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이런 책들도 번역되어 있구나, 이런 책을 쓰는 사람들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는 한편으로는 그만큼 우리나라 신문들의 문화면이 빈곤하다는 증거고(적어도 문화면에 관한 한 우리나라 신문들은 똑같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만큼 우리 지식계의 폭과 층이 두터워졌다는 증거다. 함께 독서의 즐거움을 맛보고 싶은 책들이다.


14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인도.유럽사회의 제도.문화 어휘연구 1
에밀 벤베니스트 지음 / 아르케 / 1999년 11월
25,000원 → 23,750원(5%할인) / 마일리지 720원(3% 적립)
2003년 12월 21일에 저장
절판
<비교언어학의 고전>이라는 말로 어찌 이 책의 가치를 다 평가할 수 있을까? 서양의 사상, 문화, 역사를 공부하는 모든 사람들은 마땅히 읽고 또 읽어야 할 필독서!!! 역자의 공들인 번역이 고마울 따름이다.
인도.유럽사회의 제도.문화 어휘연구 2
에밀 벤베니스트 지음, 김현권 옮김 / 아르케 / 1999년 12월
22,000원 → 20,900원(5%할인) / 마일리지 630원(3% 적립)
2003년 12월 21일에 저장
절판

<비교언어학의 고전>이라는 말로 어찌 이 책의 가치를 다 평가할 수 있을까? 서양의 사상, 문화, 역사를 공부하는 모든 사람들은 마땅히 읽고 또 읽어야 할 필독서!!! 역자의 공들인 번역이 고마울 따름이다.
라모의 조카
드니 디드로 지음, 황현산 옮김 / 세계사 / 1998년 2월
6,000원 → 5,400원(10%할인) / 마일리지 300원(5% 적립)
2003년 12월 21일에 저장
품절

이 책은 황현산 교수의 번역 하나만으로도 꼭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게다가 디드로의 작품이고, 그것도 다름아닌 [라모의 조카]인 다음에야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열정과 이해관계
앨버트 O. 허시먼 지음 / 나남출판 / 1994년 10월
4,500원 → 4,500원(0%할인) / 마일리지 130원(3% 적립)
2003년 12월 21일에 저장
구판절판
앨버트 허쉬먼의 책은 근대 (정치)경제학의 문제설정, 또는 에피스테메가 형성되는 과정을 추적한 근대 사상사 또는 지성사의 고전이다. 이 책이 이처럼 소리소문없이 묻혀 있다는 사실은 국내 사회과학계 또는 지성사계의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이 적은 분량의 책은 우리가 근대 사상사를 보는 전혀 다른 안목을 제공해준다. 그러니 고전이라 부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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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27 21: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05-03-23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숨어계신 님, 이제야 봤습니다. ;;;
어찌하여 리스트의 댓글은 이메일로 알려지지 않는 걸까요??
저도 님이 보신 책들 중에서 많은 책을 읽지 못한 저 자신이 밉습니다. (-_-)a
그럼 앞으로 우리 서로 미워하기로 할까요??

Chopin 2007-02-26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러번 고맙습니다. 추천해 주신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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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의 문학] 여름호에 실릴 글을 한 편 올립니다. 논문은 아니고, 현대 유럽의 정치철학, 좀더 정확히

말하면 알튀세르나 푸코, 들뢰즈 또는 하버마스 이후 세대의 철학자들 중에서 국내에 그다지 많이 소개되지

않은 철학자들을 개략적으로 소개하기 위해 쓴 글입니다.

시간이 더 있고 지면의 여유가 좀더 있었다면 한 2-3명의 정치철학자들을 더 보태고 싶은데, 그렇지 못해서

이탈리아와 독일, 프랑스의 철학자 3명을 소개하는 것으로 그쳤습니다.

이 글은 아직 교정을 마친 글이 아니기 때문에, 인용은 불허합니다.

--------------------------------------------------------------------------------

마르크스주의 이후 정치의 모험 - 현대 유럽의 정치철학


 



  20세기 유럽 정치철학의 흐름이 마르크스주의의 다양한 변주의 역사였다면, 21세기 벽두의 유럽 정치철학은 역사적인 종언을 고한 마르크스주의 이후에 어떻게 지배에 맞서 저항할 것인가, 어떻게 사회의 변혁을 사고할 것인가라는 화두에 대한 상이한 응답의 시도들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현대 유럽정치철학은 근본적으로 포스트마르크스주의로 특징지을 수 있는데, 이는 달리 말하면 우리가 살펴볼 3명의 정치철학자들 중 누구도 더 이상 잉여가치의 착취 메커니즘을 정치적 지배의 핵심으로 간주하지 않으며, 또한 누구도 노동자 계급이라는 정치적 주체에 근거를 둔 정치적 변혁과 대안 사회의 구성 가능성을 믿지 않는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 대신 이들은 모두, 근대 정치 문명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통해 마르크스주의가 공백으로 남겨두었던 문제들이나 마르크스주의 자신을 포함한 근대 정치 문명 전체에 함축된 모순들을 해명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그것은 파시즘과 홀로코스트는 역사적 우연이 아니라 근대 정치 구조의 본질에서 필연적으로 파생된 결과라는 고발로 제시되거나(조르지오 아감벤), 정치란 평등의 원리에 대한 옹호라는 급진적인 선언으로 표현되기도 하며(자크 랑시에르), 또는 모든 정치 투쟁, 모든 권리에 대한 옹호 투쟁은 인정을 둘러싼 갈등과 다르지 않다는 규범적인 원리의 정초 시도로 나타나기도 한다(악셀 호네트).  

 

  따라서 이들의 이론적 작업은, 마르크스주의 이후에도 여전히 비판적 사회이론이 가능한지, 또 지배자들의 질서에 맞서고 그것을 변혁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 있는지 여부를 평가해보기 위한 좋은 시금석을 제공해준다. 현실의 가장 민감한 지점, 가장 깊고 예민한 상처를 진단하고 그 뿌리를 드러내는 것, 바로 그것이야말로 정치철학이 단지 철학의 한 하위분과에 그치지 않고, 철학과 현실의 마주침, 철학과 현실의 상호침투가 발생하는 자리로서 기능할 수 있는 바탕이라면, 이들의 작업은 오늘날 정치철학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매우 드문 성과들이라고 할 수 있다.   

