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올리는 김에 하나 더 올립니다. 곧 출간된 {마르크스의 유령들}에 수록될 용어 해설 중

하나입니다. 보통은 "현전의 형이상학"이라고 하는 개념인데, 굳이 "현전"이라는 낯선 단어를 쓸

필요가 없는 것 같아서 "현존의 형이상학"이라고 바꿔 표현했습니다. 이 개념은 복합적인 쟁점들이

얽혀 있어서 전문적으로 다루려면 상당히 많은 논의가 필요한 개념인데, 개략적으로는

이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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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의 형이상학 métaphysique de la présence




현존의 형이상학 또는 현전(現前)의 형이상학이라는 개념은 데리다와 관련하여 가장 널리 사용되는 대표적인 개념 중 하나다. 이 개념은 서양의 형이상학에 대한 하이데거의 “해체” 작업을 계승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비판적으로 변형시키려는 데리다의 초기 작업을 집약적으로 표현해준다.

  따라서 현존의 형이상학이라는 개념에 대한 이해는 하이데거의 철학에 대한 이해를 전제하는데, 간략히 다음과 같이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보통 하이데거의 철학은 {존재와 시간}(1927)으로 대표되는 초기의 작업과 이른바 “전회Kehre” 이후(대략 니체에 대한 강의가 이루어진 1930년대 후반 이후)에 전개되는 후기의 작업으로 구별된다. 초기 하이데거의 작업은 현존재Dasein의 분석으로서 기초 존재론을 확립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하이데거는 존재자의 이러저러한 측면이나 영역들을 이론적으로 확립하려는 작업으로서 모든 학문은 인간 현존재가 일상적인 삶 속에서 자기 주위의 존재자들과 맺고 있는 실천적인 관계(후설이나 하버마스가 말하는 “생활세계”로 이해할 수도 있다)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특수한 존재자의 영역이 아니라 존재자의 존재가 가지는 의미 자체를 해명하려는 존재론으로서의 철학은 이러한 현존재가 자신의 존재(“실존”)를 이해하는 방식에 근거를 두어야 하는데, 하이데거는 이를 바로 기초 존재론이라고 부른다.

  반면 전회 이후에 하이데거는 더 이상 인간 현존재에 대한 분석에서 출발하여 존재의 의미를 해명하려 하지 않고 대신 존재 자체의 사태에서 출발하려고 시도한다. 이를 위해 그는 서양의 철학이 형이상학화되기 이전의 사상, 곧 소크라테스 이전의 자연철학자들의 단편에 나타난 존재 이해를 출발점으로 삼는다(본문에서 논의되는 「아낙시만드로스의 금언」 역시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그는 이들의 단편에서 존재가 “현존présence”(독일어로는 Anwesen)으로서 드러나고 있다고 본다. 곧 이들에게는 존재가, 현존하는 것을 현존하게 해주는 운동 내지 사건으로서 나타난다(또는 하이데거 식으로 말하면 “탈은폐된다”). 반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면 벌써 존재의 망각이 일어나서 존재는 더 이상 이러한 현존하게 해줌의 사건으로서 이해되지 않고, 어떤 항구적인 실체로, 곧 “현존자présent”(das Anwesende) 내지 “현존성”(Anwesenheit)으로 간주된다(하이데거에 따르면 우시아ousia, 수브스탄시아substantia, 코기토cogito 등과 같은 서양 철학사의 근간 개념들은 이러한 존재 망각의 표현들이다). 따라서 서양의 형이상학은 소크라테스 이전의 사상가들에서 탈은폐되었던 존재(곧 현존하는 것들을 현존하게 해주는 선사의 사건으로서 존재)가 점차로 망각되어온 역사이며, 이는 니체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렀다고 본다.

  이것이 하이데거가 말하는 현존의 형이상학의 대략적인 내용이다. 하지만 현존의 형이상학이라는 명칭 자체는 하이데거가 아니라 데리다가 붙인 것이다. 데리다는 하이데거의 논의를 따라 서양의 형이상학을 포괄적으로 “현존의 형이상학”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는 하이데거와 달리 전 소크라테스 철학자들의 단편에서 존재가 원초적으로 자신을 드러낸다고 보지 않으며, 철학사에 속한 철학자들의 저작 속에서만 서양 형이상학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또 어떤 의미에서는 하이데거 자신도 여전히 현존의 형이상학의 울타리 안에 갇혀 있다고 본다. 


  데리다에서 현존의 형이상학은 일차적으로 기의와 기표, 또는 음성과 기록의 문제로 나타난다. 곧 그에 따르면 서양의 형이상학은 의미나 진리의 생생한 현존으로서 로고스를 추구해왔으며, 이러한 로고스는 음성을 통해서 생생하게, 현존 그대로 드러난다고 간주해왔다. 이는 플라톤이나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오래된 철학자에서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루소나 헤겔 또는 후설이나 하이데거 같은 철학자, 그리고 소쉬르나 레비스트로스 같은 20세기의 인문과학자들의 작업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이 데리다의 생각이다. 다시 말해 로고스가 생생하게 구현되는 자연적인 매체로 음성을 특권화하고 대신 문자나 기록 일반은 이러한 음성을 보조하는 데 불과한(심지어 배반하기도 하는) 부차적인 도구로 간주하는 이론에서는 어디서든 현존의 형이상학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데리다에게 현존의 형이상학은 로고스중심주의이자 음성중심주의를 뜻하며(나중에는 특히 라캉에 대한 논의를 통해 이는 팔루스중심주의로 확장된다), 이것이 로고스의 자연적인 발현 장소로서 음성을 특권화하는 한에서 이는 또한 기술에 대한 폄훼와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데리다는 서양의 형이상학에 대한 하이데거의 해체 작업은 근본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지만, 동시에 그것이 “존재의 부름l'appel de l'être”이나 “존재의 목소리voix de l'être” 같이 음성 중심주의를 함축하는 모호한 은유에 의존하고, 또 존재의 의미는 기호들, 기록들의 연관망에서 벗어나 있다고 간주하는 한에서는 여전히 서양 형이상학의 울타리 안에 갇혀 있다고 본다.

  로고스중심주의, 음성중심주의로서 현존의 형이상학이라는 주제는 초기 데리다의 저작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나지만, 80년대 이후의 후기 작업에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고 있다. 반면 초기 저작에서는 하이데거의 형이상학 “해체”(또는 “극복Überwindung”)의 주요 개념인 “es gibt”(보통 사용되는 의미로 한다면 “~이 있다”)나 “Ereignis”(보통은 “사건”을 의미하지만, 하이데거는 이 단어에 함축된 “고유한eigen”이라는 어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사용하고 있다) 또는 “장래Zukunft” 등에 대한 논의가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다가, {법의 힘}이나 {시간의 선사Donner le temps}(1992), {마르크스의 유령들} 또는 {아포리아}(1996) 등에서는 광범위하게 활용되고 또 변용되고 있다(“장래avenir”와 “도래à-venir”, “도착하는 이arrivant”, “선사don”, “임박함imminence”, “사건”, “전유”, “비전유”, “탈전유” 등이 그 사례다). 이런 의미에서 하이데거의 서양 형이상학 해체는 데리다 철학의 주요 원천이면서 또 가장 중요한 대결의 쟁점이라고 할 수 있다. 데리다가 하이데거를 자신의 유령이라고 말한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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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이 좀 늦었습니다. 서관모 선생이 무언가 답변을 주실까 했더니, 조금 더 기다려봐야 할 듯하군요. 그래서 먼저 최원 형 댓글에 답변을 하면서 약간의 논의를 더 보충해보겠습니다. 

우선 civilité의 번역어는 정말 “시민인륜성”이 아니라 “시민인륜”이더군요. 헤겔의 Sittlichkeit가 대개 “인륜성”으로 번역되기에 무심결에 “시민인륜성”으로 봤는데, 제가 좀 부주의했네요. 어쨌든 “시민인륜”이라는 번역어에 대한 제 견해는 지난 번과 같습니다.

그 다음 puissance의 번역어인 “역능”과 notion의 번역어인 “의념”에 대한 논의에 대해서는, 세밀하게 검토하자면 상당히 오랜 논의가 될 듯해서 오늘은 다음과 같은 정도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우선 제가 주소를 달아놓은 프랑스 사전에 나온 notion에 대한 설명을 간략히 살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사전에서는 notion이라는 단어에 세 가지 정도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A. “어떤 사물에 대한 직접적이고 직관적인 인식”이라는 의미지요.

B. 두 번째는 “정신의 구성물, 표상”이라는 뜻으로, 관념과 동의어라고 하고 있습니다.

C. 마지막으로 철학에서 쓰이는 특수한 어법에서는 “대상의 본질적인 성격을 함축하는 것으로서,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관념”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는 개념과 동의어로 쓰인다고 덧붙이고 있고요.


그리고 각각의 항목에 대해 몇 가지 사례들이 나와 있고, 또 각각의 항목에서 약간의 변이형도 보여주고 있지요. 

지난 번에도 이야기했듯이 사전에 나오는 정의는 엄밀한 정의라기보다는 이런저런 용례들에 대한 규정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본다면, 이러한 정의들은 불어에서 쓰이는 notion에 대한 용법들을 상당히 다양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유용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전의 정의에 대해 제 나름대로 몇 가지 논평을 해보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notion에 관한 불어의 용법에서는 일상적인 의미로 쓰이는 notion과 철학에서 전문적으로 쓰이는 notion을 구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알기로 독일어에서 notion이라는 단어는 거의 쓰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영어의 용법은 불어와 크게 차이가 있는 것 같지 않은데, 불어의 용법에 비해, 모호함, 확실한 증거 없이 어떤 개인이나 집단이 신뢰를 보내는 관념 같은 의미가 좀더 강조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 사전들을 참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http://www.hydroponicsearch.com/spelling/simplesearch/query_term-notion/database-!/strategy-exact; http://dict.die.net/notion/)

일상적인 용법으로 본다면 notion은 사실 별도의 번역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 단어가 쓰이는 상황에 따라, “관념”이라든가 “개념”, “용어”라든가, 또는 그냥 “말”이라고 번역해주면 무난하겠지요. 가령 “la notion d'espace”나 “la notion de cause” 같은 것들은 “공간 개념”이나 “원인 개념”으로 번역해도 좋고 아니면 “공간이라는 관념”이나 “원인이라는 관념” 또는 “공간이라는 용어”나 “원인이라는 용어” 같은 식으로 맥락에 따라 여러 가지로 번역할 수 있다고 봅니다. 또 그런 게 자연스럽기도 하죠.

이 경우 각각의 경우에 “의념”이라는 단어를 대체한다면, 사실 매우 어색하게 들리지 않겠습니까? 반면 “통념”이라는 단어를 대체해본다면, 적어도 “의념”이라는 단어보다는 훨씬 덜 어색하게 들리리라고 봅니다. 그건 그만큼 통념이라는 말이 훨씬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말이고, 이 경우에 notion이라는 불어 단어가 불어권에서 쓰이는 용어법과 좀더 가까운 용법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점은 뒤에서 더 생각해보기로 하지요.  

철학적인 용법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이 사전의 정의는 상당히 불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사전에서는 notion을 “대상의 본질적인 성격을 함축하는 것”으로서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관념”이라고 규정하면서 개념과 동의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경우에는 사실 굳이 notion에 대한 다른 용어를 고려할 필요가 없겠죠. 그냥 “개념”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 충분합니다. 

이 사전은 철학 사전이 아니므로, 사실 어떤 점에서는 당연하다고 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좀 아쉬운 것은 불어 사전임에도 불구하고 바슐라르 이래 프랑스 과학철학의 전통, 다시 말해서 알튀세르나 푸코, 또는 바디우 같은 사람들의 저작에서 상당히 널리 통용되고 있는 “concept”와 “notion”의 구별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알튀세르나 초기 바디우(특히 “Le concept de modèle” 같은 저작)에서 notion은 전과학적ㆍ이데올로기적인 표상들, 관념들을 가리키는 반면, concept는 과학적 개념, 인식을 나타내는 용어들을 뜻합니다. 주지하다시피 이는 바슐라르가 창시하고 알튀세리엥들이 개조한 “절단coupure” 및 “단절rupture”의 인식론에 의거하고 있는 용어법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발리바르, [바슐라르에서 알튀세르로: 인식론적 단절의 개념], {이론} 95년 겨울호를 참고할 수 있겠죠.

지나치는 김에 지적하자면,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발리바르의 원래 논문 제목은 “coupure épistémologique”인데, 서관모 선생은 번역본에서 이를 “인식론적 절단”이 아니라 “인식론적 단절”이라고 번역했다는 점입니다. 서관모 선생은 162쪽에 붙인 역주에서 “알튀세르는 ‘인식론적 단절’ 개념에 독자적인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바슐라르의 rupture를 coupure로 개명하여 사용하였다”고 말하면서도 “알튀세르 자신도 80년대에는 별도로 coupure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rupture라는 용어를 쓴다”고 지적하면서 두 단어를 구별하지 않고 모두 “단절”이라고 번역하고 있지요. 그 대신 양자를 구별하기 위해 원어를 병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지적은 좀 사실과 어긋납니다. 알튀세르는 단순히 rupture를 coupure로 대체한 게 아니라, 두 개념을 구별해서 함께 쓰고 있습니다(Écirits philosophiques et politiques II에 수록된, “Sur la philosophie”라는 장을 보십시오. 특히 pp. 318 이하). 이건 발리바르도 마찬가지지요(Lieux et noms de la vérité, Aube, 1994 중에서 3장 “coupure et refont” 참조). 물론 두 사람이 이 두 가지 개념을 가공하는 방식에는 얼마간의 차이점이 존재하긴 합니다.  

따라서 “coupure”와 “rupture”는 서로 구별되는 용어로 번역하는 게 옳을 것 같더군요. “coupure”라는 단어가 “자르다”는 뜻을 지닌 “couper” 동사에서 나온 말이므로, “절단”이라는 번역어가 괜찮다고 봅니다. 언젠가 Gregory Elliott의 글을 보니까 “coupure épistémologique”를 “epistemological cut”이라고 옮기던데, 상당히 정확한 번역이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이 번역문에서 서관모 선생은 notion을 “상념(常念)”이라고 옮기고 있는데, 왜 “상념”이라는 번역어가 “의념”이라는 새로운 번역어로 대체되었는지 그 이유는 짐작하기 어렵지만, 어쨌든 서 선생은 이때부터 계속 notion의 번역어에 대해 관심을 가져오신 듯합니다.

다시 원래 논점으로 돌아가자면,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concept와 notion의 의미상의 차이는 서 선생이 “용어 해설”에서 인용하는 두 개의 사전에서 좀더 잘 드러난다고 봅니다. 곧 concept는 엄밀하고 정확한 이론적인 구성물에 해당하는 반면, notion은 이러한 엄밀성을 결여한 채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어떤 관념이나 생각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겠죠. 

