 창시자라면, 근대성 내에서―왜냐하면 이것이 유일한 현실적 시간과 장소이기 때문에―근대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출구를 모색하는 일이야말로 긴급한 과제이며, 더욱이 데카르트에게서 절대적 이기주의와는 다른 가능성을 발견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더 긴급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장 긴요한 질문이 실천적 질문이라면, 이는 이론의 응용으로서의 실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데리다가 말하듯이 아포리아의 경험으로서 실천적 질문, 즉 더 이상 사방 어디에도 빠져나갈 구멍은 없다는 절박한 자각을 겪게 되자마자 제기되는 질문, 불가능성에 직면하여 제기되는 질문을 가리킨다(이 점에 관해서는 특히, Derrida 1996 참조). 따라서 마리옹이 출발점으로 삼는 실천적 질문은 아포리아적인 질문이며, “다른 주체”, “정신들 사이의 소통”, “주체성의 영역에서 의식들의 소통” 가능성에 대한 질문이다. “에고(코기토)만이유일하고 결정적으로 “확실하고 동요될 수 없는 최소의 것”을 보증할 때, [...] 다른 정신들이 일반적으로 인식될 수 있으며, 특수하게는 에고에게 획득될 수 있는가?”(192, 강조는 필자)[이하에서 별도의 언급이 없는 한, 강조나 꺾쇠 추가는 모두 필자 자신의 것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자. 왜 상호 주관성, “정신들 사이의 소통”, “주체성의 영역에서 의식들의 소통” 가능성에 대한 질문이 그토록 절박한 것인가? 「에고의 타자성」의 용어법대로 하자면, 데카르트의 에고에 대한 해석에서 “유아론”의 문제가 왜 그토록 중심적인 것인가? 이렇게 상호 주관성의 문제가 근원적인 쟁점이라면, 후설이나 하버마스식의 상호 주관성이야말로 진정한 탈근대성의 출구로 간주될 수 있는가? 도대체 데카르트의 에고의 한계는 유아론에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오히려 유아론 이전에 유아론을 가능하게 만드는, 또는 에고에서 유아론의 문제를 보게 만드는, 좀더 근원적인 어떤 봉쇄가 문제인가? “에고(코기토)만이유일하고 결정적으로 “확실하고 동요될 수 없는 최소의 것”을 보증할 때”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사실 이는 부정확한 주장이다. 근거들의 순서라는 관점에서 볼 때 어떤 의미에서도 코기토가 “유일하고 결정적으로 “확실하고 동요될 수 없는 최소의 것”을 보증”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진실한 신의 보증이 없는 한, 코기토적 확실성은 끊임없이 기만적인 악령의 위협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특히 Beyssade 1993 참조(이 문제는 뒤에서 좀더 자세히 다루겠다). 코기토가 ‘유일하고 결정적인 보증자’라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데카르트적인 체계의 바깥에 위치해야 한다. 즉 진실한 신의 보증을 주관성의 형이상학이 요구하는 하나의 허구적 장치로 간주할 수 있을 때에만 코기토는 유일하고 궁극적인 근거로 나타날 수 있다. 마리옹은 이처럼 근거들의 순서와 체계외적 관점을 교묘하게 뒤섞으면서 자신의 논변을 정당화하지만, 이는 정당화되기 어려운 태도다.] 이 질문들이 우리의 주도적인 질문인데, 우선은 에고 코기토에 대한 마리옹의 논의를 좀더 따라가 보자.


이처럼 데카르트의 에고(코기토)에서 상호 주관성, 즉 다른 정신들에 대한 인식이나 “정신들 사이의 소통”의 가능성에 대한 질문을 제기한 다음 마리옹은 󰡔성찰󰡕에서 이러한 가능성을 찾을 수 있는지 검토한다. “이러한 질문을 제기하고 이에 답변하기 위해 우리는 아주 간단한très simple 절차를 따를 것이다. 즉 에고(코기토)가 󰡔성찰󰡕의 근거들의 순서에 따라 다른 정신들을 허락하고 그것들과 마주치는지 탐구해 보는 것이다. 따라서 󰡔성찰󰡕 자신이 설정한 목표objectif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정의상 객관성/대상성objectivité을 넘어서는 목표, 즉 정신의 타자성, 타자의 정신을 따라 󰡔성찰󰡕을 다시 한 번 더 읽는 것이 문제가 될 것이다.”(193) 마리옹은 자신의 탐구가 “아주 간단한 절차”가 될 것이라고 말하지만, 바로 다음 문장에서 이것이 결코 간단하지 않음이 드러난다. 왜냐하면 “󰡔성찰󰡕 자신이 설정한 목표”, 즉 “󰡔성찰󰡕의 근거들의 순서”를 넘어서는 또 다른 목표를 추구하는 탐구가 과연 “아주 간단한 절차”인지 곧바로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어떤 의미에서 앞 문장에 나오는 데카르트 자신의 “근거들의 순서”라는 개념이 다음 문장에서는―‘목표’와 ‘객관성/대상성’의 어원적 유사성을 매개로 하여―아주 간단하게 “객관성/대상성”이라는 전혀 낯선 개념으로 변용될 수 있는지, 그리하여 표상 및 객관성의 정당성을 실추시킨 하이데거의 권위를 빌려와서, 아주 간단하게 아무런 설명도 없이 󰡔성찰󰡕에 대한 해석에서 데카르트 자신의 목표, 즉 근거들의 순서와 다른 목표를 당연한 듯이 설정할 수 있는지 의문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어떤 근거에서 마리옹은 “정신의 타자성, 타자의 정신”이 󰡔성찰󰡕의 또 다른 목표, 곧 데카르트 자신이 설정한 목표는 아니지만 그보다 더 데카르트의 정신에 부합하는, 일종의 무의식적이고 심층적인 목표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가? 여기에 대해 마리옹은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는다.[󰡔성찰󰡕의 텍스트 구조에 대한 문제는 거듭 논란이 되어 왔으며, 최근에는 60년대 이후 구조주의 언어학과 문학이론의 성과를 토대로 󰡔성찰󰡕의 텍스트를 이중적인 구조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진 바 있다. 예컨대 쥬도비치는 장-뤽 낭시의 선구적인 연구를 따라, 데카르트의 저작에서 허구 내지 우화fabula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데카르트의 저작에서 실제 논의되고 있는 철학적 내용과 문학적이거나 비철학적 허구 작용의 관계라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Nancy 1978; Judovitz 1988, p. 32 이하, p. 87 이하 참조. 또한 코스만은 토도로프나 주네트가 제시한 서사récit의 세 가지 차원, 즉 이야기histoire와 담론discours, 서사 작용narration의 구별에 입각하여 󰡔성찰󰡕에서 실제 성찰을 이끌어가고 있는 ‘나’의 성찰과정을 ‘이야기’로, 그리고 󰡔성찰󰡕 텍스트의 담론적 구조를 ‘담론’으로 분석하면서 서사자로서의 나와 󰡔성찰󰡕의 저자로서의 데카르트 사이의 관계라는 문제를 다룬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저자는 데카르트의 󰡔성찰󰡕이 전통적인 성찰 형식의 작품들을 따르면서 이를 내적으로 변형시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Kosman 1986. 이러한 연구들의 타당성과 설득력은 각각 개별적으로 평가되어야겠지만, 새로운 이론적 성과를 바탕으로 이전까지 제대로 해명되지 않았던 문제들을 제기하고 주목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만약 마리옹이 󰡔성찰󰡕의 근거들의 순서와는 다른 순서 내지 질서의 문제를 제기하려 한다면, 당연히 이러한 연구들을 검토해 보았어야 할 것이다.]


어쨌든 이렇게 자신의 탐구 목표를 설정한 마리옹은 󰡔성찰󰡕에는 다른 정신의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으며, “정신들 사이의 소통”의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이끌어 낸다. “따라서 결론은 근본적일 것이다. 󰡔성찰󰡕은 에고의 기능을 수행하는 다른 사람―적어도 다른 정신이라는 의미에서―에 대한 인식을 개념적으로 금지한다. 분명 적어도 암시적으로는 󰡔성찰󰡕은 다른 사람들 및 다른 영혼들이 사유에게 표상된 대상들로 제시된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이 경우 󰡔성찰󰡕은 사유를 실행하는 유일한seul 에고의 독특한unique 특권을 승인한다.”(205) 그러나 이러한 결론에는 하나의 예외가 존재하는데, 그것은 나 자신의 관념을 구성하는 세 요소 중 마지막 요소인 신의 관념이다. 유한한 실체인 에고의 세력권에서 독립해 있는 무한한 신의 관념은 탁월한 타자성을 나타낸다. “그렇지만 근거들의 순서가 적어도 한 번은 타자성을 그 자체로 인정해야 한다고 반박할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 신 존재 증명은 어떤 타자에, 심지어는 탁월한 타자에 도달하며, 이것은 그것이 에고의 창조자로, 에고와 다를 뿐만 아니라 에고에 선행하는 것으로 자신을 알려주는 만큼 더욱 더 에고로 환원될 수 없는 자신의 독립성을 표시한다.”(205)


그러나 마리옹은 다시 이러한 신적인 타자성이 “에고에 의한 타자 그 자체의 인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첫째, 타자성에는 근본적인 분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신적인 타자성은 하나의 조건 하에서만 타자성 일반에 대한 인정을 소묘할 수 있게 해준다. 즉 데카르트가 유한한 정신들의 처지를 신적인 권위 위에서 사유한다는 조건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문제설정은 결코 중첩되지 않을 뿐 아니라, 데카르트는 적어도 한 번은 전자를 후자에 대립시킨다. 즉 에고가 부모의 타자성을 인정하든가(출생), 아니면 그가 신의 타자성을 인정하든가이다(창조). 타자성은 유한하고 경험적으로 획득될 수 있는 타자이거나 아니면 무한하고 초월론적으로 격리되어 있는 (전적인) 타자 중에서 결정되어야 한다. 타자성은 전자와 후자에 무차별적으로 확장될 수 없다. 데카르트의 어떤 텍스트도 신적인 타자성이 유한한 타자성을 가능하게 해주며, 심지어 그에 대한 인정을 요구한다고 가정하게 해주지 않는다. 유한한 타자는 타자성의 관계 아래에서 일의적으로도, 심지어는 유비적으로도 신과 합치하지 않는다.”(206) 무한과 유한 사이의 중의적인équivoque 분할, 간극을 데카르트 철학 해석의 기본 원칙으로 간주하는 마리옹(Marion 1991a)은 타자성의 문제에서도 무한한 신적 타자성과 유한한 인간적 타자성 사이에는 근본적인 분할, 간극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인용하는 「세 번째 성찰」에 따르면 출생의 원인으로서 부모라는 경험적 타자의 문제는 사유하는 에고의 유래, 에고의 존재 근거라는 문제와 혼동되어서는 안 되며, 이 둘 사이에는 어떠한 의미 있는 이론적 연관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데카르트는 󰡔성찰󰡕에서 신적 타자성을 다른 타자를 사유하기 위한 근거로 삼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이유는 이러한 신적 타자성이 초월론적 지평을 개방한다는 사실 자체 때문에 신적 타자성은 타자에 대한 가능성을 허락할 수 없다는 점이다. “에고의 탁월한 타자로서 신에 대한 인정이 이미 타인과의 마주침을 성취한다는 것은 논증되어야 할 사실로 남아 있다. [...] 무한한 관념으로서 신은 유한자의 관념들 중 하나를 이룰 수 없으며, 나 자신의 관념 [...] 중 일부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각각의 유한한 존재자, 따라서 에고의 초월론적 전제로 나타난다. 따라서 무한자는 근원적으로 에고를 규정하며, [...] 신적 타자성은 초월론적 지평을 개방한다. 그는 더 이상 진정한 하나의 타자un autre vraiment tel, “나와 유사한 인간”(󰡔성찰󰡕, AT, VII, 43, 3)으로 개방되지 않는다.[마리옹은 󰡔성찰󰡕을 해석하면서 줄곧 자신의 독자적인 해석과 번역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성찰󰡕 국역본(Descartes 1996)을 참조하되, 번역은 마리옹 자신의 번역을 따랐다. 데카르트 저작은 관례에 따라 AT라는 약어 아래 권수는 로마자로, 쪽수와 줄수는 각각 아라비아 숫자로 표시한다.] 자아에 대한 또 하나의 타자이자 다른 에고로서 유한하고 사유하는 것인 어떤 타자, 자아와 다른 어떤 타자의 타자성은 항상 결핍되어 있다. 따라서 타자는 잠정적으로 결핍된 것이 아니며, 처음부터 에고가 그 자신에 의해서만 정의되기 때문에 결핍된 채 남아 있다.”(206-207)


이 두 개의 논거는 「코기토의 고독」에서 마리옹의 목표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에게 상호주관성을 가능하게 해주는 타자는 하나의 유한한 자아로서 에고의 인식 대상으로 환원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아로부터 절대적으로 독립해 있는 무한자도 아닌, 사유하는 유한자로서의 또 하나의 다른 에고다. 이렇게 마리옹 주장의 진의가 해명되면 다시 이런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왜 “또 하나의 다른 에고”의 문제가 데카르트 철학에서, 그것도 󰡔성찰󰡕과 같은 텍스트에서 중요한 문제로 제기되어야 하는가? 어떤 의미에서 이 문제가 데카르트 자신이 설정한 󰡔성찰󰡕의 목표보다 더 중요한, 그것을 “넘어서는” 목표로 제시될 수 있는가? 마리옹이 제시하는 다른 에고가 하나의 다른 에고, 즉 이미 수적이고 양적인 규정에 따라 구별된 에고이고 따라서 ‘제일 철학’보다는 경험적이고 응용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면, 어떤 근거에서 그는 󰡔성찰󰡕의 제목 속에 “분리된 지성들”, 또는 다른 정신들이 빠져 있다는 사실에 의문을 제기하고 심지어 이를 “역설”(194)이라고 부르면서 데카르트 제일 철학의 권리 설정의 타당성 여부를 문제 삼을 수 있는가? 마리옹의 목표가 󰡔성찰󰡕에서 상호 주관성의 가능성을 검토해 보는 것이라면, 이런 질문들은 당연히 제기되고 또 적절한 답변이 제시되었어야 할 질문들이다. 하지만 그는 이런 질문들을 제기하지 않은 채, 상호 주관성의 문제, 그것도 이미 경험적 영역에 속하는 상호 주관성의 문제가 󰡔성찰󰡕 같은 제일 철학 저작에서 다루어져야 한다고 강변하고 있을 뿐이다.


논문 마지막에서 마리옹은 자신이 이 글에서 목표로 삼은 것이 데카르트 도덕론의 문제였다고 주장한다. “이 가능한 두 가지 논변이 가리키는 것은, 데카르트의 도덕론은 그 본질적인 일부에서는 여전히 이해되어야 할 것으로 남아 있다는 점이다.”(219) 이는 다소 허탈한 결론이다. 왜냐하면 결국 이 논문의 목표가 데카르트의 도덕론이라면, 왜 제일 철학의 권리 영역 속에서 경험적인 상호 주관성의 문제가 제기되어야 한다고 강변하면서, 󰡔성찰󰡕에서 이것이 생략된 것을 “역설”이라고 부르는지 납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이 논문의 4절까지의 내용이 목표로 삼은 것이 무엇인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II

이처럼 「코기토의 고독」에서 타자성에 대한 문제제기가 실망스럽게 종결된지 10년 뒤 마리옹은 「에고의 타자성」에서 “다시 한 번 동일한 문제”, 즉 “데카르트에 의해 확립된 에고는 유아론의 불모적인 압박 속에 머물러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그리고 이번에는 「두 번째 성찰」에 대한 매우 세심한 독서를 통해, 󰡔방법서설󰡕이나 󰡔철학원리󰡕의 ‘cogito ergo sum’, 또는 ‘Je pense donc je suis’와는 달리 「두 번째 성찰」에 나오는 ‘ego sum, ego existo’라는 문장[이 문장은 국역본에서는 “나는 있다, 나는 현존한다”로 번역되어 있다. Descartes 1996, 43쪽. 하지만 마리옹 자신이 라틴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데다가, 독자적인 번역을 위해서는 상당히 세심한 분석과 논증이 요구되기 때문에, 본문에서는 원문을 그대로 인용하겠다.]이 에고의 근원적 타자성을 함축한다고 주장한다. 10년 사이에 동일한 텍스트에 대한 분석에서 정반대의 결론이 제시되는 만큼, 이는 아주 주목할 만한 주장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정말 에고는 근원적 타자성을 함축하는가? 또는 ‘ego sum, ego existo’ 문장에 대한 분석을 통해 에고의 근원적 타자성이 도출될 수 있는가? 도대체 에고의 근원적 타자성이란 무엇인가? 데카르트 철학에서, 즉 탈근대성의 한 가능성으로서 데카르트 철학에서 그것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이것이 마리옹의 「에고의 타자성」 논문을 검토하면서 우리가 제기해 보려는 질문들이다.