 

조르지오 아감벤과 호모 사케르의 묵시록


  조르지오 아감벤Giorgio Agamben(1941~)은 국내에도 잘 알려진 움베르토 에코나 안토니오 네그리와 더불어 이탈리아가 배출한 현대의 대표적인 철학자 중 한 사람이다. 정치철학자로서 아감벤의 명성은 무엇보다도 󰡔호모 사케르Homo Sacer󰡕(1995)의 놀라운 성공에 힘입고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서양 형이상학의 역사에 관한 하이데거의 관점과 발터 벤야민의 종말론적인 폭력의 비판을 밑바탕에 두고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한나 아렌트가 제시한 인권 개념에 대한 비판, 푸코의 생명권력론, 칼 슈미트의 주권 개념 등을 비판적으로 전유하여 정치 공동체의 구조와 정치적 주체의 본성에 대한 매우 독창적인 주장을 제시하고 있으며, 이는 서양 근대정치철학의 규범적 기초 전체를 뒤흔드는 결과를 낳았다.

 

  󰡔호모 사케르󰡕의 핵심 테제는 아감벤 자신이 요약하고 있듯이,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1) 원초적인 정치적 관계는 추방/배제ban(외부와 내부, 배제와 포함이 구분되지 않는 지대로서의 예외상태state of Exception)다.

2) 주권의 근본 활동은, 원초적인 정치적 요소이자 자연과 문화, zoē와 bios의 접합의 임계(臨界)로서 벌거벗은 생명bare life의 생산에 있다.

3) 서구의 근본적인 생명정치의 패러다임은 도시가 아니라 강제수용소에 있다.

 

  이 세 가지 테제는 이 책 1, 2, 3부의 내용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우선 “벌거벗은 생명”이란 벤야민이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에서 사용한 “blosses Leben”이라는 개념에서 빌려온 것인데, 아감벤은 이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및 정치학의 논의와 직접 결부시켜 서양 정치철학을 관통하는 근본 개념으로 제시하고 있다. 아감벤이 주목하는 것은 한편으로 “비오스bios”와 “조에zoē” 사이의 아리스토텔레스식 구분법인데, 전자는 인간에 고유한 생명/삶을 가리키고, 후자는 인간, 동물, 신에게 고유한 자연적 생명/삶을 가리킨다. 아감벤에 따르면, 이러한 구분은 정치적 활동의 가능성은 오직 인간에게만 존재하며, 따라서 비오스에 놓여 있다는 고대 희랍인들의 사고를 보여준다. 다른 한편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자로서의 존재자on hē on”를 형이상학의 대상으로 설정함으로써 제1 철학으로의 길을 열어 놓았는데, 여기서 “존재자로서의 존재자”는 바로 “순수 존재”, 곧 “온 하플로스on haplōs”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 존재자들에 공통적인 삶/생명zoē을 추출해내려는 노력과 “순수 존재”를 분리하려는 노력, 곧 정치학과 형이상학 사이에는 체계적 연관성이 존재한다는 것이 드러난다.    

 

  아감벤은 벌거벗은 생명의 최초의 법적 유래를, 고대 로마법에 나오는 “homo sacer”라는 표현에서 찾는다. 호모 사케르는 “희생물로 삼을 수는 없지만, 그를 죽인다고 해서 살인죄가 되는 것이 아닌” 사람을 말한다. 희생물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은 “sacer”가 종교적 의미에서 “성스러운”을 가리키지 않음을 의미하고(신의 법에서 배제), 그를 죽이는 게 살인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호모 사케르가 “정상적인 인간”의 범주에서 제외되어 있으며(인간의 법에서 제외), 그의 삶은 “비오스”가 아니라 “조에”에 해당한다는 것을 뜻한다.

 

  아감벤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근대에 들어서 비로소 이 “조에”, 호모 사케르가 법적ㆍ정치적으로 보편적인 의미를 획득하게 되었으며, 호모 사케르의 “벌거벗은 생명”이 정치의 핵심 목표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를 보여주기 위해 아감벤은 푸코의 생명 권력의 문제설정과 아렌트의 전체주의 비판을 결합하여 󰡔인권선언󰡕(1789)을 새롭게 해석한다.

 

  그에 따르면 󰡔인권선언󰡕이 제 1조에서 “인간은 나면서부터 자유로우며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고 천명할 때의 “인간”은 인간주의적인 전통이 해석해온 것처럼 천부인권의 담지자가 아니라 “벌거벗은 생명”을 가리킨다. 곧 󰡔인권선언󰡕은 아무런 특질도 지니지 않는 추상적 존재로서의 인간, 벌거벗은 생명체가 정치의 대상이 되었음을 공표한 선언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시민들이 누리는 이러저러한 정치적 권리들은 우선 그들 각자가 인간=벌거벗은 생명체로서 주권자의 통치의 대상으로 포섭된 이후에 얻게 되는 특질들의 표현에 불과하다. 푸코가 말하듯 생명권력이 근대성의 문턱을 이룬다면, 그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다.

 

  아감벤은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수행한 “민족국가의 위기와 인권”의 관계에 대한 분석을 여기에 결부시킨다. 아렌트는 1차 대전 이후에 특히 유럽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국가의 영역 바깥으로 밀려나게 된 상황에 주목하면서, 이러한 민족국가의 위기는 동시에 인권 개념의 한계를 보여준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이처럼 국가의 바깥으로 밀려남으로써 이 사람들은 아무런 권리도 누리지 못하고 시시각각 생존의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는데, 이는 인간주의적 전통에서 가정하고 있는 것처럼 인권 개념은 특정한 정치공동체에 선행하는 천부적인 권리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는 점을 극명하게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오히려 “인간”, “벌거벗은 생명”으로서 인간은 주권적 권력에 포섭됨으로써만 비로소 인간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아감벤에게 󰡔인권선언󰡕은 근대 정치철학의 규범주의적 해석과는 정반대로 주권자의 생명권력에 대한 근본적인 예속의 선언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측면에서 아감벤은 나치즘이 근대 유럽의 역사, 더 나아가 서양 역사 전체의 흐름과 전혀 무관한 돌연변이적 현상이 아니라, 그 본질적인 잠재력의 표출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주권 개념에 대한 분석과 곧바로 연결되는데, 그는 주권 개념에 대한 해석에서 슈미트의 테제, 곧 “주권자는 법질서 바깥에 서 있지만, 그럼에도 이 질서에 속해 있는데, 왜냐하면 헌정이 전면적으로 중단되어야 하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그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라는 테제를 준거로 삼고 있다. 그가 이처럼 슈미트의 테제에 주목하는 것은 이 테제가 나치 독일이 수행한 생명정치의 핵심을 매우 정확히 드러내준다고 보기 때문이다.