그런데 서관모 선생은 두 개의 사전을 인용하면서, notion의 또 다른 의미에 주목합니다. 곧 서 선생은 notion은 제한된 집단이나 개인들에게만 한정되어 사용된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다음과 같은 주장은 서 선생의 이런 생각을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통념”이라는 역어는 notion에 “通”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지 않기 때문에 “總念”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곤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통념은 일본에서나 한국에서나 “일반 사람들에게 공통된 생각”, “일반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생각”인데, notion 일반은 “일반 사람들에게 공통된다”는 한정/특정과 무관하다.”(11쪽)

그런데 왜 서 선생이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서 선생이 인용하는 사전에 나오는 다음 밑줄 친 구절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일상적인 프랑스어에서 concept는 과학, 철학, 이론의 엄밀하고 정확한 구성물에만 사용되고, 일반적으로는 조직화되고 통제된 지식 활동에 사용된다. ... notion은 개별적인 conception 또는 한 사회 집단에 의해 수용된 conception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사용되나, 엄밀하거나 정확한 정의를 전제로 [p. 10] 사용하지는 않는다.”(Alain Rey, La terminologie, PUF, 2001)”(9쪽)

따라서 서관모 선생이 “통념”이라는 번역어 대신 “의념”이라는 번역어를 제안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notion은 결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conception 또는 한 사회 집단에 의해 수용된 conception>을 의미한다는 데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서 선생이 <용어 해설> 마지막에서 “[의념은] “총념”이나 “통념”에 비해 훨씬 덜 한정된 “념”이기에 notion의 역어로 상대적으로 무난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에 비하면 중국에서 이 단어가 최근 notion의 번역어로 쓰이기 시작했다는 점은 부가적인 논거인 듯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는 좀 설득력이 부족한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Alain Rey가 notion에 대해 저런 식의 정의를 제시할 때 염두에 두는 notion이 과연 어떤 용례로 사용된 것인지는 인용된 부분만 봐서는 잘 모르겠는데, 어쨌든 그 구절 하나에 의거해서 notion이 제한된,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에게만 받아들여지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좀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사실 서관모 선생이 인용하는 첫 번째 사전에서는 notion이 ““정신이 획득한 일반적인 관념, 이미 사물의 본질에 대한 인식을 제공하지만 그러나 발전시킬 필요가 있는 그러한 관념이다.”(La notion philosophique 2, PUF, 1990, p. 1771)”(9쪽)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서관모 선생은 첫 번째 사전을 인용하기 전에 “현대 프랑스어에서 notion의 사전적 정의는”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정확히 지금 인용된 이 내용은 현대 불어의 용법이 아니라 스토아학파에서 notion 또는 notio가 가리키는 의미를 뜻합니다. 이 인용문은 La notion philosophique 2에 나오는 “notion” 항목의 첫 번째 대목을 옮긴 것인데, 이 항목에서는 스토아학파에서 칸트에 이르는 notion의 내용을 역사적으로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고, 이 대목은 스토아학파 부분에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서관모 선생이 “통념”이라는 역어 대신 “의념”을 제안하기 위해 제시하는 논거는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는 서 선생의 주장과는 반대로 notion은 오히려 일반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지는 관념을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단 이 때 “받아들인다”는 말은 엄밀하게 학문적인 논증을 거쳐서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아니라 “상식적으로”,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시간과 공간에 대해 말할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시간과 공간을 개념적으로, 예컨대 아인슈타인이 부여하는 개념적인 의미에서 이해하고 또 사용하고 있을까요? 물리학자들의 전문적인 학술회의나 대화에서가 아니라면 사람들이 시간과 공간이라는 말을 쓸 때는 그야말로 “통념적”으로 쓰는 거지요. 곧 사람들 각자가 시간과 공간에 대해 이해하는 어떤 관념, 어떤 통념에 따라 그 말을 쓰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러한 이해는 대개의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대개의 사람들은 시간은 1초, 2초, 3초, 1분, 2분, 3분, 1시간, 2시간 등등과 같이 정해진 단위에 따라 선형적으로 진행하는 흐름으로, 공간은 어떤 물리적인 실재들이 들어 있는 텅 비어 있는 틀로 이해합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체계화한 시간과 공간 개념에 상응하는 것이기도 하죠.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상식의 철학자라고 하지 않습니까?

갈릴레이가 상대성 개념을 도입해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세계관과 단절한지 대략 400여년의 시간이 흘렀고, 아인슈타인이 다시 이를 엄밀한 물리학적 개념으로 개조한지는 100여년이 흘렀지만, 보통 사람들이 시간과 공간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은 여전히 “통념적인” 상태, “notionnel”한 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알튀세르가 concept와 notion을 구별할 때 염두에 두고 있던 것이 바로 이런 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푸코에서도 이와 비슷한 용법이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물론 푸코는 알튀세르와 상당히 다른 경우이기는 하지만, 가령 [정신착란의 초월성transcendance du délire]라는 제목이 붙은(국역본에는 [정신착란의 선험성]이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광기의 역사} 2부 2장(및 3-4장)을 보면, “notion”에 관한 상당히 체계적인 용법이 나옵니다. 여기서 푸코가 notions이라고 부르는 것은 고전주의 시기에 의사나 철학자들이 광기를 분류하고 치료법을 제시하기 위해 사용하는 여러 가지 비과학적인 명칭들(과학으로서 정신의학은 19세기에 형성되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을 가리킵니다. 푸코는 이러한 명칭들을 가리키기 위해 아주 체계적으로 no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요. 예컨대 다음 구절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그 notions은 의학적 사유의 개념적이고 이론적인 기능보다는 오히려 의학적 사유의 실제적 작용에 더 가깝다. 윌리스의 노력에서 발견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notionsdlsep, 그는 조광증과 우울증의 순환주기에 관한 커다란 원칙을 그 notions에 입각하여 세울 수 있게 된다. ... 그것들은 엄격한 개념정의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상상적 응집성에 의해 안정된 형상을 강요하면서 의학의 작업과 일체가 되었으며 ...”({광기의 역사} 이규현 옮김, 나남사, 2003, 340-41쪽)

지나가는 김에 지적한다면,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 책의 역자는 notion을 전부 “선험적 개념”이라고 번역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역자는 특별히 역주를 하나 붙여서 여기서 notion은 “칸트의 비판 철학에서 말하는 ‘오성의 산물’”(340-41쪽)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이것은 전혀 그릇된 설명이지요. 칸트에서 notion이라는 단어가 나오기는 하지만, 칸트의 용법은 매우 특수할뿐더러 푸코가 사용하는 notion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오히려 역자의 그릇된 설명 때문에 국내 독자들이 {광기의 역사} 2부 2-4장에 나오는 푸코의 논의를 정확히 이해하기가 상당히 어려워지고 있을 뿐입니다. 아울러 이 책의 번역 상태는 전반적으로 괜찮은 편이지만, 주요한 철학적 논의가 나오는 대목에서는 꽤 많은 오역들이 있어서, 이 번역본을 기초로 학문적인 논의를 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하루빨리 상당한 수정이 이루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이러한 푸코의 용법은, 바슐라르 이래 프랑스 철학자들, 특히 구조주의-과학철학 노선에 속하는 철학자들에게 concept와 notion의 구별은 나름대로 상당히 일반화된 용법이었다는 점을 예시해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듯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notion에 대한 번역어로는 “통념”이 적합하며, 굳이 “의념” 같은 단어를 도입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저는 “의념”이라는 단어가 우리나라에서는 전혀 쓰이지 않는 말인 줄 알았는데,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니 단학을 하는 분들이 사용하는 용어더군요. 그 분들은 이 단어에 “간절히 바라는 마음”, “마음을 어떤 한 곳에 집중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더군요. 그래서 서 선생이 이런 의미를 아시고 “의념”이라는 단어를 제안하신 것인지, 또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하더군요.

puissance에 관해 보자면, 저는 인터넷 서점에 나온 간략한 소개글에 “역능”이라는 단어가 보이길래 puissance를 이 단어로 번역했나보다 생각했는데, 스피노자의 맥락에서는 “역량”으로, 보통의 맥락에서는 “역능”으로 번역했나 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히려 스피노자 때문에 puissance를 “역능”으로 번역해서 쓰는데, 최원 형이나 서 선생의 경우는 반대군요. ㅎㅎ

어쨌든 간에 저는 puissance나 potentia의 번역어로 “역능”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적합지 않다고 봅니다. 스피노자가 이 개념에 대해 얼마간 새로운 내용을 부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피노자에게만 고유한 번역어를 따로 쓴다든지, 스피노자 때문에 “역능”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내는 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잠재태나 가능태와 다른 의미에서 puissance라는 개념은 상당히 오랜 전통을 지닌 개념이고, 스피노자를 포함해서 이 전통에 속하는 철학자들은 얼마간의 차이는 있지만, dynamis/potentia/puissance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 전통과는 구별되는 의미를 부여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스피노자에 대해서만 별도의 용어를 사용한다면, 가령 스토아학파나 플로티누스, 또는 브루노나 니체 등에 대해서도 각각 상이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겠지요. 그렇게 될 경우 dynamis/potentia/puissance가 갖는 개념적인 통일성을 이해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게 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최원 형은 “역능”이라는 단어가 일부 국어사전에 나온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이 단어는 일상생활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 말이 아닙니까? 인터넷 검색을 해보면 이 단어는 주로 네그리나 들뢰즈 철학에 관심 있는 분들만 사용하는 용어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 단어가 어떻게 일부 국어사전에 수록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것은 아마도 어떤 학문 분야에서 모종의 필요상 이런 단어를 만들어서 쓴 것이 계기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을 듯합니다(인터넷에서 검색해보니 정서심리학에서 capacity를 “역능”이라고 번역해서 쓰는 것 같더군요). 하지만 네그리나 들뢰즈 철학에 관심이 있는 분들을 제외하고 이 단어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은 그 용어가 실질적인 “용어”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요컨대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역량”이라는 용어가 “역능”이라는 번역어보다 더 나은 점은 이 말이 생활에서 널리 쓰이는 말이기 때문에 이 말을 쓸 경우 어색함이라든가 거부감이 없다는 점입니다. 이론을 하는 분들은 이 점을 상당히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번역어라는 것이 널리 쓰이기 위해서 만든 용어라면 이런 화용론적인 측면은 상당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실생활에서 사용하지 않는 단어들이 번역어나 철학 개념으로 채택되면, 제 경험에 비추어보면, 그 용어는 몇몇 전공 학자들의 테두리를 결코 넘어설 수 없습니다.

일례로 칸트 철학은 우리나라에 가장 먼저 도입된 철학이지만, 칸트 전공자들이 사용하는 용어들 중에는 아직까지도 그들만의 용어로 남아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령 “예취”라든가 “통각” 또는 “오성” 같은 것들이 그렇죠. 현상학에서 사용하는 “충전성(充全性)”이나 “현전”, “현성(現成)”, “시숙(時熟)” 같은 용어들도 그런 예가 되겠죠. 좀 나쁘게 말한다면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는 용어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의념”이나 “역능”이라는 단어도 이와 마찬가지 경우입니다. 이 용어들이 사용된다 해도 그것은 일부의 들뢰즈, 네그리 전공자들, 또 발리바르 연구자들의 테두리를 넘어서기 어려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지적하자면, 최원 형은 마지막에서 “관개체성”, 곧 “transindividualité”라는 개념을 언급했는데, 이 개념은 puissance나 notion이라는 개념과는 처지가 좀 다르죠. “transindividualité”는 “trans-”라는 접두어를 추가해서 만든 신조어인 반면, puissance나 notion은 흔히 쓰이는 일상적인 단어들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신조어도 가능한 한 일상 생황에서 쓰이는, 좀더 자연스럽고 편한 언어로 번역하는 것이 원칙이겠지요.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부득이 새로운 말로 표현해야겠지만 ...

notion이나 puissance에 관해서는 좀더 이야기를 해보고 싶은데, 벌써 상당히 이야기가 길어졌으니까 오늘은 이 정도로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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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대중들의 공포}의 출간을 환영하면서, 이 번역본에서 사용된 몇몇 용어들에 대해

간단한 몇 가지 의문을 밝힌 바 있다. 그 글에 대해 번역자 중 한 사람인 최원 씨가 바로

답글을 달아주셨는데, 이 문제에 관한 토론을 좀더 활발하게 진행해보자는 뜻에서 새로

"토론"이라는 게시판을 만들었다.

 

사실 우리나라처럼 인문사회과학 영역에서 외국의 이론이나 사상에 많이 의존하는 곳에서

개념이나 용어의 번역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원래 그 개념이나 용어가

지닌 뜻을 되도록 정확히 전달하면서 동시에 좀더 많은 사람들이 쉽고 편리하게 쓸 수 있는

번역어를 고안하고 정착시키는 일은, 외래 사상을 토착화하는 데서나 국내의 논의를 좀더

활성화하는 데서 근간이 되는 과제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국내에서는 이러한 토론이 그리 활발하게 이루어졌다고 보기 어렵다.

특히 지난 1980년대 이래 국내에 많이 수용되어온 현대 사상 분야에서는 더욱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각 연구자는 저마다 상이한 번역어를 만들어 사용하고,

이에 따라 동일한 한 가지 외국어 용어나 개념이 2-3개 또는 심할 경우에는 6-7개의

상이한 우리말로 번역돼서 쓰이는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이런 상황이 그 자체로 그릇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상이한 번역어들의 존재는

개념에 대한 연구자들의 상이한 이해를 반영하는 것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창조적인

다양성의 표현이라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좀더 공개적이고 진지한 토론이

없이는 상이한 번역어들이 제시되는 이유가 무엇이고 그 각각의 장단점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판단할 수 있는 길이 없으며, 이 경우 상이한 여러 번역어들의 존재는 독자들의

혼란만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 문제다.

나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본다면, 어떤 개념이나 용어의 번역어를 모색하고 고안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개념이나 용어가 담겨 있는 이론이나 사상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가

수반되어야 한다. 역으로 정확하고 편리한 번역어는 그만큼 그 이론이나 사상에 대한

접근을 용이하게 해주고 다른 학문, 다른 사상과의 소통도 원활하게 해줄 수 있다.

그만큼 정확한 번역어를 찾고 만들어내는 일, 또 그것들에 관해 토론하는 일은 그 자체가

하나의 의미있는 이론적, 철학적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전에 프랑스에서 출간된

{유럽철학어휘사전}에 관한 글을 올리면서 지적했던 것처럼

(http://blog.aladin.co.kr/balmas/655361)

어떤 의미에서 서양 철학사는 전승된 개념들 및 외래의 용어들에 대한 새로운 번역의

시도의 역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토론"이라는 게시판은 일차적으로는 나 자신의 필요를 위해 새로 만든 것이다. 며칠 뒤면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이 출간될 것이며 앞으로도 내가 번역한 몇 권의 책들이

계속 나올 예정이다. 최대한 오역을 줄이고 원래 텍스트의 내용들을 정확히 전달하려고

노력했고 또 지금도 노력하고 있지만, 오역은 번역가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더욱이 내가

이런저런 개념이나 용어들에 대해 새로 제시한 번역어가 과연 정확한 것인지, 쉽고 편리

하게 쓸 수 있는 것인지 장담할 수가 없다. 사실 번역어의 생명은 제안자에 달려 있다기

보다는 독자들, 대중들에게 달려 있는 한, 내 스스로 장담하고 어쩌고 할 성질의 문제도

아니다. 따라서 독자들의 관심 덕분에 오역이나 잘못된 정보를 바로 잡을 수 있고,

이런저런  번역의 문제, 이론의 문제에 관해 새로운 통찰을 얻을 수 있다면,

다른 독자들과 더불어 큰 기쁨으로 생각하겠다.  

아무쪼록 새로 만든 이 "토론" 게시판이 번역어와 번역 문장, 더 나아가 이론이나

사상 일반에 관한 진지하고 활발한 토론의 장이 되기를 바란다. 누구든 글을 쓸 수 있게

열어놓았으니까, 굳이 번역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하더라도 이런저런 문제에 관해

논의하고 싶은 분들은 이 항목에 글을 써주시기 바란다.

단 상업적인 광고나 도배 문구, 그리고 인신공격이나 명예훼손의 위험이 있다고 간주되는

글들은 삭제하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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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9-16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재밌는 게시판을 만드셨군요. :) 저는 그저 오가며 그냥 개인적인 생각 던져놓는 정도로만 가끔 참여하게 될 거 같습니다. 학문적인 의미에서 무게있는 이야기를 할 입장은 아닌지라. 근데 관련 종사자(?)들께서 많이 생각을 피력해주시면 좋을텐데 잘 되려나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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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엔 발리바르의 대작 {대중들의 공포}가 마침내 국내에 번역, 출간됐다. 오랫동안 이 책이 출간되기를 기다려온 나 같은 사람들에게는 정말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발리바르의 이 책은 지난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약 15년 동안 발표한 논문들을 모은 책이다. 하지만 내용상으로 본다면 이 책은 단순한 논문모음집이라기보다는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의 아포리아와 모순들을 해명하고, 마르크스주의의 일반화라는 관점에서 이러한 아포리아와 모순들을 개조하고 전위하려는 발리바르의 이론적인 작업을 체계적이고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책이다.  놀라운 이론적 엄밀함, 현실 정세에 대한 날카로운 감수성, 풍부하고 창의적인 문제설정들을 고루 갖춘 이 책은 20세기 마르크스주의 최후의 걸작 중 하나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을 것이다.


