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여수 참사] “악취·추위속의 공포…4일이 4년 같았다”
입력: 2007년 02월 12일 18:23:50
 

서울의 한 섬유공장에서 일하던 방글라데시인 ㅇ씨(36). 2005년 5월 차별과 학대를 견디다 못해 이주노동자 노조를 구성하려다 갑자기 들이닥친 출입국관리소 직원들에 의해 붙잡혔다. 그가 수용된 곳은 국내에서 가장 수용환경이 좋다는 청주보호소. 7명 정원의 방에 11명이 수용됐다. 밥은 양이 부족했고 육류는 없었다. 1주일에 닭고기 1~2조각이 전부였다. 수용기간 동안 체중이 4~5㎏ 빠졌다. 하루 중 운동시간은 딱 10분. 없는 날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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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기사들은 아래 주소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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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발간된 [근대철학] 창간호에 수록된 글을 한 편 올립니다.

이 글은 원래 제 학위논문에서 좀 미진하게 다루었던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쓴 것인데,

쓰다가보니, 책 한 권으로 확장해도 괜찮은 주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국내는 물론이거니와

외국에서도 이 문제에 관한 논의는 상당히 드문 편인데, 잘 발전시켜보면 철학사적으로, 또 

스피노자 철학 체계에 대한 연구로도 나름대로 의미 있는 기여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뭐, 당분간은 다른 주제에 매달려야 할 처지라서 당장 이 문제를 진척시키기는

좀 어렵겠지만(사실 참고해야 할 역사적인 문헌들이 만만치 않아서 쉽게 끝낼 수 있는 일도 아니긴 하지만),

어쨌든 가까운 장래에 본격적으로 논의를 발전시키고 싶군요.

이 글은 작년 여름에 서양근대철학회에서 발표했던 글을 좀 다듬은 것인데, [근대철학]에는

분량 제한이 있기 때문에 축약본이 실렸습니다. 혹시 이 글을 인용하거나 논의 대상으로 삼고 싶은

분들은 [근대철학]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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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공통 통념 개념 I



1. 머리말


  이 글은 스피노자의 notio communis, 또는 (스피노자가 이를 주로 복수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notiones communes 개념의 기원과 의미, 그리고 번역의 문제를 검토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notio communis 또는 “공통 통념” 개념1)은 스피노자 철학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우선 “인식론”의 측면에서 중요한데, 왜냐하면 이 개념은 {윤리학} 2부에서 부적합한 인식에서 적합한 인식으로의 이행을 설명하는 데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는 윤리적인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수동성에서 능동성으로 이행하는 것, 또는 예속적인 삶의 양식을 합리적으로 개조하고 자유를 영위하는 것이 스피노자 철학의 주요 목표라면, 들뢰즈가 잘 보여주었듯이 공통 통념은 이러한 이행을 성취하는 데서 관건이 되기 때문이다.(이 점에 관해서는 특히 Deleuze 1969 17장 참조)

  따라서 우리는 공통 통념이라는 개념이 그의 철학, 특히 {윤리학}에서 체계적으로 규정되고 여러 번 사용되리라고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뒤에서 볼 것처럼 그의 저작에서 이 개념은 매우 드물게 나타나고 있으며, 이 개념이 가장 의미 있게 사용되는 {윤리학} 2부 정리 37에서 40의 논의 역시 공통 통념에 대한 체계적인 규정을 제시해주고 있지는 않다.

  우리가 이 글에서 논의의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은 {윤리학} 2부를 중심으로 스피노자의 공통 통념 개념을 좀더 체계적으로 재구성해보는 것이다.2) 이러한 재구성은 네 가지 단락으로 이루어진다. 우선 2절과 3절에서 우리는 notio communis 개념의 철학사적인 유래를 해명해볼 생각인데, 특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데카르트에서 이 개념의 특성과 용법이다. 데카르트는 스토아학파에서 유래한 notio communis 개념을 근대 철학사에 새롭게 복권시키는 데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는데, 다른 개념이나 문제의 경우에도 그렇지만 스피노자는 notio communis에 대한 데카르트의 논의에 기대어, 그것을 자신의 관점에 따라 비판하고 재구성하면서 활용하고 있다. 따라서 공통 통념 개념에 대한 스피노자의 이론적 독창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데카르트의 논의를 좀더 꼼꼼히 살펴보는 게 필요하다. 이러한 논의를 거쳐 4절에서는 공통 통념 개념의 특성과 형성 과정이라는 문제를 중심으로 스피노자의 용법을 재구성해볼 것이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notio communis 개념의 차이가 좀더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3)


2. 고대 스토아학파에서 notio communis의 의미


  notio communis는 에피쿠로스 또는 고대 스토아학파에서 유래한 개념으로, 특히 스토아학파의 인식론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키케로는 {아카데미아 학파에 대하여Academici Libri}에서 스토아 학파의 인식론을 다음과 같이 소묘하고 있다.


왜냐하면 감각들의 원천이자 심지어 그 자체가 감각들과 동일한 것인 정신은 정신을 움직이게 하는 사물들로 정신 자신을 향하게 만드는 자연적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신은 어떤 인상들visa을 곧바로 사용하기 위해 포착하는 반면 다른 인상들은 저장해두는데, 여기에서 기억이 생겨난다. 하지만 정신은 나머지 우리 인상들을 유사성에 따라 조직하며, 이러한 [조직된] 인상들로부터 사물들에 대한 우리의 통념들(그리스인들이 때로는 엔노이아이ennoïai라고 부르고 때로는 프롤렙시스prolêpsis라고 부르기도 한)이 생겨난다ex quibus efficiuntur notitiae rerum. 이성적 추론과 증명, 셀 수 없이 많은 사실들이 보태지면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지각(perceptio/katalêpton)이 나타나며, 점차 개선되어 지혜에 이르게 된다.(Cicero 2005, pp. 19-20) 


  키케로에 따르면 프롤렙시스는 “정신 안에서 선취된 사물들에 대한 일종의 표상이며, 이것 없이는 사물을 이해할 수도 없고 탐구나 토론을 수행할 수도 없”4)(Cicero 1978, p. 54-55)는 것으로, 그는 이 용어를 에피쿠로스가 고안해냈다고 말하고 있다.(같은 곳) 에피쿠로스가 과연 이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5), 적어도 이 용어가 에피쿠로스와 스토아학파에 의해 체계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키케로는 이 인용문에서 엔노이아이와 프롤렙시스 사이의 차이점에 대해 별다른 언급도 하지 않고 있지만, 스토아학파의 인식론에 관한 귀중한 자료로 간주되는 아에티우스Aetius의 단편에서는 두 개념의 차이가 좀더 명확히 제시되고 있다.


스토아학파에 따르면, 사람이 태어날 때 영혼 안에 어떤 것이든 기록할 수 있는 종잇장 같은 중추부hēgemonikon를 지니고 있다. 그는 이 위에다 자신의 관념들 각각을 새겨 넣는다. 첫 번째 기록방법은 감각에 의한 것인데, 왜냐하면 사람들이 어떤 것, 예컨대 하얀 것을 지각했을 때, 이 하얀 것이 사라진 뒤에는 이것에 대한 기억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일한 종류의 많은 기억들이 생겼을 때, 우리는 우리가 경험을 갖는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다수의 유사한 인상들이 경험이기 때문이다. 어떤 관념들은 이와 같은 식으로 의도하지 않은 가운데 자연적으로 일어나며, 다른 것들은 가르침과 배움을 통해 이루어진다. 전자가 “프롤렙시스”이라고 불리며, 후자는 “엔노이아”라고 불린다.(Long & Sedley 1987, p. 238) 


이 두 가지 개념 사이에, 또는 좀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의 인식론 사이에 정확히 어떤 차이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헬레니즘 연구자들 사이의 논쟁점 중 하나지만6), 우리의 논의를 위해서는 두 개념을 등가적인 것으로, 곧 notio communis 개념의 이론적 원천으로 간주하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아에티우스의 단편(그리고 앞서 인용한 키케로의 구절)의 중요성은 오히려 스토아학파에서 공통 통념이 지닌 경험적 성격을 명확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곧 키케로나 아에티우스 모두 공통 통념을 우리의 정신에 본유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관념이나 개념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습득되고 더 많은 경험과 교육을 통해 강화, 향상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또는 공통 통념을 일종의 본유 관념으로 간주한다면, 이는 개별적인 경험들을 통해 발현되는 소질이나 능력의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이 때문에 키케로가 말하는 프롤렙시스의 특성, 곧 “이것 없이는 사물을 이해할 수도 없고 탐구나 토론을 수행할 수도 없”다는 것을 초월적이거나 초월론적 원리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7) 


3. 데카르트의 notio communis 개념


  스토아학파에서 체계적으로 사용된 이후 중세철학 내내 notio communis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으며 유스투스 립시우스Justus Lipsius 또는 후고 그로티우스Hugo Grotius 등에 의해 스토아주의가 복권되면서 다시 이 개념도 철학적인 중요성을 얻게 되었다.8) 립시우스를 비롯한 신스토아학파 사상가들이 고전 스토아학파에서 사용된 notio communis 개념의 의미에 충실했다면, 데카르트는 이 개념에 대해 독자적인 의미를 부여해서 활용하고 있다.


1) 공통 관념의 특성

 

  데카르트의 공통 관념9) 이론의 특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정신지도규칙}에 나오는 “단순 본성” 개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개념은 규칙 6에서 절대적인 것과 상대적인 것에 대한 정의와 함께 처음 등장하고 있는데, 규칙 8에서 이 개념에 대한 좀더 명확한 규정이 나온다. 


그런 다음에 우리는 실재 자체로 나아가야 하는데, 이때의 실재 자체란 지성의 접근이 가능한 한에서만 고찰되는 실재를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실재를 가장 단순한 본성과 복합적인 것 혹은 합성적인 것으로 나눈다. 단순한 것 중에는 정신적인 것, 물질적인 것, 아니면 이 두 가지에 모두 속하는 것이 있고, 끝으로 합성적인 것 중에는, 지성의 판단이 이것에 대해 어떤 것을 규정하기 전에 이미 그렇게 되어 있음을 지성이 경험하는 것이 있는 반면에, 또 지성 자신이 합성한 것도 있다.(AT X, 399; 이현복 I, 62-63쪽)


규칙 12에 나오는 데카르트의 부연 설명에 따르면, 정신적 또는 순수하게 지적인 단순 본성은 “정신의 어떤 빛을 통해 또 그 어떤 물질적인 상의 도움 없이 지성에 의해 인식되는 것”으로 “인식, 의심, 무지, 의지의 작용”과 같은 것이 여기에 포함된다. 반면 물질적 단순 본성은 “오직 물체 속에만 있다고 인식되는 것”으로, 모양, 연장, 운동 등이 있다. “끝으로, 공통적인 것이란 때로는 물질적인 것에, 때로는 정신적인 것에 구별 없이 귀속되는 것이다. 존재, 단일, 지속 등이 그런 것이다.”(AT X, 419; 이현복 I, 86쪽) 데카르트에 따르면 이러한 단순 본성들은 “모두 그 자체로 알려지는per se notas 것이고 어떠한 오류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AT X, 420; 이현복 I, 87쪽) 왜냐하면 단순 본성들은 단순하다는 바로 그 사실로 인해 우리가 이러한 단순 본성에 조금이라도 도달한다면, 이는 전체적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단순 본성은 우리가 어떤 판단이든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는 기초 인식이다.10)

  데카르트는 공통적인 단순 본성에 공통 관념들을 포함시키고 있다. “또한 여기에 공통 관념이 포함될 수 있다. 이것은 다른 단순 본성들을 서로 연결해 주는 연결선vincula과 같은 것으로, 추론에서 도출되는 모든 것, 이를테면 제삼자와 같은 것은 서로 같으며, 제삼자와 같은 방식으로 연관되지 않는 것은 서로 상이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 등은 공통 관념의 명증성에 의존하고 있다. 이런 공통 관념은 순수 지성에 의해 인식되거나, 아니면 순수 지성이 물질적 상을 직관함으로써 인식된다.” (AT X, 419; 이현복 I, 86쪽) 따라서 공통 관념들은 단순한 것들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이것들은 “그 자체로 알려지는” 명증한 것이며, 더 나아가 모든 사람은 선천적으로 자연의 빛을 지니고 있고, “똑같은 자연의 빛을 지닌 모든 사람들은 모두 똑같은 notions을 가져야” 하기 때문에 본유적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데카르트의 공통 관념들은 단순성명증성, 본유성을 특성으로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데카르트의 후기 저작에서 단순 본성이라는 용어는 드물게 출현하는 편이며,11) 따라서 공통 관념도 단순 본성과 연계되기보다는 공리나 영원진리와 관련하여 언급된다. 예컨대 「두번째 성찰에 대한 답변」 말미에 나오는 기하학적 증명에는 “공리들 또는 공통 관념들 axiomata sive notiones communes”라는 표제 아래 10개의 명제들이 제시되고 있다.(AT VII 164-66)12) 또한 {철학원리} 49항에서 “공통 관념 또는 공리communis notio sive axioma”(AT VIII-1, 24/원석영, 41쪽)라고 말하고 있고13), {뷔르만과의 대화}에서는 영원진리를 공통 관념과 동의어로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저자는 영원진리들을 공통 관념들이라 불리는 것eas, quae communes notiones vocantur으로 이해한다.”(Descartes 1981, p.103)

  공리 또는 영원진리로서의 공통 관념들에 대해 데카르트는 “공통 관념들 또는 공리들 [...] 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아서 모두 나열하기가 쉽지 않다”(AT VIII-1, 23-24; 원석영, 41)고 말하면서 몇 가지 사례들을 제시하고 있다. “무로부터는 아무것도 생기지 않는다”라든가 “어떤 것이 존재하면서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같은 명제 또는 “사고하는 것은 사고하는 동안 실존하지 않을 수 없다”(49항)는 것, “무는 어떠한 속성이나 특성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52항) 등이 그것들이다.14) 또한 「두번째 성찰에 대한 답변」에 나오는 10개의 공리들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존재한다. “결과 안에 있는 것들 중, 유사한 또는 좀더 상위의 형태로 원인 안에 실존하지 않았던 것은 아무것도 없다”나 “무로부터는 아무것도 생기지 않는다”, 또는 “관념들 안에 단지 표상적으로 실존하는 실재성이나 완전성 전체는 그 원인들 안에서는 형상적으로 또는 탁월하게 실존해야 한다.” 

 

2) 공통 관념의 단순성


 데카르트는 초기 저작과 후기 저작에서 notio communis에 대해 똑같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을까? 이는 데카르트 연구자들 사이에서 쉽게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는 문제다. 가령 장 라포르트Jean Laporte에 따르면 데카르트에서 공통 관념들 또는 공리들은 “단순 본성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연결선들vincula 또는 필연적 관계들을 보편적인 용어들로 번역한 것”(Laporte 1988, p. 305)이며, 따라서 이는 초기 저작에서 말하는 단순 본성들과 다르지 않다. 강조점이나 뉘앙스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앙리 구이에Henri Gouhier 역시 장 라포르트와 마찬가지로 공통 관념은 “단순 본성들로 간주된 실재들res 사이의 연결선들로 사용되는 단순 본성의 일종”이라고 말하고 있다(Gouhier 1987, p. 274). 반면 앨런 하트Alan Hart는, 이들의 이름을 거명하지는 않지만, 이들의 주장에 반대하여 초기 저작에서 나타나는 공통 관념과 후기 저작에서 사용되는 공통 관념 사이에는 명백한 차이점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전자의 경우 다른 단순 본성들과 마찬가지로 단순한 것인 데 반해, 후자는 이 단순한 것들을 연결시켜서 지식을 형성하는 역할을 담당한다는 점에서 양자는 다르다는 것이다.15)

  그러나 앨런 하트의 논거는 그다지 설득력 있는 것 같지 않다. 다음 구절이 그가 제시하는 주요 전거다. “그렇다면 우리 정신 안에 내재해 있는 이런 모든 공통 관념이 이와 같은 운동에서 유래하고, 이것 없이는 존재할 수도 없다는 것보다 더 불합리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제 3의 것과 동등한 두 가지는 서로 같다”는 것과 같은 공통 관념을 우리 정신 안에 형성시켜 줄 수 있는 물질적 운동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지를 나에게 가르쳐주길 바란다. 왜냐하면 이런 모든 운동은 개별적인 것particulares인 반면에 공통 관념은 보편적인 것이고 운동과는 어떠한 유사성도, 어떠한 관계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AT VIII-2, 359-60; 이현복 II, 191-92쪽) 그는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이 공통 notions 또는 공리들은 운동들과 관련되지 않지만, 단순 notions의 경우는, 운동들이 정신이 단순한 본유 관념들을 현실화하는 기회가 되는 한에서, 물질적 운동들과 관련되어 있다”(Hart 1970, p. 120―강조는 하트)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 단순 관념들은 물질적 운동을 기회로 현실화되는 반면, 공통 관념들은 운동과 무관하며, 단순한 것들을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두 가지 점에서 그릇된 주장이다. 첫째, 그가 인용한 구절에서 데카르트는 단순한 notions과 공통 notions을 구별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그의 논점은 레기우스의 경험론적 주장에 맞서 모든 notions은 다 “성향 내지 잠재성dispositione sive facultate”이라는 의미에서 본유적임을 주장하는 데 있다. 마지막 문장에서 데카르트가 운동의 개별성과 공통 notions의 보편성을 대비시키는 것은 이 때문이다. 둘째, 그는 단순 notions과 달리 공통 notions은 단순 notion들을 연결시켜주는 역할만을 담당한다는 의미에서 경험적 기회와 무관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데카르트의 공통 관념들이 지닌 존재론적 함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그것들을 논리학적 규칙들이나 수학적 공리들로 환원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부족하다.

  역으로 라포르트나 구이에의 입장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들이 좀더 분명하게 설명해야 하는 것은 어떻게 “연결선”으로서의 공통 관념이 단순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인데, 이들은 이 점에 관해 뚜렷한 논거를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오히려 제라르 시몽의 다음과 같은 주장이 좀더 설득력이 있다. “따라서 공리들의 단순성은 그것들이 관계가 아니라 존재를, 상이한 존재자들 사이의 연결이 아니라 각각의 물체들이 그것들의 독특성 속에서 소유하고 있는 존재의 일반적인 특성들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비롯한다.”(Simon 1996, p. 131) 곧 그에 따르면 데카르트가 말하는 공통 관념들은 논리학적이거나 수학적이라기보다는 형이상학적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유일한 한 가지 주제, 곧 실존의 환원 불가능성, 무의 불가능성, 실체의 필연성 사이의 연계라는 주제만을 함축하고 있다. 데카르트가 제시하는 공통 관념의 사례들이 논리학적 규칙들이나 수학적 공리들과는 무관한 존재론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공통 관념들 또는 공리들이 지닌 단순성 역시 이러한 존재론적 함의에서, 곧 각각의 실재들이 지니고 있는 “존재의 일반적인 특성들”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시몽의 주장은 데카르트의 공통 관념들의 성격을 좀더 일관성 있게 해명해줄 뿐만 아니라,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연관성을 좀더 정확히 드러낸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4. 스피노자의 notio communis 개념


  공통 통념에 대한 스피노자의 용법에서 주목할 만한 점 중 하나는 이 용어가 초기 저작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으며, 더 나아가 체계적인 논의의 대상도 되지 않는다. 초기 저작에서 이 용어는 단 두 번 사용되는데, 한 번은 올덴부르크의 반론에 답변하면서 스피노자가 그의 반론의 요점을 정리하고 있는 곳에서16), 다른 한 번은 메이으르(Lodewijk Meyer)가 스피노자를 대신하여 작성한 {데카르트의 철학원리} 「서문」이다.17) {윤리학}이나 {신학정치론} 같은 후기 저작에서도 notio communis라는 용어 자체는 드물게 출현하며, {윤리학}에서는 6번18), {신학정치론}에서는 5번 사용될 뿐이다19). 하지만 특히 {윤리학} 2부에서 이 개념은 상당히 독창적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우리가 4절에서 중심적으로 다룰 주제도 바로 2부에 나타난 공통 통념 이론이다.20)

  데카르트의 용법과 비교해볼 때 notio communis에 대한 스피노자의 용법은 두 가지 차이점을 지니고 있다. 첫째는 notio 개념이 일의적으로 사용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데카르트와 달리 notio는 더 이상 단순성과 명증성, 본유성으로만 규정되지 않으며, 상상의 notio와 이성의 notio로 분화된다. 따라서 스피노자에서 notio는 인식론적 갈등 내지 분화의 소재가 된다. 이는 데카르트와 달리 스피노자에서 notio의 애매성은 인간학적인 삶의 양식의 차이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바로 이 때문에 notio communis에 대한 규정과 그것이 수행하는 기능 역시 데카르트와 달라진다. 데카르트에게는 notio communis가 형성되고 구체화되는 과정에 대한 설명이 부재할 뿐만 아니라, 이 개념이 윤리적 실천에서 수행하는 역할에 대한 분석도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 스피노자의 notio communis 이론은 이 두 가지 내용을 핵심적인 요소들로 지니고 있다.


1) notio의 애매성


  이 단락에서는 우선 스피노자에서 notio가 어떻게 규정되는지, 이 개념에 관한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차이점은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자. notio, 곧 통념에 대한 스피노자의 관점은 2부 정리 40의 주석 1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이로써 나는 공통적이라 불리며 우리의 추론의 기초를 이루는 통념들notiones의 원인에 대해 설명했다. 하지만 다른 원인들, 곧 어떤 공리들 내지는 통념들의 원인들이 존재하는데, 우리의 방법으로 이를 설명해보면 유익할 듯하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 어떤 통념들이 다른 통념들보다 유익하며, 어떤 통념들이 거의 아무런 쓸모가 없는지 명백해질 것이기 때문이다.(G II 120―강조는 스피노자)


곧 그에 따르면 통념들에는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공통적이라 불리며, 우리의 추론의 기초를 이루는quae communes vocantur, quaeque ratiocini nostri fundamenta sunt” 통념, 곧 공통 통념이 있고, 그 이외에 “또다른 통념들”도 존재한다. 이 구절 바로 뒤에서 이러한 또다른 통념들의 예로 “이차적이라 불리는 통념들quas secundas vocant”21)이나 사람, 말, 고양이 등과 같이 “보편적이라 불리는 통념들”이 예시되고 있다. 스피노자는 이것들 중 특히 두 가지 통념의 형성 원인들을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그 중 하나는 “초월적 용어들termini transcendentales”이라고 불리는 것, 곧 존재자ens, 실재res, 어떤 것aliquid 같은 것들이며, 다른 하나는 사람, 말, 개 등과 같은 “보편 통념들notiones universales”이라고 불리는 것들이다.