「에고의 타자성」에서 마리옹은 자신의 관심이 근본적으로 탈근대성의 문제에 있음을 명시적으로 밝힌다. 즉 마리옹은 탈형이상학적이고 탈근대적인 조류 속에서 주체에 대한 문제는 항상 ““나” 그 자체가 아니라 이 “나”를 말하는 것의 지위”에 대해 제기된다고 주장한다. “근본적으로 “나”라는 것은 그것이 어떤 토대[속]에서 [자신을] 정립한다고, 또는 그것을 획득한다고 주장할 때에만 질문을 받을 만하게 된다.”(4) 그런데 마리옹에 따르면 이러한 자기 정초적 나는 두 가지 아포리아, 즉 분열scission과 폐쇄clôture에 직면하게 된다. 첫 번째 분열의 아포리아는 “나”라는 것이 다른 모든 것에 선행하며 다른 것들을 가능하게 해주는 초월론적 기능을 수행한다는 사실에서 직접 유래한다. 왜냐하면 “나”는 그것이 이러한 초월론적 기능을 수행한다는 사실 자체에 의해 모든 가능한 대상의 영역, 따라서 경험의 영역으로부터 분리되는 반면에, 그것의 경험적 담지자로서 가시적이고 개체화된 “경험적 나”는 여러 대상들 중 하나로 설정되며, 이에 따라 주체가 초월론적 기능을 행사하는 순간부터 모든 인간 주체는 초월론적 나je와 경험적 나 또는 자아moi의 분열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 폐쇄의 아포리아는 에고의 이러한 내적 분열에서 유래한다. 왜냐하면 “경험에 복종하지 않기 때문에 경험을 가능하게 해주는 제일 원리의 성격은 에고를 절대적인 현상학적 독특성, 즉 그 자신은 경험될 가능성이 없는, 경험의 가능성의 조건이라는 독특성으로 밀어 넣기”(5)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허한 자족성”에 대한 해결책은 “이것과 모든 가능한 현상 사이의 연속성이라는”(같은 곳) 것으로 제시된다. 이렇게 되면 이제 에고는 “자신이 생산한 대상만을 인식하기 때문에, 어떠한 다른 에고 자체에도 이르지 못하고, 오직 그것이 대상화/객관화하는 타자화된altéré 에고, 단순한 다른 “자아”에 도달할 수 있을 뿐이다. 타자를 다른 대상으로 변형시킴으로써 에고는 유아론의 아포리아 속에서 창문도 없이 자기 자신에게로 폐쇄된다.”(6)


마리옹의 이 두 가지 규정은 그의 문제의식이 「코기토의 고독」보다 훨씬 깊어졌음을 잘 보여준다. 앞에서 우리가 본 것처럼 「코기토의 고독」에서 마리옹의 문제제기는 실은 형이상학적인 것 내지 제일 철학적인 것과 실천적인 것 내지 응용적인 것을 정확히 구분하지 않은 채 실천적인 도덕론에 대한 문제제기를 위해 형이상학적인 문제를 남용하고 왜곡하는 부정확성을 드러내는 데 비해, 여기서는 제일 철학의 영역에서 주체성의 형이상학적 규정 자체를 문제 삼으면서 타자성의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두 가지 규정에는, 「코기토의 고독」에서부터 지속되고 어쩌면 마리옹의 입장 자체에서 유래하는 근원적인 문제점이 존재한다. 즉 이 두 가지 규정에서, 푸코의 󰡔말과 사물󰡕의 분석(및 무의식의 주체에 대한 라캉의 분석)에 따르는 첫 번째 규정과, 후설적인 상호 주관성의 관점에 입각한 두 번째 규정이 내적인 갈등 없이 상호 연결될 수 있는지, 또는 마리옹 자신의 표현대로 하면 “에고의 자기 자신과의 이러한 내적 분열은 역설적으로 하나의 폐쇄를 동반한다”(5쪽)고 볼 수 있는지의 문제가 제기된다. 왜냐하면 첫 번째 규정이 초월론적 에고와 경험적 자아 사이의 분열을 문제 삼는데 비해, 후자는 이러한 분열 자체가 에고의 폐쇄를 의미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첫 번째 규정은 에고가 초월론적 에고라면, 그 에고는 정의상 또 다른 초월론적 에고를 허용할 수 없으며, 따라서 초월론적 에고에 대해 내재적으로 제기될 수 있는 문제는 에고가 초월론적 기능을 담당하게 됨으로써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에고의 내적 분열의 문제라는 것을 의미한다. 더욱이 이 규정에 따르면 초월론적 주체의 설정 자체는, 그 이전의 존재론적 기원 내지 원초적 실정성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반면 두 번째 규정은 초월론적 에고의 문제설정에 내재적으로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초월론적 에고의 설정 자체가 하나의 유아론이라고, 즉 어떤 하나의 에고가 초월론적 기능을 떠맡는 것은 부당하며, 이는 다른 에고 내지 다른 존재자들에 대한 억압이고 폭력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하나의 에고’라는 규정에서 이미 드러나듯이, 이러한 두 번째 규정은 첫 번째 규정의 관점에서 볼 때는 처음부터 초월론적 문제설정을 인정하지 않은 가운데 외재적인 관점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어떤 에고가 초월론적 에고라면, 그 에고의 바깥에 실정적인positive 의미에서 또 다른 에고가 존재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자기모순이다. 초월론적 에고의 바깥은 무의미한 미지의 영역이든가 아니면 다른 에고는 항상 이미 경험화되고 개체화된 에고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리옹은 에고의 폐쇄를 “어떠한 다른 에고 자체에도 이르지 못하고, 오직 그것이 대상화/객관화하는 타자화된 에고, 단순한 다른 “자아”에 도달”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이렇게 해서 에고의 폐쇄라는 규정 내부에다가 첫 번째 규정에서 유래하는 (초월론적) 에고와 (경험적인) 타자화된 에고=다른 자아 사이의 차이를 슬쩍 추가하고 있지만, 이것이 두 가지 규정 사이의 근원적인 관점의 차이를 가릴 수는 없다. 이러한 차이 내지 갈등을 무시한다는 점에 「에고의 타자성」의 근본적인 문제점이 존재한다.


어쨌든 이 두 가지 규정에 따라 마리옹이 제기하는 문제는 다음과 같다. 그는 첫 번째 규정을 통해 “칸트와 후설에 이르기까지 명시적으로 군림하고 있는 이러한 분열은 이미 데카르트적 에고에도 영향을 미치는가? 이미 그 현상학적 가시성과 원리로서의 우월성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가?”(6)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푸코 식의 첫 번째 규정이 칸트 이후의 현상학적 초월론에는 타당하지만, 데카르트적인 에고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 마리옹의 관점인 셈이다. 그리고 마리옹은 두 번째 규정을 통해 “데카르트에 의해 확립된 에고는 유아론의 불모적인 압박 속에 머물러 있는가?”(같은 곳)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이 질문은, 데카르트적인 에고에서, 분열만이 아니라 폐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근원적인 타자성의 가능성을 찾는 것이 마리옹의 목표임을 잘 보여준다.


이렇게 해서 마리옹은 󰡔성찰󰡕을 분석하기 위한 기반을 마련한다. 그러나 한 가지 더 남아 있는 과제는 데카르트를 ‘고전’으로 만들어 온, 따라서 역설적으로 데카르트를 근대성의 지평 내로 가두어 온, 데카르트적 에고에 대한 고전적인 ‘형이상학적’ 해석들을 비판하고 이와는 다른 해석의 가능성이 존재함을 보여주는 일이다. 이를 위해 마리옹은 분석 대상의 구분이라는 전략을 채택한다. 마리옹이 보기에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따르는 고전적인 형이상학적 해석의 문제점은 그들이 ‘cogito ergo sum’이나 ‘ego cogito, ego sum’이라는 정식에 집중할 뿐, 󰡔성찰󰡕에 나오는 ‘ego sum, ego existo’라는 정식은 무시한다는 점에 있다.[이는 사실은 마리옹에 앞서 발리바르가 제기한 문제다. Balibar 1992 참조.] 이것은 그들이 ego와 sum 사이의 논리적인 동일성, 따라서 동일률을 데카르트적인 에고의 핵심 전제이자 원리로 간주해 왔음을 뜻한다. 마리옹은 이러한 해석이 스피노자에서부터 칸트, 헤겔을 거쳐, 심지어는 니체나 하이데거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어 왔다고 주장한다. 더욱이 이는 고전 철학자들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게루Martial Gueroult나 힌티카Jakko Hintikka 또는 해리 프랑크푸르트Harry G. Frankfurt 같은 탁월한 데카르트 주석가들에게도 해당하는 것이어서, 후자의 두 사람은 코기토 해석에서 수행perfomance의 중요성을 지적하고 이것의 의미를 밝히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항상 ego에서 sum으로 이행하는 것이 문제”(16)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말 그런 것인가? “우리는 분명 ego cogito, ergo sum이라는 정식이 이러한 견지에서 해석될 수 있으며, 심지어 그래야 한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 단지 우리는 이 정식[...]이 코기토라는 데카르트적 개념[의 의미]을 소진시키는지, 요컨대 고전적인 해석만이 유일하게 수용 가능한 것인지 묻는 것뿐이다.”(16)


그렇다면 ‘ego sum, ego existo’라는 새로운 정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마리옹은 두 가지를 지적한다. 하나는 이 정식의 요점은 “추론에서 수행문performatif으로의 이행”(18)이라는 점이다. 즉 “나는 존재한다고 말하는 한에서 나는 확실히 존재하는데, 왜냐하면 사유는 언표 속에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바깥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사유가 언표를 성취하는 한에서 사유는 언표에 선행한다. 사유는 직접 언표 속에서 말해지지 않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언표를 말하는 것이 바로 사유이기 때문이다. 사유는 정확히 바로 그것이 언표를 검증한다/진리화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언표에 부재한다. [...] 오직 「두 번째 성찰」에 나오는 실행중인 언표만이 자신이 말하는 바를 실행할 뿐이다.”(같은 곳)


두 번째는 왜 데카르트가 1641년에, 그것도 「두 번째 성찰」에서만 ego sum, ego existo라는 정식을 채택했는가 하는 점이다. 이것은 단순히 부정확한 문학적 변형물일 뿐인가, 아니면 본질적으로 상이한 논변의 출현인가? 마리옹의 논점은 이 새로운 정식은 ego cogito, ergo sum으로는 해명될 수 없는 새로운 테제, 즉 에고의 근원적 타자성을 표현해 준다는 점이다. “오히려 본질적으로 상이한 논변의 돌출이 문제 아닌가? 그리고 고전적인 해석이 유아론에 귀착되기 때문에, 우리는 1641년의 정식이 에고의 모든 유아론을 넘어선다는 점을 통찰할 수 있지 않을까?”(19) 그가 제기하는 논점이 이렇다면,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두 번째 성찰」의 정식에 대한 마리옹의 해석의 타당성을 검토해보는 것이다. 쟁점은 이 정식이 과연 에고의 타자성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는가에 있다. 그리고 이는 결국 우리가 처음부터 제기해 온 문제의 핵심에 닿아 있다. 마리옹이 제기하는 에고의 타자성은 과연 탈근대성의 문턱에서 데카르트 철학이 지닌 또 다른 가능성을 드러내는가? 아니면 오히려 그것의 진정한 가능성을 오도하는 것인가?


III

우선 마리옹의 텍스트 분석을 따라가 보자. 그는 「두 번째 성찰」, AT판 7권 24쪽 19번째 줄부터 25쪽 13번째 줄까지 불과 반쪽 정도밖에 안되는 원문의 내용을 4단계로 나누어 치밀하게 분석한다. 마리옹의 전략은, 그의 구분법에 따르면 네 번째 단계, 즉 25쪽 12번째 줄에 나오는 “ego sum, ego existo” 문장의 의미를 해명하기 위해 그 이전의 논변의 전개과정을 차례로 검토하는 것이다.


마리옹은 AT판 7권 24쪽 19번째 줄에서 26번째 줄에 이르는 첫 번째 단계에서 지금까지의 결론, 즉 내가 보는 모든 것이 거짓이며, 아무 것도 확실치 않다는 것에 대한 반론이 시도되고 있다고 평가한다. 여기서 출발점은 절대 의심할 수 없는 “다른 어떤 것diversum”이 존재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이다. 이미 24쪽 16-17번째 줄에서 물체와 형태, 연장과 운동 및 장소가 키메라[...]라고 단언되었으므로, 이 “diversum”은 이와는 다른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마리옹은 diversum에서 중의적 의미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즉 diversum은 자체 내에 어떤 특정한 규정을 갖지 않기 때문에 비인격적 사물로서의 타자, 곧 autre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타인, 곧 autrui를 의미할 수도 있다. “단지 어떤 타자가 문제일 뿐만 아니라, 좀더 근원적으로는 어떤 타인이 문제가 된다.”(21) 여기서 마리옹이 말하는 타인은 물론 경험적이거나 존재적ontisch인 인격체가 아니라, 초월론적이거나 존재론적인ontologisch 존재자를 가리킨다. diversum이 지닌 이러한 중의성이 「두 번째 성찰」을 해석하는 마리옹의 첫 번째 교두보다.
그 다음 그는 이를 「두 번째 성찰」의 바로 다음 문장과 연결시킨다.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내 속에 집어넣는 어떤 신aliquis Deus이, 내가 그를 무엇이라 부르든 간에, 존재하지 않는가?” 마리옹은 여기서 타자성의 첫 번째 흔적을 발견한다.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첫 번째 특이한 결과가 도출된다. 즉 회의를 극복하기 위한 첫 번째 시도에서부터 타인이 가설의 자격으로, 에고 이전에avant 생성되는 것이다.”(21―강조는 마리옹) 다시 말하면 지금까지 벗어날 길이 없는 것으로 보였던 회의를 극복하기 위한 단초는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내 속에 집어넣는”, 따라서 나의 회의가 실제의 현실 그 자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있게 해주는 “어떤 신”, 따라서 타인의 존재가능성에서 발견된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어떤 신은 그가 나의 회의, 나의 생각들을 “집어넣는immittit”―마리옹은 이를 “발송하는envoie”으로 번역하고 있다. 하이데거나 데리다를 염두에 둔 것일까?―자이기 때문에, 만약 그가 존재한다는 것이 인정된다면, 그것이 입증될 수 있다면, 그는 바로 나 이전에 존재하는, 즉 시간적으로만이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권리상으로 나에 우선하여 존재하는 어떤 자이다. 그렇다면 회의와 확실성, 거짓과 명증의 문제는 이 어떤 신에게 전적으로 달려 있는 셈이 된다. 어쨌든 마리옹은 이러한 어떤 신이 위에서 제기된 diversum의 의미를 규정하고 있다고 간주한다. 즉 diversum은 본질적으로 타인일 뿐만 아니라, 에고의 대화자interlocuteur인 어떤 신이다. “신은 [...] 곧바로 에고의 대화자로 인정된다.”(22) 따라서 “회의는 추상적이고 한층 심해지는 [...] 어떤 사유의 유아론 속에서 전개되기는커녕, 에고와 비규정된 타인 사이의 대화의 공간 속에서 전개된다.”(22)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마리옹은 “어떤 신”의 가정에서부터 곧바로 타인의 존재, 더욱이 에고의 대화자로서의 타인을 이끌어내지만, 원문의 형식은 의문문으로 되어 있고 맥락상의 의미는 가설적 추정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는 데카르트가 어떤 신이 정말 존재한다고, 또는 존재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는 증거가 될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리고 실제로 다음 문장에서 데카르트는 곧바로 이러한 신의 가정이 나 자신이 꾸며낸 것일 수 있다고 반박하지 않는가? “그러나 아마도 나 자신이 이것의 작자일 수도 있는데, 왜 내가 이렇게 생각해야 하는가Quare vero hoc putem, cum forsan ipsemet illarum author esse possim?”(AT VII, 24, 23-24) 데카르트에 따르면 이렇게 생각하지 말아야 할 필연적인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또한 아직은 이렇게 생각해야 할 어떠한 필연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마리옹도 곧바로 이를 인정한다. “분명히 추론은 곧바로 역전된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원문의 증거에 굴복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대체[어떤 신에서 나 자신으로의]는 대화의 공간을 전혀 변화시키지 않는데, 왜냐하면 에고는 그에게 도달하는arrive 관념들의 우발적인éventuelle 원인이 됨으로써만, 자신의 고유한 역할 외에 타인의 역할을 떠맡는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22-23) 더욱이 나는 “아무런 감각이나 신체도 갖고 있지 않”(AT VII, 24, 25-26)기 때문에, 타인의 자리에 나의 관념들을 위치시킬 수 없다. 나는 어떤 신의 관념의 원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마리옹에게 중요한 것은 데카르트가 어떤 신의 가정, 즉 “나와 다른 것의 관념의 원인이 내 안에, 하지만 나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채 존재한다는”(23) 가정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다.


그러나 마리옹은 묻지 않지만, 아직 한 가지 질문이 더 남아 있다. 그리고 이것은 훨씬 더 중요하고 결정적인 질문이다. 그 질문은 󰡔성찰󰡕에서 성찰을 진행하고 있는 ‘나’라는 화자의 추론, 따라서 이야기histoire의 전개과정 자체에 대한 질문이라기보다는, 󰡔성찰󰡕의 담론 구조에 대한 질문이다. 즉 왜 「두 번째 성찰」의 이 지점에서 어떤 신의 가정이 제기되는가? 마리옹이 구별하는 첫 번째 단계 바로 이전의 문장에서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물체와 형태, 연장과 운동 및 장소가 키메라”라고 주장되었으며, 따라서 “아마도 어떤 것도 확실하지 않다는 한 가지 것만이”(AT VII, 24, 18) 참된 것으로 남아 있다고 주장되었는데, 이제 왜 어떤 신의 존재가 가정되는가? 「두 번째 성찰」의 이야기의 수준에서는 이것에 대한 어떠한 추론적 필연성도 제시되지 않는다. 더욱이 이야기의 내용에 따르면 이러한 신은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내 속에 집어넣는” 자인데, 이는 지금까지의 나의 사유들을 단지 가설에 불과한 것으로, 또는 오히려 어떤 신에 의한 조작으로 만들어 놓는 것이며, 따라서 이는 지금까지의 데카르트의 회의의 과정 자체를 허구화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경우 데카르트 이야기의 전개 과정 자체의 설득력이 일순간에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 그렇다면 데카르트는 왜 추론의 이 지점에서 이러한 어떤 신의 가설을 제기하는가?


전능한 신의 존재에 대한 가정은 사실은 「첫 번째 성찰」의 ‘과장된 회의’의 순간에 이미 등장한 바 있으며, 현재의 어떤 신에 대한 가정은 이것이 다시 제기된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마리옹 역시 「두 번째 성찰」의 어떤 신의 존재에 대한 가설과 「첫 번째 성찰」의 전능한 신의 존재에 대한 언급을 연결시킨다. “이 순간 「두 번째 성찰」의 모든 논변의 지평을 고정시키는, 적어도 「첫 번째 성찰」에서 에고에 의해 수용된 신념은, 엄밀히 말하면 에고로부터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정신 속의 오래된 의견meae mentis vetus opinio으로부터 도래하는데, 이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어떤 신의 가능성을 고려하게 만든다.”(25―강조는 마리옹) 그렇다면 이러한 “나의 정신 속의 오래된 의견”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텍스트의 담론 구조의 수준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하는가? 이 질문들은 󰡔성찰󰡕의 이야기의 수준에서 전개되는 형이상학적 사유의 내용과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담론 구조의 문제는 데카르트가 󰡔성찰󰡕을 집필한 이유가 무엇이고, 󰡔성찰󰡕을 통해 제시하려는 내용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것은 󰡔성찰󰡕 이전까지의 데카르트의 저작들, 예컨대 󰡔세계󰡕나 󰡔방법서설󰡕 등과 어떤 연속성 및 불연속성을 지니고 있는지 등과 같은 문제들을 다른 방식으로 제기하는 것이며, 따라서 󰡔성찰󰡕의 이야기 수준의 내용, 즉 이론적 논변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Judovitz 1988; Kosman 1986 참조).