이 책에 수록된 논문들 하나하나는 웬만한 책 한 권 이상의 깊이와 집약적인 논점들을 포함하고 있을 만큼 가치 있는 작업들이다. 따라서 오늘날 좌파의 이론적, 정치적 향방에 관해 고민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 책은 중요한 시사점들을 제공해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쉽게 이해하기 힘든 대목들이 많겠지만, 되풀이해서 읽고 토론하고 학습한다면 그만큼 값진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철학 일반의 관점에서 평가한다 해도 이 책은 지난 1990년대 프랑스 철학계가 배출한 가장 중요한 저작 중 한 권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이나 장-뤽 낭시의 {세계의 의미Sens du monde}, 베르나르 스티글러의 {기술과 시간Le temps et la technique}, 자크 랑시에르의 {불화La mésentente} (및 몇몇 철학사 저작들)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만한 업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이 책을 번역하기란 쉽지 않은 일인데, 서관모 교수와 최원 씨 두 역자의 노고 덕분에 이 책을 우리말로 읽을 수 있게 됐다.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두 사람의 노고에 깊이 감사드리고 싶다. 아직 번역본을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번역의 상태에 대해 예단하기는 어렵지만, 발리바르의 사상을 잘 이해하고 있고 오랫동안 그의 사상을 연구해온 역자들이기 때문에, 번역이 꼼꼼하게 잘 됐을 것으로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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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출간을 환영하는 글을 쓴 김에, 이 책에 나오는 몇몇 용어들의 번역에 관해 한두 가지 의문점을 적어보고 싶다. 이 책을 아직 읽어보지 못한 상태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다소 성급할지도 모르겠지만, 알라딘에서 제공되는 책 내용 보기 서비스를 통해 읽어본 바로는 이 책에서는 civilité라는 발리바르의 개념을 <시민인륜성>으로 번역하고 있고, notion이라는 단어는 <의념(意念)>으로, puissance는 <역능>으로 옮기고 있는 것 같다.

<시민인륜성>이라는 번역어의 경우는, 선뜻 완전히 찬동하기는 어렵지만, 한 가지 대안으로 충분히 고려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civilité라는 개념은 번역하기 매우 까다로워서 그동안 국내에서는 <예의바름>이나 <예절>(일상적인 의미로 본다면 이 용어들이 적절할 것이다) 또는 <시민성>이나 <시민윤리> <시민문명>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된 바 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음만 따와서 <시빌리테>라고 사용되기도 했다(사실 썩 마음에 드는 번역어가 없는 상황에서는 이런 방법도 한 가지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시민인륜성>이라는 번역어의 특징은 헤겔의 개념인 Sittlichkeit의 번역어로 널리 쓰이는 <인륜성>이라는 말에 <시민>이라는 접두어를 붙인 데 있다. 이는 Sittlichkeit와 civilité의 연관성을 고려하면서도 civilité가 지닌 정치적인 함의를 좀더 강조해보려는 의도인 것 같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시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번역어로서는 좀 어색하다는 느낌이 든다. 원어인 civilité는 일상적으로 널리 쓰이는 단어인 데 비해 이 번역어는 국내에서는 전혀 쓰이지 않는 합성어라는 데서 이러한 어색함이 생겨나는 것 같다. 번역어는 무엇보다도 쉽게 쓰일 수 있는 용어이어야 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시민인륜성>이라는 번역어가 지닌 어색함은 적지 않은 문제점일 수 있다.

더욱이 헤겔의 Sittlichkeit 개념이 이미 정치적인 성격을 지닌 개념인 데 비해, <인륜성>이라는 번역어는 이런 함의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다는 점에서도 이 번역어는 얼마간 논란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시민인륜성>이라고 번역했을 때, <인륜성>이라는 말이 지닌 비역사적이거나 비정치적인 함의가 civilité에 그대로 따라다닐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점이 염려가 된다.   

그러나 마땅히 다른 대안이 없는 현재로서는 역자들의 제안을 그냥 물리칠 이유도 없는 것 같다. 이 용어에 대해서는 좀더 논의가 있어야 하겠지만, 당분간은 번역어로 써볼 수 있을 것 같다.


반면 <의념>이나 <역능>이라는 번역어는 나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notion(또는 라틴어로는 notio)이라는 용어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에 관해 {스피노자와 정치}에 수록된 “용어해설”이나 한 편의 논문으로(http://blog.aladin.co.kr/balmas/1059302) 내 의견을 밝힌 적이 있고, 또 조만간 서관모 선생이 제안한 이 번역어에 대해 몇 가지 반대의 논거를 제시해보고 싶기 때문에, 여기서는 간단히 다음과 같은 점만 지적해두고 싶다.

우선 서관모 선생이 notion을 <의념>으로 번역하자고 제안하는 논거가 그리 설득력이 있는 것 같지 않다. 그의 제안은 프랑스의 두 개의 사전에 나오는 간략한 설명과, 중국의 몇몇 학자들이 최근 notion을 이 용어로 번역하고 있다는 데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먼저 사전은 어떤 용어나 개념에 대한 충분한 정의를 제시하는 책이 아니라 그 용어의 용례들을 모아놓은 책일 뿐이라는 존 오스틴의 주장을 상기해보는 게 좋을 것이다. 사전은 그 용어가 어떤 용례로 쓰이는 보여주는 참고자료일 뿐이며, 좋은 사전은 그 용례를 좀더 많이, 풍부하게 보여주는 사전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서 선생이 전거로 제시한 사전들은 그리 좋은 사전이라고 보기 어렵다. notion 개념이 불어에서 어떻게 쓰이는지 좀더 풍부한 용례를 보려면 오히려 다음 사전을 참조하는 게 더 나을 것이다.

(http://atilf.atilf.fr/dendien/scripts/tlfiv5/advanced.exe?8;s=1169875485;) 
확인을 해봤더니 이 주소에서는 화면이 뜨지 않는데, 아래 주소로 가서 위쪽에 있는

검색창에 notion을 입력하면 해당 내용을 볼 수 있을 것이다.

http://atilf.atilf.fr/dendien/scripts/tlfiv4/showps.exe?p=combi.htm;java=no;


더 나아가 notion이라는 용어, 특히 철학 개념으로서 notion에 대한 번역어를 고려하기 위해서는 철학자들의 저작에서 어떻게 이 용어가 사용되고 있고, 또 그 개념적 의미가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좀더 엄밀한 고찰이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더욱이 notion이라는 용어는 바슐라르에서 알튀세르, 푸코에 이르는 20세기 프랑스 철학의 전통에서 상당히 체계적인 개념으로 쓰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서 선생의 “용어 해설”은 문제를 좀 너무 간단하게 생각한 게 아닌가 한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일본이나 중국 학자가 notion을 어떤 용어로 번역하고 있는가 하는 점은 참고할 만한 것이기는 해도 그대로 우리말 번역어로 채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과문한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말에 “총념”이나 “의념” 같은 말이 존재하며, 또 과거에 사용되었다는 것을 들은 적이 없다. 중국과 우리나라, 일본이 한자문화권이기는 하지만, 각 나라의 문화적 전통이 다르고 사용하는 언어 자체가 다른데, 이런저런 용어를 굳이 가져다 쓸 이유는 없다고 본다.

적어도 그것이 좀더 우리 사회, 우리 문화에 맞는 이론 작업을 하기 위한 조건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스피노자가 말했듯이 언어, 특히 단어들은 대중과 지식인이 공유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식인이 외국의 용어나 개념들에 대한 번역어를 정하기 위해 이런저런 신조어를 만들어내는 것은 문제가 있는 태도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결국 소수의 지식인들끼리의 말잔치로 끝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철학을 공부하다 보면 늘 듣는 말 중 하나가 철학은 너무 어렵다는 것이고, 이런저런 개념들의 뜻을 파악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런 하소연이 나오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번역해서 쓰는 서양의 철학 개념들 중 상당수가 우리나라 대중들이 일상에서 쓰지 않는 단어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언젠가 독일 유학생 중 하나가 우스개 소리로 한 이야기 중에 이런 게 있다. 어느 날 그가 집에 있을 때 창 밖에서 “Aufheben!”이라는 소리가 여러 차례 들렸다고 한다. 이 단어는 알다시피 헤겔 철학의 주요 개념 중 하나인 Aufhebung, 곧 “지양”이라는 개념의 동사형이다. 헤겔을 전공하던 이 사람은 깜짝 놀라 혹시 철학자 모임이 있나 해서 창밖을 내다봤더니, 청소차가 다니면서 내는 소리였다고 한다. “쓰레기 수거!”라는 말이었던 것이다.   

이런 사례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프랑스에서도 사람들이 흔히 쓰는 말 중에 “a priori”라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철학 용어로서 “선험적”이라는 말이나 “아프리오리”라는 말로 번역돼서 쓰이는 것이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이를 “우선”, “먼저”라는 뜻으로 무시로 사용한다.


따라서 서양의 철학자들이나 대중들에게는 매우 자연스러운, 일상 언어의 용법과 철학 개념 사이의 연관성이 우리에게는 좀처럼 파악되기 어려운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형편에 굳이 일상생활에서 쓰이지도 않는 새로운 단어들을 만들어내서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이유가 있을까? 간혹 도가 지나쳐서 모든 철학 용어들을 한자가 아닌 순 우리말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런 지나친 순혈주의는 논외로 한다고 해도 불필요하게 신조어를 남발하는 것은 자제해야 한다고 본다.

이는 puissance나 potentia의 번역어로 일부에서 쓰이고 있는 <역능>이라는 용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나로서는 {스피노자와 정치}에 수록된 “용어해설”이나 몇몇 논문에서 <역량>이라는 번역어를 제시한 적이 있지만, 굳이 이 용어를 고집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더 적절하게 puissance나 potentia의 의미를 담아낼 수 있는 번역어가 있다면, 기꺼이 그것을 채택할 용의가 있다.

하지만 <역능>처럼 일상생활에서는 아무도 쓰지 않는 단어를 만들어내서 번역어로 쓰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더욱이 왜 굳이 이 용어를 puissance나 potentia의 번역어로 쓰는지, 어떤 점에서 이 용어가 이 철학 개념을 적절하게 옮겨주는 것인지 그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다. 이 용어를 쓰는 사람들 중 누구도 자신이 왜 이런 용어를 쓰는지 그 이유를 제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스피노자의 potentia가 <능동적인> 힘을 뜻하기 때문에 <역능>이라는 번역어를 사용한다고 말하기는 한다. 하지만 과연 potentia 또는 희랍어로는 dynamis라는 개념을 <능동적인> 힘의 의미로(곧 잠재태나 가능태가 아닌 의미로) 쓴 것이 스피노자 혼자뿐인지, 또 스피노자가 과연 그 최초의 인물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사실 이는 스토아학파에서 플로티누스를 거쳐, 르네상스 시대의 브루노에 이르는 장구한 전통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스피노자의 독특성이라면 오히려 이를 <내재적>으로 또는 <관계론적>으로 이해했다는 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더욱이 <능력>을 거꾸로 뒤집어서 <역능>이라고 번역하면, 이 단어가 그대로 능동적인 힘이라는 뜻을 내포하게 되는 것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조금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notion이나 puissance 같은 개념들은 앞으로 국내에서 오랫동안, 또 널리 쓰이게 될 용어인 만큼 용어 번역에는 좀더 신중한 검토와 논의가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생각에는 먼저 puissance나 potentia를 <역능>이라는 번역어로 옮기는 사람들이 그렇게 옮기는 좀더 정확하고 명료한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고 본다. 이런 맥락에서 나도 <의념>이라는 말이 notion에 대한 번역어로 왜 부적합한지 조만간 글을 하나 써볼 생각이다.


아무튼 이런 의문점들 때문에 이 책을 번역한 두 역자들의 값진 노고가 훼손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쉽지 않은, 하지만 국내 좌파의 이론적, 정치적 논의를 위해서는 정말 꼭 필요한 이 책을 번역하느라고 애쓴 역자들에게 다시 한 번 깊이 감사드린다. 이 책에 좀더 많은 독자들의 손때가 묻게 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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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9-15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내 처음 들어오는 서양철학의 경우 거의 역자에 의해서 용어가 굳어지는거 같아요. 역서에서 그렇게 써버리면 이후에 다른 학자들이 문제제기를 해도 새로운 용어를 사용하기가 어려워지고. 그래서 결국은 후의 문제제기에 공감하면서도 처음의 용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고. 어렵습니다.

balmas 2007-09-15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구두님/ ㅎㅎ 사실 그렇게 썩 바람직한 방식은 아니죠. 그런데 외국에서도 간혹 그런 경우들이 있습니다. 좀처럼 번역하기 어려운 다른 나라의 용어들을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외국어로 쓰는 거죠. 가령 하이데거의 독일어 개념인 Gestell(우리말로는 "몰아세움"이나 "닦달", "작업틀" 등으로 번역되는데)은 영미권이나 프랑스에서 독일어 단어 그대로 사용하죠. 데리다의 "differance"도 그렇구요. ㅎㅎ
아프락사스님/예, 그런 경우가 많죠. 그래서 사실 번역자들의 책임이 무겁습니다. 중요한 개념일수록 더욱 신중할 필요가 있죠. :-)

람혼 2007-09-15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ufheben"의 일화는 정말 남의 일 같지 않아서, 재미있으면서도 동시에 짐짓 제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이야기로군요.^^ 쓰레기를 '지양'하라!! ㅎㅎ

최원 2007-09-15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 지적들 감사합니다. 용어들을 제안하고 설명해주신 서관모 선생이 진태원 선배님의 문제제기에 직접 답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이 들지만(아마 나중에 해주시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제가 답변 드릴 수 있는 것만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먼저 civilite의 번역어는 '시민인륜성'이 아니라 '시민인륜'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아무래도 말의 경제성문제가 있기 때문에 '시빌리테'의 네 음절을 초과해선 안될 것 같아서 '시민인륜'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시빌리테'라는 말을 원어 소리나는 대로 적어서 사용하는 것은 그 말의 의미를 대중들에게 이해시키는 데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생각입니다. 이제껏 발리바르의 시빌리테라는 문제설정이 잘 전달되지 못해온 것도 용어를 번역하지 않은 채 그냥 쓴 데에 상당한 책임이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새로운 합성어이긴 하지만 그 말이 쉽게 정치/시민권 개념과 헤겔의 인륜 개념을 떠올리게 만든다는 점을 고려하여 택한 것입니다. 다음, puissance (potentia)의 경우는 스피노자 논문에서는 진선배님의 설명을 받아들여 모두 '역량'으로 번역했습니다. 다만 스피노자의 논의 맥락이 아닌 puissance가 일반적으로 양 개념으로 일관되게 사고될 수는 없지 않는가 하는 점이 우려가 되고, 또 우리나라 말에서 '역량'이라는 말은 오히려 capacite의 의미에 더 부합하기 때문에 puissance를 역량으로 일관되게 번역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역능'이라는 말은 잘 쓰이지 않는 말이기는 하지만 새로 만들어낸 신조어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일부 국어사전에 나와 있는 말이지요. 능력과 유사한 의미로 사용된다고 합니다. 다만 능력이라는 말은 puissance에 있는 의미들(세력, 위세, 권세, 권력)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에 '역능'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로 한 것입니다. '의념'의 경우야 말로 말을 완전히 새로 만든 것인데, 신조어가 야기할 수 있는 폐해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notion이 이제껏 통념, 관념, 개념 등으로 번역되는 데에서 오는 혼란과 폐해를 생각해볼 때는 저는 개인적으로 괜찮은 시도라고 여겨집니다. notion의 '가치'를 정확히 가리킬 언어가 없어서 생겨나는 혼란을 교정할 수 있기 때문이죠. 모든 신조어는 어쩔 수 없이 하나의 모험이고 실패할 확률이 확실히 높습니다. 그러나 나름대로 근거가 있고, 또 그 말이 대중화될 경우(따라서 서관모 선생의 입장은 대중들이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 말은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지 대중들의 언어와 다른 지식인들만의 언어를 만들자는 뜻은 전혀 아닌 것 같습니다), 생겨날 수 있는 이득이라는 것도 있는 것 같습니다. 예컨대, '관개체성'이라는 말이 바로 그런 예가 아닐까 합니다.

balmas 2007-09-16 0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람혼님/ ㅎㅎㅎ Aufheben에 관해 뭔가 일화가 있으셨나 봅니다.

최원님/ ㅎㅎㅎ 좀 놀라지 않았나 모르겠습니다. 책을 읽지도 않은 상태에서 몇 가지 용어들에 관해 딴지를 걸고 넘어가서 불쾌했을지도 모르겠고요. 혹시 그런 점이 있었다면 사과드릴게요.

사실 개념이나 용어는 우리가 어떤 사상이나 이론에 관해 논의할 때 가장 먼저 걸리는 문제인데, 그동안은 별 토론도 없었고 다소 즉흥적이고 편의적으로 만들어지고 쓰인 게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그 반면 서관모 선생은 그동안 여러 용어나 개념에 관해 좋은 제안을 많이 해주셨고 최원 형도 마찬가지죠. 앞으로 발리바르 저작들(그리고 바라는 바이지만 알튀세르의 저작들)이 속속 번역될 것으로 보이는데, 이를 계기로 중요한 개념이나 용어들에 관해 좀더 신중하고 엄밀하게 논의해보자는 뜻에서 문제제기를 해봤습니다.

