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 형, 오랜만에 오셨네요.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양 선생님도 잘 계시고 따님도 무럭무럭 자라는지 궁금합니다. 타향에서 설을 맞아서 좀 쓸쓸할지도 모르겠는데, 새해에 가족 모두 건강하시고 공부에도 많은 진전이 있기를 바랍니다.

최원 형이 좋은 문제제기를 해주셨네요. 질문은 크게 두 가지인 듯합니다. 첫 번째 질문은 라틴어 “intelligendum”, 동사원형으로 하면 “intelligere”의 번역에 관한 문제지요. 제가 이 동사를 “파악하다”라고 번역한 것은, 이 동사가 지닌 인지적 의미를 조금 더 부각시켜 보자는 이유 때문입니다. 이 동사는 간혹 “이해하다”(영어로는 understand, 불어로는 “entendre”나 “comprendre”)로 번역되곤 하는데, 알다시피 지난 19세기 말 이후 사회과학 방법론 논쟁에서 “이해”와 “설명”은 늘 대립되는 개념쌍으로 제시되어왔죠.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이해”라는 개념 내지 용어는 다분히 주관적이고 비과학적인 앎의 양식을 뜻하겠지요. 그런데 스피노자는 이런 방법론 논쟁의 맥락과는 무관한 사람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 논쟁과 상반된 입장에 서 있는 철학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겠죠. 따라서 저로서는 intelligere라는 용어를 “이해하다”라고 번역했을 때 생길 수 있는 오해를 막아보자는 뜻에서 “파악하다”라고 번역한 것입니다(이 점에 관해서는 마슈레의 생각을 많이 따른 셈이죠).

그 다음 두 번째 질문은 “percipere/perceive”와 “intelligere/understand” 사이의 관계와 차이에 관한 것이죠. 우선 이런 점을 지적할 수 있을 듯합니다. 스피노자에서 “percipere/perceive”라는 용어는 상당히 의미가 넓은 편입니다. “의미가 넓은 편”이라는 말은, 이 용어가 반드시 “감각 지각”을 뜻하는 것도 아니고, 또 부적합한 인식이나 혼동되고 단편적인 인식을 뜻하지도 않는다는 뜻이죠. 다시 말해 스피노자에서 “percipere/perceive”와 “concipere/cenceive”는 거의 등가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몇 군데에서는 “percipere, sive concipere”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하죠.

그렇다고 해서 양자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느냐 하면 그것도 아닌데, 스피노자 자신이 {윤리학} 2부 정의 3의 해명에서 “perceptio”와 “conceptio” 사이의 차이점에 관해 전자는 “정신이 대상으로부터 수동적인 영향을 받는 반면”, 후자는 “정신의 작용/능동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하고 있지요. 실제로 스피노자의 용법을 살펴보면 “percipere”의 경우는 늘 표상적인 측면, 곧 어떤 대상에 대한 표상이나 인식이 명석판명한지 아닌지, 또는 적합한지 아닌지와 관련되어 쓰이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2부 정리 29의 주석에 보면 “외적으로 규정되는” 경우는 “percipere”로, “내적으로 규정되는” 경우는 “intelligere”로 쓰고 있는데, 이러한 용법은 다음과 같이 부연해볼 수 있다고 봅니다. 스피노자에게 인식은 항상 신체의 “affectio”를 대상으로 하는데, 이 “affectio”가 외부 물체의 작용에 대한 영향을 함축하는 한에서 인식은 늘 수동적인 표상/지각에서 시작한다고 볼 수 있죠. 이것은 2부 정리 29의 주석에 나오는 “외적으로 규정되는” 경우가 잘 보여주는 경우겠지요. 그런데 두 번째, “내적으로 규정되는” 경우에 정신은 개별적이고 단편적인 지각의 상태에서 벗어나 다수의 표상들을 비교, 고찰한다는 의미에서 첫 번째 경우와 같은 단편적이고 고립적인 인식의 상태에서는 벗어나 있지만, 여전히 대상들, 표상들에 대한 지각에 기초를 둔 인식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전자와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겠죠. 물론 이러한 다면적인 비교, 고찰을 통해 “실재들 사이의 합치, 차이 및 대립을 파악”하는 데까지 나아감으로써 적합한 인식, 능동적인 인식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죠. 