그런데 마리옹은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은 채 ‘나의 정신 속의 오래된 의견’을 단순히 “사실성facticité”의 문제로 간주한다. “이러한 의견은 정신에 [...] 강제되며, 정신은 이를 자신 안에 오래 전부터vetus 고정되어 있는infixa 것으로 발견한다. 따라서 이것은 자신의 사실성 덕분에 에고를 규정한다.”(25) 더욱이 마리옹은 이러한 오래된 의견의 사실성이 바로 에고의 타자성, 에고의 대화적 성격을 입증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에고가 회의에 들어서는 것은, 그것이 자신의 사실성(그것의 원초적으로 비기원적인 “이미 거기에”)에 따라, 비규정적임에도 불구하고 기정되어 있는 어떤 사실un fait accompli 앞에 미리 놓여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의견 그 자체로 식별할identifier 수도 있고 아니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신으로, 또는 비규정적인 어떤 기만자로 식별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데, 왜냐하면 어쨌든 에고는, 에고를 그 자신과 동일화해야 하는 유아론으로의 길 위에서 모종의 타자가 자신에 선행한다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고는 독백에 의해서가 아니라, 원초적 대화에 의해서 자기 자신에게 도달하는 것이다.”(25-26)


여기서 드러나듯이 마리옹이 에고의 타자성, 에고의 대화적 본성을 주장할 수 있게 해주는 결정적인 논거는 전능한 신이 존재한다는 오래된 의견이 하나의 사실성으로서 미리 에고에게 주어져 있다는 점이며, 그는 이러한 논거로부터 자신의 기본적인 논변을 전개한다. 즉 마리옹은 (1) 자신이 설정한 첫 번째 단계에 나오는 diversum의 중의적 의미의 가능성에 착목한 뒤, (2) 이를 그 다음에 나오는 어떤 신의 가정과 연결 짓고, (3) 다시 이를 에고 이전의 사실성으로, 곧 에고의 원초성을 타자에 의해 정립된 원초성으로 만드는 항상 이미 주어져 있는 사실성으로 확정함으로써, (4) 에고가 자기 이전의 어떤 타인과의 대화를 통해 비로소 초월론적 주체성으로 성립되며, 바로 이 때문에 에고는 근원적으로 타자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다. 그 이후의 마리옹의 논변은 이렇게 해서 확정된 논리 구조의 적용에 불과하며, “ego sum, ego existo”에 대한 해석 역시 이러한 논리에 따라 전개된다.


실제로 마리옹은 세 번째 단계에 대한 해석에서, “만약 내가 속는다면, 분명 나는 존재한다Haud dubie igitur ego etiam sum, si me fallit”는 문장을, 두 번째 단계에 나오는 “만약 내가 설득된다면 나는 존재하는 것임에 틀림없다certe ego eram, si quid persuasi”는 문장과 연결시켜, 이것 모두가 에고에게 질문하고 따라서 그에 선행하는 어떤 대화적 타자를 가정하고 있다고 해명한다. 마찬가지로 마지막 네 번째 단계에 나오는 “ego sum, ego existo”에 대한 해석에서도 마리옹은 이를 두 번째 단계의 문장과 바로 연결시킨다. “여기서 “ego sum, ego existo”는 나에 의해, 절대적으로 나에 의해 발언되고 수행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문제가 되는 것은 두 번째 단계의 “만약 내가 설득된다면 나는 존재하는 것임에 틀림없다”는 논거를 재개하는 것인가? 분명 그렇다. 두 경우에서 타인은 논변을 단축하고 그것을 좀더 강렬하게 만들기 위해 배후로 물러선다. 그러나 우리는 이 때 대화의 장치가 소멸된다기보다는, 호명되는interpellé 에고와 호명하는interpellant 에고(자기의 타인으로서)로 전위되고, 거기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밝힌 바 있다.”(29-30)


“ego sum, ego existo”가 이렇게 에고 이전에 미리 존재하는 어떤 신의 가설과 연결될 수 있다면, 이제 남은 문제는 이 문장 자체를 에고 자신에 의한 에고의 호명으로 해석하는 것뿐이며, 이는 매우 간단히 이루어진다. “이제 여기서 에고가 자신에 대한 호명을 실행하게 되는 유사한 대화를 도출할 수 있을까? 분명 그렇게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데카르트는 여기서 특징적인 수행문의 어휘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에고가 자신에 대한 호명으로부터 탄생하는 대화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자체로 시간화되어 있는(~할 때마다quoties) 언어행위(발음하다pronuntiatum, 발언하다profertur)다. [하지만] 이러한 자기에 대한 자기의 대화는 [...] 자기에 대한 자기의 표상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여기서는 자기에게 말 걸기, 자기에 대한(심지어는 자기에 맞선) 말하기를 인지해야 한다. [...] 존재하지 않는 나는 나 자신을 선행하여 이러한 다른 실존(하지만 나의 것인)을 발음하고 발언하기 위해, 그리고 행동 속에서 그것을 보증하기 위해 나를 나 자신에게 낯설게 만든다.”(30) 이렇게 해서 diversum에서 출발하여 “ego sum, ego existo”에 이르는 마리옹의 기본 논변이 완성된다.


그러나 여기서도 다시 한 가지 질문이 제기된다. 자기 자신에 대한 말 걸기는 어떻게 “자기에 대한 자기의 표상”이 되지 않을 수 있는가? 자기에 대한 자기의 말 걸기를 지칭하기 위해 마리옹은 계속 “호명”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하지만 알튀세르가 모세와 여호와의 대화를 통해 예시했듯이(Althusser 1995, p. 309), 호명은 나라는 작은 주체와 내가 알 수 없는, 하지만 나를 부르고 내가 그에 응답함으로써 비로소 주체가 되는 대문자 주체, 따라서 큰 타자 사이에 이루어지는 거울작용인데, 이러한 호명이 타자성을 위한 논거로 사용될 수 있는가? 즉 호명 속에서 이루어지는 “나를 나 자신에게 낯설게” 만드는 것이 진정 타자적인 것인가? 아니면 그것은 에고의 기만적인 가공에 불과한 것인가? 마리옹은 호명의 타자적 성격을 증명하기 위해 호명의 수행적 성격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 자체로 시간화되어 있는(~할 때마다) 언어행위(발음하다, 발언하다)”가 타자성을 보증할 수 있는가? 또는 여기서 보증되는 타자성이란 어떤 것인가? 마리옹은 정당하게 타자성은 “자기촉발auto-affection과 타자촉발hétéro-affection, 동일자même와 탈자extase의 구별이 확립되기도 전에 작용”(30)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항상 구별 이후에 오는 우리가 이러한 타자성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우리가 그것을 인정하자마자, 그것을 식별하거나 동일화하자마자, 그것은 순수한 가공과 허구, 기만이 되지 않는가?


여기서 우리가 앞서 제기했던 질문과 지금의 질문이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우리는 앞서 “아마도 어떤 것도 확실하지 않다는 한 가지 것만이” 참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된 바로 다음에 어떤 신의 가설이 등장하는 이유는 이야기의 수준보다는 텍스트의 담론 구조의 수준에서 질문되고 답변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마리옹은 이런 질문을 제기하지 않은 채, 어떤 신의 가설, 또는 전능한 신이 존재한다는 ‘나의 정신 속의 오래된 의견’을 이미 기정되어 있는 사실로 간주하면서, 바로 이러한 논거에 의지하여 에고의 타자성에 대한 논변을 진행한다. 우리가 어떤 신의 가설을 담론 구조의 수준에서 질문해야 한다고 말했던 것은 과장된 회의의 과정 전체는, 게루가 지적했듯이 광기나 꿈과 같이 “회의의 자연적 이유들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형이상학적 의견”(Gueroult 1968, p. 42), 다시 말해 전능한 어떤 신의 가설, 따라서 또한 악령의 가설에 의지하며, 이 때문에 악령의 가설은 “데카르트 철학의 몇 가지 진리들”에 뿌리를 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진리들에 전적으로 낯선 인공물”(Ibid., p. 42)이라는 주장이 제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전능한 신이라는 형이상학적 의견이나 악령의 가설은 󰡔성찰󰡕 자체의 이야기의 수준에서는 해명될 수 없으며, 담론 구조의 차원에서 설명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말해준다.


데카르트가 광기나 꿈과 같이 바로크 시대의 회의주의자들에 고유한 논거들을 사용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악령이라는 초자연적 가설을 도입하여 󰡔성찰󰡕의 논의를 진행하는 것은 보편 수학의 명석 판명함이라는 진리의 기준만으로는 확실한 진리를 보증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 더욱이 코기토에 고유한 순간적, 일시적 성격 때문에 코기토적 확실성은 끊임없이 제기되는 기만의 위협에 직면하게 된다. 즉 “내가 사유하는 한에서quatenus”, “내가 사유할 때마다quoties” 내가 존재한다는 점, 또는 내가 “설득되는 한에서”, 내가 “기만되는 한에서” 내가 존재한다는 점은 절대적으로 기만의 위협을 막아내지 못하며, 내가 사유하는 동안에만, 내가 사유할 때만 진리를 보증해 줄 수 있다. 따라서 데카르트 철학 체계의 관점에서 본다면 어떠한 회의에 의해서도 반박될 수 없는 확실한 진리는 결국 ‘진실한 신의 전능함’으로부터 보증되는 것이며[여기에는 신의 진실성, 또는 선함과 신의 전능성 사이의 갈등이라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하지만 영원 진리 창조론에 대한 해석과 연관되어 있는 이 문제를 여기에서 다룰 수는 없다. 이 점에 대해서는 특히 Curley 1984; Beyssade 2001 참조.], 코기토적 진리의 “표본적exemplary” 성격은 명증한 진리에 고유한 취약성과 불안정성을 드러냄으로써, 신이라는 “진리의 표본 자체”로 인도해준다는 데 있다(Beyssade 1993, p. 38). 이렇게 볼 때 만약 우리가 마리옹처럼 어떤 신의 가설을 하나의 주어진 사실성으로 간주하고 그것이 󰡔성찰󰡕의 담론 구조에서 수행하는 역할에 대한 질문을 생략한다면, 󰡔성찰󰡕의 논변의 의미와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마리옹은 자신이 이 논문에서 보여주려고 한 것은 이런 것들이 아니라 󰡔성찰󰡕의 에고가 처음부터 타자적 공간 속에 존재한다는 점이라고 주장하면서 반론을 제기할지도 모르겠다. 이런 주장에 대해서는 우리가 처음부터 제기했던 질문을 다시 던져볼 수 있다. 이렇게 해서 획득된 에고의 타자성이라는 테제는 과연 데카르트 철학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인가? 아니면 오히려 데카르트 철학의 비판적인 성격, 또는 데리다의 용어대로 하자면 첨예한 성격을 오도하는 것인가?


이 문제는 두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탁월한 타인으로서 신의 타자성에 관한 질문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마리옹은 전능한 신이 존재한다는 나의 정신 속의 오래된 의견을 하나의 사실성으로 간주한다. 그런데 이러한 태도는 이 의견에 고유한 갈등과 긴장을 은폐한다. 즉 「두 번째 성찰」에 이르는 데카르트의 논의에서 전능한 신은 진실성과 사악함 사이의 긴장이 해결되지 않고 있는 신인데, 이는 이 신이 데카르트의 논의에서는 과장된 회의를 추동하고 그리하여 절대적인 진리의 보증을 추구하게 만드는 역할만을 수행할 뿐, 그에 대한 보증의 기능을 담당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러한 타자성은 일차적으로 진리의 명증성에 대한 위협으로 나타나며, 이러한 절대적 기만의 위협이야말로 에고의 첨예한 경험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마리옹처럼 이러한 신에 대한 의견을 “의견 그 자체로, 또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신으로, 아니면 비규정적인 어떤 기만자로 식별할 수 있다는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데”라고 넘겨버릴 수는 없다. 여기서는 그에 대한 식별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이러한 식별이 없다면 에고의 경험의 첨예함 자체가 무디어질 뿐 아니라, 이러한 첨예한 경험을 통과하지 않고 도달된 신적 타자성은 유한자, 또는 역사적으로 규정된 이성에 고유한 자기기만과 신비화라는 비판을 감당할 수 없게 되며, 그 자체가 유한자의 가공물과 수단으로 전락하게 된다. 파스칼은 이미 이를 지적한 바 있다. “나는 데카르트를 용서할 수 없다. 그는 신 없이 철학을 하려고 했지만, 그는 세계를 작동시키기 위해 신에게 손가락을 움직이는 역할을 부여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것 이외에는 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Pascal 1963, p. 1001)


다음으로는 “ego sum, ego existo”에 대한 해석의 문제다. 「에고의 타자성」의 기본 논지는 에고의 타자성을 통해 해석된 “ego sum, ego existo”는 데카르트 철학에 고유한 가능성을 열어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장을 타자성의 방향에서 해석하면서 겪게 되는 가장 큰 어려움은 자기 표상, 따라서 마리옹식으로 말하자면 동일율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마리옹이 제시하는 두 개의 논거는 첫째, 이를 자기에게 말 걸기, 자기에 대한(심지어는 자기에 맞선) 말하기로 이해해야 하며, 둘째, 이러한 말하기는 “존재하지 않는 나는 나 자신을 선행하여 이러한 다른 실존(하지만 나의 것인)을 발음하고 발언하기 위해, 그리고 행동 속에서 그것을 보증하기 위해 나를 나 자신에게 낯설게 만든다”(30)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두 개의 논거는 사실 한 가지 문제로 귀착된다. 어떻게 “ego sum, ego existo”를 타자적인 말하기로 해석할 것인가? 마리옹이 제시하는 진정한 해답은 “나를 나 자신에게 낯설게 만든다”는 것인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또는 “ego sum, ego existo”가 어떻게 이런 의미로 파악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되지 않는다.


하지만 더 중요한 문제는 이 문장이 “나를 나 자신에게 낯설게 만든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해도, 이러한 해석이 기본적으로 부당전제에 의지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해석은 아직 존재하는 것으로 해명되지 않은, 즉 “ego sum, ego existo”를 통해 비로소 그 존재 여부가 판명되는 에고에 대해 자기 자신을 주체로 동일화/식별할 수 있는 언어 능력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타자화할 수 있는 능력까지 부여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아직 존재하지 않는, “ego sum, ego existo”를 발언함으로써 비로소 존재하는 것으로 입증되는[코기토의 맥락에서 수행적 행위의 의미에 대해서는 오스틴보다는 벤베니스트Emil Benveniste의 규정을 따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벤베니스트는 오스틴을 비판하면서 수행적 행위의 의미를 좀더 정치하게 정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다음과 같은 규정은 경청할 만하다. “수행적 언표는 하나의 행위이므로 유일하다unique는 특징을 지닌다. 이것은 특별한 상황 속에서만, 단 한 번만, 일정한 날짜와 일정한 장소에서만 실행될 수 있다. 이것은 기술의 가치도, 명령의 가치도 지니지 않으며, 다시 이야기하지만 수행의 가치를 지닌다. [...] 사건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수행적 언표는 사건인 것이다. 개인적이고 역사적인 행위이기에 수행적 발화는 반복될 수 없다. 모든 재생자격을 지닌 사람이 수행하는 하나의 새로운 행위이다.” 벤베니스트 1992, 391쪽. 벤베니스트의 입론에 어긋나지 않고서도 우리는 코기토의 경험은 개인적이고 역사적인 행위이기 때문이 아니라 초역사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유일한 사건이라고 정정할 수 있다.] 에고가 이런 능력을 미리 지닐 수 있는가? 더욱이 에고에게 이러한 능력을 부여하는 것은 데카르트적인 코기토의 경험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즉 데리다가 지적하듯이 “코기토의 행위는, 비록 내가 미쳤을지라도, 비록 나의 사유가 전적으로 미쳤을지라도 타당하기 때문”에 “코기토의 행위와 실존은 처음으로 광기에서 벗어난다.”(Derrida 1967, p. 85―강조는 데리다) 반면 마리옹처럼 코기토의 행위를 타자적인 것 내지 대화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에고에게 이미 이성적인 능력을 갖춘 말하는 주체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며, 따라서 이는 미리 광인이라는 타자를 배제하는 게 된다. “만약 코기토가 광인에게도 타당한 것이라면, 미친다는 것은 ... 코기토를 반성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다는 것, 즉 그것을 하나의 타자, 나 자신일 수 있는 하나의 타자에 대해 그 자체로 나타나게 할 수 없다는 것이기 때문이다.”(Ibid., p. 91)


이러한 코기토의 경험의 첨예함에 대한 약화 및 광인이라는 타자의 배제가 우연일까? 다시 말하면 이는 마리옹이 설정하는 타자성의 공간, 대화의 장치와 무관한가? 앞서 본 것처럼 그는 자신이 말하는 타자적 공간 속의 타인이 누구인지, 또는 그 타자적 공간의 성격이 어떤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여기서 보듯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 마리옹이 타자와의 대화의 가설에 따라 “ego sum, ego existo”를 해석한 결과는 정작 광인이라는 타자, 심지어는 타자 그 자체를 배제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 이는 내가 보기에는 마리옹이 설정하는 타자성이란 코기토적 경험을 좀더 잘 이해하게 해주고, 더 나아가 그것이 오늘날 탈근대성의 문턱에서 직면한 한계를 내재적으로 극복하게 해주는 타자성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코기토적 경험의 첨예함에 거스르는 타자성이며, 그 첨예함을 배제한 가운데서만 성립할 수 있는 타자성임을 의미한다.


「에고의 타자성」 논문 서두에서 설정된 두 가지 아포리아의 용어법대로 하면, 코기토의 경험의 첨예함이란 분열, 즉 초월론적 에고와 경험적 자아 사이의 분열의 경험이다. 코기토의 경험은 ‘나는 사유하며, 사유하는 동안 나는 존재한다’는 것, 또는 ‘나는 존재하며, 나는 실존한다’고 말하는 순간 바로 그 말하는 행위로서 나는 존재한다는 것이며, 이러한 경험은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 권리적인 의미에서 세계 전체를 파악하고 초과하려는 기투의 경험이다. 하지만 이러한 코기토의 경험이 보증되고 인정되고 소통되자마자, 곧 “작동”하자마자, 이 경험은 동시에 배제를 작동시키면서 유한한 자아의, 자아들 사이의 경험이 되어버린다. 따라서 코기토에 고유한 타자성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코기토가 그에 맞서 자신을 입증하고 확인해야 하는 미지의, 비규정된 타자이며, 이러한 타자가 타자로 설정되자마자 이 타자는 유한한 다른 자아라는 타자와, 자아들 사이의 상호 주관적 소통에서 배제된 광기와 폭력이라는 타자, 또는 진실한 신이라는 타자로 분할된다. 코기토적 경험에 고유한 이러한 불안정 및 분열을 무시한 채 처음부터 원초적 타자성을 추구하는 것은 애초에 특정한 타자를 배제하게 되며, 따라서 타자성을 폐쇄된 공간 속에서의 타자성, 즉 경험적 자아들 사이의 타자성으로 만들게 된다. 내가 보기에 이는 마리옹이 초월론적 주체에 고유한 아포리아를 회피하기 위해 너무 서둘러 상호 주관적 타자성으로, 또는 레비나스적인 절대적 타인의 타자성으로 도피해버린 결과다.