이런 토론을 좀더 체계적으로 해보자는 뜻에서 “마이페이퍼”에 <토론>이라는 항목을 새로 추가했으니까, 앞으로 이 문제는 그 항목에서 더 이야기해보도록 하지요.

최원 2007-09-16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너무 빨라서 조금 놀랐던 것은 사실이었습니다만, 기분이 불쾌한 것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이 책에 관심을 보여주시다니 하면서 아주 기분이 좋았습니다. 토론란을 여신 것은 의도도 좋고 블로그가 갖는 일방성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도 보완되고 아주 좋은 것 같습니다. 서관모 선생께도 진선배님의 문제제기가 있었다고 간단히 어제 이메일로 알려드렸고 아마 별다른 사정이 없으시면 여기 주소도 알려드렸으니 한 번 와서 보실 것 같습니다.

열매 2007-09-19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Masses, classes, ideas--studies on politics and philosophy before and after Marx"라는 책 아닌가요? 국역본의 부제와 동일한 영역본을 구했는데, 한국어역본과 차이를 보이는군요. 몇편은 소개되어 있고, 몇편은 없는 식으로. 어떤 연유인지 혹 아신가요^^? 역자해제에도 별 말씀이 없으시니 물을 때도 없네요^^;

최원 2007-09-19 0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알라딘 책내용 보기(Let's Look) 서비스를 보면 '저자 서문'이 있는데, 거기 설명이 나와 있습니다. 영역본(masses, classes, ideas)이 먼저 나왔고, 그 책이 훨씬 더 확장되어 불어본(la crainte des masses)이 나왔는데, 이때 불어본에 추가된 글들과 또 다른 글이 묶여서 나중에 영역본이 하나 더 따로 나왔습니다(politics and the other scene). 불어본과 영어본은 구성에서도 조금 차이가 있지만 각각의 논문들 자체도 조금씩 차이가 있습니다. 한국어 본은 영어본을 참조했지만 불어본을 번역한 것입니다.

열매 2007-09-19 0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후자의 영역본을 검색해보니 176쪽인데, 꽤나 많은 글들이 보충되었나 봅니다.
역자님의 상세한 설명 고맙습니다.
댓글저장
 

에티엔 발리바르의 대작 {대중들의 공포}에 수록된 "역자 해제"입니다. 최원 씨의 홈페이지에서 

퍼왔습니다.

http://board4.cgiworld.paran.com/view.cgi?id=wonchoi68&now=1&jd=-1&ino=258&tmp_no=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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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중순에 도서출판 b를 통해 출간될 예정인, 에티엔 발리바르의 [대중들의 공포]의 역자 해제입니다. 혹시 인용할 일이 있으면 책으로부터 직접 인용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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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의 전화, 정치의 전화


: 알튀세르에게서 발리바르로






















프랑스 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는, 1980년대 말 ‘역사적 사회주의의 몰락’을 통해 돌이킬 수 없이 가시화된 (최종적인) ‘맑스주의의 위기’라는 정세에 대한 대응의 일환으로 일군의 국내 맑스주의자들이 그의 스승인 루이 알튀세르의 사상을 대거 소개하면서 국내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발리바르가 알튀세르의 가장 충실한 주해자로 인식된 것은 비교적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이러한 인식 자체는 크게 문제 삼을 것이 없다. 그러나 이로 인해서, 발리바르의 작업의 독창성은 그간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으며, 특히 그가 알튀세르와 형성했던 쟁점은 국내의 논의에서 다소 억압된 측면마저 없지 않다.


여기 우리가 번역한 󰡔대중들의 공포 : 맑스 전과 후의 정치와 철학󰡕은 저자가 서문에서 직접 밝히듯이 1983년부터 1996년 사이에 그가 작성한 글을 모아놓은 논문집이다. 이 시기는 발리바르가 ‘국가’ 문제를 중심으로 알튀세르와 일정한 쟁점을 형성하면서 독자적인 길을 걷기 시작한 1978년 이후의 시기와 대략 겹치는 것으로, 우리는 이 책을 통해 그가 걸었던 길의 성격과 그 이론적 성과를 얼마간 조명해볼 수 있을 것이다.


발리바르의 작업은 크게 세 영역으로 구분될 수 있다. 첫 번째 영역은 루소에서 피히테에 이르는 ‘맑스 이전적’ 근대 정치철학들에 대한 비판적 독해가 행해진 영역으로, 여기서는 “인민이 인민이 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즉 인민의 자기-구성의 원칙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축으로 회전했던 ‘해방의 정치’에 대한 다양한 논의 및 그 아포리아들에 대한 연구가 행해진다(최근 이 연구는 철학적 인간학 및 근대 주체의 계보학에 대한 연구로 크게 확장되어, 데카르트, 홉스,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로크 등을 아우르게 되었다). 두 번째 영역은 맑스와 엥엘스, 그리고 그 후계자들의 사상에 대한 해체작업이 진행된 영역으로, 여기서는 ‘변혁의 정치’ 및 그 아포리아들에 대한 연구가 성찰된다(이와 함께, 맑스의 시도에 평행하지만 그것과 “이단점”을 형성하는 또 다른 ‘변혁의 정치’의 이론가로서 푸코의 시도가 비교ㆍ연구된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영역은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를 비롯한 동일성의 폭력을 정치의 대상으로 확립하기 위한 노력이 진행된 영역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로부터 도출되는 새로운 정치의 개념을 발리바르는 ‘시민인륜의 정치’라 칭하고, 그것을 ‘맑스 이후적’ 정치의 주요 방향, 또는 위기에 처한 해방의 정치와 변혁의 정치를 전화시킬 수 있는 정치의 새로운 쟁점으로 사고한다. 특히 근대 정치의 이데올로기적 형태로서 민족형태에 대한 연구 및 최근 부상하는 유럽구성의 모순들에 대한 분석들이 여기 포함된다.


이렇게 분화된 세 영역은 이 책의 구조에 충실하게 반영되어 있다. 이 책은 총 5부로 나누어져 있는데, 각각 한 편의 논문으로 이루어진 제1부와 제5부는 본서의 입구와 출구 역할을 하면서 세 영역의 전체적인 연관을 해명한다. 제2부에서 제4부까지는 차례대로 해방, 변혁, 시민인륜의 정치를 다룬다. 단 이러한 구성에서 (시기적으로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논리적으로) 다소 예외가 되는 논문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 책의 제목과 동일한 부제를 가지고 있는 「스피노자, 반(反)오웰 : 대중들의 공포」라는 논문일 것이다. 스피노자의 질문의 중심 대상을 이루는 “대중들의 공포”는 동시에 “대중들에 대한 공포”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 정식의 모호성은 ‘인민(peuple)’이라는 이름하에 대중들을 자기 구성의 근거로 제시하고자 하는 모든 민주적 정치(특히 ‘인권의 정치’)의 아포리아를 사고하기 위한 특권적인 장소로 나타난다. 또한 대중들의 지적 교통의 상상적,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역사적으로 분석하는 스피노자의 이론은 맑스의 ‘계급과 대중의 변증법’의 아포리아를 이루는 “이데올로기의 동요”라는 문제를 사고함에 있어서도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효과적인 이론적 수단을 마련해 준다. 발리바르가 말하듯이, ‘대중들의/대중들에 대한 공포’라는 스피노자의 질문이 이 책에서 이루어진 정치적ㆍ철학적 조사의 출발점을 이룬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나는 본서의 방대한 내용을 요약 정리할 생각은 없다. 그보다는 알튀세르를 계승하면서도 그와 쟁점을 형성하는 발리바르의 입장을 간략하게 고찰함으로써 본서의 내용에 접근할 수 있는 길 하나를 제시하는 데에 만족하고자 한다. 나는 제1절에서 알튀세르와 발리바르가 ‘국가’ 문제를 둘러싸고 벌였던 논쟁을 소개하고, 발리바르가 알튀세르의 이론적 전제들을 어떻게 정정하거나 전위하는가 하는 문제를 살펴보겠다. 제2절에서는 발리바르가 알튀세르의 프로이트-맑스주의적 기획을 스피노자-맑스주의적 기획으로 대체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밝히고, 이를 통해 그가 ‘구조주의’를 복권시키는 방식을 논하겠다. 제3절에서는 해방, 변혁, 시민인륜이라는 정치의 세 개념의 관계를 다루고, 특히 반(反)폭력의 정치로서 ‘시민인륜의 정치’의 의미를 ‘더 많은 민주주의’ 또는 ‘갈등적 민주주의’라는 관점에서 조명해 보겠다.










1. 국가라는 쟁점1)






발리바르는 1993년 자신의 박사학위 심사에 제출된 논문들을 소개하기 위해 작성한 「무한한 모순」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나는 (내가 1976년의 저작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하여󰡕에서 썼듯이) 민주주의 자신의 계급적 경계들을 넘어서는 민주주의의 일반적 발전형태가 국가장치의 해체(démantèlement)라고, 그리고 일반적으로 말해서 국가의 사멸이라고 쓰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1970년대와 80년대의 정치적 경험이 나에게 “국가 밖의” 사회운동의 실존이란 형용모순임을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또는 가르쳐주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실로 내가 1978년에 알튀세르와 견해에서 갈라서기 시작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이슈 위에서였다. [……] 오늘날 나는 맑스주의와 자유지상주의적(libertaire) 전통 전체가 공유하는, 이론적 무정부주의(사회주의적인 것이든 아니든 간에)라 부를 수 있을 것이, 적어도 그것의 이론의 관점에서 볼 때에, 맑스주의가 짧게 잡아도 나치즘과 대결하던 시절 이래로 직면해 왔으며 그것으로부터 결코 빠져나오지 못한 위기를 장악하여 해결할 수 없었던 무능력에 주된 책임이 있다고 믿는다. 더욱이 나는 민주적 정치의 위기―이 위기는 오늘날 다양한 네오-파시즘들에 새로운 문을 열어주겠다고 상이한 방식들로 위협하고 있다―를 해결하는 데에 우리가 지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기반들 위에서가 아니라고 믿는다. [……] 그러나 이것이 결코 나로 하여금 정치의 새로운 실천이 대중적 실천이라는 관념을 포기하게 이끌지는 않는다. 반대로 나는, 그러한 의념(notion)은 필연적으로 양가적임을 알기에, 민주적 시민권에 대한 그 어떠한 성찰 속에도 “봉기적” 차원을(또는 말하자면, 집단적 해방[liberation] 운동들의 양상 중에서 제도들 및 장치들의 기능작용을 초과하는 양상을) 포함시키는 것이 더욱 더 불가결하다고 믿는다.2)






여기서 발리바르는 자신이 견해차로 알튀세르와 갈라서기 시작한 것이 1978년이라고 적고 있다.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자. 알튀세르는 바로 전해인 77년 11월에 이탈리아의 󰡔선언󰡕(Il manifesto) 지(誌)가 주최한 “혁명 이후의 사회에서의 권력과 저항”이라는 콜로키움에서 한 편의 글을 발표했다. 나중에 수정되어 「마침내 맑스주의의 위기가!」라는 논문으로 발전되는 이 글에서, 알튀세르는 공산당이 “집권당[통치당]”이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펼쳤고, 이 주장은 이탈리아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 큰 논쟁을 불러왔다.3) 이 논쟁에 대해 알튀세르는 다시 일련의 글을 작성하고 인터뷰를 했는데, 이것들은 모두 「당 내에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는 것」이라는 제목하에 󰡔선언󰡕지에 실렸다(78년 4월호).


이 논쟁에 대한 발리바르 자신의 개입은 「국가, 당, 이행」(1978)이라는 글을 통해 이루어진다.4) 이 글에서 발리바르가 시도한 것은 알튀세르에 대한 이탈리아 공산주의자들의 비판이 오해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도(그는 알튀세르가 주장한 것은 비판자들의 생각과 달리 당이 “집권당”이 아닌 “야당”으로 남아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었다고 지적한다), 동시에 그렇게 명확해진 알튀세르의 주장에 대해 그 자신의 새로운 비판을 제출하는 것이었다. 발리바르가 알튀세르에게서 문제로 삼는 것은 “당이 근본적으로 국가 바깥에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알튀세르의 주장 전체를 인용해 보자.






그렇기 때문에 저는 다음과 같은 정식화에 불편을 느낍니다. “……이행국면에서의 ‘정치적 영역’의 이론적 형태. 정치적 영역은 당이 곧 국가로 되는 단계를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가정해 보자.” 정확히 이런 생각에 저는 찬성하지 않습니다(제가 잘못 아는 것이 아니라면, 그람시가 자신의 현대군주[] 이론에서 옹호한 것은 바로 이것이었으며, 그것은 동시에 이미 마키아벨리에 의해 정식화된, 정치에 대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라는 핵심주제를 받아들인 것일 따름입니다). 당이 곧 국가로 되면, 우리가 갖게 되는 것은 바로 소련입니다. 꽤 오래 전에 저는 이탈리아 동료들에게, 당은 원칙적으로 결코(정말로 결코) “집권당”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고 썼습니다. 심지어 특정한 상황하에서 정부에 참여할 여건이 될 때라도 말입니다. 자신의 정치적 및 역사적 존재이유에 따라 당은 근본적으로 국가 바깥에 있어야 합니다. 부르주아 국가에서도 그렇지만, 프롤레타리아 국가에서는 더욱 더 그래야 합니다. 당은 (잠정적으로 정식화했을 때……) 국가의 사멸을 위한 수단의 하나로 되기 전에는, 부르주아 국가의 파괴수단이 되어야 합니다. 국가에 대한 당의 정치적 외재성 원칙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관한 맑스와 레닌의 몇 안 되는 텍스트들에서 끌어낼 수 있는 근본원칙들 중 하나입니다. 국가에 대한 당의 자율성(정치의 자율성이 아니라) 없이는 우리는 결코 부르주아 국가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부르주아 국가를 “개혁”한다 하더라도 말입니다.5)






「국가, 당, 이행」에서 발리바르는 이러한 알튀세르의 주장을 “당에 대한 관념적(그리고 관념론적) 관념(conception)”이라고 비판한다. 알튀세르의 주장은 국가 바깥에 대중운동 또는 사회운동이 실존한다는 것을 가정하는 것이지만, 발리바르에 따르면 대중들은 항상 이미 국가 속에 있으므로 “당을 국가에서 분리하여” 국가 바깥에 있는 “대중들에게로 이전해야 한다”는 것은 명백히 오류이다. 알튀세르의 주장은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에 대한 논의 속에 함축된 ‘국가와 사회는 분리불가능하다’라는 입장을 특정한 방식으로 타협하는 것이기까지 하다.6) 모순들은 국가와 국가 외부의 사회운동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 전적으로 내적인 방식으로만 존재한다. 따라서 당의 위치 또한 국가의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발견될 수밖에 없다. 이를 부인함으로써 부르주아 국가에 대한 당의 “자율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당 자체를 관통하는 모순들을 보지 못하도록 억압하는 효과만 낳을 뿐이다. 국가에 내적인 모순들에 의해 관통당하는 당은 스스로 그 모순들의 효과에 전적으로 지배되며, 그 속에서 매우 불안정한 자리만을 차지할 수 있다. 당은 ‘진리의 담지자’라기보다는 자본주의의 경향에 대한 내재적 반(反)경향이 되는 한에서 잠정적으로만 혁명적일 수 있을 뿐이며, 따라서 “계급투쟁의 최종적인 해결 장소”로 나타날 수 없다.7)


더 나아가서, 발리바르는 고전적 맑스주의의 입장에 따르는 알튀세르의 “국가 사멸”의 정치기획을 명시적으로 비판한다. 원래 국가를 궁극적으로 소멸시켜야 한다는 사고는 초기 맑스에게 더욱 특징적인 것으로, 「유대인 질문」에서 「공산당 선언」에 이르는 일련의 텍스트들에 지배적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이 사고는 정치 그 자체(무엇보다도 ‘인권의 정치’)를 사회경제적 모순들을 은폐하기 위한 부르주아적 가상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하면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는 곧 ‘정치의 종언’을 의미하는 것이어야 하며, 이러한 목표는 국가의 사회 속으로의 소멸 또는 국가의 “노동자 연합”으로의 대체를 통해 달성될 수 있다고 본다.