 

  아감벤은 우선 나치 강제수용소의 법적 지위의 특이성에 주목하는데, 강제수용소는 나치 시대에 처음 설치된 게 아니라,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사실은 그 이전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단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는 강제수용소의 설치 및 운용에 관한 사항, 또는 좀더 일반적으로는 주권자가 국민들의 기본권을 잠정 중단시키고 “예외상태Ausnahmezustand”를 선언할 수 있는 권한에 관한 사항이 헌법에 명시되어 있었던 데 비해, 나치 수용소의 경우는 헌법에 아무런 규정이 없는 가운데 강제수용소를 설치, 운용했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아감벤에 따르면 이는 법적인 관점에서 볼 때 매우 새로운 점이다. 우선 첫째, 이처럼 명시적인 규정 없이 기본권을 정지시키고 예외상태에 돌입함으로써, 정상과 예외의 구분이 소멸하게 된다. 바이마르 헌법이 규정하는 예외상태는 정확히 헌법이라는 정상적인 법적 규범에 따라 자신의 효력을 얻게 되는 반면, 나치 법에서는 법적 규범에 대한 준거가 없이 예외상태가 성립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둘째, 이에 따라 예외상태는 실질적으로 법질서 자체가 되는데, 이 예외상태는 바로 주권자(총통)의 결정에 따라 직접 성립하기 때문에, 이제는 단지 정상과 예외의 구분이 소멸할 뿐만 아니라 법과 사실 사이의 구분도 소멸하게 된다. 하지만 아감벤이 보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나치의 특이성, “예외성”은 사실은 전혀 예외가 아니라 서양 형이상학과 정치학의 성립 이래 존재해온 잠재적 경향의 발현이라는 점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그는 “조에”와 “하플로스” 사이의 내적 연관성과 고대 로마법에서 homo sacer라는 존재에 주목하고 있는데, 나치가 정상화된 예외상태 속에서 설립한 강제수용소는 이를 가장 온전한 형태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곧 주권자(총통)의 권력은 기본권-인권의 “금지”와 이질적인 존재들의 “추방”의 권력이며, 이를 통해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은 일체의 정치적 지위와 권리를 박탈당하고 한낱 몸뚱아리로 환원되어, 그를 살해한다고 해서 살인죄가 성립하지 않는 “호모 사케르”가 되는 셈이다.

 

  더 나아가 강제수용소란 벌거벗은 생명이 정치의 대상으로 출현하는 장소들을 모두 포함하기 때문에, 이제 수용소는 나치의 유대인수용소나 소련의 정치범수용소 같은 것에 국한되는 게 아니라, 훨씬 보편적인 현상을 가리키는 개념이 된다. 예컨대 아감벤은 프랑스 공항에 설치되어 있는 난민 신청자들을 임시로 수용하는 장소 역시 일종의 수용소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공식적인 법적 기관에 넘겨지기 전까지 이 사람들은 “예외상태” 속에서 어떤 법적 지위나 권리도 지니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벌거벗은 생명체”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얼마 전에 참사를 빚은 여수의 외국인보호소 역시 이런 의미에서 아감벤이 말하는 수용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감벤의 작업은 서양 근대 정치철학의 가장 기본적인 규범적 토대인 인권의 원리에 대한 과감한 도전이자 서양 근대 문명의 가장 깊은 상처 중 하나인 홀로코스트에 대한 혁신적인 재해석이라는 점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하지만 아감벤의 정치철학은 그가 원용하는 철학자들에 대한 해석의 타당성 여부를 둘러싼 논란들은 제쳐둔다 하더라도, 정치적 행위를 위한 규범적 기초의 여지를 지나치게 축소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가령 그는 법과 폭력을 구분 불가능한 것으로 제시하고 있고, 나치즘 같은 전체주의와 현대의 서구 자유주의를 본질적으로 등가적인 것으로 간주하며, 나치의 강제수용소와 현대의 난민 보호소 등을 동일시하고 있는데, 그럴 경우 과연 어떠한 정치적 행동이 가능할까, 또 어떤 정치적 목표를 추구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악셀 호네트와 인정 투쟁


  아감벤이 근대성(또는 더 나아가 서양 역사 전체)의 부정적인 경험에 대한 성찰에서 출발한다면, 독일 비판이론의 제 3세대 대표자로 불리는 악셀 호네트Axel Honneth(1949~)의 “인정투쟁Kamp um Anerkennung” 이론은 반대로 근대성이 이룩한 핵심적인 성과, 곧 계몽주의 이래 서양 사회가 이룩한 합리적ㆍ도덕적 진보에 대한 긍정에 뿌리를 두고 있다. 

 

  호네트의 인정투쟁 이론은 하버마스가 제안한 이론적 전회, 다시 말해 주체 중심적인 철학에서 상호주관성 철학으로의 전회에서 출발한다. 곧 이들에게 주체는 타인들과의 관계 이전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주체들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형성되며, 주체가 지닌 언어적ㆍ실천적ㆍ반성적 자율성은 상호주관적 규준들을 내면화함으로써 형성된 산물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호네트는 하버마스의 상호주관성이 지나치게 보편적 화용론에만 의지하고 있으며, 다른 종류의 규범적 토대들을 간과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곧 주체들 사이의 상호주관적 관계는 언어적 소통을 통해서만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정서적 관계 및 구체적인 욕구들을 포함하는 주체들의 정체성의 실현 과정을 포함하고 있는데, 하버마스의 이론에는 이러한 차원에 대한 고려가 빠져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하버마스는 구체적인 사회적 투쟁들 속에 담겨 있는 규범적 쟁점들을 충분히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고 본다.

 

