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님 서재에서 퍼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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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체류외국인’과 범죄는 뗄 수 없는 관계라구요?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는 미등록체류자에 대한 강제단속 및 추방에 대한 문제지적이 있을 때마다 “갈수록 늘어나는 외국인들의 범죄는 흉포·지능·조직화되고 있어 우리 사회의 안전을 위협하는 하나의 큰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며 강제단속은 불가피하다고 항변한다. 


 부산 KNN방송국의 ‘현장추적 싸이렌’이라는 프로그램에서는 <무너진 코리아 드림, 불법체류자, 그리고... 범죄>라는 제하의 방송을 지난해 11월28일과 12월12일 양일에 걸쳐 진행한 바 있다. 이 방송에서는 미등록체류자의 범죄가 날이 갈수록 지능화되고 교묘해지고 있다며  부산출입국관리사무소의 미등록체류자 강제단속과정을 여과없이 보여주었다. 

 
 이 프로그램에 나온 범죄행위는, 상습도박, 폭행, 대마초흡연, 불법안마시술소였다. 하지만 대마초흡연자라고 신고가 된 이주노동자는 현장에서 소변검사까지 했지만 검사반응은 음성이었고, 폭행범이라고 신고가 된 이는 조사를 하지 못해 결국 그가 정말로 폭행을 했는지, 금품 갈취를 했는지에 대한 조사는 이루어지지도 못한 상태였다. 이 두 사건에서 출입국관리공무원은 단지 신고만으로 이주노동자를 범죄자로 낙인찍고, 가택수사, 공장무단침입 등을 하고 있다. 또한 상습도박범으로 출입국관리사무소로 연행된 베트남인 16명 중 9명은 등록체류자였으며 7명이 미등록체류자였는데, 등록체류자들은 불구속입건되거나 훈방 및 경고조치에 그쳤다. 이것이 법무부가 말하는 미등록체류자들의 고도로 지능화되고 흉포화되는 범죄현장인가?


 -법무부의 강제단속행위가 더 범죄에 가깝다

 


 한편, 범죄자로 낙인찍힌 미등록체류자들을 단속하는 출입국관리공무원들의 단속행위는 어떠한가? 출입국관리공무원은 영장없이 무단으로 가택에 침입하여 집안을 뒤지고, 이주노동자의 핸드폰을 뺏고, 영장없이 공장에 들어가 이주노동자에게 소변검사를 강요한다. 신고와 추측만으로 검거와 연행을 일삼는 출입국관리공무원들의 단속행위가 오히려 범죄에 가깝다.

 이주노동자를 만날 때마다 불심검문을 하고 있지만, 출입국관리공무원들은 신분증을 제시하지 않으며, 반말만을 사용한다. 관행이 이러하니, 출입국관리공무원을 사칭하며 미등록노동자들의 납치, 금품을 갈취하는 범죄가 발생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우리는 과연 출입국관리공무원이 범죄용의자를 조사하고 연행하는 절차에 대한 기본적인 법지식과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의심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경찰의 영역이 아닌가? 주먹구구식으로 이루어지는 조사와 연행 속에서 이주노동자의 인권은 설 자리가 없다.

 


-‘외국인범죄율’로 미등록체류자 마녀사냥 말라.

 


 또한 방송에서는 외국인범죄율이 날로 높아간다는 통계를 제시하고 있으며, 법무부 또한 이 자료를 자주 인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외국인범죄율’이지 ‘미등록체류자 범죄율’이 아니다. 외국인은 미등록체류자 외에도 등록체류자 또한 포함되는 숫자이다. 방송에 나온 사건 중 도박사건과 불법안마장 사건 또한 등록체류자의 범죄사건이었다.

 오히려,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최영신(44) 연구위원팀이 펴낸 연구보고서 ‘외국인 범죄의 실태와 전망’에 따르면 인구 10만명당 개발 도상국 출신 외국인들의 범죄자 수는 경제 선진국보다 크게 낮았다. 인구 10만명당 한국인 범죄자 수와 비교해도 크게 낮다.”고 한다.(2007년2월5일자 서울신문 보도) “최 연구위원은 “불법 체류자들은 범죄로 인해 자신의 신분이 노출돼 강제 출국되는 걸 두려워하기 때문에 범죄 가능성은 낮다. 오히려 열악한 생활 환경과 문화적 차이 탓에 내국인에 의해 범죄 피해를 당할 수 있는 범죄 피해 취약 집단”이라고 설명했다.“고 한다.(2007년2월5일자 서울신문 보도)

 마치 미등록체류자가 모든 범죄의 온상인 것처럼 호도하는 법무부와 KNN 방송국은 동남아 출신 이주노동자를 겨냥한 인종차별적 태도와 감성을 버려야 한다. 외국인이 범죄의 온상이자 국가경제 및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다는 시각은 히틀러와 같은 전체주의 정권에서 이주민을 바라보았던 인종주의적 시각이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굽어진 의식’이 결국 열린 다문화 사회로 가는 길의 걸림돌이 될 것이다.

 이것은 현재 법무부에서 입법예고한 ‘출입국관리법 개정안’에서 사실로 드러난다. 법무부는 ‘미등록체류자에 대한 옹호가 국가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다’고 공공연히 말한다. 하지만, 이주민에 대한 무차별적인 불심검문과 검거를 허용하고 있는 출입국관리법 개악안이야말로 한국사회가 쌓아온 민주주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있다. 헌법에 어긋나며 형법과도 충돌하는 출입국관리법 개악안이야말로 법치주의 질서를 뒤흔들고 있다. 강제단속․추방정책이 만들고 있는 국가질서는 무엇인가? 바로 전체주의와 인종주의의 국가질서라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부산외국인노동자인권을위한모임은 부산출입국관리사무소와 KNN 방송국에 대하여 관련기관에 진정할 예정이다.