후기 맑스에게서도 이러한 ‘국가 사멸’의 입장이 정확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이 입장과 경쟁하는 또 다른 입장이 (특히 「고타강령 비판」을 통해) 경향적으로 제출되는데, 그것은 국가를 ‘사멸’이 아닌 ‘전화(transformation)’의 대상으로 보면서, 공산주의를 ‘정치의 종언’이 아닌 ‘노동의 정치’로(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 장악, 정치에 의한 노동의 전화, 노동에 의한 정치의 전화라는 삼중적 의미에서의 ‘노동의 정치’로) 정식화한다. 그러나 맑스는 국가주의와 무정부주의에 의해 장악된 이데올로기적 공간 속에 갇힘으로써, 이러한 자신의 새로운 입장을 제대로 발전시키지 못한다. 특히 맑스는 바쿠닌의 무정부주의에 대해 이론적으로 거의 대응하지 못했는데, 엥엘스와 함께 쓴 「인터내셔널의 이른바 분열」(1872)에서는 심지어 자신의 사상이야말로 진정한 무정부주의로 볼 수 있다는 식의 주장을 펼침으로써 바쿠닌에게 엄청난 이론적 양보를 행하고 만다. 레닌 또한 󰡔국가와 혁명󰡕에서 판네쿠크의 편에 서서 카우츠키와 플레하노프를 비판하면서, 맑스주의와 무정부주의 사이의 분기(分岐)는 (국가를 사멸시킬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목적들[목표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혁명적 이행 속에서 국가폭력과 국가권력을 사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수단들’에 대한 것일 뿐이라고 주장함으로써, 무정부주의의 ‘목적들’을 맑스주의의 것으로 받아들인다.8)


이론적으로 이렇게 당혹스러운 결과가 나타난 것은, 맑스와 그의 후계자들이 국가를 오로지 억압적 국가장치의 차원에서만 분석하고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의 차원에서 분석하지 못한 데에서 부분적으로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 이데올로기 일반이 영원하다면,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일반도 영원하며, 따라서 국가의 종국적 소멸은 불가능하다……9) 그러나 이렇게만 보는 것은 즉시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한다. 그람시와 특히 알튀세르라는 예외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람시는 국가를 ‘강제와 동의’의 두 차원 또는 ‘독재와 헤게모니’의 두 차원에서 분석했고, 또 알튀세르는 명시적으로 국가를 ‘억압적 국가장치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의 두 차원에서 분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론적 무정부주의”가 맑스주의에서 극복되지 못했다면 그 원인을 우리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여기서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것은 그람시와 알튀세르가 보여주는 의미심장한 대립이다. 앞서의 인용문에서 보았듯이, 알튀세르는 자신의 ‘국가사멸’의 입장을 당과 국가를 동일시하는 그람시의 ‘현대 군주론’에 대한 대비를 통해 정당화한다. 알다시피 그람시는 공산주의를 국가사멸의 전망 속에서 사고하지 않고, 반대로 국가의 강제적 측면의 해체 및 국가의 헤게모니적 측면의 확장을 통한 ‘윤리적 국가’의 구성이라는 전망 속에서 사고한 예외적인 이론가였다. 그람시는 국가가 (헤게모니적 지도를 통해) 사회를 잠식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알튀세르가 그람시에게서 반대하는 것은 정확히 이러한 사고이다.10) 물론 앞서의 인용문에서 알튀세르는 당과 국가를 전진적으로 동일시하는 그람시의 입장을 쫓으면 이로부터 귀결되는 것은 정확히 “소련”이라고 말함으로써 문제를 경험적이고 정치적인 방식으로 설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알튀세르가 이렇게 그람시의 입장에 반대하는 데에는 보다 근본적인 이론적 이유가 있다. 국가가 사회를 완전히 잠식한다는 것은 곧 (사회 성원 전체를 ‘유기적 지식인’으로 포괄하는 ‘당=국가’를 통해) 사회가 스스로에 대해 다소간 완전히 의식적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알튀세르의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그람시의 사고는 백해무익한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데올로기가 무의식적이며,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의 “거리를 둔” 작동에 항상 물질적으로 기초해 있다는 점을 놓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람시의 입장은 (공산당을 포함한)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의 작동을 분석의 맹점에 놓아두고, 이데올로기에 의해 호명된 주체들의 ‘의식’을 어떤 자발적이고 투명한 것인 양 간주하기 때문에, 의식적인 노동자들 또는 그들의 당이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기존의 사회주의 국가를 실천적으로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이론적으로 정당화할 위험이 있다(또는 적어도 그람시의 입장은 기존의 사회주의 국가를 비판할 수 있는 이론적 수단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람시와 알튀세르의 이러한 차이를 발리바르 자신이 설명한다.






이데올로기적 사고 양식과 국가의 이러한 상호적 결정을 상술하기 위해서는 따라서, 국가로 하여금 사회의 영역을 잠식하도록 하는 “국가 개념의 확장”으로 나아가거나(이것이 그람시의 방법일 것이다), “국가”라 불리는 것의 감축불가능한 복잡성을 표시하는, 이데올로기적 과정 속에서의 국가의 “거리를 둔 작동”, “부재하는 인과성”을 사고하려 해야 할 것이다(이것이 알튀세르의 방법이다). 이 두 번째 길은 분명히 이데올로기적 과정의 “무의식적” 특성에 대한 엥엘스의 주장에 확고한 의미[방향, sens]를 부여하는 것이리라. 무의식적이라는 관념은 바로 지배계급의 국가의 역사적 작용의 이중적 양태, 그 강제적, 행정적인 장치 속에서 직접적[무매개적]이고 가시적이며 동시에 대중들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그 효과 속에서 간접적이고 비가시적인 이 이중적 양태를 표현할 것이다. 사회적, 정치적 투쟁들 속에서의 “의식”과 “무의식”의 차이적 거리(l’écart différentiel)는 이렇게 이데올로기의 물질성 자체를, 이데올로기의 역사적 작용양식을 지시할 것이다.11)






이데올로기 속에서 작동하는 의식과 무의식의 이러한 “차이적 거리”를 명확히 하기 위해, 알튀세르는 사회의 내용물을 실천적으로 비워버리는 것에 이르는 그람시의 “국가개념의 확장”에 반대하고 오히려 국가가 항상 거리를 두고 작동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에 학교, 교회, 가족, 법, 미디어뿐만 아니라, 심지어 정당과 노조까지 모두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여전히 국가장치들로 환원될 수 없는 어떤 것, 즉 대중운동 또는 사회운동의 고유한 영역이 국가 바깥에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고 사고했다. “당을 국가로부터 분리해서” 국가 바깥에 있는 “대중들에게 이전해야 한다”고 그가 주장한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반대로 발리바르에게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 ‘사회와 국가의 분리불가능성’을 극단적으로 강조하고, 따라서 국가의 영향을 벗어나서 구축되는 어떠한 독립된 사회 영역의 실존 가능성도 부인하는 발리바르의 입장은 국가를 ‘확장적’으로 사고하는 그람시의 입장과 정확히 어떻게 구별될 수 있는가? 발리바르의 입장은 혁명당이나 심지어 평의회와 같은 대중들의 자발적인 조직들을 포함한 모든 조직들을 국가 속에 위치지우고, 따라서 그것들을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의 일부로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가? 그리고 이는 정확히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이라는 개념 자체를 사실상 소멸시키는 데에 이르는 입장이 아닌가?


내가 보기에, 발리바르가 「민족형태 : 그 역사와 이데올로기」에서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에 대한 알튀세르의 논의에 서로 밀접하게 연관된 두 가지 교정을 가하는 것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적어도 측면목표로 삼는 것 같다. 발리바르는 이렇게 말한다.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의 정의를 소묘하면서 부르주아 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핵심이 가족-교회 쌍에서 가족-학교 쌍으로 옮겨갔다고 시사했을 때 그는 옳았다. 그렇지만 나는 이 정식에 두 가지 교정을 가하고 싶어진다. 우선 나는 이 제도들 중의 이러저러한 제도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를 구성한다고 말하지 않고자 한다.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라는 표현이 적절히 가리키는 것은 오히려 몇몇 지배적인 제도들의 결합된 기능수행이다. 이어서 나는, 학교교육(scolarisation)의, 그리고 가족이라는 세포의 현대적 중요성은 오로지 그것들이 노동력 재생산에서 차지하는 기능적 지위에서만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그것들이 이 재생산을 의제적 종족체의 구성에 종속시킨다는 점에서, 다시 말해 인구정책들 [……] 에 암암리에 함축되어 있는, 언어적 공동체와 인종 공동체의 절합에 복속시킨다는 점에서 유래한다고 생각하기를 제안하고자 한다. 학교와 가족에는 아마 다른 측면들이 있을 것이다. [……] 그것들의 역사는 민족형태가 출현하기 훨씬 전부터 시작되며 민족형태를 넘어서 지속될 수 있을 것이다. [……] 이러한 의미에서 부르주아 사회구성체에는 오직 하나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가 있을 뿐이다. 이 장치는 학교제도와 가족제도를, 그리고 부수적으로 학교와 가족에 결합되어 있는 다른 제도들을, 자신의 목적들을 위해 이용한다. 민족주의의 헤게모니의 근저에 이 장치가 현존한다.12)






따라서 발리바르가 가하는 두 가지 교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노동력의 재생산의 기능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재생산을 의제적 종족체의 구성에 종속시키는 역할을 한다. 둘째,―이 점이 우리의 논의에서는 매우 중요한데―가족과 학교뿐만 아니라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로 분류한 다양한 조직들은 그 자체로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라고 볼 수 없으며, 오직 가족과 학교의 특수한 역사적 결합체로서의 ‘가족-학교’ 쌍만이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로 간주될 수 있다. 따라서 부르주아 사회구성체에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가 여럿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 하나만 있을 뿐이며, 이것이 그 사회구성체 내에 존재하는 모든 조직들을 “지배”한다. 가족과 학교를 비롯한 다양한 조직들은 각각 독립적으로는 국가장치가 아니라 제도들이며, 이 제도들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로서의 ‘가족-학교’ 장치에 복속되어 기능한다.13) 이렇게 해서 발리바르는 부르주아 국가에 맞선 투쟁의 중심목표가 가족-학교 결합체의 해체라는 점을 명시하면서도, 동시에 이러한 해체는 가족제도와 학교제도, 그리고 또 다른 (부르주아적이라고 일컬어지는) 제도들을 역사적으로 모두 ‘파괴ㆍ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전화’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임을 분명히 한다.


발리바르가 국가와 국가장치를 상대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이다 : 국가 안에는 억압적ㆍ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결합하여 기능하는 다양한 ‘제도들’과 더 나아가서 (혁명조직들, 반[反]체계적 운동조직들을 포괄하는) ‘대항제도들’이 존재하며, 따라서 국가는 국가장치로 환원될 수 없다.14) 갈등과 모순은 국가의 내부와 외부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 전적으로 내적인 방식으로 존재하며, 이것이 사실은 국가권력이 헤게모니로 나타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된다.


헤게모니는 갈등과 모순의 한편에 서서 다른 편을 단순하고 순수한 방식으로 억압하거나 심지어 제거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갈등과 모순을 매개하고 조정할 수 있는 효과적인 위계질서를 확립함으로써 스스로 갈등과 모순 너머의 “상위의 공동체”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15) 즉 그것은 갈등과 모순을 내부화[은폐, interiorisation]하고, ‘복잡성을 감축할 수 있는 능력’이다. 종족적 분파들 사이의 갈등의 매개자로서의 (중세) 교회, 종교분파들 사이의 갈등의 조정자로서의 민족국가는 바로 이러한 “총체적 제도(institution totale)”의 거대한 역사적 사례이다.16) 국가가 다양한 분파들의 대립을 넘어 스스로 확보하는 ‘초월적 높이’야말로 국가가 이데올로기적 과정 속에서 갖는 ‘차이적 거리’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발리바르의 정식화 속에서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는 (알튀세르가 바라듯이) 여전히 ‘거리’를 두고 작동하지만, 이것이 국가 바깥의 사회운동의 실존을 가정하도록 하지는 않는다.17)


이제 국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제도들에 대한 이러한 혁신된 이해가 이데올로기와 주체화 양식 그 자체에 대한 이해를 개조하는 것은 당연하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복수의 상이한 주체화 양식들을 갖게 된다. 한편에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와 거기에 결합하여 기능하는 제도들에 관련된 주체화 양식이 있다면, 다른 한편에는 또 다른 제도들에 관련된, 이데올로기를 매개로 하지 않는 주체화 양식들이 있다. 「무한한 모순」에서 발리바르는 라캉과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적 호명’ 개념이 중세 교회에서 확립된 주체화 양식(주체가 자신의 내부에서 듣는 큰 타자 또는 대문자 주체로서의 신의 목소리에 복종함으로써, 그 속에서 자신의 존재의 의미와 자유를 추구하는 것)을 과도하게 일반화한 것이었다고 말하면서, 역사적으로 출현한 주체화양식들은 일률적으로 이러한 호명 메커니즘으로 환원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고대 그리스 노예제 사회에서 주체화 양식은 (주인이 노예에게 행하는) “일방적 말하기”의 방식으로 나타난 바 있으며, 근대에 접어들어서는 이데올로기적 호명의 새로운 방식을 실현하는 민족형태뿐 아니라, 물신숭배(맑스)와 생명권력(푸코)과 같이 이데올로기적 호명에 의존하지 않는, 말하자면 비(非)이데올로기적인 새로운 주체화 양식들이 출현한다.


이제 우리는 󰡔맑스의 철학󰡕에서 발리바르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보다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이데올로기 이론은 기본적으로 국가 이론(즉 국가에 내재하는 지배양식의 이론)인 반면 물신숭배 이론은 기본적으로 시장 이론(즉 주체화양식 또는 사회의 시장으로의 조직화에 내재적이고 또 상품적 역능들에 의한 사회의 지배에 내재적인 주체들과 대상들의 ‘세계’의 구성양식의 이론)이다.”18) 게다가, 이렇게 서로 이질적인 주체화 양식들은 역사 속에서 차례차례 나타났다가 다른 것으로 대체되어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복귀하여 비동시적으로 현재의 지배적인 주체화 양식(들)을 과잉결정하게 된다. 결국 발리바르는 이데올로기적 주체화 양식과 그렇지 않은 주체화 양식을 구분할 것과 함께, 다양한 주체화 양식들에 대한 연구를 보다 역사적인 방식으로 행할 것을 제안하는 것이다.










2. 프로이트-맑스주의에서 스피노자-맑스주의로






그런데 이렇게 주체화 양식들을 역사적으로 연구해야 한다는 생각은 또한 프로이트-맑스주의적 기획에 대한 비판을 경유함으로써 가능해진 것이다. 프로이트-맑스주의에 대한 후기 알튀세르 및 발리바르의 비판은 우선 그것이 가정하는 사회적 상동성(homologie)의 원리에 대한 비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사회적 상동성의 원리는 사회의 한 부분에서 발견되는 구조가 그 사회의 다른 부분에서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수준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된다고 보는 원리이다. 사회를 일종의 동심원적 구조에 따라 설명하는 이러한 원리에 따르면, 가부장제적 가족 내에 상존하는 성욕 억압의 권위주의적 구조는 국가의 권위주의적 구조와 유사하며, 따라서 우리는 개인적 무의식의 구조를 설명하는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사회적 무의식의 구조도 설명할 수 있게 된다.


결국 이러한 논리는 (프로이트-맑스주의를 정초한 빌헬름 라이히가 품었던 “망상”처럼) 노동의 민주주의와 성 혁명을 통해 욕망에 대한 억압 그 자체의 제거와 “무의식 없는 정신현상의 유토피아”를 향해 우리가 나아가야 한다는 극단적인 종말목적론적 결론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명시적으로 이러한 결론으로 나아가지 않는 경우에도, 프로이트-맑스주의는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통시적이라기보다는 공시적인 방식으로, 즉 “구조주의”적 방식으로 분석함으로써, 사회에 대한 단일한 초역사적 이론(역사를 무시하는 이론이라기보다는 역사 전체를 일관되게 설명하고 거기에 목표와 방향을 부여하는 역사-외적 근본원리를 정초하는 이론이라는 의미에서)을 구성하려고 시도한다.