제가 제 글에서 다음과 같이 쓴 것은 이 점을 감안한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여러 가지 실재들을 동시에 고려하게 되면, 자연의 공통 질서에 따라 인식할 때와는 달리 이러저러한 실재들과의 우발적인 마주침에 따라 실재들의 이런저런 측면들을 단편적으로 지각하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다면적인 인식 내지 지각은 이를 기초로 하여 실재들 사이의 합치와 차이, 대립을 고려하기 때문에, 단편적 지각에 수반되는 혼동된 인식에 빠질 위험성도 적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인식은 훨씬 더 명석하고 판명한 인식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내적 규정에 따라 이루어지는 인식은 여전히 지각의 차원에서, 곧 변용들의 질서와 연관에 대한 지각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상상적 인식이다. 따라서 이것과 자연의 공통 질서에 따라 이루어지는 지각과의 차이는 동일한 상상적 인식 내부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이러한 다면적 지각의 노력을 통해 우리가 소수의 물체들 사이의 공통적 특성을 지각하게 되고, 이를 기반으로 삼아 좀더 많은 물체들 사이의 특성들에 대한 지각으로 인식의 범위를 확장하게 된다면, 우리는 좀더 많은 공통 통념들에 기초를 둔 인식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공통 통념들에 기초를 둔 2종의 인식은 상상적 인식 안에서 자신의 성립 조건을 발견한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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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 2008-02-09 0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렇군요.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저도 외적으로 규정된 인식으로부터 내적으로 규정된 인식으로의 전환이 수동에서 능동으로의 전환의 의미를 갖는다는 생각에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나 '내적으로 규정된 인식'이 상상적 인식이라는 점에는 여전히 선뜻 동의가 안되는군요. 저에게는 내적으로 규정된 인식이 common notions를 말한다는 것도 아주 명료하진 않습니다. common notions 자체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것들은 언제나 1종과 2종 사이의 미분으로 기능을 하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데리다적인 의미에서 '결정불가능한 것'으로 남아있거나, 또는 오히려 1종과 2종 사이에서 진동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기게 됩니다. ommon notions를 어느 한 쪽에만 귀속시키려고 하는 것 자체가 항상 어떤 곤란을 갖게되지 않나 싶은 것이지요. 그래서 그런지 저의 눈에는 더욱 더 스피노자가 perceive와 conceive를 혼용하면서 common notions를 묘사하는 것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군요. 그리고 예전에 토론을 하고나서 나름대로 저도 문제를 다시 생각해보곤 하는데, 아직 가설적이기는 하지만 common notions를 아예 가지고 있지 않은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2부 정리 38의 corollary에 보면 "there are certain ideas or notions common to all men"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 구절을 적극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예전부터 느껴온 것이지만 이 문제는 참 힘든 문제인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답변 감사드립니다!
 

안녕하세요. 먼저 인사부터 드려야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요. 늘 건강하시고 올해도 많은 좋은 일 성취하시기 바랍니다.