(사)외국인노동자 인권을 위한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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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체제 등장 이후의 정치·이데올로기 지형에 대하여
 

사회진보연대
 

신자유주의적 전환의 폐해들이 민중들의 삶을 옥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실시된 대선은 반신자유주의 운동의 방향에 어떤 새로운 돌파구도 만들어 내지 못한 채 신자유주의의 파괴적 영향을 더욱 확대할 것으로 예상되는 세력의 집권으로 귀결되었다. 유권자들의 자조섞인 푸념이 보편적 정서였을 만큼, 신자유주의가 조성해 낸 끔찍한 생활의 곤경은 대통령 선거를 통해 크게 달라질 것으로 기대되지는 않았고, 선거의 결과가 적극적 선택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신자유주의 세력간의 경쟁 구도에 대한 혐오의 반사적 결과에 의한 것인지는 결과에 큰 차이를 불러오지 않았다.

한국사회의 정치 이데올로기 지형 : 1987~1997년

그런 점에서 이명박 체제의 등장은 대중들의 적극적 대응의 결과가 아니라 부정적 대응의 산물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런 이명박 체제의 등장에서 주목되는 점 중 하나는 이른바 ‘자유주의’ 세력들의 와해와 재편이라는 특징이다. 이명박 체제를 단순히 보수주의로 규정한다면, 지금까지의 결과와 또 현재 진행되는 지배세력들의 재편구도를 적절하게 파악하기는 어렵다고 보인다. 더욱이 올 봄의 총선에서 예상되는 정치세력들의 이합집산까지 고려하면 상황을 좀 더 긴 역사적 맥락에서 파악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1987년에서 1997년에 이르는 시기에 한국 사회의 이데올로기 지형에는 냉전시기의 구도를 벗어나 새로운 탈냉전적 구도를 형성하려는 시도가 관찰된다. 그 시도는 자유주의적 세력을 중심으로 진행되어 왔으며, 보수주의 또한 일정한 변화를 거쳐 왔다. 자유주의의 변신은 탈냉전과 신자유주의 시대를 맞아 한국 사회에서 이데올로기적 주도권을 장악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자유주의의 주도권은 동시에 민중적 주도권의 제약을 목표로 한 것인데, 이러한 시도는 이미 1987년 당시의 상황에서부터 유래한 바 있다. ‘1987년 정세의 자유주의적 포섭과 그 한계’가 지난 20년간의 한국 사회의 정치정세를 규정해 왔다고 할 수 있고, 대중운동의 발전의 향배는 이런 제약을 벗어날 수 있는가에 달려있었다고 할 수 있었다.
1987년 이후 그러한 자유주의의 변신은 이른바 ‘민주화’ 담론을 선점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어 왔다. 이는 흔히 ‘87년체제’라고 이야기되지만 그 실체는 모호한 것이었는데, 이런 자유주의는 그럼에도 제도적 토대를 충실히 갖추지 못한 자유주의라는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대중운동에 대한 코포라티즘적 통제를 전면적으로 실현할 수 없는 조건적 한계 때문이었는데, 그것은 세계경제의 반주변부로서 한국사회에서 제도적 코포라티즘이 안정화할 충분한 조건을 만들어내기에 취약한 구조가 있기 때문이기도 했고 다른 한편에서 신자유주의의 고조라는 시대적 규정성에서 나오는 구조적 제약 또한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구조적 제약 속에서 자유주의의 변신은 한편에서 인민주의적 동원을 통하여 실제로는 대중의 탈정치화와 정치의 호도를 수행하고, 또한 개혁이라는 이름 하에 실제로는 사회구조를 끊임없이 신자유주의적 방식으로 전환시켜 왔다. 다른 한편 이러한 자유주의의 취약한 구조는 통치의 유지를 위해 보수주의적 정치세력과의 연대를 통해 보완되었는데, 이데올로기적 주도성을 상실한 보수주의와 코포라티즘적 주도성을 발휘하기 어려운 자유주의의 연대가 이렇게 형성되었고, 내부적으로 이들 중 어떤 분파의 어떤 세력이 이 결합을 주도하는가에 따라 정치적 외양은 매우 상이한 모습을 보여 왔다고 할 수 있다. 1992년 3당합당을 통한 김영삼의 대통령 당선이나, 1997년 DJP 연합을 통한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 모두 그런 과정을 거쳐 왔다고 할 수 있다.