물론 이러한 프로이트-맑스주의의 시도는 맑스주의의 매우 현실적이고 중대한 곤란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알다시피 맑스주의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논의를 “공백”으로 남겨둠으로써 이것을 채워줄 이론적 원천을 다른 분과학문에 요구해 왔다. 이미 언급한 라이히뿐만 아니라, 프랑크푸르트학파나 초현실주의 그룹에 속하는 다수의 이론가들, 초기 알튀세르와 그를 따르는 이론가들, 최근에는 슬라보예 지젝을 비롯한 포스트-라캉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프로이트-맑스주의 이론가들이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이데올로기 이론’을 구성하고, 그것을 생산양식에 대한 맑스의 이론에 추가함으로써 후자를 완성시키는 일에 끊임없이 몰두해온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프로이트와 맑스를 종합하려는 이러한 시도는 사회에 대한 “절대과학”을 생산하려는 야심만만한 시도라고 볼 수 있지만, 1970년대 말 「프로이트와 맑스」라는 글에서 알튀세르가 선언하게 되듯이, 그것은 결국 불가능한 시도로 남게 된다. 왜냐하면 프로이트와 맑스의 이론은 서로 상이한 이론적 대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대상의 갈등적 성격에서 비롯되는 과학 그 자체의 갈등적 성격을 역사유물론과 정신분석학이 공유한다고 할지라도, 양자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이론의 심연이 존재한다.


알튀세르가 도달한 결론은 보다시피 이렇게 부정적인 것이었는데, 정확히 여기에서 발리바르는 프로이트-맑스주의의 기획을 스피노자-맑스주의의 기획으로 대체하자고 제안한다. 그렇다면, 스피노자는 프로이트가 주지 못한 무엇을 제공할 수 있다는 말일까? 스피노자의 대상 또한 맑스의 대상과 정확히 동일한 것은 아니라면, 양자는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결합될 수 있다는 것일까? 이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맑스와 프로이트의 대상의 이질성만큼이나 정신분석학의 대상의 특수한 성격 자체를 다시 문제로 삼아야 한다.


정신분석학은 기본적으로 가족의 갈등적 구조와 그것의 개인적 인성 내로의 반영(즉 차별적인 정신적 심급들의 조직화)의 메커니즘을 분석하는 것을 대상으로 한다. 따라서 그것은 사회ㆍ집단적 수준에서 조직되는 대중들의 이데올로기적 교통을 설명하기에는 부적절하다. 주지하다시피, 후기 프로이트는 자신의 이론적 대상을 문화ㆍ문명 및 종교의 영역으로 크게 확장한 바 있고, 또 라캉과 같은 이론가는 이를 계승하여 자신의 작업 전체를 무의식의 ‘사회적’ 성격에 대한 강조 속에서 출발시켰지만, 근본적으로 정신분석학의 대상은 여전히 가족적인 구조에 매여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이론적 제약은 앞서 본 프로이트-맑스주의의 경우처럼 사회적인 것과 가족적인 것의 ‘구조적 상동성’을 가정하는 방식으로 나타날 수도 있지만(알튀세르의 비판은 여기에 집중한다), 반대로 그것은 사회적인 것과 가족적인 것의 ‘분리’를 추구하는 방식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그리고 발리바르에 따르면, 정신분석학이 선호하는 것은 오히려 두 번째 방식이다. 정신분석학은 사회적인 것을 분석함에 있어 사적인 것(가족)과 공적인 것(국가)을 분리하고, 갈등을 주로 사적인 것에 위치시킴으로써, 대칭적으로 공적인 것을 갈등적이지 않은 영역, 즉 갈등이 “승화”(프로이트)되거나 또는 (이러저러한 이원적 적대가 세 번째 항에 의해 중화되는) “상징적인 것”(라캉)이 구축되는 영역으로 표상한다.19) 정신분석학이 근본적으로 사회를 부당전제하는 “사회학주의”의 혐의를 갖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20)


따라서 프로이트에 대해 스피노자적 대안을 추구한다는 것은 사회ㆍ집단적 차원에서 전개되는 이데올로기적 교통을 그 자체로 분석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러한 교통의 갈등적 성격에 천착해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피노자는 ‘대중들의/대중들에 대한 공포’를 정치의 중심 문제로 부각시키는데, 이는 근본적으로 스피노자가 대중들의 이데올로기적 교통을 관통하는 적대들에 주목하기 때문이다(통치자들에 대한 대중들의 적대, 대중들에 대한 통치자들의 적대, 대중들에 대한 대중들 자신의 적대).


여기서 홉스와 스피노자의 차이는 아주 계발적이다. 사회적인 것 또는 시민사회를 창립함으로써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사적ㆍ자연적 적대를 억압하거나 심지어 제거할 수 있다고 보는 홉스의 입장에 반대하여, 스피노자는 사회적인 것 속에 여전히 적대가 지속될 뿐 아니라, “내전이나 외적과의 전쟁이 함축하는 폭력과, 죽음에의 위협”은 오히려 “법치상태 자체의 역사의 극단적인 결과”라고 보는 입장을 취한다. 스피노자의 이론적 대상은 정확히 이러한 사회적인 것 속에서 전개되는 대중들의 이데올로기적 적대이며, 이 때문에 스피노자는 프로이트를 대신하여 맑스의 이론을 전화하거나 또는 “일반화”하는 데에 적합한 특권적인 이론가로 떠오른다. 발리바르는 프로이트와 스피노자가 갖는 몇몇 중요한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프로이트를 스피노자가 아닌 홉스에게 접근시키는데, 이는 프로이트가 홉스와 마찬가지로 갈등을 사적인 영역에 한정하고, 사회와 국가를 원칙적으로 비(非)갈등적인 영역으로 표상하려고 했기 때문이다.21)


이렇게 ‘이데올로기적 적대’를 명확한 분석 대상으로 삼는 스피노자의 관점을 택함으로써, 우리는 또한 자연에서 문명으로의 이행과 같은 역사에 대한 선형적이고 목적론적인 사고를 포기할 수 있게 된다. 사회계약론은 서사(histoire)의 형식 속에서 스스로의 논의를 전개함으로써 자신이 마치 역사에 대한 이론이라도 되는 양 위장하지만, 이러한 위장 속에서 말소되는 것은 정확히 모든 역사들의 독특성과 비동시성이다.


스피노자는 사회계약의 가장된 역사성을 실제 역사 속으로 옮겨 놓는다. 그의 󰡔신학-정치론󰡕은 유대 민족의 ‘계약’(pactum)의 개별역사를 분석함으로써 사회계약론의 목적론적 역사인식을 ‘해체’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대중들의 종교적 상상에서 비롯되는 비합리적인 분쟁과 폭력에서 빠져나와 계몽된 개인들의 연합인 시민사회로 이행하기 위한 합리적 수단으로서의 사회계약이라는 관념과 일정하게 거리를 두면서, 오히려 스피노자는 사회계약의 토대에 ‘신성 계약’의 종교적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22) 즉 모세의 군주정에 앞서는 신정(神政)(각각의 개인이 정치ㆍ종교적 대표자의 매개 없이 신과 직접적인 계약을 맺음으로써 성립되는 신정)은 다른 역사적 신정들과 달리 그 자체로 하나의 ‘허구’이며, 모든 역사적 사회계약들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근본적인 이데올로기적 구성물로 기능한다. 따라서 모든 사회계약은 “신학-정치적” 토대를 가지고 있으며, 사회계약을 통한 이행이란 이데올로기 없는 투명한 사회로의 이행이 아니라, 항상 아직 이데올로기의 요소 속에서 진행되는 이행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 점이 스피노자로 하여금 계약이나 이행이라는 관념 자체를 󰡔신학-정치론󰡕에서 포기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스피노자는 모든 이행이 이데올로기 속에서 벌어진다는 점을 명료하게 인식하면서, 대중들의 종교 이데올로기를 역사적으로 분석하고 그것을 내적으로 전화하는 실천에 착수한다. 무엇보다도 스피노자는 신학적이면서 동시에 정치적인 이중의 계약을 통한 시민적ㆍ민족적 종교 또는 진정한 종교(vera religio)의 창립 가능성을 모색하는데, 이는 그가 당시 칼뱅주의를 신봉하던 대중을 군주파로부터 분리하여 공화파의 지지자들로 전환시키기 위해서는 공화주의와 대중의 종교, 이 양자에 공통적인 지반을 발견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23) 이렇게 봤을 때, ‘계약’을 통한 이행의 진리성은 계약의 가장된 역사성을 통해서 보장될 수도 없고, 반대로 (존 롤즈와 같은 현대의 계약론자들이 주장하듯이) 계약의 선험적ㆍ절차적 공정성을 확보함으로써 보장될 수도 없다. 오히려 그러한 진리성은 정세 속에서 계약 관념이 만들어내는, 종교 이데올로기 내에서의 미분적 거리를 통해 달성될 수 있을 뿐이다. 역사는 ‘절대진리’를 향해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정세적 진리의 생산을 통해, 따라서 매번 상이한 진리의 생산을 통해 전진할 뿐이다.


스피노자가 맑스주의에 고질적인 “역사 없는 역사성”이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이다. ‘역사 없는 역사성’이라는 말은 맑스와 그의 후계자들이 자본주의에 대한 연구를 “논리적인 것”의 측면에서 과도하게 추구함으로써, 자본주의의 “역사적인 것”의 측면을 충분히 분석하지 못했다는 것을 일컫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 말은 “논리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의 반정립 자체를 문제로 삼으면서, “역사적 자본주의”를 정확히 계급투쟁의 역사로 연구하자고 제안하는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역사 없는 역사성’이라는 문제가 ‘피지배자 없는 지배’라는 문제와 함께 논의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인데, 발리바르는 맑스주의의 이러한 무능력의 원인을 맑스주의가 가졌던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관념’의 한계에서 찾는다.


맑스주의는 이데올로기를 자본주의의 근본 모순을 은폐하는 ‘환상’에 불과한 것으로 봤으며, 상관적으로 그러한 모순을 직접적인 방식으로 겨냥하지 않는 모든 투쟁들을 자본주의의 환상에 사로잡힌 투쟁으로 여겼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이 역사적으로 자본주의에 강제한 모든 변화들은, 그것들이 명확히 자본주의의 전면적인 파괴로 귀결되지 않는 한, 최종분석에서 자본주의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허구적인 변화들로 간주되었으며, 심지어 근본적인 변혁을 늦추는 지연제와 마취제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치부되었다. ‘개량주의’와 ‘혁명주의’의 오래된 대립은 바로 여기에서 파생되는데, 그 대립은 자본주의적 착취에 맞서 어떤 제도들을 어떻게 변혁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구체적으로 분석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변혁을 ‘전부 아니면 전무’의 양자택일 속에서 관념적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이제 우리가 스피노자의 관점을 택하여, (사회계약적이든 그렇지 않든) 모든 역사적 이행들은 항상 이데올로기 속에서, 즉 “이데올로기의 동요” 속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긍정할 수 있다면, 우리는 맑스주의의 ‘역사 없는 역사성’이라는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이론적 수단을 확보하게 된다. 자본주의에 순수한 방식으로 반대하는 투쟁이란 사실 역사적으로 볼 때 규칙이 아니라 예외에 불과하며,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 중 절대다수는 항상 어떤 이질적인 이데올로기와의 결합 속에서 이루어졌다. 이는 단지 ‘자본주의에 내적인’ 투쟁들에만 해당되는 것도 아니었는데,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것으로 간주되는 ‘혁명적인’ 투쟁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예컨대 러시아 혁명 당시 노동자 계급은 반전(反戰) 이데올로기를 통해 재향군인의 조직들과 결합함으로써만 자신의 혁명을 성사시킬 수 있었고, 이 때문에 그들의 조직은 순수한 ‘노동자 소비에트’가 아니라 ‘노동자ㆍ병사 소비에트’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모든 이행은 이데올로기 속에서 발생할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기존의 지배 이데올로기의 작동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피지배자들의 요구를 다양한 방식으로 지배 이데올로기 속에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즉 새로운 지배 이데올로기의 형성을 강제함으로써 발생한다. 따라서 적어도 자본주의에 내적인 어떤 이행들은 그 자체로는 환상이 아니며, 역으로 자본주의로부터의 이행 또한 자본주의에 대한 단순한 반정립 속에서 사고할 수 없다.


이제 이러한 논의의 이론적 귀결을 보다 추상적인 방식으로 정리해 보자. 모든 계급투쟁은 하나의 토대를 갖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토대와 이데올로기적 토대라는 두 개의 토대를 갖고 있으며, 항상 그것들의 과잉결정을 통해 진행한다.24) 스피노자-맑스주의가 추구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과잉결정에 대한 역사적 분석인데,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알튀세르가 부닥쳤던 딜레마 중 하나가 해결되는 것을 본다. 알다시피 알튀세르는 ‘최종심급’이라는 개념을 통해 구조와 정세의 절합을 사고하려고 했다. 최종심급 개념은 구조가 어떻게 정세를 결정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개념이다. 물론 최종심급 자체가 구조는 아니지만, 그것은 주어진 정세에서 어떤 심급이 지배적 심급(“주요 모순”)이 될지를 결정함으로써 정세 속에 구조의 존재를 보장한다.


따라서 알튀세르에게 ‘최종심급 없는 과잉결정’이라는 관념은 매우 부조리한 것으로 여겨졌다. 왜냐하면 이러한 관념은 ‘모든 것에 의한 모든 것의 결정’을 주장함으로써 결국 ‘결정’이라는 관념 자체를 폐기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최종심급이 지배적 심급과 일반적으로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 경우 우리는 단순한 결정의 모델로, ‘경제주의적’ 결정의 모델로 복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최종심급은 정확히 정세의 바깥에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순수하게 그 안에 있을 수도 없게 된다.


이러한 이론적 긴장을 표현하기 위해, 알튀세르는 최종심급을 역설적으로 ‘부재하는 원인’ 또는 ‘부재하는 현전하는 원인’으로 정식화하지만, 오히려 이러한 표현은 최종심급 개념이 구조와 정세 사이에서 진동하는 개념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맑스를 위하여󰡕의 유명한 두 장(제3장과 제6장)은 각각 이러한 진동의 한편에 서있으며, 알튀세르와 그를 따랐던 이론가들은 그 진동의 한쪽을 택하도록 강제된다. 발리바르가 회고하듯이, 구조의 알튀세리앵이 있다면 정세의 알튀세리앵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인데, 노년에 알튀세르가 ‘마주침의 유물론’을 도입하면서 최종심급 개념을 일정하게 해체하고, 그것을 지배적 심급과 동일시하는 것을 우리는 이러한 진동의 또 다른 출현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주침의 유물론은 정세를 특권화하고 구조를 상대화하면서, 구조와 정세의 외재성을 진정으로 극복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반면 발리바르는 스피노자-맑스주의적 기획을 통해 구조를 이원화하고, 정세를 정확히 이질적인 두 구조 사이에 삽입함으로써, 정세와 구조를 진정으로 내재적인 방식으로 관련시킨다. 이러한 틀 속에서 목적론은 완전히 포기되지만(왜냐하면 두 개의 구조를 포괄하는 메타구조가 없기 때문에), ‘구조에 의한 결정’이라는 관념은 강화되며, 복잡해진다. 「무한한 모순」에서 발리바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내가 제안하는 도식은] 역사성의 보완물이나 보충물처럼 작동하는, 하나의 “토대”와 하나의 “상부구조”의 총합이 아니라, 오히려 양립불가능하면서 동시에 분리불가능한 설명의 두 “토대들” 또는 두 결정들의 결합일 것이다 : 주체화[복종]양식과 생산양식(또는, 더 일반적으로, 이데올로기적 양식과 일반화된 경제적 양식). 대립적 의미에서이긴 하지만, 이 둘은 모두 물질적이다. 주체화와 생산의 물질성의 이러한 상이한 의미들에 이름을 붙이려고 할 때, 상상적인 것현실이라는 관례적인 용어들이 떠오른다. 어떤 역사적 정세에서도 상상적인 것의 효과들은 오직 현실적인 것을 통해서만, 현실적인 것을 수단으로 해서만 나타날 수 있으며, 현실적인 것의 효과들은 상상적인 것을 통해서만, 상상적인 것을 수단으로 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한다는 조건으로, 우리는 이 용어들을 채택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역사 속에서 인과성의 구조적 법칙은 또 다른 장면을 통해, 또 다른 장면을 수단으로 우회한다. 맑스를 패러디하여, 이데올로기가 역사를 갖지 않는 것처럼 경제도 역사를 갖지 않는다고 말하자. 왜냐하면 이들 각각은, 자기 자신의 효과들의 유효한 원인인 상대편을 통해서만 역사를 갖기 때문이다. 이것은 “부재하는 원인”이라기보다는 스스로를 부재하게 만드는 원인, 또는 자신의 유효성이 대립물을 통해 작동하는 원인이다.25)