다름이 아니라 선배님이 쓰신 글 관련해서 한 가지 질문을 드릴까 해서 글을 남깁니다. 역시 common notion에 관한 것인데요, 선배님 논문 "공통통념 개념 I" 마지막 부분 쯤에 보면 선배님께서는 {윤리학} 2부 정리 29의 주석을 해석하시면서, 외적으로 규정된 인식과 내적으로 규정된 인식의 구분을 universal notion과 common notion의 구분에 연결시키신 것 같습니다. 이러한 해석에는 저도 어느정도 동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외적으로 규정된 인식을 이를테면 일면적 지각으로, 그리고 내적으로 규정된 인식을 "다면적 지각"으로 말씀하신 부분에서 조금 망설여집니다. 문제의 주석을 보면,

I say expressly that the mind does not have an adequate knowledge, but only a confused and fragmentary knowedge, of itslf, its own body, and external bodies whenever it perceives things from the common order of natre, that is, whenever it is determined externally--namely, by the fortuitous run of circumstance--to regard this or that, and not when it is determined intrnally, through its regarding several things at the same time, to understand their agreeement, their ifferences, and their opposition. For whenever it is conditioned internally in this or in another way, then it sees things clearly and distinctly, as I shall later show.

여기서 스피노자가 외적으로 규정된 인식을 지각(perception)과 연결시킨 것은 맞지만, 내적으로 규정된 인식은 오히려 이해(understanding)에 연결시킨 것 같습니다. 선배님께서는 understand에 해당하는 저 말을 논문에서 계속 '이해하다' 대신 '파악하다'로 옮기셨는데, 어떤 특별한 사유가 있는지요? 전 라틴어를 아직 모르지만, 해당 부분 라틴어본을 봐도 외적 인식은 percipit으로, 내적 인식은 intelligerum으로 적혀있어서 영어본 번역이 크게 잘못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더불어서, 선배님께서는 다면적 지각으로서 공통된 성질을 인식한 결과로서의 common notion은 다면적이라고 해도 여전히 그것이 '지각'인 한에서 상상적 인식에 속한다고 보시는 듯이 여겨졌습니다. 제가 맞게 읽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렇다면 더욱 더 intelligerum을 어떻게 번역할까가 중요해지지 않나 싶습니다.

반면 common notion에 관한 {윤리학} 2부의 두 정리(38과 39)를 보니, 38에서는 '인식하다(conceive)'라는 말이 사용되었고, 38의 증명에서는 'perceive"와 'conceive'가 각각 한 차례 사용되었고, corollary에서는 다시 'perceive'가 사용되었군요. 39와 그것의 증명에서는 두 단어 모두 사용되지 않고 있습니다만, corollary에서는 'perceive'가 한번 사용되었습니다. 어쨌든 이렇게만 놓고 보면, 정확히 common notion이 perception(지각)에 속하는지, 아니면 conception(즉 concept와 관련된 인식/관념) 또는 understanding(이해)에 속하는지가 불분명한 것 같습니다.

선배님 생각을 좀 들어보고 싶어 이렇게 염치불구하고 질문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최 원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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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세상]



불안하지?! 그럼 영어사교육 해


[특별기획 : 이명박정부와 진보](8) - 영어 교육



송경원(진보교육연구소)  / 2008년02월05일 11시15분

‘헬로우, 하우두유두’


네 살이 채 되지 않은 딸아이 입에서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온 말이다. 깜짝 놀라며 아내와 눈을 마주친다. 아내 또한 한 방 먹은 표정이다. 그러면서도 “우와, 발음 죽이네”라고 말한다. 하긴 경상도 사람이니 영어발음에 열등감을 가지고 있던 아내다. 물론 남편이라는 사람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영어 단어 외우는 시간에 수학 문제 푸는 걸 더 좋아하고 영어시험은 기본만 하자는 아이였으니, 영어실력이 오죽 하겠는가.


‘헬로우, 하우두유두’


아이가 또 말한다. 아내와 말하지는 않았지만, 불안이 엄습해온다. 영어나 외국어는 부모의 실력이 중요한데, 아빠는 영어체질이 아니라고 합리화한지 오래이고 엄마는 경상도 사투리로 발음하니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영어공부 해야 하나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다음 날,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 주면서 선생님께 묻는다.


“영어 가르치나요?”


속으로는 ‘그렇게 안 봤는데, 왜 가르치니’ 라고 항의한다.