  하버마스 이론의 이러한 난점 내지 공백을 보완하기 위해 지난 1990년대 이래 호네트는 헤겔 철학에서 유래한 인정투쟁 이론을 발전시켜왔으며, 이는 그가 하버마스의 이론적 그늘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정치철학자로 부상하는 데 중요한 발판을 마련해주었다. 호네트의 출발점은 개인이 자신의 정체성을 실현하는 데서나 사회가 성립하는 데서 주체들 사이의 상호 인정 관계가 핵심적이라는 데 있다. 곧 한 개인이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그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가치를 긍정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러한 자기 긍정은 이 개인에 대한 타인의 인정을 통해서 형성되고 또 그것을 통해 지속적으로 유지ㆍ발전될 수 있다.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해명하기 위해 그는 인정의 세 가지 차원을 구별한다. 곧 한편으로는 엄마와 아이나 연인들 간의 사랑과 상호배려에서 표현되는 정서적 차원의 인정의 관계가 있고, 또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다른 성원들을 동등한 법적 주체로서 인정하고 배려하는 법적 인정의 관계가 존재하며, 분업적으로 조직된 사회 단체 내부에서 동료들에 의한 사회적 평판이라는 인정 관계가 존재한다. 이 세 가지 형태의 인정은 각각의 개인들이 하나의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주체로서의 정체성을 실현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다. 그리고 각각의 주체들의 정체성 형성에는 역시 독립된 주체로서의 타인들의 인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는 또한 상호주관적인 사회화의 조건으로서도 기능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인정관계의 정치적ㆍ사회적 함의는 어떤 것인가? 호네트가 주목하는 것은 인정의 반대, 곧 무시의 경험이다. 인정이 개인의 정체성 형성 및 사회적 유대관계의 형성에서 본질적인 역할을 수행한다면, 역으로 개인이 타인들에게 무시당하는 것은 그 개인의 정체성 및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다. 따라서 타인으로부터 자신이 기대한 만큼 또는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만큼 인정받지 못하는 개인은 그에 대해 저항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무시가 특수한 한 개인에 대해 우발적인 방식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집단에 대해 구조적이고 반복적으로 일어나게 되면, 이는 곧바로 사회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가령 식민지 주민들이 정복자들에게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나, 소수 인종, 소수 종족들이 한 사회의 지배 인종, 종족들에게 멸시받고 차별받는 것, 또는 우리나라의 경우를 예로 든다면 조선족이나 동남아시아 출신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차별 대우를 받고 무시당하는 것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들이 이러한 멸시와 차별대우, 따돌림 등에 맞서 저항하고 투쟁할 때 인정투쟁은 정치적 투쟁으로서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인정투쟁 이론은 피지배자들이 지배에 맞서 저항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이며, 왜 그것이 합당한 규범적 근거를 지니고 있는지 해명해줄 수 있으며, 역으로 어떤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인지 아닌지를 평가할 수 있는 척도도 제시해줄 수 있다. 각각의 사회 성원들이 억압 없이 자유롭게 자신의 정체성을 실현할 수 있는 사회는 건강하고 정의로운 사회인 반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억압하는 사회 또는 특정한 집단의 정체성을 기준으로 다른 집단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강제하는 사회는 병리적이고 부당한 사회로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호네트의 인정투쟁 이론은 가령 영미권에서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나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 등이 발전시킨 “인정의 정치학”보다 좀더 규범적이고 도덕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의 이론은 1980년대 다문화주의와 정체성의 정치의 맥락에 따라 전개된 인정의 정치학과 달리 적절한 인정을 받으려는 인간의 욕구는 인간의 정체성 형성에 본질적이며, 따라서 이는 초역사적ㆍ초문화적인 규범적 기초라는 관점을 견지하고 있다.  

  

  호네트의 인정투쟁 이론은 하버마스의 화용론 중심의 상호주관성 모델을 인간학적으로 확장했을 뿐만 아니라, 무시당하고 억압받는 피지배자들의 부정적 경험을 자신의 비판이론의 원천으로 삼으면서 비판이론이 지닌 해방론적 함축을 잘 살리고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이러한 해방론적 함의에도 불구하고 정작 호네트 자신은 인정투쟁 이론이 지닌 정치철학적 측면들을 발전시키지 않은 채, 인정투쟁 이론의 규범적인 측면을 좀더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호네트의 작업에서는 인정투쟁 이론이 사회구조 또는 사회제도들의 형성과 개조, 변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 찾아보기가 어렵다. 따라서 인정투쟁 이론이 비판이론의 진정한 계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정치적ㆍ사회적 차원에 대한 논의를 보완ㆍ확장할 필요가 있다. 

 

  더 나아가 호네트는, 스승인 하버마스와 마찬가지로 서양 근대 문명의 가장 어두운 측면, 곧 파시즘과 홀로코스트에 대한 적절한 이론적 해명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얼마간 맹목적이다. 한나 아렌트 이래 또는 비판이론의 대표자 중 한 사람인 아도르노 이래 현대 철학자들 중 상당수가 근대성에 내재한 도착성의 뿌리를 해명하는 것을 자신의 본질적인 과제로 삼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인정투쟁 이론이 정치철학으로서의 이론적 완결성을 갖기 위해서는 이 점은 반드시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자크 랑시에르와 평등의 원리로서 정치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 철학계에서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1940~)라는 이름은 오랫동안, 스승인 알튀세르에 대한 지적 반역을 감행한 인물로 기억되어 왔다. 1965년 알튀세르와 그의 제자들이 함께 저술한 저 유명한 󰡔“자본”을 읽자Lire le Capital󰡕에 공저자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가, 1974년 󰡔알튀세르의 교훈La leçon d'Althusser󰡕이라는 자신의 첫 번째 저서에서 알튀세르의 엘리트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으로 “독립선언”을 했던 만큼 이러한 평판은 얼마간 불가피한 것이었다. 하지만 랑시에르는 1980년대부터 󰡔무지한 스승Le maître ignorant󰡕(1987), 󰡔불화La mésentente󰡕(1995) 같은 독창적인 저작들을 발표하면서 알튀세르의 그늘에서 벗어나 곧바로 현대 철학의 핵심 인물로 떠올랐다.

 

  랑시에르의 정치철학은 하나의 근본적인 통찰, 곧 정치는 평등의 원리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통찰에 대한 체계적인 탐구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랑시에르는 “정치la politique”와 “치안/통치la police”를 구별하면서 출발한다. 치안/통치는 한 사회를 위계적으로 조직하고 통치하는 구조 일체를 가리키며, 따라서 지배자와 피지배자, 지식인 내지 철학자와 대중 사이의 근원적인 불평등을 가정한다. 반면 정치는 모든 사람은 동등하며, 누구나 다 동등한 능력과 자질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긍정한다. 심지어 지적인 능력에서도 모든 사람은 동등하다. 이런 의미에서 정치는 근본적으로 민주주의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반대로 철학은 한 사회의 구조와 성립 근거를 밝히고 그것을 가장 합리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원리를 해명하는 것, “치안/통치”를 확립하는 것, 곧 위계와 지배를 정당화하는 것을 자신의 과업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랑시에르는 “정치철학”이란 용어모순이며,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정치와 “치안/통치”, 근원적인 평등의 원리와 근원적인 불평등의 질서 중에서 우선하는 것은 바로 정치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불평등을 가정하는 “치안/통치”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지배자는 피지배자들에게 지배자로서 인정을 받아야 하는데, 이는 피지배자들이 지배자를 지배자로서 인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 지배자와 근원적으로 동등하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설적이게도 근원적인 불평등을 전제하고 있는 “치안/통치”의 질서는 근원적인 평등의 원리를 자신의 존립의 기초로 삼고 있는 셈이다.