  초월적 용어들은 “인간 신체가 동시에 일정한 숫자의 이미지들만을 판명하게/구분되게distincte 형성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데서 생겨난다. 곧 만약 이미지들이 이 숫자 이상으로 나타나게 되면, “이미지들은 혼동되기 시작할 것이며, 만약 신체가 동시에 그 자체로 판명하게/구분되게 형성할 수 있는 이미지의 숫자가 훨씬 더longe excedatur 초과되면 이것들은 서로 완전히inter se plane 혼동되어 버릴 것이다.”(G II 120-21) 다시 말해 만약 신체에서 이미지들이 동시에 판명하게/구분되게 형성된다면 정신도 이 이미지들을 판명하게 상상할 수 있지만, 신체에서 이 이미지들이 완전히 혼동되어 버리면 정신은 아무런 구분 없이 모든 물체들을 혼동되게 상상해서, 이 물체들이 “마치 하나의 속성 아래quasi sub uno attributo, 예컨대 존재자, 실재 등과 같은 속성 아래 포괄되는 것처럼 상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이 용어들이 “최고로 혼동된 관념들summo gradu confusas”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반면 보편 통념들은 전자와 비슷한 원인을 갖고 있지만, 전자와는 달리 “완전히” 혼동될 만큼 많은 이미지들이 신체에서 형성될 경우에 생기는 게 아니라 “정신이 (각각의 사람의 피부색이나 키 등과 같이) 개개의 [사람들의] 적은 차이들을 상상하지 못하고 그들의 숫자도 상상하지 못하며, 단지 이 차이들이 신체를 변용하는 한에서 모두 합치하는 것만을 판명하게 상상하게 될 정도만큼 상상의 힘을 능가”할 때 생긴다. 따라서 보편 통념들은 초월적 용어들만큼 혼동된 것은 아니지만, 개개의 이미지들 사이의 차이와 실질적인 일치점 또는 대립점들을 지각하지 못하는 신체와 정신의 무능력에서 유래한다는 점에서는 초월적 용어들과 공통적이다. 더 나아가 스피노자는 이러한 보편 통념은 모든 사람에 의해 “동일한 방식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마다 상이하게 형성된다고 지적한다. 곧 “각자는 자신의 신체의 성향에 따라pro dispositione sui corporis” 보편 통념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사람의 직립 자세를 경탄하는 사람들은 사람을 직립 동물로 이해할 것이고, 또 다른 사람들은 사람을 웃을 수 있는 동물로, 털 없는 두발 달린 동물로, 이성적 동물로 생각하게 된다. 이는 중세 스콜라 철학에서 인간을 정의하는 여러 가지 방식들이라는 점에서 미루어 알 수 있듯이, 보편 통념에 대한 스피노자의 논의는 매우 신랄하고 비판적이다.   

  요컨대 스피노자에게 notio는 훨씬 더 광범위한 외연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단순하고 자명한 것, 본유적인 것을 가리키지도 않는다. 반대로 그는 1종의 인식에 속하는 notio와 2종의 인식에 속하는 notio를 명확히 구별하며, 전자를 후자로 대체하는 것, 또는 후자에 기초하여 적합한 인식을 형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물론 데카르트 역시 notio가 누구에게나 명석하게 인식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이는 선입견이 그러한 인식을 가로막기 때문이다.(AT VIII-1 24; 원석영 42)22)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데카르트에게 notio는 두 가지가 아니라 한 가지만이 존재하며, 선입견에서 해방되어 이를 명석하게 인식할 수 있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존재할 뿐이다. 반면 스피노자에게는 하나의 notio가 아니라 두 개의 notio가 문제가 된다. 이는 그가 notio를 상이한 인식의 종류의 문제설정, 따라서 상이한 삶의 종류라는 문제설정 속에 편입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정리 40의 두 번째 주석은 이를 명확히 보여준다.  


위에서 말한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가 많은 것을 지각하여 보편 통념들notiones universales을 형성한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보편 통념들은] (I) 감각들을 통해 우리에게 단편적이고 혼동된 방식으로mutilate, confuse, 그리고 지성의 방향으로 진행되는 질서 없이sine ordine ad intellectum23) 표상되는 독특한 실재들로부터 [형성된다](2부 정리 29의 따름정리를 보라). 이 때문에 나는 보통 이러한 지각들을 모호한 경험에 의한 인식cognitionem ab experientia vaga이라 부른다. (II) 기호들로부터 [형성된다]. 예컨대 어떤 단어들을 듣거나 읽음으로써 우리는 실재들을 다시 떠올리고recordemur, 이 실재들에 관해, 우리가 실재들을 상상하는 수단들과 유사한 어떤 관념들을 형성함으로써 [보편 통념들이 형성된다](2부 정리 18의 주석을 보라). 전자와 후자처럼 실재들을 고찰하는contemplandi 방식을 나는 다음부터 첫 번째 종류의 인식, 억견opinio 또는 상상이라 부를 것이다. (III) 마지막으로 우리가 실재의 특성들에 대해 공통 통념들 및 적합한 관념들을 갖고 있다는 점으로부터 [보편 통념들이 형성된다](2부 정리 38의 따름정리, 정리 39와 그 따름정리, 정리 40을 보라). 그리고 이러한 방식을 나는 이성 및 두 번째 종류의 인식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 두 가지 인식의 종류는, 우리가 조금 뒤에서 살펴볼 것처럼 모든 점에서 서로 대립하고 전면적으로 단절되어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첫 번째 종류의 인식은 “거짓의 유일한 원인”(E II P41)인 한에서 개조되고 대체되어야 할 대상이다. 더욱이 인식의 종류는 항상 그에 상응하는 삶의 종류, 삶의 양식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통념의 애매성이라는 문제는 데카르트에서처럼 단지 선입견의 문제로 환원될 수 없다. 곧 상상적인 notio는 하나의 선입견의 결과인 것이 아니라, 특정한 종류의 삶(수동적이고 예속적인 삶)을 형성하고 재생산하는 조건이다. 요컨대 스피노자에게는 상상의 이론, 또는 알튀세르의 용어를 빌리자면 이데올로기의 이론이 존재하는 데 반해 데카르트에게는 그러한 이론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서 바로 notio에 대한 양자의 관점의 차이가 생겨난다.


2) 공통 통념의 의미


  notio 개념의 차이로 미루어볼 때 notio communis라는 개념 역시 상이한 의미로 사용될 것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우선 공통점을 살펴보자. 데카르트처럼 스피노자도 notio communis를 때로는 공리로 제시하며, 때로는 이를 “단순한 것”으로 특징짓기도 한다. 가령 {윤리학} 1부 정리 8의 주석 2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만약 사람들이 실체의 본성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 이 정리[1부 정리 7]는 모든 사람에게 공리이며, notiones communes 중 하나로 간주될 만하다.”(G II 50) 하지만 notio communis는 {윤리학}에서 이런 의미로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다. 또한 {신학정치론} 6장의 주석 6에서는 다음과 같이 공통 통념을 단순한 것이라고 부르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신의 본성을 명석 판명하게 인식할 수 있기 위해서는, 공통 통념들이라 불리는 지극히 단순한 어떤 통념들quasdam notiones simplicissimas, quas communes vocant에 주의를 기울이는 게 필요하다.”(G III 253)

  또한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와 마찬가지로 거듭 공통 통념은 “우리의 추론의 기초”(E II P40s1)라든가 “이성의 기초”(E II P44c2d), 심지어 “철학의 기초”24)라고 주장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스피노자가 공통 통념을 추론이나 이성 또는 철학의 기초로 간주하고 있다면, 이는 그가 notio communis의 근거 또는 대상을 속성 및 가장 일반적인 특성들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곧 notio communis는 “모든 것에 공통적인 것”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또는 그것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에 철학이나 이성의 기초가 되며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이다. 반면 데카르트에게 notio communis는 “자연의 빛” 덕분에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것으로 제시되어 있을 뿐, 그 근거가 분명히 제시되지 않고 있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 따른 notio communis에 대한 고유한 용법은 {윤리학} 2부 정리 37 이하에서 나타나고 있다. 곧 여기에서 notio communis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인 관념들ideas 또는 통념들notiones이 존재하는데, 왜냐하면 모든 물체는 어떤 점에서 일치하며 이는 우리에게 적합하게, 곧 명석하고 판명하게 지각되어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규정되고 있다. 따라서 notio communis는 자명한 진리가 아니라 우리가 획득하고 구성해나가야 하는 참된 인식 또는 적합한 인식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모든 물체는 어떤 점에서 일치하며”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이는 실재의 특성들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에 실재에 대한 실질적인 인식을 제공해준다. 그런데 물체들은 단 한 가지 점에서만 일치하는 게 아니라 여러 가지 점에서 일치할 수 있다. 가령 상이한 두 인간의 신체는 연장의 일부라는 점에서 서로 일치할 뿐만 아니라 고도로 조직화된 기관들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도 일치하며, 어떤 것은 먹을 수 있고 어떤 것은 먹지 못한다는 점에서도 일치한다. 이처럼 일치점이 다양하다는 사실은 우리가 이것들에 기초를 두고 얻을 수 있는 참된 인식 또는 적합한 인식의 범위도 다양하다는 점을 시사해준다.


3) 공통 통념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1) 두 가지 공통 통념


  이제 공통 통념들이 형성되는 구체적인 방식을 검토해보기로 하자. 이 점과 관련하여 일단 주목해야 할 것은 2부 정리 38과 39에서 제시되고 있는 두 가지 적합한 인식의 형태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다. 스피노자는 2부 정리 38과 39에서 두 가지 형태의 공통 통념을 지적하고 있다.


모든 것에 공통적인 것, 그리고 부분과 전체에 균등하게 존재하는 것은 적합하게 인식될 수밖에 없다.25)


인간 신체와, 인간 신체가 통상적으로 그것들에 의해 변용되는 어떤 물체들에 공통적이고, 또 고유한 것은 이것들 각각의 부분과 전체 안에 균등하게 존재하며, 이것에 대한 관념 역시 정신 안에서 적합하게 존재할 것이다.26) 


마르샬 게루 이후 관행적으로 각각 “보편적 공통 통념notion commune universelle”과 “고유한 공통 통념notion commune propre”이라고 불리는27) 이 두 가지 형태의 공통 통념이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지, 곧 보편적인 공통 통념에서 고유한 공통 통념으로, 또는 역으로 후자에서 전자로 이행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지 해명하는 것이 스피노자 공통 통념 이론의 재구성에서 핵심 과제가 된다.

  먼저 “보편적 공통 통념”의 경우를 보면, 스피노자는 이것의 대상을 “모든 것에 공통적인 것, 그리고 부분과 전체에 균등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모든 것에 공통적인 것의 사례는 스피노자가 정리 37이나 정리 38의 따름정리에서 지시하고 있듯이 「자연학 소론」 보조정리 2에서 찾아볼 수 있다.


보조정리 2

모든 물체는 어떤 것들에서 합치한다in quibusdam conveniunt.

증명

왜냐하면 모든 물체는 단 하나의 동일한 속성의 개념을 함축한다는 점에서 합치하기 때문이다(같은 2부의 정의 1에 의해). 그리고 때로는 좀더 느리게 운동하고 때로는 좀더 빠르게 운동할 수 있으며, 절대적으로 말하면, 때로는 운동할 수 있고 때로는 정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합치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에 공통적인 것의 가장 보편적인 사례는 바로 “속성”이다. 존재하는 모든 실재들은 그것이 속하고 있는 속성들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모든 물체들에 공통적인 연장 속성은 적합하게 인식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처럼 보편적 성격을 띠는 인식은, 수동적인 상태에서도 적합한 인식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충분히 의미가 있지만28) 아직 추상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추상적이라는 것은 이중의 의미에서 그렇다. 첫째, 인식은 세부적인 동일성과 차이, 대립들을 정확히 식별할수록 구체적인 데 반해, 모든 물체들이 공유하는 연장 속성은 차이 없는 동일성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둘째, 이는 또한 윤리적인 의미에서도 추상적이다. 스피노자에게 부적합성에서 적합성으로의 이행은 항상 실천적ㆍ윤리적 이행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적합한 인식은 인간의 윤리적 실천, 곧 능동화 과정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실재들 사이의 동일성과 차이, 대립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해주지 못하는 보편적인 공통 통념은 그만큼 구체적인 실천에서도 적은 도움을 줄 수밖에 없다.

  따라서 보편적인 인식과는 다른, 좀더 구체적인 인식이 형성될 수 있다는 점이 입증되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정리 39의 대상이다. 앞의 인용문이 보여주듯이 정리 38과 달리 정리 39에서는 인간 신체와 몇몇 물체들에 공통적이고 또한 고유한 것이 인식의 대상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공통 통념, 곧 “고유한” 공통 통념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이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서는 먼저 적합한 인식과 부적합한 인식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2) 부적합한 관념들의 형성


  부적합한 관념들에 대한 논의는 {윤리학} 2부 정리 24에서 정리 31에 이르기까지 전개되고 있는데, 이 중에서 부적합한 관념들의 본성 및 형성에 관한 제일 체계적인 논의는 정리 29의 따름정리 및 주석에서 볼 수 있다. 우선 따름정리를 그대로 인용해보자.


이로부터 인간 정신은 그것이 자연의 공통의 질서로부터 실재들을 지각할 때마다quoties ex communi naturae ordine res percipit 자기 자신과 자신의 신체에 대해, 그리고 외부 물체들에 대해서도 적합한 인식을 갖지 못하고 단지 혼동되고 단편적인 인식만을 가진다confusam tantum & mutilatam habere cognitionem는 점이 따라 나온다. 왜냐하면 정신은 (2부 정리 23에 따라) 신체의 변용들의 관념들을 지각하는 한에서가 아니라면 자기 자신을 인식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신은 (2부 정리 19에 따라) 변용들의 관념들을 통해서만 자신의 신체를 지각하며, 마찬가지로 (2부 정리 26에 따라) 이러한 변용들의 관념들을 통해서만 외부 물체들을 지각한다. 따라서 이러한 관념들을 갖고 있는 한에서 정신은 (2부 정리 29에 따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2부 정리 27에 따라) 자신의 신체에 대해서도, (2부 정리 25에 따라) 외부 물체들에 대해서도, 적합한 인식이 아니라 (2부 정리 28 및 그 주석에 따라) 단지 단편적이고 혼동된 인식만을 가질 뿐이다.


여기서 우선 주목할 만한 것은 “자연의 공통의 질서ordo communis naturae”라는 개념이다. 이는 “공통 통념들”과 마찬가지로 “공통의communis”라는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 그런데 인식의 종류들의 분류에서 공통 통념들은 제 2종의 인식, 곧 적합한 인식으로 분류되어 있는 데 반해, 스피노자는 여기서 자연의 공통의 질서에 따른 인식을 부적합한 인식으로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왜 “공통의”라는 특징을 공유하고 있음에도 양자는 각각 부적합한 인식과 적합한 인식으로 나누어지는지, 양자의 관계는 무엇인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 따름정리 바로 다음에 나오는 주석에서 이러한 의문에 대한 한 가지 답변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정신은, 내적으로 규정될 때마다, 곧 그것이 동시에 여러 가지 실재들을 고려한다는 사실에 의해 실재들 사이의 합치, 차이 및 대립을 파악하도록 규정될 때마다가 아니라non quoties interne, ex eo scilicet, quod res plures simul contemplatur, determinatur ad earundem convenientias, differentias, et oppugnentias intelligendum, 자연의 공통의 질서로부터 실재들을 지각할 때마다, 곧 그것이 외적으로, 다시 말해 실재들과의 우발적인 마주침으로부터 이것 또는 저것을 고려하도록 규정될 때마다quoties externe, ex rerum nempe fortuito occursu, determinatur ad hoc, vel illud contemplandum 단지 혼동되고 단편적인 인식을 갖게 된다.”(G II 114) 스피노자는 이번에는 “외적으로 규정되는 것”과 “내적으로 규정되는 것”의 일반적인 대비를 바탕에 깔고 자연의 공통의 질서로부터 실재들을 지각하는 것을 “외적으로 규정되는 것”과 동일시하고 있다(“곧hoc est”이라는 접속사는 의미론적 동치를 의미한다). 그런데 내부와 외부에 대한 일반적 통념과는 달리 스피노자는 내적으로 규정되는 것과 외적으로 규정되는 것 각각에 대해 독특한 규정을 부여하고 있다. 곧 그에 따르면 외적으로 규정되는 것=자연의 공통의 질서로부터 실재들을 지각하는 것은 “실재들과의 우발적인 마주침으로부터 이것 또는 저것을 고려하도록 규정”되는 것을 의미하며, 내적으로 규정되는 것은 “동시에 여러 가지 실재들을 고려한다는 사실에 의해 실재들 사이의 합치, 차이 및 대립을 파악하도록 규정”되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정리 29의 주석에 따르면 자연의 공통의 질서로부터 실재들을 지각하는 것은 세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 이는 여러 개의 실재들을 동시에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체와 우발적으로 마주치는 “이것 또는 저것”을 개별적으로 지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곧 어떤 실재들이 우리의 신체에 강한 자극과 충격을 줄 때마다 때로는 이것을, 때로는 저것을 즉자적으로 지각하는 것을 가리킨다.

  둘째, 따라서 자연의 공통의 질서에 따른 지각은 자연의 실재 질서에 따르는 것이라기보다는 우리 신체의 변용의 질서와 연관에 따른 지각(E II P18s)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자연의 공통의 질서에 따른 지각은 우리에게 외부 물체들의 본성에 대해 무언가를 가르쳐주기보다는 우리 신체의 습성이나 기질을 더 많이 반영하는 지각이다. 그렇다면 왜 이것을 “자연의 공통의 질서”라고 부를까? 샤를르 라몽Charles Ramond이 잘 보여주었듯이29) 바로 이 점에 “자연의 공통의 질서”라는 표현의 역설이 존재한다. 한편으로 이는 자연의 실재 질서를 가리킨다.(E IV P57s) 2부 정리 7에서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이나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 같은 표현들을 사용하고 있는 데서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스피노자에게는 자연의 객관적 질서를 가리키는 표현들이 존재하는데, “자연의 공통의 질서” 역시 그 중 한 가지이다.30) 따라서 모든 것에 공통적인 특성들에 대한 인식으로서, 그리고 그것들에 기초를 둔 인식으로서 공통 통념들에 의한 인식은 이러한 자연의 공통의 질서를 인식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그러나 그 자체로는 실재적인 자연의 공통의 질서에 따른 지각은 단편적이고 혼동된 인식을 낳는다. 왜 이러한 역설이 생길까? 그것은 우리가 자연 전체로서 이러한 질서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일부”로서, 곧 수동적인 상태에서 인식하기 때문이다31).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왜냐하면 스피노자에 따르면 우리의 모든 지각, 인식은 일차적으로 우리의 신체의 변용의 질서와 연관에 따라 이루어지므로 자연의 공통적 질서에 따른 지각만을 우리 신체의 변용의 질서와 연관에 따른 지각 일반과 동일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적합한 인식과 부적합한 인식의 차이점을 좀더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자연의 공통적 질서에 따른 지각의 특징을 좀더 분명하게 규정해야 한다. 여기서는 2부 정리 14를 살펴보는 게 도움이 될 것이다. 「자연학 소론」 바로 다음에 나오는 이 정리에서 스피노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 정신은 매우 많은 수의 실재들을 지각할 수 있는 소질을 지니고 있으며apta est plurima percipiendum, 그 신체가 매우 많은 방식으로 배치될 수 있으면 있을수록 이러한 소질은 더욱 커진다eo aptior quo ejus corpus pluribus modis disponi potest.


증명에서 요청 3과 요청 6에 준거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이 정리는 「자연학 소론」의 결론에서 직접 따라 나온다. 이 정리가 첫 번째로 지적하고 있는 것은 매우 많은 실재들을 지각할 수 있는 정신의 소질이나 능력은 신체가 매우 많은 방식으로 배치되는 능력에 비례한다는 점이다. 곧 신체가 외부 물체들로부터 많은 방식으로 변용되고(요청 3) 이를 통해 얻은 변용의 역량으로 매우 많은 방식으로 외부 물체들을 변용하고 배치할 수 있게 되면(요청 6), 그만큼 정신의 지각의 능력도 증대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신의 능력은 신체의 능력에 비례하며, 신체의 능력은 변용되는 능력과 변용하는 능력의 증대와 다르지 않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정신의 지각의 능력과 신체의 변용 능력이 스피노자에게는 능동적인 능력을 형성한다고 할 수 있다.32)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정리 29에서 말하는 “자연의 공통적 질서에 따른 지각”, 곧 “동시에 여러 가지 실재들을 고려”하지 못하고 그 대신 “실재들과의 우발적인 마주침으로부터 이것 또는 저것을 고려하도록 규정”되는 지각은 이러한 능동적 능력과 대비되는 의미에서 수동적인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곧 이러한 정신은 신체가 매우 적은 방식으로 배치될 수 있는 능력만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적은 수의 실재들 또는 (정리 17에 나오는 용어를 사용하자면) 이미지들을 동시에 지각하지 못하고 실재들에 대한 단편적이고 혼동된 인식만을 얻게 되는 것이다. 


(3) 적합한 관념들의 형성


  그렇다면 이러한 자연의 공통의 질서에 따른 지각과 다른 식으로 지각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스피노자를 이를 “내적으로 규정”되는 지각으로, 곧 “정신이 동시에 여러 가지 실재들을 고려한다는 사실에 의해 실재들 사이의 합치, 차이 및 대립을 파악하도록 규정”되는 지각으로 부르면서, 부적합한 지각 또는 인식과 다른 적합한 인식의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이러한 내적으로 규정되는 지각과 공통 통념들의 형성은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가?     스피노자는 {윤리학} 2부 정리 41에서 1종의 인식과 2종 및 3종의 인식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첫 번째 종류의 인식은 오류의 유일한 원인이다. 그러나 두 번째와 세 번째 종류의 인식은 필연적으로 참이다.


그리고 스피노자는 이 정리의 증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가 정리 40의 주석에서 말한 것처럼 1종의 인식에는 부적합하고 혼동된 모든 관념이 속한다. 따라서 (2부 정리 35에 따라) 이러한 인식은 오류의 유일한 원인이다. [...]” 그는 여기서 1종의 인식이 오류의 유일한 원인인 이유를 이 인식이 “부적합하고 혼동된 관념”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 또는 정리 29의 따름정리 및 주석이나 정리 35의 용어법대로 말하면 “단편적이고 혼동된” 인식이라는 점에서 찾고 있다. 따라서 1종의 인식은 단편적이고 혼동된 인식, 곧 부적합한 인식이라는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 때문에 그것은 오류의 원인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어떤 인식이 단편적이고 혼동된 인식일까? 이는 2부 정리 29의 따름정리와 주석에 따르면 자연의 공통 질서에 따라 이루어지는 인식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지각이다.33) 이러한 인식은 정신이 “외적으로 규정”될 때, 곧 “실재들과의 우발적인 마주침으로부터 이것 또는 저것을 고려하도록 규정될” 때 형성되는 인식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를 단편적 인식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또한 이는 2부 정리 40의 주석 2에서 말하듯이 우리의 신체를 변용하는 무수히 많은 이미지들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고 한데 뭉뚱그려서 상상할 때 생겨나는 인식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는 이를 혼동된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1종의 인식은 단편적이고 혼동된 인식이기 때문에 실재들 사이의 “합치, 차이, 대립”을 제대로 알려줄 수 없으며, 각각의 개인들이 지니고 있는 기질에 따라 왜곡되고 변형된 인식만을 제공해줄 뿐이다.