“아니요. 그냥 가끔 쉬는 시간에 영어 비디오 틀어주는 정도예요. 그런데 요즘 한 아이가 학원을 다니는지 영어를 하는데, 다른 아이들도 따라하더라구요”


궁금한 부분이 풀렸다. 하지만 그러면 뭐하나. 딸아이가 이미 사교육 천국의 영향권 안에 포위되어있는 것을 확인했으니, 씁쓸하고 불안할 따름이다.


사교육은 보험


사교육이 투자였던 때가 있었다. ‘나보다 나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부모의 희망이 사교육으로 표현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97년의 IMF 충격 이후 사교육의 심리는 조금 변한다. 투자의 마음이 여전히 있기는 하나, 점차 보험 드는 마음이 커진다. 계층 상승만 주로 보아오다가 계층 하락을 직간접적으로 접한 게 그 이유다. “아, 이 나라는 중산층에서 떨어질 수도 있구나. 그리고 떨어지면 비참하구나”라는 점을 뼈저리게 깨닫는다. 당연히 부모의 마음에서 ‘나보다 못살면 안돼, 최소한 나처럼 살아야 해’라는 메아리가 커져간다.


2000년대 들어 사교육의 양극화가 심해지는데, 중상층 이상이 양극화를 주도하는 게 특징이다. 중상층 아래가 사교육비를 예전과 비슷하거나 조금 더 지출하는 사이에 중상층 이상이 사교육비를 대폭 늘리면서 격차가 점차 커져간다. 불안하기 때문이다. 떨어질 곳이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추락은 두려움이다. 그리고 추락 지점을 비참한 곳으로 생각하면 할수록 두려움과 불안은 크다. 당연히 추락을 막거나 대비하기 위한 장치를 미리미리 마련해야 한다. 보험을 들어야 한다. 그것도 많이 들수록 좋다. 최후의 마지노선으로는 평소 씹어대기 바쁜 교사를 염두에 둔다. 이 보험의 심리는 유독 중상층만 그런 게 아니다. 중상층 아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추락에 대한 두려움의 정도가 다르며, 가용할 수 있는 경제력과 정보력 또한 다르다.


이처럼 교육에서 IMF 충격은 사교육을 투자에서 보험으로 바꾸었다. 약육강식과 승자독식의 사회를 경험하면서 대비책으로 사교육에 더욱더 몰두하도록 만들었다. 그 안에는 불안이 깔려있다.


불안을 먹고 사는 영어광풍


사교육기관이 많고 다양하긴 하나, 부모 입장에서는 유형이 웬만큼 정해져 있다. 아줌마통신의 정통 코스는 이렇다. 일단 어릴 때부터 영어를 시킨다. 그리고 초등학교 고학년부터는 특목고나 자사고를 대비시킨다. 중학교 고학년이나 고교부터는 일류대를 준비한다. 물론 시작하는 시기와 비용이 가계 수입이나 부모의 가치관에 따라 다르다. 하지만 겨냥하는 것은 같다. ‘아이 맡기기’나 ‘특기 살리기’의 마음을 제외하고는 죄다 입시다. 일류대라는 최종 목적지를 위해 그 중간다리인 특목고를 보내야 한다. 그런데 특목고는 영어가 중요하다. 아니, 영어는 특목고, 일류대, 취업이나 승진에서 모두 필요하다. 그러니 일단 영어다. 영어를 몰라도 생활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는 이 땅에서 영어 광풍이 몰아치는 이유는 이거다. 영어가 모든 직업에서 ‘꼭’ 필요한 게 아닌 이 나라에서 ‘미친 영어’가 자리잡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국제통상이나 교류가 많은 분야 등 영어를 꼭 필요로 하는 사람들만 영어하면 되지, 왜 모든 한국인이 영어해야 하나? 글구 통역이나 번역은 두어서 뭐하나?”라는 항변은 무의미하다.


