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우님, 지난 번에 알튀세르의 {재생산에 대하여} 번역이 좋은지 질문했던 적이 있죠?
원래는 서점에서 읽어볼까 했는데, 마침 가까운 서점이 이전 공사 중이어서 위험을 무릅쓰고(?) 주문해서 오늘 책을 받아서 조금 읽어봤습니다.
읽어봤더니 역시 예상대로 번역이 아주 형편없는 것은 아니지만 또 썩 만족스러운 수준은 아니더군요. 김웅권 씨의 번역이 대개 그렇습니다. 자기가 전공하지 않은 분야의 책들을 주로 번역하고, 그것도 너무 많은 책을 번역하다 보니까, 사실 수준 높은 좋은 번역을 기대하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겠죠.
{재생산에 대하여} 번역의 사례를 몇 가지 본다면, 이 책의 번역의 수준이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곳저곳 몇 군데를 읽어봤는데, 대동소이한 수준에 비슷한 문제점들이 나타납니다.
우선 1장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볼까요? 41쪽 첫 문장은 이렇게 돼 있습니다. “우리들 각자는 철학이 무엇인지 자연발생적으로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자연발생적으로”는 “spontanément”의 번역인데, 이 단어라면 “자생적으로”라고 옮기는 게 좋겠죠. “자연발생적으로”와 “자생적으로”는 뉘앙스의 차이가 상당히 크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 정도야 그리 큰 문제라고 할 수는 없겠죠.
그 다음 43쪽까지는 별로 문제가 없는 번역입니다. 그런데 43쪽에서 좀 문제가 나타납니다. 우선 두 번째 문단에 괄호 안에 든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사태가 잘 해결되길 기다린다”거나 죽음이 갑자기 닥칠 때, “철학한다는 것은 죽는 것은 배우는 일이다”―플라톤―에서 보듯이 말이다)” 이 문장은 정확히 보면 비문이고 원문의 내용도 약간 부정확하게 옮기고 있습니다.
원문은 이렇습니다. “(“on attend que ça se tasse” ou que la mort survienne : “philosopher c'est apprendre à mourir”―Platon―)”
제가 옮긴다면 이렇게 옮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사태가 잘 해결되길 기다린다.” 또는 죽음이 닥치기를 기다린다. 이런 의미에서 플라톤은 말한다. “철학한다는 것은 죽는 것을 배우는 일이다)””
세 번째 문단 번역에서도 문제가 나타납니다. “이러한 동일화는 비판적인 가치를 지니는 철학에 대한 어떤 관념을, 본의와는 달리 그런 것처럼, 사실상 포함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이 문장의 불어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Il n'est pas possible de dire que cette identité contienne, en fait, et comme malgré elle, une idée de la philosophie qui possède une valeur critique.”
제가 볼 때 이 문장은 이렇게 번역하는 게 적절할 듯합니다. “[철학=체념이라는] 이러한 동일성이, 사실상 그리고 그 자신에 거슬러, 비판적인 가치를 지닌 철학에 대한 어떤 관념을 포함한다고 말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이 문장의 뜻은 이런 것입니다. 철학에 대한 대중적인 생각에서 엿볼 수 있는 철학 = 체념이라는 표상이, 비판적인 가치를 지닌 철학관을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철학 = 체념이라는 관념과, 비판적인 철학관은 양립 불가능하다는 것이죠.
44쪽에도 잘못된 번역이 나옵니다.
“현재로선 중요한 것은 민중의 표현에서 문제되고 있는 상식의 철학과 본래 의미의 대문자 철학과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깨닫는 것이다. 후자의 철학은 (플라톤 ...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들 등과 마르크스, 레닌 같은) 철학자들에 의해 ‘구상된’ 철학이다. 그것은 대중에 보급될 수도 있고 보급되지 않을(a) 수도 있다. 아니 그보다 보급될(b) 수 있다.”
이 밑줄친 문장을 보면, 이게 무슨 말인지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문장의 불어 원문은 이렇습니다. “qui peut ou non se diffuser(A), ou plutôt être diffusée(B) dans les masses populaires.”
이 문장은 이렇게 번역할 수 있을 것 같네요. “후자의 철학은 (...) 철학자들이 ‘가다듬은’ 철학으로, 인민 대중 속에 확산되거나 확산되지 않을(a') 수 있다. 또는 오히려 [지식인에 의해] 보급될(b') 수 있다.”
(a), (b)와 (a'), (b')의 차이는 김웅권 씨는 원문의 “se diffuser”(A)와 “être difusée”(B)를 똑같이 “보급될”로 번역한 것에 비해, 제 번역은 (A)는 “확산되다”로 번역했고 (B)는 “[지식인에 의해] 보급되다”로 번역한 것에 있죠.