노무현정권의 등장과 정치가형 인민주의

그런 점에서 2002년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은 어떤 점에서 자유주의 세력의 단독집권이라는 외양상의 특징에서 보이듯 매우 이례적인 상황이었는데, 그렇지만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의 우여곡절과 당선 직후의 사정들이 보여주듯이 매우 불안정한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러한 집권이 가능했다는 점에서, 그 이전의 10년과 달리 노무현 시기의 이례성이 보여주는 것은 1997년 금융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적 전환이 초래한 한국사회 위기구조의 결과인 동시에 그에 대한 자유주의적 봉합까지도 위기에 처하게 만든 상황적 맥락이었다. ‘민주화’와 ‘개방·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진행되어 온 신자유주의적 전환에 대해 대중들이 그것을 기존의 자본과 국가권력의 체제, 그리고 기성정치권이라 이름되던 세력에 대한 불만과 저항의 수동적 표출로 드러낸 것이 2002년의 대선 상황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단독 집권한 인민주의적 자유주의 세력은 집권시기 초부터 역설적으로 자유주의의 무능력을 전면적으로 노출하기 시작했다. 지나온 5년의 역사는 신자유주의의 확산과 더불어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위기가 심화되어온 시기였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세가지 표지에서 드러난다. 첫째는 코포라티즘적인 안정적 통치 체제의 설립에 실패하고 사회 불안정성이 고조된 것, 둘째는 이 자유주의 세력과 더불어 체제를 유지해 온 자유주의적 NGO에 대한 대중적 지지가 점차 철회된 것, 셋째, 정책 지향성의 상실과 그로부터 각종 부패 스캔들이 늘어난 것 등을 들 수 있다.
자유주의 세력이 ‘민주화’ 담론을 인민주의적으로 전유함에 따라, 대중운동이 반신자유주의 운동을 통해 더 적극적으로 민주주의의 담론을 발전시켜야 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가 마치 신자유주의 세력의 독점물인양 취급받기 시작했고 그만큼 민중적 정치운동의 가능성의 폭은 줄어들었다. 민주주의를 전면화하고 급진화하는 노력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발생한 민주주의의 후퇴는 자유주의 세력이 주도한 신자유주의적 전환이 진보 세력에게 초래한 심각한 타격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명박정권의 정치 이데올로기 : 관리되는 신자유주의화?

2007년 대선의 결과는 신자유주의의 통치성의 위기가 다시 전문관리체제라는 명목하에, 1990년대와 유사한 세력 결합 구도를 만들어 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보수적 지지기반 위에 일부 자유주의 세력을 포섭하여 실용주의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였는데, 이는 관리되는 신자유주의화라는 구도로, 그간의 돌출적 정책들과 ‘민주화’ 담론의 인민주의의 폐해성을 공격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그렇지만 새로운 집권세력이 단순한 보수주의 세력만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고 해서, 그 정치적 담론이 1990년대와 동일할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민주화’ 담론적인 인민주의를 포기하고 노골화한 신자유주의 방향으로 더욱 나가게 되는 외양을 띨 것으로 보이며, 자유주의 세력의 위기를 통해서 새로운 자유주의-보수주의 연합으로서 기존의 정치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매우 공세적인 태도를 취할 것으로 예측된다. 첫 번째로 그것은 노무현 시절과는 다른 새로운 형태의 인민주의 공세를 펼 가능성이 높다. 노무현 시절의 인민주의가 ‘민주화’ 담론의 독점을 통한 사실상 신자유주의의 전환의 방향을 띠었다면, 이명박 하에서는 교육, 공무원, 공공 분야에 대한 총공세를 통해서 다른 방식의 원한의 정치를 부각시키며 그를 통해 유예된 부문 없이 신자유주의적 전환은 완성을 시도할 것으로 보인다. 이전의 미디어와 NGO의 동원을 중심으로 한 인민주의적 정치 대신 억압적인 관리·행정 체제를 중심으로 하는 억압이 가속화될 가능성 또한 높을 것으로 보인다. 둘째로 시장 주도성의 강화는 쉽게 예견되는 것이고, 그에 대한 걸림돌은 사실상 매우 많이 해체된 것으로 보인다. 세 번째로 대중운동의 대응성이 전례없이 취약해졌기 때문에, 이에 대한 예비적 대응의 필요성 또한 그만큼 줄어들었고 그런만큼 대중에 대한 공세적 대응 또한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명박정권에 맞서는 대중운동의 조건

이에 맞서는 대중운동의 조건은 매우 취약하고, 그 어느 때보다 대중운동 자체가 위기적 상황 속에 처해있다. 대중운동의 여러 조건들을 고려해 볼 수 있지만, 두드러지게 그것은 민주노총, 민주노동당, 민중연대라는 세 가지 주요 조직들의 위기 속에서 관찰될 수 있다. 세 조직의 위기는 서로 맞물려 있는 것이고, 동일한 위기의 구조가 세 가지 조직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집권을 위한 정책대안이라는 구도는 운동세력이 빠져들기 쉬운 함정이지만, 운동조직이 이를 통해서 대중적 지지기반을 확대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자유주의 집권세력의 위기가 진보세력의 위기와 맞물린 것은, 진보세력 또한 1987년 정세의 봉합 이후의 상황을 돌파해 내지 못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민중연대의 사실상 해체(한국진보연대의 반쪽짜리 출범)는 이런 위기를 잘 보여주는 바가 있는데,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광범한 민중들의 연대를 확대하고 활성화하지 못하고, 오히려 제도권 정치적 지향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대중운동이 전환되어서는 대중운동의 고양을 통한 민중적 정치의 활성화를 기대할 수 없다. 분할되어 있는 대중들을 통일시키기 위한 중심체로서 민주노총, 민주노동당이 운동조직과 운동정당의 성격을 강화하지 못하는 한 대중의 정치적 역량을 성장시키고 그것을 통해 운동을 발전시키는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기층적, 지역적 영향력 확대를 수반하는 분명한 사회운동 정당으로의 방향전환이 없는 한 민주노동당 내의 갈등구조 또한 근본적 쇄신의 길을 동반하기는 어렵다고 보이며, 기층조직의 교육·조직·투쟁사업을 통일시키는 지나온 노동자운동 역사 속의 강점을 되살리지 않는다면 조직의 위기를 넘어서는 것 또한 여의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전선에서 민주주의의 현실적 긴박성을 강조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반신자유주의 연대를 확대하고, 특히 지역적·기층적 조직화에 힘쓰는 노력이 더욱 중요해 지고 있는 시점이다.
 