IV

마리옹 자신도 자신의 논변이 충분한 설득력을 지니지 못함을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cogito ergo sum이라는 고전적 정식의 배타적 우월성을 문제 삼아야 한다는 것을 완전하게 증명한 것은 아니라면, 적어도 보여주었기를 희망한다.”(43) 하지만 문제는 “완전하게 증명”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초월론적 주체에 고유한 분열의 문제를 너무 쉽게 회피하면서 곧바로 타자성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그는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에서는”, “신에게는 동일율, 유한한 정신에게는 타자성이 엄밀하게 배정”(45)되어 있다는 것을 자신의 논거로 삼지만, 이는 데카르트를 서양의 존재-신-론에 다시 포섭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그러한 배정은 데카르트만이 아니라 플라톤 이래 서양 형이상학에 고유한 것이기 때문이다.


마리옹이 계속해서 데카르트의 도덕에 대해 말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이는 궁극적으로는 실천의 문제, 즉 권리와 사실의 분열, 간극의 문제다. 데리다가 말하듯 “우리는 우리가 (유한하거나 규정된) 어떤 것도 말하지 않을 때, 우리가 신이나 존재, 또는 무에 대해 말할 때, 우리가 유한자를 자신의 말의 공표된 의미 속으로 변형시키지 않을 때, 우리가 무한자를 말할 때, 즉 우리가 무한자로 하여금 스스로 사유하고 스스로 말하게 할 [...] 때 거짓말할 수 없다.”(Derrida 1967, 90-91) 하지만 이는 엄밀히 말하면 무한자가 “자신을 사유하고 자기 스스로 말”할 때만이다. 따라서 동일율에는 항상 중간태라는 문법 형식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는 유한한 주체의 권리 밖의 일이며, 이를 빌미로 유한자의 타자성을 주장하는 것은 사실상의 폭력을 권리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유한자가 근원적으로 타자적 존재라면, 유한자에게 무한자, 존재, 신은 항상 분열된 채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유한한 주체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분열된 타자성을 식별하려는 노력이며, 자신의 사실적 폭력과 분할을 폭력과 분할로서 인식하려는 노력이다. 타자성은 유한한 주체의 분할을 폐지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회피할 수도 없다. 따라서 마리옹이 에고의 타자성을 주장하고, 또한 이것이 탈근대적 문턱에서 필수불가결한 원칙이라고 주장한다면, 그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있다. 하지만 이를 빌미로 유한한 주체에 고유한 분할을 초과하거나 회피하려 한다면, 이는 탈근대성의 문턱을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근대성의 경계 너머로 후퇴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내가 보기에 마리옹의 타자성론은 이 두 가지 경계 사이에서 동요하고 있다.



참고문헌

벤베니스트, 에밀(1992). 󰡔일반 언어학의 제문제 1󰡕 황경자 옮김, 민음사.
Althusser, Louis(1995). Sur la reproduction, PUF.
Balibar, Etienne(1992). “"Ego sum, ego existo": Descartes au point d'hérésie”, Bulletin de la société française de philosophie, tome LXXXVI.
Beyssade, Michelle(1993). “The Cogito: Priviledged Truth or Exemplary Truth?”, in Stephen Voss ed., Essays on the Philosophy and Science of R. Descartes, Oxford University Press.

Beyssade, Jean-Marie(2001). “Création des vérités éternelles et doute métaphysique”, in Descartes au fil de l'ordre, PUF.
Curley, Edwin(1984). “Descartes on the Creation of the Eternal Truths”, Philosophical Review 93.
Derrida, Jacques(1967). L'écriture et la différence, Seuil.
(1996). Apories, Galilée.
Descartes, Renée(1974). Oeuvre de Descartes, eds., C. Adam & P. Tannery, Vrin.
(1996). 󰡔성찰 외󰡕 이현복 옮김, 문예출판사.
Gueroult, Martial(1968). Descartes selon l'ordre des raisons I, Aubier(2e éd.).
Judovitz, Dalia(1988). Subjectivity and Representation in Descartes, Cambridge University Press.
Kosman, L. Aryeh(1986). “The Naive Narrator: Meditations in Descartes' Meditations”, in Amélie Rorty ed., Essays on Descartes' Meditation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Marion, Jean-Luc(1991a). Sur la théologie blanche de Descartes, PUF.
(1991b). “L'ego altère-t-il autrui? La solitude du cogito et l'absence d'alter ego”, in Questions cartésiennes, PUF.
(1996). “L'altérité originaire de l'ego”, in Questions cartésiennes II, PUF.
Nancy, Jean-Luc(1978). “Mundus est Fabula”, MLN 93.
Pascal, Blaise(1963). Oeuvres complètes, Ed. L. Lafuma, Seu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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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ego sum, ego existo
    from meilette's paper 2008-09-30 00:14 
    (��)������ Ÿ��: ��-�� �������� ������ Ÿ�ڼ��п� ���� ������ ���� �׷��ٸ� ��ego sum, ego existo����� ���ο� ������ ������ �ǹ��ϴ°�? �������� ��
 
 
람혼 2008-08-30 0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요즘 이곳에 연이어 '진수성찬'을 차려주셔서 저로서는 그냥 편하게 앉아서만 읽기가 오히려 죄송한 마음까지 듭니다.^^; 논문을 다 읽고 나니 마리옹의 어떤 '저의'가 새삼 궁금해지기도 하고 또 스스로 직접 확인해보고 싶기도 한 기분에, 평소 따로 시간을 내서 읽지는 말아야겠다고 생각해오던 Questions cartésiennes 두 권 또한 읽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베사드만해도 그런 느낌은 아닌데, 마리옹은 데카르트 안에서 너무 '과도하게 많은' 것을 찾아내고 끌어내려고 하는 건 아닌가 하는 개인적 인상을 받을 때가 가끔 있습니다(논문의 맥락을 따라가면서 문득, 마리옹은 Husserliana 13권부터 다시 읽어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약간 '익살스런' 생각도 잠시 들었음을 고백합니다^^). 데카르트에 대한 '재평가'는 가라타니 고진도 조금 다른 맥락에서 몇 번 언급한 바 있었지만, 말씀하신바 '너무도 쉽게' 타자성으로 '회피'한 결과가 돼버린 마리옹의 경우는, 아마도 '탈근대'와 '타자성'을 성찰하려는 철학적 기획이 얼마나 많은 '전제조건'들을 또한 얼마나 '섬세하고 예민하게' 추적하고 검토해야 하는지에 관해ㅡ곧 철학적 아포리아와 대면하는 기본적이면서 동시에 치열한 이론적 자세에 관해ㅡ많은 것을 다시 생각하게끔 해주는 사례들 중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아마도 이 논문이ㅡ직접적으로는ㅡ'말하지 않고 있는' 거시적 본령 역시 이러한 철학적 정치함에 대한 '환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개인적으로 생각해봅니다. 덧붙여, 이러한 이론적 '정치함' 혹은 '치밀함'과 관련하여, 위의 분석이 뜬금없이(?) 제게 새삼 환기시켜준 개인적 감정은, 세태 혹은 정세에 대한 진단과 해법을 너무도 쉽게 '민족주의적' 상호주관성 개념을 통해 '회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김상봉 선생의 저서에 대한 불만이었음도 지나가는 길에 첨언해봅니다.

여담이지만, 마리옹의 '꼬장꼬장한' 실물을 멀리서나마 좀 볼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을 안고 갔던 '철학자 대회'는 말 그대로 '꽝'이었습니다.^^

balmas 2008-09-01 03:50   좋아요 0 | URL
'진수성찬'이라뇨, 지나친 말이네요. 어쨌든 열심히 읽어주시니 제가 더 고맙습니다.
이번 철학자대회는 원래 오기로 했던 철학자들이 다수 불참하는 바람에 좀 허전했겠습니다. ㅎㅎ

동구리 2008-09-22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글 잘 읽었습니다. 저 역시 마리옹에 대한 졸고를 서강대 철학논집에 하나 실었습니다. 제가 주로 연구한 마리옹의 저작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적 프리즘"에서는 데카르트 철학의 존재신론적 측면과 존재신론에 포섭되지 않는 측면을 마리옹이 나름대로 잘 파악하고 있다고 보였는데요. 그래서 거기서는 마리옹이 데카르트에만 머무르지 않고 동시대의 파스칼의 논의에서 존재신론에 포섭되지 않는 파스칼의 탈형이상학적 기획을 찾아내려 하더군요. 아무튼 위에서 알게 된 마리옹의 두 편의 논문에서는 그가 좀 무리한 주장을 하는 것 같군요(물론 원문 자체를 아직 읽지는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진 선생님의 건실한 논의를 따라가보자면 말입니다). 꼼꼼하게 써주셔서 공부가 많이 되었습니다. 아.. 그리고 저도 마리옹 얼굴좀 보려고 철학자대회 갔다가 허탈감만 느끼고 집에 돌아갔더랬죠^^;;

balmas 2008-09-23 12:48   좋아요 0 | URL
동구리님, 처음 뵙는 분인 것 같은데, 반갑습니다. 부족한 글을 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리옹에 관해서 글을 하나 쓰셨군요.^^ 마리옹은 국내에 생소한 철학자인데 이미 글을 하나 쓰셨다니, 이쪽 분야에 대해 잘 아시는 분인가 봅니다. 마리옹의 실물을 못봐서 못내 섭섭한 분들이 꽤 있나 봅니다. ㅎㅎ

앞으로도 종종 들러주세요. :-)
 

 지난 봄에 발표한 글을 하나 올립니다. 원래는 지난 3월에 근대철학회 창립 1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처음 발표한 글이고, 그 다음에는 {근대철학} 3권 1호에 수록되었습니다.

지금 생각으로는 후속편에서 "호명"의 문제에 대해 좀더 집중적으로 분석해볼 생각인데, 그렇게 되면 지젝의 알튀세르 해석의 난점과 지젝식의 이데올로기론의 한계가 좀더 분명히 드러나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혹시 논평이나 인용을 하고 싶은 분들은 {근대철학}에 게재된 글을 대상으로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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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와 알튀세르에서 이데올로기의 문제-상상계라는 쟁점




읽기라는 문제, 따라서 글쓰기/기록하기라는 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했던 인물인 스피노자는 또한 역사이론과 동시에 직접적인 것의 불투명성에 관한 철학을 처음으로 제시했던 사람이다.
루이 알튀세르, {“자본”을 읽자}

스피노자주의 또는 후기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
슬라보예 지젝,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I 이데올로기의 유령들



지난 40여 년 동안 서양의 인문사회과학계에서 단일한 논문으로서 과연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들」[이하에서는 편의상 AIE 논문이라고 줄여 부르겠다.]보다 더 지속적이고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한 논문이 있을까? 지난 1980년대 말 이후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하고 마르크스주의가 퇴조하면서 알튀세르의 저작들은 점점 더 인문사회과학 논의에서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지만[여기에는 물론 주지하다시피 지난 1980년에 발생한 알튀세르의 개인적 비극도 영향을 미쳤다.], 이 논문만큼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한 토론과 응용 및 변용의 대상이 되고 있다. 어쩌면 이 논문은 바로 알튀세르의 저작들이 퇴조하기 시작한 바로 그 무렵부터 본격적인(또는 적어도 그 이전보다 더 역동적인) 이론적 생명력을 얻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슬라보예 지젝이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1989)을 필두로 여러 저작에서 알튀세르에 대한 비판적인 고찰을 통해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다시 한 번 인문사회과학의 핵심 쟁점으로 부각시킨 것이 바로 1990년대이며, 그 뒤에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가 젠더 이론 및 주체의 예속화/주체화subjection 이론을 전개하면서 AIE 논문을 주요한 이론적 지주로 활용하기 시작한 것(특히 Butler 1997 「서론」 및 4장 참조) 역시 1990년대의 일이다. 또 그의 제자였던 에티엔 발리바르가 호명 이론을 변용하여 “국민 형태forme nation”에 관한 독창적인 문제설정을 전개하기 시작한 것 역시 90년대 이후의 일이다(특히 Balibar 1988; 2001 1장 참조). 한 가지 놀라운 점은 이처럼 다양한 비판적 논의의 대상이 되고 또 광범위한 영향력을 미쳤음에도 이 논문은 아직도 여전히 많은 이론적 잠재력과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들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우리가 고전이라고 부르는 텍스트들에 공통적인 특징으로, 아마도 바로 이점이야말로 알튀세르의 저작, 특히 AIE 논문을 현대의 고전이라고 부를 수 있게 해주는 것일 듯하다.


알튀세르의 이론적 작업 전체를 고려해봤을 때 AIE 논문에 관한 다양한 논의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이 논문에 미친 스피노자 철학의 영향이 거의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알튀세르는 여러 차례에 걸쳐 스피노자에 대해 예외적인 찬사를 보내고 있으며, 1960년대의 자신의 이론적 작업에 대해 자기비판적으로 고찰하고 있는 소책자에서는 자신이 “스피노자주의자”였음을 명시적으로 고백하고 있지만(Althusser 1997, pp. 181-189), 정작 알튀세르의 가장 중요한 글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는 AIE 논문의 스피노자주의적인 성격에 대해서는 거의 논의가 이루어지지 못했다[알튀세르의 이론 작업과 스피노자 철학의 관계 일반에 대해서는 Moreau 1997, Tosel 2005 등을 참조하고, 국내의 논의로는 진태원 2001; 2002; 2005 등을 보라. 외국의 주석가들 중 알튀세르 이데올로기론의 스피노자주의적 성격에 주목하고 있는 글로는 Montag 1995; 1996, Pfaller 1998 정도에 불과하다. Montag은 AIE 논문이 알튀세르의 저작 중에서도 “매우 스피노자주의적인 글”(1995, p. 65)이라고 지적하고 있지만 간략한 논의에 그치고 있다. Montag 1996은 알튀세르 이데올로기론을, 특히 홉스의 정치학과 대비되는 스피노자의 정치학과 연결시켜 흥미 있는 논의를 제시하고 있다. Pfaller 1998은 지젝의 알튀세르 비판이 지닌 관념론적인 측면을 지적하면서 스피노자 상상계의 무한성을 강조하고 있다. Locke 1996은 스피노자와의 연관성에 주목하고 있지는 않지만, 알튀세르 이데올로기론의 비(非)라캉주의적인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 반대로 많은 주석가들은 AIE 논문 및 그의 이데올로기론 전체를 라캉주의적인 이데올로기론으로 특징짓고 있다[너무 많은 주석가들이 이런 견해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일일이 전거를 밝히는 것은 불필요할 것 같다. 대표적인 몇몇 경우를 지적해본다면, Barrett 1993; Eagleton 1991; Macey 1994. 국내에서는 양석원이나 홍준기 등을 들 수 있다. 이 주석가들의 특징은 구체적인 문헌학적 논거를 제시하지 않고 있을뿐더러, 지난 1993년 이래 발표된 알튀세르의 유고들을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특히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해명하는 데 이 유고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또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라캉주의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불식시키는 데도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진태원 2002 참조.]. 이들에 따르면 알튀세르는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수용하거나 그것을 준거로 삼아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론을 개조하려고 했지만, 라캉의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기능주의에 빠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AIE 논문이나 알튀세르의 몇몇 글들(특히 「프로이트와 라캉」 같은 글)에 나타난 라캉에 대한 단편적인 언급에 의지하여 AIE 논문 전체, 특히 그 논문의 후반부를 이루는 「이데올로기에 관하여」라는 절을 라캉주의적 이데올로기론으로 특징짓고 있다.


이들의 견해를 하나하나 논박하는 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는 일일뿐더러 지면의 한계상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그들 중 한 사람, 아마도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꼽힐 만한 지젝의 논의를 살펴보고 싶다. 이는 이 글 전체의 구도와 관련해서도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에 대한 지젝의 비판은, 우리가 서두에 인용한 제사(題詞)가 시사하듯이,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비판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젝의 논의는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과 스피노자 철학 사이의 관련성을 검토해보려는 이 글의 반면교사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II 지젝의 알튀세르 비판



슬라보예 지젝은 그의 출세작인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Zizek 1989)에서부터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Zizek 1993/2007b), 「이데올로기의 유령」(Zizek 1994), 󰡔나누어질 수 없는 잔여󰡕(Zizek 1996)나 󰡔까다로운 주체󰡕(Zizek 1999/2005) 등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비판하고 라캉주의적인 관점에서 이를 개조하거나 변형하려고 시도해왔다. 이처럼 그가 여러 저작에서 알튀세르를 비판하고 있음에도 그의 논점은 매우 간략하게 요약될 수 있으며, 그의 다양한 논의들은 이러한 논점의 변주에 불과하다.


1) 그가 보기에 알튀세르 이데올로기론의 핵심은 호명 이론에 있다. 곧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을 주체들로 호명하며, 이를 통해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재생산 또는 좀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지배 체계의 재생산에 기여한다는 것이 그의 이데올로기론의 근본적인 전언이다.(Zizek 1989; 1993)


2) 하지만 호명 이론은 그의 이데올로기론의 가장 독창적인 부분이면서 또한 그의 이론의 근본적인 한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호명 이론은 어떻게 지배에 대한 저항이나 지배 체계를 넘어서는 것이 가능한지 보여주지 못하며, 모든 주체는 결국 지배 체계의 재생산 메커니즘에 예속될 수밖에 없다는 숙명론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Zizek 1989; 1993; Dolar 1993)


3) 알튀세르가 이런 한계에 부딪치는 이유는, 라캉의 욕망의 그래프 상에서 본다면 그가 첫 번째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의 이데올로기론, 그가 제시하는 호명 이론은 부유하는 기표들의 의미를 고정시켜 주는 이데올로기적 누빔점에 관한 이론에 그치고 있다. 이러한 도식 속에서는 모든 호명은 항상 성공하기 마련이며, 모든 주체는 항상 주인기표를 통해 호명된다.[“누빔점은 주체가 기표에 ‘꿰매어지는’ 지점이다. 그리고 동시에 어떤 주인기표(‘공산주의’ㆍ ‘신’ㆍ ‘자유’ ㆍ‘미국’)의 호출과 함께 개인에게 말을 걸면서 개인을 주체로서 호명하는 지점이다. 한 마디로 그것은 기표 연쇄를 주체화하는 지점이다.”(Zizek 1989, 179쪽)]


4) 반면 라캉의 이론은 알튀세르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길을 제공해주는데, 그것의 핵심은 “환상을 가로지르기”라는 개념에서 찾을 수 있다.(Zizek 1989 2부 3장; 1993 1부 1장; 1996 pp. 165 이하; 2003 중 「재판 서문」 등 참조) 욕망의 그래프 상에서 보면 세 번째 그래프(“케보이Che vuoi?”)는 상징적 질서인 타자Autre에 의해 부여된 자신의 역할에 대해 회의하는 주체, 곧 히스테리에 걸린 주체를 나타낸다. 이처럼 자신의 동일성 내지 정체성에 대해 회의한다는 것은 바로 주체에게 전달된 호명이 실패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네 번째 그래프는 그 이전까지 일관된 것, 아무런 공백이나 균열도 없는 충만하고 전능한 것으로 간주되었던 타자 자체 내에 공백이 존재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이러한 의미에서 욕망의 그래프의 두 번째 수준 전체(3번째와 4번째 그래프)는 “호명 너머의 차원을 지칭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Zizek 1989, 216쪽)[이하 인용문의 번역은 국역본이 있는 경우에도 대개 필자가 다소 수정했지만 일일이 밝히지는 않았다. 그리고 별도의 지적이 없는 한 인용문에 나오는 강조 표시는 모두 원문의 것이다.]