영어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그래서 불안하다. 영어를 잘해도 불안하고, 못해도 불안하다. 영어 잘하는 사람으로 인정받아도 모국어 수준이 아니기 때문에 불안하고, 못 하는 사람은 능력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힐까 두렵다. 그래서 너도나도 보험을 든다. 일하는 사람은 시간을 쪼개서 각종 온·오프라인 영어 사교육기관을 찾고, 부모는 아이를 영어학원 봉고차에 밀어넣는다. 빠른 엄마는 태교부터 시작한다.


1997년부터 초등학교에서 영어수업이 시작되고 특목고와 자사고가 확대되면서 등장한 풍경이다. 교육분야에서는 입시에서의 영어 비중이 영어 광풍의 원인이고, 초등학교 영어 수업이 촉매제다. 물론 해도해도 끝이 없다. 100점을 맞는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다. 남보다 한 발 앞서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영어 사교육의 순례는 보다 강한 약효를 찾아 쭉 이어질 뿐이다.


불안을 부채질하는 이명박 정부의 영어교육 정책


여기에 이명박 정부는 기름을 붓는다. 지난 1월 30일 <영어공교육 완성 실천방안>에서 △5년 안에 영어전용교사 2만3천 명 충원, △영어수업시간 확대, △영어능력평가시험 도입, △영어친화적 환경 구축 등을 발표한다. 영어 광풍의 촉매제였던 초등 영어수업을 보다 확대하겠다고 한다. 미친 영어의 원인이었던 입시에서의 영어 비중은 일언반구도 없다.


물론 수능 영어를 상시적인 국가영어능력평가 시험으로 대체하고, 현재의 수능 영역인 읽기.듣기는 등급제로 하며, 말하기.쓰기는 합격/불합격만 판정하겠다고 말하기는 했다. 하지만 시험 부담만 커진다. 한 번만 보던 수능에서 여러 번 치는 시험으로 바뀌므로 ‘남보다 한 발’ 앞서기 위해서는 보다 높은 점수를 받을 때까지 시험봐야 한다. 여기에 읽기.듣기만 보던 시험에서 말하기.쓰기가 추가된다. 더구나 인수위는 2012년부터 대입을 완전 자율화한다고 했다. 그 때 등급이나 합격/불합격으로만 나오는 영어능력평가 결과를 대학들이 그냥 받을까. 지금까지 변별력을 외쳐왔던 대학들이 그 때 가서는 가만 있을까. 영어 본고사가 없으리라고 장담하기 어렵다.


그래서 인수위의 “국가영어능력평가시험은 사교육을 유발하지 않도록 학교 교육과정을 충분히 반영”한다는 이야기는 웃긴 소리다. 대학서열화와 특목고.자사고는 보다 확대되고, 입시에서의 영어 부담은 커지고, 학교 영어수업은 늘어나니, 영어 광풍의 앞날에는 거칠 것이 없다. 불안을 치유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불안을 부추긴다. 영어 못 하면 정말 큰일 날 것 같다. 보험 더 들어야 한다. 이젠 영어 사교육기관 알아보기와 영어 사교육기관의 떼돈 벌기만 남았다.


불안을 만드는 이명박 정부


더 나아가 이명박 당선인은 “영어 잘 해야 잘 산다”라는 말까지 한다. 최소 10년 동안 영어를 배웠어도 여간해서는 영어가 필요없는 사람들에게 영어 잘 해야 잘 산단다. 영어를 공용어로 하는 필리핀이 우리보다 잘 사는지에 대한 말도 없다. 그냥 영어 잘하면 잘 산단다. 걔네들 발음 웃긴다 하면서 놀리는 일본이 우리보다 못 사는지에 대한 말도 없다.