2008년01월15일 14: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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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imaud님, 님이 꼭 소장해야 할 책이 하나 나왔네요. ㅋㅋ

프랑스 TV 좌담회에 나온 걸 한 번 봤는데, 사진보다 훨씬 더 아름답더군요.

반짝반짝 빛이 난다고 할까, 그런 느낌을 줬어요.

목소리도 침착하면서도 단호한 것이

빈틈없는 내면을 갖춘 피아니스트구나 그런 느낌이 들더군요.

저도 한 번 구입해봐야겠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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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08-01-15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악하악 그리모 여신님~~~@.@ 처음에는 미모에 반하고 다음에는 연주에 반하고 그 다음에는 글솜씨에 반하고..킄 정말 여신님 같은 여친만 있었으면 소원이 없을텐데요...흙흙..ㅜ.ㅜ 오늘 발마스님 세미나에서 발마스님 바로 앞에 앉아 있던 사람이 바로 저예요 ㅋㅋㅋ

2008-01-16 0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라로 2008-01-16 0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땡스투가 안되나요???

balmas 2008-01-16 0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Grimaud님/ ㅎㅎㅎ 그러셨구나. 앞으로 꾸준히 나오셈~
속삭이신님/ 그렇군요. 강의계획서는 조금 있다가 조교에게 보낼 생각인데, 그럼 빠르면 내일(16일) 안에
등록이 될 겁니다. 제가 강의계획서를 메일로 보내드릴까요? 필요하시면 메일 주소를 비밀 댓글로 적어주세요. :-)
나비님/ 오, 고맙습니다. 땡스투까지 해주시고. 그런데 상품 입력이 안됐나 ;;; 다시 해볼게요.

2008-01-16 09: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래 글에 이어지는 속편 글입니다.

역시 이화여대 강철구 교수의 글입니다.


 





 


그로티우스와 식민주의적 열망
[강철구의 '세계사 다시 읽기'] <22> 근대 자연법의 형성과 식민주의 ②
등록일자 : 2008년 01 월 10 일 (목) 03 : 26   
 


  3. 그로티우스와 '바다의 자유'
  
  
네덜란드 사람인 그로티우스(Hugo Grotius)는 근대 자연법의 창시자이자 국제법의 아버비지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가 1609년에 <자유로운 바다: Mare liberum>라는 글을 통해 바다의 자유를 주장했고 1625년의 <전쟁과 평화의 법>이라는 책을 통해 국제법의 원리를 만들었으며 그것을 자연법 위에 세웠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사상은 보통 평화롭고 공정한 국제관계의 형성을 염두에 둔 것으로 오해되고 있다.
  
▲ 휴고 그로티우스 (Hugo Grotius, 1583 –1645)

  그러나 그가 바다의 자유를 주장한 것은 공정한 국제법을 위해서가 아니다. 17세기 초는 네덜란드가 동인도회사를 만드는 등 아시아 무역을 위해 매우 애쓰던 시기이다. 따라서 이때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내세우며 이 수역의 독점권을 주장하고 있던 포르투갈의 논리를 분쇄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그의 노력은 네덜란드의 상업적 나아가 식민주의적 이해관계에서 출발한 것이다.
  
▲ 토르데시아스 조약 (Tordesillas條約, 1494) 원본

  그는 인간은 신으로부터 이성과 자유의지를 물려받았으므로 기본적으로 이성적인 존재이며 도덕적인 자유를 누린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자신들의 편익을 위해 자연법을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기독교적인 고려는 상당히 약화되어 있다.
  
  그가 자연법을 구축하기 위해 인간의 사회적 본능으로부터 끌어낸 것은 다섯 개의 기본적인 원리이다. 그것은 1) 다른 사람의 재산에 대한 존중 2) 부당하게 뺏은 재산을 돌려줄 의무 3)잘한 일을 명예롭게 해 주기 4)손해에 대해 배상해줄 의무 5) 자연법을 공격하는 행위에 대한 처벌이다.
  
  이 원리들을 보면 그의 사상에서 재산권이 중심적인 원리를 차지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분명하다. 따라서 그가 '자유로운 바다'에 대한 주장을 기본적으로 재산권 위에 구축한 것은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다.
  
▲ 자유로운 바다 (Mare Liberum, 1609)

  
▲ 전쟁과 평화의 법 (De Jure Belli ac Pacis, 1625)

  그러나 이런 생각은 그의 독창적인 것이 아니다. 비토리아와 함께 역시 살라만카 학파에 속하는 바스케스(Ferdinando Vasquez)의 강한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글에서 두 사람을 수십 번씩 언급하고 있다.
  
  특히 비토리아의 영향은 절대적이다. 논리의 큰 틀이 같으며 아에네아스를 포함한 고대의 터무니없는 글들에서 자기 논리의 근거를 끌어내는 방식도 똑같다. 다만 두 사람의 논리를 더 정교하게 만들고 그것을 네덜란드의 식민주의적 이익을 위해 재구축했을 뿐이다.
  
  그는 재산을 동산과 부동산으로 구분했는데 동산은 그것을 직접 신체적으로 취함으로써 소유할 수 있다. 몸을 움직여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부동산은 그렇게 할 수 없으므로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의 울타리치기가 필요하다. 울타리치기를 통한 점유와 시효(時效)에 의해서만 재산권의 주장이 가능하다. 점유만 해서는 안 되고 상당기간 그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땅에서는 그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바다는 깊어서 울타리를 칠 수 없다. 당연히 바다를 개인적으로 점유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공유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누구나 바다를 자유롭게 항해하고 다른 나라와 교역할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통해 그가 <자유로운 바다>에서 하고 있는 이야기는 네 가지이다.
  