 

  랑시에르는 이러한 역설적인 상황을 “잘못/왜곡tort”이라는 중의적인 개념으로 표현한다. 이것이 (도덕적으로) 잘못인 이유는 “치안/통치”의 질서는 지배-피지배 관계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만, 사실 “치안/통치”는 지배와 피지배의 구별이 근원적으로 근거가 없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평등의 원리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는 또한 “왜곡”되고 “뒤틀린” 것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공동체의 성원들은 모두 동등함에도 불구하고, 또 그러한 동등성 때문에 비로소 “치안/통치”가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치안/통치”의 질서는 사회 성원들에게 자원과 권한을 불균등하게 배분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치안/통치”의 질서에 대해 저항하는 것, 이를 전복시키거나 변혁하는 것은 불가능한가? 이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서는 제 3의 용어, 곧 “정치적인 것le politique”이라는 용어의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랑시에르는 정치와 “치안/통치”가 조우하는 장소, 곧 “치안/통치”의 잘못과 왜곡이 드러나는 장소를 “정치적인 것”이라고 부른다. 정치적인 것은 기존의 “치안/통치”의 질서에서 배제되어 있는, 이러한 질서 속에서 아무런 몫도 갖지 못한 자들이 자신의 몫을 주장하면서 저항할 때, 자신의 목소리를 드러내면서 “치안/통치”의 균형잡힌 질서를 뒤틀고 균열을 낼 때, 그것의 잘못을 보여줄 때 나타난다. 따라서 “정치적인 것”은 고정된 불변의 장소, 위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몫 없는 자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등장할 때마다, “치안/통치”의 도덕적 잘못을 드러내고 이로써 그 존재론적 질서의 왜곡을 보여줄 때마다 형성된다. 아니 그러한 보여줌의 사건 자체가 바로 정치적인 것의 자리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랑시에르에게는 “정치적 주체” 역시 어떤 객관적인 속성에 따라 (예컨대 노동자 계급인지 여부) 정의되는 것이 아니다. 아테네의 자유 빈민들(“데모이demoï”)이 민주주의의 실시를 요구하면서 나섰을 때 그들이 곧 정치적 주체였으며, 또 1871년 파리에서 노동자들이 봉기했을 때, 1968년에 학생-노동자들이 “우리 모두는 독일의 유대인들이다”라고 외치며 거리에 나섰을 때, 그들 역시 정치적 주체들이었다. 그에게 정치적 주체란 어떤 존재론적 규정에 따라 정의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기존의 “치안-통치”의 질서에 따라 규정된 존재론적 정체성에서 벗어나 정치적 투쟁이 전개될 때 비로소 정치적 주체가 등장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랑시에르는 “주체화”를 “탈정체화”, “탈분류화”의 과정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볼 때 그가 현재의 자유민주주의에 대해 비판적일 것이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랑시에르는 의회주의적인 자유민주주의를 “탈민주주의post-démocratie”라고 부른다. 곧 “치안-통치”의 “잘못/왜곡”을 드러내줄 수 있는 여지가 대부분 사라지고 정치는 다양한 사회경제적 집단들의 산술적 합의(“선거”)로 환원되는 곳, 전문가들과 정책입안자들이 통치하는 곳이 바로 현재의 자유민주주의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그가 자유민주주의(또는 근대성) 일체를 부정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감벤이나 알랭 바디우와 달리 랑시에르는 자유민주주의 제도가 지닌 긍정적인 함의들을 인정하는데, 이는 이 제도들이 바로 과거 정치적 주체들의 투쟁의 산물이며, 그러한 투쟁을 자기 내부에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제도들 덕분에 이전에 일어났던 정치적 투쟁의 사건, 민주주의의 사건은 언젠가 다시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게 된다.

 

  따라서 랑시에르에게 민주주의는 어떤 특정한 제도, 어떤 특정한 정치유형과 동일시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모든 정치 제도 속에 그것을 가능하게 하고 평가할 수 있게 해주는 규범적 원리로 내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랑시에르의 정치철학이 지닌 강점은 바로 이처럼 혁명적 전통의 유산을 보존하면서 동시에 민주주의의 규범적 측면을 함께 유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반면에 정치를 사회적 질서와 대립시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정치에 관한 사고를 실재의 객관적 조건에 대한 사회과학적 탐구와 근본적으로 절연시키고 있는 것은 랑시에르의 철학이 지닌 중대한 문제점 중 하나다. 게다가 이는 민주주의적 제도들에 대한 긍정적 평가와도 얼마간 모순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평가는 제도들에 대한 객관적 규정의 가능성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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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tournelle 2007-05-11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 명의 철학자 모두 알고 있어서 반갑네요. 아감벤과 랑시에르는 최근에 가장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철학자이지만, 호네트는 그의 스승 하버마스와 마찬가지로 그닥 끌리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에로이카 2007-05-11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름만 들었을 뿐 뭐하는 사람들인지는 몰랐는데 저 같은 사람들이 많이 배울 수 있는 좋은 글인 것 같습니다. 국가, 민주주의, 외국인 (노동자)에 대해 요즘 이 생각 저 생각 많았는데, 좋은 참고가 될 것 같습니다. (공부 열심히 해야 하겠다는 마음이 들게 한 "훌륭한!" 글입니다.)

질문 하나만 드릴께요. 호네트의 인정투쟁을 다룬 부분에서, 인정투쟁의 존재는 한 사회가 정의로운가 그렇지 않은가를 나타내는 척도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발마스님의 해석인가요, 아니면 호네트의 말인가요?

노무현 정부 이후 더욱 활성화된 우파들의 정치적 동원도 나름대로 무시에 대한 '인정투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닌지요? 만약 그렇게도 볼 수 있다면, 인정투쟁의 존재가 사회의 정의로움을 판가름하는 기준이 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민주주의는 민주화 세력이건 반민주화 세력이건 "시민(-주체)"라면 동일한 권리와 의무를 상정하는 것이고, 따라서 독재 시대의 끄나풀들이 상대적으로 민주화된 사회에서 "인정투쟁"(이라고 간주될 수 있는 것)에 참여한다면, 이것은 그 사회의 정의로움 여부와는 별 상관 없는 것 아닌가요?