따라서 경제는 현실적인 것이며, 이데올로기는 상상적인 것이다. 그러나 다시 상상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의 인과적 유효성을 조건짓는다는 의미에서 ‘현실의 현실’을 구성한다. 발리바르는 자신의 문제설정에 적합한 이름을 찾기 위해 몇 가지 후보를 검토하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초현실주의(surrealism)’이다. ‘과잉현실주의’라고도 번역할 수 있는 이 용어는, 그 말의 문학적 용법이 불러올 수 있는 오해 때문에 결국 채택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가 항상 두 가지 현실에 의해 과잉결정된다는 점을 훌륭하게 포착한다.26)


그렇다면, 발리바르가 최종적으로 자신의 문제설정에 주는 명칭은 무엇일까? 놀랍게도 그것은 “구조주의”이다. 여기서 우리는 맑스주의에서 사용되는 ‘토대’라는 말이 영어로 base이지만, 그와 동시에 structure로 표현되기도 한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알다시피 ‘하부구조-상부구조’는 영어의 ‘infrastructure-superstructure’라는 말을 번역한 것인데, 거기에서 하부구조는 종종 structure라고 줄여서 표기되기도 한다. 발리바르는 자신의 문제설정에 ‘구조주의’라는 명칭을 부여함으로써, 그것이 ‘구조에 의한 결정’ 관념을 기각하거나 상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발본화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를 다른 방향에서 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발리바르가 ‘구조에 의한 결정’을 설명하는 방식은 구조주의의 의미 자체를 전화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또는 말하자면, 그는 ‘어떤 구조주의’에 ‘또 다른 구조주의’를 대립시키고 구조주의의 유산을 선별적으로 계승한다). 발리바르에 따르면, 새로운 구조주의에서 ‘인과성(causality)’은 발본화되지만, ‘결정론(determinism)’은 기각된다.27)


이 구별을 설명하기 위해 발리바르가 명시적으로 준거하는 것은 다시 스피노자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결정론과 인과성은 반드시 구별되어야 하며, 특히 결정론은 목적론에서 분리될 수 없다. 스피노자는 󰡔윤리학󰡕 제1부의 부록에서 결정론의 환상을 비판하면서, 하나의 사건이 다른 하나의 사건을 순수하고 단순하게 결정하고 그렇게 결정된 사건이 또 다른 사건을 마찬가지로 결정함으로써 인과관계가 진행된다고 사고하는 것은 그 연쇄를 거꾸로 추론하여 하나의 기원적인 원인을 발견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지만, 이러한 추론은 사실상 어떤 궁극적인 원인에도 도달할 수 없으므로, 종국에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전도하고 목적론적인 환상을 수립함으로써 추론을 종결짓도록 강제된다고 주장한다. ‘결정’에 대한 이러한 선형적이고 적분적인 사고에 스피노자는, 다수의 원인들이 서로에 대해 미분적인 방식으로 작용하는 인과성의 복잡한 도식을 대립시킨다. 이 사고에 따르면, 인과관계는 하나의 사건이 다른 하나의 사건을 단순하고 절대적인 방식으로 결정함으로써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인접하거나 그렇지 않은 또 다른 사건들이 그러한 결정의 경로에 ‘흔적’으로 기입됨으로써, 항상 ‘변화가 변화되는 방식’으로 형성된다.28) 이 때문에 우리는 비동시적인 다수의 원인들을 동시에 고려함으로써만 인과성을 어느 정도 적합하게 인식할 수 있는데(스피노자의 󰡔윤리학󰡕 제2부 정리29의 주석을 이러한 방식으로 읽을 수 있다), 발리바르가 두 개의 구조, 두 개의 토대의 상호 기입을 통한 역사의 ‘독특성’의 생산을 논할 때 부각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스피노자적 인과성 개념이다.29)


이제 두 개의 구조, 두 개의 토대가 놓임에 따라, 정치는 그 위에서 세 가지 개념으로 분화된다. 정치가 스스로와 관계 맺는 방식이 ‘정치의 자율성’ 개념을 통해 인식된다면, 정치가 경제라는 타자와 관계 맺는 방식은 ‘정치의 타율성’ 개념을 통해 인식되고,30) 마지막으로 정치가 이데올로기라는 또 다른 타자와 관계 맺는 방식은 ‘타율성의 타율성’ 개념을 통해 인식된다. 다시 여기에 해방, 변혁, 시민인륜이라는 윤리적 형상들이 조응하며, 이것들은 각각 상징적인 것(이상성), 현실적인 것(현실), 상상적인 것(허구)이라는 정치의 세 가지 보편의 계기를 표시하게 된다. 따라서 정치의 세 개념은 ‘보편들’을 대상으로 하지만, 이것들이 정세 속에서 서로에 대해 맺는 관계는 다시 한 번 ‘독특성’이다. 발리바르는 「정치의 세 개념」의 결론에서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우리가 말한 개념들이 정치에 관련되는 한에서 그것들은 개별적인(individuel) 길들 위에서만(또는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개별적인 길들의 교차점에서만) 절합될 수 있다. 이러한 길들은, 진리처럼, 필연적으로 독특(singulier)하며, 따라서 모델이 없다.”










3. ‘갈등적 민주주의’ 또는 ‘더 많은 민주주의’를 향하여






그러나 이렇게 “정치의 세 개념”과 세 가지 “보편적인 것들”을 도식적으로 연결하는 데에는 약간의 문제가 따른다. 발리바르는 본서의 결론에 해당하는 「보편적인 것들」이라는 글에서 현실로서의 보편적인 것을 직접 ‘경제’와 연결시키기보다는 다소 상이한 맥락에서 정의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 “나는 [현실로서의 보편적인 것을] 세계라 불리는 것을 구성하는 요소들 내지 단위들(unités)의 실제적 상호의존성이라는 관념으로 이해하는데, 거기서 세계란 제도들, 집단들, 개인들이요, 더욱 심원하게는 그것들을 포섭하는 과정들의 총화, 즉 사람과 사물의 유통, 정치적 타협들과 세력관계들, 법적 계약들, 정보들과 문화적 모델들의 교통 따위의 총화이다.”31) 이러한 외양상의 불일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나는 해방, 변혁, 시민인륜의 정치를 명시적으로 경계(frontière)라는 의념과 관련시켜 볼 것을 제안하고 싶다.


해방의 정치는 본질적으로 공동체 속에 제도화된 시민권을, ‘평등-자유’ 명제에 기초한 부정적이고 봉기적인 시민권의 대중적 발동을 통해, 공동체의 경계 너머로 확장하는 정치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공동체의 경계란 내국인과 외국인의 구분과 차별을 제도화하는 ‘외부의 경계’를 의미할 뿐 아니라, 그에 못지않게 다수자와 소수자, 정상과 비정상, 정치ㆍ사회적 권리들을 다소간 온전하게 누리는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 요컨대 능동적 시민과 수동적 시민의 위계와 차별을 제도화하는 ‘내부의 경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해방의 정치는 기존의 체계에 의해 ‘수동적 시민’으로 분류되어온 자들을 저항과 봉기의 행위 속에서 정치를 실천하는 진정한 ‘능동적 시민’으로 역전시키고, 외국인ㆍ불법이주자로 차별받는 자들을 정치ㆍ사회적 시민권 내에 명시적으로 포함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반면, 변혁의 정치는 오히려 주어진 ‘경계’ 내에(즉 주어진 사회구성체 내에) 형성되어 있는 사회적 관계들 또는 조건들을 발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여기서 transformation이라는 단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데에 따르는 난점이 있는데, 관례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변혁’이라는 용어는 transformation의 함의를 충분히 담지 못하는 용어이다. 이 때문에 이 책을 번역할 때 우리는 그것을 때로 ‘변형’이나 ‘전화’라는 용어로 번역하기도 했지만, 그렇게 해도 여전히 transformation에는 남는 측면이 있다. 이 측면을 포착하기 위해서, 우리는 ‘전환(轉換)’이라는 용어를 고려할 수 있다. 비록 이 책의 번역에서 이 단어를 사용하진 않았지만, ‘전환’이라는 단어는 transformation이 항상 내부로부터 만들어지는 변화를 지시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즉, transformation은 체계를 경계 바깥으로 확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체계를 내부로부터 바꾸는, 내부로부터 돌아서게 만드는 실천이다.


우리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은 발리바르의 말에서 확인할 수 있다 : “맑스의 정치는 자유의 필연적 생성이라는 시각 속에 각인된다. 평등한 자유라는 명제가 권리들을 항상 대기 중인 초월적인 기원으로 되돌려 보내면서 그 권리들의 보편성을 전제한다면, 맑스의 정치적 실천은 자유의 필연성, (프롤레타리아트로 지칭되는) 인민의 자율성의 필연성을 자신의 결과로 생산하는, 조건들의 내적 변혁이다…….”32) 여기서 발리바르가 해방의 정치를 논하면서 말하는 “초월적인 기원”이 체계의 부정적 ‘외부’를,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체계로부터 내적ㆍ외적으로 배제된 ‘타자들’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면, 해방과 변혁이 각각 체계의 ‘확장’과 ‘전환’으로 특징지어지는 정치라는 점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맑스의 변혁의 정치란 언제나 공동체에 내적인 정치, 심지어 민족에 내적인 정치로 인식되어야 한다는 말일까? 그렇지는 않다. 정반대로 맑스는 ‘세계’야말로 이러한 내적 전환의 궁극적 지평이라고 사고했으며, 따라서 처음부터 ‘국제주의’를 공산주의로의 이행의 핵심적인 요소로 제시했다. 바꿔 말해서, 맑스의 정치는 자본의 운동이 일국적 차원을 넘어 세계적인 수준에서 전개될 때, 이로부터 출현할 통일된 세계를 내적으로 전환할 세계정치의 주체로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존재를 가정한다(‘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그런데 발리바르는, 자본에 의한 세계화, 통신기술과 교통기술의 발전에 의한 세계화를 통해 정작 통일된 인류가 현실에서 출현할 때, 해방의 정치와 변혁의 정치는 모두 위기에 봉착한다고 말한다. 먼저 해방의 정치 쪽에서 보면, 인류 공동체가 실제로 출현함에 따라, 공동체를 그 경계 바깥으로 확장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근대 정치의 기획은 그야말로 대상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왜냐하면 인류 공동체가 출현했다는 것은 (공상에 의존하지 않는 한) 더 이상 외부가 없는 공동체가 성립되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해방의 정치는 인류가 서로의 차이를 극복하고 하나의 인민으로 통일되는 것을 꿈꾸는 ‘세계시민주의’를 처음부터 자신의 본질적인 요소로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인류가 더 이상 무한히 접근해 가야 할 이상(理想) 또는 ‘규제적 이념’(칸트)이 아니라, 그 자체 경험될 수 있는 하나의 현실로 둔갑함에 따라, 그러한 이상에 준거하는 일체의 정치가 위기에 빠지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이야말로 경계 바깥을 향한 공동체의 확장을 추구하는 해방의 정치가 아닌, 세계를 내적으로 전환하는 변혁의 정치가 진정한 기회를 맞이할 것이라고 기대해도 좋지 않을까? 맑스의 예상 속에서, 세계화된 세계란 바로 ‘현실적 보편성’이 달성된 세계로 인식되었으며, 그것은 근대 속에서 근대를 반대하는, 따라서 근대를 넘어서는 것을 목표로 한 프롤레타리아 대중정치의 세계적인 출현으로 이어질 것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전혀 벌어지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세계화된 세계에서 경계들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부화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제 경계들은 모두 “내적 경계들”이 되었다. 이러한 내부화는 경계들을 상대화하기는커녕, 그것들이 전통적으로 가졌던 배제의 역할들을 점점 더 폭력적이고 히스테릭한 방식으로 수행하게 만든다. 이 때문에,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세계정치의 단일 주체가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인종적, 문화적, 종교적 따위의 경계들을 따라 다양한 수준에서 분할된 주체들이 서로 충돌하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일반화된다. 이 상황은 분명 홉스적이지만, 그 전망은 오히려 반(反)홉스적인데, 왜냐하면 세계적인 리바이어던이 출현하거나 세계적인 사회계약이 성사될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대중들의 극단적 폭력을 부추기고, 그것을 “잉여인구”를 제거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면서, 대중정치 그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반(反)정치”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변혁의 정치는 해방의 정치와 마찬가지로 위기에 빠진다.


이 같은 정세 속에서 발리바르는 ‘현실적 보편성’이라는 관념을 복잡화할 것을 제안한다. 세계화가 가져올 복합적 효과를 맑스가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따라서 변혁의 정치 자체가 무기력에 빠지게 된 것은, 맑스 또는 맑스주의가 경제적 적대를 자본주의의 유일한 현실로 가정함으로써, 이데올로기적 적대라는 또 다른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것을 자본주의의 세계화 속에서 전진적으로 극복될 일시적이고 부차적인 현상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해 왔기 때문이다.33) 그러나 세계화된 세계 속에서 전면화되는 ‘내적 경계들’이 무엇보다도 인민들의 가슴에 그어지는 정신적 경계들, 즉 동일성(identité)의 경계들을 의미한다면, 그것들의 분석은 이제 경제가 아닌 이데올로기의 측면에서 본격적으로 시도되어야 한다. 발리바르가 현실적 보편성을 ‘경제’와 명시적으로 연결시키기보다는 ‘보편적 인류가 현실에서 출현한 상황’으로 재정의하면서, 이 상황을 경제적 모순과 이데올로기적 모순의 폭력적인 과잉결정으로 제시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렇지만, 앞에서 이미 살펴봤듯이, 발리바르가 현실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을 ‘현실과 비(非)현실’의 이분법이 아니라, 이질적인 두 현실의 과잉결정이라는 관점에서 사고한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는 겉보기와 달리 매우 수미일관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제 다양한 내적 경계들에서 폭발하는 “동일성의 폭력”이 정치의 중심문제로 제기됨에 따라(그러나 정확히 이러한 경계들은 더 이상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경계들/국경들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곳에서 증식하며 모든 곳을 “경계지대”로 변화시킨다), 이것을 대상으로 하는 새로운 정치로서 시민인륜의 정치가 도입된다. 시민인륜의 정치는 해방과 변혁의 정치를 무효로 만들거나 대체하는 정치가 아니라, 그것들을 복원하고 재활성화할 수 있는 조건으로서 ‘폭력에 맞선 투쟁’을 전면에 놓는 정치이다. 발리바르는 시민인륜의 정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 “나는 정치가 총체적인 동일화와 부유하는(fluctuante) 동일화의 불가능한(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상당히 실제적인) 한계들 사이에서 동일화들의 갈등을 해결하는 한에서 그러한 정치를 시민인륜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러한 의미의 시민인륜은 확실히 모든 폭력을 제거하는 정치는 아니지만, 그것은 정치(해방, 변혁)를 위한 (공적, 사적) 공간을 부여하고 폭력 그 자체의 역사화를 허용하는 방식으로 동일화의 극단성들 사이를 벌려 놓는다.”34)


시민인륜의 정치를 사고하기 위해 발리바르가 우선적인 검토 대상으로 삼는 것은 헤겔의 ‘인륜(Sittlichkeit)’ 개념이다. 원래 헤겔은 인륜을 󰡔정신현상학󰡕에서 도덕보다 하위의 개념으로 다루지만(거기에서 도덕은 프랑스 혁명 이후에 등장하고, 인륜은 ‘정신’의 운동의 출발점을 이루는 고대 그리스 공동체를 무대로 하여 등장한다), 󰡔법철학󰡕에서는 반대로 인륜을 도덕보다 상위에 놓고, 근대 국가의 헤게모니를 설명하는 핵심 개념으로 만든다. 발리바르가 준거하는 인륜은 물론 󰡔법철학󰡕의 그것이다. 헤겔에 따르면, 국가는 갈등하는 특수한 공동체들(가족적, 지역적, 종교적, 직업적, 정치적 공동체들)을 단순히 제거함으로써 헤게모니를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공동체들을 잠재적으로 해체하여 국가적 작동의 매개들로 재구성하는 ‘부정의 부정’의 운동을 통해 헤게모니를 확보한다.