  1) 동인도에 대한 접근은 모든 나라에게 열려있다.
  2) 이교도들은 그들이 단지 이교도라는 이유만으로 공유나 사적인 재산권을 박탈당할 수는 없다.
  3) 바다 자체나 항해의 자유는 점령이나 교황의 수여, 시효나 관습 등에 의해 어느 일방의 배타적인 권리가 될 수 없다.
  4) 다른 국가와 교역을 하는 권리는 어떤 이유에서건 특정한 한 쪽의 배타적인 권리가 될 수 없다.
  
  이런 이야기는 식민지에 대한 정복자로서의 권리나, 교황의 수여에 의한 권리를 주장하는 포르투갈의 배타적 권리를 부인하는 것이다. 또 신은 자급자족이 가져오는 해로운 결과를 원하지 않으므로 상업을 통한 교환과 그것을 진작시키기 위한 수단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포르투갈이 이런 자연법적 원리를 침해할 때 네덜란드가 포르투갈에게 전쟁을 선포하는 일은 정당화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 토르데시야스조약에 의해서 만들어진 스페인과 포르투갈 지배권의 경계선. 연두색 부분이 포르투갈 세력권, 초록색 부분이 스페인 세력권이다.

  그렇다고 그의 이러한 주장이 일관된 것은 아니다. 나중에 잉글랜드가 네덜란드의 상업적 이익에 도전했을 때에는 이와는 달리 '폐쇄된 바다'를 주장했다. 자격 없는 자들이 제멋대로 무역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의 주장은 객관적인 원리에 의존하기보다는 네덜란드의 이익과 밀착되어 있다.
  
  그로티우스와 식민주의적 열망
  
▲ 사냥하는 북미 인디언 (18세기)

  그는 또 아메리카에서의 식민지 확보를 위해서도 같은 원리를 내세웠다. 토지는 신이 인간에게 공유로 수여한 것인데 그것을 어떤 사람이 자신의 개인적 소유로 하려면 울타리를 칠 뿐 아니라 그것을 경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땅에 대한 재산권은 직접 경작을 하는 개인에게만 가능했다.
  
  이런 논리로 그는 경작을 하지 않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땅을 침탈하는 것을 정당화했다. 반면 유럽에도 많이 산재하고 있는 빈 땅에 대해서는 그런 주장을 하지 않았다. 유럽의 땅은 모두 누군가의 재산권 하에 있다는 것이다.
  
▲ 정착생활을 하는 인디언의 실내 풍경

  또 그는 어떤 땅의 재산권은 그것을 경작하는 개인에게만 속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것이 곧 땅을 직접 경작할 개인들에게 분배될 경우에는 국가가 어떤 토지에 대해 권리를 갖는 것도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 주장은 다른 유럽국가가 이미 확보한 식민지를 빼앗기 위한 논리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로티우스의 자연법사상에서 식민주의에 대한 고려는 본질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바다의 자유라는 원리로 인도양이나 신세계에 도달할 수 있는 자유를 주장함으로써 기득권을 가진 다른 나라들의 권리 주장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재산권 이론으로 식민지 토지의 침탈을 정당화한 것이다.
  
  그의 자연법 이론은 이렇게 철저하게 식민주의적 열망에 봉사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가 귀족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네덜란드 공화국의 열렬한 지지자로서 포르투갈이나 잉글랜드와의 교섭에서 네덜란드의 상업적 이익을 지키기 위해 애쓴 외교관으로서의 경력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자연법이나 국제법에 대한 이론적 구성은 그 결과물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주장하는 평등하고 공정한 국제법은 유럽 내에서 네덜란드의 이익을 위한 것일 뿐 아니라 아메리카 원주민을 포함한 비유럽인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 매우 제한된 정의를 보여주는 것이다.
  
  푸펜도르프의 자연법
  
  그로티우스의 제자로 자연법을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 자무엘 푸펜도르프(Samuel Puffendorf)이다. 그는 독일 태생으로 독일의 룬트 대학 등에서 교수를 하다가 나중에는 스웨덴에서 활동했다. 그가 1672년에 쓴 자연법(De Jure Naturae)은 로크가 '이 종류의 가장 훌륭한 책'이라고 평가한 책이다. 이 책을 통해 푸펜도로프는 로크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 푸펜도르프 (Samuel Pufendorf, 1632~ 1694)

  그는 자연법을 논할 때 그로티우스나 로크와는 좀 다른 태도를 갖고 있다. 독일이나 스웨덴은 스페인, 네덜란드, 잉글랜드와 달리 당시 식민지 문제에 직접 관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 사람과 달리 이교도와 기독교인들에게 다 같이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자연법을 만들기를 바랐다. 그가 자연법을 재산권이 아니라 도덕적인 맥락에서 검토한 이유이다.
  
  그는 자연상태를 원시 시대에나 있었던 것으로 생각했으므로 아메리카나 다른 식민세계를 원시상태로 보지는 않았다. 또 아메리카 원주민을 원자화한 자연인으로 보지도 않았다. 아메리카인들도 종족이나 국가를 구성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그들도 유럽 국가들의 구성원이나 마찬가지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 그는 자연상태를 전쟁상태로 본 토마스 홉스와는 달리 평화상태로 보았다. 그 안에서 사람들이 보편적이고 영구적인 자연법에 의해 다른 사람들과 사교를 하며 인간의 본성과 목적에 맞추어 평화롭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재산권에 있어서도 그는 신이 인간에게 공동으로 이 세계를 주었다고 믿었으나 그것을 소유권이라는 적극적인 형태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것을 소극적으로 해석했다. 따라서 그것은 모든 사람이 공동으로 소유하는 것도, 또 어느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대신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 푸펜도르프의 자연법(De Jure Naturae, 1672)

  따라서 존 로크가 나중에 개인적인 점유를 뜻하는 전유(專有, appropriation)를 하지 않고는 어떤 것도 사용할 수 없다고 주장한 것과 달리, 사용(使用)이 전유에 앞선다고 주장한다. 사용권이야말로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이라는 것이다.
  