전 국민이 영어를 잘 못해서 국가적인 위기가 닥쳤다는 말도 없다. 위기의 징후도 없다. 그러면서 영어 잘 하란다. ‘왜?’라는 질문에 대한 답도 없다. 국제화 시대라고는 하는데, 온통 영어 이야기 뿐이다. 그래서 더 답답하고 불안하다. 정책을 입안하는 사람 입장에서야 위기를 들먹이면서 불안을 조성하는 게 정책 추진에 도움이 되기는 하나, 도대체가 위기 국면에 대한 뚜렷한 말 한마디도 없고, 오로지 두려움만 조장할 뿐이다.


이런 이유로 이경숙 인수위원장에게 자꾸 눈이 간다. 인수위원장인지 영어교육부 장관인지 모를 정도로 틈만 나면 영어를 언급하고, 자신의 숙명여대가 대한민국 최초로 테솔(TESOL)을 운영하고 작년부터는 교육청의 지원 속에서 현직 영어교사의 심화연수를 하고 있으니, 의심의 눈초리는 당연하다. 또한 인수위가 앞으로 테솔을 통해 영어교사를 양성한다고 했으니, “기존의 교대와 사대는 죽이고 숙명여대나 성균관대를 키우려는 속셈 아니냐”라는 말도 나올 만 하다. “인수위원장이 수학 전공자였으면, 온 국민에게 미적분 강요했겠네”라는 비아냥도 있다. 이쯤 되면, 지위를 활용하여 개인적 이득을 취하는 ‘업무상 배임’의 혐의를 지우기 어렵다.


뭐, 좋은 말로 한 개인의 학문적 소신이라고 하던 새 정부의 교육철학이라고 하던 간에 인수위의 모습은 밑도 끝도 없다. 그냥 영어 잘 하란다. 그래야 잘 산단다. 그래서 학교에서 영어 공부 많이 시키고 시험 보겠단다. 그러면 사교육비 줄어든단다. 인수위 그 자체가 불안이다. 어디로 튈지 모른다. 보험 꼭 필요하다.


사교육 심리의 이중성이 불안 해소의 출발점


투자든 보험이든 간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교육을 시킨다. 그리고 이중적이다. 자기 아이 문제일 때는 보신주의와 가족이기주의가 작동하나, 한편으로는 공교육과 좋은 교육을 말한다. 이거 나쁘게들 평가한다.


하지만 다르게 볼 수도 있다. 보신주의와 가족이기주의는 현실이 강요한 거다. 양육강식과 승자독식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삶의 지혜이다. 교육 분야에서의 형태는 사교육으로 나타난다. “아이는 스스로 자란다”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니 쉽지 않다. 오늘도 자기보다 20~30살 어린 아이와 다툰다. 아이에게 부모의 존재가 스트레스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


이렇게 사는 건 사는 게 아니다. 불안이 치유되지도 않고, 행복하지도 않다. 그래서 꿈꾼다. 불안이 치유된 사회, 행복한 학교, 즐거운 아이를 희망한다. 변화를 바란다. 현실과 바램의 괴리가 이중성을 낳는 것이다.


지금은 이명박 정부의 변화를 학부모가 불안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다. 물론 이건 꿈꾸던 변화가 아니다. 그래서 더 불안할 뿐이다. 당연히 다른 변화, 보다 나은 변화에 대해 여전히 목마르다. “모든 한국인이 영어를 해야 합니까? 영어 꼭 해야 하는 사람만 하면 안 됩니까?”라는 질문에 답을 기다리고 있다. 필요한 분야만 영어 하고 입시에서 영어 부담이 없어서 영어가 즐겁기를 바란다. 대학서열화, 고교서열화, 입시의 틈바구니를 부수는 행복여행을 원한다. 여기엔 빠른 답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한국 교육의 제2법칙 “처음에만 시끄러울 뿐, 금방 적응한다”가 작동한다.


누가 다른 변화를 말하고 학부모와 대화할 수 있을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정파주의의 화신은, 정파보신주의와 정파이기주의로 똘똘 뭉친 집단은 ‘보다 나은 변화’로 다가가기 어렵다. 학부모가 대화 자체를 거절한다.