  반면 공통 통념들에 기초를 두고 있는 2종의 인식은 이처럼 자연의 공통적 질서에 따른 인식을 “지성의 방향으로 진행되는 질서”에 따라 개조하는 인식이다. 다시 2부 정리 29의 따름정리와 주석에 나오는 스피노자의 언급에 따르면, 이러한 인식은 “내적으로 규정되는”, 곧 “동시에 여러 가지 실재들을 고려한다는 사실에 의해 실재들 사이의 합치, 차이 및 대립을 파악하도록 규정”되는 인식이다. 이처럼 여러 가지 실재들을 동시에 고려하게 되면, 자연의 공통적 질서에 따라 인식할 때와는 달리 이러저러한 실재들과의 우발적인 마주침에 따라 실재들의 이런저런 측면들을 단편적으로 지각하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다면적인 인식 내지 지각은 이를 기초로 하여 실재들 사이의 합치와 차이, 대립을 고려하기 때문에, 단편적 지각에 수반되는 혼동된 인식에 빠질 위험성도 적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인식은 훨씬 더 명석하고 판명한 인식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내적 규정에 따라 이루어지는 인식은 여전히 지각의 차원에서, 곧 변용들의 질서와 연관에 대한 지각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상상적 인식이다. 따라서 이것과 자연의 공통 질서에 따라 이루어지는 지각과의 차이는 동일한 상상적 인식 내부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이러한 다면적 지각의 노력을 통해 우리가 소수의 물체들 사이의 공통적 특성을 지각하게 되고, 이를 기반으로 삼아 좀더 많은 물체들 사이의 특성들에 대한 지각으로 인식의 범위를 확장하게 된다면, 우리는 좀더 많은 공통 통념들에 기초를 둔 인식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공통 통념들에 기초를 둔 2종의 인식은 상상적 인식 안에서 자신의 성립 조건을 발견한다고 말할 수 있으며, 이 점에서 우리는 들뢰즈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있다.34)


5. 맺음말


지금까지 우리는 스피노자의 notio communis 개념의 의미를, 데카르트와 비교하면서 살펴보았다. 이러한 논의는 데카르트와의 차이점을 드러내면서 스피노자의 용법의 고유성을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의의를 지닐 수 있지만, 이것만으로는 스피노자의 공통 통념 개념의 의미를 해명하기에는 충분치 못하다. 이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논의가 주로 {윤리학} 2부에 국한되어 있을 뿐 {윤리학} 5부나 {신학정치론}에서 볼 수 있는 공통 통념의 용법과 의미를 제대로 다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특히 {신학정치론}은 {윤리학}과 달리 엄밀한 학문적 논증이 아니라 합리적인 삶의 규칙에 따라 우중(愚衆)을 인도하기 위한 실천적인 지침을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으며 공통 통념 개념이 지닌 실천적 함의를 좀더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스피노자의 공통 통념 개념을 전체적으로 해명하기 위해서는 {신학정치론}에 대한 별도의 고찰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스피노자의 notio communis 또는 notio를 “개념”이나 “관념”으로 번역하기 어려운 이유 역시 좀더 분명히 드러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우리가 후속 논문에서 다룰 주제가 바로 이것이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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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는 이 글에서 스피노자의 경우 notio communis를 “공통 통념”이라고 번역했으며, 데카르트의 경우는 “공통 관념”이라고 번역했다. 동일한 용어를 이처럼 철학자에 따라 상이하게 번역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며, 사실 될 수 있는 한 해서는 안되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notio communis의 경우 이러한 차이는 이 개념에 대한 두 철학자의 인식의 차이에서 유래하며, 따라서 상이한 번역이 얼마간 불가피하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이 때문에 notio communis 및 notio라는 용어에 대한 번역의 문제는 이론적으로 의미 있는 쟁점을 제기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문제를 충분히 다루기 위해서는 별도의 논문이 필요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심사위원들(익명의 심사위원들의 꼼꼼한 논평에 대해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린다)이 제기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겸해 두어 가지 점만 지적해두기로 하겠다. 첫째, 우리가 “notio”를 “개념”으로 번역하는 것을 피한 이유는, 데카르트에서 “notio sive idea”라는 표현은 발견할 수 있는 반면 “notio sive conceptus”라는 표현은 전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주 9) 참조). 둘째, 본문에서 지적하겠지만 데카르트에서 notio는 인식론적 일의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관념”으로 번역할 수 있지만, 스피노자에서는 notio가 상상과 이성이라는 두 가지 상이한 인식의 종류에 속해 있기 때문에, 이를 “관념”이라는 용어로 번역하기는 어렵다. 셋째, 데카르트(나 스피노자)에서 notio를 “관념”의 동의어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해도, “idea”와 “notio”라는 두 가지 상이한 원어를 동일한 “관념”이라는 단어로 번역할 경우 상당한 혼란이 초래될 수 있다.(“개념”이라고 번역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또 이 경우 notio라는 개념이 지닌 독자적인 이론적 위상과 문제설정은 “관념”이라는 개념 속으로 파묻혀 버리게 될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notio에 관한 독자적인 역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통념”은 적어도 두 가지 측면에서 가능한 대안 중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첫째, “통념”이라는 용어는 notio가 항상 “보편적”이거나 “공통적”인 성격을 지닌다는 점을 잘 드러내줄 수 있다. 둘째, 또한 이 용어는 notio가 논증이나 증거를 통해 정당화된 것이 아니라 명증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이 두 가지 점만으로도 “통념”이라는 용어는 notio에 대한 역어로 충분한 자격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의 제안에 대한 좀더 충실한 논거들은 후속 논문에서 제시해볼 생각이다.     

2) 한편 󰡔신학정치론󰡕에서는 󰡔윤리학󰡕과는 다소 상이한 용법이 나타나는데, 자클린 라그레Jacqueline Lagrée는 이를 “종교적 공통 통념 이론”이라고 부르고 있다.(특히 Lagrée 1989; 1990 참조) 이는 스피노자 철학의 매우 중요한 부분이기는 하지만,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고 다른 곳에서 좀더 논의해보겠다.  

3) 이 글에서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저작에 대해 다음과 같은 약어를 사용할 것이다. 데카르트 전집의 경우 AT라는 약칭 아래 권 수는 로마자로(I, II, III ...), 페이지 수는 아라비아 숫자로(1, 2, 3, ...) 표시할 것이다. 국역본의 경우에는 “참고문헌”에서 밝힌 것처럼 역자의 이름에 따라 책을 표기하고, 쪽수를 적을 것이다. 스피노자 전집은 G라는 약칭 아래 역시 권 수는 로마자로, 페이지 수는 아라비아 숫자로 표시할 것이다. 스피노자의 각각의 저작 및 󰡔윤리학󰡕의 정의와 공리, 정리, 증명, 주석 등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표시한다.

      󰡔지성교정론󰡕: TIE, 󰡔소론󰡕: KV, 󰡔신학정치론󰡕: TTP, 󰡔윤리학󰡕: E

      정의: D, 공리: A, 정리: P, 증명: d, 따름정리: c, 주석: s, 보조정리: L, 서문: praep, 부록: app,

      E II P29s → 󰡔윤리학󰡕 2부 정리 25의 주석.

    KV II, 17, §5 → 󰡔소론󰡕 2부 17장 5절.

    TIE, 38 → 󰡔지성교정론󰡕 38절.

     TTP VI ad6 → 󰡔신학정치론󰡕 6장 주 6)   

4) “anteceptam animo rei quamdam informationem, sine qua nec intellegi quicquam nec quarei nec disputari possit.”

5) 이 점에 관해서는 특히 Goldschmidt 1984, pp. 114 이하; Lévy 1992, pp. 302 이하 참조.

6)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에서 프롤렙시스 개념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Goldschmidt 1984 참조.

7) Sandbach 1930이 프롤렙시스에 대한 가장 완고한 경험론적 입장을 대표한다면, 현대의 주석가들은 대개 온건 본유론적인 입장을 택하고 있다.

8) 이 점에 대해서는 Lagrée 1989; 1991; 1994를 각각 참조. 신스토아학파의 용법에서 두드러진 것 중 하나는 이른바 종교적 notio communis 이론이다. 이 이론은 뒤플레시스 모르네의 󰡔기독교 종교의 진리에 대하여De la vérité de la religion chrétienne󰡕(1581) 이래 17세기 전반에 걸쳐 상당히 확산되었으며, 특히 에드워드 허버트 셔버리Edward Herbert Cherbury의 이론과 스피노자의 이론 사이에는 상당한 친화성이 존재한다. Lagrée 1989; 1990을 각각 참조.

9) 앞서 지적했듯이 우리는 데카르트의 경우 notio communis를 “공통 관념”으로 번역했다. 반면 데카르트 국역본(이현복 I, II, 원석영)에서는 모두 이를 “공통 개념”으로 번역하고 있다. 하지만 데카르트가 “ideas sive notiones”, 곧 “관념들 또는 notions”라는 표현은 몇 차례에 걸쳐 사용하고 있는 반면(가령 AT VIII 358), 어디에서도 “ideas sive conceptiones”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고 있는 것을 고려해볼 때, 차라리 notio는 “관념”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10) 다시 말하면 데카르트가 말하는 “단순성”은 원자나 요소 또는 원초적 형상의 단순성이 아니라 인식하는 정신에 나타나는 가장 단순한 것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데카르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을 대체하는 새로운 인식의 질서를 수립한다. 이 점에 관한 좀더 자세한 논의는 Marion 1981, pp. 131 이하 참조.

11) 하지만 단순 본성 개념이 초기 저작, 특히 󰡔정신지도규칙󰡕에만 등장한다고 간주하는 것은 잘못이다. 장 라포르트가 지적하고 있듯이, 이 개념은 드물기는 하지만 후기 저작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Laporte 1988 참조.

12) 데카르트 자신은 이 10개의 “공리들 중 여럿”은 “좀더 잘 설명될 수 있었을 것”이며, 따라서 “공리들이라기보다는 정리들로” 제시되어야 했을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AT VII 164)

13) 또한 󰡔“성찰” 반론에 대한 두 번째 답변󰡕도 참조. “공리들 또는 공통 관념들axiomata sive communes notiones”(AT VII 164)

14) 데카르트에서 공통 관념들의 사례에 대한 좀더 포괄적인 고찰로는 Gouhier 1987, pp. 272-73 참조. 공통 관념의 사례들은 초기 저작인 󰡔정신지도규칙󰡕에서부터 󰡔뷔르만과의 대화󰡕 및 말년의 서신교환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15) “단순 관념들은 초기 저작에서는 보편자들(실체, 자아, 연장)의 일반 범주인 데 반해 「어떤 비방문에 대한 주석」에서는 개별 관념들도 포함하고 있다. 공통 관념들은 확실한 지식을 얻기 위해 특수한 관념들을 연결시킬 수 있는 공리들 내지 사유의 규칙 또는 근거율이다.”(Hart 1970, p. 121)

16) “선생께서 내가 제시한 것에 대해 제기한 세 번째 반론은, 공리들은 ‘notiones communes’로 간주되지 말아야 한다는 점입니다.”(G IV 13)

17) “axiomata seu notiones communes”(G I 127).

18) E I P8s2(G II 50); E II P38c2(G II 119); E II P40s1(G II 120); E II P44c2d(G II 126); E II P47s(G II 128)

19) TTP IV(G III 64); TTP V(G III 77); TTP VI ad6(G III 253); TTP VI(G III 88); TTP XIV(G III 179)

20) 따라서 notio communis가 󰡔윤리학󰡕이 이룩한 주요 혁신 가운데 하나라는 들뢰즈의 말은 일리가 있다. “실제로 공통통념들은 󰡔윤리학󰡕에만 고유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이전의 저작들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문제는 그 새로움이 단지 단어의 새로움일 뿐인 것인지 아니면 귀결들을 이끌어내는 개념의 새로움인지를 아는 것이다.”(Deleuze 1999, 170쪽) 번역 가운데서 “공통개념”은 “공통통념들”이라고 고쳤다.

21) 게루에 따르면 이는 유와 종, 범주 등과 같은 논리적 개념들을 의미한다. Gueroult II, p. 364.

22) 또한 󰡔철학원리󰡕 1부 71-72항도 참조.

23) “지성의 방향으로 진행되는 질서 없이sine ordine ad intellectum”라는 이 표현은 󰡔윤리학󰡕에서는 매우 드물게 나타나는 표현이고, 실제로 이것이 의미하는 게 무엇인지도 상당히 모호하다. 이는 대개 “지성에 대해 무질서하게/질서 없이”라고 번역된다. 가령 Curley는 “without order for the intellect”라고 번역하고 있고, Bartuschat는 “ohne Ordnung für den Verstand”(Spinoza 1999b)로, Pautrat는 “sans ordre pour l'intellect”(Spinoza 1999a)로 번역하고 있다. Appuhn과 게루(Gueroult II, p. 382)는 “désordonnée pour l'entendement”이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이는 표현은 약간 다르지만 내용상으로는 다른 번역들과 거의 같다. 반면 Shirley는 “without any intellectual order”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런 번역은 여기서는 별 문제가 없을지 몰라도 5부 정리 10에 대한 해석에서는 상당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우리는 Macherey의 번역(“sans ordre allant dans le sens de l'intellect”, Macherey 1997, p. 312)을 따랐는데, 이 구절의 의미를 제일 정확하게 표현해주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5부 정리 10에 다시 한 번 등장하는데, 거기에서는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하고 번역하느냐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된다.  

24) “철학의 기초는 공통 통념들이며, 자연으로부터만 이끌어내야 한다.”14장 (G III 179)

25) “Illa, quae omnibus communia, quaeque aeque in parte, ac in toto sunt, non possunt concipi, nisi adaequate.”

26) “Id, quod corpori humano, & quibusdam corporibus externis, a quibus corpus humanum affici solet, commune est, & proprium, quodque in cujuscunque horum parte aeque, ac in toto est, ejus etiam idea erit in mente adaequata.”

27) Gueroult II, pp. 327 이하 참조.

28) 갈릴레이나 데카르트가 확립하려고 했던 근대 수리물리학이 이러한 보편적 인식의 한 사례가 될 수 있다. 여기서는 개별 물체들이나 몇몇 물체들의 고유한 특징보다는 물체들이 물체들인 한에서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성질, 곧 속성이나 특성만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29) Ramond 1995 pp. 231 이하 참조; 또한 박기순 2006 주 28) 참조.

30) 반면 몇몇 주석가들은 이를 상상적인 질서, 또는 “자의적인 질서random order”나 “거칠고 정교화되지 않은raw, uncultivated” 질서로 간주하기도 한다. 예컨대 Yovel 1994, p. 95; Segal 2000, p. 14 주 5) 등 참조.

31) “우리는 다른 것들 없이 자신에 의해 자신을 인식할 수 없는 자연의 일부인 한에서 수동적이다/수동적으로 영향을 받게 된다Nos eatenus patimur, quatenus Naturae sumus pars, quae per se absque aliis non potest concipi.”(E IV P2)

32) 능동과 수동에 대한 스피노자의 정의는 3부 정의 2에서 제시된다. 이 정의에 대한 분석은 진태원 2006, 7장을 참조하라.

33) 2부 정의 3의 해명에서 볼 수 있는 “지각”과 “개념” 사이의 스피노자의 구별에 따르면 지각은 “수동성”을 더 함축한다는 의미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34) 공통 통념 이론에 대한 들뢰즈 논의의 문제점은 그의 모순적인 주장에 있다. 곧 그는 우리가 실존의 차원에서는 부적합한 관념들만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2종의 인식은 상상적 인식 안에서 자신의 성립 조건을 발견한다고, 곧 우리는 실존의 차원에서 적합한 관념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는 점에 있다. 이는 그의 스피노자 해석에 특유한 본질과 실존, 관계와 역량의 분리에서 비롯하는 결과다. 좀더 자세한 논의는 진태원 2006 4장과 6장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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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7-02-12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인쇄해서 읽겠습니다. ^^

menwchen 2007-02-12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좋은 글 감사합니다^^* 열심히 읽어야징~~ 두루두루 잘지내시고 건강하시죠?

ohhyuk83 2007-02-13 0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대철학]은 서양근대철학회 학회지인가요? 아직 학교도서관에는 없네요. 아주 최근에 나온건가요?

balmas 2007-02-13 0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인님/ ㅎㅎㅎ
멘님/ 예, 잘 지내고 있습니다. 좀 기진맥진하고 있는 것 빼고는 ... ^^;
오혁님/ [근대철학]은 이번 호가 창간호입니다. ^^

yoonta 2007-02-13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논문을 읽다보니 라틴어가 팍팍 튀어나오네요..-_-;;;
영어도 서툰 저로서는 언제쯤 발마스님 정도의 득도를 하게될지 까마득하게 느껴질 따름입니다..^^ 여튼 재미있게 읽고있습니다..^^

balmas 2007-02-14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윤타님/ ㅎㅎ 득도라뇨? 고전 문헌학 하는 분들이 보면 비웃습니다. 네오 라틴 몇 마디 읽는 정도에 무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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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사회주의 운동사 1』, 동녘

    (3) 공상적 사회주의에서 제 1인터내셔널까지의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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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맑스, 엥겔스와 맑스 이전의 사회주의’, 『역사적 맑스주의』, 새길

      - ‘맑스와 맑시즘’, 『역사적 맑스주의』, 새길

    (4) 맑스, 엥겔스의 정치적 저작들

      -『경제학, 철학 수고』, 『공산당 선언』, 『프랑스 내전』, 『고타강령 비판』

      - ‘Engels and the History of Marxism’ in The History of Marxism.

      -『공상적 사회주의에서 과학적 사회주의로』

      -『반뒤링론』 포이에르바하와 독일고전철학의 종말

    (5) 제 2인터내셔널 시기의 운동

      - ‘The Second International’ in History of The International Vol.1 : 1864-1914.

    (6) 제 2인터내셔널 시기의 이론

      - ‘제 1,2 인터내셔널 시기의 마르크스주의’, 『마르크스주의의 역사』, 중원문화.

      - 사회민주주의의 기초 / 칼 카우츠키 지음 ; 이상돈 옮김, 백의

      - 프롤레타리아 독재 /카를 카우츠키 저/강신준 역 | 한길사

      -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민당의 과제 /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지음 ; 강신준 옮김.

      -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와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이론’,『자본주의의 위기와 역사적 마르크스주의』공감

      - 자본주의 붕괴논쟁 / F. R. 한센 지음 ; 임덕순 옮김.

      -『룩셈부르크주의』, 풀무질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과 평의회 마르크스주의』, 공감

    (7) 레닌

      - ‘레닌’, 『마르크스주의의 역사』, 중원문화

      -『무엇을 할 것인가』, 『4월 테제』, 『국가와 혁명』

    (8) 제 3 인터내셔널과 소련 마르크스주의

      - History of the International Vol.2, 1914~1943

      - 코민테른과 세계혁명, 거름

      - “소련에서의 마르크스주의”,『마르크스주의의 역사』, 중원문화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과 소련사회주의』, 공감

      - “소련 마르크스주의의 자본주의 위기 논쟁”,『자본주의 위기와 역사적 마르크스주의』

      - 레닌주의의 기초 ; 레닌주의의 제문제 /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 유물론 /스탈린

    (9) 서구 마르크스주의

      - “서구마르크스주의”,『역사적 마르크스주의: 이념과 운동』, 공감

      -『서구마르크스주의 읽기』, 이매진

      - “The Marxism of the early Lukacs" in Western Marxism: A Critical Reader

      - “Interview with E. Balibar”, in Lukacs After Communism

      - “Theory and Practice in Gramci's Marxism", in Western Marxism

      - “The Frankfurt School”, in Western Marxism

      - Origin and significance of the Frankfurt School : a Marxist perspective / Phil Slater

      -『1968년의 목소리』, 박종철출판사

      -『유로코뮤니즘과 사회주의』, 새길

    (10) 중국의 마르크스주의

      -『중국 혁명사』, 세계

      -『中共』, 까치

      - China since Mao by Charles Bettelheim

    <참고자료>

      - A History of Socialist Thought: by G. D. H. Cole

      - Forging Democracy: The History of the Left in Europe, 1850-2000, Geoff Eley

      - One Hundred Years of Socialism: The West European Left in the Twentieth Century

      - Socialism and the Great War : the collapse of the Second International / by Georges Haupt.

      - Political thought in France : from the revolution to the fourth republic / by J. P. Mayer.

      - The Frankfurt School : its history, theories, and political significance / Rolf Wiggershaus ; translated by Michael Robertson.

      - 변증법적 상상력, 돌베개

      - 유로공산주의, 일월서각


   예비모임 : 2월 3일(토요일) 오후 6시 30분


   장소 : 신촌로터리 “새움”세미나실 (http://club.cyworld.com/seumnet 이나

            011-821-5371로 문의해 주세요)


2. 해방신학과 엠마누엘 레비나스


   담당 : 김성호 (성공회대 신학박사과정수료)


   목표

     이론과 실천은 두 개의 영적 과정이다(레비나스). 해방신학은 이론신학도 실천신학도 아니다. 해방신학은 이론신학이자 실천신학으로서의 영성신학이다. 해방신학은 가난한 자를 우선적으로 선택하여 그들의 권리를 회복하고자 노력한다. 따라서 해방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자가 되려면 반드시 해야하는 신학이다. 가난의 대물림이 확대되는 사회와 세계에서 가난한 자를 위한 투쟁은 여전히 유효하다. 다른 모든 사람도 구원의 대상이지만(구원의 보편성) 가난한 자의 생명을 더 우선적으로 돌봐야 하는(구원의 특수성) 것이 그리스도인의 책무이다.

     레비나스의 타자의 철학 역시 가난한 자만를 위한 철학은 아니지만 그들을 더 우선하여 돌봐야하는 윤리철학이다. 지식인은 그늘에 있는 민중의 위기를 재빨리 감지하여 그들의 생명이 꺼지지 않도록 보호하고 배려해야 한다.

     이번 강좌는 해방신학의 고전인 구티에레즈의 <해방신학>을 정독하여 해방신학에 대한 오해를 거둬내 이해를 심화하고, 레비나스에 관한 이차문헌인 <The Cambridge Companion to Levinas>를 번역하여 출판하고자 한다.(책은 상의 후 바꿀 수 있음)


   진행방식

     서로 상의한 뒤 진행한다. 부담없고 편안한 세미나를 지향한다. 만약 발제로 할 경우 <해방신학>을 11장으로 나눠 발제하고 토론한다. 두번째 방법은 독서후 토론만 할 수 있다. 레비나스 관련 번역은 논문 1편 혹은 2편을 한 사람씩 책임있게 정성껏 번역하고 발표한다. 몇 차례의 수정 과정을 거치고 출판사와 상의한 뒤 출판한다.


   참고문헌

    - 해방신학의 최근 경향에 대한 몇 편의 논문(추후 제공함)

    - 구스타보 구티에레즈, <해방신학-역사와 정치와 구원>, 분도출판사, 2000

    - 도로테 죌레, <고난>

    - <말해진 것보다 더 많이 말해져야 한다>

    - 레비나스, <전체성과 무한>, 불어판과 영어판

    - 레비나스, <존재와 다르게 또는 본질을 넘어>(김연숙 옮김, 근간), 불어판과 영어판

    - 레비나스, <존재한다는 것은 옳은가>(김성호 옮김, 근간), 영어판

    * 이 외에도 현대 프랑스철학에 관한 모든 책


   해방신학 및 레비나스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는 분도 참가할 수 있습니다. 번역은 의무사항이 아니므로 영어에 대해 부담가질 필요 없습니다. 번역된 발표문으로 공부하실 수도 있습니다. 해방신학과 레비나스를 연결해서 생각해볼 좋은 기회이니 많은 참석 바랍니다.


   일정은 예비모임에서 참가자들이 의논해서 결정할 것입니다.


   예비모임 : 1월 29일(월요일) 오후 6시 30분


   장소: 신촌로타리 “새움”세미나실

           (http://club.cyworld.com/seumnet이나 011-821-5371로 문의해 주세요)

 

 

 

II. "새움"의 진행 중인 세미나들 안내

  진행 중인 세미나에 참가하시는 것도 가능 합니다


 1. 생명의 사회사

   담당 : 김동광 (국민대 사회과학 연구소)

   시간/장소: 매주 화요일 오후 6:30-9시:30/ 연세대학교 백양관 508호


 2. 인권의 역사

   담당 : 류은숙 (인권연구소 “창” 활동가)

   시간/장소 : 매주 목요일 오후 7:00-9:30 / “새움”세미나실


 3. 자본론 2권 읽기 1

   담당 : 김동수 (활동가, ‘자본의 두 얼굴’의 저자)

   시간/장소 : 매주 화요일 오후 6:30-9시:30/ 연세대학교 백양관 507호


 4. 자본론 2권 읽기 2

   담당 : 류승민 (연세대 경제학과 박사과정)

   시간/장소 : 매주 화요일 오후 7:00-10:00 / “새움”세미나실


 5. 현대 정치철학 세미나-레닌을 중심으로

   담당 : 한형식 (연세대 철학과 박사과정수료)

   내용 : 레닌의 저작 (‘국가와 혁명’ ‘무엇을 할 것인가?’ ‘민주주의 혁명에서 사회민주주의의 두가지 전술’)을 중심으로 그의 정치사상을 살펴본다.