  또 그는 아메리카에서의 스페인인의 여행과 무역의 자유를 정당화하는 비토리아의 논리를 공격하는 가운데 식민주의의 침략성을 고발하고 있다. 유럽인이 원주민의 땅에서 여행할 자유를 갖는 것은 단지 폭풍에 밀려 왔을 때나 순수하게 손님으로 해안에 도착했을 때뿐이라는 것이다. 이 경우는 환대를 받아야 하나 물론 필요한 단기간만 머물러야 했다. 장기간 머물 때는 그들의 동기를 살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교역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유럽인들은 아메리카에서 원하는 누구나와, 또 무엇이든지 교역할 자유를 주장하나 그때도 동기를 살필 필요가 있다. 그들이 정의와 관용을 가지고 그렇게 하지 않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가 당시의 다른 사람들과 완전히 동떨어진 생각을 한 것은 아니다. 그도 국가로부터 특허권을 수여받은 동인도회사 같은 특허회사들의 교역 독점권을 자연법에 속하는 것으로 믿었다. 또 필요한 경우 식민지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유럽의 굶주리고 쓸모없고 반역적인 사람들을 추방하기 위해서는 식민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생각이 그로티우스나 로크와 매우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은 그가 식민주의적인 고려를 덜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대에 로크와 같은 사람의 영향력이 훨씬 더 컸으므로 그의 상대적으로 온건하고 합리적인 주장은 잊혀지고 말았다.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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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14 15: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08-01-15 00:26   좋아요 0 | URL
예, 메일 확인했습니다. 좀 생각해보고 연락 드리겠습니다.

자꾸때리다 2008-01-14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 내일 가도 되죵?

balmas 2008-01-15 00:27   좋아요 0 | URL
ㅎㅎ Grimaud님도 오시나요? ^^
 

[프레시안]에 재미있는 기사가 연재 중이어서 퍼옵니다.

필자는 이대 사학과 교수인데, 유익하고 좋은 글이네요.

 





 


근대 자연법의 형성과 식민주의
[강철구의 '세계사 다시 읽기'] <21>
등록일자 : 2008년 01 월 08 일 (화) 00 : 58   
 


  1. 근대 자연법, 어떻게 볼 것인가
  
  근대 자연법의 형성

  
  고대 그리스 철학과 로마의 스토아학파에서 발원한 자연법은 중세 시대에는 신학적 원리에 의해 지배되었다. 중세 사람들은 인간의 이성에 의해 자연적인 것으로 생각되는 모든 법의 원천이 신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중세적 자연법은 16, 17세기의 변화된 상황에 맞추어 스스로를 변화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16세기의 종교개혁과 그 후 1세기 넘어 계속된 종교전쟁, 또 유럽인이 아메리카나 아시아로 진출하며 부딪치게 된 많은 문제들이 자연법의 변화를 강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17세기의 자연법 학자들은 신적인 원리보다 스토아 학파가 설파하고 있는 인간 이성의 자율성을 강조했다. 인간 이성이 자율적이고 독립적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 원리가 근대 자연법 사상의 기초가 되었다.
  
  그들은 자연법을 성경에서 나타나는 신의 절대적인 의지와 같은 초월적인 원리가 아니라 합리적이라고 생각되는 인간의 '이성'에 근거시켰다. 자연법의 존재를 인간이 사회생활을 하는데 꼭 필요한 것으로 보이는 사회성이나 편익과 관련시켜 설명한 것이다. 그런 것을 위해 자연법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비토리아에서 불완전한 형태로 시작되어 그로티우스, 푸펜도르프, 로크에게로 이어지고 나중에 계몽사상가들에 의해 받아들여지며 17, 18세기 유럽 사회, 정치사상의 근본 모티브가 되었다. 그리하여 이 시기에 나타나는 국제법, 사유재산권, 자연상태, 자연권, 사회계약론, 인민주권설 등의 이론들은 모두 자연법에서 비롯되었다. 자연법이 계몽사상의 핵심일 뿐 아니라 근대 서양 사상의 본질적인 부분이 된 것이다.
  
  그것은 또 당대 미국의 독립전쟁이나 프랑스 혁명에도 큰 영향을 미침으로써 근대사의 진행과정에도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자연법의 바른 이해는 유럽 근대사상의 성격을 바로 이해하기 위한 선결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법의 이해와 유럽중심주의
  
  서양학자들은 지금까지 자연법을 대체로 인간의 보편적인 이성에 근거한 합리적인 사상체계로 이해해 왔다. 근대인들을 맹목적이고 기독교적인 중세적 도덕률에서 해방시켜 이성에 근거한 합리적인 도덕철학 위에 서게 했다고 믿은 것이다. 따라서 그에 대해 대체로 긍정적이고 찬미하는 태도를 보인다.
  