요즈음 딸아이는


‘헬로우, 하우두유두’ 하지 않는다. 잊어먹었다. 한국말만 쓰는 환경이 낳은 결과다. 대신 TV에서 <우리말 겨루기>나 비슷한 프로그램만 방영되면, “정답입니다”를 외치면서 신나게 달려가서 뚫어지게 쳐다본다. 엄마 아빠는 그동안 아이에게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신기해 하는데, 한창 말을 배울 때라 그런가 보다 한다. 물론 한편으로는 여전히 불안하다.


특히, 지난 십수 년간 영어와 담을 쌓고도 잘 살아왔다고 여기는 아빠라는 작자는 영 못마땅하다. 그래서 지난 십수 년간 꾸준히 애용해왔던 ‘알파벳 C와 아라비아 숫자 8의 합성어’에다가 ‘2MB’라는 새로운 단어를 연신 갖다 붙인다. 물론 딸아이 몰래 하느라 애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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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류우님의 "류우님이 작성하신 방명록입니다."

발리바르의 말을 역사적으로 이해한다면, 박상현 씨가 이야기한대로 어떤 상징 체계의 변혁을 뜻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가령 프랑스 혁명의 이념이었던 "자유, 평등, 박애[형제애]" 같은 것들은 혁명 이후 지배적인 정치적 상징체계가 되죠.

그런데 만약 이것을 마르크스의 관점 그대로, 곧 "지배 이데올로기는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다"라고 이해하면, "자유, 평등, 박애" 같은 것들은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계급 지배의 도구 및 피지배 계급에 대한 기만/조작이라는 함의를 포함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자유, 평등, 박애" 같은 이념은 봉건 사회의 이데올로기보다는 나름대로 진보적이지만, 그래도 부르주아 계급의 지배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에, 결국 근본적인 한계를 지닌 것으로 이해가 됩니다.

알튀세르가 수행한 이데올로기에 대한 개조 작업의 의의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알튀세르의 개조가 가지는 중요한 함의 중 하나는 이데올로기는 단지 기만이나 조작이 아니라, 독자적인 물질적인 실존과 메커니즘을 지닌 적극적인(positve), 더 나아가 구성적인 층위라는 점입니다. 이는 이데올로기를 가상이나 신비화, 왜곡으로 보는 경우와 달리 이데올로기에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실존을 부여하게 되고, 사회 구조 및 계급의 구성과 재생산 및 개인들이 이러한 메커니즘 속에 편입되고 그 속에서 기능하는 방식에 대해 효과적인 설명을 할 수 있게 해줍니다.

그렇지만, 알튀세르도 "지배 이데올로기는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다"라는 마르크스의 정식 그 자체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합니다. 그것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의 애매성 중 하나인데, 이데올로기의 물질성을 역설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데올로기와 진정한 정치(곧 프롤레타리아 혁명)를 계속 대립시키죠. 이 후자와 같은 경우 진정한 정치는 정의상 이데올로기 바깥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고, 또 이데올로기를 초과하려는 경향을 지니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데올로기의 물질성만을 계속 주장할 경우에는, 도대체 그가 말하는 이데올로기가 왜 이데올로기냐라는 물음, 다시 말해 (영원한 것, 물질적인 것으로서) 이데올로기와 정치, 곧 계급투쟁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부딪치게 되는데, 알튀세르의 관점이 기능주의에 빠져 있다는 주장은 이로부터 생겨나게 됩니다.