   시간/장소 : 매주 금요일 오후 6:30-9시:30 / 연세대학교 백양관 508호


 6. 정치철학 세미나

   목표 : 정치사상의 형성을 중심으로 근대철학 읽기

   시간/장소 : 매주 수요일 오후 6시 30분 / “새움”세미나실

   연락처 : 김지홍 (연세대 철학과 석사과정) 011-9890-1592 / for7594@nate.com


 7. 페미니즘 세미나

   목표 :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바라보는 여성 문제 / 대안 / 현재적 의미 모색

   시간/장소 : 매주 수요일 오후 6시 30분 / “새움”세미나실

   연락처 : 장희은(연세대 경제학과) 010-7141-0665 / greenstar623@gmail.com


 8. 자본론 1권 읽기

   목표 : 자본론의 꼼꼼한 독해를 통해 맑스의 경제사상 읽기

   시간/장소 : 매주 월요일 오후 2시 / “새움”세미나실

   연락처 : 유승민(연대 경제학과 박사과정) 011-9975-1392/ rufrl@hanmail.net

 9. 역사적 자본주의론 (1): 브로델을 읽는다

   목표 : 역사적 자본주의론에 이론적 자원을 제공한 브로델의 저작읽기

   시간/장소 : 매주 목요일 오후 6시 30분 / “새움”세미나실

   연락처 : 정웅기 (연대 사학전공 4학년), 011-9631-8357


 10. 헤겔 세미나 : 대논리학 읽기

   목표 : 헤겔에 대한 맑스주의적 독해

   시간/ 장소 : 매주 일요일 오후 1시 / 연세대학교 백양관 507호

   연락처 : 정재화 (연세대 철학과 박사과정) greenview@nate.com



* 이 세미나들은 아무런 참가제한이 없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 모두 오시면 됩니다.


* 회비는 참가하는 세미나 수에 무관하게 학생은 매달 1만원, 직장인은 2만원씩입니다.

  (수입이 없으신 분은 내지 않으셔도 됩니다.)


*문의: 011-9975-1392 류승민 또는 http://club.cyworld.com/se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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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7-01-20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 맑스주의의 역사 문의 후에 참여해 봐야겠어요. ㅎㅎ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

balmas 2007-01-21 0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한번 연락해보셈~ ^^

포월 2007-02-28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 두 번째 꼭지의 일부는 새움의 세미나가 아니라 연세대 대학원 학술협동조합의 기획강좌입니다. 생명의 사회사, 인권의 역사, 자본론 2권 읽기, 현대 정치철학 세미나 이렇게. 그러고보니 벌써 지난달에 이렇게 소개가되었군요. 쩝...
 

[월간 사회운동] 12월호에서 퍼옵니다.

아래 주소로 가시면 다른 기사들도 읽을 수 있습니다. :-)

http://www.movements.or.kr/bbs/view.php?board=journal&id=1653

 

갈등주의적 페미니즘을 향하여

한나 아렌트와 동일성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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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니 호니히 | 노스웨스턴 대학
역주: 한나 아렌트는 20세기 이후 정치 철학에서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아렌트는 그리 편치 않은 사이였다. 그 이유로는,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나치즘과 스탈린주의를 한 데 묶어 ‘전체주의’로 평가했다는 점, 『인간의 조건』에서 노동을 체계적으로 평가절하했다는 점, 그리고 『혁명론』에서 사회 혁명이자 민중 혁명이라는 이유로 프랑스 혁명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사실 우리로서는 아렌트가 제기한 쟁점 중 많은 부분을 여전히 받아들일 수 없다. [이 중 아렌트의 ‘전체주의’ 개념에 대한 체계적 비판은, Domenico Losurdo, Towards a Critique of the Category of Totalitarianism, Historical Materialism, volume 12:2, 2004를 참고하라.] 게다가 아렌트적 문제설정, 발리바르 식의 구분법을 사용하자면 ‘해방의 정치’를 주목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변혁의 정치’로서의 사회주의에 대한 대체물로 여긴다는 점도 우리가 볼 때 문제가 많은 접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렌트가 정치 및 해방에 관해 매우 많은 시사점을 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아렌트와 함께 아렌트에 맞서’ 그녀를 읽는 호니히의 작업은, 아렌트의 탁월한 통찰을 남김없이 취하면서도, 그 통찰에 따라 아렌트를 내부에서 ‘해체’함으로써 변혁의 정치와 양립가능하게끔 아렌트를 개조하는 비판적 독해의 전범을 보여 준다. 특히 이 논문에서 호니히는 (어떤) 페미니즘에 입각해서 아렌트를, (어떤) 아렌트에 따라 페미니즘을 각각 개조하는데, 우리는 특히 전자와 같은 접근이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고 생각한다. 이는 페미니즘이 보편적 이념 아래 종속된 특수한 분야가 아니라, 보편적 이념의 난점을 극복하고 그것을 한층 보편화하는 데 필수적일뿐더러 대체불가능한 지적․정치적 자원이라는 점을 실천적으로 입증하기 때문이다.
이 논문은 본래 Feminists Theorize the Political, ed. Judith Butler and Joan Scott (New York: Routledge, 1992)에 수록되었다가, 갈등주의에 대한 페미니즘적 비판에 대응하기 위한 새로운 후기를 포함하기 위해 상당히 개정되고 확장되어, Feminist interpretations of Hannah Arendt(Re-Reading the Canon), ed. Bonnie Honig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Press, 1995)에 재수록되었다. 이 번역본은 재수록본을 옮긴 것이다.


페미니즘 정치의 자원을 넓히려고 애쓰는 사람이 한나 아렌트라는 인물을 주목하는 것은 뜻밖이거나 심지어 거북스런 일이다. 엄격한 공/사 구별로 악명 높은 아렌트는, 그녀 식 정치의 독특한(sui generis) 성격과 공적 영역의 순수성을 보호하기 위해 사회 정의와 성별 쟁점들의 정치화를 금지한다. 이 같은 종류의 업무는 정치가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론화한 것처럼 전통적인 가사 영역에 속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아렌트는 자신이 “여성 문제”라고 부른 것들을 정치적으로 제기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다.1)
그렇다면 왜 아렌트를 주목한단 말인가? 내가 아렌트를 주목하는 것은 그녀가 성별 이론가라거나 여성이어서가 아니라, 페미니즘 정치에 크게 이로울 수 있을 갈등주의적(agonistic)[역주: 'agon'은 본래 고대 그리스에서 운동․음악․극 따위의 각종 경연이 벌어지는 장소를 가리키는 말로서, ‘갈등’이나 ‘분투’, ‘논쟁’, ‘고뇌’ 등의 의미를 갖고 있다. 또 고희극(古喜劇)에서 주요 인물들이 서로 대립되는 주장으로 갈등하고 언쟁하는 부분을 의미하기도 한다.]이고 수행적인 정치의 이론가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렌트를 주목하는 것은 그녀가 정치에 대한 자신의 관점에 포함시키는 것 때문일 뿐더러, 그녀가 정치에서 배제시키는 것(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때문이기도 하다. 이 같은 배제에서 활용되는 용어들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견고한 구별을 다루는 페미니즘 정치에게 유익하다. 아렌트가 공/사 구별에 집요하게 기대기는 하나, 그것을 정치화할 수 있는 자원들은 정치와 행위(action)에 관한 그녀의 설명 안에 제시되어 있다. 아렌트 정치의 갈등주의적이고 수행적인 충동에 기반하여 아렌트를 읽으려면, 바로 그 정치를 위해, 증대(augmentation)와 수정(amendment)이 미치지 않는 공/사 구별의 선험적 결정에 저항해야만 한다. (증대와 수정의 가능성을 영속시키려는) 이 저항 자체가 아렌트가 설명하는 정치 및 정치적 행위의 중요한 구성 요소다.
나는 (반드시 저항이라고 할 수는 없는) 저항력(resistibility)이 아렌트 정치의 필수불가결한 조건(sine qua non)이라는 점을 논하는 것으로 시작하고자 한다. 그런 다음, 정치 영역에서 신체를 배제할 때 아렌트가 사용하는 용어들을 간략히 검토할 것인데, 우선 아렌트가 이론화하는 바와 같은 신체의 일의적․전제적․불가항력적(irresistible) 성격에 초점을 맞춘 다음, 수행적 화행(話行, speech-acts)을 통해 정치적으로 쟁취된 동일성(identity)―아렌트는 이를 [높이] 평가한다―을 획득하는 행위하는 자아(acting self)의 다중성(multiplicity)을 조명할 것이다. 아렌트의 설명에서 동일성은 수행적 산물이지 행위의 본질이나 표현적 조건이 아니다. 아렌트 작업의 이 같은 특성이 작업 배치의 토대가 되는 공/사 구별과 결합되면서, 아렌트에 대한 페미니스트 비판자들이 그녀가 여성 및 여성들의 쟁점에 호의적이지 않은 정치를 이론화했다고 비난할 여지를 주었다.2) 하지만 내가 볼 때 페미니즘 정치에 대한 아렌트의 가치는 그녀가 표현적이고 동일성에 기반을 둔 정치를 기각한다는 바로 그 점에 있다. 문제는 아렌트의 이러한 기각이, 성별과 같은 사적 영역의 동일성들을 잠재적인 정치화의 장소들로 대하는 것에 대한 거부에 입각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나는 아렌트가 그녀의 유대(Jewish) 동일성과 그 동일성에 동반되는 책임의 문제를 놓고 게르숌 숄렘(Gershom Scholem)과 벌인 유명한 논쟁에 주목하는데, 이는 그녀가 (이른바) 사적 동일성들을 “전(前)정치적” 영역에 가두는 데 실천적으로 실패했음을 예증하며, 동일성의 정치와 보다 직접적으로 연루되기 때문에 더욱 고무적인 저항과 재의미화(resignification)의 대안 전략이 필요하다는 점을 가리킨다.
나의 결론은, 성과 성별을 이원적이고 구속적인 동일성의 범주로 구축하고 정치 공간을 공적․사적 영역으로 이원적으로 분할하려는 지배적 흐름에 (수행적이고 갈등주의적으로) 대항하려는 페미니즘에게 아렌트의 정치가 유망한 모형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아렌트 자신은 이처럼 그녀의 작업을 급진화하려는 것에 틀림없이 반대했을 테지만, 나는 이 같은 시도가 그녀의 (정초적) 문헌들을 증대시키는 것인 만큼, 그녀의 정치를 매우 잘 따르는 것이라고 믿는다.

정치적 행위와 저항력

아렌트가 정치와 행위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가장 간명하면서도 예리하게 논하는 것은 『미국 독립 선언』 독해에서다. 아렌트 설명의 모든 기본 요소들이 여기 다 나와 있다. 독립 선언은 정치적 행위이자 권력 행위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새로운 일련의 제도를 정초하고 새로운 정치 공동체를 구성/입헌(constitute)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이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어떤 것을 낳”고, “새로운 관계를 확립하며 새로운 현실을 창출한다.”3) 그것이 정치적 행위의 “완벽한” 사례인 까닭은 그 본질이 “‘행위를 옹호하는 논증’에 있다기보다는” 말 속에서 출현하는 행위(an action that appears in words)에 있기 때문이다.4) 이는 수행적 언표이자 화행으로서, 공적 영역의 대등한 이들(equals) 사이에서 그리고 그들 앞에서 수행된다.
“우리는 이 같은 진리가 자명하다고 생각한다”(We hold these truths to be self-evident)는 유명한 문구에 초점을 맞추면서 아렌트는, 새로운 정체(政體)의 권력과 권위가 자명한 진리에 대한 진술적/확인적(constative) 지시 관계(reference)가 아니라 “우리는 생각한다”는 수행문에서 나온다고 주장한다.5) 극적인 동시에 비지시적인 수행문은 새로운 정치 공동체를 낳는다. 그것은 “우리”를 구성한다. 이 화행은 모든 행위와 마찬가지로 그것이 언표(되고 반복)되는 순간(들)에 행위자들을, 말하자면 탄생시킨다.
“우리는 생각한다”는 수행문과는 대조적으로, 자명한 진리에 대한 진술적 지시 관계는 자유로운 합류가 아니라 강박과 필연에 대한 고립된 묵종(黙從)을 표현한다. 자명한 진리에는 “동의가 필요치 않다.” 그것은 “논쟁적 증명이나 정치적 설득 없이 강제한다.” 그것은 “어떤 점에서 ‘전제 권력’만큼 강제적이다.” 진술문은 “불가항력적”이다. 그것들이 “우리에 의해 견지(held)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들에 의해 견지된다.”(OR 192~93). 자유로운 정치적 행위를 위해 아렌트가 독립 선언과 그 정초에서 숙정하는 것은 그 폭력적이고 진술적인 순간들, 신과 자명한 진리, 그리고 자연법이라는 불가항력적인 정박점이다. 이 같은 함(doing) 배후에는 어떤 “~임”(being)도 존재하지 않는다. 함, 수행이 전부다.6)
아렌트의 설명에 따르면 새롭게 정초된 공화국 권위의 진정한 원천은 진술적 순간이 아니라 수행적 순간이고, 고립된 묵종이 아니라 공동 행위(action in concert)이며, 자명한 진리가 아니라 “우리는 생각한다”이다.7) 그리고 공화국 권위의 진정한 원천은 이제부터 그 유지 방식, 재정초와 재구성/입헌에 대한 개방성이 될 것이다. “따라서 헌법의 수정은 미국 공화국의 기원적 정초를 증대하고 확장한다. 물론 미국 헌법의 권위 자체는 수정되고 증대될 수 있는 그 본래적 역량에 있다.”(OR 202, 강조는 필자) 헌법적 수정과 증대, 재정초에 이처럼 우호적인 성향을 지닌 정체는 신과 자연법, 그리고 자명한 진리라는 정초적 정박점을 반드시 기각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알다시피 신은 증대를 허용하지 않고, 또는 신은 증대될 필요가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신, 자연법, 자명한 진리 이 세 가지 모두는 불가항력적이고 완전하다. 이 문장(紋章)들은 권력을 굳게 만든다. 이들이 수행문을 진술문으로 사물화(事物化, reification)하면 재정초와 증대가능성이 감소함으로써 정치의 공간이 폐쇄되고 정체의 권위가 박탈된다. 저항력, 개방성, 창조성, 그리고 미완성성은 이 정치의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아렌트가 공적 영역에 신체를 허용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고 고집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단순하고 일의적인 신체

인간 신체는 한나 아렌트에게 있어 순수 과정의 결정과 필연성, 불가항력, 모방성의 주문(主文)이다. 아렌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 볼 때 깨닫게 되는 가장 강력한 필연은 생명 과정으로, 이는 우리의 신체에 고루 미치고 신체를 항상적 변화 상태로 유지하거니와, 그 운동은 우리 자신의 활동과 독립하여 자동으로 진행되고 불가항력적이다 ― 즉 압도적으로 집요하다. 우리 자신이 하는 것이 적어지고 우리의 능동성이 낮아질수록 이 생물학적 과정이 더욱 강력하게 나서면서 그 본래적 필연을 우리에게 강제하게 되고, 모든 인간 역사의 기저에 깔린 단순한 발생의 운명적인 자동 운동으로 우리를 위압한다. (OR 59; 강조는 필자)

그렇다면 공적 영역의 행위가 [필요한] 이유 중 하나는 사적 영역에서 노동하고 일하며 (무엇보다) 궁핍화된 존재들을 괴롭히는 순수 과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다. 적어도 『혁명론』에서 아렌트가 말하는 것은 이런 식인데, 여기서 그녀는 프랑스 혁명의 막대한 실패를 기록하면서 그 책임을 “신체의 필요에 떠밀린 빈민들이 무대로 난입하여” “사회 문제”를 정치적 고려의 중심으로 만듦으로써 정치 공간을 실질적으로 폐쇄한 사실에 돌렸다(OR 59). 굶주리거나 가난한 신체를 대변하는 요구가 공적으로 만들어지면, 인간이 소유한 개성화하고(individuating) 능동화하는 능력은 침묵하게 된다. 난폭할 정도로 절박할 뿐더러 불가항력적이기까지 한 신체의 필요가 만족되기 전까지는 어떤 발화도, 어떤 행위도 있을 수 없다.
다른 저서인 『인간의 조건』에서 아렌트의 강조점은 달라진다. 여기서도 “사회적”인 것을 정치적으로 고려하는 것에 대한 그녀의 적의는 약해지지 않지만, “사회적인 것의 부상”은 행동주의(behaviorism)나 대중 사회, “가사적인”(housekeeping) 용무의 관리가 정치 영역을 찬탈한다는 견지에서 이론화되는데, 이런 것들은 신체의 집요함보다 그 압박이 덜하진 않지만, 불가항력 면에서 보자면 덜 집요해 보인다. 여기서 사회적인 것은 무대에 부상하긴 해도, 난입하진 않는다.
『혁명론』과 대조적으로 『인간의 조건』은 신체를 직접 논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신체의 문제가 다뤄질 경우 그 강조점은 신체의 불가항력보다는 그 모방성(imitability) 쪽에 놓인다.8) 아렌트의 말을 예로 들자면, 인간을 구별 짓는 정치적 발언과 행위에서 인간이 “전달(communicate)하는 것은 스스로이지, 단순한 무언가―목마름이나 굶주림, 애정이나 적의나 공포 따위―가 아니다.”(HC 176) 목마름이나 굶주림이 “단순한 무언가”인 까닭은 그것이 우리의 생물학적 실존의 공통적이고 공유된 특성이며, 그 자체로는 우리와 다른 이들을 어떤 의미 있는 방식으로도 구별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같은 공통성(commonality, 평범함)은 근대에 들어 과대해지는데, 사회적인 것이 극히 순응적인 일련의 배치로 발전하여 “셀 수 없이 다양한 규칙들을 부과함으로써 … 경향적으로 그 구성원들을 ‘정상화/표준화’(normalize)하고 그 행실을 바로잡으며 자발적 행위나 걸출한 성취를 배제”(HC 40)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행위해야 하는 이유는 신체를 벗어나 그 집요함에서, 일시적으로, 자유로워지려는 필요성에 있지 않다. 대신 아렌트가 초점을 두는 것은 정치와 행위의 해독성 있고 독특한 소용(sui generis goods)을 통해 사회적인 것의 정상화/표준화하려는 충동에서 벗어나거나 그를 억누르려는 필요성이다. 행위해야 하는 이유는 행위만이 특유하게 갖는 개성화의 역량, 그리고 구별 및 개성화, 걸출한 성취를 향한 자아의 갈등적인(agonal) 열정에 있다.
그들이 행위할 때, 아렌트의 행위자는 다시 태어난다(HC 176). 혁신적인 행위와 발언을 통해 그들은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보여주고, 자신들의 특유한 개인적 동일성들을 능동적으로 드러내며, 이로써 자신들을 인간 세계에 출현시킨다.”(HC 179) 그들이 공적 영역에서의 행위에 순간적으로 참여할 때 동일성들이 생겨나는데, 이는 그들을 목격한 목격자(spectator, 관객)들이 그들의 영웅적 수행에 관해 말하는 이야기 속에 영원히 새겨진다. 행위 이전에 또는 행위와 떨어져서는 이 자아는 동일성을 갖지 않는다. 그것은 파편적이고 불연속적이며 불분명할뿐더러 무엇보다도 전혀 흥미롭지 않다. 생명을 떠받치고 심리적으로 결정되어 있으며, 시시하고 모방가능한 사적 영역의 생물학적 피조물인 이 자아가 동일성을 얻는 것은 ― “누구”(who)가 되는 것은 ― 행위를 통해서다. 그것이 될 수도 있는 “누구”를 위하여, 자아는 근본적으로 우연적인 공적 영역의 위험을 무릅쓰는데, 여기서는 무엇이든 일어날 수 있고, 행위의 결과가 “무한하고” 예견할 수 없으며, “생명이 아니라 세계가 쟁점이 된다.”9) 이렇게 함으로써 그것이 내버리는 것은 “무엇임”(what it is, 현재의 본질)이라는 안락한 안전함, 사적 영역에서 그것을 정의(하고 심지어 결정)하는 역할과 특성들, “그것이 내보이거나 감추는 특징들, 재능들, 솜씨들과 단점들,” 그리고 그 작인(作人)을 특징짓는 의도와 동기, 목표다.10) 그렇기에 아렌트의 행위자들은 결코 자기-주권적이지 않다. 사적 영역에서 신체들(과 심리들)의 전제주의에 추동되는 그들은, 마찬가지로 공적 영역에서도 자신들이 하는 것을 결코 실질적으로 통제하지 못한다. 행위자로서 그들이 용감해야만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행위는 자발적이고, 무에서 솟아나거니와, 가장 혼란스러운 점은 그것이 스스로를 놀라게 한다(self-surprising)는 점이다. “타인들에게는 그렇게 뚜렷하고 틀림없이 나타나는 ‘누구’는 그 개인 스스로에게는 숨겨진 상태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11)
우리가 “무엇”인가("what" we are)에는 흥미롭거나 별다른 것이라고는 없으며, 심리적이고 생물학적인 자아에도 주목할 만한 것이 없다. 사적 자아의 특성은, 우리의 장기와 마찬가지로 “전혀 특유하지 않다”(HC 206). 아렌트는 생물학적 자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만일 이 내부가 드러난다면, 우리는 모두 비슷하게 보일 것이다.”12) 여기서 아렌트가 가치를 두는 수행적 화행과 대비되는 침묵은 난폭할 정도로 집요한 신체적 필요가 유발하는 묵언(muteness)보다는 차라리 엄격하게 (의사)전달적이고 극히 지시적인 ― 발화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지시적인 ― 일종의 진술적 말하기이자 말없는 (의사)전달이다. 여기서 “발화는 부차적인 역할을 노는데, 그 역할이란 (의사)전달 수단이거나 말없이도 성취될 수 있는 무언가에 대한 부산물이다”(HC 179). 사적 영역에서 언어의 초점은 (신체의) “즉각적이고 동일한 필요와 부족을 전달”하는 것이므로, 이는 의태적으로 수행될 수 있다. 이 단순하고 일의적인 신체는 발언의 도움 없이 이 일을 처리할 수 있다. 아렌트는 “기호와 소리면 충분할 것”(HC 176)이라고 말한다.