  물론 서양 사람들의 이런 태도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그들이 자연법을 유럽의 사상사적 전통과 근대 초 유럽 내부의 정치, 사회, 경제와의 관련에만 중점을 두고 접근하기 때문이다. 즉 유럽적 관련에서만 자연법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자연법은 유럽인들의 탁월한 문화적 성취 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근대 자연법의 형성과정에는 그렇게 볼 수 없는 다른 중요한 측면이 있다. 자연법의 발전이 근대 초 유럽인들의 식민주의적 열망과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 자연법의 발전이 애초에 식민주의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이론적 작업으로부터 많은 자극을 받은 것이다.
  
  그럼에도 서양학자들은 이런 면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것이 자연법 형성에서 본질적인 부분이 아니고 단지 사소하고 부수적인 면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근대 자연법에 미친 식민주의의 막중한 영향을 생각한다면 이런 태도는 상당 부분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서양학자들의 유럽중심적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식민주의와의 관련성을 차단함으로써 그들이 찬양하는 자연법의 보편적인 의미를 훼손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자연법을 바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장에서는 근대 자연법의 형성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비토리아, 그로티우스, 푸펜도르프, 로크의 자연법사상과 식민주의와의 관련을 검토함으로써 근대 자연법에 대한 기존의 해석을 넘어서서 보다 객관적인 이해에 접근하려 한다.
  
  2. 스페인의 아메리카 정복과 비토리아
  
  아메리카 정복의 정당성 문제
  
  15세기 말에 시작된 스페인인의 아메리카 정복과 식민화는 매우 쉬운 과정이었다. 토착 제국들과 정치체들이 급속히 붕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메리카의 정복과 지배는 당시 스페인 사람들에게 큰 지적인 문제를 만들어냈다. 즉 아메리카에 대한 스페인왕의 지배권(imperium)과 재산권(dominium)을 어떻게 정당화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16세기 초에는 교황 알렉산더 6세의 칙서가 그 근거가 되었다. 1493년에 교황이 이사벨라와 페르디난드 공동왕에게 대서양에서 새로 발견되는 땅에 대해(그것이 어느 기독교 군주에 의해 점유되어 있지 않은 한) 지배권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황의 이런 행위는 교황이 기독교인과 이교도들 모두에 대해 세속적인 권위를 갖고 있다는 가정 위에 서 있었다. 그러나 이런 가정은 중세 자연법에 기초를 갖고 있지 않았으므로 신학자들이나 법률가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 교황알렉산더 6세 (Pope Alexander VI, 1431~1503)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504년에 페르디난드왕이 한 회의를 소집했다. 여기에 모인 법학자, 신학자, 교회법학자들은 아메리카 원주민인 인디오가 왕에게 속하며 그것은 인간의 법이나 신의 법에 합치된다는 결론을 내림으로써 왕의 지배권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 스페인의 공동왕 페르디난드(Fedinand Ⅱ)와 이사벨라(Isabella Ⅰ)

  1511년에 새로운 상황이 벌어졌다. 서인도의 이스파뇰라 섬에서 선교를 하던 도미니쿠스 파의 몬테시노 신부가 원주민에 대한 스페인 식민자들의 잔인하고 부당한 행위들을 설교를 통해 공격했기 때문이다. 그는 식민자들이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 '그들은 무어인이나 튀르크인과 마찬가지로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고 강경하게 성토했다.
  이 사건이 서인도제도 뿐 아니라 본국에까지 파장을 일으키며 국왕의 지배권 문제에 대한 논의를 다시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그 해에 부르고스에서 열린 회의에서는 다시 한 번 스페인왕이 아메리카에 대한 지배권과 재산권을 갖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 결론을 내린 논거는 무엇일까.
  
  이 회의는 로마법에 근거하여 원주민들의 재산권을 부정했다. 원주민들이 적법한 사회를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로마 법학자들에 의하면 사회란 재산에 기초해 있는 것이고 재산관계가 진정한 시민 사이의 모든 교환의 기초였다. 따라서 그런 관계를 갖고 있지 않은 사회는, 즉 시민공동체를 갖고 있지 않은 사회는, 그들의 땅을 빼앗으려는 침략자에 대해 재산권을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의 땅은 그들의 땅이 아니라 그들이 우연히 살게 된 열린 공간이라는 것이다.
  
▲ 아메리카 원주민과 그 사회, 국가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것은 16세기 스페인인들에게 매우 큰 과제였다.

  이런 주장은 서인도 제도 같이 문화적으로 뒤떨어진 곳에는 적용할 수 있었으나 아스텍이나 잉카 지역에는 불가능했다. 이들 나라가 정치 공동체를 갖고 있고 그 땅을 지배하고 잘 관리하고 있다는 것은 유럽인들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1530년대에 정복의 정당성 문제가 다시 대학을 중심으로 제기되었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해 가장 유명하고 강력한 논리를 제공한 사람이 살라만카 대학의 신학부 교수인 프란시스코 드 비토리아(Francisco de Vitoria)이다.
  
  정복의 정당성과 신법
  
▲ 비토리아 (Francisco de Vitoria, 1483~1546)

  비토리아는 도미니쿠스파 신부로서 1511-23년 사이에 파리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한 인물이다. 학문적으로 매우 유능한 인물로 파리 대학에서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을 편집하는 일에 참여했고 귀국해서도 제자들에게 주로 신학대전을 교과서로 하여 가르쳤다. 말하자면 전형적인 스콜라 철학자로서 16세기 스페인의 유명한 살라만카 학파의 창시자이다.
  
▲ 파리 대학의 강의 모습.