분명 제가 든 이 "우파들의 준동"은 극단적인 예일 것입니다. 이주노동자들의 인정투쟁은 세계 여러 곳에서 오랜 역사를 갖고 있고, 오늘날 한국에서도 시작되고 있고, 이는 발마스님의 글에서 말씀하신 논지를 지지하는 사례일 것입니다. 제가 "인정투쟁"이 뭔지 잘 몰라 무식한 질문을 한 것일 지도 모르지만, 그냥 궁금해서 여쭤봤습니다. ^^

balmas 2007-05-13 0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화과나무님/ 잘 보셨다니 다행입니다. 아감벤과 랑시에르를 좋아하는 분들은 하버마스나 호네트를 좀 덜 좋아하는 경향이 있죠. 그 반대도 마찬가지구요. ㅎㅎ 그런데 어쨌든 이 사람들 모두 중요한 이론적 작업을 하고 있고 또 그만큼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에, 공부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간과할 수는 없겠죠. ㅋㅋ 너무 "모범답안"인가요? ^^;;
에로이카님/ ㅎㅎ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다행입니다. "훌륭한 글"이라는 말씀은 그냥 주례사 같이 들리는데요. ^^;
그리고 적절한 질문을 제기해주셨는데요, 사실 그런 문제가 제기될 수 있죠. 그래서 호네트도 최근 출간된 논문집에서 이 문제를 실제로 다루고 있습니다. 저는 에로이카님의 질문을, 인정투쟁이라는 기준은 형식적 민주주의와 별로 다를 바가 없는 게 아니냐라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이 질문에는 몇 가지 측면에서 답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보편적인 원칙일수록 얼마간 구체적인 쟁점들에서는 형식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겠죠. 가령 "인권"이라는 원리 역시 지극히 다양한 정치적 목적들을 위해 이데올로기적으로 동원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죠. 이건 인정 또는 인정 투쟁이라는 원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데올로기적인 남용이나 오용의 문제를 그냥 넘겨버릴 수는 없죠. 요컨대 "그릇된" 인정과 "참된" 인정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할 텐데, 호네트는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들이 인정에 대한 요구에서 제기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들이 어떤 부당한 무시를 당했다고 말하는지, 그들이 인정을 요구하면서, 또는 타인을 인정한다고 말하면서 제시하는 기준이나 원리가 실제로 제대로 지켜지거나 충족되고 있는지 평가해보면 된다는 것이죠. 가령 반민주주의 세력이 자신들의 인정의 권리를 주장할 때 무엇을 주장하는지 생각해볼 수 있겠죠. 표현의 권리를 이야기한다면, 과연 그들의 표현의 권리가 침해를 당했는지 따져보면 될 것이고, 이런저런 정치적 억압에 대해 불평한다면, 과연 그들이 부당한 억압을 당했는지 살펴보면 되겠죠.
반대로 자본가들 또는 기업가들이 노동자들이나 자신의 직원들을 이런저런 목적을 위해 동원하면서 제시하는 약속이나 보상 같은 게 있을 텐데, 이것 역시 "인정"의 한 형태가 되겠죠. 이 경우에는 과연 그들이 약속한 것들이 제대로 충족되었는지, 그것이 노동자들이나 직원들의 정체성 실현을 위해 충분하고 정당한 조건들이 되는 것인지 따져볼 수 있겠죠. 만약 그것들이 제대로 충족되지 않는다면, 이들이 제기하는 인정이라는 것은 사실 이데올로기적인 인정, 그릇된 인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호네트는 인정의 원리가 한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인지 평가할 수 있는 구체적인 척도로 기능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걸로 충분할까요? ㅎㅎㅎ 그렇지 않다고 볼 수 있는 여지도 있을 텐데요, 그건 다음에 또 기회가 된다면 이야기해보도록 하죠.

에로이카 2007-05-13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 상세한 답변 감사합니다. ^^ 맞아요. 말씀하신대로 제 생각에는 "그릇된" 인정과 "참된" 인정의 구분이 아주 중요하거든요. 그런데 문제는 양자의 구분이 초기 알튀세르식의 과학(참)/이데올로기(거짓) 같은 분할과 같은 형태로 가능한가 하는 거거든요. 인정 요구의 진정성을 "따져보는" 과정 끝에 내리는 답이 이렇게 투명할 것 같지는 않고, 또 그 투쟁에 얽혀 있는 이들이 모두 동의하지 않을테구요. 그 과정 자체가 정치적 투쟁(특히 서로 다른 진리-주장들 간의 충돌)을 동반하는 것 아닌가요? 이걸 인정투쟁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다시 앞의 얘기로 돌아가, "참된 인정"과 "그릇된 인정" 간의 구분은 상대적, 정치적인 것이 다시 되어버리겠지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는데요... 제 머리 속의 원을 나선형으로 바꿔주실 수는 없을지? ^^

아, 또 이렇게 질문 드릴 수도 있겠네요. 인정투쟁이 없는 사회도 있는가? 없다 있다가 아니라, 적다 많다로 얘기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훌륭한" 글이라고 한 것은 주례사 아니구요... 정말 이 글을 보니까, 철학 공부를 해야할 필요와 욕망이 느껴져서요... 철학 쪽은 아주 오랫동안 안 봤거든요. 그런데 이 댓글 쓰면서, 무척 머리가 아파져 과연 내가 그걸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기도 하네요... ㅎㅎ

balmas 2007-05-14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로이카님/ ㅎㅎ 마지막 질문부터 답변을 해보자면, 인정투쟁이 자아들의 정체성 형성과 분리할 수 없게 결부되어 있다면, 정의상 인정투쟁이 없는 사회는 없겠죠.

그런데 이런 질문도 가능합니다. 왜 그냥 "인정"이 아니라, "인정투쟁"일까? 다시 말해 "인정"이 상호주관적인 사회성의 필연적인 형식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평화롭게(?), 조화롭게 서로서로를 인정해주는 사회를 생각해볼 수는 없는 것일까?

“인정투쟁”이라는 용어 자체가 이 질문에 대한 호네트의 답변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해줍니다. 곧 "인정"이 아니라 "인정투쟁"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회에 대한 그의 관점은 기본적으로 "갈등적"이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더욱이 이러한 갈등, 투쟁을 통해서 인정의 진전이 이루어질 수 있으니까(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갈등성은 오히려 긍정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죠.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러한 갈등이나 투쟁이 동등한 두 주체들 사이에서 벌어질 수도 있지만, 또한 비대칭적인 주체들, 집단들 사이에서도 일어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갈등이나 투쟁의 필연성의 이유를 좀더 잘 이해할 수 있을 듯합니다.