그러나 타자 속에 존재하는 이러한 공백 내지 균열이 그보다 아래 수준의 그래프에 위치한 주체들에게 은폐되어 있는 것은 바로 “환상phantasy” 때문이다. 곧 환상은 “케보이?”,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며, 정상적인 주체들은 이러한 환상을 통해 욕망하는 법을 배운다. 환상의 차원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일관된 의미의 질서, 상징적 질서는 불가능하며, 주체들 각자가 이러한 상징적 질서 속에서 자신들의 동일성을 획득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욕망의 그래프 상에서 환상의 도식이 빗금 쳐진 주체와 대상 a의 조우로 표시되는 것($◇a)은 이를 가리킨다). 따라서 환상이 수행하는 기능은 이중적이다. 그것은 한 편으로 주체가 향락을 경험하고 자신의 일관성을 유지하게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대타자의 공백을 메우면서 상징적 질서를 유지시켜준다.


라캉에 따르면 정신분석적인 치료는 피분석자 또는 분석 주체가 분석가(타자)와의 동일시를 넘어서 분석가의 수수께끼 같은 욕망(“x로 남아 있는 분석가의 욕망”(Lacan 1973, p. 246))을 대면하고 이로써 자신의 욕망을 발견할 경우에 종결된다. 이는 다른 식으로 말하면 주체가 타자로부터 배제된 대상 a가 주체 자신의 “결핍destitution”, 공백을 메우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러한 대상 a와 분리되어 자신의 결핍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주체는 자신이 충만한 주체, 아무런 공백을 지니지 않은 자율적 주체가 아니라 자기 내부에 공백을 지닌 주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정신분석 임상의 차원에서 환상을 가로지르기가 뜻하는 바다.


지젝은 이러한 임상적인 차원의 개념을 사회적 차원, 이데올로기론의 차원에 적용하려고 시도한다. 이 경우 환상을 가로지르기가 의미하는 것은 상징적 질서에 의해 부여된 동일성을 거부하는 것, 다시 말해 그가 “행위act” 또는 “본래적 행위”(Zizek 1999, p. 266; Zizek 2007b, 428쪽)라고 부르는 것이다. 요컨대 알튀세르는 호명 이론을 통해 어떻게 각각의 주체가 이데올로기 장치들 내지 (라캉 식으로 표현하면) 상징적 질서를 통해 상징적 동일성을 부여받고 있는지 해명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상징적 동일화를 넘어 그것을 가능케 하는 환상의 차원, 곧 타자 자체의 공백을 메우는 차원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어떻게 주체가 상징적 동일화, 호명을 넘어설 수 있는지 설명하는 데 실패했다. 라캉 정신분석학의 중요성은 이데올로기적인 상징적 동일화 배후에서 작동하는 이러한 환상의 차원을 밝힐 수 있게 해주고, 더 나아가 환상을 가로지르는 길을 보여주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일체의 상징적 동일화를 거부하는 “본래적 행위”에서 찾아야 한다.


흥미로운 것은 알튀세르에 대한 지젝의 이러한 비판은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비판과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스피노자주의가 후기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라는 점을 입증함으로써 제시되는데, 우리가 제사로 인용한 책(Zizek 1993; 2007b)에서 지젝은 두 단계의 논의를 통해 이를 시도한다. 우선 그는 라캉의 11번째 세미나인 󰡔정신분석학의 네 가지 기본 개념󰡕에 나오는 언급에서 출발하여 스피노자 철학의 기본 성격을 개괄한다.

라캉의 용어로 말하면 스피노자는 기표 사슬의 평준화와 같은 것을 성취한다. 그는 지식의 사슬인 S2를 명령의 기표, 금지의 기표, “아니오!”의 기표인 S1과 분리시키는 간극을 제거한다. 스피노자의 실체는 주인 기표 속에서 아무런 지주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으로서, 곧 아버지의 은유의 부정화하는 절단의 개입 이전에 존재하는 “순수 실정성”의 환유적 우주로서의 보편적 지식을 가리킨다. 따라서 스피노자적인 “지혜”의 태도는 의무론을 존재론으로, 명령을 합리적 지식으로 환원하는 것에 의해, 언어행위론의 관점에서 말하면 수행문을 서술문으로 환원하는 것에 의해 정의된다.”(Zizek 1993, p. 217; 2007b; 417쪽)

곧 지젝에 따르면 스피노자는 “유한성의 간극béance”은 소거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순수 실정성”의 보편적 우주에 대한 관조적 인식을 추구한 셈이다. 그 결과 스피노자는 존재와 당위, 존재론과 의무론, 사실과 가치, 서술문과 수행문 사이의 차이를 인지하지 못한 채 후자의 항들을 각각 전자의 항들로 환원시켰다. “그렇다면 영원의 관점에서 현상들을 관찰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된다. 우리의 유한성의 간극을 극복하는 것을 통해 우리는 현상들을 보편적인 상징적 네트워크의 요소들로 인식한다. ... 세계에 자신의 목적을 부과하는 초월적 주권자로 이해된 “신”은 내재적인 필연성 속에서 신을 파악하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력을 입증한다. 반대로 칸트는 이론 이성에 대한 실천 이성의 우위를 긍정하는데,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령의 사실은 환원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유한한 주체들로서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명령을 서술문으로 환원시킬 수 있게 해줄 만한 관조적 위치에 이를 수 없다.”(같은 곳)


지젝의 두 번째 논의는 이러한 범신론적인 스피노자 철학이 어떻게 후기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적인 환상 속에서 재현되는지, 또는 그것의 철학적 모체를 나타내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스피노자주의에서는 주체의 책임이라는 것을 사고할 수 없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스피노자는 명령이나 의무의 요소를 자신의 철학 속에서 완전히 배제해버리고 세계를 인과적 사슬의 연쇄로 환원해버렸기 때문에, 세계에서 발생하는 사건에 대해 주체는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 주체에 책임이 있다면 그것은 인과 연쇄에 대한 주체의 무지에 있을 뿐이다. ““죄”는 나를 파괴적 행동으로 내몬 원인들에 대한 나의 무지를 가리키는 낡은 용어에 불과하다.”(같은 책, p. 218; 419쪽) 그런데 이러한 책임의 부재는 곧바로 타자들에게 악에 대한 책임이 모두 전가되는 것으로 변모된다. 왜냐하면 “[스피노자주의에서는] 주체가 이러한 과정의 자율적인 담지자가 되기는커녕 부분적-측면적 연계의 연결망을 위한 하나의 자리, 수동적 근거이기 때문이다. 소통은 주체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정서들 사이에서 발생한다. “나”는 정확히 말하면, 나를 규정하면서 나의 자기 동일성의 경계들을 가로지르는 이러한 부분적인 객체적 동일화-모방의 연결망을 간과하는 한에서만 나 자신을 자율적이고 자족적인 주체Subject로 인지한다.”(같은 책, p. 218; 420쪽) 이러한 메커니즘은 우리가 “탈산업적인 소비사회”라고 부르는 것에서 발생하는 바로 그것이다. 곧 “이른바 “탈근대적 주체”는 이 메커니즘에 대한 통제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자신의 “정념들”을 규제하는 이미지들에 반응하면서 부분적인 정서들의 연결고리들에 의해 횡단되는 수동적 기반이 아닌가?”(같은 곳)


정리하자면 지젝에 따를 경우 알튀세르에게 주체들은 상징적 기표들의 연결망 속에서 부과된 동일성들에 수동적으로 호명되는 개인들인 것처럼, 스피노자주의에서도 주체들은 정서적 모방-동일시의 연결망 속에서 자신들에게 전달되는 이미지들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정념적인 주체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스피노자주의는 후기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로 기능한다고 할 수 있다. 지젝 자신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과 스피노자 철학 사이의 긴밀한 상호연관성이라는 명확한 테제를 제시하고 있는데, 그의 논변이 과연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 것인지, 그가 과연 “독서의 마스터”라고 불릴 만한 자격이 있는지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뒤에서 보겠지만, 스피노자주의에 대한 지젝의 언급은 지극히 상투적이며, 우리가 보기에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들(푸코, 데리다, 들뢰즈, 발리바르 등)에 대한 그의 비판들 역시 대개 상투적이고 피상적이다. 좀 특이한 것은 지젝의 여러 저서들을 번역한 이성민 씨는 지젝을 “‘독서의 마스터’”라고 부르면서 지젝은 “무엇보다도 먼저 정교한 독서를 통해 대결한다”(Zizek 2005, 642쪽)고 찬양하고 있다는 점이다.]


III 알튀세르와 스피노자에서 이데올로기―상상계라는 쟁점



그렇다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과 스피노자 철학 사이에는 그처럼 긴밀한 연관성이 존재하는가? 분명 양자 사이에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존재한다. 하지만 이러한 연관성은 지젝이 생각하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우리가 보기에 이데올로기론에 관한 문제에서 알튀세르와 스피노자 사이의 연관성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상상imagination” 또는 “상상계imaginaire”라는 개념에 주목해야 한다.[스피노자의 저작에서 “상상imaginatio”이나 “상상하다imaginari” 또는 “이미지imago” 같은 용어들은 매우 체계적이고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지만, 불어의 “imaginaire”에 해당하는 “imaginarius”라는 용어는 매우 적게 나타난다. 이 용어는 {윤리학}에서는 단 3 번, {신학정치론}에서는 6번 등장할 뿐이다. 더욱이 그 용법 자체도 현대적인 의미의 “상상계”라는 뜻을 담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상상 이론은 주 12)의 인용문에서 알튀세르가 주장하듯이, 근본적으로 “상상계”에 관한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어떤 의미에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은 스피노자의 상상이론을 현대적인 용어들로 다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아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 좀더 정확할 것이다. 곧 우리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의 관점에서 스피노자의 상상이론을 살펴보면, 그동안 거의 주목받지 못했던 스피노자의 상상이론이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체계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분명히 드러나며[스피노자의 상상이론에 관한 논의는 특히 영미권 주석가들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Bertrand 1983은 스피노자의 상상이론을 체계적으로 재구성하고 있는데, 알튀세르의 관점과는 약간 상이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특히 그녀는 󰡔윤리학󰡕 1부 「부록」과 󰡔신학정치론󰡕 「서문」 및 17장에서 볼 수 있는 스피노자의 상상계 이론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는 그녀가 좀더 전문적인 주석가의 관점에서 스피노자의 상상계 이론을 체계적으로 재구성하는 데 관심을 갖고 있는 데 반해, 알튀세르는 상상계 이론과 정치 이론 사이의 연관성에 주목하는 데서 생겨나는 차이로 볼 수 있다.], 반대로 스피노자의 상상이론의 관점에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조명하게 되면 라캉주의의 선입견에 가려 있던 알튀세르의 논의들이 새로운 면모를 드러내게 된다.


우선 알튀세르 자신이 스피노자 철학, 특히 그의 이데올로기론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에서 출발해보자. 알튀세르는 1974년에 출간된 {자기비판의 요소들}에서 60년대 수행된 자신의 이론적 작업이 스피노자 철학에 준거하고 있었음을 고백하면서 자신이 스피노자의 철학을 어떻게 활용했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몇 가지 사례를 들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윤리학} 1부 「부록」이다.[나머지는 스피노자의 철학 전략으로서 “신으로부터의 출발”이라는 사례, 스피노자의 반변증법적 입장, 인식의 문제에서 반초월론적 문제설정을 보여주는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참된 관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habemus enim veram ideam”라는 {지성개선론}의 명제 등이다. 좀더 자세한 논의는 Althusser 1974 참조.] 특히 그가 AIE 논문에서 전개한 이데올로기론은 {윤리학} 1부 「부록」 및 {신학정치론}에서 소묘된 상상이론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는 스피노자의 상상이론의 요점을 세 가지로 제시한다. “{윤리학} 1부 「부록」 및 {신학정치론}에서 우리는 분명 지금까지 사고된 최초의 이데올로기론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의 세 가지 특징을 담고 있다. 1) 이데올로기의 상상적 “실재성” 2) 이데올로기의 내적 전도 3) 이데올로기의 “중심”, 곧 주체라는 가상”(Althusser 1974, p. 184) [그 이외에 {윤리학} 1부 「부록」에 관한 상세한 연구는 Macherey I; Sévérac 1997 등을 참조. 이 두 사람은 {윤리학} 1부 「부록」 텍스트를 매우 꼼꼼하게 분석하고 있어서, 텍스트의 논의를 파악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우리와 분석방식이 약간 상이하고 관점에도 다소 차이가 있긴 하지만, {윤리학} 1부 「부록」을 정확하게 읽기 위해서는 반드시 참조해야 할 연구들이다.] 매우 간략하기는 하지만 이 세 가지 논점은 {윤리학} 1부 「부록」과 {신학정치론}을 분석하기 위한 좋은 지침을 제시해주며, 더 나아가 AIE 논문이 스피노자의 상상이론과 어떻게 이론적으로 연관되어 있는지 좀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알튀세르가 지적한 세 가지 논점은 다음과 같은 점을 의미한다.

1. 이데올로기의 상상적 “실재성”

이 테제는 스피노자에서 상상은 감각 및 이성이나 지성과 구별되는 하나의 인식 “능력facultas”이 아니라 세계 그 자체임을 뜻한다. 여기서 세계라는 것은 인간의 삶의 공간 그 자체를 의미한다. 알튀세르는 이미 1963년 고등사범학교에서 했던 강의에서 스피노자의 상상 개념에 대해 이런 식의 해석을 제시한 바 있고[“[스피노자에서] 상상계는 데카르트에서처럼 심리학적 범주로 인식되지 않고, 세계가 그것을 통해 사고되는 범주로 인식된다. 스피노자에게 상상계는 더 이상 심리학적 기능이 아니며, 헤겔 식의 의미에서 한 요소, 곧 심리학적 기능들이 삽입되어 있는, 이 범주들이 그로부터 구성되는 하나의 전체다. ... 상상은 마음의 능력, 심리학적 주체의 한 능력이 아니며, 하나의 세계다.”(Althusser 1996c, p. 114)], 1964년에 발표되고 1년 뒤인 1965년에 {마르크스를 위하여}에 수록된 「마르크스주의와 인간주의」에서는 이러한 관점을 좀더 상세하게 제시하고 있다. “데카르트주의자가 2백 걸음 떨어져 있는 달을 “보았”듯이 또는―그들이 이에 집중하지 않았다면―보지 못했듯이, 사람들은 결코 의식의 한 형태로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세계”의 한 대상처럼, 자신들의 “세계” 자체처럼, 그렇게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살아간다.””(Althusser 1996a, 280쪽/240쪽) 매우 도발적인 이 테제는 스피노자의 철학, 특히 {윤리학}이나 {신학정치론}의 원문을 통해 정확히 입증될 수 있으며, 여기서 언급된 “2백 걸음 떨어져 있는 달을 “보았”듯이”라는 표현 자체가 이미 {윤리학} 2부 정리 35의 주석에 나오는 사례를 가리킨다.

태양을 볼 때 우리는 이것이 우리로부터 200 걸음 정도 떨어져 있다고 상상한다. [하지만] 오류는 단순히 이런 상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식으로 상상하는 중에 우리가 태양의 진정한 거리 및 이러한 상상의 원인에 대해 무지하다는 사실에 있다. 왜냐하면 나중에 태양이 지구 지름의 600배 이상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이를 가까이 있는 것으로 상상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태양을 이처럼 가까이 있는 것으로 상상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의 진짜 거리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신체의 변용은 우리의 신체가 태양에 의해 변용되는 한에서 태양의 본질을 함축하기 때문이다.(Spinoza 1999a, 158~159쪽―강조는 인용자) [이 사례에 대한 좀더 상세한 분석은 진태원 2006 5장 참조]

이데올로기가 상상적 실재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 또 스피노자에서 상상은 인식의 한 가지 “능력”이 아니라 인간의 삶의 조건 자체, 인간학적 장 그 자체라는 것은 2절에서 살펴본 스피노자주의에 대한 지젝의 언급이 얼마나 허술한 주장인지 잘 보여준다. 지젝은 멘델스존과 야코비의 논쟁 이래 독일 관념론의 기본 신조처럼 전승되어온 스피노자주의=범신론이라는 도식을 그대로 되풀이하면서 스피노자가 “유한성의 간극”은 소거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순수 실정성의 보편적 우주의 인과연쇄에 대한 관조적 인식을 추구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스피노자 철학에 관해 이보다 더 상투적인 비난도 없을 것이다. 󰡔윤리학󰡕 1부 「부록」이나 󰡔신학정치론󰡕이 보여주듯이 스피노자가 제시하는 인간의 삶, 인간 사회의 삶은 상상으로 가득 차 있으며, 더욱이 지젝이 주장하듯이 이러한 상상은 단순히 무지의 표현이자 인식의 진전에 따라 소멸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위의 인용문이 보여주듯이 우리가 인간이라는 종에 고유한 변용에 따라 세계를 체험하고 살아가는 한에서 우리가 자연에 대해 얼마나 진전된 인식을 얻든 간에 우리는 여전히 세계를 “인간 신체의 변용의 질서와 연관ordinem & concatenationem affectionum corporis humani”(E II P18s)”에 따라 체험하고 상상하기 때문이다. 곧 스피노자에서 자연이 “사물들의 질서와 연관ordo & concatenatio rerum”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자연의 일부”로서 인간은 이를 “변용의 질서와 연관”에 따라 경험하고 인식하는 것이다. 이는 지젝 식의 표현을 따른다면 바로 “유한성의 간극”에 대한 스피노자적인 표현과 다르지 않다.