  스콜라철학자들은 재산권이란 그것이 사회를 구성하건 아니건 모든 사람에게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재산의 권리가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에게만 배타적으로 주어진다고 하는 부르고스 회의의 결론은 비토리아에게는 불충분해 보였다. 아메리카의 정복은 원주민들이 이 자연권을 그 자신들의 행위에 의해 상실했다는 것을 증명해야 정당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 살라만카 대학은 16세기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문화적 중심지의 하나였다.

  따라서 그는 스페인인들이 아메리카의 토지를 원주민들로부터 빼앗는 근거를 파고 들어갔다. 그런데 이 야만인들은 인간적인 법(유럽적인 법)이나 그 지배자 밑에 있지 않았다. 따라서 유럽의 실정법에 의해 판단할 수는 없었고 신법(神法)에 의해 판단되어야 했다.
  
  그들은 기독교적 입장에서는 많은 죄를 짓고 있고 이단적인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주권이나 재산권을 부인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기독교적 사회만이 아니라 자연상태에 사는 사람들도 이에 대한 자연권을 갖고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또 이들이 이성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복되어도 좋다는 생각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들도 교육을 잘 받지 못해서 그렇지 그 나름으로 이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도시의 건설이나 결혼, 관리(官吏), 통치자, 법, 수공업, 상업 등 '이성의 사용'을 필요로 하는 행위들을 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
  
  비토리아에게 문제가 된 것은 토착민들이 기독교 선교를 거부할 때 그것이 정복의 근거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그는 이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어떤 유럽의 군주나 교황도 지구 전체에 대한 세속적인 지배권을 주장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원주민들이 그들이 싫어하는 것을 거부했다고 해서 공격을 받을 수는 없었다.
  
  또 그들이 온갖 종류의 성적인 일탈이나 인육을 먹는 카니발리즘을 통해 중세 자연법을 위반했다 해서 그들을 강제할 근거도 없었다. 따라서 비토리아는 유감스럽지만 스페인인은 그들이 아메리카에서 하는 일에 대한 도덕적 정당성을 갖지 못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신법의 입장에서 볼 때 스페인인들은 식민지 정복의 아무런 권리도 주장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만민법과 교통의 자유
  
  이렇게 신법으로는 아메리카 정복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없었으므로 비토리아는 다른 방법을 취했다. 로마 시대의 만민법(ius gentium)을 끌어 들인 것이다. 만민법은 로마 시대에 그 영토 안에 있는 수많은 종족들 사이의 관계를 규율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인데 그는 모든 국가 사이에는 만민법이 작용한다고 믿은 것이다. 그는 만민법을 자연법이거나 또는 자연법에서 비롯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만민법의 개념을 바탕으로 신화와 허구를 포함해 고대의 많은 글들을 인용하며 '사회와 자연적 교통의 권리'라는 원리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것이 유럽인과 아메리카 원주민을 포괄할 수 있는 기독교보다 더 보편적인 원리라고 주장했다.
  
  이에 의하면 바다, 해안, 항구는 시민으로서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이며 모든 사람에게 공동으로 속하는 것으로 사유 재산에서는 벗어나 있다. 따라서 그는 어떤 해안이 누구에게 속하든 상관없이 거기에 들어가는 것은 법의 객관적 권리라고 주장했다. 그것이 서로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로마의 전설적 시조인 아에네아스가 자신의 정박을 거부한 라티움 왕을 야만인이라고 부른 이유라는 것이다.
  
  이렇게 그는 고사(故事)로부터 선례를 만들어 가며 여행과 방문, 정착, 교역, 광산 채굴의 보편적인 권리를 끌어냈다. 그리고 이런 권리가 정중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부인될 때는 전쟁을 할 수도 있었다. 어떤 사람의 권리를 지키는 것은 전쟁의 정당한 사유가 되기 때문이다.
  
  당연히 교역을 막아서는 안 되었다. 그것이 유무상통을 통해 서로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만약 원주민들이 내지 여행을 막고 복음을 전하는 것을 금한다면(그들이 그것을 믿건 말건) 스페인인들은 그들을 정복할 권리를 갖는다. 또 인간을 희생시키는 제사나 카니발리즘을 강제로 막는 것도 합법적이다. 또 원주민들의 전쟁에도 요청을 받을 경우 참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 인디언의 낮은 지성을 고려하면 폭력은 최소화해야 했다.
  
  이렇게 비토리아는 기독교가 정당화할 수 없는 정복행위를 자연법이 할 수 있게 만들었다. 로마법에 근원을 갖고, 선례를 신화에서 찾고, 비토리아에 의해 주의 깊게 제한된 상황에서이기는 하나 후대에 무한히 확장될 수 있는 보편적인 원리가 원주민들에 대한 정복과 착취를 정당화한 것이다.
  
  1539년부터 본격화된 이 논리는 곧 지배적인 이론으로 받아들여지며 이후 스페인 식민주의의 중요한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이는 다른 식민국가들에게도 유용한 이론이었다. 네덜란드나 잉글랜드를 포함하여 많은 나라 사람들이 이 이론을 열렬히 환영한 이유이다.
  
  그러나 인간의 자연적 사회성과 동료애라는 가정 위에 선 이 원리가 아메리카에 적용된 상황은 참 역설적이다. 그 명목 하에 아스텍 여인들이 개의 먹이로 던져졌고 아메리카의 전체 문화가 파괴되었던 것이다.
  
▲ 도미니쿠스파 선교사인 라스 카사스(Las Casas)는 아메리카에서 벌어지는 스페인 식민자들의 악행을 고발한 대표적인 사람 중 하나이다. 이 그림은 그의 책 <인디언 파괴에 관한 간결한 보고>(1667) 가운데 한 페이지이다.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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