이 운동은 확실히 특수한 공동체들을 국가의 이해관계에 따라 차별적으로 취급함으로써 그 공동체들에 중요도 및 인정(reconnaissance)의 위계화된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운동은 국가를 특수이해에 따라 규정되는 또 다른 공동체(우월하지만 특수한 공동체)로 현상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국가를 보편화하는 효과를 불러온다. 왜냐하면 이 운동은 개인들을, 그들이 속해 있는 일차 소속집단에서 상대적으로 분리하여 이차 소속집단(즉 국가)에 귀속시키고, 그렇게 함으로써 개인들이 복수의 동일성들을 가지고 “유희”할 수 있는 공간, 즉 상대적으로 큰 제약 없이 개인들이 이러저러한 동일성들 가운데 하나를 택하거나, 하나의 동일성에서 다른 동일성으로 옮겨갈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기 때문이다. 개인들이 일차 소속집단에 속박되어 있을 때, 그들은 그 속에서 자신들이 담당하는 역할과 기능으로 환원되며, 진정 자유로운 개인들로 나타날 수 없게 된다.35) 근대 국가는 이러한 ‘구속’을 (탈퇴 가능한) ‘가입’으로 전환시킴으로써, 무엇보다도 개인을 “자유화”하는 공간으로 등장한다. 이 때문에 개인들은 국가 속에서 일종의 “해방”을 경험하며, 이것이 국가의 보편화적 힘의 근간을 이룬다.


그러나 발리바르에 따르면, 헤겔은 국가를 시민인륜의 유일한 담지자로 만들고, 국가의 작동에 각인된, “변증화될 수 없는” 삼중적 모순을 부인한다. 첫째, 일차 소속 집단을 파괴하는 국가의 폭력과 그 공격성의 사후효과에 대한 부인, 둘째, “의제적 종족체”를 이데올로기적 핵심으로 하는 근대 민족국가의 공동체적 특수성에 대한 부인, 셋째, 계급적대의 파괴적 효과에 대한 부인이 그것이다. 발리바르는 헤겔적 정치를 “위로부터의 시민인륜의 정치”라 부르면서, 이와 반대로 다중들(multitudes)이 국가로 하여금 자신들의 존엄을 인정하게 만들고, 시민인륜의 규범들을 도입하도록 강제하는 “아래로부터의 시민인륜의 정치”가 가능할 뿐 아니라, 사실 후자야말로 보다 근본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관점은 「고타강령 비판」에서의 맑스의 주장으로 소급되는 것으로, 발리바르는 “맑스가 사회주의자들의 인민적ㆍ국민적 교육 기획들에 반대하여, 인민이 일차적으로, “그리고 불손하게”, 국가의 민주적 교육자로 될 필요성을 제기”한 바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러나 우리는 더 멀리까지 거슬러 올라가, 스피노자와 마키아벨리에 준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길게 논할 수는 없지만, 관개체성의 이론가로서 맑스와 스피노자는 각각 경제적 차원과 이데올로기적 차원에서 개체성들의 “압축불가능한 최소”를 산출함으로써, 아래로부터의 반폭력의 정치의 존재론적 근거를 마련한다. 이들이 말하는 압축불가능한 최소란 대중에 대한 지배자들의 억압이 오히려 대중의 반발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지배자들 자신의 파괴가 초래되는 ‘억압의 한계’를 가리키지만, 조금 더 일반적으로 정식화하자면, 타자의 개체성을 동일자의 개체성과 완전히 분리하려는 시도가, 타자와의 ‘관계’의 파괴를 통한 동일자 자신의 파괴로 연결되는 “관개체성의 역전”의 문턱을 가리킨다. 본서에 수록된 「정치의 세 개념」(특히 세 번째 절)과 「폭력 : 이상성과 잔혹」 등에서 우리는 이러한 관념이 반복되는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 󰡔로마사 논고󰡕에서 행해진 ‘공화주의’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분석은 바로 사회 집단들 사이의 갈등성을 국가 바깥으로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국가 내에 특정한 방식으로 유지하는 것이 오히려 시민인륜을 가능하게 만들고, 국가를 상대적으로 안정시키는 기폭제가 될 수 있다는 점을 훌륭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문제의식의 중심에 놓여있는 것이 바로 ‘호민관’ 제도인데, 이 제도는 몽테스키외에게서 기원하는 근대 공화주의의 삼권분립론(이것은 알튀세르가 보여주었듯이 ‘귀족적 당파성’을 갖는다36))이 ‘대중들의/대중들에 대한 공포’를 중화하기 위해, 갈등을 지배 분파들 사이의 견제와 타협으로 전위시키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민주적 공화주의의 대안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안타깝게도 본서에는 수록되지 않았지만, 최근 작성한 몇몇 글들에서 발리바르는 점점 더 명시적으로 시민인륜 개념을 헤겔보다는 마키아벨리의 관점과 연결시켜 왔다. 예컨대 「유럽적 시민권은 가능한가?」라는 글에서, 발리바르는 20세기 유럽의 노동자 운동이 “사회적 갈등을 유지하는 호민관의 기능”을 함으로써, 유럽의 “민족사회 국가”(l’État national-social) 내에서 일정 수준의 민주주의를 달성하는 일이 가능해졌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따라서 우리는 민주주의의 활력에 헤겔의 이론보다는 마키아벨리의 정리를 적용해야 하거나, 적어도 전자를 후자로 교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37) “사회적 갈등성의 유지”라는 마키아벨리의 관점은 시민인륜 개념과 직접 연결되는 것으로, 발리바르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 ““시민인륜”은 확실히 모호한 용어이지만, 나는 그 용어가 갖는 함의들이 문명화, 사회화, 경찰과 치안, 예의바름 따위의 다른 용어들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특히 “시민인륜”은, 마치 사회 내의 “갈등들”과 “적대들”이 항상 폭력의 맹아들이며 그 반대는 아니라는 듯이 “갈등들”과 “적대들”을 억압해야 한다는 관념을 반드시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극단적 폭력은 [……] 사실 법질서를 위한 지구적 규모의 정책입안은 말할 것도 없고, “합의”와 “평화”를 정치적으로 맹목적으로 선호하는 데에서 온다.”38)


이와 같은 관점은 ‘체계’를 닫아걸기보다는 타자를 향해 개방하는 관점을 취함으로써 ‘타자성’을 체계 내부에 각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0세기 유럽의 노동자 운동 또한 스스로를 이중적 의미에서 “체계의 외부”에 있다고(즉 ‘자유-시장 자본주의’의 외부에 있을 뿐 아니라 ‘서구유럽’의 외부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이를 통해서 이들은 다름 아닌 체계의 호민관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체계 내부와 외부의 열린 변증법을 통해서 민주주의를 역동적으로 사고하는 마키아벨리의 관점은 ‘민주정을 포함한 모든 정체의 민주화’를 주장하는 스피노자의 문제설정과 같은 것이다. 양자의 문제설정에서 시민인륜의 정치는 해방의 정치와 결합되며, 그리하여 ‘아래로부터의 시민인륜의 정치’를 정의한다.


발리바르는 이 같은 새로운 정치의 전망을 “갈등적 민주주의” 또는 “더 많은 민주주의”라고 부르고, 이것을 다원주의의 극단적 확장이라는 문제설정과 연결한다. 문제는, 교회이든 민족국가이든 아니면 그 무엇이든, 공동체의 초월적인 동일성에 개인들/개체들의 생산을 종속시키는 것이 아니라(따라서 다원주의를 어떤 한계 속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수많은 개인들/개체들의 상호확장적 생산을 위한 관개체적 “연대(solidarité)”의 유형들과 구조들을 새롭게 발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해방의 정치와 절합되는 시민인륜의 정치란 무엇보다도 “연대”의 정치일 수밖에 없다. 또, 역으로, 시민인륜의 정치와 절합되는 해방의 정치란 ‘공동체’의 창립을 목표로 하는 정치가 아니라, “공동체 없는 시민권”의 창립을 목표로 하는 정치일 수밖에 없다. 변혁의 정치 또한 해방의 정치 및 시민인륜의 정치와 절합됨으로써, 기존의 국제주의의 추상성을 극복하고, “사회적 시민권”의 관민족화의 구체적인 조건들을 연구하고 전환하는 정치로 거듭 나야 할 것이다.


앞으로 도래할 공산주의는 기독교적 공산주의, 부르주아적 공산주의, 사회주의적 공산주의와 같은 과거의 공산주의들을 선별적으로 계승할 것이지만, 그것들로 환원될 수 없는 새로운 내용을 또한 가질 것인데, 발리바르는 특히 ‘국제주의’와 ‘여성주의’의 요소를 강조한다. 이는 근대 민족국가의 정치가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를 핵심으로 하는 정치였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여성주의는 새로운 공산주의를 위한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보편적인 것들」에 나오는 발리바르의 말을 인용해 보자.






이렇게 평등-자유를 위한 여성들의 투쟁이 비차별(non-discrimination) 속에서의 비무차별화(non-indifférenciation[차이화])를 확립하는 경향을 갖는 복잡한 운동으로 발전된다면, 그것은 연대를 만들어 낼 것이지만(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 시민권의 진보에 기여할 것이지만), 어떤 공동체도 만들어내진 않을 것이다. 장-클로드 밀네(Jean-Claude Milner)의 언어로 말하자면, 여성은 전형적으로 “역설적 계급(classe paradoxale)”이다. 유사성이나 “자연적” 혈연관계의 상상적인 것에 의해 형성되지도 않고, 스스로를 “선택된” 집단이라고 여기도록 권위를 부여해 줄 상징적 목소리(Voix)의 호명에 응답하는 것을 통해 형성되지도 않는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여성의] 이러한 투쟁이 대상으로 삼는 것은 오히려 잠재적으로 공동체 일반을 변혁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지체 없이 보편주의적이다. 그것은 무엇이 정치의 의념 자체와 권위, 적법성, 대의의 형태들(비록 그것들이 “민주적”이라고 할지라도 돌연 특수주의로 얼룩진 것으로 나타나는 형태들)의 변혁일 수 있을까를 상상하도록 허락한다.39)






오늘 우리는 위기의 담론들의 범람 속을 살아가고 있다. 사회운동의 위기, 노동자 운동의 위기, 진보의 위기 등을 진단하는 담론 속에서, 그러나 내일의 새로운 전망을 열어내는 움직임은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한국에서도 “맑스주의의 위기”가 선언된 지 십오 년가량의 세월이 흘렀건만, 맑스주의를 전화하려는 기획은 좀처럼 심화ㆍ확산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여기 우리가 번역한 발리바르의 책은 뒤늦게 출판된 감이 없지 않지만, 우리가 처한 정치의 위기를 극복하고 이론의 전화, 정치의 전화를 위한 새로운 전망을 열어 내는 데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원래 이 책의 번역은 2003년 말 <이후> 출판사에서 활동 중이던 김정한 씨의 제안으로 시작되었지만, 중간에 출판사 조건의 변화로 인해 현재의 도서출판 b로 옮겨 출판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번역이 지속될 수 있도록 배려해 준 김정한 씨와 도서출판 b의 조기조 대표, 이성민 씨께 감사드리고 싶다. 특히 그 동안 수없이 많은 연기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번역자들을 기다려준 도서출판 b에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을 함께 전달하고 싶다.


이 책의 번역에는 많은 분들이 함께 해 주셨다. 우선 공동번역자인 서관모 교수님은 전체 책의 교열과 감수를 해 주셨을 뿐 아니라, 부록을 제외한 제3부의 「이데올로기의 동요」 논문 전체를 완전히 재번역해 주셨고, 서두에 실린 「용어 번역에 대하여 : ‘시민인륜’과 ‘의념’」을 작성해 주셨으며, 독어 원문 대조가 필요한 인용문들을 모두 대조하여 바로잡아 주셨다. 수많은 오역과 잘못된 한국어 표현을 일일이 바로잡아 주신 서관모 교수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다른 한편, 이 책에는 과천연구소를 통해 국내에 이미 번역 소개된 몇몇 논문들이 재수록 되었는데, 원래의 번역문들을 전재했지만 전체적인 표현의 통일성을 고려하여 약간의 교열작업이 있었음을 이 자리에서 밝힌다. 여기 속하는 논문들은 「맑스라는 이름의 자코뱅」, 「푸코와 맑스 : 유명론이라는 쟁점」, 「파시즘, 정신분석학, 프로이트-맑스주의」, 「모호한 동일성들」 이렇게 네 편이다. 원고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과천연구소의 윤소영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과분하게도 나는 이 책을 번역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자발적으로 조직된 너무나 열성적인 교정팀의 도움을 받는 영광을 누렸다. 사회진보연대에서 활동 중인 장진범 씨, 진재연 씨, 그리고 창작과비평사에서 일하는 강영규 씨, 이 세 분의 도움이 없었다면 나는 중간에 아마 번역을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지칠 줄 모르고 수많은 오역들을 바로잡아주고 좋은 의견들을 내준 세 분께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드리고 싶다. 또 서강 정치철학 연구회, (내가 회원으로 있기도 한) 사회진보연대, (지금은 전국학생행진으로 거듭난) 전국학생연대회의는 2005년 여름에 번역자 자격으로 본인을 초청하여 이 책의 몇몇 주제들을 토론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얼마 안 있어 책이 출판될 것으로 예상하고 그런 기회를 마련해주신 지 벌써 2년의 세월이 흘러버렸으니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성원해주시고 기다려주신 것에 감사드리고 싶다. 이 책을 번역하는 도중 소중한 딸 ‘준아’가 태어났다. 바로 얼마 전 돌잔치를 치렀는데, 정말 육아의 고통이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느낀 한 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역일과 다른 일들을 핑계로 내가 혹시 준아를 돌보는 일을 게을리 하진 않았나 반성해 본다. 너무 바쁜 아빠를 잘 참아 준 우리 딸 준아에게 고마움과 사랑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번역이 진행되는 동안 아내 양윤선 씨는 육아와 학업의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토론 상대자가 되어 주고, 많은 조언을 주었다. 영원한 지적 동반자인 양윤선 씨께 이 자리를 빌려 깊이 감사드린다.






2007년 7월


시카고 하이드 파크에서






최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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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7-09-15 0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오기는 했는데 각주가 살아나지 않네요. -_-;
위의 최원 씨 홈페이지 주소로 가시면 각주도 모두 볼 수 있으니까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balmas 2007-09-15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바람구두님, 오랜만이시네요. 어떻게 잘 지내고 계십니까? 제가 그동안 통 서재활동을 못하다보니까, 바람구두님 서재에도 한 번 못들렀습니다. 장소만 바뀌었지 생활하는 건 비슷한데, 여기 있으니까 이상하게 여유가 더 없는 것 같네요. ㅎㅎ

balmas 2007-09-15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시군요. 역시 바람구두님답게 예민한 문제의식을 갖고 계시네요. :-) 그러시다면 아마 이 책이 많은 도움이 될 듯합니다. 제가 번역해서 나중에 나올 책도 좀 도움이 될 듯하구요. ㅎㅎㅎ 너무 책 선전 위주인가요?

람혼 2007-09-15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럴수가, 안 그래도 요즘 "La crainte des masses"와 "Race, nation, classe"를 번갈아가며 열심히 읽고 있었는데, 우연찮게도 번역본이 나왔군요! balmas님, 좋은 소식에 감사드립니다. 번역과 대조하면서 보다 찬찬히 독해해봐야겠습니다.

자꾸때리다 2007-09-15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연 언제쯤 책을 읽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역자 해제는 읽어봐야겠네요.

balmas 2007-09-16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구두님/ ㅎㅎㅎ 그런 말이 있었습니까? 앞으로 더 널리 알려야겠네요. ^^;;
람혼님/ 그러셨군요. 마침 잘 됐네요. :-) 람혼님도 참 여러 방면으로 독서를 많이 하시네요. 반갑습니다. ㅎㅎ
Mravinsky님/ 그러세요. 일단 역자 해제 읽고, 관심이 더 생기면 책도 한번 사보고 하세요. :-)

열매 2007-09-19 0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많은 서문이나 해제를 읽어왔지만, 자신의 아내를--남편의 공부를 뒷바라지해주거나, 교열이나 검토,토론의 대상이었거나, 심지어 남편대신 번역을 대신해 주었을지도 모르는-- '아내 ~씨'라고 부르는 호칭은 처음 보았습니다.
보통 단순히 '아내'라거나, 짧게 이름만 호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이 분의 호칭에서는 정말 동지로서의 연대감같은 것이 애틋하게 느껴집니다.
'집밖에선 진보, 집안에선 마초'가 단순히 '진보의 이중성'에 대한 시니컬한 농담만은 아니라고 여겨왔었는데, 이 분의 호칭을 보면서 왠지 신뢰감이 생기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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