다중적인, 행위하는 자아

유일하고 일의적인 신체와는 대조적으로, 행위하는 자아는 다중적이다. 이 갈라진 자아는 진술적인 면과 수행적인 면으로 갈라진 독립 선언의 구조 위에 겹쳐진다. 진술문과 신체는 모두 전제적이고 불가항력적이며 일의적이고 창조성이 없다. 양자 모두 분란을 일으키며(disruptive), 무대에 부상하거나 난입하여 정치 공간을 폐쇄시키겠다고 늘상 으르렁댄다. 이 항존하는 위협 때문에 우리는 신체적이거나 진술적인 강박의 침입에 맞서 공적 영역, 수행성의 공간을 방심하지 않고 경계(警戒)해야 한다.
행위하는 자아는 선언의 수행적 순간과 유사하다. 그것은 자유롭고 (자기)창조적이며 변혁적이고 모방할 수 없다. 아렌트의 수행문들은 복수성(plurality, 다원성)을, 그 행위자들은 다중성을 상정한다. “우리는 생각한다”는 수행문의 힘은 구별되고 다양한 개인들에 의해 현행화되는데, 이들은 행위 이전까지는 세계에 대한 관심과 구별을 향한 갈등적(agonal) 열정을 제외한다면 별 다른 공통점을 갖지 않는다(OR 118 곳곳). 마찬가지로 아렌트의 행위자들이 행위하는 것은 그들의 이전 본질(what they already are) 때문이 아니며, 그들의 행위는 사전적인 안정된 동일성을 표현하지 않는다. 그들은 불안정하고 다중적인 자아를 전제하는데, 이 자아가 추구하는 것은 기껏 해 봤자 행위에서의, 그리고 행위의 대가인 동일성에서의 일시적인 자기실현이다.
아렌트는 이 다중적인 자아를 투쟁의 장소로 특징짓는데, 이 투쟁은 자아가 행위하는, 그리고 수행적 산물인 동일성을 쟁취하는 각각의 순간에 일시적으로 진정된다. 투쟁은 사적인 자아와 공적인 자아 사이에서 벌어지는데, 전자가 위험을 기피하는 폐인(stay-at-home)이라면 후자는 우연적인 공적 영역에서 활동하는 용감한 심지어 경솔한 행위자다. 이 같은 사적․공적 충동의 갈라짐이 자아에 새겨지지만, 자아의 파편성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사적 영역에 홀로 있을 때에도 이 자아는 세 가지 구별되고 경합하며 양립불가능한 정신 능력들―사고, 의지, 판단―에 고취되어 서로 갈등하는데, 이 각각의 능력 또한 내적으로 쪼개지고 “반사되며” “스스로에게 다시” 되튕겨진다. 아렌트는 항상 “이 같은 내적 저항이 남아 있다”13)고 말한다. 자율성이 부과된 구축물이라고 아렌트가 주장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것은 파편적이고 다중적인 자아에게 일의성을 부과한다. 그것은 “스스로의 자아에 대한 지배와 타인들에 대한 통치에 의존하는 정복”을 포함한다. 그것은 아렌트가 설명하는 자아가 그것에 대해 저항하는 구성체(formation)다(HC 244). 이 자아는 결코 하나가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아렌트가 (때때로) 정치라 부르는 갈등주의적인 투쟁의 장소다.14) 그리고 아렌트는 이를 찬성하는데, 왜냐하면 니체와 마찬가지로 그녀는 이 같은 자아의 내적 다중성이 그 힘과 활력의 원천이자, 창조적인 수행적 행위의 조건 중 하나라고 보기 때문이다.15)
일의적 신체와 다중적 자아 간의 이 같은 갈라짐은 개별적 자아들의 속성으로 제시되지만, 그러나 그것들은 아렌트가 친애하는 모형인 고대 그리스에서 일부 자아들을 타인들과 구별 짓기 위해 실제로 작동한다. 여기서 행위의 경험은 극히 소수에게만 허용된다. 신체의 판에 박힌 일상과 집요함은 『인간의 조건』에서 암묵적으로 ― 고대 그리스에서 명시적으로 그랬던 것처럼 ― 여성과 노예(그리고 또한 아이들, 노동자들, 그리고 폴리스의 모든 비-그리스인 거주자), 곧 “신체적 기능과 물질적 용무들이 숨어 있어야 하는”16) 사적 영역에서 신체와 그 필요에 전념하는 노동하는 신민들(subjects, 주체들)과 동일화된다. 이들 사적 영역의 주민들은 신체와 본성이 그들에게 강요하는 요구, 그리고 그들을 재산으로 소유하는 가구(household)의 주인이 그들에게 지시하는 명령에 수동적으로 종속(subject)된다. 지루할 정도로 뻔하고 반복적이며 순환적인 본성의 과정 및 가구의 전제주의 양 쪽에 희생당하는 그들은, 아렌트가 공적 영역에서의 행위와 동일시하는 자유를 행할 수 없게끔 결정되어 있다. 반면 자유로운 시민은 사적 영역에서의 자신들의 사적 필요를 돌볼 수 있지만(그보다는 신민들이 돌보게 만들 수 있지만), 그런 다음 이 숙명적이고 생명을 떠받치는 용무를 뒤로 하고 자유와 발언과 행위의 공적 영역에 입장할 수 있다. 사실 이 용무를 뒤로 할 수 있는 그들의 능력이야말로 그들이 행위할 능력이 있다는 표지다. 정치에서는 어쨌거나 “생명이 아니라 세계가 쟁점인 것이다.”
자유로운 시민들이 이처럼 사적 영역에서 공적 영역으로 주기적으로 통행하는 것을 보면, 이 두 영역의 간극이 협상 불가능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HC 24). 그러나 이는 오직 시민들에게만, 그러니까 자신들의 신체화(embodiment) 조건과 본질적으로 동일화되지 않는 이들에게만 적용된다. 이는 실질적으로 그들의 시민권을 측정하는 기준이다. [반면] “타자들”, 그러니까 그들의 동일성이 그들의 신체화와 동일하다(이것이 그들의 야만을 측정하는 기준이다)는 본성 자체 때문에 결코 시민이 될 수 없는 이들의 경우 공/사의 불통(不通)을 협상할 여지가 없다.
이처럼 문제점이 많은 정치적 행위를 아렌트가 폴리스에 귀속시키는 것은 틀림없지만, 이를 아렌트 자신에게 귀속시키는 것이 옳을까?17) 분명 아렌트는 그녀 식의 사적 영역과 거기서 일어나는 노동 및 작업 활동들이 특정 계급의 인민이나 신체, 또는 특히 여성과 동일화될 수 있는 것처럼 말하곤 한다. 그러나 한나 피트킨이 지적하듯, 경우에 따라 사적 영역과 노동 및 작업 활동들은 특정한 계급이나 집단보다는 “공적 영역이 반드시 경계해야 하는 특정한 태도(들)”을 표상한다.18) 예를 들어 노동, 곧 “인간 신체의 생물학적 과정에 조응하는 활동”이라는 하나의 양태 안에서는, 생명의 숙명론적 본질과 특정한 종류의 합리성의 도구적 성격이 우리를 너무나 철저하게 지배하는 나머지 정치의 자유 및 특유의 생성적인 수행성이 떠오를 수 없다(HC 7). 노동 및 작업에 관해 아렌트가 정말로 근심한 것은 그것들이 행위를 방해하거나 파괴하는 특수한 감성들(sensibilities)을 요구하고 일으킨다는 것이기 때문에, 피트킨은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아마도 ‘노동자’는 그의 생산 방식이나 빈곤이 아니라 그의 ‘공정’(工程, process) 지향적인 관점에 따라 식별되어야 할 것이다. 아마도 그가 필연에 떠밀리는 것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고, 그가 스스로를 행위할 능력이 없이 떠밀리는 존재라고 간주하기 때문일 것이다.”19)
또는 차라리 정치적 행위에서 배제되는 것은 아마도 노동하는 감성일 텐데, 이 감성은 활동으로서의 노동에 특징적인 것으로 간주되지만, 어떤 특정 노동자의 사고를 특징지을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거니와, 이 감성은 노동자가 노동할 때 표현되는 노동하는 본성이나 본질을 신호하는 것으로 간주돼서는 안 된다. 이 함 배후에는 어떤 “~임”도 없다. 동일한 분석이 작업에도 적용된다. 이 설명에서는 정치적 행위에서 배제되는 개인들의 명확한 계급이란 없다. 대신 정치는 다양한 감성들, 태도들, 성향들, 그리고 접근들로부터 보호되는데, 이 모두는 모든 자아들과 주체들을 일정한 정도로 구성하고, 자아를 지배하기 위한 투쟁에 참여하며, 아렌트가 가치를 두는 행위의 이해(들)과 양립할 수 없다. 요컨대 노동, 작업, 행위를 감성들로 해석함으로써 그것들을 탈본질화하거나 탈자연화(denaturalize, 변성(變性))할 수 있다. 각각은 스스로를 수행적 산물로, 즉 어떤 계급이나 성별의 진정한 본질의 표현이 아니라 개인들과 사회들, 그리고 정치적 문화들의 행위와 행실, 규준, 그리고 제도적 구조들의 항상 (침전된) 산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20)
노동과 작업과 행위를 이처럼 (경합하는) 감수성들로 읽는 것은 자아를 다중성으로 보는 아렌트의 관점과 양립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신체를 진술의 폐쇄와 모방성, 불가항력의 주문으로 취급하는 아렌트의 견해를 부드럽게 전복하는 길을 가리킬 것이다. 아렌트의 설명에서 노동은 결국 신체적 기능일뿐더러 신체에 전념하는 양태, “생명 과정 자체에 필요한” 사물들에 몰두한 양태가 되는 것이다. 만일 노동(모든 것을 때때로 떠미는 결정적 감성)이 수행적 산물일 수 있다면, 신체 자체는 왜 안 되겠는가? 노동, 작업, 행위를 감성으로 보는 이 같은 독해는 신체를 탈본질화하고 탈자연화하고, 아마도 복수화하며, 어쩌면 심지어 그것을 아렌트적인 의미에서 수행적 산물, 행위가 가능한 장소로 보게 하는 방향으로 우리를 밀고 가지 않겠는가?

공과 사를 구별하기

이렇게 아렌트의 설명을 급진화하는 데 방해되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수행문과 진술문이라는 표제 아래 함께 모아 둔 일련의 구별들에 아렌트가 의존한다는 점이다. 아렌트는 이 구별들을 협상할 수 없고 겹치지 않는 이원적인 대당으로 다루며, 그것들을 그녀 작업의 (움직이는) 중심에 놓여 있는 (역사적으로 매우 불평등한) 공/사 구별 위에 배치한다. 물론 앞으로 밝혀질 것처럼 방해가 되는 것은 하나 이상인데, 왜냐하면 아렌트가 다층적인 체계로써 자신의 공/사 구별을 확고히 하기 때문이다. 이 구별은 수많은 이원성을 낳는데, 각각은 그 이전 것에 덧붙여진 새로운 층의 보호막이며, 이들은 아렌트가 그것에 할당한 존재론화하는(ontologizing) 기능에 저항하는 구별을 더 견고하게 지키려는 의도를 갖는다. 수행문 대(對) 진술문, “우리는 생각한다” 대 “자명한 진리”, 다중적 자아 대 일의적 신체, 남성 대 여성, 저항가능한 대 불가항력적인, 용감한 대 위험회피적인, 발언 대 묵언적 침묵, 능동적 대 수동적, 비범한 대 평범한, 개방적 대 폐쇄적, 권력 대 폭력, 자유 대 필연, 행위 대 행실, 비범한 대 평범한, 모방불가능한 대 모방가능한, 분란 대 반복, 빛 대 어둠, 요컨대 공 대 사.
왜 이렇게 많은가? (선)긋기가 아렌트적 의미에서 비범한 행위긴 하지만(그것은 새로운 관계들과 새로운 현실들을 창조할 수 있는 힘을 갖는다), 이 구별을 긋는 것 자체에서 아렌트는 불안한 반복의 순환에 사로잡힌다. 이 모두를 필요로 할 정도로 희박한 구별이 침식당하는 것에 저항하려는 영웅적 노력 안에서, 이원적 구별과 형용사적 쌍들은 서로의 위에 덧쌓인다. 참으로 희박하지 않은가. 아렌트의 설명에서 이 같은 구별들이 서로 침투하는 수많은 사례들이 있다. 아렌트는 공적 영역이 사적 영역에 너무나도 쉽사리 식민화되고 사회적인 것으로 전환된다는 사실에 관해 아주 솔직하다.(그녀가 『인간의 조건』과 『혁명론』에서 대답하는 것이 바로 이 문제다.) 그녀의 솔직함 때문에 우리는 이 구별들을 긋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 사적 영역의 제국주의에서 공적인 것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 역도 성립한다. 아렌트에게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사적 영역의 신뢰성, 일의성, 그리고 평범함을 행위와 정치의 분란에서 보호하는 것이다.21) 요컨대 아렌트는 행실뿐만 아니라 행위 자체도 길들인다. 그녀는 행위에게 근거지라 부를 만한 장소를 부여하고, 행위에게 그것이 속해야 하는 이곳에 머무르라고 말한다. 그러나 물론 행위는 이를 거부한다.
행위의 진정한 위험은 바로 여기, 이 거부에 있다. 스스로를 놀라게 하는(self-surprising) 행위의 특성은, 행위가 항상 그것에 대한 우리의 의도대로 되어 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제한되지 않는다. 또한 행위자로서의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된 것이 “누구”인지에 대해 완전히 확신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제한되는 것도 아니다. 행위가 스스로를 놀라게 하는 것은 또 다른 의미, 곧 그것이 우리에게 일어난다(it happen to us)는 의미에서다. 우리는 수행할 것을 결정하고 난 후에 공적 영역에 입장하여 그 영역을 특징짓는 우연성에 우리의 수행을 종속시키는 것이 아니다. 종종, 정치적 행위는 우리에게 도래하며, 신중하다거나 계획적이라거나 의도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우리를 휘말리게 한다. 행위는 그 행위자들을 생산한다. 우연적이고 일시적으로(episodically, temporarily) 우리는 행위의 갈등주의적 성취다. 아렌트의 설명에서 미국 혁명은 미국 혁명가들에게 일어난 것이었다. “그러나 혁명으로 이끈 운동은 부주의(inadvertence)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혁명적이지 않았다”(OR 44). 그리고 때때로, 특히 그녀가 의지를 설명할 때, 행위는 원래 사적 영역에서, 사적인 자아에게 일어난다.
아렌트는 의지를 행위의 선행항로 간주하지만, 그것이 실은 행위를 지연시킨다는 점에서 기묘한 종류의 선행항이다. 반사적이고, 내적이며, 원함과 원치 않음(willing and nilling)의 잠재적으로 영원한 동역학에 사로잡혀 있고, 이 동역학을 저지할 능력이 없는 의지는 구원을 기다린다. 그리고 구원이 도래할 때, 그것은 행위라는 형태 자체로 온다. 행위는 의지의 강박적인 반복에 분란을 일으킴으로써, 의지의 마비적 “우려와 근심”에서 자아를 해방한다. 행위는 사적 영역에, 말하자면 진입한다(come in). 그것은 아직 채비를 갖추지 못하고 완전히 의지를 굳히지 않은(왜냐하면 또한 여전히 원치 않기 때문에) 사적 영역의 주체에게 일어난다. 쿠데타처럼 행위는 “벨레(velle, ‘원한다’는 뜻의 라틴어)와 놀레(nolle, ‘원치 않는다’는 뜻의 라틴어) 간의 갈등을 중단”시키고 의지를 구원한다. “즉 의지(Will)가 구원받는 것은 의지하기를 그치고 행위하기 시작함으로써이며, 중지가 의지하지 않을 의지(will-not-to-will)의 행위에서 비롯할 수 없는 것은 이것이 또 다른 의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22)
공/사 영역의 이종교배 사례들은 넘쳐 난다. 그것들은 이종교배의 불가능성, 도착(倒錯), 기괴함을 설명하게 되어 있는 구별들만큼이나 다양하다. 그렇다면 성/성별 수행성을 다룬 한 페미니스트 이론가처럼 “신체 자체에 수행성을” 적용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23) 무엇이 공/사 구별의 희석을 금지하는가? 사적 영역의 진술적 동일성들이 실제로는 개인들, 사회들, 그리고 정치적 문화들의 규준들과 제도적 구조들, 행실들, 행위들의 (침전된) 산물이라는 것을 폭로하는 것에 대한 벌이 무엇인가? 내기에 걸린 것은 무엇인가?
아렌트에게서 내기에 걸린 것은 행위 자체의 상실, 행위가능한 것(actionable, 기소할 수 있는)이 허용되는 영역의 상실이다. 이것이 근심의 진정한 원인이며, 특히 사회적인 것의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규칙들”이 정상적이고 행실 바른 주체들을 생산하는 데서 거둔 놀랍고 불편한 성공을 감안한다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것을 허용하기 위해 아렌트는 공적 영역에서 거의 모든 내용을 비워 버린다. 내용을 가진 것들은 어쨌거나 진술문이고, 아렌트의 이론화에서 폐쇄의 장소이며, 수행문에 대한 불가항력적인 장애물이다. 한나 피트킨이, 저 시민들은 “저 광장(agora)에서의 끝없는 회의(palaver)에서 [무엇에] 관해서 함께 얘기하는가”라고 어리둥절하게 여기는 것은 이 때문이다.24) 아렌트가 행위를 사실상 형식화하는 것, 협상불가능한 공/사 구별로써 행위를 보호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사회적인 것의 그 어떤 부상보다, 표면적으로는 불가항력적인 신체들의 그 어떤 난입보다 더 행위를 상실하고 폐색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
공/사 구별의 침투성, 부정확성, 모호성은 그것을 포기할 이유가 되지 못한다. 그보다는 희석의 가능성을 시사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불가항력적으로 새겨진 아렌트 자신의 공/사 구별을, 모래 위에 그어진 선, 그 자체로 부당한(illicit) 진술문, 구성적인 표식이나 문헌, 반박․증대․수정되기를 갈등주의적으로 호소하는 것으로 여긴다면 어떻겠는가? 그리고 우리가 공과 사의 지리적이고 독점적인 은유를 없애는 것으로 시작한다면 어떻겠는가? 아렌트의 공적 영역을 고대 그리스의 아곤과 같은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행위를 일으킬 법한 ― 지형(학)적인(topographical) 동시에 개념적인 ― 다양한 (갈등주의적) 공간들의 은유로 대한다면 어떻겠는가? 우리에게 남는 것은 사건으로서의 행위, 평범한 사물의 질서에서 새로움과 구별로의 길을 여는 갈등주의적 분란, 불가항력적인 것에 대한 저항의 장소, 다양한 행실을 구성하고 통치하며 통제하려는 정상화/표준화하는 규칙에 대한 도전이다. 그리고 우리는 훨씬 더 광범위한 진술/확인의 정렬 안에서 정치적 행위의 장소들을 식별할 수 있는 위치에 설 것인데, 이 정렬의 범위는 신이나 자연, 기술, 자본 등의 자명한 진리에서부터 동일성, 성별, 인종, 종족성 등에 이를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행위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될 것이다 ― 사적 영역에서 말이다.
아렌트는 물론 그녀의 설명을 이처럼 수정하는 것이 지나친 정치화라고, (낸시 프레이저가 아렌트를 대변해서 쓰듯) “모든 것이 정치적일 때, 정치적인 것의 의미와 종별성은 희미해진다.”25)고 염려할 것이다. 프레이저가 볼 때 정치에 대한 아렌트의 이론화는 하나의 역설에 빛을 비춘다. 만일 정치가 모든 곳에 있다면, 그것은 아무 데도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수정된) 설명에서 모든 것이 정치적이지는 않다. 그것은 단지 정치화로부터 존재론적으로 보호받는 것은, 필연적으로나 자연적으로나 존재론적으로 정치적이지 않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뿐이다. 공과 사의 구별은 정치 투쟁의 수행적 산물로서, 어렵사리 획득되고 항상 일시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물론 이 역설은 역전될 수 있다. 정치적인 것과 비정치적인 것의 분할을 정초적으로 보존하려는 충동은 정치적인 것의 보존을 염려하는 것이라고 표명되지만, 그 자체는 반정치적인 충동이다. 아렌트는 이를 알았다. 독립 선언의 진술적이고 정초적인 토대를 그녀가 비판할 때 기초로 삼은 것이 바로 이것이다. 선언의 자명성에 수행성을 적용하도록 그녀를 자극한 것도 이것이다. 그리고 동일한 충동이 아렌트의 공/사 구별 자체에 수행성을 적용하도록 자극할 수 있다.
이 같은 갈등의 분산은 아렌트가 이론화한 정치의 또 다른, 사뭇 상이한 계기에 의해 정당화될 수도 있다. 아렌트는 상황의 긴급함 때문에 정치가 지하에서 움직이도록 강제되는 시간이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녀는 점령 프랑스의 지하 정치에 유의하면서, 저항의 장소, 전복적인 정치 행위의 네트워크가 증식하는 것에 가치를 부여했다.26) 아렌트가 “사회적인 것의 부상”과, 틀에 박히고 관료적이며 관리적인/행정적인(administration) 정체(政體)에 의한 정치의 전위라고 묘사한 것을 점령이라는 용어로 불러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제도적 장소가 부재할 때 페미니즘 정치는 지하에 숨어들면서, 개인적이면서도 제도적인 동일성들의 틈과 균열에서 조심스럽게 스스로의 거처를 정하고, 새로운 관계들과 현실들을 확립한다는 희망을 품고 수행적이고 갈등주의적이며 창조적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

사적 영역에서 행위하기

사적 영역의 자명성 안에 위치한 갈등주의적인 수행성의 정치라는 이상의 개념을 탐색한 것은 주디스 버틀러인데, 그녀는 특히 성과 성별의 구축 및 구성에 초점을 둔다. 버틀러는 사적 영역의 진술―아렌트가 자연 순환의 무심하고 지루하며 완벽하고 억압적인 반복이라고 서술한 것―의 가면을 벗기고, 일상적으로 성/성별 동일성을 (재)생산하는 수행성으로 이들을 재서술한다. 이 같은 수행들은 “이성애적 계약”에 의한, 그리고 그것에 중심을 둔 이원적인 성별 구성의 규제적 실천의 강제적 산물이라는 것이 버틀러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 행위들은 “내적으로 불연속적이다.” 그것들이 생산하는 동일성들은 “이음매가 없지”(seamless) 않다. “지시대상[자아]의 다중성과 불연속성은 기호[성/성별]의 일의성을 조롱하고 이반한다.” 이 조롱(mockery)과 반란의 공간들, “이런 행위들 간의 자의적 관계 안에, 다른 식으로 반복할 가능성 안에” “성별 변혁의 가능성들”이 있다.27) 전복적인 반복은 대안적인 성/성별 동일성들을 수행적으로 생산할 것인데, 이 동일성들은 증식할 것이고 이 같은 증식(과 전략적 전개) 속에서 지금 성/성별 동일성들을 규제하고 남김없이 구성하려 드는 사물화된 이원성들에 대항하여 저항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전략은 동일화주의적인(identitarian) 관리, 규제, 표현에 저항하거나 거기에서 벗어나는 공간들을 식별함으로써 동일성들을 수행적 산물로 탈권위화․재서술하고, 성공적인 진술문을 열망하는 동일성들의 가면을 벗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렌트의 용어를 빌자면 이 전략은 “우리가 생각하는” 성/성별 동일성들이 행위를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수정되고 증대될 수 있다는 믿음에 의지한다. 정치 이론의 과제는 새로운 시작들을 환대하는 (긴장과 결정불가능성, 그리고 자의성의) 공간들을 넓힘으로써 (재)정초의 실천을 돕고 북돋는 것이다.28) 이들은 정치의 공간, 수행적 자유의 (잠재력 있는) 공간들이다. 여기서는 사적 영역에서 행위가 가능해지는데, 왜냐하면 사회적인 것과 그 정상화/표준화의 장치들은 아렌트가 지나치게 속단한 것과 달리 완벽한 폐쇄를 획득하는 데 시종일관 실패하기 때문이다. 사회적인 것의 야망이 이처럼 실현되지 못한다는 것은 정치를 마비시키는 응고되고 딱딱하며 사물화되고 자연화된 동일성들과 정초들을 전복할 수 있다는 것, 행위가능한 것의 영역을 넓힐 수 있다는 것, 수행적 행위들을 진술적 진리들로 침전시키는 것에 저항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정치와 동일성의 문제에서는 그것을 바로 잡는다거나(get it right) 완전히 끝장내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신념을 견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불가능성은 아렌트의 공적․사적 영역의 필요와 억압을 구조화한다. 그리고 이는 어떤 동일성의 정치라도 문제시하고 저항할 수 있는 훌륭한 이유를 제공해 준다.
한나 피트킨은 이익, 그리고 공유된 물질적 필요 및 용무의 재현/대의(representation)의 재판정이나 실천으로 정치를 이론화할 것을 거부하는 아렌트를 열렬히 비판한다.29) 아렌트의 정치가 아무런 함의나 내용도 없을 만큼 형식적일 수 있다는 것을 근심한다는 점에서는 그녀가 옳다. 그러나 피트킨은 아렌트가 제시한 전망의 유망함(promise, 약속)을 헤아리는 데는 실패한다. 정치적 행위가 우리가 “무엇”인지를 ― 즉 우리의 사물화된 사적 영역의 동일성들을 ― 재현/대의하는 장소가 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아렌트의 태도에 유망함이 있다. 아렌트의 관점에서 재현/대의의 정치는 부과적이고 어긋나는(ill-fitting) 이익들과 동일성들의 그릇된 공통성을 투사한다. 더욱이 그것은 중요한 대안을 차단한다. 그 대안이란, 우리가 “무엇”인지를 재생산하고 재-현(re-present)하는 대신, 우연적으로(episodically) 새로운 동일성들을 생산함으로써 우리가 “누구”인지를 갈등주의적으로 낳는 수행적 정치인데, 이 동일성들의 “새로움”은 “행위하는 인간들/여성들([wo]men)에 의해 ― 비록 의식한 것은 아니더라도 ― 시작되고, 그들의 후손에 의해 널리 상연되고 증대되며 오래 간직되는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이 될 것이다.30)