에로이카님은 “참된” 인정과 “그릇된” 인정의 구분을 과학과 이데올로기에 대한 알튀세르의 구분과 비교하셨는데, 글쎄요, 알튀세르의 구분법에 관한 논의는 차치해둔다고 하면, 이 질문에 대해서는 이렇게 답변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우선 “참된” 인정과 “그릇된” 인정을 “확연히”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겠죠. “확연히” 구분한다는 것을, 모든 당사자들이 객관적 또는 중립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제 3의 기준을 전제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그럴 겁니다. 하지만 인정투쟁은 대개 사회적으로 공유되는 어떤 척도나 규범을 상정한 가운데 일어나기 때문에, 인정의 요구들이 정당한지 아닌지 평가할 수 있는 여지는 있겠죠. 물론 이러한 평가를 거부하고 강압적으로 인정의 요구들을 억누르거나 무시할 수 있을 텐데, 상당수의 인정투쟁이 폭력적인 갈등을 동반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겠죠.

성흘기님/ 처음 뵙는 분인 것 같은데 반갑습니다.(그런데 아이디가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네요. ^^;;) 글쎄요, 이 사람들이 현대 철학의 거물인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하는데, 좀 다른 의견이신지 모르겠습니다. ㅎㅎㅎ 랑시에르와 부르디외를 비교하는 Nordmann의 책은 저도 읽어봤는데, 불과 15매 정도의 분량에서 굳이 부르디외까지 언급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종종 들르시길. :-)

에로이카 2007-05-14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 연이은 친절한 댓글 감사합니다. ^^ 앞으로도 좋은 글들 많이 올려주세요.

비로그인 2007-06-06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아...나한테는 너무 어려운 글 이기에 읽다가 졸뻔 했다..;;

위험해...;;ㅎ
 

 

 

'시간강사 제도', 근본적인 기로에 서다
  [김명인 칼럼]'겨우 존재하는 사람들'과 대법원 판결
  2007-04-16 오전 10:34:28

  세상에는 겨우 존재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들은 주목받지 못하는 주변인들이며 존재하지만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유령과 같은 불안한 존재들이다. 이를 테면 고학력사회 속에 섬처럼 살아가는 고졸자, 혹은 그 이하의 저학력자들이 그렇고, 농촌 노인들이 그렇고 점점 늘어가는 실업자들이 그럴 것이다. 그들 역시 이 사회의 구성원들이고 중요한 노동력이자 생산력 기반이지만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취급되고 있다. 하지만 그들도 이 지상에 살아가고 있으며 그들의 물질적, 정신적인 소외와 고통은 우리 사회가 언젠가는 갚아야 할 잠재적인 빚으로 쌓여가고 있다.

'겨우 존재하는 사람들', 대학 강의의 40%를 책임 지다
  
  여기 또 하나의 겨우 존재하는 인간군이 있다. 그들은 시간강사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2005년의 통계에 의하면 한국에는 약 5만 명의 시간강사들이 존재하며 한국 대학의 시간강사 의존율은 40퍼센트라고 되어 있다. 다른 말로 하면 5만 명의 시간강사들이 현재 한국의 대학교육의 40퍼센트를 감당하는 고등교육의 중추적 주체로 활약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대학에서 출석부를 들고 강의실에 들어가는 사람들 열 명 중의 네 명이 그들인 셈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대학에서 그들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학력과 학식, 그리고 인격에 관계없이 그 점에서 시간강사는 누구나 똑 같다. 강의실에서는 엄연히 '교수님'이지만 강의실 바깥에 나서는 순간 그들은 마치 허방을 밟는 것처럼 존재의 불안정 상태에 빠지게 된다.
  
  대학에 따라서는 이들에게 휴게실이나 연구실을 제공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겉치레에 그치고 교직원식당을 이용할 수 있게 하기는 하지만 도서관 이용은 제한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약간의 권리라는 것도 학기 중에 한할 뿐 그들이 아무리 한 대학에 오래 출강했다고 하더라도 방학 중에 그들의 대학 내 신분은 제로 상태가 된다. 대학에서 그들의 사회적 존재는 교수-교직원-학생-비정규 일용직(경비, 청소직 등)의 다음 서열로 최하층에 속한다. 그들은 계절적 일용잡급직인 것이다. 학기 중에 주어진 시간만큼 강의를 하고 그에 해당하는 강사료를 받는 것, 오직 그것만이 그들이 대학과 맺는 관계의 전부이고, 그 외의 부분에서 그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강의실을 나서는 순간 대학은 그들을 철저히 타자로 만든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강의가 끝나자마자 보따리를 싸서 이 낯선 공간을 어서 떠나는 일뿐이다.
  
  그들이 대학 안에서만 불안한 것은 아니다. 대학 밖에서도 그들의 불안은 그대로 이어진다. 시간강사라는 직업(?)은 그저 명예직이고 어엿한 본업이 따로 있는 사람들은 예외이지만 강사료를 기본수입으로 하여 생활을 꾸려나가고 있는 대부분의 시간강사들의 대학 밖 사회 속에서의 존재 형태는 좋게 말해서 프리랜서고 솔직히 말하면 비정규직의 최악의 형태인 시간제 일용노동자(아르바이트)에 불과하다. 그 불안한 시간강사 직조차 안정적으로 보장되어 있지 못해서 그들은 그 어떤 생활상의 장기계획도 세울 수 없다. 그저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한 학기 두 학기를 근근히 살아 나갈 뿐이다. 간혹 주 20시간 이상, 심지어는 30시간이 넘는 살인적인 강의를 하는 이른바 '강사재벌'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재벌은 커녕 가족의 생계를 전적으로 강의에 의존하는 눈물겨운 슈퍼맨들이며 그런 기회 역시 결코 안정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저 할 수 있을 때, 자리가 있을 때 거의 필사적으로 벌어두자는 것이다. 그런 그들의 삶은 불안에 피폐까지 더한 것이 된다.
  
  '시간강사' 제도, 근본적인 위기에 봉착하다
  
  며칠 전 대법원에서 시간강사들을 근로자로 인정해야 하고 그에 따라 산재보험료를 납부하는 것(대학에서 시간강사들의 산재보험료 일부를 부담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 재판의 원고는 일부 사립대학들로 그들은 시간강사가 학교당국의 지휘・감독을 받지 않고 고정급여를 받지 않으며 소속이 없기 때문에 근로자로 볼 수 없다는 명분을 내세워 시간강사의 근로자성을 부인하고 그에 따라 대학은 그들을 위한 산재보험료 부담의무가 없다는 논리를 폈다고 한다. 그러나 대법원은 바로 그 논리야말로 그들의 열악한 비정규직적 특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는 반론을 세워 원고 패소 판결을 이끌어냈다고 한다.
  