발리바르가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는 피지배 계급의 이념의 보편화다"라고 말한 것은 알튀세르의 개조 작업의 의의를 보존하면서도 이러한 애매성을 전위시키기 위한 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지배 이데올로기를 구성하는 상징체계를 피지배 계급의 이념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게 되면, 우선 마르크스와 같이 “자유, 평등, 박애” 같은 이념을 기만이나 조작, 왜곡으로 보지 않고 그것들이 지닌 적극적 함의, 보편적 가치를 옹호할 수 수 있게 되죠. 왜냐하면 이러한 상징들은 지배 계급의 것이 아니라 피지배 계급, 대중들의 이상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왜곡이나 기만, 조작이 문제가 된다면, 그것은 이 상징들 자체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징들을 제도적ㆍ계급적으로 전유하는 방식의 문제가 됩니다. 이는 역으로 말하자면, 이러한 상징들은 지배 계급의 정치를 비판할 수 있는 근거가 되고, 또 피지배 대중들의 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준거가 된다는 뜻이겠죠.

류우님이 질문한 문제로 되돌아간다면, 혁명 이후 유럽의 정치사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겠죠.

첫째는 상징들 사이의 갈등이라는 문제가 있겠죠. 곧 “자유, 평등, 박애”라는 상징들 자체는 처음부터 온전한 형태 그대로 정치의 이념으로 제시되었다기보다는, 다양한 형태의 이데올로기적ㆍ정치적 갈등과 대립을 겪으면서 정치의 상징들로 부각된 것이고, 또 그 이후에도 다른 상징들과의 지속적인 갈등 과정을 겪는 게 아닌가 볼 수 있습니다. 가령 “자유”보다는 “질서”를 주장하는 이들도 있을 테고(보수주의가 그렇겠죠), “평등”보다는 “능력”이나 “독특성/개성”을 강조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박애”의 남성 중심주의를 문제 삼는 경향도 있겠죠. 이는 정치 이데올로기들의 갈등의 역사라고 할 수 있겠죠.

다른 하나는 이러한 상징들이 제도적ㆍ계급적으로 전유되는 방식들이라는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상징들을 구현하는 다양한 제도적인 장치들의 역사라고 볼 수 있을 텐데, 가령 프랑스 혁명 이후 선거 제도가 전개되고 변화되는 과정이라든가, 시민권이 변화 및 확장, 발전되어가는 과정, 또 교육 제도의 상이한 전개 과정들 등이 그 사례라고 할 수 있겠죠. 이 두 가지의 역사는 서로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고, 또 사실 각각의 역사를 분석할 때 다른 쟁점들을 지속적으로 참조하는 것이 좀더 구체적이고 실효성 있는 분석을 제시해줄 수 있겠죠.

이 분야에 관해서는 많은 책들이 존재하지만, 우선 발리바르의 작업들을 체계적으로 읽어보는 것도 괜찮겠죠. 그리고 혹시 불어를 할 줄 안다면, 첫 번째 역사에 관해서는 Florence Gauthier, Triomphe et mort du droit naturel en Révolution : 1789-1795-1802 같은 책이나 아니면 좀더 폭넓게는 Francois Chatelet, Histoire des ideologies, vol. 1-3 같은 책들이 도움이 되겠죠. 두 번째 경우에는 Robert Castel의 여러 저작들 및 Pierre Rosanvallon의 저작들이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역사서는 아니지만, T. H. Marshall의 Citizenship and Social Class 같은 책도 이 분야의 고전으로 꼽을 수 있겠죠.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17세기 이래 서양의 정치사, 지성사, 법사학/법제사, 경제학설사 등등이 모두 이 문제들과 결부되어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제대로 공부를 하자면 엄청 분야가 넓죠. 문제의식을 잘 가다듬어서 폭넓으면서 아주 구체적인 그런 연구를 한 번 해보세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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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02 02: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입센의 작품들을 좀 읽어볼 일이 있어서 검색을 해보니까

몇 가지 작품이 여러 출판사에서 나왔네요.

원문 번역은 아닐 테고 대부분 영어나 일어 중역본인 것 같은데,

개중에서 그래도 나은 번역본은 어떤 것인지 혹시 아시는 분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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