동일성의 정치

아렌트의 행위 이론에서 수행성이 중심성을 차지하는 것은, 성별이나 인종, 종족성 또는 국적(nationality, 민족성) 같은 공유된 (공동체) 동일성들을 표현하는 것으로 정치를 바라보려는 시도에 아렌트가 반대하는 데서 비롯한다. 수행성과 갈등주의는 아렌트의 설명에서 우연의 일치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다. 아렌트의 정치가 항상 갈등주의적인 것은 그것이 표현주의의 매력에 저항하기 때문인데, 이는 자아를 그 동일성들이 항상 수행적으로 생산되는 복잡한 다중성의 장소로 보는 그녀의 관점을 위한 것이다. 이 갈등주의는 주체성의 무엇-임(what-ness)의 자기만족적 친숙함을 삼가고, 행위와 새로운 관계 및 현실들을 발생시킬 수 있는 상쾌한 역량을 위해 사회적인 것의 유혹적인 안락을 거절한다.
아렌트의 시각에서 볼 때, 선재적(先在的)이고 공유되며 안정된 동일성의 기초 위에 스스로를 구성/입헌하는 정치 공동체는, 정치의 공간을 폐쇄하고 정치적 행위가 상정하는 복수성과 다중성을 동질화하거나 억압할 위험이 있다. 아렌트는 복수성이나 다중성을 극복하려는 시도가 반드시 “공적 영역 자체의 폐지”와 “모든 타인들에 대한 자의적 지배,” 또는 “실재적 세계를 이 타인들이 아예 존재하지 않을 상상적 세계로 교체”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한다(HC 220, 234). 이 같은 교체를 방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정치 공동체들의 비동일성과 이질성들로써, 그리고 또한 정상화/표준화적 주체성의 구축과 자율성의 부과에 대한(또한 성/성별 동일성들을 남성과 여성,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의 이원적 범주로 형성하려는 것에 대한) 자아의 저항으로써 정치 공간들을 보호하는 것이다. 자아를 정의하려 드는 사회적, 심리적, 사법적 범주들에 대한 자아의 갈등주의적 어긋남은 권력 발생의 원천이자, (대안적) 수행성(들)을 발생시키는 장소가 있다는 신호다.
아렌트가 민족 국가에 적의를 품었던 것은 이처럼 정치와 행위의 조건으로 차이와 복수성을 염려하기 때문인데, 민족 국가의 혐오스러운 “결정적 원칙”은 그것의 “과거와 기원에 대한 동질성”이다(OR 174). 그리고 이것은 또한 그녀가 페미니즘 정치라는 주제에 침묵한 이유를 설명해 줄 것이다. 아렌트는 “여성의 경험”이나 “여성의 앎의 방식” 안에서 동질성을 선포하려는 어떤 시도에 대해서도 굉장히 경계했었을 것이다. 그녀는 저 (이른바) 동일성의 경계 내부의 중요한 차이와 복수성들―또는 심지어 [동일성의 경계]에 대한 저항―을 숨기(거나 금지하거나 처벌하거나 침묵시키)는 보편성을 함축한다거나 그것을 열망하는 여성 범주에 의지하는 어떤 페미니즘 정치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을 것이다.
이 같은 의견은 추리한 것인데, 왜냐하면 아렌트가 자신의 이론 작업에서 페미니즘이나 페미니즘 정치라는 쟁점을 다루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 자신은 그동안 아렌트에게 직접적으로 성별 문제를 제기하길 꺼려했는데, 왜냐하면 아렌트에 대한 페미니즘적 비판자들이 이 문제를 도덕주의적인 방식으로 제기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아렌트가, 여성으로서, “여성 문제”를 제기하거나, 적어도 여성을 염두에 두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정치를 이론화할 책임이 있다고 가정했다. 그녀가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그녀는 부역자(collaborator)로 규정된다. 이 같은 고발을 가장 쌀쌀맞고 강력하게 제기한 것은 아드리엔느 리치인데, 그녀는 『인간의 조건』이 “거만하고 불구적인 책”이고 “남성 이데올로기로 길러진 여성 정신의 비극”을 보여 준다고 묘사한다.31) 나는 여기서 가정하는 책임에 대해 별로 확신하지 않기에, 이 질문들을 제기하되 이런 방식으로는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즉 이런 책임을 할당하거나 함축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나는 아렌트가 한 패(joiner)가 되기를 거부한 것에 대해, 동일성 정치와 동일성 공동체에 소속되는 것을 그녀가 경계한 것에 대해, 로자 룩셈부르크에 대해(뿐만 아니라, 내 생각에, 그녀 자신에 대해) “그녀 세대의 모든 다른 여성들과 정치적 신념들이 불가항력적으로 이끌린 여성해방운동에 대해 그녀가 보인 혐오는 중요한 것이었다. 여성 참정권론자(suffragette) 식 평등의 면전에서 그녀는 ‘작은 차이 만세’(Vive la petite différence)라고 대답하고 싶었을 것 같다.”32)라고 말하게 한 놀라운 외고집에 대해 얼마간 존경심을 느낀다.
괴짜스런 논평이다. 그 정치적 헌신을 정치가 아닌 “운동”과의 “불가항력적인” 동일화의 산물로 기각당한 여성 참정권론자들에게는 확실히 부당할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흥미로운 논평이긴 하다. 이 룩셈부르크가 찬사를 보냈다고 아렌트가 상상하는 이 작은 차이란 무엇인가? 이는 성적 차이가 아니다 ― 이는 차이이며, 전혀 작지 않다. 작은 차이란 (비록 아렌트의 의미심장한 어법 선택으로 그 자체 성별화되긴 했지만) 성/성별-내적인 차이다. 그것은 룩셈부르크와 여타 여성들을 구별하는 차이다. 아렌트가 룩셈부르크에게서 존경한 것은, 아렌트 자신이 얻으려고 분투한 자질이다. 소속의 거부, 특정한 종류의 평등보다 차이나 구별의 선택이 그것이다.33) 그녀가 이 절에서 얘기하는 “여성 참정권 평등”은 이 여성들이 여전히 얻으려고 분투하는 남성 유권자들과의 공민적 평등이 아니다. 그것은 여성 참정권론자들 사이의 평등, 공동의 대의에 대한 그들의 헌신인데, 이 대의의 명목 하에 그들 간의 차이가 말소된다(고 아렌트는 주장한다). 아렌트가 구성하고 찬사를 보내는 로자 룩셈부르크는, “외부자”이자, “그녀가 혐오했던 나라의 폴란드계 유대인”이며, “그녀가 곧 경멸하게 되는 [정]당”의 구성원이자, “여성,” 곧 여성운동의 “불가항력적” 꾐에 저항하고, 다른 투쟁들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며, 이로써 동질성이 아닌 구별의 동일성을 혼자 힘으로 쟁취한 탁월한 유형의 여성이다.
동일성의 정치에 대한 동일한 감정들, 동일한 거리두기의 기술과 혐오가 게르숌 숄렘과 아렌트의 서신교환에서 분명하게 나타나는데, 이 서신교환은 아이히만(Eichmann)에 관한 아렌트의 논쟁적 책을 대상으로 삼는다는 명목을 내세웠지만, 실은 또는 마찬가지로 아렌트의 (자칭 사적 영역의) 유대인으로서의 동일성이라는 용어에 관한 논쟁이었다.34) 이 짧은 서신교환은 동일성의 정치에서 계발적이고 도발적인 연구다. 아렌트에게 보낸 숄렘의 편지는 동일화와 정치화를 행사한다. 그는 아렌트에게 그녀의 책이 “신자의 확신”을 거의 담고 있지 않고, “허약함”과 “비열함, 그리고 권력욕(power-lust)”을 표출하며, “독자(one)에게 … 편집자에 대한 … 신랄함과 치욕의 느낌을 남긴다”고, 그는 그녀에게 “깊은 존경심”을 갖고 있으며, 그녀의 책에 흐르는 “냉혹하고” “거의 냉소적이고 악의가 느껴지기까지 하는 어조”에 그녀의 주의를 환기시켜야만 하는 것은 이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그녀(“친애하는 한나”)에게서 어떤 “아하바트 이스라엘(Ababath Israel, 이스라엘을 사랑하라는 히브리어), ‘유대 민족을 사랑하라’”의 “흔적을 거의” 찾을 수 없고, 이 같은 부재는 “독일 좌파 출신의 수많은 지식인들에게” 전형적이다[고 말한다]. 무엇이 숄렘에게 이 모든 것들을 말할 수 있게, 그리고 그것들을 도덕적 결점으로 낙인찍을 수 있게 허가하는가? 그것은 그가 아렌트를 “전적으로 우리 민족의 딸로만 [여길 뿐], 다른 식으로는 전혀”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이다.35)
아렌트는 두 가지 전략적 거부로 대응한다. 첫째, 그녀는 그녀가 “전적으로” 유대적일 뿐, 차이들이나 다른 동일성들에 의해 갈라지거나 구성되지 않는다는 그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한다. 둘째, 그녀는 유대적 동일성이 표현적이며, 공적 효과를 갖고 특정하고 분명한 책임들을 동반한다는 숄렘의 가정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녀는 특정한 종류의 행위, 언표, 그리고 감정이 그녀가 유대인이라는 사실로부터 필연적으로 따라 나와야 마땅하다는 주장에 저항한다. 그러나 시종일관 그녀는 숄렘과 마찬가지로 유대적 동일성이 (그녀의 다중적이지만 사적인 동일성의 다른 사실들처럼) “논의의 여지가 없고” 일의적이며 진술적인 “사실”이며 “논의”나 “논쟁에 열려 있지 않다”고 가정한다. 그렇기에 그녀는 그녀에 관한 숄렘의 많은 진술들이 “단순히 틀렸으며” 그녀가 그것을 교정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녀는 “‘독일 좌파 출신 지식인들’ 중 한 명이 아니다.” 만일 아렌트가 “‘어딘가에서 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독일 철학의 전통에서다.”
숄렘이 “나는 당신을 전적으로 우리 민족의 딸로만 [여길 뿐], 다른 식으로는 전혀 여기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 아렌트는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진실은, 내가 나 자신인 것 이외에 어떤 다른 식이라거나 다른 무언가인 척 해 본 적이 결코 없으며, 그런 방향으로는 유혹조차 느껴본 적 없다는 것이다.” 요점은 그녀가 유대 민족의 “딸”과 다른 무언가인 척 해 본 적 없다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단지 그녀임(what she is)과 다른 무언가인 척 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아렌트는 그녀가 무엇인지(what she is)에 관해 결코 말하지 않으며, 스스로를 긍정적으로 식별하지 않는다. 그녀가 말하는 전부는 “나 자신과 다른 … 무언가[인 척 하는 것은] … 내가 여자가 아니라 남자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을 것이다 ― 말하자면 약간 제정신이 아닌 것이다.” 다시, 그녀 자신에 대한, 이 경우에는 여성으로서의 긍정적 식별이 없고, 단지 그 역을 주장하는 것은 “제정신이 아니”라는 주장이 있을 뿐이다.(그것을 긍정적으로 주장하면 어떻게 될까?)36)
숄렘이 그녀를 “전적으로 우리 민족의 딸로만 [여길 뿐], 다른 식으로는 전혀” 여기지 않는 곳에서, 아렌트는 그녀 자신의 “유대성(Jewishness)을 내 삶의 논의의 여지가 없는 사실적 소여(所與, data) 중 하나”로 “항상 여겨 왔다.” 그녀는 자신의 유대성이 숄렘이 투사하는 것처럼 [스스로를] “전적으로” 구성하는 동일성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아렌트는 다른 “사실들”에 의해서도 구성되는데, 그녀가 여기서 언급하는 것은 그 중 두 가지다 ― 성/성별, 그리고 독일 철학을 수업한 것이 그것이다.37) 그렇기에 아렌트는, 그녀가 “전적으로” “우리 민족의 딸”이라는 숄렘의 묘사는 그가 그녀에게 “붙이고 싶어 하는” “꼬리표”이지만, 그것은 “과거에 들어맞아 본 적이 없고, 현재에도 들어맞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38) 이는 어긋난 채 들러붙어 있는 꼬리표인데, 왜냐하면 아렌트의 유대성은 복잡하고 갈등적인 동일성의 파편이기 때문이다.
아렌트가 볼 때, 그녀가 이해하는 식의 유대성이라는 사실에서는 아무 것도 따라나오지 않는다. 그녀의 유대성은 사적 문제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사실이며, 전혀 행위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점, 그 사실성에 아렌트는 감사함을 느낀다. “있는 그대로의 모든 것에 대한 기본적 감사 같은 것이 있다. 주어졌던 것이지 만들어지지 않았고 만들어질 수 없는 것에 대한, 퓌세이(physei, ‘자연적’이라는 뜻의 희랍어)이지 노모이(nomoi, ‘인위적’이라는 뜻의 희랍어)이지 않은 것에 대한,” “토론이나 논쟁 너머의” 것들에 대한 [감사]. 그녀의 종족적, 종교적, 문화적 동일성이 주어진 것이자 사적 사실, 만들어지거나 행위할 수 없는 것이라는 이 같은 단언은 숄렘에게 보내는 아렌트의 편지에 구조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아렌트는 그녀의 사적 동일성이라는 사실들에 대한 토론으로 편지를 시작하는데, [이 토론은] 그녀가 사실적 오류라고 간주하는 것들을 겨냥한 일련의 정정으로 제시된다. 이 같은 사실에 관한 문제는 흥미롭지 않으며, “논쟁에 열려 있지 않다.” 아렌트는 편지를 전(前)정치적인 전문(前文)으로, 뒤따르는 정치적 논쟁과 분리된 것으로 제시한다. 오직 후반부만이 발언과 “토론할 가치가 있는 문제들”을 다룬다. 그녀는 이 구별을 강조하기 위해, 동일성에 중심을 둔 예비 단계가 끝나고 정치적 논쟁이 개시된다는 점을 표시하는 다음 문구로 문단을 시작한다. “요점으로 들어가자면.”
그러나 이 편지에서 아렌트가 감사해 한 바로 그것이야말로, 이 대립에서 숄렘이 그녀에게 용인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숄렘은 그녀의 유대적 동일성을 사적 사안으로 대하지 않으려 한다. 숄렘이 볼 때, 식별가능하고 논란의 여지가 없는 특정한 공적 책임들과 함의들이 아렌트의 유대성이라는 논의의 여지가 없고 일의적인 사실에서 따라 나온다. 이것이 아렌트가 숄렘의 포함에 저항하는 이유고, 그가 유대 민족의 “전적으로 딸로만” 그녀를 기록하는 것에 저항하는 까닭이다. 그녀는 숄렘이 유대인에게 귀속시키고 요구하는 평등이나 동일성보다, 차이 심지어 작은 차이를 소중히 여긴다. 그녀는 그의 동일성의 정치에서, 행실이 동질화되게끔 통제하고 독립적 비판을 침묵시키는 음험한 자원을 본다.
유대적 동일성의 사적 자유, 곧 숄렘의 고발 및 매우 공적이고 극히 정치화된 이 동일성 논쟁에 의해 이미 문제화된 사적 자유를 고집하는 대신, 아렌트는 유대성을 동일성으로 구성하는 숄렘의 용어에 더 잘 대항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전략은 아렌트가 쓸 수 없는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그녀는 가장 중요한 지점에서 숄렘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녀와 숄렘 모두 유대 동일성을 일의적이고 진술적인 사실로 간주한다. 그들이 의견을 달리 하는 것은 그것이 공적인 사실이냐 사적인 사실이냐 여부,39) 그것에서 행위를 위한 요구나 지침이 따라 나오느냐 여부일 뿐, 양쪽 모두 유대성이 “만들어질 수 없고”, 더욱이 말소(unmade)될 수 없는 사실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그것은 행위자가 하는 일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숄렘이 아렌트를, 그녀가 쓴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외양상의 어떤 “아하바트 이스라엘”의 완전한 결여에도 불구하고, “전적으로” “우리 민족의 딸”이라고 간주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아렌트는 그녀가 무엇을 하든 유대인으로서의 그녀의 진정한(authentic) 동일성을 부인하거나 전복할 수 없었다. 이 점에 관해서 아렌트는 완벽하게 일치한다. 그녀의 방어 전략은 숄렘의 비난의 기본적 전제를 흉내 낸다. 그녀가 행한 그 무엇도 그녀의 유대성이라는 논의의 여지가 없고 진술적 사실을 의문시하거나 전복할 수 없다.
유대적 동일성을 진술성으로 간주함으로써, 아렌트는 유대 동일성에 수행적으로 개입하거나 심지어 전복할 기회, 그 역사성과 이질성을 탐색할 기회, 일의성에 대한 그것의 열망을 몰아내거나 좌절시킬 기회, 그 분화된 가능성들을 증식시킬 기회들을 포기한다. 이 때문에 아렌트에게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특정한 책임들을 함축하고 충성을 요구하는 동질적이고 알의적인 동일성으로 유대성을 묘사하는 숄렘에게 비판적으로 응답할 수 있는 어떤 자원도 남지 않게 된다. 좋은 유대인과 나쁜 유대인을 구별하는 숄렘의 진술적 기준은 본래대로 남아 있다. 건강한 여성과 불구화된 여성을, 충성스러운 여성과 배신한 여성을 구별하는 아드리엔느 리치의 전략에도 동일한 논리가 적용될 것이다. 그녀가 아렌트를 “전적으로 (여성으로) [여길 뿐], 다른 식으로는 전혀” 여기지 않기 때문에, 그녀는 (독일 철학의 수업 같은) 아렌트의 다른 구성적 동일성들이 아렌트의 ― 여성으로서의 ― 진정하고 일의적인 동일성에 대한 배신이라고 간주할 수 있는 것이다.
숄렘이나 리치, 나아가 모든 동일성의 정치에 맞선 보다 강력하고 고무적인 방어책은 불가항력적인 것에 저항하는 것인데, 그 수단은 그것을 사유화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되는 자칭 불가항력적이고 동질적이며 진술적이고 일의적인 동일성의 가면을 벗겨, 그것이 수행적으로 생산된 것이고, 다중적인 수행과 행실의 균열되고 파편적이며 어긋나고 미완성적이며 침전되어 있고 이음매로 가득한 산물이며, 헤아릴 수 없는 반복과 강제의 자연화된 산물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이 독립 선언의 “자명한 진리”의 강제적 폭력에 맞서 그 문헌의 “우리는 생각한다”에 힘을 불어 넣은 아렌트의 전략이다. 이 고무(鼓舞)의 전략을 전유하여, 어떤 유대적이고 페미니즘적인 동일성의 정치가 가정하는 일의성과 자명성의 폭력적 폐쇄를 폭로하고 개입하며 전복하거나 저항한다면 어떻겠는가?
여기서의 전략은 기성의 동일성들을 중단시키는 것, 그리고 동일자(sameness)의 평등을 위해 차이를 말소하지 않는 페미니즘과 동질화하지 않는 유대성을 이론화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여기서의 전략은 차이들을 사물화하기보다 그것들을 증식시키고 탐색하는 것이며, 그 결과는 자신의 유대성을 (행)하는(do one's Jewishness) 수많은 길, 자신의 성별을 (행)하는 수많은 길이 있다는 고무적인 발견이나 강조가 될 것이다.40) 어떤 (이른바) 사적 영역 동일성이 갖는 동질화하는 효과는 약화될 것이고, 이는 “동일성들” 자체의 틀 부에서 더 많은 분화와 대항가능성을 허용할 것이다.
이 중단의 전략은 아렌트가 찬사해 마지않았던 국외자(局外者, pariah, 최하층민)이라는 개념 및 국외자의 관점에 대한 중요한 대안을 구성한다.41) 아렌트는 (로자 룩셈부르크를 비롯하여 아렌트가 존경했던 다른 이들로 상징되는) 의식적 국외자의 외부자(outsider)적 위치를, 그 곳에 있는 이가 독립적인 비판과 행위 그리고 판단에 필수적인 거리를 확보할 수 있는 특권적인 장소로 간주한다. 그러나 아렌트가 국외자 위치를 입지(location)하는 것은, 형성된 동일성들 내부에서는 어떤 비판적 지렛대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녀의 문제적인 가정에 힘입는다. 아렌트가 국외자의 외부자적 지위에 찬사를 보내는 것은, 동일성들이 성공한다고, 그들이 분명 이음매 없음(seamlessness)과 폐쇄를 획득한다고, 그들은 필연적으로 동질화적이라고 그녀가 믿기 때문이다. 내가 여기서 전개하고 탐색한 갈등주의적인 수행성의 정치는 그 대신에 동일성들이 결코 이음매가 없지 않다는 것, 기존 동일성들의 단절, 부적합성, 그리고 어긋남들 내부에 비판적인 지렛대의 장소가 있다는 것을 가정한다. 그것은 따라서 국외자의 위치는 그 자체로 불안정하다는 것, 국외자는 결코 실제로 외부자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것의 장소들은 다중적이라는 것을 가정한다. 이 다중적인 장소들은 아렌트적 정치의 특권화된 공적 공간을 탈중심화하고 행위의 장소들을 단일한 공적 영역 너머로 증식시킴으로써 잠재적 권력과 저항의 보다 광범위한 공간들을 탐색한다.42)
이 갈등주의적 페미니즘은 또한 갈등주의를 일종의 공동 행위(action in concert)로 가정함으로써 아렌트의 국외자에 함축된 개인주의에서 벗어난다.43) 갈등주의적 페미니스트들이 개입하는 동일성들은 공유되며, 공적 실천들은 그저 개인적 개성들의 표지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어떤 특정한 갈등주의적 행위가 한 명이나 여러 명의 행위자들에 의해 수행될 수도 있겠지만, 행위의 요점은 다른 이들이 자신의 차례에 각각 탐색하고 증대하며 수정할 수 있는 개성화와 정치의 새로운 공간들을 개방하고 정초함으로써 사회적인 것의 정상화/표준화하는 효과를 상쇄하는 것이다. 이 페미니즘 정치가 전제하는 것은 “여성”이라는 이미 알려지고 통일적인 동일성이 아니라, 갈등주의적이고 차별적이며 다중적인 비동일화된/식별되지 않은(nonidentified) 존재들로서, 이들은 항상 생성 중이며 항상 증대와 수정을 요청한다. (어떤 동일성의 표현적인 열망에 저항하지만 마찬가지로 항상 감응하는) 갈등주의적이고 수행적인 이 정치는, 새로운 관계들과 새로운 현실들을 창조할뿐더러 낡은 것들을 수정하고 증대하고자 한다 … 심지어 사적 영역 안에서도 말이다.