2. 이데올로기의 내적 전도

이것은 목적론이 어떻게 자연을 전도시키는가에 관한 스피노자의 분석을 가리킨다. 스피노자는 󰡔윤리학󰡕 1부 「부록」에서 목적론이 모든 편견의 뿌리를 이루고 있음을 지적한다.

내가 여기서 지적하려고 하는 모든 편견은 오직 다음과 같은 점에 의거하고 있다. 곧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모든 자연 실재들은 자신들이 그러듯이 어떤 목적을 위해 행위한다고 가정하며, 더 나아가 신 자신이 모든 것을 어떤 특정한 목적에 따라 인도한다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이 인간을 위해 모든 것을 만들었고, 자신을 숭배하게 하기 위해 인간을 만들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deum omnia propter hominem fecisse, hominem autem, ut ipsum coleret.(E I App.; G II 78―강조는 인용자)

여기서 목적론은 정신분석학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상상적 투사(投射)projection의 형태를 띠고 있다. 스피노자는 사람들이 어떤 목적을 위해 행위한다는 것을 본성적인 사실로, 그 자체로는 해로울 것이 없는 자연적 사실로 간주한다. 문제는 사람들이 인간에 고유한(또는 특정한 생물들에게 고유한) 목적 지향적 행위방식을 다른 모든 자연 실재들에게도 그대로 적용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자연 실재들은 어떤 목적에 따라 운동하지 않으며 관성 원리에 따라 작용하고 반작용할 뿐이다. 스피노자의 관점에서는 자연에는 작용인(물론 동역학적 관점에서 파악된)만이 작용하고 있을 뿐 목적인이란 존재할 수 없으며, 자연 실재들에 대해 이를 가정하는 것은 인간의 행위 방식을 자연에 투사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러한 투사가 신에게 적용될 때, 목적론은 완결된 형태를 띠게 된다. 왜냐하면 모든 자연 실재들이 어떤 목적에 따라 행위한다면, 자연 전체를 목적론적 관점에 따라 계획하고 질서지은 어떤 존재자, 초월적이고 인격적인 존재자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연에 대한 목적론은 필연적으로 목적론적 질서의 주재자인 어떤 신을 가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는 스피노자 자신이 말하듯이 “자연을 완전히 전도하는 것”이다.


이 점은 우리가 위에서 제시한 “변용의 질서와 연관”이라는 관점에 따라 달리 표현해볼 수 있다. 변용의 질서와 연관, 곧 상상계가 인간의 경험과 인식의 원초적인 인간학적 조건을 이룬다면, 이러한 상상계가 낳는 가상성은 무엇보다도 이러한 변용의 질서와 연관을 사물 그 자체의 질서와 연관으로 착각하는 데 있다. 곧 어떤 실재들의 변용 내지 이미지와 그 실재들 자체를 혼동하는 것, 다시 말해 실재들의 변용이나 이미지, 실재들의 변용의 질서와 연관을 그 실재들 자체의 질서와 연관이라고 착각하는 것에 바로 가상의 근본적인 뿌리가 존재한다. 스피노자의 고유한 용어법대로 하면, 결과를 원인으로 착각하는 것, 또는 결과만을 사고할 뿐, 그러한 결과를 낳은 원인에 대해서는 무지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배제하는 것, 바로 여기에 가상이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상상의 고유한 효과 중 하나는 자신을 산출한 원인을 배제하는 데 있다.


알튀세르의 경우는 어떨까? 이 점에 관해서도 양자 사이에는 놀랄 만한 유사성, 아니 동일성이라고 할 만한 것이 존재한다. AIE 논문의 이론적인 의의는 마르크스주의적인 이데올로기론에서 하나의 단절을 이룩하고 있다는 점에 있는데, 그것은 그 논문이 정확히 이데올로기를 기만이나 조작, 허위의식으로 간주하는 관점, 또는 포이어바흐 식으로 이데올로기의 발생 원인을 인간의 존재조건 자체의 소외 속에서 찾는 관점과 단절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그것을 “이데올로기에 관한 이데올로기적 관점”으로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해석들은, 그것들이 전제하고 의존하는 테제, 곧 이데올로기에서 세계에 대한 상상적 표상 속에 반영되는 것은 인간들의 존재조건, 따라서 실재 세계라는 테제를 글자 그대로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Althusser 1995, p. 296; 1991, 109쪽―강조는 인용자)

더욱이 이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제시된 이데올로기에 대한 관점, 곧 “완전히 실증주의적인 맥락”에서 이데올로기를 “순수한 환상으로, 순수한 꿈으로, 다시 말하면 무로 이해”(같은 책, p. 294; 104쪽)하는 관점과도 정확히 단절하는 것이다. 그 대신 알튀세르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인간들”이 이데올로기 안에서 “서로 표상/재현/상연하는se représentent” 것[이 표현의 의미에 대한 좀더 상세한 논평은 진태원 2002, 379쪽 참조]은 인간들의 현실적인 실존조건들, 그들의 현실 세계가 아니며, 이데올로기에서 그들에게 표상/재현/상연되는représenté 것은 그들이 이 실존조건들과 맺고 있는 [상상적] 관계다. 실재 세계에 대한 모든 이데올로기적, 따라서 상상적 표상/재현/상연의 중심에 잇는 것은 바로 이 관계다(같은 책, p. 297; 109쪽)” “représenter”라는 단어의 독창적인 용법은 논외로 한다면, 스피노자의 상상에 대한 논의와 알튀세르의 주장 사이의 이론적 연관성은 더할 나위 없이 명백하다.

3. 이데올로기의 “중심”: 주체라는 가상

이 테제는 목적론적 가상의 중심에는 자기 자신을 세계의 중심, 자연의 중심으로 간주하는 인간들의 착각이 놓여 있음을 가리킨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윤리학󰡕 1부 「부록」에서 스피노자의 분석은 크게 두 가지 논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스피노자는 신이 목적론적으로 행위한다는 가정의 밑바탕에는 좀더 근본적인 상상적 투사가 존재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것은 바로 신과 인간의 특별한 상호 의존 관계에 관한 투사다. 앞에서 인용한 󰡔윤리학󰡕 1부 「부록」 인용문에서 강조한 부분에서 드러나듯이 이러한 상호 의존 관계는 이중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첫째는 “신이 인간을 위해 모든 것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신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 인간을 특별히 총애하며, 인간을 위해 모든 것, 모든 자연 실재들을 창조했다. 이는 곧 신이 인간에게 자연 만물을 자신의 수단으로, 자신을 보존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음을 의미한다. “이로부터 그들은 자연 만물을 자신들의 이익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만 간주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이 수단들을 발견하기는 했지만 스스로 이 수단들을 공급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기 때문에, 여기에서 이러한 수단을 자기들이 사용할 수 있게 마련해준 다른 누군가가 있다고 믿을 만한 이유를 발견하게 되었다.”(E I App.; G II 78)


그러나 그렇다면 왜 신은 이처럼 인간을 총애하는가? 무엇 때문에 인간에게 이러한 특권, 인간이 모든 것을 자신의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했는가? 그 이유는 두 번째 의존 관계를 통해 해명된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을 숭배하게 하기 위해서”다. 다시 말해 신은 인간으로부터 숭배를 받기 위해, 공경을 받기 위해, 인간을 위해 자연 만물을 창조했으며, 또 인간에게 그것들을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 여기서 당연히 다음과 같은 의문이 들게 된다. 그러나 왜 신이 인간의 숭배, 인간의 공경을 필요로 하는 것일까? 왜 무한한 신, 지고하게 완전한 신이 유한하고 불완전한 인간의 숭배, 인간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일까? 스피노자는 󰡔윤리학󰡕 1부 「부록」에서 이 질문에 답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예 질문 자체를 제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스피노자는 그 이전에 목적론 자체를 가상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 목적론을 타당한 것으로 전제했을 때에만 의미 있게 주고받을 수 있는 이러한 질문과 답변을 불필요한 것으로, 신학자들의 가상, 심지어 “착란delirare”에 불과한 것으로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이는 물론 스피노자가 이러한 목적론적 가상이 지니는 실제적인 효력을 무시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여기서 스피노자의 목표는 이러한 가상의 효력을 부각시키는 게 아니라, 가상을 낳는 인간학적 원인을 분석하는 데 있을 뿐이다. 사실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 5장과 17장, 특히 17장에서 히브리 백성들이 모세의 중개를 통해 야훼와 맺는 계약, 다시 말해 우리가 방금 말한 신과 인간의 특별한 상호 의존 관계의 원형을 이루는 신과의 계약에 대한 분석을 제시하고 있다. 이 점에 관해서는 뒤에서 다시 다루겠다.]


둘째, 그 대신 그는 관점을 바꿔서 목적론적 가상을 낳게 만든 원인이 무엇인지 질문하고 있으며, 이런 관점에서 신과 인간의 특별한 상호 의존 관계를 설명하려 하고 있다. 이를 위해 먼저 스피노자는 목적론을 낳는 본질적인 인간학적 특성을 지적하고 있다.

여기서는 모든 사람이 인정해야 하는 것, 곧 모든 인간은 실재의 원인에 대해 모르고서 태어난다는 것, 그리고 모든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충동을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충동을 의식한다는 것을 기초로 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E I App.; G II 78) [“satis hic erit, si pro fundamento id capiam, quod apud omnes debet esse in confesso; nempe hoc, quod omnes homines rerum causarum ignari nascuntur, & quod omnes appetitum habent suum utile quaerendi, cujus rei sunt conscii.”]

스피노자는 이 문장에서 두 가지 본질적인 점을 대비시키고 있다. 하나는 인간은 실재의 원인에 대해 모르고 태어난다는 것, 따라서 인간에게는 본유 관념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충동을 지니고 있고, 또 이러한 충동을 의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첫 번째 논점은 상상 개념 자체에서 따라 나온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스피노자에게 모든 인식은 항상 신체의 변용의 질서와 연관을 통해서 이루어지며, 단지 외부 실재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인간 자신의 신체 및 인간 자신의 정신에 대한 인식까지도 이러한 변용의 질서와 연관에 의해 가능하기 때문이다(2부 정리 19와 정리 23 참조). 그런데 이러한 신체의 변용의 질서와 연관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신체의 역량의 정도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으며(2부 정리 14), 신체의 변용들을 인식하는 정신의 소질, 능력도 그에 따라 변화한다. 하지만 스피노자에게 아이 또는 유년 시절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매우 취약한 상태를 가리키기 때문에[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아마도 󰡔윤리학󰡕 5부 정리 39의 주석일 것이다. 스피노자의 인식론 및 윤리학을 이해하는 데서 매우 중요한 문제임에도 스피노자에서 아이/유년시절의 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는 연구는 매우 드물다. 정리 39의 주석에 대한 논평은 Macherey V, pp. 184-85를 참조하고, 아이/유년시절의 문제에 관한 최근의 좋은 논의는 Zourabichvili 2002 2부 참조.], 인간이 탄생의 시점에 가까이 있으면 있을수록 인간의 신체적, 정신적 능력은 취약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본유관념 같은 것은 생각할 수 없으며, 인간은 “실재의 원인에 대해 모르고서 태어난다”고 할 수 있다.[이 점에서 스피노자는 경험론자들, 특히 홉스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스피노자에게 인간의 본질은 충동 또는 욕망이기 때문에, 인간은 무지한 채로 태어나지만 본성적으로 어떤 충동을 지니고 있으며, 또 이 충동을 의식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인간학적 조건에서 비롯한 이 양자의 괴리가 좁혀지지 않는 상태에서는(이는 인간이 신체적, 정신적 능력을 향상시킴으로써만 가능하다) 인간은 목적론적 가상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고, 이를 자연 현상들에 대해 투사할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목적론적 가상을 비롯한 인간의 모든 가상은 한편으로 원인에 대한 무지와 다른 한편으로 결과(충동)에 대한 의식 사이의 괴리에서 유래한다고 할 수 있다.


알튀세르에서 이데올로기의 중심, 곧 주체라는 가상은 주지하다시피 “호명” 테제를 통해 제시된다. 지젝을 비롯한 많은 라캉주의 주석가들은 적어도 호명 테제에서만큼은 알튀세르가 라캉에게 분명한 이론적 빚을 지고 있으며, 더 나아가 라캉의 이론을 잘못 해석해서 활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점에서는 그들의 이야기도 일리가 있는데, 왜냐하면 호명 테제에 나오는 몇몇 표현들, 특히 대문자 주체와 작은 주체들 사이의 “거울 관계” 내지 “거울 구조”라는 표현은 라캉의 용어법에서 기원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가령 알튀세르의 표현법은 라캉의 11번째 세미나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차용했다고 볼 수도 있다. “주체는 타자Autre의 장에 예속됨으로써만 주체일 뿐이다.”(Lacan 1973, p. 172) 단 라캉은 대문자 주체 대신 대문자 타자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하지만 용어법 자체는 라캉에서 유래했다고 하더라도 그 내용 자체는 라캉적이라기보다는 스피노자적이라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이는 우선 알튀세르가 호명 테제를 예시하기 위해 들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모세가 신과의 계약을 맺고 이를 바탕으로 히브리 국가를 구성하는 사례라는 점에서 알 수 있다. “따라서 신은 “주체Subject”이고 모세 및 신의 백성인 수많은 주체들은 신의 대화자-피호명자, 곧 그의 거울들이고 반영들이다. 인간들은 신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지 않았던가? 모든 신학적인 성찰이 증명하듯이 신이 인간들 없이 완벽하게 지낼 “수 있다”고 하더라도 ... 인간들이 신을 필요로 하고 주체들이 “주체Subject”를 필요로 하듯이 신은 인간들을 필요로 하고 “주체”는 주체들을 필요로 한다.”(Althusser 1995, p. 317; 1991, 124쪽) 그런데 이는 스피노자가 󰡔신학정치론󰡕 17장에서 히브리 신정국가의 형성을 설명하기 위해 제시하고 있는 이중적 계약의 사례 바로 그것이다.


이 점을 이론적ㆍ정치적 측면에서 좀더 부연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우회를 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제사로 인용한 󰡔“자본”을 읽자󰡕의 한 구절에서 알튀세르는 스피노자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이하 3절의 내용은 발리바르의 󰡔스피노자와 정치󰡕 「역자 해제」 중에서 270-276쪽의 내용을 다소의 수정을 거쳐 전재한 것이다.]

읽기라는 문제, 따라서 글쓰기/기록하기라는 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했던 인물인 스피노자는 또한 역사이론과 동시에 직접적인 것의 불투명성에 관한 철학을 처음으로 제시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Althusser 1996b, p. 8. 강조는 알튀세르)

스피노자에 대한 알튀세르의 논의 중에서 제일 덜 주목받고 있지만, 또한 제일 놀라운 사례 중 하나로 꼽힐 만한 이 주장은 겉보기에는 매우 당혹스러운 주장이다. 사실 스피노자의 저작에서 역사에 관한 언급을 거의 찾아볼 수 없고, 또 역사에 대한 고찰이 전혀 스피노자 철학의 중심 주제가 아니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는 엉뚱한 소리로 들릴 수 있다. 더 나아가 역사철학이 18세기 말 계몽주의 이후, 특히 독일 관념론에서 하나의 철학적 주제로 등장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알튀세르의 지적은 시대착오적인 주장이라는 비난까지 받을 만하다.


그런데 여기서 알튀세르는 스피노자의 역사이론은 그것 혼자서만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동시에” “직접적인 것의 불투명성에 관한 철학”과 결부되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마치 후자가 없이 전자는 존재할 수 없다는 듯이, 그리고 이 양자를 결부시켰다는 점이야말로 스피노자의 고유한 철학적 업적이었다는 듯이 말이다. 그리고 또한 그는 “읽기”라는 문제, “글쓰기/기록하기”라는 문제와도 결부시키고 있다.


왜 알튀세르는 스피노자가 거의 언급하지도 않은 그의 “역사이론”에 주목하고 있을까? 그리고 이 역사이론이 “직접적인 것의 불투명성”과 어떤 관계에 있을까? 더 나아가 이는 “읽기”나 “글쓰기/기록하기”의 문제와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 이처럼 의문들은 끊임없이 생겨나지만, 알튀세르는 스피노자에 관한 그의 다른 언급들과 마찬가지로, 대담한 주장을 한 마디 던져놓은 다음, 마치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는 듯이 다른 논의로 성큼 건너뛰고 있다.


바로 이 문제들과 관련하여 발리바르는 󰡔스피노자와 정치󰡕에서 흥미 있는 통찰을 제공해주는데, 왜냐하면 그는 󰡔신학정치론󰡕에서 하나의 역사이론(“역사철학”이 아니라)을 발견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그는 성서에 나타나 있는 히브리 신정국가의 구성 및 전개과정을 분석하고 있는 󰡔신학정치론󰡕 17장만이 아니라 성서에 대한 역사적 비평을 시도하고 있는 전반부(곧 1장-15장)의 분석 역시 하나의 역사이론을 함축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먼저 그는 스피노자의 성서 비평은 “이차 수준의 역사”(또는 스피노자의 표현대로 하면 “비판적 역사”)를 구성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성서는 히브리 백성들의 상상에 기초를 둔 하나의 역사적 담론이며, 스피노자의 성서 비평은 이러한 역사적 담론에 대한 이차적 담론, 곧 비판적 역사라는 것을 뜻한다. 더 나아가 그는 성서는 바로 서사敍事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서사는 히브리 민족의 고유한 역사적 기록/글쓰기의 관행에 기초를 두고 있음을 지적한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알튀세르의 표현대로 “글쓰기/기록”이라는 문제, 그리고 이에 대한 “읽기/독해”의 문제를 역사의 문제이자 철학의 문제로 제기한 최초의 인물인 셈이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스피노자의 역사이론을, 알튀세르 식으로 말하자면 “직접적인 것의 불투명성”, 곧 대중들의 상상이라는 문제와 결부시킨다. 발리바르의 분석에서 직접적인 것의 불투명성/상상계는 두 가지 측면에서 제시되고 있다.


우선 자신들의 역사에 대한 대중들의 무지가 있다. “이러한 이차 수준의 서사는 재구성될 수 있는 한에서의 사건들의 필연적인 연쇄과정 및, 자신들을 움직이는 원인들 대부분에 대해 알지 못하는 역사적 행위자들이 자신들의 역사의 “의미”를 상상하는 방식을 자신의 대상으로 한다.”(Balibar 2005, 152쪽) 대중들의 상상은 비판적 역사의 필연적인 구성 요소인데, 왜냐하면 이러한 비판적 역사의 소재를 이루는 성서 내지 히브리 인민의 삶 자체가 상상의 요소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대중들의 삶이 상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대부분의 인간들이 자신들의 삶의 조건을 구성하는 실제 원인에 대해 알지 못하고, 이를 상상에 따라 재구성하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앞서 논의한 대로 스피노자의 일반적인 인간학적 테제, “인간들은 자신들의 의욕과 욕구는 의식하고 있지만, 그들이 무지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야기시킨 원인들에 대해서는 꿈에서조차 생각하지 않는다"(󰡔윤리학󰡕 1부 「부록」)는 테제에서 따라 나온다.