불어에서는 수동 표현을 만드는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한 가지는 동사 앞에 “se”라는 단어를 붙이는 것이고, 또 하나는 être 동사(영어의 be 동사에 해당) + 과거분사를 쓰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서 (A)에서는 se +diffuser라는 형태로 (B)에서는 être 동사 +과거분사라는 형태로 수동 표현이 두 번 쓰이고 있죠. 따라서 이 두 가지 수동 표현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해명하는 게 이 문장을 이해하는 데 관건이 될 텐데, 김웅권 씨는 그냥 (A)와 (B)를 똑같이 “보급될”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문장 자체나 맥락만을 봐서는 (A)와 (B)의 차이가 어떤 것인지 파악해내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다만 추측해본다면, 양자 사이의 차이는 이렇게 볼 수 있을 듯합니다. 알튀세르가 (A)에서 “se diffuser”라고 말할 때, 이 때의 “diffuser”는 “누가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널리 퍼뜨린다, 보급한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자생적으로, 자연히 퍼져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A)는 “철학자가 가다듬은 철학이 인민 대중 속에 자생적으로, 자연히 확산되거나 확산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뜻하죠. 곧 이미 대중의 자생적인 표상 속에서 철학자들이 가다듬은 철학의 맹아 같은 게 담겨 있다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알튀세르는 바로 뒤에서 “또는 오히려”라는 말을 덧붙인 뒤에 이번에는 (B), 곧 “être difusée”라는 표현으로 (A)를 대체하죠. 이것이 무얼 뜻할까요? 제가 보기에 이는 (A)와 달리 철학자가 가다듬은 철학은 대중들의 생각 속에 자생적으로 확산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개입을 통해, 보급을 통해서 비로소 퍼지게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알튀세르는 (A)보다는 (B)가 사태에 더 잘 들어맞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또는 오히려”라는 접속사를 덧붙인 다음에 (A) 대신 (B)라는 표현을 대체한 것이죠.
제가 보기에 이는 이 문장 바로 뒤에 나오는 문장을 통해 정당화될 수 있을 듯합니다.
김웅권 씨의 번역을 먼저 보기로 하죠.
“오늘날 우리가 폭넓은 대중의 민중적 표상에서 철학적 요소들을 만날 때 이러한 보급 속에서 그것들을 고려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들은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노동 운동의 결합을 통해 대중에 ‘주입된’(레닌ㆍ마오쩌둥) 본래 의미의 대문자 철학적 요소들에 대한 민중의 자연발생적 의식으로 간주될 수 있다.”
“Quand on rencontre aujourd'hui des éléments philosophiques dans la représentation populaire des larges masses, il faut en tenir compte dans cette diffusion, faute de quoi on peut prendre pour la conscience populaire spontanée des éléments philosophiques au sens fort qui ont été "inculqués"(Lénine, Mao) aux masses par l'union de la théorie marxste et du Mouvement ouvrier.”
김웅권 씨의 번역은 별로 나쁜 번역은 아닌데, 다만 약간 수정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밑줄 친 부분을 이렇게 바꿔보면 알튀세르의 논점이 좀더 분명히 드러날 듯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노동 운동의 결합을 통해 대중들에 ‘주입된’(레닌ㆍ마오) 강한 의미의 대문자 철학적 요소들을 민중의 자연발생적 의식으로 오해할 수 있다.”
또 이런 식으로 번역해야 (A)와 (B)의 차이도 좀더 분명히 드러날 수 있습니다. 김웅권 씨의 번역은 전반적으로 읽을 만한 번역이긴 하지만, 좀 미묘한 논의가 나오는 대목에서는 이처럼 오역을 범하거나 뉘앙스를 적절히 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좀더 뒤로 가서 125쪽 [국가와 국가장치] 부분을 좀 볼까요? 사소하긴 한데, 첫줄에 약간의 오역이 있네요.
“즉 국가는 {공산당 선언}과 {브뤼메르 18일}에서부터 (그리고 파리코뮌에 대한 마르크스의 그 이후의 모든 고전 텍스트들과 레닌의 {국가와 혁명}에서) 억압 장치로 분명하게 이해되고 있다.”
여기서 괄호 속의 내용은 “그리고 그 이후의 모든 고전 텍스트, 무엇보다도 파리코뮌에 대한 마르크스의 텍스트들 및 레닌의 {국가와 혁명}에서”로 번역해야죠.
126쪽에서는 1절 제목 번역에 약간 문제가 있네요.
“1. 묘사적 이론에서 단순하게 이론으로”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이 제목의 원문은 “1. De la théorie descriptive à la théorie tout court”입니다. 여기서 “tout court”라는 표현은 “단순하게”라는 뜻보다는 “자체”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게 좋습니다. 다시 말해 이 제목이 말하려는 것은 <국가에 대한 묘사적(또는 기술적) 이론에서 국가에 대한 과학적 이론으로>라는 뜻입니다. “la théorie tout court”는 과학적 이론으로서 이론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죠.
또 중간쯤 보면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우리가 건축물의 은유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혹은 국가에 대한 마르크스 ‘이론’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것들이 그 대상에 대한 이해들이거나 묘사적 표상들이라고 말할 때, ...”
여기서 밑줄친 부분의 원문은 “des conceptions, ou représentations descriptives de leur objet ...”입니다. 따라서 이는 “자신들의 대상에 대한 묘사적 관념이나 표상들”로 고치는 게 옳겠죠.
결론을 내리면, 김웅권 씨의 번역은 전반적으로 읽을 만한 번역입니다. 단 읽다 보면 고개를 갸우뚱거리거나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 나올 텐데, 그건 오역일 가능성이 높지요. 읽다가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은
따로 질문하시면, 제가 이해할 수 있는 한에서는 답변해드리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