후기: 갈등주의 대 연합주의?44)

정치 이론가들과 페미니스트들은 특히 아렌트 정치의 갈등주의적 차원을 들어 아렌트를 오랫동안 비판해 왔는데, 그 죄목은 갈등주의가 남성주의적이고, 영웅주의적이며, 폭력적이고, 경쟁적이고, (단순히) 심미적이며, 또는 필연적으로 개인주의적 실천이라는 것이다.45) 이 이론가들에게 갈등주의적 페미니즘이라는 통념은 기껏 해야 형용모순이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혼잡하든지 아마 위험한 관념일 것이다. 실라 벤하비브는 그들의 시각을 사실상 승인하는데, 그녀는 최근 일련의 유력한 논문들에서, 페미니즘에 적합한 아렌트를 구출하려는 시도의 수단으로써 그녀의 사고에서 갈등주의를 도려내려 한다.46) 벤하비브는 갈등주의를 “연합주의”(associationism)와 병렬하면서 이들이 두 가지 양자택일적인 “공적 영역의 모형”47)라고, 그리고 이들 중에서 연합적 모형이 우위를 점하는데 이는 그것이 “더 근대적인 정치 인식”일 뿐더러 페미니즘에게도 더 나은 모형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벤하비브는 페미니즘에 대한 갈등주의의 의미와 가능성들을 재평가하기보다, 갈등주의를 남성 행위의 기원으로 [보는] 앞선 페미니스트의 성별화를 받아들이고 심지어 상술한다. 그녀는 개인들이 각자와 공동으로 행위하는 연합적 모형을 특권화하면서, 모든 공동 행위의 필연적으로 갈등주의적인 차원에 대한 절실한 평가를 페미니즘에게서 박탈하는데, 이 차원에서 정치적으로 연루된 개인들은 서로서로 함께 그리고 맞서서(both with and against) 행위하고 투쟁한다.
“페미니즘 이론과 한나 아렌트의 공적 공간 개념”에서 벤하비브는 갈등주의와 연합주의를 완벽한 거울상으로 구축한다. “도덕적으로 동질적이고 정치적으로 평등주의적인, 그러나 배타적인 공동체”를 전제하는 아곤과 달리, 근대 공적 공간은 이질적이다. “그것에 대한 접근이나 토론의 의제는,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동질성의 기준에 따라 미리 정의될 수 없다.” 아곤이 안정적인 공적 공간에 자유를 위치 짓는 반면, 연합적 모형은 공간이 아닌 실천으로 자유를 다룬다. 그것은 그것이 발생하는 모든 장소와 모든 시간에 “공동 행위에서 출현”한다. “아곤적인 공간은 협력보다는 경쟁에 기초”하며, 이는 공동 행위가 아니라 “위대함, 영웅주의, 그리고 탁월함”에 초점을 둔다. 그것은 그들을 함께 묶기보다는 “그것에 참여하는 이들을 개별화(individuate)하며 그들을 서로서로 분리시킨다.”48)
[갈등주의의] 반대항으로 가정된 연합주의 편에서 이처럼 갈등주의를 기각하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일련의 문제적인 정의와 생략에 기초한다. 첫째, 갈등주의는 엄격하게 고전적인 용어로 정의되는 반면, 연합주의는 근대성에 맞게 개정되고 갱신된다. 이처럼 아렌트적 아곤을 본질적이고 필연적으로 고전적인 영웅적 개인주의의 장소로 그리는 것은, 갈등주의를 공동 행위의 실천으로의 아렌트 자신의 재의미화 앞에서 비산(飛散)한다.(아렌트는 자신이 설명하는 행위는 ― 그것의 가장 아곤적인 형태에서조차 ― 항상, 항상 공동적(in concert)이라는 점을 아주 분명히 한다.)49) 그런 다음 벤하비브는 아렌트적 연합주의를 개정하고 갱신하는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는데, 이는 그녀가 승인하고 싶어 하는 공적 영역의 보다 근대적인 인식을 생산하기 위해서다. 벤하비브는 아렌트가 “그녀 자신의 연합적 모형과 양립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녀의 공적 영역 개념을 제한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아렌트의 연합주의를 수정하여 아렌트가 반정치적인 것으로 기각한 용무들을 포함하도록 하고(갈등주의의 경우에는 이 같은 수정이 진척되지 않는다.), 다시 한 번 아렌트 자신의 설명에 반하여, 연합주의를 공적 담론의 “실체적이지 않고 절차적인” 모형과 동일화함으로써 이 양립불가능성을 완화한다.50)
문제는 벤하비브가 아렌트의 설명을 수정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아렌트와 함께 아렌트에 맞서(with Arendt against Arendt) 사고”51)함으로써 진행되는 것이 자신의 기획이라는 입장을 아주 분명하게 취한다. 문제는 그녀가 아렌트의 다중적인 정치 행위의 전망을 두 개의 구별되고 분리되며 상호 배타적인 공적 공간 유형으로 가른다는 점, 우리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그녀가 역설한다는 점, 그 쌍을 비대칭적으로 간주함으로써 특정한 선택을 유도한다는 점, 그리고 (이 시점에서는 별로 놀라울 것도 없지만) 연합주의가 두 가지 통념 중 더 근대적이기 때문에 더 좋은 것이라고 그녀가 결론을 내린다는 점에 있다.
다른 논문인 “한나 아렌트와 서사의 구원적 힘”에서 아곤은 다시 한 번 평가절하되는데, 이번에는 담론적인(연합적인) 공적 공간과의 대조를 통해서다. 벤하비브는 다시 한 번 비대칭적으로 나아가면서 아렌트적 행위의 담론적인 계기를 은유화하지만 그 갈등주의적 이면은 내버려 두는데, 이 때 갈등주의적인 공적 공간은 “위상학적이거나 제도적인” 장소라고 주장하는 한편, 아렌트의 보다 “근대적인” 통념인 담론적인 공적 공간은 “사람들이 함께 공동 행위하는 경우라면 언제 어디서든 출현한다”고 역설한다.52) 이 같은 은유화의 한계는 그러나 자의적이다. 다양한 다소 갈등주의적이면서 연합주의적인 공적 공간에 대한 아렌트의 설명 중에서, 후자가 전자보다 벤하비브가 추구하는 분산에 더 호의적(amenable)이라고 시사하는 것은 없다. 만일 우리가, “아렌트와 함께 아렌트에 맞서,” 인민들이 함께 공동 행위할 땐 언제나 연합적인 공적 공간이 출현한다고 말한다면, 인민들이 공동으로 각자와 함께 그리고 [각자에] 맞서(with and against each other) 행위하고 투쟁할 땐 언제나 갈등주의적인 공적 공간이 출현한다고 말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벤하비브는 최근 논문 “국외자와 그녀의 그림자: 한나 아렌트의 라헬 파른하겐(Rahel Varnhagen) 전기”에서 갈등주의/연합주의 이항을 한층 성별화하여, 남성적인 갈등주의적 공간과 이제 명시적으로 여성화된 연합주의를 병렬하는데, 여기서 후자는 살롱으로 모형화된다. 벤하비브는 낭만주의 시대 유대계 독일 살롱 여주인(hostess)에 대한 아렌트의 초창기 전기(傳記) 『라헬 파른하겐』을 과감하게 끌어들이면서, 연합과 친교, 대화와 우정, 그리고 여성 작인(作人, agency)을 북돋는 연합적이고 여성 지배적인 준(準)공적 공간으로 살롱을 옹호한다. 반면 아곤적인 공간은 여성을 배제하고 투쟁과 경쟁을 일으키는 곳으로 언급된다.53)
그러나 살롱이 지지하는 것은 벤하비브의 여성화된 연합주의보다는, 벤하비브가 보존하려는 대당들 예컨대 갈등주의와 연합주의 간의 대당이랄지, 공적 공간의 남성친화적 모형과 여성친화적인 모형 간의 대당들을 약화시키려는 (나 자신과 같은) 시도들이다. 여성들은 분명 다른 공적 영역들에서보다 살롱에서 더 많은 권력을 가졌지만, 그 권력은 공적이고 사적인 가부장 권력에 의존했다. 여성들이 주인 노릇을 한 살롱은 일시적으로 부재한 아버지들과 남편들의 소유였다. 라헬의 살롱이 거둔 짧은 성공은 부분적으로, 대학이나 의회, 궁정 따위의 경쟁하는 남성적 문화 중심지가 우연적․일시적으로 부재한 데서 비롯됐다.54) 더욱이 살롱은 우정과 교통, 친교뿐만 아니라 험담, 음모, 경쟁, 투쟁 등을 낳은 것으로도 유명했다. 사람들은 거의 … 갈등주의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벤하비브는 이 모두를 인정하지만, 그녀의 연합적 이상에 대한 살롱의 표상이 갖는 이 같은 결점은 문제될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데, 왜냐하면 그녀의 관심은 살롱 그 자체를 복원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연합주의의 “전조(前兆)”로, “그 미래 잠재력의 일부를 과거에 보유한 존재”로 다루는 데 있기 때문이다.55) 꽤 공평한 평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화된 연합주의의 모형으로서 살롱이 갖는 결점은, 살롱을 갈등주의/연합주의 이원항을 성별화하려는 수단적 형상으로 활용하는 벤하비브의 견해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가?56) 갈등주의적 차원과 연합주의적 차원을 복잡하게 결합하는 살롱은 아마 벤하비브가 살롱의 사례를 근거 삼아 제시하는 상호 배타적인 대당을 (지지하기보다는) 동요시킬 것이다.
이 논문에서 탐색한 유형의 갈등주의는 벤하비브가 기각한 갈등주의와 같지 않다. 이는 그녀의 이원항에 저항하거나 그것을 초과하는 공동 행위의 일종이다. 영웅적 개인주의라거나 합의에 기초를 둔 연합주의가 아닌 이 갈등주의는, 항상 투쟁의 장소이기도 한 공동 행위, 차이와 복수성이 새겨지고 갈라진 세계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항상 동료들과 함께 그리고 맞서 있는 공동의(concerted) 페미니즘적 노력의 모형을 만든다. 이 갈등주의가 출발점으로 삼는 것은 아렌트의 재의미화된 갈등주의지, 고전적인 폴리스 경험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남-녀 대당에도 깔끔하게 들어맞지 않는다. 그것은 이 관습적인 대당을 적으로 삼는다. 그리고 그것은 수월성(秀越性, excellence)이나 극적 자기과시가 아니라, 동질화와 정상화/표준화를 배경으로 하는 개성화 및 구별을 향한 탐험에 중심을 둔다. 벤하비브가 볼 때 갈등주의란, 행위자들이 “구별과 수월성을” 다투는 실천이다.57)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갈등주의의 구별-수여적(distinction-awarding) 효과를 명성이나 수월성에 대한 갈망과 즉각적으로 동일시하는 그녀의 견해는, 고전적 갈등주의에도 적용될 뿐더러 보다 (탈)근대적인 차원을 가질 수 있는 “구별”에 대한 대안적 독해를 박탈한다. 아렌트의 이론적 설명을 움직였던 구별에 대한 갈등적(agonal) 열정은 또한, 개성화 및 구별된 자아로서의 출현을 향한 투쟁으로 읽힐 수도 있다. 아렌트의 용어를 빌자면, “무엇”이라기보다는 “누구”, 명성 그 자체가 아니라 개성을 소유한 자아, 그것을 정의하고 고정하려 드는 (사회학적, 심리학적, 사법적) 범주들에 의해 결코 소진되지 않는 자아 말이다.
고전적인 아곤만이 수여할 수 있었던 명성과 수월성에 더 이상 속박되지 않을 때, 이 열정을 갈등적(agonal) 열정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서 승인된 페미니즘 실천들이 갈등주의적인 까닭은 그것들이 투쟁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성/성별을 지배하는 실천들을 (재)정초하고 증대하고 수정하려는 정치적 투쟁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아곤의 전투원들이 공적으로 지지되는 타자(Other)와 함께 그리고 맞서 투쟁하는 관계 안에서 스스로를 개성화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갈등주의적 페미니스트들은 동료들과의 투쟁을 지지하여 다양한 페미니즘들, 성/성별의 지배적 실천들과 동일성들, 그리고 그것들을 실천하고 강제하는 타인들과 함께 그리고 맞서 스스로를 개성화하고 위치 짓고자 한다.58) 갈등주의적 페미니스트들은 관습적인 성/성별 실천을 중단시키고 관습적인 성/성별 이원항들의 자칭 우선성을 탈중심화함으로써 개성화와 구별을 획득하고 북돋는다.59) 이 개성화 과정은, 비록 일련의 행위들과 수행들을 누군가가 목격할 수도 있겠지만, 청중(audience, 관객)을 위해서 수행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녀와 같은 타인들과 제휴하여 개성화를 얻는 자아, 그리고 비록 항상 갈등적일 테지만, 이 공유된 지지와 투쟁의 실천들을 통해 동일한 것을 할 수 있게 되는 타인들을 위한 것이다. 갈등주의적 개성화는 정치적인 또는 페미니즘적인 행위의 목표가 될 필요는 없다. 아렌트가 잘 알았던 것처럼, 개성화는 차라리 정치적 참여의 부산물 중 하나로 얻어지는 경향이 있다. 정치적인 공동 행위의 신고(辛苦)한 시험을 통해 아렌트적 행위자들은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발견한다. 이 같은 자기발견이나 변혁을 단순히 유치한(boyish) 태도로 회피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또한 현세적인 장치 안에서 특성과 개성의 발전을 신호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갈등주의적 페미니즘이 공동의 정치 행위에 참여하는 효과로 얻어지는 개성의 발전을 강조하는 것은, 갈등주의와 연합주의를 한 동아리로 묶는 아렌트의 본래 시도를 복원한다.60) 이 복원은 현 시점의 동시대 페미니즘들에게 중요한데, 왜냐하면 “여성”이라는 동질화적이고 규율적인 범주를 일부 페미니즘들이 활용하는 것에 대응하기 위해 근래 우리가 차이와 복수성에 초점을 두다 보니, 일부 사람들이 통일적 동일성, 대의 또는 토대가 부재하는 가운데 어떻게 미래의 페미니즘이 공동의 행위를 추동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해 왔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동일성이 아니라 차이와 복수성을 토대로 놓는 갈등주의적인 공동 행위를 이론화함으로써 (특별히 페미니즘을 위해서는 아니겠지만) 우리가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게 돕는다. 그녀는, 주체성의 무엇-임(what-ness)을 행위의 출발점으로 삼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함으로써, [여성의] 형상이 항상 이미 알려진 동일성을 의미하게 만들기보다는 “여성”을 의문시하려고 노력하는 페미니즘들을 위한 (의식하진 않았겠지만 귀중한) 모형을 제공한다. 아렌트는 (행위의 동작주(動作主, agents) 내부 그리고 사이에서) 차이들로 갈라진 공동 행위를 이론화함으로써, 공동 행위를 타인들과 “함께”일 뿐만 아니라 항상 동시에 “맞서는” 관계들에 우리를 연루시키는 (재)정초, 증대, 수정의 실천으로 생각하게 해 준다. 요컨대, 일단 우리가 갈등주의와 연합주의를 상호 배타적인 양자택일로 생각하기를 그만둔다면, 우리는 “아렌트와 함께 아렌트에 맞서” ― 페미니스트들이 항상 탈중심화하고 저항하며 초월하고자 노력했던 ― 지배적인 성/성별 이원항을 단순히 재활용하기보다는 그것에 개입하기에 좋은 위치를 점하는 갈등주의적이고 페미니즘적인 정치 행위의 (증대되고 수정된) 전망을 전개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될 것이다.61)