그 다음 히브리 신정국가의 구성의 기초가 되었던 정치적 상상의 요소가 있다.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 17장에서 성경에 나오는 히브리 신정국가의 구성을 분석하고 있는데, 그가 주목하는 것은 히브리 국가의 구성이 일종의 계약에 따라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계약은 단순한 계약이 아니라 이중적인 계약의 형식을 띠고 있다. 곧 이는 주권자와 신민들 사이에 맺어지는 정치적 계약이면서 동시에 야훼라는 신에 대한 개개의 신자들(곧 개개의 히브리인들) 사이에 맺어진 종교적 계약이기도 하다.[이 점에 관한 좀더 상세한 논의는 Balibar 1985; 진태원 2004 참조] 따라서 히브리 백성들에게 신은 종교적인 경배의 대상이면서 또한 정치적 주권자이며, 신의 계율에 대한 위반은 동시에 국법의 위반을 의미했다. “요컨대 시민법과 종교는 서로 엄격하게 구별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 국가는 신정 국가라 불릴 수 있었다.(Spinoza 1999b 17장 7-8절, p. 546)”


스피노자 자신이 말하고(“이 모든 것은 사실이라기보다는 의견opinione magis quam re에 속하는 것이다.” Spinoza 1999b 17장 8절, 모로판, 546) 발리바르가 지적하듯이 이러한 이중적 계약이라는 것은 물론 하나의 허구다. 하지만 이러한 허구는 매우 실제적인 효과를 낳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허구를 통해 하나의 국가가 구성될 수 있었고, 적어도 모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놀랄 만한 안정과 번영을 이룩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허구가 이처럼 중요한 결과를 낳을 수 있었던 이유는 신을 각 개인의 신으로서만이 아니라 또한 히브리 민족 전체의 신으로, 따라서 히브리 국가의 유일한 주권자로 만듦으로써, 각자가 신에게 바치는 절대적 헌신과 복종이 동시에 국가에 대한 헌신과 복종으로 되게 만들었다는 점에 있다.


여기서 이런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왜 이러한 이중적 계약이 필요한가? 스피노자에 따르면 이는 무엇보다도 오랜 노예 생활 때문에 스스로 국가를 구성할 만한 역량을 갖추지 못한 히브리 인민들의 “미개인 같은rudis”(Spinoza 1999b 5장 10절, p. 222) 심성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의 허구에 기초한 히브리 신정국가는 역사적으로 유일한 국가인 것처럼, 일반적인 설명적 가치를 갖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는 발리바르가 보여준 것처럼 좀더 일반적인 함의를 갖고 있다. 곧 히브리 신정국가에 대한 스피노자의 분석은 민주주의(또는 국가 일반)에 대한 법적 관점의 한계를 보여준다.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정의 이중적 측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정은 한편으로 민주정과 등가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신과의 계약을 통해 신에게 모든 권력을 부여하고 자신들을 신의 백성으로 재인지함으로써, 히브리인들 모두는 신 앞에서 동등한 신의 백성들, 신의 시민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상상적 민주정”은 민주정의 핵심인 집합적 권리, 집합적 주권을 “다른 무대”로 옮겨놓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 곧 신정에서 인민들 스스로가 동등하게 집합적 주권을 행사할 수 있다면, 이는 신이라는 진정한 주권자가 초월적인 자리를 차지하는 한에서다(곧 신의 거주지로서 신전이 특별한 경배와 존경의 대상이 되는 한에서). 따라서 신정은 집합적인 주권이 초월적인 신의 자리, 비어 있는 상징적 자리의 매개를 통해서만 실행될 수 있는 국가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발리바르의 질문이 나온다.

그렇다면 이제 고유한 의미의 민주정으로 되돌아가 보자. 개인들이 신과의 동맹이라는 허구(곧 주권의 상상적인 자리 이동) 없이도 명시적인 “사회계약”에 따라 직접 집합적 주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판명되면, 문제는 완전히 사라진다고 말할 수 있는가? 대중들의 미신은 차치한다 해도, 이는 분명히 그렇지 않다. 권리의 동등성과 의무의 상호성 위에 구성된 민주 국가는 개인적 의견들의 결과인 다수결 법칙에 따라 통치된다. 그러나 다수결 법칙이 효과적으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주권자가 공적인 이익과 관련된 활동을 명령할 수 있고 또한 그것이 존중받을 수 있게 만드는 절대적 권리를 지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이것 외에도 또한 야심들보다는 이웃에 대한 사랑을 선호하는 것, 곧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의 필요성에 대한 합의가 지배하고 있어야 한다.(Balibar 2005, 77쪽)

따라서 얼핏 보기에는 일회적인 것에 불과한 히브리 신정국가는 사실은 정치에 대해, 민주주의에 대해 중요한 보편적 교훈을 제공해준다.


그것은 첫째, 법적 제도만으로는 민주주의(또는 국가 일반)는 충분한 안정성을 확보할 수 없으며, 대중들의 정념적 삶을 조절할 수 있는 별도의 메커니즘 내지는 장치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둘째, 하지만 정념적 삶을 조절하는 메커니즘으로서 종교는 근본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 히브리 신정국가가 개인들의 종교적 삶과 정치적 삶을 일체화함으로써 상당한 기간 동안 정치적 통합을 이뤄내긴 했지만, 이러한 국가의 통합, 일체화는 그 자체가 정념적인 양가성에 지배받고 있다. 왜냐하면 신자들끼리의, 국민들끼리의 놀라운 유대는 신과의 동일시/정체화를 매개로 한 서로에 대한 정념적 사랑에 기초하고 있는데, 이러한 사랑의 이면은 초월적인 신의 감시와 처벌에 대한 공포와 잠재적인 적으로서 이웃에 대한 일반화된 증오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예수는 이처럼 종교적 삶과 정치적 삶을 일체화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삶을 정치적, 교권적 권위로부터 분리하여 이를 각자의 믿음과 판단에 따른 윤리적 실천으로 전환시켰다는 점에서 하나의 문화혁명을 이룩했다. 하지만 이는 신자로서의 개인들을 정치적 권위만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 자체로부터 분리시켰으며, 또 그에 비례하여 이웃에 대한 사랑을 핵심으로 하는 신의 말씀을 내면화된 도덕법으로 전환시켰다는 점에서 또 다른 한계를 지니고 있다.


셋째, 상상계가 개인의 삶 및 사회적 삶에서 구성적인 요소로 존재하는 한에서 대중들은 ‘자기 자신’(이렇게 말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과 합치할 수 없다는 것, 곧 대중들은 온전한 자율적 주체로 성립할 수 없다는 점이다. 다른 식으로 말하면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다. 상상계가 인간의 삶의 장소 그 자체인 한에서, 다시 말해 환원 불가능한 인간의 유한성의 조건 그 자체인 한에서, 민주주의의 근본 원리 또는 민주주의의 성립 가능성의 조건으로서 전제되어 있는 대중들의 자기 통치는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은 전적으로 부정적인 것인가? 겉보기와는 달리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대중들의 자기 통치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민주주의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민주주의는 항상 경향적으로만, 갈등적인 운동으로서만 존재할 뿐이라는 점을 뜻하기 때문이다. 곧 이는 유토피아로서의 민주주의 대신 현실적인 운동으로서 민주주의에 대한 사고의 가능성을 마련해준다.


이제 우리가 위에서 출발했던 알튀세르의 호명이론의 문제로 되돌아가보자. 지금까지의 분석은 알튀세르가 AIE 논문에서 제시한 호명이론이 외양에도 불구하고 또는 그것이 채택하고 있는 몇몇 용어법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스피노자가 󰡔신학정치론󰡕에서 전개한 이론적 분석과 놀랄 만한 이론적 연관성을 지니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1) 이는 우선 스피노자의 상상계 이론 및 그것을 원용한 히브리 신정국가에 대한 분석은 알튀세르의 AIE 논문과 마찬가지로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분석, 국가의 형성과 재생산에 대한 분석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2) 더 나아가 알튀세르가 대주체와 작은 주체들(및 그 매개자로서 정치 지도자) 사이에 존재하는 호명 관계라고 부른 것은 스피노자가 히브리 신정국가의 구성 및 그것이 보여준 놀랄 만한 지속성을 설명하기 위해 제시한 이중적인 계약관계와 정확히 합치하는 것이다.


3) 히브리 신정국가에 대한 스피노자의 분석은 알튀세르의 호명 이론이 수많은 오해와 달리 상상계 내부의 관점을 표현하는 것임을 시사해준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 특히 그의 호명 이론은 기능주의적인 관점을 대변하는 것으로 널리 비판받아왔다. 다시 말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은 각각의 “개인들”이 “주체들”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항상 이미 이데올로기에 의해 호명되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지배 체계에 대한 저항의 가능성을 사고할 수 없게 만든다고 비판받아왔다(이런 측면에서 보면 지젝의 비판은 종래에 제기되던 비판을 라캉 정신분석학의 관점에서 좀더 세련되게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가 AIE 논문이 불러일으킨 논쟁(및 오해)에 대해 해명하고 있는 「AIE에 대한 노트」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이데올로기 내부에는 항상 계급투쟁이 존재하고 있다.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들의 기능이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것이라면 그 이유는 저항이 있고, 저항이 있는 것은 투쟁이 있기 때문이며, 이 투쟁은 결국 계급 투쟁에, 때로는 가까이에서, 그러나 대개는 멀리서 응답하는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인 반응이다.”(Althusser 2007, 332쪽) 그런데 계급투쟁에 대해 말하는 것은 항상 집단에 대해, 또는 더 나아가 대중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반면 호명 이론에서는 집단이나 대중들이 아니라 항상 개인이나 주체(또는 복수로 개인들이나 주체들)가 문제가 되고 있다. 이는 알튀세르가 말하는 호명의 메커니즘은 항상 사회적 투쟁의 현실적 장이 추상된 가운데, 집단이나 대중들이 이미 개인들이나 주체들로 해체된 가운데 사고되는(또는 “상연되는représenté”) 것임을 말해준다. 물론 이는 이러한 추상이나 해체가 전혀 허구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과의 계약에 대한 상상계가 히브리인들에게 지극히 실재적이었듯이, 이데올로기의 상상계 내부에서는 이는 지극히 실재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알튀세르에게 주체는 상상계에 속하는 것이지 결코 라캉적인 의미에서 상징적인 차원이나 실재적인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지젝은 알튀세르를 비판하면서 지속적으로 “상징적 동일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만, 알튀세르에게 이는 용어모순과 같은 표현이다. 그에게 주체가 지니고 있는 동일성은 상상적인 차원에 있는 것이며, “동일시identification” 역시 상상적인 것이다.[이 점에 관해서는 특히 󰡔마르크스를 위하여󰡕에 수록된 「“피콜로 극단”. 베르톨라치와 브레히트(유물론적 연극에 대한 노트)」 참조. 이 글은 아마도 이 책에 수록된 글 중 가장 주목받지 못한 글이라고 할 수 있지만,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글이다. 발리바르는 󰡔마르크스를 위하여󰡕 「1996년 서문」에서 의미심장하게도 이 글이 일종의 “도둑맞은 편지”일 것이라고 쓰고 있다. Balibar 1996 참조.] 하지만 여기서 주의할 점은 알튀세르에게 상상계란 라캉적인 의미의 상상계, 또는 좀더 그릇된 것이기는 하지만, 지젝의 의미에서의 상상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따라서 알튀세르에게 무의식의 주체라는 차원이 없다고, 호명 이전에 존재하는 주체를 사고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의 이데올로기론의 논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라캉적인 도식이나 최근에는 지젝 식의 해석을 그것에 덧씌우는 것에 불과하다. 그에게 주체는 상상적인 주체, 하지만 삶의 기반으로서 상상계 속에서 자신에게 부여된 동일성을 갖고 살아가는 주체를 가리킨다.


스피노자와 관련하여 알튀세르가 차이를 보이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전자에게는 역사적으로 특수한 형식(히브리 신정)으로 나타났던 것이 후자에게는 보편적인, 초역사적인 메커니즘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발리바르가 보여주듯이 히브리 신정이 보편적인 함의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알튀세르가 이를 호명 이론으로 발전시킨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이 경우 제기되는 또 다른 문제는 알튀세르가 호명의 메커니즘을 부정적인 것으로만, 곧 지배 계급의 예속의 메커니즘으로만 사고했다는 점이다. 히브리 신정의 경우 호명은 대중들의 무능력을 전제한 가운데 이루어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가상적이고 부정적인 측면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그것이 히브리 인민들의 집단적인 생존의 전략(무의식적인?)이었으며, 또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반드시 부정적인 것으로만 치부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발리바르 식으로 표현하면(Balibar 1991), 히브리 신정국가에 고유한 이데올로기적 호명은 대중들의 해방에 대한 열망의 (얼마간 가상적인) 표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 스피노자 식으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그 나름대로 민주주의적인 경향의 표현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알튀세르가 스피노자의 상상계 이론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과 응용의 능력을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간파하지 못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 점일 것이다.


물론 이는 지젝(및 다른 비판가들)이 주장하듯이 알튀세르에게 호명의 메커니즘이 “기능주의적인” 관점에서만 사고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알튀세르는 이미 AIE 논문 말미의 “보론”에서 이데올로기 내부에서는 항상 계급투쟁이 진행된다는 것, 곧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대중적인 저항이 항상 이미 존재한다는 것을 지적한 바 있고, AIE 논문이 불러일으킨 논란에 대해 답변하는 글(Althusser 1976)에서는 이 점을 좀더 명시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 특히 그의 호명 이론이 기능주의적이라거나 저항의 가능성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비판은 적절한 것이 못된다. 다만 알튀세르는 호명은 개인들 및 대중들의 실존과 행동의 상징적 지주이면서 동시에 장애물을 이룬다는 것, 따라서 호명 그 자체가 계급투쟁 및 지배와 저항의 쟁점이 된다는 것을 충분히 해명하지는 못했다고 할 수 있다.



IV. 지젝의 난점들


지젝의 작업은 라캉의 정신분석학, 특히 그의 후기 작업의 요소들을 도입함으로써 현대 이데올로기론의 새로운 장을 열어놓았다. 지젝 이전까지 이데올로기론에서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주로 상상계-상징계라는 쌍을 통해 논의되었는데, 이는 라캉의 작업이 (옳든 그르든 간에) 대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 특히 그의 호명이론을 매개로 도입되고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반면 지젝은 이전까지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던 “실재계”의 차원을 과감하게 이데올로기론으로 이끌어들이면서 이데올로기론 및 알튀세르와 라캉의 관계에 대해 전혀 새로운 해석을 제시했다. 사실 라캉의 후기 작업이 RSI론[이는 각각 “le Réel”, “le Symbolique”, “l'Imaginaire”, 곧 “실재계”, “상징계”, “상상계”의 약자표시다]으로 통칭되는 삼원성(특히 실재계를 중심으로 한)에 따라 구조화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영미권에서 지젝 이전의 라캉 수용은 불완전하고 다소 왜곡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젝의 진정한 독창성은 라캉의 이론(및 독일 관념론 철학)을 이데올로기론 및 사회이론으로 번역하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드문 몇몇 예외를 제외한다면[드문 예외들 중 특히 장 클로드 밀네의 작업을 들 수 있다. Milner 1983.], 그 이전까지는 누구도 실재계를 포함한 라캉의 RSI론 전체를 이데올로기론과 사회이론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또 그것이 현대 사회의 여러 현상들을 설득력 있게 설명해줄 수 있다고 기대하지도 않았다. 반면 지젝은 다수의 저작들을 통해 라캉의 정신분석학 이론이 이데올로기론 및 문화분석론으로서도 기능할 수 있다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젝의 이론적 작업에 난점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는 특히 그가 시도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론에 대한 개조에서 잘 나타난다. 가령 그는 우리가 위에서 제시했듯이 알튀세르의 이론에 대해 라캉의 정신분석학이 우월한 이유를 이 후자가 호명을 넘어서는 길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찾는다. 왜냐하면 알튀세르는 특히 AIE 논문에서 호명은 반드시 성공한다는 것을 이론화함으로써, 그의 의도와 달리 자본주의적인 재생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제시하지 못한 채 오히려 기능주의에 빠져든 반면, 라캉은 욕망의 그래프나 “무의식의 주체”라는 개념을 통해 상징적 질서의 공백을 드러내고 호명을 넘어설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문제는 지젝이 주장하듯이 라캉의 이론이 이러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환상을 가로지르기”가 단지 정신분석학의 임상적인 차원이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에서 가능해야 한다는 점이다. 지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환상을 가로지르’면서 동시에 증상과의 동일시를 완수해야 한다. 우리는 ‘유대인’에게 전가된 속성들 속에서 우리의 사회체계 자체의 필연적인 산물을 확인해야 한다. 우리는 유대인에게 귀속된 ‘과잉분’ 속에서 우리 자신에 대한 진실을 확인해야 한다.”(Zizek 1989, 223쪽) 반복되는 “해야 한다”의 명령형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지젝에게 “환상을 가로지르기”는 궁극적으로 윤리적 문제라는 점이 드러난다. 윤리는 물론 비판적인 지식인들이나 대중이 갖추어야 할 중요한 덕목이며, 올바른 정치적 행위를 위한 규범적 조건이기도 하다. 하지만 사회이론 또는 사회적 분석의 차원에서 윤리적 명령이 어떤 의의를 지닐 수 있을까? 특히 이데올로기론의 차원에서는 윤리적 명령이 어떤 의미에서 중요할까? 이는 “우리는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야 한다” 내지 “우리는 호명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식의 명령과 다른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하지만 “환상을 가로지르기”라는 해결책이 제기하는 좀더 중대한 문제는 다른 데 있다. 이런 질문을 던져보자. 환상을 가로지르기는 어떻게 가능한가? 우리가 “‘환상을 가로지르’면서 동시에 증상과의 동일시를 완수”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지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회엔 항상 상징적 질서로 통합될 수 없는 어떤 적대적인 갈등이 가로지르고 있다. 사회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환상의 목적은 바로 진정으로 존재하는 사회에 대한 하나의 비전을 구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적대관계에 의해 분할되지 않으며, 각 부분들 사이의 관계가 유기적이고 상보적인 사회에 대한 하나의 비전을 구축하는 것이다.”(Zizek 1989, 220쪽) 우선 이데올로기적인 환상의 핵심이 “유기적이고 상보적인 사회에 대한 하나의 비전을 구축하는 것”이라는 주장은 실소를 자아내는데, 과연 오늘날 누가 이처럼 아름다운 “통합주의적 관점”, “사회를 하나의 유기체적 통일체”(같은 곳)로 바라보는 관점을 믿을지, 또 과연 지배 계급이 자신들의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이런 식의 관점을 설파할 것인지 믿기 어렵기 때문이다.