  시간강사의 근로자성(노동자적 본질)을 명확히 한 이 판결은 그러나 시간강사 문제의 매듭을 지은 판결이 아니라 시간강사 문제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판결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의 시간강사 제도는 시간강사는 근로자가 아니라는 허구적 전제 위에서 오래도록 유지되어 온 제도이기 때문에 시간강사도 근로자라는, 그것도 아주 열악한 노동조건에 시달리고 있는 비정규직 근로자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확인되고 그 전제 아래 시간강사 문제를 보아야 한다고 하면 그 제도는 근본적인 위기에 봉착하게 되기 때문이다.
  
  시간강사가 조만간 전임교수가 되기 위한 일종의 도제 혹은 연수과정이던 때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며 지금도 일부 명문대나 지방 국립대 등의 일부 학과의 경우 그런 관행이나 인식이 아직 현실성이 있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조만간 전임교수가 될 예비교수로서의 시간강사는 아무리 근로조건이 열악하고 강사료가 적다고 해도 일종의 통과의례 삼아 시간강사 기간을 감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런 좋은 시절은 다 지나갔다고 해야 할 것이다.
  
  대학의 수도 늘어나고 대학생 수도 늘어나 대학이 과거의 엘리트 교육기관이 아니라 대중교육기관으로 변신하게 되면서 대학은 늘어나는 교육수요의 처리를 저임금 시간강사들에게 분담시키게 되었고, 이는 점점 하나의 관행이자 제도로 굳어져 버리게 되었다. 그 결과 5만의 시간강사가 전체 대학교육의 40퍼센트를 감당하게 되는 데까지 이르렀다. 수천만 원에 이르는 대학교수 1인의 연봉으로 최소한 서너 명의 시간강사에게 연간 강사료를 지급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는 대학들이 이 좋은 제도를 포기할 이유가 없다. 대학들은 시간강사들에게 '조만간 전임교수가 될 예비교수들로서 당신들을 고용하는 게 아니라 돈을 주어 가면서 오히려 교육훈련을 시켜주는 것'이라는, 결국 '시간강사는 노동자가 아니다'는 이데올로기 아래서 사실은 학문후속세대들의 고급 학술・교육 노동력을 고도로 착취해 왔던 것이다. 그리고 대학원의 난립과 학위의 남발로 한편으로는 비싼 대학원 등록금을 받으면서 저임금 시간강사 예비군을 넉넉하게 확보하는 정책 또한 지속해 왔다.
  
  그 결과 학문후속세대로서의 시간강사들은 저임금과 불안한 생활에 쫓겨 창의적 연구와 학문선배들에 대한 선의의 학문적 경쟁의 기회를 잃어 가고, 전임교수들은 전임교수들 대로 전임동료들의 항상적 부족으로 교육, 연구, 행정부담의 3중고에 시달려 대학교육의 질은 점점 악화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런 조건 속에서 세계적인 대학을 만들겠다는 슬로건은 공염불이 될 수밖에 없다. 대학이 지성의 전당이라는 말은 이젠 지나가건 소도 웃을 말이 되어 버리고 지성의 깃발이 펄럭임을 멈춘 곳에서 경쟁적 시장주의가 대신 준동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그놈의 경쟁력'을 온전히 갖추기 위해서라도 지금과 같은 시간강사 제도라는 학문후속세대에 대한 노골적 착취제도는 근절되지 않으면 안 된다. 경쟁에는 '생산적 불안'이 필요한 법인데 시간강사라 불리는 수많은 학문후속세대들이 생산적 불안에 사로잡힐 출발선에조차 서지 못하고 '생존적 불안'의 바다 위를 떠도는 상황에서 한국 대학의 세계적 경쟁력 싸움은 처음부터 지는 싸움일 수밖에 없다.
  
  대학 사회의 '비열한 안정' 뒤흔들 투쟁이 다가오고 있다
  
  시간강사는 비정규직 근로자다. 대학과 국가가 이 명백한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일이다. 대학과 국가에게는 이 문제에 관한 한, 두 가지 선택밖에 없다. 하나는 시간강사 제도를 폐지, 혹은 최소화하여 현재의 시간강사들의 대다수를 일정한 유예기간과 평가과정을 거쳐 정규직 교육노동자, 즉 전임교수로 광범하게 채용하면서 대학교육체계를 정상화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시간강사 제도를 유지하되 그들에게 전임교수들에게 버금가는 당당한 교육노동자로서의 지위와 대우, 그리고 복지혜택을 제공하여 그들의 불안한 삶을 종식시키는 것이다. 또한 거기에는 당연히 현재의 대학원 교육체계와 학위부여 제도의 획기적 변화도 수반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이번 대법원 판결과 함께 이제 시간강사 문제는 하나의 사회적 이슈로 다시 떠오르게 되었다. 특히 올해 7월부터 비정규직 보호법이 시행되면 2년 뒤 시간강사들 역시 해고냐 정규직화냐 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이 상태로 간다면 지금은 대학사회의 그늘에서 불안 속에 그저 겨우 존재해 왔던 그들은 더 열악한 존재의 불안상이라는 나락으로 떨어져버릴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될 경우 그들이 이제 더 이상 '겨우 존재하는' 상태에 머물기를 거부하고 그들의 희생 위에 존재해 온 대학사회의 비열한 안정을 뒤흔드는 투쟁을 통해 자신들의 사회적 존재감을 회복하는 길로 나서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 것인가.

   
 
  김명인/인하대 교수,<황해문화>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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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런스 2007-04-17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계절적 일용잡급직..남의 일이 아니군요.

마늘빵 2007-04-17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간강사들 제대로 대접해줘야합니다. 정말. 대학에 있는 교수들과 시간강사의 차이는, 정규냐 비정규냐의 차이 밖에 없다고 봐요.

balmas 2007-04-18 0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싸이런스님/ ㅎㅎㅎ 남의 일이 아니죠.
아프락사스님/ ㅎㅎㅎ 글쎄 제대로 대접해줘야 하긴 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법을 고치거나 해서라도 현행 상태를 유지하려고 하지 제대로 대접해주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쩝 ;;;
 

 

 

2007년 04월호 (통권 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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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04월 (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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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 드잘레이, 브라이언트 가스 『궁정전투의 국제화』 | 오창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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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주의 국가, 반인종주의 대응: '문화'와 '인권'의 허점 | 앨러나 렌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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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經(시경)』을 보는 관점 | 문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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