1) Rahel Varnhagen: The Life of a Jewish Woman, rev. ed., trans. Richard and Clara Winston (New York: Harcourt Brace Jovanovich, 1974), ⅹⅷ. 본문으로
2) 가장 적대적인 비난은 Adrienne Rich의 On Lies, Secretes and Silences: Selected Prose, 1966~1978 (New York: Norton, 1979)과 Mary O'Brien의 The Politics of Reproduction (Boston: Routledge and Kegan Paul, 1981). 나는 리치의 비난을 아래에서 간략히 논하고 이 논문의 마지막 절에서 갈등주의에 대한 페미니즘적 기각을 둘러싼 쟁점들을 취급할 것이다. 본문으로
3) The Human Condition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8), 155, 200[국역: 한길사, 1996]; 이하 HC로 인용. 본문으로
4) On Revolution (New York: Penguin Books, 1963), 130[국역: 한길사, 2004]; 이하 OR로 인용. [역주] 아래에서 필자는 아렌트의 정치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몇 가지 언어학적 개념을 사용한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간략한 설명을 덧붙인다.
우선 기표(記表, signifier), 기의(記意, signified), 지시대상(referent)에 대해 알아보자. 기표란 우리가 말하거나 기록하는 시각적․음성적 물질성이고, 기의는 기표가 의미하는 개념이며, 지시대상은 기표나 기의가 지시하는 현실 속의 대상이다. 예를 들어 ‘집’이라는 글자, 그리고 우리가 ‘집’이라고 발음할 때의 음성적인 물질성이 기표고, 이 기표가 의미하는 내용인 ‘사람이 들어서 살 수 있게 만든 것’이 기의이며, 현실에 존재하는 건물이 지시대상이다. 한 편 기표와 기의가 결합된 것이 기호(記號, sign)이고, 이 결합 과정을 ‘의미작용’(signification)이라고 부른다.
또한 필자는 영국의 언어철학자인 존 오스틴에서 유래한 진술문과 수행문의 구별을 체계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진술문이란 예를 들어 “당신은 나의 아내다.”처럼 참과 거짓을 따질 수 있는 문장이며, 수행문이란 “이 쪽으로 와라.”와 같은 명령, “당신은 누구인가?”와 같은 질문, “이 달 말까지 재산을 양도하겠다.”와 같은 약속, 그리고 “이로써 폐회를 선포한다.”와 같은 선언 등, 발화 자체가 하나의 행위인 문장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진술문과 수행문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점이다. 위에서 예로 든 “당신은 나의 아내다.”의 경우 참/거짓을 가릴 수 있다는 점에서 틀림없는 진술문이지만, 이 언표를 발화함으로써 부부 사이의 위계 관계를 (재)확립하고 아내로서의 의무를 암묵적으로 강제하는 효과가 수반된다는 점에서 수행문이기도 하다. 요컨대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진술문과 수행문을 엄격하게 나누고 그 중 어느 한 쪽을 특권화하는 것이 아니라, 진술문 안에 내재한 수행적 계기, 수행문 안에 내재한 진술적 계기(또는 차라리 수행문이 진술적 계기를 요청할 수밖에 없는 까닭)를 추적하고 폭로하여 다른 가능성을 개방하는 것이 된다. 본문으로
5) 이하에서 나는 J. L. 오스틴(John Langshaw Austin)의 용어인 수행문과 진술문이 나의 아렌트 독해에서 필수적 역할을 놀게 할 것이다. 내가 다른 곳에서 논증했듯, 오스틴의 구별은 정초적 문헌의 두 계기 ― “우리는 생각한다” 대 “자명한 진리” ― 간의 부당한(illicit) 긴장에 관해 아렌트 자신이 만들어 낸 논증들을 유용하고 적절하게 예시한다. 이 긴장은 (“우리는 생각한다”는 수행문에 유리하게 그것을 해결하려는 아렌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제거할 수 없는 것인데, 제도들이 스스로를 “앞으로 내내”(all the way down) 정당화하려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아렌트는 그것에 응답하기 위해 권위를 비정초적이고 정치적인 증대와 수정의 실천으로 훌륭하게 이론화할 때, 그 불가능성을 사실상 긍정한다. 나는 여기서 이 실천은 또한 내가 갈등주의적 페미니즘과 동일시하는 동일성의 개입과 중단들을 망라한다고 주장한다.
내가 오스틴의 구별을 활용하는 것은, 실라 벤하비브(Seyla Benhabib)가 주장하듯, “언어적” 구별을 사용하여 정당성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도 아니고, “모든 권력의 궁극적인 자의성이라는 데리다의 테제”(그런데 이는 전혀 그의 테제가 아니다.)를 방어하는 것으로 귀결되지도 않는다. 만일 그것이 벤하비브에게 그런 식으로 보인다면, 이는 그녀가 정치적 정당성의 문제가 반드시 이론의 영역 내부에서 해결되어야 한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그런 시각에서 볼 때, 나 자신의 기획이 정당성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패한 시도로 나타나거나 정당성의 문제는 해결불가능하다(혹은 이 경우에서처럼 어쨌든 둘 다 일 것이다)는 이론적 주장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벤하비브의 시각이나 기획은 나와 다르다. 내가 오스틴과 데리다에게 도움을 받아 아렌트의 독립 선언 독해에서 끌어낸 교훈이란, 정당성 문제의 해결 자체는 진행 중이고, 끝없는 정치적 작업의 기획이자, 민주적 증대와 수정의 영속적 실천이지, 해결되어야 할 철학적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철학적 수준에서 정당성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또는 그것이 철학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믿음)는 그 정신 면에서 분명히 비(非)아렌트적이며, 정치를 전위시키려는 정치 이론이 갖는 일반적으로 문제적인 경향의 징후다. 더 요점으로 들어가 보자면, 정당성이 정치적이라기보다는 철학적 문제라는 벤하비브의 가정은 자신의 진단적 선택지를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단 두 가지로 제한한다. 완전한 정당성과 완전한 자의성이 그것이다. 내가 볼 때 권위를 정치적 증대의 실천으로 이론화하는 아렌트의 주된 매력은, 그것이 이 이원항을 벗어나고 동요시킨다는 데 있다. Seyla Benhabib, "Democracy and Difference: Reflections on the Metapolitics of Lyotard and Derrida," Journal of Political Philosophy 2 (1994): 11 n. 24를 보라; 그리고 Bonnie Honig, "Declarations of Independence: Arendt and Derrida on the Problem of Founding a Republic," American Political Science Review 85 (1991): 97~113. 정치를 전위하려는 정치 이론의 경향에 관해서는, 나의 Political Theory and the Displacement of Politics (Ithaca: Cornell University Press, 1993)를 보라. 본문으로
6) 나는 니체를 빌어 말하고 있는데, 아렌트는 그에게, 비록 양가적이기는 하지만, 이 점에 관해 크게 빚지고 있다. Friedrich Nietzsche, On the Genealogy of Morals, ed. Walter Kaufmann, trans. Walter Kaufmann and R. J. Hollingdale (1887; New York: Vintage Books, 1969), 1, ⅹⅲ[국역: 책세상, 2002]. 본문으로
7) 나는 나의 글 "Declarations of Independence"에서 아렌트의 독립 선언 독해에 나타나는 이 같은 본질주의적 구성 요소를 비판하고 수정하면서, 자크 데리다를 따라, 독립 선언의 성공은 사실 그것의 실제적인 수행적 성격보다는 그것의 구조적 결정불가능성, 이 정초적 화행이 수행적 언표인지 진술적 언표인지 여부를 우리가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는 사실에 의존한다고 논증한다. 여기서 나의 주장, 즉 갈등주의적 페미니즘이 자칭 진술적 동일성들을 수행문으로 재서술함으로써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이 겨냥하는 바는, 모든 동일성들이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라거나 손쉽게 재(再)제정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그게 아니라 요점은, 모든 정체(政體)들과 동일성들, 정초들에 개입하지만, (자연과 신체, 또는 신의) 순수한 진술로 은폐되고 가장된 (진술문과 수행문 사이의) 결정불가능성을 되찾는 것이다. 이 구조적 결정불가능성은 증대와 수정의 공간이다. 그것은 자유롭게 부유하는 수행의 집합이 아니라, 진술과 자연화의 상당한 힘에 대한 일련의 정치적 개입과 투쟁을 가능케 한다. 본문으로
8) 한나 피트킨(Hanna Pitkin) 역시 이 차이에 유의한다. 그녀의 "Justice: On Relating Public and Private," Political Theory 9 (1981): 303~26을 보라. 그렇기는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다르게 읽는데, 그녀는 『혁명론』이 “더 솔직하”고, 신체와 사회적인 것에 대한 아렌트의 진정한 관점을 아마 보다 진정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334). 그러나 이 같은 결론은 부당한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조건』이 얘기를 삼간다는 것을 함축하는데, 이는 전혀 아렌트답지 않은 것이다. 더욱이 피트킨이 신체에 대한 아렌트의 설명 중 하나를 다른 것들에 대한 얇은 베일로 간주하는 것은, 아렌트가 다른 것 위에 다른 하나를, 신체의 구별되는 특징화를 층층이 쌓는다는 점을 모호하게 만든다. 더 최근 논문인 "Conformism, Housekeeping, and the Attack of the Blob: The Origins of Hannah Arendt's Concept of the Social"(이 책의 3장)에서 피트킨은 덜 본질주의적인 접근을 택하는데, 여기서 그녀는 아렌트의 몇몇 문헌들을 가로지르는 그 복잡한 전환을 추적하면서 아렌트의 사회적인 것 개념을 탈자연화하려고 한다. 본문으로
9) Hannah Arendt, "What is Freedom?" in Between Past and Future, enl. ed. (New York: Penguin, 1977), 156[국역: 푸른숲, 2005]. 본문으로
10) Arendt, HC 179; 그리고 "What is Freedom?" 151~52. 아렌트는 이 같은 작인(作人, agency)의 속성들을 행동적으로(behaviorally), 그 자유를 타협하는 행위의 원인들로 읽는다. 본문으로
11) Arendt, HC, 179. 나는 “스스로를 놀랍게 하는”(self-surprising)이라는 용어를 조지 카텝(George Kateb)가 아렌트를 다룬 Hannah Arendt: Politics, Conscience, Evil (Totowa, N.J.: Rowman and Allanheld, 1984)에서 빌려 왔다. 본문으로
12) Hannah Arendt, Thinking, vol. 1. of The Life of the Mind, ed. Mary McCarthy (New York: Harcourt Brace Jovanovich, 1978), 29[국역: 푸른숲, 2004]. 이 주장은 분명히 잘못되었다. 아렌트가 의미했던 것은 모든 “내부들”이 동일하게 보인다는 것이 아니라 생물학적 차이들은 흥미롭거나 중요치 않다는 것, 신체로서 우리 모두는 비슷하다는 것이었으리라. 본문으로
13) Hannah Arendt, Willing, vol. 2. of The Life of the Mind, 69. 아렌트는 이 주장을 특히 의지하기와 관련지어 제기하지만, 이는 정신 능력 세 가지 모두에 영향을 미치는 되튐에 특징적인 것이다. 본문으로
14) 내가 말하려는 것은 아렌트가 갈등주의적인 투쟁의 현상을 “정치적”이라고 이름붙였다는 것이지, 아렌트 자신이 이 내적 투쟁들을 묘사하는 데 “정치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려 했을 것이라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그러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본문으로
15) 엘리자베스 영-브루엘(Elisabeth Young-Bruehl)은 아렌트적 자아의 다중성에 유의한 유일한 아렌트 독자이지만, 그녀는 자아를 다중성으로 본 이 같은 관념과, 행위를 표현적인 것이 아닌 수행적인 것으로 본 아렌트의 접근을 연관시키려 하지는 않는다. 또 영-브루엘은 이 다중적 자아를 갈등주의적 투쟁의 장소로 보지도 않는다. 반대로 그녀는 “개인 내부에 존재하는 견제와 균형”에 준거하는데, 이는 이 맥락에서는 적절하지 않은 모든 것에 우선하는(overarching) 통일성을 함축한다. Elisabeth Young-Bruehl, Mind and the Body Politics (New York: Routledge, 1989), 23을 보라. 본문으로
16) Arendt, HC 73. 『인간의 조건』에서 아렌트는 “‘그들의 신체로 삶의 신체적인 필요를 보살피는’[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론』 1254b25[국역: 박영사, 2006]를 인용하고 있다] 노동자들과, 자신들의 신체로 종의 물리적 생존을 보장하는 여성들”(72)을 묘사한다. 본문으로
17) 아렌트는 종종 그녀의 폴리스의 아곤(agon)적인 정치의 실천에 대한 (탄복스럽기 그지없는) 묘사와 그녀 자신의 정치 전망을 분명하게 구별짓는 데 실패한다. 그리고 그녀의 비판자들은 종종 전자를 후자로 오해한다. 예를 들어 피트킨은 행위에 대한 아렌트의 설명이 “개인주의적”이라고 적는데, 그러나 피트킨의 인용구는(HC 41) 아렌트가 폴리스의 갈등을 묘사한 것이다. 아렌트가 자신의 정치 관점을 묘사하는 곳에서, 심지어 『인간의 조건』같은 초기 저작―혹자는 이 역시 너무 갈등적이라고 말한다―에서조차 그녀는 그것이 항상, 항상 “공동적”(in concert)이라고 말한다. 본문으로
18) Pitkin, "Justice," 342. 본문으로
19) Pitkin, "Justice," 342. 나는 “감성들”이라는 용어를 쉬라 도사(Shiraz Dossa)에게서 빌려오는데, 그는 피트킨과 아주 유사한 경우다. 그와 피트킨 모두, 노동, 작업, 행위가, 감성으로서 모든 자아들을 특징짓는다고 주장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한다. The Pubilc Realm and the Public Self: The Political Theory of Hannah Arendt (Waterloo: Wilfred Laurier University Press, 1989), 3장; 그리고 도사에 대한 나의 서평은 Political Theory 18 (1990): 322를 보라. 본문으로
20) 노동과 작업과 행위를 탈자연화함으로써 그것들의 효과를 우리 자신의 하기(doing)의 산물로 보라는 이 같은 요청은, 이 책에 실린 한나 피트킨의 논문에 담긴 입장과 유사하다. 피트킨은 아렌트가 사회적인 것에 할당한 믿을 수 없는 힘에 어리둥절해한다. “우리에게 우리의 힘을 가르치는 것―우리는 우리의 곤란의 원천이고 우리가 현재 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에 주되게 노력한 사상가에게서, 사회적인 것을 블롭(Blob, 유명한 SF 공포영화에 나오는 우주생명체)이라 보는 공상과학적인 전망[“우리를 장악하려는 목적으로, 우리의 자유와 정치에 달려든다.”]이 나오는 것은 참으로 당혹스러운 일이다”(53). 본문으로
21) 아렌트는 정치“의 모든 영역"이 “제한”되어야 하고, 그것은 “인간과 세계 실존 전체를 포괄”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Arendt, "What is Freedom?" 264). 본문으로
22) Arendt, Willing, 37~38, 101~2; 강조는 필자. 나는 다른 곳에서 아렌트의 설명에서 의지는 자기산출적이면서 동시에 그 고유한 활동을 멈추게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Arendt, Identity, and Difference," Political Theory 16 (February 1988): 81. 그러나 이 글에서 강조한 문구 때문에 나는 아렌트가 후자의 특성을 의지에 부여한 것이 아니라 행위에 부여했다는 점을 납득하게 됐다. 본문으로
23) Judith Butler, "Performative Acts and Gender Constitution: An Essay in Phenomenology and Feminist Theory," in Performing Feminism, ed. Sue-Ellen Case (Baltimor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90), 273. 본문으로
24) Pitkin, "Justice," 336. 본문으로
25) Nancy Fraser, Unruly Practices: Power, Discourse, and Gender in Contemporary Social Theory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9), 76. 본문으로
26) Arendt, "Preface," in Between Past and Future, 3~4. 본문으로
27) Butler, "Performative Acts," 276, 271, 280, 그리고 271. 본문으로
28) 이론의 고유한 사명은 정치 제도들의 포괄적인 정당화를 제공하는 데 있다는 관점에 맞서, 위와 같이 정치 이론의 과제를 바라보는 관점을 옹호하는 나의 견해는 각주 5를 보라. 본문으로
29) Pitkin, "Justice," 336. 본문으로
30) Arendt, OR 47. Cf. Judith Butler, "Performative Acts," 274. 본문으로
31) Adrienne Rich, On Lies, Secrets and Silence, 211~12. 아렌트의 독자들은 한 동안 이 인용문을 재유통시켰다. 리치의 논문 "On the Coditions of Work" 역시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 어쨌거나 “불구적”인 책까지는 아니더라도 “거만한” 책에서 인용한 문구로 시작한다는 사실은 자주 언급되지 않았다. 본문으로
32) Hannah Arendt, Men in Dark Times (New York: Harcourt Brace Jovanovich, 1968), 44[국역: 문학과지성사, 1983]; 이하 MDT로 인용. 아렌트는 정치적으로 능동적인 여성들이 여성 참정권 활동에 이끌린 이유가, 그 운동이 당시 여성에게 개방된 몇 안 되는 활용가능한 정치적 행위의 기회였기 때문이라는 가능성은 결코 고려하지 않는다. 본문으로
33) 이 얘기는 출처가 상당히 의심스럽지만, 아렌트는 미국 정치 과학 협회 여성 간부 회의에 출석하기를 거부하면서, “나는 스스로를 여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알려져 있다. 본문으로
34) 아렌트의 Eichmann in Jerusalem[국역: 한길사, 2006]의 출판을 둘러싼 논쟁은 Dagmar Barnouw의 Visible Spaces: Hannah Arendt and the German-Jewish Experience (Baltimor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90)에 잘 기록되어 있다. 본문으로
35) Gershom Scholem, "'Eichmann in Jerusalem:' An Exchange of Letters between Gershom Scholem and Hannah Arendt," Encounter (January 1964): 51~52(강조는 필자). 이하 숄렘에서의 모든 인용문은 51~52에서다. 이 절에서 아렌트의 모든 인용문은 53~54에서다. [역주] 번역하기 아주 까다로운 이 문장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The fact that he regards Arendt "wholly as a daugher of our people and in no other way." 본문으로
36) 그녀가 스스로를 “독일 철학의 전통”과 동일화할 때조차, 이는 조건부다. “만일 내가 어딘가에서 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독일 철학 전통에서다.” 더 넓게 보자면, 이 같은 어법은 아렌트가 그녀의 기원이라는 문제가 단순히 발언의 주제가 아니기를 선호했으리라는 점을 시사한다. 즉, 그녀는 “어딘가에서 온 것이라고 말해지길”(강조는 필자) 원치 않은 것이다. 본문으로
37) 그리고 숄렘 또한 마찬가지로 그의 유대주의와 시오니즘 이외의 차이들과 동일성들에 의해 구성된다. 아렌트는 그에게 이 사실을 상기시키는데 ― 그리고 그녀의 동일성을 그가 투사한 것에 대해 같은 방식으로 보복한다 ― 그 방법으로 그녀는 숄렘이 그녀에게 보내는 편지에 서명할 때 그의 히브리 이름 “게르숌 숄렘”을 사용하는데도 “친애하는 게하르트(Gehard)”라는 호칭을 쓴다. 본문으로
38) 나는 숄렘이 이 맥락에서 “딸”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아렌트가 성/성별 차이에 의해 구별되게 구성되어 있다는 것에 대한 인정이라기보다는, 가부장적 형상, “우리 민족”에 대한 의무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수단이라고 간주한다. 요컨대 숄렘의 문구에서 “딸”이라는 용어는 아렌트의 성/성별을 그녀의 유대 동일성 안으로 문제 없이(unproblematically) 동화시키려 든다. 본문으로
39) 동일성이 하나의 사실이라는 아렌트의 주장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이 사적 사실이라는 주장은 그러나 맥락에 따라 분명히 달라진다. 그녀는 누군가가 “공격당하는 동일성의 견지에서” 스스로를 방어해야만 하는 시간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다른 경우에는 스스로를 자신의 동일성의 견지에서 위치 짓는 것은 겉치레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이 책에 실린 Dietz, 48 n. 106을 보라). 이 전략의 맥락의존성 때문에, 누군가는 항상 상황을 진단하고 행위의 공간에서 동일성의 (아렌트에게는 불운한) 적절성에 동의할 것인지 아니면 그 사적 자유나 부적절성을 고집할 것인지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이 진단에 관한 토론은 페미니즘이 주기적으로 대면하는 것이다.) 나의 주장은, 숄렘과 서신을 교환했던 이 경우에는, 아렌트가 상황을 잘못 진단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공격당하는 동일성, 유대인이 되는 그녀의 고유한 방식의 견지에서 대응했어야 했다. 나는 그녀가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 부분적으로는, 그녀와 숄렘이 둘 다 유대인이기 때문에 그녀의 유대 동일성은 공격당하는 것일 수 없고 마찬가지로 대응을 기초 짓는 근거가 되는 것도 아니라는 그녀의 동일화주의적 가정에서 기인한 것이 아닌가 의심한다. 본문으로
40) 나는 “자신의 성별을 (행)한다”라는 통념을 Judith Butler, "Performative Acts," 276에서 빌려 왔다. 본문으로
41) Hannah Arendt, The Jew as Pariah, ed. Ron H. Feldman (New York: Grove, 1978). 본문으로
42) 나는 아렌트의 설명에서 정치적 공간의 다중적인 장소들을 Political Theory and the Displacement of Politics, 116~17에서 추적한다. 본문으로
43) 사실, 아렌트의 국외자 관점에 함축된 개인주의는 숄렘과의 관계에서 그녀의 지위를 약화시키는 데 기여한다. 숄렘은 자신이 배신자라고 간주하는 아렌트에게 회복시키고자 하는 유대 민족의 공동체적 형상을 되풀이해서 호소한다. 아렌트는 이 용어들을 받아들이고 그 틀 내부에서 대응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그녀의 견해에 동감했을 만한 (과거나 현재의) 타인들과 동맹을 맺을 수도 있었고, 유대 공동체에 대해 그녀 자신을 유대 내적 비판이라는 대안적인 유대 역사의 일부로 위치 지을 수도 있었다. 아렌트는 이 마지막 전략을 그녀의 레싱 연설에서 활용하는데 ― 리사 디쉬(Lisa Disch)가 주장하듯(이 책 12장) ― 이 때 아렌트는 독일 계몽주의 전통에서 레싱을 재생시켜 그녀 자신이 그 상속자인 대안적인 지적 계보의 일부로 그를 위치 짓는다. 본문으로
44) 이 절의 초안에 논평해 준 것에 대해 린다 제릴리(Linda Zerilli)와 모리스 캐플런(Morris Kaplan)에게 감사를 전한다. 본문으로
45) 예를 들어 한나 피트킨은 아렌트의 정치적 행위자들이 “유치하게 젠체하며” “낭만주의적”이고 “갈등주의적인 남성 전사”의 동호회에 소속되어 있다고 비난한다("Justice"). 또한 Patricia Springborg, "Hannah Arendt and the Classical Republican Tradition," in Thinking, Judging, Freedom, ed. G. T. Kaplan and C. S. Kessler (Sydney: Allen and Unwin, 1989)를 보라; 그리고 Wendy Brown, Manhood and Politics (Totowa, N.J.: Rowman and Littlefield, 1988). 본문으로
46) 요컨대 벤하비브는 1970년대와 1980년대 초반 논쟁들을 사실상 되풀이하는데, 이들은 아렌트가 팔로스중심주의적(갈등주의적)이거나 여성중심적(연합주의적)인 사상가라고 비난했다. 벤하비브의 혁신은 아렌트 사상의 이 같은 차원들의 한 쪽 면으로 그녀를 배타적으로 동일화하는 것을 거부하고, 아렌트적 도식 안에 양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그녀가 인정한다는 데 있다. 그러나 앞선 페미니스트들처럼 그녀는 이 두 가지 차원들을 대립적이고 위계적으로 위치 지으면서, 우리가 그것들 중에서 하나를 택해야만 한다고 고집하는 식으로 나아간다. (아렌트에 대한 앞선 페미니즘적 수용에 관한 보다 상세한 논의는 나의 "The Arendt Question in Feminism,"과 Mary Dietz의 "Feminist Receptions of Hannah Arendt," 이 책의 1장과 2장을 보라.) 본문으로
47) Seyla Benhabib, "Feminist Theory and Hannah Arendt's Concept of Public Space," HIstory of the Human Sciences 6 (1993); 97~114. 본문으로
48) 위의 책, 103~4, 102. 본문으로
49) 각주 18을 보라. 벤하비브가 아렌트에 의한 갈등주의의 재의미화를 무시한 것은 이 맥락에서만이다. 다른 곳에서 그녀는 그것의 한 차원에 분명히 주목하면서, 아렌트는 “호메로스적 전사-영웅을 진압하고, 그렇다, ‘길들여’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신중한 시민을 낳는다.”(위의 책, 103; 강조는 원문)고 주장한다. 본문으로
50) 위의 책, 104, 105. 본문으로
51) 위의 책, 100. 본문으로
52) Seyla Benhabib, "Hannah Arendt, and the Redemptive Power of Narrative," Social Research 57 (1990): 193~94. 본문으로
53) "The Pariah and Her Shadow," 이 책, 94~95, 97~100. 본문으로
54) 위의 책, 87~88, 93, 97. 파른하겐의 살롱이 거둔 매우 일시적인 성공, 그리고 그것이 가부장적 제도 권력이 겪은 이 같은 우연하고 일시적인 공백에 의존했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이 사례의 진정한 교훈은, 연합주의를 옹호하려는 이들은 이 같은 귀중한 대안적인 행위의 공간을 국가와/나 가부장적 공적 영역의 헤게모니적 열망에 맞서 보존하기 위해서라도 갈등주의를 배우고 긍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본문으로
55) 위의 책, 104 n. 23. 본문으로
56) 요컨대 여기서 나의 목표는 연합적이거나 페미니즘적인 공적 공간의 모형으로서 살롱의 장점을 토론하는 것이 아니라 갈등주의와 연합주의를 이원적 대당으로 위치 짓고 ― 성별화하여 ― 합의적인 정치 모형과 담론의 공통 기반에 합치할 수 있는 아렌트와 페미니즘을 발전시키려는 벤하비브의 더 큰 노력 안에서 살롱의 역할을 간략하게 기록해 두는 것이다. 본문으로
57) "Feminist Theory and Hannah Arendt's Concept of Public Space," 103. 본문으로
58) 아곤을 공동 행위와 동시에 투쟁의 장소로 설명하는 것에 관해서는, 나의 "The Politics of Agonism," Political Theory 21 (August 1993): 528~33을 보라. 본문으로
59) 이 같은 (변모하는 동맹적) 실천의 몇몇 사례에 관해서는, 이 책 14장에 있는 멜리사 올리(Melissa Orlie)의 논문을 보라. 올리는 성/성별의 정치가 또한 항상 인종, 계급, 성욕의 정치와 겹쳐 있는 방식을 소중하게 부각한다. 본문으로
60) 이 갈등주의가 아렌트의 그것과 갈라지려는 목적이, 그녀의 행위가능한 영역을 넓히고 이른바 사회적인 용무들과 이른바 진술적 사실들을 포함하는 데 있는 한에서, 갈등주의는 (이 책 36의 매리 디에츠와 반대로) 동일성을 그것의 필수적으로 중심적인 용무로 간주하는 것으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 그것은 다만 이 논문에서만 그럴 뿐이다. 만일 이 갈등주의가 항상 얼마간 동일성의 정치에 관심을 갖는다면, 이는 동일성―특히 (사법적이거나 사회적) 법 아래서 주체성의 형성과 생산―이 항상 사회-정치-사법적인 질서의 하나의 효과나 수단이며, 따라서 정치적 개입의 필수불가결한 하나의 장소라는 점을 갈등주의가 알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61) 특히 이 문구 “함께 그리고 맞서”는 벤하비브가 독자로서 아렌트에 대한 자기 자신의 관계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Feminist Theory and Hannah Arendt's Concept of Public Space," 100). 그렇게 하면서 그녀가 갈등주의적 관계를 묘사하는 것은 적절하다. 그녀의 아렌트 독해는 벤하비브 자신의 입장을 동시에 개성화하는 공동 행위다. 또한 벤하비브 자신이 일시적으로나마 갈등주의와 그녀의 연합주의의 변종이 실제로 상호 배타적이지 않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도 유의해야만 할 것이다. “구별과 수월성을 겨룬다는 의미에서 모든 진정한 정치와 권력 관계들이 갈등주의적 차원을 포함하는 한편, 갈등적 정치는 또한 설득과 함의의 힘에 기초한 연합적 차원을 포함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들 두 모형 간의 날카로운 분화는 완화될 필요가 있다”(103). 이렇게 말했으면서도 벤하비브는 계속 이 대당의 용법을 상술하고 그것을 완화시키기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식으로 계속한다. 본문으로
2006년12월12일 19: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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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6-12-21 0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갑니다. 감사힙니다.

Chopin 2006-12-21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나 아렌트는 벤야민의 먼 친척이라는 것 밖에 몰랐는데,,,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습니다. 감솨~~~
 


 

 

 

학문과 삶의 공동체 연세대학교 대학원 학술협동조합

 

 

제 2 기 기획 강좌 "삶과 앎의 소통을 위하여"

 

 

과학-생명의 사회사

강사: 김동광(국민대 사회과학 연구소)

시간/장소: 매주 화요일 오후 6:30-9시:30/ 백양관 508호

첫 강의: 1월 9일

 

 

사회-인권의 역사

강사: 류은숙(인권운동연구소)

시간/장소: 매주 목요일 오후 6:30-9:30/ 백양관 508호

첫 강의: 1월 11일

 

 

경제-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자본론 2권

강사: 김동수(활동가, ‘자본의 두 얼굴’의 저자)

시간: 매주 월요일 오후 6:30-9시:30/ 백양관 508호

첫 강의: 1월 8일(이 날은 강의 오리엔테이션을 합니다)

 

 

정치-현대 정치철학 세미나-레닌을 중심으로

강사: 한형식(연세대 철학과 박사과정)

내용: 레닌의 저작 (‘국가와 혁명’ ‘무엇을 할 것인가?’ ‘민주주의 혁명에서 사회민주주의의 두가지 전술’)을 중심으로 그의 정치사상을 살펴본다.

시간: 매주 금요일 오후 6:30-9시:30/ 백양관 508호

첫 강의: 1월 12일

 

 

*이 강좌는 2007년 1월부터 6월까지 진행됩니다.

*이 강좌는 수강의 기준은 없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 모두 오시면 됩니다.

*강의수강을 원하시는 분들은 강의 시작하는 날 강의실에서 등록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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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 011-9975-1392 혹은 ( http://grad.yonsei.ac.kr/main.html 의 학술협동조합)

 

 

연세대학교 대학원 학술협동조합 ․ “참된 지성으로의 도약” 제45대 대학원 총학생회

 

 

 

Seminar network 새움(http://club.cyworld.com/seumnet) 의 세미나

 

1. 정치철학 세미나

 -목표: 정치사상의 형성을 중심으로 근대철학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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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페미니즘 세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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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비모임: 12월 27일 6시 30분, 새움 세미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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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자본론 1권 읽기

 -목표 : 자본론의 꼼꼼한 독해를 통해 맑스의 경제사상 읽기

 -예비모임 : 12월 26일 오후 2시(장소는 추후 공지)

 -연락처 : 유승민(연대 경제학과 대학원) 011-9975-1392 rufrl@hanmail.net

 

 

 4. 역사적 자본주의론 (1): 브로델을 읽는다

 - 목표: 역사적 자본주의론에 이론적 자원을 제공한 브로델의 저작읽기

 - 예비모임 : 2006년 12월 28일(목) 오후 6시 새움 세미나실 (예정)

 - 연락처 : 정웅기 (연대 사학전공 4학년), 011-9631-8357

 

 

5. 자본주의 붕괴 이론 세미나

 - 목표 : 제2인터내셔널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된 자본주의 붕괴론 스터디

 - 시간/장소: 추후 공고

 - 연락처 : 이상경 011-9270-6751

 

 

6. 헤겔 세미나 : 대논리학 읽기

 - 목표 : 헤겔에 대한 맑스주의적 독해

 - 시간/ 장소 : 매주 월요일 / 연세대학교 (추후 공고)

 - 연락처 : 정재화 (연세대 철학과 박사과정) greenview@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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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6-12-20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좋은 정보 고맙습니다. :) 퍼갑니다~
강좌는 모르겠고 세미나는 해 볼만 하겠는데용 ㅎ

기인 2006-12-20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 막상 들어가 보니, 학부 친구들 중심...;;
학부 친구들 하는 세미나 들어가려고 하면 학부 친구들도 부담스러워하고, 저도 부담되더라고요. 쩝; 맘에 맞고 관심 비슷한 친구 찾기가 힘들어서 걱정입니다. ㅎ

balmas 2006-12-20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인님/ 대학원생도 환영할 거예요. 한번 연락해보세요. :-)

가을산 2006-12-21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능한 시간 장소가 저녁이었으면 좋겠는데..... 어렵겠지요?