좀더 심각한 것은 이데올로기적 환상에 대한 지젝의 관점 자체다. 그에 따르면 이데올로기적 환상은 “하나의 비전을 구축하는 것”이다. 그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반유대주의 이데올로기에서 유대인을 하나의 물신으로 제시하는 방식을 예로 든다. 곧 유대인은 “이 통합주의적인 비전과 적대적인 갈등에 의해 분열된 실제 사회 간의 거리”를 메우기 위한 물신, “건전한 사회조직을 부패시키는 이질적인 신체, 외부적인 요소”다. 따라서 “사회적인 환상이라는 개념은 적대라는 개념에 대한 필수적인 대응물이다. 환상은 정확히 적대적인 균열을 은폐하는 방식이다. 바꿔 말해서 환상은 이데올로기가 자기 자신의 균열을 미리 고려해 넣는 방식이다.”(같은 책, 221쪽)


두 가지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첫째, 지젝이 말하는 사회적인 환상 또는 이데올로기적 환상이 비전을 구축하는 것이라면, 결국 환상이란 기만적인 조작 및 그것이 산출하는 허위의식과 같은 것이 아닌가? 하지만 아마도 지젝이나 지젝주의자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답변할 것이다. 왜냐하면 환상이 작동하는 것은 의식 내지 담론의 수준이 아니며, 이데올로기적 효과의 최종적인 버팀목으로서 향락의 수준이기 때문이다. 곧 이데올로기적 환상은 우리의 향락 자체를 구조화하는 방식이다. 유대인의 예를 든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유대인을 증오하고 혐오하고 배척하는 것은 이런저런 구체적이고 합리적인 근거들 때문이 아니라, 그가 바로 유대인이기 때문이다.


둘째, 그렇다면, 우리가 앞서 제기한 질문이 다시 제시된다. 이러한 사회적 환상을 가로지르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사회적 환상이 기만이나 허위의식의 문제라면 환상을 가로지르는 것은 원칙적으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사실상으로는 매우 힘들지 몰라도). 비판적인 분석과 대중적인 계몽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적 환상이 의식이나 담론의 차원이 아니라 향락의 수준에 위치하고 있다면, 곧 우리 욕망의 가장 집요하게 내밀한 차원의 문제라면, 이것을 어떻게 가로지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심각한 것이 된다. 어떻게 어제까지 그토록 증오했던 유대인들을 더 이상 증오하지 않는 일이 가능하게 될까? 유대인(또는 오늘날이라면 이주 노동자들)은 우리 사회의 타락의 원인이 아니라 사실은 가장 큰 피해자라고 일깨우면 될까? 유대인(이주 노동자들)이 실제로 우리 사회가 직면한 문제들과 무관하다는 경험적인 자료들을 축적해서 입증하면 될까? 하지만 스피노자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볼 수 있듯이 정서와 인식, 욕망과 지식을 철저하게 분리하는 지젝의 관점에서 과연 이것이 가능할지 의문이다.

지젝의 작업에서 핵심적인 문제가 바로 이것일 텐데, 지젝은 이 문제에 대해 줄곧 윤리적 태도, 사회의 근본적인 변혁의 가능성을 믿고 또 그것을 추구하려는 윤리적 태도(그의 표현대로 하면 “행위”)가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가령 다음과 같은 구절이 그렇다. “버틀러와 대조하여, 라캉이 내기에 걸고 있는 것은, 심지어/또한 정치에서도, 바로 그 근본적인 환상을 ‘횡단’하는 좀더 근본적인 제스처를 성취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환상적 중핵을 교란시키는 그와 같은 제스처만이 본래적 행위인 것이다.”(Zizek 1999, p. 266; Zizek 2005, 428쪽; Zizek 2007a). 좋은 이야기다. 그런데 대중들의 저항 없이 어떻게 사회의 근본적인 변혁의 가능성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리고 환상을 가로지르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보여주지 않고서 어떻게 대중들의 윤리적 각성 및 저항을 기대할 수 있을까?[지젝에 대한 좌파 이론가들, 특히 숀 호머의 비판을 반비판하면서 토니 마이어스는 다음과 같이 대꾸한다. “다른 한편으로, 호머는 지젝이 강조한 ‘행위’를 ‘세계를 바꾸기 위한 진실한 방법’으로 확대 해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행위가 우리의 인식 지평을 바꾼다고 할 때, 행위의 출현 이후 어떤 세계가 나타날지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지젝은 진술 불가능한 것을 말하기보다는 행위의 가능성 자체를 지속시키는 데 관심을 가진다. 지젝이 지적하듯이 “오늘날 정치적 공간이 구조화되는 방식은 점점 더 행위의 출현을 힘들게 한다.” 그래서 지젝은 자본주의적 삶의 지평을 끊임없이 이론화함으로써 행위를 위한 장소를 규명하는 데 자신의 에너지를 집중한다.”(마이어스 2004, 225쪽) 마이어스는 몇 가지 측면에서 기본적인 혼동을 보여준다. 우선 문제가 되는 것은 행위의 출현 이후 어떤 세계가 나타날지 아는 것이라기보다는 행위 자체가 어떻게 가능한지 아는 것이다. 지젝 혼자만의 행위가 아니라 대중의 행위가. 둘째, 혁명 이후, 그날 이후의 세계가 어떻게 될지는 누구도 모른다는 말과 혁명의 가능성, 변혁의 가능성을 위해 현재 존재하는 세계의 구조들을 분석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마이어스는 지젝이 “자본주의적 삶의 지평을 끊임없이 이론화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지젝이 하고 있는 것은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대중문화적인 현상 및 부시의 이라크 침공과 같은 정치적 현상들에 적용하여 그 현상들을 해석하는 것이 아닐까? 라캉의 정신분석학의 진리를 입증하기 위해 현상들을 예시하는 것 또는 좀더 후하게 말하면 라캉을 원용해서 현상들을 분석하는 것(이때의 분석은 아마도 정신분석학적인 의미의 분석에 더 가까울 것이다)은 세계의 구조에 대한 분석과는 전혀 다르다. 그러나 구조적인 분석이 없이 어떻게 자본주의적 세계의 근본적인 변혁을 감히 꿈꿔볼 수 있을까? 셋째, 마이어스는 지젝이 행위를 위한 장소를 규명하는 데 에너지를 집중한다고 말하고 있고, 지젝 자신은 진보 정치를 위해 수동성으로 물러날 필요성을 강조한다. 이것도 근본적인 변혁을 위한 윤리적 행위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좀 냉소적으로 말하자면, 오늘날 지배 계급 중 누가 지젝의 근본적인 변혁을 위한 윤리적 행위를 두려워하겠는가? 오히려 그들은 사람들이 “지젝이 강조한 ‘행위’를 ‘세계를 바꾸기 위한 진실한 방법’으로 확대 해석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지 않을까?] 아니 지젝에게는 수동적인 대중과 다른 대중들multitudo에 대한 관점이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더욱이 환상의 물질적인 지주로 기능하는 각종 물질적 장치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지젝의 이데올로기론의 관념론적 성격에 대한 비판으로는 Sato 2007 5장을 참조할 수 있다.]


지젝이 최근의 작업(특히 Zizek 2003 「재판 서문」; 2005 및 여러 저작)에서 집요하게 근본적인 변혁에 대한 전망, “본래적인 행위”의 필요성에 대해 주장하면서도, 정작 실천적인 측면에서는 윤리적 명령을 반복하는 데 그치고 있는 것은 사실상 이데올로기론에서의 퇴보를 나타내는 징표가 아닐까? 이를 좀더 부연하자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 지젝에게 상상계 또는 그가 좀더 강조하는 용어대로 하자면 환상은 스피노자나 알튀세르와 달리 그것이 지닌 가상성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상상적인 것은 사회적 적대를 봉합하고 왜곡하고 기만적으로 쟁점을 전위시키는 것일 뿐, 개인들의 삶의 기반, 장소 그 자체로 나타나지 않는다. 더욱이 스피노자나 알튀세르에서 이데올로기적 상상은 정치적 행위의 바탕을 이루는 데 반해, 지젝에게는 지배 계급의 조작의 소재가 될 뿐이다.


2) 이데올로기론에서 알튀세르적인 단절의 지표 중 하나는 이데올로기적인 물질성에 대한 주장이었다. 이러한 테제를 통해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제시한 고전적인 테제, 곧 이데올로기는 사회적 의식의 문제이며 물질적인 역사와 달리 아무런 독자적인 실재성도, 역사성도 갖지 않는다는 테제와 단절을 이룩할 수 있었다. 또한 이 테제는 이데올로기 국가장치 개념으로 이어져, 어떻게 이데올로기가 사람들의 의식에 직접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물질적인 장치를 통해, 관습적인 의례와 규율 장치를 통해 작동하는지 보여줄 수 있었다. 따라서 이데올로기의 물질성에 관한 테제는 이데올로기가 역사적으로 규정된 물질적 장치들을 통해 제도화되고 변화하는 과정을 설명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해주며, 이는 정치적 투쟁의 쟁점을 구체적으로 명시할 수 있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스피노자에서도, 적어도 󰡔신학정치론󰡕에서 상상계는 항상 물질적인 장치들이나 제도 및 의례들과 관련해서 사고되고 있다. 반면 지젝에게는 물질적인 장치들이나 제도들에 대한 분석이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 사회적ㆍ문화적 현상들에 대한 분석들이 라캉의 정신분석학의 유효성을 입증하는 사례들로 제시될 뿐이다.[주목할 만한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지젝이 처음 제시하고(Zizek 1989) 지젝 자신(Zizek 1997 3장) 및 로베르트 팔러(Pfaller 2002)가 좀더 정교하게 발전시킨 “상호수동성interpassivity”이라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이데올로기적 장치 및 제도들을 분석하는 데 매우 효과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


V. 결론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해보자. 지젝은 자신의 여러 저작에서 라캉의 정신분석학에 기반하여 알튀세르의 호명 이론의 한계를 비판해왔다. 또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에서는 이러한 한계가 스피노자주의의 한계 또는 후기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로서 스피노자주의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이 스피노자 철학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판단하는 점에서는 지젝이 전적으로 옳다고 할 수 있으며, 이 점에서 그는 대부분의 라캉주의자들의 맹목적인 비판보다 훨씬 뛰어난 통찰력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스피노자주의=범신론이라는 상투적인 도식에 입각한 그의 비판은 지극히 초보적인 수준의 비판일 뿐만 아니라 스피노자의 상상이론이 지니는 중요성과 독창성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심각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이는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지젝의 생각과 달리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은 라캉의 정신분석학과는 다른 기반, 특히 스피노자의 상상계 이론에 기초하여 구성되고 발전되었으며, 라캉의 이론이 얼마간 알튀세르에게 영향을 미쳤다면 그것은 오히려 전자의 토대 위에서 변형되고 재구성된 상태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 점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는 한 알튀세르 이데올로기론의 특성 및 그것의 정확한 강점과 난점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이 글은 2008년 3월 15일 서양근대철학회 창립 1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처음 발표했으며, 3월 31일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월요모임에서 다시 발표한 바 있다. 첫 번째 발표회에서 귀중한 논평을 해주신 홍기숙 선생님께 깊이 감사드리고, 두 차례의 발표회에서 좋은 지적을 해주신 여러 선생님들께도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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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요약

이 연구는 루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이 어떤 의미에서 스피노자주의적 이데올로기론이라고 할 수 있는지 해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은 대개 라캉주의적 이데올로기론으로 알려져왔으며, 더욱이 실패한 라캉주의 이론으로 비판받아 왔다. 슬라보예 지젝은 최근 저작들에서 이러한 실패의 이유를 알튀세르와 스피노자주의의 연관성에서 찾고 있으며, 라캉 정신분석학의 관점에서 양자의 공통적인 한계를 비판하고 있다. 필자의 주장은, 스피노자와 알튀세르의 본질적인 이론적 연관성을 지적하고 있는 점에서는 지젝이 옳지만, 그 연관성의 실제 내용과 의미를 이해하는 데는 완전히 실패했다는 것이다. 필자는 문제의 핵심이 스피노자 철학에서 '상상계' 개념의 의미를 밝히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상상계 개념은 스피노자의 인간학을 정확히 이해하는 데 중요할 뿐만 아니라,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새롭게 해명하는 데에도 근본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더 나아가 지젝의 이데올로기론의 난점들은 스피노자와 알튀세르가 공유하고 있는 유물론적 상상계 개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생겨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핵심 주제어
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 상상계, 호명, 환상, 변용의 질서와 연관, 신정국가


Abstract

This study aims to elucidate in what sense the Althusserian theory of ideology is a spinozistic one. It has been generally considered as a Lacanian theory, and even criticized by some commentators as a failed one. Slavoy Zizek found the reasons of its failure in the theoretical connections between the Althusserian theory and the Spinozism, and criticized their common limitations from the viewpoint of Lacanian psychoanalysis. In my thought, he was surely right to find the essential theoretical relation between Althusser and Spinoza, but he totally failed to understand its meaning and significance. I think the point is to clarify the meaning of "the imaginary" in the philosophy of Spinoza. "The imaginary" is important not only to understand Spinoza's anthropology, but also to bring a new light on the Althusserian theory of ideology. Then, I hope, one can explain the difficulties of Zizek's own theory of ideology in the light of the materialist concept of the imaginary which is shared by Spinoza and Althusser.

key words: Slavoy Zizek, ideology, the imaginary, interpellation, fantasy, order & connection of affections, state of theocra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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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08-25 0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년 전에 '사회계약론의 해체'를 주제로 한 두 편의 논문들을 너무도 소중한 마음으로 읽었던 경험이 있는데, 올려주신 이 논문 역시 스피노자의 '상상계'라는 측면과 관련하여 너무도 소중한 논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읽기'의 즐거움을 주심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 역시 개인적으로 알튀세르와 라캉의 관계에서 '일방적인' 영향관계와 그 한계만을 주장하는 쪽에 내심 불만이 많았던 와중에, '상상계'를 중심으로 한 정치한 이론적 추적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갑니다. 더불어, 오히려 알튀세르와 라캉의 접점이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 사이의 단순한 영향관계나 용어의 차용 등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그들 둘 각각이 스피노자에게 지고 있는 어떤 이론적 '빚'으로부터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또한 알튀세르의 호명 이론에 대해 가해지는 '기능주의적'이라는 비판에 대한 대응에 있어서는 푸코의 이론적 작업에 대한 논의와 어떤 식의 '연대'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되는데요, 곧 말씀하셨던 물질적 장치 및 제도에 관한 분석이라는 측면에서 오히려 그 접점과 차이점을 적극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더욱 이론적으로 '생산적'일 수 있는 장은 아마도 알튀세르와 푸코의 자리, 혹은 그 둘 사이의 자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III장의 논의들을 읽다보니, 개인적으로 마르크스의 저 유명한 문장 "Sie wissen das nicht, aber sie tun es"에 대해서도 스피노자와 관련하여 여러 유용한 시사점들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예전에 알튀세르의 Écrits philosophiques et politiques 2권에 수록된 Sur Brecht et Marx를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있는데, 그래서인지 '피콜로 연극'에 대한 언급과 그 주목에 대한 요청이 더욱 반갑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축자적인 질문을 드리자면, III장 1절에서 "c'est-à-dire une totalité dans laquelle s'insèrent les fonctions psychologiques, et à partir de laquelle elles sont constituées"(Althusser, Psychanalyse et sciences humaines, p.114)를 "곧 심리학적 기능들이 삽입되어 있는, 이 범주들이 그로부터 구성되는 하나의 전체다"라고 번역하신 부분 중 마지막 부분의 "elles"은 "범주들"라기보다는 바로 앞의 "기능들"을 받는 것으로 번역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고보니, 일전에 지젝이 The "Thrilling Romance of Orthodoxy"라는 글에서 잠시 언급했던 바타이유에 대한 비판이 조금 부당하다고 느꼈던 기억이 새삼스러운데(과연 지젝은 바타이유를 제대로 읽었을까, 라는 의문과 함께^^), 이 논문 덕분에 그러한 지젝의 비판에 대한 '역-비판' 한 편 수행해볼 '용기'가 생겼습니다.^^ 이 역시 감사드립니다.

balmas 2008-08-26 01:15   좋아요 0 | URL
즐거운 읽기가 됐다니 저도 기쁘네요.^^
지적하신 대로 알튀세르와 푸코의 주체론에 대한 지젝의 비판은 사실은 희화화에 가깝다고 봐야 하겠죠. 저는 예전부터 이런 식의 비판이 너무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는데, 국내 독자들 중 상당수가 그런 비판을 곧이곧대로 생각하는 걸 보고 좀 충격을 받았습니다. 조만간 기회가 되면 지젝의 비판이 얼마나 부실한 것인지 밝혀보고 싶어요. :-)
그리고 지적하신 문구의 번역은 제가 원문을 아직 확인하지 못했는데, 람혼님이 인용하신 문장 그대로라면 람혼님 지적이 옳습니다. 예전에 공부하면서 발췌해놓았던 번역문을 그대로 가져다 썼더니 약간의 잘못이 있었던 것 같네요. 좋은 지적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바타이유에 관한 글은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Ritournelle 2008-08-25 1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 지성계에 존재하는 몇 안되는 훌륭한 지젝 비판의 글로 잘 읽겠습니다. 보다 자세한 논평은 읽고 난 뒤에 가능하다면 하겠습니다. 개인적으론 람혼님의 "또한 알튀세르의 호명 이론에 대해 가해지는 '기능주의적'이라는 비판에 대한 대응에 있어서는 푸코의 이론적 작업에 대한 논의와 어떤 식의 '연대'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되는데요."라는 지적은 매우 날카롭고 유효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뿐만 아니라 이 부분에 대한 보다 자세한 향후 연구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지적이기도 하네요. 어쨌든 좋은 글 감사합니다.

balmas 2008-08-26 01:16   좋아요 0 | URL
격려의 말씀 감사합니다. 알튀세르와 푸코에 관한 문제에서는 저도 람혼님 지적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조만간 무화과나무님의 논평도 한번 기대해보겠습니다.^^

딸기 2008-08-29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 24일 수요일로 정했어요~

balmas 2008-08-30 01:07   좋아요 0 | URL
예,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